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그냥, 별 말씀은 없으셨고, 고맙다는 인사랑 또, ──음.」
장석민은 기억을 더듬어 최대한 자세하게 설명을 하려 노력했다. 유일하게 오늘 면회가 허락된 두 사람 중 하나가 장석민이었다. 의뭉스러운 나단이 입을 열 리 없으니 장석민이 병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왕자들이 그의 주변을 둘러쌌다.
전하께서는 뭐라 말씀하시느냐.
전하의 상태는 정확히 어떻더냐.
전하가 내 이름을 찾지는 않더냐.
정신없이 쏟아지는 질문 사이에서 장석민은 쩔쩔매며 자하르를 찾았다. 눈이 마주치자 자하르는 손을 뻗어 장석민을 왕자들 사이에서 빼내어 자신의 옆에 두었다.
많이 피곤할 겁니다. 데리고 가서 쉬겠습니다.
자하르의 말에 다른 왕자들의 표정이 대번에 구겨졌다. 하일이 대놓고 너 혼자 장석민을 독점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말까지 했다. 자하르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형님께서 뭔가 잊으신 것 같습니다. 쟝은 원래 제 사람입니다.
자하르답지 않게 날이 선 말투에 당황한 하일이 대답할 말을 찾는 사이, 자하르는 장석민의 손을 이끌고 병원을 나왔다.
차에 오른 후에야 자하르는 장석민을 쥐고 있던 손을 놓아주었다. 저릿저릿한 손을 혼자 주무르며 장석민은 자하르에게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았다.
「저를 보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거듭 하셨습니다. 말라쿤이 아나크왕을 도와 그의 병을 낫게 했다는 말을 하시고. 아, 이건 아까 얘기했구나. ……음. 또 뭐라고 했지.」
장석민이 미간을 찌푸린 채 기억을 더듬는 모습을 보며 자하르는 입을 다물었다. 그가 손가락으로 시트의 손잡이를 두드렸다.
병실 벽의 색깔과 커튼의 색, 옆에 붙어있던 간호사의 외모까지 모조리 설명하던 장석민은 자하르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입을 다물었다.
「저기, ……괜찮으세요?」
무크라르 왕이 깨어났다는 말을 들은 이우호 자하르의 반응이 영 이상했다. 좋아할 줄 알았는데 낯빛이 계속 어두운 채였다.
「괜찮습니다. 당연히.」
자하르가 대답했다. 그러나 여전히 표정은 풀리지 않는다.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제가 봤을 때는 무크라르 전하께서 완전 다 나으신 것 같더라고요.」
자신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던 무크라르 왕의 얼굴에서는 병색을 찾아 볼 수 없었다. 비싼 병원에서 관리를 잘 받았나보다고 생각하며 장석민은 말을 이었다.
「건강해보이셨어요. 지금이라도 일어나 걸으실 것 같아 보이던데요. 역시 병원이 좋아서 그런지, 관리를 잘 해주셨나 보더라고요.」
장석민의 말을 들을수록 자하르의 표정은 점점 무거워졌다. 장석민은 머리를 긁적였다. 자하르가 전에 했던 이야기가 떠오른 것이다.
「혹시, ……안 깨어나시길 바라셨나요?」
목적어는 없다. 두 사람만 있는 공간이지만 자칫 다른 사람의 귀에 들어가면 반역죄로 몰릴 수도 있는 말이었다.
「아닙니다.」
자하르가 담담하게 답했다.
「모든 일은 어차피 신께서 원하는 대로 흐릅니다. 다만──.」
거기까지 말을 한 자하르가 입을 다물었다. 장석민은 조심스럽게 그가 삼킨 뒷말을 짐작해 꺼냈다.
「우연이, 지나친다는 말씀을 하시려는 건가요?」
그렇게 묻는 표정이 진지하다. 까맣고 윤기 나는 눈동자에 총기가 어린다. 자하르의 입가에 미소가 스친다. 이럴 때 보면 확실히 머리가 나쁘지는 않은데.
「쟝은 좀처럼 종잡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네?」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날아든 공격에 장석민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자하르는 이전에도 자신에게 종잡을 수 없다는 말을 했다. 정확히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을 싫어한다는 말이었다.
기도제에 참석한 것 때문에 아직 화가 풀리지 않은 것인가. 장석민은 눈을 껌뻑거리며 자하르의 표정을 살폈다.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좋아보이지도 않다.
