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쟝.」
장석민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눈을 떴다. 셔츠에 커프스단추를 채우고 있던 자하르가 장석민을 내려다보았다.
「……왜, …….」
왜 깨웠으며, 당신은 어디를 가기에 왜 정장을 입고 있고, 왜 네놈은 아직도 내 방에 있는지를 묻는 함축적인 한마디였다.
「오눌 미국에서 중요한 손님이 와서 공항에 나가봐야 합니다.」
「……, 조치가, …….」
「아직 안전 조치가 풀리지 않았습니다. 비공식 방문입니다.」
미국에서 누가 오냐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장석민은 배게에 얼굴을 묻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온몸이 뻑적지근했다. 어젯밤 공평함이 무엇인지, 온몸으로 새겨준.자하르 덕분이었다.
빌어먹을, 록을 움직였을 때 뭔가 이상한 점을 눈치챘어야 했는데, 자하르가 그렇게 호락호락 악수를 둘 타입이 절대 아니건만.
장석민이 잠이 덜 깬 상태에서 불퉁하게 구시렁거리고 있자 , 자하르가 그의 뺨에 손을 얹었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란 장석민이 몸을 떨었다. 하지만 전처럼 피하지는 않았다.
「잘했습니다.」
파하지 않는 것을 칭찬하며 장석민의 뺨을 두드렸다.
「왜 남의 얼굴을 자꾸 만지십니까.」
「닳는 것도 아닌데 어떻습니까.」
되레 뻔뻔한 답이 돌아오자 장석민의 눈에 한숨이 스쳤다. 저런 호색한이 잘도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고 숫총각행세를 했구나 싶었다
자하르의 손가락이 얼굴과 목덜미를 만지다 그 아래로 내려갔다. 장석민의 몸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부었군요.」
자하르가 얇은 잠옷을 손가락 끝으로 들추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부어오른 돌기를 바라보는 눈이 미술품을 완상하는 듯했다.
장석민이 재빨리 옷을 잡아끌어 덮으며 몸을 시트로 둘둘 감았다.
「그럼, 그렇게, ─했는데, 안 부을 수가 있습니까.」
장석민은 어젯밤 몸의 감각이 최고조에 달하면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는 것을 배웠다. 부은 것은 지금 거기뿐만이 아니었다.
장석민은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시트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자하르의 웃음이 들렸다. 넥타이를 매는 소리가 뒤이어 들렸다.
「……자하르 왕자님.」
장석민이 그를 불렀다.
슈트의 재킷을 입던 자하르가 네, 하고 대답했다.
「자꾸 제 방에서 이런 시간에 나가시면, 소문납니다.」
「모르셨습니까?」
「……?」
「리뭉에서 일을 하는 시종들은 모두 혀가 없습니다.」
「네?!」
그러고 보니 장석민은 리문의 시종들과는 어떤 대화도 나눈 기억이 없었다. 장석민의 머리털이 쭈뼛 섰다.
「은유적 표현입니다.」
「…….」
「무거운 비밀을 내뱉는 혀는 그 무게를 감당해야 한다, 라는 타르카의 속담이 있습니다. 이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밖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장석민은 타르카 왕국의 국민성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소문과 수다라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누구도 둘 사이를 의심하는 일을 없을 겁니다.」
자하르가 슈트의 재킷을 입으며 망했다. 단정적인 어투였다. 다른 사람들도 늘 그렇게 말했다. 하캄도, 사이프도, 하일도,
자하르마자 단호하게 그 사실을 부정하자 장석민은 미묘하게 기분이 뒤틀렸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재킷의 옷깃늘 바로잡던 자하르가 의외라는 눈길로 장석민을 바라보다가 대꾸했다.
「사람들은 실제로 벌어지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이야기할 거리에 관심을 두지.」
자하르의 냉정한 말투에 장석민은 너 잘났다, 이 정치가 놈아, 하고 시트를 머리끝까지 덮었다. 자하르가 시트를 끌어내리고 장석민에게 말을 건냈다.
「기정사실화 시키고 싶으신 겁니까?」
「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십니까.」
「서운해 보이셔서.」
장석민은 허, 하고 헛웃음을 삼켰다.
「절대로, 누구한테도, 들키고 싶지 않습니다.」
장석민이 눈에 힘을 주며 그렇게 말했다. 자하르가 고개를 슬쩍 기울인 채 왜요, 하고 물었다.
