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그날 집에 가니 아주머니는 내게 말했다. 내게 동생이 생겼다고. 여자애라고 했다. 온전한 얼굴 한 번 보기 힘든 엄마는 병원에 있다 했고, 집에는 내 옆방의 새로운 방을 위한 가구를 나르는 아저씨들이 분주했다.
아직 얼굴도 모르는 동생. 새것의 냄새가 물씬 나는 방을 보던 나는 동생을 상상했다.
‘그 애는 뻐꾸기일까, 아니면 그냥 새일까.’
비정한 상상이지만 그랬다. 딱히 기대하던 동생도 아니었고, 내 좋음의 전부는 오늘 만난 그 애에게 전부 소속되어 있었으니까.
해가 바뀌었다고, 달라진 것은 없었다. 학교는 그대로였고, 반의 아이들은 작년 학년과 같은 애들이었으며, 자리도 첫 날 앉은 그대로 가고, 반 애들의 수도 딱 맞춘 듯이 30명이었다. 그저, 그 중에 그 애가 있을 뿐이었다.
그저 그런 것인데.
“가하.”
매일 아침 마다 만나는 그 파란 눈이 하루를 티 하나 없이 맑게 했다. 사실 제대로 말도 통하지 않는 우리지만 비어 있는 연습장에 매일매일 그림과 단어를 그리며 대화를 나눴다. 나는 전에 대호가 말한 것처럼, 그 애가 기분 나빠할지도 모른다는 조바심으로 통제하기 어려운 시선을 살짝 거두고 인사했다.
“안녕.”
‘주현아.’
나는 피했던 시선을 살며시 올려서 그 애를 보았다. 입 안에서 아끼고 아끼며 녹아들던 그 이름은 차마 내뱉을 수가 없었다. 그 애가 없을 때는 몇 번이고 입 안에서 굴려 보던 이름인데도 어쩐지 그 애랑 막상 마주하고 있으니 툭 툭 함부로 부를 수가 없었다.
나 같은 애가 부르기엔 너무 소중한 이름이었다.
“안녕, 가하.”
그 애는 내 이름을 아무렇지도 않게 불러서 나만 그런가 싶어 괜히 더 쑥스러웠다. 우리는 그날부터 자리도 같이, 짝도 같이, 점심도 같이, 도서관도 같이……. 하다못해 화장실도 같이 갔다. 그 나잇대 애들이라면 으레 같이 가고는 하지만 나는 어쩐지 신경이 쓰여서 늘 한 칸을 띄고 볼일을 봤다. 혹은 가끔은 같이 가서도 화장실 앞에만 서 있을 때도 있었다. 그냥, 뭔가 부끄러웠다.
그렇게 붙어 다니는 우리를 반 아이들은 가만히 두고 보지는 않았다. 소곤거리는 건 예사였다.
“쟤네 엄마 바람 핀대.”
“누구랑?”
“……랑.”
“주현이는 왜 저런 애랑 어울려?”
“맞아. 안 어울려.”
안 어울린다는 것은 나도 알았다. 그들이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그런 것은 내가 더 잘 알았다. 그렇지만 나도 원하는 것이 하나쯤은 있었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것들 사이에서 그거 하나만 욕심내는 게 나쁜 거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나는 뻐꾸기의 새끼니까. 남의 것을 차지하고 사는 게 내 삶이라고 하니, 더 바라지 않고 그 애 하나만, 차지하면 안 될까. 분에 넘치는 줄로는 알지만 대신 평생 다른 애들 하나 없이 살아도 될 것 같았다.
나를 향해 웃어 주는 그 눈과, 내 이름을 불러주는 그 입술만 있다면.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에 도서관에서 빌려 온 책을 펼치자 내 짝꿍 주현이가 내 어깨를 잡았다.
“가하.”
“응.”
“오늘, 있어? 시간?”
“시간?”
