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8/35)

자하르가 장석민은 차 안쪽에 앉히고 자신도 그 옆에 앉은 후에 차문을 닫았다. 차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거셌다.

운전식과는 유리로 가로막힌 구조였기에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장석민은 제 숨소리가 유난히 거칠다는 생각과 함께 호흡이 조금씩 가빠지는 것을 느꼈다.

자하르가 자, 하고 말문을 열었다.

「이야기를 좀 나눌 필요가 있겠는걸요.」

「…….」

「제가 가지 말라고 했던 말이 안 들렸습니까? 혹시 청각에 문제가 생긴 거라면 병원에 데려다 드리죠.」

언뜻 듣기에 다정하지만 귓구멍에 뭘 처박았냐는 비난이다.

「……자하르 왕자님께서, 일부러, ……데려다 놓은,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당연했다.

자신이 나타나는 곳에 이렇게 연달아 테러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당연히 자하르가 자신을 위해 마련해 놓은 쇼라고 여겼다.

자하르가 손가락으로 장석민의 관자놀이를 두드렸다,

「머리가 좋은 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아이큐 자랑을 했다가는 저 손가락이 뇌 검사를 하자며 머리가죽을 쥐어뜯어 버릴 것 같았다.

「몸에 폭탄을 두르고 나타나는 행동을, 정말로 제가 계획했다고 생각했습니까?」

「…….」

남자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그건 자하르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장석민이 그렇지만, 하고 말을 덧붙였다.

「설마 그렇게, 자주 테러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을, …….」

「종교분쟁과 영토분쟁은 끊이지 않습니다. 어제도 말씀드렸다시피 테러 위험은 항상 있습니다. 눈앞에서 사람 머리가 날아가는 것을 한 두번 본 게 아닙니다.」

끔찍한 이야기를 평온하게 하는 재주가 뛰어난 사람이었다.

「건물 안으로 테러범이 들어온 것을 막지 못한데에 경호팀에 1차 책임을 물을 겁니다. 책임자는 경질되어 마땅합니다.」

책임자 부럽다. ……가능하면 나도 경질된다면 좋을 텐데.

「그렇지만, 테러범에게 겁 없이 다가간 쟝의 책임이 가장 큽니다.」

거기에 관해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기에 장석민은 죄송합니다.하고 바로 사과했다.

「죽을 뻔했습니다.」

자하르의 눈이 엄하게 꾸짖고 있었다. 장석민은 약간 울컥했다. 저도 나를 죽이려고 했던 주제에 생각해주는 척하고 있어.

「제가 죽으면, ……어쩌면, 자하르 왕자님은 편하실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

원망 섞인 말이 기어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자하르가 장석민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웃음을 삼켰다.

「편하다?」

「…….…….」

자하르의 말투에 노기가 스며 있었다. 장석민이 폭탄을 두른 테러범에게 다가가 몸싸움을 벌였을 때, 자하르는 제 눈을 의심했다. 테러범을 던져버리고 의기양양한 얼굴을 하고 자신을 바라보는 장석민의 낯을 보는 순간, 화가 치밀었다.

이름을 불렀다. 저 멍청한 것을 손에 쥐고 있지 않으면 일렁거리는 분노가 가라앉지 않을 것 같았다. 하얗게 질린 장석민이 뒷걸음질을 치며 도망가는 모습에 자하르의 분노는 정점에 다다랐다.

사실, 장석민이 테러범에게 잡힌 순간 자리를 떠났어야 했다. 이성적인 판단에 따르면 그렇게 하는 게 옳았다. 그런데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럴수가 없었다. 멋대로 제 손을 빠져나간 장석민에게 화가 치밀어,자리를 뜰 생각이 들지 않았다.

「편해질 것 같습니까?」

자하르의 물음에 장석민은 선뜻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했다.

편해지려면 애초에 그날 자신을 없애는 것이 맞겠지. 약간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심술이 나서 내뱉은 말이긴 했지만, 자하르에게 엎드려 감사인사를 해도 모자란 상황이었다. 다른 왕자들은 폭탄을 두른 테러범이 나타났을 때, 모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갔는데 자하르만이 자리를 지키고 장석민을 지켜봐 주고 구해주기도 한 것이다.

