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6/35)

긴급히 본궁으로 모셔오라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리문으로 들어서자마자 라겔이 왕가의 문장이 찍힌 흰색 봉투를 전하며 건넨 말이었다. 자하르의 표정이 사라졌다. 그 문장 한 줄에서 장석민은 여러 가지 내용을 유추해냈다.

본궁은 왕이 사용하는 궁일 텐데, 누가 거기서 회의를 주최한 것일까, 게다가 내일이면 자하르와 하일이 협의를 끝낸 임시 기구 설립에 대한 발표를 한 예정인데 굳이 오늘, 회의를 하자고 하는 이유가 뭐가 있을까.

「준비하세요.」

자하르가 장석민에게 말을 건넸다. 시종들의 도움을 받아 옷을 갈아입으면서도 장석민은 마음이 좋지 않았다.

자하르의 어깨와 발목의 상태로 봐서 오늘 움직이는 것은 무리였다.

오늘 하루만큼은 쉬면서, ……저 인간 쉴 생각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회의를 나가는 건 영 무리일 것 같은데.

준비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자하르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말끔하게 옷을 차려입고 장석민은 기다리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장석민의 시선이 그의 발목과 어깨를 차례대로 훑었다.

「걸을 만합니다. 하루쯤 지나면 나을 겁니다.」

발목 부근에 감아놓은 붕대가 눈에 들어왔다. 장석민이 조그만 목소리로 죄송합니다. 하고 사과를 건넸다.

「어째서 쟝이 죄송한가요?」

자하르가 차 문을 열어주며 물었다. 장석민이 먼저 안쪽으로 들어갔다. 자하르가 옆 좌석에 앉은 다음, 차 문을 닫았다.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자하르가 다시 말했다.

「쟝이 죄송할 일은 없습니다.」

「저 때문에 다치셨으니까요.」

자하르가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쟝이 제게 칼을 휘둘렀습니까?」

「아니요.」

「제 다리를 쟝이, ──음, 이건 책임이 조금 있긴 하군요.」

자하르의 음성에 웃음이 묻어났다. 장석민이 자하르를 끌어안고 계곡 아래로 떨어진 것을 말하고 있었다.

「책임 공방은 다녀와서 하는 걸로 합시다.」

장석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하르가 통화를 시작했다. 통화 내내 그의 표정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창밖을 지나가는 풍경을 보며 장석민은 애써 불안한 마음을 억눌렀다.

본궁에 도착하고 나서야 통화를 마친 자하르가 입을 열었다.

「쟝을 데려가는 것이 썩 내키지 않습니다.」

「…….」

「리문에서 기다리셔도 괜찮습니다.」

자하르의 목소리가 평소답지 않게 침중하다. 불안이 수런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선택하셔도 괜찮습니다. 저를 따라갈지, 리문으로 돌아갈지.」

잠시 생각하던 장석민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왕자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으면 좋겠습니까?」

자하르가 입을 굳게 내리 물었다.

조짐이 좋지 않았다. 장석민이 있는 것이 자신에게 도움이 될지, 그렇지 않을지조차 판단이 서지 않는다. 아니, 두고 가고 싶은 마음과 손에 쥐고 있고 싶은 마음이 교차했다.

「쟝이 원하는 대로 하시면 됩니다.」

「그럼 가겠습니다.」

너무나 선선히 따라나서겠다고 하는 장석민의 발언에 자하르가 눈을 치떴다.

「어쨌든 제가 옆에 있으면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거죠? 불안하기는 하지만, ……사고 안치겠습니다.」

장석민이 손을 들어 보이며 맹세하는 시늉을 했다. 경직된 분위기를 풀어주려고 일부러 농담을 던진 것이다. 자하르와 눈이 마주쳤다. 또 그 미묘한 표정이었다. 저 표정을 보고 있노라면 목안이 간질간질한 기분이었다. 장석민은 어물거리다 시선을 내렸다.

