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30/35)

몇 시지?

고개를 돌려 시계를 확인해본 후 장석민은 장탄식을 터트렸다.

분명히 시간이 엄청나게 지난 것 같은 확인해보면 고작 10분, 20분이 지나 있었다.

"아아, 여기가 바로 정신과 시간의 방이구나."

이전에 만화에서 보았던, 1분이 365분이 되는 수련의 방을 떠올리며 장석민은 입맛을 다셨다. 책을 보는 것도 지겹고 맞지 않은 비밀번호를 두드리는 것도 지겨웠다.

이틀정도 지난 걸까.

장석민은 속으로 이곳에 들어온 시간을 헤아려본 후, 한숨을 지었다.이대로라면 자하르가 저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말 그대로 개처럼 꼬리를 흔들며 반길 것만 같았다.

"이 새끼. 하나도 안 위험한데 일부러 지 좋으라고 가둬놓고 간 거 아니야?"

제 욕망을 위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놈이었다.

"변태 같은 새끼. 나쁜 놈의 새끼."

소파 위에서 뒹굴거리던 장석민의 눈에 커다란 체스판이 돌아온 것도 그와 동시였다. 얼굴에 피가 몰렸다. 이제 건전하게 체스를 둘 수 있는 날은, 다시는 오지 않을 것만 같다.

"아,진짜 갑갑하잖아."

리문은 창이라도 나 있었지. 여기는 지하라서 밖을 내다볼 수도 없었다. 게다가 자하르가 차단기를 내리고 간 터라 밖에서 문을 열어주기 전까지는 감금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좋은 점은 누군가 흙발로 이곳에 찾아오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없다는 것이었다. 무크라르 왕의 축문 사건 이후로 장석민에게 연락해오는 왕자들이 늘었다. 

하일은 대놓고 거기서 나와서 자신과 일을 하자고 말을 했고 카힌은 자신에게 오면 유전을 하나 떼어주겠다는 서신을 보냈다. 다른 왕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하나같이 비현실적이고 호사스런 조건을 건넸다. 그럴수록 장석민은 무서웠다. 특히 나단 왕자가 연락해올까 봐 가장 두려웠다. 나른하게 웃고 있는 나단의 웃는 얼굴을 떠올리자 잊고 있었던 두통이 찾아왔다.

에라, 모르겠다. 잠이나 자자.

장석민은 소파에 몸을 바로 누웠다. 침대까지 가기도 귀찮았다. 어차피 내 운명의 침대도 아니니까.

가물가물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장석민은 자고 일어나면 시간이 대여섯시간씩 지나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 …….」

멀리서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꿈결처럼 들려오는 그 다정한 음성에 장석민은 몸을 움츠렸다. 어쩐지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석민.」

남의 이름 함부로 부르지 말란 말이다. 기분 나쁘니까.

「장석민.」

명확한 그 발음에 머리에 찬물을 뒤집어 쓴 듯이 정신이 또렷해졌다. 잠기운이 싹 달아났다. 눈을 뜬 그곳에 나단의 웃는 얼굴이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 어, 어떻게…….」

분명히 자하르가 모든 문을 차단하고 간다 했는데.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몰라 장석민은 눈을 깜빡였다. 꿈을 꾸는 것인가?

「여기 있으니 찾기가 그렇게 힘들지.」

「…….」

장석민은 이것이 꿈이길 바라며 몇 번 더 힘을 주어 눈을 감았다가 떴다. 나단은 여전히 해사한 낯짝을 하고 앞에 서 있었다.

「자하르가 정말이지 꽁꽁 숨겨뒀구나.」

나단이 서재를 이리저리 둘러보며 말했다.

「자하르의 잔나툰이 여기군.」

「잔나툰은, ……궁의 이름이 아닙니까?」

자하르가 머무는 궁을 잔나툰이라고 불렀다.

「잔나툰 속의 잔나툰이지. 자하르에게 이곳이 낙원이 아니겠는가? 다른 왕자들도 하나씩은 갖고 있을 것이다. 보통은 이런 곳에서 대외에 내보일 수 없는 극비 업무를 처리하거나 하지.」

비밀 기지라는 단어에 자하르가 웃던 것이 떠올랐다. 영 틀린 얘기는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단이 주변을 연신 둘러보며 눈을 빛냈다. 장석민은 그가 이곳에 있는 것이 영 불편했다.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어떤 이유에서건 자하르가 숨겨놓은 장소까지 찾아와 자신을 보려는 목적이 썩 좋을 것 같지는 않았다.

