* * *
처음이 제일 어렵지, 하고나면 그 다음부터는 수월하다고 하던가?
나는 다시 돌아온 이 오래된 집의 입구를 바라봤다. 현관 댓돌에 신발을 벗던 주현이가 신발을 도로 대충 구겨 신고 내게 왔다. 나는 그 모습에 멈췄던 걸음을 다시 옮겨서 현관으로 같이 들어갔다. 주현이가 조금 안심한 듯, 아까처럼 신발을 벗고 마루에 올라서 신발을 벗고 있는 내 팔을 당겼다.
“목욕, 하자. 가하.”
“……그래.”
결국, 하는구나……. 들어가면서도 설마, 또? 했지만 그게 주현이의 버릇이라고 들으니 할 말이 없었다.
삐걱대는 복도를 같이 걷는 주연이의 얼굴은 워낙 하얘서 그런가 아직도 부어 있는 눈 주위가 벌겠다. 오늘 주현이가 내 앞에서 펑펑 울어 버린 게 조금 충격적이라, 웬만하면 그 애의 마음을 어떤 식으로든,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안 된다고 했다가 또 무슨 반응을 보일지…….
그렇지만 가만 보면, 주현이 자신은 굉장히 자신 있게 ‘싫어’, ‘아니’, 하고 의사표현을 정확히 하면서, 내가 똑같이 하면 굉장히 싫어하는 티를 낸다. 이게 바로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거지? ……아닌가? 분명 드라마 여주인공이 그랬는데.
어쨌든 나는 그렇게 다시 주현이랑 같이 목욕을 했다. 첫 번째나 좀 어색하고 이상했지, 오늘은 그냥 괜찮았다. 괜찮다는 의미가 좋다, 라는 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참을 만 하다는 거지. 예를 들면 손이 닿지 않는 등 닦기라든지…….
아무튼 이번에는 저번의 경험을 참고로 해서, 나는 쓸데없는 눈치를 보지 않고, 적당히 욕조 안에서 있다가 나왔다. 그래서 그런가 저번처럼 어지럽거나 몸에 힘이 풀리는 일 없이 기분 좋게, 따끈따끈하고 개운하게 나올 수 있었다.
몸의 물기를 수건으로 닦고 주현이네 집에서 일하는 사람이 그새 가져다 둔 새 옷을 입었다. 이번에 입은 옷은 조금 커서, 소매가 반쯤 내 손을 가리고, 맨투맨 목 부분도 어깨가 조금 보이게 헐렁했다. 주현이 옷인가? 추리닝 바지의 밑단을 두 단정도 접고 욕실에서 나오자 기분 좋은 얼굴을 한 똑같은 추리닝 차림의 주현이가 문 앞에 있었다. 물론 주현이는 나보다 몸이 커서 옷이 꼭 잘 맞았다는 것만 달랐다.
“가하, 배고파?”
“아니. 괜찮아.”
“그럼 놀까?”
“그러자.”
주현이는 내 손을 잡고 자기 방으로 이끌었고, 잡은 손마디 사이로, 욕조에 있던 탓에 쪼글쪼글해진 그 애와 내 손끝이 느껴졌다.
우리는 주현이 방으로 들어가서 벽장에 잘 넣어 둔 게임 콘솔 세트와 게임팩을 꺼냈다. 게임은 저번에 못 다한 마리오였다. 나는 요시를 선택하고, 주현이는 피치를 했다. 피치라니, 보통의 남자애들이라면 하지 않을 캐릭터인데. 역시 주현이는 좀 다른 구석이 있다.
좋게 말하면 취향 하나 참 독특했다.
‘……그래서 아무도 친구 안 하는 나랑 하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화면에는 보스가 나오고 있었다. 나는 얼른 손가락을 놀려서 점프해대면서 입 안에서 알을 뿜었다.
“아, 아……. 아! 또 죽었어!”
“필살기, 필살기.”
“안 돼. 기가 없어……. 아…….”
[Game Over]
이럴 수가. 나는 허무하게 생명력인 하트를 다 쓰고 죽어 버린 게 억울해서 다시 세이브했던 파일을 로드하며 외쳤다.
