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1/35)

 계단을 뛰어 올라온 장석민은 숨을 헐떡거리며 방문을 열었다. 시야에 바로 들어오는 ‘그것’에 놀란 장석민은 문을 닫았다.

“하아……, ……하아.”

 심호흡하고 다시 문을 열었다. 여전히 ‘그것’은 거기 놓여 있었다. 장석민은 눈을 부릅뜬 채로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직접 가서 만져보고 냄새도 맡아보고 두드려 본 후, 장석민은 ‘그것’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쳤어? 누가 이렇게 큰 황금상을 선물로 줘?!”

 에드문트 회장이 보낸 선물은 날개를 양쪽으로 활짝 편 새 모양의 황금상이었다. 어림짐작해도 2미터는 훌쩍 넘는 크기다.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지 않는다. 장석민은 황금상 주변을 빙글빙글 돌다가 헛웃음을 삼켰다. 눈으로 봐도 믿기지가 않는다.

“하하하, 하하……, 하하하…….”

 동상에 얼굴을 기댄 채, 장석민은 실성한 사람처럼 웃음을 흘렸다. 그러다 문득 힘을 주어 황금상을 들어본다.

“……으, ──.”

 황금상 아래가 간신히 들리는 수준이었다. 소맷자락을 걷고 이번에는 본격적으로 등에 업어봤다. 때마침 문이 열리고 자하르가 안으로 들어왔다. 깜짝 놀란 장석민은 황금상을 등에 업은 채 앞으로 고꾸라졌다. 자하르가 달려와 잡아주지 않았다면 장석민은 세계최초로 황금상에 깔려 죽은 더럽게 운 없는 놈이 될 뻔했다.

「괜찮으십니까?」

 자하르의 물음에 장석민이 입술 끝만 간신히 올려서 웃으며 네, 하고 대답했다. 자하르가 한 손으로 황금상을 바로 세워주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말라쿤의 상입니다.」

「마음에 드는 게 문제가 아니라, ……이걸 대체 어떻게…….」

「10미터 규모로 요구하셨다는 말씀을 전해드렸습니다. 조금 고민하시다가 흔쾌히 수락하셨습니다.」

 장석민이 내가 언제, 하는 표정으로 자하르를 바라보았다.

「방에 장식하기에는 이 정도 크기가 적당하다 생각되신다며 보내셨습니다.」

「하……, 허허…….」

 있는 집 자제로 살아온 이십여 년의 인생이 허무하게 느껴진다. 돈지랄의 규모가 다른 것이다. 게다가 이들은 이게 돈지랄이라는 인식 자체가 없는 게 문제였다.

「허──, 허──.」

 장석민은 새의 눈에 박힌 반짝이는 돌을 발견하고 손톱으로 닥닥, 긁어 보았다. 연속으로 허,를 반복하며 그는 황금상을 이리저리 만져보았다. 발톱에도 하나하나 보석이 박혀있는 것까지 발견한 후에 고개를 들었다.

「장식이죠?」

「네?」

「상징인 거죠? 사사로운 증여가 아니라.」

 그제야 장석민의 말을 이해한 자하르가 웃음을 삼켰다.

「사사로운 증여입니다.」

「……. …….」

 기뻐해야 할지 두려워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자하르가 굳게 입술을 다물고 있는 장석민의 옆얼굴을 살피며 마음에 안 드십니까, 하고 묻는다.

「……좀 무서워지기 시작해서요.」

「뭐가요?」

「그날 있었던 일은 우연이었습니다. 거기서 말이 시작되었고, 왕자님 처소에까지 묵게 되고 일을 돕고, ……이런 것까지 받으니. 대국민 사기를 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황금이 싫은 게 아니었다. 후에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할까 두려운 것이다.

「지금까지 쟝이 말라쿤에 관해 꾸며낸 이야기가 있습니까?」

「……아니요.」

「거짓된 이야기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었나요?」

「아니요, 전 그냥…….」

「사람들은 믿고 싶은 대로 믿습니다. 때로는 그것이 진실보다 강한 믿음이 됩니다.」

 그 말을 하는 자하르의 입가에 비스듬한 미소가 걸린다. 그 미소와 마주한 장석민은 가슴에 묵직한 무엇인가가 걸린 기분이 들었다. 손바닥으로 가슴께를 문지르며 장석민은 아침에 먹은 것이 소화가 덜 되었나, 고개를 갸웃거렸다.

「쟝은 그냥 있으면 됩니다. 지금처럼.」

 자하르가 장석민의 어깨를 도닥인다. 툭툭, 다정하게. 그런데도 자하르의 손가락이 닿은 어깨가 뻐근하니 아픈 느낌이었다.

 장석민은 어깨를 슬슬 돌리며 자하르에게 물었다.

「오늘은 일이 없으신가요?」

 그러고 보니 수행원이 장석민에게 옷을 갈아입으라거나 휠체어에 타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 시간에 자하르가 궁 안에 있는 것은 드문 경우였다.

「오늘은 아쉬르입니다.」

「아쉬, ……?」

 그러고 보니 비르마가 수업이 끝날 때 무슨 날이라고 말한 것도 같다.

「이믈라쿤이 끝나기 일주일 전의 날은 정오를 기점으로 누구도 일하지 않고 먹고 즐기고 마실 수 있습니다.」

 이믈라쿤이 끝나기 일주일 전. 유독 그 말이 장석민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어찌어찌 열흘가량만 잘 참으면 이 모든 고생은 끝이다.

「아쉬르는 축제 같은 건가요?」

「축제라기보다는 안식일과 비슷합니다. 나라의 후계자를 정하기 전에 모두 쉬면서 그간의 노고를 치하한다는 의미입니다.」

「후계자는 그럼 이믈라쿤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정해지는 건가요?」

「나바툰이라는 의식이 진행되고 신의 답을 기다리면 됩니다.」

「나바……?」

 생소한 의식들의 이름이 이어지자 장석민은 정신이 없었다.

「나바툰. 신이 이 나라의 후계자를 정해주는 의식입니다.」

「그건 무크라르 국왕께서 정하시는 거 아닌가요?」

 분명히 모든 것은 국왕의 뜻에 따르기 때문에 자하르라고 할지라도 끝까지 안심할 수 없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났다.

「무크라르 전하께서 백색의 종이를 히룬이라는 상자에 넣습니다. 상자는 봉해진 채 신의 제단에 바쳐집니다. 사흘 뒤에 상자를 열고 신의 계시를 확인하는 겁니다.」

「……그거 어차피 이름 다 적고 넣는 거 아닙니까?」

「무크라르 전하께서 무엇을 원하시든 곧 그것이 신의 뜻입니다.」

 말 그대로 눈 가리고 아옹이었다. 참 특이한 나라라고 생각하며 장석민은 말머리를 돌렸다.

