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2/35)

비밀 문이 열렸다.

장석민은 아까 누운 채로 생각했다. 그날, 나단은 대체 어디로 들어온 것일까. 자하르가 분명 입구는 차단했다고 말했다. 게다가 경호원들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나단이 비밀 통로를 통해 혼자 들어온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장석민은 책상에서 종이와 펜을 챙겨 주머니에 쑤셔 넣고 어두운 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계단을 오르는 것이 평소보다 몇 배는 더 힘들었다. 아래가 찢어졌는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날카로운 고통을 느꼈다. 인어가 인간의 다리를 얻고 처음 걸었을 때, 이쯤 아팠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장석민은 부지런히 계단을 올랐다. 입에서 단내가 날 때쯤 도서관과 이어지는 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도서관 복도를 빠른 걸음으로 질러 걸었다.

도서관 지기는 오늘도 시체처럼 앉아 있었다. 장석민은 마지막으로 그에게 인사를 한 뒤, 정원을 향해 걸었다. 꽃나무를 찾았다. 이름은 알 수 없지만 모양이 특이해서, 기억에 선명하게 남은 그 나무를.

"찾았다."

장석민은 재빨리 그 아래로 달려갔다. 손으로 땅을 파서 그 아래에 묻어놓은 총을 꺼냈다. 흙을 대충 털어낸 다음, 총을 옷 속에 잘 감추어두었다. 주머니에 넣어온 종이에 펜으로 글자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장석민은 자신의 좋은 기억력에 탄복하며 글자를 다 적은 종이를 반으로 접었다. 이제는 이것을 어디에 둘지를 정하면 된다. 너무 눈에 띄지도 않고, 그렇지만 오늘 내로 발견될 수 있는 곳으로.

고민하던 그는 파이룬으로 향했다. 하루에 한 번 수업을 하지만 그 전에는 누구도 찾아오지 않는 교실이 떠오른 것이다. 품에서 총을 꺼내 비르마 선생이 서는 교단 위에 올려두고 그 옆에 반으로 접은 쪽지를 두고 나왔다.

"선물입니다. 왕자님."

대답이 돌아올 리 없는 말을 중얼거린 후, 장석민은 고개를 돌렸다. 동이 트기 시작한 새벽의 하늘로 새하얀 본궁의 지붕이 오롯이 빛나고 있었다.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간이침대에 앉아 장석민은 작가 조지 버나드 쇼가 비석에 새겨놓은 문구를 떠올렸다. 그럴 줄 알았으면 안 그랬으면 되잖아! 하고 자신을 향해 외쳐 봐도 소용없었다. 모든 것은 자신이 선택한 길이니까.

"에라이. 젠장."

장석민은 벌러덩 누웠다.

제 발로 본궁으로 들어온 장석민을 보고 무크라르 왕은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자하르는 어쩌고 너 혼자 왔냐고 묻는 왕에게 장석민은 바쁜일이 있으시답니다,하고 둘러댔다. 못마땅하단 얼굴이었지만 애초에 장석민을 자하르에게서 떼어내는 것이 목적이었던 무크라르 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시종을 시켜 그가 사용할 거처로 안내했다. 리문에서 머물렀던 방과 비교하면 조금 떨어지긴 하지만 훌륭한 수준이었다.

장석민은 말라쿤이라고 진지하게 믿지는 않되 그 명성을 적당히 이용하려던 무크라크 왕은 장석민을 엄청나게 돌려댔다. 각종 연회나 공식석상에 데리고 갔고 사람들을 만나게 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장석민이 경제나 정치적으로 사람들에게 해주었던 조언은 진짜였기에, 국왕은 장석민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려 했다. 장석민은 적당히, 건성으로 그들을 대했다. 자하르가 대본을 써주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묻는 질문에는 내키는 대로 대답했다. 당연히 결과는 똥이었다. 파시르 장관이 장석민에게 물어서 결정한 투자가 엄청난 손실을 가져왔을 때, 무크라르 왕은 허허 웃었다. 말라쿤이 늘 좋은 결정만 내릴 수는 없다고 그는 장석민을 거들기까지 했다.

하지만 우마르 장관, 우스만 장관, 지브릴 장관, 나아가서 옆 나라의 무함마드 대사까지 모두 손실을 얻게 되자 장석민을 두둔해줄 수가 없었다. 장석민은 처음 방을 옮긴 것은 지브릴 장관의 손실 이후였다. 어차피 조용히 처박혀 있다가 잊힐 계획이었던 장석민은 방을 옮기라 해도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사실 옮긴 방의 수준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한 번씩 방을 거듭 옮길 때마다, 장석민의 표정도 무너져 갔다. 결국 오늘 옮긴 방을 보고 장석민은 얼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에라이, 쩨쩨한 놈."

제 손에는 손가락마다 다이아몬드 반지를 꼈으면서 이 비좁고 허름한 방을 내어준 무크라르 왕에게 장석민은 되는 대로 욕을 퍼부었다.

"돼지 같은 놈, 나쁜 놈, 빌어먹을 놈, 저주받을 놈."

한국어를 알아들을 사람이 없으니 장석민은 마음 놓고 욕을 씨부렸다.

「식사입니다.」

시종이 문을 두드리면서 문 안쪽으로 식판을 들이밀었다. 그것을 보자 뱃속 깊은 곳으로부터 진실한 욕이 터져 나왔다.

