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는 개뿔
자신의 아버지가 쓰러졌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자신을 이곳에 감금시킨 놈을 이해할 수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삼가 애도를 표합니다.」
「아직 안 돌아가셨습니다.」
부드러운 투로 대답했지만 단호한 목소리였다. 장석민은 죄송합니다,하고 사과했다.
「아무튼, 지금 왕자님도 안 좋은 상황에 처하신 거 알고 있습니다.」
장석민은 최대한 차분하고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상대에게 신뢰를 주기 위해서는 이쪽이 정신을 차려야 한다.
「그런데 지금 당혹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일 겁니다. 사람들은 혼란스러울수록 뭔가를 믿고 싶어 합니다. 프로파간다가 어떨 때 가장 효과적이었는지 생각해보세요.」
프로파간다요, 하고 되묻는 자하르의 목소리가 어처구니없어한다.
프로파간다가 적당한 예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지만 장석민은 일단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든 지식을 동원했다.
「무크라르 전하께서 깨어나시기 전까지 자하르 왕자님도 버티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장석민을 바라보는 자하르의 눈이 슬쩍 가늘어진다.
「제가 방패가 되어드리겠다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정말로 제가 말라쿤의 현신이라고 여기면 그 옆에 있는 자하르 왕자님을 다른 왕자님들이 함부로 끌어내리지는 못할 겁니다.」
장석민이 만났던 국왕은 전통과 신을 몹시 중요시 여겼다. 분명히 국민들이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하르도 그걸 모를 리 없다. 장석민은 자하르를 바라보며 눈에 힘을 주었다. 손발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필사적으로 참아내며 말을 이었다.
「제가 자하르 왕자님을 후계자로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자하르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취미는 없습니다만, 그러니까 어떻게 믿게 할 생각입니까.」
「그때처럼.」
「──.」
「그때처럼, 그날처럼 사고를 예견하게 해주세요.」
장석민의 목소리가 더없이 진지했다. 자하르가 글쎄요, 하고 중얼거렸다 마뜩잖아하는 얼굴이었다.
「그날은 우연이었습니다. 그건 저도 알고 쟝도 알지요.」
「한번은 우연일 수 있지만, 그것이 거듬되면 필연이 됩니다.」
장석민이 자하르의 옷자락을 쥐었다.
「기회를 주세요, 저는 절대로 그날 본 것에 대해 말하지 않을 겁니다. 제가 바보가 아닌 이상 그걸 떠들고 다니겠습니까.」
「바보가 아닌데 왜 저를 따라왔을까요.」
「…….」
「머리가 좋은 것 같은게 결정적인 순간에는 멍청한 선택을 합니다, 쟝은.」
「그……, 다시는 안그러겠습니다.」
바보, 천치, 멍청이라고 이마에 써 붙이고 다니게 되어도 상관없다.
일단은 살고 봐야 했다.
「그래도, 지금 제가 한 제안은 나쁘지 않은 거 아닌가요?」
자하르가 입을 다물었다. 장석민은 초조하게 그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자하르가 생각에 잠겼다. 좋은 징조였다. 그가 자신의 제안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는 뜻이다.
「나쁘지는 않은데──.」
동양인 청년의 머리에서 나온 생각치고 나쁘지 않았다. 이유도 없이 쓰러진 국왕과 마무리를 맺지 못한 나바툰.
혼란 속에서 사람들이 찾는 것은 신의 계시다. 그런 의미에서 따지자면 말라쿤은 이런 상황에서 잘만 이용한다면 아주 좋은 징조로 작용할 수 있는 신수 (한자)였다. 문제는 장석민을 그대로 이용하기에 위험부담이 크다는 것이었다. 평소라면 외국에서 온 후궁 하나가 떠들어대는 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지금은 살얼음판을 내딛는 형국이었다. 애초에 위험한 싹은 잘라내는게 맞다.
맞는데, ─ 내키지가 않는다.
「좋다는 생각도 들지는 않는군요.」
자하르가 불편한 마음을 뒤로하고 무심한 어투로 말했다.
「아닙니다. 정말 좋은 결정였다고 나중에 생각하실 겁니다. 정말 잘 해드리겠습니다. 정말로, 몸과 마음을 다 바쳐서 왕자님께 충성하겠습니다.」
실적 없는 웨이터가 VIP고객에게 매달리듯 장석민은 필사적이었다.
「몸과 마음을 바쳐서라, ─ .」
「네, 맹세코 절대로 비밀을 발설하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장석민은 자하르가 시키면 혈서라도 쓰고 싶은 심정이었다.
「게다가 자하르 왕자님도 대나무 밭은 필요할 거 아닙니까.」
「대나무 밭?」
자하르가 되물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그러니까,자하르 왕자님의 원래 성격을 편하게 보여줄 사람이 가끔은 필요하시잖아요.」
보고 싶지 않았다. 하나도 안 편했고 어제도 며칠만 있으면 한국에 갈 수 있다는 일념 하나로 장석민은 자하르를 간신히 참아냈다.
「글쎄요. 제 원래 성격이 어떤데요?」
물라서 묻냐! 이 이중인격자야!
「……알려지신 것과는 조금 다르게, 솔직하신, ……부분이,…….」
최대한 단어를 골라서 사용했는데도 어감이 썩 좋지 않았다. 하지만 장삭민에게는 이것이 최선이었다. 그 미친 이중인격을 어떻게 이 이상 어떻게 더 포장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저 보고 쟝 앞에서는 솔직해지라는 말씀인가요?」
「예? 꼭 계속 솔직하실 필요는 없지만, 원하시면, 간간이…….」
자하르가 흠, 하고 생각에 잠긴다. 장석민은 초조하게 그의 입만 바라보았다.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장고하던 자하르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어떤 사고룰 예견하실 건가요?」
「그건, 왕자님께서,……만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번거롭게 하시는군요.」
그의말에 시커먼 불안이 장석민의 머리로 흘러들어왔다.번거로우니 그냥 죽여 버리겠습니다. 하는 말이 금발이라도 저 모양 좋은 입술에서 나올 것만 같았다. 그때 갑자기 자하르가 아무런 전조 없이 손을 뻗어 장석민의 뺨을 쥐었다. 손바닥의 온기가 장석민의 몸과 마음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자하르의 기다란 손가락이 장석민의 뺨을 어루만졌다.