「가도 되는 거면, 가겠습니다.」

어느 정도 자하르에 대한 책임감도 있었다. 붕대를 감고 있지만 걷는 것도 힘들어 보였다. 남자로서, 자신이 저지른 일에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아버지에게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온 그였다. 물론 아버지는 여자와 관련된 일을 염두에 두고 책임을 논하신 것일 테지만.

「그래요.」

자하르가 먼저 차에서 내렸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자엇ㄱ민은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맞잡았다. 본궁 앞에 도열하고 있던 사람들이 자하르 왕자에게 예의를 갖추어 인사했다. 그 옆에 서 있던 장석민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장석민은 마른침을 삼켰다. 걱정이 되긴 했지만 자하르가 옆에 있으면 어떻게든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본궁으로 향하는 새하얀 계단을, 장석민은 천천히 올랐다.

장방형의 테이블이 놓인 알현실 안에는 이미 자리를 잡고 기다리고 있던 왕자들이 여럿이었다, 처음에는 다 비슷비슷해 보이던 외모들이 이제는 제법 그 차이점이 구분되기 시작했다.

저 첫 번째 줄 가장 심술 맞아 보이는 것이 둘째 하일, 그 옆의 코가 유난히 큰 게 셋째 알 타밈, 느물거리는 호로새끼가 넷째 카힌, 얼굴이 허여멀건 한 것이 다섯째 하마드, 키가 제일 작은 것이 여섯째 마세르, 특징 없는 일곱째 반다르, 제일 반듯한 외모를 가진 여덟째 자하르, 안경을 쓴 게 아홉쩨 줄루위, 제일 덩치가 제일 큰 것이 막내 하디드였다.

장석민이 알현실에 나타나자 다들 안도하는 기색이었다. 무슨 일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 본궁으로 소환을 당하자 불안한 것은 모두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말라쿤이 있으니 적어도 죽을 일은 없겠군.

말라쿤이 왔으니 사고가 나도 죽지는 않겠어.

말라쿤이 있으니 불행한 일은 없을 테지.

장석민은 왕자들 사이에 이는 안도감을 읽고 숙연해졌다. 만에 하나 자신이 만들어진 행운의 상징임을 밝혀진다면, 여기서도 자신을 죽이겠다고 달려들 놈들이 여럿 보였다.

「늦었어.」

하일이 자하르를 보며 말했다. 자하르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장석민도 옆에서 같이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타밈이 먼저 입을 열었다.

「누가 우리에게 루쿤을 보낸 겁니까. 게다가 본궁에서라니.」

루쿤은 왕이 긴급 왕정회의를 소집할 때, 왕족들에게만 보내는 서신이었다. 자하르가 오늘 받은 것도 루쿤이었기에 그의 표정이 내도록 좋지 않았다.

「위대하신 왕 무크라르 전하께서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는 이런 상황에서 함부로 루쿤을 보내거나 본궁을 사용하는 것은 자칫, 반역의 죄를 물을 수도 있습니다.」

줄루위가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레 하일에게 쏠렸다.

「나도 모른다고 하지 않았느냐.」

하일이 신경질적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감히 누가 지금 나를 오라 가라 하는 거냐.」

그의 시선이 자하르에게 꽂혔다. 자하르 역시 아는 사실이 없기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됐다. 이런 바보 같은 일에 낭비할 시간 따위…….」

하일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때 알현실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와 그에게 손짓을 하며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

하일이 그토록 당황스러워하는 표정은 처음이었다. 알현실의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이 하일에게 말을 건넸다.

「오랜만이군.」

「……. ……어떻게, …….」

「다들 오랜만이군.」

가장 상석에 앉은 남자를 본 왕자들 모두 당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장석민은 자하르의 굳은 기색을 보고 놀랐다가, 고개를 돌려 상석에 앉아있는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두 번 놀랐다.

"어──!"

눈이 마주치자 남자가 알은체를 하며 눈인사를 건넸다. 그 기색을 알아챈 자하르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장석민을 바라보았다.

