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장석민의 지랄 때문에 목숨을 구한 에드문트의 회장은 그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해주겠노라고 외쳤다. 독일어를 알아들을 리 없는 장석민은 뺨을 두어 번 긁적거리다가 영어로 괜찮다고 답했다.
시찰은 중지되었고 자하르는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그곳에 남았다. 결국 하일과 같은 헬리콥터를 타고 오게 된 장석민은 나중에 회장이 무슨 말을 했는지 사이프를 통해 듣게 되었고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할 뻔했다. 독일어를 했다면! 제2외국어를 독일어로 선택했다면 한국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을 텐데!
피눈물을 쏟으며 후회를 했지만 에드문트 회장은 이미 다른 헬리콥터를 타고 떠난 뒤였다.
건방진 하일은 고맙다는 말 한마디도 없이 고개 한 번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 했고 자하르는 후에 다시 이야기하자고 장석민의 어깨를 두드리고 문제를 수습하러 떠났다. 하일에게 목숨을 구해줬으니 한국으로 돌려보내 달라는 말을 했다가 장석민은 헬리콥터에서 던져질 뻔했다.
결국 그날 남은 것은 버릇없는 꼬마에게 걷어차여 생긴 시퍼런 멍뿐이었다. 돌아와서도 장석민은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수행원들에게 불려 가 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해서 설명해야만 했던 터다.
그가 처소로 돌아온 것은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경전이고 비밀번호고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침대에 몸을 던졌다. 그대로 까무룩 죽은 듯이 잠이 들었다.
묘한 소문이 돌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한 것은 느지막이 아침을 먹고 난 뒤였다. 남의 말 사흘인데, 사흘이 끝나기도 전에 일이 생기니 장석민은 길을 지날 때마다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들어야 했다. 그뿐만 아니었다. 식사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도 자신의 소맷자락을 만지고 달아난 시동이 여럿이었다.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대체 뭐하는 짓이냐고 물어도 그들은 대답도 하지 않고 웃으며 달아날 뿐이었다. 유행하는 장난이라고 치부하려 했지만, 어린아이들만 그러는 게 아니었다.
지나가던 시종들도 장석민을 보면 은근슬쩍 다가와 그의 소매나 등을 만지고 갔다. 처음에는 하지 말라고 타일러보기도 하고 이유를 묻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아예 방관했다. 귀찮았다. 손안에 있다가 사라진 천금 같은 천국행 표를 놓치고 나자 모든 의욕이 사라진 것이다.
이도저도 귀찮아서 장석민은 수업도 들어가지 않고 처소로 들어와 누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천근만근 같은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보니 문 앞에 꽃이 놓여 있었다.
"……이 나라는 왕따 방법도 참 창의적이구나."
장석민은 발로 대충 꽃을 걷어차 버리고는 다시 문을 걸어 잠갔다.
십여 분 후, 또 누군가 문을 두드리고 꽃을 놓고 갔다. 그게 두어 번 더 반복되자 장석민은 노크소리가 들려도 침대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빌어먹을. 고마우면 다야? 니 목숨 구해줬으면 내 목숨도 구해줬어야지! 이 프랑크푸르트 소시지 같은 독일 놈아!
에드문트 회장의 불그스름하고 긴 얼굴을 떠올리며 장석민은 원망을 쏟아부었다.한참을 그러고 있는데 누군가 다시 문을 두드렸다.
장석민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거기서 하일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자신이 아주 조그만 목소리로 독일 꼬마를 족쳤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탕. 탕. 탕.
이번에는 노크 수준이 아니었다. 꽃을 가져다 놓든 쓰레기를 가져다 놓든 니 맘대로 해라. 장석민은 베개 아래로 고개를 묻고 눈을 감았다.
하일이 그때 죽길 바란다면 내가 너무 나쁜 놈인가? 신에게 벌 받으려나?
……벌은 사후에 받아도 되는 거잖아. 아아, 여기서 나갈 수 있었는데.
하일 개놈의 새끼.
쾅. 문의 중첩이 떨어져 나가고 장석민은 베개를 머리에 인 채로 고개를 들었다. 머릿속으로 수없이 죽였던 남자가 방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뒤따라 들어온 사이프가 문을 바로 세운 후에야, 장석민은 지금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인간과 밀폐된 공간에 놓이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왕자님께서 오셨는데 건방지게 아직도 누워있는 것이냐.」
사이프가 장석민을 꾸짖었다. 장석민은 침대에서 주섬주섬 내려왔다. 자하르도 아닌 하일이 이 시간에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지만 좋은 목적이 아니라는 것은 확신할 수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장석민이 인사를 하자 하일이 의자를 빼어내 앉았다. 장석민도 따라 앉으려다가 사이프가 무시무시한 눈길을 주는 바람에 도로 그 앞에 섰다.
「그날은, ……잘 들어가셨나요?」
「잘 들어갔으니 지금 이 자리에 있겠지.」
누가 몰라서 묻나. 독일 꼬마가 자라면 꼭 요런 어른이 되겠지. 장석민은 부글부글 끓는 화를 참으며 다행이네요. 하고 답했다.
하일이 눈을 가늘게 뜨고 장석민을 위아래로 살펴본 뒤, 입을 뗐다.
「그날 거기에 크레인이 떨어질 것은 알았는가?」
「그럴 리가요.」
장석민의 눈이 휘둥그레 벌어졌다. 하일이 또 무슨 꼬투리를 잡아 누명을 씌우려는지 덜컥, 겁이 났다.
「제가 그걸 어떻게 압니까. 그 요아힘인가 뭔가 하는 녀석이 제 정강이를 두 번이나 걷어찼다고요. 그래서 소리 지른 겁니다.」
장석민은 의자 위에 발을 얹어 옷자락을 들어 보였다. 사이프가 어허, 하고 눈짓을 했지만 이 나라에서 억울함은 그 자리에서 풀지 않으면 나중에 더 큰 화가 되어 돌아온다는 사실을 장석민은 알고 있었다.
「그 빌어먹을 자식이, 건방지게 구는 바람에…….」
「말조심해라. 그 빌어먹을 건방진 녀석이 이십 년 뒤에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정유 회사를 물려받게 될 테니까.」
사이프의 비웃음에 장석민은, 너는 헬리콥터 한 대도 없냐고 놀려대던 꼬마의 낯을 떠올렸다. 뱃속에서부터 뭉근한 분노가 치솟았다. 너희 집에는 이거 없지? 하면서 친구들을 놀렸던 과거의 자신이 그 위에 겹쳐졌다. 나는 그저 게임기로 놀렸을 뿐인데 헬리콥터로 돌아오다니. 업보치고는 너무 하잖아.
「어쨋든 그 녀석이 잘못한 겁니다. 혹시라도 보상 청구를 하러 오신 거면 걔네 집에 하세요. 돈도 많다니까.」
시근덕거리고 있는 장석민을 보며 하일이 코웃음을 쳤다.
「기가 막히는군. 이런 얼빠진 놈에게 그런 소문이 돌다니.」
「…….」
소문이란 단어에 장석민의 피가 얼어붙었다. 와디에 관한 소문이 잦아 들려면 아직 며칠을 더 필요했던 터다. 그는 허허허, 하고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들으셨어요? 하고 물었다.
「지금 나라에 소문이 파다하다.」
누군가 타르카 왕국의 국민성을 묻는다면 장석민은 소문이라고 답하리라고 마음먹었다.
「그게요, 그러니까 제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닙니다. 그때 창고에서 분명히…….」
「시끄럽다.」
하일이 짜증 섞인 일갈을 했다. 장석민은 어깨를 움츠렸다. 자하르의 궁이라고 해도 하일은 마음만 먹으면 러마디의 목숨은 쉽게 거둘 수 있는 인물이었다.
「네놈이 말라쿤의 현신이라는 이야기가 떠돈다.」
「말라쿤? 새요?」
장석민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물었다. 자신이 지은 와디가 어떻게 와전되었기에 그런 소문이 도나 싶었다.
「아나크 왕이 낮잠을 자고 있는데 숙적이 보낸 독사가 그의 발을 감았다. 말라쿤이 공중에서 세 번 울어 위험을 알린 덕에 아나크 왕은 독사의 목을 베어 살 수 있었다.」
사이프가 고사를 설명해주었다.
「그게 왜요?」
「네가 어제 공사 현장에서 세 번 울어 위험을 알렸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
장석민의 머리에 스치는 소리가 있었다.
야, 야, 야!!!
「자하르의 후궁 중 하나가 말라쿤의 현신이 깃들었다는 소문이 들기 시작했단 말이다.」
하일이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장석민은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이믈라쿤을 얼마 남기지 않은 이 시점에서 그런 소문이 자하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외부인인 장석민도 잘 알 수 있었다.
「네놈이 그날 세 번 소리치지만 않았다면──!」
「그럼 왕자님들은 다 죽…….」
장석민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하일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이럴 때는 납죽 엎드리는 게 최고다.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주의하겠습니다.」
무엇을 주의해야 하는지는 몰라도 일단 상황을 잘 마무리해야 한다. 계승권 문제에 하일이 얼마나 민감한지는 거듭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는터다.