그 애와의 대화는 늘 짧은 단어로 시작한다. 시간.
“가자. 우리 집.”
그 애와 함께 하는 시간.
“밥, 먹자. 게임, 놀자. 응?”
멈췄으면 하는 시간.
“응.”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심 기뻐했다. 우리의 함께하는 시간이 학교에서만이 아니라 그 붉은 담벼락을 넘을 수 있다는 것에.
나는 손으로 전화기 모양을 만들어서 귀에다 대고 대답했다.
“엄마한테 전화하고. 전화, 엄마.”
“응!”
그것만으로도 그 애는 좋은지 고개를 붕붕 끄덕였다. 그 움직임에 봄 햇살에 반짝거리는 밀 빛 머리가 나풀거렸다. 공중전화기는 학교 정문 앞에 세워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반을 나섰다. 그런데 옆 반에 있어야 할 대호가 교실의 미닫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가하야.”
“대호야.”
대호는 내 옆에 있는 주현이를 힐끔 보더니 다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 시간 있으면 우리 집 갈래?”
“오늘?”
오늘은, 그 애가……. 나는 학기 첫날에 비해 또 키가 좀 더 커진 주현이의 얼굴을 슬쩍 보고,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나 친구 집 가.”
그러자 대호의 얼굴이 사납게 변했다.
“어디? 너, 친구 없잖아.”
“……주현이네.”
친구가 없긴 했다. 카르마 시스템 검사 결과 이후로 말을 거는 사람은, 주현이와 이렇게 가끔 오는 대호가 전부였으니까. 그렇다고 그런 소리를 듣는 것이 썩 좋은 건 아니었다.
그것도, 그 애의 앞에서……. 나는 괜히 침울하게 가라앉아서 대호를 피해서 학교 건물을 나섰다.
“어, 야! 유가하!”
대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나는 휙휙 스치는 푸른 나뭇잎들과 개나리, 진달래들이 섞인 풍경을 뛰었다. 내 눈은 오로지, 정문 근처에 있는 공중전화만 보였다.
“헉, 헉…….”
나는 터질 것 같은 폐를 손으로 누르면서 공중전화에 콜렉트 콜을 걸어서 집 전화번호를 눌렀다.
―가하니?
아주머니의 목소리에 나는 네,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안내원의 목소리와 함께 잠시 끊겼던 통화가 이어졌다.
―무슨 일 있니?
“아뇨……. 그건 아니고. 오늘 친구 집에서 놀다가……. 갈 거예요.”
―그래? 사모님에게 말해 둘게. 친구 이름이 어떻게 되니?
학교가 끝나면 엄마가 나를 늘 데리러 오기 때문에, 아주머니는 내게 그 애의 이름을 물어보았다. 주현이, 송주현……. 아주머니가 다시 나를 부를 때까지도 나는 한참을 말하지 못했다.
―가하야? 끊겼나?
“……주현이요. 송주현…….”
―송주현……. 알겠어! 재밌게 놀다 오렴. 너무 늦게까지 있지 말고.
말만 들으면 아주머니가 내 엄마 같았다. 오히려 ‘진짜’ 우리 엄마는 오늘 나를 데리러 오지 않아도 되니까 좋아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자기 모임의 사람들과 더 같이 있을 수 있으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수화기를 덜컥, 제자리에 걸었다. 교실로 돌아오자 쉬는 시간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유난히도, 교실이 조용했다. 그렇지만 내가 교실에 들어올 때는 늘 애들이 말없이 나를 쳐다보기만 했기 때문에 나는 그게 이상한지도 몰랐다. 수업이 다 끝나고, 내가 주현이를 따라서 가는 길에 얼굴에 푸른 멍이 물든 대호가 지나쳐 갈 때까지는……. 나는 대호의 다친 모습에 같이 걷고 있던 주현이의 옆을 지나쳤다.
“대호야.”