"이런 개, 씹, 좆!"

뻑뻑한 빵 한조각과 고린내가 나는 치즈 한 장이 전부였다. 방을 옮길 때마다 식사의 수준도 떨어지고 있었다. 리문까지는 아니더라도 러마디의 처소에서 먹던 음식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장석민은 돌처럼 딱딱한 빵을 씹으며 무크라르 왕의 단명을 바랐다. 사실, 요즘 무크라르 왕의 낯짝이 썩 좋은 것은 아니었다. 듣자니 국경 근처에서 크고 작은 내전들이 끊임없이 발발하고 있다 했다. 테러도 끊이지 않고 진행 중이던 국유사업도 번번이 꼬이고 미끄러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오늘은 국제 회의장에서 폭탄 테러가 있었다는 소식이 들려 왔을 때 무크라르 왕의 얼굴은 아주 볼만 했다.

"거봐. 인과응보라니까. 다 뿌린 대로 거두……, ……난 왜 이런 거지."

우울한 중얼거림이 이어진다. 남을 욕하다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근간 자신이 인생을 얼마나 억세게 운이 없고 좆 같은지에 대해 장석민은 몇 번이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람은 원래 타고난 복의 크기가 결정되어있다던데, 사실 나는 은수저 물고 태어나서 있던 복을 죄다 써버린 것을 아닌가.

"아니야. ……아직 남아있을 거야."

장석민은 어딘가에 남아있을 복이 하루빨리 돌아와서 자신을 돕길 바랐다. 그나마 자신이 긍정적인 성격이라 다행이었다. 아니었다면 예전에 자살했을 터.

"나는 안 죽지. 삶에 대한 집착이 강해서 절대로, 안 죽지."

누군가 자신에게 해주었던 말을 되새기며 장석민은 눈을 감았다.

자하르와 보냈던 그 밤이, 아주 아득한 옛날 같다.

본궁으로 온 이후로 자하르와 만난 적이 없다. 아니, 딱 한 번, 공식 석상에서 먼 곳에 서 있는 자하르를 스치듯 본 적은 있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장석민은 쏘아죽일 것 같은, 자하르의 시선을 느꼈다.

활로 자신을 겨누고 있는 듯한, 눈빛이었다. 장석민은 자리를 피했다. 자하르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왔을 때 다리가 풀려 주저 앉고 말았다. 자하르는 따라오지 않았다. 당연하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장석민을 한국으로 보낼 비행기를 마련해 두었다. 그걸 차버리고 나온 것이다.

자하르의 자존심에 다시 진한 상처를 남겼음을 장석민은 안다. 미안했다. 얼굴을 보기 힘들 만큼 미안했다. 하지만 그때로 다시 돌아가서 선택을 하라고 한다면 똑같은 결정을 내릴 것이다.

장석민은 자하르가 죽게 놔두고 싶지 않았다. 설사 그가 비밀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죽이려 한 데다, 한 번 따먹고 버리려고 했고, 그러고 두 번 따먹고, 세 번 따먹, ……. …….

"……미친놈."

이번에는, 그런 놈을 걱정하고 있는 자신의 욕으로 결론 났다. 장석민은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넣고 거칠게 두어 번 흔든 다음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하르를 떠올리자 가슴이 답답했다. 이곳에 온 이후로 일부러 장석민은 자하르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한 번 물꼬가 터지면 걷잡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됐어. 안 해. 안 한다고."

자하르는 백마 탄 왕자가 아니다. 중동 작은 나라의 여덟 번째 왕자일 뿐이다. 말보다는 낙타가 어울린다. 아니, 말이 어울리기도 했지. 게다가 계곡으로 자신을 구해주러 왔을 때나, 나단과 무크라르 왕에게 절대로 내어주지 않겠다고 말했을 때는, 정말로 백마 탄 왕자 같았다. 그가 이 문을 열고 자신을 구해준다면 …….

"……. ……."

이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일어나서도 안 된다. 그랬다간 자하르가 죽을 테니까. 장석민은 우울한 생각을 떨쳐내기 위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로 침대에 누웠다. 방에 놓인 것이라고는 딱딱해서 존재 가치가 의심되는 간이침대 하나와 세면대 하나가 전부였다. 읽을 만한 책이나 놀이 거리도 없었다. 리문에 있을 때는 그나마 책이라도 읽고 자하르와 체스라도…….

"에헤이."

장석민은 머릿속에 스며든 자하르에 대한 생각을 떨쳐내기 위해 재빨리 손을 흔들었다. 그는 모로 누워서 눈을 감았다. 오늘도 이렇게 좆 같은 하루가 지나는구나.

「장석민.」

장석민은 시발. 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이 궁에서 자신을 저런 식으로 부를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장석민은 눈을 감고 일부러 자는 척했다.

마주쳐서 좋을 것 없는 사람이었다.

문이 쾅. 열리고 목소리의 주인공이 들어왔다.

「장석민. 내 목소리 못 들었어?」

장석민은 부스스 눈을 뜨며 놀라는 척 몸을 일으켰다.

