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5/35)

"부적을 갖고 올걸."

장석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중얼거렸다. 후회가 밀려왔다. 그런다고 없던 부적이 생기는 것은 아니었지만 기댈 데 하나 없는 이곳에서 이상하게 그 부적 생각이 간절했다. 

자하르가 눈을 뜨지 못한 지 사흘째다. 다들 걱정은 하고 있지만, 그가 멀쩡하게 일어서리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처음엔 장석민도 자하르가 얼른 눈을 뜨길 바랐지만 하캄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에는, 그 마음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자하르가 늦게 눈을 떴으면 했다. 가능하다면 이믈라쿤 기간이 끝나고 눈을 떠준다면 정말 좋으련만.

"그럼 하일이 계승자가 되겠지."

장석민은 침대에 앉은 채 두 손을 모았다.

"하느님, 부처님, 알라님, 제발 누구든 좋으니까 자하르가 왕위 계승 기간이 지난 후에 멀쩡하게 눈을 뜨게 해주세요.

그렇게만 되면 자신은 손 안대고 코 푸는 격이 된다. 장석민은 중얼거리며 믿지도 않는 신들에게 간곡한 기도를 올렸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장석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어주었다. 낯이 익은 어린 시종이었다. 시종이 종이를 내밀었다.

「이게 뭔데?」

시종이 고개를 내젓기만 했다. 그가 영어를 알아듣지 못한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기에 장석민은 한숨을 내쉬고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시종이 사라지고 나서 문을 닫았다.

곱게 접힌 종이를 펼쳐보니 거기에는 빨간 글자로 22라는 숫자가 큼직하게 적혀 있었다.

"누가 모른대!"

장석민은 종이를 구겨서 바닥에 내던졌다. 차라리 하일을 만나고 싶었다. 머리를 벅벅 문질렀다. 방구석에서 자하르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도록 빌고나 있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느낌이 좋지 않아,"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수만은 없다. 장석민은 베일을 집어 들고 머리에 둘렀다. 자신이 얻을 수 있는 정보의 창구는 둘이다. 하캄에게는 들을 만큼 들었기에 나머지 다른 창구를 찾아가자고 마음먹었다.

나가기 전에 거울을 보며 매무시를 가다듬었다. 예쁜 꽃들을 보며 심란한 마음을 달래려는 의도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수업 시간에 맞춰 후궁들이 모여 있는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지는 않을까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지만 들려오는 것은 알아들을 수 없는 아랍어뿐이었다. 영어로 대화를 나누는 후궁들도 몇 보였지만 남자 러마디인 장석민이 끼어들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여자들 사이에서 소외감을 느껴본 적 없는 그였기에 평소처럼 능숙하게 말을 건네기도 힘들었다. 주저주저하며 눈치를 살피던 장석민의 앞으로 어제 빗자루를 집어던진 여자가 다가왔다.

「식사는 하셨어요?」

장석민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 말인가? 지금 나한테 말하는 건가?

「아침 식사는 하셨냐고요.」

아무랟 자신에게 묻는 말인 것 같아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뒤늦게 오늘의 모임은 공복으로 와야 하는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일본에서 오셨나요?」

「그런데 베일을 쓰지 않으면,……저랑 말해도 됩니까?」

「원칙적으로는 가능합니다. 비르마 님이 금지하시는 것뿐입니다. 대화를 나누어도 됩니다.」

외국에서 동양인은 일본인 아니면 중국인인 줄 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기에 장석민은 웃으며 한국인입니다, 하고 답했다.

「원래 하일 왕자미과 원래 아는 사이였어요?」

「네? 아, 그건 아니고, 그, 그냥 어쩌다가 그렇게 됐습니다.」

여기에 들어온 이후로 여자가 먼저 말을 걸어온 적이 없었기에 장석민은 말을 더듬었다. 바보 같은 놈. 여자에게 말을 더듬다니. 뒤늦게 자신을 꾸짖었지만 이미 혀는 꼬인 후였다.

여자는 으흠, 하고 생각하는 척하다 입을 열었다.

