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아."
커다란 액자를 옆구리에 낀 장석민은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쓸데없이 뛰어난 미술 솜씨를 발휘한 덕분에 1등을 거머쥔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렇게 받아온 상이 장석민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이걸 뭐 어디에 쓰라고."
자하르의 사진이 들어가 있는 액자는 성인 남자의 몸뚱이처럼 컸다. 그걸 비르마가 장석민에게 상으로 건네주자 앉아있던 여자들의 눈에 질투의 불길이 타올랐다.
차마 필요 없다는 말은 하지 못하고 저는 괜찮으니 다른 분께 드리는 게 좋겠다고 사양하자 비르마는 겸양 역시 후궁으로서 갖춰야 할 미덕이라고 장석민을 칭찬했다. 자신의 등에 꽂히는 수많은 시선을 뒤로하고 장석민은 결국 자하르의 사진을 받아올 수밖에 없었다.
사진을 집에 걸어둘 만큼 좋아했던 여자라고는 학창시절 우상 왕조현 뿐이었다. 그 이후로는 진득하게 좋아하는 여자도 없었다. 그런데 이걸 걸어두라니.
전통복을 입고 그림처럼 웃고 있는 자하르의 사진을 보자 장석민은 묘하게 기분이 안 좋았다. 모든 것을 다 가지고도 가지려고 하지 않는 상대가 얄밉게 느껴진 것이다.
"이러니 열폭들을 하지."
장석민은 방으로 가서 자신의 정신 건강을 위해 이 사진을 구석에 처박아 놔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처소로 향하던 도중 장석민은 복도를 따라 서 있는 석등에 불이 들어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요 며칠 밤 산책을 했지만, 석등에 불이 붙어있는 것을 본 적은 없었다. 시종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본 장석민은 궁의 공기가 평소와 다름을 느꼈다.
"왔구나."
장석민은 옆구리에 액자를 낀 채 걸음을 빨리 옮겼다. 우선 말이 통하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 저 멀리서 어린 시종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는 하캄을 발견하고 그는 내달리듯 걸었다.
「하캄! 하캄!」
하캄이 장석민을 보고 인사를 건넸다. 장석민도 멈추어 서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또 뵙게 되는군요.」
「네. 덕분에 수업은 잘 들었습니다.」
하캄이 장석민의 옆구리에 있는 액자를 보고 빙긋이 웃었다. 장석민은 얼른 그것을 뒤로 감추고는 그런데, 하고 말문을 열었다.
「혹시 오늘 자하르 님이 궁에 오신 겁니까?」
「네. 일정을 마치시고 방금 들어오셨습니다.」
짧으면 일주일, 길면 이 주일까지 궁을 비운다고 오늘 낮에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이곳에서 시간을 때울 거리를 생각해내 수업까지 듣고 온 것이다.
「어디 계십니까? 어디로 가면 자하르 왕자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아무리 이곳에 있는 여자들이 아름답다 하더라도 만질 수 없는 꽃들이었다. 장석민은 하루라도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 자신의 삶을 원래대로 되돌리고 싶었다.
「부탁입니다. 어디로 가면 자하르 왕자님을 만날 수 있나요?」
장석민은 눈을 반짝거리며 묻자 하캄이 어색한 미소를 띤 채 대답했다.
「어디 계신지는 말씀드릴 수 있으나 아마 만나실 수는 없을 겁니다.」
「네? 왜요?」
아시다시피 자하르 왕자님은 밤이 되면 어떤 후궁도 곁에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장석민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하캄이 자신의 말을 완전히 오해한 것을 깨달은 터다.
「아니, 그러니까 저는, 그러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게다가 밤이 늦었습니다. 나라의 일로 먼 나라에 다녀오신 후라 방에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잠깐, 1분, 아니 30초면 되는데…….」
「요즘 이런저런 문제로 나라 안팎이 복잡한 상황입니다. 후에 만남을 청하시길 권합니다.」
「언제요! 내일 당장 어디로 떠날지도 모르잖아요. 전 정말로 30초면 되는데…….」
울상을 짓고 그렇게 말해보아도 하캄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어보일 뿐이었다. 장석민은 알겠어요, 하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차분한 음성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럼 하나만, 딱 하나만 대답해주세요.」
"사람이라는 게 참 그래."
정원을 가로질러 걸어가며 장석민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오늘 점심 때만 하더라도 자하르가 남자 러마디는 모두 풀어준다는 이야기를 듣고 일이 주 정도는 느긋하게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저녁에 자하르가 궁에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조급증이 생겨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지금 당장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영영 돌아가지 못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마저 들었다.
자하르 님이 머물고 계신 방을 알려주세요. 장석민의 부탁에 하캄은 난색을 보였다. 지금 가려는 것이 아닙니다. 나중에, 훗날 자하르 님이 한가해지셨을 때, 기회가 된다면 찾아가 뵙고자 하는 겁니다. 장석민은 절실한 마음을 담아 그렇게 말했다. 하캄은 한숨을 내쉬며 손가락으로 궁의 중앙에 있는 흰색 건물을 가리켰다.
장석민은 몇 번이나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며 절대로 오늘 찾아가는 무례함은 범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어차피 잠자는 시간도 아니잖아."
어둠 속에서 중얼거리던 장석민은 고개를 들었다. 자하르가 머물고 있다는 3층에 불이 들어와 있다. 하캄에게 매달려 알아낸 정보에 의하면 자하르는 자정이 넘기 전에 잠드는 일이 없다고 했다.
1분, 아니, 30초면 자신의 볼일은 끝이 난다. 그렇게 무례한 일도 아닌 것이다. 잘못된 일은 그 즉시 바로잡는 게 최우선이다.
끊임없이 자기 합리화를 하며 장석민은 어둠을 더듬어 자하르가 머물고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몇 번, 경비병들이 앞을 지나갔지만 그때마다 장석민은 아슬아슬하게 몸을 숨겼다.
"역시 사람은 군대를 갔다 와야 한다니까."
아버지의 입김으로 집안에서 유일하게 공익을 갔다 온 장석민은 몸을 웅크린 채 어둠 속으로 재빨리 몸을 날렸다. 이번에도 아슬아슬하게 경비병을 따돌리고 움직일 수 있었다.
인내심을 갖고 그렇게 전진하기를 한 시간. 자하르가 머물고 있는 건물에 도착한 그는 제2차 관문을 목격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젠장."
건물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문 앞에 장총을 든 경비병 두 명이 버티고 있었다. 장석민은 혹시나 그들이 자리를 비우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고 수풀에 숨어 있었지만, 그들은 박제된 곰처럼 움직일 줄 몰랐다. 수풀 안에서 삼십 분을 더 기다려 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장석민은 입술을 질근질근 깨물며 3층을 올려다보았다. 불은 꺼지지 않은 채다.
