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33/35)

거짓말!

장석민은 버럭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장석민은 종이에 사인을 하지 않았다. 그저 알레이야는 아니다, 라는 한 줄만 적어뒀을 뿐.

자신 때문에 자하르가 알레이야와 억지로 결혼을 하게 된 것이 미안해서 마지막으로 놓고 온 선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파혼소식이 들려오지 않아 그럭저럭 합을 맞추어 결혼하기로 했구나, 하고 체념 중이었다.

「사인 하나로 속단할 수는 없다.」

「그건 비르마 선생님께서 증명해주실 겁니다.」

「비르마 선생이?」

무크라르 왕의 눈빛이 흔들렸다. 비르마라면 왕궁 내에서도 대쪽같이 깐깐하기로 소문난 노인네였다. 권력이나 재물에 흔들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타르카 왕국의 모든 사람이 알 정도였다.

「비르마 선생이 그걸 어떻게 증명한단 말인가?」

「쟝이 비르마 선생에게 경전을 베껴 써서 제출한 종이와 이 종이에 적힌 필적이 동일합니다. 필적뿐만 아니라 점을 잘못 찍는 위치까지 같습니다. 그것이 쟝이 남긴 사인입니다.」

장석민은 눈을 감았다. 자신이라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일부러 짧은 아랍어로 알레이야의 이름을 쓴 것이. 발목을 잡은 것이다.

무크라르 왕의 수염이 파들파들 떨렸다. 아직 장석민을 정식 후궁으로 입궁시키지 않았지만 이미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터였다. 그걸 다시 자하르에게 돌려준다는 것은 그의 자존심상 허락치 않았다.

「후궁은, ──다른 사람의 후궁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

자신이 한 번 뒤집은 것이지만, 무크라르 국왕은 그 말을 뱉을 수밖에 없다.

「전하는 남색에 대한 취향이 없지 않습니까. 전하의 취향은 아래에 털도 돋지 않은 어린 계집이 아니던가요.」

장석민은 물론이고 무크라르 왕의 얼굴에도 경악의 빛이 차올랐다.

「네놈이 감히…….」

「그런 거라면 쟝에게는 당연히 손을 대지 않으셨겠지요.」

자하르의 시선이 스치는 부분을, 장석민은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혹시,──쟝에게 손을 대신 거라면,」

자하르가 입술을 사리물었다. 눈빛이 섬뜩하게 빛나는 기세에, 무크라르 왕은 저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저것은 지금까지 그가 알고 있던 아들, 자하르가 아니었다.

「──쟝이 아직 순결한 몸이길, 간절히 기원하겠습니다.」

자하르가 손을 제 심장에 얹어 공손한 바람을 표했지만 눈빛은 금방이라도 상대의 목줄기를 물어뜯을 것같이 흉흉하게 빛났다. 성인의 가면을 던져버린 아들과 마주한 무크라르 왕은 침중한 낯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가 침묵을 지키는 사이, 천지를 뒤흔드는 폭발음이 울렸다. 벙커안이 흔들리며 한 점에 수만 달러짜리 도자기들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장석민의 얼굴에 점점 불안한 기색이 떠올랐다. 이대로 재수없게, 무크라르 왕과 같이 이곳에서 생매장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나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흔들리고 있는 벙커가 이대로는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세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무크라르 왕도 갑작스러운 공습에 가장 안전한 벙커로 들어온 것이지 완전한 안전을 보장해주는 곳은 아니었다.

「자하르 왕자님…….」

장석민이 다시 자하르를 불렀다. 자하르가 장석민의 손을 가볍게 두번 두드렸다. 그의 시선을 창백한 얼굴로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향한 채였다. 팽팽한 줄다리기 중이었다. 그러나 지금 승기를 쥐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두 사람 모두 모를 리 없다.

「네가 원하는 것이 그 둘인가?」

무크라르 왕의 입에서 항복과도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아사드에게 들여오기로 한 차관이 내일까지 해결되지 않으면 NUAE에서 제제가 들어올 것입니다.」

아무리 땅속에 석유와 다이아몬드가 쌓여 있어도 파내지 않고 팔리지 않으면 무용지물이었다. 공교롭게도 현재 타르카 왕국에 발생한 사건들은 이런 중요한 돈 줄기 흐름을 모두 막아버린 상태였다. 일시적인 문제로 시간을 두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지만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기에 채무불이행 상태가 계속되면 국가 신용에 큰 손해를 가져올 수 있었다.

자하르는 지금 무크라르 왕에게 기한을 제시한 것이다.

