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8/35)

「쟝!」

문을 열면서 부르는 목소리가 다급하다.

「쟝, 어디 있습니까.」

자하르는 방으로 들어와 불을 켰다. 장석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황금상 위로 향한다.

예상대로 장석민이 그 위에 늘어진 채로 한가한 고양이 같이 누워있다.

「쟝.」

자하르가 언뜻 입매를 굳히고 다가간다. 장석민이 네, 하고 대답했다.

「나단 형님이 다녀가셨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그 왕가의 내력은 성격이 안 좋은 건가요.」

장석민이 힘업싱 중얼거렸다. 자하르의 눈빛이 언뜻 서늘하게 가라앉는다.

「얼굴을 보여주세요.」

「안 맞았어요. 제가 매일 맞고 다니는 줄 아십니까.」

장석민이 얼굴을 자하르 쪽으로 향했다. 우울해 보이는 것을 빼고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얼굴이었다. 장석민이 무사한 것을 확인한 자하르가 황금상의 앞으로 걸어갔다.

「내려오세요.」

「여기서 놀라고 이 안장 만들어주신 거 아닌가요?」

「혼자 있을 때나 놀라고 만들어 준 겁니다.」

자하르가 손을 내밀며 내려오세요, 하고 말한다. 장석민은 몸을 곧추세우고 말을 타는 것처럼 고삐를 손에 쥐었다.

「조금만 더 놀다 갈래요.」

자하르가 눈을 감았다 뜬다. 조금 전의 온화한 낯은 사라지고 어느새 흉흉한 남자가 자리 잡고 있다.

「제가 올라갈까요?」

다정하게 묻고 있지만 그가 올라오면 후회할 일이 생길 것임을 장석민은 알았다.

「내려갑니다.」

자하르가 말없이 손을 버렸다. 장석민은 한숨을 내쉬었다. 혼자 내려간다고 했다가는 아주 때려죽일 기세였다. 장석민은 순순히 자하르의 품에 뛰어들었다. 자하르가 장석민을 가뿐이 받아들었다. 안고 있는 시간이 조금 길다는 생각이 들 무렵에야, 장석민을 바닥에 내려 주었다.

괜스레 붉어진 얼굴을 장석민은 들키지 않으려고 손등으로 문질렀다. 자하르가 입을 열었다.

「나단 형님께서 뭐라고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짜고짜 본론이다.

장석민은 자하르를 올려다보았다.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신경을 안 쓸 수가 없던데요.」

자하르가 험악하게 눈을 치뜬다. 장석민은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생각해 두었던 말을 늘어놓았다.

「기도제에 참석하겠습니다. 그러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가지 않아도 됩니다.」

「갈게요.가서 앉아만 있으면 되는데요.」

「쟝.」

자하르의 목소리에 위험한 기운이 일렁인다. 장석민은 애써 그걸 모르는 척했다.

「쟝을 생각해서 가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그럼, ……저는 절 생각해서 가겠습니다.」

「뭐라고요?」

「죄송합니다. 저는 원래 이기적이라──.」

말을 미처 끝내지 못했다. 자하르의 눈빛이 살벌하게 빛났다. 금방이라도 장석민의 목덜미를 쥐고 비틀어버릴 듯이.

장석민은 자신의 생각을 정정해야 함을 인정했다. ……자하르는 자신을 죽일 수도 있다. 높은 가능성으로.

「이기적이라고 하셨습니까.」

「……. …….」

무섭다. 끝내주게 무섭다. 오랜만에 진짜 온몸의 세포가 오싹오싹 설만큼, 무서웠다.

「쟝이 묘하게 이기적인 성격인 건 알고 있습니다. 주변의 상황보다 자신을 우선으로 행동한다는 것도.」

자하르가 서늘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도 머리는 좋은 편이 아니었습니까??」

「…….」

「상황 판단이 그렇게 안 되시나요? 누구 말을 우선으로 해야 하는지,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장석민은 입술을 깨물었다.

