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7/35)

"억울해. 아니라고. 아니라니까."

할 수만 있다면 궁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서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와디의 낭독이 끝난 후에 비르마는 장석민에게 정신이 있는 거냐고 노발대발 소리를 질렀다. 다른 후궁들도 그를 미친놈 보듯이 정색했다. 장석민은 자신을 바라보는 후궁들의 시선에 충격을 받았다. 하일이 보낸 남자 러마디였기에 찬밥 취급을 받아오긴 했지만 이렇게 대놓고 미친놈 취급은 아니었던 것이다.

사흘 안에 타르카 왕국의 전통 경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세 번 써오세요. 장석민은 비르마의 옷자락을 잡고 늘어졌다. 전 까막눈입니다. 선생님, 로스쿨까지 졸업한 수재가 할 수 없는 수치스러운 발언이었지만 그때는 필사적이었다. 한 글자도 읽지 못하는 경전을 세 번이나 써오라는 것은 그에게 나가 죽으라는 말과 다름없었다.

정말 저는 못합니다. 차라리 다른 벌을 받게 해주세요. 네? 부탁드립니다. 비르마 선생님.

그러나 비르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장석민에게는 수업은 다른 후궁들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였다. 이곳에 나오지 못한다면 자신을 대신할 인어공주도 찾지 못하고, 그렇게 되면 결국 죽음으로 가는 급행열차를 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장석민이 눈을 크게 뜨고 비르마에게 진심으로 부탁했다. 제발, 제발, 다른 벌을 받겠습니다. 비르마가 장석민의 손을 냉정하게 내치며 소리 질렀다. 사흘 뒤에 써오지 않으면 하루가 지날 때마다 써야 하는 횟수가 한 회씩 늘어날 겁니다.

장석민은 억울했다. 자신의 시가 표절작임을 그들이 모르는 건 분명했다. 자리를 떠난 자하르마저 그 시를 듣고 독창적인 시라고 평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대체 뭐가 문제인데.

장석민은 비르마에게 따져 물었다. 제 와디의 어디가 그렇게 문제입니까. 네?

말이 끝남과 동시에 비르마의 지팡이가 장석민의 정강이를 내리찍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장석민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정강이를 쥔 채로 자리에서 껑충껑충 뛰었다. 

비르마는 그대로 정원을 떠났다. 장석민은 빗자루를 붙들고 물어보려 했지만 그녀는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결국 그 와디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알려준 사람은 처소에 찾아온 하캄이었다.

보기보다 대담한 분이었군요. 러마디 님.

그렇게 말하는 하캄의 목소리에는 놀리는 투가 역력했다. 장석민은 대체 자신이 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으니 그 이유를 알려달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하캄이 알려준 진실은, …….

"아아, 아니라고. 아니라고. 난 그런 거 아니야."

차라리 자하르에 대한 연모로 벽을 타고 불을 지르는 또라이라는 소문이 백 배 나을 정도였다. 쥐구멍이 있으면 숨고 싶다는 말은 자신이 아니면 절대로 쓰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엘시시가 그딴 뜻인 줄 내가 알았어? 알았냐고!"

엘시시.

본궁의 창고에서 들었던 남자의 이름. 아니, 남자의 이름이라고 착가했던 말. 그 뜻이 무엇인지 귀띔을 해주던 하캄은 웃음을 참느라 몇 번이나 쿨럭거리며 기침을 했다.

엘시시는 수컷의 성기를 지칭하는 저속한 표현입니다. 그것도 보통 성기가 아니라…….

여기까지 말하고 하캄은 헛기침을 세 번이나 했다. 장석민이 울 것 같은 얼굴로 바라보자 하캄은 애써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말의 성기를 이르는 단어입니다. 물론 조금 다른 뜻도 있지만, 단어가 그대로 가리키는 뜻보다 한층 저속한 표현입니다.

엘시시여(=말자지여). 엘시시여(=말자지여). 어이한단 말인고.

사막을 나는 새여 나의 엘시시(=말자지)에게 날아가거라.

완벽한 음담패설의 한 구절이었다. 장석민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가 파랗게 질렸다가 종내에는 하얗게 변해갔다.

아니에요, 나 진짜 몰랐어요. 하캄, 제발, 가서 소문 좀 내주세요. 네? 소문내는 게 이 동네 사람들 특기잖아요.

장석민은 하캄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울부짖었다. 하캄은 애석한 얼굴을 하고 장석민의 어깨만 두드렸다. 오늘이 지나기 전에 자신이 만든 말자지 와디가 궁 안에 파다하게 퍼질 것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입 싼 중동 놈들. 물에 빠지면 입만 동동 뜰 중동 놈들."

그가 지나가면 키득거리며 손가락질을 하는 시종이 벌써 여럿이다. 장석민은 베일을 단단히 여미었다.

처소에 틀어박혀 소문이 가라앉을 때까지 한 발자국도 움직이고 싶지 않았지만 비르마가 내준 숙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경전을 빌리러 가야 했다. 하캄에게 경전을 빌려달라고 부탁을 안 해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오늘 큰 연회가 있어서 자리를 비우지 못할 것 같다고 난감해 했다.

게다가 타르카 왕국의 경전은 크고 무거워서 그 자리에서 보고 베껴야 할 것이라고 충고도 뒤따랐다. 결국 장석민은 옆구리에 공책을 끼고 하캄이 그려준 지도를 보며 대도서관으로 향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대도서관이 궁의 가장 구석에 있어 오는 길에 만난 시종이 몇 없었다는 것이다.

"가는 길에도 제발."