「좋아요. 쟝의 말대로 하겠습니다.」
「……!」
「하긴, 아버님께서 의식이 없으신 상태에서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진 않았습니다.」
「……!」
거짓말. 이제와서 어디서 인자한 척이야.
장석민의 뺨을 어루만지던 자하르의 손이 천천히 목덜미 아래로 내려왔다.엄지로 천천히 목젖 부근을 훑으며 자하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여기 이 부분을 손가락으로 뚫으면 굉장히 많은 양의 피가 쏟아져 나옵니다.」
「 ─, ─. 」
「쟝이 입고 있는 그 하얀 옷을 흠뻑 적시는 데 30초도 걸리지 않을 겁니다.」
작은 웃음소리가 뒤따랐다. 천장이 높은 방안에 자하르의 웃음소리가 울릴 때마다 장석민은 수명이 단축되는 기분이었다.
「제가 무대를 만들어드리지요.」
자하르의 손가락이 목에서 내려와 장석민의 어깨에 닿았다.
「잘 부탁합니다.」
어깨를 툭툭, 가볍게 두 번 두드렸다. 그의 손이 닿는 곳마다 망피로 두들겨 맞는 느낌이었지만 장석민은 애써 의연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는 10분 뒤에 국무회의가 있어서 가보겠습니다.」
자하르가 시계를 보고 방 안을 나섰다. 방문이 닫히자마자 장석민은 다리가 풀려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10분.
자신의 협상이 통과되지 않았다면 아마 인생의 마지막이 되었을 시간이었다.
타르카 왕국은 말 그대로 무정부 상태였다. 자하르가 말했던 국가 안전조치라는 것이 아마 이 때문에 발동된 모양이었다. 긴급회의가 소집되었고 총리와 장관들이 모여 밤새 설전을 벌였다고 한다. 국왕이 봉한 상자는 국왕만이 열 수 있었기에 결국 결론내리지 않은 채, 회의는 끝났다.
정해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후계자가 정해지기 전에 왕이 죽은 겨우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재금같은 경우는 몹시 복잡한 상황이었다. 무크라르 왕이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데다, 왕자들은 저마다 왕이 자신을 후계자로 지목했을 거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홉명의 왕자들을 지지하는 귀족 가문이 모두 달랐기 때문에 자칫, 후계자가 모이기로 했다. 정말 중요한 자리 아닌가요, 하고 묻는 장석민에게 자하르는 그렇죠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자리에 자신을 대동해도 되느냐고 조심스럽게 묻자, 자하르가 의아하다는 듯이 눈을 치떳다. 그는 되물었다. 그럼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말라쿤에 대한 믿음을 줘서 뭘 하실거죠? 결국 장석민은 말 한마디, 몸짓 하나가 조심스러운 자리에 자하르와 함께 참석하게 되었다.
"……분명히 동의도 안 받았겠지"
그런 자리에 자신이 나타나면 길길이 날뛸 왕자 둘쯤, 알고 있는 장석민으로서는 입맛이 쓸 수밖에 없었다. 장석민은 자하르에게 힐끔 시선을 던졌다. 통화하고 있던 자하르가 눈을 맞추고 슬쩍 눈썹을 휜다. 왜 그러냐는 것이다.
「아닙니다. 아무것도.」
혹시 제 손에 피를 묻히기 싫어 다른 왕자 손에 맞아 죽으라고 던져주는 것은 아니겠지.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떠나오기 전에 자하르에게 어떤 사건을 예언해야 하는 거냐고 물었지만 그는 모호하게 대답할 따름이었다.
신로를 드리면 그때 위험을 알리세요, 라니. 장난하냐?
장석민은 속이 썩어 문드러질 것 같았다. 왜 자세하게 알려주지 않느냐는 물음에 자하르는 알아서 좋을 거 없다는 대답을 했다.
「왜 그러신가요.」
통화를 마친 자하르가 장석민의 불안스러운 눈길을 읽고는, 입을 열었다. 옆에서 비서가 앉아 있었기 때문에 장석민은 모종의 거래에 대해 언급할 수 없었다.
「몸이 많이 안 좋으십니까? 차를 돌릴까요?」
자하르가 다시 걱정스러운 낯을 한다. 장석민은 다급히 고개를 흘들었다. 차를 돌리는 것이 곧 자신의 목숨과도 직결함을 아는 터다.
「괜찬으시다면 러마디 님과는 제가 차에 있겠습니다.」
비서인 라겔의 말에 가시가 돋쳐 있었다. 이런 중요한 시국에 동양인 청년을 데리고 모임에 참석하겠다는 자하르 왕자의 결정이 썩 내키지 않아하는 눈치였다.
「쟝은 나와 함께 하기로 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라겔의 시선이 장석민의 얼굴에 꽂힌다. 눈치도 없이 어딜 그렇게 따라다니느냐는 힐난이 담겨 있다. 장석민은 모른 척 시선을 딴 곳에 돌렸다. 눈치 빠른 사람이 둔한 척하는 것도 힘이 들었다.
차가 건물의 주차장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대체 뭘 예견해어 하는 걸까.
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서 장석민은 다시 자하르를 흘끔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쳐도 그는 슬며서 웃어줄 뿐, 아무런 언질도 없었다. 엘레베이터 문이 열리자 성큼성큼 앞서 걷는 자하르의 너른 등을 보며 장석민은 불퉁하게 투덜거렸다.
"됐다, 됐어. 더럽고 치사하다."
일이 실패로 돌아가면 다 자하르 탓이라고 생각하며 장식민은 발걸음을 옮겼다.
「자하르!」
회의실에 들어서자마자 들려오는 낮익은 목소리에 장석민은 제가 불린 것도 아닌데 어깨를 움츠렸다.
「네가 제정신이냐? 지금 이런 자리에 저런 놈을 데려와?」
장석민을 발견한 하일이 빠르게 쏘아붙였다. 그의 옆에 서 있던 다른 왕자들도 마뜩찮은 얼굴로 동양인 청년에게 시선을 던졌다.
장석민은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했다. 가시방석일 줄은 알았지만 앉기도 전에 엉덩이에 가시가 박힐 줄이야.