「무크라르 전하께서 찾으신다.」

「네?!!」

병실 앞에서 느꼈던 당혹스러움은 비할 바가 아니었다. 장석민은 소파에서 아예 일어섰다.

「전하께서 저를 왜 찾으십니까?」

그날의 일이라면 병실에서 한 감사인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나.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신다.」

「무슨 말씀이요?」

장석민의 대답에 나단이 큰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이거야 원, 예의 교육을 대체 어떻게 시킨 것인지.」

「…….」

「자하르야 성격이 워낙 관대한 편이라 너를 어떻게 대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사분사분하다.

「무례하구나. 전하께서 하실 말씀이 있으면 그리로 가서 들어야지. 네가 뭔데 여기 앉아서 그 말씀을 전해 달라 하는 거냐.」

나단의 이야기를 통해 장석민은 자하르가 그간 한 번도 격식과 예의대한 이야기를 입에 담은 적이 없음을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그래. 죄송한 줄 알면 가야지.」

나단이 장석민에게 자신을 따라오라고 턱짓했다. 장석민은 머릿속으로 자신보다 키가 작고 가느다란 몸을 가진 나단을 제압하고 튀었을 경우,팔 다리 온전하게 무사히 생명을 보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따지기 시작했다. 일단 놈을 기절시킨 다음 미친 듯이 계단을 올라가서 당분간 숨어 있다가 자하르가 오면…….

「장석민.」

「……네?」

「내가 지금 이곳에 혼자 왔을 거라고 생각하나?」

나단이 품속에서 총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문의 인식기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탕탕, 하는 소리와 함께 인식기 주변에서 불꽃이 튀었다. 밖에서 문이 열렸다.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군대 수준의 경호원들을 보는 순간 장석민은 확률을 0으로 재조정했다.

「가지.」

나단이 장석민을 향해 손짓했다.

장석민은 이 가문의 사람들을 좋아하게 될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 거란 생각을 하며 걸음을 옮겼다.

「내 너를 계속 찾았다.」

장석민은 차라리 하일이 옆에서 무크라르 왕의 영어를 통역해줬으면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죄송합니다.」

뭐라고 하는지 모르니 일단 사과하자.

장석민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자하르가 너를 몹시도 아끼는 모양이구나. 신통력을 가진 말라쿤이니 당연하기도 하겠지.」

이번에는 반쯤은 알아들었다. 그래도 잘 모르니 장석민은 거듭 죄송합니다. 하고 손을 모았다.

「전하, 사람들이 말라쿤이 저승에서 아나크 왕의 영혼을 빼와 그를 다시 살린 것처럼, 이자가 전하를 살렸다고 칭송하고 있습니다.」

나단의 말에 무크라르 왕의 얼굴에 흐뭇함이 실린다.

그게 아니야! 의사 선생에게 감사하라고! 이 바보 멍청이 같은 인간아!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고 싶은 것을 참느라 장석민은 얼굴의 근육이 떨릴 지경이었다.

아, 골머리 아파.

장석민은 후딱 이 바보 같은 대화를 마치고 돌아가고 싶었다.

「그대 덕분에 내가 건강을 되찾았다.」

무크라르 왕의 얼굴은 사경을 헤매다 며칠 전에 의식을 되찾은 사람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혈색이 좋았다.

「그, ……축하드립니다.」

적당한 말을 찾을 수가 없어 장석민은 대충 얼버무렸다. 자신의 공으로 인정하기에는 돌아올 몫이 너무 크다.

「그대는 어찌하여 자하르의 후궁으로 들어왔는가?」

갑작스러운 질문에 장석민은 적잖이 당황했다. 이걸 뭐라고 하면 좋지. 당신네 둘째 아들이 납치해서 여덟 번째 아들이 타락시키라고 보냈는데, 이미 그는 타락의 끝을 달리고 있었고 그걸 우연히 알게 된 저는 그 타락의 길을 함께……, …….

「어쩌다 보니, 그리 되었습니다.」

「신이 그대를 인도하셨다.」

장석민은 허허로운 웃음을 지으며 시선을 삐딱하게 돌렸다. 그놈의 신을 내가 만나기만 하면 다리몽둥이를 분지르겠다.