게다가 무슨 생각에서 그런 말을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어도, 자하르는 당신을 죽게 하지는 않을 거라고 말했다.

이중인격 미친놈이긴 하지만 그래도 인간으로서의 기본은 갖추고 있구나. 미운 정도 정이라고 했는데, 이렇게…….

「거기서 그렇게 죽어버린다면 제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겁니다.」

간신히 붙으려 했던 정이 뚝 떨어졌다.

역시, 그러면 그렇지.

자하르가 주머니에서 흰색 손수건을 꺼냈다. 손수건이 목덜미에 닿았다. 짜릿한 통증에 장석민이 아야,하고 작게 신음하자 자하르가 일부러 더 힘을 주어 피를 닦아냈다.

「살살──.」

「몸을 함부로 굴리지 마세요.」

「함부로 굴린 게 아니라…….」

「장을 내가 사용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쟝의 목숨은 함부로 다른사람이 거둬갈 수 없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있는 겁니다.」

얼핏 들으면 다정한 말 같기도 하지만, 요는 너는 내 소유니까 마음대로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장석민은 불퉁하게 알겠다고 대답했다.

「상처는 가서 다시 치료해야겠습니다.」

목에 난 상처를 보는 자하르의 낯이 굳어 있었다. 나직하게 혀를 차는 소리가 불쾌함을 드러냈다.

「……그래도, ……이 일이 자하르 왕자님께 도움이 될 수도…….」

중얼중얼 말을 하다가 자하르의 얼어붙은 눈동자를 보고 장석민은 혀를 깨물었다.

무섭다. ……전보다 무서움이 배가 되었어. 그전에는 이유 없이 무서운거였지만 지금은 이유가 분명하다.

「도움이 되고 안 되고는 제가 결정합니다.」

정나미가 뚝뚝 떨어지는 차가운 말투에 장석민의 고개가 한층 수그러들었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정말로, 정말로 짜고 치는 고스톱인 줄 알고 그런 건데.

나직한 한숨이 새어나왔다. 자하르의 손이 장석민의 뺨을 감싸 쥐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접촉에 장석민은 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무리 유리로 운전석과 가로막혀 있다 해도, 엄연히 다른 사람이 볼 수 있는 공간이었다.

「쟝은, 죽고 싶은 겁니까. 살고 싶은 겁니까.」

「당연히 살고…….」

뺨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장석민이 헉, 하고 숨을 삼켰다.

「그럼 앞으로는 저를 믿으셔야 합니다.」

「읏…….」

「대답하세요.」

「……알겠……, 믿을게요. 믿겠습니다.」

장석민의 입에서 원하는 답이 나오자 자하르가 손을 놓았다. 장석민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아직도 턱이 얼얼했다.

말이 쉽지. 전 국민을 대상으로 사기를 치고 있는 이중인격자를 어떻게 덥석 믿겠는가. 게다가 얼마 전에는 진지하게 나를 제거하려던 사람을,

「그럼, 아까 버튼을 누르라는 말씀은,……그때도 제가 자하르 왕자님을 믿었어야 했나요?」

마지막 소심한 반항이었다.

「안 누를 줄 알았습니다.」

「눌렀을 수도 있잖아요.」

장석민은 그때 자하르가 자포자기했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나도 죽고 너도 죽을 테니, 우리 모두 성스러운 죽음을 맞이하자. 그렇게 받아들인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성자처럼 경건한 얼굴을 하고 원론적인 이야기를 하는 낯짝이 얄미워서 집어던진 것이지, 눌렀을 가능성도 아예 배제할 수 없다.

「본인 손으로 목숨을 끊기에는,쟝은 살고자 하는 의지가 강합니다. 타살을 당하면 당했지 자살을 선택하지 않을 성격입니다.」

장석민은 소름이 쭈뼛 돋았다. 그 짧은 시간에 그런 것까지 계산해서 자신을 도발한 남자의 판단력이 무서웠다.