「쟝의 노움을 받고 싶어서 데리고 왔습니다.」
자하르의 말에 하일의 표정이 한층 험악해진다.
「저런 말라비틀어진 동양 놈이 무슨 도움을 준다고?」
「정말 둘이 붙어먹은 거 아니야?」
카힌이 끼어들었다. 카힌의 능청스러운 얼굴을 보다 그가 대충 어떤 말을 할지 장석민은 예상할 수 있었다
「지금 그런 이야기를 나눌 때가 아닙니다.」
「그럼 어떤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데?」
「아버님께서 의식이 없으시니 계승자를 어떻게 정해야 할지 논의 해야지요.」
「하마드 형님의 말이 맞습니다. 하루빨리 논의가 이루어져야 정국을 안정시킬 수 있습니다.」
「그 논의를 대체 무슨 수로 하겠다는 건데.」
왕자가 아홉 명이니 한마디씩만 해도 아홉 마디였다. 문제는 번호표를 뽑고 차례대로 말하는 것도 아니고 한마디씩만 하는 것도 아니었다. 다들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으로 이야기가 흐를까 잔뜩 신경을 곤두세운 채로 말들을 쏟아 냈다. 난장판이었다. 왕자들의 수행원들조차 한 발짝 물러선 곳에서 조심스럽게 그들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장석민은 자하르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간간이 말을 할 뿐, 적극적으로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다. 입을 열 때도 꼭 필요한 대답만 하고 있는 분위기였다.
신호를 대체 언제 주겠다는 걸까. 언제 예언의 말을 해야 할지 모르니 장석민은 자하르에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네 생각은 어떠냐? 아까부터 입만 다물고 있으니 의중을 알 수가 있어야지.」
카힌이 자하르에게 물었다. 자하르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일단은 아버님께서 일어나실 때까지 임시로 국정을 운영해갈 기구들 각료들을 주축으로 만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자하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카힌이 그의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기구? 그건 어떤 기준을 가지고 선출할 것이냐.」
「그건 논의해봐야겠지요.」
「네놈이 시간을 끌려고 그러는걸 누가 모를 줄 알아. 저놈을 여기 대려온 것도 다 눈속임일 테지.」
카힌이 장석민을 가리켰다. 다른 왕자들의 시선도 일제히 장석민에개 향했다.
내가 뭘, 내가 어쨌다고.
갑자기 공격의 대상이 된 장석민은 이러지더 저러지도 못하고 눈만 뎅글뎅글 굴렸다.
「그렇지 않습니다. 쟝은 아버님의 무사함를 같이 기원해줄 사람입니다.」
자하르의 말을 듣자마자 하일이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섰다.
「네놈이 어떤 수작을 꾸미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금 이런 상황에사 그런 말도 안 되는 놀음을 하자는 것이 제정신리냐?」
「믿음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자하르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신께서 모든 일을 올바르게 인도하실 겁니다.」
장석민은 자하르가 원론적인 이야기러 상대의 속을 박박 긁어대고 있음을 짐작했다. 하일을 비롯한 다른 왕자들의 얼굴이 구겨지고 있는 것을 봐선 90퍼센트의 확률로, 그럴 것이다.
「그럴다면 가서 기도나 올릴것이지 여기는 왜 온 것이냐.」
하일의 비아냥거림에도 자하르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제가 해야 할 도리는 하고자 함입니다.」
자하르의 본래 성격의 알게 된 이루로 장석민은 그의 온화한 표정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저 더러운 성질을 대체 어떻게 참고 있는 것일까.
「도리? 네가 핫산 내무장관에게 연락해서 임시 기구 설립에 관한 이야기를 한 줄 누가 모를 것 같아?」
하일의 말에 앉아있던 왕자들 사이에서도 수군거리는 소리가 퍼져 나갔다. 자하르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지금인가? 지금 자하르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르리는 것이 신호인가? 장석민은 입술을 달싹거리며 언제 세 번 울어서 위험을 알려야 할지,
눈치를 살폈다.
「핫산 내무 장관에게 연락한 것은 사실입니다. 아버님께서 갑작스러운 병환으로 저렇게 되셨으니 일단 왕실의 가장 큰 어른께 의견을 여쭙는 것은 당연하니까요」
「가장 큰 어른이라는 것이 네 외숙부라는 것이 문제겠지.」
「그러는 하마드 형님께서도 칼리드 장관과 길밀한 연락을 주고받고 했다고 하던데요.」
「네놈이 무슨 상관이냐.」
다시 회의는 난장판이 되어갔다. 장석민은 계속 눈을 부릅뜨고 자하르만 살폈다. 그의 몸짓, 눈짓, 말 한마디에 어떤 의미가 담겨있지는 않을까 잔뜩 긴장을 한 채 지켜봐야 했다.
「기가 막히는군.」
카힌리 갑자기 장석밍을 보며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대체 저놈응 왜 저렇게 너를 잡아먹을 듯이 쳐다보는 것이냐. 어디 눈빛이 뜨거워서 제대로 회의를 할 수나 있겠어?」
「쟝.」
자하르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장석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지금이야? 지금인 건가?
「잠깐 나가 계세요.」
그러나 자하르에게서 나온 말은 전혀 뜻밖이었다. 장석민이 저요? 하고 되물었다.
「네. 잠시만 밖에서 기다려 주세요. 곧 끝날 겁니다.」
곧 끝나긴 뭐가, 아니, 지금 대체 이게 뭐하자는 짓이지?
장석민은 자하르가 대체 무슨 의도인지 알 수 없어 눈을 크게 뜨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나 자하르는 죄송하다는 말을 남기고 다시 황자들과 대책 회의에 들어갔다. 라겔이 장석민을 이끌고 밖으로 나왔다.
"허, 허……."
자리를 마련해주겠다고 해서 따라왔는데 졸지에 쫓겨나게 된 장석민은 허허로운 웃음을 지으며 회의실을 나왔다.
"대체 뭐하자는 고야. 진짜 속을 모르겠네."
장석민은 밖으로 나와 긴 쇼파 위에 앉았다. 뭘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이 한참을 멍하게 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통유리로 된 통로로 사람들이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처음에는 한둘이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사람이 늘고 있었다. 장석민은 옆에 서 있던 라겔에게 물었다.