「……내일까지.」

「오늘 중이면 더 좋을 테지요.」

낮게 읊조리는 목소리가 협상 테이블을 두드린다. 무크라르 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짧은 통화를 마친 무크라르 왕이 고개를 돌렸다. 

「나단은 건강이 악화되어 공식적으로 모든 업무를 그만두고 마고스의 섬에서 휴양을 해야 할 것이다.」

「공식적으로는──, 그렇게 되겠군요.」

눈을 가늘게 뜨고 속삭이는 듯한 자하르의 말투에 무크라르 왕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저 악마 같은 놈이, 대체 어디에 있다가 나타난 것인지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네가 지금 이런 일을 벌이고도 무사할 것이라 생각하느냐.」

「국정이 이토록 혼란한데 제 한 몸 건사하는 것이 중요하겠습니까.」

죽어도 그냥 죽지는 않겠다는 협박이었다. 무크라르 왕이 입술을 부들부들 떨며 자하르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리고 뭔가 착오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자하르가 한 손을 가슴에 얹은 채 말을 이었다.

「저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

「위대하신 무크라르 전하께서 복권해주신다면 일의 수습을 위해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무크라르 왕의 눈에서 광선이 나올 것 같다고, 장석민은 생각했다.

그의 두꺼운 턱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렸다. 자하르는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네놈이, …….」

무크라르 왕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무크라르 왕의 낯빛이 창백하게 변했다.

「벨이 울립니다.」

자하르가 말했다. 날카로운 전화벨소리가 공기를 찢을 것처럼 울리고 있었다. 끔찍한 일이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알려주기라도 하는 듯이, 벨소리는 끈질기게 울렸다.

자하르의 눈이 담담하게 무크라르 왕을 직시했다. 잠시 멈췄던 전화벨이 다시 울리기 시작하자, 무크라르 왕이 발작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알겠다. 네 말대로 할 테니, 지금 당장 모든 일에 참여해서 국정의 정상화를 도와라.」

「전하의 관대하신 마음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자하르가 진심을 다해 머릴 숙이며 감사했다. 누군가 본다면 눈물을 흘릴 만큼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다, 당장 나가! 당장 나가서 이 테러부터 멈추어라, 당장!」

무크라르 왕이 말을 하는 중에도 폭탄이 터져 책상이 흔들렸다. 자하르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전하, 저는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이 테러와 아무런 연관도 없습니다.」

「──!」

「배후가 누구인지 밝히는 데에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 」

자하르가 장석민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결혼을 승낙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방에 있던 사람 중 평연한 얼굴을 할 수 있는 것은, 자하르뿐이었다.

「부디, 전하의 강녕함을 바랍니다.」

자하르의 인사를 마지막으로 무크라르 왕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장석민은 자하르의 손에 이끌려 벙커 밖으로 걸어 나왔다.

「미쳤습니까?」

나오자마자 장석민은 참고 있던 말을 내뱉었다.

「지금 저렇게, 국왕 앞에서 그렇게 드러운 성질을 다 보이면, ……게다가 협박한 거죠?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협박한 거 맞죠?」

벙커 안에서 장석민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자하르와 무크라르 왕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분위기가 험악해질수록 손끝이 싸늘하게 굳었다. 자하르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지만 무크라르 왕의 얼굴을 봐선 좋지 않은 말이 오갔음이 분명했다.

「그렇게 협박하면, 나중에 목이 잘리면 어쩌려고……, 게다가 결혼은 또 뭐고……, 으아아, 나 진짜 돌겠네. 왕자님 진짜 미쳤습니까?」

자하르가 장석민을 돌아보며 담담히 말했다.

「미친 거 같긴 하군요.」

「…….」

자하르의 등 뒤로 불길이 치솟고 있는 광경이 보인다. 사람들의 비명이 터지고 여기저기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가운데 자하르의 주변으로만 시간이 다르게 흐르고 있는 느낌이었다.

「오늘의 일로 타르카 왕국은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얻을 겁니다.」

「…….」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되는 정치적 불안도 대두되겠지요. 여러모로 곤란한 상황이 지속될 겁니다. 당분간 저는 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바빠질 것 같습니다.」

장석민은 자하르가 일부러 이런저런 위험을 모조리 끌어왔음을 짐작했다. 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자하르일 게 분명했다.

「……후계자에서 완전히 밀려나시는 거 아닙니까.」

아무리 그래도 후계자를 정하는 것은 왕이었다. 왕과 대놓고 줄다리기를 했는데 자하르가 후계자가 될 수 있을 리 없다.