「오늘은 그럼 다 쉬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말을 듣고 보니 자하르도 평소보다 수수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한가로운 자하르의 모습이 몹시 낯설게 느껴졌다. 평소보다 좀 인상이 달라진 것 같기도 하고……. ……왜 편해 보이는 게 아니라 더 날카로워 보이는 거지?

「왜 그러시죠?」

 자하르도 장석민의 시선을 느꼈는지 그렇게 물었다.

「아닙니다. 그럼 자하르 왕자님도 오늘은 쉬고 내일부터 다시 일하시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장석민은 쾌재를 불렀다. 자꾸 자하르의 뒤를 따라다녀 이름이 거론되는 일은 사양하고 싶었다. 이제는 한국까지 가는 날이 일주일도 남지 않은 것이다. 죽은 듯이 지내다가 사라지는 게, 지상 최대의 과제였다. 콧노래를 부르던 장석민은 문득 황금상을 돌아보고는 음, 하고 입을 다물었다.

「이거, 말입니다.」

 손가락을 톡톡 두드렸다. 안까지 가득 찼는지 묵직한 느낌이 손을 타고 전해진다.

「제가 돌아갈 때, ……사사로운 증여라고 하셨으니, …….」

 장석민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들은 자하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에드문트 회장이 쟝에게 준 선물입니다. 마음대로 하시면 됩니다.」

 딱히 물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부족한 게 없었으니까. 차도 그럴싸한 모델로 갖고 있었고 결혼한다면 제 몫으로 돌아올 서초동의 아파트도 있다. 그래도 이건 가져간다면 두고두고 자랑할 거리는 되는 것이다.

 근 한 달간 행방불명이 되었던 아들이 황금으로 만든 새 상을 가져간다면 아버지는 뭐라고 하시려나. 분노와 당혹스러움과 기쁨이 혼재된 아버지의 표정을 상상하니 장석민은 슬쩍 웃음이 났다.

「뭐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습니까?」

 자하르가 물었다.

「저걸 가지고 한국으로 돌아가면 재미있겠다 싶어서요.」

 자하르가 약간 의외라는 듯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재미요?」

「네. 아버지가 놀라실 것 같아서요. 화는 나는데 화를 못 내고, 아니 내시다가 웃으실 거 같기도 하고.」

「왜 화를 내죠?」

 장석민은 아차 했다. 자하르는 자신이 이곳에 자처해서 온 것이라고 알고 있다.

「아, 아니. 그러니까, ……남자가 큰 뜻을 품고 갔으면 이루고 와야 하는데 한 달도 안 돼서 쫓겨 왔다고 하시면 실망이 크실까 봐요.」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으면서도 장석민은 진땀을 흘렸다. 남자에게 장가를 가겠다고 떠난 아들과 그런 아들이 실패를 하고 돌아오자 화를 내는 아버지라니. ……믿을 리가 없잖아.

「그렇긴 하겠군요.」

 자하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 러마디들 중에는 그렇게 해서 집에서 쫓겨난 사람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

「혹시 모르니 가실 때 위로금을 드리겠습니다.」

 장석민이 두 손을 내저었다.

「됐습니다. 위로금이라니, 당치 않습니다.」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자하르가 자신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임을 알면서도 장석민은 은근히 자존심이 상했다. 어디 사람을 거지 취급을 하고 난리야. 이거 왜 이래, 나도 은수저 물고 태어난 몸이라고.

「저는 위로금 같은 건 필요 없습니다.」

 자하르가 슬쩍 웃었다.

 반듯한 미소인데도 장석민은 순간 어깨를 움칫, 떨었다.

「모쪼록 쟝의 마음이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

「위로할 일이 생긴다면 힘이 닿는 데까지 위로해드리겠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다른 후궁들이었으면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조아렸겠지만 장석민은 떨떠름하게 웃기만 했다. 그런 장석민을 자하르가 말없이 바라보았다. 웃음기를 머금고 있는 회색 눈동자가 얇은 막이 싸 있는 것처럼 번들거린다. 장석민은 다시 어깨를 움츠렸다. 마치 물속에서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는 커다란 뱀과 마주한 기분이 들었다.

 ……왜 이렇게 무섭지.

「왕자님은 그러면 오늘은 뭘 하고 보내실 건가요?」

 그의 시선을 떨쳐내기 위해 장석민은 일부러 창밖을 바라보며 말머리를 돌렸다.

「밀린 책을 읽고 저녁때쯤엔 한가로이 산책을 하겠지요.」

 어울리는 것 같으면서도 쉽게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는 모습이다.

「잠들기 전에 술을 한잔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고요.」

「술이요?」

 종교적 이유로 포도주를 제외한 술은 이 나라에서 아예 금지되었다고 들은 기억을 떠올리며 물었다.

「오늘은 술을 마셔도 괜찮습니다. 모두가 쉬는 날이기에 신도 오늘은 눈을 감아주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장석민은 시원한 맥주가 떠올랐다. 목이 칼칼한 것이 거품이 부드럽게 인 맥주를 한 잔만 마시면 좋으련만.

「술 생각이 나십니까?」

 장석민이 헤헤, 하고 어색한 웃음소리로 대답을 대신했다.

「하캄에게 말하면 구할 수 있는 것은 가져다줄 겁니다.」

 장석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캄은 여러모로 고마운 사람이구나. 가기 전에 저 황금상에서 발톱 하나라도 떼어서 건네주든가 해야겠다. 그러면 오늘은 본격적으로 맥주나 마시면서 노닥노닥…….

「적당히 마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자하르가 장석민의 꿈을 가로막으며 말을 덧붙였다.

「오늘은 신께서도 안식을 하는 날입니다. 가끔은 그래서 그걸 믿고 과감한 일을 벌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과감한 일이라는 말에 장석민의 얼굴이 희게 질린다. 혹시 하일이 제멋대로 이곳에 찾아와 칼을 들이밀고 자신의 목을 쳐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터다.

「정확히 어떤 생각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지만 쟝이 걱정하는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그럼…….」

「남녀 사이의 문제입니다.」

「남녀요?」

「오늘은 마음에 두고 있는 처녀가 있으면 몰래 다가가 눈을 가리고 입을 맞출 수 있습니다. 이 연이 결혼까지 이어지기도 합니다.」

「……뭐.」

 나름대로 로맨틱한 풍습이었다.

「이게 가끔은 짓궃은 장난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보통은 후궁들에게는 절대로 손을 대지 못하지만, 이런저런 예외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자하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챈 장석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걱정 마세요. 술에 취해서 다른 사람한테 실수하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자하르가 무슨 말이냐는 얼굴로 대답했다.

「제가 걱정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쟝에게 실수를 하는 것입니다.」

「네?」

 얼핏 이해가 되지 않아 장석민은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니 오늘은 이곳에서 나가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자하르가 다정한 조언을 해준 후 방을 나갔다. 혼자 남은 장석민은 잠시 뒤에 이를 사리물었다. 자하르가 자신을 같은 남자가 아닌 후궁으로 취급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숫총각 주제에 감히…….”