저기 위에 올라가면 자하르가 있는데. 그놈만 만나며 내가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데. 한국으로 돌아가면 여자를……, 아니, 목숨이 안전해 질 텐데.
도저히 포기가 되지 않았다. 장석민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건물 안으로 통하는 다른 문이 있는지 살폈다. 그러다 문득 손에 닿는 벽의 촉감을 깨닫고 다른 방법으로 올라가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재빨리 경비병의 시선이 닿지 않는 사각지대로 몸을 숙인 채 걸어갔다. 커다란 반원의 탑으로 가려진 곳에서 장석민은 자신이 생각해 낸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벽에 발을 디디었다.
"된……, 다!"
간신히 발을 걸칠 수 있는 수준으로 벽돌의 홈이 파일 건축물에 입을 맞춘 후, 그는 왼발을 위로 올렸다. 동시에 오른손을 반대편 방향으로 뻗었다. 실내 암벽등반을 즐기던 그녀가 떠올랐다. 그녀의 녹록치 않은 성격 덕분에 취미에도 없는 암벽등반을 하러 새벽마다 일어나 암장을 찾았던 것이다. 지금은 이름도 생각나지 않는 그녀에게 무한한 감사를 하며 장석민은 열심히 벽을 올랐다.
"후우……."
극도로 신경을 집중하고 팔로 흠을 움켜쥔 채, 발을 움직였다. 몸이 한쪽으로 쏠리지 않도록 균형을 잡으며 위로 기어 올라갔다. 아무런 안전장치도 없는 데다 경비병에게 발가되지 않도록 주변 경계까지 하면서 올라가느라 점점 올라가는 속도가 더디어졌다.
반쯤 올라왔을 때 무심코 아래를 내려다본 장석민은 이크, 하고 몸을 벽에 바싹 붙였다. 내려갈까도 생각해봤지만 올라온 것이 아까워 도저히 그럴 수가 ㅇ벗었다.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장석민은 자하르가 있는 3층 발코니를 향해 필사적으로 벽을 기어올랐다. 3층 발코니의 기둥을 손으로 움켜잡는 순간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던 등반의 끝을 알리는 팡파르가 울렸다.
두 손으로 기둥을 움켜쥐고 몸에 반동을 주었다. 다리를 발코니의 난간에 걸쳤을 때 안쪽에서 두런거리는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재빨리 발코니 위로 올라갔다. 안쪽으로 몸을 납죽 숨기고 안쪽의 상황을 살폈다.
두 남자가 대화 중이었다. 커튼에 가려 얼굴이 정확히 보이지 않았지만 저 태평양처럼 넓은 어깨의 주인공은 그날 보았던 26세 동정남이라고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장석민은 문에 바짝 기대어 흘러나오는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이내 곧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임을 깨닫고 쓰읍, 혀를 찼다.
이거야 원, 아랍어 모르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여기에서 한 달만 있었어도 아랍어 공부를 좀 해보는 것인데, 아깝게 됐네. 나는 이제 곧 떠날 몸이니까.
장석민은 발코니 구석에 쭈그려 앉아 안에서의 대화가 끝나길 기다렸다. 아무리 그래도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는 도중인데 불쑥 들어갈 수는 없었다. 발코니로 들어가면 자하르가 놀랄 텐데. 뭐라고 해야 하나. 익스큐즈미 하면 되려나. 아니면…….
생각하는 중에 장석민은 주변을 감싼 공기가 미묘하게 바뀐 것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사위가 조용하다. 이상하리만치, 뭐가 달라진 거지.
장석민은 고개를 빼고 안을 살펴보았다. 칼을 빼들고 발코니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자하르와 그의 수하를 발견한 순간 뭐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죽는다.
『누구냐.』
굵직한 남자 목소리가 발코니에 울렸다. 뒤따라 나온 자하르가 남자에게 물었다.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고?』
『네, 왕자님. 분명이 이쪽에서 기척을 느꼈습니다.』
『아무도 없지 않느냐.』
『분명히…….』
『밤이 늦었다. 네가 많이 피곤한 모양이다.』
『아닙니다. 왕자님. 제가 분명히 들었습니다.』
남자가 억울하다는 듯이 말하자 자하르의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뒤따랐다.
『괜찮다. 이만 들어가 쉬어라.』
『그렇지만…….』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하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 또 국무회의에 참석해야 한다. 아까 그 이야기는 내일 다시 매듭짓도록 하자.』
남자가 칼을 다시 칼집에 넣고 그럼, 하고 자하르에게 인사를 했다. 이내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발걸음 소리가 저벅저벅 멀어져갔다. 풀벌레가 풀숲에서 징징, 울었다. 발코니에 기대어 있던 자하르가 입을 열었다.
『이만 올라와도 될 텐데.』
아무런 반응이 없자 자하르가 흠, 하고 생각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이만 올라와야 하지 않나요?」
발코니의 기둥을 붙들고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장석민이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자하르와 눈이 마주친 순간, 장석민의 얼굴이 당혹과 수치로 붉게 물들었다.
「괜찮으세요?」
자하르가 물었다. 완벽한 킹스 잉글리시였다. 그의 성품만큼이나 부드럽고 기품 있는 발음이었다. 신경을 집중해야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잇는 하일의 괴상한 발음과는 천지차이였다.
「도와드릴까요?」
이번에도 자하르가 물었다. 장석민은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았지만 팔에 마비가 오기 직전이기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자하르가 손을 뻗어 장석민의 손을 잡아주었다. 한 손으로 장석민의 몸을 가볍게 들어 올린 그는 그대로 발코니 안쪽으로 장석민은 안착시켰다. 바닥에 주저앉은 장석민은 근육이 경직되어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왼팔을 주물렀다.
칼을 빼어 든 남자를 본 순간 장석민은 두 번 생각하지 않고 발코니 바깥으로 몸을 날린 것이다. 난간 기둥에 매달려 몸을 버티면서도 장석민은 공포로 머리가 굳어 이게 무슨 일인가 판단이 되지 않았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인가요?」
자하르의 질문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장석민은 얼른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머리 위에서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린다. 온화한 미소가 자하르의 입가에 걸려 잇다. 같은 형제인데도 이렇게나 다르다니. 장석민은 자신의 손가락 발가락을 잘라버리겠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하일을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역시 투표권이 있다면 8번이다.
「밤이 늦었습니다. 이만 돌아가시지요.」
자하르가 장석민을 일으켜 세워주었다. 장석민은 자신이 자하르의 어깨에도 닿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속으로 적잖이 놀랐다. 온화하고 아름다운 자하르의 얼굴이 워낙 인상적이라 그가 이토록 키가 크다는 사실을 미처 인지하지 못한 것이다.
