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눈을 떴을 때, 장석민은 신이 얼마나 불공평한 존재인지에 대해 생각했다. 생각에 잠겨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자하르의 옆얼굴은 어떻게 봐도, 아름다웠다. 저런 아름다운 거죽에 그런 영혼을 불어넣다니.
참으로 불공평하다.
「깨셨습니까.」
시선을 느꼈는지 자하르가 고개를 돌린다.
「……어디…….」
장석민이 누워있는 곳은 리문의 침대가 아니었다. 말을 하는데 목이 꽉 잠겨 있어,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장석민이 인상을 찌푸렸다.
「근처에 있는 작은 별장입니다.」
정원 안에 별장도 있다는 얘기는 처음이었다. 그래, 그러니까 나를 그렇게 가난하다고 구박을 하지.
장석민은 몸을 일으키려다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아직, 일어나는 건 무리입니다.」
자하르가 장석민을 도로 눕게 했다.
「내일 아침쯤에 나가면 될 것 같군요.」
장석민은 다시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다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설핏 이마를 찌푸렸다.
「그런데 왜 여기로 오신 건가요?」
마지막 기억은 숲에서의 격렬한 섹스였다. 자하르는 걸핏하면 쓰러진 장석민을 안거나 메거나 해서 들고 다녔다. 굳이 산장 안으로 들어올 필요는 없었을 텐데.
「쟝이 절대 말을 타고 가지 않는다고 울었습니다.」
「네?」
「말을 타느니 죽겠다고, 하더군요.」
의식이 혼미한 와중에도 말을 타면 정말 콱, 죽어버리겠다며 장석민은 흐느껴 울었다. 결국 자하르는 근처의 산장까지 장석민을 안고 걸어올 수 밖에 없었다.
「……나, 진짜 생존 본능이 강한가 봐.」
말은 절대로 타지 않겠다고 한, 기억 속에 없는 자신에게 감탄하며 장석민은 중얼거렸다. 이전에 한 번, 성교 후 승마가 사람의 인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경험을 했던 터다.
「강하시죠.」
자하르가 그 말을 듣고 대답했다.
「……하긴, 그러니까 이런 것도 견디지.」
장석민의 중얼거리는 말을 들은 자하르의 눈썹이 찌푸려진다.
「견딘다?」
「아, 아니. 그러니까,…….」
「견디는 건가요? 어폐가 있군요. 제가 좋다고 먼 나라에서 오신 분이, 견딘다라 ──.」
장석민은 머뭇거리며 할 말을 찾았다. 장석민은 자하르가 지금은 그 말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구색은 맞춰야 했다.
「처음이라, 그렇습니다.……남자하고는.」
장석민의 말에 자하르의 표정이 조금 풀린 듯 보였다.
「그렇죠. 쟝은 저를 덮칠 생각이었으니까요.」
「아니, 그게 아닙니다. 왕자님 보면서 그런 생각한 적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맹세코, 한 번도.」
정색을 하는 장석민의 말에 자하르의 입가에 미소가 걷힌다.
「왜요.」
「네?」
「막상 와서 보니 실물이 별로였습니까.」
그렇게 묻는 투가 짓궃었다.
「……좀 상상했던 것하고는 달랐습니다.」
장석민이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다르다?」
「……. 아시면서 뭘 물으십니까.」
자하르의 이중적인 모습을 현재 가장 가까이서 보고 있는 것이, 장석민이었다. 이 부분에서만큼은 자하르도 할 말 없을 거였다.
「달라서 싫습니까?」
너무나 직접적인 질문에 당황한 쪽은 장석민이었다.
「네?」
「상상한 것과 달라서 싫으시냐고 물었습니다.」
「……, 싫다기보다는,…….」
진짜 단어 고르기가 너무 힘들었다.
장석민은 열심히 머리를 굴리다가, 어렵사리 입을 뗐다.
「어렵습니다.」
「어렵다고요?」
「아무래도, 제가 자하르 왕자님의 비밀을 알고 있는 것도 그렇고, 자꾸 이런 관계로 흐르는 것도, …….」
장석민은 조그만 목소리로 걱정됩니다, 라고 말을 이었다. 자하르가 짧게 대꾸했다.
「그게 걱정되는 거라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몇 번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그래도 만약 알려지면 아마…….」
자신을 맨손으로 때려죽일 사람의 얼굴이 두엇, 스쳐 갔다. 그중 사이프가 선봉에 서겠지. 하일은 뒤에서 박수를 치며 좋아할 테고, 장석민은 고개를 내저었다.