「제가, ……뭔가 비난 받을 만한 언행을 보였습니까?」
「비난이요?」
자하르가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제가 쟝을 비난했다고요?」
비난이라기보다 비호감을 표현한 거겠지. 그렇게 대답하려다 장석민은 고개를 내저었다. 남자를 상대로 별생각을 다 한다.
「아닙니다. 여튼, 무크라르 전하께서 일어나셨으니 이제 하룬도 열리겠군요. 그렇게 되면 자하르 왕자님도…….」
거기까지 말을 한 장석민은 문득 가슴 한켠을 지나가는 서늘한 기운에 어라, 하고 입을 다물었다. 자하르가 후계자가 된다. 그렇게 바라고 바라던 일이다. 자신이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될 테니까.
한여름 밤의 꿈. 그것도 악몽 같은 나날이 끝나는 것이다. 그 종말을 고하는 말이 이상하게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왕자님도, ……. …….」
자하르도 장석민이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알면서 대답하지 않았다. 자하르가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글쎄요.」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말에 장석민은 토를 달지 않았다.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던 자하르가 말을 잇는다.
「좀처럼, 생각대로 일이 풀리지는 않는군요.」
어쩐지 그 말이 추를 단 것처럼 무거워 장석민의 마음 깊은 곳까지 내려와 닿았다. 리문으로 도착할 때까지, 묵직한 침묵이 이어졌다.
궁 안의 사람들이 분주해졌다.
창밖으로 보기만 해도 궁 안이 이전과는 다른 분위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크라르 왕이 눈을 뜬 일을, 사람들은 기적이라고 얘기했다. 그리고 나단 왕자의 효성에 대한 칭찬이 끊이지 않았다. 그가 연 기도제가 무크라르 왕의 의식을 저승에서 이승으로 이끌었다는 말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여기저기에서 무크라르 왕과 나단의 사진이 함께 걸리기 시작했다.
"말이 되냐. 그게. 당연히 의사 선생님께 감사해야지."
장석민은 불퉁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무크라르 왕이 일어난 것은 끝내주는 의학의 힘이지 돈을 처바른 기도제 따위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럴 거면 환자를 왜 병원에 데려다 놔? 그냥 제단에 올려놓지. 종교질도 작작 해야지."
시종이 가져다 준 포도를 먹으면서 장석민은 연신 투덜거렸다. 무크라르 왕이 깨어난 이후로 후계자 권력구도가 묘하게 바뀌고 있음을 이방인인 그도 느끼고 있었다.
"참 이상한 나라란 말이야."
마지막 남은 포도를 입안에 털어 넣고 우물거리면서 장석민은 구시렁거렸다. 그냥, 딱 하고 상자를 열어서 이름을 확인하고 8번 자하르, 탕탕탕. 하면 끝날 문제일 텐데. 아직 하룬은 봉인된 채로 열지 않고 있다.
병중에 무크라르 왕의 심경에 변화라도 있었던 것일까.
장석민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애초에 자신이 아무리 고민해도 풀리지 않을 문제다. 지금 그가 걱정해야 하는 것은.
「자하르 왕자님은 언제쯤 돌아오십니까?」
장석민은 과일을 채워주러 온 시종에게 물었다. 시종은 애매한 웃음을 띤 채로 그런 것은 저희가 알지 못합니다. 하고 어제와 똑같은 대답을 해줄 뿐이었다.
"젠장"
그날 리문으로 돌아온 이후로, 장석민은 자하르의 얼굴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시종들에게 물어도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 같았다.
그런 것은 저희가 알지 못합니다.
그럼 대체 누가 아는데!
장석민은 젠장, 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기도제 참석 문제로 뜸해진 발걸음이 아예 뚝 끊긴 것이다. 이제는 쌩까는 건가.
그날 리문으로 돌아오던 길, 유난히 기분이 안 좋아보이던 자하르의 얼굴이 떠올랐다. 생각에 잠긴 것 같은데, 무슨 생각을 하냐고 물어도 대답하지 않고 그는 침묵할 따름이었다.
이후로 자하르는 4층에 얼굴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래도 리문에 아예 돌아오지 않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시종들에게 물어보면 새벽 일찍 궁을 나가셨습니다. 라는 말을 하니.
"……설마 나 피하나?"
장석민은 차에서 자하르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종잡을 수 없다고 했었지. 역시, ……싫어진 건가.
