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4/35)

「…….」

장석민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생각을 들킨 것 같아 무안했다. 

「말하지 마세요. 제 입장도 곤란해지니까.」

자하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일 형님께 공식적으로 항의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래도 말은 해두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섬뜩하리만치 나직하다. 장석민의 부어오른 뺨을 보는 눈초리도 서늘하기 그지없다.

「괜찮습니다. 이 정도야, 뭐. 하하하하. 자하르 왕자님이 저를 밤에 괴롭히는 거에 비하면야. 하하하.」

장석민이 일부러 큰소리로 웃어 보이지만 분위기는 걷잡을 수 없이 어색해졌다. 죄송합니다, 농담이었습니다, 하고 곧바로 사과를 건넸지만 자하르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제가 하는 행위가, 쟝을 괴롭게 합니까?」

「네?」

「그게 괴로워서, 견뎌내야만 하는 행위인가요?」

핀트가 엇나간 질문이 돌아오자 장석민은 눈을 껌뻑거리다가 입을 뻥긋거린다. 남자랑 성행위를 하는데 기분이 좋다는 말을, 어떻게 자신의 입으로 한단 말인가.

장석민의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자하르가 그렇군요, 하고 손을 거두었다. 뺨에서 온기가 물러서자 장석민은 순간, 아쉽다는 생각을 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이내 고개를 돌렸다.

장석민이 얼굴을 문지르면서 베일을 찾으러 옷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뭐하시나요.」

「베일을 찾습니다. 이 근처, 어디에 뒀는데…….」

「약속은 취소했습니다.」

「네? 아까, 30분 뒤에 온다고, …….」

「방금 라겔에게 취소하라고 일러뒀습니다.」

짧은 통화가 그 내용이었던 모양이다. 장석민은 그래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안 됩니다.」

「…….」

역시 이놈은 사람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방법을 모른다.

「안 되는데, 그렇게 했습니다.」

자하르가 평연한 투로 말하며 소파에 앉는다. 넥타이를 끌어내리는 모습을 보며, 장석민은 재수 없는 놈이라고 중얼거렸다.

「네?」

「아닙니다.」

재수없는 놈. 지 혼자 멋진 건 다 하고 있네. ……시발, 멋있잖아.

장석민이 맞은편에 앉으려다가 멈칫, 하고 자하르의 눈치를 살폈다. 자하르가 왜 그러신가요, 하고 의아한 투로 물었다.

「앉아도 되나요?」

한번도 의식하지 않았는데 하일이 지랄을 하고 난 뒤라, 괜스레 행동 하나하나가 신경 쓰였다.

「소파가 마음에 안 드십니까?」

「아니요, 그럴 리가요.」

자하르가 새 소파를 주문하기 전에 장석민은 털썩, 자리에 앉았다.넥타이를 풀어 소파 옆에 걸쳐둔 자하르가 입을 열었다.

「오늘은 온 종일 뭘 하고 보내셨나요.」

「……별거 안 했습니다.」

「경전을 쓰셨을 테고, 황금상을 타고, 하일 형님께 뺨을 한 대 맞았겠군요.」

하나하나 꼽아 말하는 자하르를 보며 장석민은 심사가 왜 또 저렇게 뒤틀렸나 싶었다.

「마지막 거는, ……제가 한 게 아닌데요.」

소심하게 반항을 했다. 자하르는 대답하지 않고 재킷을 벗는다. 장석민은 그가 옷을 하나씩 벗는 것이 영 불안했다.

「왕자님은, 일……, 잘하고 오셨나요?」

물어놓고 장석민은 제 혀를 깨물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건 마치 집에서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가 던지는 말 같지 않은가!

「네, 잘 끝났습니다. 덕분에.」

「다행이군요.」

장석민은 옷자락을 쥐었다 놓았다. 하일로부터 받은 지령이 있기에 자하르의 눈을 보는 게 어려웠다.

「저한테 하실 말씀 있습니까?」

「아니요, 아니, ……자하르 왕자님.」

장석민이 마음을 다잡고 그를 불렀다.

자하르가 네, 하고 짧게 대꾸했다.

「저,……언제쯤 돌아갈 수 있습니까.」

자하르가 약속을 한 것은 정국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 나서, 였다. 어제 일이 주 안에는 어떻게든 해줄 것이라고 장석민은 믿고 있었다.

「왜 물으십니까.」

「네?」

「그렇게 돌아가고 싶습니까?」

그렇게 묻는 목소리가 날카롭다. 자하르가 장석민을 직시한다. 그때와 같은 눈빛이다. 잘못을 추궁하는 듯한, 뱀이 단단한 비늘을 세워 먹이를 옥죄는 듯한, 집요한 시선.

