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민이 흠칫하여 손에서 폰을 놓쳤다. 자하르가 폰을 집어 장석민의 손에 도로 쥐어주며 말했다.
「농담입니다.」
「……. …….」
장석민은 자하르의 눈에 인 살기를 분명히 읽었다. 장석민이 폰을 앞 칸으로 전진시켰다.
「왜 그랬습니까.」
자하르가 물었다. 무엇에 대한 이유를 묻는 것인지 알 수 없어 장석민은 뭐가요, 하고 대꾸했다.
「왜 그 여자가 제 은인이 되어버린 겁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변론의 여지가 없었다. 장석민은 죄송합니다, 하고 사과의 말을 우선 건넸다.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저는 그때, 어떻게든 여기를 벗어날 생각뿐이라서…….」
자하르의 폰이 움직였다. 평범한 수였다.
「……왜 그녀가 무크라르 전하께 찾아간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무크라르 전하께 찾아간 것이 아니라 나단을 찾아간 것입니다.」
「네?」
「나단은 그 여자의 사촌오빠입니다.」
「어, ……그러면 자하르 왕자님과도……」
「네. 사촌입니다. 왕실내의 근친혼은 흔합니다. 아니, 권력의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어 권장되기도 하지요.」
장석민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 투성이였다. 장석민은 이마를 감싸 쥐고 한숨을 내쉬었다.
「왜 안 나타나셨습니까.」
갑작스럽게 날아든 질문에 장석민이 바로 대답하지 못하자 자하르가 웃음기 어린 다음 말을 덧붙였다.
「바로 나타나셨어야죠. 그러면 제 비가 되었을 텐데.」
「……그럴까 봐 못 나타났다는 생각은 안 하시는군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제가 좋다고 사진 한 장 보고 먼바다를 건너오신 분인데.」
자하르의 농담을 듣고 있자니 장석민은 끔찍한 내일은, 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비밀 기지 안에서 그냥 이렇게 체스나 두면서 시시덕거리면 좋을 텐데.
……미친놈.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은 이제 아예 하지도 않다니. 이 스톡홀름은 병원에 가도 고칠 수가 없을 것 같구나.
「죄송합니다.」
장석민이 사과의 말을 건넸다.
「뭐가요.」
당신 자존심을 나단과 무크라르 왕 앞에서 박살내서, 이렇게 될 줄 모르고 빗자루에게 그날의 정황을 적은 편지를 보내서, 문단속 잘하고 당신이 오면 개처럼 꼬리를 흔들라고 했는데 날름 납치당해서, 탑에서 의식을 잃은 당신을 버려두고 가서, ……살레하와 그날 대화를 나누는 바람에, 결국에 여기까지 일을 끌고 와서,
「제가 이길 것 같습니다. 이번 판은, 미리 죄송합니다.」
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삼키고 장석민은 너스레를 떨었다. 자하르가 글쎄요, 하고 자신의 말을 옮겼다.
「무크라르 전하는, ……히룬에 누구의 이름을 써뒀을 까요.」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하르가 말을 이었다.
「애초에 열 생각이 아니었으니까요.」
「네? 설마 쓰러질 걸 미리 알고 있기라도 했다는 겁니까?」
「쓰러진 적이 없다, 라고 해야 정확하려나.」
「……?!」
「쓰러진 것이 아닐 겁니다. 쓰러진 척 한 것일 테지요. 그리고 나단 형님을 시켜 국정을 감시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러니 혈액검사에서 어떤 독인지 밝혀내지 못한 겁니다. 애초에 독도 병도 없었으니까요.」
자하르가 말끝에 아마, 라고 단서를 덧붙였지만 장석민은 그가 어느 정도 조사를 마치고 결론을 내렸음을 알아챘다. 쓰러졌다 회복한 사람인데 유난히 혈색이 좋아보이던 무크라르 왕의 얼굴이 떠올랐다. 오싹 소름이 돋았다. 권력이 대체 뭐라고 그런 짓까지 벌인단 말인가.
「그런데 왜 나단 왕자님을 하필, …….」
「다루기 쉽다고 생각했을 테지요. 더군다나 공식 석상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으니 다른 사람들의 견제를 받지도 않을 테고.」
자하르가 비숍을 움직였다. 장석민은 공격에 대항을 하며 말을 옮겼다.
「──전혀 아닌데, 말입니다.」
자하르의 말에 장석민도 공감하는 바였다. 사실 그 집안에서 다루기 쉬운 인간이 과연 한 명이라도 있을까 싶었다.
「둘의 연합도 언젠가는 끝날 겁니다. 둘 다 서로를 절대 믿지 않을 타입이라서.」
그걸 조금 앞당겨야 할 텐데, 하는 혼잣말에 자하르의 음성에 고뇌가 묻어난다. 장석민이 말을 움직이며 입을 열었다.
