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7/35)

"하, 나 참 기가 막혀서."

장석민은 같은 말을 여러 차례 중얼거렸다.

오전 일찍 공사를 하러 들어온 인부들은 용접기를 들고 장석민이 머물고 있는 모든 창에 방범창을 달기 시작했다. 하나둘씩 늘어가는 방범창을 보며 장석민은 이곳이 바로 창살 있는 감옥이라고 생각했다.

공사를 마친 인부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방을 나설 때까지 장석민은 기가 막힌다는 말을 백 번쯤 중얼거렸다.

"하, 진짜."

장석민은 창으로 다가가 힘을 주어 창살을 잡아당겨 보았다. 꿈쩍도 하지 않는다. 혹시나 싶어 옆에 있는 것을 당겨보아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도 남김없이 꼼꼼하게 용접을 해놓은 것이다.

"미친 거 아니야! 내가 무슨 죄수냐고!"

장석민은 버럭 소리를 내지르며 방안을 서성였다. 일을 처리해야 한다고 아침 일찍 나간 자하르와는 만날 수 없었다.핸드폰을 사용하지 못하니 당연히 통화도 불가능했다.

"자하르! 이 사기꾼!"

장석민은 창살을 흔들면서 소리 질렀다. 분노의 방향이 하일에서 자연스럽게 자하르에게 향하기 시작했다.

자하르가 언급한 위험성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의 처사는 지나쳤다. 창에 창살을 두른 것으로 모자라 장석민의 외출도 아예 금지된 것이다. 산책하러 나가지도 못하고 창살 있는 커다란 방에서 혼자 우두커니 남게 되었으니 화가 나는 것은 당연했다.

장석민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앞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들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나가시면 안 됩니다.」

이미 수십 번은 들은 말이었다.

「제가 제 발로 나가는데 왜 안 됩니까.」

「나가시면 안 됩니다.」

그 말 외에는 배운 영어가 없는 것인지 경호원은 아침부터 내도록 같은 말만 반복했다. 힘으로 밀어내고 나가려했지만 두 발자국도 떼지 못하고 도로 잡혀 방으로 밀어 넣어졌다.

"믿으라고? 이러면서 지를 믿으라고?"

자신을 믿으라고 말하던 자하르의 낯짝이 떠오르자 뱃속에서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장석민은 도로 문을 활짝 열었다.

「잘 들으세요.」

장석민은 눈을 부릅뜬 채로 말을 이었다.

「자하르 왕자님께 계속 이런 식으로 하실 거면, 그냥 콱, ──.」

콱 죽어버리겠다는 말을 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런 일로 죽기에는 그간 살아온 날들이 아름답고, 참아온 날들이 안타깝고, 왕으로의 날들이 더욱 아름다울 것이다.

장석민은 입술을 한참 달싹거리다가 버럭 외쳤다.

「밥도 안 먹을 거고, 체스도 두지 않을 거라고 전해 주십시오!」

문을 쾅 닫아놓고, 장석민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얼마나 머저리 같고 병신 같은 말이란 말인가. 밥도 안 먹고 체스도 두지 않을 거라니. 그 말을 전해 들을 자하르를 생각하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는, 이중인격 성격 파탄자 자하르가 그런 말에 눈 하나 깜짝할 리 있겠는가.

장석민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그렇게 한참을 쭈그려 앉아 있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에게 남은 희망은 단 하나였다.

장석민은 창으로 달려가 창살에 매달려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이번에도, 어느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나가게 해달란 말이야!"

그의 의미 없는 외침이, 리문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시트를 쥔 손이 움칫, 하고 떨렸다. 발소리가 침대로 다가온다. 장석민은 눈을 감고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자는 척하는 연기에 소질이 없었기에 무념무상으로 숫자라도 세야겠다고 마음먹은 터다.

「주무세요?」

옆에 앉는 기척이 느껴졌다.

「자는 건가요.」

자하르의 다정한 음성이 들려왔다. 장석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한숨소리가 이어진다. 그가 시트를 끌어내렸다. 장석민이 힉, 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식사를 거르신다고 하셨다는 말씀은 들었습니다.」

「…….」

그렇게 말한 것은 오전이다. 아침 식사는 했으니 실질적으로 거른 것은 점심, 저녁 두 끼뿐이다. 자하르가 손을 뻗어 장석민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굶어죽으신다고요?」

「…….」

걱정하는 척하는 그 말투가 일견 굶겨 죽인다는 것처럼 들리는 것은 내 착각이겠지. ……착각이면 좋으련만.

장석민이 대답하지 않자 자하르가 장석민의 어깻죽지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그를 일으켜 세웠다.

힘없이 늘어지는 연기는 하도 많이 해서 장석민은 자하르의 손에 축 늘어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얼굴에 따끔한 시선이 느껴졌다.