「……형님께서 여긴 어쩐 일입니까.」

하일이 먼저 남자에게 말을 건넸다.

「어쩐 일이긴. 왕자인 내가 왕정 회의에 참석하는 것이 그릇된 일인가? 당연히 참석을 해야지.」

타르카 왕국의 첫 번째 왕자 나단이 웃으며 대답했다.

「누구예요?」

장석민이 자하르에게 넌지시 물었다. 자하르가 첫째 형님, 이라고 짧게 대답했다. 장석민은 적잖이 놀랐다. 도서관과 기도회에서 보았던 호박색 눈을 가진 남자가, 후궁이 아니라 이 나라의 첫째 왕자였다니. 게다가 타르카 왕궁의 첫째 왕자를 수식하는 말은 한 줄이었다.

'몸이 좋지 않아 공식 석상에서 얼굴을 볼 수 없는.'

사실 그가 갑자기 공식 석상에 나타났다는 사실보다 장석민이 놀라워하는 것은 그의 외모였다. 나단 왕자는 웃는 것만으로도 사방이 환하게 느껴질 만한 미인이었다. 남자에게 미남이 아닌 미인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것이 조금 미안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 단어 외에는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목울대를 타고 나오는 허스키한 음성이 아니었다면 여자라고 봐도 무방한 외모였다.

게다가 첫째라면 하일보다 나이가 많을 텐데, 나단 왕자의 외모는 아무리 많이 봐도 이십 대 후반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상석에 앉아 느슨하게 웃고 있는 나단 왕자를 보며 장석민은 저 사람이 스킨케어 센터를 운영한다면, 떼돈을 벌 수 있을 거란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건강이 좋지 않다 들었는데 이렇게 얼굴을 뵈니, 반갑습니다.」

자하르가 나단에게 인사를 건넸다. 나단이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웃으며 대답했다.

「병치레가 길어지니 나의 궁에 찾아오는 발길도 뜸하여, 찾아와 봤는데 다들 건강해 보이니 마음이 놓이는군.」

뼈가 있는 한마디였다.

모두의 기억 속에 첫째 왕자 나단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냥 기분전환 삼아 오신 것 같지는 않은데, 어떤 연유로 저희를 모이라고 하신 겁니까. 루쿤도 형님께서 보내신 겁니까?」

돌려 말하는 법을 배우지 않고 태어난 듯한, 하일이 다짜고짜 물었다.

나단이 큰소리로 웃으며 하일을 바라보았다.

「여전하군,하일.」

「…….」

「여전히 오만해.」

나단의 말에 하일이 발끈해서 주먹을 쥐었다. 어떤 이야기가 오가는지 알 수 없지만 장석민은 하일이 부들부들 떠는 모습에, 속이 조금 시원했다.

「루쿤을 보낸 것은 무크라르 전하의 뜻이다.」

「무슨 말씀입니까. 전하는 지금 의식 없이 왕실 병원에 누워계신지 열흘이 넘었습니다. 나단 형님께서 그간 외출이 너무 없으셔서 뭔가 뭔가 착각하고 계신 것 같군요.」

카힌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의 말투에서 나단을 깔보고 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카힌의 말대로입니다. 루쿤은 전하의 뜻이 아니면 절대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하일도 카힌의 말을 거들었다. 나단이 해사하게 웃었다. 볕을 보지 않은 하얀 팔이 위태롭게 의자 아래에서 흔들렸다.

「이렇게 되실 것을 미리 예지라고 하셨는지 전하께서 루쿤을 나에게 맡기셨다. 친필로 작성하신 칙령이니 다들 돌아가면서 읽어봐도 된다.」

나단이 검은색 서류철을 장방형의 탁자에 던지듯 건넸다. 하일이 분노어린 얼굴을 하고 서류철 안에 든, 종이를 확인했다. 글자를 읽어 내려가던 하일의 표정이 사라졌다.