「가셨던 일은, ……잘 마무리 되었나요?」
「아직은 마땅한 대답을 드릴 수 없습니다. 시간이 조금 필요한 일이라서요.」
장석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쟝은, ──.」
나이트를 손에 쥐고 자하르가 말을 삼켰다. 장석민은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 흠칫, 손끝이 떨렸다.
「저와 이곳에서 평생 살아달라고 부탁한다면.」
「──!」
「듣지 않으시겠죠?」
자하르의 물음에 장석민은 선뜻 그러겠노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자하르가 죽는 것은 원치 않았다. 그래서 그 늙은이의 후궁이 되겠다고 말은 했지만, 평생 여기서 당신이랑 살겠다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겠지만 그것이 장석민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속내를 숨기고 저렇게 말했다간 그게 거짓임을, 저 눈치 빠른 인간이 모를 리 없다.
「그러니 제가 가둬놓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겁니다.」
자하르가 짧게 웃으며 쥐고 있던 나이트를 움직였다. 장석민은 체스판을 우울하게 바라보았다. 이것이 자하르와 두는 마지막 대국이 될 터, 주어진 시간을 모두 쓰면서 말의 움직임을 머릿속에 새겨두고 싶었다.
장석민은 신중하게 룩을 옆으로 움직여 자하르의 말을 잡았다.
「오늘 밤, 빨간 두건을 씌워두고 밤새 범할 생각이었는데──.」
자하르의 눈이 가늘게 길어진다. 그가 비숍을 움직였다.
「평생 그 두건은 못 쓸 것 같습니다.」
장석민은 공격적으로 자하르의 수에 대응했다.
「안타깝군요.」
자하르의 폰이 움직였다. 장석민은 대각선으로 나이트를 움직여 자하르의 폰을 잡았다.
「모두 벗겨놓고 그것만 씌워두고 가랑이를 벌린 채 좆질을 할 생각에 한달음에 달려왔는데, ──사실, 아까 알현실에서 그대로 사람들 앞에서 쟝을 범해버릴까도 생각했습니다.」
「──! 미쳤습니까?」
「그러면 쟝은 다른 사람의 후궁으로 가는 일도 없을 테고 저는 가짜 인어공주와 결혼하는 일도 없을 테고, 행복한 결말이군요.」
자하르가 웃으면서 퀸을 옆으로 세 칸 움직였다.
「……그런 건, 제가 사양합니다.」
장석민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늙은이의 후궁으로 들어가는 것은 괜찮고요?」
장석민의 입술이 움칫, 떨린다. 자하르가 눈을 살짝 내리감은 채로 체스판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저도 사람들이, 쟝의 구멍이 얼마나 맛있고 찰진지 아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그러니, 그건 사적인 공간에서만 합시다.」
썩은 이야기를 내뱉는 와중에도 사뭇 경건해 뵈는 자하르의 옆얼굴을 보며 장석민은 한숨을 지었다.
「제가 가면 같이 체스 둘 사람이 없어서 어쩌…….」
그 순간 웃고 있던 자하르의 얼굴이 서늘하게 굳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장석민은 재빨리 억지로 쾌활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하하. 뭐. 무크라르 전하는 저한테 손이나 대겠습니까. 어디 골방에 일이 년쯤 처박혀 있다가 나오면 되겠지요. 그러면 저에 대한 이야기도 잊힐 테고. 그때쯤 자하르 왕자님이 한국 대사관에 연락 좀 해주세요.」
자하르가 말없이 체스판 위로 시선을 두었다. 장석민은 멋쩍은 듯이 몇 마디를 덧붙였다.
「싫으면 말고요. 그냥 제가 알아서 탈출할게요. 벽을 타고 오르든가, 불을 지르든가.」
농담으로 던진 이야기였다. 처음에 잔나툰으로 들어왔을 때, 자하르를 만나기 위해 장석민이 저질렀던 일들을 언급한 것이다. 자하르가 그날들을 떠올리며 웃길 바랐다.
그는 여전히 무거운 침묵을 지켰다.
「아님, 하늘을 날 수 있을지도 모르죠. 말라쿤의 현신이잖아요.」
필사의 발악이었다. 썰렁한 복학생이 좋아하는 신입생 앞에서 달달 외운 개그를 내뱉고 있는 기분이었다. 제발 좀 웃어줘라. 한 번만 웃어주면 안 되냐? 이 비싼 중동 왕자야.
「뭔가 착각하고 계신 듯한데, 쟝은 말라쿤이 아닙니다.」
「…….」
저 말투는 저 집안사람들의 내력인가.