「비밀은 지키면 비밀의 주인이 되지만 고백하면 비밀의 노예가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비밀을 알고 있는 제 마음도 무겁습니다.」
마음만 무거운 게 아니었다. 허리 아래가 작신작신 밟힌 듯이 하반신 전체가 무거웠다.
「평화의 열매는 침묵의 나무에서 열리고요.」
자하르가 자신이 말한 격언의 뒤를 이어 얘기하자 장석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타르카에 오래전부터 전해지는 말입니다.」
「……음, 시초가 여기였군요.」
「이 경우엔 제가 침묵하지 못했으니, 쟝이 침묵을 해줘야 평화로울테지요.」
침묵이란 단어가 주는 울림이 이렇게 두려울 줄이야.
「그런데,──그렇게 되면 제가 쟝의 노예가 되는 건가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픈 와중에도 장석민이 분연히 대답했다.
지금 노예처럼 부려지는 것은 이쪽이었다. 심지어 이런 짓까지 하고 있는데, 어디서 그따위 말을 한단 말인가. 뭐라고 한마디 더 하려고 몸을 일으키려다 허리를 잘못 움직인 장석민은 윽, 하고 신음을 삼켰다.
「괜찮으신가요?」
다정한 목소리에 장석민은 울화가 치밀었다.제발 그만해달라고 할 때는 들은 척도 하지 않더니, 목소리가 좋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저렇게 말을 하니까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처럼 들리다니.
「안, 괜찮습니다.」
장석민이 허리를 두드리며 끄응, 앓는 소리를 냈다. 무의식적으로 말을 타지 않겠다고 운 것은 지금 생각해도 귀신같은 생존 본능이다.
자하르가 양석민의 허리로 손을 뻗었다. 장석민이 흠칫, 놀라며 몸을 뒤로 뺐다. 자하르의 표정이 사라졌다. 그가 한 뼘 더 손을 뻗어 장석민의 허리에 손을 얹었다.
「안 그랬으면 좋겠군요.」
「네?」
자하르가 장석민의 허리를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손을 댈 때마다 피하는 거 말입니다.」
「……」
양심도 없는 놈.
오늘만 해도 억지로 두 번이나 한 주제에 뚫린 입이라도 잘도, 떠들어대는구나.
「……왕자님은 왜, ……자꾸 식언을 하십니까.」
도저히 가슴속에서 치미는 울화를 참지 못하고 장석민은 한소리를 했다.
「한 번 한 상대하고는 안 하신다면서요.」
장석민이 그나마 버틴 것은 자하르가 한 번만 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눈 딱 감고 한 번만 참으면 된다고 믿었는데 그것이 두 번이 되고, 세 번이 되니, 생명은 소중해도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자하르가 자꾸 자신에게 아래를 세워서 덤벼드는 꼴이, 영 불안했다.
「그랬지요.」
잠시 침묵하던 자하르가, 입을 연다.
「그럼, 말을 바꾸면 되는 겁니까?」
「네?」
「한 번 한 상대하고도 또 할 수도 있다──.라고 하면 되는 건가요.」
「뭐가, ……왜요. 굳이 왜 말을 바꾸십니까.」
「쟝이 할 때마다 그 말을 신경 쓰는 것 같아서, 원하시면 말을 바꾸죠. 경우에 따라서는 두어 번 먹은 구멍에도 충분히 넣을 마음이 든다, 로.」
「──.」
장석민은 말없이 가슴을 두드렸다. 자하르의 손이 허리에서 장석민의 가슴께로 움직였다.
「여기도 아프십니까?」
그의 손이 가슴에 닿자 장석민이 흠칫, 놀라며 저도 모르게 손을 쳐냈다.
자하르의 입매에 비스듬한 미소가 걸린다. 좋지 않은 징조다.
「기억력에 문제가 있으신가요?」
「…….」
「분명히 제가 피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자하르가 장석민의 가슴 부근을 손으로 문질렀다. 손길은 다정하지만 그 말투와 표정이 살벌해서 온탕과 냉탕에 발을 하나씩 담그고 있는 기분이었다.
「좀 괜찮으신가요?」
자하르의 물음에 장석민은 네,하고 대답했다. 애초에 가슴이 답답한 것은 자하르가 던지는 개소리 때문이니까.
「그래서, 제가 말을 바꾸면 앞으로는 신경 쓰지 않고 다리를 벌리는 겁니까?」
다시 명치 부근이 답답해졌다. 장석민이 인상을 찌푸리자 자하르가 왜요.하고 되물었다.