 이를 부드득 갈며 문을 노려보았지만 그의 말을 들어줄 이는 황금으로 만든 말라쿤뿐이었다.

 맥주 캔 고리를 뜯으며 장석민은 테이블 위에 세워놓은 빈 캔을 세어보았다.

“어디 보자. 둘, 셋, ……여섯. ……아홉.”

 혼자서 맥주를 아홉 캔이나 비우고 열 번째 캔을 뜯은 자신을 발견하고 장석민은 한숨을 내쉬었다. 처량해도 이리 처량할 수가 없구나.

 자하르의 말대로 하캄에게 맥주를 부탁했다. 하캄은 맥주를 박스째들고 나타났다. 이 많은 것을 누가 다 마시냐고 묻는 장석민에게 하캄은 특유의 서글서글한 얼굴로 대답했다. 이제는 다시 부르시면 안 옵니다. 그제야 장석민은 하캄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챘다. 그 역시 오늘은 일을 하고 싶지 않은 게 당연했다. 하캄은 인사를 하고 바로 사라졌다. 맥주 한 박스와 남겨진 장석민은 혼자 방에 앉아 맥주를 홀짝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오랜만에 목구멍을 자극하는 맥주 탄산의 느낌에 심취해 이런 것이 극락이구나 싶었다. 그러나 그것이 두 캔, 세 캔, 다섯 캔쯤되니 장석민은 외로움을 느꼈다. 이 맛있는 것을 마시면서 누구 하나 말벗이 되어줄 이가 없다는 사실이 참 서글펐다. 보통은 아홉 캔쯤 마시면 취할 만도 한데 혼자 홀짝거리고 있으니 취기도 오르지 않는다.

 장석민은 맥주 캔을 들고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삼삼오오 사람들이 모여서 즐겁게 놀고 있는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

“안식일이 아니고 축제 맞잖아.”

 수업이 끝날 때 비르마가 무리하지 말고 쉬라고 했던 말이 이해 갔다.

“……재미있겠다.”

 장석민은 유리창에 코를 댄 채 불퉁하게 중얼거렸다. 나가고 싶지만 나갈 수가 없다. 자하르가 한 말 때문이 아니었다. 오늘은 신도 눈을 감고 쉬는 날이라 했다. 자하르는 그것이 큰 문제로 불거지지 않을 거라 말했지만 장석민에게는 달랐다.

“괜히 하일이라도 마주치면 아주 좆 되는 거지.”

 하일을 보면 스머프들을 잡아먹겠다고 덤비는 가가멜이 떠올랐다. 자신이 스머프라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그만큼 하일이 표독스러운 이미지로 느껴진다. 사람이란 게 얼마나 간사한가. 온종일 쉬는 데다 맥주까지 얻어 마시고 있는데 이렇게 울적하다니.

 맥주를 홀짝홀짝 마시던 장석민은 금세 가벼워진 캔을 구겨서 테이블 위에 던져버렸다. 창밖의 풍경이 너무 부러워서 도저히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장석민은 침대로 몸을 던졌다. 최고급 면이 그의 몸을 감쌌다. 처소를 옮기면서 한 가지 더 좋아진 점은 침대와 침구였다. 이전의 것과 비교도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이런 날 침대에서 혼자 뒹굴고 있는 자신이 믿기지 않는다. 노는 장소에는 빠짐없이 나가던 파티광 장석민이었거늘. 나도 나가서 놀고 싶다. 그냥 구경만이라도 하고 싶다.

“나도 놀고 싶다고.”

 보드라운 침구에서 몸을 비비적거리던 장석민은 시트로 고개를 처넣었다 문득 머리를 스친 생각에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이 가늘게 웃었다.

“요는 안 들키면 되는 거잖아.”

 장석민은 이전에 사이프가 건넸던 베일을 칭칭 두르고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눈만 간신히 내놓은 모양의 베일은 그가 누구인지 구분할 수 없게 만들었다. 게다가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한 터라 누구도 그가 동양에서 온 청년임을 알아채지 못했다.

 장석민은 콧노래를 불렀다. 부드러운 저녁 공기가 그를 감쌌다. 궁의 분위기가 평소와 다르게 느슨하게 흐르고 있었다. 흥청망청 떠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다들 들뜬 채였다. 장석민은 맥주를 한 손에 들고 걸으며 주변을 살폈다. 본궁에서 이어지는 정원에서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며 포도주를 나눠 마시고 있었다.

 아랍어로 떠들고 있었기에 애초에 대화에 끼어드는 것은 무리였다. 장석민은 슬쩍 분위기만 살피다가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모여 떠들고 있었다.

“좋구나.”

 장석민은 흐뭇하게 웃으며 걸었다. 이곳에 와서 이렇게 유유자적 저녁 산책을 즐긴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만날 머리 터지게 고민을 한 자신에게도 쉴 수 있는 시간을 주고 싶었다.

 정원에 심어 놓은 장미의 향이 저녁 공기에 실렸다. 장석민은 장미가 이토록 크고 탐스러운 꽃이라는 사실을 이곳에 와서 알게 되었다.

“사막에서는 뭐든 크게 자라나.”

 자하르도 그랬지만 나머지 왕자들도 죄다 키가 컸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장석민은 불퉁하게 중얼거렸다. 자신에게 작고 가느다랗다고 말하던 자하르의 말이 떠오른 것이다.

 팔다리를 내려다보던 장석민은 쳇, 혀를 차고 팔을 주물주물 만져본다.

“요즘 운동을 안 해서 빠지긴 했어도 이거 다 근육인데.”

 가늘다는 말이 어떻게 자신을 수식할 수 있나, 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하르에게 자신이 그렇게 보인다는 사실도 이해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뭐? 조심하라고?”

 장석민은 베일 안으로 맥주 캔을 집어넣어 마시며 투덜거렸다. 아무리 후궁으로 여기에 들어왔다고는 해도 자신은 엄연한 남자다. 무엇보다 숫총각 따위랑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경험이 많은. 그런 자신을 자하르 놈이 여자처럼 대했다는 사실이 못 견디게 자존심 상했다.

 그러고 보면 요 며칠 대동하고 다닐 때도 차 문을 열어주거나 손을 잡아주기도 했다. 마치 여자취급을 하는 것처럼.

“……설마아.”

 설마, 설마, 설마아. 그 숫총각 놈이 자신이 그 인어공주인 줄 알고 좋아하는 거면 어쩌지. 자신을 바라보던 그 끈적한 시선이 떠오르자 장석민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래서 뭘 모르는 애들하고는 안 되는데…….”

 여자와 관계를 맺을 때도 장석민은 연애를 처음 해보는 타입은 일부러 피했다. 적당히 서로 즐기고 헤어질 줄 아는 타입이 뒤탈 없이 편했다. 첫사랑이니 뭐니 하는 순애보 섞인 감정은 취향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은인을 꼭 찾겠다고 말하던 자하르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장석민은 에구, 하고 자조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좀 멋있긴 하지.”