「뭐하는 거에요?」
「2시부터 각국 대사관 각료들 모임이 옆 건물에서 있습니다.」
「대사관……,……!」
장석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대사관? 대사관에서 다 온다고요?」
라겔이 그렇습니다, 하고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장석민의 눈에 환희의 빛이 차오른다. 각국 대사관 각료들 사이에 한국 대사관에서 온 사람들도 섞여 있을 게 분명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급행열차가 칙칙, 소리를 내며 그의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저 잠깐만 나갔다 오면 안 될까요?」
장석민의 물음에 라겔이 뭔 헛소리냐는 얼굴로 안됩니다, 하고 차게 대꾸했다.
「산책 좀 하고 올게요.」
「안됩니다.」
「화방실 좀 다녀올게요.」
「복도 옆으로 가시면 있습니다.」
「…….」
자하르를 따라다니면서 늘 자유롭게 산책을 해왔는데 오늘따라 갑자기 이렇게 나오는 이유를 알지 못해 속이 터질 것 같았다. 그럼 하는 수 없지.
「저 머리가 너무 아파서 그럽니다.」
장석민이 자리에 주저앉으며 이마를 손으로 감싸고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가 가끔 발작을 일으킨다는 것을 비서인 라겔도 알고있었기에, 이렇게 하면 맑은 공기는 쐬개 해줄 고라는 계산이 있었다.
라겔이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뭔가를 내밀었다.
「……뭔가요?」
「타이레놀입니다.」
필요없어! 장석민은 하마터면 라겔의 손을 내리칠 뻔했다. 필사의 인내심으로 참아내며 장석민은 다시 그에게 간청했다.
「한 30초면 될 것 같은데, 차가운 공기만 쐬면…….」
장석민의 눈에 통로를 따라 지나가는 한 무리의 동양인이 들어왔다. 장석민의 시선이 그들을 따라 움직이는 것을 본 라겔이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국대사군요.」
장석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한국대사가 경호원을 이끌고 통로 옆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장석민은 홀린 듯이 그들 옆을 따라 걸었다.
"저기요, 저기요."
장석민이 유리를 손으로 두드리자 한국대사가 고개를 돌렸다.
"저기요, 저 한국 사람이에요?"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지 대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장석민은 하,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장석민의 눈에서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너 한국사람이에요. 한국, 나 한국으로 가고 싶어요. 망명할래, 아니 나 좀 데려가요.네?"
간절하게 외쳐봤지만 통유리로 가로막혀 있는 터라 소리가 들리지 않아 한국대사는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일 뿐이었다. 장석민은 손바닥으로 유리를 내리쳤다.
"나 한국으로 가야 한다고. 자국민 보호! 자국민, 보호! 납치!"
장석민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자 라겔이 달려왔다.
「왕자님들께서 모인 자리입니다. 여기서 이렇게 소란피우시면 안됨니다.」
"이거 놔, 지금 왕자가 문제야? 나 저 사람들하고 이야기해야 한다고, 놓으라고."
장석민은 라겔에게 한국말로 대답한 것도 알아채지 못하고 손으로 유리를 두드렸다.
"잠깐만요, 잠깐, 가지 마! 어딜 가는 거야!"
한국대사가 고개를 흔들며 걸어가기 시작하자 장석민의 심장은 바직바직 타들어 갔다.
"안 된다고! 어딜 가냐고! "
「소란을 피우면 안됩니다.」
다른 경호원들까지 달려와 장석민을 뜯어말렸다. 장석민은 놓으라고 소리를 지르며 유리창을 두드렸다. 한국대사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러고는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안 돼! 가지 마! 납치를 당했다고, 내가!"
커다란 당치 두 명이 양옆에서 장석민의 어깨를 붙들었다. 한국대사의 뒷모습이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아무리 실리가 중요하다고 다른 나라의 대사들도 있는 자리에사 자국민이 보호를 요청했을 경우, 대사관 측에서도 절대 무시를 할 수 없을 것이다. 한마디로 장석민에게 지금 저 한국대사는 반드시 잡아야 할 사람이었다. 장석민은 자신의 팔을 붙들고 있는 덩치 중 하나를 떨어냈다. 사람은 정신이 회까닥 뒤집히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기 마련이다. 장석민은 나머지 덩치 하나도 엎어치기로 바닥에 내던졌다.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라겔이 파리하게 질려서 소리 질렀다. 장석민의 귀에는 그따위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희번덕 움직이던 장석민의 눈에 구석에 놓은 소화기가 들어왔다. 장석민이 달려가 소화기를 집어 들었다.
「잡아!」
왕자들이 아홉 명이나 모여 있는 자리였다. 자칫 위험한 행동을 했을 경우 테러로 규정될 수 있다는 것을, 지금 이자리에 있는 사람 중 장석민을 제외한 모든 이들은 알고 있었다. 소화기를 집어든 장석민을 향해 경호원들이 들려들었다. 장석민은 그들을 피해 한국대사가 걸어가고 있는 방향을 향해 소화기를 냅다 집아 던졌다. 그러니 강화유리로 만든 건물 외벽은 쩡, 소리를 내며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장석민은 데구루루 굴러오는 소화기를 다시 집어 들었다. 이미 그의 팔을 두 명의 경호원이 낚아챘다. 장석민은 한 손으로 소화기를 휘둘렀다. 다시 한 번, 유리창에 있는 힘껏 내던졌다. 이번에는 희미하게나마 금이 생겼다. 됐어, 조금만 더 하면! 장석민의 눈에 희망이 차올랐다. 하지만 그의 다른 쪽 팔에도 두 명의 경호원리 들어 붙었다. 소화기를 다시 집어 들려고 했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꼼짝 마. 」
경호원중 하나가 소리 질렀다. 한국대사의 등이 멀어지고 있었다. 살아나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멀어지는 것이었다. 장석민은 입술을 깨물었다. 떼어낼 수 없어도 밀어낼 수는 있다. 그는 자신에게 매달려 있던 경호원들과 그대로 유리창으로 돌진했다. 남자 다섯이 엉겨 붙어 있던 무게와 달려가는 속도까지 더해지자 엄청난 충격이 유리에 가해졌다. 와장창 하는 소리와 함께 외벽이 무너졌다. 동시에 경보가 울리기 시작했다. 근처에 있던 경호원들과 수행원들이 달려왔다. 경보가 울리자 회의실 안에 있던 왕자들까지 밖으로 나왔다.