「당연하죠, 비밀이 알려지면 자하르 왕자님은 저를 죽일 거고, ……왕자님이 죽이기 전에 절 죽일 사람도 여럿 있을 겁니다.」
손도끼를 손에 쥐고 달려올 사이프의 모습이 눈에 훤하다. 자하르 왕자에 대한 사이프의 조건 없는 믿음은, 충심보다는 팬심에 가까웠다.
장석민은 수트 차림의 자하르를 힐끗, 쳐다보았다. 저 외모라면 아이돌보다는 배우가 어울릴 텐데.
「비밀이 알려진다라, ─」
자하르의 입가에 유려한 웃음이 걸린다. 장석민이 흠칫, 하고 몸을 뒤로 빼자 자하르가 손을 뻗어 장석민의 목덜미를 손으로 쥔다.
「비밀이 알려지면, 안되죠.」
그가 목을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스칠 때마다 장석민은 몸이 오싹오싹 떨렸다. 나긋나긋한 말투나 눈빛은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러운데 장석민은 오히려 남자가 이런 모습일때, 더욱 무서웠다.
차라리 상스러운 말을 하는 편이 백 배는 나……을리가 없지.
「저, 절대로 말 안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당연하죠. 그리고, 쟝의 목숨은 제 것입니다.」
「……네, 압니다.」
우아한 손가락이 그날처럼 자신의 목을 움켜쥘까 봐, 장석민은 바싹 긴장한 채 대답했다.
「누구든 제 허락을 받지 않고는 쟝에게 해를 끼치지 못할 겁니다.」
「……즉, 왕자님의 허락을 받으면 누구든 저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는 말씀이시죠?」
「그걸 그렇게 해석하는 것도 능력이군요.」
자하르의 손이 멀어졌다. 몸의 긴장도 그제야 풀렸다.
커프스단추을 달던 자하르가 장석민에게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넥타이 매듭 좀 바로잡아주시겠습니까.」
아무 생각 없이 손을 뻗어 넥타이를 바로잡아주던 장석민은 어쩌다 내 신세가 이렇게 되었지, 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젠장, 아무리 쾌락에 약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내가 그은 선은 지키며 살아왔건만, ……남자가 넥타이 매듭을 만져달라는 말이 아무 위화감없이 들리는 날이 올 줄이야.
장석민이 우울한 낯으로 다 됐습니다, 하고 손을 떼자 자하르가 어디 아프십니까, 하고 묻는다.
「아니,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나, 싶어서요.」
「사진을 보고 오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
「어떤 사진이었습니까?」
「아, 그냥, 평범한 사진이었습니다. 」
장석민이 남한에서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자하르는 가끔 이런식의 질문을 해오곤 했다.
「어떤 사진이었는지 궁금하군요. 혹시 갖고 있습니까?」
장석민은 속으로 좆 됐다, 를 중얼거렸다.
「찾아보면 나올지도 모르고, ……잃어버렸을 수도 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보고 싶군요.」
자하르가 장석민의 어깨를 도닥인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저는 다녀오겠습니다. 오늘 저녁에 오미드 장관과의 만찬을 준비해두었습니다.」
「서류는요?」
「책상에 올려두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자하르는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서류를 미리 준비해 장석민에게 건냈다.
장석민이 고개를 끄덕이자 자하르가 한마디 덧붙였다.
「몬도 안 좋으실 텐데, 돌아다니지 마세요.」
앞의 말보다 뒤의 말에 강세가 들어간다는 것을 장석민은 안다.
「돌아다니라고 해도, ─ , ─됐어요.」
장석민이 손울 내저었다. 오늘은 하루, 종일 방에 처박혀서 경전이나 베껴 쓸 생각이었다.
「다녀올께요.」
자하르의 인사말이 귓가에 닿았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뒤이어 들렸다.장석민은 손바닥으로 귀를 문질렀다. 달콤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기분이 들었다.
"쓸데없이 목소리만 좋아가지고, ……목소리만이 아니군."
왕자라는 혈통에 얼굴도 잘생기고 키도 키고, 게다가,
"……윽, 젠장."
몸을 뒤척거리다 장석민은 아래에서부터 올라오는 통증에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다, 이건 좋은 게 아니지. 뭐든 과하면 부족한 만 못하니라.
"내가, 진짜, 기간 한정이니까 버틴다."
장석민이 허리를 두드리며 도로 몸을 바로 했다.
얼마 뒤에는 이렇게 누우면 보이는 건, 자신의 방 천장일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간다면,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가고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가겠지.
장석민은 눈을 깜빡였다. 작게 열린 창틈에서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침대위의 캐노피가 비현실적으로 흔들렸다. 다시는 못 만날 운명의 침대도, 끝내 주는 침구도, 가격을 알지 못할 책상도, 벽에 걸린 저…….