“다시 하자!”
“응.”
[Game Over]
남자라면 삼세판이지. 나는 빠르게 버튼을 누르면서 파일을 다시 로드했다.
“……다시 해!”
“응.”
[Game Over]
이씨……. 나는 얄미운 화면을 노려보고만 있는데 주현이가 내 팔 소매를 잡고 슬슬 당겼다.
“…….”
“다시 할까, 가하?”
“……아니.”
아까부터 반복되는, 몇 번째일지 모를 막히는 구간의 단념하라는 메시지가 떠오르자마자 콘솔을 카펫 바닥에 툭, 두었다. 나 안 해……. 짜증나.
하도 집중해서 보느라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서 카펫에 벌렁 누워 버렸다. 주현이는 등 뒤로 팔을 기대고 그런 나를 내려다 봤다.
“가하, 다른 거 하자.”
“뭐, 다른 게임 또 있어?”
“숨바꼭질?”
“음……. 그래.”
더 이상 비디오 게임을 하기에는 좀 질려서 나는 좋다고 했다. 게임하느라 앉아 있어서 몸이 좀 찌뿌둥하기도 했고. 우선 가위 바위 보로 술래를 정하기로 했다.
“가위, 바위…….”
“보!”
주현이는 보를 내고, 나는 가위를 냈다.
“나야, 술래. 가하, 숨어.”
주현이가 씩 웃으면서, 뒤로 돌고 눈에 두 손을 올려서 눈을 가린 채로 숫자를 셌다.
“오십, 사십구, 사십팔, 사십칠, 사십육…….”
“눈 뜨면 안 돼!”
“안 떠. 사십오, 사십사…….”
나는 발끝을 들고, 장지문을 열어서 주현이 방을 나간 다음, 조용히 스르르 닫고서 잠시 고민했다.
‘어디 숨지?’
툇마루의 덧문 너머에는 잘 꾸며진 정원이 보였지만, 학교의 정원처럼 우거진 스타일이 아니라서 갔다가는 눈에 잘 띌 것 같았다.
‘저기는 아냐.’
방 앞에 있는 나무 마루의 복도를 살금살금 걸어가면서 보는데, 집에 벽이 없는 방이 많아서 숨을 곳이 마땅해 보이지 않았다.
‘옷장이나……. 창고 없나?’
여느 집이면 다 있을 비스무리한 장소를 고민하고 있는데, 그 사이에 숫자는 점점 줄어들고 있어서 내 마음이 더 급해졌다.
“사십, 삼십구, 삼십팔…….”
삐익, 삐그덕…….
게다가 아무리 조심해서 걸어도 오래된 마루에서는 작게라도 소리가 났다. 사람이 없는 조용한 집에 그 소리는 유일하다시피해서, 나만 그런지는 몰라도 은근히 크게 들렸다.
내가 복도를 가다가 꺾어서 계단과 욕실 문, 부엌이 있는 곳으로 나오자 식탁에 앉아 있던 가정부 누나가 책을 보다 말고 나를 발견하고 일어섰다.
“가하 도련님,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우리가 있는 공간을 울리는 낭랑한 목소리에 나는 입에 손가락을 대고 쉿, 쉿 거렸다. 누나 목소리 들리면 어떡하지? 나는 아직 복도에 작게 울리는 주현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혹시나 해서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누나에게 돌려서 소곤소곤 말했다.
“삼십오…….”
“우리 숨바꼭질해요. 저 봤다고 하면 안 돼요.”
내 말에 가정부 누나는 방긋 웃으며 나랑 똑같이 입에 검지를 대었다.
“알겠어요. 쉿.”
“누나, 어디 숨을 만한 데 없어요?”
“숨을 만한 곳이요……? 음…….”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손가락을 천장을 가리켰다.
“2층에 조그만 방이 여러 개 있어서 숨기 좋을 거예요.”
“고마워요, 누나.”
나는 부엌문 너머에 있는 계단 쪽으로 향하다가 급하게 고개를 돌려서 당부했다. 설마, 치사하게 주현이에게 다 알려 주고 그러지는 않겠지?