 손으로 턱을 쓸어내렸다. 어디 하나 빠지는 곳이 없는 남자가 그날 목숨까지 구해줬으니 자하르가 연심을 품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장석민은 혀를 내찼다. 자신은 어차피 떠날 몸인데 연심을 갖게 된 숫총각 왕자가 안타깝게 느껴진 터다. 게다가 탑에서의 일도 의심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빨리 그 마음을 떨어트려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비죽비죽 웃음이 새어나왔다. 자하르 왕자가 절대로 너에게 마음을 둘 리 없다고 입을 모아 말하던 사람들이 떠오른 것이다.

“1퍼센트라고 했지?”

 자신을 벌레처럼 깔보며 말하던 사이프가 이 사실을 알면 어떤 얼굴을 하려나. 장석민은 들고 있던 맥주를 호르륵 마셔버렸다. 빈 캔을 흔들며 주변을 둘러보니 여기저기에서 테이블을 내다 놓고 모여 술을 마시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장석민은 말없이 다가가 사람들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를 들었다. 한 단어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특유의 들뜬 공기에 절로 흥이 났다. 장석민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테이블 주변을 서성거리다가 과일을 섞어 만든 술을 한잔 얻어 마셨다. 과일로 담근 전통주가 입안에 착 달라붙었다.

 거기서 한참 흥얼거리다 다른 건물 앞으로 걸어가니 거기서도 한차례 술판이 벌어진 채였다. 누구인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술을 권하고 술잔을 돌렸다. 장석민도 옆에서 기웃거리다 한잔 얻어 마셨다.

 아까와는 다른 맛이었지만 이 역시 맛있었다. 혼자 방구석에 미지근한 맥주나 홀짝거리지 말고 진작에 나올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노랫소리도 흘러나왔다. 모여서 춤을 추는 사람도 보였다. 오늘만큼은 먹고 마시고 쉬어도 된다 하니 다들 걱정 없어 뵈는 얼굴들이었다. 하긴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어디든 땅을 파면 석유나 다이아몬드가 나오는 나라인데. 이국적인 음악을 들으며 장석민은 열기 어린 공기를 폐부가득 들이마셨다. 이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끝이라는 생각이 들자,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장석민은 테이블 끝에 앉아 혼자 술을 훌쩍거리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적당히 취해 기분도 좋고 바람도 부드러운 밤이었다.

“아, ……좀 취했나.”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서늘한 기운이 얼굴을 스치자 정신이 또렷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도 오래가지 않아 다시 알코올 기운이 이성을 마비시켰다. 본인이 일자가 아닌 갈지자로 걷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로 정원을 거닐었다. 눈이 뻑뻑했다. 오랜만에 마신 술이라 평소보다 취기가 빨리 올랐다. 장석민은 머리를 흔들면서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물을 좀 마셔야겠다 싶어 식당 근처로 걸어갔다. 다행히 낯익은 면면들이 보였다. 식사 시중을 들던 시종들이었다. 그들에게 다가가 장석민은 물을 마시는 시늉을 해 보였다. 시종 중 하나가 손바닥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 장석민은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오늘은 아무도 일하지 않고 노는 날이라 했거늘.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황금상에서 깃털이라도 하나 떼어주자고 마음을 먹었을 무렵 시종이 병에 물을 가득 담아 왔다. 장석민이 고맙다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병을 받아들었다. 시종이 얼른 마시라고 손짓을 했다.

“친절한 중동 사람 같으니.”

 가슴이 콱 막혀 장석민은 단번에 물을 들이켰다. 몇 모금을 꿀꺽꿀꺽 들이켜던 장석민의 표정이 순식간에 구겨졌다.

“쿨럭, 켁, 쿨럭──.”

 입에서 불이 난다는 표현을 이때가 아니면 쓸 수 없었다. 액체가 넘어간 목구멍까지 타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장석민이 쿨럭거리며 기침을 하자 시종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얼른 더 마시라고 손짓을 해 보였다.

“누가, 술을──, 컥.”

 이전에 호기심에 친구들과 나누어 마셨던 도수 75의 바카디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들어간 순간 숨이 막혔다. 장석민은 병을 들고 한참을 켈룩거렸다. 숨을 들이켜자 알코올 기운이 한층 빠르게 돌았다.

“물, 물 달라니까.”

 장석민은 다시 물을 마시는 시늉을 했다. 옆에 서 있던 남자가 안타깝다는 얼굴을 하고 다른 병을 건넸다. 장석민은 이번엔 냄새를 확인한 후 받아 마셨다. 이번에는 그나마 한 모금만 마신 후에 뱉어낼 수 있었다. 장석민이 눈물을 찔끔 흘리며 계속 기침을 하자 남자 중 하나가 낄낄거리며 그의 손에서 병을 빼앗아 들었다. 그러고는 그걸 단번에 마셔 보인다. 마치 이것도 못 마시냐는 조소가 그의 눈빛에서 드러난다.

 장석민은 울컥, 화가 치밀었다.

“난 지금, ……됐다. 됐어.”

 어차피 물을 얻어 마시지 못할 거 오래 머물러 있어봐야 뭐하냐는 생각이었다. 장석민은 비틀거리며 그곳을 나왔다. 정원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술에 취한 와중에도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아야 한다는 일념에서였다. 일전에 보아두었던 누각이 떠올랐다. 거기라면 한가해서 술이 깰 때까지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어지러워.”

 장석민은 머리를 흔들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술까지 들이켠 터라 속도 메슥거리기 시작했다. 대리석 누각이 보이자 긴장이 풀려 다리가 휘청거렸다. 누각의 계단을 오를 때는 손까지 사용해 마치 네 발로 기듯 걸어갔다.

“시바…….”

 간신히 누각의 꼭대기에 오른 장석민은 기둥에 몸을 기댄 채 쓰러졌다. 얻어 마신 술이 얼마나 독한지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주변에 술 냄새가 진동할 정도였다.

“흐흐, ……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술에 취하면 나오는 버릇 중 하나였다. 취하면 바보 같은 웃음소리를 낸다는 것을 전에 만났던 여자가 동영상으로 녹화해서 보여준 이후로 장석민은 엔간해선 취할 만큼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래. 그날도 대체 왜 그렇게 술을 마셨던 것인지. 정신만 똑바로 박혀있었으면 살레하인가 뭔가 하는 여자랑 어떤 일도 없었다고 확신할 수 있을 텐데. 지나간 일을 후회해봤자 소용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장석민은 자꾸만 그날의 일을 되새기며 혼잣말로 욕설을 중얼거렸다.

“뭐든 적당히 해야지, 시발……, 적당히…….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구나.”

 우울하게 중얼거리는 끝말에 그의 진심이 실려 있었다. 자하르가 조심하라고 일렀던 남녀의 애정문제 따위는 전혀, 요만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인종 차별이야. 나 정도면 충분히 괜찮은데…….”