「하일 형님, 저에게도 보여주십시오.」

하마드가 손을 내밀었다. 그가 종이를 받아가기 전에 타밈이 옆에서 종이를 가로챘다. 그의 옆으로 카힌이 고개를 내밀어 같이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상황을 알지 못하는 장석민은 자하르의 얼굴만 살폈다. 자하르의 눈빛이 서늘하게 굳은 채로, 나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 것이 위대하신 무크라르 전하의 선견이시지.」

선견이란 말을 하던 나단의 눈이 장석민에게 향했다. 영문을 알 리 없는 장석민은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한 번 웃었다. 나단이 마주 보고 꽃 같은 웃음을 지었다. 시커멓고 커다란 타르카 가문의 왕자들만 보다가 해사한 얼굴을 보자 왠지 눈요기가 되는 듯하여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장석민이 헤헤,하고 웃어 보였다. 자하르가 손을 뻗어 테이블 아래로 장석민의 손을 세게 움켜쥐었다.

"……!"

웃지 말라는 표시임을, 장석민은 손을 부러트릴 것 같은 손아귀 힘을 통해 알아챘다.

「전하께서 루쿤을 전하셨을 때, 뜻하는 바가 있었을 듯합니다. 그뜻이 무엇인지 여쭙고자 합니다.」

그때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자하르가 처음으로 건넨 말이었다. 나단의 눈썹이 위로 휘었다.

「전하께서는 본인께서 피치 못할 사고나 지병으로 후계자 없이 쓰러지셨을 경우를 걱정하셨다.」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던 왕자 중에서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라이드 빈 무크라르는 후계자를 선택하는 일을, 끝까지 미루고 싶어 했다. 할 수만 있다면 죽기 전까지 후계자 없이 권력을 독점했을 유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믿거나 말거나 나단은 웃으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혹시 그런 일이 생겼을 경우, 나에게 임시 국정 위원회를 열 수 있는 권한을 넘겨주셨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하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임시 국정 위원회를 열 수 있는 권한이라는 것은, 즉 왕의 대리인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이었다.

「하일, 너는 지금 전하의 뜻을 거스르겠다는 것인가?」

나단의 서늘한 물음에 하일이 이를 사리물었다. 모두의 얼굴에서 당혹스러움과 분노가 어렸다. 타르카 왕국에서 왕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그에 반대하거나 거스른다면 반역을 뜻했다.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내놔야 한다는 의미와 다름없었다. 재산, 여자, 그리고 목숨까지.

「걱정하지 마라. 어디까지나 대리이니까. 전하께서 깨실 때까지.」

「언제 깨실지 알고…….」

카힌이 턱을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장석민은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채고 자하르의 얼굴을 살폈다. 그의 눈동자는 감정을 숨긴 채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당연히 하루라도 빨리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셔야 할 테지.」

나단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여 장석민에게 향했다. 또 눈이 마주쳤다. 웃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되어, 장석민은 그냥 고개를 숙였다.

「먼바다를 건너 온 말라쿤의 현신이라 했지.」

외모만큼이나 부드러운 영어발음이었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라는 것을 알고 장석민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대는 뭐라고 불러야 하나?」

장석민은 자하르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름을 말해도 됩니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자하르는 표정없는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쟝, 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그것은 성일 텐데. 이름이 있지 않나?」

장석민은 잠시 주저 하다 장석민입니다. 하고 답했다. 어차피 외국인이 발음하기 힘든 이름이니 나단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쟝이라고 부를 거라 생각했다.

「장. 석. 민. 좋은 이름이군.」

거의 정확한 그의 한국어 발음에 장석민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한국?"

"네. ……어떻게."

이곳에서 한국어를 들을 것이라 생각지도 못했기에 장석민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나를 키워주셨던 유모가 한국계였다. 누워서 할 일이 없으니 이것저것 보다 보니 어느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고.」

나단이 유창한 영어로 말을 이어가며 장석민에게 넌지시 미소를 지었다. 저도 모르게 따라 웃으려던 장석민은 자하르를 떠올리고 이크,하며 애써 무표정을 가장했다.

