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우리가 선택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나는 종종 그런 생각을 한다. 왜냐하면 어린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우리 집이 돈을 잘 벌게 된 것, 내가 새로운 학교에 가게 된 것, 내가 D등급 에스퍼라는 것, 엄마가 내 동생을 낳은 것.
그리고 그 애를 만난 것…….
나는 하얀색으로 칠해진 아기 요람의 턱에 기대어서 꺄르륵 웃어대는 내 여동생을 내려다보았다. 칠십 먹은 노인마냥 쭈글쭈글하고 벌건 얼굴이 마치 괴물 같았다. 아기가 예쁘다는 말은 다 거짓말이다. 그런 내 옆으로 누군가가 왔다.
“네 동생이란다.”
남산만한 배가 비교적 홀쭉해진 엄마였다. 아직 붓기가 남은 그녀는 어딘가를 또 나가는지 제법 화려한 빨간색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내 동생이라고 소개하는 그녀의 얼굴은 어딘가 지친 기색의 그늘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큰 짐을 덜었다는 얼굴이었다.
자식을 낳은 엄마의 얼굴은 다 저런 걸까. 내가 저녁마다 아줌마와 거실의 소파에 앉아서 보는 드라마에서는, 아이를 낳은 엄마는 애를 늘 안고 애지중지하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저렇게, 지친 눈이 아니라.
나는 어울리지 않는 색의 원피스를 입은 엄마에게서 눈을 돌려서 다시 동생이라는 아기를 보았다. 레이스로 뜨여진 머리쓰개와 분홍색 우주복을 입은 여동생은 입을 오물거리며 손을 내게 뻗었다.
“아, 아부, 부부……. 아바.”
“네가 오빠니까 잘 돌보렴. 엄마 오늘 안 들어올 거야.”
‘그런 당신은 엄마잖아요.’
나는 하지 못하는 말을 삼켰다. 이런 생활이 1년 정도 되니, 이제는 어느 정도 눈치가 생겼다. 아무리 내 생각을 말해도 엄마는 수긍이라든지, 이해라든지 그 무엇도 하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에 나름의 처세가 생긴 것이다. 슬프지만, 그랬다.
엄마가 현관의 도어 록을 여는 소리와 함께 집에는 사람 없는 특유의 적막함이 맴돌았다. 아줌마는 장을 보러 마트에 갔고, 한가한 토요일 오후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그렇다고 말도 통하지 않는 간난 애와 지겨운 눈싸움을 계속 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내방으로 가서 책가방에 있는 로봇이 그려진 알림장을 꺼냈다. 혹시 내가 까먹고 하지 않은 숙제가 있다면, 그거라도 하면서 이 지겨운 시간을 좀 이겨내고 싶었다.
아니면, 차라리…….
“학교 가고 싶다…….”
로봇 같이 찍어낸 똑같은 모양의 교복을 입은 애들이 다니는, 정이 가지 않는 학교였지만 그래도 우리 집보다는 나았다. 어쩌니 저쩌니 해도 집에 예전처럼 온 가족이 모여서 밥을 먹는 일도 드물었고. 하다못해 실질적으로 나를 돌봐 주는 건 가족 그 누구도 아닌. 전혀 다른 남인 아줌마였으니까. 집에 있으면 그 사실을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 사실을 떠올릴 때면 잘 먹던 밥도 얹히곤 했다.
무엇보다도 학교에는. 내 옆자리에는. 그 애가 있었다.
「가하.」
내 이름을 온전히 불러 주는 그 애.
알림장을 넘기는데 마지막 장에 나는 쓰지 않는 파란색 펜글씨가 [오늘의 할 일]에 적혀 있었다.
[0222253567]
그 애가 적어 준 집 전화번호였다. 그거 외에는 숙제도 뭐도 적혀 있는 게 없었다.
“…….”
고민은 길지 않았다. 차고 넘치는 주말이라는 시간을 가진 나는 알림장을 들고 거실에 있는 전화기로 갔다. 수화기를 손에 들고서 원형의 숫자판 홈에 손가락을 걸치고 비밀 금고를 위한 암호를 누르듯이 하나씩 굴렸다.
차르륵, 차르륵, 차르르르륵…….
마지막 숫자 7을 굴리고 기다리자 수화기 구멍으로 전화가 연결되는 신호음이 들렸다.
뚜루루……. 뚜루루루…….
‘받을까?’
뚜루루…….
―네, 전화 받았습니다. 누구신가요?
“아……. 저.”
전화를 받은 사람은 그 애가 아니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젊은 목소리의 남자는 내 당황스러운 반응을 인내심 있게 기다려 주었다.
―천천히 말씀하세요. 찾으시는 분이 계신가요?
“저, 그……. 주현이, 친군데요.”
손에 식은땀이 배어 나와서 잡고 있는 수화기가 잠시 밑으로 밀렸다. 나는 다시 잘 고쳐 잡으며 급하게 말했다.