「일단은, 그렇겠지요.」

모든 것을 예상했다는 듯이 자하르가 대꾸했다.

「……. ……계속 바라셨던 일이잖아요.」

장석민의 말에 자하르가 짧게 웃음을 삼켰다.

「바라던 일은 아닙니다. 당연히 그렇게 될 일이라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제가 바라는 일은,──.」

자하르의 시선이 두려움으로 가득한 까만 눈동자를 더듬는다.

그날 눈을 떴을 때 장석민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자하르는 머리끝까지 분노가 치밀었다. 장석민이 자신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제 발로 본궁으로 걸어 들어갔음을 안 것이다. 당장이라도 본궁으로 가서 장석민을 끌고 오고 싶은 것을 참느라 미칠 것만 같았다. 그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행위인지 끊임없이 되뇌며 마음을 다잡았다. 끔찍한 사실은 장석민 덕분에 그가 목숨을 부지했고 일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는 것이다. 미친 듯이 일에 매달렸다. 요 며칠은 침대에 누워 십분 이상 눈을 감은 기억도 없다. 감정을 억누르고 다루는 데 재능이 있는 성격이라 그나마 다행이라 여겼다. 조금씩, 무크라르 왕이 눈치채지 않을 정도로 그의 왕자를 무너트릴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오늘 복도에서 장석민을 마주친 것이다.

감정은 이성을 토막토막 끊어냈다.

그간 계획했던 모든 일을, 오늘 하루 고스란히 쏟아냈다. 길게는 서너달에 걸쳐 벌어졌어야 할 일이 하루밤새 일어난 것이다. 이것이 타르카 왕국은 물론이고 자신에게도 얼마나 큰 손해로 다가올지, 누구보다 자하르는 잘 알고 있었다.

자하르는 눈을 감았다 떴다.

「쟝이 복도 청소를 하는 일은, 보고 싶지 않다는 겁니다.」

「……, ……지금 그것 때문에 이걸 다…….」

「그뿐입니다.」

쾅, 하고 지척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자하르가 장석민의 손을 잡아채어 정원의 안쪽으로 걸어갔다.

「왕자님, 아무리 그래도, 이건──.」

지나치지 않느냐는 말을 하려 했다. 자하르가 장석민의 몸을 바특이 끌어안지 않았다면.

「──! 누가,…….」

자하르가 장석민을 끌어안은 채로 기둥 안쪽으로 몸을 돌렸다. 기둥으로 가린 장석민의 얼굴은 자하르를 제외하고 누구도 볼 수 없었다. 그래도 장석민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 자하르를 밀어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단단하게 자신의 몸을 끌어안는 손을, 도저히 밀어낼 수 없었다.

장석민은 위로 올렸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잘했어요.」

그 기척을 읽은 자하르가 속삭였다.

「밀어냈으면, ──죽였을지도 모릅니다.」

한 치의 틈도 없이 장석민을 바싹 끌어안으며 자하르가 말을 이었다.

「지금은 얌전하게 내게 안겨있어요.」

자신이 복도를 청소하는 모습이 보기 싫다며 수도에 공습경보를 울리게 한 미친놈이었다. 정상이 아니었다. 사방에 불이 치솟고 폭탄이 터지는데도 낯빛 하나 변하지 않는 놈이었다.

그런데도, 그럼에도, 장석민은 자신을 끌어안은 남자의 온기에 안도하고 만다. 자하르가 자신의 옆에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장석민이 고개를 들어 자하르를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여기저기에서 치솟는 불길 때문인지 얼굴에 뜨끈하게 열이 올랐다. 자하르의 손가락이 장석민의 입술을 쓸어내렸다. 손가락이 입술에서 떨어지는 순간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서로에게 달려들어 입을 맞추었다.

점막을 뜨거운 혀가 더듬었다. 정신없이 몰아쳤다. 폭탄소리보다 입안에서 울리는 질척거리는 소리와 숨소리에 온신경이 쓰였다. 뜨거운 피가 온몸을 내달렸다. 그간 숱하게 나누었던 키스의 감각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느낌이었다. 부드러운 혀가 자신의 혀를 옭아매며 움직일 때마다, 잔등에 오싹한 소름이 돋았다. 미칠 것 같았다. 심장이 타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장석민은 자하르의 옷자락을 움켜쥐고 밭은 숨을 내쉬었다. 벌어진 입술에서 새어나오는 숨결마저 집어삼킬 듯이, 남자는 거칠게 입술을 문질렀다.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칠 무렵, 자하르가 장석민의 몸을 떼어냈다.