해가 지기 전까지는 절대 나오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며 장석민은 도서관의 계단을 올랐다. 거의 3층 높이에 해당되는 무지막지한 수의 계단을 올라 육중한 철문을 지나 도서관 안으로 들어선 순간, 장석민은 숨을 들이켰다.

"……분명 오늘 연회 따위는 없을 거야."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은 을씨년스러운 실내 분위기에 그는 어깨를 움츠리며 걸음을 옮겼다. 천장이 높아 오히려 밖보다 도서관 안이 싸늘했다. 가장 이상한 점은 커다란 도서관 안애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도 없나. 아무도 없어요?"

장석민은 일부러 소리 내어 중얼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헉!"

어둠 속에 앉아 있던 시체와 눈이 마주친 그는 기겁하며 벽에 달라붙었다. 시체가살아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아챈 것은 상대방의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뜻 남자에게 다가갈 수가 없었다. 어둠 속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몹시 기괴했던 터다. 장석민은 소름이 돋은 팔뚝을 문지르며 도서관 지기에게 말을 건넸다.

「책을 찾고 있는데요.」

의자에 앉아있던 도서관 지기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장석민은 다시 용기를 내어 그에게 말을 건넸다.

「경전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걸…….」

책 제목이 적힌 종이를 내밀었다. 아랍어를 모르는 장석민을 대신해 하캄이 써준 글자였다. 도서관 지기의 눈이 종이에 적힌 글자를 따라 움직였다. 죽어 고꾸라진 고목 같은 손이 말없이 왼쪽을 가리킨 후 손가락으로 4와 8을 만들어 보였다.

「저기로 가면 되는 겁니까? 4는 뭔가요?」

역시나 돌아오는 것은 침묵이었다. 장석민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누군가의 도움을 쉽게 받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곳에서 하캄처럼 영어가 능숙한 시종은 손으로 꼽힐 정도였던 것이다.

장석민은 도서관 지기가 가리킨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나무로 만든 복도가 그의 걸음을 따라 삐걱삐걱 흔들렸다.

그 소리 때문인지 누군가 따라오는 느낌이 들어 장석민은 몇 번이나 뒤를 돌아 확인해야 했다.

"여긴 대체 언제 지은 건물이야. 세상에."

천장을 올려다보았다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곤충과 눈이 마주친 이후로 장석민은 앞만 보고 걸어나갔다.

"4라고 했지. 네 번째 책장의 8번째 책이란 말인가?"

장석민은 네 번째 책장 앞에 서서 종이와 함께 제목을 비교하며 책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비슷한 글자조차 찾지 못했다. 장석민은 책장 사이로 나와 복도 앞을 바라보았다. 어마어마한 수의 책장들이 관처럼 늘어져 있다.

"하아, ……경전을 찾는 것 자체가 이미 벌이구만."

장석민은 투덜거리며 책장 사이의 복도를 걸었다. 네 번째 기둥 앞에선 책장을 뒤지기도 하고 8번째 책장을 뒤져보기도 했다. 4와 8을 더한 12번째 책장도 뒤졌다. 그러다 기둥과 천장이 연결되는 부분마다 조그맣게 숫자가 적혀있는 것을 발견하고 유레카를 외쳤다.

"좋아. 여기가 2니까, ……헉. 아직도 2라고?"

한참 돌아다닌 것 같은데 자신이 아직도 2구역에 속해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장석민은 4구역이 나타날 때까지 그렇게 다시 한참을 걸었다. 4구역에 들어선 후 장석민은 8번째 책장으로 갔다.

빽빽하게 꽂혀있는 책들의 제목을 종이와 하나하나 비교를 해가며 그는 경전을 찾았다.

"젠장. 무슨 놈의 글씨가 이렇게 생겨먹어서……."

글자를 알아보기 힘든 것도 문제였지만 실내가 어두운 것도 한몫했다. 창문이 높이 달려 있는 터에 채광이 좋지 않아 글자도 간신히 알아보았다. 빨리 책을 찾아서 입구 근처에서 베껴 써야 할 텐데.

"이건가?"

장석민은 일단 비슷해 보이는 책을 찾아 뽑았다. 그 안을 살펴보려고 책을 펼쳤다가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놓치고 말았다. 팔랑팔랑 떨어진 종이는 책장 바닥 아래로 들어갔다. 장석민은 일단 책을 다시 꽂아두고 바닥에 납죽 엎드렸다. 책장과 바닥 사이에 손목 하나가 들어갈 만큼의 틈이 있었다.

"가지가지 한다. 진짜."

그는 소맷자락을 걷은 후 틈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안에서 켜켜이 쌓여있던 먼지가 손가락에 닿자 으, 하는 소리가 절로 새어나왔다. 손목이 책장 아래에 닿아 발갛게 부어올랐지만, 손가락 끝에 뭔가 걸리는 느낌이 들어 장석민은 힘을 주어 손을 더 밀어 넣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

달칵, 하는 소리가 들린 순간 장석민은 자신이 종이가 아닌 뭔가를 건드렸다는 것을 직감했다. 혹시 쥐덫을 건드려 손가락이라도 잘리는 게 아닌가 싶어 장석민은 후다닥 손을 빼냈다. 동시에 구궁, 하며 육중한 소리가 책장 옆의 벽면에서 들렸다.

"……어."

벽이 돌아가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벽이 열리고 그 안에 계단이 나타났다. 장석민은 어, 어, 하고 눈을 끔뻑거리다가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다. 감시카메라도 보이지 않는다. 이 커다란 도서관을 지키는 지기는 한참 걸어 나가야 찾을 수 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문 앞에서 장석민은 고민을 시작했다. 그냥 얌전히 경전을 찾아서 베껴가며 자신의 대역을 구한 뒤, 안전하게 한국으로 돌아갈 것인가. 어디로 통하는지 알 수 없는 비밀 문으로 나가볼 것인가.