 사실 술을 마시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장석민은 누구 한 명쯤은 자신을 알아봐 주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품고 있었다. 그러나 콧노래를 부르고 테이블을 기웃거려도 누구 하나 그에게 관심 가져주는 사람은 없었다. 누군가 그간 자신에게 연심을 갖고 있었다면 알아봐 줄 법도 하건만. 장석민은 쓰고 있던 베일을 벗어 버렸다. 땀에 젖은 이마가 바람에 식었지만 나른한 술기운은 여전했다.

 이 머나먼 타국에 와서 홀리고 돌아가는 것은 숫총각 왕자 하나뿐이란 말인가. 장석민, 이름 석 자가 운다.

“……울적하네.”

 장석민은 눈을 깜빡거리며 흰색 대리석 지붕 사이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눈을 감았다가 뜰 때마다 가물거리는 별빛 사이로 잠이 스며들었다. 고개를 숙였다가 들었다를 반복하는데 두런두런 사람의 말소리가 들여왔다. 꾸벅꾸벅 조는 와중에도 장석민은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임을 알아챘다. 어디서 들었더라. 분명히 어디선가 들었는데…….

 고민을 하는 중에도 수마는 조금씩 그의 이성을 몰아냈다. 술기운까지 더해져 도저히 정신을 붙들고 있을 수가 없었다. 장석민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쿵, 하는 소리가 아래까지 울렸다. 동시에 말소리가 그쳤다.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느새 누각 위로 올라온 사람이 장석민의 앞에 섰다. 눈을 뜨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장석민은 도저히 잠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누군가 장석민의 고개를 들게 했다. 장석민의 얼굴을 확인한 사람의 놀라는 기색이 전해졌다. 두런거리는 목소리가 들리더니 자신을 조심스럽게 흔들어 깨우는 기척이 느껴졌다. 잠에서 깨어 부드러운 손을 가진 여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눈꺼풀이 천근만근이었다. 장석민이 으음, 하고 눈가를 찌푸렸다. 뒤에 부드러운 천이 얼굴을 가리는 것이 느껴졌다. 눈을 가린 뒤에 입을 맞춘다는 이야기를 떠올린 장석민은 히죽 웃음이 새어나왔다.

 왔구나. 드디어 올 게 왔어. 그러면 그렇지. 이 넓디넓은 궁에서 나하나 마음에 두지 않은 여자가 없다는 것이 어디 말이나 된단 말인가.

 자아, 그래요. 오늘은 나도 눈 감아 줄 테니까 어서, ……. ……졸려.

 어떻게든 정신을 붙들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의식은 저 너머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제 하일 형님이 자하르 녀석에게 준 동양 놈인가?』 

『네. 확실합니다.』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오는군.』 

『이게 모두 다 훌륭하고 위대하신 카힌 왕자님의 은공입니다. 모두가 신의 보살핌입니다.』 

 옆에 서 있던 남자가 웃으며 손바닥을 비볐다. 무크라르 왕의 네 번째 아들, 빈 무크라르 카힌이 이를 드러낸 채 웃었다.

『참 재미있단 말이야. 절세 미녀조차 거들떠보지 않던 녀석이 이걸 끼고 다닌다니..』

 카힌이 바닥에 널브러져 새근새근 자는 장석민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말라쿤의 환생이니 뭐니 하는 말이 떠돌고 있지만 사실 그걸 진지하게 믿는 사람은 없었다. 자하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놈이 동양인 청년을 데리고 다니는 것은 모두 상징의 문제였다. 이믈라쿤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쓸 수 있는 모든 수단은 이용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점잖은 척, 욕심 없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자하르가 얼마나 셈이 정확한 놈인지 카힌은 잘 알고 있었다.

『일어나라.』

 카힌이 발로 장석민의 어깨를 밟고 흔들었다. 그러나 장석민은 깰 생각도 없이 으응, 하고 잠투정 섞인 소리를 낼 뿐이었다.

『왕자님께서 말씀하시는데 이런 건방진 놈이! 제가 당장 이놈을 깨우겠습니다.』

『됐다.』

 카힌이 손을 들어 남자를 제지했다. 그는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

『이 근처에서 만나자고 했었단 말이지. 하일 형님이.』

 할 말이 있으니 보자고 하더니 갑자기 약속을 취소한 하일을 떠올리며 카힌이 피식 웃음을 삼켰다. 넝쿨째 들어온 호박을 누가 굴려준 것인지 바로 눈치챈 것이다.

『형님도 참. 이렇게 노골적이어서야.』

 하일은 늘 이런 식이었다. 살레하와 자하르의 결혼을 추진했을 때도 그 목적이 너무나 직접적이라 사람들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누구도 그를 무시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일의 일을 추진하는 솜씨였다. 무크라르 왕을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몰라도 결국 그의 입에서 살레하와 자하르의 결혼을 허락하는 말이 나온 것이다.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오던 살레하 공주가 도중에 증발하지만 않았더라도 자하르는 하젤의 신분을 잃었을 게 분명하다. 살레하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은 하일이 일어나 분해 날뛰었는지 궁 안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자하르에게 준 생일 선물이었다. 선물을 준 목적은 누가 봐도 확실했다. 카힌은 서늘한 눈으로 바닥에 잠들어 있는 동양인 청년을 내려다보았다. 자하르의 성스러운 신분을 더럽히라고 보낸 동양인 청년이 영 다른 의미로 이름을 날리자 하일은 심통이 난 것이 틀림없다. 어떻게든 자하르의 이름에 흠집을 내고 싶어 하는 하일이 동생 카힌에게 청년이 있는 장소를 알려준 이유는 뻔했다.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천으로 둘러라.』

 카힌이 명령하자 남자가 재빨리 장석민의 얼굴을 베일로 둘둘 감았다. 카힌이 일으켜 세우라고 고갯짓을 했다. 남자가 장석민을 어깨에 멘 채 일어섰다.

『일단은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자.』

 하일이 동생 카힌에게 말라쿤의 현신이라 불리는 청년을 건네준 이유는 하나였다. 상징을 꺽어버려 더럽히라는 것이다.

 카힌이 남색을 즐기는 것을 궁내에서 모르는 이가 없다. 부인이 여덟명이었지만 그는 남자 후궁을 더 즐겨 찾았다. 딱히 동양인 청년을 눈여겨 보았던 것은 아니지만 자하르가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던 놈을 욕보인다고 생각하자 썩 나쁘지 않았다.

『어디로 갈까요. 왕자님.』

『저 안쪽에 이전에 서고로 사용되던 창고가 있다.』

 카힌의 말을 알아들은 남자가 앞장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적당한 곳에서 해치운 다음 옷을 벗겨서 사람이 다니는 길에 내던지면 그만이다.

 늘 점잖은 얼굴을 하는 자하르가 어떤 표정을 지을까.