오늘 내도록 황금상 위에 누워서 생각한 것이 있었다.

「알고 있습니다.」

마른침을 삼켰다. 손끝이 떨렸지만 장석민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최후변론을 하기 전의 기분이었다.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긴장되고 떨리지만 반드시 지나야 할, 길목이다.

「나단 왕자님께서 제게 부탁하셨습니다. 참가한다면 큰, ……상을 내리실 거라고.」

장석민은 입안에서 시발, 이라고 중얼거렸다. 그까짓 선물이 뭐라고 이딴 말을 한단 말인가.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장석민은 낮에 하캄을 불러 물었다. 자신의 머리로는 도저히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던 터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는 말에 하캄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거 참, 힘든 선택이네요. 하캄이 턱을 만지면서 중얼거리는 말에 장석민은 속으로 적잖이 놀랐다. 그가 무크라르 왕에 대한 충성심을 들먹이며 등을 떠밀어 기도제에 참가하라는 말을 할 것이라 생각했다.

사실, 그러길 바라고 있었다.

후궁은 본래 속한 궁의 주인의 말을 따라야 합니다. 지금 이 상황이 자하르 왕자님의 명예를 훼손하는 일임을 아셔야 합니다.

하캄의 이야기가 장석민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하르 왕자님의 목숨이 걸린 일이잖아요. 왕명에 불복하면 자하르 왕자님도 위험한 거 아닌가요.

하캄의 주름진 얼굴에 진한 미소가 그려졌다.

러마디 님. 가끔은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 있습니다. 궁의 주인에게 그것은 명예입니다. 모쪼록 잘 생각하시어 현명한 선택하시길 바랍니다. 

하캄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장석민은 마음이 더 무거웠다. 그래서 황금상 위에 올라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본인이 악역을 자처하기로 결심했다. 자하르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고, 일을 해결할 수 있다. 

자신만 나쁜 놈이 된다.

자신의 목숨도, 자하르의 목숨도 지키고 싶었다.

「고국으로 돌아갈 때 큰 선물을 내리신다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도제에 참석하고자 합니다.」

장석민은 숨을 내뱉는 것처럼 빠르게 하고자 하는 말을 했다. 여기까지 말을 하고 장석민은 눈을 질끈 감았다. 자하르가 길길이 날뛰며 개 같은 성질을 부릴 게 분명했다. 그러나 한참을 지나도 자하르에게서 어떤 말도 돌아오지 않았다. 장석민은 슬그머니 눈을 떠서 고개를 돌렸다.

「…….」

자하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화도 내지 않았고 그 선물이 무엇인지도 묻지 않았다. 입을 내리문 채, 묵묵히 침묵을 지키고 서 있을 뿐이었다. 깊은 눈동자에는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저는……, …….」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장석민이 입술을 움직였다.

「알겠습니다.」

자하르의 목소리가 담담하게 울렸다.

「쟝의 뜻이 그렇다면, 그 뜻을 존중하겠습니다.」

「……. ……,」

「그럼 오늘은 피곤하실 텐데, 쉬세요.」

자하르가 고개를 숙이고 나갔다.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쾅,하고 울렸다. 장석민은 방금, 자신이 얼마나 멍청한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자하르는 장석민이 어째서 그런 말을 내뱉었는지 알고 있었다.

그의 높은 긍지에 상처를 입히고 말았다.

「준비 다 끝나셨습니까?」

그렇게 물으며 들어오는 사람은 라겔이었다. 장석민의 얼굴에 언뜻 실망의 빛이 스쳤다.

「아름다운 옷입니다.」

라겔이 장석민이 입고 있는 옷을 보며 감탄어린 말을 중얼거렸다. 윤기가 흐르는 백색의 천이 장석민의 몸을 유려하게 감고 있었다. 자하르가 장석민에게 선물한 옷이었다. 괜찮다고 한사코 거절을 하는 그에게 자하르가 말했다.