「그대의 도움을 좀 받고 싶은데.」

「네? 저요?」

「신의 목소리를 듣는 자의 도움을 받아 무크라르 전하의 무탈함을 기원하는 기도제를 열 것이다.」

「기도제, 라니요.」

자하르의 음성이 낮게 깔렸다.

장석민은 흠칫, 하고 떨며 자하르를 돌아보았다. 자하르는 웃고 있었다. 하지만 장석민의 눈에는 그의 파르스름한 분노가 고스란히 보였다.

「자하르 너는 선견을 가진 말라쿤의 현신이라는 분을 모시고 있으면서 어째 그 신통함을 무크라르 전하를 위해 사용하지 않는 것이지?」

나단의 물음에 자하르의 웃음이 스러졌다.

「쟝은 기도를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우리의 신을 믿지 않습니다.」

「알고 있다. 그저 나는 장석민의 도움을 받고자 함이다. 그가 자리에 함께 해주기만 해도 신은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주실 테니까.」

나단이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기도회를 성대하게 열 생각이다. 모두들 참석해야 할 것이다. 당연히 그래야 할 테지. 무크라르 전하의 안녕을 기원하는 기도제니까. 혹시 제멋대로 아직 돌아가시지도 않은 전하를 대신할 정부를 수립하느라 바쁜 사람들은 불참해도 상관없다.」

뼈가 있는 말에 하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나단이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단상에서 내려온 그가 장석민의 앞으로 걸어왔다.

「장석민.」

외국인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정확한 발음으로 나오는 것이 여전히 신기한 장석민이었다.

「네. 왕자님.」

「아까 말한 대로 그대의 도움이 필요하다. 무크라르 전하를 위한 기도제에 그대가 꼭 참석해주길 바란다.」

「……될 수 있으면 그러겠습니다.」

거기서 날름 그러겠노라고 대답할 만큼, 장석민은 둔하지 않았다.나중에 자하르의 뜻에 따르는 게 가장 현명한 선택이 될 것이다.

「확답을 받고 싶은데.」

나단이 눈을 사르륵 접으며 웃었다.

장석민은 자하르에게 흘깃 시선을 던졌다. 자신이 나설 때가 아님을 아는 것이다.

「쟝은 몸이 좋지 않습니다.」

자하르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언제 갑자기 발작을 일으킬지 알 수 없어 확답을 드리기가 곤란합니다. 하지만 신께서 그리 하고자 하신다면 쟝도 그 자리에 참석할 것입니다.」

책임을 묘하게 피해나가는 답이었다. 옆에 서 있던 장석민도 고개를 끄덕였다. 성인 남자가 병약함을 핑계 삼는 것이 조금 부끄럽긴 했지만 일단은 후퇴하는 게 낫다는 판단에서였다.

「자하르.」

나단이 아우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자하르가 나단과 눈을 마주하며 네, 하고 대답했다. 예의바른 어투였지만 칼로 잘라낸 듯이 단호한 기색이 느껴졌다.

「너는 전하께서 일어나시는 것을 원치 않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어째서 너의 작고 귀여운 새를 빌려주는 것을, 그렇게 꺼리지?」

나단의 시선이 장석민을 훑었다. 자하르가 손을 뻗어 장석민을 자신의 뒤에 서게 했다.

「전하의 쾌차를 위해, 가능한 모든 일을 돕겠습니다.」

자하르가 가슴에 손을 얹은 채, 그렇게 답했다.

「좋다. 그렇게 알아두겠다.」

나단이 기분 좋은 고양이 같은 얼굴로 나른하게 웃으며 장석민에게 인사를 건넸다.

"장석민.안녕."

어린애 수준의 회화실력이었지만 한국어로 이야기해주는 것이 싫지만은 않았다. 장석민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럼 저는 먼저 일어서보겠습니다.」

자하르가 자신의 형제들에게 반듯하게 인사를 했다. 마지막으로 나단에게도 인사를 하고 그는 알현실을 걸어 나왔다. 그의 뒤를 따라나서던 장석민은 자신에게 손을 흔들고 있는 나단을 보고는 멈칫, 서서 손을 재빨리 흔들어 주었다. 자하르가 저만치 앞서 걷는 것을 보고 장석민은 다시 그의 옆으로 달려갔다.