「눈 안 뜰 겁니까?」

자하르가 물었지만 장석민은 눈꺼풀을 들어 올리지 않았다.

「억지로 눈을 뜨게 할 방법을 열 가지쯤 알고 있는데, 그중 한 가지를 말씀드리자면──.」

장석민이 눈을 번쩍 떴다. 자하르가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잘했어요. 하고 칭찬했다.

「드신 게 없다 하여 수프를 가져왔습니다.」

자하르가 테이블에 놓인 트레이를 가리켰다. 아까부터 맛있는 냄새가 솔솔 진동을 하더니. 장석민은 주린 배를 움켜쥐고 안 먹겠습니다. 하고 도로 자리에 누웠다. 자하르가 트레이를 가져와 침대 위에 올려두었다.

「쟝.」

자하르가 자신의 이름을 부를 때 들리는 특유의 울림이 있었다. 달콤한 사탕과자로 공기를 한 겹 싼 것처럼, 부드러운 음색이었다.

「식사를 거르시면 안 됩니다.」

장석민은 여전히 침묵으로 대응했다.

갑작스럽게 떠올린 것이 단식 투쟁이었지만 일단 내뱉은 말이니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두 끼 만에 입을 벌리고 음식을 먹기에는 사나이 자존심이…….

그때 아래에서 꾸루룩,하며 장이 요동치는 소리가 울렸다. 장석민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자하르가 웃음을 삼키며 장석민의 몸을 다시 잡아 일으켰다.

「삶에 대한 의지가 그렇게 강한 몸으로, 어떻게 아사를 하시려고.」

「……, 두세요. 그냥.」

「가만히 못 두니까, 회의를 하다말고 오지 않았습니까.」

자하르가 수프를 한 숟다락 떠서 자하르의 입술 위에 가져다 대었다.

「입 벌려요.」

다른 의도임을 알면서도 그 말을 듣는 순간, 떠오르는 장면이 있어 장석민의 낯에 뜨끈하게 열이 올랐다.

「억지로 입을 벌리게 해서 밀어 넣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자하르의 손은 이미 장석민의 턱을 강하게 쥐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어느 지점을 누르면 엄청난 고통으로 입이 벌어지는지 자하르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장석민 역시 몸소 체험한바 자아아알. 알고 있었다.

「입 벌려요.」

장석민이 젠장, 하고 낮게 중얼거리며 입술을 벌렸다. 그 틈으로 자하르가 숟가락을 밀어 넣었다. 입안에 부드러운 수프의 풍미가 퍼졌다. 장석민은 울고 싶어졌다. 단식 투쟁 두 끼만에 무너진 것도 서러운데 입안에 들어간 수프는 단번에 후루룩 마셔버리고 싶을 만큼 맛있었다.

「자, 한 번 더.」

자하르가 수프를 떠서 한 번 더 넣어주었다. 장석민은 마지못해 먹는 척 연기하느라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자하르가 천천히 수프를 입안에 흘려 넣어 주었다.

「입맛에 맞습니까?」

「……그냥, 뭐.」

「다시 끓이라고 하죠.」

자하르가 수프를 물리는 시늉을 하자 장석민은 아니요, 하고 몸을 일으켰다. 자하르의 입가에 걸린 웃음을 보고 나서야 장석민은 자신이 속은 것을 알아챘다.

「다행히 입맛에 맞나 보군요.」

장석민이 어물어물 시선을 내리며 음식은 버리면 안 됩니다. 하는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래요. 그럼 버리지 말고 한 그릇 다 비우시기 바랍니다.」

장석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식 투쟁을 주장하기에 이미 버린 몸이었다. 그는 자하르가 들고 있던 숟가락을 건네받으려고 손을 내밀었다.

「뭔가요.」

「제가, 먹으려고.」

「괜찮습니다. 마저 먹여드리죠.」

장석민이 됐다면서 손을 내밀었지만 자하르가 단호하게 거절했다. 장석민은 하는 수 없이 입을 뻐끔뻐끔 벌리며 자하르가 주는 대로 수프를 받아먹기 시작했다.

아픈 아이에게 미음을 떠먹여 주는 어머니처럼 자애로운 얼굴이었다. 성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장석민은 아주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지금 뭔가 일이 틀어져서 정신없이 바쁠 텐데 한걸음에 달려와 자신에게 수프를 먹이고 있는 자하르에게 너무 심한 쌍욕을 퍼부었나 싶었다. 

천천히 한 숟가락씩 장석민에게 수프를 먹여주던 자하르가 문득 입을 열었다.

「쟝이 이렇게 힘없이 수프를 받아먹고 있는 모습이, 퍽 마음에 드는군요.」

「──?」

「가능하면 앞으로도 매일 굶긴 다음 한 끼만, 제 손으로 수프를 먹이고 싶을 정도입니다.」

「…….」

야, 이…….