「하지만 인도하신 길이 조금 잘못되었다.」

장석민은 잉? 하면서 무크라르 왕을 쳐다보았다. 방금 뭐라고 한 거지? 길을 잘못 들었다고? 어쩐 일로 이 가문의 사람이 옳은 말을 하는 거지.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전하.」

나단이 맞장구를 쳤다. 그가 일부러 영어로 이야기하는 것은 장석민에게도 들으라는 뜻이었다.

장석민은 두 부자를 번갈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오니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긴 의자에 누운 채로 말을 잇는 무크라르 왕의 눈빛이 탐욕스럽게 빛났다.

「나라가 위험에 빠졌을 때, 그동안 각기 보여주었던 충심이 무엇인지 알게 되니 참으로 마음이 아프더구나.」

「저도 진정 마음이 아팠습니다.」

장석민은 나단을 후려치고 싶다고 생각했다. 염병, 다 끝날 때쯤 종이 한 장 달랑 들고 나타나서 다된 밥에 재 뿌리던 놈이 누군데!

「모두들 어떻게 권좌를 차지할까 궁리하느라 바쁘더군. 믿고 있던 녀석들마저 그 모양이었다니.」

무크라르 왕이 쯧쯧, 혀를 찼다. 그의 손가락에 껴 있던 반지가 달그락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나를 진정으로 생각하여 움직인 것은 첫째 왕자인 나단뿐이었다.」

장석민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다른 왕자님들도 전하께서 누워계실 때 기도제를…….」

「무엄하다. 허락이 있기 전까지 입을 열면 안 되는 자리이거늘.」

나단이 엄한 목소리로 장석민을 꾸짖었다. 장석민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그대가 나단을 도와 나를 살렸으니, 나는 그대의 공을 인정하여 그대에게 큰 상을 내릴까 한다.」

어디 유전을 하나 뚝 떼어준다고 해도 전혀 반갑지 않았다.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대를 자유롭게 해주겠다.」

「……? 네?」

무크라르 왕이 말하고 있는 자유의 의미를 이해하기 힘들어 장석민은 되물었다.

「자유롭게 해주신다함은, ……뭘, …….」

「후궁은 궁의 주인에게 속하여 자유가 없는 몸. 그대를 자유롭게 해주겠다는 말이다.」

장석민은 눈을 껌뻑거렸다.

물론 자신에게 이게 좋은 말일 수도 있지만 무크라르 왕이 자신을 살린 대가라고 말하기에는 어딘가 석연잖은 구석이 있었다.

「그리하여 너를 내 후궁으로 들이겠다.」

「──!!!」

이건 또 뭔 왕또라이 같은 개소리야.

「원래 후궁은 순결해야 하는 법이라 다른 자의 후궁으로 갔던 사람은 다시는 들어갈 수 없는 자리이긴 하지만 자하르는 하젤이라 너는 괜찮을테지.」

전혀 안 괜찮다고! 당신 아들이 내 거기에 그거를 하고, 거기를 막 그러고, 그랬단 말이다!

「전하의 후궁이 되는 것은 네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이다. 고개를 조아려 어서 감사인사를 올리거라.」

장석민은 하마터면 그렇게 조잘대는 나단의 얼굴을 후려칠 뻔했다.간신히 정신을 수습하고 장석민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 말해보아라.」

여유로워 보이는 무크라르 왕의 낯짝을 보며, 그래도 저놈이 나를 생명의 은인으로 알 테니 죽이지는 않겠다는 생각에 장석민은 용기를 내었다.

「저는 본래 자유로운 신분이었습니다. 어쩌다가 후궁으로 들어갔지만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제 거처는 제가 결정할 수 있습니다.」

무크라르 왕이 장석민의 이야기를 흥미롭다는 듯이 들었다.

그래, 죽이지 않는다.

장석민은 침을 꼴깍 삼키며 말을 이었다.

「저는 무크라르 전하의 후궁으로 들어갈 생각이 없습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그 마음만 받도록 허락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더불어 대한민국 대사관에 연락을 취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자하르가 없는 지금 자신을 보호해줄 수 있는 것은 그동안 세금을 꾸준히 내온 조국뿐이었다. 말을 마친 장석민은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무크라르 왕의 허락을 기다렸다.