그는 결심을 굳히고 고개를 들었다. 어쩌면 이것이 자신에게 열린 새로운 활로일 수도 있다.

장석민은 심호흡을 하고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인간은 반복 학습을 통해 발전해 나아가는 동물이라고 했다. 그런 면에서 자신은 인간성이 떨어지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아."

손바닥으로 지끈거리는 이마를 눌렀다. 폐쇄된 공간을 한참 동안 걷고 있자니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그날도 자하르를 따라 그 탑 아래로 내려가지 않았더라면 문제에 휘말리지 않았을 테지. 아니야. 자하르를 살린 것은 나니까 잘 내려간 거야.

……아니지. 기절해있던 놈을 발로 걷어차서 깨운 건 나니까 애초에 자하르가 위험에 처하지도 않았을 거다.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을 더듬어 내려가며 장석민은 그날의 일을 떠올렸다. 다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계속 전진할 것인가. 거듭되는 고민이 그날로 돌아간 듯한 착각을 느끼게 해주었다. 심지어 계단을 오르기도 하고 내리기도 해서 이제는 여기가 지상인지 지하인지조차 가늠하기 힘들어졌다. 탈출이고 뭐고 이젠 그냥 돌아가는 생각이 들었을 무렵 장석민은 계단이 끝나는 지점에 도착했다. 장석민은 벽 앞에 서서 가만히 귀를 대고 소리를 들어보았다. 조용하다. 한참을 그러고 서 있었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어차피 여기까지 왔으니 결말은 보자싶어 장석민은 문을 손으로 밀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 굳어버린 돌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하, 나 진짜. 힘쓰게 만드네."

장석민은 등을 대고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옆으로도 밀어보고 아래를 밀어보기도 하고 잡아당겨 보기도 했다. 5분가량을 문 앞에서 끙끙거리며 힘을 쓰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장석민은 헛웃음을 삼켰다. 이 문이 어쩌면 바깥세상으로 나가는 통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허무함이 배가 되었다. 무릎을 세워 끌어안고 그 위에 고개를 괴었다.

어디서부터 내 인생을 꼬이기 시작한 것일까.

"……역시 부적을……."

책상 구석 어딘가에 있을 부적을 떠올리며 쓴 입맛을 다셨다. 다시 돌아가서 경전을 찾아 베끼는 수밖에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장석민은 문 옆에 작은 돌멩이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시발, 이라고 중얼거리며 발끝으로 돌멩이를 있는 힘껏 걷어찼다가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

발끝이 저릿저릿했다. 못해도 이건 발톱이 부러진 고통이다. 장석민은 으으, 하고 신음을 삼키며 허리를 폈다. 그리고 장석민은 보았다. 

피가 배어나기 시작한 발과 등 뒤로 열려 있는 문을.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장석민은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가 문을 넘자 등 뒤에서 쿵,소리가 울렸다. 이음새도 보이지 않는 벽이 다시 생긴 것을 보고 장석민은 혀를 내찼다. 발가락의 상태는 걷는 데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이제 탈출만 하면……!

"하……, ……."

문과 연결된 곳에서 걸어 나오자마자 장석민은 자신이 탈출에 실패했음을 깨달았다. 도서관의 비밀 문은 밖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궁의 내부와 연결이 되어 있었다. 심지어 여긴 이미 한 번 와본 곳이었다.

"이럴 줄 알았어.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릴 리가 있나."

도서관의 비밀 문은 자하르를 따라갔던 탑의 지하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날 등 뒤에서 갑자기 나타났던 괴한들의 미스터리가 설명되는 순간이었다. 장석민은 투덜거리며 다시 비밀 문을 열려고 했지만 이 또한 장치와 연결된 것인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눈에 불을 켜고 장치를 찾던 장석민은 유난히 낡아 보이는 책 한권이 눈에 띄었다. 장석민이 종이를 떨어트린 자리에 있던 책의 표지와 똑같은 책이었다. 장석민은 망설이지 않고 그 책을 빼 들었다. 사라졌던 문이 다시 나타났다. 만세를 부르며 그 안으로 들어가려던 장석민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

어째서 이걸 잊고 있었던 것일까!

그날도 컴퓨터를 발견하고 이 방으로 기어들어왔던 것이다. 장석민은 주먹을 쥐고 기뻐하다가 재빨리 책상으로 달려갔다. 걸릴 때는 걸리더라도 밖으로 구조 요청은 해두어야 한다. 컴퓨터 전원 버튼을 눌렀다. 부팅을 기다리는 시간이 이렇게 길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다. 

형에게 먼저 메일을 보낼까. 아니, 경찰청 홈페이지에 글을 올릴까, 대사관 홈페이지도 찾아봐야 하는데. 어디에 글을 올리면 많은 사람이 나를 구하러 와줄까.

"빨리, 빨리, 빨리."

책상을 두드리며 한국인들이 외국에 나가 가장 많이 한다는 말을 중얼거렸다. 모니터 화면에 글자가 나타났다.

PASSWORD

"하하하하하하"

이젠 웃음이 났다. 절망과 희망. 오늘 대체 그 사이에서 몇 번을 오가는지 세기도 힘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패스워드의 빈칸이 네 자리라는 사실이었다. 장석민은 미친놈처럼 웃으며 손가락으로 숫자 자판을 눌렀다.

1818.

INCORRECT PASSWORD

장석민은 사람들이 흔히 쓰는 비밀번호 네 개를 더 넣어보았다.

1234. 1111, 9999. 6666.