“주현이 좀……. 바꿔 주세요.”
―아, 주현 도련님 친구 분이시군요. 이름을 어떻게 전해 드리면 될까요?
수화기 너머의 남자는 서글하게 다시 되물었다.
“가하요. 유가하. 그, 주현이 짝꿍이에요.”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네.”
집이 크고 넓었으니, 부르러 가는데도 제법 시간이 들겠지? 나는 그렇게 짐작하며 전화기 옆에 있는 소파에 털썩 누웠다. 그러자 손에 들고 있는 수화기에 달린 꼬불거리는 줄이 주욱 늘어났다. 빨리 받았으면,
―가하!
좋겠다.
“주현아!”
나는 그 애가 대답을 하자마자 소파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애가 반가운 목소리로 다시 인사했다.
―가하! 안녕.
오늘은 무슨 일일까? 늘 무시되던 내 바람은 어쩐 일인지 배신하지 않고 이루어졌다. 수화기 너머에는 기다리고, 바라던 어눌한 말투의 내 이름이 들리고 있었다. 어쩐지 수화기로 듣자니 목소리가 다르게 들려서 조금 어색했다.
“응. 안녕…….”
―뭐 해? 가하?
“나? 나……. 그냥. 아무것도 안 해. 너는?”
―나도……. 심심해. 가하. 가하 없어.
얼굴을 보고 있지 않아도 내려가는 목소리가 조금 풀죽은 그 애의 표정을 떠올리게 해서 나는 소파 등받이에 기대면서 작게 웃었다. 흐.
―가하, 좋아? 나 심심해, 좋아?
“으응. 아니. 나도 심심해.”
‘보고 싶다.’
나는 말 하나를 숨기고 소파 팔걸이에 덮인 가죽을 손으로 툭, 툭 꼬집으면서 수화기에 얼굴을 바짝 대었다. 그 애의 숨소리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듣고 싶었다. 그 애가 하하, 하고 웃었다.
“왜 웃어.”
―가하, 귀여워.
“네가 더…….”
누가 누구를 귀엽다고 하는 건지. 애초에 우리말이 서툴러서 도막도막 잘린 말을 하는 그 애가 나 같은 것보다 훨씬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내 방 옆에 누워 있는 내 동생이란 애보다, 훨씬…….
내 대답을 끊고 그 애가 자신 있게 말했다.
―데려가? 가하?
“응?”
―나 심심해, 가하 심심해. 우리 만나. 갈게.
“언제?”
어차피 내일은 일요일이니까 오늘 하루 종일 논다고 해도 상관은 없었다. 학교에서 보자고 할까? 엄마가 나가서 데려다 줄 사람은 없지만 아줌마에게 지하철 타는 법을 물어 보면……. 내 대답에 그 애가 으음, 하고 고민하는 소리를 내었다.
―지금?
“지금?”
그 애는 확고하게 말했다.
―응. 지금. 보고 싶어
“……나도.”
한낮의 햇볕이 거실의 유리창을 타고 내가 있는 소파로 헤쳐 들어왔다. 눈꺼풀 사이로 눈부시게 스미는 빛에 나는 눈을 감았다.
‘나도, 나도 보고 싶다.’
그러자 그 애가 수화기 너머로 짧게 젖은 소리를 내었다. 그 찰나의 소리에 내가 방금 뭐냐고 물어볼 새도 없이 그 애가 말했다.
―갈게, 지금.
“어디로? 학교?”
뭐였을까? 그 소리.
―아니. 가하 집.
“우리 집 주소 알아?”
―아니. 몰라.
너무 당당하게 말해서 나는 맥이 빠졌다. 누가 들으면 아는 줄 알고 말하는 줄 알았을 것이다. 그렇게 타박을 주기에는, 사실 나도 아직 집 주소를 잘 몰랐다. 낯선 집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주소가 잘 외워지지가 않았다. 그저 서초동……. 으로 시작한다는 것밖에는.
그 애는 내게 말했다.
―기다려, 가하.
“어? 응…….”
그 애가 옆에 누군가에게 말하는지 수화기 너머로 작은 소리로 알 수 없는 언어가 나왔다.
‘영어일까?’
요즘 수업에 배우기 시작한 영어 시간과 비슷한 듯 아닌 듯, 알 수 없는 소리에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그렇지만 나는 외국어에는 젬병인지라 그 빠르게 속삭여지는 의미 모를 소리를 그저 묵묵히 수화기 너머로만 듣고 있었다. 그러다가 수화기가 움직이는지 툭툭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처음에 수화기로 들었던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례합니다. 도련님 친구 분이시죠?
“네…….”
―전 도련님 가택 비서 박호연이라고 합니다. 혹시 집에 어르신 계신가요?
“아뇨. 아직……. 다 나갔어요.”