「농담입니다.」

농담이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웃고 있다. 자하르의 눈에도 웃음기가 스친다. 사실 농담이 아니었다. 장석민이 입을 벌리고 수프를 받아먹고 있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숟가락을 입에 넣어줄 때마다 입술이 숟가락을 머금는 움직임이나, 목울대가 조금씩 움직이는 모양이 자하르의 눈을 끌었다. 입술에 수프가 묻으면 혀로 닦아내는 모습까지도.

마지막 한 숟가락을 장석민의 입에 넣어주었을 때, 자하르는 안타까운 마음까지 들었다.

「다 드셨군요.」

자하르가 숟가락으로 장석민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아래를 빨게 할 때만 사용하던 작은 입술이 부드러운 감촉을 가졌다는 것은, 그날 계곡 아래에서 잠시 스쳤던 접촉을 통해 알게 되어싿. 입술을 닦아주자장석민이 시선을 아래로 내리깐다. 머쓱해지면 보이는 특유의 표정이다.

자하르가 트레이를 치웠다.

「그럼, 식사는 하셨고.」

자하르가 장석민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체스는 안 하신다?」

장석민의 시선이 옆으로 향한 채, 얼어붙었다.

「안 하시겠다고요?」

자하르가 확인을 하듯 거듭 물었다.

「안, ……할 겁니다.」

「왜요?」

「왕자님이, ……약속을 안 지키셨으니까요.」

말을 하면서도 겁에 질려 장석민의 얼굴이 희게 질린다. 소심한 주제에 할 말은 하고 마는 성격인 것이다. 자하르는 그런 장석민을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이 아니라 지키기 위해 노력 중인 것입니다.」

담담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자하르는 오늘 단 1초도 쉰 기억이 없다.국왕의 부재를 전제로 진행시켰던 모든 일을, 처음부터 다시 짜 맞추어야 했다. 국왕의 칙령을 들고 나타난 나단의 배경과 그간의 행적들, 무크라르 왕의 이해하기 힘든 의도까지 더듬어 올라가야 했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지만 불가능에 가까운 일들이었다.

장석민이 불퉁한 얼굴로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그래도 하루아침에 방에 창살까지 설치해버린 자하르가 못미더운 것은 사실이었다.

「저는, 왕자님께서 전처럼 제게 자유를 주시기 전까지는, ──체스를 두지 않겠습니다.」

장석민은 속으로 본인에 대한 욕을 퍼붓는 중이었다. 얼마나 머저리 같은 말을 하고 있는지, 단어 하나를 내뱉을 때마다 혀가 후회로 저릿저릿 할 지경이었다.

「자유, ──자유라.」

애초에 후궁에게는 자유가 없었다. 궁의 주인에게 묶인 몸이었다. 후궁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는 자하르였기에 그나마 후궁들이 제시간을 보내며 지내고 있는 것이다.

「자유롭게 산책을 하는 권리를 보장해주기 위해,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는 공간에 쟝을 풀어주라는 건가요?」

「…….」

「그렇게 하고, 매일 밤 저는 쟝의 위에 올라타서 좆질을 하면 되겠군요. 쟝도 자유롭고 나는 욕망을 채우니 정말 좋은 결말이네요.」

장석민은 몸을 움츠렸다. 체스를 하지 않겠다고 했으니 자하르가 억지로 자신을 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체스는 장석민에게 그나마, 선택의 여지를 주기 위한 구실이었다.

「……?」

자하르가 장석민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가 장석민을 욕실로 이끌었다.

「뭐하시는 건가요?」

장석민의 물음에 자하르는 차가운 침묵으로 응수했다. 욕실의 문이 닫히고 그는 장석민을 욕조 안에 올려놓았다. 자하르가 옷을 벗기 시작했다. 장석민은 눈 둘 데를 찾지 못해 고개를 돌리며, 대꾸했다.

「저는, 이제…….」

「알고 있습니다. 자의에 의해 다리를 벌리지 않는다고 하셨죠.」

셔츠까지 벗은 자하르가 욕조로 다가와 샤워 콕을 열었다. 뜨거운 물이 장석민의 몸 위로 쏟아졌다.

「왜 이러시는 겁니까.」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은 채로 장석민이 물었다. 자하르가 바로 샤워 콕을 잠갔다.

「물에 젖은 몸을 보는 게 더 꼴려서 그렇습니다. 쟝에게 처음 아래가 선 게, 그때였거든요. 그런 표정을 지을 줄 안다는 사실이 굉장히 의외였습니다.」

장석민은 자하르가 빅슬립을 먹은 날을 언급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그럼 그때 범인을 추궁하는 듯한 날카로운 눈빛이 그런 의미였단 말인가.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자 장석민의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자하르가 장석민의 귓가에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자의든 타의든 넣을 구멍만 있으면 솔직히 상관없습니다.」

장석민의 마음이 서늘해졌다. 자하르의 방금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는 것이다. 네 의사 따윈 애초에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는, 철저한 무시였다.