「그런 식으로 계속 말을 바꾸시면, 제가 어떻게 왕자님을 믿습니까? 왕자님을 믿으라면서요.」
옳지. 잘한다. 장 변호사.
「안 믿으시면 어쩌실 거죠? 지금 쟝이 저를 믿는 거 외에 방법이 있습니까?」
……왜 왕자하세요. 변호사하시지.
자하르가 장석민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엷게 웃었다. 장석민이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가 떴다. 자하르가 여전히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음을 깨닫고 장석민의 눈에 근심이 어렸다.
「저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자못 진지하다.
「그럼 다시는 억지로 이런 관계를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
이건 확실히 못 박고 넘어갈 문제였다.
「그건 약속드리기 힘들 것 같습니다.」
「……!」
「사람의 일이라는 것이 본인의 의지대로 흘러가는 게 아니니 그냥 흘러가는 대로 두라고, 쟝이 말했었죠? 저에게도 가끔은 의지를 벗어난 일들이 일어납니다. 아까 그건 정말 어쩔 수 없었습니다. 바로 앞에서 붉은 속살을 훤히 내보이며 조그만 구멍을 벌름거리는데,──넣지 않고 배길 수가 없었습니다.」
마치 바로 앞에 그 광경이 펼쳐져 있다는 듯이 탐욕스러운 말투였다.
장석민은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아버지의 병환으로 고뇌하는 아들에게 해준 조언을 누가 이런 데에 써먹으라고 했어! 이 지조 없는 빌어먹을 중동 놈아.
「그런 건 의지를 다져도 불가능한 일이지요.」
자하르가 선선한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의지를, ……의지대로 하세요. 제발.」
장석민은 간절한 바람을 담아 부탁하자 자하르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스쳤다.
「의지라,──그럼 의지를 조금 수정하겠습니다.」
자하르는 눈을 내리깐 채로, 아까 자신의 아래에서 헐떡이며 절정에 다다르던 장석민의 모습을 떠올렸다. 입안이 바싹 말랐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아래에 피가 몰렸다. 장석민의 얼굴을 천천히 살폈다. 흥분을 느끼던 모습을 쉽게 떠올릴 수 없는 단정하고 깨끗한 얼굴이 자신을 의아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당분간은 쟝과 하겠습니다. 그게 편하기도 할 테고,──여러모로 괜찮겠군요.」
자하르의 이해되지 못할 말에 장석민은 혼란스러웠다. 저놈은 혹시 자신을 가지고 노는 것일까.
「재미있으세요?」
장석민의 물음에 자하르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눈을 치뜬다.
「저를, ……이렇게 하는 걸. 재미있어 하시는 거 같아서 말입니다.」
「글쎄요.」
자하르가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 장석민은 그가 생각에 잠길 때마다 심장이 벌렁거렸다. 멀쩡한 인두겁을 뒤집어쓴 속 시커먼 남자가 골똘히 하는 생각은, 대체로 불길한 결과를 가져왔다.
「재미있어서 이러는 건 아닙니다.」
긴 생각 끝에 내뱉은 말치고는 평범하고 시시했다. 뒤에 덧붙는 비정상적인 말이 있지는 않을까, 장석민은 두근두근 자하르의 말을 기다렸다.
「재미라기보다는,──.」
자하르의 눈초리가 길게 장석민을 훑는다. 적당한 말을 찾는 것이다. 자하르가 손을 뻗어 장석민의 뺨을 쥐었다. 손안에 흠칫,하는 움직임에 웃음이 났다. 두 번에 걸친 경고 탓인지 이번에는 손길을 피하진 않았다.
자하르가 손가락으로 장석민의 뺨을 쓸어내렸다. 피부가 좋아서인지 손에 쥔 채로 만지는 느낌이 괜찮았다.
자하르가 말없이 자신을 만지작거리고 있자 장석민의 불안은 눈덩이처럼 불어갔다. 이러다 갑작스럽게 어떤 방향으로 돌변을 할지 모르니 무서운 것이다. 대체 어떤 대답을 하려고 저렇게 긴 생각을 하는 것이냐.
안 되겠다.
「……펴, 편하셔서 그런가.」
장석민은 자하르의 침묵을 깨기 위해 본인이 질문을 던지고 저 스스로 답하는, 머저리 같은 방식을 택했다.
「편하다고요?」
자하르가 되물었다.
