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4/35)

졸지에 자하르의 처소에 침입하기 위해 성벽을 기어 올라가고 편지를 전해주려고 불을 지른, 희대의 미친놈이 되어버린 장석민의 발걸음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그게 아니라고. 아니라잖아. 아니라니까."

같은 말을 수십 번 수백 번 중얼거렸지만 들어주는 이는 업었다. 하캄에게 부탁해 포도주를 받았다. 이미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는지 하캄은 별말 없이 포도주 한 병에, 말린 과일까지 챙겨서 건네주었다.

"오해를 해도 유분수가 있지. ……그런 걸 어떻게, ……."

자기보다 머리 하나가 큰 자하르를 떠올리자 헛구역질이 나왔다. 아무리 얼굴이 아름답다고 해도 남자에게 그런 짓을 할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는다. 세상에 아름다운 여자가 그렇게나 많은데 왜 내가 남자에게 그 짓을…….

두통이 다시 일었다.

자신이 지나가기만 하면 수군거리는 사람들 때문에 장석민은 일부러 정원의 구석진 곳으로 찾아가 포도주를 마셨다. 달은 크고 별은 아름다웠지만 장석민의 마음은 지옥이었다.

다른 것은 다 참아도, 자신이 남자에 대한 마음으로 이 모든 일을 벌였다는 오해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꼬깃꼬깃한 편지를 손에 쥔 채 그게 아니라고 말을 하려 한 순간 나이마가 오늘은 이만 가봐야 할 것 같다고 자리를 떴다.

시종들이 불이 붙었던 여자를 데리고 나갔고 뒷정리를 시작했다. 비르마는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고 수업을 종결시켰다. 끝난 것이다. 자하르 왕자와 그의 모친인 나이마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할 기회도 날아갔다.

불타는 집념으로 요리를 하던 여자들 사이에서 탄식이 터져 나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미친놈이란 오해에, 천재일우의 기회를 날려버린 빌어먹을 새끼라는 미움까지 더해져 장석민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그 방을 나서야 했다.

"아니라고. 진짜, 아니라니까."

남을 변호하는 직업을 가진 주제에 자신이 대한 변명은 한마디도 못한 것이다. 엄청난 자괴감에 장석민은 포도주 한 병을 모두 비웠다. 병에서 마지막으로 떨어지는 포도주 한 방울이 혀끝에 닿는 순간에도 그의 시름은 조금도 걷히지 않았다.

빈 병을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서 장석민은 처소로 걸어갔다. 다행히 밤이 늦은 시간이라 누군가와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장석민은 어깨에는 자하르가 주고 간 윗옷이 걸려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옷을 불태워버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모독죄로 목이 잘릴 것만 같았다.

혹시 이거 갖고 싶으신 분.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싸늘한 침묵뿐. 후에 비르마가 귀띔하길 왕족이 내린 선물은 마음대로 누군가에게 증여하거나 버릴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나쁜 놈이야. 그거."

장석민은 자신에게 외투를 벗어주고 간 자하르를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그의 행동은 지극히 신사적이고 친절했다. 문제는 장석민은 그 친절이 세상에서 가장 필요 없는 사람이었을 뿐이다.

"누가 옷 벗어 달래? 나쁜 놈. 지만 멋있는 거 다하고."

괜한 자격지심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하르가 괜히 싫었다. 잠시 잠깐 만난 자신도 이런 마음이 드는데 평생 형제로서 경쟁해온 하일은 어땠을까.

"……오지랖도."

장석민은 고개를 내저었다. 자신을 잡아와서 이곳에 던져버린 하일이야말로 악의 축이었다. 그놈을 동정할 시간이 있으면 어떻게 이곳을 빠져나갈지에 대해 고민하는 편이 백배는 더 생산적일 것이다.

둘이 만나서 대화하는 것도 안 되고, 편지는 전하는 것도……, 이젠 안 받겠군.

그럼 누가 듣건 말건 나는 납치되었다고 소리를 질러볼까. ……나쁘지 않다. 생각해보면 여긴 자하르의 궁이 아닌가. 제아무리 하일이라 해도 바로 손을 쓰지도 못할 터.

애써 생각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틀어가며 걸음을 옮겼다. 희망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들자 그나마 죽을 것 같은 기분이 조금은 나아졌다.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오해 좀 못 풀면 어때. 떠나면 그만인데. 어차피 내 여자들도 아니고, 비 맞은 중처럼 구시렁거리며 장석민은 자신이 머물고 있는 처소의 문을 열었다. 침대로 몸을 날렸다. 씻고 옷을 갈아입을 기력도 없었다.

그냥 이대로 잠을…….

"……, ……."

그는 홀린 듯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고 옷장 옆에 걸린 거울 앞으로 걸어갔다.

25.

새빨간 펜으로 적힌 숫자,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각. 그제야 장석민은 숫자가 의미하는 바를 깨닫는다.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것이다.

아침 식사를 하면서도 하일의 첩자가 누구인지 알아내려고 신경을 곤두세웠다. 매일 아침 옷을 날라다 주는 저 아이인가. 아니면 세숫물을 떠다 주는 저 아저씨? 아니면, ……설마.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하캄이 과일이 든 바구니를 장석민 앞에 놓아주며 인사말을 건넸다.

「네. 안녕히 주무셨어요.」

의심의 눈길로 하캄을 살피며 장석민이 대답했다.

「어제 드렸던 포도주는 입맛이 맞으셨나요?」

어제의 일을 돌려서 묻는 것이다. 오래 본 사이는 아니지만, 그가 진중한 성격임을 알 수 있었다.

「네. 그럭저럭.」

「다행이네요.」

하캄이 깊게 파일 주름에 미소가 어린다. 장석민은 포도를 입에 넣으며 우물거리다가 결심을 굳힌 듯 말문을 열었다.

「뭣 좀 여쭤 봐도 될까요?」

「제가 대답해드릴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신중하고 현명한 답이었다. 장석민은 자하르가 부탁할 것이 있으면 하캄을 찾으라고 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 사람은 하일의 사람이 아니다.

「하일 왕자님이 원하면 이 안에 사람들 들여보낼 수 있습니까?」

장석민의 물음에 하캄이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러마디 님만 하더라도 하일님께서 보내신 것 아닙니까.」

「…….」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반박하지 못했다.

「하지만 다른 의미로, 자하르 님께는 그 어떤 분이라 할지라도 해를 끼치지 못할 것입니다.」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었다. 장석민은 흠, 하고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자하르 왕자님은 어떤 분인가요?」

그가 던진 질문이 의외라는 듯이 하캄이 웃어 보였다.

「알고 계신 그대로입니다.」

「전 그분을 모르는데요.」

사실이었다. 드라마 인물 보기 수준의 짧은 내용을 사이프에게서 들은 게 전부였다. 그게 사실인지 여부도 모른다.

「관대하다, 성품이 훌륭하다, ……아직 결혼을 안했다, 정도뿐입니다. 다른 건 몰라요.」

「잘 알고 계시군요.」

「농담이 아니라고요. 전 진지합니다.」

자하르가 자신을 살려줄지, 아니면 하일에게 다시 돌려보낼지도 모르는 것이다. 장석민은 불퉁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저에게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래 보이시는군요.」

하캄은 하일 왕자가 선물로 보냈다는 동양인 청년을 내려다보았다. 그 나름의 사정이 있는 것 같지만, 꿍꿍이가 있어 보이진 않는다.

하캄은 맞은편 의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앉아도 될까요? 제가 나이가 들어 기력이 하찮아서 오래 서 있는 것이 어렵답니다.」

장석민이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빼주며 그럼요, 하고 대답했다. 예의 바른 청년이었다. 이곳의 예절은 익히지 않아 실수투성이긴 해도 왠지 밉지 않았다. 이곳에서 나고 자라 수많은 사람을 봐온 하캄은 어딘지 마음에 가는 청년 앞에 앉았다.