「지금 뭣들 하는 짓이냐.」
가장 먼저 달려 나온 하일이 유리창이 깨진 난장을 보고 소리를 내질렀다. 다른 왕자들도 대번에 낯을 굳혔다.
"놔! 이거 놓으라고!거기 한국대사! 어디 갔어! 젠장, 놓으란 말이야! 한국대사!"
경호원들에게 붙들린 장석민이 악을 쓰며 발버둥을 쳤다. 다들 그 모습을 보며 혀를 냈다 저런 것이 말라쿤의 현신이라고 데리고 다니는 자하르가 불쌍하다는 비아냥거림도 들렸다. 난장은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소방 경보가 울리자 스프링클러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왕자들의 머리 위로 물이 쏟아져 내렸다. 하일이 자하르를 노려보았다. 네가 데려온 놈이 벌인 짓을 보라는 눈초리였다. 자하르는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장석민을 내려다보았다.
「대체 이게, 무엄하다, 저놈을 당장……!」
하일이 소리를 지르는 찰나, 쾅, 하는 폭발음이 울렸다. 모두들 기겁을 하며 몸을 움츠렸다.
「피하십시오!」
「테러입니다. 당장 자리를 피하셔야 합니다.」
경호원들관 수행원들이 달려와 각기 왕자들을 둘러쌌다. 모두들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자하르가 장석민에게 다가와 그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피하셔야 합니다.」
자하르가 말을 건넸다. 장석민은 눈을 껌뻑거렸다. 지금이 그 위험을 알려야 하는 타이밍인가요? 하고 물으려던 순간에 2차 폭발이 발생했다.
여기 저기에서 사람들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자하르는 말없이 장석민을 잡아당겼다. 자하르의 손에 잡힌 채로 장석민은 건물을 빠져나왔다. 위함을 알릴 새도, 말라쿤의 현신으로서 인상을 심어줄 새도 없었다.
그들이 건물을 빠져나오자마자 다시 여러 차례 폭발음이 울렸다. 장석민이 흠칫하고 놀라자 자하르가 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퍼엉 ─ ─.
조금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엄청난 굉음이 주변을 뒤흔들었다. 건물이 무너지고 불길이 치솟았다. 번쩍번쩍 위용을 자랑하던 건물이 와르르무너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옆 건물에 모였던 사람들까지 달려 나와 피신을 해야만 했다.
「왕자님, 아지즈 왕자님!」
「하마르 왕자님!」
모두들 제가 모시는 왕자를 찾기 위해 뛰어다니며 소리 질렀다. 하얗게 질린 장석민은 자신의 어깨를 끌어안고 있는 자하르를 올려다보았다.
「괜찮으신가요?」
자하르가 물었다. 여기저기 찢어져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지금 이경우에는 목숨을 건진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것 같았다. 장석민은 얼빠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하르가 장석민을 끌어안고 있던 손을 풀었다.
그리고는.
「왕자님!」
라겔이 소리 질렀다. 자하르가 한쪽 무릎을 꿇고 바닥에 앉았다. 예상하지 못한 그의 행동에 장석민의 목소리에는 울음마저 섞여 있었다 .
왜 이래. 이 중동 놈아. 무섭게 왜 이래.
「왕자님. 왜 이러새요. 일어나세요.」
장석민이 자하르를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그는 꾼쩍도 하지 않았다. 자하르가 장석민의 손을 잡고 진지한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네?」
「그대 덕분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무슨, 소리를 ,….….」
「경보가 울리지 않았다면 회의실에서 나오지 못했을겁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자하르가 장석민의 손을 잡고 입을 맞추었다. 장석민은 기겁을 하고 손을 빼내려 했지만 자하르의 우악스러운 힘이 그렇게 하게 두질 않았다.
「저뿐만 아니라 다른 형제들의 목숨까지 구해주셧으니, 이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뭔 개소리냐고 말을 하려던 장석민은 어느새 주변에 몰려든 왕자들의 얼굴을 보고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하일이 가장 먼저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다른 왕자들도 차례대로 고개를 숙였다. 장석민은 엉겁결에 같이 고개를 숙였다. 자하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차분한 회색 눈동자에 희미한 웃음이 어려 있었다. 이것이 그가말했던 무대였음을, 장석민은 그제야 알아챘다. 건물 더미 속에 남아있던 폭탄이 뒤늦게 터지며 자하르의 등 뒤로 불기둥이 치솟았다.
진정한 아수라는 저 인간의 시커먼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을 것이라고.
"아, 아야."
장석민이 인상을 찌푸리자 자하르가 괜찮아요? 하고 묻는다. 하지만
약을 찍어 바르는 손은 멈추지 않았다.
「아, 아파요.」
「그러게 누가 유리를 몸으로 들이박으라고 했습니까.」
자하르가 장석민의 어깨에서 유리조각을 빼내며 대답했다. 장석민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머뭇거리던 그는 자하르에게 조심스럽게 물었
다.
「……한국대사 말입니다.」
「네.」
「다, 왕자님께서, ……계획하신 일입니까?」
몇 번을 생각해봐도 같은 결론이 나왔다. 오늘 있었던 모든 일이 자신이
한국대사를 보면 지랄 발광할 것을 계산해서, 자하르가 짜놓은 무대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자하르가 말없이 빙긋 웃었다. 무언의 긍정이었다. 장석민은 혀를
깨물었다. 빌어먹을 중동 놈. 나쁜 새끼.
「귀띔이라도 해주셨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랬다면 그렇게 눈이 뒤집혀 지랄은 안 했을 텐데. 덕분에 장석민은
한쪽 어깨에 자잘한 유리파편이 박히고 여기저기 찢어지는 부상을 입었
다. 게다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자하르가 직접 부상을 치료해준다
면서 핀셋으로 유리조각을 하나씩 빼내고 있었다.
「쟝이 뭔가 알았다면 그것을 신경 쓰느라고 어색하게 굴었을 겁니다.