패스워드 불일치 화면이 연속으로 떴다. 생각나는 숫자를 아무렇게나 계속 치다가 장석민은 의자에 주저앉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열려라 참깨, 라고 중얼거려보았다가 손바닥으로 뺨을 두드렸다.

"미친놈. 정신 차리자."

언제까지 여기서 숫자 자판을 두드리고 있을 시간이 없다. 다시 선택의 시간이다. 도서관으로 돌아가든가 언제 올지 모르는 이곳에서 계속 비밀번호를 누르고 있든가.

더 이상 불확실성에는 투자하지 말자.

장석민은 확실한 길을 택했다. 도서관과 이어진 문을 열고 다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도서관으로 들어온 그는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답답함을 느낀 그는 그대로 밖으로 뛰쳐나왔다.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도서관 지기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도서관 계단에 앉아 그는 깊숙이 공기를 들이마셨다. 미지근한 공기가 그의 폐 안에 가득 찼다. 바다를 건너 사막 위에 세워진 나라에 와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실감한다. 차가운 손바닥으로 흥건한 이마를 닦아냈다. 시원하다. 이마에 손을 얹은 채 장석민은 생각을 정리했다. 요 며칠간 많은 일이 있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건들을 호재와 악재로 구분하기 시작했다.

자하르 왕자를 구한 일. 모호.

자하르 왕자가 깨어난 일. 호재.

자하르 왕자가 은인을 찾으면 한국으로 돌려보내 주겠다고 한 일. 호재.

컴퓨터에 놓인 서재와 연결된 비밀 통로를 찾아낸 것. 호재.

……그리고 말자지 와디.

"……. 됐어. 어차피 남의 말은 사흘이야."

애써 위안하며 장석민은 이 호재들을 사용할 방법들을 정리했다. 복잡했던 것들이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하자 그래도 어느 정도 마음이 놓였다.

눈을 감고 숨을 길게 들이쉬었다.

"이길 수 있다."

주먹을 불끈 쥐고 중얼거렸다. 재판장에 들어서기 전에 늘 하던 습관이었다. 이 싸움에서 이길 것이다. 이겨서 살아나갈 것이다.

장석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매연에 갇힌 뿌연 서울 하늘이 그리워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노크하기 전, 준비해온 거울을 보고 장석민은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어제 경전을 빌리러 도서관으로 다시 달려가서 책을 찾는데 두 시간을 더 허비했다. 새벽까지 경전을 베끼다가 돌아와 간신히 한 시간 동안 눈만 붙이고 일어났다. 그래도 깨끗하게 세수를 하고 머리도 단정하게 빗고 나왔다. 누군가에게 부탁하러 가려면 궁해 보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었다.

"완벽해."

장석민은 거울로 얼굴까지 모두 확인한 후 문을 두드렸다. 문 안쪽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랍어였다. 들어오라는 소리겠지.

장석민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전화통화를 하며 와이셔츠의 단추를 잠그고 있던 자하르가 놀란 눈으로 문 쪽을 바라보았다.

「아, 저는 들어오시라는 줄 알고.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이고 문을 닫으려 하자 그가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다. 장석민은 쭈뼛거리며 소파에 앉았다.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댄 후 그는 다시 통화를 시작했다. 표정이 밝아 보이지 않는 것이 뭔가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테이블 위에는 커피와 각국의 신문이 놓여 있었다. 혹시 한국 신문은 없을까 해서 장석민은 눈으로 재빨리 훑어보았지만 익숙한 글자는 찾을 수 없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이른 아침부터.」

통화를 마친 자하르가 장석민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우선 어제 그 와디는 언어적 미숙함에서 온 실수였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죄송합니다.」

준비해온 멘트를 숨도 쉬지 않고 뱉어냈다. 장석민은 무릎 위에 두 손을 얹고 고개도 들지 못했다. 상대방의 반응이 이렇게 두려운 것은 처음이었다.

「괜찮습니다. 이해합니다.」

자하르가 가볍게 웃으며 대꾸했다. 어제 그 일로 자신에게 말도 걸지 말라고 반응할까 걱정했던 장석민은 슬쩍 고개를 들어 어색한 눈웃음을 지었다. 자하르가 다정하게 같이 웃어주었다.

이렇게 보면 사막의 성자가 맞는 것 같은데…….

「그 일 때문에 걱정이 되어서 잠을 못 주무셨나 보군요.」

장석민은 손바닥으로 눈을 비볐다. 밤을 새우면 눈이 붓는 것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이었다.

「괜찮으니 걱정하지 마시고 가서 다시 주무세요. 수업은 오후에 있습니다.」

「아닙니다. ……가서 다시 경전도 계속 써야 하고.」

어제 밤새도록 베꼈는데 책의 10%도 쓰지 못한 것이다. 그런 것을 두 번 더 반복해야 한다. 가슴이 답답했다. 경전 말고도 해결해야 할 일이 산더미이건만.

「저,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자하르가 그날의 은인을 찾겠다고 후궁들의 출입을 막지 않은 것이 장석민에게는 큰 득이었다.

「뭔가요?」

자하르가 커피를 마시며 물었다. 전통복이 아닌 정장에 넥타이까지 하고 있어서인지 중동의 왕자라기보다 월가의 성공한 CEO같아 보였다. 금욕적인 느낌 때문인지 매력도 한층 더 했다. 여러모로 아까웠다. 저 외모도. 사랑받지 못하고 방치되고 있는 후궁들도.

「혹시 사적인 시간을 제외하고 오늘 공적인 업무가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진행되는지 알 수 있을까요?」

커피를 마시던 자하르가 눈을 치떴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에 허를 찔린 표정이었다.