다른 왕자들도 우르르 자리를 정리하고 알현실을 나왔다. 정확히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해하지 못한 것은 장석민 하나였다.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육중하게 울렸다. 오는 내내 아무 말도 없던 자하르가 소파에 몸을 기대어 앉았다.

장석민은 소파 뒤를 서성거리다가 자하르의 앞으로 다가가 앉아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앉으라고 가져다 둔 소파입니다.」

장석민은 자하르의 맞은편에 앉았다. 자하르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였다. 그 안에서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궁금했지만 그가 이야기를 해줄 때까지 기다릴 심산이었다.

「쟝.」

이윽고 긴 침묵을 깨고, 자하르가 장석민을 불렀다.

「네?」

「원래 이름이 뭐라고요?」

「……, ……네?」

자신이 잘못들은 것은 아닌가 싶어 장석민은 눈을 치떴다.

「원래 이름이 무엇인가요.」

얘가 왜 이러지. 뭘 잘못 먹고.

「……장, 석, 민.입니다.」

「쟝, ……, …….」

자하르가 몇 번 더 장석민이 아닌 장석민을 입안에서 발음했다.

「발음하시기 어려우실 겁니다. 계속 부르던 대로 부르세요. 그런데, ……아까 거기서 제 이름 얘기만 오간 건 아니죠?」

「──.」

중요한 이야기가 나오자 자하르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것인가. 뭔가 내 얘기가 오간 것 같은데, 장석민이 큰 눈을 껌뻑거리며 물끄러미 시선을 던지자, 자하르가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쓸어내렸다.

「데리고 가지 말걸 그랬습니다.」

「네?」

「오늘 그 자리에 쟝을 데리고 가지 말걸 그랬습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장석민은 불안함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뭔가 일이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된 모양이다.

「제가 또 무슨 실수라도 했습니까?」

「아니요,」

「그런데 왜…….」

「나단 형님이 쟝을 빌려달라고 했습니다.」

「예? 아니, 도움을 구한다고는 했는데, 그게 그렇게 해석이 되나요?」

장석민은 손가락을 공중에 살짝 돌리면서 단어의 뜻을 되새겼다.

「그러니까, 나단 왕자님께서 기도제를 하는데 저한테 참석하라는 말씀을 하신 게 아닌가요?」

장석민은 그 자리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차근하게 되물었다.

「맞습니다.」

「참석하면, ……안 되는 건가요?」

자하르의 의중에 따라 움직일 생각이긴 했지만 장석민은 그가 저렇게 정색하는 의도를 알지 못해 혼란스러웠다. 국왕을 위한 기도제일 뿐인데, 뭐가 그리 큰 문제가 된단 말인가.

「내키지 않습니다.」

「네?」

「제가, 내키지 않습니다.」

자하르가 장석민을 바라보았다. 차가운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났다. 나단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철저하게 자신의 실수였다. 이십여 년이 넘도록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왕자를, 미처 계산에 두지 않은 것은, 확실히 자신의 실수였다.

나단이 무크라르 왕의 칙령을 들고 나타났을 때, 자하르는 제 눈을 의심했다. 그리고 거기에 앉아있던 나머지 여덟 명의 왕자들 역시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왕의 대리인으로서 성대하게 기도제를 연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데 거기에 장석민을 데려다 놓는다는 것이, 자하르의 심사를 뒤틀리게 했다.

「내키지 않는다고,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장석민은 놀라 묻는다. 자신이야 외국인이니 잘 이해되지 않지만 이 나라 사람들은 기도니 종교니 하는 것들을 몹시 중요시여기는 것이다. 나단 왕자가 큰 기도제를 여는데 거기에 자신을 불참시킨다면. 자하르에게 불이익이 갈 것 같았다.