“아 참, 누나, 비밀 지켜야 돼요! 나 못 본 거예요!”
“네. 주현 도련님이 물어보시면 전 여기서 계속 책 읽고 있었다고 그럴게요.”
그녀는 다시 식탁에 앉아서 고개를 저으며 장난스럽게 미소 지었다.
“이십…….”
복도 너머로 들려오는 한층 적어진 숫자에 나는 얼른 발을 옮겨서 좁은 계단을 밟았다.
삐익, 삐익…….
이 계단은 어린 나에게도 조금 넓이가 좁은 계단이라 옆에 있는 난간을 지지하면서 가야했다.
2층으로 올라가자 아래층과 비슷한 방식으로 나무 마루로 된 복도와 장지문들이 잘 닫혀져 있었다. 이 위층도 밑층과 마찬가지로 내부에 빛이 잘 안 들어와서 그런가, 은근히 어두운 인상을 주었다. 어린애가 살기에는 조금, 어두운……. 우리 집은 조명도 다 하얀색인데.
나는 복도를 걸어 다니면서 숨을만한 방을 살폈다. 살피는 와중에 2층은, 1층과는 달리, 가정부 누나가 말한 것처럼 방들이 좀 더 여러 개였고, 특히 중앙에 있는 방은 3개정도의 방이 크게 이어져 있는 듯했다. 나머지 복도 쪽 벽에 있는 방에 들어가면, 왠지 들어와서 확인하다가 금방 잡힐 것 같아서, 나는 중앙 쪽에 있는 장지문을 열었다.
“우와.”
장지문을 열고 들어가자 방 안에는 박물관에서나 볼법한 물건들이 방 안에 여기저기 걸려 있었다. 왼쪽에는 벽이 움푹 들어가 있고, 바닥보다 조금 올라와 있는 작은 공간에 알록달록한 색깔로 책이 그려진 병풍이 펼쳐졌다. 그 바닥 위 놓인 도자기 안에 꽃가지가 꽂혀 있었다. 그 병풍 옆에는 검은 나무로 만들어진 커다란 함이 있었는데, 그 위에 늘어져 있는 조그만 도자기 장식들과 옆에 먼지 하나 없는 작고 네모난 거울이 있었다. 그것들은 뭘 모르는 내 눈으로 봐도, 한두 푼 할 것 같지 않은 분위기를 풍겼다. 다른 데로 가서 숨을까? 하고 나가려는데, 밑층에서 주현이의 목소리가 올라왔다.
“가하, 나 이제 찾아!”
‘벌써?’
나는 고민을 할 새도 없이 우선 방의 장지문을 닫고, 방 안에 숨을 만한 곳이 없는지를 살폈다. 왼쪽에 있는 함 옆에 또 다른 장지문 같은 곳이 보였다.
‘다른 방인가?’
가서 드륵, 하고 열자, 벽장이었는지 잘 접혀서 쌓아올려진 두꺼운 침구가 보였다. 그 위에 내가 숨을 만한 공간도.
여기다!
나는 얼른 그 침구 위로 올라가서, 내가 열은 벽장의 장지문을 탁, 닫았다.
쉽게 찾지는 못하겠지? 방이 좀 많으니까. 시간이 좀 더 있었으면 다른 방도 가서 더 좋은 장소 있나 구경할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아쉬워하며 폭신한 이불에 웅크려 누운 몸을 낮췄다. 나밖에 없는 방 안은 그야말로 고요 그 자체여서 나는 조금 자신이 생겼다.
‘분명 못 찾을 거야.’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벌써?
장지문 너머, 삐걱삐걱 대는 계단 소리와 함께 맑은 그 애의 목소리가 울렸다. 되게 빠르네. 아니, 자기 집이니까 잘 아는 걸지도……. 누나가 말, 안 했겠지? 계단의 삐걱이는 소리가 멈추고, 장지문 너머로 그 애가 다시 말했다.
“가하, 정말정말 안 보여……. 꼭꼭 숨어라…….”