「어, 자고 있었습니다.」

「거짓말하지 마라. 어디서 감히, 빤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는 거냐.」

나단이 흉흉하게 눈을 빛냈다. 요즘 나단의 낯짝도 좋지 않았다. 나라의 정세가 어지러우니 무크라르 왕의 심기가 좋지 않고, 옆에서 그 더러운 성질을 직접 받아내는 것은 나단 왕자였다. 처음에는 그도 왕의 비위를 잘 맞춰주는 듯했지만 요즘은 슬슬 한계에 도달해가는 눈치였다. 게다가 사람들이 말라쿤의 신묘한 능력이 떨어진 이유를, 그의 주인인 아나크왕의 후계자 자하르 왕자에게서 떨어트려 놓았기 때문이라고 숙덕거렸다.

장석민을 후궁으로 들이라고 옆에서 무크라르 왕을 부추긴 것이 나단이었기에 자연스레 불똥은 그에게 튀었다. 나단이 화풀이하는 대상은 당연히 장석민이 되었다.

「죄송합니다.」

장석민이 이곳으로 옮겨와서 가장 많이 하는 말이었다. 죄송합니다. 표정은 없고 목소리는 일정한 톤으로.

「따라와라.」

「어딜 갑니까?」

나단이 장석민의 뺨을 후려쳤다. 장석민은 이를 사려물었다. 빌어먹을 이 집안사람들은 죄다 내 뺨을 후려치지 못해 죽은 귀신이 들러붙었나.

「오라고 하면 오는 거다. 잔말 말고.」

장석민은 힘없이 비척거리며 나단의 뒤를 따라 걸었다. 창고로 장석민을 데리고 간 나단은 그에게 청소도구를 내밀었다.

「뭔가요?」

「청소 도구다.」

장석민은 눈을 껌뻑거렸다. 그러니까 청소도구로 뭘 하라는 거지.

「여기서부터 저쪽까지 보이는 복도를 닦아라.」

「……왜요?」

나단이 손을 치켜 올렸다.

장석민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며 대꾸했다.

「저는, 아무리 그래도 후, 후궁으로 여기에 들어온 것인데 이런 일을 하면 사람들이 보기에 그렇지 않습니까.」

「이 복도는 사람들이 함부로 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리고 네까짓게 무슨 후궁이냐. 말라쿤의 현신 좋아하네.」

「…….」

그 현신을 데려오자고 주장했던 놈이 누구인데.

「밥값도 못하는 것이.」

아무래도 어제 무크라르 국왕이 마지막 기회라며 자신을 아흐마드 장관과 독대를 시켰던 일이 잘 안된 모양이었다. 장석민은 말없이 나단의 손에서 청소 도구를 건네받았다. 그러고는 바닥에 엎드려서 복도를 벅벅 문지르기 시작했다.

「검사하러 왔을 때, 제대로 해두지 않으면 가만 두지 않겠다.」

대답하지 않고 장석민은 힘을 주어 솔을 문질렀다. 나단이 사라지는 것을 본 후에, 장석민은 솔을 집어 던졌다.

"진짜, 빡치네."

집에서도 해본 적 없는 청소였다, 남자라도 집안일을 할 줄 알아야 한다며 아버지가 형들에게는 어릴 때부터 청소, 설거지 빨래 등을 시켰지만 유일하게 장석민의 손끝에는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키웠던 터다.

형들이야 저놈의 새끼, 저새끼, 저거 저 새끼, 하면서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장석민은 집에서도 늘 귀염을 독차지하는 막내아들이었다.

그런데 복도 바닥이나 문지르고 있는 지금이라니.

"빌어먹을, 확 대머리나 돼라."

유난히 얇고 찰랑거리는 나단의 머릿결을 떠올리며 장석민은 구시렁거렸다. 집어던진 솔을 다시 손에 들고 그는 바닥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여기로 사람들이 오가지 않아, 이 꼴을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금쪽 같이 귀한 막내아들이 이러고 있는 것을 알면 아버지가 얼마나 가슴아파하실까.장석민은 시근덕거리며 손에 쥔 솔을 움직였다. 흰색 대리석을 벅벅 문지르며 전진을 하던 그의 앞에 검은색 신발이 들어왔다.

"좀 비켜……."

한국말로 내뱉어 놓고 장석민은 이게 아닌데, 하고 혀를 깨물었다. 분명히 누구도 오지 않는 복도라고 했는데 어째서 사람의 발이 나타난거지. 왜 비키지 않고 버티고 있는 건데. ……게다가, 목덜미가 왜 이렇게 따끔한 걸까.

장석민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회색 눈동자에 장석민은 들고 있던 솔을 놓쳤다. 자하르의 뒤로 다른 왕자들도 우르르 걸어오고 있었다.

「뭐야? 말라쿤의 현신 아니신가.」

「요즘 신통력이 떨어졌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바닥 청소를 하는 수준까지 내려가나? 하하하.」

뭐라고 떠들어대는지 알 수 없어도 자신을 비웃는 소리임은 알 수 있었다. 지나가던 하일은 청소솔을 발로 걷어차기까지 했다. 다른 왕자들도 키득거리며 복도를 걸어갔다. 장석민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린 채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단이 이곳의 청소를 시킨 이유를, 장석민은 그제야 알아챘다. 표정없이 장석민을 내려다보던 자하르가 그의 옆을 지나쳐 걸었다. 다정한 말을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인사조차 건네지 않는 그의 냉정함에, 장석민은 또 한 번 비참한 감정을 느꼈다. 쥐구멍이 있으면 숨고 싶었다. 잘난 척하고 나왔는데 보인 꼴이 이거라니.