장석민은 눈 둘 데를 찾지 못하고 황망하게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그게, ……그게 왕자님한테도 좋지 않을까 싶어서요.」

하일에게 가고 싶지 않았다. 그놈에게도 손톱만큼의 도움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무엇이 좋은지 나쁜지는 제가 판단합니다.」

자하르가 장석민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그렇게 답했다. 어떻게 하면 저 남자에게 미움을 받아서, 쫓겨 날 수 있을까.

……그 생각을 하고 있자니 이유 없는 통증이 가슴을 묵직하게 눌렀다. 말라쿤 상 위에 올라가서 차라리 이대로 이놈이 살아나서 날아가 버렸으면 좋겠다는, 미친 생각까지 했다.

「저를 믿기로 하셨으니, 그 얘기는 이쯤에서 그만두죠.」

자하르가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 장석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자하르는 회의가 끝난 뒤에도 당분간은 자신을 보내지 않을 성 싶다.

그렇다면 어찌하면 좋으려나.

「뭐, 하나만 여쭙겠습니다.」

「뭔가요.」

자하르의 눈썹이 위로 휜다. 심사가 썩 좋지 않다는 표시다.

「왕자님은, 어떤 사람이,……가장 싫습니까?」

자하르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장석민을 보았다. 뭔가 우물우물 숨기는 기색이 있더니 묻는다는 말이 저것이라니.

「그건 왜 물으시나요.」

그렇게 묻는 자하르의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졌다.

「그냥요, 알아둘까 해서요.」

자하르가 글쎄요, 하고 말끝을 늘인다. 장석민은 옷자락 끝을 계속 만지작거렸다.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을,──.」

「──?」

「좋아하지 않습니다.」

자하르가 말을 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계속 손에 쥐고 눈을 둬야 하기 때문에 신경이 쓰입니다. 아니, 쥐고 있어도 가끔은 초조할 때도 있군요.」

자하르는 눈을 뎅그러니 뜨고 자신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는 장석민을 바라보았다. 가끔, 저 동양인 청년을 보고 있으면 알 수 없는 초조함에 묵직한 불쾌함이 치솟았다.

「아, 그것도 있군요.」

자하르가 눈웃음을 지으며 말을 덧붙였다.

「앞뒤가 다른 사람도 싫어합니다.」

「자기비판의 시간인가요?」

장석민이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물었다. 자하르가 웃음을 삼켰다.

「뒤통수치는 사람을 싫어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거 자기비판이죠?」

「하긴, 쟝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서, 속을 걱정은 안 해도 되겠군요.」

장석민이 언뜻 미간을 찡그렸다.

「제가 그렇게 얼굴에 다 드러납니까?」

「부정적인 생각은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장석민은 큰일인데, 하고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간 부정적인 생각을 해온 경험이 별로 없기에 장석민은 자신이 그럴 때 어떤 표정을 짓는지도 잘 알지 못했다.

「부정적인 생각은 안 하시면 ㅚ는 거 아닌가요.」

자하르가 넌지시 웃으며 말했다.

「말처럼 쉽습니까.」

「안 하게 해드리지요.」

장석민은 그럼 오늘 밤부터 체스 내기는 그만두고 잠 좀 편하게 재워주는 것은 어떠냐고 물어보려 했다.

「이번에는 제가 하나만 여쭙겠습니다.」

자하르가 갑자기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면.

「네?」

「하일 형님께서 쟝을 때린 이유가 뭡니까.」

장석민이 그건, 하고 입술을 달싹거렸다.

「예의를 알지 못하여 때린 게 맞습니까?」

하일이 안하무인의 성격이라도 앞뒤 구분도 하지 못하는 머저리는 아니었다. 예의를 알지 못한다고 리문까지 찾아와 장석민에게 손을 델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게, 그러니까.……죄송합니다.」

장석민이 고개를 숙였다.

「뭐가 죄송한가요?」

「제가, 왕자님 사진을, ……잃어버려서 달라고 했는데, …….」

「잃어버렸다고요?」

「네…….」

장석민이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자하르가 자신의 얼굴을 보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걸 달라고 부탁한 것입니까? 하일 형님께?」

「네. ……그랬는데,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무리 말라쿤의 현신이라는 소리를 듣는 장석민이라 해도 일개 후궁의 신분이었다. 다른 왕자에게 자하르의 사진을 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도한참 어긋나는 태도였다.

「그냥 저에게 달라고 하지 그러셨습니까.」

「……죄송합니다.」

「어떤 사진이었습니까.」

「잘, 기억이 안 납니다.」

「기억이 안 난다고요?」

「그냥 얼핏 봤던 거라서, ……평범한 모습이었습니다.」

자하르가 흠, 하고 입을 내리다물었다.

