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러시죠.」
자하르가 시선을 느꼈는지 물었다. 서류를 읽고 있던 자세 그대로.
「아닙니다. 오늘은, 안 바쁘신가 보군요.」
「바쁩니다.」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장석민은 말없이 다시 경전을 베껴 쓰기 시작했다. 손이 저릿할 만큼 쓰고 있었지만 아직 8회나 남아있다는 사실이, 그를 슬프게 했다.
「잘 써집니까?」
자하르가 물었다.
「까막눈이라서, 잘 쓰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요.」
한숨을 섞어 말하는 대답에 자하르가 고개를 돌려 노트를 확인했다.
손가락으로 여기, 여기, 하고 짚어주며 대답했다.
「글자가 아예 틀렸습니다.」
「어? 왜요? 똑같이 쓴 거 같은데.」
장석민은 경전과 노트를 번갈아 보다가 점의 위치가 다른 것을 확인하고 재빨리 고쳐 썼다.
「아랍어 알파벳부터 외우셔야 할 것 같군요.」
장석민이 그러게요, 하면서 턱을 괴었다. 아무래도 8번 남은 경전쓰기를 제대로 하려면 알파벳 정도는 외워둬야 할 것 같았다. 그림을 보고 그리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책을 한 권 사다 드리죠.」
자하르의 말에 장석민은 떨떠름한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까짓 책 한 권이 뭐가 문제일까 싶겠지만 자하르의 요즘 행태를 떠올리면 책 한 권조차 받는 것이 조심스러웠다.
「뭔가 불편하신가요?」
장석민은 아니요, 하고 고개를 내저었다.
「의자는 잘 맞으십니까?」
「네, 완전 잘 맞아요.」
장석민은 일부러 의자에 몸을 깊숙이 기댄 채, 어깨를 비비적거리며 대답했다. 과장된 행동임을 알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자하르가 또 뭐를 사다 나를지 모르는 터다.
그날 숲에서 돌아온 뒤에 가장 먼저 바뀐 것은 장석민의 침대였다. 캐노피가 달린 것을 빼면 너무나 마음에 들었던 침대가 떠나자 장석민은 자신의 입방정을 자책하며 피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 뒤에 놓인 침대에 누운 순간, 옛 침대에 대한 향수는 싹 사라지고 말았다.
마음에 드십니까. 자하르의 물음에 장석민은 자존심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일생에 단 한 번 만날 수 있는 운명의 침대가 있다면 바로 이 침대일 게 분명할 텐데. 침대에 얼굴을 부비며 좋아하고 있는 장석민의 눈에 들어온 것은 아직 제거하지 못한 가격표였다. 0의 숫자를 세어보고는 장석민은 침대치고는 조금 비싸지만 이 편안함을 생각하면 그렇게 나쁘지는 않구나, 생각했다. 뒤늦게 자하르도 가격표를 발견하고 마뜩잖은 표정을 지었다.
급하게 준비를 하느라 그랬습니다. 결례를 저질렀군요.
다른 쪽 결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저지를 주제에, 가격표 하나에 뭐 저러는가 싶어 장석민은 아닙니다, 하고 고개를 내저었다. 자하르가 가격표를 떼는 것을 보며 장석민은 이 침대 브랜드가 뭐예요, 하고 물었다.
한국으로 돌아간다면 하나 사서 자신의 방에 놓을 생각이었다. 돈을 벌게 된 이후로 아버지가 용돈을 끊어버려 카드값이 빠듯하긴 했지만 조금 무리한다면 아예 못 살 가격은 아니었다. 자하르가 처음 들어보는 브랜드를 말해주었다. 장석민이 머릿속에 브랜드 이름을 새겨 넣고 있는 와중에 미처 제거하지 못한 가격표를 하나 더 발견했다. 별생각 없이 가격표를 떼어내던 장석민은 문득 스친 생각에 자하르에게 물었다.
설마, ……이 가격표는 베개의 가격인가요.