그때, 장석민의 옆으로 뭔가가 툭, 떨어졌다. 앞으로 걸어갔던 자하르가 청소솔을 주워서 장석민의 옆에 내려놓았다. 엉겁결에 솔을 받아든 장석민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달싹거렸다. 자하르는 여전히 거기에 서 있었다. 눈이 마주쳤지만 어떤 감정도 내비치지 않았다. 전처럼 온화한 낯을 꾸며내지도 솔직한 낯을 보여주지도 않았다. 무기질적인 가면을 쓴 것처럼, 그는 무심하고 평연한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시선이 장석민의 뺨에 닿았다.

「저는…….」

장석민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그렇게 말했을 때 자하르가 설핏 인상을 찌푸렸다. 그뿐이었다.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복도를 걸어갔다. 복도에 우두커니 남겨진 장석민은 멍하니 솔을 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바닥에 물이 떨어져서 고개를 들었다.

천장은 무사했다.

"어……."

물이 떨어지고 있는 곳을 발견한 장석민은 누가 볼 새라 소맷자락으로 눈가를 닦았다. 자신의 생각은 틀렸다.

좆 같은 하루는 아직도 계속되는 중이었다.

시트를 뒤집어 쓴 채로, 장석민은 훌쩍훌쩍 울었다. 다 큰 남자가 오밤중에 우는 것이 얼마나 병신 같고 꼴사나운지 알았지만 울음이 그치지 않았다.

장석민은 그 복도를 모두 닦아내고 방으로 돌아왔다. 마음 같아서는 솔을 집어던져버리고 나단의 멱살을 움켜쥐고 싶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그렇지 않은 일 정도는 구분했다. 장수 돌침대도 아닌 주제에 돌 같은 강도를 자랑하는 침대에 누워 장석민은 눈을 감았다. 피곤하니 잠이 바로 올 것이라는 기대에서였다. 하지만 자신을 바라보던 회색 눈동자를 머릿속에서 도저히 몰아낼 수가 없었다.

"젠장, 빌어먹을. ……."

잊고 있던 비참함이 몰려왔다. 차라리 자하르가 보내준다고 했을 때, 전용기를 탔다면 이런 감정은 몰랐을 텐데. 하지만 그랬다면, ……오늘 자하르를 보지 못했겠지.

"시발……, ……."

장석민은 끅끅거리며 눈물을 닦아냈다. 어떤 선택을 하든 항상 최악의 패만 뽑아대고 있는 기분이었다. 자하르와 알레이야의 결혼식이 무산되었다는 얘기도 들려오지 않았다. 자신은 여기서 썩어갈 거고 자하르는 그 예쁜 여자를 부인으로 맞이할 것이다. 장석민은 주머니에서 자하르가 준 빨간 베일을 꺼냈다. 우울하면 머리에 덮고 잠을 자던 소중한 베일이었다. 빌어먹을 새끼. 팽, 하고 코를 풀어 내던졌다. 몸을 웅크리고 눈을 꼭 감았다. 비참하게도 이런 와중에 잠은 밀려들었다. 가물가물 멀어지는 의식 사이로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쟝.

어렴풋이 들리는 목소리에 장석민은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쟝──.

웃음기가 묻어나는 음성이 장석민의 잠을 깨웠다. 그 목소리에 답해야 한다는 것을 아는데 가위에 눌린 것처럼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자는 건가요.

커다란 손이 뺨을 감싸 쥔다. 손가락이 뺨을 더듬는 익숙한 느낌에 장석민은 한숨처럼, 긴장을 토해낸다.

잘했어요.

손가락이 두 번, 장석민의 뺨을 두드렸다. 복도에서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고 가던 바로 그 손이다.

눈을 떴다. 새카만 어둠이 방에 그득 차 있다. 주변을 둘러보지 않아도 방금 그것이 꿈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비참함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이렇게 사람이 비참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장석민은 태어나 처음으로 알았다. 한겨울에 홀랑 벗겨진 채로 길에 내몰린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알고 싶지 않은 것들을, 배워가는 중이었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꿈에서 느꼈던 따스한 온기는 온데간데없이 차가운 손가락의 감촉만이 닿았다. 마음이 스산했다.

정말로, 지금은, 진심으로 죽고 싶었다.

먼 곳에서 쾅,하고 터지는 소리가 울린다. 오늘도 어디선가 테러가 일어난 모양이었다. 요즘은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놀라서 창문으로 달려가 밖을 확인하곤 했는데 지금은 저 소리에 익숙해져 있었다. 자라면서 사람의 머리가 날아가는 모습을 여러 차례 봐왔다는 자하르의 이야기가 과장된 게 아니었다.

"시발, 또 자하르."

무슨 생각을 해도 자하르와 이어지는 생각의 끈을 잘라버리고 싶었다.

쾅, 이번에는 조금 더 가까운 데에서 터지는 소리가 울렸다. 가까운 곳에서 경보가 울리고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졌지만 장석민은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손바닥으로 귀를 틀어막고 잠을 청하려 했다.

콰앙──.

이번에는 문이 흔들릴 정도의 폭발이었다. 궁 안에도 경보가 울렸다. 장석민은 그제야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주무십니까.」

문밖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장석민은 피식, 웃음을 삼켰다.