「하하하하하. 흥미로운 아이구나.」

무크라르 왕이 어깨를 젖히며 웃었다. 웃음소리에 보석이 흔들리는 소리가 뒤섞였다.나단도 함께 웃었다.

혼자 뻘쭘하게 서 있는 장석민도 하하, 하고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동양에서 온 말라쿤이여.」

말라쿤이라는 호칭을 무크라르 왕의 입에서 들으니 장석민은 더 몸둘 바를 몰라 했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듯하구나.」

불길한 기운이 장석민의 등골을 스치고 갔다. 저런 얼굴로 저런 말투를 사용 하는 사람을, 이미 네댓쯤 알고 있었다.

하일, 나단, 카힌, 자하르, ……무크라르까지.

「너는 지금 자하르에게 속한 몸. 자하르는 나의 아들이니, 아들의 것은 곧 아버지의 것이다. 이 나라에 속한 모든 것은 다 나의 소유란 뜻이다. 결국 너는 내 소유란 뜻이지.」

건성으로 늘어져 있던 무크라르 왕의 얼굴에 탐욕이 깃들었다. 장석민은 이전에 무크라르 왕이 썩 좋은 왕은 아니라고 말했던 자하르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자하르! 이 사기꾼! 좋은 왕이 아닌 게 아니라, 저건 개새끼잖아!

「하지만, 아랫사람의 것은 함부로 빼앗으면 사람들이…….」

장석민이 전에 사이프가 했던 말을 고대로 읊었다.

「닥치지 못할까.」

나단이 사납게 눈을 부라렸다.

「자하르는 위대하신 무크라르 왕께서 사경을 헤매실 때, 제 권좌의 보존만을 생각했다. 그런 아들에게 죄를 묻지 않고 너그럽게 눈감아주시는 전하의 은혜도 모르고, 네까짓 게 감히 뭐라고 떠드는 것이냐!」

장석민은 눈을 질끈 감았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제야 짐작이 갔다. 권력에 대한 욕심이 많은 무크라르 왕이 임시기구 설립응ㄹ 준비하던 자하르를 쳐내려는 작정이었다. 그러려면 그의 날개부터 부러트려야 하는 법. 장석민은 자신이 자하르의 날개가 되어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하르가 잘한 것은 하나 있구나. '말라쿤'을 완성시켜 내게 준 것이니.」

무크라르 왕의 얼굴을 보는 순간 욕지기가 치밀었다.

「싫습니다.」

장석민이 주먹을 쥐었다.

「뭐라고?」

「저는, 무크라르 전하의 후궁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럴 생각도 없고 앞으로도 …….」

장석민의 옆으로 칼날이 들어왔다. 나단이 칼을 빼어들어 장석민의 목을 겨눈 것이다.

「앞으로도? 그리고 계속 말해보거라. 장석민.」

시발. 역시 난 쟤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게 싫다고!

「계속 말해보래도.」

장석민은 입술을 질겅질겅 깨물었다. 이 빌어먹을 가문이 너무도 싫었다. 자신을 끌고 온 하일도 싫었고 고양이같이 웃고 있는 나단도 싫었고 늙은이 주제에 죽을 때까지 권력을 나눠주기 싫어서 아들의 후궁을 취하겠다고 달려드는 무크라르 왕도 싫었고, 무엇보다.

자하르의 얼굴이 떠올랐다. 장석민은 고개를 떨구었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자하르뿐임을 안다. 하지만 그는 올 수 없다. 온다 해도 손을 쓸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그런데도, ……지금 자하르가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자신이 싫었다.

「……저는 싫습니다.」

나단의 눈이 경악으로 벌어졌다.

「네가 진정 목이 잘리고 싶어서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냐.」

「목이 잘려도, ……, 늙은이의 후궁 따위, ──.」

「뭐라고?!」

「감히 저놈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장석민은 눈을 감았다. 무크라르 왕의 후궁이 되는 것은 죽는 한이 있어도 싫었다. 무크라르 왕이 장석민을 데리고 가려는 이유는 제 아들인 자하르의 명예를 꺾고 자신의 이름을 드높이기 위함이었다. 그런 무크라르 왕이 장석민을 제대로 대접해줄 리가 없다. 빛 한줄기 없는 감옥에 갇히는 것과 다름없었다.