자하르는 평연한 얼굴로 그렇습니다. 하고 대꾸했다. 장석민은 손에 쥐고 있던 가격표를 얼른 내던저버렸다. 베개 하나의 가격이 이러한데 침대의 가격이 얼마나 될지 감히 상상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가격을 예상하지 못할 침대 다음은 책상이었다. 경전을 베껴 쓰던 장석민이 괜한 성질을 부리며 책상에서 벌떡 일어나며 도저히 못 앉아있겠다고 투덜거리는 말을 들은 후였다. 그날 오후에 시종들이 책상을 가져다 놓은 것이다. 장식이 예사롭지 않은 책상의 가격은 차마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책상 앞에 앉기도 침대에 눕기도 부담스러워 한숨을 내쉬는 장석민에게 자하르는 왜 그러신가요, 하고 물었다. 그, 그냥 좀 답답해서요. 장석민은 얼어붙어 대답했다. 자하르가 방을 둘러보며 흠, 하고 생각에 잠겼다.
방이 좀 살풍경하긴 하군요. 그리고 그가 저녁에 가져온 것은…….
"후우……."
장석민은 벽에 걸린 그림을 보고 시름 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서류를 읽고 있던 자하르가 고개를 들었다.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뭔가 불편하시면 라겔이나 저에게 바로 말씀하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불편한 것은 바로 너의 그런 태도라고 말해주고 싶구나. 장석민은 오늘도 하고 싶은 말을 꿀꺽 삼키었다. 경전을 쓰면서도 앞에 앉은 자하르가 신경 쓰여 손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숲에서 돌아온 이후로, 자하르의 태도가 바뀌었다.
물건을 사다 주는 것이야 돈이 썩어 넘치는 나라의 왕자니 그렇다쳐도, 자신을 대할 때 보이는 표정이나 눈빛이 묘하게 달랐다. 다른 사람은 모르고 넘길 정도의 아주 미약한 변화였지만 자하르의 본모습을 알고 있는 장석민은 귀신같이 알아챌 수 있었다.
……이상하게 정상적으로 군단 말이야.
장석민은 경전을 쓰면서 짧게 흘끔, 자하르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일이 어느 정도 정리되어 간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 듯, 요즘 자하르는 이전보다는 외출하는 시간이 짧아졌다.
장석민의 외출도 당연히 줄었다. 간간이 조언을 구하러 오는 사람들에게 자하르가 준비한 답변을 해주거나, 하는 게 요즘의 일과였다.
무크라르 왕은 아직도 의식을 찾지 못했고 왕자들은 물밑으로 암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하지만 며칠 뒤에 자하르와 하일이 합의를 한 대로 임시 기구 설립이 발표될 것이고, 그러면 정국도 안정된다.
"……며칠 안 남았군."
장석민이 불쑥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자하르가 고개를 기울였다.
「아닙니다.」
하일과 자하르가 손을 잡은 상태라면 비행기를 격추시킨다는 그 요상한 미사일은 신경 쓰지 않아도 좋을 듯했다. 자신이 입을 다물고 있는 한, 평화가 유지되었다. 순조롭게 진행되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불안한지 모르겠다. 뭔가 영, 걸린단 말이지.
장석민은 답답한 가슴께를 문지르며 열심히 펜을 움직였다. 한 시간여를 그렇게 베끼고 나자 어깨가 묵직해서 더 이상 손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장석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어깨를 돌리며 찌뿌듯한 몸을 풀었다.
「오늘은 거기까지 하실 건가요.」
자하르의 물음에 장석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읽지도 못하는 글자를 베껴 쓰는 것만큼 지겨운 작업은 없었다. 더 이상은 때려죽여도 쓰고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자하르도 읽고 있던 서류를 옆으로 치웠다. 그러고는 옆에 놓여있던 체스판을 가져왔다.
「오늘도 합니까?」
장석민의 물음에 자하르가 대꾸했다.
「그러면 쟝이 스스로 속옷을 내리고 다리를 벌려주시면 됩니다.」
「……. ……둡시다.」
숲에 다녀온 이후로 가장 변한 것은 이 부분이었다.
자하르는 장석민과 매일 밤 체스를 두었다. 체스를 두면서 정국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도 있었고, 너무나 놀랍지만, 문화적인 식견을 나눌 때도 있었다. 체스를 두는 것 자체만 두고 보자면 완벽하게 정상적이고 건전한 행위였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오늘도,…….」
「네. 같습니다.」
자하르가 내건 게임의 조건은 간단했다. 그가 이기면 장석민이 스스로 다리를 벌릴 것.
그런 개 같은 조건이 어디 있습니까, 하고 버럭 외쳤다가 장석민은 3초 만에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자하르가 웃는 낯으로 물었다.