「말라쿤보다는 레이룬에 가깝지요.」
「……그게 뭔가요?」
「길들여지지는 않지만 제 주인을 잊지 않는 새를 레이룬이라고 부릅니다.」
이해되지 않는 설명에 장석민은 눈을 깜빡거렸다.
「매사냥을 위해 매를 길들여야 합니다. 하지만 대다수가 하늘로 날아올라 다시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몇은, 가끔 주인에게 돌아오진 않지만 머리 위를 맴도는 새들이 있습니다.」
자하르의 시선이 장석민의 얼굴을 더듬었다. 천천히, 그러나 충분하게.
「가끔 그 매는 제가 내키면 사냥감을 물어다주곤 합니다. 하지만 주인이 원할 때 돌아오는 것은 아니지요.」
「……이상한 새군요.」
그 이상한 새가 자신과 비슷하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장석민은 난감했다.
「그 레이룬을 길들이는 것을 숙원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요. 잡힐 것 같으니까.」
「잡히나요?」
「아니요. 레이룬은 새의 타고나는 성격 문제이기 때문에 훈련으로는 교정할 수 없습니다.」
자하르가 나이트로 장석민의 폰을 잡았다.
「레이룬을 가리켜 밤하늘을 나는 새라고 합니다. 보이지 않는 밤하늘 어딘가에서 주인의 주변을 맴돌고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장석민의 차례였다. 퀸을 움직이려던 장석민은 어라, 하고 눈을 깜빡였다. 대체 언제…….
「체크메이트군요.」
자하르가 낮게 중얼거렸다. 장석민이 고개를 들었다. 자하르가 자신의 킹을 체스판 위에 쓰러트렸다.
「그러니, 쟝은 제게 심장을 먹일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장석민의 승리였다. 장석민 본인조차 인식하지 못했던.
자하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즐거운 대국이었습니다. 쟝의 소원대로 고국으로 돌려보내 드리겠습니다.」
「무슨,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라겔에게 말해둬서 전용기를 준비해두었습니다.」
자하르의 말에 장석민의 머릿속에 희미하게 스치는 기억이 있다. 아까 이곳에 오자마자 자하르가 했던 전화가 그것이었단 말인가.
「가지 않겠습니다.」
장석민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자하르의 눈이 여전히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제가 가면, 왕자님은, 자하르 왕자님은 죽는 거 아닙니까.」
자하르가 대답하지 않았다. 왕의 명을 거역하고 지금, 장석민을 보낸다는 것은 그런 의미였다. 장석민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비행기에 오를 수 없었다.
「가지 않겠습니다.」
자하르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권유를 하는 게 아닙니다.」
그의 목소리에 엷은 분노가 배어났다. 하지만 장석민은 고개를 저었다.
「압니다. 하지만, ──.」
자하르가 장석민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금방이라도 뼈를 바스라트릴 것 같은 힘이었다. 그의 눈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보내고 싶어서 보내는 게 아닙니다.」
「──.」
「지금이라도 그냥 사람들 앞에서 쟝을 다 벗겨놓고 그 배가 터질때까지 정액을 싸질러서, 이게 누구 것인지 알리고 싶단 말입니다.」
웃고 있는 회색 눈동자에서 푸르스름한 기운이 일렁였다. 일을 준비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무크라르 왕이 움직일 것을 알았지만 장석민을 후궁으로 내놓으라는 천박한 안을 들고 나올 거라는 생각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알고 있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모르겠다. 손에서 놓고 싶지 않아서, 제 욕심으로 장석민을 쥐고 있었던 것이다.
「──권유가 아닙니다.」
자하르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장석민의 어깨를 쥐고 있던 손도 풀렸다. 그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이전에 제가 소원 내기에서 이겼던 적이 있지요. 그럼, 이건 그 소원으로 합시다.」
그의 손가락이 장석민의 어깨를 툭툭, 두 번 두드렸다. 장석민은 어깨에 올라가 있던 손이 멀어지는 것을 보았다. 장석민은 무심결에 자하르의 손을 움켜쥐고 말았다.
「──.」
자하르의 눈이 벌어졌다.
「──, 저는, …….」
무슨 생각으로 자하르의 손을 움켜쥔 것인지 본인도 깨닫지 못했다. 그냥, 이대로 손이 멀어지면 자하르를 평생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가슴속에 이유를 알 수 없는 울화가 치민다. 숨을 쉴 때마다 뜨거운 무엇인가가 숨통을 쥐고 흔드는 느낌이다.