「그날, 뭔가 본 거 있어요?」

아, 이거구나. 여자가 다가와서 다정하게 밥을 먹었는지, 출신지가 어디인지, 이것저것 물어본 의도가.

「혹시 뭐 본 거 있어요?」

장석민의 대답이 바로 돌아오지 않자 여자가 재차 물었다.

「아, 아니요.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손을 열심히 내저었다. 그가 사라진 방향이 정신을 잃고 쓰러진 자하르가 발견된 방향과 비슷해서 여자가 확인 차 묻는 게 분명하다.

「그런데 왜 심부름을 시켰는데 그대로 사라진 거죠?」

여자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추궁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헤매다가 그냥 돌아갔습니다. 제가 아직 궁의 지리는 정확히 잘 몰라서요. 죄송합니다.」

이미 생각해두었던 답변이라 막힘없이 술술 나갔다. 여자의 얼굴에 언뜻 실망의 기색이 스쳤다. 상황 파악이 덜 된 동양인 청년에게 결정적인 증거를 얻어내려는 의도가 빤히 보였다.

속 보이는 여자가 얼마나 귀여운데, 차라리 그게 낫잖아.

그렇게 떠들어대던 자신의 입을 꿰매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장석민에게서 얻어낼 정보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여자는 그럼, 하고 차가운 공기를 흩뿌리며 자리로 돌아갔다.

장석민은 에구, 하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곳에서 남자 러마디는 말 그대로 있으나 마나 한 존재였다. 아니, 없어져야 할 존재였다. 혹시라도 성스러운 자하르 왕자의 명성에 누가 될까 봐 다들 장석민을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있었다.

"나도 관심 없다니까. 내가 관심 있는 건 니들이라고."

장석민은 한숨을 섞어 중얼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그나마 영어로 숙덕거리는 소리를 엿들은 결과 범인을 반드시 색출해야 한다는 얘기와 얼른 자하르가 눈을 뜨길 바란다는 쓸데없는 내용이 대다수였다. 후궁들 사이에서 앞줄을 차지하고 있는 대다수는 아랍어를 사용했다. 그들이 자세한 내막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혹시나 싶어 옆에 앉아있던 금발의 후궁에게 말을 건네 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싸늘한 침묵이었다.

「핸드폰 있으면 빌려주시면 안 될까요?」

통하지 않을 수작을 걸어봤지만, 이번엔 아예 쳐다보지 않는다. 후궁들은 이곳에서 통신 기기가 금지된다는 이야기를 이미 하캄에게 들었던 터다. 왕자가 누군가와 결혼을 하고 후궁들에게 은총을 내리기 전까지 다른 남자와 내통할 가능성을 차단하려는 이유라고 했다.

이토록 멋진 남자가 옆에 있어도 눈길 한번 주지 않는데 내통은 얼어죽을. 망할 놈들.

이곳에서 더 이상은 얻어낼 정보가 없을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한 순간 비르마가 들어왔다. 엉거주춤하게 서 있던 장석민과 눈이 마주치자 비르마가 물었다.

「어딜 가려고 하는 겁니까?」

「아? 저 잠시 볼일이 생각나서…….」

화장실을 가려 한다는 구태의연한 변명이 떠올랐지만 숙녀들 앞이니 최대한 고운 말을 사용했다.

「지금부터 자하르 왕자님을 위한 기도가 시작될 겁니다. 다들 착석하세요.」

노인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장석민은 깨갱하고 자리에 앉았다. 

「위대하신 아나크 왕의 전통을 이어 타르카 왕국에만 대대로 전해지는 전통 기도를 올릴 겁니다.」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장석민은 저 아나크라는 놈과 타르카 왕국의 전통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를 따라 하시면 됩니다.」

비르마가 바닥에 러그를 깔고 무릎을 꿇고 앚았다. 다들 그녀를 따라 했다. 러그가 준비되지 않은 장석민만 맨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대리석 바닥이 차가웠지만,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도 무릎을 꿇고 있는 이 상황에 불평을 토로할 수 없었다.