이렇게 키가 크고 어깨가 떡 벌어진 남자를 내가, ……아아, 메슥거려.
장석민이 손으로 입을 막은 채 미간을 찌푸리자 자하르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물었다.
「몸이 좋지 않으신가요? 시종을 불러 처소까지 모셔다 드리라고 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그러니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드릴 말씀?」
자하르가 웃으며 장석민의 말을 따라 묻는다. 장석민은 손바닥이 식은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음을 깨달았다. 이상했다. 자하르의 태도는 부드럽고 예의 바른데 온몸의 세포가 일제히 곤두선 것처럼 긴장상태가 계속되었다. 장석민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정말로 중요한 용건입니다.」
비장한 각오를 다지고 눈에 힘을 주었다. 인간 대 인간, 남자 대 남자로서 부탁할 생각이었다. 하일이 자신에게 저지른 끔찍한 일과 살레하와 관련된 일을 모두 얘기하려 했다.
「하일 형님께서 보내신 분이지요.」
「……어, 네.」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그가 자신을 기억하고 있을 거라고는 조금도 기대하지 않은 것이다. 그날 자하르에게 온 선물의 양을 고려해 본다면 당연히 기억할 리가 없었다.
동양의 신비, 뭐 이런 걸로 기억하는 건가.
장석민은 눈을 껌벅거리며 자하르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형님께서 특별히 부탁한다는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 …….」
「간곡하게 부탁을 하셨기에 잘 대접해드리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혹시 불편한 사항이 있으시면 하캄에게 말씀을 하시면 될 겁니다.」
「아, 예 감사…….」
자하르의 목소리는 사막에 이는 바람처럼 온후해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힘이 있었다. 저도 모르게 황송한 마음이 들어 고개를 끄덕이던 장석민은 이게 아니지, 하고 정신을 차렸다.
「아니, 저는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네? 알고 계신다고요?」
자하르가 고개를 끄덕인다. 세상의 모든 것들을 알고 있을 것 같은 현명하고 사려 깊은 얼굴이다. 장석민의 뺨에 화색이 돌았다. 이야기가 그럼 쉬워지는 것이다.
「하일 형님께서 대신 전해주셧습니다.」
「……전해주셨……다고요?」
대신, 이라는 단어가 이토록 불길하게 들린 적은 맹세코 없었다. 장석민은 눈을 치뜨고 자하르의 입술만 바라보았다.
「우연히 저를 보고 후궁이 되기로 결심하셔서 하일 형님을 찾아가셨다고 들었습니다. 먼바다를 건너오셨다고요.」
「……! ……!!」
「보통 남자 후궁은 바로 출궁하도록 조처를 취하는데, 형님의 부탁도 있었고, …….」
자하르가 말끝을 흐리며 잔잔하게 웃어 보인다. 이 밤중에 벽을 기어올라 3층 발코니까지 올라온 장석민의 파이팅을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한 것이다.
「어어, 아니, 아니요, 아니, 아닙니다.」
장석민이 두 손을 내저었다. 얼굴은 희게 질리다 못해 푸르스름하게 변한 채로.
자하르가 테이블에 손을 뻗어 작은 종을 집어 들었다. 두어 번 흔들자 문밖에서 시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짧은 지시를 내렸다.
「시종이 처소까지 모셔다 드릴 겁니다.」
「아니요, 오해는 풀어야, 오해는 풀어야죠. 저는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온 겁니다.」
피를 토할 것 같은 심정으로 장석민은 자하르에게 그렇게 말했다.
자하르가 애매한 웃음을 지었다.
장석민은 사람의 표정을 읽는 데 선수였다. 여자의 미묘한 심경변화를 알아채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온 결과였다. 덕분에 어디 가서 눈치가 없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장석민은 자하르의 표정을 정확히 읽을 수 있었다.
상대방에 대한 거부와 그에 대한 미안함.
「밤이 늦었습니다. 피곤하실 텐데 가서 주무시지요.」
그가 들고 있던 종을 한 번 더 울리자 시종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자신에게 축객령이 내려진 것을 깨달은 장석민은 그게 아니라고 외쳤지만, 시종이 이미 그의 팔을 붙든 후였다.
「그러니 모쪼록 당분간은 이곳에서 편히 계시기 바랍니다.」
「당분간이라니! 잠깐 이거 놔, 당분간이라니요!」
장석민이 목소리를 높여 당분간은 필요 없다고 외쳤지만 방문은 굳게 닫힌 이후였다.
「안 돼. 이게 무슨 일이야. 난, 아니라니까. 안 좋아해. 하나도 안 좋아. 안 좋다니까!」
시종은 이런 일이 종종 있었다는 듯이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장석민의 팔을 잡아끌었다.
"아니라니까! 한국 대사관! 대사관을 불러줘! 대사관을 좀 불러달라고요! 오해라고!"
북받친 억울함이 한국말이 되어 쏟아졌다.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밤은 깊어 갔고 오해는 더욱 깊어갔다.
"아! 진짜 아니라니까."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벌써 네 번째다. 잠을 자다가도 그 생각이 떠오르면 저도 모르게 공중에 발길질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는 것이다.
말했어야 했는데. 거기서 그게 아니라고 말했어야 했는데.
장석민은 자신을 바라보며 짓던 자하르의 애매한 미소가 떠오르자 머리를 쥐어뜯으며 으으, 앓는 소리를 냈다. 침대에 널브러져 몸을 버둥거려 봐도 어제부터 가슴을 짓누르던 수치심을 1그램도 줄어들지 않는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멍한 얼굴로 고개를 쳐든다.
"……됐다. 됐어."
배는 이미 떠나간 후다.
잠자리에서 수천 번 후회를 해보아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오늘 어떻게든 다시 자하르를 만나서 얘기해야 한다.
장석민은 마음을 다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창밖의 어스름한 어둠 위로 새벽의 푸른 기운이 몰려들고 있었다.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조금 후면 아침 식사시간이다. 그래, 하캄에게 다시 자하르의 일정을 물어보자. 오늘 다시 만나서 반드시 오해를 풀자.
장석민은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던졌다. 문 앞에 다람질된 새 옷이 준비되어 있는 터다. 집에서도 일하시는 아주머니가 늘 상주해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시중을 받는 일에는 익숙한 그였지만 여기는 차원이 달랐다. 속옷까지 다림질되어 들어있는 바구니를 집어 들고 방으로 다시 들어왔다.
각이 잘 잡힌 속옷을 집어 들었을 때, 그 안에 들어있는 종이를 발견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뭐지."