「……이번, 게임은 제가 이긴 겁니까.」
장석민이 고개를 떨구고 중얼거렸다. 그렇지요, 하는 낮은 목소리가 돌아왔다. 장석민은 자하르가 이번 게임을 일부러 져준 것임을 안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체크메이트가 되도록 대국을 유도한 것이다.
「그럼 제 소원을, …….」
「알고 있습니다. 안쪽으로 다른 통로가 있습니다. 그쪽으로 나가면 됩니다.」
장석민은 자하르가 이미 탄로 난 비밀기지로 자신을 데려온 이유를 그제야 깨달았다. 통로는 장석민이 알고 있는 것 외에도, 더 있는 모양이었다.
「그건, ……, ……제 소원이 아닙니다. 제 소원은…….」
「──?」
장석민은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의 입으로 이런 말을 하는 날이 오다니.
여자에게는 수백 번, 수천 번, 쉽게 속삭였던 가벼운 말이었다. 지금은 그것이 딱 죽을 만큼, 힘들었다.
「……요.」
「……. ──.」
너무 작게 말해서 자하르가 듣지 못했던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장석민은 다시 입술에 힘을 주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말해서──.
다음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자하르가 장석민의 손을 잡은 채로 그를 벽에 몰아 세웠다. 바싹 몸을 붙인 채로, 그가 장석민을 쏘아보았다.
「뭐라고 했스니까.」
잡아먹을 듯한 눈빛이었다. 호흡이 힘들 만큼, 무서웠다. 장석민이 입술을 달싹거리자 자하르가 그의 몸을 벽에 강하게 밀치며 다시 물었다.
「뭐라고 한 겁니까.」
「……, 하자고. …….」
속삭임에 가까운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숨이 뜨거웠다. 얼굴에 피가 몰렸다. 어디에 눈을 둬야 할지 몰라, 장석민은 자하르의 어깨로 시선을 내렸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머리 위에서 자하르의 숨소리가 들렸다. 뭐라고 말이라도 해주면 좋으련만, 그는 한참이 지나도 입을 열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다가왔던 자하르의 몸이 멀어졌다. 그가 복도 안쪽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장석민의 얼굴은 더 붉어졌다. 용기를 끌어 모아 자하르에게 했던 말이 거절당하자 무안함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
복도 저쪽으로 사라졌던 자하르가 다시 나타났다. 장석민은 가방을 찾으려고 고개를 돌렸다.
「뭘 찾으시나요.」
「가방이, 이쯤에…….」
자하르가 차단기를 내렸다. 구웅, 하는 소리와 함께 육중한 철문이 이중으로 닫혔다.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차단해두었습니다.」
「네?」
자하르가 입고 있던 옷을 벗으며 말을 이었다.
「쟝의 마음이 도중에 바뀌면 안 되니까요.」
「…….」
반듯한 흰색 옷이 그의 발치로 떨어졌다. 자하르가 셔츠의 단추를 끌러 내렸다.
「비행기는 내일 새벽에 뜰 겁니다. 그러니까,──.」
자하르가 장석민의 손을 잡아챘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다가온 그의 몸에 장석민이 흠칫, 놀랐다. 자하르가 장석민의 허리를 바싹, 끌어안은 채 속삭였다.
「내일 새벽까지는, 쟝을 놓아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옷을 벗어주세요.
그 말을 들었을 때 장석민은 멍청한 표정으로 자하르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자하르가 자신의 셔츠를 벗어 던지며 다시 한 번 말했다.
옷을 벗어주세요. 쟝의 손으로 속옷까지 모두.
왜요?
조금 전 말이, 얼마나 머저리 같은 줄 알면서도 장석민은 그렇게 내뱉고 말았다.
쟝이 얼마나 나를 원하는지 보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자하르의 음성은 평연했지만 그가 얼마나 흥분한 상태인지는, 같은 남자로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스스로 옷을 벗고 다리를 벌려주세요.
고귀한 청을 하는 사람처럼 자하르가 장석민의 손을 잡고 속삭였다. 장석민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끄럽다고 뺄 상황도 아니고 그럴 나이도 아니었다. 입고 있던 전통복을 벗어서 소파에 걸쳐두었다. 단추를 하나씩 끄를 때마다 장석민의 동작을 지켜보는 남자의 시선이 조금씩 진해졌다.
옷자락이 살갗을 스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장석민은 셔츠를 모두 벗어 바닥에 던졌다. 바지를 내리려고 손을 올리는데 자하르가 자신의 혀로 입술을 축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걸 보고 나자 손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본인도 제어가 되지 않는 느낌이었다. 바지를 아래로 내리자 흰색 속옷 한 장만 남았다.