한 여름밤의 꿈처럼, 물거품처럼 사라질 것이다.
"하하하하, 대박이다 나 대신 누가 왕자랑 결혼만하면 완전 인어공주 완성인데?"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장석민은 제 손으로 입술을 찰싹 내리쳤다.
" 누구 인생 조지려고."
저런 성격 파탄 이중인격자랑 결혼 하는 여자의 인생은 얼마나 불쌍할까.…… 아니 평생 철저하게 속일지도 모르겠다, 그럼 여자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을 테지. 잘생기고, 돈도 많고, 성격은(속이면) 다정하니까. 게다가 지금이런 상황에서도 유력한 후계자 후보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주어진 조건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노력까지 하는 것이다. 하긴, 그 더러운 성격을 속이는 데에도 얼마나 큰 노력을 하고 있겠어.
역시, 자하르가 제 본모습을 속이고 여자에게 잘 대해주는 모습을 상상하니 배알이 뒤틀렸다. 나한테는 그렇게 있는 성질 없는 성질.다 보여주고 다른 여자에게는 가식을, …….…….
장석민은 지금 자신의 질투 방향이 몹시 그릇되어있음을 깨달았다.
"미쳤나."
장성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잠에서 덜 깨서 머리에 피가 덜 돌아 헛생각이 드는 것이다. 침대에서 일어나, 그는 욕실로 들어가 세수를 했다. 침대에 다시 누웠다. 멀쩡한 정신으로 다시 잠들 예정이었다. 부드러운 침구 위에서 몸을 몇 번 뒤척이던 장석민의 머릿속으로 다시금 쓸데없는 생각들이 몽글몽글 솟아났다.
여기 와서 평생 못해볼 경험 다 해보고 간다. 말도 타보고, 납치도 당해보고. 최음제도 먹어보고, ……남자랑.
"에이이"
장성민은 방금 떠오른 생각을 치워버리듯 허공에 손을 내저었다. 자하르와 한 행위는 생존을 위한,
생존을 위한, ……. ……치고난 좋았, ……안 돼.
장석민은 다시 몸을 일으켰다. 아무리 본인이 쾌락에 약한 몸을 가졌다 하더라도 엄연히 이건 아니었다.
침대에서 일어난 그는 책상 앞으로 가서 앉았다. 펜을 집어 들고 경전을 쓰기 시작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경전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든 것은 처음이었다.
좋은 내용이 담겨져있을 것 같은, 글귀를 써내려가며 장석민은 조금씩 마음의 평화를 찾아갔다.
"으아아, 안 해! 안 한다고!"
더 이상 했다가는 손목이 부러지든가 눈알이 빠지든가, 둘 중 하나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석민은 자리에서 인어나 찌뿌듯한 몸을 펴며 시계를 확인했다 정심을 먹고도 미친 듯이 쓴 것 같은데, 아직 오후 3시밖에 되지 않았다.
"하아, 외국인 우대가 안 되면 문맹 우대라도 해주면 좋으련만."
남은 횟수를 헤아리며 장석민은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이런 경우에는 십중팔구 시종이었다. 장석민은 문을 열었다. 낯익은 시종 하나가 커다란 상자를 들고 서 있었다.
「뭔가요?」
「자하르 왕자님께서 보내셨습니다.」
「또요?」
대체 언제 어떻게 주문을 해서 보내는 것인지, 자하르는 시도 때도 없이 물건을 보냈다. 아무래도 말을 타면서 했던, 여기서도 썩 호화롭지 못한 생활, 이라는 언급이 그의 마음에 콱 박혀버린 모양이었다.
자존심을 건드린 것일까.
장석민은 상자를 받아들고 시종에게 고맙다고 인사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받는 선물은 구석에 포장도 뜯지 않은 채 쌓아두지만, 자하르의 것은 그럴 수가 없었다. 처음에 받았을 때, 다른 왕자들이 보낸 선물 위에 올려두었다가 차마 입으로 말할 수 없는, 곤욕을 치른 것이다.
장석민은 의자에 앉아 상자의 포장지를 벗겨냈다. 상자 안에는 안장이 들어 있었다.
"……라이언한테는 너무 클 텐데."
장석민은 기억 속에 있던 말안장의 크기를 가늠해보면서 상자 속의 안장과 비교했다. 그 옆에 작은 카드가 놓여 있는 것을 보고 꺼내 읽었다.