반으로 접혀있던 종이를 펼쳤다. 굵은 매직으로 숫자가 적혀 있었다.
26.
"……뭐지?"
26이란 숫자가 나타내는 의미가 있는 건가 싶어 장석민은 머리를 긁적였다. 자신의 나이도 아니고, 허리 사이즈도 아니고, 오늘 날짜도 아니고.
"아! 자하르의 나이!"
장석민은 손뼉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자하르의 나이를 굳이 이 새벽에 종이에 적어 바구니에 넣어야 할 이유가 있나 떠올렸다.
알 게 뭐냐. 자하르의 사진을 두고 그림을 그리는 수업까지 하는 판국에 새삼 종이에 나이를 적어 알리는 것은 놀랍지도 않다.
장석민은 종이를 아무렇게나 구겨서 구석에 던져버리고 옷을 입었다. 준비된 세숫물로 대충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질했다. 여자를 만나러 가는 자리라면 최대한 공을 들여 차림새를 신경 쓰겠지만, 어차피 식사하러 가는 자리에 보이는 것은 남자 시종뿐이었다. 남자에게 잘 보일 필요는 예나 지금이나 그리고 앞으로도 없는 것이다.
장석민은 옷을 입고 처소를 나갔다. 지나가던 시종들이 그를 알아보고 예의를 차려 인사했다. 장석민도 같이 고개를 숙였다. 어차피 며칠 뒤엔 떠날 곳이지만 있는 동안에 책잡힐 일은 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몇 걸음 걷지 않아 이상한 기척이 느껴졌다.
장석민은 뒤를 돌아보았다. 숙덕거리던 시종 둘이 그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 뭐야."
착각인가 싶어 신경 쓰지 않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식당으로 가는 길에 다른 시종들도 그를 보고 수군덕거리는 광경을 몇 번 더 보고 나서 자신의 착각이 아님을 인정했다.
테이블에 앉은 장석민은 눈으로 하캄을 찾았다. 수프에 빵을 찍어 먹으면서도 연신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럴 때마다 주변에 있던 시종과 눈이 마주쳤다. 못 볼 것을 보았다는 듯이 시종들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좋지 않은 징조다.
다행히 하캄이 과일 바구니를 들고 멀리서 나타났다. 장석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하캄에게 다려갔다.
「하캄!」
자신을 발견한 하캄의 표정에 여러 가지 감정이 스치는 것을 보고 장석민은 알아챘다.
……어제의 일이 알려진 거다.
입 싼 중동 놈들. 고새 그게 다 퍼진 거냐.
하캄이 인사했다. 장석민은 벌게진 얼굴을 하고 같이 인사를 했다. 하캄이 밤새 별고 없으셨나요, 하는 형식적인 인사말을 건넸다. 차마 거기에 별일 없었다는 뻔뻔한 대답을 하지는 못했다.
장석민이 주저주저하며 입술만 물었다 놓기를 반복하자 하캄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큰일 나실 뻔했습니다.」
「그……, 죄송합니다.」
「저한테 죄송하기 전에 러마디 님의 몸을 스스로 돌보셔야 합니다. 왕자님의 처소에 무단으로 침입하는 것은 중죄입니다. 다른 왕자님이셨으면 아마 목을 치셨을 겁니다.」
하캄의 말을 듣고 있자 목에 섬뜩한 찬 기운이 스치고 지나간다. 장석민은 어깨를 움츠리고 다시 한 번 죄송하다는 사과의 말을 중얼거렸다.
「이 궁의 주인이 자하르 님인 것을 다행으로 여기세요.」
하캄의 진심 어린 조언에 장석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역시 8번이지.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세요. 정말 큰일 납니다.」
오늘 당장 그런 일을 벌일 예정이었던 장석민은 하는 수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데 저한테 무슨 볼일이 있으셨던 거 아닙니까?」
하캄이 물었다. 목이 잘리느니 마느니 하는 이야기를 들은 직후라 장석민은 차마 대놓고 자하르의 일정을 물을 수가 없었다.
「아니, 저기, 그러니까…….」
그래도 오해는 바로잡아야 했다. 손 놓고 있다가는 궁 안에 자하르 왕자를 덮치려고 성벽을 기어 올라간 변태로 소문나는 것은 시간문제다.
「사과 말씀을 드리고 싶은데요.」
장석민이 두 손을 모으고 쌍꺼풀 없이 커다란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진중하고 진실해 보이는 표정이라는 것을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거울에서 수십 번 연습해온 표정이었던 터다. 이 표정으로 이야기했을 때 장석민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 여자는 없었다.
장석민은 최대한 공손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어제는 오해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자하르 왕자님께 사과 말씀을 드리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쩨쩨하긴."
투덜거리며 혀를 찼다. 그의 앞에 서 있는 여성이 흘깃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장석민은 베일을 고쳐 썼다.
오늘도 꼬장꼬장한 비르마가 앞에서 일장연설을 늘어놓는 중이었다. 자하르에게 사과를 해야 한다는 장석민의 말을 들은 하캄의 표정은 이게 어디서 약을 팔아, 였다. 물론 그는 부드러운 말로 어제의 일 때문에 당분간은 자제하시는 편이 나을 거라고 답했다.
자제라니.
장석민은 옷자락을 움켜쥔 채로 손에 힘을 주었다. 그 말만 들으면 자신이 자하르를 덮치지 못해 환장한 변태처럼 여겨지지 않는가.
아무리 부탁하고 매달려도 하캄은 결국 장석민에게 자하르의 일정을 알려주지 ㅇ낳았다. 그는 입을 굳게 다물고 고개를 내저었다. 그것이 이곳에서 공평한 방식이라고 믿는 눈치였다.
드럽고 치사해서 내가 알아내고 만다.
하캄이 아니더라도 정보를 얻어낼 곳은 얼마든지 있었다. 게다가 하캄은 늙은 남자가 아니던가. 애당초 자신의 매력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었다. 자하르에 대한 정보도 알고 있고 자신의 매력이 통하는 상대의 교집합을 찾아, 장석민은 오늘도 예의 그 수업에 참석하기로 했다.
「자하르 왕자님은 굉장한 미식가입니다. 위대하신 왕 무크라르 전하의 일을 도와 세계의 각지를 다니시며 온갖 음식을 맛보셨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모두들 진지한 얼굴을 하고 비르마의 강의를 들었다. 자하르가 미식가거나 말거나 장석민에게 중요한 것은 그가 언제 어디에 나타나느냐 하는 문제였다.
만나기만 한다면.