「어떤 이야기부터 해드릴까요.」

「우선, 어, ……후계자 얘기부터 해주세요.」

이곳의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수 있을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는 동양인 청년을 하캄은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지금 국왕이신 무크라를 전하의 아드님은 열 분입니다. 아시다시피 하일 왕자님은 그중 두 번째시고 자하르 왕자님은 여덟 번째입니다.」

장석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첫째 나단 왕자님을 낳으신 왕비님은 출산 후 얼마 되지 않아 돌아가셨습니다. 나단 왕자님 역시 몸이 약하셔서 공식 석상에는 얼굴을 거의 드러내지 않고 계십니다. 나단 왕자님께서는 후계자 문제에서 이름이 거론되지 않은 이유입니다.」

하일이 자신이 첫 번째 후계자라고 말했던 사실이 떠올랐다. 그놈이 괜한 지랄을 한 것은 아니었구나.

「둘째 왕자님이 하일 왕자님, 자하르 왕자님과 더불어 가장 유력한 후계자로 꼽히고 계십니다.」

「나머지는요?」

「거의 비등한 수준입니다.」

장석민은 하캄이 일부러 자신의 앞이기에 하일을 높여 말했음을 직감했다. 아마도 하일 역시 나머지 다른 왕자님과 그렇게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여기는 나이가 그렇게 큰 서열은 아닌가 봐요?」

「보통은 서열이 되지만 왕위 문제만은 조금 다릅니다. 왕자라면 몇 번째가 되더라도 동등한 자격을 갖고 출발하게 됩니다. 물론 원론적인 이야기이고 왕자님을 낳으신 분들의 출산이나 가문의 권력에 따라 조금씩은 달라집니다.」

장석민은 오늘 낮에 보았던 나이마를 떠올렸다. 분명 그녀 역시 좋은 가문 출신이리라. 타고난 기품은 꾸며서 나타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까 말씀하신 대로 거의 비등하다는 것은 열 분 모두 훌륭한 가문 출신이라는 것이겠군요.」

「네. 그렇습니다. 물론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큰 문제는 아닙니다.」

하캄은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 동양인 청년은 가끔 상상할 수도 없는 괴이한 일을 저지르기도 했지만 대화를 해보면 총기가 반짝인다.

「……결국 개인의 역량 차이라는 얘기네요.」

오늘까지 하면 총 세 번.

세 번의 만남만으로 장석민은 자하르에게 자격지심을 느끼게 되었다. 신이 정성을 다해 빚어놓은 것 같은 외모와 반듯한 성격, 세상사 모든 일에 다정하고 상냥한 말투와 목소리

……무엇보다, 오매불망 그만을 바라보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들까지! 말 그대로 부족할 게 없는 남자였다. 장석민은 쳇, 하고 혀를 찼다.

「국민들은 누가 왕이 되길 바랍니까?」

「어느 분이 왕위에 오르신다 한들, 모두 신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기뻐할 것입니다.」

「자하르 왕자님은, ……정말로 그걸 하지 않고 계속 지내실까요?」

「예, 지금처럼 그 뜻을 지켜 가실 겁니다.」

「만에 하나, 만에 하나 그게 그러니까, ……안 지켜지면 어떻게 되나요?」

사실 장석민은 여기서 하캄이 자신 있게 별 상관없습니다, 하고 답하길 원했다. 그래야 자신이 임무에 실패한다 하더라도 어떻게든 살아날 구멍이 있을 테니까.

「음, 거기에 대한 답은 누구도 할 수 없습니다.」

「네? 왜요?」

「후계자를 정하는 것은 모두 위대하신 무크라르 전하의 뜻대로 입니다.」

「자하르 왕자님에 대한 신임은 두터운 편 아닌가요?」

「네. 현재 가장 총애받는 왕자님입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기대가 높을수록 실망도 큰 법이지요.」

장석민은 얼마 전에 연애 스캔들이 났던 연예인을 떠올렸다. 평소 청순하고 귀여운 이미지로 인기를 끌었던 그녀는 남자와 함께 해외 휴양지에서 선탠을 즐기는 사진 하나로 바닥까지 추락했다. 관련 기사에 달린 댓글만 봐도 눈살이 찌푸려진 정도였다. 계약을 맺었던 광고마저 모두 잘렸다고 하니 평소의 이미지 기대치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두 번 말할 것도 없다.

하일 왕자를 측근에서 모시고 있는 사이프의 반응만 보더라도 자하르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다. 그런 그가 여자도 아니고 남자와 스캔들이 났을 경우 입을 타격은 불 보듯 뻔했다.

장석민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지가 공주도 아니고 그러게 왜 평소에 청순한 이미지를 구축하고 난리야, 난리는.

장석민은 으휴, 한숨을 내쉬고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자하르 왕자님은 착한 분이죠?」

몹시 유치한 질문이라는 것을 알지만 중요한 문제였다.

「훌륭한 분입니다.」

원하는 답이 아니었기에 장석민은 재차 물었다.

「관대하고 성품이 훌륭하다고 소문이 나셨잖아요. 그러니 착한 분이시죠?」

「자하르 왕자님도 예전에는 그저 평범한 어린아이였습니다. 장난기 많고 이리저리 많이 뛰어다녀서 늘 상처가 아물지 않는 분이셨죠.」

성스러운 느낌마저 드는 그 남자에게 그런 유년시절이 있다는 이야기가 선뜻 믿기지 않았다.

「나실 때부터 타고난 기품이 있는 분이었지만 부단한 노력으로 사막의 성자로 불리며 자리에 오르신 것입니다. 그러니 매우 훌륭한 분이시죠.」

장석민이 원하는 대답은 그것이 아니었다. 어떤 경우라 할지라도 불의에 맞서는 선의 수호자! 이런 대답이 돌아오길 바랐건만.

아, 역시 만나서 확실히 해야 한다.

「……이런 질문 드려도 될지 모르겠는데.」

「안 됩니다.」

하캄이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무슨 질문을 할지 알고요!」

「자하르 왕자님을 만나 뵙게 해달라고 하실 거 아니었습니까?」

「…….」

「계승권 문제로 민감하신 시기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러마디 님들은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셔야 합니다.」

「저는 기다릴 수가……, …….」

하캄의 얼굴에 의아함이 스쳤다. 장석민은 입을 다물었다. 하일이 그런 의도로 자신을 보낸 것을 안다면 하캄은 앞으로 말도 건네지 않을 것이다. 하캄은 이곳에서 유일하게 말이 통하는 소중한 상대였다.

「진짜 잠깐이면 되는데.」

「안 됩니다.」

「멀리서 소리만 지르면 안 될까요?」

「불경죄로 엄히 다스려질 겁니다.」

이곳의 법도가 어떤지 알 수가 없으니 행동의 제약이 너무 많다. 이대로 손만 놓고 있다가는 한 달이 훌쩍 지나고 쥐도 새도 모르게 하일이 보낸 첩자에게 살해를 당할 텐데.

장석민은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괴로워했다.

「이달은 계승을 결정짓는 이믈라쿤 기간입니다. 이 기간이 끝나면 비교적 자유롭게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그전에 전……. ……아닙니다.」

하캄이 이제는 가서 일을 봐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이제 죽었어, 한국어로 한숨처럼 중얼거리는 말을 하캄이 알아들을 리 없을 텐데 그가 멈칫 걸음을 멈추었다.

「아예 방법이 없는 건 아닌데…….」

「네? 뭔데요?」

다 죽어가던 장석민의 뺨에 화색이 돈다.