"최고급 가죽으로 이집트의 장인이 만든 안장입니다. 심심하시면 말라쿤 위에 올려놓으시고, ……미친."
장석민은 카드를 끝까지 읽지도 않고 접어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자하르가 보낸 커다란 안장은 황금상 위에 얹어서 놀라는 의미였다.
"내가 어린애야? 내가 지보다 연상인데. 지금 장난하나?"
어이가 없어서 상자를 옆에 내던졌다…….가 3초 만에 다시 집어 들었다. 상자를 이대로 방치했을 경우, 자신에게 닥칠 끔찍한 일 댓가지가 그의 머리를 재빨리 훑고 지나간 터다.
하는 수 없지.
장석민은 커다란 안장을 질질 끌고 황금상 앞으로 다가갔다. 들어 올리는 것도 벅찰 만큼 커다란 안장을 간신히 황금상 위에 얹어 두었다.
뱃대끈까지 있어서 새 상 아래로 버클까지 연결해서 걸쳐놓으니 그럴듯한 모양이 되었다.
"별짓을 다 하네. 진짜."
장석민은 자조 어린 중얼거림을 뱉으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손끝에 아까 집어 넣은 카드가 걸렸다. 장석민은 마저 자하르가 쓴 카드를 읽었다.
"말라쿤 위에 올려놓으시고 원하시면 승마처럼 즐기실 수 있도록 하세요. 그리고,……. ……."
장석민은 카드의 마지막 문구가 자하르가 선물과 카드를 보낸 목적임을 알 수 있었다.
"……사진을, ……볼 수 있기를."
더듬더듬 추신을 읽은 뒤에 장석민은 카드를 접어버렸다.
"하일! 이 미친놈은 이유를 대도 무슨 그런 말 같잖은 이유를 대서."
컴퓨터를 할 수 있다면 인터넷에서 본 사진이라도 둘러대기로 할 텐데. 지금 당장은 확인이 불가능하다. 인터넷에서 봤다고 했다가 자료를 찾을 수 없음으로 판명되면 그야말로 좆 되는 것이다.
카드를 쥔 채로 서성거리던 장석민의 머리에 그럴듯한 생각이 스쳐갔다. 자신에게도 자하르의 사진이 한 장 있다!
"오, 그게 있었지."
장석민은 방과 연결되어 있는 거실로 달려갔다. 분명히 리문으로 들어왔을 때, 이 구석쯤에…….
"찾았다."
전에 초상화 그리기 경합으로 받은 액자를 집어 들었다. 자하르가 그 안에서 봄날의 햇볕처럼 따스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흐뭇하게 그걸 바라보던 장석민의 낯빛이 금세 우울해진다.
"……이런 걸 갖고 있으면 완벽한 호모로 오인당할 거야."
자하르는 자신이 자의로 이곳에 왔다고 생각하고 밤마다 이런저런 것들을 하고 있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완벽한 호모로 판명되고 싶지 않다는 미약한 자존심이 남아 있었다.
좀 더 정상적이고 평범한 사진을 한 장 갖고 있으면 좋을 텐데. 예를 들면 자하르가 유학하던 시절의 사진이라든가.어릴 때도 괜찮겠지.
장석민은 잠시 스물 초반의 자하르의 모습을 떠올렸다가, 이내 머릿속에서 몰아냈다. 현재의 모습으로 과거의 얼굴이나 미래의 얼굴을 짐작하는 것은 여자를 대상으로 하는, 즐거운 상상인 것이다.
장석민은 액자를 일단 다시 구석에 잘 숨겨두었다. 조금 더 정상적인 사진을 찾자고 생각했다. 다시 방으로 걸어 나오는데 노크소리가 들렸다.
장석민은 시계를 확인했다. 자하르가 생각보다 일찍 도착한 것인가,
그는 달려가서 문을 열었다.
「생각보다 일찍…….」
「비켜라.」
자하르와 닮은 얼굴이지만 심술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얼굴이 화가 난 투로 그렇게 말했다. 장석민이 옆으로 비켜섰다. 문 앞에 서 있던 경호원이 난감하단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자하르의 명으로 일단 막기는 해도 상대가 왕족이니 그로서도 어쩔 수 없는 게 당연하다. 장석민은 알겠다는 듯, 눈짓했다. 사이프까지 들어오고 문이 닫혔다. 방안을 둘러 본 하일이 코웃음을 쳤다.
「자하르 놈이 아주 제대로 미쳤구만.돈이 썩어 넘쳐.」
소파에 앉던 하일의 비웃음은 벽에 걸린 그림을 보는 순간 절경에 이르렀다.