「쟝은 그리고, 어차피 내 말은 안 믿지 않습니까.」

「……. …….」

……귀신같은 놈.

「앞으로는 믿기로 하셨으니, 그건 넘어가겠습니다.」

장석민이 고개를 끄덕이자 자하르가 사나운 눈길을 거둔다. 대화가 일단락되는 것 같아, 장석민은 안도했다.

자하르가 라겔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보고를 받고 몇가지 지시를 내렸다. 안전 확보 문제 때문인지 차는 아직도 주차장을 벗어나지 못한 채였다.

빨리 돌아가서 그냥, 잠이나 잤으면.

장석민은 초조하게 창밖을 바라보며 옷자락을 만지작거렸다.

통화를 마친 자하르가, 고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네?」

임무를 지시하던 자하르가 눈빛을 바꾸었다. 장석민은 그 눈빛을 안다. 남자가 제 욕망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이다.

「사람들 앞에서 엘시시라──.」

「──.」

장석민의 몸이 작게 튀어 올랐다. 딸꾹질이 새어 나왔다. 자하르가 작게 웃으며 그런 장석민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커다란 손이 등을 어루만질 때마다 딸꾹질은 심해졌다.

「쟝이 뭘 보고 그런 상스러운 말을 사람들 앞에서 한 건지,──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모, 몰라서, 그, 그 뜻인지 몰라서,…….」

「그 뜻?」

「──! 아니, 그러니까 언어적 미숙함에서 온,……외국인이니까.」

자하르가 안타깝다는 듯이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입구를 지키던 군인들이 차에 탄 사람들을 확인하면서 한 대씩, 차례대로 통과시켰다.

「자하르 왕자님. 감사합니다.」

차창이 열렸을 때, 총을 들고 있던 군인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자하르는 눈짓으로 인사를 받았다.

「말라쿤님께도 축복이 가득하시길.」

장석민은 그 군인이 자신에게도 감사 인사를 건넸다는 것을 짐작했다. 하지만 도무지 웃어줄 수가 없었다.

차의 검은 유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리문으로 돌아가면 그 단어의 뜻과 올바른 사용법에 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차의 유리가 닫혔다. 장석민은 아까 제가 끈덕지게 던진 물음에 대한 답이,조금 전 자하르의 입에서 나왔음을 깨달았다.

검은색 롤스로이스가 주차장을 미끄러지듯이, 빠져나왔다.

「여러 가지 이야기는 있습니다.」

자하르가 폰을 움직였다. 장석민의 시선이 체스판에 멈춘다.

「어떤, 이야기요?」

「갑작스럽게 쓰러져서 의식을 잃으신 것이라 아무래도 독에 당하셨다는 설이 제일 유력하지요.」

장석민이 눈이 커진다. 이전에도 하캄에서 들었던 이야기지만 자하르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무게는 다른 것이다.

「독이라면, 이런저런 검사를 통해 알 수 있는 거 아닌가요?」

「그래서 문제입니다.」

장석민이 잠시 주저하다가 나이트를 움직였다. 트레이드였다. 장석민이 자하르의 말을 잡아 침대 위에 두었다.

「어떤 검사를 해도 나오는 결과가 없으니 말입니다.」

장석민이 음, 하고 생각에 잠겼다. 어떤 검사에도 나오지 않는 독이라는 것이 세상에 존재하는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런 게 있어요?」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지요.」

자하르가 폰을 움직이자 장석민의 눈이 반짝 빛났다. 본인이 좋은 수를 떠올릴 때마다 저런 얼굴이었다.

「스큐어인데요.」

다음의 수에 자하르의 말이 잡힐 것을 말하는 목소리가 들떠 있다. 자하르는 그렇군요, 하고 입술을 다물었다.

「생각보다 실력이 좋으시군요.」

자하르의 칭찬에 장석민이 뭘요, 하고 웃는다. 겸양의 몸짓을 보이지만 눈빛은 여전히 반짝반짝 빛나고 뺨에는 홍조가 가득 찬다. 