자하르가 장석민의 턱을 쥐고 시선을 맞추었다. 그의 회색 눈동자에 스산한 분노가 스며있었다.

「──그런데, 기분이 더럽단 말입니다.」

「……!」

「쟝이, 나를 거부하는 게, 끝내주게 기분이 더럽다고요.」

「……저는…….」

자하르가 장석민을 쏘아보았다. 시선만으로도 사람을 죽여 버릴 것 같은, 흉포한 눈길이었다. 그가 벽에 손을 짚어 장석민의 몸을 가두었다. 아슬아슬하게 맞닿는 거리였다. 자하르가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손을 대지는 않겠습니다. 약속하지요.」

자하르가 자신의 살덩이를 꺼내 쥐었다. 장석민이 흠칫 놀라 몸을 뒤로 움직였다.

「가만히 계세요. 한 번, 하는 겁니다.」

「…….」

「심사를 뒤틀리게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지금도 그 알량한 가랑이를 벌리고 쑤셔 넣고 싶은 것을 참고 있으니──.」

자하르가 장석민을 앞에 두고 본인의 손으로 용두질을 시작했다. 물에 젖은 손이 철벅거리는 소리를 냈다. 금세 힘을 받기 시작한 살덩이가 그의 손안에서 무게를 더해갔다.

장석민은 고개를 돌리려 했다.

「고개 돌리지 마세요.」

자하르의 음성이 탁하게 울렸다.

「적어도, ──얼굴은 보면서 하게 해줘야 하지 않습니까.」

「……. 대체 왜, ──.」

「글쎄요.」

자하르가 장석민의 얼굴을 느릿하게 훑었다. 동양인치고 커다란 눈이 수치심으로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파들파들 떨리는 속눈썹에 맺힌 물방울에도 모양 좋은 귓볼에도, 상처가 남아있는 목덜미에도, 자연스럽게 시선이 간다. 아래에 빠듯하게 피가 몰렸다. 자하르의 목안에서 거친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장석민은 혼란스러웠다. 도망가고 싶었다. 하지만 등에 벽이 닿아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음을 알게 해주었다. 아래를 잔뜩 세우고 용두질을 하면서 자신ㅇ르 잡아먹을 듯이 바라보고 있는 남자의 시선이 무서웠다.

그런데도, ……피할 수가 없었다.

자하르의 시선이 몸을 훑어 내리는 것을, 그의 숨결이 목덜미에 닿는 것을, 알면서도 피할 수가 없었다. 심장이 뛰었다. 온몸으로 더운 피가 돌기 시작했다.

살덩이가 손바닥에 비벼지는 소리가 음탕하게 울렸다. 장석민은 제 숨도 조금씩 뜨거워지고 있음을 느꼈다. 눈앞의 남자가 자신을 얼마나 원하는지 그의 숨결과 눈빛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쟝의 구멍에 넣고 싶습니다.」

「──!」

「좆으로 문질러주면 좋아서 움찔거리는데, ──마치 남자의 물건을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처녀의 질처럼 쫄깃하단 말입니다.」

「……. …….」

뜨거운 숨 위에 얹어진 음성이 장석민의 귀에 닿았다. 고개도 돌리지 못하고 귀를 틀어막지도 못하니, 장석민은 미칠 것 같았다.

「──좋습니까?」

「네?」

「제 성기가 지금 쟝의 질을 쑤시고 있는 겁니다. 깊숙하게, 그 오물거리는 보드라운 질에, ──박아주고 있는 겁니다.」

장석민의 귓볼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자하르는 처음의 말처럼 몸에 손끝하나 대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의 시선과 목소리만으로도 온몸이 엉망진창으로 범해지는 기분이었다.

「힘주고 구멍을 조여봐요, 그래, 그렇게──읏, ──.」

머리 위로 달뜬 숨소리가 점차 가빠지기 시작했다. 장석민은 자하르가 손을 움직이며 상스러운 말을 속삭일 때마다 몸을 흠칫거렸다.

그의 성기가 아래를 파고들어 힘차게 허리를 쳐올리는 느낌이었다. 자하르의 눈이 장석민을 무섭게 쏘아보았다.

그리고,

「──, ──, ──!」

눈을 반쯤 내리감은 자하르의 입에서 낮은 탄성이 터졌다. 장석민의 배 부근에 뜨끈한 액체가 잇따라 사출되었다.

거칠게 흩어졌던 숨소리가 조금씩 안정을 되찾았다. 장석민은 그제야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배 아래로 사출된 정액이 흘러내렸다.자하르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의 시선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열기가 퍼졌다. 자하르의 얼굴에 애매한 웃음이 스쳤다.