기도라고 해봤자 얼마나 하겠어.조금만 하다가 눈치 봐서 슬쩍 빠지자. 장석민은 마음을 고쳐먹고 비르마가 행하는 대로 동작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기도는 세 시간가량 지속되었다.

「점심을 드신 후에 다시 이곳으로 오시면 오늘의 두 번째 기도가 시작될 겁니다. 자리를 잡고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허리를 두드리며 일어서던 장석민은 비르마의 말에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대체 저놈의 노인네는 무슨 기운으로 이 긴 시간 기도를 하고도 멀쩡해 보이는 건데.

거의 마비가 된 다리를 질질 끌고 나오면서 장석민은 점심때는 기필코 방에 처박혀 나오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정원을 지나 처소로 가던 중에 그의 눈에 익숙한 얼굴들이 들어왔다.

"어!"

절뚝거리는 다리로 열심히 뛰어가 장석민은 그들의 앞을 가로막아섰다. 하일이 대번에 낯을 찌푸렸다. 사이프가 노기 띤 음성으로 장석민을 꾸짖었다.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죄송합니다.」

장석민은 얼른 한 발자국 물러서며 예를 갖추었다. 하일이 코웃음을 치며 눈을 내리깔았다.

오만한 중동 놈.

속으로 욕설을 삼키며 장석민은 입을 열었다.

「소식은 들으셨습니까?」

「무슨 소식?」

「……자하르 왕자님의…….」

하일이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얼굴로 대꾸했다.

「지금 내 동생의 문병을 온 것이다.」

「그러니 어서 비키거라.」

사이프가 장석민을 밀어내려 했다. 장석민은 그러나 쉽게 길을 내주지 않았다.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정원의 건너편으로 지나가던 시종들이 하일과 동양인 청년이 같이 있는 모습을 보고 힐끔거리기 시작했다. 하일은 슬슬 짜증이 치밀었다. 사이프가 목소리를 낮추며 당장 길을 비키라고 말했지만 장석민은 못들은 척 자리를 지켰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보는 자리에서 본인이 보낸 러마디의 목을 내칠 수가 없었다.

하일이 손을 들어 주변을 물렸다.

「무슨 이야기냐.」

장석민이 고개를 들었다.

「자하르 왕자님께서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들었습니다.」

「알고 있다.」

그리 답하는 하일의 얼굴에 언뜻 미소가 스쳤다. 혹시, 하는 생각에 장석민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사람들을 보낸 것이…….」

「하일 왕자님께서 그런 더러운 짓을 할 것 같으냐. 말조심해라. 혀를 자르기 전에.」

사이프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칸자르의 날을 보여주며 눈을 부라렸다. 장석민은 등허리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래도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이번 일은 계승권 문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겁니까?」

하일이 피식, 실소를 삼켰다.

「이믈라쿤이 끝나기 전까지 의식을 찾지 못하면 그렇겠지.」

주어가 없는 문장이었다. 아무리 자하르에 대한 왕의 신임이 두터워도 정신이 없는 아들을 후계자로 지목할 수는 없는 것이다. 장석민은 음, 하고 입술을 물었다가 질문했다.

「……그러길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만약, 만에 하나, 아주 희박한 가능성으로 자하르 왕자님이 그때까지 의식을 찾지 못하면…….」

하일이 소리 내어 웃었다.

「너는 지금 네가 한 말로 왕족에 대한 반역죄로 처벌받을 수 있다.」

장석민은 그게 아니고요, 하고 재빨리 덧붙였다.

「저는 그저, 위, 위대하신 하일 왕자님께서 계승자로 지목을 받으시면 어떻게 될는지 궁금했던 것입니다.」

속이 메슥거렸다. 마음에도 들지 않는 2번 놈에게 아부를 하자니 손발이 오그라드는 기분이었다.

「그건 당연한 일이지. 자하르가 어떻게 되든 내가 오를 자리다.」

하일이 콧대를 높이 쳐들었다. 지금까지 본 얼굴 중에 제일 기분 좋아 보이는 낯짝이었다. 당연하긴 얼어죽을. 동생을 비역질로 타락시키라고 나를 보낸 주제에. 장석민은 욕을 집어삼키며 말을 이었다.