마루로 된 복도를 걷는지 툭, 툭 하고 발걸음 소리와 삐걱, 삐걱 대는 소리가 내 마음을 잔뜩 방망이질 했다. 우리 둘밖에 안 되는 숨바꼭질인데도, 무척 긴장이 되었다. 이 집에 나와 주현이, 가정부 누나를 빼면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런가…….
삐걱, 삐걱, 삐걱……. 드르륵.
거칠게 장지문을 여는 소리가 이 방 너머의 복도에서 들렸다. 그 소리에 나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렸다. 다행히 입으로 소리는 내지 않았다.
“없네……. 가하, 어디 있어? 머리카락 보인다…….”
그렇게 말하면서 그 애는 복도 옆에 늘어져 있던 장지문을 하나씩 계속 열어젖히기 시작했다.
삐걱 삐걱, 드르륵, 삐걱 삐걱, 드르륵, 삐걱 삐걱…….
그게 마치 언젠가 내 차례가 올 거라는 불안감을 들게 했다. 지금이라도 몰래 나가서 계단 밑으로 가야하나? 예전 학교에서 친구들하고 숨바꼭질을 할 때 쓰던 편법을 생각하며 내가 있던 벽장의 장지문을 살살 밀었다. 나름대로 소리가 안 나도록, 그랬는데…….
드르르…….
낡은 집이라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소리가, 은근 났다. 나는 그 자리에서 다시 닫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온 촉각을 곤두세웠다. 들렸을까? 아니, 방 안이니까 안…….
드르르……. 삐걱.
그때, 방 너머 복도에서 계속해서 움직이고 열리던 문소리와 발소리가, 딱 멈췄다.
“……. 여기 있구나, 가하.”
그 말에 내 심장이 펄떡, 뛰었다.
“들었어. 나.”
주현이가 특유의 해맑은 웃음소리를 내었다. 나는 그 말에 점점 빨라지는 심장 박동을 손으로 누르면서, 조심스럽게 벽장에서 나왔다. 이번에는 벽장의 문을 닫지 않고, 나와서 방안에서 우선 서 있었다. 주현이가 움직이면 그 소리에 묻어서 발을 움직일 생각이었다.
삐걱, 삐걱…….
주현이가 복도를 다시 걷는지 복도의 마룻바닥이 걸음마다 신음을 뱉었다. 나는 그 사이에 방 안을 휘, 둘러보았다. 아까 들어올 때 보았던 움푹 들어간 벽에 놓인 병풍에 시선이 걸렸다.
저 뒤에 있으면……. 방 안에 들어와서도 쉽게 못 찾겠지? 나는 잔뜩 긴장한 발걸음으로 병풍 뒤로 살금살금 걸었다. 다행히 병풍 뒤로 작은 내가 들어가기에 충분한 공간이 있었다. 그렇게 무릎을 감싸 안고 앉아 있는데, 내가 있었던 벽장 쪽 벽에서 쾅, 하는 소리가 들려서 놀라서 몸을 파르르 떨었다. 벽장에 그대로 있었으면, 저 소리에 놀라서 들켰을 게 분명했다.
“꼭꼭 숨어라…….”
그 말과 함께 삐걱 삐걱 대는 마루의 소리와 또 다른 소리가 들렸다. 싸아아 하는 소리가 점점 내가 있는 병풍 뒤 벽으로 다가오는 게, 손으로 벽을 쓸어내리는 듯 했다. 그 소리들이 손에 땀을 쥐게 하면서도, 즐거운 짜릿함을 주었다. 집이 은근 복잡한 듯, 간단한 구조라서 그런가? 나는 병풍 뒤에서 가만히 있는데, 방의 입구인 장지문이 드르륵, 하고 열리는 소리가 났다. 두 손을 코와 입 쪽에 펼쳐서 막았다. 혹시나 싶어서였다. 방 안의 마루를 터벅터벅 걷던 주현이는 방의 중앙에 와서 중얼거렸다.
“……여기 있어, 가하?”