「……?」

「죄송합니다.」

「네?」

갑작스러운 그의 사과에 장석민의 머릿속에는 오만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막상 일을 벌이고 나니 후회가 드나? 내가 싫어졌나? 남자 러마디와 염문이 나는 것이 꺼려지나? 키스하고 나니 별로인가?

「아무래도 위험할 것 같습니다.」

「뭐가, ……, ──!」

본궁의 탑이 무너지고 있는 것을 본 장석민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자하르가 애매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워낙 가격한 세력이라 보통은 누구도 저들과 손을 잡을 생각을 하지 않는데──.」

뒷말에 숨겨진 뜻을 읽은 장석민의 얼굴에 우울함으로 가득하다. 그런 미친자들에게 돈을 대줘서 자기 나라에 폭격을 퍼붓게 만든 왕자가, 그러니까 나랑 결혼하게 됐다는 거지?

「갈까요.」

자하르가 장석민의 손을 잡았다.

「어디로요?」

「내기를 끝내러.」

그렇게 말하는 자하르의 눈이 길게 웃었다.

치솟는 불기둥을 배경으로 장석민은, 생각했다.

내 운이 이미 다한 것이 분명하다고.

굉음과 폭음의 사이에서 장석민은 자하르가 웃음을 삼키는 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모두 준비해두었습니다.」

「바로 이륙할 수 있도록 일러둬라.」

라겔이 다시 달려가는 것을 보고 장석민은 의아한 얼굴로 자하르를 돌아보았다.

「뭐예요? 이건.」

「약속드렸던 전용기입니다.」

「……이걸 왜. …….」

커다랗게 벌어진 장석민의 눈이 자하르에게 연유를 묻고 있었다.

「쟝을 데리고 나오는 데에, 무리를 한 건 사실입니다.」

「…….」

「당분간은 벌인 일을 수습하느라 정신없을 겁니다. 그 동안 쟝의 안전을 제가 보장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평연하게 말을 하고 있지만 현재의 상황이 보통 심각하지는 않을 거라고, 장석민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오늘의 일은 자하르가 제 살을 깎아서 만든 판이었다.

「……, ……. 괜찮으십니까?」

장석민의 물음에 자하르가 선선히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요.」

「…….」

역시 이놈은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방법을 모르는 게 분명하다.

「괜찮지 않습니다. 당연히.」

자하르의 손이 장석민의 뺨을 감싸 쥐었다.

「지금도 쟝의 다리를 벌릴 생각으로 가득한데, 괜찮을 리가 있겠습니까.」

「…….」

자하르의 손가락이 장난스럽게 장석민의 뺨을 톡톡, 두드렸다.

「가세요.」

짧은 한다미데 장석민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자신을 데리고 나오겠다고 궁에 불 지르고 폭탄 터트리고 지랄이란 지랄은 다 해놓고 나왔으면서, 지금 딸랑 한다는 말이, 가세요?

「……더 하실 말씀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자하르가 단호하게 답했다. 저쪽에서 라겔이 손을 흔들며 준비가 끝났음을 알리고 있었다.

「……더 하실 말씀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자하르가 단호하게 답했다. 저쪽에서 라겔이 손을 흔들며 준비가 끝났음을 알리고 있었다.

「…정말 없습니까?」

「네.」

장석민은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이대로 헤어질 수는 없다고 생각만 들었다. 멋진 말이든, 기억에 남는 말이든, ……뭐라도 해야 하는데 예상치 못한 갑작스런 출국에 머릿속이 텅 비어버렸다.

「시간 없습니다.」

자하르가 시계를 흘끔 보며 말했다. 궁에서 빠져나오기 전에 거세게 끌어안고 나누었던 입맞춤이 아득한 꿈속의 일인 것처럼, 자하르의 태도는 냉정하기 그지없었다.

「……왜, 그렇게 사람이, …….」

장석민은 입술을 물었다 놓으며 말을 이었다. 볼썽사납게 다 큰 남자가 울면서 작별 인사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왜 그렇게 냉정합니까.」

「──.」

「이렇게 가면 언제 볼지, ……못 볼지도 모르는데, ……인사도 제대로 안 하고, 그냥 이렇게 가면…….」

자하르가 고개를 슬쩍 아래로 떨구었다가, 입을 열었다.