아, 그렇구나. 이거였구나.

「쟝. 자고 있나요.」

"하하하하. 시발."

아직도 꿈이구나. 여전히 꿈이었어.

장석민은 손바닥으로 이마를 감싸 쥐었다. 문 밖에서는 여전히 쾅, 쾅, 하는 폭발음이 잇따라 들렸다.

자신이 꿈꾸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을 루시드 드림이라고 했지. 꿈 속 상황에 대한 판단과 결정을 할 수 있다고 했으니 내 마음대로 해도 되겠지.

장석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자하르!"

그는 오늘 내도록 머릿속에서 맴돌던 이름을 외쳤다.

"자하르! 이 빌어먹을 왕자지, 엘시시 같은 놈아!"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문밖에서는 쾅쾅 터지는 폭발음이 비현실적으로 울렸고 장석민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름을 목 놓아 불렀다.

"시발새끼야!!! 보고 싶다고!!!"

「방금 그거 욕한 겁니까?」

꿈 한번 참 생생하다. 어떻게 말투랑 대사까지 저렇게 그놈다운 것일까. 장석민이 흐흐, 웃음을 터트리자 문밖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문 열어요.」

「싫은데요?」

꿈속이라도 장석민은 자하르가 원하는 대로 호락호락 해주고 싶지 않았다.

「열지 않으면 제가 열고 들어가겠습니다.」

「그러시든가.」

장석민은 웃으면서 팔짱을 꼈다. 콰직, 하고 일그러지는 철문을 보던 그의 얼굴에서 웃음이 스러지기 시작했다. 둔탁한 파열음이 한번 더 들린 뒤에 문짝이 날아갔다. 넘어진 문 위로 자하르가 걸어들어왔다.

꿈속인데,……왜 이렇게 무섭냐.

장석민은 뒷걸음질을 치며 식은땀을 흘렸다. 자하르가 무표정하게 걸어들어와 장석민의 이마를 손으로 짚는다.

「열은 없군요.」

「…….」

「그런데 왜 이런 식으로 나오시는 걸까──.」

낮은 이죽거림이 이마에 닿는 온기가 환상이나 망상이 아님을 알려주었다. 장석민은 눈을 크게 뜨고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자하르, 왕자……님?」

「잘 지냈습니까.」

그의 물음에 장석민은 머릿속이 하얗게 번졌다. 꿈이 아닌가? 정말로 꿈이 아니고 자하르가 이곳으로 문을 부수고 들어온 건가?

방을 둘러본 자하르의 낯이 굳는다.

「이런 곳에서 지내고 있었습니까?」

「……어.」

장석민이 손으로 자하르의 얼굴을 치덕치덕 만져보았다. 손에 닿는 감각도 현실적이다. 

자하르가 장석민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잠에서 덜 깼나요.」

다정한 음성으로 묻지만 은근한 비난이 숨겨져 있다. 자하르의 재수 없는 말투 그대로였다.

「……진짜입니까?」

「뭐가요.」

「자하르 왕자님이, 여기 있는 거 말입니다.」

자하르가 한숨을 섞어 짧게 웃는다.

「나갑시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손을 잡고 이끌려는 힘에 장석민은 정신을 차렸다. 그는 자하르의 손을 뿌리쳤다.

「죽고 싶어서 이러십니까?」

본궁은 무크라르 왕이 머무는 궁이다. 아무리 자하르 왕자라고 해도 이렇게 침입을 해서 장석민을 빼내간 것이 알려진다면, 테러로 그 죄를 물을 수도 있는 행위다.

「이러다가 걸리기라도 하면, ──.」

쾅, 하는 폭발음이 바로 머리 위에서 들렸다. 자하르가 장석민의 몸을 끌어안았다. 천장에서 돌가루가 바스스, 떨어졌다. 웨엥─, 하는 날카로운 경보음이 복도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뭐, 뭡니까?」

「나갑시다.」

자하르가 웃으며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보이는 가지런한 웃음에 장석민응ㄴ 소름이 쭈뼛 돋았지만 그를 따라가는 것 외에는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복도를 걸어 나가는데 사람들이 우왕좌왕 달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대체 어떻게된 상황인지 알 수 없어, 장석민은 당혹스럽기만 했다.

「어떻게 된 거예요? 네?」

앞서 성큼성큼 걸어가던 자하르가 걸음을 멈추고 장석민을 돌아보았다. 희게 질린 얼굴이 며칠 사이에 핼쑥하다. 자하르가 낮게 혀를 차며 장석민의 뺨을 쥔다.

「식사가 입맛에 안 맞으신가요?」

「……지금 여기서 제 입맛에 관한 논의가, ──힉.」

바로 옆으로 폭탄이 떨어졌다. 창문이 와르르 무너지고 파편이 튀었다. 자하르가 장석민의 몸을 자신의 몸으로 감쌌다. 사람들의 비명이 터지고 불을 끄려고 여기저기에서 달려오고 있었다.

「아슬아슬했군요.」

자하르의 중얼거림을 들은 장석민은 고개를 들었다. 이전에도 한 번 보았던 얼굴이다.