「그럼 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하일이 치켜들었던 턱을 내렸다. 한국으로 돌아가라는 대답을 가리키며 장석민은 하일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떻게 되다니?」

「하일 왕자님께서 계승자가 되시면 저는 언제쯤 돌아갈 수 있을까 해서요.」

「네가? 어째서?」

무쇠 칼로 끝을 쳐낸 듯한 딱딱한 하일의 영어 발음에 장석민은 속이 타들어 갔다.

「당연히, 그러기로 약속을……. 」

「내가 너에게 약속을 했다고?」

수염이 두텁게 난 하일의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그려졌다.

「나는 네가 자하르의 명예를 더럽히면 너를 고향으로 보내준다고 약속했다.」

「그……!」

「그러니 자하르가 이대로 죽어버려서 내가 후계자가 된다고 해도 너를 돌려보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지.」

장석민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황당함에 말도 채 잇지 못하는 사이 하일이 자리를 떠날 채비를 했다.

「이젠 저리 비켜라.」

사이프가 장석민을 밀어냈다. 장석민이 떨리는 손으로 하일의 옷자락을 낚아챘다.

「애초에 그럼 그냥 죽이겠다는 소리잖아요. 당신도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아는 거 아닙니까?」

배를 강타하는 충격에 장석민은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사이프가 장석민을 발로 걷어찬 것이다.

「감히 왕족의 옷을 더러운 손으로 만지다니. 네놈이 제정신이 아니구나.」

제정신이건 아니건 장석민은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냥 한 달 뒤에 죽이겠다는 거……, …….」

장석민은 힉, 숨을 삼켰다. 목덜미에 새파란 칼날이 들어왔다.

「원하면 지금 죽여주마.」

하일이 히죽 웃었다. 빌어먹을 새끼. 놈은 자신을 지금 바닥에 기는 개미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장석민은 입술을 깨물었다.

하일이 칼을 거두었다. 그가 손짓하자, 물러서 있던 수행원들이 그의 주변을 둘러쌌다.

「선택은 어차피 너의 몫이다.」

하일이 복도 끝을 사라질 때까지 장석민은 입술을 질근질근 깨물었다. 그가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는 자리에서 발딱 일어섰다.

"이, 개, 쌍, 씹, 좆, ……. ……!"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분노의 불길이 그의 온몸을 휘감았다. 장석민은 방금 나온 교실로 달려갔다.

자하르가 이대로 눈을 뜨지 않으면 장석민에게는 한국으로 살아 돌아갈 기회조차 없다. 장석민은 간절한 마음으로 두 손을 모았다.

"하나님, 부처님, 알라님, 제발, 제발이요, 8번이요. 8번입니다. 8번이 계승자가 되게 해주세요. 자하르가, 그놈이 왕이 되게 해주세요. 제발이요. 네? 제발이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간절하고 절실하게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대단하십니다.」

하캄의 말에 수프를 먹고 있던 장석민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 밑이 퀭하게 꺼져 있었다.

「매일 새벽, 점심, 저녁, 늦은 밤 할 것 없이 아즈나둔을 하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아즈나둔은 타르카 왕국의 전통 기도였다. 비르마가 알려준 대로 장석민은 시도 때도 없이 자하르의 의식이 돌아오길 기도했다. 바닥에 엎드려 믿지도 않는 신에게 기도를 올리는 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라는 사실에 분노가 치밀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자하르가 눈을 떠야 했다. 그것만이 살길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눈도 뜨지 못한 환자를 욕보여야만 할 판국이다. 그 커다란 남자를 어떻게 할 생각만 하면 속이 울렁거렸지만, 환자를 추행한다는 것은 도의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걸리면 이것대로 왕족 능멸죄로 참수형에 처해질 게 분명했다.

「하는 수 없잖아요.」

장석민이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쉬며 대답하자 하캄이 그의 옆으로 접시를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꿩고기 요리입니다. 요리장에게 특별히 부탁했습니다.」

어째서 이걸 내게? 하는 얼굴로 장석민은 눈을 껌뻑였다.