「냉정한 사실을 하나 말씀드릴까요.」

「…….」

「지금 저는 아직도 쟝을 보내지 말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자하르가 눈을 감았다 뜨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이대로 그냥 평생 제 옆에 두고 가두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밤마다 그 좁은 구멍에 내 성기를 박아 넣고, 배가 터질 때까지 정액을 싸버리고 싶습니다. 지금도 당신을 저 화장실로 끌고 가 속옷을 끌어내리고 선 채로 범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선정적인 말을 늘어놓으면서도 그의 얼굴은 평온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장석민은 자신의 얼굴을 찌를 듯이 쏘아보고 있는 시선에서, 자하르의 욕망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게 냉정한 제 현실입니다.」

「…….」

「지금 쟝과는 악수도 나누지 않을 겁니다. 손끝 하나 닿지 않을 생각입니다. 부디, 안녕히 가십시오.」

자하르가 고개를 숙였다.

그 반듯한 인사에 장석민은 울컥, 뜨거운 것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믿을 수 없게도 그런 그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자하르가 제 살을 베어 만들어 준 기회를 다시 놓게 할 수 없었다. 장석민이 울음을 삼키며 조그만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끝나면, ……, ──.」

「──.」

「일이 마무리 된다면, 그때는, ……, …….」

울먹거리는 목소리에 자하르의 입가가 얼핏 풀렸다.

「잊고 계신 것이 있군요.」

「네?」

「쟝은 저와 혼인을 약속한 몸입니다.」

「──! 거, 꺼내오려고 그냥 한 말이 아닙니까?」

자하르가 선선한 눈웃음을 진 채 당연히 아닙니다, 하고 대꾸했다.

「타르카에서는 남편을 둔 부인이 바람을 피우면 죽을 때까지 돌팔매질 합니다.」

「누가 부인……, 잠깐, 그쪽은 그럼 바람을 피워도 되는 겁니까?」

억울함에 나왔던 눈물이 쏙 들어갔다.

「그럴 리가요.」

자하르가 손을 자신의 가슴에 얹은 채로 말을 이었다.

「저는 정절을 중요시 여기는 사람이라.」

「──!」

거짓말! 이 새빨간 거짓말쟁이가!

라겔이 저 멀리서 준비가 끝났다고 재촉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하르가 장석민에게 눈짓했다.

「이제는 정말 가셔야 할 시간입니다.」

장석민이 시근덕거리며 자하르를 노려보았다. 여자, 남자 가리지 않는 놈이 자신이 업을 때, 정절을 지킬 리가 있겠는가. 자하르가 다른 사람과 뒹굴고 있는 모습을 떠올리자 배알이 뒤틀리고 속에서 천불이 났다. 바람을 피우면 너를 돌로 쳐 죽일 거라는 놈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는 사실이 분했다.

「그럼, 이만.」

통로 안까지 들어오지도 않고 자하르는 걸음을 멈추었다. 장석민이 시근덕거리며 안녕히 계시라는 인사를 했다.

「쟝.」

자하르가 장석민을 불렀다.

「……네.」

자하르가 허리를 숙여 뭔가를 속삭였다. 장석민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모습을 본 라겔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정확히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알 수없어도 자하르 왕자가 대단히 슬픈 말을 한 게 분명하다고 라겔은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장석민이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눈을 하고 입술을 짓씹어 삼킬 듯이 깨문 채로, 자하르 왕자를 쳐다볼 리가 없을 테니.

「그날을 즐거이 기다리시면 됩니다.」

「그걸 내가 왜 마셔……, ……, 됐어요. 그건 그때 얘기해요.」

짐을 들고 걸어가려던 장석민이 문득 고개를 돌렸다.

「왕자님. 그거 아십니까?」

「……?」

「그 새가 주인에게 돌아가지 않고 머리 위를 맴도는 이유 말입니다.」

레이룬에 관한 이야기였다. 자하르가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기울였다. 장석민이 눈을 치뜬 채로 말을 이었다.

「새의 성격도 문제지만, 제가 봤을 때는 주인 성격에도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확실히.」

「그러니까 성격은 교정이 안 되니, ──확 다리를 분질러서 앉히는 게 나을 거란 말씀이죠?」

장석민이 화다닷 고개를 숙이고 통로 안으로 달려갔다.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한 번 더 고개를 숙인 후에 사라지는 모습을, 자하르는 말없이 서서 지켜보았다.

「왕자님, 시간이 됐습니다.」

라겔이 넌지시 그를 재촉했지만 자하르는 비행기가 이륙하는 활주로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흰색 비행기가 날개를 펼치고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자하르는 한 번도 시선을 떼지 않고 줄곧 바라보았다.