「제 앞에서는 하고 싶은 대로 막 하시잖아요. 성질도 더럽, 아니, 그냥 있는 그대로 보여주시고, 대나무 밭이라고 생각하고 정말 편하게 비밀을 털어놓으시는 건가 해서요.」
자하르가 웃었다. 솔직한 웃음이었다.
그 웃음을 보는 순간, 장석민은 낯선 기분을 느꼈다. 자하르도 저런 표정을 짓는구나.
「대나무 밭이요?」
「아, 한국에 전해지는 이야기인데. 커다란 귀를 가진 왕의 머리를 이발하게 된 이발사가, 그 비밀을 알게 되었는데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자 끙끙 앓게 됩니다. 나중에 결국 대나무 밭에 가서 시원하게 소리친다는 내용입니다.」
자하르가 매우 선선한 얼굴로 웃고 있어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설화를 설명하는 장석민의 표정도 밝아졌다.
「그래서 그 대나무 밭은 어떻게 됩니까?」
「바람이 불 때마다 그 소리가, ……,…….」
장석민은 놀라서 혀를 깨물고 말았다.
「소리가?」
「……울리지 않고 그 비밀을 갖고 대나무 밭이 쑥쑥 자란다는 아름다운 결말입니다.」
석연치 낭ㄶ은 결말에 자하르가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장석민은 진땀을 흘렸다. 대나무 밭에서 바람이 불 때마다, 털어놓은 비밀이 울린다는 결말을 어떻게 까맣게 잊고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자하르가 이 이야기의 결말을 알게 되면 대나무 밭을 태워버리자고 할 게 분명하다.
「좋은 이야기군요.」
자하르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스친다. 장석민의 얼굴을 쥔 손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손가락이 뺨에 스칠 때마다, 장석민은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처럼 긴장이 되었다.
이 미친놈은 왜 목소리에, 눈빛에, 손가락의 감촉까지 이토록 다정하단 말인가. …‥심장 떨려 죽겠네.
「피곤하시면 주무셔도 됩니다.」
자하르가 장석민에게 나직이 말을 건넸다.
「……계속 여기에 있어도 되는 건가요?」
무크라르 왕이 쓰러진 이후, 자하르는 새벽에도 일하느라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이렇게 여기에 머물러 있어도 되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혹시 바쁘신 일이 있으면 먼저 가셔도 괜찮습니다. 전 그냥 내일 아침에 좀 걸을 만하면 리문으로 가도 됩니다.」
거짓없는 진실이었다. 좀 멀리 나오긴 했지만 자고 일어나면 어느정도 운신은 가능할 것 같았다.
「일이 정리되고 있습니다.」
자하르가 불숙, 꺼낸 말에 외까풀의 커다란 눈에 의아함이 스친다.
「일주일 내에 어떻게든, 일이 정리될 것 같습니다.」
사실 일주일까지 걸리지도 않을 것이다. 빠르면 사흘 안에 국가에 내려졌다. 비상조치가 철회되고 국정이 정상화될지도 모른다.
「쟝의 도움이 컸습니다.」
자하르의 인사에 장석민은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남자는 좀처럼 종잡을 수가 없었다. 섹스 얘기를 할 때는, 변태 미친놈 같다가 이렇게 가끔 정상적인 인간처럼 굴 때는, 영락없이 왕자님인 것이다.
「제가 한 게 뭐가 있다고요.」
「아닙니다. 쟝이 아니었다면, 아직 지지부진한 회의만 계속되었을 겁니다.」
하일은 성격이 나쁘긴 했지만 실리주의자였다. 그가 자하르와 손을 잡기로 마음먹은 데에는 요즘 사람들의 입에 심상치 않게 오르내리는 장석민의 도움이 컸다. 왕이 이유도 모른 채 쓰러졌음에도 사람들은 말라쿤이 등장해 왕자들을 돕고 있으니, 잘 해결될 거라는 막연한 믿을음 갖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자하르에게 있어 동양에서 온 청년은, 완벽한 길조였다.
「그럼 저도 조만간……,」
장석민의 눈이 반짝 빛났다.
「제 소유의 섬이 하나 있습니다.」
「네?」
「그간 쟝의 도움으로 이룬 일이 많습니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원하신다면 쟝의 가족도 모셔와 살게 해드릴 수 있습니다.」
장석민은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장석민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 새끼야, 무슨 개소리를 그렇게 우아하게 하고 지랄이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목숨은 소중했다.