「네놈은 그 더러운 좆을 잘못 눌려서 여기에 끌려온 멍청한 동양놈일 뿐이다.」
「……네. 그렇죠.」
그날 밤 좆을 놀렸는지 안 놀렸는지 기억에도 없지만 하는 수 없이 그렇게 맞장구쳤다.
「나를 너를 추잡한 소문을 만들라고 보낸 거라고! 네놈이 말라쿤의 현신이니 뭐니 하는 소문의 주인공이 되면 안 된다. 알겠는가?」
하일의 영어가 끔찍할 만큼 알아듣기 힘들었다. 장석민은 일단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자하르가 연회를 열 것이다.」
「네? 왜요?」
「우리나라는 목숨을 구해준 자에게 반드시 포도주로 갚는다.」
그것이 연회를 열어준다는 표현인 듯했다. 장석민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럴 필요 없이 한국행 비행기 티켓 하나만 끊어주면 만고 장땡일 텐데. 이 기회에 어디 슬쩍…….
「나에게는 X-398이 있다.」
장석민은 나는 뭐가 있다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저는 집에 아우디 A6가 있는데…….」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냐. X-398은 날아가는 비행기를 격추시킬 수 있는 탄도미사일이다.」
「…….」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라. 네놈은 내 허락 없이 이곳에서 절대로 벗어나지 못한다.」
나쁜 새끼. 장석민은 욕을 삼켰다. 하일이 사이프에게 눈짓하자 사이프가 들고 있던 상자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장석민은 이게 뭔가요, 하고 물었다.
「오늘 연회에서 넌 이 술을 자하르에게 올려라.」
나무 상자 안에는 고급스러운 와인 한 병이 예쁘게 포장되어 있었다.
「저보고 지금 자하르 왕자님을 독살하라는 겁니까?」
사이프가 장석민의 등짝을 매섭게 후려쳤다.
「감히 지금 어디서 왕족의 독살 이야기를 떠드느냐. 왕족을 독살하는 놈은 삼대를 멸한다. 자하르 왕자님을 독살하다니! 무엄한 녀석. 네놈이 어찌 우리 자하르 왕자님을…….」
하일이 사이프의 정강이를 걷어차자 사이프는 입을 다물었다. 하일이 상자를 장석민의 앞으로 밀었다.
「독살하라는 게 아니다.」
「그런데 이걸 왜 자하르 왕자님께 드리라는 겁니까.」
장석민은 미간을 찌푸린 채 울먹거렸다. 독살이 아니더라도 술을 한잔 잘못 올리면 자신은 그대로 죽을 것이다.
「추문을 만들라는 말이다.」
「자하르 왕자님께서 주사가 심하십니까? 술 마시면 개가 된다든지…….」
사이프가 네놈! 하고 끼어들었다가 하일이 눈빛으로 그를 정리했다.
「자하르는 술에 취하지 않는다. 취한 것을 본 자가 없을 정도로 세다.」
「……. ……. 뭘 탔습니까?」
장석민은 불안스레 와인 병을 바라보자 하일이 흡족한 듯 수염을 쓸어 내렸다.
「빅 슬립.」
「……, ……그거 안 좋은 거 아닙니까?」
유학시절에 뒷골목에서 마리화나를 피우던 놈들이 떠들어대던 이야기가 얼핏 떠올랐다. 빅 슬립이라는 환상의 약이 있는데 한 방울만 섞어 마셔도 넘어오지 않는 여자가 없다는 둥, 목석 같은 여자가 스스로 다리를 벌리고 달려온다는 둥. 장석민은 약물의 힘을 빌려 여자를 억지로 취하려는 놈들을 혐오했기에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혀를 내찼다.
……그런데 지금 하일은 자신에게 약물의 힘을 빌려 남자를 강제로 취하는 놈이 되라 하고 있는 것이다.
「자하르는 의심이 많은 놈이라 남이 주는 음식은 절대로 먹지 않는다.식사도 궁정 요리사가 만든 것이 아니면 먹지 않을 정도다.」
「그런데 제가 드리는 술을 마시겠습니까?」
「마신다. 마셔야 한다. 그게 관습이다.」
장석민은 자리에 무릎을 꿇고 빌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그런 짓을 합니까. 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그러면 다른 방법을 찾아서…….」
하일이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자하르의 명예를 더럽히라고 보내놨더니 넌 지금 그의 명예를 드높이고 있다.」
「…….」
그날 탑에서 자하르의 목숨을 살린 것이 알려진다면 자신은 그날로 하일의 손에 죽게 될 거라고 장석민은 확신했다.
「마시게 해라. 한 잔이면 된다. 그리고 방으로 모시고 가라. 이후의 일은 네가 굳이 하지 않아도 벌어질 것이다.」
하일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장석민은 귀가 썩는 느낌이었다. 싫어 나보다 머리 하나는 큰 남자 따위, ……하고 싶지 않다고.
헛구역질을 참으며 장석민은 하일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하일 왕자님은 제가 목숨을 구했는데 어찌 아무것도 없으십니까?」
최후의 발악이었다. 관습과 전통을 그렇게 중요시하는 나라라면 네놈도 뭔가 내놔야 한다는 압박이었다.
「그래서 포도주로 갚지 않았는가.」
하일이 히죽 웃으며 최음제가 든 와인 병을 가리키며 대꾸했다. 장석민은 이를 악물었다. 그런 식이면 붕어빵에는 붕어 들었고 국화빵에는 국화 들었게!
「아, 그렇지. 목이 마르다.」
하일이 물병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장석민은 주저하다 물을 따라 건네자 그가 시원하게 물을 들이켰다.
「고맙다. 한 잔 받았으니 이제 끝이다.」
포도주를 선물하고 은인에게 한 잔 받는다. 말 그대로를 실천한 하일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연회는 오늘 밤이다.」
「…….」
「바람에 실려 오는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겠다.」
하일이 웃으며 방을 나갔다. 그 뒤를 따라나서던 사이프가 장석민을 바라보며 뭔가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장석민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아챘다.
"젠장! 그놈의 순결 내가 제일 지켜주고 싶다고!"
무의미한 외침이 꽃이 수북이 쌓인 처소에 울려 퍼졌다.
하일이 틀리길 바랐다. 그러나 그가 떠나고 한 시간도 되지 않아 하캄이 옷을 입고 나타났다. 나이마 비 전하께서 직접 선사하신 옷이라며 하캄은 진심으로 그를 축하했다.
금색 실로 새의 문장이 수놓아진 남색 전통복이었다. 마치 나는 말라쿤의 현신이오, 하는 듯한 옷이었다. 나이마가 말라쿤에 대한 소문을 듣지 못했을 리 없다. 어차피 자하르가 남자 러마디는 취하지 않으니 적당히 이믈라쿤 전까지 그 소문을 이용할 생각이 분명했다.
장석민은 울상을 짓고 그냥 보통 때처럼 휜옷을 입으면 안 되냐고 물었지만 하캄이 펄쩍 뛰며 말렸다. 윗사람이 선물한 옷을 입지 않으면 그건 그 사람을 모욕하는 일이 된다며, 곤욕을 치르고 싶지 않으면 잔말 말고 이 아름다운 옷을 입으라고 그는 동양인 청년의 등을 떠밀었다.
남색 전통복을 입고 옆구리에는 하일이 준 와인 병을 낀 채, 처소를 나서는 장석민의 발걸음은 형장으로 가는 사형수처럼 무거웠다.
가는 길에도 마주친 시종 몇이 장석민의 옷을 만지며 지나갔다. 대체 이게 무슨 의미냐고 안내를 해주던 하캄에게 묻자 그가 웃으며 대꾸했다.
말라쿤을 만지면 대대손손 복을 받는다는 말이 전해집니다. 그리고 하캄 역시 장석민의 손을 잡고 두어 번 문질렀다.
타르카 왕국을 소개하는 문장에는 소문과 미신이라는 두 단어가 반드시 사용돼야 한다고 장석민은 생각했다.
연회장 앞에서 하캄은 이만 물러가겠다며 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장석민은 파티를 좋아했다. 유학시절에는 물론이고 한국에서도 호텔 바나 클럽의 파티들을 쫓아다녔따. 여자들과 술 마시고 춤추라고 마련해주는 자리를 싫어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만큼은 연회장에 발을 들여놓고 싶지 않았다. 장석민이 안에 들어서자 먼저 도착한 후궁들이 그에게 눈인사했다. 그가 지나갈 때마다 옷자락을 만지는 것도 잊지 않았다.
"……돌하르방도 아니고."
장석민은 투덜거리긴 했지만 길을 지날 때마다 예쁜 여자들이 앞 다투어 자신의 옷자락을 만지는 일이 거듭되자 점점 기분이 풀렸다.
"나도 참 단순한 놈이라니까."