어째서 저런 표정을…….

「──!」

무심코 아래를 내려 보았던 장석민은 자신의 아래가 반쯤 서 있음을 발견했다. 허겁지겁 옷자락을 내려 보았지만 물에 젖은 채였기에 소용없는 짓이었다. 몸의 선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저런.」

자하르가 낮게 혀를 찼다.

「남자에게 아래를 범해지는 것을 상상하면서 선 겁니까.」

장석민의 얼굴을 굳히고 자하르를 밀어냈다.

「끝나셨으면 이제, ──.」

그러나 자하르가 그의 손목을 움켜쥐어 욕조의 벽에 다시 세웠다.

「전에도 말했지만, 제 기준의 한 번은──,잡념이 사라지기 전까지입니다.」

「그러는 게 어디 있, ──.」

자하르가 장석민의 바지를 끌어내렸다. 장석민이 눈을 부릅떴다.

「걱정하지 마세요. 쟝이 내 앞에서 스스로 가는 걸, 보고 싶은 것뿐이니까. 내가 손대지 않는 것이 아쉽긴 하지만, ──.」

장석민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 상태로 나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아까보다 조금 더 부풀어 오른 장석민의 살덩이가 끄덕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누구보다 욕구에 약하고 솔직한 성격이었다. 피가 아래로 몰려서인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입안이 바싹 말랐다.

「……손대지 마세요. 그럼.」

장석민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자 자하르가 짧게 웃었다. 그러고는 장석민의 손을 아래로 이끌었다. 그가 그 위에 손을 얽고는 낮게 속삭였다.

「대신, ……. …….」

아주 작은 속삭임은 장석민에게만 간신히 들릴 정도였다. 장석민의 얼굴이 금세 수치로 물들었다.

「어떻게 그런……!」

「그 정도는 양보해주셔야죠. 나는, 쟝의 안전을 위해 그 맛있는 구멍을 포기했는데.」

「…….」

「자, 시작하세요.」

자하르의 시선이 장석민의 성기에 닿았다. 맛있는 것을 본다는 듯이, 그는 입맛을 느릿하게 다시며 다시 한 번, 장석민을 재촉했다.

「어서요, ──그저 말하면 되는 거잖아요.」

장석민은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의 것을 쥔 채로, 그는 남자의 귓가에 속삭여준 난잡한 말들을 하나씩, 뱉었다.

속살거리는 말들로 욕조 안은 금세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골라 봐요.」

자하르의 말에 장석민은 지구본을 또르르, 돌렸다. 눈을 감고 손가락을 지구본에 얹자, 바다 한가운데가 찍혔다.

「어, 아무것도 없는데요.」

자하르가 다가와 허리를 굽혀 지구본을 확인했다. 망망대해 한가운데를 찍은 장석민의 손가락이 민망한 듯 오그라들었다.

「다시 할게요.」

「아닙니다. 거기에 섬을 하나 만들면 됩니다.」

「네?!!」

「정확한 위도와 경도를 확인해서 섬을 만들어드리지요.」

장석민의 외출금지는 사흘째 계속되고 있었다. 너무 심심해서 온몸이 뒤틀리다 못해 죽어가는 지경이었다. 얼마나 심심한지 경전을 다 쓰고도 한 번 더 베껴 쓰고, 심지어는 자하르가 가져다준 아랍어 알파벳 책을 다 뗀 상태였다. 장석민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옆에서 본 자하르가, 한마디 던졌다.

지도에서 어디든 고르세요.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모셔다 드리죠.

장석민이 가장 가고 싶어 하는 곳이 어디인 줄 알면서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말투였다. 이쯤 되자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리, 하는 심정으로 장석민은 지구본을 굴렸다.

「무슨 섬을 만듭니까. 됐어요. 돈이 아주 썩어 넘쳐나는군요.」

장석민이 정색하며 대답하자 자하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섬을 만드는 데 그리 큰돈이 들어가는 건 아닙니다. 하나 만들어 두고 시간이 될 때마다, 가서 즐기는 것도 방법이겠군요.」

장석민은 태어나 한 번도 빈부격차를, '빈'의 입장에서 느껴본 적이 없었다. 섬을 만드는 데 그리 큰돈이 들어가는 게 아니라는 말을 들으며 장석민은 경제규모가 다른 데서 오는 상대적 박탈감을 마음껏 맛보는 중이었다.