「다른 의도가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는 조, 좋아하는 상대의 일과를 써서 갖고 있으면 그 상대에게 좋은 일이 생긴다는 전통이 있습니다. 자세히 알려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시간만 알려주셔도 됩니다.」

퍽킹. 전통. 중동 놈들이 그걸 어떻게 알 거냐고.

「재미있는 전통이군요. 어느 나라에서 오셨다고 하셨죠?」

「한국입니다.」

자하르는 Korea, 라고 입안에서 발음을 해보고는 알은체를 했다.

「요즘 그쪽도 후계자 문제 때문에 정치적으로 문제가 있었죠.」

장석민은 자하르의 식견에 깊게 탄복했다. 외국인들에게 한국의 이미지는 김치 아니면 전쟁인데 정확하게 현재의 정치적 문제를 거론해 온 것이다.

「예. 그 문제로 나라가 좀 시끄럽긴 합니다.」

나라의 지도자를 잘못 뽑아 놓으면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 있는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 게 현 시국이었다.

「타르카 왕국은 모쪼록 후계자 문제가 잘 해결되었으면 바랍니다.」

말해놓고도 장석민은 뿌듯했다. 그간 자하르와 마주하면서 나눈 대화라고는 할 말이 있습니다, 제 편지를 읽어주세요, 결혼하시기 전에 저를 고향으로 내쳐주시겠습니까, 따위였다. 하, 마지막에는 엘시시 타령까지 했었지. 이제야 제대로 남자 대 남자로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걱정 감사합니다.」

자하르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에 용기를 얻은 장석민은 말을 이어나갔다.

「전통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은, 조금이라도 자하르 왕자님께 도움을 드릴 수 있는 부분이 있을까 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계속 얘기해보라는 투로 자하르는 장석민을 바라보았다.

「사실, 이런 말씀까지는 드리지 않으려고 했는데.」

장석민은 흠, 하고 마른기침을 하고 말을 이었다.

「전 원래 이곳에 오기 전에 변호사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될 수 있으면 개인 신상 따위 이곳 사람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지만, 최대한 자신을 그럴싸해 보이도록 포장해야 했다.

「그래서 자하르 왕자님께서 하시는 일 중, 제가 도울 수 있는 부분이 있는지도 알고 싶습니다.」

어차피 자하르가 승낙하지 않을 것임을 예측했다. 장석민에게 필요한 것은 자하르가 오늘 몇 시부터 몇 시까지 공무로 자리를 비우느냐 하는 정보였다. 그 시간동안 탑 지하로 들어가서 0000에서 9999까지 차례대로 비번을 쳐볼 예정이었다.

자하르는 애매한 웃음을 띤 채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어려우시겠죠. 당연히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러시면 그냥 몇 시부터 몇 시까지 공무를 수행하시는지만…….」

큰 것을 포기하는 척하며 작은 것을 요구하는 것은 합의할 때 자주 사용하는 수법이었다. 장석민은 최대한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고개를 숙였다. 물어라, 물어. 사막의 성자라면 동정심을 발휘하여 이 미끼를 물어!

「그럼 그렇게 할까요.」

찻잔이 테이블에 닿는 소리가 달그락, 울렸다.

「정말요? 그럼 몇 시부터…….」

「언제부터 도와주실 수 있으신가요?」

「네?」

「사실 오늘 오후에 해외 귀빈들과 정유 플랜트 시찰을 나갈 예정입니다. 가능하시면 그때 동석해주실 수 있을까요?」

「왜요?!」

저도 모르게 따져 묻고 말았다. 자하르가 웃음을 삼키며 대답했다.

「도움을 주신다고 하셔서 도움을 받으려고 합니다. 오늘 수석 비서가 공교롭게도 공항에서 비행기가 연착되어 시간 내에 올 수 없다는 연락을 해와서요.」

장석민의 머릿속은 하얗게 번져갔다.

「옷은 급한 대로 기성복으로 준비시키겠습니다. 괜찮으신가요?」

장석민은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어, 네, 하고 대답을 했는데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미처 머리로 이해되지 않았다.

「그럼 저는 봐야 할 서류들이 있어서요. 두 시간 뒤에 수행원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자하르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장석민도 얼떨결에 같이 일어났다. 방을 나오면서도 장석민은 정확한 사태 파악을 하지 못한 채였다. 복도의 모퉁이를 지나 대리석 층계참에 선 후에야, 그는 깨달았다.

자하르가 동정심을 발휘해 쓸데없이 커다란 미끼를 물어버린 것을.

최악의 악재는 엘시시 타령이 아니었다.

「러마디 님.」

하캄이 부르는 소리에 장석민은 시트를 뒤집어쓰고 앓는 소리를 냈다.

「러마디 님. 몸이 편찮으신가요?」

하캄이 방문을 열고 들어오며 묻는다. 장석민은 최대한 아파 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어디가 아프신지 말씀해주시면 약을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쉬면 나을 것 같은데요.」

「11시 전까지 준비를 마치라는 전언이 있었습니다.」

수행원에게 건네받은 슈트를 하캄이 의자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아픈데……, …….」

「저런, 어디 가요?」

절대 쉬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장석민은 할 수만 있다면 오늘 아침의 자신의 혀를 실로 꽁꽁 묶어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고 싶었다. 자하르의 시찰을 도우러 갔다가는 수업에도 참석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탑의 지하로 들어가는 기회도 놓치는 것이다. ……심지어 경전을 베껴 쓸 시간도 줄어든다.

「왕자님이 저한테 왜 이럴까요.」

시트를 뒤집어쓴 채 장석민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맹세코, 자하르가 자신의 말도 안 되는 두 번째 청을 들어줄 것이라고는 상상치도 못 했다.