그럼 그냥 억지로 제가 벌려도 됩니다. 신경 스시는 것 같아 그나마, 선택의 여지를 드린 겁니다.
그나마 선택의 여지, 라는 부분에서 장석민은 발끈했다. 저번의 패배는 방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자하르가 그랜드 마스터에게 체스를 배웠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처음부터 정신 똑바로 차리고 했을 테니까.
좋습니다. 대신 제가 이기면 손끝 하나 대지 마세요.
장석민의 선언에 자하르가 픽, 웃음을 삼킨 후에 체스판을 펼쳤다. 첫날은 자하르의 아슬아슬한 승리였다. 장석민은 눈물을 삼키고 제 손으로 옷자락을 열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밤도, 세 번째 밤도 자하르의 승리였다. 그것도 모두 아주 근소한 차이로.
억지로 당하면 그나마 변명이라도 남지. 스스로 옷을 벗는 수치심은 말로 표현이 안 되었다. 자하르는 꼭 확인하듯이 장석민에게 나직이 속삭였다.
이것 봐요. 지금 좆을 뒤로 넣어주니까 쟝의 성기가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군요. 이런, 앞쪽을 말하는 게 아니었는데.
뒤로 박혀서 가는 기분이 어떻습니까? 정액이 얼굴까지 튀었군요. 그렇게 좋았나요?
절정에 이르러 숨을 헐떡거리는 자신의 몸 위에서 나른하게 웃으며 속살대는 자하르를 한 대만 때려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장석민은 몇 번이고 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조금만 더 하면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에 장석민은 체스 내기를 포기하지 못했다. 도박을 끊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이 이런 것일까.
장석민은 우울한 얼굴로 체스판을 내려다보았다.
「자신 없으신가요?」
「아니요. 오늘은 제가 꼭 이기겠습니다.」
장석민이 결의에 찬 얼굴을 하고 체스판에 말을 세웠다. 자하르도 웃으며 체스말을 세웠다. 그때 밖에서 노크소리가 울렸다.
「들어 와도 된다.」
자하르의 허락 뒤에 문이 열렸다. 라겔이었다. 그가 책상 앞으로 다가와 검은색 서류철을 건넸다.
「이건 뭐지?」
검토할 서류들은 모두 건네받은 터였기에 서류철을 건네받는 자하르의 표정이 의아했다.
「나이마 비전하께서 드리라 하셨습니다.」
서류철 안에는 여자들의 사진과 간단한 약력이 적혀 있었다. 장석민은 그것이 나이마가 추려놓은 며느리 후보라는 것을 대번에 알아챘다.
자하르가 대답하지 않고 서류철을 닫았다.
「이믈라쿤이 끝났으니 하루빨리 반려를 얻어서 어머니의 걱정을 덜어 달라는 말씀도 전하셨습니다.」
「알겠다.」
자하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덮어놓은 서류철은 구석으로 밀어놓고 손을 댈 생각도 없어보였다.
「언제쯤 대답해주실 건지 ……꼭 여쭤보라는 말씀도 있었습니다.」
「시간이 난다면 본다고 일러드려라.」
시간이 난다면?
라겔의 눈에 체스판이 들어왔다. 자하르가 눈을 내리감았다 뜨며 라겔에게 시선을 돌렸다.
「퇴근할 시간이 지나지 않았나? 라겔.」
아랫사람을 걱정하는 다정한 말투였지만 장석민에게는 그 말이 얼른 꺼지라는 것처럼 들렸다.
「네. 오늘은 당직입니다.」
「피곤할 텐데 가서 쉬도록 해야지.」
부드러운 웃음 속에서 단호한 뜻이 엿보였다. 라겔이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장석민은 손끝으로 슬그머니 서류철을 열어보았다. 자하르의 손이
서류철을 단호하게 내리눌렀다.
「안 고르세요?」
「지금 그럴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장석민의 눈에도 체스판이 보였다. 체스 한 게임을 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계산해본다면 자하르의 말에 얼마나 어폐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결혼하기 싫으세요?」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장석민 역시 최대한 즐기다가 결혼하고싶었다. 결혼하고 나면 다른
여자와는 관계를 갖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자하르는 달랐다. 원한다면 부인을 여러 명 거느릴 수 있고 후궁도 언제든지 선택할
수 있었다.