장석민이 결연한 표정으로 체스판을 들고 와서 승부를 겨루자는 말을 했을 때만 하더라도 자하르는 이게 또 무슨 수작인가 싶었다. 승부를 겨뤄서 이긴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자하르는 읽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장석민의 얼굴과 체스판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장석민은 마치 죽음을 각오하고 결투신청을 하는 사람처럼, 진지한 얼굴이었다. 농담을 하는 것 같지는 않고 혼자 뭔가를 결심을 한 모양이었다.

한 게임이면 되는 건가요.

자하르의 물음에 장석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조금 기다려주세요. 이것만 마무리하고 올라가겠습니다. 바쁜 일을 먼저 마무리한 후, 자하르는 4층으로 올라가 장석민과 마주앉아 체스를 두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랑 뒀거든요. 장기도 잘 두는데, 장기는 모르시죠? 한국의 체스입니다.」

장석민의 목소리에 기쁨이 묻어난다. 자신의 승리가 다가오고 있음을 예감한 터다.

「무슨 소원을 비실 건가요?」

자하르의 물음에 장석민이 웃음으로 얼버무린다.

「한국으로는 지금 돌려보내 드릴 수 없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충분히 실현 가능한 선에서 저도 말씀드릴 예정입니다.」

실현 가능한 선, 이라는 부분에서 자하르는 장석민이 제시하려는 소원이 무엇인지 읽을 수 있었다.

그날 리문으로 돌아온 후에, 자하르는 장석민을 데리고 4층으로 올라갔다. 사람들 앞에서 자하르에게 엘시시라고 소리치던 입에 성기를 물려주었다. 아래를 빠는 실력은 서툴고 형편없었지만 눈물범벅이 되어 자신을 노려보며,한껏 입술을 벌리고 있는 모습은 괜찮았다. 연이틀 두 번이나 보았는데도 질리지 않는 얼굴이었다. 

자하르는 장석민의 입안 가득 사출한 뒤, 한 방울도 흘리지 말고 삼키게 했다. 수치심에 파르르 떨면서 한 모금 한 모금 목울대를 타고, 정액을 넘기는 모습이 또, 그럴듯했다.

맛있었습니까, 하고 묻는 말에 장석민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분노와 수치가 뒤섞인 그 표정이 아래를 돋우게 했다.

다음에는 더 진한 정액을 맛보게 해드리죠.

자하르의 말이 끝난 것과 동시에 장석민의 얼굴에 절망의 빛이 떠올랐다.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장석민이 의기양양하게 체스판을 내밀며 소원 들어주기 승부를 겨루자는 말이, 결국에는 어떻게 흐를 것인지 충분이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무작정 싫다고 거부하기에는 제 목숨이 아깝고, 그렇다고 마냥 다리를 벌려주기는 싫은 것이다. 고심 끝에 가져온 방법이 체스 승부라는 것이 참으로 장석민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하르는, 헤실헤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누르고 있는 장석민의 낯을 살폈다. 단정하고 깨끗한 외모다. 화려한 후궁들의 미모에 비한다면 뛰어날 것은 없지만, 못날 것도 없는 얼굴이었다.

평소의 모습보다는 저 단정한 얼굴이 수치심을 이기조 못하고 일그러지거나 흥분을 가누지 못하고 절정에 다다르는 경우가 더, 기억에 남는다는 것이 문제지만.

「선물이 늘었군요.」

자하르의 구석에 가득 쌓인 선물더미에 시선을 두었다. 장석민의 앞으로 오는 선물이 늘어갔다. 정확히 말하면 말라쿤에서 보내는 선물이었다.

자하르의 예상보다 장석민에 대한 소문은 더 빠르고 그럴듯하게 퍼져갔다. 아홉명의 왕자가 그에게 목숨을 빚졌으며 에드문트 회장이 커다란 황금상을 만들어 보냈다더라, 그가 하는 조언은 정확해서 파드 장관이 진행하고 있던 사업의 커다란 손실을 막아줬다더라, 등등.