으아. 나는 이제는 심장이 뛰다 못해서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풍 뒤에 있는지라, 병풍 너머의 소리만 들렸는데 그게 더 신경을 곤두세우게 했다. 우선 방 안에 들어온 주현이는 방 안을 느릿하게 걸었다. 걸으면서 내가 보았던 함의 문을 열어 보는지 털컥 털컥하고 서랍 빼는 소리가 들렸다.
“머리카락 보인다…….”
그러다가, 주현이가 말을 뚝, 멈췄다. 그 애는 벽 어디론가 가서 다시 혼잣말을 했다.
“열렸어, 가하. 여기 있구나?”
벽장의 열린 문을 발견한 듯, 그 애는 콧노래를 불렀다. 소리가 날까 벽장의 문을 닫지 않았던 게 실수였다. 그 애는 벽장 안을 들어가서 뒤적거리는 소리를 내더니, 벽장의 문을 거칠게 닫았다.
쾅, 그 큰소리에 내 몸이 반사적으로 파득, 튀었다.
“잘 숨었어. 가하.”
그 말과 함께 내가 있던 병풍이 스르륵 접히기 시작했다. 손으로 입을 막은 채로 가만히 앉아 있던 나는 병풍이 접히며 드러난 주현이와 눈이 마주쳤다. 그 애는 나를 보고 웃었다.
“찾았다, 가하.”
그렇게 말하고 나를 폭 안았다. 아까 했던 목욕으로 아직 촉촉하게 젖은 머리끝이 내 뺨을 찔렀다.
“찾았어, 가하. 내꺼야.”
“파하, 너. 진짜 잘 찾는다…….”
나는 그 품에 안긴 채로 입을 막았던 손을 떼고 말했다. 그러자 주현이가 대답했다.
“나, 잘 찾아, 가하. 언제, 어디.”
도막도막 잘린 말은 아마, 언제 어디서라도 사람을 잘 찾는다는 의미인 듯했다. 나는 투덜거렸다.
“너네 집이니까 잘 찾는 거겠지. 이거 좀 불공평해.”
“원래 불공평해. 인생.”
주현이가 그렇게 말하면서 내 뺨을 자기 손등으로 살살 쓸었다. 뺨에 닿는 손등이 차가웠다. 평소와 달리 의외의 말에 나는 주현이를 쳐다보았고, 주현이는 다시 말했다.
“그러니까 벌칙 해. 가하.”
나는 어른스러운 아까 전의 대답에 비해서 천진하게 웃는 주현이에게 투덜거렸다. 넌 좋겠다. 아무 생각 없이 순수한 그 애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애를 누가 안 좋아하겠는가. 성격이라도 좀 나빴으면…….
“이상한 거 안 돼.”
“이상한 거? 뭐가 이상한 거?”
“뭐냐 하면……. 음…….”
뭐, 남의 집 벨 누르고 튀는 거라던가, 아 근데 여기는 그럴 집이 없지. 주현이는 나를 말똥말똥하게 쳐다보았다. 그 눈빛에 나는 아! 하고 크게 소리를 내었다.
“그, 그 스웨덴 인사도 안 돼!”
내 말에 주현이의 표정이 눈에 띄게 실망으로 가라앉았다. 너, 하지 않기로 약속했으면서. 아무리 봐도 벌칙으로 해 달라고 할 속셈이었던 거 같아서 나는 내심 안심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거 안 되는 거라니까. 나는 입술의 평화를 찾은걸 뿌듯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주현이가 안겨 있는 나의 목덜미를 서늘한 손으로 살살 만져대었다.
“다른 거 해 줘.”
“뭐? 말했지만 인사 안 돼.”
그 애는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주현이는 여전히 내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다가 쇄골 쪽을 차가운 손가락으로 지분대어서 몸이 살짝 움츠러들었다.
“인사 아냐. 다른 거 해 줘.”
“손 차가워, 다른 거 뭐?”
나는 그 손을 떼면서 그 애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그 애가 내 손을 잡고 손등에다가 자기 입술을 꾹, 누르면서 나를 향해 파란 눈을 올려다보았다. 방 안이 어두운 탓인가, 푸른 눈이 거무스름한 빛을 띄고 있었다.