「마저 벗어주세요.」
자하르의 사분사분한 음성이 꿈결처럼 들렸다. 장석민은 천천히 속옷의 끈을 손가락으로 쥐고 아래로 끌어내렸다. 반쯤 일어서 있던 성기가 밖으로 툭, 불거져 나왔다. 자하르의 시선이 어디에 머물러 있는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거 아십니까.」
자하르가 한 걸음 다가왔다. 남자의 체향이 훅, 하고 끼얹어지듯 코에 닿았다. 장석민은 얼굴이 달아올랐다. 흥분한 수컷의 냄새였다.
「쟝의 성기는 앞뒤가 다 먹음직하게 생겼습니다.」
「──!」
자하르의 손이 장석민의 아래를 가볍게 움켜쥐었다. 손가락 사이로 힘을 받기 시작한 살덩이를 훑어 내리며 그가 말을 이었다.
「사내새끼의 좆을,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처음이거든요.」
자하르가 장석민의 몸을 소파에 눕게 하고 허리를 숙였다. 장석민이 헉, 하고 숨을 삼키며 자하르의 머리카락을 쥐었다. 펠라를 처음 받아보는 것은 아니었다. 이전에 여자들과 할 때 숱하게 즐기던 것이었다. 하지만 맹세코 그가 해왔던 것은 이런 행위가 아니었다.
단번에 삼켜진 살덩이를 두꺼운 혀가 빨아올렸다. 장석민의 입에서 연신 밭은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날카로운 이가 부드러운 살덩이를 씹자 장석민이흐느끼며 자하르에게 사정하기 시작했다.
「읏, 그만, ──제발.」
강하게 빨아올리는 힘에 장석민은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장석민은 입으로 강간을 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오늘 처음으로 깨달았다. 남자의 구강성교는 잔인하리만치 거칠었다. 하지만 아픈 것만은 아니었다. 그 긍지 높은 남자가 무릎을 꿇고 자신의 것을 빨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장석민은 아래에 피가 빠듯하게 몰렸다.
「아, 아아! 아, 흣──.」
초조함에 입이 바싹 말랐다. 조금만 더 하면, 조금만 더 하면, 이 흔들리는 쾌락의 파도를 넘어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자하르의 머리카락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었다.
「──?」
자하르가 장석민의 아래에서 입을 떼었다. 그가 혀로 입술을 핥으며 느릿하게 말했다.
「가고 싶습니까?」
「……, …….」
「가고 싶으면, 스스로 말해보세요.」
「나쁜, ……, …….」
욕을 한바가지 하고 싶은 것을 참느라 입술을 깨물었다. 자하르가 천천히 일어나 장석민의 몸을 뒤로 돌렸다. 그러고는 장석민의 손을 이끌어 둔부에 가져다 댔다.
「벌리세요.」
「…….」
「잔뜩 벌려서, 어디에 넣어야 좋을지 제게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눈이 벌게져서 쏘아보고 있는 장석민의 귓가에 자하르가 속삭였다.
「그게 쟝의 소원이었잖아요. 남자의 좆에 박히고 싶어 했지 않습니까, 네?」
자하르가 부푼 성기를 장석민의 허벅지에 문지르며 말했다.
「어서 보여주세요.그래야 쟝의 소원을 들어드릴 수 있습니다.」
빌어먹을 변태새끼.
장석민은 소파에 얼굴을 처박았다.이제 고개를 들고 할 수 없는 짓을 해야만 했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엉덩이를 잡고 틈을 벌렸다. 뭉툭한 살덩이의 선단이 그 틈에 걸쳐졌다.
「이제는 넣어달라고, 스스로 그걸 원한다고 말해보세요.」
「──!」
작작하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자하르가 장석민의 성기를 움켜쥐고 손에 힘을 주지 않았다면, 그렇게 외쳤을 것이다.
「아파, 뭐하는──, ──읏.」
「──저도 지금 이 정도는 아픈 것을, 간신히 참고 있습니다.」
「……, …….」
「빨리 넣어달라고 말해주세요. 쟝이 그걸, 원한다고, 그걸,──당신이 원한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자하르의 음성에 초조함이 묻어났다. 늘 여유로운 그가 자신 때문에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이 머릿속을 뜨겁게 데웠다. 장석민은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잘 안 들립니다.」
「넣어주……, ……요.」
속삭이는 듯한 작은 목소리였지만 그 한마디에 자하르의 눈빛이 형형하게 바뀌었다. 벌어진 틈 사이로 자하르가 성기를 밀어 넣었다.
「으, 윽……,흣.」
소파에 상반신을 기댄 채 서 있던 장석민의 입에서 흐느낌이 흘러나왔다. 자하르가 장석민의 몸 위에 자신의 몸을 겹치고 말했다.