「됐습니다. 저 섬은 어차피 별로 안 좋아합니다. 정상적으로 다른 나라를 짚어보겠습니다.」

자하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장석민은 이번에는 부디 사람이 사는 곳이 나오길 기도하며 지구본을 돌렸다. 자하르는 산간 오지가 나오면 도로를 닦고 전기를 연결시키고도 남을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지구본이 멈추기 직전, 벨소리가 울렸다. 자하르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핸드폰을 들고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통화를 시작했다. 장석민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하르는 요즘 말 그대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정확히 어떤 일을 진행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하루에 잠을 자는 모습을 보기 힘들 만큼, 일에 매달렸다. 보통 자하르가 가진 핸드폰으로는 급한 용무만 보고되었다. 전화통화를 하고 난 후에, 보통은.

「죄송합니다.」

자하르가 사과의 말을 건넸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바로 나가봐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장석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틈날 때마다 장석민의 방으로 와서 시간을 보내고 있음을 알았다. 자하르는 본인을 제외한 그 누구도 리문의 4층으로는 올려보내지 않았다. 결국 자하르가 오지 않으면 장석민은 방에 혼자 우두커니 앉아 시간을 죽이는 일밖에 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일이 끝나면 바로 오겠습니다.」

「천천히 오셔도 됩니다.」

장석민의 대답에 옷을 입고 나서려던 자하르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다. 뭐가 또 심기를 거스른 걸까.

장석민이 왜 그러세요, 하고 묻자 자하르가 답했다.

「문을 열 때 쟝이 충직한 개처럼 달려와 반겨주는 모습이, 좋습니다.」

「…….」

야, 이 인간이.

「그래서 가끔은 일주일정도 가둬놓고,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하하, …….」

장석민이 힘없는 웃음을 짓자 자하르가 농담입니다, 하고 덧붙였다. 농담이 아니라는 사실을 방안에 있는 사람 전원이 알고 있다.

「그러면 안 되겠죠. 대나무 밭이 말라죽을 테니까.」

자하르가 단추를 잠그며 말을 이었다,

「계속 들여다보며 물을 줘야 시들지 않겠죠.」

의미심장한 말에 장석민은 얼굴에 열이 뜨끈하게 올랐다. 들키지 않게 손바닥으로 뺨을 문지르며, 평연한 척 대꾸했다.

「물은 제가 알아서 먹겠습니다. 다녀오세요.」

「아무나 문 열어주지 마세요.」

장석민이 허, 하고 기가 막힌다는 소리를 냈다.

「……제가 왕자님보다 연상인 거, 가끔 잊으시는 거 같은데요. 저 어린애 아닙니다.」

「성인인 것은 확인해서 알고 있습니다.」

자하르의 시선이 닿는 곳을 알아채고 장석민은 재빨리 옷자락으로 앞을 가렸다.

「절대로 문 열지 마세요.」

장석민이 아이고, 하며 이마를 감싸 쥐었다.

「해님 달님도 아니고.」

「그게 뭡니까?」

「서양 버전으로는 빨간 두건인가요. 아니, 좀 다른가.」

장석민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자하르의 눈이 길게 웃었다. 그웃음의 의미를 눈치 챈 장석민이 정색하며 빨간 두건은 보내지 마세요. 하고 덧붙였다. 자하르가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장석민이 오늘 배달해오는 선물상자는 뜯지 말자고 다짐했다.

「다녀오세요.」

자하르가 밖으로 나섰다. 혼자 남게 된 장석민은 소파에 앉아 뒹굴거리며 책을 읽기 시작했다. 자하르의 책장에서 몇 권 골라 가져온 책들이 제법 취향에 맞아 오랜만에 독서를 하게 된 것이다.

누운 채로 두 권을 독파했을 무렵, 어깨의 통증을 느끼고 장석민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으아아"

늘어지게 기지개를 켠 다음, 장석민은 창가로 다가갔다. 정원을 내려다보며 그는 쓸쓸하게 날짜를 헤아렸다.

"망할, 보내주기는 하는 거야?"

자하르가 자신을 죽일 것 같다는 생각은 없어졌다. ……아니, 줄었다.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럴 것 같았다. 문제는 언제 그가 자신을 한국으로 돌려보내주느냐 하는 것이다. ……왠지 이대로 영원히 이곳에서…….

"재수 없게, 그럴 리 없어."

장석민은 재빨리 고개를 내저으며 머릿속에 인 생각들을 몰아냈다. 인생사 생각대로 흐르는 것이다. 긍정적으로 사고를, ……,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지금 그나마 나나 되니까 버티지 보통 사람은 이런 상황에서 벌써 미쳤을 거라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던 장석민의 시선이 창문에 고정되었다.

"어."

장석민은 창문 너머로 보이는 사람을 보고 눈을 껌뻑였다. 저 사람이 여기는 웬일이지. 창에 얼굴을 바싹 들이댄 채 장석민은 리문으로 걸어오고 있는 사람을 확인했다. 나단 왕자였다.

예상대로 입구에서 경비병들이 출입을 막았지만 그가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보이자 경비병들의 얼굴에 당혹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이고, 젠장. 설마 여기까지 올라오는 건 아니겠지."