「저걸 지금 자하르가 사다가 걸어둔 것이냐?」
「……네.」
「하하하하, 기가 차는군.」
장석민도 그 그림을 처음 벽에 걸었을 때 바로 그 반응을 보였다. 모작이죠? 라고 물었다가 돌아온 대답은 모작이 뭔가요.였다. 장석민이 당황해서 말을 더듬자 자하르는 바로 농담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장석민은 몇 번이고 거듭 모작이냐고 물었지만 자하르는 말없이 웃을 뿐이었다. 결국 끝까지 그가 원하는 대답을 돌아오지 않았다.
「네까짓 게 뭐라고 여기에, 하하하.」
하일이 그림과 장석민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비웃음을 날렸다. 장석민은 그러게요, 하고 중얼중얼 대답하고는 하일의 맞은편에 앉았다.
「무슨 짓이냐.」
하일의 일갈에 장석민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감히 네가 뭐라고 내 앞에 앉아. 당장 일어나.」
아랫사람은 윗사람과 같은 단에 앉지 않는다. 그것이 궁에서 가르치는 예절이었다. 하지만 장석민은 자하르에게 한 번도 그 예의를 강요받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늘 맞은편에서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체스를 두고 식사를 하기도 했다.
장석민이 자리에서 주춤거리고 일어서자 하일이 원탁에 다리를 올린 채, 말을 시작했다.
「하나만 묻지.」
「……네.」
「네가 정말 말라쿤의 현신이냐.」
「……,…….」
하일의 물음에 장석민은 사람들이 얼마나 말라쿤의 현신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하일은 그 이야기를 믿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는 직접 장석민을 이 나라로 데려온 장본인이었다.
「말라쿤의 현신이냐고 물었다.」
장석민은 글쎄요, 하고 말끝을 흐렸다. 아니라고 말했다가는 자하르에게 폐가 될 것 같고, 그렇다고 대답했다가는 하일에게 네까짓 놈이, 하면서 발로 정강이를 까일 것 같았다.
「네가 무슨 말라쿤의 현신이야. 너는 내가 데려와서 자하르에게 던져준 천박한 동양 놈에 불과하다.」
「…….」
알면서 뭘 물어. 묻기는.
「그런데 어째서 네가 계속 미래를 예측하고 사고를 보는 거지?」
「우, 우연입니다. 신께서 도와주셨나 봅니다.」
「우연이 거듭되면 사람들은 거기서 의미를 찾는 법.」
여전히 하일의 영어는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장석민은 잔뜩 신경을 곤두세운 채, 하일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틀 뒤에 회의가 열릴 것이다.」
자하르가 했던 말과 같았다. 장석민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가 끝나면 더 이상 자하르도 네가 필요 없을 것이다.」
「……예, 그렇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데 묘하게 입맛이 썼다.
「그러면 너는 나에게 와서 내 일을 도와라.」
「네?!!!」
얼마 전 카힌에게 보내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보다 백배는 황당한 주문이었다.
「무슨 소리를,……하일 왕자님은 제가 말라쿤의 현신이라는 말을 믿지 않으시잖아요.」
「당연히 믿지 않는다.」
사이프도 뒤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믿지.」
「…….」
「그 믿음을 이용하려는 것이다.」
「그렇지만, 저는……. ……선물은 도로 빼앗으면 안 된다고 들었습니다.」
이전에 사이프가 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대답했다.
「쫓겨나면 그만이다.」
「네?」
「자하르에게 쫓겨나라.」
장석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건 또 뭔 독창적인 개소리란 말인가.
「쫓겨나라니요?」
「자하르가 널 끔찍하게 싫어하게 만들어서 쫓겨나라. 그놈이라면 신의를 알 테니 그 이유는 알리지 않고 쫓아낼 테지.그리고 내 밑으로 와서 있어라. 내가 왕위를 차지하면 바로 고국으로 쫓아 보내 주마.」
자하르가 내건 약속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기간이 조금 길어지겠지만 오히려 잠자리를 안 해도 된다는 파격적인 장점이 따라 붙는다.
「고국으로 돌려보내 주는 것은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 그건 대사관측에도 연락해서 약속을 해두지.」
하일답지 않은 약속까지 덧붙였다. 하일을 믿는 것만큼, 이중인격자인 자하르를 믿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적어도 하일은 체스를 두면서 오늘 밤은 몇 번이나 하려나, 하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런데.