「러마디 님의 연심이 얼마나 지고지순한지 모두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장석민의 반듯한 이마에 내천 자가 그려졌다. 하캄이 흐뭇하게 웃으며동양인 청년에게 꿩 요리를 내밀었다.

「……잘 먹겠습니다.」

사실 오늘로 기도 따위 그만두고 도망갈 길을 다시 찾아볼 생각이었다. 자하르가 의식을 잃은 지 닷새째. 숨통이 조여 오는 기분이었다. 방에 있으면 미칠 것 같은 기분에 매일 나가서 기도를 하고 있었다. 궁에서 탈출하는 건 불가능했다. 기도로 사람이 의식을 찾는 것도 불가능했다. 불가능과 불가능 사이에서 장석민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자신에게 남겨진 유일한 시간일지 모르는 나날을.

힘없이 꿩고기를 입안에 넣고 우물우물 씹었다. 향신료가 강하긴 했지만 씹을수록 끝 맛이 좋았다. 문득, 슬퍼졌다. 이렇게 해가 좋은 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죽는 날만을 걱정하고 있어야 한다니

장석민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걸 본 하캄이 놀라서 손수건을 내밀었다.

「괜찮습니다. 러마디 님. 자하르 왕자님은 꼭 일어나실 겁니다.」

「못 일어나면 어쩌죠?」

장석민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숨을 내쉴 때마다 눈물방울이 후드득 떨어진다. 까만 눈동자에 인 슬픔이 진실하다는 것을, 오랜 세월을 살아온 하캄은 알아챘다.

쯧쯧.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동방에서 온 청년은 소문대로 오매불망 자하르 왕자만을 그리워했다. 아무리 그 연심이 깊다 하더라도 남자 러마디는 내보내지는 존재였다. 자하르 왕자가 계승자가 되어 왕위를 이어받게 된다면 그 옆에는 아리따운 공주나 여자 후궁이 차지하게 될 것이다.

안타까운지고.

하캄이 혀를 차며 동양인 청년의 어깨를 도닥여주었다. 그의 다정한 손길에 장석민은 허엉, 하고 목을 놓아 울음을 터트렸다.

「죽으면 어쩌죠?」

「절대로 죽지 않으실 겁니다.」

「죽으면 안 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주어 없는, 완벽한 오해가 이어졌다. 장석민은 흐느끼며 어쩌죠, 어쩌죠, 하고 중얼거렸다. 하캄은 괜찮습니다, 하고 다정하게 그를 위로했다. 그때 저 멀리서 하얀 옷을 입은 시동이 헐레벌떡 달려오며 손을 흔들었다.

『하캄 님! 하캄 님!』

『뛰어다니지 말거라. 그러다 윗분들이 보시면 경을 친다고 몇 번을 말하지 않았느냐.』

하캄의 말투는 엄했지만, 눈빛은 다정했다. 그가 시종들 사이에서 존경을 받는 이유는 하루 이틀만 지내도 알 수 있었다.

『……셨습니다.』

『숨넘어가겠다. 인석아.』

하캄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물을 시동에게 내밀었다. 땀으로 흥건한 이마를 닦아내며 시동이 헐떡헐떡 숨을 토했다.

『뜨셨습니다.』

건네준 물도 마시지 않고 시동이 말을 이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아랍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장석민은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훔치며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눈을, 눈을 뜨셨습니다! 왕자님께서 눈을 뜨셨습니다.』

『그 말이 사실이냐?』

하캄의 얼굴에 기쁨이 번졌다. 장석민의 시선이 하캄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정말 그 말이 사실이냐?』

「뭔데요. 왜요? 무슨 말이에요?」

장석민이 하캄을 붙들고 물었다.

「깨어나셨다고 합니다.」

「……누……, …….」

「자하르 왕자님께서 깨어나셨다고 합니다.」

장석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먹을 공중으로 휘둘렀다.

됐다. 된 것이다. 이제는 살 수가 있어.