『하하하하. 재미있겠군.』

 카힌은 머리가 나쁘지 않았다. 지금쯤 무크라르 왕이 종이에 적을 이름이 누구인지 정도는 알고 있다. 고민하는 이름 사이에 자신이 끼어있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도.

 이 일이 발각된다 하더라도 하일은 한걸음 떨어진 곳에서 관망할 게 분명하다. 그가 동생에게 준 선물을 망가트린 파렴치한 형 역할을 할리도 만무하다. 뻔하고 노골적인 수작이었다. 그렇지만 카힌은 형이 던진 미끼를 사양하지 않았다. 왕위가 누구에게 돌아가든 그 꼴 보기 싫은 자하르 놈을 한 방 먹인다는 사실이 카힌에겐 큰 의미였다.

 다른 왕자들에게 각별한 정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카힌은 특히나 자하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이는 한참 어린놈이 세상사 모든 것을 안다는 얼굴을 하고 성자니 뭐니, 하는 칭송을 받는 꼴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기에 둬라.』

 서고로 사용되던 창고에 동양인 청년을 눕히고 남자가 카힌의 명령을 기다렸다.

『밖에서 기다려라.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카힌의 의도를 알아챈 남자가 알겠다는 듯이 웃음을 띠고 사라졌다. 카힌은 동양인 청년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베일을 벗겨 냈다. 땀에 젖은 얼굴이 드러났다. 취향은 아니었지만 썩 나쁜 얼굴은 아니었다. 선이 단정하고 피부도 고와 앳되어 보인다.

『이봐.』

 카힌이 어깨를 붙들고 흔들었다. 깨워서 강제로 범하는 쪽이 낫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잠들어 있던 청년이 으응, 하고 잠투정을 했다. 몇 번을 흔들어 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일어날 기미가 안 보이자 카힌은 포기하고 상대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반항을 할 거라 생각했던 상대가 의외로 순순히 몸을 뒤척여 옷을 벗는 것을 도왔다.

『이것 봐라.』

 왕자에게 바쳐지는 러마디는 순결한 몸이어야 했다. 경험이 있는 상대는 애초에 걸러지는 것이다. 카힌은 무의식중에 적극적으로 옷을 벗고 있는 장석민은 재미있다는 듯이 내려다보았다.

 속옷으로 손을 집어넣어 몸을 더듬어 보았다. 탄탄하고 매끈한 살갗의 감촉이 손안에 감겼다. 카힌의 입가에 웃음이 어렸다. 예상보다 좋은 시간을 보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거, 맛이 나쁘지 않겠는걸.』

 카힌이 입맛을 다시며 장석민의 가슴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축 늘어져 있던 몸을 일순 힘이 들어가며 아, 하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웃고 있던 카힌의 표정이 변한 것은 그 순간이었다.

“응……, ……으응.”

 평범해 보이던 동양인 청년의 얼굴이 일순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눈가를 살짝 찌푸린 채 입술을 벌리고 있는 모습이, 카힌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입안이 바싹 마르는 느낌에 그는 침을 꼴깍 삼켰다. 더듬어가는 손의 움직임에 힘을 주었다. 청년의 입술에서 흐트러진 숨소리가 새어나왔다. 청년의 선정적이고 솔직한 반응에 카힌은 아랫도리가 바싹 당겨옴을 느꼈다. 입술로 가슴을 물었다가 놓자 동양인 청년이 허리를 비틀며 미소를 흘렸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야릇한 얼굴이었다. 카힌은 허겁지겁 바지를 내렸다. 놈의 다리를 벌리고 안으로 들어갈 생각에 바지 앞섶이 젖을 만큼 흥분한 상태였다. 한 손으로 커다랗게 부푼 성기를 쥐고 몸을 숙였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카힌은 등 뒤로 다가오는 발소리를 듣지 못했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을 때, 그는 이미 억 소리를 내며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커다란 손이 카힌의 몸을 잡아 옆으로 내던졌다. 그 아래에 깔려 있던 장석민의 몸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반쯤 벗겨진 옷 사이로 쭉 뻗은 팔다리가 보였다.

『──.』

 내려다보는 눈동자에 서늘한 빛이 스민다.

『아직은, 때가 타면 안 되지.』

 나긋한 목소리가 속삭이듯 말했다. 웃음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커다란 손이 그대로 장석민의 몸을 들어 올렸다.

 몸의 축이 흔들렸다. 흔들, 흔들, 흔들, 잠이 쏟아졌다. 단단한 것에 고개를 대고 장석민은 히죽 웃었다. 머리 위에서 웃음을 삼키는 소리가 들린 듯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푹신한 것이 등에 닿았다. 아아, 방으로 돌아왔구나. 안도하는 마음에 다시 삐죽, 웃음이 새어나왔다. 자신을 내려놓던 손이 뺨을 살짝 내리친다.

“……왜애……. 5분만…….”

 장석민은 투덜거리면서 시트에 고개를 파묻었다. 커다란 손이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벗기든지 말든지 몸에 힘을 빼고 추욱 늘어졌다. 옷가지가 다 벗겨지자 장석민은 한결 가벼운 마음에 으, 하고 팔다리를 쭉 뻗었다.

“헤헤…….”

 바보 같은 웃음을 흘리며 장석민은 시트로 몸을 둘둘 감았다. 한참을 그러고 있는데 시선이 느껴졌다. 나른하고 느슨한 시선이다. 몸을 훑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감았던 눈을 뜨려고 하는데 술기운에 눈이 뻑뻑해서 눈꺼풀이 잘 움직이지 않는다. 그는 대신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안기라는 뜻이었다.

 상대가 당황했는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장석민은 에휴, 하고 한숨을 내쉬며 손에 힘을 주어 잡히는 대로 끌어안았다. 생각보다 커다란 것이 가슴에 안겼다.

“착하지. 오빠랑 자자.”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이며 장석민은 자신이 끌어안고 있는 것에 입술을 비볐다.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며 장석민은 웃음소리를 냈다. 피부를 통해 느끼는 웃음소리를, 여자들은 좋아했다. 장석민 역시 상대와 그런 식으로 교감을 나누는 방식을 좋아했다.

“예쁘다.”

 손바닥으로 상대의 등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예쁘지 않은 여자는 없다. 어디 하나 예쁜 구석이 있기 마련이다. 흐뭇하게 웃으며 장석민은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예쁘다, 참 예뻐……. 응.”

 안고 있는 여자의 몸을 쓸어내리는데 손바닥이 한참 움직여야 했다. 참 너른 등을 가진 여자구나, 생각하면서 장석민은 입술을 움직였다. 머리카락을 깨물고 귓불을 깨물었다. 상대가 피식, 웃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장석민은 어라, 싶었다. 생각이 날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잠과 현실의 경계에서 이성이 부침을 거듭했다.