장석민은 우울하게 고개를 떨구었다. 자하르가 자신을 싫어할 이유가 언뜻 다섯 가지 이상은 떠오른 터다. 가장 큰 이유는 아마 그의 뜻을 꺾고 기도제에 참석했다는 것일테지. 기도제는 결과적으로 나단의 이름을 사람들에게 알리게 했으니까. 거기에 가장 큰 몫을 한 것은 다름 아닌 장석민이었다.
사람들은 그날 이후로 말라쿤의 선견과 신성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말라쿤의 현신인 장석민이 축문을 읽고 나서 영문을 알 수 없게 쓰러졌던 왕이 의식을 되찾았던 것이다. 신수(神獸)인 말라쿤이 저승에 직접 가서 왕의 영혼을 되찾아 왔다며, 그가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얘기까지 떠돌았다.
자하르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장석민 스스로 리문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은 이유였다. 장석민은 두려웠다. 자신에 대한 환상이 견고해질수록, 그것이 깨질 때 오는 충격도 큰 법이다. 그렇게 되면 자신뿐만 아니라 자하르 역시 위험할 텐데…….
"……, ……."
장석민은 문득, 자신이 한국으로 돌아갈 걱정보다 자하르에 대한 걱정을 하느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음을 깨달았다.
"하하하하. 진짜 거지가 왕자를 걱정해도 유분수가 있지."
큰소리로 웃어봤지만 기분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장석민은 자하르가 걱정되었다. 이중인격, 성격파탄, 변태중의 상변태 자하르가, 걱정이 되어 잠이 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스톡홀름 증후군이야. 이건.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겠어."
「누구한테 납치라도 당하셨습니까?」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장석민은 펄쩍 뛰어올랐다. 자하르가 서류 가방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귀신이라 본 사람처럼.」
「……. …….」
장석민이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린 채, 자하르를 바라보았다. 평소와 다름없는 그였다. 얄미울 정도로 여유롭고, 아름답고, 그리고 재수 없는.
자하르가 멍한 장석민을 보며 슬쩍 웃음을 삼켰다.
「계속 그런 표정이면, ──가둬놓고 싶어진다고 말씀드렸을 텐데.」
자하르의 손이 장석민의 뺨을 감싸 쥔다. 오랜만에 닿는 그의 손길에 장석민은 놀라는 것도 뒤로 하고 눈을 껌뻑거렸다.
「이제는 무서워하지도 않습니까?」
「아니, ──무섭긴 한데, ……여기는 어쩐 일로…….」
「여기에 제가 오지 못할 이유라도 있습니까?」
의아하다는 듯 돌아오는 물음에 장석민은 고개를 내저었다.
「통 오지 않으셔서 아예 절 잊으신 줄,──.」
장석민은 제 혀를 깨물었다. 이 미친 혀가 대체 뭐라고 떠들어대는 거야.
자하르의 눈에 황당하다는 기운이 스민다.
「며칠 동안 여기서 그런 생각을 하셨습니까?」
그렇게 묻는 투가 즐겁다. 장석민은 그게 아니라고 반박을 하려 했다.자하르가 낯선 표정으로 웃지 않았다면.
삼키지 못한 덩어리가 가슴속에 걸려 통증이 느껴진다. 심장이 세차게 펌프질을 하자 혈액을 타고 온몸에 그 미약한 통증이 퍼져 나간다. 눈을 깜빡일수록 자하르의 표정이 눈에 더 아로새겨진다. 눈이 아픈 것 같아, 장석민은 왜 이러지, 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손가락으로 눈을 비볐다.
「눈에 뭐가 들어갔나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자하르가 장석민의 고개를 들어 눈을 살핀 다음 손가락으로 장석민의 뺨을 더듬는다. 그러고는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기다렸다니, ──점점 더 가둬놓고 싶어지는군요.」
「지금도 가두, ……아닙니다.」
자하르가 웃었다.
장석민은 오랜만에 가슴을 묵직하게 짓누르던 것이 사라진 기분이었다. 자하르가 웃고 있으니 생각했던 것만큼 최악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바쁘셨어요?」
「네. 바빴습니다.」
「일은 어떻게, ……잘 돼가고 있나요?」
세세하게 물을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대충 돌아가는 흐름은 알고 싶었다.