"감사합니다. 하느님, 부처님, 알라님."

장석민이 두 손을 모르고 뜨거운 쌍루를 흘리는 모습을 본 시동이 웃음 터트렸다. 동양에서 온 청년의 자하르 왕자에 대한 일편단심은 이미 궁내에서 소문이 파다한 상태였다.

장석민은 시동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젠 괜찮은 거지? 그럼 이믈라쿤에 참여할 수 있는 상태시지?」

영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시동이 송아지처럼 큰 눈을 껌뻑이며 하캄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떤 상태인지 이 아이도 정확히는 모를 겁니다.」

「그래도 눈을 떴으니 괜찮은 거죠?」

하캄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야완은 신경을 마비시키는 독이었다. 독이 몸에 퍼지기 전 해독하는 시간이 중요한데 다행스럽게 빠른 시간에 조치가 취해진 것이다. 모두 신이 자하르 왕자를 살린 것이라고 말했다. 본인이 신이 된 줄 모르는 장석민은 다시 한 번 만세를 불렀다.

"시발, 감사합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신에게 감사 기도를 하고 싶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자하르에게 달려가 니 형이 날 죽이기 전에 한국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상대가 환자인 것을 생각해 오늘은 참기로 했다.

시동이 하캄의 옷자락을 흔들며 뭐라고 말을 건넸다. 하캄이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러마디 님.」

「네?」

「모든 후궁을 파이룬으로 모시라는 전언이 있다고 합니다.」

파이룬은 비르마가 궁전 예절을 가리키는 교실이 있는 건물이었다. 마지막 기도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장석민은 대답도 하지 않고 그대로 내달렸다. 하캄이 뒤에서 뛰지 말라고 소리쳤지만, 그의 모습은 모퉁이를 지나 사라지고 난 후였다.

『모든 후궁을 파이룬으로 모시라 했느냐?』

하캄의 물음에 시동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분도 빠짐없이 모시라 전해 들었습니다.』

『누가 그런 명을 내렸느냐?』

시동이 그게, 하고 머리를 긁적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들으셨어요?」

장석민이 문을 열고 뛰어들자 안에 있던 여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향했다. 비르마가 미간을 찌푸렸다. 해맑은 미소를 띤 채 장석민이 말을 이었다.

「자하르 왕자님께서 깨어나셨다고 합니다.」

「모두 알고 있어요. 그래서 모인 겁니다.」

「진짜 기도를 해서 일어난 건가 봐요.」

장석민의 목소리에 기쁨이 넘실거렸다. 해처럼 밝은 장석민의 얼굴에 후궁들 몇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베일을 쓰고 있을 때는 무시할 수 있어도 고스란히 민얼굴을 드러낸 그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땀내에 섞인 남성의 내음이 교실에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베일을 쓰셔야 합니다. 몇 번을 말씀드려야 하나요.」

비르마가 장석민을 꾸짖었다.

「어, 죄송합니다. 급하게 뛰어오느라…….」

장석민이 손으로 자신의 정수리를 더듬으며 말했다. 급한 대로 손바닥으로 머리를 가린 채 그가 말을 이었다.

「완전히 괜찮아지신 겁니까?」

「아직 정확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 일단은 그렇습니다.」

장석민은 됐어, 하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런데 여기서 왜 다 모이라고 한 겁니까?」

후궁 몇이 평소처럼 장석민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려다 어물어물 고개를 돌렸다. 해사하게 웃고 있는 동양인 청년의 얼굴이 몹시 눈부시게 느껴진 터다.

「전할 말씀이 있다 하셨습니다.」

장석민은 눈을 껌뻑거렸다. 그제야 머리가 이성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누가? 누가 이 궁의 후궁들을 모두 모아놓고 말을 하겠다고 하는 것인가.