적당히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일한다는 말만 받아오면 그만이었다. 도대체 뭘 믿고 뱃속이 시커먼 하일이 보낸 동양인 청년을 나랏일에 데려간단 말인가!

「자하르 왕자님께서 러마디 님이 제법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그럴 리가 있어요!」

남자가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한다는 얘기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긴, 그렇죠?」

하캄이 시트를 정리해주며 대꾸한다. 그 말이 또 묘하게 기분이 상한다.

「……들어 하면 어쩌죠?」

「그럴 리가요.」

하캄이 산뜻하게 장석민의 쓸데없는 고민을 잘라버리고 그를 자리에서 일으킨다. 하는 수 없이 장석민은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준비를 마치고 자하르의 수행원을 따라 처소를 나서면서도 떨떠름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다. 대체 놈이 무슨 속셈인지 파악이 되지 않는다.

가서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누굴 붙들고 물어볼 사람도 없다.

"뭐, 법적인 자문 정도야. ……그래. 뭐. 이 나라 법이라고 별거 있겠어."

이곳에 있으면서 잊고 있었던 사실들을 떠올렸다. 자신은 성공한 로펌의 변호사였고 훌륭한 인재였음을.

자하르가 어떤 의도로 이번 일에 자신을 대동하는지는 알 수 없어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공을 세워 빨리 한국에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장석민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앞서 걷던 수행원에게 물었다.

「그런데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건가요?」

수행원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손으로 위를 가리켰다. 착륙장에 준비된 군용 헬리콥터의 로터가 엄청난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검은색 헬리콥터의 옆면에는 그려진 새의 문장이 그 위용을 자랑했다.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지금 이 순간부터는 변호사 장석민으로서 모든 일에 임하자. 장석민은 어깨를 펴고 걸음을 옮겼다.

"어이가 없군."

군용 헬리콥터를 타고 사막을 건널 때까지는 이 대단한 일에 참여하는 일원이 된 것 같아 어깨가 으쓱으쓱 했다. 사막 한가운데에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곳에 헬리콥터를 내릴 때만 하더라도 쫙 펴진 어깨가 풀리지 않았다. 그 뒤로 헬리콥터가 두 대 더 착륙했다. 사찰단들과 인사를 나누는 자하르의 모습을 보며 장석민은 자신을 어떻게 소개해야 좋을지 고민했다. 변호사라고 해야 할지, 비서 대신 왔으니 비서 대행이라고 해야 좋을지. 비서 대행으로 일하고 있는 장 변호사입니다, 라고 해야 할까?

결국, 그 고민은 엉뚱한 방향에서 해결되었다.

"독일어로 대화를 나눌 거면 나를 왜 데려와. 최소한 독일어는 할 수 있냐고 물어는 봐야 할 거 아니야."

장석민은 투덜거리며 옷자락만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모든 대화가 독일어로 진행되었다. 통역사도 대동하지 않고 유창한 독일어로 시설을 설명하는 자하르를 보며 장석민은 한숨을 내쉬었다.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시찰단 뒤꽁무니만 따라다니는 자신의 처지가 처량하기 짝이 없었다.

자하르가 시계를 보며 시찰단에게 설명을 하는 와중에 착륙장에 헬리콥터 한 대가 더 내렸다. 그 안에서 내린 인물을 보고 장석민은 손바닥으로 이마를 눌렀다. 하일과 그 수행원들이었다. 장석민을 처음 본 하일 왕자는 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는 표정이었다. 거기에 대한 마땅한 답을 알지 못하기에 장석민은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

「무슨 일이지.」

사이프가 옆으로 다가와 나직하게 물었다. 장석민은 고민하다 모르겠는데요, 하고 대꾸했다.

「미친놈처럼 자하르 왕자님의 뒤를 따라다닌다더니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이냐?」

「그게 아니라……, ……따라다니라면서요.」

그러려고 따라다닌 것은 아니지만 억울해서 한마디 덧붙였다.

「설마, 네놈 따위가, 자하르 왕자님의 명예를…….」

사이프의 턱이 부들부들 떨렸다. 장석민은 두 손을 내저으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절대 아닙니다. 절대로. 하일 왕자님께도 아직은 절대 아니라고 전해주세요. 오늘은 어쩌다가 온 것입니다.」

사이프가 장석민을 미심쩍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하일에게 가서 귀엣말 했다. 잠시 기대를 거는 듯한 표정이었던 하일의 표정이 순식간에 구겨졌다. 이후로도 하일의 심기는 썩 좋지 않았다. 분위기를 봐도 목석 같은 동생이 동양인 청년을 마음에 두는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 증거로 시찰하는 도중에 장석민과 눈을 마주친다거나 따로 말을 건네는 일도 없었다. 장석민은 저 멀리서 혼자 하릴없이 주변만 둘러보았다. 자신이 보낸 후궁을 데려와서 이런 식으로 취급한다는 사실에, 하일의 자존심이 상하는 모양이었다.

"미치겠네."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하일뿐만이 아니었다. 터덜터덜 걸어가는 장석민의 표정도 불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자하르 왕자를 붙들고 자기를 대체 여기에 왜 데려왔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럴 기회조차 없었다. 자하르의 수행원은 물론이고 시찰단으로 온 외국 손님들의 가드가 그들을 빙 둘러싼 채였던 것이다. 게다가 아까부터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사이프 때문에 장석민은 구석에서 옷자락만 쭈글쭈글 주물렀다.

명색에 변호사인데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인가 싶어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러던 도중 자신을 흘깃거리며 지나가는 꼬마가 눈에 들어왔다. 시찰단과 함께 내린 아이였다. 나이는 열 살쯤 되었을까. 옷차림을 봐서는 시찰단 일행의 자제인 듯싶었다. 어린아이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뭐든 하자는 생각에 장석민은 친절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꼬마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건방진 놈이.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장석민은 자신이 알고 있는 거의 유일하다 싶은 독일어로 Wie heisst du, 라고 이름을 물었다.