「아직 반도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으, 아파, …….」
「쟝이 넣어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자하르가 뒤에서 장석민의 엉덩이를 움켜쥐었다.탄력 있는 둔덕이 한 손에 잡힌다. 그 사이에 반쯤 들어간 상덩이가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흉흉한 기세로 부풀어 있다.
며칠 열지 않았던 몸이 어느새 처음처럼 잔뜩 빡빡하게 아래를 조여들었다. 자하르도 미간을 찌푸렸다.
「몇 번이고 해도, ──,──.」
자하르가 허리를 쳐올리자 장석민의 몸이 긴장으로 굳었다. 그럴수록 아래를 조여드는 힘도 더해갔다.
「처녀의 질처럼, ──빡빡하게 조여드는군요.」
아주 조금씩 안쪽으로 파고들어오고 있었다. 자하르가 천천히 삽입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 장석민은 몇 번이고 제발, 천천히 해달라고 부탁해야 했다.
「──,제발, ……아, ……읏.」
「천천히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음성에 열기가 엷게 배어있다.
「어린 아이 다루듯이, 천천히 해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말을 하는 틈을 타고 단단한 살덩이가 몸 안으로 한 치쯤 파고들었다.장석민이 헐떡거리며 소파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아래가 벌어지는 느낌에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았다.
"내가 미쳤, ……이걸, 왜, ……. ……시발."
장석민이 시근덕거리며 한국어로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자하르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왜요.」
「욕하고 계셨죠?」
「──.」
귀신이다.
알고보면 이 자식도 나단처럼 한국계 유모를 둔 게 아니었을까.
「쟝이 욕을 하는 소리를 들으면, 뭔가, ──, 색스럽습니다.」
뒤에서 치받아 오는 힘에 장석민이 윽,하고 앞으로 쓰러졌다. 자하르의 손이 그의 몸을 받쳐 들었다.
"시발,──."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은 압박감에 장석민은 또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고 말았다. 자하르가 잠시 멈칫하더니 장석민에게 속삭였다.
「다시 한 번, 해보시겠습니까?」
「네? 뭘, …….」
「얼핏, 기억이 나는 듯도 해서요.」
「무슨, 말을──.」
「뭔가 주문 같은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의식이 없는 와중에 계속 같은 말이 들려와서.」
자하르는 장석민이 의식이 없는 자하르를 둘러업고 계단을 올라오면서, 시발타령을 하던 것을 말하고 있었다.
「욕이었군요. 그게.」
「그, ……, …….」
「그런데, 내가 그 소리를 들으면, ──좆이 터질 것 같이 흥분된단 말입니다.」
자하르가 장석민의 엉덩이를 잡아 벌렸다. 장석민이 놀란 눈으로 뒤를 돌아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자하르가 가늘게 웃었다.
「찢어집, ──.──!」
아슬아슬하게 열린 아래로 단단한 살덩이가 푹, 하고 들어왔다. 놀라서 벌어진 입술에서는 제대로 된 단어도 나오지 않았다.
자하르가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그의 이마에도 땀이 배어났다.
「──다, 들어갔습니다.」
「──, …….」
「제 좆이, 쟝의 구멍에 들어가 있습니다.……느껴집니까?」
장석민이 대답하지 않자 자하르가 허리를 퍽, 하고 치받았다.
「헉──,」
「느껴지냐고 물었습니다.」
「아, ──, ──.」
장석민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자하르는 만족하지 못한 듯이 연신 거세게 허리를 추어올렸다. 퍽퍽, 하고 아래를 두드리는 충격에 장석민의 몸에 식은땀이 배어나기 시작했다.
「내가, 당신의 안에, 성기를 꽂아 넣고,──하고 있는 게, 느껴지냐는 말입니다.」
장석민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느껴, ……,느끼고, 읏.」
장석민의 말을 들은 자하르가 거칠게 아래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틈없이 다물린 내벽에 단단한 성기가 질척거리며 마찰했다.
「아, 읏, 아아,──,──.」
소파에 닿은 장석민의 성기가 반쯤 힘을 받아 얼룩을 만들고 있었다. 뒤에서 사정없이 박아오는 힘에 장석민은 자신이 느끼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구분할 수 없었다. 온몸의 감각이 뒤섞여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아래가 뜨끈하게 젖어드는 느낌에 장석민은 처음에 너무나 고통스러워 실금을 한 거라 생각했다.
「아래를 만져주지 않아도 가는군요.」
「……!」
이죽거리는 듯한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자신의 성기에서 뿌연 액체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자하르가 성기를 빼지 않고 그대로 장석민의 몸을 앞으로 돌렸다. 자하르를 정면에서 보게 된 장석민의 얼굴은 말 그대로 잘 익은 홍옥처럼 붉어졌다.