「지금은, 생각 없습니다.」
장석민이 폰을 앞으로 두 칸 전진시켰다.
「그래도, 언젠가는 하시겠네요.」
자하르는 대답하지 않고 손가락으로 자신의 턱을 두드렸다.
「그, ……저번에 찾는다는 분은, …….」
자하르가 그날 탑에서 자신을 도운 은인이 나타나면 이믈라쿤이 끝나는 즉시 결혼식을 올리겠다고 한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게 말입니다. 나타나야, 할 텐데요.」
자하르의 날카로운 시선이 힐끗, 장석민에게 닿았다. 장석민은 심장이 벌렁거렸다. 남자는 아무래도 자신을 의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증거가 없으니 잡지 못하는 것이다. 영원히 잡지 말아야 할텐데.
자하르도 폰을 움직였다. 폰을 쥐고 있는 남자의 손가락을 보는 순간, 장석민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것을 떠올리고 말았다.
「……비한테는 잘해주시겠죠?」
갑작스러운 물음에 자하르가 한쪽 눈썹을 올린다.
「아니, ……여자한테는 그러지 마시라고요.」
그 본성을 드러내면 후궁에 있는 여자들이 다 달아날 게 분명하다고
장석민은 생각했다. 그런데 한편으로, 자하르가 비가 될 여자에게 잘해주는 장면을 상상하자 이상하게 속이 뒤틀렸다. 자신에게는 그렇게 막대하던 주제에 여자들에게는 그 고상한 얼굴을 하고 가식을 떨겠지. 쳇. 장석민은 앞에 있던 폰을 전진시켰다.
자하르의 기다란 손가락이 폰을 쥔 채로, 공중에서 가만히 멈춘다.
생각에 잠긴 것이다.
「여자한테는 그러지 말고, ㅡ쟝에게는 그래도 됩니까?」
침묵 뒤에 던져진 물음에 장석민은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저한테도 그러면 안 됩니다.」
「어떻게 하면 안 되는 건가요?」
「네?」
「요즘 쟝이 원하는 대로 해주고 있잖습니까. 박아달라면 박아주고, 만져달라면 만져주고.」
자하르의 말이 움직였다. 말이 체스판 위에 놓이는 소리가, 달칵,
울렸다.
「그, ……내용이, ─.」
「내용?」
「……, ……, 저속하지 않습니까.」
열심히 단어를 골라도 어쩔 수 없었다. 보기가 천박하다, 상스럽다.
난감하다 뿐인데 그중 나은 것을 골라야 했다.
자하르가 저속하다라, 하면서 장석민이 한 말을 입안에서 굴리듯 발음했다.
「대나무 밭에서는 마음껏 저속해도 되는 거 아닙니까?」
자하르가 목을 움직였다. 장석민은 자하르의 손과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함부로 록을 움직이면 캐슬링을 못하기 때문에 초반에는 록과 킹, 퀸을 움직이지 않는 것이 상식이었다.
「실수하신 거 아닌가요? 안 물러줍니다.」
장석민의 말에 자하르가 대답없이 빙긋이 웃었다. 잠시 고민하던 장석민은 나이트를 움직였다.
아싸, 오늘은 좀 편히 잘 수 있겠구나.
「이틀 뒤에 회의가 있을 예정입니다.」
일부러 말하는 것을 봐선 자신을 대동할 만큼 중요한 자리인 듯했다. 장석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회의가 끝나면 대충 일은 마무리될 예정입니다.」
「무크라르 전하는 여전히, 그 상태시고요?」
「네. 병원에서도 손 쓸 도리가 없다고 하더군요. 이유를 알 수 없다는 이야기만 수십 번 들은 것 같습니다.」
덕분에 의사들이 여럿 잘렸지요, 하고 뒤따라 붙는 말은 농담이 아닌 것 같았다.
「초자연적인 이유일까,……사람들이 그러던데요, 저주 같은 게 아니냐고.」
자하르가 코웃음을 쳤다.
「그러면 편하겠군요. 저주 술사를 찾아 제거하면 그만이니까.」
「죄송합니다. 괜한 얘기를 했네요.」
장석민이 중얼거리며 사과의 말을 건네자 자하르가 아닙니다, 하고 대꾸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자하르가 폰을 쥔 채로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아버님이 이대로 일어나지 않으시는 게, 좋을 수도 있습니다.」
장석민의 표정이 굳었다. 아무리 권력이 좋아도 자신의 아버지인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섬뜩하기까지 했다.
