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롤로그(1권) (1/35)

밤하늘을 나는 새 1

프롤로그

여자 싱어가 감미로운 재즈선율에 맞춰 노래를 부른다. 부드러운 음색이 대화 소리에 자연스럽게 뒤섞인다. 오늘 처음 만난 듯한 남녀가 상대를 탐색하며 이야기를 나눈다. 칵테일 잔을 손에 쥔 여자가 붉은 입술을 불빛 아래서 속살거린다. 맞은편에 앉은 남자는 바에 비스듬히 기댄 채, 여자의 입술을 시선으로 훑는다.육감적이고 부드러워 보이는 입술이다. 영양가 없는 이야기로 여자는 두 시간째 떠들어대고 있다. 마티니로 목을 축이며 남자는 인내심을 품고 여자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그러셨어요. 그러셨구나, 정말 그래요, 하하, 재미있는 이야기군요, 그것 참 흥미롭네요.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이며 남자는 고개를 끄덕인다. 

간간이 여자의 팔을 부담스럽지 않게, 그러나 충분히 친밀함을 느낄 수 있도록 도닥이며, 마티니 두 잔으로 술기운이 달아오른 여자가 남자의 눈을 지그시 바라본다. 남자는 미소를 지으며 여자의 귓가에 정중한 유혹의 말을 속삭인다.여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남자는 계산서에 술값과 팁을 충분히 얹어놓았다. 객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서 여자의 가느다란 허리에 손을 둘렀다. 남자는 호텔에 딸린 라운지 바를 주로 이용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점 때문이었다. 예약한 스위트룸에 들어가자 여자의 안색이 대번에 밝아진다. 여자를 위한 물질적인 노력에 남자는 인색하지 않았다. 보이는 것을 중요시하기는 여자들의 환심을 사려면 이 정도는 써야 한다는 사실을, 남자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마음에 들어요?"

"너무 멋있는데요."

여자가 야경을 즐기고 있는 사이 남자는 호텔 라운지 바에 전화를 걸어 미리 준비해 놓은 샴페인을 올려달라고 부탁했다.

"괜찮은 샴페인이 있다고 해서 아까 부탁해 놨어요. 지선 씨가 잠시 화장 고치러 간 사이에요."

"어머, 스윗하셔라."

여자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새빨간 거짓이다. 남자는 이 호텔 클럽의 단골이다. 라운지 바도 마찬가지다. 라운지 바의 지배인하고는 안면을 튼 지 오래다. 남자가 여자를 데리고 올라가면 늘 샴페인을 주문했다. 그날, 그날, 걸려드는 여자의 수준에 따라 샴페인과 객실의 등급을 바꾼다. 오늘은 그래도 제법 괜찮은 등급의 여자가 걸렸다.

C컵의 자연산 가슴과 탄탄한 허벅지, 올라붙은 엉덩이와 육감적인 입술이 매력적인 여자. 나이는 이십 대 중반.

오랜만에 취향에 제대로 들어맞는 여자를 만난 것이다.

남자는 넥타이를 풀며 노련한 솜씨로 여자에게 입을 맞춘다. 여자의 경계심이 스위트룸의 야경 앞에서 무너진다. 옷 사이로 살갗이 부딪히는 소리가 은밀하게 들려온다.

입술을 떼고 남자는 여자의 뺨에 가볍게 여러 번 입을 맞춘다.

"먼저 샤워하고 올게요."

"네. 기다리고 있을게요."

남자가 다정하게 웃으며 의자에 앉는다. 여자가 샤워실로 들어가자 얼마 지나지 않아 물소리가 들린다.

남자는 넥타이를 손으로 끌어내리고 베개 밑에 미리 준비해 놓은 콘돔을 내려놓았다. 한창 달아오를 때 콘돔을 찾는 것만큼 추하고 분위기 깨는 짓은 없다고 믿고 있는 터다.

슈트 재킷을 벗어 의자에 걸쳐놓았다. 셔츠의 팔목 단추를 끄르고 있을 때, 문에서 노크소리가 들렸다.

벌써 샴페인이 준비된 모양이다. 이래서 한국사회는 줄서기를 제대로 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남자는 네, 하고 대답을 하며 객실의 문을 연다.

검은색 슈트를 입은 남자가 살벌하게 자신을 바라보며 장석민 씨 맞습니까,라고 물을 때만 해도 남자는 썩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커다란 주먹이 날아와 안면을 가격하기 전까지는, 그럭저럭 운이 좋은 토요일 밤이었다.

"빨리 나가."

"당신들 뭐예요. 경찰 부를 거야."