「얼굴을 뵐 수는 있을 겁니다.」

「──!」

「물론 마음대로 말을 걸거나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괜찮으십니까?」

「그럼요. 괜찮고말고요. 얼굴만 잠시 뵈면 됩니다. 신에게 맹세코 자하르 왕자님께 폐가 되는 일을 하지 않겠습니다.」

하캄의 손을 잡은 동양인 청년의 외까풀의 커다란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맺혔다.

"죄송해요. 하캄. 저는 무신론자예요."

빗자루를 손에 든 장석민은 혹시라도 누가 들을까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설사 누가 듣는다 하더라도 알아듣지도 못할 한국말이었지만 양심이 콕콕 쑤셔 큰 소리로는 할 수가 없었다.

장석민은 사원으로 가는 계단을 열심히 쓸었다. 자하르가 궁에 머무는 동안 사원에서 목요일 새벽마다 기도를 하므로, 이곳에서 청소하고 있으면 한 번은 마주칠 수 있다는 것이 하캄의 설명이었다.

장석민은 과일을 손에 들고 만세를 불렀다. 하지만 하캄의 말은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말을 걸어서도 안 되고 눈을 마주쳐서도 안 됩니다. 그렇게 말하는 하캄의 목소리가 엄하기 그지없었다. 왜죠. 장석민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다. 신께 기도를 드리러 가는 곳이기 때문에 부정을 타면 안 됩니다. 하캄의 대답에 장석민은 고개를 끄덕였다가 잠시 후에 제가 부정인가요, 하고 되물었다.

하캄은 대답 없이 일이 바쁘다며 자리를 떠났다.

"부정은 무슨."

장석민은 코웃음을 치며 빗자루를 움직였다. 사원으로 향하는 계단은 까마득하게 높지만 괜찮다. 대충 청소를 하다 자하르를 만나면 빗자루를 집어던지면 그만이다.

"오랜만에 힘 좀 쓰겠군."

한 손으로 어깨를 주물렀다. 분명 자하르는 이야기를 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정말 미안한 이야기지만 장석민은 힘으로라도 그를 제압할 예정이었다. 어디 한적한 곳으로 끌고 가서 말할 것이다. 나는 당신에게 삿된 마음을 품지도 않았을뿐더러, 여기에 1초라도 머물고 싶지 않으니 당장 돌려보내 달라고.

다행히 기도하러 가는 길에는 수행원이나 경호원을 대동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이 고급 정보는 하캄이 아니라 매일 꽃을 가져다주는 시종에게 얻어낸 것이었다. 자하르가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크고 어깨는 태평양처럼 넓고 몸도 단단해 보였지만, ……잠깐. 제압할 수 있을까,

"아냐, 할 수 있어."

장석민은 애써 밝은 얼굴을 하고 빗자루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는 유단자였다. 태권도 2단, 유도 2단, 검도 1단, 합이 5단. 지적인 외모에 운동을 잘하는 남자가 얼마나 여자들에게 먹어주는지 알게 된 이후로 꾸준히 운동을 해온 터였다. 제아무리 자하르가 큰 체격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일대일로 붙으면 승산은 있다. 게다가 특별히 후궁들이 입는다는 검은 옷에 베일까지 뒤집어쓰고 나왔다. 자하르를 방심시키기 위한 특별 계책이었다.

하,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이런 짓까지 해야 하다니. 공주님 구하러 가는 슈퍼마리오도 아니고 뭔 놈의 클리어 해야 할 단계가 이렇게 많은거야. 빌어먹을 왕자 놈. 온화하게 웃고 있는 자하르의 얼굴을 떠올리자 열불이 솟구쳐 저도 모르게 욕이 튀어 나갔다.

"안 돼. 정신집중. 열폭은 나중에."

장석민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철썩철썩 내리친 후, 열심히 계단을 쓸었다. 2층 높이의 계단을 모두 쓸고 위로 올라갔을 때 멀리서 청소를 하는 시종들이 띄엄띄엄 보였다. 새벽부터 부지런하기도 하지.

눈이 마주치자 장석민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그와 동시에 그의 머리 위로 시커먼 것이 날아왔다.

"──!"

간발의 차로 몸을 뒤로 젖혀 피한 장석민은 고개를 들었다. 위에서 청소를 하던 시종이 빗자루를 놓친 모양인지 빈손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야. 미안하다는 말도 없나."

장석민은 투덜거리며 시종에게 건네주기 위해 빗자루를 집어 들었다.

"앗!"

이번에는 피할 새가 없었다. 장석민은 머리를 손바닥으로 감싸 쥐고 인상을 찌푸렸다. 신발이었다.

「뭐하는 겁니까.」

장석민이 신발과 빗자루를 집어 들었다. 대답 대신 저 멀리서 빗자루 하나가 더 날아든다. 장석민은 팔뚝으로 빗자루를 막아냈다.

화를 내려고 고개를 들었는데 자신을 쏘아보고 있는 눈들이 낯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 …….」

장석민은 계단을 둘러보았다. 시종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모습이 그제야 눈에 제대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장석민은 자신에게 신발과 빗자루를 날린 후궁에게 인사를 건넸다. 수업을 들을 땐 맨 앞줄에 앉아있던 탐스러운 갈색 머리의 아가씨였다. 장석민을 알아본 그녀는 계단을 내려와 그의 손에 들린 신발과 빗자루를 뺏었다.

「내려가요.」

「네?」

「이 계단을 쓸려면 적어도 5년은 기다려야 합니다. 어디 감히 한 달도 안 된 러마디가.」

장석민은 눈을 깜빡거리다 물었다.

「설마, ……연차에 따라 구역이 정해져 있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푸른색 눈동자가 차게 빛났다. 그녀가 손으로 저 멀리 사원 입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일 년이 안 되는 분들은 잔심부름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저기서 걸레와 양동이를 가져오세요.」

「……어디요?」

「저어기.」

그녀가 무성의하게 대꾸했다. 여자는 성격이 중요하지. 말버릇처럼 그렇게 말하던 친구를 장석민은 이해하지 못했다. 성격이 중요하게 느껴지기 전에 헤어지고 다른 여자를 만나면 되는데 왜 그걸 따지고 있을까 싶었다. 여자는 무엇보다 얼굴이라고 굳게 믿어온 그였다. 그런데 오늘부로 그 생각을 조금 수정하게 될 것 같다.

「저기요?」

장석민은 일부러 모르는 척 계단의 아랫부분을 가리키며 되물었다. 그러자 위에서 비질하던 여자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저 아래. 건물 뒤로 돌아가서 문을 열고 들어가서 계단을 내려가서 창고!」

어깨에서 허리로 이어지는 선이 유난히 아름다웠던 올리브 빛 피부색을 가진 여성이었다. 사흘만 사귀어 봐도 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했던 그녀가 딱딱한 영어로 장석민에게 일갈했다.

……성격이 중요하구나.

장석민은 자신의 빗자루를 들고 터덜터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눈치를 살피며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으려 했지만 어김없이 싸늘한 눈총이 쏟아져, 결국에는 아래로 내려와 사원이 잘 보이지 않는 건물의 앞까지 걸어오고 말았다.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자하르 왕자가 지나다니는 길에서 이만치 떨어져 나온 장석민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나타났을 때 아무리 빨리 달려나간다 하더라도 따라잡을 수 없는 위치였다. 계단 바로 옆으로 가려고 해도 저 위에서 매의 눈을 하고 이쪽을 감시하는 후궁들 때문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여자란 게 이렇게 무서운 거였다니.

누구보다 여자를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해온 인생이었는데 여기서 인생 제2장을 쓰고 있는 기분이었다. 여자와는 즐거운 일만 했던 그였기에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가늠할 수 없었다.

출입문을 찾아 장석민은 힘없이 터덜터덜 건물 뒤쪽으로 걸어갔다. 이젠 아예 사원으로 향하는 계단이 보이지도 않았다.