장석민은 가슴 속에 품고 있는 봉투를 손으로 어루만졌다. 어제의 상황을 되짚어 본다면 자하르와 허심탄회하게 말을 나누는 기회를 잡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말이 안 되면 글로 표현하면 되는 것이다.
하캄에게 단호한 거절을 듣고 자하르 전하를 덮치려고 성벽을 기어오른 변태라는 오욕을 쓴 채, 눈물에 젖은 빵을 먹고 난 장석민은 처소로 들어오자마자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살레하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자신은 얼마나 결백한지, 인도적인 차원에서 이것이 얼마나 큰 문제인지, 장석민은 감정과 논리를 적절히 사용해 줄줄 글을 써내려갔다.
편지를 쓰는 일 따위, 소싯적 러브레터를 남발했던 그에겐 일도 아니었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필기체로 장석민은 편지지 세 장을 빼곡히 채웠다. 자하르 왕자님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봉투를 봉했다.
이젠 30초도 필요 없다. 3초면 된다.
자하르의 머리카락만 보이면 어디든지 달려가서 이 편지를 주겠노라고 다짐하며 장석민은 고개를 들었다.
「고귀한 분을 모시는 사람으로 요리 솜씨 또한 중요한 덕목이 될 것입니다. 요리하는 사람을 부리는 것도 모두 그대들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몇 살이나 되었을까. 일흔? 여든?
하얗게 머리가 세었음에도 카랑카랑 힘찬 비르마를 바라보며 나이를 짐작하려다 포기했다. 도저히 가늠되지 않는 노인이었다.
목소리와 기세만 봐선 50대지만 얼굴이나 손의 주름을 봐선 최소 칠십이다. 나이와 무관하게 살아가는 타입이라는 뜻이다. 저런 사람에게 잘못 걸리면 진짜 골치 아파지는데.
「거기!」
비르마가 들고 있던 지팡이가 이쪽을 가리켰다. 앉아있던 장석민은 후다닥 몸을 바로 하자 비르마가 혀를 내차고는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오늘은 여러분들의 나라의 전통 음식들을 만들어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역시 이번에도 요리를 가장 잘 만든 사람에게는 상을,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벌을 내릴 것입니다.」
어제의 벌은 경전을 베껴 써오는 것이었다. 아랍어가 지렁이로 보이는 장석민에게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1등을 했다가는 또 얼마나 괴상한 상이 기다리고 있을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어차피 떠날 몸이니 눈에 띄지 않는 게 낫다. 장석민은 중간이나 가자고 결심했다.
「신선한 재료를 고르는 안목과 원하는 재료가 없을 때 적당한 대체재를 사용하는 기지도 필요합니다.」
비르마가 식품 창고의 위치를 알려주며 가서 재료를 골라오라고 했다. 저마다 안면이 있는 사람들끼리 짝을 지어 움직였다. 장석민도 얼른 그녀들의 뒤를 따라 나섰다. 비르마가 없는 곳이라면 그녀들과 말을 섞는 것이 훨씬 쉬울 것이란 심산이 있었다.
「어떤 요리를 하실 건가요?」
장석민이 생선을 고르고 있던 여자에게 다가가 물었다. 그러자 그녀가 화들짝 놀라 자리를 피했다. 부끄러움이 많은 성격인가.
그는 이번엔 긴 다갈색 머리에 아름다운 눈을 가진 여자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오늘 벌을 받지 않으려면 노력해야겠네요. 어디에서 오셨나요?」
이번에도 여자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자리를 피했다. 이쯤 되면 개개인의 성격을 고려해볼 필요가 없다.
뭐가 문제인 거지.
"앗."
누군가 뒤에서 장석민의 다리를 단단한 막대로 내리쳤다. 비르마였다.
「결혼하지 않고, 베일을 쓰지 않은 여성에게는 말을 걸면 안 됩니다. 그것도 배우지 않고 궁에 들어오신 건가요?」
「몰랐습니다.」
비르마가 한심하단 듯이 혀를 찼다. 장석민은 조금 울컥했다. 눈뜨고 보니 배 위였고 정신 차려 보니 궁 안이었는데 뭔가 배울 틈이 어디 있겠느냐고 항변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말이 상대에게 먹힐 것 같지 않다. 게다가 이런 자리에서 납치니 뭐니 하는 말을 잘못했다가는 일이 유쾌하게 풀릴 것 같지도 않았다.
그는 변호사였다. 아무리 아버지의 배경으로 로스쿨에 입학하고 로펌에 입사했다고 하더라도 변호사로서 최소한의 자질은 갖추고 있는 것이었다. 어디서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다음부터 주의하겠습니다.」
장석민은 순순히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다.
「이곳에서는 남녀 러마디 간에도 대화를 나눌 수 있다 해도 웬만하면 삼가주세요. 보기좋지 않습니다.」
장석민을 못마땅한 기색으로 한번 훑어보던 비르마가 지팡이를 들고 자리를 떠났다. 그녀는 주변을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물으며 조언을 해주었다. 장석민에게는 아예 기대조차 걸지 않았는지 무슨 요리를 하는지 묻지도 않았다.
장석민은 낮게 혀를 찼다. 여자들이 자신에게 아무런 기대도 관심도 보이지 않는 이 상황이 익숙하지 않은 터다. 장석민은 식재료를 고르며 주변을 살폈다. 혹시 베일을 쓴 여자가 있으면 말을 걸어볼 심산이었다. 불행히도 오늘 역시 모든 여자가 베일을 쓰지 않은 채였다. 부엌행주라도 잠시 그녀들의 머리에 얹어주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심정이었다.
눈이 즐거운 것은 좋았지만, ……좋다.
이렇게나 많은 미녀와 한자리에 있는 경험은 또 언제 해보겠는가.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성현들의 말도 있으니 일단은 눈으로 즐기자. 장석민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억누르고 식재료를 골라 담아 자리로 돌아갔다. 벌써 밑 재료를 준비하는 사람도 여럿 보였다.
장석민은 가져온 고기를 물에 담가 피를 빼며 재료를 다듬었다. 요리하는 남자는 섹시하잖아. 어느 영화에서 여주인공이 남자 주인공의 셔츠만 걸쳐입고 담배를 피우며 했던 대사에 장석민은 요리를 배우기로 마음먹었다. 그때가 열일곱 살이었던가. 공부는 하지 않고 요리학원을 나간다는 장석민 때문에 어머니는 몸져누우셨다. 결국 그가 요리학원의 문턱을 넘게 된 것은 대학을 진학하고 나서였다.
그가 가진 수많은 취미 중에서 요리는 단연 으뜸이었다. 양시에서부터 일식, 한식, 심지어는 재빵사 자격증까지 모두 따두었다. 어떤 여자를 만나도 그녀의 취향에 맞춰줄 수 있는 경지에 오른 것이다.