이런 것도 제가 해드리면 안 되는 겁니까.

장석민은 말없이 옷을 든 상자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자하르는 전처럼 장석민의 방으로 찾아오지도 않았고 말을 건네지도 않았다.

오늘도 같이 기도제에 가는 데도 4층으로는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장석민은 시무룩한 얼굴로 착의 시중을 받았다.

「다 되었습니다.」

시종이 마지막으로 장석민의 옷매무시를 가다듬어주고 말했다. 장석민은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라겔의 뒤를 따라 나섰다.

「자하르 왕자님은요?」

「차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전이었으면 자하르가 방까지 장석민을 데리고 왔을 것이다. 장석민은 우울한 얼굴로 엘리베이터를 탔다. 로비에 도착해서 주차장으로 걸어가면서도 장석민은 발걸음이 무거웠다. 묵직한 것이 목구멍에 걸린 것처럼 답답한 심정이었다. 라겔이 차문을 열어주었다. 먼저 타 있던 자하르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낯선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장석민은 자하르의 맞은편에 앉았다. 차가 출발을 했지만 자하르는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라겔은 오늘 동석하지 않았기에 차 안에는 두 사람뿐이었다.

장석민은 긴장으로 목이 타들어갔다. 손끝이 차가워서 몇 번이나 주먹을 쥐어?ㅆ다 놓았다. 처음으로 여자와 소개팅을 하던 때에도 이렇게 긴장하지 않았었는데.

「구겨집니다.」

「네?」

「버릇인 것은 아는데, 옷 구겨집니다.」

장석민이 손을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손이 옷자락을 쥐고 있었다. 자하르가 선물로 준 옷의 끝자락에 주름이 생기려 했다. 장석민은 손바닥으로 옷을 폈다.

「죄송합니다. 선물하신 옷인데. ……그런데, 이게 제 버릇인가요?」

「모르셨습니까? 긴장하면 나오는 버릇입니다.」

「……그렇구나.」

어색한 중얼거림 뒤에 침묵이 찾아온다.

「오늘, ──.」

「오늘.」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자하르가 먼저 하세요, 하고 장석민에게 양보했다. 장석민은 입술을 물었다 놓은 뒤, 말을 이어싿.

「오늘, 제가 혹시 주의할 점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제 옆에 있으면 됩니다.」

「……예.」

「오늘, 나단이 어떤 제안을 할 수도 있습니다.」

나단 형님도 아니었다. 장석민은 긴장한 채 자하르의 말을 기다렸다.

「어떤 제안을 하든, ──듣지 않는 편이 나을 겁니다.」

「…….」

「아니, 듣지 마세요.」

「……. …….」

「내가 쟝에게 보여주는 인내심은, 여기까지입니다.」

자하르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감정이 보였다. 시커먼 감정이 그의 눈빛에서 일렁였다. 소름이 쭈뼛 돋았다. 하지만 장석민은 차라리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가 자신의 앞에서 화를 내고 성질을 드러내는 편이 나았다.

「알겠습니다.」

장석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하르 왕자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이미 그의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내 것이다. 더 이상 자하르가 양보해줄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장석민은 자하르의 눈을 바로 보며 굳게 입을 다물었다.

서류를 덮는 자하르의 화가 조금은 누그러진 듯 보였다.

차가 멈추어 섰다. 자하르가 안에서 차문을 열며 먼저 나갔다. 그가 장석민에게 손을 내밀었다.

"……씨. 지만 멋있는 거 다하고,"

장석민은 투덜거리며 자하르의 손을 잡았다. 백색의 계단이 끝없이 펼쳐진 신전 앞에 기도제를 위해 모여든 사람들이 벌써 자리를 잡고 있었다. 자신들을 향해 절을 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는 순간, 장석민은 자신이 크나큰 실수를 저지른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쟝.」

한 계단 위에 서 있던 자하르가 장석민의 이름을 불렀다. 오롯이 서있어도 그 존재가 빛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장석민은 자하르를 보며 깨달았다.