"부르고 싶으면 불러. 내일 아침 차가운 바닷속에서 눈뜨고 싶으면 말이야."

갑자기 방으로 들이닥친 남자들은 샤워 중인 여자를 끌어내 옷가지와 함께 복도로 내던지며 살벌하게 윽박질렀다. 당황한 여자가 울 것 같은 얼굴로 맞받아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객실의 문은 굳게 닫혔다.

정신을 차리지 못할 만큼 흠씬 두들겨 맞은 장석민은 문이 닫히는 순간에도 여자에게 전화를 걸겠다는 손짓을 해 보였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여자는 질겁하며 고개를 돌려버렸지만.

아, 오래간만에 정말 제대로인 여자를 만났는데.

장석민은 입맛을 다시며 작금의 사태를 아쉬워했다. 쩝, 입맛을 다시던 장석민은 얼굴을 찌푸렸다. 입안이 찢어진 터다.

"장석민 씨."

문이 열리자마자 장석민에게 다짜고짜 주먹을 날린 사내가 의자에 걸터앉으며 입을 열었다. 그가 비싸게 주고 산 디올 옴므 재킷을 깔고 앉은 것을 보고 장석민은 어, 하고 몸을 들썩였다.

뒤에서 사정없이 발길질이 날아왔다. 

"어딜 움직여. 우리 형님이 움직이라는 말 하기 전에는 손끝 하나 움직이지 마. 알겠어?"

양팔에 용 문신을 한 사내가 험악한 목소리로 윽박질렀다. 장석민은 신음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아끼는 디올 옴므 재킷은 덩치 큰 남자의 엉덩이 아래로 끌려 들어갔다.

"장석민 씨. 맞죠?"

"……네 그렇습니다."

잠시 아니라고 해볼까 하다가 이실직고했다. 형식상 던진 질문이라는 것을 모를 만큼 장석민은 눈치가 나쁘지 않았다.

"살레하 님을 압니까?"

"살, 누구요?"

장석민은 눈을 껌뻑거렸다. 일부러 모르는 척 하려는 것이 아니라 맹세코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여지없이 뒤에서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카펫에 얼굴을 묻은 채로 장석민은 대체 살레하가 누구인지 기억해내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아무래도 오늘 자신이 이곳에서 제 발로 걸어나갈 수 있는지는 살레하라는 여자를 기억해내는 데에 달린 것 같다.

사내가 주머니에서 사진을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장석민은 시선을 돌려 사내의 눈을 바라보았다. 몸을 움직여 사진을 확인해도 좋은지 허락을 구했다. 사내가 눈짓으로 허락했다.

장석민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사진을 확인했다. 사진 속의 인물을 알아본다면 이 악몽 같은 토요일에 마침표를 찍을지도 모른다는 실날같은 희망을 품고.

"엥?"

얻어맞아 코피를 흘리고 있던 장석민의 입에서 황당한 외마디 소리가 터져 나온다.

"기억이 납니까?"

"아니, 이 사진을 보고 어떻게, 악, 때리지 좀 마세요. 양심적으로 이 사진으로 누가 사람을 알아봅니까."

사진 속의 살레하는 커다란 갈색 눈을 가진 중동계 여성이었다. 문제는 사진 속의 그녀는 검은 베일을 뒤집어쓰고 있어 얼굴에서 드러난 부분이 눈뿐이라는 사실이었다.

"세상천지 어느 놈이 자기가 만났던 여자를 눈만 보고 알아봅니까."

억울함에 언성이 높아진다.

장석민은 수많은 여자를 만난다. 아니, 만나왔다. 일이 일찍 끝나는 평일에는 바나 고급 클럽에 가서 여자를 만났고 주말에는 근교로 놀러가 여자들을 만났다. 두세 번 만나는 여자도 간혹 있었지만, 대부분은 단발성으로 그쳤다. 세상에 이렇게나 많은 여자들이 있는데 굳이 같은 여자를 만나고 싶지 않은 것이 장석민의 솔직한 속내이자 욕구였다.

장석민의 항변에 남자는 아무 말이 없었다. 오늘 처음 보는 남자의 엉덩이 아래에 깔려 있는 디올 옴므 재킷을 보자, 장석민은 꾸욱 참고 있었던 분노가 다시금 치솟았다.

"만에 하나 제가 이 여자를 안다고 칩시다. 그게 그렇게 큰 잘못입니까? 아무런 말씀도 없이 호텔 방에 막무가내로 들어와 사람을 이렇게 때릴 만큼, 큰 잘못입니까? 호텔 객실은 엄연히 사적인 공간입니다. 이런 식으로 들어오시는 것은 거주 침입으로 법적으로 처벌받을 수 있습니다."