그러다 문득 우울해져 입술을 깨문다.
이렇게나 단순한데. 여자만 있으면 내 세상은 이토록 완벽한데! 이 많은 여자들 틈바구니에서 손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돌하르방 노릇만 해야 한다니.
「큰일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비르마가 다가와 장석민의 공을 치하했다. 장석민은 웃으면서 그럼 경전을, 하고 말을 꺼냈다가 노인네의 차가운 시선을 받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자하르 왕자님께서는 공부로 바쁘셔서 늦은 시간에나 잠시 들르실 것입니다.」
「……굳이 오늘 안 오셔도 되는데.」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얼굴이라도 비치실 겁니다.」
마지막 희망이 저 멀리 날아갔다. 비르마가 연회의 주인공이니 마음껏 즐기라는 말을 남기고 퇴장했다. 장석민은 와인 병을 옆구리에 끼고 최대한 구석에 틀어박혔다. 여자랑 즐기지 못하는 연회 따위 어떻게 돌아가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싶었다. 구석에 앉아 혼자 빵만 우적우적 씹고 있는 그의 앞에 낯익은 얼굴이 나타났다.
「뭐하십니까.」
빗자루였다. 장석민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비르마는 보이지 않았다. 말을 해도 되겠다 싶어서 대답했다.
「그냥 있는데요.」
혹시 옷을 만지러 온 것인가 싶어 장석민은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뭐예요?」
「만지러 온 거 아니세요?」
빗자루가 코웃음을 쳤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제가 믿을 것 같나요?」
「……뭐, 그럼.」
장석민이 손을 다시 늘어트리자 그녀가 황급히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짚었다. 손가락을 두어 번 그위에서 문질거리더니 빗자루는 손을 뗐다.
「손이 미끄러진 것뿐입니다. 착각하지 마세요.」
「……네.」
장석민은 이런 유형의 여자를 싫어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아했다. 자존심이 높을수록 적당히 장단을 맞춰주면 다루기가 쉬운 터다. 그런데 지금은 그 적당히가 힘들었다.
「쟝이라고 했나요?」
빗자루가 물었다. 이름을 고쳐주는 것도 의미 없다 싶어 장석민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하르 왕자님께서 어떻게 그쪽의 이름을 알고 있는 거죠?」
「물어보셔서 가르쳐드렸습니다. ……그러면 안 되는 건가요?」
장석민의 대답에 빗자루의 눈에 금세 눈물이 차올랐다. 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녀가 장석민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남자 러마디 주제에, 들어온 지 일 년도 되지 않은 주제에, 어째서 자하르 왕자님이 너 따위의 이름을 물어본 거지?」
「……이름을 모르니까……?」
울음을 그치게 하려고 장석민은 조심스럽게 대답했지만, 그 말에 빗자루의 눈물 줄기는 한층 거세졌다.
「당신 이름만 모르는 게 아니라고! 자하르 왕자님은 지금까지 후궁의 이름을 물어본 적이 없으니까!」
「왜요?」
장석민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뭐라고요?」
「아니, 왜 안 물어보지. 나 같으면 다 물어볼 텐데. 이름이 뭐예요?」
내친김에 묻자 싶어 질문했다.
「자하르 왕자님께도 아직 안 알려준 이름을 내가 왜 그쪽한테 알려줘야 하죠?」
「……미안합니다. 괜한 걸 물었네요.」
장석민의 맞은편에 빗자루가 앉았다. 술 냄새가 훅, 하고 풍겨왔다. 그녀는 혼자서 와인을 마시기시작했다. 장석민은 잠시 머뭇거리다 그녀의 앞에 치즈를 놓아 주었다. 말없이 치즈를 집어 먹던 빗자루가 입을 열었다.
「자하르 왕자님을 본 게 일곱 살 때였어요.」
「아, 예,」
술주정의 서막이 열렸음을 직감했다.
「전 어린 아이였지만 알 수 있었어요. 저 사람이 이 나라의 왕이 되리라는 것을.」
이믈라쿤 시기에 자칫 민감할 수도 있는 이야기를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떠들었다. 장석민은 쉿, 쉿 하고 손가락을 입에 대었지만, 빗자루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떠들어댔다.
「그래서 그분의 비가 되기로 결심했어요. 난 이 나라에서 가장 유서 깊은 가문의 딸이니까. 그래도 되지 않겠어요?」
장석민은 그렇죠, 하고 그녀의 앞에 과일도 놓아주었다. 몸에 밴 습관이었다.
「그런데 후궁으로 들어온 지 십 년이네요. 십 년이 지났는데 자하르 왕자님은 아직, 제 이름조차 모른다고요.」
「참 속상하시겠어요.」
장석민의 위로에 빗자루가 눈물을 훌쩍거리다가 고개를 들었다. 어여쁜 얼굴이다. 장석민은 얼른 자신의 옷자락으로 눈물을 닦아주었다. 빗자루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지금 뭐하는 겁니까.」
빗자루가 노기 어린 음성으로 따져 물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장석민은 당황했다.
「아니 눈물을 흘리셔서…….」
지금 나이마 비 전하께서 내린 옷이라고 자랑하는 건가요? 나 참, 기가 막혀서.「」
「……아니요. ……아닌데요.」
빗자루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씩씩거리며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장석민은 쓴 입맛을 다셨다. 차마 너한테 수작을 걸었다는 말을 할 수 없는 서글픈 인생이었다.
지나가던 후궁들 몇이 장석민에게 다가와 옷자락을 만지고 까르르 웃으며 사라졌다.
"……. 참 우울하네."
자하르는 이대로 오지 않는 건가. 영원히 안 왔으면 좋겠다.
장석민은 잔에 와인을 채우며 대리석 바닥에 비친 자신에게 건배했다. 문 쪽에서부터 웅성거리는 소리가 퍼지기 시작했다.
장석민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흰색 연회복을 입은 자하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티클 하나 섞이지 않은 정백(精白)의 아우라가 그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모두 숨죽이고 그가 걸어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장석민은 옆구리에 있는 와인 병이 유난히 무겁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장석민을 발견한 자하르가 눈인사를 건넸다. 평소 같았으면 후궁들 사이에서 욕이 터져 나왔겠지만, 오늘만큼은 다들 그런 것쯤은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상석에 앉은 자하르가 사과의 말로 인사를 시작했다.
「어제는 불행한 사고가 있었습니다.」
그의 한마디에 잠시 들떠 있던 연회장이 숙연해졌다. 장석민이 벌인 소동으로 몇 명은 간발의 차로 목숨을 구했지만 몇은 크레인 잔해에 깔려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은 것이다.
말 한마디 섞어보지 못한 사람이 대다수였지만 그런 현장에 있었다는 것은 장석민에게도 충격이었다.
「신의 품에 안긴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
자하르가 잔을 들어 보였다. 모두 말없이 잔을 치켜들었다. 장석민도 와인을 가득 채운 잔을 머리 위로 올렸다. 아무리 마셔도 취할 것 같지 않은 밤이었다.
「이런 데 계셨군요.」
장석민은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와인 잔을 든 자하르가 장석민을 내려다보았다. 일부러 그를 피해 발코니 구석에 쭈그려 앉아있던 장석민은 담배를 피우다 학년주임에게 걸린 고등학생 같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날 정신이 없어서 인사가 늦었습니다. 덕분에 사고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자하르가 깊이 고개를 숙였다. 겉치레로 고개나 까닥거리고 마는 하일과는 차원이 다른 인사였다.
아아, 역시 8번에게 한 표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요. 인사받기도 민망하네요.」
멋쩍게 웃는 장석민의 얼굴을 훑는 자하르의 시선에 날이 서 있었다.
장석민은 어라, 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하르는 평온한 낯으로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모든 일은 신의 순리대로입니다. 쟝이 그렇게 행하신 것도 신의 뜻이며 살아남은 우리는 그 은총을 나누어 받게 된 것입니다.」
그날 한 일이라고는 어린애랑 싸운 것밖에 없었지만 이렇게 치켜세워주니 장석민은 슬쩍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어머니께서 선물하신 옷이군요. 잘 어울리십니다.」
「아, 예. 좀, ……하하하.」
「그 새가 말라쿤입니다.」
자하르가 손가락으로 금색 실로 수놓아진 새를 가리켰다. 장석민은 뺨을 긁적거리다가 저어, 하고 입을 열었다.
「그 새에 관한 이야기는, ……그냥 뜬소문이니까 안 들으신 걸로 해주세요.」
「아닙니다. 쟝이 보여주었던 용기와 헌신은 말라쿤이 아나크 왕을 도운 것만큼 값진 것이었습니다.」
몸이 배배 꼬이는 것 같아 장석민은 헤헤, 하고 부끄러운 웃음을 흘렸다.
「하일 형님께는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귀한 분을 선물로 주셨군요.」
속없이 헤헤 웃으며 듣다가 장석민은 아차 싶었다. 이러다가 자하르가 자신을 영영 귀하게 여겨 한국으로 돌려보내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저는 말라쿤이나 그런 게 절대 아닙니다. 그냥 우연으로 벌어진 일이니 큰 뜻을 두지 마세요. 물론 왕자님께서 사고로 다치지 않으셔서 다행입니다.」
자하르는 말없이 웃었다.