내 목소리에 대호의 등이 화들짝 놀랬다. 그리고 평소 같으면 내 이름을 부르면서 반갑게 뒤돌아 볼 애가 그러지 않았다. 대호가 메고 있는 가방 옆 주머니에는 리코더가 삐죽 나와 있었다. 나는 대호의 팔을 잡고 다시 불렀다.
“대호야, 얼굴 왜…….”
“손 대지마!”
대호가 눈에 물기가 어린 채로 내 손을 뿌리치며 나를 보았다. 큰 소리에 나는 몸이 얼어서 가만히 서 있었다. 도리어 맞은 손이 얼얼했다. 대호는 큰 눈망울에서 눈물을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씩씩대며 주먹으로 눈을 비볐다. 마주한 대호의 얼굴에는, 파란 멍이 두셋 정도 나 있었다. 그 몰골에 나는 어쩔 줄 몰랐다.
“이제 너 싫어. 나한테 오지 마…….”
그 말에 나는, 내가 무엇을 잘못했나 보다 싶어서 사과했다. 나를 싫어하던 애들이 결국 대호를 괴롭히고 말았던 걸까.
“미안해, 대호야…….”
“됐어. 나 갈 거야. 이제부터 말 걸지 마…….”
그렇게 대호는 가 버렸고, 우두커니 있는 나에게 주현이가 왔다.
“가하.”
“주현아…….”
내 말을 들은 주현이의 입술이 작게 올라갔다. 그리고는 대호가 뿌리쳤던 내 손을 잡아서 살살 쓰다듬었다.
“응. 나, 이름. 주현.”
대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혼란스러운 가운데 내 손을 잡고 있는 주현이의 손에서 붉은 빛이 났다.
“내, 이름. 다시.”
언젠가 학교에서 보여 주었던 가이드의 가이딩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에스퍼가 힘을 쓸 수 있게 채워 주는 가이드의 조력, 가이딩.
손등을 타고 흐르는 붉은 힘이 내 팔을 타고 왼쪽 심장으로 흘러들어 갔다. 그 간질거림이 결국 내 목을 타고 뱉어내었다.
“주현…….”
“착해. 가하.”
주현이는 그렇게 말하면서 내 손에 자신의 입술을 살짝 대었다.
“착해.”
언제 한 번 아주머니가 사 온 마쉬멜로우처럼 말랑하고 보들거리는, 그런 감촉이 손등을 스쳤다. 가이딩의 힘인지, 대호의 뿌리침으로 발갛게 조금 부어올랐던 손등은 가라 앉아 있었다. 어색함에 손을 빼려는 힘은 내 손을 꼭 붙잡는 주현이의 힘에 가로막혔다.
“가하, 가자. 우리 집.”
우리를 태우고 가는 차는, 처음 보는 차였다. 아침 등교 길에 웬만한 차는 다 보았다고 생각했는데, 차 얼굴에 생소한 은색 모형을 단 이런 차는 본 적이 없었다. 우리가 그 차를 향해 걸어가자 운전석 쪽에서 서 있던, 각이 잘 잡힌 모자와 정장을 입은 기사 아저씨가 문을 열어서 우리를 태워 주었다. 조수석에는 안경을 쓴 남자가 나와서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도련님, 친구 분이신가요?”
“가하, 친구.”
“처음 뵙겠습니다. 주현 도련님 비서 박태윤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유가하입니다.”
그 모습에 나도 덩달아 가방이 흘러내리도록 인사를 했다. 그러자 비서가 작게 웃었다. 주현이도 마찬가지로 웃었다.
“가하, 귀여워.”
“…….”
나는 그게 조금 부끄러워서 딴청을 부리면서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나와 주현이는 평범한 차보다 너른 뒷좌석에 앉아서 소리 없이 부드럽게 흘러가는 풍경을 보았다. 그러다가 주현이가 내 옆에 바싹 와서는 내 어깨 위, 차 문 옆에 있는 안전벨트를 죽 당겨서 내 엉덩이 맡에 있는 고정대에 찰칵하고 채웠다.