「무크라르 전하는, 썩 좋은 왕이 아니었습니다.」
자하르가 퀸을 움직였다. 본격적인 공세에 들어간 것이다.
「왜요?」
장석민의 뇌리에 남은 무크라르 왕은 열 손가락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낀, 커다란 아저씨일 뿐이었다.
「자신의 권력을 지나치게 독점화하여, 선대왕이 만든 국정 기구를 없애거나,여자 치마폭에 싸여 국유 사업을 외국에 팔아치우기도 했고, 후계자 선택도 원래대로라면 5년 전에 끝났어야 합니다. 후계자가 정해지면 자연스럽게 권력이 분배되는데 그것을 몹시 꺼리셨습니다. ─이런저런 문제들이 많았죠.」
아들이면서 냉정하게 아버지의 실정을 비판하는 자하르를 보며 장석민은 음, 하고 입을 다물었다.국민들의 입장에서는 어쩌면 자하르 같은 왕이 나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러면 혈열에 연연해서 일을 그르치지는 않았 테니까.
「왜 그렇게 보십니까?」
「……왕에 어울리실 거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자하르가 짧게 웃었다.
「어째서요?」
「냉정하셔서 정에 이끌려 실정을 하지는 않으실 거 같아서요. ……섹스 스캔들만 조심하세요, 부디.」
장석민의 말에 자하르가 이번에는 조금 더 크게 웃었다.
「그런데, ……저한테 막 이런저런 이야기해도 되는 겁니까?」
「쟝은 제 대나무 밭이잖아요, 대나무 밭이 아니면 이란 이야기를 어디서 하겠습까.」
대나무 밭에 바람이 불면 일어나는 일은, 절대로 함구해야겠다고 장석민은 또 다짐했다.
「그래도 저도 가끔, 실수는 합니다.」
「……인간이니까.」
그렇개 말한 장석민의 입이 귓가에 걸렸다. 자하르의 인간적인 실수가 조굼 전에 일어났던 터다.
대체 왜 거기서 룩을 움직여서 .
실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장석민은 나이트를 움직였다. 이제 몇 수만 두면, 승리를 손에 거머쥘 수 있다.
「제가 근래에 한 실수는 ─.쟝에 관련된 것입니다. 」
「네? 저요?」
장석민의 뇌리에 여러 가지 장면들이 스쳐 갔다. 실수, 그래. 나 진짜.나한테 실수 많이 했다. 방금 그 수도 실수한 거지.
그걸 저 스스로의 입으로 선선히 인정을 하고 들어오자, 장석민은 자하르의 미약한 인간성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하르가 비숍을 움직이며 체크메이트, 하고 외쳤다.장석민이 눈을 껌뻑거렸다.
「무슨 소리예요. 갑자기, 이게 어떻게 체크 메이트입니까.」
「어떻게 움직여도 킹은 잡힙니다.」
「말도 안 돼요. 이렇게 움직이면……,…….」
자하르가 손짓으로 도주로를 막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장석민이 이렇게, 하면서 옆으로 움직여 봤지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젠장, 이러는 게 어디 있어.」
「킹을 쓰러트리셔야죠.」
자하르가 장석민의 킹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웃었다. 자하르와 여러판을 두었지만 이번 판만은 단연코 이해가 가지 않는 진행이었다. 머릿속으로 자하르가 말을 움직였던 것을 복기해 봐도,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록을 움직여 장석민의 공격을 이끌어냈던 수가 떠올랐다.
「……아까 록을 움직인 게, 블런더가 아니었어요?」
아까의 수는 분명한 실수였다. 그 걸로 장석민이 앞으로 둘 모든 수를 계산해 놓은 것이라 믿을 수 없었다. 게다가 자하르도 본인도 실수를 했다고 망하지 않았던가.
「그럴 리가요. 그런 실수는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까는 분명 실수를 했다고…….」
「실수는 했습니다.」
자하르가 장석민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장석민의 손으로 킹을 쓰러트리게 한 후, 그는 말을 이었다.