「조금만 늦었더라도……, 큰일 날 뻔했지요. 왕자님 두 분 다.」
자신에게 달려오던 자하르오 하일의 등 뒤로 크레인이 떨어지는 장면을 떠올리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말 그대로 간발의 차였다.
「아슬아슬했죠.」
자하르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문득 스치는 생각에 장석민은 주변을 둘러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냥 사고였나요?」
숨을 뜻을 알아챈 자하르가 애매하게 웃어 보였다. 장석민은 거 참, 하고 혀를 찼다. 벌써 두 번째였다.
「이것도 이믈라쿤과 관련되어 벌어진 일인가요?」
「조사를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
만약 성공했다면 계승자 유력한 후보 둘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말라쿤이니 뭐니 하고 떠드는 게 괜한 일은 아니었다.
「누가 그런 짓을 꾸몄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자하르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간 웃음이 눈부셔서 장석민의 양심이 한층 더 욱신욱신 쑤셔왔다. 이런 사람에게 빅 슬립이 든 와인을 먹여야 한다니.
「저는 이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있어서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에 장석민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 전에 찾아뵙고 인사드리려고 왔습니다.」
「아, 예. 그럼 안녕히…….」
자하르가 들고 있던 와인 잔을 내밀었다. 젠장. 쓸데없이 고지식한 놈 같으니라고.
「이걸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자하르의 말에 장석민은 입술을 깨물었다 놓았다.
「……저기, ……제가 좋은 와인이 하나…….」
장석민은 내도록 옆에 끼고 있던 와인을 내밀었다.
「드시기 싫으면 안 마셔도 되고요.」
「감사히 받겠습니다.」
이제는 피할 수가 없다. 장석민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병의 뚜껑을 벗겨 냈다. 잔에 와인을 따르면서도 속이 울렁거려 미칠 것 같았다.
이 술을 마시면 자하르는 맛이 간다. 그러면 내가 놈을…….
자하르와 눈이 마주쳤다. 반듯하고 깊은 눈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장석민은 울고 싶었다. 입안이 바싹바싹 마르고 속이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잔에 와인이 가득 찼다. 자하르가 잔을 슬쩍 들어 보였다.
아, 안돼.
손이 움찔거리며 올라가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아냈다. 와인을 한 모금 입에 머금은 자하르가 슬쩍 눈을 내리감았다. 긴 속눈썹이 사르락 사르락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저 아름답고 정결한 남자의 몸에 내가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도저히 바라볼 수가 없어 장석민은 고개를 숙였다.
「잘 마셨습니다.」
「네? ……?」
소주도 아니고 원 샷을 할 리가 없는데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다. 와인 잔을 자하르가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와인은 거의 줄어있지 않았다. 마셨다기보다는 입만 살짝 댄 수준이었다.
「안 마시세요?」
「네. 오늘은 많이 마셔서 여기까지 하겠습니다.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가 웃으며 인사를 하고 발코니 밖으로 나갓다. 장석민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무슨 이유로 그가 와인을 남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거라면 나중에 하일에게도 할 말이 잇는 것이다.
"됐어. 으하하하하하."
장석민은 미친놈처럼 웃으며 남아있는 병에 남아있던 와인을 나무에 뿌려버렸다. 잔에 있는 것도 처리하려고 돌아선 순간, 발코니로 누군가 성큼 들어와 장석민의 앞을 가로막았따. 빗자루였다.
「어, 왕자님은 아까 가셨는데…….」
장석민이 자하르가 사라진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자하르가 두고 간 잔을 들어 올렸다.
『왕자님께서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그녀가 뭐라고 하는지 알 수 없어 장석민은 입만 뻐끔뻐끔 움직였다.
『자하르 왕자님이 살아계신 것은 저에게도 축복이니 나머지 이 잔은 제가 비우겠습니다.』
그녀가 잔을 자신의 입으로 가져다 댔다.
"야!"
장석민은 빗자루의 손에서 잔을 빼앗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녀 역시 만만치 않았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그들의 주변으로 사람이 몰리기 시작했다.
『남은 잔을 마시는 데에도 순서가 있는 법. 어디 1년차 러마디가!』
빗자루가 아랍어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녀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거 마시는 거 아니에요! 큰일 난다고요.」
『이걸 마시고 왕자님의 은총을 입고 말겠어.』
장석민이 소리쳤지만, 그녀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이걸 마시고 왕자님과 하나가 되겟다는 둥, 나도 이걸 마시고 말라쿤의 현신이 되겠다는 둥 헛소리만 늘어놓았다. 심지어 그녀가 너무 필사적으로 나오자 혹하는 후궁들이 하나둘 늘기 시작했다. 혹시 저 잔 안에 남은 와인을 마시면 자하르 왕자의 총애가 자신에게 향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갈대숲의 불처럼 번져나갔다.
『그 잔 저에게 주세요.』
『제가 마실게요.』
여기저기에서 손이 뻗어왔다. 아수라장이었다. 장석민은 식은땀을 흘리며 와인 잔을 머리 위로 올려 사수했다. 바닥에 내던질 틈도 없었다.
아니, 버렸다가는 바닥에 쏟아진 와인마저 핥아 먹을 기세였다. 그중 가장 눈이 뒤집혀 있는 것은 빗자루였다.
장석민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결단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그는 남은 와인을 단번에 입안에 머금었다. 장석민은 불룩한 볼을 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제 그만 포기하라는 뜻이었다. 주변에서 실망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저 독한 동양 놈 좀 보라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욕을 좀 먹는 한이 있어도 이게 나았다. 빅 슬립을 든 와인을 사수했다는 생각에 장석민은 자신이 몹시 대견스러웠다. 실망한 후궁들이 하나 둘 흩어지기 시작했다.
됐어. 입안에 조금 남기는 하겠지만, 이 정도는 양치질만 잘하면 문제 없다. 이대로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서 뱉어내기만 하면…….
「무슨 일입니까.」
생각지도 못하게 들려온 자하르의 낮은 목소리에 장석민은 숨을 들이켰다. 입에 머금고 있던 액체가 목을 타고 꿀꺽, 넘어갔다. 장석민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 욱, ──."
뱉어내려고 했지만 입에서 나오는 와인은 두어 방울이 전부였다.
좆 됐다. 어쩌자고 이걸…….
「괜찮으십니까?」
자하르가 장석민의 앞으로 다가왔다.
"읏……."
대체 얼마나 약을 넣은 것인지 술기운이 도는 동시에 머리가 핑 돌았다. 휘청거리고 넘어지는 장석민의 몸을 자하르가 받아들었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머리 위로 나직하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괜찮으신가요?」
자하르가 물었다. 전혀 괜찮지 않았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얼른 이 자리를 피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괜찮지 않은 일이 벌어질 것이다. 장석민이 자하르를 밀어내며 일어섰다. 그러나 이내 다시 고꾸라졌다. 다리에 힘을 주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장석민이 신음을 삼키며 다시 자하르의 품으로 넘어지는 모습에 후궁들이 저 간교한 동양놈을 보라며 소맷자락을 물어뜯었다.
「걸으실 수 있겠어요?」
「아, ……예.」
정신을 차리려고 장석민은 머리를 흔들었다. 이제는 거의 손발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처소까지 혼자 걸어가는 것을 불가능했다. 목을 타고 올라오는 숨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술이, ……술기운 때문에…….」
장석민은 어색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렇다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다. 자하르의 옷자락을 쥐고 있는 장석민의 손가락 끝이 떨렸다. 슬슬 몸에 신호가 오기 시작한 것이다.
자하르가 슬쩍 눈으로 한숨을 짓다가 장석민의 허리에 손을 둘렀다. 꺄악, 하는 억눌린 비명이 새어나왔다. 자하르 왕자가 장석민을 어깨에 들쳐 멘 것이다. 그간 후궁들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았던 자하르 왕자였다.
있을 수도 없거니와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따. 주변이 삽시에 시끄러워졌다. 뒤늦게 소식을 전해 들은 비르마가 기겁을 하며 달려왔다.
「왕자님. 그런 일은 시종들을 시키심이…….」
「처소에 모셔다 드리고 오겠습니다.」
「왕자님. 아무리 그래도…….」
자하르가 괜찮습니다, 하고 웃어 보였다. 어떤 사심도 욕망도 담고 있지 않은 청아한 눈빛이었다. 비르마는 고개를 숙이고 옆으로 물러섰다.