「왕자님의 평판에 문제가 생길 것 같은데요?」

장석민의 말대로였다, 그렇게 했다가는 나단의 얘기로는 자하르 왕자는 무크라르 왕이 일어나지 않길 원한다는 말이 퍼져 나갈 수 있다.

그런데, 자하르는 장석민을 내어주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장석민을 바라보던 나단의 시선이 그의 심기를 긁었다. 외모는 그럴 듯해도 속이 가장 썩은 인간이 나단이었다. 어릴 적에도 그 더러운 성격 때문에 튜터들이 남아나질 못하고 교체되었다. 게다가 나단은 마음에 드는 것을 손에 넣지 못하면 그것을 망가트리곤 했다. 그로 인해 하일과 어릴 때 몇 번이나 격렬한 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카힌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아니, 형제 중 누구와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저는, 괜찮습니다.」

장석민이 자하르의 낯을 살피며 그렇게 말했다.

「뭐가 괜찮습니까.」

자하르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날아들었다. 당황한 장석민이 바로 대답하지 못하자, 자하르가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이 쟝을 이용하는 것이 뭐가 괜찮은가요?」

당신도 이용하지 않았느냐고 말하려다 장석민은 입을 다물었다. 저 흉흉한 기세를 봐서 지금 그 얘기를 했다가는 최소 사망이다.

「저는 괜찮지 않습니다. 쟝이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도록 일을 마무리 짓겠습니다.」

자하르가 딱 잘라 이야기를 마쳤다.

그는 손으로 미간을 문질렀다. 오늘 하루만 해도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다. 임시 기구 설립에 대한 이야기도, 하일의 표정을 봐선 아예 물 건너간 듯했다. 나단이 거기에 대해 못을 박아버린 것이다.

제멋대로 아버님이 돌아가시지도 않았는데 정부를 세우기 바쁜 사람들, ──그렇게 말하던 나단의 낯짝을 떠올리자 속이 뒤틀렸다.

「──, ──.」

가장 그의 심기를 긁는 것은 무크라르 왕이 무슨 생각으로 나단에게 대리인의 권리를 넘겼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자하르는 짧게 웃음을 삼켰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자하르 왕자님.」

장석민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자하르가 시선을 들었다. 까맣고 말간 눈이 자신을 걱정스럽게 올려다보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괜찮습니다.」

자하르가 평연하게 말했다.

「……안 괜찮아 보이시는데요.」

자하르가 쓰게 웃었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 기분을 고스란히 드러낸 모양이었다.

「발목이나 어깨도 아프시잖아요. 괜찮아요?」

그렇게 묻고 있는 장석민의 목덜미가 자하르의 눈에 들어왔다.

「목의 상처는 좀 어떻습니까.」

장석민이 제 손으로 목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이 정도야 뭐. 조금 졸린 건데요.」

사실 조금 졸린 수준이 아니었다. 장석민은 그 죽음의 문턱에 한 발을 걸쳤던 것이다. 의식이 가물가물 멀어지는 순간에 거짓말처럼 자하르가 나타났다.

그때 정말 왕자님 같았지. ……아니구나. 실제 왕자구나.

자하르가 손을 뻗었다. 손가락을 두어 번 까닥거리는 것이 목을 가져와 바치라는 뜻 같았다. 장석민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자하르에게 목을 진상했다. 그의 손가락이 장석민의 목줄기를 따라 주욱, 훑어 내렸다.

「약을 바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자하르의 손가락이 움직인 선을 따라 소름이 돋는 느낌이었다. 장석민은 네,하고 대답하면서 시선을 어물어물 피했다. 동굴 안에서 얼굴을 맞댄 채, 흐르던 기묘한 기류가 떠올랐다. 얼굴이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나단 형님이,」

자하르의 말에 장석민이 고개를 바로 해,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

「나단 형님이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으셔야 합니다.」

「네?」

「제 말대로 하세요.」

강제가 묻어나는 어투에 장석민은 약간 불퉁한 얼굴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납득 못하는 얼굴이군요.」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사실입니다.」

자하르는 감정에 의해 일을 결정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번 경우에는 아무리 봐도 그가 득보다 실이 많은 선택을 하려 하고 있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그냥 그렇다고 외우시면 됩니다. 그리고 내일부터는 공식 석상에 쟝을 데리고 다니지 않을 겁니다.」

「…….」

「당분간은, 리문에만 계세요.」

당분간은, 이라는 단어가 주는 불길한 뉘앙스를 장석민은 바로 읽을 수 있었다.