「마땅히 대답해드릴 말이 없군요.」
모호한 답이 돌아오자 장석민의 얼굴에 얼핏 실망의 기운이 어렸다.
그 기색을 읽은 자하르가 물었다.
「제가 약속을 지키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어? 아니요. 지키시겠죠.」
지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저 나단이 갑자기 후계자 구도에서 우위를 차지하게 된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 ……그런데 그걸 내가 왜.
"허허, 진짜 이건 스톡홀름 증후군 맞다니까."
장석민이 스톡홀름 증후군Stockholm syndrome이라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자하르가 고개를 기울인다.
「납치에 대한 걱정이 있으신가 보군요.」
「그게 아니라, ……, 아닙니다. 저도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네요.」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에 한숨이 묻어난다. 단순하고 명쾌하게 즐거운 삶을 살아오던 장석민에게 근간의 일들은 수용범위를 넘어서는 것들이었다, 1과 2가 사이좋게 지내던 자연수의 세계에 어느 날, 1.5가 생기더니 1.25, 1,75가 고개를 내밀고 심지어는 1.111111……,의 무한대로 이어지는 숫자가 두둥 나타난 기분이었다.
저기 루트가 보이고, 분수도 보이고, 아아, 뭐가 뭔지 모르겠다. 장석민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자 자하르의 눈이 살며시 접힌다. 자하르가 제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장석민의 손을 내려주면서 말했다.
「간단히 짐을 챙기세요.」
「네?」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장석민은 저도 모르게 큰소리를 냈다. 자하르가 한 약속이 이렇게 빨리 자신의 앞으로 다가올 것이라 생각 못한 것이다.
당연한 건데, 당연히 돌아가야 하는데, ……. 이제 저 조각 같은 얼굴을 다시 못 보는 건가?
「왜 그렇게 쳐다보나요? 거처를 옮길 겁니다. 쟝을 아예 사람이 없는 곳에 가둘 생각입니다. 문을 열 때마다 개처럼 반갑게 저를 맞아주시겠군요.」
「…….」
그러면 그렇지. 정 어디 있어, 정. 내 저놈의 조각을 콱.
장석민이 정신을 수습하고 자하르에게 물었다.
「리문에서 그냥 있으면 안 되나요?」
「리문을 비울 생각입니다.」
「……왕자님이요?」
자하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없는 동안 쟝을 안전한 곳에 두고 싶습니다.」
아무리 경호원을 둘러 세워놓는다 하더라도 그놈의 왕권 앞에서는 속수무책임을 장석민도 여러 번 봐 왔다. 자하르가 없는 사이에 하일이 찾아올 수도 있고 나단이 찾아올 수도 있다. 조금 답답할 테지만 자하르의 말대로 아무도 없는 곳에서 차라리 며칠 푸욱 처박혀있다 오는 게 낫다.
「왕자님은 어디 가시는데요?」
「여기저기 가야 합니다. 설명할 시간이 없는데요.」
자하르가 시계를 두드렸다. 장석민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짐을 싸려다가 문득 머리를 두드리는 생각에 고개를 돌렸다.
「저도 데려가시면 안 돼요?」
자하르의 입매가 굳는다. 장석민은 괜한 말을 했구나 하는 생각에 아닙니다,하고 말머리를 돌렸다.
「그냥 처박혀 있겠습니다.」
「──데려가고 싶은데.」
자하르가 말끝을 삼킨다. 장석민을 놓고 가고 싶지 않았다. 잠시라도 눈을 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인간을 두고 이런 시기에 자리를 비우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있고 그 위험을 장석민에게까지 감수하게 할 수는 없었다.
「제 전용기는 비좁은 1인용이라서요.」
장석민은 엑, 하고 얼굴을 일그러트린다. 섬을 만드는데 돈이 얼마 들지 않는다는 개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이던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치고 지나치게 궁상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요, 1인용 타고 잘 다녀오세요.」
장석민이 구시렁거리며 가방에 이것저것 쑤셔넣기 시작했다.
「간단한 옷만 몇 벌 챙겨 가시면 됩니다. 거기에 웬만한 것들은 다 갖춰 놓았으니까요. 그리고 그 책은 안 가져가셔도 될 겁니다.」
「심심하면 읽을거리는 가져가야죠.」
「많을 겁니다.」
짐을 쑤셔 넣던 장석민의 손이 멈칫, 굳었다. 왠지 불길한 생각이 스친 것이다.