마치, 빠져나올 수 없는 깊고 깊은 늪처럼…….
“해, 각인. 가하 내 에스퍼 해.”
“그거, 어른 되면 하는 거잖아…….”
“약속해.”
주현이는 손등에 올렸던 입술을 움직여서, 내 손목의 뼈마디를 이빨로 아프지 않게 살짝 살짝 물어대었다. 볼록 튀어나온 뼈를 찌릿찌릿하게 무는 주현이를 보던 나는 손을 빼면서 의아해했다.
“아야, 하지 마. 왜 나랑 하고 싶어? 나, 등급도 낮고……. 그렇게 큰 힘도 없어.”
티비에서 봤지만, 가이드들도 등급이 높은 에스퍼가 자신의 각인 상대가 되는 걸 원한다고 했다. 자신이 힘을 줄 때마다 화려한 힘을 내뿜을 때 그렇게 기분이 좋다고 그랬는데……. 그러니까 지금은 몰라도, 주현이도 어른이 되면 그런 사람을 원할 것이다. 내 부모도 자랑할 만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원하듯이 말이다.
그건 아무리 순수하다고 해도 피해 갈 수 없는 변화라는 것을 난 안다.
사람은 너무나도 쉽게 바뀌니까.
그리고 그걸 내가 봤으니까……. 그렇게 주현이의 선택을 설득했다. 이건 나만의 비밀이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왕이면, 난 예쁜 가이드 여자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구…….
주현이도 예쁘긴 하지만 남자니까.
주현이는 빼던 내 손목을 여전히 잡은 채로 살짝살짝 물다가 잇자국이 난 곳을 혀로 슬쩍 핥고, 빨아들이면서 말했다. 으아, 축축해…….
“내가 좋아해. 가하.”
“…….”
“가하 가이드 나만 해. 내 에스퍼 가하만 해. 언제 어디, 우리 같이 있어. 영원히.”
“글쎄……. 너도 크면 나보다 더 예쁜 여자애랑 각인 하고 싶어질걸.”
주현이가 내 말에 흐, 하고 웃었다.
“가하 예뻐.”
“아니, 그게 아니라…… TV에 보면 다들 그러던데. 그 ‘달의 후예’에 나오는 예쁜 여배우, 가이드인데 예쁘고 등급이 높아서 다들 좋다고 그랬어. 다들 그런 사람이랑 각인하고 싶다고…….”
“나 필요 없어. 그런 사람. 더러워, 시끄러워, 귀찮아. 하지만 가하 아냐. 가하 좋아해.”
“……너 친구 나 말고 없어? 더 친한 친구랑 해.”
내 질문에 주현이가 평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없다고? 스웨덴에 있을 때도 없었어?”
지금이야 귀국 자녀반 있다가 와서 친한 친구가 별로 없겠지만, 여기보다 오래 살았다는 스웨덴에서는 있었을 거 아닌가. 개중에 한두 명 친한 친구…….
“없어.”
없구나. 나는 예상하지 못한 주현이의 대답에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왜? 반 애들 다 너 좋아하잖아. 귀국 자녀반 애들이랑도 복도에서 보면 잘 얘기하잖아.”
나는 가지지 못하는 애들의 호감을 너는 다 받으면서 왜 친구가 없다고 그래? 그런 작은 반발심도 들었다. 네가 손을 뻗으면 다들 좋다고 올 텐데…… 나는 그렇지 않지만.
“반 애들, 친구 아냐.”
“……그럼 뭔데?”
“사람.”
주현이는 그렇게 말했다. 사람.
“밑에 있는, 사람.”
“……그럼 나는?”
부하라 이건가. 그럼 난 부하의 부하? 이건 좀 슬픈데. 아까부터 묘한, 주현이의 대답에 나는 더 나아가서 되물었다. 주현이는 웃으면서 단박에 대답했다.
“가하, 내 사람. 내꺼. 내가 지킬 거.”
“……고맙다, 정말.”