「잘했어요.」
그가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장석민을 끌어안고 속삭였다.
「다 좋은데, 질이 너무 빡빡해서 한 번은 풀어줘야 하거든요. 쟝이 한 번 가고나면 아래가 훨씬 부드라워진단 말입니다.」
「대체 제가 그런게 어디 있다고, ……, …….」
자하르가 저런, 하고 혀를 찼다. 그가 손을 뻗어 한껏 벌어져 있는 아래를 더듬으며 말을 이었다.
「쟝은 이 구멍으로 느낍니다.」
「──!」
반박을 하고 싶어도 이미 한 차례 뒤로만 느끼고 사정을 해버린 터라,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남자의 성기를 넣어주면 오물거리면서 조이는 이것을, 그럼 뭐라고 부릅니까」
자하르의 낮은 속삭임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공포와는 또 다른 긴장이었다. 그가 장석민의 몸을 끌어안고 어르듯이 만지며 다시 물었다.
「뭐라고 부르나요. 한국말로 가르쳐주세요.」
「……. 됐습니다, 그런 말은, …….」
「알려주세요.」
자하르의 속살대는 음성에도 장석민은 입술을 고집스럽게 다물었다.자하르의 입술이 귓바퀴에 닿았다. 장석민의 몸이 불에 댄 것처럼 퍼뜩, 뛰어올랐다.
「뭐, 뭐하시는──.」
「귀를 핥았습니다.」
장석민이 손바닥으로 황급히 귀를 가렸다. 자하르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쟝은, 정말 특이한 사람입니다.」
「제가 뭘, …….」
「아래에 남자 좆을 꽂아 넣고 있는 와중에, 귓바퀴 한 번 핥았다고 그런 표정을 짓나요.」
자하르가 장석민의 어깨 아래로 손을 넣어 자신의 허벅지 위로 그를 앉게 했다. 장석민이 윽,하고 신음을 삼켰다. 몸의 무게가 더해지자 결합이 조금 더 깊어진 느낌이었다.
장석민의 몸이 긴장으로 움츠리자 자하르도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아래가 너무 조입니다. 조금, 힘을 빼세요.」
「……, 마음대로, 되는 게──.」
아래를 찰박, 하고 얕게 쳐오는 성기의 느낌에 장석민이 흡, 하고 숨을 삼켰다. 생리적인 눈물이 흘러내렸다.
「──쟝의 소원이었잖아요.」
자하르가 장석민의 등에 손을 두르고 속삭였다.
「소원대로 해주는 건데,──울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울고 싶어서 우는 게 아니라, 너무 커서, 악!」
얕게 들어오던 성기가 단번에 안쪽을 파고들었다, 자하르의 목에서 탁한 신음이 흘렀다.
「굳이, 흥분시키려는 말은 안 하셔도 됩니다.」
「언제, ……아, 읏, 흑, ……!」
「그렇지 않아도, 지금 아래가 터질 것 같으니까.」
낮게 깔린 목소리가 위험하게 흔들렸다. 자하르가 장석민의 몸을 바싹 끌어안은 채로 허리를 거세게 움직였다. 절대로 닿을 수 없을 거라고 믿었던 안쪽의 속살까지 남자의 살덩이가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장석민의 입에서 비명 같은 울음이 터져 나왔다.
「아! 아아, 아! 읏, 아아!」
몸이 흔들렸다. 머릿속의 생각도, 몸을 내달리는 감각도 함께 흔들렸다. 어디론가 떨어질 것 같은 두려움에 장석민은 자하르의 몸을 힘껏 끌어안았다.
자하르가 장석민의 얼굴을 쥐어 자신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집요하고 날카로운 시선이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 시선이 어딘지 모르게 불안감을 띠고 있다는 것이었다.
장석민은 알아챘다.
남자도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쟝, ──,──.」
자하르가 장석민의 이름을 불렀다. 온전하지 않은, 이름이었지만 장석민은 그가 자신을 불러주는 것이 좋았다. 자하르가 쟝, 이라고 내뱉을 때마다 보이는 입술의 움직임이 좋았다. 그 달콤한 울림이 좋았다. 자신을 끌어안은 넉넉한 팔도, 우아한 손가락도, 자신에게만 보여주는 그 더러운 성질머리까지 좋았다.
빌어먹을.
장석민은 욕을 주워섬겼다.
자하르의 얼굴이 바싹 다가왔다.코끝이 맞닿는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그의 숨결이 느껴졌다. 아래가 타오를 것 같았지만 장석민의 신경은 온통 남자의 입술에 쏠려 있었다. 마치 첫키스를 노리는 얼뜨기 소년처럼, 달뜬 시선으로 자하르의 입술만 바라보았다. 목이 타들어갔다. 몇 번이고 침을 삼켰다.