 머리가 멍해져 사고가 더는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자 떠올리는 것을 포기하고 그는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옷 아래의 몸을 더듬었다. 손가락에 서늘하고 단단한 피부의 감촉이 전해졌다. 단단한 몸이었다. 부드러운 곡선을 좋아하긴 하지만 운동으로 다져진 몸도 나쁘진 않다. 갈비뼈의 수를 세어 내리듯 천천히 손가락을 위에서 아래로 움직였다. 오랜만에 느끼는 타인의 체온에 몸이 점점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상대가 거부감을 느끼지 않도록 천천히 손을 앞으로 움직였다. 부드러운 가슴을 찾기 위해 한참을, 그렇게 헤맸지만 도무지 목적지를 찾을 수 없었다. 아직도 등을 만지고 있는 것인가.

 술에 취해 앞뒤도 구분하지 못하고 만져대고 있는 자신이 한심스러워 장석민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죄를 구하는 뜻으로 장석민은 상대의 목을 끌어안고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내가 많이 취했나 봐. 미안해요.”

 나직하게 속삭이자 다시 그 소리가 들렸다.

 웃음을 삼키는 듯한 숨소리──. 아, 뭐지. 눈을 떠야 하는데…….

 얼굴을 찌푸린 채 눈에 힘을 주었다. 장석민은 천천히 눈을 떴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눈동자와 마주쳤다. 비가 오기 전의 잿빛 하늘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어두운 시선이 장석민을 가두었다.

 장석민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이게 뭐지. 이게……. 왜 내가 자하르 왕자를 끌어안은 채 가슴을 더듬고 있는 것일까.

“……꿈이구나.”

 눈을 끔뻑거리던 장석민은 바로 결론지었다. 술에 취해서 잠이 드니 별 해괴망측한 꿈을 다 꾼다.

“저리 가.”

 아무리 꿈이라도 남자와 뒹구는 취미는 없기에 장석민은 끌어안고 있던 자하르를 밀어냈다. 자하르의 입가에 비틀린 웃음이 걸렸다. 그 웃음에 기분 나빠진 장석민은 불퉁하게 중얼거렸다.

「재수 없게 웃긴.」

「──.」

 자하르의 얼굴에 웃음이 가셨다. 장석민이 그를 다시 밀어내려고 손을 들었다. 자하르가 장석민이 손목을 움켜쥐었다. 꿈속의 자하르는 평소와 몹시도 달랐다. 다정한 웃음도 상냥한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탐욕스러운 눈을 하고 잡아먹을 듯이 노려볼 뿐이었다. 시선만으로도 겁탈당하는 기분이 들 정도로, 기분 나쁘고 집요한 시선이었다.

 무슨 꿈이 대체, 이따위야.

 발버둥을 쳐서 떨쳐내려 해도 자하르가 장석민의 다리를 무릎으로 눌러 꼼짝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뭐하는 거냐고, 이, 미친.”

 꿈이니까 나오는 대로 한국말로 떠들었다. 자하르가 그런 장석민을 비스듬히 내려다보았다. 한국말을 하는 장석민이 재미있다는 얼굴이다. 달빛을 받은 회색 눈이 유난히 차게 빛났다. 가끔, 장석민은 그의 눈이 뱀처럼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단하고 차가운 비늘을 세워 사람의 몸을 칭칭 감아 죄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게 가만히 있었어야지.」

 꿈에서도 그의 발음은 완벽했다.

「네 역은 가만히 있거나, 사라지거나 둘 중 하나인데, 왜 그게 안 되지?」

 다정한 목소리가 협박의 말을 뱉는다. 현실이었다면 한마디도 못했을 테지만 꿈이라고 생각하니 장석민은 하고 싶은 말을 고스란히 할 수 있었다.

「안 그래도 조용히 있다 사라질 겁니다.」

「그럴 수 있겠습니까?」

 자하르가 손등으로 장석민의 뺨을 툭툭, 내리치며 말했다. 꿈속의 그는 아주 재수가 없었다. 장석민은 자하르의 손을 내치며 대답했다.

「숫총각 주제에, 잘난 척하지 마. 뭐,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유치하고 맥락에도 맞지 않는 말이라는 것을 알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깨고 나면 사라질 꿈이니까.

「취하셨군요.」

 자하르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묻어난다.

「취하기도 취했지. 대체 너흰 무슨 술을 마시는 거야. 머리 아파. 꿈에서도 안 깨네.」

 장석민의 중얼거림을 들은 자하르가 눈을 가늘게 뜬다. 아하, 하고 웃는 기색이 영 수상쩍었다. 자하르가 장석민의 손목을 쥐고 있던 손을 놓아주었다. 이제 악몽도 끝인가 한숨을 쉬던 장석민은 아래를 움켜쥐는 힘에 헉, 하고 숨을 삼켰다.

“자, 잠……, 아……. ……!”

 우악스러운 손길이었다. 살덩이를 쥔 손은 욕망을 달래준다기보다 쥐어 터트릴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장석민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잠, 깐…….”

 너무 아파서 손으로 상대의 팔을 움켜쥐고 손톱을 세웠다. 팔에 피가 배어 나왔지만 자하르는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장석민은 꿈속의 자하르를 밀어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힘을 주었다. 그럴수록 자하르는 단단하게 장석민의 아래를 붙들었다.

「아프, ──미친, ……읏. 무슨, 짓, ──.」

「꿈이니까 상관없지 않습니까?」

 자하르가 몸을 낮게 엎드려 장석민의 귓가에 느릿하게 속삭였다.

「처녀 총각이, 마땅한 일을 하는 건데.」

 자하르가 손을 움직여 축 늘어진 살덩이를 훑어 올렸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몇 번이나 놓으라고 말했지만 자하르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끔찍한 꿈이었다.

“시발, ──.”

 장석민이 눈을 질끈 감고 중얼거렸다. 욕을 알아들을 리 없을 텐데 자하르의 표정이 일순 굳는다. 이내 그가 느슨하게 웃으며 다시 손을 움직였다. 아래에 피가 빠듯하게 몰렸다. 벌어진 입에서 뱉어내는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장석민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자하르가 이런, 하고 혀를 내찼다.

「이래서 카힌이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던 거군.」

「무슨, ──읏.」

「끝나고 나서 먹을 생각이었는데, ──이래서야.」

 손바닥이 살덩이를 빠르게 마찰시켰다. 점점 욕망이 고조되었다. 아슬아슬한 감각이 허리를 타고 몸 전체에 치달았다. 피가 아래로 몰리자 이성적인 판단은 멈춘 지 오래였다. 내용이 기분 나쁘긴 하지만 아차피 깨고 나면 사라질 꿈이었다. 장석민은 눈을 감고 본능이 내달리는 대로 몸을 맡겼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 …….

“아, ……, 으, 읏.”

 손의 움직임에 맞추어 장석민은 허리를 추어올렸다. 손으로 시트를 움켜쥔 채로 장석민은 혀로 입술을 축였다.