여기저기에서 벌써 맛있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장석민은 칼을 양손에 들고 피를 뺀 소고기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다지기 시작했다.
다다다다다.
도마를 두드리는 경쾌한 소리에, 요리하던 여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장석민에게 향한다.
장석민은 싱긋 눈웃음을 보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쌀쌀맞은 냉대였다. 마음이 급속도로 서늘해졌다. 칼을 쥔 손에 힘이 풀렸다.
젠장. 베일만 벗으면 저 여자들의 마음을 돌리는 건 시간문제일 텐데.
……아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지. 이제 어디서 어떻게 자하르를 만나면 좋단 말인가. 정보를 얻으려고 이곳에 찾아왔는데 여자들에게는 말도 건네지 못한다. ……어제 1등을 하는 게 아니었는데. 그 액자를 노리는 여자들이 제법 많아 보였지. 그걸 준다고 하면 나한테 말을 좀 걸어주려나.
기계적으로 고기를 다지며 장석민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혹시나 자하르에 대한 얘기를 나누지 않을까 여자들의 대화에 귀기울여봤지만 좀처럼 대화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제 2외국어를 아랍어로 해두는 건데.
장석민은 한숨을 내쉬며 대충 다진 고기를 볼에 담았다. 요리는 정성이고 먹는 사람을 위한 마음이다. 한식 선생님이 입이 닳도록 말했던 사항이었다.
알 게 뭐야. 이건 여자를 위한 음식도 아닌데.
장석민은 무심한 얼굴로 이번엔 씻어둔 양파를 다졌다. 크기가 들쑥날쑥했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이런 꼴로는 이곳 여자들에게 점수를 딸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대충하자, 대충.
성의 없이 다진 고기와 대충 자른 양파를 한데 넣어 아무렇게나 버무리고 잇는데 문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고기를 치대며 장석민은 시선을 돌렸다. 조리대에 서 있던 여자들이 모두 어느새 베일을 꺼내어 쓰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비르마 역시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고 한쪽으로 비켜선 상태였다. 장석민도 얼른 그들을 따라 무릎을 꿇었다.
문이 열리고 화려한 옷차림의 여성이 들어왔다. 장석민은 한눈에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챘다. 닮았다. 모를 수가 없이 닮았다. 저 다정해 보이는 눈웃음과 상냥한 입매가 자하르와 똑 닮아 있었다.
「나이마 비 전하를 뵈옵니다.」
비르마가 인사를 하자 자하르의 모친이 일어서라고 손짓을 했다. 장석민은 베일 사이로 자하르의 모친 나이마 비를 살폈다. 움직일 때마다 장미향기가 날 것 같은 손동작이었다. 손끝마저 아름다운 여성이다.
「수고가 많으십니다.」
자하르의 부드러운 음색이 누구를 닮았는지 알게 해주는 순간이었다. 나이마는 상냥하게 모두의 노고를 치하한다고 인사말을 건넸다.
고생이라곤 하지 않은 몸이다. 여자의노화를 사람들은 얼굴에서 찾지만 장석민은 목소리에서부터 온다고 믿고 있었다. 나이마의 목소리는 삼십 대 초반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고왔다.
「오늘은 특별히 나이마 비 전하께서 그대들의 음식을 심사해주실 겁니다. 그러니 최선을 다하시길 바랍니다.」
비르마의 한마디에 칼을 들고 있던 여자들의 눈빛이 일제히 변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자하르의 모친에 눈에 든다는 것은, 총애받는 후궁으로 가는 지름길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왕위 계승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는 중이다. 왕자들 중에 가장 유력한 대상으로 꼽히는 것은 자하르였다.
이미 그로 내정되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자하르는 26년간 지켜왔던 수도승과 같은 삶을 벗어나 아름다운 비를 맞이하게 된다. 모두 그 자리를 꿈꾸고 있었다. 명예와 부, 그리고 타르카 왕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남자를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자들은 전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현저하게 살벌한 기세로 요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장석민도 입을 다물고 요리를 하는 중이었다. 베일도 쓰고 있겠다, 이제는 말을 걸어도 되겠지 싶어 앞의 여자에게 날씨 이야기를 했다가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휘두르는 칼에 베일 뻔한 것이다. 선택의 여지 없이 조용히 요리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요리를 만들고 계시나요?」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아름다운 목소리에 장석민은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다진 고기를 이용한 전통 요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를 들은 나이마가 고개를 살짝 비스듬히 기울인 채 미소를 지었다. 남자 러마디가 요리를 하는 모습이 재미있다는 표정이었다.
「하일 왕자님께서 보내신 분입니다.」
비르마의 말에 나이마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장석민은 잠시 고민했다. 자하르 왕자의 어머니라면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했을 때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을까.
「어느 나라에서 오셨나요?」
답을 알 수 없다.
장석민은 안전한 길을 선택했다.
「한국에서 왔습니다.」
나이마가 그렇군요, 하고 대답했다. 말투는 상냥했지만, 한국이라는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 관심도 없어 보였다. 그녀에게 장석민은 둘째 왕자인 하일이 보낸 남자 러마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그녀는 장석민에게 눈인사를 하고 자리를 옮겼다.
옆 테이블에서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나이마의 옆얼굴을 흘깃흘깃 바라보면서 장석민은 가슴에 품고 있는 편지를 떠올렸다.
상황을 설명하긴 그렇지만 편지를 전해달라고 하면 어떨까. 하일이 보낸 러마디의 부탁을 과연 그녀가 들어줄까? 위험부담이 크다. 하지만 이런 기회도 흔치 않을 텐데. 어쩌지.
장석민이 편지를 품에 안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나이마가 입을 열었다.
「지금도 가장 잘하는 사람에게는 상을 주고 가장 못하는 사람에게 벌을 내리시나요?」
그녀의 물음에 비르마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나이마 역시 비르마의 가르침을 받았음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나이마가 웃으면서 말했다.
「저도 몇 번이나 경전을 베껴 쓰곤 했었죠.」
의외였다. 늘 앞자리에서 좋은 성적만을 냈을 것 같은 나이마가 그렇게 말하자 그녀가 한층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아. 나이 차이가 많이 나도 좋으니 저런 여자랑 한 번만 사귀어봤으면. 장석민이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추억에 잠겨 있던 나이마가 그래요, 하고 손을 마주하며 말했다.
「오늘의 상은 제가 정해도 될까요?」
「뜻대로 하소서.」
비르마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가장 훌륭한 요리를 만드는 분과 오늘 저녁 식사를 같이하면 좋겠습니다. 물론 자하르 왕자님과 같이.」
「──!」
「……!」
「──!!」
나이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를 향해 방긋방긋 웃던 여자들 모두 일제히 자신의 조리대로 몸을 돌렸다. 도마와 인덕션으로 불꽃이 튀었다.