법적인 이야기를 들먹이자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장석민은 소맷자락으로 입가의 피를 닦아내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어떤 오해가 있으신지 모르겠지만 사진 속의 여자 분은 제 기억에 없습니다. 살레하라는 이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 여자 분과 제가 만났다고 해도 그건 성인 대 성인으로 합의 하에 이루어진 만남일 뿐입니다."

많은 여자를 만나고 다니니 이와 비슷한 일을 몇 차례 겪은 그다. 자고 있는 도중에 여자의 남편이 들이닥쳐 3층에서 뛰어내린 적도 있고, 여자의 애인에게 걸려 흠씬 두들겨 맞은 적도 있다. 돈을 뜯어낼 심산으로 일부러 남자를 불러낸 여자도 있었다. 나름대로 산전수전을 겪어온 터라 장석민은 이내 냉정함을 되찾고 청산유수로 말을 이어갔다.

"정말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이 눈과 그 이름은."

사내가 눈짓을 하자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남자들이 모두 몸을 돌렸다.

사내는 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을 더 꺼내어 내밀었다.

"이걸 보시면 혹시 기억하시는 데 도움이 될까요?"

대체 무슨 사진이기에 데려온 사람들을 모두 등 돌리게 하나 싶어 궁금증이 일었다. 장석민은 테이블에 올라온 사진 한 장을 다시 확인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윤기 나는 검은 머리가 잘 어울리는, 전형적인 중동계 여인이었다. 기억을 더듬어볼 것도 없이 얼마 전 이태원 바에서 만났던 여자가 자동으로 떠올랐다.

외국인을 많이 만나서 중동계 여자가 특별할 것도 없었지만, 이 여자는 확실히 기억에 남았다. 바에 들어서는 순간 모든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그쪽으로 향했을 만큼 여자가 뚱뚱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뭔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하는 태도 때문에 확실히 더 눈에 띄었다.

"기억나십니까?"

"얼핏,기억이 나는군요."

얼핏,이라고 한 이유는 그날의 기억이 명확하게 지속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여자가 바에 들어섰을 때 장석민은 이미 술이 거나하게 취한 상태였다.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해 술이나 즐기다 갈까, 하던 차였었다. 

마음에 드는 여자도 없는데 불쌍한 여자 기분이나 좋게 해주자 싶어 장석민은 그녀에게 술을 사주었다. 한사코 거절하던 그녀도 장석민의 유창한 화술에 넘어가 같이 술잔을 기울이며 분위기를 즐기게 되었다.

함께 술을 마시며 떠들었던 기억은 드문드문 이어진다. 그녀는 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떠들었고 장석민은 무성의한 맞장구를 쳐주었다. 한국의 전통주를 마셔보지 않겠냐며 바에서 함께 나간 것까지는 기억이 나지만 그 이후는 필름이 끊어졌다. 다음날 일어났을 때는 자주 이용하던 호텔에서 다 벗은 채로 누워있었다.

했던가? 하는 질문에는 확실히 대답할 수가 없다. 99%의 확률로 하지 않았겠지만 만에 하나 술김에 저질렀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제가 혹여나 본의 아니게 그 여자분께 실례되는 일을 저질렀으면 사과 말씀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절대로 거기에는 그 어떤 강제성이나 불법적인 행위는 없었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다. 혹여나 법적으로 책임질 부분이 있으면 여기로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장석민은 테이블 옆에 놓아두었던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사내에게 내밀었다. 

법무법인 백승의 장석민 변호사.

이름에는 특별히 금박을 넣었다. 장석민은 이 명함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에게 돈을 뜯어내려던 여자 중 몇은 이 명함만 보고 꼬리를 내리고 사라지기도 했다.

로스쿨을 갓 졸업한 장석민이 내로라하는 법무법인 이름이 적힌 명함을 팔 수 있었던 것은 판사 출신 변호사인 아버지 덕이었다. 로스쿨에 합격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대학 법대 총장이 아버지와 동기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입에 은수저를 물고 태어난 장석민은 세상이 편했다. 외모도 반반하고 집안도 좋고 성격도 사교적이라 친구도 많았다. 중, 고등학교 때는 고액과외를 받아 명문대에 입학했고 졸업을 하자마자 유학길에 올라 미국에서 누릴 수 있는 향락은 모조리 누렸다.

로스쿨을 졸업한 그의 인생은 그림으로 그린 듯이 유려하게 펼쳐졌다. 아버지는 부장 판사 출신 변호사였고 형들은 모두 현직 판, 검사였다. 덕분에 수임을 맡은 일 대부분은 어렵지 않게 승소할 수 있었다.