“……, ……?”

 손의 움직임이 멈춘 것을 깨닫고 장석민은 눈을 크게 치떴다. 커다란 손바닥이 장석민의 눈을 가렸다. 낮게 웃는 기척이 들렸다. 위험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다시 아래를 사정없이 헤집는 손의 움직임에 사고는 그대로 멈추었다. 아래로 몰린 욕망을 모조리 쥐어짜 내려는 듯이 손이 우악스럽게 살갗을 쥐고 흔들었다.

 팍, 하고 뜨끈하게 터지는 느낌에 장석민은 숨을 토해내며 그대로 어깨를 늘어트렸다. 자하르의 손에 몇 번 더, 뿌연 액체를 쏟아냈다.

 장석민은 아아, 하고 자조 어린 한숨을 쉬었다. 사정을 하고 나니 자괴감과 함께 죽을 듯한 탈력감이 온몸을 뒤덮었다. 시야가 흐려지고 눈꺼풀이 뻑뻑하게 감겼다.

「설마, 이대로 주무실 건가요.」

 부드럽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장석민은 얼굴을 찌푸렸다. 지금은 왕자가 아니라 왕자의 할애비가 온다 하더라도 도저히 일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졸려. ……잘래.”

 웅얼거리는 목소리를 들은 자하르가 그래요, 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음은, 나중을 기약하죠.」

 그다음이 뭐가 있냐고 물으려 했다. 입술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럼 좋은 꿈 꾸시길.」

 벌써 이런 악몽을 꿔서 꿈자리가 사나운데 무슨 좋은 꿈이냐고 물으려했지만 장석민은 까무룩,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그런 아침이 있다. 유독 침대에서 일어나고 싶지 않은. 오늘이 꼭 그런 아침이었다. 장석민은 시트를 몸에 둘둘 감고 보드라운 베개에 얼굴을 비볐다.

“응……, 좋다.”

 이상하리만치 몸이 고단했다. 아픈 것이 아니라 기분 좋은 나른함이었다. 이건 마치 질펀하게 한 판…….

“……! ……!”

 몸에 스피링이 달린 사람처럼 벌떡 일어났다. 몸을 가리고 있던 시트를 치웠다. 다행히 옷을 입은 채였다.

“난 또……. ……아우, 간 떨어질 뻔했네.”

 술김에 실수라도 한 것은 아닌가 싶었는데 다행히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아무리 신이 눈을 감아주는 날이라고 해도 왕자의 여자를 건드리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뭘 얼마나 마셨다고, ──으.”

 중얼거리는 와중에도 술 냄새가 풀풀 풍겼다. 장석민은 손바닥으로 머리통을 감싸 쥐었다. 그제야 숙취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장석민은 열심히 기억을 더듬어 어제의 일을 재구성했다. 방에서 혼자 맥주를 홀짝거리다가 영 심심해서 밖으로 나간 기억까지는 명확하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술을 한 잔씩 얻어 마시고, 그리고, 그리고, ……. 식당 근처에서 물을 한 잔 얻어 마시려고 갔다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끔찍한 것을 마신 기억을 떠올렸다. 목이 타들어 가는 듯한 감각이 다시금 생각나자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동시에 목이 말랐다. 장석민은 침대에서 내려와 테이블로 걸어갔다. 늘 그렇듯이 라임을 띄운 차가운 물이 한 병 놓여 있었다. 장석민은 병째 들고 물을 마시며 방 안을 둘러보았다. 2미터는 족히 넘을 황금 새가 날개를 양옆으로 펼친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평화로운 아침 풍경이었다.

 그래. 어제 그렇게 술을 마시고 결국에는 개가 되어 네 발로 기어서 여기까지, ……. ……아닌데.

 눈을 끔뻑거릴 때마다 흩어진 조각의 기억들이 하나씩 그의 머리로 내려왔다.

“거기서, 잠들었는데, ……여자가 왔지?”

 누군가 잠든 자신의 얼굴을 가렸던 기억을 해내고 장석민은 씁, 하고 혀를 찼다. 입을 맞춘 기억은 없어도 그 다음 장면은 안 봐도 뻔했다. 몰래 입을 맞추고 여자는 눈물을 훔치며 사라졌겠지. 역시, 그러면 그렇지. 어떻게 그 많은 여자 중에 나를 마음에 둔 여자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 어디 말이 되겠는가. 평소라면 그 마음에 응답 보답하겠지만 이제 곧 있으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니, 모른 척해야 한다. 내세에 다시 만나면 잘해드리겠습니다.

 꿀꺽꿀꺽 물을 들이켜며 장석민은 얼굴 모를 그녀에게 애통한 마음을 전했다. 차가운 물이 목을 타고 몸으로 전해지면서 정신도 점점 또렷해졌다. 그나저나 자하르는 어쩌지. 나한테 더 마음이 기울기 전에 그쪽부터 정리해야 하는데……. 얼마나 고민을 했는지 꿈에도 나왔……, ──!

“풉──.”

 장석민은 마시고 있던 물을 토해냈다. 값비싼 카펫이 그가 뱉어놓은 물로 얼룩졌지만 지금 그런 것이 눈에 들어오진 않았다. 쿨럭, 쿨럭 기침을 뱉으며 장석민은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꿈의 내용이, 어제 꾼 꿈의 내용이 생생하게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어제 놈이 그 손으로 나를……, ……!

 아래를 내려다보았다가 장석민은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미친.”

 꿈이라는 것이 본래 고민하고 있는 생각이 무의식에 작용하여 여러 내용으로 재창조된다. 그렇다고는 해도 어젯밤에 꾼 꿈은 도저히 납득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장석민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대체 뭐하는 짓이란 말인가. 자하르를 상대로 그런 꿈이라니. 의식이 지배하지 못하는 꿈이라 하더라도 남자랑, 심지어 자하르랑──!

“미쳤어, 미친놈.”

 손바닥으로 철썩철썩 얼굴을 내리쳤다. 몇 번을 그러고 나니 수치심이 약간은 희미해졌다. 이성도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어차피 꿈이다. 꿈은 현실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벌어진 일이니 누구도 알지 못한다. 나만 잊으면 끝인 것이다.

“잊자. 잊어. 완전히.”

 장석민은 머리를 옆으로 흔들었다.

“하아, 진짜. 한국에 가서 술을 끊든가 해야지.”

 얼굴을 쓸어내리며 다시 침대로 굼실굼실 기어 올라갔다. 아무래도 몸이 나른해서 두어 시간은 더 침대에서 나오고 싶지 않았다.

 보드라운 베개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감았다.

 이대로 주무실 건가요.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떠오르자 장석민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꿈이야! 꿈이라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벌떡 일어나 주먹을 공중에 휘두르며 보이지 않는 상대를 물리쳐야 했다. 그걸 몇 번쯤 반복하고 난 뒤에야 나른한 아침을 포기하고 침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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