어떻게든 되겠지. 이 사람 옆에 있으면.

장석민은 불안한 마음을 다잡고, 자하르가 있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성대하게 치르겠다는 나단의 말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이전에 자하르가 사원에서 참가했던 기도제하고는 차원이 달랐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분위기에 압도당한 장석민은 쭈뼛거리며 자하르의 곁에서 눈만 댕글댕글 굴렸다.

장석민이 도착하자 나단이 반색을 하며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왔군. 내 몹시 기다리고 있었는데.」

「안녕하세요.」

「자하르도 왔구나.」

눈이 부실 만큼 화사한 미소였다. 오지 않으면 꼭 손발을 자르고 목을 잘라주겠다고 말을 했던 사람과 동일인이라고 믿기 힘든 변모였다.

이 집안의 피가 안 좋은 게 분명해.

장석민은 불퉁하게 중얼거리며 자하르의 옆에 섰다.

「이리 와야지.」

나단이 장석민을 향해 손짓을 했다.

「네?」

「말라쿤의 자리는 내가 따로 저 앞에 마련을 해두었다.」

「어? ……. 저는 그냥 여기에…….」

「마련을 해두었다니까.」

장석민은 자하르를 쳐다보았다.

자하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장석민은 심장이 바직바직 타들어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장석민. 앞으로 가야 한다.」

장석민은 나단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국에서 숱하게 불려왔던 이름인데도 거슬렸다.

장석민은 다시 자하르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런 일이 생길 것이라고 예상했던 자하르는 장석민에게 몸을 숙이고 낮게 속삭였다.

「가만히 계시면 됩니다. 저는 여기 있겠습니다.」

별것 아닌 말이었는데 불안이 스르륵 녹아내렸다. 장석민은 자하르에게 고개를 숙이고 나단을 따라 앞으로 걸어 나갔다.

나단은 장석민의 자리를 가장 맨 앞자리에 마련해두었다. 호화로운 의자에 앉게 된 장석민은 좌불안석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단이 의식을 알리는 기도를 시작했다. 장석민은 바싹 긴장을 하고 그 의식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한 시간쯤 지나자 팽팽하게 켕겨있던 몸의 긴장이 축 늘어지고 말았다. 장석민은 터지는 하품을 참고 눈꺼풀을 잡아당기는 만유인력을 이겨내는 데 온힘을 다해야 했다.

길고 긴 기도가 끝나고 나단은 신에게 축원을 기원하는 축문을 읽었다. 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나단의 머리카락을 보며 장석민은 그가 미용실을 차려도 돈을 잘 벌 것 같다는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오늘 이 자리에 아주 귀한 분을 모셨습니다.」

미용실과 에스테틱을 함께 해도 좋을 텐데.왕자라서 관리를 따로 받는 것일까. 하긴 자하르도 피부가 좋긴 했지.

「우리를 대신하여 신의 목소리를 들어, 위대하신 무크라르 전하의 강녕을 기원해 줄 분입니다.」

하일도 피부는 좋은 편이었고 유전인가 아님 관리의 힘일까. ……성격 나쁜 것은 확실히 유전일 거야.

「말라쿤의 현신인 장석민을 소개하겠습니다.」

이제는 아랍어의 단어가 제법 여러 개 귀에 들렸다. 조금 전 말에는 말라쿤과 장석민이라는 단어가, ……, ……뭐?

장석민이 눈을 부릅뜨고 나단을 바라보았다. 나단 역시 장석민을 바라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장석민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 ……왜, ……."

「일어나주시기 바랍니다.」

장석민의 시선이 자하르를 찾았다. 자하르가 넌지시 눈짓했다. 장석민은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단이 걸어와 그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뭔가요.」

「축문입니다.」

「……그러니까, 뭔데요.」

「말라쿤의 현신인 그대가 읽으면 됩니다.」

장석민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종이를 눈으로 대충 훑었다. 아랍어로 적힌 축문 아래에는 영어로 발음기호가 적혀 있었다.