「어디로 갑니까.」
자하르가 웃으며 대답했다.
「따라오시면 알 겁니다.」
문 앞에 선 자하르가 코드 인식기에 카드를 대고 손가락을 얹자 문이 열렸다.
「……하하, 다 고치셨구나.」
멀쩡하게 잘 열리는 문을 보며 장석민은 머쓱하게 중얼거렸다.안으로 들어서자 종이냄새가 물씬 풍겼다. 천장까지 닿아있는 책장은 몇 번을 봐도 경이로울 광경이었다.
「여기는 비밀기지 같은 곳인가요?」
비밀기지라는 단어에 짐을 내려놓던 자하르가 웃었다.
「몇 살이라고 하셨죠?」
「……연상입니다. 왕자님보다.」
비밀 기지라, 하면서 자하르가 장석민의 말을 따라했다. 단어 선택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장석민의 얼굴에 뜨끈하게 열이 올랐다.
「비슷하겠군요. 어릴 때부터 놀던 곳이니까.」
「놀던 곳이라고요?」
「궁의 건물은 미로처럼 얽혀있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자, 방은 여기를 쓰면 됩니다. 식사는 저 옆으로 돌아가시면 간단히 드실만한 것이 있습니다. 욕실은 이쪽이고.」
자하르가 열어 준 방에는 침대가 하나 뎅그러니 놓여 있었다. 장석민은 침대에 앉아 힘을 한 번 줘보고는 흠, 하고 못마땅한 소리를 냈다.
「왜 그러시죠.」
「인간이란 게 얼마나 간사한지에 대해 생각 중입니다. ……참, 그거 며칠 됐다고.」
지금 이방에 놓인 침대도 훌륭한 측에 속했다. 그런데 몸에 전해지는 탄력이 썩 만족스럽지 못했다. 가격을 가늠하고 싶지 않은, 자하르가 가져다 준 침대에 벌써 익숙해진 탓이다.
「리문의 침대가 그리우신가 보군요.」
「제 것도 아닌데요, 미련 가져서 뭐하겠습니까.」
장석민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일생에 한 번 만날까 말까한 운명의 침대를 이미 만나버렸지만, 가질 수가 없는 것이다.
「그건 쟝에게 준 선물입니다.」
자하르의 목소리가 문득 낮아진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사흘 내에 제가 돌아오지 않으면 라겔이 찾아올 겁니다.」
「라겔이 왜, ……, …….」
「전용기를 마련해두었습니다. 라겔이 모든 수속을 도와줄 겁니다.」
자하르의 말이 이어질수록 장석민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마치 아주 먼 곳을 떠나는 사람같이 말하고 있다.
「어디를 가시는 건데요.」
「어디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를 만나는가가 중요합니다.」
자하르의 입매에 미소가 진해졌다. 그걸 바라보는 장석민의 가슴에 불안이 덜컥, 걸린다.
「왜요? 제가 안 돌아오길 바랍니까?」
장석민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자하르가 길게 웃으며 말을 잇는다.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만약을 위한 준비입니다. 쟝은 이곳에서 편히 쉬다가 제가 돌아오며 개처럼 반겨주면 됩니다.」
「사람을……. 됐어요. 왕자님 오실 때까지 그냥 잠만 잘 겁니다.」
그 경우에는 라푼젤과 슬리핑뷰티 중 어느 쪽인가요, 하고 놀리듯 묻던 자하르가 시계를 확인하고 설핏, 인상을 썼다.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장석민은 침대에서 일어나 자하르의 뒤를 따랐다. 복도를 지나자 이전에 자하르의 뒤를 따라 들어갔던 비밀 통로가 있는 벽이 나왔다.
「여기로 나가면 안 됩니다.」
「……나가는 방법도 모릅니다.」
「생각난 김에 아예 차단을 해두고 가죠.」
자하르가 벽에 걸려 있던 덮개를 열어 코드를 조작했다. 삑,삑,하는 기계음이 몇 번 울린 뒤에 화면이 차단block off이라는 단어가 떴다.
「안으로 들어오는 문은 모두 닫혔습니다. 급한 일이 생기면 이걸 누르고 나가시면 됩니다.」
자하르가 비상 버튼을 가리켰다.