“안전. 가하.”
어른을 위한 안전벨트의 높이라 그런지 그게 조금 답답했다. 나는 안전벨트의 줄을 죽죽 잡아당기며 나를 꼼짝없이 고정시키는 걸 늘려 보려고 나름 애를 썼다. 그러자 옆에서 안전벨트를 맨 주현이가 내 손에서 안전벨트를 빼서 되돌렸다. 단호한 표정을 지으면서.
“안 돼. 가하.”
“답답한데…….”
“안 돼. 가하, 나빠.”
나는 그 애에게 나쁘고 싶지 않았다. 착하고 싶었다.
계속. 언제나.
그래서 결국 나는 그 푹신한 뒷좌석에 꼼짝달싹도 못하게 고정된 채로 갔다. 다시 내가 안전벨트를 잡아당길까 감시하는 주현이가 내 오른손을 꼭 잡고서, 그렇게 갔다. 푹신하고, 차 안에서 따뜻하게 나오는 히터바람, 그리고 엉덩이부터 등까지 따끈하게 데우는 열감에 나는 어느새 잠이 들었던 것 같다. 귓가 가까이서, 간질이 듯이 사륵사륵 부는 속삭임에 눈이 뜨여졌으니까.
‘……. 하. 가하, 가하…….’
“응…….”
눈을 뜨니 그 애의 파란 눈은 서로의 입술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깜빡거리며 나를 담고 있었다. 붉은 입술이 오물거리며 내 이름을 불렀다.
“가하. 우리 집.”
입술 옆에서 닿을 듯 말 듯 불어오는 입의 열기가 사근하게 도착지를 알렸다.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면서 유난히 붙어오는 주현이의 몸을 살짝 밀었다.
“으, 으응, 잠시만…….”
우리 교복 마이 자락이 스치면서, 잠시 떨어졌던 볼 옆의 열기가 잠시 내려앉았다. 나는 잠결에 취해서 나비의 날갯짓과 같이 가벼운 무게를 가진 그 열기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주현이가 나를 향해서 배시시 웃었다.
“환영해. 가하.”
그 애의 웃는 입술이 유난히 반들거린다고 생각했다. 마치, 잘 코팅된 사탕처럼, 내가 뒤늦게 손으로 더듬는 볼 옆의 흔적처럼. 그런 것을 두고 박 비서는 우리가 있는 뒷좌석으로 고개를 돌리고선 신기하다는 눈초리를 보냈다.
“주현 도련님이 가하 도련님을 굉장히 맘에 들어 하시네요. 무척 까다로우신 분이신데…….”
“그러게요. 요즘 기분이 좋으신가 했더니…….”
기사도 나를 백미러로 흘끗 쳐다보며 눈을 휘었다.
“잘 지내 주세요.”
나와 주현이는 기사 아저씨가 열어 주는 차에서 내려서 커다란 대문 앞에 섰다. 마치 언젠가 학교에서 갔던 한옥 마을처럼, 회색 돌이 쌓인 끝이 안 보이는 담벼락에는 까만 기왓장이 촘촘히 드리워져 있었다. 마치 조선시대로 시간을 거슬러 온 기분에 나는 발을 옮길 생각도 없이 그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주현이가 내 손을 잡고 이끌었다.
“가자. 가하.”
“응? 아…….”
나는 트렁크에 넣은 책가방을 생각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내 마음을 읽은 것인지 박 비서가 자연스럽게 나를 문으로 안내했다.
“가방은 제가 챙겨 가겠습니다.”
그렇게 그 애의 손을 잡고서. 나는 그 집의 문턱을 넘었다. 그때는 신기한 모습을 가진 집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친구와 함께 있다는 것에 그저 좋고, 들떠 있었던 거 같다.