언제 올지도 몰랐다. 하다못해 아줌마도 엄마가 나가기 전에 나갔으니 좀 있어야 올 것이었다. 나는 거실의 뻐꾸기 벽시계를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내 대답에 비서는 차근하게 다시 물어봤다.
―혹시 언제 오시는지 아시나요? 그리고 집 주소 아시면 불러 주시겠어요?
“그, 아뇨. 몰라요……. 집 주소도……. 잘 몰라요.”
새로운 주소도, 엄마와 아빠의 돌아오는 시간도 내가 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내 무익한 대답에 비서가 난감한 목소리로 잠시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 애가 분명할 낯선 언어와 남자의 목소리에 나오는 언어가 삽시간에 주고받고를 반복했다. 가끔, 그 애가 귀국자녀반 애들과 복도에서 마주칠 때나 듣는 언어였다.
‘역시 영어겠지? 나도 이제부터 영어 열심히 배워야겠다.’
그 애가 나와는 좀 다른 생김새를 가지고 있다 보니 쓰는 말도 다르다는 것은 늘 알고 있었는데……. 나하고는 늘 서툴어도 한국어로 하니까 그 사실을 까먹게 된다. 어쩐지 수화기로 들리는 목소리의 주인은, 내가 알던 주현이가 아닌, 전혀 모르는 사람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비서가 수화기 너머로 나를 불렀다.
―도련님 친구 분, 그, 20분 후에 집 앞에 나와 계시면 됩니다.
“집 앞이요? 집 문……앞이요?”
―예. 차 다니는 길목 쪽에요. 주현 도련님 바꿔 드리겠습니다.
주소도 모르는데 어떻게 온다는 거지? 나는 의문을 떠올린 채로 네.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로 까득까득 대는 소리와 함께 그 애의 조금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하, 가하.
“응.”
―갈게. 빨리! 가하, 보고 싶어.
“나도……. 보고 싶어.”
보고 싶다는 말이 이렇게 간질거리는 말이었던가? 나는 거실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달아오른 뺨을 손바닥에 찬 땀으로 식은 손으로 식혔다. 뜨거운 태양보다도 온도가 높은 말이었다.
‘보고 싶다’라는 말.
내 대답에 또 수화기에서 아까 들은 모를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들으니, 뭔가, 쪽. 하는 듯한. 그런…….
―기다려, 가하.
그런 소리.
아까 전화 했던 전화 내용대로, 나는 20분 뒤에 집 문을 나섰다. 현관문을 나서는 길에 막 집 대문을 열고 들어오던 아줌마와 나는 딱 마주쳤다. 아줌마는 양손 가득히 장을 본 재료를 든 채로 나에게 웃었다.
“가하야, 많이 기다렸지? 아줌마가 금방 밥 해 줄게.”
“아줌마, 저 지금 나가요.”
“으응? 어딜 가려고 그래? 밥도 안 먹었는데.”
“친구 만나려구요.”
“친구? 누구? 언제?”
아줌마는 짐을 들고 오면서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나도 마주 안았다. 이건, 나만 아는 비밀인데, 내가 안긴 푸근한 품은 기분을 넉넉하게 만드는 신비한 힘이 있다. 그렇게 안긴 품의 어깨 너머로 열린 대문이 보였다. 그 문 앞에 서는 검은 차도.
“주현이라고……. 저번에 말한 친구요.”
“아아, 저번에 말한 그 친구?”
내 말에 아줌마는 안다는 듯이 뽀글뽀글한 파마머리를 흔들었다. 차마 아까워서 다 말해 주지는 않았지만, 그녀도 어느 정도 그 애를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애가 온 이후로 내 얼굴이 좋아졌다며 넌지시 물어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도 내 얼굴은 좋아 보일 거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가하!”
열린 대문 앞에 서 있던 검은 차에서 그 애가 내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열린 대문 사이로 나와 눈이 마주쳤으니까. 마주치자마자 내게 달려왔으니까. 그 외침에 나를 안아 주던 아줌마가 포옹을 풀었다. 그 애의 뒤로 조수석에서 내린 정장 차림의 남자가 잰 걸음으로 따라왔다.
“오메, 누구니?”
아줌마는 그 애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 애의 이국적인 얼굴이 유난히 신기한지 그녀에게서 사투리가 나왔다. 그 애는 아줌마와 눈을 마주치다가 내게 시선을 돌렸다.
“누구야, 가하? 엄마?”
“주현이에요. 그게.”
‘엄마는 아니고……. 뭐라고 해야 하지?’ 내가 사실을 말하기도 전에 아까 전화를 했던 사람이 틀림없을 목소리가 우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도련님, 뛰어가지 마세요. 조심하셔야죠. 안녕하세요. 가하 군 가족 되시죠?”
“아? 예예, 안녕하세요. 그, 우리 가하 친군가요?”
아줌마는 나를 보다가 그 애를 보다가, 그러다가 결국 정장 차림의 남자에게 물어봤다.
“예. 주현 도련님 친구 분이시라고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혹시 어머니 되십니까?”