장석민이 자신의 삶에서 유일하게 노력하고 정성을 기울이는 부분은 여자와 관련된 것뿐이었다.

말하자면, 새로운 여자와 만나 유익한 시간을 보내는 것, 그리고 깔끔하게 마무리를 하는 것.

"제가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돕도록 하겠습니다."

장석민은 얼른 빨리 이 상황을 정리하고 싶었다. 귀찮은 일은 딱 질색이었다. 깔끔하게 돈이든 권력이든 자신이 가진 것을 이용해 한시라도 빨리 매듭짓고 싶었다.

"그래서,장석민 씨."

"네."

장석민이 대답했다.

"그러니까, 살레하 님을 만난 적이 있다?"

"네? 아, 그렇게 되는 건가요."

"그날 그럼 바에서 같이 나갔던 남자가 장석민 씨가 맞군요."

사내가 미소 지었다. 호텔 객실 안으로 들어와 처음으로 짓는 미소였다. 일이 생각보다 수월하게 해결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장석민도 슬며시 긴장을 풀었다. 그렇기에 직후 뒤통수를 가격한 엄청난 물리적 충격에 대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멀어져 가는 의식 속에서 장석민은 알아차렸다. 뒤통수를 얻어맞기 전까지는 그래도, 그럭저럭 재수 옴 붙은 토요일 정도로 마무리할 수 있었음을.

최악의 토요일이 그의 의식을 잠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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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이 들었을 때 장석민은 누군가 머리에 도끼질을 하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큰 도끼가 아니라 손도끼다. 숫돌에 날을 잔뜩 세운,날이 선 손도끼, 막걸리에 양주를 섞어 마신 다음 날 아침에도 이런 고통을 느껴본 적이 없건만,

장석민은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리며 손바닥으로 옆을 더듬었다. 호텔 룸서비스라도 시킬 요량이었다. 그러나 손에 잡히는 것은 전화기도 베갯잇도 아닌, 차가운 마룻바닥이었다.

바닥에서 잠이 든 것인가. 그 정도로 많이 마시었던가.

장석민은 고개를 흔들며 일어서려다가 뒤통수를 쪼개는 듯한 통증에 비명을 삼켰다. 이건 머릿속에서 나는 두통이 아니다. 물리적인 상처로부터 올라오는 통증이다.

"으으……."

손바닥으로 뒤통수를 더듬다가 흠칫 몸을 떨었다. 어디에 부딪혔는지 손으로 더듬는 것만으로도 확연히 느껴질 만큼 부어있었던 것이다.

대체 어디서 어떻게…….

기억을 더듬던 장석민의 뇌리에 호텔 방으로 들어오던 검은색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스쳤다.

"어! 그놈들, 윽."

몸을 일으키려던 장석민은 손바닥으로 머리를 감싸 쥔 채로 다시 고개를 숙였다. 이게 뭐야, 하고 투덜거리며 위를 확인했다.

"……."

믿을 수 없는 아니, 믿고 싶지 않은 광경에 말을 잃었다. 혹시 자신이 아직도 꿈속에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헛된 희망을 품어보았지만, 손으로 만져지는 감촉들은 자신이 현실에 갇혀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자신은 갇혀 있었다. 동물 우리에. 바닥은 단단한 나무고 사방은 쇠창살로 에워싸진 채.

여기가 어디인지 알아내려고 해도 주변을 잠식한 어둠 때문에 1미터 앞의 사물도 인지하기 힘들었다. 일단은 여기서 나가야 한다. 장석민은 힘을 주어 쇠창살을 밀어도 보고 당겨도 보았다. 그는 나중에 이곳을 나가게 된다면 이 우리를 만든 회사의 주식을 사둬야겠다고 생각했다.

견고하게 만들어진 우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여기요! 여기요! 이봐요!"

장석민은 방향을 선회해 목소리를 높여 소리치기 시작했다. 이곳에 자신을 가둔 사람이 누구인지 몰라도 자신을 풀어줄 사람도 그들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갑자기 사방에서 으르렁대는 소리가 울렸다.

어둠속에서 반짝거리는 눈동자가 하나둘,늘기 시작했다. 형체가 확실히 보이지는 않지만 그것들이 개나 고양이는 아닐 것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겁이 덜컥 난 장석민은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여기요! 여기! 살려주세요!"

반가워서 소리를 치던 장석민은 문득 뇌리를 스친 생각에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상대가 어떻게 나올 것인지에 대한 계산은 하지 않은 거다. 