장석민은 초조하게 창밖을 바라보았다. 입구까지 무사통과한 나단이 고개를 들어 창을 확인했다. 눈이 마주쳤다. 나단이 화사하게 웃으며 손짓을 했다. 장석민은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나단이 곧 그 안으로 들어가겠다는 손짓을 했다.

"뭐? 들어온다고? 안 돼, 시부랄. 죽은 척했어야 하는데!"

장석민은 다급하게 커튼을 쳤다. 누가 오면 문 열어주지 말라고 했는데, 저 인간이 열어달라고 하면 다 열어줘야 하는 거 아니야?

장석민은 창가를 서성이며 손톱을 물어뜯었다. 하필 자하르가 없는 틈을 타서 온 것을 보면 저 인간이 자하르의 부재를 모를 리 없다.

자하르에게 지금쯤이면 연락이 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간을 조금만 끌면 된다는 건데. 

어느새 문밖에서 소란스러운 다툼이 들렸다. 자하르가 경호원들에게 누가 오더라도 문을 열어주지 말라고 이르고 간 터라, 나단과 실랑이가 벌어진 게 분명했다.

"어쩌지, ……젠장, 어쩌지."

장석민은 현재 나단이 국왕 대리로서 국정을 대신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자하르를 통해 들었다. 나단을 거스른다는 것은, 자신은 물론, 저 문밖에 있는 경호원들과 나아가서 자하르까지 문제에 휘말릴 수 있는 여지가 컸다. 예상대로 문 밖의 소란이 점점 커졌다. 고성이 오가기 시작했다. 장석민의 얼굴이 점점 창백하게 변했다. 탕, 하는 총소리가 울리는 순간 장석민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는 다급하게 달려가 문을 열었다.

「아, 장석민.」

나단 왕자가 해사하게 웃었다. 경호원에게서 빼앗은 총이 그의 손에 들려 있었고 천장에 매달린 크리스털 샹들리에 귀퉁이가 박살 난 채였다. 총을 빼앗긴 경호원의 얼굴에 당혹감과 수치심이 동시에 스쳤다. 자하르 왕자가 몇 번이고 단단하게 이르고 간 상태인데 나단 왕자가 찾아와 총까지 빼앗은 것이다. 문책을 당해 마땅할 일이었다.

「오랜만이네. 장석민.」

들으면 들을수록 신기한 발음이었다. 장석민은 나단 왕자에게 인사하며 오랜만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얼굴을 볼 수가 있어야지. 자하르에게 말해서 기도제에 참석할 수 있는지 여부를 알려달라고 했는데, 계속 몸이 좋지 않다는 대답만 들어서. 내 꼭 직접 병문안을 하려고 왔지.」

나단이 웃으면서 방 안쪽으로 몸을 빼꼼 내밀었다.

「들어가도 되겠지?」

이 나라의 첫번째 왕자다. 그것도 현 국왕의 대리인.

일개 후궁인 장석민이 들어오지 말라는 말을 할 수가 없는 존재였다. 장석민이 고개를 끄덕이자 나단은 들고 있던 총을 경호원에게 던져주고는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왔다.

「……고생 많으십니다.」

장석민이 경호원들에게 넌지시 말을 건네고 문을 닫았다. 나단은 방을 둘러보며 감탄을 내뱉고 있었다.

「오, 이 그림이 여기에 있었군. 얼마 전에 팔렸다는 뉴스는 보았는데, 자하르가 제법 장석민을 아끼는군, 그래.」

그림에 관해서는 할 말이 없었기에 장석민은 말없이 나단의 옆에 섰다.

「좀 앉을까.」

나단이 소파를 턱짓했다.

「……앉아도 되나요?」

「그럼.」

나단이 쾌활하게 대답하며 먼저 소파에 앉았다. 저러는 것을 보면 그렇게 나쁜 사람 같지는 않은데.

장석민이 자신의 맞은편에 앉자 나단의 눈매가 사르륵, 접힌다.

「보통 후궁은 맞은편이 아니라 그 옆으로 한 칸 물러나서 앉아야 한다. 그런 예의도 자하르가 가르쳐주지 않던가?」

「죄송합니다.」

「됐어, 나도 예의, 격식 따지는 타입은 아니라서.」

나단이 손을 내저었다. 소맷자락 안에서 움직이는 손목이 덜 여문 소년의 몸처럼 가늘다.

어떻게 이 사람이 하일보다 나이가 많단 말일까.

장석민은 겉보기등급과 실제나이의 상관성에 대해 생각하며 나단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래. 건강은 좀 어떻고?」

장석민은 그게, 하면서 말끝을 흐렸다. 아픈 척을 하려면 자하르가 필요한데, 지금 여기서 쓰러진다고 누가 받아주지도 않을 테고.