“아, 나는 그런 건 아니고……. 여기 일하는 가정부입니다. 사모님은 약속 때문에 나가셨어요. 그,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그녀는 대문 앞에서 반질반질한 차를 흘깃 보면서 스스로를 설명했다. 내게도 특이하게 보이는 차니까, 어른인 그녀에게도 그랬을 것 같다. 비서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별다른 일은 없지만 저희 도련님이 가하 도련님을 집으로 데려가서 놀고 싶어 하셔서요. 부모님에게 먼저 알려드리고 모셔 가려고 왔습니다.”
“아아, 그렇구나. 저번처럼 말이죠? 아유, 그럼요. 이 나이엔 친구랑 나가 놀아야지. 잘 됐어, 가하야. 사모님에게는 아줌마가 말해 둘게. 맘껏 놀고 와, 응?”
아줌마는 푸근하게 웃으며 내 머리를 툭툭 쓰다듬었다. 그걸 주현이가 옆에서 은근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줌마와 대면하고 있는 비서는 정장 마이 안쪽에서 자그마한 철제 케이스를 열어서 직사각형의 빳빳한 종이를 아줌마에게 공손히 건넸다.
“여기, 제 연락처입니다. 저희가 저녁에 다시 자택까지 모셔다 드리겠지만 그 전에 연락하실 일 있으면 이리로 전화 주시면 됩니다.”
“아, 예예. 그……. 삼라 전자 비서실……. 삼라?”
아줌마가 두 손으로 그 종이를 받아서 읽는 동안 주현이가 내게 냉큼 다가와서 손을 잡았다. 파란 눈이 오후의 햇빛을 받아서 그런가 유난히 반짝거렸다.
“가자. 가하.”
“응? 응.”
“그럼, 저희는 여기서 가 보겠습니다.”
아줌마는 입을 벌린 채로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주현이와 걸으며 아줌마에게 작게 손을 흔들었다. 그렇지만 아줌마는 비서가 준 명함을 계속 보느라 나를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우리는 빠르게 자동차에 탑승했다. 차 뒷좌석에 타자, 그제야 알았다. 이 차는 저번과는 다른 차라는 것을.
‘집에 차가 2대인가?’
하긴, 집이 크니까 2대는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내가 뒷좌석에 타자마자 주현이가 그때처럼 내 옆으로 바싹 다가왔다. 그리고는 그때처럼 내 머리 위에 있는 안전벨트를 죽 당겨서 찰칵하고 꽂아 주었다. 두 팔마저 안전벨트 아래 고정되어 있는 모습을 그 애는 흐뭇한 얼굴로 보면서 흡족해했다.
“됐다.”
답답하긴 한데. 그래도 그 애가 좋다면야. 나는 그렇게 옆에 앉은 주현이의 손을 꼭 붙잡은 채로 그 애의 집에 다시 갈 수 있었다. 이번에는 저번처럼 한옥 입구처럼 생긴 대문이 아니라, 현대식으로 된 차고 쪽으로 들어가서 지상으로 가는 계단을 통해서 정원 길로 갔다. 같이 있던 비서 말로는 이게 더 빠른 길이라고 했다.
“——,——.”
“——.”
주현이는 그때처럼 자갈 깔린 정원 길에 발을 딛자마자 박 비서에게 뭐라 말하고 홱 돌았다. 나는 자연스레 그 애가 보던 비서를 보다가 내 팔이 당겨지는 힘에 고개를 돌렸다. 박 비서는 살짝 목례하며 가만히 서 있었고, 주현이는 뭐가 그렇게 급한지 내 팔의 옷자락을 움켜쥐고 자갈길을 팍팍 뛰었다. 그에 나도 따라서 뛰었다.
우리 옆으로 스치는 푸릇한 어린 가지들이 사락사락 소리를 내고, 우리가 뛸 때마다 발밑의 자갈이 튀면서 조금 늘어난 신발 아래로 부스러기가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작고 작은데 발 밑 아래에서 콕, 쿡, 찌르는…….
그렇게 같은 정원 길을 지나 저번에 보았던 2층 집에 가자 오후 햇살을 진하게 받아서 툭, 튀어 나온 처마 밑으로 그늘이 도드라지게 드리워진 집 현관이 보였다. 우리는 디딤판 같은 돌 마루에 신발을 벗고 곱게 나이 먹은 마룻바닥에 발을 디뎠다.
삐걱, 끼익.
우리만 있는 집의 복도에서 다시 낡은 소리가 들려왔다.
삐걱, 삐걱, 끼이익…….
“도련님,”
옆의 복도에서 우리가 있는 현관으로 나온 젊은 여자는 연한 핑크빛 긴팔 블라우스와 갈색 긴 치마를 입고 하얀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차는 2대였는데, 이런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내가 낯선 사람의 등장에 양말 안의 발을 꼼지락 거리고 있을 때 주현이의 손이 내 옷의 팔 자락을 놓고 나를 향해 가리켰다.