「어떤 분이요?」

장석민에게 빗자루를 집어 던진 후궁이 물었다. 그녀가 꽤나 지체 높은 집안의 여식이라는 사실을 장석민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질문에는 감히 누가, 라는 맥락이 숨겨져 있었다. 후궁들은 왕자의 소유이기에 감히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죄송합니다. 제가 부탁을 드렸습니다.」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다들 황급히 예를 갖추었다. 장석민은 헉, 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자하르가 예의 그 상냥한 미소를 띤 채 걸어들어왔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황송할 만큼 곱고 아름다운 자태였다.

전보다 수척해지긴 했지만, 중상을 입고 얼마 전까지 의식을 차리지 못했던 사람이라고 믿기 힘든 얼굴이었다.

비르마가 헛기침을 하며 장석민에게 눈짓을 했다. 장석민은 자신이 자하르의 앞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뒤로 물러섰다. 자하르가 옆을 지나가자 장석민은 소름이 쭈뼛 돋았다. 자연스럽게 그날 지하에서 피를 뒤집어쓰고 있던 자하르의 모습이 떠오른 것이다.

「제가 비르마 님께 부탁을 드려 다들 모이시라고 했습니다. 바쁘실 텐데 죄송합니다.」

자하르가 정중하게 사과의 말을 건네자 다들 얼굴을 붉혔다. 다들 아니라고 외치고 싶은데 꾹 참고 있는 게 눈에 보인다.

장석민은 자하르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그날 자신에게 칼을 겨누고 웃던 남자는 어디로 간 것일가.

시선을 느낀 자하르가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친 장석민은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괜스레 찔려 눈을 내리깔았다.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후궁들 사이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후궁 중 누구라도 곁에 둘 수 있을 텐데 구태여 이렇게 모이게 한 까닭을 다들 궁금해했다.

「얼마 전에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가녀린 여자의 몸으로 목숨을 걸고 저를 도와주신 분입니다.」

장석민은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 손바닥에 흐르는 식은땀을 들키지 않으려고 손을 등 뒤로 숨겼다.

「우리를 지켜주고 계신 신과 그분이 아니었다면 저는 이 자리에 없었을 겁니다.」

자하르가 후궁들을 둘러보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분이 나타나지 않고 계시다는 말씀은 전해 들었습니다.」

장석민은 1초라도 빨리 이 자리를 떠나고 싶었다. 안 좋은 예감이 온몸을 쿡쿡 찌르고 있다.

「반드시 찾고 싶습니다.」

자하르의 나긋한 음성에서 단호한 의지가 느껴졌다. 상황을 알 리 없는 후궁들은 서로 들뜬 얼굴로 눈빛을 교환했다.

장석민은 마른침을 삼켰다. 자하르가 단순히 생명의 은인을 찾으려고 의식을 되찾자마자 후궁들을 불러 모았다는 사실이 선뜻 믿기지 않았다. 상을 내리는 것은 건강을 되찾은 다음 천천히 해도 되는 것이다. 게다가 그날 지하에서 봤던 자하르는 장석민이 전해 들어 알고 있던 남자가 아니었다.

사막의 성자가 아니라 악귀였지, 그건.

장석민은 엉덩이 부근에 손바닥을 문지르며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자하르와 긴히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본능은 그를 피하라고 외치고 있었다.

「어떤 사정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꼭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자하르가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입가에 봄바람 같은 웃음이 걸렸다.

장석민은 머릿속에서 큰 북이 쿵쿵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위험 경보다. 뭔가 일이 잘못되었다는 경보가 몸의 세포를 바싹 긴장시켰다.

「그분을 찾는다면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

후궁 중 하나가 물었다. 긴 갈색 머리가 허리까지 닿는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자하르가 다정하게 눈을 맞춘 후, 대답했다.

「저는 이믈라쿤이 끝난 후에, 반드시 그분을 비로 맞이할 것입니다.」

소리 없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러니 할 말이 있는 분은 제게 찾아와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말을 남기고 자하르는 자리를 떠났다. 모두 참고 있었던 말이 터져 비르마가 몇 번이나 지팡이로 책상을 내리치며 정숙을 요구했다.

유일하게 정숙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장석민뿐이었다.

꿈만 같아.

누군가 외쳤다. 그 말에 장석민은 전적으로 동감했다.

그는 악몽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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