"이걸 어떻게 읽으라고, ……미친."

「그냥 읽으면 된다.」

나단이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소리에 장석민은 헉, 하고 숨을 삼켰다. 그가 한국어를 알아듣는다는 사실을 잠시 깜빡한 터다.

나단이 웃으면서 장석민의 손을 잡아 제단 앞으로 이끌었다. 자하르의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져서 장석민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읽어라.」

옆에 서 있던 나단이 잇새로 속삭였다.

장석민은 한숨을 내쉬며 종이에 적힌 발음기호대로 천천히 축문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한 글자 한 글자를 읽으면서 혹시 실수를 하지 않을까 싶어 심장이 벌렁거려싿. 발음을 잘못해서 엘시시 같은 사태가 발생한다면 이 자리에서는 맞아죽는 것은 따놓는 당상이다. 극도의 긴장으로 손끝이 차갑게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다행히 축문을 끝까지 읽을 때까지 큰 실수는 없었는지 사람들에게 뭇매를 맞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장석민이 축문의 마지막 문장을 읽으며 고개를 들었을 때, 뒷줄에 앉아있던 자하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어요.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 했다. 차갑게 식은 손가락 끝에 피가 도는 기분이었다. 이제 끝인 것이다.

장석민은 종이를 단상에 올려놓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려 했다.

「왕자님!」

누군가 문을 박차고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 있던 사람 중 열 명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양복을 차려입은 남자가 숨을 헐떡거리며, 뭐라고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유일하게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장석민은 불안한 얼굴로 눈을 껌뻑거렸고 남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손을 모았다. 동시에 고개를 돌렸던 열 명의 왕자들의 표정은 모두 제각기였다. 장석민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주변을 둘러보다 나단과 눈이 마주쳤다. 커다란 눈이 감동으로 촉촉하게 젖은 나단이, 장석민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이게 모두 너의 덕이구나.」

「네?」

「너의 공을 내 전하께 반드시 알리겠다.」

나단의 눈이 정밀하게 세공된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그 형형한 눈빛 앞에, 장석민의 머릿속에 시커먼 불안이 왈칵 쏟아져 흘렀다.

「정말 고맙구나. 장석민.」

나단의 입에서 나온 이름을 듣는 순간, 장석민은 그가 자신의 숨통을 틀어쥐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호흡이 힘들었다.

「병원으로 가겠다.」

나단을 위시한 열 명의 왕

자들이 차례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장석민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무크라르 왕이, 긴 잠에서 깨어났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죠?」

장석민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자하르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있잖아요, ……, 이상하지 않습니까?」

자하르가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대었다. 조용한 병원의 복도에서 저만 떠들고 있음을, 장석민은 바로 알아채고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된 거지?」

하일의 물음에 병원장이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다른 왕자들도 팔짱을 끼고 서서 병원장의 설명을 들었다. 장석민은 자하르의 옆얼굴을 흘끔, 쳐다보았다.

입을 굳게 다문 채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왕이 깨어났다면 자하르 왕자에게 좋은 일이겠지? 상자를 열면 자하르의 이름이 나올 테니까. 그러면 자하르는 후계자가 되는 거고. ……젠장, 그런데 왜 이렇게 돌아가는 꼴이 불안한 거지.

장석민은 초조하게 자하르와 왕자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나단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도 그의 불안을 부추겼다.

손가락이 차갑게 얼어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장석민이 몇 번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자 자하르가 가만히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장석민이 기겁했다.

「누가 보면, ──.」

나단이 나타났다. 장석민은 재빨리 자하르의 손을 뿌리쳤다. 자하르의 표정이 언뜻 굳은 것을, 장석민은 미처 보지 못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카힌이 물었다.