자신을 동물 우리에 가둔 인간들이다. 아마도 높은 확률로, 인도적이고 친절한 반응은 기대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장석민은 쇠창살을 손에 쥔 채로, 마른침을 삼켰다. 상대가 누구든지 간에 마음의 준비를 해야만 했다. 아버지의 배경으로 갖게 된 직업이지만 명색의 변호사이다.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기백을 갖춘 그였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호랑이에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아날 수 있다고 했다. 정신 차리자. 장석민.

그는 떨리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찰싹찰싹 내리치며 마음을 다잡았다.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들어왔다. 전등에 불이 켜졌다. 눈을 찌르는 갑작스러운 빛에 장석민은 인상을 찌푸렸다. 빛에 익숙해진 후 눈에 새겨진 광경에 장석민은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호랑이가, 그것도 칼을 찬 중동 호랑이가 그의 앞에 등장했다.

『이놈인가?』

『그렇습니다. 한국에서 보내온 자료에 의하면 이놈이 맞습니다.』

장석민은 재빨리 눈을 깜빡였다.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해온 터라 지금 눈앞의 사람들이 하는 말이 아랍어인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대화내용은 당연히 파악이 불가능하다. 문제는 왜 흰색 칸두라(Kandura)를 입고 있는 남자들이 자신의 앞에 나타났는가 하는 거였다.

그가 상상한 광경은 고작해야 검은색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거들먹거리며 나타나 협박을 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중동인이라니. 그것도 옆구리에 칼을 찬 중동인이라니!

동물 우리와 흰색 칸두라를 입은 중동인이라는 비현실적인 조합에 장석민은 아까 꾸었던 헛된 꿈을 다시 한 번 가져보았다. 허벅지를 세게 꼬집어보았지만 역시나 이건 현실이다.

장석민은 쇠창살을 손에 쥔 채로 살려달라고 말했다. 영어가 혹시 통할까 싶어서 영어로도 해보고, 짧은 실력이지만 불어와 독일어로도 말을 건네 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살벌한 표정으로 자기들끼리 대화를 나눌 뿐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유학시절 옆 반에 있는 압둘이라는 녀석과 말이라도 한마디 나눠봤을 텐데.

피를 토할 것 같은 후회가 밀려왔지만 물은 엎질러진 뒤다. 절망이 밀려왔다.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말도 통하지 않는 중동인들을 상대로 자신을 변호할 수도, 지금 이 야만적인 행위가 법에 저촉되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도 저들에게 설명해줄 수 없다.

좆 됐다.

그것이 지금 그의 상황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표현이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좌절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장석민은 머리를 굴렸다.

검은색 양복의 사내들이 자신을 저자들에게 넘긴 것인가. 여긴 어디일까. 저들은 대체 왜 자신을 찾은 것일까.

미친 듯이 떠오르는 의문 중 그 어느 것에도 답을 내리지 못했다. 그저 이 모든 사태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 짐작할 따름이었다.

어쩔 수 없다. 정공법을 택했다.

"살레하,라는 여자분 때문입니까?"

한국말로 말했음에도 살레하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대화를 나누고 있던 사내의 얼굴이 대번에 굳는다. 장석민은 자신이 꺼낸 카드가 독이 될지 득이 될지, 알지 못했다. 그저 그것이 그가 가진 유일한 카드였다.

흰색 칸두라에 붉은색 슈마그(Shumagh)를 두른 남자의 눈에 살벌한 살기가 스친다.

장석민은 직감했다. 유일하게 쥐고 있던 카드는 패망의 열쇠였음을.

「무엄하군. 감히 네가 그 이름을 입에 담는가.」

짙은 수염을 가진 자가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영어였다.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그나마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대체 제가 왜 이곳에 있는 겁니까? 여긴 어디입니까?」

장석민은 빠르게 궁금증을 털어놓았다.

「그런 것들이 궁금한가?」

짙은 수염을 가진 남자가 비웃음을 입에 건 채 물었다. 궁금했다.

장석민에게 지금 여기가 어디인지 왜 잡혀 와서 이런 우리에 갇혀있는지는 몹시 중요하고 궁금한 문제였다.

「네. 궁금합니다. 알려주세요. 대체 왜 저를 이런 곳에 가두어두는 겁니까.」

짙은 수염을 가진 남자가 붉은색 슈마그를 두른 남자에게 허락을 구하려는 듯 허리를 숙였다. 상대가 고개를 끄덕이자 짙은 수염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두 사람이 주종관계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우리가 먼저 묻겠다. 네 질문에 대한 답은 이쪽의 질문이 끝난 다음 해주지.」

「알겠습니다.」

「살레하 님을 만난 적이 있다고 했지?」

잠시 고민하던 장석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이야기는 검은 옷을 입고 있던 남자들과도 결론을 내린 후다. 여기서 발뺌을 했다간 우리에서 나가긴 고사하고 우리에 다른 동물이 들어올 수도 있다. 아까부터 이쪽을 보며 으르렁거리고 있는 놈 중 가장 사나운 놈으로.