이야기의 정점은 며칠 전, 장석민이 막아낸 테러범이었다. 죽음에 의연하게 맞서는 희생정신은 아나크 왕을 지키던 말라쿤의 모습 그대로였다고 사람들은 입을 모아 칭송했다. 

사실에 기반을 둔 이야기는 점점 눈덩이처럼 불어 장석민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모두 실현이 된다는 이야기까지 떠드는 사람까지 생겼다.

정작 그 소문에 가장 관심이 없는 사람은 장석민 본인이었다. 제 목숨을 보전해 여기서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다른 것은 전혀 상관없다는 일관적인 태도를 보였다.

「선물 좀 안들어오게 하면 안 되나요?」

「선물은 거절하는 것이 아닙니다.」

「……. …….」

장석민이 시큰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선물을 거절하면 어떻게 되는지 전설의 명마 라이언을 통해 배운 바가 있는 터다.

「모두들 쟝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자하르가 폰을 움직였다. 장석민이 자하르의 손을 보면서 입술을 다물었다. 생각에 빠져 입술을 물었다 놓기를 반복한다.

「내일 칼라파 장관과의 자리를 마련해 두었습니다.」

「또요?」

장석민이 대번에 싫은 티를 낸다. 자하르가 써주는 대로 외워서 말을 하고 있지만,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없으니, 사람들은 만날 때마다 불안한 이유에서다.

「간단하게 차나 마시면서 제가 알려드린 대로 대답만 하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장석민이 손가락으로 나이트를 만지작거리면서 음,하고 말문을 연다.

「……도움이 되고 있나요?」

「뭐가, 말입니까?」

「저요. 자하르 왕자님께 도움이 되고 있는 게 맞나요?」

자하르가 웃음을 삼켰다.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제가 쟝과 이렇게 한가하게 체스나 두고 있을 것 같습니까?」

「……하하.」

장석민이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쥐고 있던 나이트를 움직였다. 그리고는 씨익 미소 지어 보인다.

회심의 한 수였다.

「소원 들어주시는 겁니다.」

장석민의 말에 자하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쟝도 그럼 제 소원을 들어주셔야겠군요.」

「네? 왜요?」

「체크메이트.」

자하르가 말을 움직이며 뱉은 말에 장석민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무슨, 잠깐, 잠깐만요. 이게 어떻게, ……어.」

장석민이 눈을 두어 번 껌뻑거린다.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들어온 수가 어느샌가 장석민의 킹을 빼도 박도 못 하게 체크상태로 몰아넣은 것이다.

빠져나갈 구멍 따윈 없었다. 다 이겼다고 생각한 게임에서 뒤통수를 맞자 장석민의 표정은 억울함으로 가득했다.

「어떻게, 이게, ……가능…….」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신묘한 수에 장석민은 말까지 더듬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장기를 둬온 데다 본격적으로 체스를 배운 이후로, 태국을 해서 져본 역사가 없는 그였기에 당혹감은 배가 되었다.

「제가 수학을 했던 알패즈 선생님께서 그랜드 마스터였습니다. 그분께 체스를 배웠습니다.」

「……. 이런 게 어디, …….」

여전히 받아들이기 힘든지 장석민의 시선이 체스판에서 떠나지 않는다. 자하르가 그럼, 하고 입을 열었다.

「쟝이 제 소원을 들어 주셔야겠군요.」

「──!」

장석민이 눈을 부릅뜨고 고개를 들었다. 체스 게임에서 상대에게 질거라는 계산은 없었기에 자하르의 소원 따윈 고려해본 적도 없는 게 당연했다.

장석민이 체스판을 손에 쥔 채로 다급하게 외쳤다.