「이걸 왜 진작 먹지 않았을까.」
자하르가 장석민을 잡아 일으켰다. 장석민이 손을 빼내려 힘을 썼지만 어림도 없었다.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저거, 사기죠? 사기 같은데. 아무리 봐도.사기입니다.」
「저런, 패배를 인정하는 것도 체스를 배우는 방법입니다.」
자하르가 장석민의 손을 잡고 책상에서 끌어냈다. 장석민은 여전히 체스판을 바라보며 이럴 수는 없다고 소리쳤다.
자하르가 장석민을 안아서 침대위에 올려놓았다. 장석민이 몸을 흠칫, 떨면서 입을 열었다.
「애초에 ─!」
「 ─?」
「조건이 불리합니다.」
「뭐가요?」
자하르가 입고 있던 옷을 벗었다. 얇은 셔츠 한 장을 걸친 그의 몸을 보는 순간 장석민은 압도되어,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뭐가 불리하다는 건가요?」
「자하르 왕자님은 이기면, …… 좋지만, 난, 이기면 그냥, 하룻밤 편하고 끝 아닙니까.」
옷을 벗기만 하는데도 분위기가 확 변했다. 같은 남자로서 장석민은 그것이 무엇인지 안다. 압도적인 수컷의 냄새인 것이다.
자하르가 장석민의 얼굴 옆으로자신의 얼굴을 기울인 채,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불리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얼핏 다정한 물음이었지만 나중에 장석민이 딴소리를 하지 못하도록 원천봉쇠하려는 작정이었다.
「저도 좋은 게 있어야, ─억,」
자하르가 장석민의 옷을 잡아 벗겼다.
「매번 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 그런 것 말고요.」
장석민은 한 게임을 이기면 다시는 손을 대지 않는다, 등의 제안을 할 생각이었다. 물론 먹힐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자하르가 자신과의 성교를 몹시, 흡족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서 점진적으로 기간을 당겨 일주일 내지는 열흘 정도로 합의를 볼 생각이었다. 그게 합의를 볼 때의 기본적인 방식이었다.
「 ─좋습니다.」
자하르가 침대의 기둥에 묶여 있던 끈을 풀었다 장석민의 머릿속에 경계경보가 울렸다.
「그럼 이번만큼은, 제가 쟝을 좋게 해드리지요.」
「네? 뭐, ……. ……나보고 넣으라고요?」
장석민의 말에 자하르가 끈을 든 채로 웃음을 터트렸다.
「그 꿈은 아직도 안 버리셨습니까?」
「꿈은 누가 ─, 으악.」
자하르가 장석민의 손을 묶기 시작했다. 처음 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자하르는 장석민의 사지를 구속한 적이 없었다.
「이거, 풀어주세요.」
자하르가 침대의 다른 기둥에 묶여 있던 끈을 가져와 이번에는 장석민의 다리를 묶었다.
「왜, 왜 그러십니까.」
「기분 좋게 해드리려고 합니다.」
쾌락만을 두고 따진다면, 자하르와 하는 섹스가 나쁜 것은 아니었다. 아니, 좋은 편이었다. ……사실 몹시 좋았다.
삽입에 대한 공포는 여전했지만 세 번에 한 번은 앞에 손을 대지 않아도 절정까지 다다랐다. 그렇다고 앞을 만져주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가게 해서 문제였다. 나중에는 나올 것이 없어 멀건.액체를 뚝뚝 흘린 때까지, 거듭 사출시켰다.
그렇지만 무서웠다. 자신이 점점 비정상적인 쾌감에 익숙해져 간다는 사실이, 장석민은 두려웠다.
「괜찮습니다. 이런 거 안 해도 되니, ─헉.」
장석민이 기겁을 하며 몸을 이으켰다. 자하르의 손이 장석민의 목덜미를 쥐고 눕혔다.
「가만히 있어요.」
자하르의 입술이 장석민의 가슴에 닿은 채로 움직였다. 얇은 셔츠 한 장을 사이에 두고, 입술의 움직임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장석민이 몸을 움칫, 움칫, 떨기 시작했다.
「와, 왕자님? 제발, 이런 거, 헉.」
장석민은 숨을 삼켰다. 살갗을 통해 자하르의 웃음이 느껴졌다.
「그럼, 공평함을 느낄 때까지 한번 해봅시다.」
장석민은 손바닥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결국 장석민이 울면서 당신이 세상에서 제일 공평하니 제발 그만해달라고 빌 때까지, 자하르는 손을 풀어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