"물건 꺼내오는 사이에 지나가는 건 아니겠지."

차라리 빨리 가져오라는 물건을 가져다주는 편이 낫겠다 싶어 속도를 올렸다. 오래된 철문을 지나 허리까지 오는 잡초 사이를 걸어가니 작은 문이 보였다. 문고리를 돌리고 싶지도 않은 낡은 문이었다. 장석민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에 청소 도구가 있을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 여자가 자신에게 이곳을 가르쳐준 데에는 다분히 엿을 먹이려는 의도가 엿보였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까라면 까는 거지. 군대에 다시 들어가 이등병이 된 기분으로 장석민은 문고리를 잡아 비틀었다, 끼그덕거리는 을씨년스러운 소리가 창소에 울렸다. 한 치 앞도 구분할 수 없는 어둠 사이로 수십 년은 된 듯한 먼지가 일었다.

"쿨럭, 쿨럭."

장석민은 손으로 먼지를 밀어내며 앞으로 걸어갔다. 청소 도구는커녕 찾을 수 없는 것이라고는 썩어 문드러지기 직전의 장작더미뿐이었다. 장석민은 소맷자락으로 입과 코를 막으며 창고 안을 더듬었다. 십여분을 뒤진 결과 그가 찾아낸 것은 거미 몇 마리와 장작더미 아래에 깔려 있는 지하실 문이었다.

"설마, ……이 안에 있지는 않을 거 아니야."

장석민은 팔짱을 끼고 지하실 문을 노려보다가 쳇, 하고 혀를 찼다. 빈손으로 돌아갔다가는 무슨 욕을 얻어먹을지 모르는 것이다. 그는 장작 더미를 치우고 동그란 고리를 잡아당겼다. 그러나 문은 이음새가 용접이라도 되어있는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뭐,야, ──이거, 왜 이렇게, ──."

이를 악물고 있는 힘껏 잡아당기자 쿵, 하고 문이 벌어졌다. 동시에 뒤로 엉덩방아를 찧게 된 장석민은 앓는 소리를 내며 지하실 안으로 몸을 숙였다.

"하하, 하하하하."

허허로운 웃음소리가 계단을 타고 지하에서 울렸다. 계단이 나 있는 것도 확실하지만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확인할 수 없는 어둠이 아래에 도사리고 있었다.

"미쳤냐. 내가 여길 들어가게."

욕을 얻어먹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에 문을 도로 닫으려던 그는 멈칫하고 뒤를 돌았다. 이 계단이 어디까지 나 있는 것일까.

궁을 부지런히 돌아다녔지만,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루트는 한정적이었다. 그 길목마다 보초가 지키고 서 있었기 때문에 탈출은 꿈도 꿀 수 없었다. 하지만 이 계단이 밖으로 이어지는 길이라면?

"그럴 리가 있……, ……을지도 모르잖아."

밑져야 본전이었다. 계단으로 내려갔다가 길이 아니면 도로 나오면 그만인 것이다. 잠시 고민하던 장석민은 결심을 굳히고 지하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의지할 수 있는 불빛이 없어서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걸음을 내딛어야 했다. 어둠 속을 걸어가며 장석민은 이 길이 자신을 살릴 활로가 될 것이라고 믿음을 가졌다. 하지만 그렇게 십여 분을 넘게 걸었을 때, 그 믿음이 점차 희석되어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장석민은 위를 올려다보았다. 아래도, 위도, 끝을 알 수 없는 어둠이었다. 그 중간에 선 그는 고민을 시작했다. 다시 돌아가야 하나. 아니면 계속 내려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저 아래에서 희끄무레한 것이 어른거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어둠 속에 너무 오래 있어 눈에 이상이 생긴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아래로 한 걸음씩 걸어갈수록 희끗희끗한 빛은 점점 명확하게 그 형태를 갖추어 나갔다.

그것이 인위적을 만든 빛이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장석민은 속도를 더해 걸었다. 누군가 일부러 이런 곳에 길을 만들었다는 것은, 그에게 매우 좋은 징조였다.

계단이 끝나는 곳에 도착한 장석민은 기쁨에 겨워 주변을 둘러보았다. 천장 위에 낡은 전구가 유령의 손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그뿐이었다. 길도, 문도, 희망도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무슨……. 말도 안 돼."

계단은 커다란 동굴처럼 생긴 방과 맞닿아 끝나 있었다. 대체 이런 계단을 왜 만들어놓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구조였다. 이것도 다 그 여자가 계산한 일이었을까. 장석민은 까마득하게 위로 이어지는 계단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려올 때는 밖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희망에 피곤한지 모르고 내려왔지만 올라가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절망감에 젖어 우울한 낯빛으로 위를 올려다보고 있는 장석민의 귀에, 문득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으면 들을 수 없을 작은 소리였다. 규칙적인 소리가 조금씩 그 형태를 찾아가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이 발소리라는 것을 구분할 수 있었다.

누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위에서 들리는 소리는 아니다. 그렇다면 대체 어디에서?

머리 위에 있던 전등이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장석민은 그것이 어떤 전조임을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드르륵, 하는 소리가 울렸다. 벽으로 가로막혀 있던 왼쪽으로 커다란 통로가 생긴 것도 그와 동시였다. 장석민은 눈을 크게 뜨고 믿을 수 없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통로의 저쪽 끝으로 사람의 형태가 지나가는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머리로 제대로 된 생각을 하기 전에 장석민은 그 통로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아슬아슬하게 등 뒤로 문이 닫혔다.

깜짝 놀란 그가 다시 뒤를 돌아 문을 열어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애초에 문 따윈 없었다는 듯이 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장석민에게 놓인 길은 하나였다. 그는 통로를 따라 걸어야만 했다. 하지만 전처럼 자유로운 발걸음이 아니었다. 최대한 발소리를 죽인 채 그는 앞으로 걸어나갔다. 앞서 걸어가던 사람의 뒷모습을 얼마 지나지 않아 찾을 수 있었다. 검은색 천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뒤집어쓴 남자는 어둠속에서 능숙하게 길을 찾아 걸었다. 장석민은 눈가를 좁히고 검은색 옷을 입은 남자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어? ……어어?"

자하르다.

얼굴을 가리고 있지만, 저 태평양 같은 어깨와 서늘한 회색 눈동자는 누가 봐도 자하르인 것이다. 수행원 한 명도 없이 이 새벽에 어디를 다녀온 것일까? 이 길은 또 뭐고? 게다가 평상시 그가 입는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얀 타브 차림도 아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카만 천으로 둘러 얼핏 왕자가 아니라 도둑처럼 보이긷 ㅗ한다.

자하르는 복도를 지나 안쪽의 좁은 계단으로 다시 내려가기 시작했다. 왜 저 안으로 들어가는 거지? 기도하려면 저쪽 아닌가?

"흠."

장석민은 생각했다.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가는 수행원이나 경호원은 한 명도 없었다. 어쩌면 이것은 신이 주신 기회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이곳에 온 이유도 자하르를 조용한 곳으로 데려가 잠시 이야기를 나눌 생각 아니었던가. 장석민은 자하르를 따라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마찬가지로 복도는 어두웠다. 장석민은 한참 동안 벽을 더듬어 걸어가야 했다. 발걸음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리는 것 같아 장석민은 아예 신발을 벗어 손에 들고 걸어 내려갔다.

"……이게 아닌데."

그냥 잠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한 것인데 걸어 들어갈수록 장석민은 점점 수렁으로 빠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기분 나쁜 안개가 뱀처럼 발치를 맴돈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재빨리 사라지고 고개를 들고 앞으로 걸어가면 자꾸 몸을 기어 올라오는 느낌이 든다. 다시 돌아가야 할까. 아님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잡을 것인가. 저런 차림을 하고 어디를 다녀온 것일까. 몰래 따라왔다가 화를 내지는 않을까. 우연히 만났다는 이야기를 하면 믿어주려나.