「저는 절대로 저런──.」

그 순간, 장석민의 머리 위를 새빨간 베일이 덮었다. 그리고 베일 위로 커다란 손이 얹어졌다.

「모쪼록 양해 부탁드립니다. 외국에서 온 분이라 언어가 많이 서툽니다.」

베일 안에서 장석민은 제 눈과 귀를 의심했다.

「자하르……. 네가 여긴 어떻게…….」

「일정이 앞당겨졌습니다. 전하의 강녕함을 빕니다.」

자하르가 무크라르 왕에게 인사를 하며 나단이 내밀고 있는 칼을 손등으로 치웠다. 무크라르 왕의 표정이 썩 밝지 않았다. 자하르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장석민은 긴장이 탁, 풀려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전하께서 너를 뵙자는 말씀은 안 하셨다.」

나단의 말에 자하르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말을 이었다.

「쟝은 아직은, 제 후궁입니다. 제가 돌봐줘야 할 사람입니다.」

아직은, 이라는 말이 거슬렸지만 장석민은 자신의 머리에 얹어진 자하르의 온기에 마음이 놓였다.

「자하르, 그렇지 않아도 너를 한 번 부를 생각이었다.」

무크라르 왕의 말에 자하르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믈라쿤이 끝났으니 너도 비를 들여야 하겠지.」

「저 역시 그러고 싶으나, 이전에 제가 큰 도움을 받은 분이 계십니다. 저는 그 분을 찾아 이믈라쿤이 끝나면 반드시 비로 맞이하겠다는 약속을 한 상태입니다.」

베일 안에서 장석민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자하르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재수 없을 만큼 멋있어 보였다.

「그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들었다.」

무크라르 왕이 나단을 손가락으로 불렀다. 그에게 뭔가를 속삭이자 나단이 알현실 밖으로 나갔다.

자하르가 장석민에게 그제야 시선을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주책없게 눈물이 터져 나와 장석민은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자하르의 손가락이 톡톡, 장석민의 머리를 두드렸다.

잘했어요.

자하르의 목소리가 손가락을 타고 전해지는 것 같았다. 장석민은 치밀어 오르는 눈물을 참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나단이 다시 안으로 들어와 무크라르 왕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무크라르 왕이 만족스러운 듯이 턱을 쓸어내리며 말을 이었다.

「너의 말라쿤에게도 이미 이야기를 했다.」

그의 언어가 영어로 바뀌어 있었다. 장석민도 고개를 들었다.

「내 소중한 목숨을 구해준 대가로 너의 말라쿤에게 자유를 준 후, 나의 후궁으로 삼겠다고 말했다.」

자하르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장석민은 느낄 수 있었다. 온화하게 웃고 있던 얼굴에서도 표정이 사라졌다.

「전하, 후궁으로 삼았던 사람은 다른 사람의 후궁으로 갈 수 없습니다.특히 무크라르 전하와 같은 고귀하신 신분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너는 어차피 하젤의 신분이니 그와 어떤 관계도 갖지 않았을 터, 순결한 몸이니 상관없다.」

장석민은 차라리 내가 당신 아들이랑 붙어먹은 호로 새끼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전하, 쟝은 제 사람입니다.」

담담한 목소리와는 다르게 자하르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장석민은 그가 분노를 삭이고 있음을 짐작했다.

「제 사람이고, 제가 돌봐줘야 하고,──제 것입니다.」

자하르의 마지막 말에 장석민은 눈을 치떴다. 조금 전 것은, 평소으 ㅣ자하르라면 사람들의 앞에서 할 말이 절대 아니었다.

「네 것이라. 그래. 너의 말라쿤이지.」

무크라르 왕의 입가에 비틀린 웃음이 걸렸다.

「자하르 너는 그 말라쿤으로 무엇을 할 생각이었지?」

「──.」

「내가 누워있을 때, 그 말라쿤으로 너는 무엇을 할 생각이었는지 물었다.」

「혼란스러운 국정을 돕고자 했습니다.」

「너의 권좌에 대한 어두운 욕심이 아니고?」

「아닙니다. 자하르 왕자님은……!」

발끈한 장석민이 입을 열었다. 자하르가 장석민의 머리를 눌러 고개를 숙이게 했다.

「아직 어리고 서툴러 예의를 알지 못합니다. 부디,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어리다는 말에 장석민은 제 가슴을 칠 뻔했다.