「……자하르 왕자님은 관대하셔서, ……저처럼 모자란 사람도 보듬어 주시는 분인데 제가 어찌…….」
자하르를 두고 하일에게 가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왠지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에서 공손하게 손을 모으고 서 있는 사이프가 그렇지,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가 하일에게 호되게 한 대 얻어맞았다.
「자하르가 싫어하는 짓을 하면 된다.」
「그게, 어떤…….」
자하르가 싫어하는 짓, 이라는 단어가 이상하게 장석민의 심장에 꽂혔다.
「비역질을 해라.」
하일이 굉장한 비밀을 말해준다는 투로 목소리까지 낮추며 속삭였다.
「……, ……네?」
「이믈라쿤이 끝났는데도 여자에게 손 하나 대지 않는 놈이다. 여자도 마다하는 놈이 남자는 오죽하겠는가. 네가 자하르 앞에서 그 음탕함을 드러내면 놈은 진저리를 내며 너를 쫓아낼 것이다.」
다리 좀 벌려 봐요. 쟝의 아래가 음탕하게 오물거리며 내 좆을 씹고 있는 걸 보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어젯밤 자신의 귀에 그렇게 속삭이던 남자가, 한 명 있었는데…….
「분명히 네가 음탕하게 다려들면 자하르는 널 싫어할 것이다. 아주 질색을 할 테지. 하하하하.」
하일이 크게 웃음을 터트리자 사이프도 맞장구를 치듯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안 싫어하시면…….」
장석민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하일이 눈을 부릅떴다.
「그럴 리가 있겠는가.」
「그럴 리가 없지!」
사이프도 한마디 거들었다가, 황급히 고개를 숙인다.
「내 동생이긴 하지만 그놈은 제정신이 아니다. 꽃 같은 처녀들이 기다리고 있는 하렘을 마다하는 놈이다. 너같이 삐쩍 마른 사내새끼가 달려들면 질색하고 피할 거다.」
「……, ……그러게요.」
맞습니다. 당신 동생은 제정신이 아니죠. 꽃 같은 처녀들은 한 번 따먹으면 흥미가 떨어진다는 이유로 손도 안 대고, 매음굴을 다니며 여자, 남자 가리지 않고 십수 명을 데리고 난교파티를 즐기던 놈이랍니다.
게다가 저처럼 삐쩍 마른 사내새끼를 데리고 매일 밤, ……아아, 말하기도 싫습니다.
「오늘 밤 수작을 걸어라.」
「…….」
「네가 수작을 걸면 자하르는 아주 역겨워할 것이다. 하지만 그간 일을 도운 공이 있으니 일이 끝나면 쫓아낼 테지.」
「수작을 걸 때, 자하르 왕자님의 손끝에도 닿지 말아야 한다.」
뒤에 서 있던 사이프가 참지 못하고 한마디 던졌다. 장석민의 낯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수작을 걸었다간 내일 당장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범해질 게 분명했다. 장석민의 어두운 표정을 전혀 다르게 해석한 하일이 은밀한 음성으로 말을 건넸다.
「국정에 관해 긴히 드릴 말이 있다고 네 방으로 불러서 더러운 수작을 걸어라. 얇은 타브를 하나만 걸친 채, 음탕하게 몸을 꼬며 요부처럼 구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
「……. …….」
그러니까 어제, 밤새도록 그 짓을 하다가 씻겨준다는 명목으로 제게 얇은 가운 하나만 입힌 채로 욕실로 데려가 그 위에 물을 붓고, 다시 그 위에 이런 짓 저런 짓을 하던 사람을 하나 알고 있는데요, ……우리는 아마, 같은 사람을 말하고 있는 거겠지요.
「자, 그럼 그렇게 알도록 하고.」
하일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장석민이 잠시만요, 하고 그를 붙들었다. 하일이 장석민의 손을 단호하게 내리쳤다.
「감히 어디 더러운 손으로.」
……그 더러운 손을 빌려 이미지 세탁하려는 주제에.
장석민은 입술을 물었다 놓으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쫓겨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별걱정을 다하는군. 백 퍼센트 보장한다. 자하르는 네가 더러운 수작을 대놓고 부리면 쫓아낼 것이다. 꼭 대놓고 부려라.」
장석민은 이마를 움켜쥐었다, 사막의 성자라는 이미지가 이렇게나 공고하다니.장석민에게는 그게 양날의 검처럼 작용하고 있었다.
하일이 걸음을 옮겼다. 장석민은 그의 앞을 재차 가로막았다.