주인의 손에서 떠나간 새가 하늘 끝자락으로, 사라졌다.

"어머. 눈이 오네?"

"진짜? 왠일이야. 차 막히겠다. 오늘은 대표님이 특별히 칼퇴근시켜준다고 했는데 이게 뭐야."

"눈 오는 거 보고 차 막힐 걱정부터 하다니, 김 변은 너무 무드가 없다. 그러니까 애인도 없지."

"이 변호사님 걱정부터 하시죠. 장 변은 퇴근 안해요?"

코트를 챙겨들던 여자의 물음에 장석민이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네?"

"퇴근 안 하시냐고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어요?"

장석민이 놀라서 벽에 걸린 시계를 보더니 허허, 하고 웃었다.

"장 변호사님은 요즘 정신이 아예 나간 거 같아. 주말인데 오늘은 누구 안 만나요?"

장석민이 글쎄요, 하고 대꾸했다.

"저는 정리할 일이 좀 남아서 서류 좀 마저 보고 갈게요."

장석민답지 않은 발언에 사람들이 다 정색을 하며 그를 돌아보았다.

"주말에 서류를 보겠다고? 크리스마스이브를 앞둔 주말에?"

"장 변, 왜 그래. 왜 그렇게 변했어."

"그 중동 무슨 나라의 공주님 하고 이뤄지지 않은 사랑 때문에 그래?"

그렇게 말한 장본인을 옆에서 옆구리를 찌르고 난리치는 것이, 장석민의 눈에 고스란히 들어왔다.

"아니요. 일이 좀 쌓여서 그래요. 안 그래도 대표님한테 찍혀서 월급도 못 받게 생겼는데."

"대표님이 월급은 안 주셔도 용돈은 주시겠지."

"……요즘 용돈 받을 분위기가 아니거든요."

장석민이 불퉁하게 중얼거리는 말에 코트를 챙겨든 여자가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우린 먼저 퇴근할게."

"그래요. 주말 잘 보내세요."

"마무리 잘 하고, 다음 주에 봐."

사람들이 하나둘 사무실을 나서자 시끄러웠던 공기가 조용히 내려앉았다. 커피를 홀짝이며 서류를 뒤적거리던 장석민은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12월.

타르카를 떠나온 지 한달이 훌쩍 지나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오고 난 후에, 장석민은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호되게 꾸중을 들었다. 형들은 저놈의 새끼, 저새끼, 저거 저 새끼, 뒤지게 맞아야 한다고 부추겼지만 아버지는 곱게 자란 막내아들에게 끝까지 매 한 대 안 치고 꾸중을 마무리했다.

아무런 말 없이 회사를 무단결근했으니 3개월간 임금 삭감이라는 끔찍한 처사와 주말 외출 금지, 부득이하게 외출할 경우 30분마다 전화로 보고, 평일에 회사에서 퇴근하고 한 시간 내에 귀가라는, 1970년대 여고생도 들으면 뒤로 까무러칠 규칙이 정해졌다. 

지은 죄가 있기에 장석민은 말없이 모든 안건을 수용했다. 게다가 한 달 용돈 밥값, 교통비, 통신비 포함 23만 5천원이라는 비인간적인 한도가 정해진 터라 장석민은 지금도 좋아하는 스타벅스의 커피가 아니라 커피믹스를 타 마시는 중이었다. 금으로 세공된 컵에 최고급 차를 마시던 잔나툰에서의 호사스런 날들이 꿈결처럼 느껴졌다.

"……뭐. 이것도 맛있으니까."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장석민은 남아있는 커피를 호르륵 마셨다. 일이 정리되면 자신을 찾아오겠다고 말했던 자하르는 지금까지 연락 한 통 없었다. 자신이 연락처를 주지 않아 연락을 못하는 건가 싶다가도 그놈의 행동력과 재력을 고려해봤을 때, 그럴 가능성은 0에 가까웠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장석민은 한동안 현실에 적응하지 못했다. 회사에 출근하면서도 멍하게 책상 앞에 앉기 일쑤였고 가끔 하는 일이라고는 구글창에 타르카, 타르카 왕국 내전, 타르카 왕국 왕위 다툼, 등의 검색어를 치는 것뿐이었다. 그가 잠시 화장실을 간 사이 그의 책상에 서류를 가지러 온 누군가 검색창 기록을 보게 된 후, 회사 내에는 믿을만한 소문이 짠하게 퍼졌다.