「그래. 그것은 내 궁에서 차차 가르치면 되는 것. 그래도 앞으로 그런 식으로 대화도중 끼어들면 혀가 잘릴 수도 있다는 이야기는 꼭 귀띔해 주어라.」

무크라르 왕의 말을 듣는 순간 장석민은 이 집안에 어두운 피가 흐르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어쟀든 네 말라쿤은 나의 후궁으로 삼을 것이다. 그리 알아라.」

「아랫사람의 것을 강제로 취하면 전하의 위대한 명성에 누가 될까 두렵습니다.」

자하르의 말에 무크라르 왕의 얼굴에 조소가 스쳤다. 말은 그럴듯하지만 실상 그 내용은 말라쿤을 억지로 데려갔다가는 그 얼굴에 먹칠을 할 것이라는 경고였다.

「강제로 취하지 않으면 되지 않은가.」

「──.」

「자하르 네가 나에게 진상을 하면 된다.」

장석민의 커다란 눈이 불안으로 흔들렸다. 자하르의 옆얼굴은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저는 쟝을 누구에게도 넘길 생각이 없습니다.」

자하르의 낮은 음성이 알현실에 서늘한 기운을 띠고 울렸다.

「쟝은 그간 저를 도와 많은 일을 해주었습니다. 제 은인과 다름없습니다. 그런 분을 절대로 내칠 수 없습니다.」

그냥 꾸며낸 말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장석민은 자하르의 말에 눈물이 왈칵 치솟았다. 절대로 내칠 수 없다는 말이, 귓가에 울렸다.

「그 은혜를 나를 위해 돌려야 하지 않겠는가?」

「…….」

「그 은혜를 너 혼자 독차지하겠다는 것은, 나라보다는 제 보신을 더 생각한다는 것일 테지. 그걸 내가 어떤 식으로 해석해야 한단 말이냐.」

자하르의 다문 입술이 움칫, 일그러졌다.

「게다가 남자 러마디를 그런 식으로 계속 데리고 다니는 것도 썩 보기 좋은 꼴은 아니다. 너도 결혼을 해야 할 테니까.」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그래. 너를 도와준 그 은인. 내가 이미 너를 위해 찾아두었다.」

무크라르 왕의 말에 장석민은 깜짝 놀랐다. 자하르의 시선도 장석민의 얼굴에 닿았다.

몰라요, 난 진짜 모르는 얘기입니다.

장석민이 고개를 내저었다. 무크라르 왕이 그날 자신이 자하르의 목숨을 구해준 것을 알 리가 없다. 그런데 은인을 찾아두었다니?

그때 시종이 들어와 나단에게 귀엣말을 했다.

「도착했습니다.」

「들라 해라.」

문이 열리고 들어온 사람을 보는 순간 장석민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시발. 좆 됐다.

「메사엘 알레이야. 위대하신 무크라르 왕을 뵈옵니다.」

남색 전통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자의 목소리가 알현실에 울렸다.

메사엘 알레이야.

장석민은 처음으로 빗자루의 이름을 들을 수 있었다.

……저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알레이야. 네가 그날 본 것을 빠짐없이 자하르에게 말해라.」

무크라르 왕이 느릿한 손짓으로 자하르를 가리켰다. 자하르를 바라보는 알레이야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날 자하르 왕자님께서 탑 아래로 내려가시는 것을 보고, 연모하는 마음을 참지 못하고 그 뒤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왕자님을 헤치려는 흉수들과 맞닥트리게 되었습니다. 자하르 왕자님께서 흉수들을 제압했지만 그중 한명이 총을 가지고 있었기에 자하르 왕자님이 위험에 처했습니다. 저는 제 한 목숨 버릴 각오를 하고 달려들었습니다. 죽을 각오로 뜯어 말려서 간신히 흉수의 손에서 총을 빼앗았습니다. 왕자님께서 그 후에 그들을 처리하셨지만, 피를 너무 많이 흘리셔서 제가 왕자님을 업고 탑 위로 올라갔습니다. 하지만 일개 후궁으로서는 왕자님을 따라 내려간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이제까지 앞으로 나서지 못했습니다.」

장석민은 자신이 써준 편지 내용을 그대로 줄줄 외고 있는 알레이야를 보며 입을 벌렸다, 예상대로였다. 알레이야는 대역으로 삼기에 완벽한 인간이었다. 거짓말을 하는데 조금의 거리낌이나 양심의 가책도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저건 실제로 자신이 그날 자하르를 둘러업고 나왔다고 믿는 눈치이다.