다들 두 손을 모으고 공손하게 길을 비켜주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연회를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술에 취한 러마디를 어깨에 걸친 채, 자하르가 그렇게 말했다. 실로 경건하고 반듯한 자태였다. 그가 인사를 하고 연회장 밖으로 나갈 때까지 누구도 그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떠안겨가는 것은 장석민이었는데 마치 그가 자하르 왕자를 납치해 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
「내려, ……걸어서 가겠습니다.」
장석민이 말해보았지만 자하르는 내려주지 않았다. 장석민은 자신을 날강도라도 되는 듯이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며 입술을 깨물었다. 자하르의 넓은 어깨 위에서 짐짝처럼 흔들리며 내일 아침 타르카 왕국 전체에 퍼질 소문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기 시작했다.
「……여기는, 제 처소가…….」
「압니다.」
자하르가 덧붙였다.
「러마디 님이 묵고 계신 처소는 너무 멉니다. 제 처소에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입이 열 개라도 반박할 수 없었다. 장석민은 어깨에 떠안은 채 걷고 있는 자하르가 지금 그의 상태를 눈치채지 못할 리 없다. 장석민이 묵고 있는 곳까지 가려다간, 그 전에 죽는다.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장석민은 입술을 달싹거리다 자하르에게 물었다.
「……왜 다시 오셨습니까.」
「병에 남아있는 와인을 버리러 간 겁니다.혹시라도 다른 사람이 마시면 안 되니까요.」
장석민은 끄응, 앓는 소리를 냈다. 그 말은 결국 자하르는 처음부터 그 와인에 최음제가 들어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어떻게 알았냐는 뜻이었지만 말을 맺지 못했다. 이제는 혀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처음 겪는 일이 아닙니다.」
창의력 없는 하일 새끼.
장석민은 하일을 저주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왕자들은 어릴 때부터 음식 맛의 미묘한 변화를 알아채도록 교육을 받습니다.」
하일! 하일! 이 빌어먹을 새끼! 그걸 알고도 나에게 와인을 떠넘겨!
「그런데 그 와인은 쟝이 아니었다면 아마 그대로 마셨을지도 모릅니다. 맛의 차이가 거의 없긴 하더군요.」
「……제가여?」
발음도 새기 시작했다. 열 때문에 눈이 뻑뻑해서 연신 눈을 깜빡거렸다. 자신 때문에 눈치챘다는 말이 선뜻 이해 가지 않았다.
「누구라도 눈치챘을 겁니다. 손까지 떠시던데요.」
얼굴이 화끈거렸다. 장석민은 죄송합니다, 하고 사과했다. 다른 왕자였다면 그 자리에서 목을 치고도 남을 일이었다. 그러다 문득 한 모급이지만 자하르가 와인을 마셨던 것을 떠올렸다.
「근데 왜…….」
「그게 예의인 줄 알기에 그렇게 했습니다.」
훌륭한 청년이었다. 이렇게 훌륭한 청년의 어깨에 매달려 흉하게 거기나 세운 채 가고 있는 나라는 놈은 그저 죽어야 한다. 장석민은 처절한 자아비판을 하는 사이 자하르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쟝은 남은 와인을 왜 드신 건가요?」
「다른 사람이 먹으려고 해서, 말리려다…….」
개중 가장 눈이 돌아갔던 것은 빗자루였다. 그녀가 마셨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훌쩍거리고 울면서 일곱 살 때부터 시작된 첫사랑 이야기를 하던 빗자루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런 그녀에게 최음제가 든 와인을 마시게 할 수는 없었다.
「의외로 다정하시군요.」
의외,라는 표현이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깊은 의미를 두지 않고 장석민은 대답했다.
「전 원래 여자한테는 다정……, ──.」
장석민은 으, 학 신음을 삼키며 자하르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좀 천천히 걸어……, ……쓸려서. ……죄송합니다.」
얼굴은 물론이고 귓볼까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로 장석민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숫총각을 상대로 이딴 요구를 하는 것이 죄스럽기 짝이 없다.
「흔들리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
속도를 늦추는 대신 자하르는 장석민의 몸을 단단히 붙들었다. 쓸리지는 않았지만 어깨에 닿는 느낌이 한층 더했다.
시발, 쪽팔려, 쪽팔려서 이제 난 어떻게 살라고.
장석민은 눈물을 삼키며 자하르에게 사과의 말을 건넸다.
「죄송, ……제가 일부러 그런 건…….」
「형님께서 본인께서 보낸 러마디 님을 아끼는 마음에 조바심이 나셨나봅니다.」
장석민은 자하르가 그럴듯한 말로 제 형의 흉을 덮어주었음을 알아챘다. 하일 이 빌어먹을 놈아. 양심이 있으면 그냥 이런 동생에게 계승권을 넘기라고!
「……저 안 죽이십니까?」
「그런 것으로 사람을 죽이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장석민은 눈을 감은 채 연신 죄송합니다.를 반복했다.
「괜찮습니다.」
자하르가 머무는 건물이 연회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어 천만다행이었다. 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았을 때 장석민의 상태는 걷잡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장석민을 침대 위에 올려놓은 후 자하르가 입고 있던 타브를 벗고 새 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장석민을 메고 오느라 어깨 부근이 체액으로 흠뻑 젖은 채였다. 자하르는 그에 대한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다. 장석민은 죽고 싶을 만큼 수치스러웠다.
「그럼 저는 일 때문에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일부러 그가 자리를 피하는 것임을 장석민은 알 수 있었다. 그는 자하르의 옷자락을 다급하게 움켜쥐었다.
「자, 잠깐만요.」
자하르의 얼굴이 언뜻 굳었다. 이내 그가 사분사분하게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전 그런 것은 다루지 않습니다.」
그의 시선이 장석민의 다리 사이를 향했다.
「누, 누가 다루라고……, 그게 아니고, 저……, 욕실까지만, …….」
아무리 급해도 다른 사람의 침대에서 그런 짓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장석민은 이를 악문 채로 다시 부탁의 말을 건넸다.
「제발요, ……네? 부탁드립…….」
옷자락으로 다리 사이를 가렸지만 손만 대도 폭발할 지경이었다. 물을 10리터쯤 마시고 요의를 참아내는 기분이었다.
저도 모르게 시발, 이라고 중얼거렸다. 장석민의 하얗게 질린 입술이 부들부들 떨었다. 바로 욕실로 데려가 줄 것으로 생각했던 자하르가 그런 장석민을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섬뜩한 한기가 몸을 스쳤다.
「……저기…….」
장석민이 자하르를 올려다보며 눈썹을 찌푸렸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자하르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닙니다.」
그가 손을 뻗어 장석민의 몸을 안아 일으켰다. 장석민은 무너지듯이 자하르의 품에 안겼다. 욕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장석민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감사합니다. ……문 닫고…….」
장석민이 손을 흔들자 자하르가 친절하게 욕실 문을 꽉 닫아주었다. 다른 사람, 그것도 일국의 왕자가 사용하는 욕실에서 자위를 하자니 민망하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 지금은 수치보다 본능이 우선이었다. 장석민은 가다시피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기본 도리는 지키자고 생각했다. 간신히 욕조 안으로 들어간 그는 콕을 열었다. 따뜻한 물이 몸 위로 쏟아져 내렸다. 그것으로도 온몸의 피가 달뜨기 시작했다.
"아, ……씨."
장석민은 앉은 채로 바지를 내리려고 했지만 긴 타브 때문에 맘처럼 그게 쉽지가 않았다. 할 수 없이 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차가운 손바닥의 감촉에 몸이 갓 잡은 생선처럼 퍼뜩, 뛰어올랐다.
서늘한 기운이 뜨거운 아래를 더듬어가는 느낌이 선연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물소리가 비현실적으로 울렸다. 숨소리가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장석민은 이를 사리물었다. 자신의 손으로 욕구를 해결한 것이 몹시 아득한 예전의 일임을 떠올렸다.
처음 수음을 배운 소년처럼 그는 마구잡이로 자신의 것을 쥐고 마구잡이로 흔들어댔다. 손바닥이 이미 흥건하게 젖은 채였다. 욕조 바닥에 철벅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아슬아슬한 감각이 점점 고조되었다. 한 손으로 욕조의 가장자리를 움켜잡았다. 그렇지 않으면 물과 함께 어디론가 쓸려 내려갈 듯이 정신상태가 위태로웠다.
망할 하일 새끼. 대체 얼마나 약을 섞어 넣은 거야.
"흣. 으──."
아래에 빠듯하게 피가 몰렸다. 한 번 하고 빨리 한 번 더해야지, 하는 따위의 생각이 들었다. 혀로 축축하게 젖은 입술을 핥아 내리며 장석민은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이제 조금만 더 하면, ──.
그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
「──! ──!!」
참아내려고 했지만 이미 절정에 다다른 살덩이는 제 욕망을 분출하고 있었다. 후드득, 옷자락 위로 진한 액체가 흩뿌려졌다. 장석민의 몸이 움칫 움칫 떨리 때마다 연달아 몇 번 더 토정이 진행되었다.
쏴아아아아.
물줄기가 장석민의 몸 위로 쏟아져 내렸다. 젖은 옷 아래로 쭉 뻗은 몸의 선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자하르가 표정없는 얼굴로 동양인 청년을 내려다보았다.