「……이게 다 왕자님이…….」

쾅, 하고 다시 폭발이 울렸다. 자하르가 장석민의 손목을 움켜쥐고 복도를 내달렸다. 그의 뒤를 따라 달리면서도 장석민의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었다. 지금 본궁에 쏟아지고 있는 이 폭격이 자하르의 짓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대체 왜? 왜? 어째서? 와이?

「왕자님, 잠깐, 잠시만, 이봐요!」

장석민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자하르가 달리는 것을 멈추었다.

「이봐?」

장석민의 마지막 외침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장석민은 고개를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말을 해야 나도, 뭘 어떻게 하든가. 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장석민이 말을 하는 중에도 몇 번의 작은 폭발이 이어졌다.

「반정부 테러입니다.」

담담한 말투였다. 자신의 나라가 공격을 당하고 있는데 당연하다는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무슨 테러가, 이렇게 심하게, ……!」

그건 테러라고 해봤자 폭탄 한두 개 터지고 말았다. 그것도 큰 문제가 되었지만 지금 이건 테러가 아니라 폭격 수준이었다.

「길라운입니다.」

「그게 뭔데, ──.」

이번에는 땅이 흔들릴 정도로 폭발이 일었다. 장석민은 자하르의 팔에 고개를 대고 몸을 숙였다. 그 모습을 보던 자하르의 입가에 비스듬한 미소가 걸렸다.

「반정부 단체 중에서 가장 과격한 세력입니다. 점조직으로 움직이고 있어서 추적도 힘들고 여러모로 골치 아픈 종자들이죠.」

자하르가 장석민의 뒤통수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겁을 먹은 새를 어르는 듯한 손길이었다.

「길라운이 왜, 갑자기, …….」

장석민이 고개를 들고 물었다.

「글쎄요. 요 근래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배후세력이 생겼다는 정보는 들었지만 저도 정확히 어떻게 된 것인지는, ──.」

장석민은 울컥 화가 치밀었다. 어떻게 된 것인지 내가 말해줄까! 니가 지금 자금을 대고 그놈들의 막후가 된 거잖아! 여기에 폭격을 퍼부으라고 돈을 대준 거잖아!

「그래서, ──뭘 어쩌려고.」

「전하를 뵈어야겠습니다. 비상사태이니.」

「전하? 무크라르 전하요? 나 데리고?」

장석민의 외침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하르가 그를 이끌고 본궁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어디로 갑니까?」

「무크라르 전하의 비밀기지로 갑니다.」

비밀기지라는 단어에 장석민은 하마터면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이런 상황에서 웃으면 제대로 미친놈이 되는 건데.

정원을 지나 무크라르 왕이 머무는 처소로 들어갔다. 역시 그 안도 아비규환이었다. 시종들이 분주하게 달리며 불을 끄고 있었고 궁에 머물고 있던 후궁들이 옷을 제대로 갖춰 입지도 못하고 뛰어나와 비명을 질렀다. 침소의 문을 열고 들어가 자하르는 침대 옆에 딸린 책장을 밀어냈다.

손잡이를 돌리자 방공호 같은 커다란 공간이 나타났다. 그 안에 있던 무크라르 왕이 기겁하며 고개를 돌렸다.

「네가 여긴, ──!」

자하르가 등 뒤로 문을 닫았다. 자하르와 무크라르 왕, 장석민이라는 기묘한 조합이 밀폐된 공간 안에 놓이게 되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전하.」

자하르가 손을 가슴에 얹고 공손히 인사를 했다. 무크라르 왕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비상사태에 허락도 받지 않고 이곳에 들어온 자하르의 행동이 곱게 비쳐질 리 없는 것이다.

「네가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 줄 아느냐.」

「긴급 사태라 전하를 급히 찾아뵈러 왔습니다.」

「아무리 긴급 사태라 해도, 게다가 저건 또 뭐야. 왜 말라쿤이 너와 같이 있는 것이냐.」

무크라르 왕의 시선이 자하르의 뒤에 있던 장석민에게 꽂혔다.

「궁이 불타고 있기에 데리고 나왔습니다.」

나라의 존폐가 달린 위험을 말하는 목소리가 온화하기 짝이 없다.

무크라르 왕은 자신의 여덟 번째 아들이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은 아닌가 싶어 낯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냐. 국방 장관과 통화해야 하기 때문에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오는 길에 파사드 국방 장관의 사망 소식을 들었습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파사드 장관은 쿠르라르 왕의 친동생이었다. 그의 오른팔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안타깝게도 테러에 휘말렸다고 합니다.」

제 삼촌의 죽음을 말하는 목소리가 건조하기 짝이 없다. 무크라르 왕은 그럴 리 없다고 소리를 지르며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짧게 통화를 마친 그의 얼굴은 이내 새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대체 어째서……. 대체 누가 지금 이런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이냐!」

국왕의 노기 어린 일갈에 자하르가 고개를 숙였다.