「자하르.」

무크라르 왕이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자하르가 고개를 숙여 네, 하고 대답했다. 그의 얼굴에는 어떤 표정도 읽을 수 없었다.

「이 아가씨가 네가 그렇게 찾던 은인이다. 이믈라쿤이 끝났으니 너는 알레이야를 비로 맞이하여 결혼하도록 해라.」

무크라르 왕의 말이 더해질수록 자하르의 낯빛이 살벌하게 변해 갔다.

「그리고 네 말라쿤은──.」

자리에 늘어져 있던 무크라르 왕의 얼굴의 음성이 단호해졌다.

「이틀 후에 본궁으로 입궁시켜라. 아무리 손도 대지 않은 후궁이라할지라도 쫓아낼 시간은 주도록 하마.」

장석민은 입술을 피가 나도록 짓씹었다. 자신이 쳐놓은 그물이 제 몸 위를 덮는 기분이었다. 똑똑한 척 굴다가 제 손발을 묶은 것이다.

「그럴 수 없습니다.」

자하르의 음성이 알현실의 공기를 갈랐다.

「뭐라고?」

「쟝은, 누구에게도 주지 않을 생각입니다.」

자하르의 음성은 평연했지만 그 눈빛이 형형했다. 장석민은 물론이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 모두 제 눈을 의심했다.

「절대로, ──제 것입니다.」

짓씹어 삼키듯이 내뱉은 한마디에 장석민의 얼굴이 희게 질린다.

무크라르 왕의 얼굴에서 웃음이 걷혔다.

「나라의 안녕보다 말라쿤에 대한 네 소유욕이 중요하다면야, 그래. 알겠다.」

그가 나단을 향해 턱짓을 하며 말을 이었다.

「자하르를 가두고 그의 앞으로 있는 모든 재산을 몰수하고, 그에게 주어진 모든 명예와 소유를 박탈하라.」

「──.」

「──!」

「그래. 한 가지 잊었다. 왕의 명을 거역하면 어떻게 되느ㅓㄴ지, 국민들에게 본보기 삼을 수 있도록 자하르의 목을 잘라라.」

「안 됩니다!」

장석민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자하르가 그의 손을 잡아 뒤로 끌었지만, 장석민은 말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제가 가겠습니다. 제가 갈 테니까, 그러니까, 자하르 왕자님은 그냥 살려주시기 바랍니다.」

「쟝!」

자하르가 소리 질렀다. 그의 눈동자에 새파란 분노가 일렁였다. 장석민은 애써 자하르를 외면하고 말을 이었다.

「제가 전하의 후궁으로 갈 수 있도록 해주세요. 그러면 되는 거니까, 자하르 왕자님은 제발, ──.」

몇 번을 깨물어서 이제는 피가 흐르기 시작한 입술을, 장석민은 내리 물었다.

「이럴 거 없습니다.」

자하르가 담담하게 말했다.

「제가 상관있습니다. 저는 죽고 싶지 않습니다.」

장석민이 눈을 부릅뜨고 외쳤다.

「저는, 누구한테 가든 상관없으니까, 나는, 죽고 싶지 않아서, ──가겠습니다. 무크라르 전하께.」

거짓말을 하느라 단어도 뒤죽박죽이었다. 장석민은 제발 자하르가 자신의 거짓말에 속아주길 바랐다.

「──.」

자하르가 말없이 앞만 바라보았다.

「자하르 왕자님은 명예를 중요시 여기지만 저는 그런 것은 모릅니다. 죽을 생각 따위 없습니다. 저는 살고 싶습니다. 절대로, 아까는 ……실언을 했습니다.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장석민이 고개를 숙였다. 손끝이 부들부들 떨리고 피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삶에 대한 욕구가 강한 인간이라고, 자하르가 농담처럼 자신을 놀리던 말이 떠오른 것이다.

이거라면, 자하르가 믿어줄 거라 여겼다.

「네 말라쿤의 뜻은 저러하다는데?」

무크라르 왕이 넌지시 웃으며 물었다.

자하르는 묵묵히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반쯤 내리감은 옆모습에서 누구도 그의 감정을 읽어낼 수 없었다.