「왕자님이, 왕자님이 저를, ……관대하게 용서해주시면 어떻게 합니까. 자하르 왕자님이라면 분명히, ──!」
하일이 장석민의 뺨을 후려갈겼다. 입안에 피 맛이 났다. 장석민은 쌍욕을 삼키며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내 앞에서 자하르를 칭송하지 마라.」
하일의 말에 사이프가 지레 흠칫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놈과 일을 같이한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내가 후계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왕이 될 것이다. 타르카 왕국의 첫번째 계승자인 나에게 당연히 돌아와야 하는 자리이다.」
하일이 턱을 치켜든 채로 말을 하다, 장석민에게 싸늘한 시선을 던졌다.
「그러니 네놈은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 쓸데없이 토 달지 말고.」
말을 마친 하일은 가자, 하면서 옷자락을 휘날리며 방문을 닫고 사라졌다. 장석민은 입안에 고인 피를 뱉어내고 소맷자락으로 입가를 닦았다.
입맛이 지독히 썼다.
자하르에게 쫓겨날 일을 저질러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묵직해졌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러고 싶지 않은데, ……그 타당한 이유를 떠올리지 못해 가슴이 답답했다.
장석민은 자리에 주저앉은 채로 무릎을 끌어안았다.
「쟝.」
방으로 들어온 자하르가 장석민을 불렀지만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전등의 불을 켰다. 침대에도 책상에도 장석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시종에게 듣기로는 리문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고 했건만, 자하르가 낯을 찌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창밖으로 나갈 수도 없다. 보초를 세워둔 터라 함부로 전처럼 벽을 타지도 못 할 것이다.
「쟝.」
자하르가 다시 한 번 장석민을 불렀다. 저 위에서 네, 하는 힘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 거기서 뭐하십니까.」
자하르의 시선이 황금상 위에 닿았다. 장석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선물이 퍽, 마음에 드시나보군요.」
황금상에 안장을 얹어놓고 그 위에 엎드려 누워있는 장석민을 보고 자하르가 가만히 웃었다. 그러나 장석민은 그 위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재미있게 노셨으면 이제 그만 내려오셔도 됩니다. 오미드 장관이 30분 후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안 만나면 안 될까요.」
장석민의 대답에 자하르가 입매가 멈칫 굳는다. 장석민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썩 내켜 하진 않았지만 당일에 저런 식으로 나온 적은 한 번도 없었던 터다.
「어디 몸이 안 좋으신가요.」
「네…….」
몸이 안 좋다면서 굳이 그 위에 올라가 있는 속셈을 모르겠다며 자하르는 다시 장석민에게 말을 건넸다.
「일단, 내려오세요.」
「내려가고 싶지 않습니다.」
힘은 없는데 묘하게 고집스러운 말투였다. 자하르가 황금상 앞으로 걸어갔다.
「쟝. 내려와요.」
이번 것은 권유가 아니었다. 장석민도 그걸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꿈쩍하지 않는다.
「쟝.」
자하르의 목소리가 나직이 울렸다. 장석민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자하르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온기가 사라진 잿빛 시선이 장석민의 얼굴을 훑었다.
「누가 그랬습니까.」
「……넘어졌습니다.」
넘어져서 생긴 상처가 아니라는 사실은, 말하는 본인도 듣는 상대도 알고 있었다.
「누가, 그랬습니까.」
자하르의 나직한 음성에 힘이 들어간다. 장석민은 고개를 내저었다.
「넘어졌어요. 이거 타고 놀다가, 바닥으로 한 번 떨어졌습니다.」
뒤이어 힘없는 이랴, 가 덧붙는다. 자하르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리 와요.」
그가 손을 뻗었다. 장석민이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부어 있는 뺨 한쪽이 더 여실히 보였다. 자하르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죄송합니다. 오미드 장관님은 베일을 쓰고 만나겠습니다.」
자하르의 시선이 제 뺨에 머물러 있는 것을 알아채고 장석민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그렇게 말하는데도 자하르의 얼굴은 웃지 않았다.
「눈만 빼고 다 가리는 거 있어요. 여자용이라고 하던데,……저는 뭐, 외국인이고 어차피 후궁이니까 그거 쓰고 나가도 상관없어요. 그러면 괜찮을 겁니다.」
장석민이 주섬주섬 말을 하자 자하르가 대답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테이블에 있던 내선용 전화기를 들어 그는 라겔과 통화를 시작했다.
「오늘 오미드 장관과의 저녁 식사는 취소해줬으면 좋겠는데,」
전화기 너머에서 다급한 라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하르가 눈을 반쯤 내리감은 채로 짧게 말을 건넸다.