밑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서 고마워해야 하는 거겠지……. 나는 맹목적으로 나를 죽 쳐다보는 주현이에게 작게 한숨을 쉬고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나 말고 친한 친구가 없어서 그렇게 각인 각인 하는 건가. 옛날 학교에서 친한 애들끼리 패밀리 만드는 것처럼…….
하지만 주현이도 나이 먹고 학년 올라가다보면 점점 친구가 생겨서 잊어버릴 게 분명하다. 누가 봐도 주현이는 친구를 삼고 싶은 사람이었고, 대체로 사람이란 게 뒤돌아보면 까먹으니까. 그런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나 같은 등급도 낮고 별 볼 일 없는 애는 얼른 잊혀질 게 뻔하지. 우리 엄마도 새 집으로 이사를 온 이후로 새로운 사람들을 모임에서 사귀면서 나 같은 애는 잊어버린 것처럼.
“알았어. 하지만 너 맘 바뀌면 말해야 해. 나도 내 가이드 새로 찾으러 가게.”
“없어.”
“만약에, 혹시나, 그런 일 있으면.”
“없어. 약속해.”
“…….”
이 고집쟁이. 나는 대충 넘기면서 일어섰다.
“알았어. 너 맘 안 바뀌면 내가 너 에스퍼 할게.”
“응. 이제 가하 내 에스퍼야. 내꺼야.”
주현이는 조금 배부른 표정이 되어 내 목덜미에 자기 뺨을 부비적거렸다. 말랑말랑한 살이 닿아 오는 게 기분 나쁘진 않아서 나는 장난스럽게 그 애의 뺨을 손가락을 콕콕 찔렀다.
“나는 내 꺼라고 했잖아.”
“나도 가하 꺼야.”
“너, 내 꺼라면서 왜 이렇게 내 말은 안 들어. 어?”
내 꺼면, 내 말을 더 잘 들어야 하는 거 아냐? 말로만 내꺼라고 하고, 정작 그렇지는 않는 게 조금 얄미워 그렇게 톡 쏘아 말했다. 평온한 얼굴을 한 주현이는 나를 일으켜 세우고 방을 나섰다.
“내가 아빠니까.”
“뭐?”
“내가 아빠, 가하가 엄마.”
“왜? 내가 에스퍼니까, 에스퍼가 원래 힘 더 세니까…….”
아빠지, 라고 하려 했는데 생각해 보니까 주현이의 가이드 등급이 더 높았다. 그냥 높은 것도 아니고……. 훨씬 더 높지. 이런. 주현이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스스로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냐. 내가 더 세, 가하. 아빠, 가족 지켜.”
“……싫어, 내가 아빠 할래. 내가 가족 지킬 거야.”
나는 괜히 오기가 들어서 주현이의 손을 잡고 계단을 걸어 내려가면서 아빠를 하겠다고 우겼다. 그러자 주현이가 계단을 내려다가 말고 나보다 두 단 정도 내려가다가 멈춰서 내 손을 꼭 잡고 특유의 어눌한 말투로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말했다. 내가 위에 있어서 그런가 눈높이가 같아지는 바람에 그 눈빛이 꽤 부담스러울 만큼 자세하게 보였다.
“알겠어요, 여보.”
“……안 어울려.”
주현이가 존댓말 쓰는 거 처음 봐서 그런지, 영 어색했다. 발음 때문인가? 내 말에 주현이가 살짝 뾰롱통한 얼굴을 하고 대답했다.
“그럼 가하 해 봐. 알겠어요, 여보. 괜찮아, 그럼 아빠 해.”
“좋아. 흠흠,”
나는 목을 가다듬고 아줌마와 집에서 본 드라마의 주인공을 흉내 냈다.
“알겠어요- 여보.”
“응, 여보.”
주현이는 그렇게 말하면서 높이가 같아진 내 입술에 촉, 하고 자기 입술을 살짝 부딪치면서 씩 웃었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너, 송주현……. 이거 하려고 그런 거지!’
“너…….”
“왜요, 가하 여보?”
능청스럽게 여보, 여보 하는 주현이가 얄미웠다. 그 애의 손가락을 내 입안에 넣고 조금 아프게 물어 버렸다. 송주현, 이 거짓말쟁이. 키스, 같은 거 우리 안 하기로 했잖아!