장석민이 중동 어느 나라의 공주와 이루어지지 못할 사랑에 빠져서 해외 도피를 했다가 돌아온 것이라는 게, 그 믿을 만한 소문의 골자였다.

"공주만 왕자로 바꾸면, 그럴듯하긴 하네."

장석민은 한숨을 섞어 중얼거렸다. 거기도 지금쯤 눈이……. 올 리가 없지. 왜 아직 연락이 없는 것일까. 혹시 어디가 잘못돼서……. ……. 아니야. 불길한 생각은 그만 하자. 아니면 나 따위는 잊고,……, 다른 여자나 남자를, …….…….

"에이이이. 젠장."

손으로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아무리 바빠도 전화 한통 정도는 할 수 있을 텐데.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칼로 자른 듯이 냉정할 수 있단 말인가. 뭐? 결혼을 할 사이?

"웃기고 자빠졌네."

투덜거리던 장석민의 머리에 그날 통로에서 보았던 자하르의 얼굴이 떠올랐다. 무표정으로도 감추지 못했던 초조함과 집착, 망설임과 욕망이 일렁이는 시선이 장석민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부러 장석민은 뒤도 돌아 보지 않고 통로를 내달렸다. 한 번 더 고개를 돌렸다가는 그 시선에 잡혀서, 돌이키지 못할 실수를 저지를 것만 같아 두려웠다.

비행기에 타고 나서도 기체가 이륙할 때까지 눈을 감고 있었다. 활주로에 기체가 뜨는 순간, 장석민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자하르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눈에 아로새겨져 잊히지가 않는다. 지금도 그가 거기에서 있을 것 같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장석민은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아까는 흩날리던 눈발이 제법 거세게 내리고 있었다.

"올해 넘기기만 해 봐라. 콱. 다른 여자 만날 테니까."

돌아오지 않을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장석민은 서류를 넘겼다. 금세 눈이 피로해져 그는 파일을 덮었다. 어떤 내용도 머릿속에 들어올 것 같지 않았다. 오늘은 와인이나 한 병 사가서 방에서 혼자 들이마시고 잠이나 자야겠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핸드폰 벨소리가 들려 주머니를 뒤적거리니, 어머니라는 글자가 두둥하고 떠올랐다. 귀한 막내아들이 한 달간 행방불명이 되었다 돌아온 이후로 어머니는 하루에도 수시로 전화를 하곤 하셨다. 어쩌다 전화를 받지 않으면 부재중 전화가 십여 통씩 찍혀 있을 때도 있었다. 그것도 다 내 탓이오, 하는 마음에 장석민은 될 수 있는 한, 친절하게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 있었다.

"여보세요"

「석민아. 엄마다.」

"네. 어머니."

「눈 오는데 퇴근 어떻게 할 거니?」

"전철타고 가야죠. 아버지는 오늘 중요한 손님오신다고 늦게까지 계신다던데요."

「그래. 조심해서 와. 나올 때 전화하고.」

"네. 들어가세요."

통화를 마치려는데 어머니가 얘, 잠깐만, 하고 아들을 다시 불렀다.

"예. 말씀하세요."

「너 뭐 가구 주문한 거 있니?」

"예? 가구요? 아니요. 저 요즘 용돈 23만 5천원인 거 아시잖아요."

「내 그럴 줄 알았어. 또 보이스 피싱인가 보다. 그럼 올 때, 엄마 좋아하는 거기에서 케이크 좀 한 조각 사 와라.」

"한판 사다드릴게요. 용돈 23만 5천원 받는 남자의 대 출혈 서비스."

전화기 너머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장석민은 들어가세요, 하고 인사를 하고 통화를 마쳤다. 주머니에 전화기를 집어넣는데 또 벨소리가 울렸다. 등록되지 않은 번호였다. 떨리는 손으로 그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장석민 씨 되시죠?」

"……네."

「소포가 하나 와 있는데, 지금 올라가도 되나요?」

택배 배달원이었다. 법원에서 올 서류가 지금 도착한 모양이었다. 장석민은 그러라고 대답하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얼마 뒤에 노란색 옷을 입은 배달원이 추워서 빨개진 얼굴을 하고 문을 두드렸다.

"장석민 씨, 여기 사인 좀 부탁드립니다."

장석민은 사인을 하면서 추운데 수고 많으시네요, 하고 상투적인 인사말을 건넸다.

"연말이라 어쩔 수 없죠."

서류를 건네받으려는 장석민에게 배달원이 커다란 상자를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택배요."