「살레하 님과 술을 마셨고.」

「네.」

「대화를 나누고.」

「네.」

「밖으로 같이 나갔고.」

「그렇긴 하지만, ……네.」

자기변호를 할 생각이었는데 점점 범인을 취조하는 분위기로 흐른다. 장석민은 그렇지만, 하고 입을 열려는 순간 짙은 수염의 남자가 발로 우리를 걷어찬다.

「묻기 전에 함부로 입을 열지 말거라. 지금 네가 살아있을 수 있는 이유는 빈 무크라르 하일 님이 그래도 좋다고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붉은색 슈마그를 쓰고 있는 덩치 큰 사내가 경멸 어린 시선으로 장석민을 내려다보았다. 빈 무크라르 하일이라고 불린 남자가 이 모든 일의 열쇠를 쥐고 있음을, 바보 천지라도 알아차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장석민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간절하고 진실한 목소리로 호소를 시작했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날 술을 조금, 헉.」

쇠창살 안으로 반달 모양을 휜 칼, 칸자르의 날이 들어왔다. 자신의 얼굴을 아슬아슬하게 스친 칸자르의 시퍼런 날을 곁눈질로 확인한 장석민은 공포로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정말로 죽을 수도 있다. 죽음에 대한 실감이 머리가 아닌 몸으로 다가왔다.

「허락하기 전에 입을 열지 마라. 다음번에는 바로 혀를 자를 것이다.」

짙은 수염을 가진 남자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깡패들이 흔히 내뱉는 경고나 협박이 아니었다. 다음에 일어날 일에 관한 담담한 서술이었다. 장석민은 입을 다문 채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자존심으로 치면 둘째가라 서러운 판사 댁 막내아들이었지만 생존본능이 우선이었다.

「사이프, 물러서라. 내가 묻겠다.」

하일이 남자를 물리고 앞으로 나섰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웃음거리 소재로 자주 사용되는 딱딱하고 촌스러운 영어발음이었다. 그러나 장석민은 이 세상에서 가장 진지한 얼굴을 하고 상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경청했다.

「살레하를 그날 만났는가?」

같은 질문이었다. 그러나 다가오는 무게가 다르다. 장석민은 울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 위에 날을 세운 기요틴이 끼긱거리며 흔들리고 있다.

「대화를 했는가?」

「……,」

고래를 아래위로 움직일 때마다 기요틴의 날이 한 뼘 더 아래로 내려온 기분이었다.

「살레하의 얼굴을 보았는가?」

「그건, 그날……, 보았습니다.」

억울함에 목에 메었다. 그날 살레하라는 여자의 얼굴을 본 것은 자신뿐만이 아니었던 터다.

「아바카(Abaca)안의 몸을 보았는가?」

아바카라는 단어를 장석민이 알아듣지 못하자 옆에 서 있던 수염을 기른 남자가 손짓으로 긴 옷을 가리켜 보았다.

「벗은 몸을 본 것이 아니라, 그냥, 저는, 그냥…….」

「보았는가?」

그날 살레하가 입고 있던 옷은 몸에 붙은 검은색 원피스였다. 옷은 고급스러워 보였지만 몸이 워낙 거대해서 원피스가 학대당하는 느낌이었다. 살레하는 옷이 자신에게 어울리는지 몹시 걱정하는 눈치였다. 귀신처럼 여자의 기분을 잘 맞추는 장석민은 그런 그녀를 보자마자 옷을 칭찬해 주었다.

검은색 드레스가 아주 잘 어울리시네요. 그 한마디였다. 그걸로 장석민은 살레하의 환심을 얻어냈다.

세상의 모든 여자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이 장석민의 신조였다. 어떤 여자든 뜯어보면 예쁜 구석 하나쯤은 나오기 마련이다. 물론 굳이 뜯어보지 ㅇ낳아도 예쁜 여자들도 많았지만. 살레하는 손톱이 예뻤다.

장석민은 그녀의 바에 기댄 채 그녀의 손톱을 칭찬했다. 복숭아처럼 달콤한 향이 날 것 같은 손톱이라고 말했다. 살레하는 소녀처럼 기뻐했다.