“목욕.”
“예, 준비 됐어요. 지금 가시겠어요?”
“응.”
‘목욕? 준비?’
나는 영문 모를 소리를 그 애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러자 젊은 여자가 아, 하고 소리를 내며 나를 안내했다.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리 오세요, 도련님 친구 분.”
“가하, 목욕. 하자.”
내가 가만히 있자 주현이가 내 팔의 옷자락을 죽죽, 당겼다.
“목욕? 왜? 나, 어제 씻었는데…….”
‘나한테 무슨 냄새 나나?’
갑작스러운 말에 나는 당황스러워서 고개를 숙여서 내 옷차림을 보았다. 아줌마가 늘 그렇듯이 잘 빨래해서 새 옷장에 넣어 준 옷이었다. 어떤 얼룩 하나 없이 잘 다림질 된. 젊은 여자가 난감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그, 도련님이 조금……. 결벽증이 있으셔서요. 바깥에 다녀오면 꼭 목욕하세요.”
“아……. 결벽증이요?”
“남이랑 닿는 걸 싫어하세요. 이리로 오시겠어요?”
처음 듣는 단어에 나는 그 애의, 파란 눈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 애의 눈이 접히며 웃었다. 호수 같이 맑디맑은 눈을 가진 애라서 그런 걸까? 때 묻지 않고 더러움 한 점 없어 보이는 눈에 ‘결벽증’이라는 증상을 수긍하며 그들과 같이 발걸음을 향했다.
놀러간 친구 집에서 목욕을 한다는 건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였지만, 큰 신경은 쓰이지 않았다. 그냥, 내 옆에서 생글생글 웃고 있는 그 애가 좋았으니까. 그 애가 하자고 하면…….
하고 싶었다. 뭐든지.
여자가 앞장서서 걸으며 우리를 안내했다. 나무 마루가 깔린 복도는 그때와 여전하게 격자무늬의 덧문이 빙 둘러서 닫혀 있었다. 길게 늘어진 복도에서 한 번 꺾자, 그때 보았던 주현이 방의 미닫이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그 방을 지나쳐 좀 더 안쪽으로 가자 위층으로 향하는 계단이 왼쪽에, 오른쪽에는 부엌, 그리고 우리의 정면에는 잘 닫혀 있는 불투명한 큰 유리 미닫이가 보였다.
여자는 그 미닫이 문 앞에 서서 드르륵 하고 문을 밀었다. 그러자 우리가 서 있는 곳보다 한단 낮은 마루가 보였다. 그녀는 문 안쪽으로 손을 내었다.
“들어가셔서 바구니에 옷 넣으시고 씻으시면 되세요. 주현 도련님이 알려 주실 거예요. 갈아입을 옷은 곧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네…….”
그렇게 말하자마자 주현이는 나를 데리고 그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가 들어가자마자 불투명한 문은 부드럽게 닫히고, 위에서 커튼 같은 것을 내렸는지 어두운 갈색 목재의 문밖이 빛 하나 들어오지 않도록 어둡게 변했다.
앞을 바라보자 현대식으로 꾸며진 세면대와 벽을 따라서 가로로 길게 걸린 거울, 발밑에 깔린 엷은 베이지 색의 나무 깔판은 좋은 느낌의 풋풋한 나무 냄새까지 더해져서 어린 내가 봐도 고급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
나는 어색함에 처음 디딘 자리에서 그저 서 있었다. 주현이는 이 방 옆에 있는 미닫이문을 열고 짚으로 짠 네모난 바구니를 가져와서 내게 내밀었다. 얼떨결에 내가 그 바구니를 받자 말했다.
“벗어.”
“어?”
“목욕, 벗어. 옷.”
그렇게 말하면서 주현이는 입고 있던 하얀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톡톡 풀었다. 꼭 맞물려 있던 셔츠 깃이 그 손짓에 느슨하게 풀려나가며 부드러운 살결을 내보였다.
‘벗으라고?’
오자마자 목욕을 해야 한다는 말도 당황스러웠지만 내 앞에서 단추를 풀고 있는 그 애의 모습에 얼굴이 터질 것 같은 압박을 느꼈다. 그리고 배 언저리의 단추를 풀어 내리던 그 애의 손가락이 멈췄다. 나는 그 손이 멈추자 자연스레 시선을 올렸다. 그 애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올망올망한 파란 눈에 내가 비치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볼 수 없는 색깔의 눈은 멍청한 내 얼굴을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마치 잘 벼린 얼음송곳 같은 눈빛에 나는 미닫이 문 구석으로 시선을 피했다.
“그, 목욕……. 같이 하는 거야?”
남의 집에서 목욕을 한다는 상황도 충분히 묘했지만, 내 앞에서 옷을 벗는 그 애를 보니 우리가 같이 목욕을 할 것 같다는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혼자도 아니고 그것도 그 애 앞에서, 같이 맨 몸을 보일 큰 용기는 내게 없었다. 부끄러운 게 뭔지 다 아는 나이였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애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티 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응.”