「현재 알아보고 있습니다.」

「당장. 누구의 짓인지 알아 봐라, 지금 당장!」

자하르 수하의 정보단체가 타르카 내에서 가장 솜씨가 훌륭하다는 사실을 아는 무크라르 왕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러고 있지 말고 당장 가서 알아 와!」

「전하. 현재 국경 아모스 지역에서 반정부 시위가 벌어지고 있고 크게 확산될 조짐이 보입니다.」

「뭐? 그것은 전에 네가 부족장들과 이야기를 잘 끝냈다고 하지 않았느냐?」

「죄송합니다. 저도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때 테이블 위에 있던 전화기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울렸다. 무크라르 왕이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말을 들을수록 국왕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 통화를 마칠 때쯤에, 그의 손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장석민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하르와 국왕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무슨 일입니까.」

「아사드에서 차관을 들여오기로 했던 것이 중지되었다는 연락이…….」

「차관이요?」

자하르가 처음 듣는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에드문트 사와의 준공 계약이 날아가서 일시적으로 자금이 얼어붙은 상태라 어쩔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 이렇게 되면…….」

무크라르 왕의 턱이 부들부들 떨렸다. 한 가지 문제도 아니고 동시다발적으로 이런 일들이 벌어지자 저주라도 받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대체 너희들은 이럴 때 뭘 하고 있었기에……!」

분노를 퍼부으려고 입을 열었던 무크라르 왕의 머리는 번뜩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에드문트, 아모스 지역의 반정부 시위, 현재의 테러, 이전이었다면 이 일을 모두 발전적으로 아우르고 있을, 한 명이 떠오른 것이다.

「자하르.」

그가 사막의 성자르 불리는 자신의 여덟 번째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자하르가 온화한 음성으로 네, 하고 그 부름에 답했다.

「설마, 네가…….」

「무엇을 말씀입니까.」

「지금 이것들이, 다 너의, …….」

국왕의 말을 다시 날카로운 벨소리가 잘랐다. 그의 표정이 서늘하게 굳었다.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무크라르 왕은 생에 한번 들을까 말까한 끔찍한 소식을 전해 듣고 있었다. 자하르가 전화가 울립니다, 하고 말했다. 무크라르 왕이 떨리는 손으로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전화 너머에서 들려오는 보고에 그는 참담한 심정으로 눈을 감았다. 수화기를 내려놓는 그의 시선이 자하르에게 향했다.

「방금 길라운이 국경 지역에서 타르카 왕국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한다는 선언을 발표했다.」

「길라운이라, ──그렇군요.」

자하르가 나직한 목소리로 되뇌었다.

「이로 인해ERU에서 북동부 쪽으로 군대를 재배치하고 제재를 가할 것이라고 알려왔다.」

내전이 아니라 이웃 국가와의 전쟁으로 번질 수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자하르가 여전히 평연한 얼굴로 그렇군요, 하고 강 건너 불구경을 하는 사람처럼 맞장구쳤다.

「자하르! 모두 네가 맡고 있던 일들이 아니냐.」

「저는 현재 일선에서 물러선 상태입니다.」

「이──!」

그 일에서 모두 물러서게 한 장본인이었기에 국왕은 따져 물을 수가 없었다. 자하르가 손을 뗀 것만으로 일이 이렇게 악화되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손을 뗀 자하르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없었다.

무크라르 왕은 두꺼운 손으로 이마를 감싸 쥐었다. 오늘 일뿐만 아니라 근간의 잦아진 테러와 국가적 위기가, 누구의 작품인지 감이 오기 시작했다. 그때 쿵, 하는 굉음이 벙커를 뒤흔들었다. 무크라르 왕의 얼굴에 식은땀이 흘렀다. 자하르는 평온한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청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자하르가 말을 이었다. 폭탄이 터지고 있는 긴급한 상황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차분한 음성이었다.

「이믈라쿤이 끝나기 전에 전하께서도 알다시피 저한테 안 좋은 일이 있었습니다.」

자하르가 말을 하는 와중에도 벙커가 몇 번이나 흔들렸다. 장석민은 어깨를 흠칫흠칫 떨었다. 자하르가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 당시 저를 도와준 은인이 있었지만 범인을 잡지 못했습니다.」

「그 건이라면 알레이야의 말대로 범인의 얼굴을 보지 못한 것 아니냐. 정신을 차리기 전에 도망을 간 것이니.」

자하르가 말없이 품에서 뭔가를 꺼내어 국왕에게 내밀었다. 장석민은 그것이 자신이 땅에서 파낸 총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이 총의 주인이 제게 암살범을 보냈습니다. 위대하신 무크라르 전하의 아들을 해치려했던 사람을 처벌해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누구냐.」

그렇게 묻는 무크라르 왕의 표정이 어두웠다. 자하르가 총신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작은 꽃이 음각으로 새겨있었다.

「왕가의 문장입니다.」

자하르의 손가락이 총신을 톡톡, 두드렸다.

「어느 가문에서 사용하고 있는 문장인지, 전하라면 한눈에 알아보시라 생각됩니다.」

자하르의 말에 무크라르 왕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암살범은 마지막에 이 총을 꺼내들었습니다. 제가 무릎을 꿇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비르마에게 건네받은 총신을 보는 순간, 자하르의 의식 위로 잠들어 있던 기억의 조각 하나가 떠올랐다.

「그게 무엇인지 전하는 아시겠지요?」

「그, …….」

「명예 처형입니다.」

자하르가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왕이 왕족을 죽일 때 사용되는 방법입니다. 마지막 순간에 무릎을 꿇게 하고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총으로 총알을 이마에 박아 넣는 것이지요, 전하도 아시다시피.」

자하르가 웃으면서 자신의 이마를 두드리는 모습에 장석민은 소름이 쭈뼛 돋았다.