그날 살레하에게 다정하게 군 이유는 단 하나.

그녀가 여자였기 때문이다.

장석민은 여자가 좋았다. 할 수만 있다면 세상의 모든 여자와 자고 싶을 만큼. 반쪽짜리 인류애가 언젠가 문제가 될 줄은 알았지만 그래도 자신의 목숨까지 위협할 줄은 몰랐다.

그날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자신의 입을 꿰매버리고 머리를 후려갈겨서라도 집으로 질질 끌고 갈 텐데.

「보았는가?」

하일이 다시 물었다.

애매하다. 질문의 의도가 무엇인지 짧은 영어라 파악이 불가능하다. 이 대답 하나로 자신이 오늘 이 우리에서 풀려날지, 처참하게 살해당할지 결정 날 수도 있다.

고민하던 장석민은 대답했다.

「제가 본 사람은 검은 옷을 입고 있던 여성분이었습니다.」

그 대답에 하일이 흥미롭다는 듯이 장석민을 내려다보았다. 칸자르의 날이 아직 쇠창살 안에 들이밀어 진 채다.

「영어를 곧잘 하는군.」

하일이 칸자르를 빼앗아 들어 칼끝으로 장석민의 턱을 들어 올렸다. 따끔한 통증 뒤, 목덜미로 뜨거운 것이 흘러내리는 느낌에 장석민은 헉 하고 숨을 삼켰다.

「어디서 배웠지?」

「……유, 유학을, 미국에서…….」

목소리가 덜덜 떨린다.

인권을 소리 높여 주장하기엔 목 끝에 겨누어진 칼끝이 살벌하리만치 날카롭다. 하일이 그의 수하인 사이프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아랍어였다. 하일이  그의 수하인 사이프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아랍어였다. 하일이 뭔가를 말하자 사이프는 탐탁잖은 표정으로 그를 만류하는 기색이었다.

뭐든 좋으니까 일단 말려라. 제발 말려줘.

장석민은 입술을 부들부들 떨며 그들의 대화가 끝나길 기다렸다.

이번엔 사이프가 질문을 시작했다.

「네가 만났던 여자가 어떤 분인 줄 아느냐.」

장석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놈의 살레하라는 여자는 대체 누구인지, 정말 미치도록 알고 싶구나.

「에데르국 미마르 살림 왕의 사랑받는 열세 번째 딸, 살레하 공주님이셨다.」

「미마, ……네?」

알아듣기 힘든 이름에 장석민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타르카 왕국의 여덟 번째 왕자 자하르 님과 혼인이 내정된 공주님이셨단 말이다.」

공주라는 단어에 기요틴이 한 뼘 더 아래로 내려온 기분이 들었다. 목 바로 위에서 무겁고 날카로운 날이 스엉 스엉, 흔들리고 있다.

「그, 훌륭하신 분이셨군요.」

장석민은 어색하게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지금이라도 당장 목이 잘릴 것 같았다. 하일이 그런 장석민을 내려다보며 말을 시작했다.

「나의 동생 자하르는 타르카 왕국의 후계자 중 유일한 하젤이었다.」

「하, ……?」

장석민은 하일보다 영어가 유창한 사이프를 바라보았다. 사이프가 짧게 설명을 덧붙였다. 

「여자와 관계를 하지 않은 남자를 뜻한다.」

「헉, 왜요?」

장석민은 저도 모르게 불쑥 진심을 마랳버리고 말았다. 아차, 후회했지만 소용없었다. 하일의 입가에 미묘한 웃음이 걸렸다.

「글쎄, 왜일까?」

「그러게요. 그 좋은 걸…….」

합, 하고 입을 다물었다. 하일이 큰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누그러진 분위기에 따라 웃으려던 장석민의 목덜미에 칼날이 깊게 들어왔다.

「그 좋은 것을 살레하와 즐겼는가?」

「아닙니다! 절대로, 저는, ……읏.」

옷깃에 피가 흥건하게 젖었다. 피 냄새를 맡은 맹수들이 우리에서 낮게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하젤은 후계자 중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는 성스러운 신분이다. 물론 후계자 대부분은 성인이 되기 전에 하젤의 신분을 벗어나지. 열세살만 되어도 왕자의 앞으로 꽃 같은 처녀들이 진상된다. 그중 누구라도 후궁으로 취할 수 있다. 아내는 고귀한 신분을 가진 여자로 간택된다.」

하일의 영어는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장석민은 단어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귀를 기울였다. 그 와중에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여자가 진상된다는 말에 그것 참 부러운 인생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하르는 어떤 처녀와도 밤을 보내지 않았다. 후계자 선택이 끝나기 전까지 아내도 맞이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면 후계자로서 대단히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다. 여자와 후계자로서 유리한 위치,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대부분의 남자는 전자를 택한다. 지금까지 모두 그러했다. 자하르만 빼고.」

장석민은 자하르라는 남자의 얼굴을 한번 꼭 보고 싶어졌다. 그 많은 여자를 뿌리치고 하젤이라는 신분을 지키고 있는 남자라니.