회의실 안에서 제 얼굴만 빤히 쳐다보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럼 제가 왕자님 얼굴만 빤히 쳐다볼 것도 다 계산하고 일부러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인가요.」
자하르는 분명 자신이 신호를 준다는 말을 했다.
「네. 그럼 카힌 형님께서 참지 못하고 싫은 소리를 하셨겠죠. 하일
형님이든. 두 분 중 하나는, 쟝을 참지 못하고 쫓아냈을 겁니다.]
「그래도 좀 알려주셨으면…….」
「본인의 연기력을 과대평가하고 있군요. 쟝은 생각이 많아서 안됩니
다. 생각하는 것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
울컥했지만 약이 든 와인을 먹이려다 손을 벌벌 떨던 기억을 떠올리고
장석민은 입을 다물었따. 그러다 문듯, 스친 의문에 입매를 찌푸렸다.
「만약, 경보가 울리지 않았다면 다들 나오지 못했을 텐데. 거기까지는
계산 안 하셨습니까?」
그가 유리창을 깬 것은 어떻게든 한국대사와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일념에서였지 경보를 울리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유리가 깨지면 경보가
울리는 시스템인지도 몰랐던 것이다.
「쟝이라면 반드시 유리를 깼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자하르가 장석민의 상처에 붕대를 감아주었다. 꼼꼼하게 움직이는
손가락이 아름답다고 장석민은 무심코 생각하고 말았다.
「믿으셨다고요……?」
장석민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세상 누구도 믿을 것 같지 않은
남자가 자신을 믿었다는 얘기가 의아했던 것이다.
나를 설마, ……그만큼 의지했다는 얘기인가.
「쟝이라면 어떤 상황에서든 최악의 선택을 했을 테니까요.」
「…….」
「다른 왕자들이 있거나 말거나 자기 생각만 했겠죠. 한국대사와 대화
만 할 수 있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 믿으셨겠지요.」
붕대를 모두 묶어 테이핑까지 마친 자하르가 장석민의 상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순진한 겁니까. 바보 같은 겁니까.」
「……. …….」
일부러 장석민을 회의실 밖으로 쫓아내고 그 시간에 한국대사를 불러들
이고, 유리창을 깰 거라는 꼐산에 경보가 울리는 시간에 폭탄을 터트렸다.
장석민은 허허, 하고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결국 자신은
자하르의 손바닥 위에서 놀았다는 얘기였따.
「그래도, 너무……, 위험했던 거 아닌가요. 시간을 조금이라도 잘못
맞췄으면 다 죽었을지도 모르는데.」
자하르가 대답하지 않았따. 그의 입매가 휘는 것을 본 장석민은 설마,
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두엇 죽어도 된다고 생각하셨던 건가요?」
「설마요.」
아아, 맞구나.
정말로 두엇 죽어도 된다고 계산해두고 있었다. 장석민은 새삼 눈앞의
남자의 이중성에 대해 몸서리가 났다. 이런 인간을 성자니 뭐니 하고
믿고 있는 국민들이 불쌍해지는 순간이었다.
아니, 뭐니 뭐니 해도 내가 제일 가엽지. ……젠장. 이런 놈이 내
목숨을 쥐고 있으니. 하일 대신 자하르, 아니 하일도 물러선 것은 아니다.
범과 이리가 각자 다른 방향에서 호시탐탐 먹어치울 기회만을 노리고
있는 셈이었다.
장석민이 한숨을 몰아쉬자 자하르가 왜요, 하고 그 이유를 묻는다.
「아닙니다. 조금 피곤해서요.」
「피곤하실 만도 하겠군요. 몸으로 유리를 들이박았으니.」
아까와 같은 말이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유리를 몸으로 들이박아 깬
것이 자하르의 심기를 거스른 모양이라고, 장석민은 짐작했다.
「덕분에 내일쯤이면 아마 이 방 안에 선물이 가득할 겁니다.」
「……어째서요?」
「타르카에서는 목숨을 빚진 상대에게 반드시,」
장석민은 자하르의 뒷말을 대신했다.
「포도주로 갚는다, 맞죠?」
이미 그 포도주를 두 명에게 받아본 경험이 있는 그였다.
「선물은 필요 없습니다. 안 받을래요. 그리고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인데, 연회나 그런 것도 열지 말아 주세요.」
자하르는 장석민을 묘한 표정을 바라보았다. 장석민이 왜 그러십니까,
하고 물었따.
「쟝은, 가끔 이해 못 할 행동을 하시는군요.」
「네? 제가요?」
「쟝은 제가 이렇게─.」
자하르가 장석민의 뺨에 손을 가져댔다. 장석민이 힉, 하고 놀라며
여깨를 움츠렸다.
「─손만 대어도 기겁을 하면서, 어떻게 그렇게 무신경하게 굴수
있는 겁니까?」
「…….」
「이런 경우에 받는 선물은 쟝이 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장석민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죄송합니다, 하고 사과했다.
「선물을 거절하는 이유가 뭔가요.」
자하르의 말에 장석민은 중얼중얼 생각을 늘어놓았다.
「어차피 다들 진짜 고마워서 주는 것도 아닐 테고, 그런 선물 받아봤자
기쁘지도 않고, 한국에 돌아갈 때 짐만 되고, ……. 필요 없어서요.」
「필요 없다고요?」
그렇게 묻는 자하르의 목소리에 장석민은 살짝 기분이 상했다. 마치
네 주제에 감히 선물을 거절하느냐는 어투였다.
「저도, 잘 삽니다. 한국에서는, 잘 삽니다. 물론 왕자님들하고 비할
바는 아니지만 부족함 없이 살고 있습니다.」
어디 가서 재력으로는 무시를 받아본 적 없는 부잣집 막내아들의 마지
막 자존심이었다.
「그러시군요.」
자하르가 약 상자의 뚜껑을 덮으며 대답했다.
「타르카에서는 형식적인 것을 몹시 중요시 여깁니다. 그게 쟝이 목숨
을 부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는 것을 잊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장석민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따. 자하르가 그럼,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
다. 드디어 자하르가 떠나는구나 싶어서 장석민의 얼굴에 대번에 화색이
돌았따.
「─?」
방을 나설 거라고 생각했던 자하르가 입고 있던 옷을 벗기 시작했다.