「노크를 해도 대답이 없어서 걱정이 앞서 열었습니다.」
자하르의 담담한 목소리가 울렸다. 장석민의 귀에는 물소리만 들렸다. 물소리가 그의 세계를 차단했다. 자하르가 욕실 안으로 들어와 콕을 잠갔다. 따스하고 안온하던 세계에서 장석민은 억지로 현실로 끌어내려졌다.
「괜찮으신가요?」
자하르의 물음에 정신이 돌아온 장석민이 가까스로 눈을 껌뻑였다.
동시에 자신의 처지가 떠올랐다. 흔적을 감춰보려 했지만 터질 듯한 욕구를 분출한 탓에 옷은 물론이고 손목과 다리, 심지어는 목덜미 부근까지 그 흔적이 튀어 있었다.
「저는, ……, …….」
차라리 상대가 웃어버리면 철판을 깔고 같이 웃어버리든가 할 텐데 자하르는 그냥 말없이 시선을 내던지고 있었다. 마치 범죄현장에서 범인을 추궁하는 듯한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장석민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커다란 죄를 지은 기분이 들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자위를 했을 때도 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건만.
분명히 내가 여기서 하겠다고 분위기를 폴폴 풍겼잖아. 아무리 숫총각이라고 해도 너무 눈치가 없는 거 아니야.
할 말이 많았지만 수치를 아는 인간이기에 소리 내어 말할 수 없었다. 이제 그만 꺼져주면 좋으련만 자하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왜…….」
간신히 내뱉은 한마디였다. 눈치 없이 여길 왜 들어왔냐는 뜻이었다.
「걱정이 돼서 들어왔습니다.」
고개 숙인 장석민의 목덜미가 발긋하게 달아올랐다. 자하르가 들고 있던 병을 장석민의 옆에 내려놓았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정갈한 향이 났다. 그것이 한층 장석민의 죄책감을 고조시켰다.
「약입니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될 겁니다.」
「…….」
「괜찮습니다.」
어떤 의미로 괜찮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장석민은 고개도 들지 못하고 웅얼웅얼 네, 안녕히 가세요. 하고 대꾸했다.
「이해합니다.」
「……감사…….」
장석민은 혀를 깨물었다. 차마 다른 사람의 욕조에서 자위를 하는 제 자신을 이해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은 내뱉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뭔가 변명은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장석민은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모르실 수도 있겠지만, ……원래 남자는 이렇게 되면……, ……아닙니다.」
내가 숫총각을 상대로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하는 기분이 들어 장석민은 말끝을 흐렸다. 픽, 웃음을 삼키는 기척이 들렸다.
「그럼 이만.」
문이 닫히고 발걸음 소리가 멀어졌다. 장석민은 고개를 들었다. 축축하게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 후 그는 무릎에 고개를 묻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배 위에서 표범 밥이 되는 편이, 좋았을지도 모른다고 장석민은 생각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울었지만, 수치심은 조금도 가시지 않았다.
최악의 밤이었다.
다음날 눈이 퉁퉁 부어 수업에 참석한 동양인 청년을 보고 여기저기에서 수군거렸다. 오해는 바로잡자 싶어 장석민은 입을 열었다.
「어제 아무 일도…….」
「당연히 없었겠죠. 자하르 왕자님은 밤새도록 본관에서 국무에 힘쓰셨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으니까요.」
빗자루가 장석민의 대답을 가로챘다. 사실이었다. 자하르가 건네준 약을 먹고 나자 몸을 어느 정도 진정시킬 수 있었다. 물론 완전히 가라앉을 때까지 차가운 물 아래서 한 시간가량 몸을 식혔다.
두어 번 더 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자하르의 욕조 안에서 그 짓을 또 벌일 수는 없었다.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 그걸 허락지 않았다. 욕실에 들어와서 약을 전해주고 나간 자하르는 그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장석민은 몸이 진정될 때까지 욕실에서 있다가 새벽녘에 자신의 처소로 갔다.
「어제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건, 다들 알고 있어요.」
빗자루의 심술이 장석민에게는 차라리 고마웠다.
「예.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장석민이 호락호락 그렇게 나오자 빗자루의 눈이 가늘어진다. 살짝 맛이 간 것 같은 동양 놈이 또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건가 싶었다.
「그쪽은 어제 괜찮으셨나요?」
장석민이 빗자루에게 물었다.
「저요? 제가 어째서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마치 어제의 일은 없다는 듯한 투다. 장석민은 그녀의 뻔뻔함에 박수갈채를 보냈다. 여러모로 생각해도 그녀가 가장 적임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까지 관찰한 후 결정을 하려던 마음을, 굳혔다.
장석민은 저기, 하고 빗자루를 불렀다.
「왜요?」
「드릴 말씀이 있는데 수업 끝나고 잠시 뵐 수 있을까요?」
그녀의 뻔뻔함과 외모, 그리고 적당히 돌아가는 두뇌 회전이라면 그날의 자신을 충분히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싫습니다.」
빗자루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꾸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장석민이 당황해서 그게 아니고요, 하고 말을 덧붙였다.
「제가 이상한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고요. …….」
「좋은 얘기도 별로 하고 싶지 않군요.」
그녀에게 동양인 청년은 처음부터 썩 마음에 드는 대상이 아니었다. 그래도 처음엔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남자 후궁은 즉시 출궁 되는 것이 관례였으니까. 살레하라는 여자와 자하르 왕자를 혼인 직전까지 가게 했던 하일이 보냈다 하더라도 남자 후궁의 운명은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하루가 멀다하고 이상한 소문을 만들고 있는 이 동양인 청년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는 시찰하는 장소까지 따라가 자하르 왕자뿐만 아니라 하일 왕자의 목숨까지 구해 말라쿤의 현신이라는 말까지 도는 중이었다.
후궁 중 누구에게도 이름을 묻지 않았다는 자하르가 이놈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도 짜증이 나 죽겠는데 어제는 술에 취한 척 연기를 하는 놈의 몸을 안아주기도 한 것이다.
빗자루가 턱을 높이 치켜들고 장석민을 내려다보았다. 출신성분도 알 수 없는 남자 러마디 따위가 완벽한 자하르 왕자 곁에 있는 자체가 짜증 났다.
「아무튼 내가 허락하기 전까지는 저한테 함부로 말 안 거셨으면 좋겠네요. 그게 궁중의 법도입니다.」
그녀가 찬바람을 날리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벙 찐 얼굴을 하고 있던 장석민은 한숨을 내쉬었다. 중요한 문제를 간과했다. 대역을 찾는 것만큼 그 대역이 자신의 이야기를 신뢰하게끔 하는 것도 중요하건만, 그 부분은 아예 생각지도 못한 것이다. 편지라도 써볼까. 장석민이 턱을 괸 채 고민에 빠져 있는 사이 비르마가 들어왔다. 그녀가 지팡이로 장석민을 가리켰다.
「거기 일어나세요.」
「네? 저요?」
지목을 당하면 또 무슨 일인가 싶어 두려움부터 앞섰다. 그가 주춤주춤 자리에서 일어나자 비르마가 말했다.
「지금 나가서 저 사람을 따라가세요.」
「네? 왜요?」
「왕자님의 명입니다.」
장석민은 챙겨온 노트를 챙겼다. 뒤통수를 찌르는 시선이 따끔따끔했다. 애써 무시하고 장석민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수행원의 뒤를 따라 나섰다.
「저기, ……몇 번째 왕자님입니까?」
장석민은 수행원에게 물었다. 수행원이 눈썹을 올리며 무슨 말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가는 곳 말입니다. 누구한테 가는 건가요.」
다른 후궁들 앞에서는 사실 차마 묻지 못했다. 너무 빤한 질문이었다. 이곳은 자하르 왕자가 기거하는 궁이었던 터다.
「자하르 왕자님께서 부르셨습니다.」
「……네.」
발목에 족쇄라도 찬 것처럼 내딛는 걸음이 무겁게 느껴졌다. 마음 같아서는 이믈라쿤이 끝나기 전까지 자하르 왕자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자위를 하다가 엄마에게 걸렸다는 친구들의 웃지 못할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장석민은 와, 쪽팔려서 어떻게 사냐, 하고 생각했다. 성적인 대상이 아닌 사람에게 그런 장면을 들킨다는 것은 몹시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흔히들 어릴 때, 친구들과 야한 동영상을 보며 같이 그런 짓을 하기도 한다지만 장석민에게는 이해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친구도 그런데 하물며 친하지도 않은 남자라니, 게다가 왕자.
어제 자신을 내려다보던 유난히 서늘하고 날카로운 시선이 떠올라 한층 우울해졌다.
"……싫다."
장석민은 중얼거리며 수행원의 뒤를 따라 걸었다. 자하르의 방문 앞에서 수행원은 고개를 숙이고 사라졌다. 장석민은 숨을 들이켰다. 노크를 하자 아랍어가 들렸다. 이번에야말로 들어오라는 소리겠지 싶어 장석민은 문을 열고 들어섰다. 고개도 들지 않고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어제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가능하시다면 어제 일은 없었던 일로……, 헉,」
소파에 앉아있던 남자가 기괴한 표정으로 장석민을 바라보았다. 잠시 굳어 있던 자하르가 잠시 기다리라고 말을 건넸다.