「du가 아니라 Sie겠지.」

「어? 영어 할 줄 알아?」

장석민이 반갑게 물었다.

「그럼 에드문트 정유회사의 후계자가 영어도 못할 거라고 생각했어? 이상한 사람이네.」

한 대 쥐어박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장석민은 꼬마에게 이름을 물었다.

「그래서 이름이 뭔데?」

「상대방의 이름을 묻기 전에 자신의 이름을 먼저 대는 게 예의라는 것쯤은, 배우지 않나?」

장석민은 되바라진 꼬마의 말에 차라리 입 닥치고 옷자락만 만지고 있을 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내 이름은 장, ……, 쟝이라고 불러.」

「쟌느? 헤, 계집애 같은 이름이네.」

장석민은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보지 않을 때 재빨리 한 대 후려갈기자는 생각이 무럭무럭 솟아났다.

「내 이름은 에드문트 빈 요아힘.」

당연히 들어는 봤겠지, 하는 표정이었다. 장석민은 그래, 하고 무성의하게 대꾸하고 고개를 돌렸다. 통성명을 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지칠대로 지친 그였다.

어린애 따위, 그것도 남자 어린애 따위. ……꺼져.

「여기 정말 근사하지 않아?」

장석민의 속을 알 리 없는 요아힘이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이 공사가 끝나면 우리 회사는 물론이고 너네 나라도 엄청난 돈을 벌게 될 거야.」

「우리나라 아닌데?」

「시종 아니었어?」

「……아니란다.」

강하게 반박을 할 수 없는 점이 참 서글펐다. 같이 일하러 온 사람이라고 말하기에는 언어의 장벽이 너무 높았다.

「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니고 있어서 시종이나 가드인 줄 알았지 근데 가드치고는 체격이 왜소하고.」

요아힘이 같이 헬리콥터에서 내린 가드들을 턱짓하며 말했다. 보통의 성인 남자 두 배는 되는 덩치들이 위압적으로 걸어 다니고 있었다. 어린아이치고 제법 괜찮은 통찰력이었다.

「가드도 시종도 아니야.」

「그럼 뭔데?」

……지나치게 좋아서 문제였다. 장석민은 휘파람을 불며 일부러 시선을 회피했다.

「뭔지 알 것 같다.」

요아힘이 눈을 가늘게 뜨고 손가락을 두어 번 흔들었다. 장석민은 예끼, 하면서 꼬마의 손가락을 억지로 쥐게 했다.

「우리 삼촌 중에도 한 명, 그런 사람이 있거든. 결혼도 했고 아이도 있지. 다들 신경 쓰지 않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난 여자를…….」

언성이 높아지자 이쪽을 돌아보는 시선이 두엇 생겼다. 장석민은 흠, 하고 이성을 되찾았다.

「됐어. 어린애하고 이런 대화 나누고 싶지 않아.」

「아하, 그래. 잔느.」

요아힘이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장석민은 주먹을 몇 번이나 쥐었다 피었다. 공사 현장을 둘러보며 시설에 대한 시찰은 삼십 여분이나 계속되었지만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똑똑하고 교육이 잘되었다 하더라도 열 살짜리 어린아이였다. 요아힘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만만한 상대에게 장난을 걸기 시작했다.

「잔느, 우리가 타고 온 헬리콥터가 얼마짜리인 줄 알아?」

「관심 없어. 내 것도 아닌데, 뭘.」

대답해놓고 너무 심했나 싶어서 장석민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요아힘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안됐네. 헬리콥터 한 대도 없는 몸이라니.」

「…….」

동네에서는 고깃국 꽤나 먹었던 관사 댁 아들이었지만 이곳에서는 명함도 내밀지 못했다. 장석민은 어금니를 물고 억지로 웃어 보여야 했다.

「영어는 어디서 배운 거야? 발음이 좀 후지긴 한데 그래도 쓸 만하네.」

「너보다 낫다.」

요아힘의 발음은 독일인 특유의 딱딱한 악센트가 묻어났다. 유치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장석민은 그렇게 맞받아쳤다. 그의 내면 깊은 곳에서도 부잣집 막내아들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요아힘이 걸음을 멈추었다. 장석민이 고개를 돌리자 요아힘이 있는 힘껏 장석민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

장석민이 눈을 부라리며 정강이를 움켜쥔 채로 요아힘을 노려보았다. 요아힘이 가운뎃손가락을 살포시 들어 보이며 재빨리 달려가기 시작했다. 장석민이 야, 하고 요아힘을 뒤쫓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공사 현장을 누비고 있는 동양인 청년과 꼬마에게 쏠렸다. 요리조리 피해 다니던 요아힘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장석민의 손에 뒷덜미를 잡혔다.

"이 건방진 놈이."

요아힘이 독일어로 빠르게 소리치자 에드문트 정유회사의 회장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이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가 공격적인 독일어로 장석민에게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장석민은 차분하게 영어로 상황을 설명하려 했지만, 그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게 아니고, 댁의 아드님이 나한테 이랬다니까요.」

장석민은 시뻘겋게 자국이 남은 정강이를 보여주기도 했지만 에드문트의 회장은 장석민의 손에서 제 아들을 뺏어냈다. 그러고는 장석민의 얼굴에 손가락질하며 속사포처럼 살벌한 독일어를 퍼부었다. 비언어적 소통이란 어쩜 이리도 훌륭하단 말인가.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는데 장석민은 그것이 욕과 협박이 적절히 혼합된 내용임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옆집 아이에게 얻어맞고 부모를 찾는 아이 같은 얼굴로 장석민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하르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곤란하다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이번에는 하일이었다. 놈은 살벌한 기세로 노려보며 손가락으로 목을 그어 보이는 시늉을 했다.