「언제까지입니까?」

「──.」

「언제까지 계속, 리문에 있어야 하나요?」

장석민이 말하는 언제까지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하르가 모를리 없었다.

「안전해질 때까지입니다.」

자하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장석민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누가 안전해질 때까지인가요?」

자하르의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나단이 손에 들고 있는 칙령은 왕의 대리인과 동등한 권력을 가질 수 있는 서명이었다. 그가 장석민을 갖고자 한다면, 자하르로서도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

「쟝이 안전해질 때까지입니다.」

자신의 궁에 있는 사람을 지키지 못하는 것은, 궁의 주인으로서 굉장히 치욕스러운 일이었다. 아니, 치욕은 중요하지 않았다.

자칫 눈만 떼어도 금세 자리를 박차고 떠나버릴 것 같은 장석민을, 자하르는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시커먼 감정이 꿈틀거렸다. 사람의 앞에서 부정적인 감정을 감추는 데에, 익숙했다. 

그런데 장석민의 앞에서는 그게 쉽지 않았다. 아주 작은 행동에도 불쾌함이 일었고 그것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따.

나단은, 자하르에게 작은 새를 빌려달라고 말했다. 자하르는 그가 장석민을 데려간다면 돌려주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 ……제가 안전해지는 순간이 오긴 하는 건가요?」

장석민이 힘없이 시선을 아래로 던지며 물었다.

「리문에 있는 한 안전할 겁니다.」

차라리 보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오늘 밤에라도 전용기에 태워 보낼 수 있다. 사회주의 체제인 북한도 아닌, 남한에 거주하는 부유한 집의 자제인 장석민은 고국으로 돌아간다면 타르카 왕국으로 돌아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매를 길들이는 것은 어려웠다. 십여 마리 중에 두어 마리만이 남고 대다수는 하늘로 날아가 돌아오지 않는다. 그 정도만 남아도 성공률이 높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장석민은 단 하나였다. 한 번 놓친다면 다시 손에 쥘 수 없을 게 분명했다.

「밖은 위험합니다. 쟝을 암살하려는 세력도 있고, 나단 형님은 무슨 일을 꾸미는지 알 수 없습니다.」

어린 아이를 꾀어내려는 듯한 달콤한 목소리로 자하르는 장석민에게 위험을 속삭였다. 벼랑 끝에 매달린 채로 오롯이 자신만을 바라보던 그 얼굴이, 다시 보고 싶었다.

장석민이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왕자님은, 제가 안전하길 바라시는 건가요? 아니면 저를 가둬두길 바라는 건가요?」

자하르가 짧게 웃었다. 손을 뻗어 장석민의 뺨을 쥐었다. 한 손에 다 들어오는 아담한 얼굴이, 설핏 긴장하는 기척이 느껴진다.

「──미안합니다. 쟝이 머리가 좋다는 것을, 가끔 깜빡하는군요.」

손가락으로 장석민의 입술을 만졌다. 흠칫, 하고 놀라자 속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자하르는 속이 뒤틀렸다.

「당연히 후자입니다.」

「──!」

「당분간은 감금해두고 안전해지길 기다리죠.」

산뜻한 투로 말해버리고는 자하르는 장석민을 두고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자 그 안에서 욕설인 게 확실한 말들이 터져 나왔다. 몹시 상스러운 내용이라는 것을 어감을 통해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계단을 하나씩 내려갈 때마다 자하르의 얼굴에서 표정이 스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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