「굳이 그 나라로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까?」
「……많죠. 필요,」
자하르가 슬쩍 입매를 찌푸렸다. 장석민의 대답이 이해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고국의 체제가, 생활하기 아무래도 불편하지 않습니까?」
「……네?」
「쟝의 부모님이 자칫 실각이라도 한다면, 여러모로 힘들어지는 거 아닌가요?」
「……, ……무슨, …….」
「체제를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편의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겁니다.」
장석민의 얼빠진 반응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해석한 자하르가 덧붙인 한마디였다. 장석민은 헛, 하고 웃음을 삼키고 말을 이었다.
「어디에 있는 한국을 생각하시는 건가요? 혹시 그 'republic'앞에 'D'로 시작하는 단어가 더 붙어있나요?」
장석민의 물음에 자하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장석민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간 자하르가 보인 이상한 언행이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후계자 문제니, 정치적 혼란이니 했던 이야기가 남쪽이 아니라 북쪽 이야기였냐.
「왜 그러시죠?」
「그 밑이요. 밑.」
장석민이 눈을 감은 채로, 손짓을 했다. 외국에 나가서 북한사람 취급당해 동정을 받았더라는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배를 잡고 웃었는데. 이젠 그런 얘기에 절대 웃지 못하겠다.
「그 밑이라면,──.」
자하르가 입을 다물었다.
「미치겠다. 왕자님 진짜 제 말을 아예,──.」
고개를 돌리던 장석민은 자하르의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이전에 한 번 보았던 얼굴이다. 소파에 앉아 카힌과 그의 외숙부를 상대하고 있다가 자하르의 등장에 반가워하며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당시의 자신을 바라보던 그 얼굴이었다.
기쁜 것 같기도 하고, 당황스러워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딘지 모르게 화가 난 것 같기도 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표정.
그 표정과 마주하고 있자니 심장 부근이 간지러워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왜 이러지. 몹쓸 병이라도 걸린 건가.
「빚에 팔려온 게 아닙니까?」
「……우리 집, 진짜 잘 사는데요.」
「그럼, ──정말 자의로 이 나라에 오신 거군요.」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평소보다는 조금 느슨하게 풀려 있었다. 놀리는 투도 아니었다.
어, ……저 인간 기분이 좋아 보이는 건, 내 착각이겠지.
장석민은 눈을 깜빡거리며 자하르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공중에서 시선이 엉켰다. 어쩐지 얼굴에서 열이 올랐다. 장석민은 고개를 떨구었다. 자하르의 평범하고 정상적인 낯짝을 마주하고 있자, 양심이 쿡쿡 쑤셔왔다.
그랬군요. 자하르가 나직이 되뇌는 말에 장석민의 얼굴은 한층 더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빚에 팔려온 것은 아니지만 자의도 아니었습니다. 하지 못하고 삼키는 말들이 뱃속에 쌓여가는 기분이었다. 자하르를 속이는 것으로 이토록 죄책감을 느끼는 일은 쳐음이었다.
차라리 일관되게 미친놈처럼 굴면 좋으련만. 아니, 그건 내가 죽겠구나.
……그런데 왜 저런 얼굴을 하는 거지.
혼란에 빠진 머리 때문인지 가슴이 답답해졌다. 장석민은 손바닥으로 명치 부근을 문지르며 자하르가 19금을 뺀, 미친놈 모드로 돌아와 주길 기도했다.
「그날.」
「……?」
「그날, 거기서 절 마주치지 않았더라면, 쟝은 평범하게 저를 연모한 채 지냈겠군요.」
「……가기 전에 한 번 먹고 보내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자하르의 눈웃음이 길어진다.
「다정하게 해드렸을 텐데.」
「……. …….」
이게 어디서 온화한 낯짝으로 사기를 치려고, 처음 할 때부터 그 무지막지한 것을 사정없이 밀어 넣던 놈이 어디서 다정 타령을 하고 난리야.
장석민은 쳇,하고 낮게 혀를 차며 몸을 반대편으로 돌렸다.
「왜요, 제가 정상적이고 다정한 성교는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 …….」
「못 미등시겠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보여드리죠.」
자하르의 몸이 장석민에게 기울어진다.
「아니요!!」
장석민이 기겁하며 외치자 자하르가 웃음을 삼킨다. 장석민은 그가 자신에게 농담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하르가 장석민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안 합니다, 지금은. 그러니 좀 주무세요.」
「…….」
지금은. 이란 표현이 가슴에 묵직하게 걸렸지만 일단은 일신의 안녕이 보장되었다는 생각에 장석민은 눈을 감았다.
얼굴 위에 닿는 시선이 신경 쓰였지만 어느 순간, 밀려드는 잠에 의식을 내어주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