그중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장석민뿐……, 은 개뿔.
"……!!"
장석민 역시 스테인리스 볼에 담았던 고기를 다시 도마에 올려놓고 칼질을 시작했다. 떡갈비의 생명은 고기를 얼마나 잘 다지느냐였다.
양손에 칼을 쥐고 도마를 리드미컬하게 두드리는 장석민의 눈에서도 불꽃이 튀었다. 오늘 저녁 자하르를 만나야 한다는 일념으로 도마를 두드리는 그의 모습은 무아지경의 경지였다.
다다다. 다 다다다닷. 다 다닷 닷닷.
굿거리장단에 맞춘 칼 소리에는 한국인의 흥과 한이 실려 있어 주변인의 넋을 빼놓기 충분했다. 현란한 그의 칼솜씨에 나이마 역시 한참을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정신을 차린 후궁들이 그제야 유력한 후보로 떠오른 장석민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저 빌어먹을 남자 러마디가 제대로 된 요리를 하고 있어!
신들린 솜씨로 고기를 다진 장석민은 미리 만들어 놓은 양념장을 고기에 붓고 다시 치댔다. 고기 반죽에 끈기가 생기자 적당한 크기로 잘라내어 모양을 만들기 시작했다. 고기 반죽이 잘 익도록 가운데 부분을 오목하게 만들어 모양을 다듬었다.
"배, 배가 필요하지."
사실 소스도 대충 만들어 바를 생각이었다. 그러나 생각이 바뀌었다. 이전에 배운 궁중요리 조리법을 그대로 재현해 한국의 맛으로 이곳을 탈출해주고 말겠어!
식자재 창고에서 동양 배를 찾을 수 없어 급한 대로 서양 배를 가져와 껍질을 벗겨 내기 시작했다. 한 번의 끊어짐 없이 과일의 껍질을 벗겨내는 그의 솜씨에 비르마도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런저런 향신료를 섞어 소스를 만들며 장석민은 콧노래를 불렀다. 오늘 자하르를 만나면 그 빌어먹을 오해부터 풀고 편지를 전해줘야지.
3초면 된다. 3초.
「……놈.」
콧노래를 부르며 소스를 젓고 있던 장석민이 멈칫하고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리가 들려온 방향에서 검은색 베일을 쓴 여자가 생선 요리를하고 있었다. 잘못 들은 것인가. 분명히…….
「개떡 같은 놈.」
장석민은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안에 놈은 자신을 제외하고 둘 뿐이었다. 그 둘은 저만치 문 앞을 지키고 서 있으니 이 여자의 입에서 저런 욕이 나오게 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결국엔, 개떡 같은 놈이라 함은.
「……저 말인가요?」
장석민이 해사하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켜 물었다. 검은 베일을 쓴 여자가 노골적으로 얼굴을 찌푸려 보이고는 고개를 돌렸다.
뭐야. 내가 뭘 어쨌다고.
여성에게 이런 식으로 반감을 사본 일이 없는 장석민에게는 이 상황이 불편하고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나이마만 아니었다면 검은 베일의 여자를 붙들고 자신이 무슨 실수를 했는지, 그 실수를 바로잡을 방법이 무엇인지, 조곤조곤 물어봤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여자의 마음을 풀어주고 경치 좋은 곳에서 와인 한 잔을 하며……. ……소스나 만들자.
장석민은 배를 갈아 넣은 소스에 간장을 조금씩 넣으며 맛을 보았다. 고기를 구우면서 소스를 계속 발라 맛을 돋워야 했다. 대충 구울 생각으로 가져온 프라이팬을 옆으로 치웠다.
"됐다."
석쇠는 찾지 못하고 스테이크를 굽는 그릴을 가져왔다. 장석민이 그 위에 반죽해놓은 고깃덩어리를 올리는 것을 주변 사람들이 흘깃흘깃 쳐다보았다. 고기가 타지 않도록 뒤집어주며 소스를 바르는 타이밍이 귀신같았다. 마음속으로 고기가 타버리도록 빌고 있던 여성들의 짜증이 절정을 향해 치달았다.
주변에 떡갈비가 익는 냄새가 진동했다. 무시하려고 해도 무시할 수 없는 그 냄새가 사람들의 코를 자극했다.
「좋은 냄새가 나네요.」
나이마가 근처로 다가와 말을 건넬 정도였다. 장석민은 해설피 웃으며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종이를 반으로 접어 부채질하며 고기를 굽던 장석민은 문득 자신을 쏘아보는 날카로운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빌어먹을 동양 놈.」
부채질하더 장석민의 손이 우뚝 멈추었다. 그다음에 이어지는 말은 아랍어라 알아듣지 못했지만 좋지 않은 내용일 게 분명했다.
자신을 둘러싸고 여자들이 눈을 치뜬 채 욕을 하는 장면을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상상조차 안 해본 장석민이었다. 자신의 목에 하일의 칼이 들어왔을 때보다 한층 더 당혹스러웠다. 그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식은땀만 줄줄 흘렀다.
그가 넋을 빼놓고 있는 틈을 타서 옆에서 요리하고 있던 푸른 옷의 여자가 슬쩍 인덕션 위의 그릴을 밀어냈다. 인덕션 위로 장석민이 들고 있던 종이가 닿자마자 불이 붙은 것도 그와 동시다.
「불!」
비르마의 날카로운 음성이 공기를 갈랐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여자들의 힐난 어린 시선에 당황한 장석민은 그 목소리가 자신을 향한 건지도 알아채지 못했다.
「불이 붙었잖아요! 뭐하는 겁니까!」
"헉!"
장석민은 자신이 들고 있던 종이에 불이 붙어 활활 타오르고 있음을 발견하고 황급히 종이를 놓았다. 거기에서 끝났다면 해피엔딩이었겠지만, 불이 붙은 종이는 그대로 날아가 옆에 앉아있던 여자의 옷자락에 떨어졌다.
여자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모두 기겁해 소리를 질렀다. 문 앞에 서 있던 경비병들이 불을 끌 물건을 찾느라 우왕좌왕 하는 사이, 장석민은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났다. 그대로 달려가 입고 있던 옷을 벗어 여자의 몸을 덮어 버렸다. 퍽퍽, 소리가 날 정도로 옷을 세차게 내치며 옷자락에 붙은 불을 진화했다. 경비병이 커다란 물을 담아왔을 때, 이미 불은 모두 꺼진 후였다.