자하르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제 입술이 그렇게 탐이 납니까?」
「……제가 언제.──.」
뒷말은 자하르의 더운 숨결 사이로 삼켜졌다. 장석민은 남자가 아래를 빨았던 장면보다 지금 이 상황이 몇 배는 더 믿기지 않았다. 입술이 맞물렸다. 자하르가 혀를 넣어 장석민의 입술을 핥았다.
「입 벌려 봐요.」
그의 나지막한 음성이 목안의 깊은 곳을 훑어 내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자하르의 혀가 장석민의 입술과 잇몸을 차례대로 핥았다. 몸이 오싹오싹 떨렸다. 뜨거운 감각이 혀를 통해 전해졌다. 혀가 입안의 점막을 두드렸다.
남자와 키스를 하고 있다──,라는 문장이 머릿속에 완성되는 순간, 자하르의 어깨를 붙들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래를 뜨끈하게 적시는 감각에, 놀란 것은 장석민뿐만이 아니었다. 입을 맞추던 자하르도 얼굴을 떼고 아래를 확인했다.
장석민의 성기가 울컥 울컥, 남아있던 정액을 사출하고 있었다. 자하르의 눈에 가느다란 웃음이 머물렀다.
「──입을 맞춘 걸로, 간 겁니까?」
「……, …….」
당혹스러움과 수치로 장석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울고 싶었다. 지금 자신의 몸에 무슨 일이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의 얼굴이 달아오르는 광경을 지켜보는 자하르의 눈빛도 조금씩 변했다.
낯선 얼굴이었다. 장석민은 몇번, 그 얼굴을 마주한 적이 있었다. 이제는 이 얼굴이 뜻하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자하르는 지금 기뻐하고 있다. 본인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그 기쁨이 배어나오는 것이다.
자하르의 입술이 다시 장석민에게 닿는다. 당혹감에 장석민은 입을 다문채 고개를 피하려고 했지만 자하르가 끈질기게 입을 대고, 입술을 맞물렸다. 뜨겁게 달아오른 점막을, 남자의 혀와 성기가 사정없이 범했다. 온통 질척대는 소리가 귀에 닿았다.
「──, ──, ──!」
자하르가 장석민의 입술을 깨문 채로 절정에 다다랐다. 뜨끈한 정액이 안쪽에 가득 들어찼다. 그 선연한 감각에 장석민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자하르가 밭은 숨을 뱉어내며 장석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초조한 공기가 두 사람의 주변을 감쌌다. 오늘밤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두 사람은 서로의 몸을 끌어안았다. 짐승처럼 엉겨 붙은 그림자가 열기를 띠고 흔들렸다.
장석민은 물끄러미 자하르가 잠들어 있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가 자신을 두고 먼저 잠드는 일은 거의 없었다.
피곤했구나.
그간 눈도 붙이지 못하고 일을 했을 거란 사실을, 조금 수척해진 얼굴을 통해 깨달았다.
소파에서 짐승처럼 성교를 하던 둘은, 결국에 장석민이 까무러치고 만 후에야 침실로 옮겨왔다. 조금 후에 다시 정신을 차린 장석민은 자신의 다리 사이에서 움직이고 있는 남자를 보는 순간, 이놈에게 인간적인 배려를 기대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국 침대로 옮기고 나서도 몇 번이나 더 몸을 겹치고 난 후, 자하르는 장석민의 위에서 내려왔다,
장석민은 자하르의 아름다운 얼굴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그가 확실히 잠들어 있음을 충분히 확인할 만큼, 천천히 몸을 일으켜 침대 밖으로 걸어 나왔다. 자하르는 여전히 깨지 않았다. 장석민은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고 옷을 벗어둔 곳으로 갔다. 다리 사이로 미처 빼내지 못한 정액이 흘러내렸다. 아까 자하르가 몸을 떼기 전에 손가락을 넣어 빼냈는데도 안에 고여 있던 모양이었다. 장석민은 소파를 짚고 서서 옷으로 아래를 닦아냈다. 가방에 있던 다른 옷을 꺼내 입는데도 식은땀이 흘렀다. 마지막으로 자하르가 준 베일을 주머니에 넣었다.
"……짐승 같은 놈이, 사양의 미덕도 모르고, ……젠장."
자하르가 들을 새라 작은 목소리로 그를 욕해주고는 장석민은 컴퓨터가 놓인 안쪽 서재로 들어갔다. 눈으로 재빨리 책장을 훑었다. 익숙한 책등이 들어오자 그는 망설임 없이 그것을 잡아당겼다.
예상대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