「그것만 누르면 열립니까?」
「차단상태에서만 그렇게 해두도록 설정해뒀습니다.」
장석민의 시선이 잠시 서재 안쪽에 머물렀다. 저 문으로도 들어올 수 없는 거겠지? 물어보고 싶지만 그랬다간 이전의 일들까지 굴비 엮듯이 줄줄이 고백을 해야 하기 때문에 입을 뗄 수 없었다. 뭐, 알아서 차단했으려니 하고 장석민은 시선을 돌렸다.
「컴퓨터는 써도 됩니까?」
「아니요.」
하고 웃는 눈이 반달처럼 휜다. 장석민은 속으로 욕을 삼키며 자하르가 없을 때 비밀번호를 끝까지 두드리겠다고 마음먹었다.
테이블을 지나쳐 가던 장석민의 눈에 커다란 체스판이 들어왔다.
「여기에도 저게 있네요.」
「예, 혼자 두곤 했습니다.」
「혼자 체스를 무슨 재미로 둬요? 당연히…….」
체스판을 보던 자하르의 시선이 미묘하게 변했음을 깨닫고 장석민은 황급히 말머리륻 돌렸다.
「당연히 혼자 둘 수도 있지. 저도 가끔 혼자 이것저것 잘 합니다. 장기도 두고 카드놀이도 하고. 하하하. 이젠 여기서 며칠간 꼼짝없이 혼자 놀아야겠네.」
「쟝.」
자하르의 부름에 장석민은 몸이 언뜻 팽팽하게 켕기는 것을 느꼈다. 이전과는 다른 긴장이었다.
「다녀오면 정식으로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뭘요?」
「체스 대국을.」
저 체스라는 단어가 이렇게 야하게 들리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는데, 장석민은 허허로이 웃으며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그리고, ──.」
잠시 생각하던 자하르가 말끝을 삼킨다.
「……?」
「아닙니다. 그 뒤는 다녀와서 하지요.」
그가 눈을 낮게 내리깔고 웃었다. 문 앞에 선 장석민은 머리를 긁적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몸 조심히 잘 다녀오세요.」
남자가 남자에게 할 만한 대사는 아니었지만 이것 외에는 마땅히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자하르가 손을 뻗어 장석민의 턱을 쥐었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장석민의 입술을 훑듯이 문질렀다. 장석민의 몸이 흠칫 떨렸다.
「당연히 잘 다녀올 겁니다.」
그의 손가락이 훑은 부분에 뜨거운 기름을 바른 것처럼 화끈거렸다.장석민은 고개를 돌리고 싶었지만 자하르의 집요한 시선에 가로막혀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잘 다녀와서 이틀 밤낮을 쟝의 구멍에 좆질을 할 생각이거든요.」
「──!」
자하르의 손가락이 장석민의 입술을 벌리게 했다. 치아를 더듬던 움직임이 혀에 닿았다. 손가락이 혀를 쓸어내렸다. 다른 손가락은 여전히 입술을 어루만졌다.
장석민의 속눈썹이 곤혹스러운 기색을 비치며 조금씩 움직이는 모습을, 자하르는 즐겁게 바라보았다.
「키스를, 하는 기분이군요.」
자하르의 말에 장석민이 대번에 눈에 힘을 준다. 자하르가 손가락을 물리자, 장석민이 고개를 내저었다.
「남자끼리 무슨 키스를…….」
「그, '남자끼리'성교는 가능하고요?」
「그거야……!」
「──?」
「……, ……, …….」
할 말이 없다. 무슨 말을 해도 궤변이고 억지였다. 장석민은 수치스러운 침묵을 택했다. 그의 얼굴이 발긋하게 달아오른 것을 보고 자하르는 슬쩍 웃었다.
「쟝의 그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더 듣고 싶긴 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군요. 그럼 다음에, '남자끼리'가능한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봅시다.」
「됐……, ──!」
그딴건 됐다고 외치기도 전에 자동문이 닫혔다. 인사를 나눌 틈도 없었다. 장석민은 눈을 껌뻑거리다가 쳇, 하고 혀를 찼다.
"자기 할 말만 하고 가면 다야. 싸가지는, 진짜."
비난 섞인 말을 투덜거리던 그는 굳게 닫힌 문을 보며 중얼거렸다.
"……사흘 내에 안 오기만 해 봐라. 내 그냥, ──. ──체스를 혼자 두고 말 테니까."
썰렁한 농담에 대답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장석민은 한숨을 내쉬고 소파로 걸어갔다. 지독한 고요함이 그의 주변에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