꼬리에 꼬리를 문 고민이 술렁였다. 다리는 뭐에 홀린 것처럼 자연스럽게 전진을 반복했다. 계단이 끝나는 곳에 넓은 공간이 펼쳐졌다. 갑작스러운 밝은 빛에 장석민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인상을 찌푸렸다. 이번엔 빛에 익숙해지도록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어……."

장석민의 입에서 놀라움의 탄성이 새어나왔다. 장관이었다. 그가 도착한 곳은 도서관이었다. 계단으로 내도록 내려온 깊이가 도서관의 벽면이었다. 벽에는 빼곡하게 책이 꽂혀 있었다. 사방이 책으로 둘러싸여 마치 책으로 만들어진 집처럼 보였다.

"무슨 책이 이렇게……."

무심코 앞으로 걸어가며 중얼거리다 장석민은 나무가 삐걱거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혹시라도 누가 들었을까 봐 심장이 두근거려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러다 자신이 자하르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따라 들어왔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한숨을 내쉰다.

몰래 나쁜 짓을 엿보려고 들어온 것도 아니고 소리 좀 나면 어떠…….

"……!"

장석민의 눈에 서재 안쪽에 놓여있는 컴퓨터가 들어왔다. 자하르고 나발이고 인터넷에 접속할 수만 있다면 한국에 구조 요청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장석민은 몸을 숙이고 컴퓨터가 있는 방으로 살금살금 전진했다. 다행히도 컴퓨터는 전원이 켜진 채였다. 책상에 몸을 숨기고 키보드에 손을 올리는 순간 가까이에서 들려오는 사람 목소리에 장석민은 황급히 몸을 숨겼다. 자하르였다.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것 같았다.

책상 뒤에 납죽 엎드린 채로 장석민은 이게 아닌데, 하고 생각했지만 나갈 타이밍은 지난 후였다. 어쩌지. 서프라이즈, 하고 나타나면 놀라시려나. 카펫을 만지작거리며 장석민은 기회를 엿보았다.

통화를 마쳤는지 자하르의 목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았다. 장석민은 지금쯤 나가면 될까 싶어 고개를 빠끔히 들었다.

"──!"

옷을 갈아입고 있었던 것인지 자하르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뒤를 돌아있던 상태라 전라의 모습을 보는 것은 뒤태에서 그칠 수 있었다.

장석민은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며 얼른 책상 아래로 몸을 숙였다.

오 마이 아이즈.

이 꼭두새벽부터 남자 알몸이나 보고 있어야 한다니. 이게 웬 횡액이야.

뒷모습을 봤는데 왜 다리 사이에 덜렁거리는 흉물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냐고!

장석민은 얼른 자하르가 옷을 마저 입길 기다리며 눈을 비볐다. 시야에 아로새겨진 그것의 모습을 어떻게든 지우고 싶었다.

그때였다.

『누구냐.』

나직한 남자의 음성이 울렸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나와라.』

장석민은 소름이 쭈뼛 돋았다. 뭐라고 말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어도 살벌한 위협처럼 들렸다. 지금 자하르의 앞에 서면 살아나가기 힘들 것 같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자하르라면 사람을 죽일 리 없는데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일이 자신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소리를 지르던 순간과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아니야. 하일이라면 몰라도 자하르라면 그럴 리가 없지. 이곳에 들어왔다고 화를 내기는 하겠지만 죽이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장석민은 카펫 위에 엎드렸던 몸을 천천히 움직였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움직인 사람들이 있었다.

"──!"

책상 모서리를 손에 쥐고 장석민은 눈앞의 광경을 지켜보았다. 방 안쪽에서 나타난 괴한이 자하르에게 달려들었다. 대체 어디에서? 장석민은 돌아보아 문이 연결되어있는지 확인했지만, 뒤쪽에는 벽뿐이었다. 

칼을 든 괴한은 셋이나 되었다. 아니, 넷이었다. 한 명은 이미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앞으로 달려드는 남자의 어깨를 자하르가 잡아 우드득, 뽑아버렸다. 남자가 눈을 까뒤집고 기절했다. 장석민은 제 어깨가 다 아픈 느낌에 얼굴이 찌푸려졌다. 남아 있던 다른 괴한이 칼을 빼어 들었다. 아슬아슬하게 자하르의 어깨를 스쳤다.

으, 아프겠다.

장석민은 이를 깨물고 이 상황을 어찌해야 할지 고민했다. 지금이라도 밖으로 나가 도와줄 사람을 찾아야 하는 것인가. 그랬다간 늦어도 한참 늦을 터. 그럼 내가 가서 도와……. ……헉.

눈 깜짝할 새였다. 자하르가 자신에게 소리를 지르며 달려드는 남자에게서 칼을 뺏어 들어 상대의 팔을 꺾어버린 것은.

『으아악──!』

어린아이의 팔을 꺾는 것처럼 손쉽게 남자를 제압한 후에 자하르는 그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 역시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깔끔한 솜씨에 장석민은 혀를 내둘렀다. 누구든 그를 건드릴 수 없을 것이라 말했던 하캄의 말을 그제야 이해되었다. 그래. 공주도 아니고 왕자인데 도와줄 필요가 있나.

『누가 보낸 것이지.』

자하르가 물었다. 조용하고 나직한 음성이었다. 만약 이 광경을 보고 있지 않았다면 자하르가 어린아이를 어르고 있다고 해도 믿을 만큼.

『누가 보낸 것인지 물었다.』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행해질 것이다.』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남자가 들고 있던 칼을 쥐고 자하르에게 달려들었다. 장석민은 숨을 들이켰다. 아무리 유단자라고 해도 남자 팔뚝만 한 칼을 들고 달려드는 싸움은 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렸다. 금속이 부딪치는 차가운 소리가 살벌하게 울렸다. 백중지세였다. 남자가 이 정도일 줄은 예상치 못했는지 자하르도 놀라는 눈치였다. 남자가 무서운 기세로 몰아붙였다. 상처가 벌어졌는지 자하르의 팔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남자가 자하르에게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지금이라도 나가야 하나.

책상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그러나 장석민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챙, 하는 소리와 함께 공중으로 날아올라 간 칼이 장석민의 옆을 스치고 소파에 박혔다. 장석민은 힉, 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자하르가 쥐고 있던 칼을 남자의 목을 겨누었다.

『누가 보냈지?』

『…….』

『대답하지 않으면 긋는다.』

장석민은 침을 꼴깍 삼키며 자하르와 남자를 지켜보았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도저히 끼어들 수 없는 분위기였다.

『명예로운 침묵을 택하겠다.』

『그래.』

자하르가 넌지시 웃었다. 그러고는 쥐고 있던 칼을 고쳐 쥔 후 남자의 어깨를 내리쳤다.

『침묵의 무게는 무거운 법이지.』

으아악, 하는 끔찍한 비명이 지하에 울려 퍼져싿. 장석민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피를 뒤집어쓰고도 자하르는 예의 그 인자한 낯짝을 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기괴한 광경이었다. 사람이 죽어가는 앞에서 저렇게 평온할 수 있다니, 소름이 돋았다.

몰래 나가자. 여기서 괜히 끼어들었다가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바보가 아닌 이상 알 수 있었다. 장석민은 계단과 이어지는 문을 향해 엉금엉금 기기 시작했다. 들키지 않으려고 온 정신을 집중해기었다. 뭔가에 이렇게 집중을 한 기억은 처음 여자와 하기 위해 콘돔을 끼울 때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조금만 더 기어가면…….

"……!"