「깨어나셨다.」

「그럼 들어가서 얼굴을 뵈어야 하겠습니다.」

하디드의 말에 다른 왕자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단이 팔짱을 낀 채로,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무리지. 의식을 되찾으신 지 얼마 되지 않아 병원 측에서도 병문안을 금지시켰다. 당분간은 지켜봐야 할 거고.」

다들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방금까지 나단이 병실에 혼자 들어가 무크라르 왕과 독대를 했음에도 저런 말을 하고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나단 형님은 어떤 특별한 경우이기에 의사도 금했다는 면회가 가능한겁니까?」

이죽거리는 하일의 목소리가 사납다.

「전하께서 루쿤을 나에게 맡기셨으니, 묻고 싶은 것도 있으셨을 테지.전하의 깊은 뜻은 나중에 친히 듣도록 하거라.」

다들 불만이 한가득인 얼굴이었지만 그것을 입 밖에 내어 말 하지는 않았다. 상황이 지금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정화갛게 판단을 내린 후에, 행동해도 늦지 않았다.

「장석민.」

나단의 입에서 정확한 발음으로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장석민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젠장, 하고 중얼거리며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네, 부르셨습니까.」

「무크라르 전하께서 너를 찾는다.」

「네???!!」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요. 지금 우리는 면회를 금지시켜놓고 저 동양인 애송이를 찾으신다고요?」

하일이 버럭 소리를 쳤다. 나단이 고개를 슬쩍 기울인 채, 대답했다.

「나는 전하가 아니다. 그분의 말씀을 전했을 뿐. 무크라르 전하께서 말라쿤의 현신인 장석민을 보고 싶어 하신다.」

장석민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자하르를 돌아보았다. 자하르 역시 지금의 상황에 단단히 심기가 뒤틀린 듯, 특유의 온화한 미소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장석민, 같이 들어가자.」

나단이 장석민에게 손짓했다.

장석민은 자하르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대체 이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누가 속 시원히 설명을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나단 형님.」

자하르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를 불렀다.

「왜 부르느냐?」

「제가 같이 들어가겠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네가 아닌 말라쿤의 현신, 장석민만을 보길 원하셨다.」

「제 사람입니다.」

자하르가 평연한 투로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제 궁에 머무는, 제 러마디입니다. 제가 없는 곳으로 혼자 보낼 수 없습니다. 이해 부탁드립니다.」

나딘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스쳤다.

「네 궁은 누구의 것이냐.」

「──.」

「지금 이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누구이냐. 대답해 봐라. 자하르.」

자하르의 눈빛이 잠시 섬뜩한 빛을 띠었다가 이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위대하신 무크라르 전하입니다.」

자하르가 공손하게 한 손을 가슴에 얹은 채, 대답했다.

「그래. 그 무크라르 전하께서 네 새를 보길 원하신다. 잠시만 빌려가도록 하지.」

나단의 말에 자하르의 얼굴에 섬뜩한 예기가 스쳤다. 장석민은 이대로 뒀다가 자하르가 더러운 성질을 여과 없이 드러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서 인사만 드리고 오면 되는 겁니까?」

장석민이 물었다. 나단이 그렇지, 하면서 가늘게 웃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자하르의 입매가 멈칫, 굳는다. 장석민은 자하르를 돌아보았다.

하는 수 없잖습니까.

그의 눈이 말하는 바를, 자하르는 정확히 읽어 내렸다. 자하르가 눈을 내리 감았다 뜬다.

「하하하. 뭐 별 일 있겠어요. ……, ……, 있어도 뭐 어쩌겠습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참으로 장석민다운 발언이었다.

「그럼 빨리 다녀올게요.」

장석민이 고개를 숙이고 나단과 함께 사라졌다. 자하르는 우두커니 서서, 장석민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온유하게 웃고 있던 그의 눈빛이 차갑게 일렁이고 있는 것을 눈치챈 이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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