「자하르, 대담해라. 네가 그동안 쌓아온 공적을 생각해서 오늘 이 자리에서 했던 너의 실언은 모두 잊어주마.」

「저는,──.」

침묵을 깨고 자하르가 입을 열었다. 뒷말까지 이어지는 시간이 장석민에게는 몹시 길게 느껴졌다.

「──쟝의 의견을 따르겠습니다.」

「……. …….」

자하르의 얼굴은 가면을 쓴 것처럼, 무표정했다. 장석민은 그가 자신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다행스러운 한편, 마음 한켠이 아렸다. 자하르가 자신을 살기 위해 환장한 놈이라고 기억할거란 생각에, 기분이 더러웠다.

「그래.알겠다. 그럼 말라쿤은 내일 단장해서 보내도록 하고, 자하르와 알레이야의 혼인은 나단이 준비하도록 해라.」

나단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무크라르 왕이 다시 흐느적 의자에 몸을 기대고 귀찮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병석에서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피곤하니 이만 물러들 가거라. 나단은 자하르의 결혼식에 관해 나눌 말이 있으니 남고.」

나단을 제외하고 모두 알현실을 나왔다. 알레이야가 자하르의 곁으로 다가와 말을 건넸다.

「왕자님. 그간 나서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후궁의 신분으로서 그런 짓을 했다는 것이 부끄러워 차마, 나설 수가 없었습니다.」

「그대의 용기에 감사드립니다.」

다정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뭔가 더 말을 붙이려는 알레이야에게 자하르가 인사를 했다.

「그럼 저는 아직 일을 마무리 짓지 못한 것이 있어서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나중에 뵙도록 하지요.」

자하르의 말에 알레이야가 얼굴을 붉히며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자하르는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장석민은 그 뒤를 따랐다.

본궁 밖에서 나오자 후텁지근한 공기가 두 사람을 감쌌다. 동화 속에 나올 것 같은 새하얀 달이 둥그런 돔 위에 걸려 있었다. 

누구도 먼저 말을 건네지 않았다.

끔찍한 밤이었다.

자하르가 장석민을 데리고 온 곳은, 리문이 아니라 탑의 지하였다. 왜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왔을까 하던 차에, 장석민의 눈에 짐 가방이 들어왔다.

그렇구나. 저거 하나만 들고 나가면 그만이었지.

장석민이 씁쓸하게 웃으며 짐 가방을 챙겨들었다. 자하르는 방 안쪽에서 누군가와 통화를 시작했다. 장석민은 아까 자하르가 알현실에서 자신의 머리에 얹어 두었다. 베일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이전에 얘기했던 빨간 두건을 떠올리며 사온 모양이었다. 두고 갈까 하다가 가방 깊숙한 곳에 넣었다. 지퍼를 올리고 있을 때, 통화를 마친 자하르가 거실로 나왔다. 그의 시선이 장석민이 들고 있던 가방에 닿는다.

「별 거 안 넣었습니다.」

장석민이 어색하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자하르는 대답하지 않고 그의 앞을 성큼, 지나갔다. 장석민은 쓰게 웃었다. 자하르가 자신을 무시할 것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기분이 더러웠다.

소파에 앉은 자하르가 장석민에게 턱짓했다.

「뭐 하십니까. 앉지 않고.」

「네?」

「체스를 두기로 한 거 잊으셨나요?」

여러 감정이 교차했다, 자하르가 자신을 무시하지 않고 말을 건네준 것에 대한 안도감, 여기까지 데려와서 마지막으로 하자는 것이 섹스를 내기로 한 체스라는 사실에 대한 비참함. ……거기에 응할 생각이 드는 자신에 대한 자괴감.

장석민은 자조어린 웃음을 짓고 자하르의 맞은편에 앉았다.

자하르가 체스판 위에 말을 올려놓기 시작했다. 그의 길고 우아한 손가락을 내려다보며 장석민은 저 손과 입 맞추었던 이틀 전을 떠올렸다.

마치 아주 오래 전 일처럼 여겨진다.

이제 한국으로 가는 길은 영 멀어지는구나.

장석민은 우울한 낯으로 체스판에 시선을 두었다. 이번에도 자하르는 흑이었다. 장석민은 자신의 폰을 쥐었다.

「결혼, ……축하드립니다.」

「혹시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이면, ──목을 비틀어버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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