「괜찮으세요?」
장석민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어디 다친 곳이 없는지 살피며 장석민은 다시 괜찮냐고 물었다. 본인이 인덕션을 밀어버려 불이 붙은 상황이었기에 여자는 화도 내지 못하고 입을 꾸욱 다물고 있었다. 장석민은 그녀가 어딘가 다쳐 말을 하지 못하는 줄 알고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정신을 놓는 바람에. 혹시라도 몸에 상처가 남는다면 제가 어떻게든 보상을 해드리겠습니다.」
여자는 꽃 같은 존재였다. 아끼고 보살피고 사랑해줘야 할 대상이었다. 그런 상대에게 상처를 내다니.
오늘 하루, 삶의 신조에 어긋나는 일들이 연달아 발생하고 있어 장석민은 당혹스럽다 못해 우울하기까지 했다.
「……아니, 다친 곳은…….」
푸른 옷을 입은 여자가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애초에 쓸데없이 솜씨가 좋아 나이마의 관심을 끄는 남자 러마디가 꼴 보기 싫어 골려주려 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얼굴로 물어오니 더는 심통을 부리기 힘들었다.
게다가.
「죄송합니다. 불 앞에서 요리할 때는 주의해야 한다고 늘 들었었는데 제 불찰입니다.」
나긋한 목소리로 사과를 건네고 있는 장석민의 몸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빼빼 마른 동양인이라고 생각했는데 벗겨놓고 보니 의외로 몸이 좋았다. 잔 근육으로 이어진 몸의 선이 더하고 뺄 것 없이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일어나기 힘드시면 제가 부축을 해드릴까요?」
심지어 베일을 뒤집어쓰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외모도 준수한 편이었다. 푸른 옷을 입은 여자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장석민은 바닥에 쪼그려 앉은 채로 그런 그녀에게 연신 말을 건넸다. 괜찮아요? 정말 어디 다친 데 없어요? 놀라서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시나요? 제가 뭘 도와드릴까요?
진심 어린 말투에 그를 바라보는 여자들의 눈빛이 조금씩 누그러졌다. 어제의 그 망측한 소문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전염병처럼 그녀들 사이에서 퍼지기 시작했다.
「흠, 흠.」
비르마의 헛기침 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장석민은 주변에 모인 여자들이 자신의 몸을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퍼뜩 놀라 옷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불을 끄느라 제 기능을 상실한 옷은 몸에 닿는 순간 부스러져 바닥에 떨어졌다.
장석민의 얼굴이 붉어졌다. 여자 앞에서 늘 가장 멋있는 모습만 보이고 싶은데. 여기에 와서는 한결같이 찌질하기만 하다.
아, 장석민. 진짜 왜 이러냐.
몰려드는 자괴감에 입술을 깨물고 있을 때 앞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후궁들의 시선이 장석민에게서 벗어나 앞쪽으로 쏠렸다. 차라리 다행이라고 여기며 장석민은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행스러운 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자하르 왕자님을 뵈옵니다.」
비르마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모두 바닥에 무릎을 꿇고 인사를 했다. 타르카 왕국의 전통적인 예법이었다. 장석민도 다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아이고, 앓는 소리를 삼켰다. 가장 만나고 싶었던 사람을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순간에 만난 것이다.
공기가 살랑거린다. 베일을 쓴 여자들의 얼굴에 홍조가 어린다. 여자들이 마음에 둔 남자를 만났을 때 나오는 특유의 분위기라는 것을, 장석민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 많은 여자 중에 나한테 딱 한 명이라도 이런 분위기를 풍겨주었다면 이토록 비참하지는 않았을 텐데. 장석민은 쓴 입맛을 다셨다.
「무슨 일입니까. 경비병이 불이 났다며 이 안으로 뛰어갔다는 말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의 시선이 모친인 나이마에게 머물렀다. 나이마가 웃으며 괜찮다고 답하자 그제야 걱정스러운 시선을 주변에 돌린다.
「다른 분들은 다치신 곳은 없으신지요.」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후궁 중 입을 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비르마가 별일 아닙니다, 하고 답했다.
「오랜만입니다.」
자하르가 비르마를 보며 알은척을 했다. 비르마의 주름진 얼굴에 웃음이 스쳤다. 저 꼬장꼬장한 노인네가 저런 표정도 짓는구나. 장석민은 비르마와 자하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런데, …….」
자하르와 눈이 마주쳤다. 설핏 서늘해 보이는 빛이 자하르으 회색 눈동자에 스쳤다. 장석민이 눈을 깜빡거리는 사이 자하르는 특유의 온화한 얼굴로 돌아와 있다. 그가 장석민에게 말을 건넸다.
「어제는 잘 돌아가셨나 보군요.」
「아, 네. 덕분에…….」
별 뜻 없는 대화였는데 그것만으로 주변 온도가 썰렁해진다.
자하르가 장석민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설핏 웃음 짓는다.
「먼 곳에서 오셔서 아직 이곳에 적응하기 힘드신 것 같군요.」
「네? 아, 네.」
모든 말에는 의도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장석민은 지금 그걸 따지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니 당장 한국으로 돌려보내 달라는 말이 하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다. 그러다 문득 옷 속에 품고 있던 편지가 떠올랐다. 장석민은 걸레짝이 되어버린 옷을 집어 들고 그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을음이 묻어 너덜너덜해진 편지 봉투가 손에 잡혔다.
「이거……!」
장석민이 편지를 내미는 사이 자하르가 입고 있던 외투를 벗었다.
「남자일지라도 러마디는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몸을 드러내면 안 됩니다.」
최고급 면으로 만든 외투를 장석민의 어깨에 둘러주며 자하르가 눈으로 웃었다. 초콜릿을 부어 만든 것처럼 달큰한 눈동자였다. 잠시 넋을 놓고 바라보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장석민이 얼른 편지를 다시 내밀었다.
「이거 받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옷자락을 여며주는 자하르의 입가에 미소가 어린다. 봄바람처럼 사분사분하고 다감한 미소였다. 후궁들 사이에서 저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실로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자하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손으로 두어 번, 장석민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뿐이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자하르는 몸을 돌려 나이마에게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났다. 자하르의 옷을 어깨에 걸친 채 한손에는 꼬질꼬질한 편지지를 쥔 장석민은 한참이 지나서야 상황을 파악했다.
자하르는 장석민의 손에 들린 편지를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것이다. 돌아온 것은 어제와 다름없는 깔끔한 거절.
그리고.
「……독한 동양 놈.」
「편지를 주려고 불까지 지르다니, …….」
오해가 갈대숲에 인 불처럼 번졌다.
무언의 비난이 순식간에 장석민의 주변에서 활활 타올랐다.
「미친 동양 놈.」
화마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절망,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