장석민은 속으로 비명을 삼켰다. 빨리 움직이기 위해 발에 힘을 준다는 것이 누워있던 괴한의 얼굴을 차버린 것이다. 그가 꿈틀거리며 얼굴을 찌푸렸다. 저놈이 일어나면 들키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지금이라도 서프라이즈, 를 외치며 나가면 안 되려나 하다가 칼에서 피를 털고 있는 자하르의 모습을 보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빨리 튀자.

공주님도 아니고 왕자님이니 제 할 일을 알아서 처리할 테지.

장석민은 꿈틀꿈틀 깨고 있는 남자를 뒤로하고 재빨리 바닥을 기었다. 문을 나서며 뒤를 돌아보았을 때, 남자는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키는 중이었다. 남자가 자하르의 눈에 띄지 않는 사각지대에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장석민은 입술을 깨물고 계단을 올랐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된다. 아까 본 자하르의 실력이라면 한 놈 더해진다고 큰일이 날 리…….

탕탕탕.

총성이었다. 장석민의 몸이 싸늘하게 식었다. 생각할 겨를 도 없이 장석민은 올라왔던 계단을 도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문을 열고 도서관 안으로 들어선 순간, 장석민은 목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을 가까스로 삼켰다. 지극히 비현실적이고 잔인한 장면이 꽃밭처럼 펼쳐졌다. 조금 전까지 찬연한 색을 자랑하던 카펫은 검붉은 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카펫의 중간에서 꿈틀거리며 피를 흩뿌리고 있는 남자의 모습에 장석민의 사고는 멈추었다.

설마 상처를 입은 남자를 방패로 삼은 것인가.

『죽어……!』

졸지에 같은 편을 쏘게 된 남자가 분노에 찬 소리를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장석민은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남자가 자하르와 몸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총이 바닥으로 떨어졌고 육탄전이 이어졌다. 처음에는 자하르의 우세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형세는 역전이 되었다. 장석민은 카펫을 적신 피의 반이 자하르의 것임을 알아챘다. 게다가 점점 자하르의 눈빛이 이상하리만치 흐려지고 있었다.

남자가 자하르의 상처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자하르가 잠시 균형을 잃은 틈을 타서 남자가 바닥에서 총을 집어 들었다. 그는 총을 자하르의 이마에 겨누었다.

『명예롭게 죽을 각오가 되었겠지?』

자하르의 시선이 잠시 총신을 머물렀다. 그의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걸렸다.

『신의 뜻대로.』

자하르가 웃으며 답하자 남자가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

후에 누군가 자신에게 그때 무슨 생각으로 몸을 날렸는지 묻는다면 대답할 말은 영원히 찾지 못할 것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장석민이 날아든 순간 총성이 공기를 갈랐다. 아슬아슬하게 총알이 자하르의 얼굴을 스쳤다. 터져 나온 피가 자하르의 얼굴을 뒤덮었다. 장석민은 있는 힘껏 주먹을 날렸다. 한 방에 거구를 쓰러트리기엔 역부족이었지만 그를 자하르에게서 떼어내기엔 충분했다. 장석민은 손을 뻗어 남자의 손에서 총을 빼앗아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남자가 장석민의 손목을 잡아 비틀었다. 눈앞이 번쩍거리는 고통에 장석민은 이를 악물었다. 있는 힘껏 남자의 얼굴을 차버리지 않았다면 손목이 부러졌을 것이다.

『……빌어먹을…….』

남자가 비틀거리며 일어나 장석민에게 달려들었다. 장석민은 숨을 들이켜고 머릿속으로 거리를 쟀다. 사정거리로 남자가 들어온 순간, 왼발을 축으로 삼아 돌려차기를 날렸다. 정확하게 들어간 발차기에 거구가 쿵,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장석민은 그가 의식을 잃은 것을 확인한 후에야 다리가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총을 든 사람을 상대로 발차기를 하다니.

"……미쳤어."

자신이 얼마나 무모했는지 깨달은 순간 긴장이 풀렸다. 손도 부들부들 떨렸다. 장석민은 피가 통하지 않아 싸늘한 손으로 자신의 뺨을 쓸어내렸다. 심호흡을 했다.

이젠 밖으로 나가서 도움을 청하면…….

"힉──."

장석민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몸을 뒤로 젖혔다.

시체가 피를 뚝뚝 흘리며 움직였다. 공포에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러나 눈을 몇 번 깜빡이고 난 뒤, 그것이 시체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막의 성자(聖者).

타르카 왕국의 여덟재 왕자 빈 무크라르 자하르가 피를 뒤집어쓴 채 걸어오고 있었다. 바닥에 피로 물든 발걸음이 찍힐 때마다 장석민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자하르가 손을 뻗어 장석민의 멱살을 쥐었다.

『누구지?』

흘러내리는 피 때문에 그는 눈을 뜨기도 힘든 지경이었다. 자하르가 눈을 몇 번 더 깜빡였다. 속눈썹 위로 진득한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섬뜩한 광경이었다. 목 안 가득 공포가 차올라 숨쉬기가 힘들었다. 장석민의 입에서 바람 빠진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자하르가 흘러내리는 피를 아무렇게나 닦아내고 장석민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발치로 피가 뚝뚝 흘러내려 웅덩이를 이루었다.

『같은 편인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장석민은 눈만 껌뻑거렸다. 자하르가 다시 물었다.

『무엇을 봤지?』

영어로 말해달라고 입을 열려던 장석민의 눈에 자하르의 반대편 손이 들어왔다. 칼이다. 자하르가 어느샌가 주워온 칸자르를 장석민의 목에 대었다.

『말하거라.』

자하르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피를 뒤집어쓰고도 성화 속에 나오는 성자처럼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자하르와 눈이 마주쳤다. 무엇에도 때 묻지 않을 것 같던 고결한 회색 눈동자에 일순, 웃음이 스쳤다. 장석민은 알 수 있었다. 그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자하르가 반대편 손으로 장석민의 목을 움켜잡았다. 반달처럼 휜 칼의 날이 번뜩였다.

죽는다.

죽음을 마주한 장석민의 이성은 거기에서 끝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그런 일을 벌일 수는 없었다.

쿵.

자하르의 몸이 마룻바닥에 세게 부딪혔다. 깨끗한 메치기 한판이었다. 과다 출혈로 제정신이 아닌 사람을 내다 꽂은 것이 양심에 걸렸지만 살기 위한 본능적인 선택이었다. 양심의 가책은 뒤로하고 칼을 뺏어 멀리 던져버렸다. 그러고는 자하르의 몸 위로 올라가 누르기로 제압했다.

『……. 감히…….』

자하르가 장석민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회색 눈동자가 탁하게 흐려진 채였다. 초점도 맞지 않는다. 숨소리 역시 심상치 않았다. 뜨거운 숨결을 내뱉는 동안에도 그의 낯빛이 점점 창백해졌다.

『……넌 누구지?』

자하르가 물었다.

장석민의 눈에 자하르의 어깨가 들어왔다. 총상을 입은 배보다 어깨에서 심한 출혈이 있는 상태였다. 심지어 상처 주변이 푸른색을 띠고 있었다. 바닥에 누워 있던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 역시 온몸이 푸르뎅뎅하게 변해 있었다.

독이구나.

장석민은 자하르의 어깨를 붙들었다. 입으로 빨아내서라도 독을 빼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커다란 손이 장석민의 얼굴을 밀어냈다.

『함부로……, ……위험하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수 없어도 장석민은 그가 자신에게 경고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장석민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깨진 화분 조각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주워 와서 자하르의 상처 주변을 그었다.

『──.』

엄청나게 아팠을 텐데도 자하르는 신음조차 내지 않았다. 장석민은 상처 주변을 압박해 피를 짜내고 자신의 옷자락을 찢었다. 그러고는 독이 퍼지지 않도록 자하르의 어깨를 단단히 조여 맸다. 남은 천으로는 배의 상처를 감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 출혈을 멈추지 않으면 그의 생명은 신이 와도 보장할 수 없을 것이다.