「이제 거의 끝났습니다. 편하게 기다리세요.」
자하르가 들고 있던 서류를 내어주고 짧게 뭔가를 지시했다. 비서로 보이는 듯한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해하실까 봐요. 어제 일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지나가는 남자에게 장석민은 슬쩍 혼잣말을 중얼거려보았다. 남자는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을 닫고 사라졌다.
「죄송합니다. 안에 사람이 있는 줄 모르고…….」
「쉬운 말부터 배워 두셔야겠군요. 앉으세요.」
쉬운 말부터 배워두라는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장석민은 소파에 앉으면서도 긴장을 쉬이 풀지 못했다.
「어제는, …….」
「어제는.」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장석민이 먼저 하세요. 하고 양보를 하자 자하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혹시 몸 상태가 좋지 않으신가 걱정이 되어 들어갔던 것뿐입니다.」
「……. ……네.」
실례라면 이쪽이 실례였다.
남의 욕조 안에서 그 짓을 하다가 걸렸는데. 막말로 자하르가 눈이 썩어들어간다고 고소를 해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자하르가 눈짓을 했다. 이제는 그쪽 차례라는 뜻이다.
「어제는, ……흠. 저야말로 어제 실례가 많았습니다. 와인도 그렇고, 정말 죄송합니다. 혹시 이 일로 저에게 실망하셔서 저를 쫓아내신다고 하셔도 벌은 달게 받겠습니다.」
쫓아낼 때 쫓아내더라도 꼭 비행기 표는 끊어달라는 말은 일단 가슴속에 품어두었다.
「괜찮습니다. 더한 일도 많이 겪었던 터라, 별로 놀랍진 않습니다.」
「그, 그러신가요?」
자하르가 보일 듯 말 듯하게 미소 지었다. 장석민은 처음엔 자하르를 비웃었다. 저 나이 먹고, 저런 위치에 저런 얼굴과 몸매를 하고 숫총각 노릇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 터다. 그러나 지금은 그 의지가 실로 대단하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제보다 더한 일이라니. 어떤 것인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아, 물론 조금 색다르긴 했습니다. 남자 러마디가 이렇게 오랫동안 궁에 있던 적이 없었으니까.」
최장기 투숙 남자 러마디라는 타이틀을 쥐게 된 장석민은 면목없습니다. 하고 고개를 숙였다.
「자하르 왕자님께서도 얼마나 놀라고 심려가 크시고 당황하셨을지 짐작도 가지 않습니다. 그런 몹쓸 장면을 보셨으니 기분도 상하셨겠죠. 그러니 모쪼록 어제 일은 없었던 걸로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공문에나 쓸 법한 말을 늘어놓으며 장석민은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웃는 기척이 들렸다. 어제오 비슷했다. 웃을 만한 대목이 아닌데 비웃는 것처럼 느껴진다.
설마, 하일도 아니고 이 사람이 그러겠어.
장석민은 고개를 들어 자하르를 바라보았다. 다정하고 평온한 회색 눈동자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끔찍할 것까지는 아니었습니다.」
「아, ……예. 저는 끔찍, 아니, 예. 그냥 잊어주세요.」
자하르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의 일은 이렇게 적당히 묻고 넘어가는구나 싶어서 장석민은 그럼 저는 이만, 하고 오늘의 만남을 마무리하려 했다.
「어딜 가시나요?」
「네?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중요한 용건은 아직 꺼내지 못했습니다.」
장석민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에드문트 회장이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아, 그거요.」
원하는 것이 있으면 뭐든지 해주겠다는 말을 했다지. 지금의 장석민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본인의 생명은 물론이고 아드님의 생명까지 구하셨다면서 선물을 보내신다 하셨습니다.」
「선물이요?」
쫀쫀한 프랑크 소시지라고 욕을 했었는데 살짝 미안해졌다. 자하르가 말을 이었다.
「말라쿤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시고 3미터 규모에 달하는 말라쿤 상을 만들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장석민은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라쿤이니 뭐니 하는 동상 따위 내 알 바 아니었다.
「그날 보았던 곳에 대규모의 원유 시추 시설이 세워질 겁니다. 난항을 겪었던 에드문트와 합의가 극적으로 끝났습니다.」
「잘됐네요.」
장석민은 자하르가 어째서 자신에게 국가 사업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쟝의 덕분입니다.」
「아니요, 제가 한 게 뭐가 있다고요.」
그날도 시찰단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다가 꼬마랑 승강이나 벌인 그였다. 동상을 세워 기념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상징의 문제입니다.」
「네?」
「세계 굴지의 석유 회사인 에드문트 사가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세워준 말라쿤 상입니다. 상징적인 것이지요.」
「그렇겠네요. 기왕 세우는 거 10미터로 올려달라고 하세요.」
「말씀은 전해드리겠습니다.」
도움이 되었다니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러나 자하르가 단순히 고맙다는 인사를 하겠다고 자신을 오전에 당장 오라고 호출을 하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부탁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역시 본론이 나오는구나. 장석민이 네, 하고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쟝이 제 옆에서 일을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네?」
너무도 갑작스러운 제안에 장석민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아니, 저는, 그러니까 그날, 제가 왜 일정을 알고 싶었냐면 그냥 그게 우리나라에서는 행운의 상징이라서, ……저기, 솔직히 제가 도울 만한 일이 없을 것 같은데요.」
그날 있었던 일의 규모를 보자면 자신이 가진 변호사 자격증은 쓸모가 없었다. 단순 사업도 아닌 국유 사업에 일개 변호사 나부랭이가, 그것도 쓸 줄 아는 언어라고는 모국어를 제외하고 영어밖에 없는 자신이 따라다닐 이유가 하등 없는 것이다.
「실질적인 도움을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왜요?」
그날도 따져 묻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신을 왜 끌고 다니려 하는가.
「상징의 문제입니다.」
아까도 자하르가 내뱉었던 단어였다.
「이해가 힘드실 수도 있겠지만 타르카 왕국은 전통과 상징을 매우 중요시합니다.」
더해서 소문도.
장석민은 이곳 사람들만큼 남 얘기를 빠르게 전파하는 힘을 가진 민족을 본 적이 없었다.
「아시다시피 지금은 이믈라쿤이 있는 달입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장석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때문에 자하르를 더럽히라고 자신이 보내진 것이다.
「그날 사고 때문에 사람들의 입에 쟝이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에드문트 사가 보낸 선물이 도착한다면 한층 더 하겠지요.」
장담한다. 선물이 도착하기 전에 말라쿤 상에 대한 이야기가 파다하게 퍼질 거라고.
「이런 시기에 말라쿤에 대한 이야기는 몹시 상서로운 징조로 여겨질 겁니다.」
장석민은 눈을 깜빡거렸다. 이제야 무슨 이야기인지 감이 잡힌다. 자하르는 말라쿤의 현신에 대한 소문을 이용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가 유력한 후보라고 해도 결국에 모든 일을 결정하는 것은 현재의 국왕이었다.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서 자하르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려는 셈이었다.
장석민은 천천히 자하르의 얼굴을 살폈다. 세상사 욕심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여유롭고 넉넉한 낯이다. 저런 얼굴을 하고도 왕위를 위해 그렇게까지 노력한다는 사실이 선뜻 믿기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하젤이라는 신분을 지금까지 지킨 것도 다 계승권에 대한 일념에서 출발한 것 아니었던가. 정말 이 사람을 성자라고 불러도 되는 것일까.
「쟝의 도움을 받고 싶습니다.」
자하르가 웃으며 장석민에게 부탁했다. 여기서 덥석 도와줄게요. 하고 자하르의 손을 잡기에 장석민은 상황이 썩 좋지 않았다. 그는 음, 하고 생각하는 척하다가 입을 열었다.
「저도 왕자님께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심호흡을 했다. 이런 말을 남자를 상대로 하려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터다.
「어차피 왕자님은 남자 러마디는 상대하지 않으신다 하셨으니, 왕자님을 연모하고 있는 제가 도움만 드리다가 결국엔 버림을 받으면…….」
여기까지 하는데도 온몸에 소름이 돋고 진땀이 흘렀다. 할 수 있어, 장석민. 저건 어깨가 무지하게 넓고 운동을 엄청나게 많이 한 구릿빛 피부의 여자다.
「……제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져서, …….」
장석민은 재빨리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더 이상 했다가는 헛구역질을 할 것 같았다. 그는 비탄에 잠긴 사람처럼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이었다.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이믈라쿤이 끝난 즉시 저를 고향으로 돌려 보내 주셨으면 합니다. 그거면 됩니다.」
「한국으로요?」
그렇게 묻는 자하르의 목소리에 슬쩍 의아함이 묻어났다. 정말 그거 가지고 되겠냐는 투였다.