이 머나먼 타국에는 억울함을 토로할 만한 상대가 아무도 없었다. 장석민은 결국 부모 없는 아이처럼 풀이 죽어 에드문트 회장에게 고개를 숙였다. 자하르가 잘했다는 듯이 고갯짓을 해 보였지만 장석민의 기분은 바닥을 기었다. 시찰이 다시 재개되었고 장석민은 성가신 꼬마와 최대한 멀찌감치 떨어져 걸으려 노력했다.

「기분 나쁘겠지만 어쩔 수 없어.」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요아힘이 히죽거리며 말했다. 너는 떠들어라 나는 내 갈 길 갈련다. 장석민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너 같은 피고용인들을 죽는 한이 있어도 고용인을 뛰어넘지 못하거든. 그게 사회의 계급 구조야.」

장석민은 삐딱하게 독일 꼬마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말자, 말아. 이런 어린애하고 입씨름해서 뭘 어쩔 건데.

「그래서, 넌 시급이 얼마인데?」'

요아힘이 물었다. 장석민은 귀에 손가락을 꽂고 바바바바, 하는 소리를 내며 무시했다. 그러자 요아힘이 다시 한 번 장석민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너, ……찬 데를, 또, ……."

장석민이 정강이를 움켜쥐고 눈을 부락렸다. 요아힘은 이번엔 도망갈 생각조차 하지 않고 느긋하게 그 옆을 걸었다.

장석민은 분노했다.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흔들리지 않는 피라미드 구조에, 군대 선임에게조차 한 번도 걷어차이지 않은 자신의 신성한 정강이를 두 번이나 걷어찬 꼬마 놈에게, 말 한마디 건네지 않을 거면서 자신을 사막 한가운데 공사장에 끌고 온 자하르 놈에게, 여자랑 말 한마디 잘못했다고 자신을 죽이겠다고 잡아온 하일 놈에게, 그리고 무엇보다 고등학교 시절 제2외국어로 독일어도 아랍어도 아닌 일본어를 선택한 자신에게.

"야! 야! 야!!!!!"

장석민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얼마나 크게 소리를 내질렀는지 공사 현장에서 일하고 있던 사람들까지 이쪽을 쳐다볼 정도였다. 장석민은 요아힘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에드문트의 회장이 시뻘게진 얼굴로 멀리서 달려왔다. 이성의 끈을 놓아버린 장석민은 보란 듯이 요아힘의 멱살을 쥐고 흔들었다. 회장이 달려들어 장석민을 말리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이런 놈은 콱, 그냥, 볼기짝을 한 대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고."

어릴 때 형들에게 즐겨 듣던 레퍼토리를 자신의 입으로 내뱉으며 장석민은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회장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결국 자하르와 하일까지 이쪽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자하르가 다가와 장석민을 말리려 했지만 장석민의 귀에는 이미 다른 사람의 목소리 따위 들리지 않았다. 이 버르장머리 없는 금발 꼬마의 궁둥이를 홀라당 까서 내리치는 것만이 지상 최대의 과제였다.

에드문트 회장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하일이 씩씩거리며 달려와 장석민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너 당장 그 손 놓지 않으면 내가…….」

그 뒤에 이어질 끔찍한 가정은 듣지 못했다. 우지끈하는 굉음이 하일의 목소리를 덮어버렸다.

「──!」

「──!!」

「…….」

모두 기겁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타워크레인의 줄이 끊어져 시추를 위해 세워둔 탑의 하부가 완전히 망가졌다. 비명이 터져 나왔다. 간발의 차였다. 조금만 늦었어도 자하르와 하일뿐만 아니라 에드문트의 회장까지 크레인에 깔려 고깃덩어리가 되었을 게 분명했다. 아슬아슬하게 크레인의 추락을 피한 하일과 자하르의 얼굴이 굳었다. 에드문트 회장의 새빨갛던 얼굴도 하얗게 질렸다. 장석민은 눈앞의 참사에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요아힘의 옷자락을 쥐고 있던 장석민의 손에서 툭, 힘이 풀렸다.

근처의 인부들이 달려왔지만, 미처 피하지 못해 크레인에 깔린 사람들을 구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여기저기에서 소리를 지르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구급차가 달려왔다. 공사장은 금세 아수라장이 되었따.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자하르가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무서우리만치 냉정한 그의 상황 판단능력에 우왕좌왕하던 사람들도 질서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에드문트 회장이 장석민을 돌아보았다. 장석민은 놀란 눈을 슴벅거리다 입을 떼었다.

「……, 댁의 아드님이, ……그러니까…….」

에드문트 회장이 장석민의 손을 움켜쥐었다. 이대로 내 손은 중동 놈이 아닌 독일 놈에게 잘리는 건가 하고 장석민은 눈을 질끈 감았다.

독일어가 속사포처럼 쏟아졌다.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깨닫기 전에 에드문트 회장이 장석민을 끌어안았다. 그 와중에도 그는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에드문트 회장에게 안긴 채, 장석민은 평생 들을 Danke는 그날 모두 들을 수 있었다.

"아, 아니, 괜찮, ……그, ……."

당황해서 영어도 나와 주지 않았다. 눈이 마주친 자하르는 미묘한 표정으로 장석민을 보고 고개를 숙였다. 오만한 하일마저 고개를 까닥, 움직였다.

결과적으로 장석민이 그들의 목숨을 구한 것이다.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은 그다음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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