「그냥, 좀, ……여기저기 아파서요. 하하하.」

「건강해보이는데 의외군.」

장석민은 그러게요, 하고 힘없이 맞장구를 쳤다.

「그래도 걸어 다닐 만은 한가 보네.」

「그, 저기, 아플 때는 숨이 차서 걷는 것도 힘듭니다.」

일단은 그렇게 말을 했다. 장석민은 흘끔, 시계를 확인했다.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 했다. 그래야 자하르가 돌아와 이 사태를 해결해줄 테니.

「자하르는 당분간은 못 온다.」

「──!」

「중요한 일을 처리중이라서.」

장석민은 소름이 쭈뼛 돋았다. 결국 자하르의 일을 꾸며 그를 밖으로 끄집어내고 그 시간에 들어왔다는 얘기였다.

「나는 자하르와 이야기를 나누려고 온 것이 아니란다.」

「네.」

상황이 불리할수록 말을 길게 하면 안 된다. 장석민은 적당히 단답식으로만 대답하자고 결심했다.

「내가 무크라르 전하를 위해 기도제를 준비 중에 있음은 알고 있을 테지.」

「네.」

「그래. 전에 약속한 대로 네가 꼭 참석해줘야겠다.」

「네?!」

장석민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되물었다.

「제가 약속을 했나요?」

「가능하면 오겠다고 했지 않느냐. 내가 보기에 넌 지금 충분히 가능해 보인다. 앞으로도 그렇고.」

장석민은 속으로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변명의 말을 늘어놓았다.

「제가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면, 그러니까, 기도제에 참석했다가 그런 일이 발생하면 무크라르 전하께 폐갸 될 것 같기도 하고…….」

「걱정하지 마라. 죽어도 거기서 죽으면, 너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사람들이 입을 모아 칭송할 것이다.」

「……. …….」

이 인간들 가문의 혈맥에 재수 없음과 이기심이라는 중요 요소가 흐르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장석민은 생각했다.

「…거기서 죽으면 반드시, 폐가 될 것 같은데요.」

장석민의 대답에 나단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하, 재미있네.」

장석민은 따라 웃어야 하나 잠시 망설이다가 슬그머니 이를 드러내고, 미소 지었다.

「그런 것은 어차피 네가 신경 쓸 바가 아니다. 너는 와서 무크라르 전하의 강녕을 기원하면 되는 것이지.」

「…….」

장석민이 대답하지 않자 나단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걸렸다.

「대답하지 말라고 자하르가 시켰더냐?」

장석민이 아닙니다, 하고 고개를 내저었다.

「자하르가 무슨 생각으로 너를 내놓지 않는지 모르겠지만, 잘 들어라. 장석민.」

나단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발음되어 나올 때마다 장석민은 심장이 한 치씩 내려앉는 기분을 맛보았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나는 너를 기도제에 초대하려는 것이 아니란다.」

봄날의 고양이처럼 나른하고 예쁜 얼굴이었다. 자하르는 나단을 절대로 믿으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했다. 그의 말만 들으면 나단은 동화속에 나오는 마귀할멈 같은 끔찍한 존재처럼 여겨졌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은 반짝반짝 빛나는, 공주님 같은 외모를 한 왕자님이었다. 그래. 저렇게 예쁜 사람이 그렇게 악독한 짓을 할 리가 없지.

장석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단의 말을 들었다.

「나는 통보하려고 온 것이다. 반드시 참석해라.」

「…….」

나단이 손가락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자하르가 뭐라고 얘기하는지는 몰라도, 이것만 알아둬라.」

붉은 입술에 꽃 같은 미소가 걸렸다.

「참석하지 않으면 너는 물론이고 무크라르 전하의 권력을 무시하고 제 권력을 만들기에 급급한 리아드 빈 자하르의 목을 자를 것이다.」

「네?!?」

「그것만 알고 있으면 된다.」

제 할 말을 마친 나단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장석민도 따라 일어서며 다급하게 나단을 불러 세웠다.

「나단 왕자님. 방금 그 말이 사실입니까? 제가 기도제에 가지 않으면 자하르 왕자님을, …….」

차마 제 입으로 말하고 싶지도 않은 일이었다. 나단이 달콤한 웃음을 띤 채, 대답했다.

「그래, 빠트린 것이 있군.」

「…….」

「먼저 손발을 자를 것이다. 그러고 나서 목을 잘라야지.」

잠자리의 날개를 뜯어내는 어린아이처럼 해맑고 잔인한 모습이었다.

나단이 그럼, 하고 가볍게 인사하고 방을 나섰다.

장석민은 소파에 주저앉은 채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시발."

장석민의 눈에는 더 이상 나단의 웃음이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다. 열 명의 왕자 중 제일 쌍놈이 누구인지, 이제는 망설이지 않고 고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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