"시킨 적 없는데?"

"저희야 뭐 압니까. 그럼 수고 하세요."

배달원이 나가고 나서 장석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큰 택배가 올 곳이, ……. …….

장석민은 택배 상자를 뜯기 위한 칼을 찾았다. 책상을 뒤져도 칼이 나오지 않자 그는 맨손으로 상자를 뜯어냈다. 액자였다. 상자 안에 든 액자를 꺼내는 그의 손끝이 알 수 없는 감정으로 떨리기 시작했다. 액자는 다시 황갈색 종이로 곱게 포장되어 있었다. 장석민은 조심스럽게 포장지를 벗겨냈다.

"허──, 이 미친……."

액자 안의 내용물을 확인한 순간 욕설이 절로 튀어나왔다.

"미친 거 아니야? 이 그림을 누가 택배로, ……, ……, 하 진짜."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지 않았다. 혹시 어디 흠집이 생긴 곳은 없을까 싶어 포장지를 마저 벗겨냈다. 그때 작은 봉투 하나가 툭, 떨어졌다.

편지라도 쓴 것일까. 혹시 비행기 티켓이라도 보낸 것일까.

봉투를 뜯어내니 그 안에는 사진이 몇 장 들어있었다.

"야, 이, 미친, ……어이, 이 진상."

장석민은 사진 속에 주인에게 들으라는 듯이 욕을 구시렁거렸다. 이런 왕자병에 걸린 왕자놈, 빌어먹을 새끼, 제정신이 아닌 놈, 사진을 현상해서 보 낼 시간에 전화나 한 통 했어야 할 놈, 나쁜 새끼.

그날 사막에서 장석민이 찍었던 사진 중 몇 장을 추려 보낸 모양이었다. 장석민은 매를 손에 얹고 있는 자하르의 사진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용케 카메라를 찾았나 보네."

그날의 일을 떠올리며 장석민은 사진을 한 장 한 장 넘겼다. 끔찍한 기억들도 지나고 보니 다 추억이었다.

"잘생겼다, 그래 너 잘생겼어."

투덜거리던 그는 마지막 한 장의 사진에서 멈칫, 표정이 굳는다. 자하르가 카메라를 보고 있었다. 기쁨이 희미하게 배어 나오는 미소를 띤 채로. 

장석민은 그가 그런 눈을 하고 누구를 보고 있는지, 안다. 목안이 간지럽고 얼굴에 뜨끈하니 열이 달아오른다. 눈이 뻑뻑해 눈을 몇 번 더 껌뻑거렸다. 그럴수록 사진속의 얼굴이 더 선명하게 눈에 닿는다.

잊고 있었던 뜨거운 감정이 울컥, 하고 치밀어 오른다.

보고 싶다.

선명한 감정이 형체를 갖고 장석민을 괴롭게 했다. 

보고 싶다. 보고 싶다. 자하르가 보고 싶다. 그를 만나고 싶다.

"……젠장."

장석민은 재빨리 손등으로 눈가를 닦아냈다. 모두들 퇴근 한 뒤라,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사진을 지갑 안에 넣어두고 다른 사진은 가방에 챙겼다. 커다란 그림이 눈에 들어온 순간, 장석민은 머리가 아파왔다. 저걸 들고 전철을 탈 수도 없다. 눈 오는 날에 이런 번화가에 택시가 잘 잡힐 리도 없다. 장석민은 아버지에게 뻔뻔하게 차 키를 요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림을 옆구리에 끼고 일어섰다. 복도를 지나 대표실 입구에 들어서니 비서가 그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

"대표님 지금 손님 오셔서……."

"알아요. 잠깐 뭐 받아가기만 하려고요."

"그 그림은 뭐예요? 사셨어요?"

비서가 웃으면서 묻는다.

"……제가 이걸 살 수 있을 리가, ……, 저 들어가 볼게요."

장석민은 대표실의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잠시만요, 하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고 아들의 얼굴을 확인한 아버지가 대번에 눈짓을 한다. 안에 손님이 와 있다는 뜻이다.

"알아요. 나 자동차 키 좀 주세요. 대표님."

"왜? 또 어딜 가게?"

"가긴 내가 어딜 가요. 돈도 없는데. 집에나 가야지. 평화로운 주말을 보낼 거예요."

"그런데 차키는 왜? 전철타고 가면 되잖아."

"짐 있어서요. 좀 주세요. 네? 엄마 케이크도 사가야 한단 말이에요."

"잠시만 있어라. 코트를 안쪽에 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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