주현이가 아야야, 하고 엄살을 떨었다.
“가하 여보, 나 아파요. 사랑해 줘요. 아껴 줘요.”
“……나 너랑 말 안 해.”
“왜요, 여보?”
“하지 마!”
내가 귀에 손을 막고 부엌으로 가 버리자 뒤에서 킥킥 웃는 주현이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일부러 그런 게 틀림없다. 나는 분해서, 주현이에게 몸을 돌렸다.
“숨바꼭질 다시 해! 이번엔 내가 술래 할 거야. 내가 너 찾아서 벌칙 줄 거야!”
“그래. 해. 이번에 나 찾아.”
그렇게 우리는 다시 숨고, 찾는 것을 시작했다.
한창 집 안에서 숨고, 찾으며 오후 내내 뛰어다니던 우리는 저녁을 먹고 부른 배를 두드리며 툇마루에 앉았다. 가정부 누나가 우리를 툇마루로 보내면서, 앉아서 기다리면 멜론 잘라 준다고 했다. 멜론. 달콤한 녹색의 살살 녹는 과육은 상상만으로도 입안에 침이 고였다.
우리는 툇마루에 눕다 시피 해서 열려진 덧문 사이로 실려 오는 따스한 저녁의 봄바람 내음을 맡았다.
우리 집은 거실이 통유리로 된 좀 더 현대적인 집이지만, 나는 어쩐지 이 낡은 집이 더 좋았다. 어디를 가든 소리가 시끄럽게 삑삑 나고, 계단은 어린 나에게도 좁아터져서 팔 하나 벌리지도 못하며, 흔히 보는 벽다운 벽도 없어서 방음은커녕, 정말 불편하기 짝이 없는 집인데 그냥 정이 갔다. 나는 정원에 심어져 있던 석등에 불을 키는 비서 아저씨의 모습에 하나 그럴듯한 추측을 해 보았다. 낡은 만큼 사람의 손을 타야 하기 때문에 친근함을 느끼는 걸까?
‘사람의 관심이 쏟아져야 하는 집이여서, 사람의 정이 가게 되는 걸까…….’
온난한 계절을 같이 즐기는 풀벌레의 우는 소리가 간간히 들렸다. 우리 집에 비하면 사는 사람 수는 적은데 더 아늑하다니.
‘그건 아마, 주현이 때문이겠지…….’
이런 저런 생각이 머릿속을 돌아다니는데, 팔을 뒤로 빼서 기대고 있는 내게 옆에 누워 있던 주현이가 다가와서 어깨에 기대었다.
주현이는 가만 보면 부비적거리는 걸 유난히 좋아하는 것이, 우리 또래랑은 좀 다른 구석이 있었다. 아까 저녁을 먹을 때도 그랬다. 누나가 어릴 땐 잘 먹어야 한다면서 남산 만하게 퍼 준 흰 쌀밥 공기에서 밥을 한 술 한 술, 수저로 풀 때마다 주현이가 젓가락으로 그 위에 반찬을 부지런히 날라 주었다. 그걸 보고 가정부 누나가 한마디 했다.
「주현 도련님이 가하 도련님을 정말 좋아하시네요. 결벽증 때문에라도 이런 거 전혀 안하시는 분인데……. 저 처음 봤어요.」
심지어, 오늘 반찬으로는 굴비가 나왔는데, 내가 젓가락질이 좀 서툴러서 살을 다 으깨는 걸 보고 옆에 앉아 있던 가정부 누나가 도와드릴까요, 하던 차에 내 밥 위로 반질반질한 결이 살아 있는 노릇한 생선살이 오붓하게 올라왔다.
「가하, 먹어.」
「고마워……. 안 해도 되는데. 내가 할게.」
외국에서 산 애 보다 생선살을 발라 먹을 줄 모른다는 게 조금 쑥스러워졌다. 그런 내게 주현이는 기쁘게 웃으면서 하얀 손으로 은색의 쇠 젓가락을 놀리며 또 한 점 내 밥 위로 올려 주었다.
「많이 먹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