「그랜드 마스터한테 배웠다는 얘기는 없으셨잖아요. 다시 한 번만 해요.」

「다시 한 번 하면 이길 수 있을 것 같습니까?」

「……. 한 번 더 하면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애초에 쟝이 이야기한 것은 한 게임이었습니다. 제가 다음 게임을 할 이유도 없고 시간도 없습니다.」

장석민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노인정 내기 장기도 아니고, 한 판만 더 두자는 것이 얼마나 흉한 일인지 저도 잘 알고 있는 터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체면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다.

「한 판만, 딱 한 판이면 됩니다.」

안 그런 척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어린애처럼 구는 장석민을, 자하르는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쟝은 나이가 어떻게 됩니까.」

「네?」

「스물둘? 스물셋?」

갑작스러운 호구조사에 장석민은 당황했다가 침착하게 대꾸했다.

「……왕자님보다 많습니다.」

자하르가 눈썹을 올린다. 전혀 예상 밖이라는 반응이었다.

「정말인가요?」

「네.」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데요.」

서양인들은 동양인의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워했다. 장석민은 특히 어머니를 닮아 타고난 동안이기도 했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어려 보인다는 이야기를 할 때, 장석민은 그냥 씨익 웃곤 했다. 나이가 들수록 젊어 보인다는 말이 경쟁력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하르는 예외다.

저보다 어린놈에게 꼼짝달싹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서러운데 자신을 어리게 보고 그렇게 대하는 것은, 솔직히 싫었다.

「왕자님보다 나이가 많습니다. 그렇게 안 보여도요.」

나이가 많으니 대접하라는 말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조심은 해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후궁으로 들어오기에, 참 늦은 나이군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공격이 들어오자 장석민은 그게, 하고 말을 더듬었다. 자하르가 됐습니다. 하고 장석민의 말을 받아주었다. 나이를 안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으니까.

「그럼, 어떤 소원을 빌면 될까요.」

혼잣말처럼 되뇌는 자하르의 말을 들은 장석민은 다시 울상이 되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표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얼굴이었다. 아마 제 감정을 감추지 않아도 좋을 환경에서 자라난 게 분명했다. 고향에서 제법 곱게 자랐다는 장석민의 말이 영 거짓은 아닌듯하다고 자하르는 생각했다.

「실현 가능한 선에서──, 라.」

자하르의 눈이 가늘어진다.

장석민의 심장은 불안감으로 꽁꽁 얼어붙었다. 자하르가 저런 표정을 지었을 때, 이후의 일들이 제대로 진행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자하르의 시선이 잠옷을 걸치고 있는 장석민의 몸을 훑었다. 요즘 너무 바빠서 그간 아래를 비울 생각도 하지 못했다. 전처럼 여러 명을 사서 닥치는 대로 박고 싸는 일은 꿈도 꾸지 못하는 것이다. 며칠 전 장석민의 입안에 사정을 한 게 마지막임을 떠올리자, 아래가 빠듯하게 당겨왔다. 용두질이나 입에 하는 적당한 해소가 아니라, 제대로 된 해소가 필요했다.

자하르의 시선이 몸에 닿을 때마다 장석민은 차가운 얼음을 피부에 데는 것처럼 흠칫흠칫 놀라 몸을 떨었다. 방금까지 반짝반짝 웃으며 체스를 두던 얼굴과는 또 다른 모습이다.

재미있다니까.

자하르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그가 장석민의 입을 부르려는 순간, 문밖에서 다급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장석민의 얼굴에 안도의 기색이 스쳤다. 그 모습을 마주한 자하르의 입매가 뒤틀렸다.

뱃속에서부터 묵직한 감정이 꿈틀거렸다. 요즘 들어 그랬다. 장석민이 자신이 나가는 모습을 보며 안도하거나 좋아하는 기색을 보일 때에, 시커멓고 묵직한 감정들이 출렁이며 밀려드었다.

「무슨 일이지.」

자하르는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부르기 전까지 사람을 올리지 말라는 명을 내려둔 터다. 그 지시를 무시하고 올라왔다는 것은 몹시 중요하고 급한 용무가 있다는 뜻이다.