「평소에도 거의 사진을 찍지 않아서, 무슨 사진인지 모르겠군요.」

역시 뭐라고 정확히 콕 집어 얘기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장석민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래서 그런 겁니까?」

「네?」

「그래서 죽을상을 하고 거기 위에서 누워 계셨던 건가요.」

자하르의 손가락이 황금상을 가리켰다. 그간 장석민을 지켜봐 온 결과, 하일에게 한 대 얻어맞았다고 거기서 그러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다른 무언가에 마음이 상한 게 분명했다.

자하르가 그런거예요? 하고 거듭 묻자 장석민은 고개를 떨구고 눈을 어물어물 움직였다. 자하르의 시선이 장석민의 속눈썹을 따라 움직였다. 민망함에 할 말을 찾는 표정이다. 그 다음은 입술이 움직일 것이다.

자하르의 눈이 장석민의 얼굴을 내리훑었다.

「그냥, …….」

하일 때문에 빡쳐 있기도 하고 자하르에게 쫓겨날 방법을 생각하느라 마음이 답답하기도 하고, 여러모로 머리가 복잡하여 올라간 것이었다. 남자 사진 한 장 없어졌다고 올라가서 진상을 부릴 만큼, 호모는 아니란 말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설명할 자신이 없었기에 장석민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아까 그 커다란 액자를 자랑하는 편이 덜 호모스러웠을 텐데.

「너무 신경, …….…….」

신경 쓰지 말라는 말을 하려고 했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자하르와 눈이 마주쳤다. 웃는 건지 화가 난 것인지, 구별이 잘 되지 않는 미묘한 표정이었다. 낯선 얼굴이다. 순간, 장석민은 얼굴에 뜨끈하니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목안이 간질간질했다. 나오지도 않는 기침을 두어 번 하면서, 장석민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신경 쓰지 마세요. 사진이야 뭐, 나중에 어떻게든, 다시, …….」

웅얼웅얼 끝말을 입안으로 삼키며 장석민은 열심히 시선을 이리저리 돌렸다. 어색하다. 어색해. 남자랑 이런 분위기 영, 어색해.

「사진 찍는 것을 즐기지 않아 남아있는 사진이 거의 없습니다. 정복을 입고 찍은 기념사진이라면 얼마든지 구해드릴 수 있지만.」

장석민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작위적인 사진이라면 저 구석에 액자로 이미 하나 갖고 있습니다, 라는 말은 가슴 속에 묻어두기로 했다.

「전, ……자연스러운 게 좋아서요.」

작위적인 사진밖에 없다 하니 옳다구나 싶어 그렇게 덧붙였다. 자하르가 그렇군요,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건 아니고 사진 때문이었다는 얘기군요.」

자하르의 혼잣말에 장석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일이 이곳에 찾아온 이유를 말하느니 그냥 심한 호모가 되고 마는게 나았다.

자하르가 눈을 내리깐 채로, 다시 생각에 잠겨들었다. 장석민은 불룩하게 부은 뺨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할 일도 없고, 가서 경전이나 베껴 쓰든가 할 생각이었다.

「쟝.」

자하르가 장석민을 불러 세웠다. 그가 입고 있던 셔츠의 단추를 끄르고 있는 모습에 장석민은 기겁을 하며 창밖을 가리켰다. 

「와, 왕자님. 아직 해도 지지 않았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장석민은 히익, 하고 숨을 들이켜며 어느 창문의 커튼을 먼저 닫아야 하나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쟝도 갈아입으세요.」

「벗는 게 아니라요?」

자하르가 눈을 한 번 크게 떴다가, 피식 웃었다.

「벗고 나갈 생각이라면 그렇게 해도 됩니다.──아니, 그건 좀 내키지 않는군요.」

자하르가 미간을 찌푸리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하고 옷장을 가리킨다. 장석민을 떨떠름한 얼굴로 베일을 가장 먼저 꺼내들었다.

「그건 안 가져가셔도 됩니다.」

「오미드 장관님을 만나러 가는 거 아닌가요?」

대수롭지 않은 이유로 우울해 하고 있다고 생각할 테니, 당연히 그가 약속을 잡을 거라 생각했다.

「아까 취소했지 않습니까.」

자하르가 입고 있던 셔츠를 벗었다. 몇 번이나 봤던 몸이었지만 경이로울 정도로 넓은 어깨였다. 장석민은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그럼, 어디를.」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해가 어물어물 지는 중이었다. 자하르가 장석민이 등 뒤로 다가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서둘러야겠군요.」

「…….」

「기분을 풀어드리죠.」

다정한 음성에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자하르가 얼른 갈아 입으세요, 하고 장성민의 어깨를 두드렸다.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간 자하르가 사라지자 장석민은 손바닥으로 자신의 어깨를 문질렀다. 차가운 손으로 한참이나 문지른 후에야, 열기가 가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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