“저, 있잖아.”
“벗어. 가하.”
그 애가 내게 얼굴을 바짝 대고 말했다. 곧은 콧날이 내 코끝을 스칠 듯 말듯, 다가오며 더운 숨을 뱉었다.
“벗어.”
똑, 똑…….
뜨거운 물이 가득 담겨서 김을 내뿜는 나무 욕조 덕분에 밀폐된 욕실 안은 따뜻한 습기가 가득 차 있었다. 그 애는 이미 욕조 안에서 등을 보인 채로 앉아 있었다. 내가 세면대가 분리되어 있던 간이 공간에서 욕실로 맨발을 조심스럽게 내딛자, 아직 마른 부분의 나무 발판이 발끝에 닿았다. 나는 내심 그 애가 나를 향해 뒤돌아볼까 봐 어깨를 움츠리고, 살짝 몸을 돌린 채로 욕실의 유리 미닫이문을 닫았다.
똑……. 똑…….
그 애가 앉아 있는 욕조 위로 천장에 맺혀 있는 물방울이 떨어지며 적막한 욕실에 소리를 더했다. 내가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나무 발판 위를 걸어가자 그 애는 여전히 내게서 등을 돌리고 앉아 있는 채로 말을 걸었다.
“가하.”
“어? 응?”
“몸 씻어. 그리고 와. 여기.”
그 애가 욕조 물 안에 있는 손을 꺼내서 욕조의 턱을 툭툭, 쳤다. 그 손길을 타고 물살이 욕조 위를 넘실거리며 촥, 하는 소리를 내었다. 마치 예전에 갔던 목욕탕처럼, 몸을 먼저 씻어야 하는 모양이었다. 그 애는 내가 꾸물대며 옷을 벗는 동안 다 씻었는지 머리가 물에 푹 젖어 있어서 머리카락 색깔이 평소보다 진한 색을 띠고 있었다. 나는 살금살금, 발뒤꿈치를 들고, 여전히 몸을 배배 꼰 채로 신신당부했다.
“응……. 가만히 있어. 돌아보지 말고.”
“응.”
“진짜로. 가만히 있어야 해.”
“알았어. 가하.”
그 애는 그 자세 그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큭큭 웃는 소리가 났던 것 같기도 하고, 나는 욕조 뒤로 있는 샤워기에 가서 물을 틀었다. 따수운 물이 마른 몸을 적시고, 머리카락 사이로 스며들어 올 때 즈음, 그 애가 있는 욕조에서 촤악, 하는 작은 물소리가 났다. 나는 등을 떨면서 얼른 고개만 돌려 보았다. 그 애가 여전히 같은 자세로 고개만 옆으로 돌려서 나를 보고 있었다.
“가하.”
“가, 가만히 있으라고 했잖아. 얼른,”
“샴푸…….”
내가 습기로 따뜻해지는 얼굴을 도로 돌리자 그 애의 작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샴푸? 나는 다시 그 애에게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자 그 애가 웃었다. 촥, 하고 욕조의 물 안에서 발갛게 달아오른 손이 나왔다. 나온 팔위로 김이 사륵사륵 올라오고 있었다.
“왼쪽 샴푸. 오른쪽 바디.”
그 손이 향하는 곳을 보니 샤워기 윗 쪽에 하얀 통이 두개 있었다. 둥근 볼 모양의 샤워 볼까지. 나는 어색하게 그 애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고마워.”
“이름.”
“응?”
“이름. 내 이름. 불러 줘.”
주현이는 앉아 있던 몸을 돌려서 욕조 턱에 팔을 포개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 움직임에 욕조의 물에 파란이 일었다. 젖어서 넘긴 머리가 욕실 벽 위의 긴 창으로 투과되는 햇빛으로 엷게 반짝였다.
그게, 어쩐지 이 세상사람 같지가 않았다. 내 눈에는 어디 하늘에서 툭, 하고 떨어진 천사 마냥 보였다.
나는 그 애의 깜빡이는 눈을 보다가 고개를 돌리고 샤워 볼에 샤워기 물을 적셨다. 발밑으로 촤아아 하고 내뿜어지는 샤워기 물이 뜨끈했다.
“주현, 아.”
“응.”
뒤돌아 있어도 느껴지는 만족스러운 목소리에 나는 피식 웃었다. 멀고 먼 외국에서 자라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워낙 유복하게 자라는 탓일까. 참 애가 순수했다. 그저 이름 하나 불러 주는 것만으로도 좋아하는 게, 참 아이다웠다.
별거 아닌데. 네가 계속 계속 불러 달라고 하면 난 그럴 수 있는데…….