장석민이 놀라서 눈을 치떴다.
「왜 그러십니까.」
자하르가 되레 물었다. 장석민이 어, 하고 방문을 바라보았다. 어서
썩 꺼지라는 뜻이었다. 윗옷의 단추를 모두 끄른 자하르가 말했다.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하겠다 ─, 고 말씀하셨죠. 」
「네? 그거야 당연히 그냥,…….」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장석민은 침대 위에서 슬금, 뒤로 물러섰다.
「그냥 한 말이다?」
「의례적인 표현이지만,……진심이 아니라는 건 아니고요.」
뒤로 조금 더 물러서며 장석민은 대답했다. 자하르가 전통복 안에 입는 힌색 셔츠를 벗었다. 적색경보였다. 장석민은 기겁을 하며 목소리를 낯추어 말했다.
「다른 사람이 보면 어쩌려고 이러십니까. 큰일 납니다.」
「올라올 때 제가 4층 아래로 사람을 다 물린 것을 못 보셨습니까?」
자하르의 눈이 웃고 있다. 장석민은 당시 자하르가 아랍어로 지시를 내리는 것을 들었지만 내용은 알지 못했기에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니, 알아들었다 하더라도 자하르가 여기서 본성을 드러낼 것이라고 어떻게 예상했겠는가.
「아무리 그래도, 왜……, 헉.」
자하르가 손을 뻗어 장석민의 옷자락을 쥐었다.
「왜요, 왜! 왜 이러십니까, 이러시면 안 되죠. 정리 차리세요, 크, 큰일 납니다. 무, 무크라르 전하를 생각하세요.」
입에서 나오는대로 주워섬기며 장석민은 자하르의 손을 뿌리쳤다.
「당연히 전하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버님께서 아프면 당연히 아들 된 도리로서 자제해야 마땅한 겁니다.」
이중인격자의 효심에 필사적으로 호소하며 장석민은 들리지 않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하르가 무심한 어투로 다음 말을 덧붙였다.
「쟝의 말대로 당분간은 야행을 자제할 생각입니다. 문도 고쳐둬야겠군요..」
이번엔 바지까지 벗었다. 장석민이 말하는.자제와 자하르가 말하는 자제의 범위가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장석민은 침대의 헤드가 등에 닿는 순간 깨달았다.
「그건 그거고, ─ 저도 해소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
장석민은 울고 싶었다.
이 미치광이가 대체 뭐라는 거야.
「한 번 하면, 안 한다고, 두 번은 안 하신다면서요.」
마지막 희망이었다. 분명히 남자는 한 번 한 상대에게는 그럴 마음리 들지 않는다고, 본인 입맛의 까다로움에 대해 토로했던 것이다. 자하르가 눈을 가늘게 뜬다.
「그랬죠.」
「네. 그러셨죠.」
한 입 갖고 두 말하면 남자 아닌 거다. 그건 고추 떼야 한다.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을 꿀꺽 삼키며 장석민의 입만 바라보았다.
「했던 사람하고 또 하는 것만큼 질리는 일은 없겠지요.」
「네, 네, 네.」
옳소. 맞습니다. 장석민은 목뼈에 이상이 생길 정도로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낮지 않겠습니까.」
「 ─! 」
자하르가 장석민의 옷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우드득, 옷의 매듭이 어처구니없을 만큼 쉽게 뜯겨졌다. 장석민이 으악, 하고 소리를 지르며 몸부림을 쳤다. 자하르가 무릎으로 장석민의 몸을 누르고 그의 두 손을 그러쥐어 침대에 눕혔다.
「게다가, ─. 」
자하르가 혼잣말처럼 속삭였다. 겁에 질린 까만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며 부들부들 떨고 있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리자. 흠칫, 흠칫, 놀라며 어쩔 줄 몰라 한다. 장석민은 손을 대는 대로 반응했다. 그것이 자하르의 구미를 당기게 했다.
두 번쯤은, 괜찬지 않으려나.
자하르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걸렸다.
"아파, ……아파."
장석민이 흐느끼면서 중얼거리는 소리에 자하르가 눈썹을 올린다.
"아프다고!"
장석민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차피 한국말은 못 알아 들을 테니 존대해줄 필요도 없고 예의를 차릴 필요도 없었다.
"무식하게 커서, 개새, ─ ."
장석민이 윽, 하고 신음을 삼켰다. 자하르가 장석민의 허벅지를 움켜쥐고 허리를 쳐올린 것이다.
「말이라는 것운 참 재미있습니다.」
담담한 목소리와는 다르게 자하르의 허릿짓은 거칠기 짝이 없었다.
장석민의 입에서 억, 억, 하는 억눌린 비명이 터져 나왔다.
「쟝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몰라도, 그게 욕이라는 건 알겠으니.」
「아, 그게, ─윽.」
자하르가 장석민의 허리를 손으로 움켜쥐었다. 단단히 박아 올리자 아래가 빠듯하게 벌어져 간신히 남자의 양물을 삼켰다. 장석민의 입술이 벌어진 채 부들부들 떨렸다.
자하르가 숨을 고른다.
「 ─간신히, 다 들어갔군요. 」
「아, ─ 아파. 」
장석민의 눈에 눈물이 가득고여 눈동자가 반들거린다. 고인 눈물이 금세 뺨에 아롱진다.
「어째 처음 할 때보다 아래가 더 빡빡한 것 같군요.」
자하르가 슬쩍 미간을 좁히며 말한가. 움직이는 것이 힘들 만큼, 아래가 조여들었다.
「아픕, 아, ─제발, 빼주, ─. 」
장삭민이 자하르의 팔을 붙들고 사정을 했다. 자하르가 쉿, 하면서 장석민의 팔을 잡아 내린다.
「조금만 만져줘도 곧 좋아질 겁니다.」
「아니요, 아 , 진짜 죽을 ─, 너무 커, ─ .」
자하르가 웃음을 삼킨다.
「남자랑 처음 하는 거 맞습니까?」
「무슨,…….」
자하르의 눈매가 가늘어진다.
「남자를 흥분시키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는, 얘깁니다.」
「내가 언제, ─! 」
안에 들어온 살덩이가 내벽을 치대기 시작했다. 장석민의 이마에 진땀이 흘렀다. 얼굴은 희게 질리고 입술은 하도 깨물어서 상처가 생겨났다.