「전하.」

나직한 음성이 제 아버지를 불렀다. 무크라르 왕의 얼굴에서 여유로움은 지워진 지 오래였다.

「저는 위대하신 전하께서 그런 일을 벌였다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들을 암살하려는 아버지라니요. 그럴 리가 없지요. 전하는 국민의 자애로운 아버님이 아니십니까.」

「당연하지, 나는 그런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린 무크라르 왕이 정색을 하며 외쳤다. 자하르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역시 전하를 믿습니다. 하오나, ──.」

그의 눈이 차갑게 번뜩였다.

「전하의 권력을 잠시라도 갖고 있었던 사람이 그런 일을 꾸민 것이라면, 이는 전하의 이름에 크나큰 누가 될 것입니다.」

무크라르 왕은 자하르가 지금 범인으로 지목하고 있는 것이 누구인지 바로 알아들었다. 그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지금 여기서 자하르를 내치기에는 당국에 벌떼처럼 몰려든 문제들을 해결할 방법이 없고 나단을 내치자니 그간 벌인 일들을 수습하기 어렵다.

무크라르 왕은 후계자 선택을 위해 전통적으로 내려오고 있는 나바툰을 없애고 새로운 방식을 택하겠다고 선언을 해둔 터다. 왕자들 사이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지만 적극적으로 반대하지는 못했다. 현재 하일과 자하르의 기세를 꺾어버린 그가 다음에는 누구를 공격할지 모르는 터다.

하지만 여론이 좋지 않다는 사실쯤은, 무크라르 왕도 알고 있었다. 타르카 왕국만큼 전통과 종교를 중요시하는 나라도 드물었다. 명분 없이 전통을 바꾸는 것은 위험한 일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줄 괴뢰가 필요했다. 나바툰에 참가하지 않은 나단을 꼭두각시 후계자로 세우기 위해서는 이미 한 번 치른, 나바툰을 무효화시켜야 했다.

「그것이, 그 총이 너를 죽이려고 한 총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아느냐.」

무크라르 왕의 질문에 자하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이 총에 묻어있던 피와 그날 현장에 남아있던 혈액의 DNA 검식을 의뢰해 두었습니다. 남아있던 증거가 혈액뿐이라서 잘 간직해두었지요. 물론 일치한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가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무크라르 왕은 종이를 읽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자하르 왕자에게 못 박힌 채였다.

「무엇을 원하는 거지?」

직접적인 질문에 자하르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전하의 강녕함과 나라의 안녕입니다. 그러려면 전하의 권력을 도둑처럼 빌려와 그 명예를 훼손하려한 자를 처벌해 기강을 바로 세워주셔야 합니다.」

한마디로 네가 건강하고 나라가 무사하고 싶으면 내 말대로 하라는 것이다. 무크라르 왕은 온화한 낯짝으로 자신을 협박중인 아들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아주 작은 청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그 아주 작은 청 한 가지가, 지금 자하르가 이곳으로 자신을 찾아온 목적임을 국왕은 직감했다.

「제 은인과 제가 혼인할 수 있도록 해주시면 됩니다.」

갑작스러운 영어에 장석민이 놀라서 자하르를 돌아보았다. 내도록 아랍어로 대화를 나누던 그가 영어를 사용하는 까닭은 장석민에게도 대화를 들으라는 뜻이다.

생각보다 맥이 빠지는 요구에 무크라르 왕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게 무슨 소리냐. 알레이야와의 결혼은 이미 내가 허락을 하지 않았더냐.」

「알레이야 님은 제 은인이 아닙니다. 그분고는 결혼할 수 없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럼 대체 그게 누군데?」

장석민은 눈을 부릅뜨고 자하르를 노려보는 중이었다.

당신 미쳤어? 무슨 생각이야? 지금 나랑 결혼하겠다고,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어서 국왕을 협박하는 거야? 야, 이, 개또라이가!

「지금, ──.」

자하르의 말을 가로 막으며 장석민이 손을 내저었다.

「전 아닙니다!」

갑작스러운 그의 난입에 자하르의 시선이 삭막하게 번뜩였다.

「건방진 것. 네가 나설 자리가 아니다.」

국왕의 꾸짖음에도 장석민은 일단 고개를 내저었다.

「저는 아닙니다. 전하.」'

「당연히 너일 리가 있겠느냐. 헛소리 말고 썩 꺼져라.」

무크라르 왕이 귀찮은 파리를 쫓아내는 듯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그걸 바라보는 자하르의 표정이 한층 굳었다.

「이 사람입니다.」

자하르의 말에 장석민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무슨 소리냐. 방금 아니라는 말을 못 들었느냐.」

「원체 수줍음이 많은 성격이라 그렇습니다.」

장석민이 뭐라고 말하려 하자 자하르가 다정하게 웃으며 속삭였다.

입 닥쳐요.

오랜만에 듣는 저음에 장석민은 오싹 소름이 돋았다.

자하르가 국왕을 향해 말을 이어갔다.

「쟝이 저를 도와준 은인입니다. 이 총은 그날 현장에서 사라진 중요한 증거입니다. 그리고 이 총을 가져다 준 사람이 쟝입니다.」

「나라는 증거가 어디……, …….」

장석민은 화다닷 입을 다물었다.

「그 증거가 무엇이냐.」

무크라르 왕도 그리 물었다.

「총 옆에 놓여있는 종이에 그의 사인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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