나는 그렇게 속으로 생각하며 샤워 볼 위에 바디클렌저를 죽, 짰다. 손으로 뭉글뭉글 비벼서 거품을 만들고, 팔부터 만들어진 샤워 볼 위의 거품을 슥슥 문질렀다. 바디 클렌저에서는 향긋하기 짝이 없는 레몬 향이 났다. 냄새가 좋다고 생각하며 몸을 숙여서 다리를 문지르고 있는데 욕조에서 이번에는 큰 물소리가 났다. 촥, 촥, 하고 욕조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바닥에 넘쳐 나오며 내 허벅지에 옅게 튀겼다.
뭐지? 나는 상황 파악을 할 새도 없이 뒤에서 차박, 차박 하고 다가오는 젖은 발걸음 소리에 얼음이 됐다.
‘으아, 왜 나온 거야?’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가만히 수그리고 있었다. 몸을 숙이고 있는 내 눈에는 거품이 묻은 내 발꿈치 뒤로 그 애의 물 젖은 발이 보였다. 매끈하게 깎여 있는 발톱만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 애가 굽어진 내 등 뒤에 손을 올렸다. 아직 거품이 묻지 않은 등이 화들짝하고 떨었다. 그 애는 내 반응을 신경도 쓰지 않는지 내 등골, 척추 마디를 손바닥으로 옅게 더듬었다.
“주, 주현아.”
“등.”
“응?”
“등. 내가 씻어. 가하, 못 씻어. 등.”
그 애는 가만히 내 등 위에 손을 올려두고 말했다. 내 손이 닿지 않는 등을 씻겨 주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여전히 수그리고 있는 채로 말했다. 수그린 탓인가 머리에 피가 온통 쏠려서 조금 괴로웠다.
“등……. 씻겨 준다고?”
“응.”
“내가 할 수 있는데…….”
“도와 줘. 나.”
그 애는 그렇게 말하면서 내 허리 쪽으로 다른 손을 걸쳤다. 클렌저 거품이 묻은 복부 가장자리에 그 애의 따뜻한 손이 파고들었다. 그 낯선 손길에 나는 뻣뻣하게 몸을 일으켰다. 몸을 바로 세우자 매끈한 등 뒤로 그 애의 몸에서 나오는 열기가 은근히 느껴져서, 기분이 이상했다.
“서 있어. 가만히.”
“진짜로, 내가 할 수…….”
“가하.”
그 애가 내가 들고 있던 샤워 볼을 부드러운 손길로 가져가며 내 귓가에 속삭였다. 나보다 키가 좀 더 커서 그런지 귓바퀴 위에 물기 어린 젖은 목소리가 내렸다.
“나 싫어. 더러운 거.”
“…….”
“가하, 싫어. 더러운 거.”
젖은 머리끝부터, 어깨에 부드럽게 스치는 샤워 볼은 거품을 피부 위로 남기면서 등 위를 느릿하게 누볐다. 그 애는 여전히 내 허리를 손으로 잡은 채였다. 간질간질한 등 뒤에 보이지 않는 감각에 나는 그저 고개를 살짝 숙이고 오므라드는 내 젖은 발가락만을 보고 있었다. 그 애가, 날 싫어하는 건……. 싫었다.
“내가, 해. 가하 깨끗하게.”
그 애는 내 척추 끝, 둔부 위에 샤워 볼을 문지르면서 고개를 살짝 숙이고 귀 뒤로 속삭였다.
“가하, 전부 깨끗하게. 내가…….”
나는 등 위로 문지르는 손길에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가깝고, 뜨거웠고, 간지러웠다. 그러다가 그 애는 샤워 볼을 바닥에 떨어트리고, 서 있는 내 어깨를 잡은 채로 다른 손바닥에 샴푸를 죽죽 짰다. 머리 위에서 샴푸를 두 손으로 삭삭 비비더니, 내 귀 뒤의 머리카락으로 두 손을 넣어서 손끝으로 샴푸와 두피를 문질렀다. 나는 아직 거품투성이인 손을 머리 위로 올리며 눈을 반쯤 뜨고 말했다.
“주현아. 나, 머리 감을 수 있어. 혼자 할 수 있어.”
“싫어.”
그 애가 짧고, 명료하게 말했다. 언제나 어눌한 말투는 유난히 그 단어를 할 때만 강하고, 명료했다. 싫어.
“싫어. 가하, 더러워.”
“내가……. 더러워?”
“응. 그래서 씻어. 내가 해. 아니면 더러워.”
그 애가 내 목 뒤에서 숨을 쉬는지 거품 묻은 목 뒤가 불어오는 숨결로 살짝 서늘했다.
‘내가 더러워서, 몸소 씻기지 않으면 못 배기는 건가? 결벽증이 그런 건가……?’
나는 아까 젊은 여자가 말해 준, 남이랑 닿는 게 싫고 밖에 나갔다 오면 목욕을 해야 한다는 주현이의 증상을 떠올리며, 앞으로 더 잘 씻고 다녀야겠다고 생각하며 팔을 내렸다.