「그럼 부탁하지.」
자하르가 통화를 마치고 장석민에게 고개를 돌렸다.황금상 위에 엉거주춤하게 앉아있던 장석민이 불안스런 눈으로 자하르의 눈치를 살폈다.
「괜찮습니다.」
긴 설명도 없었는데 자하르가 그렇게 말하자 장석민은 혼자 웅크리고 앉아 고민하고 있던 불안이 스르륵 사라지는 듯했다.
「내려와요.」
장석민이 알겠습니다, 하고 대꾸하고 다리를 발판에 걸었다. 한쪽으로 무게를 두고 다리를 움직이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자하르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그냥 뛰어내려요, 하고 말한다.
「네?」
「받아줄 테니까.」
자하르가 두 손을 뻗었다. 어린아이를 안아주려는 듯한, 자애로운 얼굴이었다.저 얼굴이 가면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장석민은 하마터면 그대로 그의 품속에 뛰어들 뻔했다.
「뭐하십니까.」
자하르가 손을 편 채로, 장석민을 재촉했다.
「제가 내려갈,──!」
자하르를 의식한 나머지 장석민은 발판에 다리를 건다는 것이 그대로 공중에 미끄러져 균형을 잃고 말았다. 자하르가 떨어지는 장석민의 몸을 아슬아슬하게 받아냈다. 자하르의 어깨가 황금상의 아래를 받치고 있는 대석에 부딪쳤다. 장석민이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괜찮습니다.」
자하르가 장석민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어깨를 위아래로 움직여본 후에, 그는 설핏 인상을 찌푸렸다.
「……괜찮으세요?」
괜한 고집을 부려 자하르를 다치게 한 것은 아닌가 싶어, 장석민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괜찮은지 나중에, 보여드리겠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챈 장석민의 얼굴에 뜨끈한 열이 올랐다. 장석민은 됐어요, 안 보여주셔도 됩니다. 하고 중얼거렸다.
자하르가 장석민의 턱을 쥐고 그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어쩌다 이랬나요.」
잠시 머뭇거리던 장석민이 떨어졌어요, 하고 아까와 같은 대답을 반복 했다. 자하르가 낮게 혀를 찼다.
「바닥에 손이 달려 장의 뺨을 후려쳤는가 보군요. 손자국이 이렇게 선명하게 나 있는데.」
「…….」
「어느 부분인지 말씀해주시면 제가 친히, 그 바닥의 손을 잘라버리겠습니다. 또 이런 일이 생기면 안 될 테니까요.」
장석민은 어물거리다 대꾸했다.
「함부로 자를 수 없는 손입니다.」
「…….」
「그러니, 그냥 모른척하세요.」
자하르가 눈을 내리감은 채로, 하일 형님입니까, 하고 물었다. 장석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자하르가 알겠습니다, 하고 장석민의 얼굴을 놓았다. 그가 다시 방을 나서려는 것을 보고 장석민이 눈을 치떴다.
「어딜 가십니까.」
「하일 형님을 찾아뵈러 갑니다.」
장석민이 기겁을 하며 자하르의 앞을 막아섰다.
「가서 뭘 하시려고요.」
「쟝은 제 궁을 머무는 사람입니다. 누구도 함부로 손을 델 수 없습니다.」
자하르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리문으로 들어와 다짜고짜 장석민의 뺨을 후려친 하일이 예의를 지키지 못한 것이다. 거기에 자하르는 얼마든지 항의할 수 있었다.
「제가 예의를 몰라서 그랬습니다. 두세요, ……괜히 일 그르칩니다.」
그렇게 말하는 투가 우울하다. 자신의 힘으로는 하일을 손댈 수 없다. 그나마 유일하게 하일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인간이 자하르였다. 하지만 꼬치꼬치 일러바치고 혼내주세요, 라고 말하는 것도 우습다.
대여섯 살 먹은 어린아이도 아니고, 다 큰 어른이 한심하다.
그래서 더 우울한 것이다. 자신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결국엔 제 목숨을 틀어쥐고 있는 성격 파탄자였으니까.……그런데도 그가 뭔가를 해주길 바라는 것이다.
자하르가 장석민의 뺨을 손에 쥔다. 흠칫, 하는 놀라는 기색이 보이지만 장석민은 물러가거나 얼굴을 피하지 않는다.
「어떻게 하고 싶은 겁니까.」
「네?」
「말은 어른스럽게 하고 있는데, 억울하니까 혼내달라는 어린애 같은 얼굴을 하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