『……누구…….』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말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회색 눈에 깃든 의식이 가물가물 사라지고 있었다. 장석민은 떨리는 손으로 자하르의 상처를 감기 시작했다. 자하르가 무의식중에 장석민의 팔을 뿌리쳤다. 장석민은 자하르의 손목을 움켜쥐었다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하르의 몸이 타는 것처럼 뜨거웠다. 자신의 손이 보통사람보다 차가운 편임을 고려해도 이건 정상이 아니었다. 자하르의 배에서 피가 꿀럭꿀럭 쏟아졌다. 그걸 막으려던 장석민의 손도 검붉은 피로 젖어들었다. 장석민은 손으로 자하르의 배를 누르며 다급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람을 불어야 하는데, 누구든 불러야 하는데…….

자하르가 장석민의 손을 움켜쥐었다. 장석민이 화들짝 놀라 그의 손을 뿌리치려 한 순간, 자하르가 자신에게 뭔가를 건넸다는 것을 깨달았다. 

검은색 카드키였다. 자하르의 손이 왼쪽의 회색 문을 가리켰다. 장석민은 카드키를 쥐고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든 불러와야, 자하르를 살릴 수 있는 것이다. 자하르를 바닥에 눕히고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는 장석민의 옷자락을 커다란 손이 움켜쥐었다.

『……마.』

기이한 순간이었다. 장석민은 자하르가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뜬다. 필사적으로 정신을 차리려 하고 있지만 그럴수록 눈빛은 흐려질 뿐이었다.

"안 갈 테니까, ……안 갈게요."

한국말을 알아들었을 리 없었을 텐데, 자하르는 장석민의 대답을 듣는 안심한 듯 순간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호흡을 확인한 후 장석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이편이 낫다. 주변을 둘러보며 아까 몸싸움을 하다 던져둔 총을 찾아냈다. 누군가 다시 정신을 차려도 손댈 수 없도록 바지춤에 꽂아 넣었다. 그러고는 돌아와 다시 꼼꼼하게 자하르의 몸을 천으로 감았다. 출혈이 잦아든 것을 확인한 후 그는 자하르의 몸을 둘러업었다. 두꺼운 철로 만들어진 회색 문 앞에 선 장석민은 자하르에게 받은 카드키를 도어록에 대었다. 도어록 화면에 뜬 문구를 확인한 순간 장석민은 시발, 하고 욕설을 내뱉었다. 그는 등 뒤로 손을 뻗어 자하르의 손을 가져왔다. 자하르의 지문을 스캔한 후에야 문은 열렸다. 다행히 아까 온 길과는 다르게 정상적인 계단이 이어졌다. 평소 운동으로 다져진 몸이니 사람 하나 들쳐 메고 계단을 오르는 것은 그에게 일도 아니었다.

"……. ……."

그러나 계단을 열 개쯤 올라갔을 때 장석민은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하반신으로 깨달았다.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반 층도 올라가지 않아 장석민은 계단을 기기 시작했다.

"……시발."

욕이 절로 나왔다.

그렇다고 자하르를 여기에 두고 올라갈 수도 없었다. 혹시라도 숨어있던 잔당이 튀어 나오면 자하르는 거기서 끝이다. 그건 인간으로서 해선 안 될 행동이었다. 게다가 무엇보다 일이 이렇게까지 된 데에는 자신의 책임이 아예 없다고 하지 못한다. 도망을 치다 누워있던 녀석을 깨우는 바람에 등을 지고 서 있던 자하르가 총을 맞은 것이다.

장석민은 이를 악물었다. 등 뒤에 있는 것도 여자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여자. 가슴도 크고 엉덩이도, …….

"……시발. 닿잖아."

허리 부근에 닿는 묵직한 감촉에 절로 욕이 튀어 나왔다. 등 뒤에 있는 몸뚱이가 여자라고 세뇌하려던 작업은 무위로 돌아갔다. 

장석민은 필사적으로 팔다리를 움직여 계단을 올랐다. 시발 타령을 백팔 번쯤 했을 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덕분에 옷이 땀과 피로 흠뻑 젖었다. 그나마 자하르가 가르쳐준 길로 나왔으니 가능한 일이지 들어온 길로 올라와야 했다면 자하르가 죽기 전에 자신이 먼저 허리가 부러져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석민은 일단 자하르를 바닥에 눕혔다. 이곳이라면 어디서 뭐가 튀어 나올지 모르는 지하 도서관보다는 나을 것이다. 장석민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 모퉁이만 돌아간다면 계단을 쓸고 있을 후궁들이 있다. 소리를 지르면 도움을 청할 수 있을 것이다.

"여……!"

문득 뇌리를 스친 생각에 장석민은 입을 다물었다.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몰래 자하르를 따라 지하에 들어갔다가 이런 일에 휘말린 것이다. 장석민은 하일이 보낸 후궁이었다. 자하르에게 자객을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괜한 누명을 쓰기 딱 좋은 상황이다. 자신의 결백을 믿어줄 이도, 주장해줄 이도 이곳엔 없다. 그리고 자신이 그 안에 들어간 것을 본 이도 없다.

내내 베일을 쓰고 있던 터에 그 안에선 누구도 자신의 얼굴을 보지도 못했다. 잠시 고민하던 장석민은 아까 허리춤에 꽂아두었던 총을 빼내 들었다. 총신에 새겨진 아름다운 꽃의 문양과는 달리 묵직하고 차가운 쇠붙이의 감촉에 손이 떨렸다.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입안이 바싹 말랐다. 외따로 떨어진 사막 위에서, 그 자신을 지킬 것은 자신뿐이다. 장석민은 결심을 굳히고 방아쇠를 당겼다.

마음속의 불안이 불붙은 갈대밭의 새떼처럼 수런거렸다. 커다란 드럼통 속의 장작이 탁탁, 소리를 내며 타들어 갔다. 쇠막대로 장작을 뒤적거리며 그 안에 넣어 둔 옷이 잘 타고 있는지 확인했다. 

일련의 일이 새벽에 벌어진 것은 장석민에게 천만다행이었다. 처소로 돌아오는 길에 다행히 마주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남자 러마디가 머무는 처소가 인적이 드문 곳에 있는 것도 장석민에게는 행운이었다.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피가 묻은 옷을 벗어서 일단 침대 시트 아래에 쑤셔 넣었다. 시트는 사흘에 한 번 갈았다. 내일까지는 누구도 시트 아래를 들여다보지 않을 거란 뜻이었다. 방에 준비되어있던 목욕물로 피를 씻어내고 장석민은 여느 때처럼 아침을 먹으러 갔다. 테이블에 앉은 채로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한 명의 시종을 볼 수 있었다. 영어를 하지 못하는 어린 시종은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장석민에게 탄 빵을 가져다주었다. 손짓 발짓으로 빵과 자신을 가리키는 것을 봐선 본인이 구웠다는 뜻 같았다.

장석민은 빵을 받아들고 고맙다고 인사했다. 돌을 씹는 기분이었지만 불편은 하지 않았다. 어린 시종은 재빨리 자리를 떴다. 시종들 몇이 급히 저쪽을 향해 내달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궁에 경보가 울린 것이다. 장석민은 말없이 화석처럼 딱딱한 빵을 씹어 삼켰다. 그 경보를 울린 것은 장석민이었다.