문턱을 넘자마자 밟히는 것은 잘게 부서진 하얀 자갈들이었다. 나와 주현이가 걷는 걸음 하나하나에 부딪치며 차르륵 차르륵 소리를 내었다. 그게 조금 신기했다. 발이 부딪치는 소리에 나는 부러 발을 살살 끌면서 소리를 내었다. 그걸 보고 주현이는 소리 없이 웃었다.
“정원.”
봄날의 햇빛을 타고 파란 잎사귀들 모양대로 그림자를 얼굴에 드리운 주현이가, 물 흐르는 소리가 나는 한쪽에 위치한 커다란 연못을 가리켰다.
그 애의 뒤로 파아란 소나무가 구불구불 자리 잡고, 누군가가 가꾸어 줄게 분명한 파란 단풍나무와 향나무, 이름 모를 둥근 이파리 나무들, 우리 허리만큼 오는 앉은뱅이 정원수가 동그랗게 모양을 잡아 아름드리 심어져 있었다.
“응……. 예쁘다.”
‘우리 집 마당은 흙 반, 잡초가 우거진 잔디 반인데.’
엄마는 내가 원하면 강아지를 키워도 된다고 했지만, 그 낯선 둥지에 강아지를 데려오고 싶지 않아서 마당은 아직도 텅텅 빈 채로 남아 있었다.
이렇게 가득 찬 게 아니라.
“가하, 더 예뻐.”
“아냐.”
나의 뻔한 칭찬에 그 애는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더 예쁘다고. 정작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훨씬 더 예쁘다는 것을 알고나 있을까? 나는 그 파란 눈앞에서 작아져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주현이가 아까 안전벨트를 말할 때처럼 또 단호하게 말했다.
“진짜. 가하, 예뻐.”
“……네가 더 예뻐.”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말했다. 그러자 주현이의 눈이 정원에 있던 연못처럼 동그랗게 변했다.
“내가?”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주현이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픽, 웃었다. 그 순간에 정원에 드리워진 길 사이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곱게 차려입은 그 여자는 앞치마를 메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나는 자동적으로 그 사람이 주현이의 엄마일거라고 생각했다.
“주현 도련님, 친구 분이랑 오셨네요.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엄마가 아들을 도련님이라 부르지 않을 것이니, 나는 그 여자는 우리 집의 아주머니와 같이 일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주현이는 내 손을 잡지 않은 손에서 주먹에서 검지와 중지를 펼치고 말했다.
“갈래. 두 번째 집.”
“어르신한테 연락 안하시고요?”
“나중에.”
“도련님 친구 분 오셨다고 전해 드릴게요.”
“응.”
그 애의 부모님도 바쁜 모양이었다. 우리 부모님처럼. 그러고는 나는 주현이의 잡은 손을 잡고 계속 이어지는 자갈길을 걸었다. 크고 말끔하게 회칠이 된 3층 집은 우리의 도착지가 아니었는지 사박사박 젖어드는 급한 발걸음이 지나쳤다. 무성하게 드리워진 나무들을 멀리멀리 헤치며 지나고 나서야 작은 펜스 앞에 도달할 수 있었다.
주현이는 그 펜스의 걸쇠를 안쪽에서 툭, 열어서 나를 이끌었다. 우리가 들어가는 2층 집은 아까 전에 보았던 큰 집에 비해 좀 더 아담하고, 나무로 지어져 있었다. 정원 어디서든 보이던 아까 3층 큰 집에 비해, 이 집은 주변의 정원수들이 가려서 이렇게 가까이 가지 않으면 있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주현이는 그 집을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 집.”
“아……. 응. 멋있다. 크네.”
“멋있어? 커? 나도?”
“어? 어……. 응.”
내 대답에 주현이의 두 입 꼬리가 반짝 올라갔다. 그러고는 집의 입구로 보이는 문으로 나를 이끌었다. 입구로 가자 주현이가 반듯한 돌 위에 신발을 벗었다. 나도 내 하얀 운동화를 벗어서 그 옆에 두었다.