크기에 대해 고민해본 적은 없지만, 여자들이 대물을 좋아한다는 얘기에 잠시나마 확대술을 생각했던 자신이 얼마나 무지했는지 깨닫게 되었다. 무조건 크다고 좋은 게 아니었다.
「아파, …제발, ─ 아, 제발요.」
배 속의 장기가 무지막지하게 쑤시고 들어오는 살덩이에 밀려 제 위치를 찾지 못할 것 같았다. 성기가 한 번씩 밀고 들어올 때마다 헛구역질이 올랐왔다. 장석민은 자하르의 눈을 바라보며 간절하게 빌었다.
자하르가 이런, 하고 혀를 찼다.
「그런 눈으로 쳐다보면, ─없던 잡념도 생깁니다. 」
「아, 윽……. 윽, 아, 흣.」
자하르가 장석민의 허리를 붙들고 거칠게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아래가 빡빡해서 움직일 때마다 자하르의 살덩이도 열상을 입는 것처럼 뜨거웠지만 가만히 있는 편이 더 힘들었다.
자하르가 장석민의 살덩이를 쥐고 문지르자 그의 눈가가 어느새 붉게 달아올랐다. 손가락으로 몇 번 훑어주는 것만으로도 금세 성기에 피가 몰렸다.
「성교룰 하기에 최적의 몸입니다.」
「뭐가, ─흣. 」
「자극을 주는 대로 몸이 고스란히 반응을 하니, ─어린아이처럼 솔직한 몸에 창녀처럼 야한 구멍을 가졌군요. 」
장석민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모욕을 당했다는 생각에 눈물이 핑 돌았다.
「칭참을 한 겁니다.」
젖기 시작한 귀두의 끝을 엄지로 문지르며 자하르가 말을 이었다.
「많은 구멍을 먹어봤는데, ─제법 괜찮다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
자하르의 성기가 느릿하게 내벽을 문지르자 장석민의 목에서 흐느끼는 울음이 흘러나왔다. 제 손으로 가리고 있지만 장석민의 표정도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느끼는 중이라는 것을, 자하르는 바로 알아챘다.
자하르가 장석민의 손을 잡아 눌렀다. 장석민의 얼굴과 목덜미가 새빨갛게 달아오른다.
그 모습을 보자 자하르는 아래가 바싹 당기는 것을 느꼈다.
「확실히, ─이건 끝내주는군요.」
「뭐가, 또,……아,……흣.」
성기를 마찰시킬때마다 장석민의 얼굴에 쾌감이 스친다. 그래, 이거였다. 한 번 더 해보고 싶다는 의외로운 생각을 하게 만든 이유.
느낄 때 보이는 장석민의 표정은, 촤고였다.
「아, 아, 읏, 아아!」
부풀어 오른 살덩이가 손바닥 안에서 젖은 소리를 내며 마찰했다. 장석민의 입에서 흐느낌이 흘러나왔다. 절정으로 몰아가며 자하르는 장석민의 표정을 감상했다. 아래를 파고드는 살덩이가 무게를 더해갔다. 장석민은 아프다고 울면서도 앞으로 전해지는 자극에 어쩔 줄 몰라 하며 허리를 비틀었다. 사정을 조르는 그 몸짓에 자하르는 웃음을 삼켰다. 손끝으로 귀두 끝을 틀어막자 장석민의 눈가에 억울함이 스친다.
「……,…….」
「왜 그러시죠.」
장석민의 성기는 지금이라도 터질 것처럼 부푼 채였다. 자하르가 모르는척, 다시 물었다.
「왜 그러신가요.」
장석민은 입술을 깨물었다. 남자를 상대로 아래를 만져달라는 말을 하는 게 자존심이 상했던 터다.
자하르가 느릿하게 허릿짓을 하며 눈으로 다시 묻는다, 나쁜놈, 빌어먹을 놈.
「손 치워주시면,…… 제가.」
「네?」
「……제가 하겠습니다.」
죽어도 내 거시기 좀 문질러달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차라리 자기 스스로 문질러 남자답게 가버리겠다는 말을 하는 게 낫다.
「혼자 하시겠다고요?」
자하르가 묻자 장석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 좆을 꽂은 채로, 혼자 문질러 가겠다는 말씀을 하고 계신겁니까?」
「무, ─, ─. 」
「그것도 나쁘진 않겠군요」
그렇게 말을 해놓고도 자하르는 손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손에 힘을 주어 장석민의 성기를 세게 그러쥐었다.
「아파 ─! 뭐하는…….」
「 ─그런데 난 쟝이 내가 주는 자극에 반응하는 꼴이 보고 싶거든요. 오롯이 내 손에서만 움직이라는 겁니다.」
자하르의 손바닥이 장석민의 아래를 거칠게 탐했다. 문지르고, 흔들고, 비벼서 자극했다.고통과 쾌감 사이에서 장석민의 몸이 힘없이 흔들리며 소리를 내질렀다.
「쉿.」
자하르가 장석민을 달랬다.
「너무 아이처럼 보채지 마세요.」
「아, 하, ……으, 아아! 읏 ─. 」
장석민은 절정에 다다랐다. 장석민이 눈을 반쯤 내리감은 채, 입술을 벌리고 숨을 토해낸다. 그의 몸이 호흡을 따라 파들, 파들 떨렸다.
절경이다.
이미 전날 몇 번을 보았던 광경인데 물리지가 않는다.
자하르의 눈빛이 진해진다. 자하르의 손은 물론이고 그의 가슴팍까지 희뿌연 액체가 튀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긴장한 채 힘이 들어가 있던 장석민의 몸이 풀썩, 침대에 껴진다. 한계까지 몰아붙인 것인지 장석민의 정신이 가물가물, 스러지려 하고 있었다.
자하르의 입가에 비틀린 웃음으 걸렸다. 그가 장석민의 허리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 있는 힘껏 밀어붙였다. 눈을 껌뻑거리던 장석민이 헉, 하고 몸서리를 쳤다. 혼곤하게 몰려들었던 잠이 순식간에 쫓겨났다.
「이제부터 시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