「네. 저는 그거면 됐습니다.」
자하르가 마음을 바꾸기 전에 얼른 확답을 받아내야 했다.
「보내 주시겠다고 서약서 한 장만 써주시면 이믈라쿤이 끝나기 전까지 옆에 있겠습니다. 반드시 이믈라쿤이 끝나면 바로 보내 주셔야 합니다. 물론 우리나라에 도착하기 전까지 비행기가 격추되거나 하는 사고는 없어야 하고요.」
「격추요?」
「호, 혹시나 해서요. 제가 비행기를 탈 때 늘 그런 걱정이 들어서요. 아, 안전 염려증이라고 해야 하나. 전 잘 때 문을 걸어 잠갔는지 세 번은 확인해야 잠이 듭니다.」
강박증 환자로 봐도 상관없었다. 자신이 자하르의 명예를 더럽히기 위해 하일이 특파한 공작세력이라는 사실을 그가 알아서는 안된다. 그런 놈을 옆에 두고 말라쿤의 현신이니 하는 상징물로 자하르가 쓸 리가 없다.
「원하신다면 써드리겠습니다.」
장석민이 벌떡 일어나 종이를 가져왔다. 법적인 구멍이 없도록 완벽하게 짜 맞춘 계약서를 써 내리기 시작했다.
「여기요. 사인하시면 됩니다. 여기, 여기, 그리고 이렇게 종이 중간에요. 한 장씩 나눠 가질 겁니다.」
장석민이 꼼꼼하게 사인할 곳을 알려주자 자하르가 웃음을 삼켰다.
「왜요?」
「변호사라는 말씀이 사실이셨군요.」
「당연히 사실……, 안 믿으셨습니까?」
자하르가 대답하지 않고 장석민이 가리킨 곳에 모두 사인을 했다. 장석민은 계약서 한 장을 곱게 접어 자신의 품 안에 넣었다. 웃음이 실실 새어나오는 것을 참느라 힘이 들었다. 생각지도 못한 구석에서 집으로 가는 표를 구한 것이다. 그동안 죽도록 고생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 맞다. 하나만 더 부탁드리겠습니다. 이 계약에 관한 이야기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성질 더럽고 포악한 하일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자신은 이믈라쿤이 끝나기도 전에 암살당할 게 분명하다.
「알겠습니다.」
자하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장석민은 얼른 처소로 돌아가 어깨춤을 추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다.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장석민을 자하르의 목소리가 붙들었다.
「저도 하나만 더 부탁드려도 될까요?」
「……네?」
지금까지 있었던 이야기를 모두 없었던 것으로 하자고 할까 봐 장석민의 눈에 불안함이 그득 차올랐다.
「처소를 이 건물로 옮기셨으면 좋겠습니다.」
자하르의 발언에 장석민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처소를, 이 건물로요?」
하캄에게 들었을 때, 이 건물은 오롯이 자하르만 사용하는 공간이라고 했다. 허락을 받지 않은 사람은 오갈 수 없고 특히, 후궁의 출입이 엄격히 금지된다고 했다. 지금 후궁들이 자하르를 찾아올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자신을 구해준 은인을 찾을 때까지는 한시적으로 출입을 허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건물로 처소를 옮기라니.선뜻 수용하기 힘든 제안이었다.
뭐든지 과하면 부족함만 못하다.
「꼭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상징의 문제입니다.」
자하르가 웃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쟝의 안전을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것은 늘 조심스러운 일입니다.」
안전이라는 단어에 장석민은 매일 아침 자신의 세탁물이나 음식에 섞여 들어오는 숫자가 적힌 종이를 떠올렸다.
「알겠습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이 안이라면 카운트다운이 적힌 종이를 받지 않을 것이다. 무시하려 했지만 은근한 스트레스 요소였다. 그런데 또 다른 걱정이 생겼다.
「……제가 자하르 왕자님 곁에 너무 붙어있으면, 명성에 누가 될까봐 걱정됩니다.」
하일이 바라던 대로 추문이라도 나면 두 사람이 체결한 계약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이 경우라면 하일이 한국으로 돌려보내 주겠다고 했지만, 그놈 성격을 고려해본다면 입 싹 닦고 모른척할 공산이 크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자하르의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단호했다.
「이믈라쿤이 끝나기 전에 남자 러마디와 염문이 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장석민은 눈을 빛내며 마음속으로 박수를 쳤다. 그거 저도 되게 바라는 바예요, 라고 외치고 싶었다.
「제가 남자와 침대에서 뒤엉켜 있는 모습을 누군가 본다 하더라도 그런 소문은 돌지 않을 것입니다.」
극단적인 표현이었지만 그만큼 자신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장석민은 손을 내밀었다가 주춤 물러섰다.
「혹시 먼저 악수를 청하는 것도 예의에 어긋나는 건가요?」
손을 내밀어 놓고 걱정스레 묻자 자하르가 장석민의 손을 맞잡았다.
「아닙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남자답게 악수를 한 후, 장석민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곳을 떠날 날이 머지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 삼재가 떠나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짐을 싸면서도 콧노래가 멈추지 않았다. 가진 것 없이 끌려왔던 곳이라 짐이라고 부를 만한 것도 없었다. 지급받은 옷가지와 공책을 가방에 넣으면서 장석민은 처소를 정리했다. 얼마 있어 흥분한 하캄이 달려왔다.
「러마디 님. 처소를 옮기신다고요?」
「들으셨어요?」
「예. 지금 궁에 소문이 파다합니다.」
장석민이 헤헤, 하고 웃으며 침대의 시트를 정리했다. 원래는 시종이 하는 일이었지만 기분이 좋아서 나가기 전에 말끔하게 정리를 해두고 싶었다.
「대체 어떻게 되신 일입니까?」
「아. 그게요.」
말을 하려던 장석민은 입을 다물었다. 이곳에서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이 하캄이긴 했지만 그것은 비교적이었다.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됐습니다.」
「정말 이상한 일이군요. 설마 자하르 왕자님이 러마디 님을 마음에 둘 리는 없을 텐데요.」
「당연히 마음에 둘 리가, ……혹시 있을 수도 있잖아요.」
「그럴 리가요.」
웃고 있었지만 하캄의 눈가에 단호한 기색이 어렸다. 지구가 네모났다는 말에도 저렇게 정색을 하지는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자하르가 남자 러마디인 자신에게 관심이 없을 거라고 딱 잘라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장석민은 묘하게 자존심이 상했다.
상관없지. 어차피 그놈이랑 연애할 것도 아니고.
「오늘부터 옮기시는 건가요?」
「편한 대로 하라고 하셔서 일단은 짐만 싸두었습니다.」
실은 오늘 당장 옮길 예정이었지만 그렇게 말했다간 너무 없어 보일까봐 둘러댔다. 장석민이 바닥을 쓸고 있는 모습을 보고 하캄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저는 조금 걱정이 됩니다.」
「제가요?」
「말라쿤에 대한 이야기를 흥미로 떠드는 것과 그것이 믿음처럼 퍼지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소문이랑 정치적 이용 사이에는 분명히 다른 무언가가 있겠죠.」
비질을 하던 동양인 청년에게서 나온 대답에 하캄은 속으로 적잖이 놀랐다. 평소에는 대책 없이 밝거나 어딘가 모자라 보이기까지 하는데 종종 이런 총기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순간이 있어요. 최선이 아니라 현실적인 차선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요.」
최선은 대한민국 영사관에 연락해서 합법적인 경로를 따라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현실적인 차선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장석민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조심할게요. 저한테 지금 몸조심하라고 당부하시려는 거죠?」
「총명하십니다.」
하캄이 고개를 조아렸다.
「궁에서는 끝까지 누구도 믿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누구도요?」
「자기 자신조차요.」
나 아니면 누굴 믿느냐고 반문하려다 알겠다고 대답했다. 자신보다 이곳에서 두 배는 긴 세월을 살아온 하캄이니 그의 말에 토를 다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고 생각한 터다.
「그럼 저는 이제 하캄을 못 보게 될까요?」
하캄은 이곳에서의 유일한 대화 상대였다. 마음을 다 주지는 않았지만, 막상 다시는 못 본다는 생각을 하자 섭섭해졌다.
하캄이 고개를 내저으며 두 팔을 벌렸다.
「그럴 리가요. 저는 늘 여기에 있습니다.」
이믈라쿤이 끝나면 자신은 한국으로 돌아갈 몸이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장석민은 말없이 하캄을 끌어안았다. 감사 인사를 하려고 입을 떼려는 순간 하캄이 아, 하고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주머니에서 서신을 꺼내 내밀었다.
「비르마 님께서 전하라 하셨습니다.」
「비르마 님이요?」
웬 서신인가 싶어 장석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종이에는 간단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1회 추가. 내일까지 4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해 한참을 서서 생각했다. 옆에서 종이를 흘끗 쳐다보던 하캄이 물었다.
「그래서 그날 경전은 잘 찾으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