‘여기가 현관인가?’
그리고 주현이를 따라 마룻바닥에 양말 신은 발을 올렸다.
삐걱.
가볍게 마룻바닥을 밟았을 뿐인데 아스라한 소리가 울려서 나는 바로 뒷꿈치를 올렸다. 마치, 내가 발을 딛는 것만으로도 이 마룻바닥을 부술 것 같았다. 그렇지만 주현이는 신경 쓰지 않는지 터벅터벅 걸으며 나를 잡은 손을 당겼다. 삐걱삐걱, 끼익끼익, 하고 낡은 것 특유의 소리가 우리 발걸음을 따라 계속되었다.
마룻바닥이 난 긴 복도를 죽 걷는 동안 나는 이 낯선 집의 내부를 보았다. 기둥도, 천장도 온통 나무로 된 집은 벽지가 굉장히 화려했다. 누구의 취향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두운 색의 벽지 위로 식물의 복잡한 패턴이 반복해서 찍혀 있었다. 그윽한 색의 나무로 지어서 그런가 아니면 어두운 색의 벽지 때문인가, 환한 대낮에도 실내는 제법 어두웠다. 그 때문인지 간간히 지나치는 기둥에 램프가 설치되어 있고, 천장에는 노오란 전등이 내리워져 있었다. 그 램프 밑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보다가 나는 몸이 돌아가는 힘에 옆을 보던 고개를 도로 앞으로 향했다.
길게 뻗은 마룻바닥 복도와 바깥 정원의 경계선을 따라 죽, 격자무늬로 짜이고 그 사이에 유리가 끼워진 덧문이 드리워져 있었다. 덧문의 너머로는 아무도 없는 푸르른 정원이 소담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아까 입구에서 보았던 것 보다는 작지만, 나에게는 이 작은 정원이 오히려 더 정감가고 좋았다.
그 마루의 중앙 즈음에 선 주현이는 한쪽 손으로 마찬가지로 격자무늬인, 그렇지만 한지가 발라진 미닫이문을 열었다. 그러자 마치 작은 선물 박스를 여는 것처럼, 넓고 네모난 방이 보였다. 방 안에는 집과 같이 나이를 먹은 듯 고풍스러운 가구들이 보였다. 붉은 카펫이 깔려 있고, 책상, 침대, 책장, 작은 소파와 테이블, 피아노…….
‘이건 거울인가?’
내가 이국적인 방 안을 구경하는 동안 주현이는 방 안을 가리켰다.
“내 방.”
자신 있게 문을 여는 게 아무리 봐도 주현이 방일 것 같았다. 나는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주현이는 나를 자신의 방으로 끌어당겨서 나를 세워 두고, 책상 옆에 있는 벽 같은 문을 밀었다. 미닫이문과 마찬가지로 하얀 한지가 발라진 그 벽 문 안에는 주현이 것이 분명할 보드게임과 게임기, 장난감 따위들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다. 거기서 그 애는 한 박스를 꺼내서 카펫이 깔린 바닥에 내려놓았다. 나도 그 앞에 앉았다. 주현이는 우리 사이에 빳빳하고 네모난 맵을 펼쳤다.
“이거, 모노폴리.”
“응.”
나는 ‘모노폴리’가 뭔지 몰랐지만, 그냥 그 애가 말하는 것을 들으며 열심히 주사위를 굴리고, 카드를 집고, 가짜로 만들어진 달러를 내고, 웃고, 실망하고, 머리를 굴리고, 시간을 보냈다.
시간.
그 애와 내가 함께하던 그 시간.
그게 좋아서, 나는 기꺼이 계속해서 주사위를 굴렸다. 얼마나 지고 이겼는지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그 애와 내가 같이 있었다는 거. 그거 하나면 더 이상 바랄게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