‘그래도 저번에는 안 그랬는데……. 오늘은 더러워 보이나? 집 안에만 있었는데.’
젖은 머리 사이로 커다란 손이 비비고, 문지르고, 거품을 푹신하게 내었다. 점점 이마 위로 내려오는 거품들에 나는 눈을 감았다.
“눈 감아. 가하. 눈 아파.”
“응…….”
기분이 좋은지 주현이는 콧노래를 부르며 내 머리를 삭삭 감겼다. 눈을 감을수록 스치는 손가락이 선연해서 더 자극적으로 느껴졌다. 예를 들면, 목 뒤나 귓가를 배회할 때면 자동적으로 몸이 잘게 떨렸다. 그럴 때마다 이상한 소리가 입에서 튀어 나올 것 같아서, 주먹 쥔 엄지의 손톱을 손바닥 안쪽에 꾹꾹 찍어 누르며 참았다.
어느 정도 머리를 감겨 주던 손이 내게서 떨어져 나가고 세워 두었던 샤워기가 딸칵, 하고 들리며 끼릭 끼릭 하고 밸브가 열리면서 다시 촥, 하고 물이 힘차게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뜨거운 물이 내 정수리를 타고 주르륵 흘렀다. 거품이 물을 타고 흐르는 느낌과 함께 다시 커다란 손이 내 머리카락 사이로 들어와서 젖은 머리카락을 슬슬슬 걷어내었다.
한창 그렇게 반복을 하다가 머리의 거품이 다 걷어진 거 같은지, 매끈한 손바닥이 내 얼굴선을 쓸어내리며 이마를 타고 흘러서 얼굴에 남은 거품을 다 걷었다. 이어서 물줄기가 어깨서부터 흐르기 시작했다. 머리에 있던 손은 이제 몸에 묻은 거품을 쓸어내렸다. 유난히 미끌거리는 그 촉감에 나는 흠칫거렸다.
처음은 목 뒤였다. 뒷목을 타고 이어진 어깨, 가슴팍, 그 애는 내 심장 쪽이 있는 곳을 느릿하게 손바닥으로 문지르다가 갈비뼈 밑의 복부, 배꼽을 살살 쓸어내리고 다시 등 뒤쪽의 팔, 등, 척추, 그리고 그 밑의 엉덩이 쪽에 샤워기 물을 살살 뿌렸다. 샅을 타고 흐르는 물줄기는 평범한 샤워인데도 이상하게, 간지럽고, 그 애가 스치는 살결 위가 파득파득 튀어오를 것만 같았다. 특히 내 엉덩이 위를 가볍게 문지르자 나는 그만 참았던 소리를 내고 말았다.
“읏,”
그러자 내 엉덩이 위에 있던 손이 잠시 멈췄다. 나는 너무 부끄러워서, 손으로 입을 막고 간신히 입을 떼었다.
“주현아…….”
“…….”
내 등 뒤에 있는 그 애는 말이 없었다. 엉덩이 위로 샤워기의 물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상하게 생각하겠……. 지? 그렇지만, 너무, 간지러워서…….
“그, 내가 하면……. 안 돼? 간지러워서……. 그래.”
“……——.”
귓가에 나직한, 그 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낯선 언어에 나는 다시 몸이 얼었다.
뭐라고, 그런 거지.
알 수 없는 의미에 나는 그저 서 있었다. 아무것도, 안하고 그저 가만히. 내 긴장한 목울대가 울렁거리는데, 샤워기가 움직이는지 뒤에 허벅지 위로 물줄기가 쏘아졌다. 그리고 다시 그 애의 손이 그 허벅지 근육을 살살, 결을 따라 살짝 쥐듯이 쓸어내렸다.
‘아…….’
나는 다시 튀어나올 것 같은 신음을 급하게 손으로 막았다. 레몬 향 특유의 생생한 향이 입 안으로 퍼졌다. 종아리까지 내려온 손은 이윽고 발목의 마디를 쓸었다. 그 애가 몸을 숙였는지 무릎 뒤로 색색 불어오는 숨이 살랑살랑 내 피부를 때렸다. 복숭아 뼈 근처를 만지작거리던 그 애의 손은 발등을 타고, 발가락 사이사이를 꼼꼼하게 문질렀다.
그때, 그 풀장에서 내 발을 쥐고 그 연한 살결 사이를 파고들었던 것처럼…….
손으로 입을 막고 있는 나는 욕실 벽에 다른 팔을 기대고 간신히 서 있었다. 숙인 내 시야에는 내 다리 사이로 그 애의 팔이 파고들어 발가락에 물을 쐬며 닦아 주는 게 보였다. 그러다 내 눈과 올려다보는 그 애의 눈이 마주쳤다. 습기로 젖은 푸른 눈이 발간 눈꼬리를 하고 웃었다.
“깨끗해. 가하.”
“…….”
“가하, 이제 좋아.”
그 눈이 참으로 맑고 맑아서,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