「자하르 왕자님. 급한 전언이 있습니다.」

「들어와라.」

자하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라겔이 자하르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라겔이 심각한 얼굴로 뭔가를 속삭였다. 장석민이 알아들을 수 없으니 멀뚱하니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알겠다. 곧 가겠다고 전해라.」

「알겠습니다.」

방을 나서려는 라겔이 침대 위에서 체스판을 끌어안고 있는 장석민을 발견하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하하, 안녕하세요.」

장석민이 어색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체스를 두고 계셨습니까?」

라겔의 물음에 장석민은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국정을 논의하고 있었습니다.」

라겔의 눈에 한숨이 어린다. 국정이 마비된 상태인 데다 후계자 논의 문제 때문에 자하르 왕자가 하루에 두어 시간도 눈을 붙이지 못할 정도로 바쁘다는 것을, 옆에서 봐온 것이다.

「밤이 늦었으니 일찍 주무시기 바랍니다. 러마디 님.」

라겔이 장석민에게 돌려서 말을 건넸다. 그때 자리에서 일어난 자하르가 의자에 걸쳐둔 윗옷을 장석민의 어깨에 얹었다. 춥지도 않은데 왜 윗옷을 입혀주는지 알 수 없어 장석민은 눈을 댕그러니 뜨고 자하르를 올려다보았다.

「라겔, 늦었으니 이만 나가도 된다.」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그렇게 말하는 눈빛이 어딘지 모르게 차가웠다.

라겔은 자신이 주제넘은 말을 했음을 깨닫고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방을 나서려던 라겔이 갑자기 떠올랐는지 장석민에게 말을 건넸다.

「러마디 님. 비르마 님께서 전하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네? 비르마 선생님이요? 」

「24회라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정확히 뭐가 24회인지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문을 닫고 라겔이 나가자마자 장석민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침대 위로 쓰러졌다.

「왜죠? 왜 선생님은 자비를 모르시는 겁니까?」

장석민의 외침에 자하르가 짧게 웃었다.

「원래 엄하신 분입니다.」

「왕자님께서 말씀 좀 전해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경전을 쓸 시간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장석민의 말이 영 엄살은 아닌 것이 요즘 그의 하루 일상은 자하르의 일상과 겹쳐 움직였다. 수업에 참석하지도 못할뿐더러 경전을 쓸 시간은 더더욱 없었다.

「말씀은 전하겠습니다. 10회로 줄이고, 그 이상은 늘리지 않는 것으로.」

「다행,……, ……, 정말 10회나 써야 합니까?」

「원치 않으시면 24회에서 계속 늘어나는 걸로 가셔도 됩니다.」

장석민이 아닙니다. 하고 고개를 내저었다.

자하르가 나갈 채비를 하는 것을 보고 장석민도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어딜 가시는 건가요?」

「경전 베껴 쓰러 갑니다.」

자하르가 웃는 채로, 눈을 치뜬다. 장석민은 억울하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그럼 언제 씁니까. 낮에는 저도 바쁘잖아요.」

못마땅하다는 듯이 자하르가 입매를 찌푸렸다. 저렇게 인상을 잘 쓰는 사람이 그간 어떻게 맨날 웃고 다녔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나가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수행원에게 책을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장석민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그 책 진짜 구석에 있어서 제가 가서 찾아야 합니다. 아무나 못 찾습니다.」

「그럼 사람을 붙여드릴 테니 같이 가세요.」

그렇게 뱉는 말에도 썩 마땅치 않아 하는 기색이 엿보였다.

「알겠습니다.」

며칠 전 테러 사건 이후로 자하르는 장석민에게 혼자 돌아다니거나 하는 일을 엄금했다. 눈을 떼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고 단정 지은 것 같았다.

「소원은──.」

자하르의 목소리에 장석민의 몸이 흠칫, 떨렸다.

「차차 생각해보는 걸로 하죠.」

「처──언천히, 생각하세요. 천천히.」

자하르가 그럼, 하고 방문을 닫고 나갔다.

"내 마지막 희망을 누구한테 보여줄 수야 없지."

장석민은 중얼거리며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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