빵을 다 삼키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에게 관심을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처소로 돌아온 장석민은 침대에 누웠다. 웅크리고 누워 해가 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피가 묻은 옷과 총을 옷 속에 감추고 밖으로 나왔다. 정원 깊숙한 곳에 있는 이름 모를 꽃나무 아래에 구덩이를 파고 총을 묻었다. 구덩이를 파묻은 주변의 나무 모양을 확인하고 장석민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정원을 지나 한적한 곳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시종들이 이곳에 모여 쓰레기를 태우며 잡담을 나누는 것을 몇 번 보았다. 혹시라도 도망갈 구석이 있나 여기저기 쏘다닌 결과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장작에 불을 붙이고 옷을 집어 던졌다. 잘도 타올랐다. 장석민은 그 앞에 멍하니 서서 불길이 타오르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

풀밭에 피투성이가 되어 누워있던 자하르의 모습이 떠올랐다. 다 죽어가는 사람을 그냥 두고 온 것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일단 나부터 살고 봐야지."

장석민은 그때 도움을 청하는 대신 바지춤에 차고 있던 총을 머리 위로 올리고 방아쇠를 당겼다. 총소리가 울리면 누구든 달려와 자하르를 도와줄 것이라 믿은 것이다. 총을 가지고 온 것은 실수였다. 방아쇠를 당기고 패닉에 빠져 저도 모르게 다시 허리춤에 찔러 넣고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안 죽었겠지. ……안 죽었을 거야."

만에 하나 그가 죽었다면 궁이 이렇게 조용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장석민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건 사고에 이렇게까지 휘말리기도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어머니가 올해 삼재라며 건네준 부적이 떠올랐다. 삼재니 부적이니 그런 것이 어디 있냐고 책상 구석에 던져두었는데……. 지도 어디에 붙어있는지도 모를 나라에 끌려와 기댈 곳 하나 없는 이 상황에서 그 부적이 간절해지기 시작했다.

손바닥으로 불기운에 뜨끈뜨끈하게 익어가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장석민은 자하르를 습격하던 남자들을 떠올렸다. 다들 보통 솜씨가 아니었다. 그런 사람이 넷이나 달려들었는데 버티고 있던 자하르도 보통은 아니다. 

대체 누가 자하르를 죽이려고 하는 것일까. 왕자도 쉬운 일은 아니구나. 문득 장석민은 쇠막대로 나뭇더미를 뒤적거리고 있는 자신으 ㅣ처지를 떠올리고 혀를 찼다.

"거지가 왕자 걱정하는 꼴이구나."

장석민은 옷가지가 잘 탔는지 확인을 하고 쇠막대를 집어 던졌다. 처소로 돌아오는 길에 시종들이 모여 심각한 얼굴로 숙덕거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중 하캄이 섞여 있는 것을 보고 장석민은 일부러 모른척 고개를 돌렸다.

「러마디 님.」

……노인네가 눈도 좋아.

장석민은 평연한 낯을 꾸미고 고개를 돌렸다.

「소식 들으셨습니까?」

「네? 무슨 일이요?」

「자하르 왕자님께서…….」

「죽었어요?」

아차 했다. 하캄이 이상하다고 생각하기 전에 장석민은 얼른 둘러댔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얼핏 들어서……. 어떻게 됐나요?」

「현재 회복 중에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다행이다.」

진심으로 안도했다.

나쁜 일을 벌인 것은 괴한들이었지만 자하르가 저렇게 된 데에는 자신의 책임이 아예 없다고 할 수 없었다.

장석민의 표정이 풀리는 것을 본 하캄이 말을 이었다.

「오늘 새벽에 사원 쪽으로 가지 않으셨나요? 혹시 뭐 보신 것 없습니까?」

장석민은 고개를 내저었다. 하캄이 자신을 부른 이유가 이것이구나, 싶었다.

「계단만 쓸다 왔어요.」

하캄은 그렇군요, 하고 대답했다. 처음부터 쓸 만한 이야기가 나올 것이라는 기대는 없어 보였다. 장석민은 잠시 머뭇거리다 물었다.

「많이 다치셨나요?」

「저희 같은 아랫것들은 자세한 사항을 알지 못합니다. 그저 총탄 때문에 갈비뼈 두 개가 부러지고 경미한 타박상을 전신에 입으시고 피를 많이 흘리셨고 아직 깨지 않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의식을 되찾지 못하시는 이유는 하야완이란 독 때문인데 지금은 해독한 상태라 합니다.」

「…….」

뭘 어디까지 알아야 자세히 안다고 자부할 수 있는 것일까. 이 동네는.

「그 독은 위험한 건가요?」

자하르를 두고 온 후로 제일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총상도 과다출혈도 아니었다. 푸르스름하게 변해가던 상처가 잊히지 않았다.

「다행히 독이 전신에 퍼지기 전에 발견되어 목숨에 지장이 없으시다 합니다. 다만, 언제 깨실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렇구나…….」

「걱정이 많이 되시나 봅니다.」

하캄의 말에 장석민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왕자님에 대한 연모의 마음이 정말 두터우시군요.」

「……. …….」

그런 마음은 한 오라기도 없다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당장 지금까지 보였던 걱정이 의심 받을 것이다. 장석민은 어색하게 웃으며 그렇죠, 하고 우물거렸다.

「곧 일어나실 겁니다.」

하캄이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 가 아니라 당연히 그럴 것이라는 뉘앙스라서 장석민은 혹시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실이 또 있는 건가 싶었다.

「의사가 그런 말을 했나요?」

「아닙니다.」

하캄이 고개를 내저었다. 장석민이 의아함에 눈을 치떴다. 분명 조금 전까지 자하르의 의식이 돌아오지 않고 있다 했다. 아무리 목숨에 지장이 없다 하더라도 저렇게까지 확신을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하캄이 장석민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말을 이었다.

「자하르 왕자님은 신의 가호를 받으시는 분입니다. 위대하신 아나크 왕의 뜻을 이어받고 계신 신성한 몸입니다.」

「…….」

숫총각이라는 사실 하나로 이렇게까지 신성시되다니. 소를 여신의 환생으로 여기는 나라의 관습이 100배쯤 타당하게 여겨질 정도다.

「그러니 반드시 일어나실 겁니다.」

한 치의 의심도 없는 눈빛이었다. 이쯤 되면 종교와 비슷한 수준이다. 만에 하나 자하르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날 그 근처에 있던 모든 사람이 몰살을 당하고 남았겠지.

몸이 오싹 한기가 스며들었다.

「그런데, 누가 그런 건가요?」

지하에 중상을 입은 괴한들을 남겨두고 온 기억이 떠올랐다. 범인은 잡았을 테니 정체를 알아내는 것에는 큰 어려움이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사실 범인만 잡으면 거기에 있다 사라진 자신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캄의 표정이 처음으로 침울해졌다.

「모른다고 합니다.」

「네? 왜……, 아니, 범인들이 안 잡혔어요?」

끈으로 묶어두고 나왔어야 했나. 장석민은 후회 사이로 하캄의 청천병력 같은 말이 파고들었다.

「흔적도 없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네? 왜요? 분명히 거기, ……아니, 어떻게 다 사라져요?」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일이 어디에서 벌어진지 뒤늦게 알게 되어 탑 아래로 내려갔는데 핏자국만 남아 있었을 뿐이랍니다.」

「아, ……네.」

그 정도면 충분히 자세히 알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하려다 관두었다. 장석민은 잠시 어물거리다 입을 열었다.

「그럼 어떻게 되는 건가요?」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 거짓말에 능숙한 편이었다. 변호사란 직업은 그런 것이었다. 정보의 양을 적당히 조절해서 상황을 적당히 포장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이번은 다르다. 혀끝 하나에 목숨이 달렸다. 장석민은 초조하게 하캄의 대답을 기다렸다.

「자하르 왕자님께서 깨어나시면 모든 게 해결될 겁니다.」

주름진 하캄의 눈가에 의지가 엿보인다.

장석민은 숨을 들이켰다. 묵직한 무게의 해결이란 단어가 배를 짓눌렀다.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아. 머릿속에서 떠오른 말이 이명처럼 귓가에 맴돌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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