미쳤다. 아니면 불능이던가.

「여덟 번째 왕자이지만 그가 후계자로서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었던 첫 번째 이유다.」

왠지 그 첫 번째 이유 말고도 두 번째, 세 번째 이유가 줄줄이 있을 것 같았지만 장석민은 토를 달지 않았다.

「미마르 살림 왕의 하나뿐인 여식과 혼인을 한다면 자하르에게도 우리에게도 크나큰 이득이 될 것이었다.」

가장 큰 이득을 보는 사람은 아마도 하일이었을 것이다. 지금 당장에라도 장석민을 찢어 죽일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나라의 옛 전통을 지키려는 자하르라 할지라도 아버님이자 위대하신 왕 리아드 빈 무크라르의 뜻을 거스를 수 없는 법.예정대로라면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는 살레하는 자하르와 이번 달 마지막 날에 혼인식을 치렀을 것이다.」

「경, 경사스러운 일이군요.」

「너와 대화를 나누던 날 밤을 마지막으로 살레하가 사라지지 않았다면 그랬을 테지.」

「……!」

「그날 살레하는 사라졌다.」

「맹세코 저는 그분께 해를 끼치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장석민은 펄쩍 뛰었다. 덕분에 우리 천장에 머리를 부딪치기까지 했지만 상관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심장이라도 꺼내 보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장석민은 여자를 좋아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여자와 자는 것을 좋아했다.

인생의 목적을 거기에 맞춰두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여자에게 폭력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그의 신조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는 헤어지기 전까지, 여자를 꽃처럼 소중하게 대했다. 헤어지기까지 시간이 몹시 짧은 것이 문제였지만.

「정말입니다. 저는 절대로, 헉!」

「닥치거라!」

하일이 칼을 쥔 손에 힘을 쥐고 소리쳤다. 그의 눈에는 푸르스름한 살기가 일렁였다.

「위대하신 왕 라이드 빈 무크라르께서 자하르에게 혼인을 하도록 권고하시기까지 얼마나 많은 나의 수고가 있었는 줄 아느냐.」

하일의 턱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까 너를 왜 이곳에 데려왔는지 물었지?」

이제 장석민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원치 않았다,

「나의 대업을 그르친 놈의 목숨은 내 손으로 처리해야 한다. 그것이 나의 명예를 회복하는 길.」

하일이 손을 뻗어 장석민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네 머리를 베어 테이블 위에 올려둔 채 식사를 하고 업무를 보고 잠을 청할 것이다.」

사람 머리를 앞에 두고 식사를 하는 하일의 모습이 어렵지 않게 그려졌다.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공포가 장석민의 심장을 두드렸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너를 찾는 동안 생각이 바뀌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그 생각을 바꾸었다는 말에 장석민은 진심으로 감사인사를 올렸다. 하일의 눈가에 잔인한 웃음이 스쳤다.

「나는 너를 쉽게 죽이지 않을 것이다. 네 귀를 자르고 손가락을 자르고 발가락을 자르고 성기를 자를 것이다. 그것들을 모두 개의 먹이로 던져주고 온몸에 꿀을 발라 벌레가 가득한 항아리에 가둬버릴 것이다. 죽기 직전에 꺼내어 마지막으로 여기에 가둘 것이다.」

하일이 턱짓을 하자 사이프가 커다란 우리를 가리고 있는 장막을 끌어내렸다. 새카만 짐승이 사나운 울음소리를 내며 창살에 온몸을 부딪쳐왔다. 날카로운 이빨이 쇠창살을 씹어대자 소름 끼치는 찰그랑 소리가 울려 퍼졌다. 새빨갛게 충혈된 눈과 쇠창살을 씹어 피떡이 된 주둥이는 짐승이 얼마나 굶주렸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우리를 뚫고 나와 뭐든 씹어 삼킬 것 같은 짐승의 기세에 장석민은 감히 살려달라는 말조차 하지 못하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네가 마지막에 할 수 있는 말은 제발 죽여 달라는 말이 될 것이다.」

장석민은 바닥에 엎드렸다. 자존심 따위, 현재 그가 머리에 떠올릴 수 있는 단어가 아니었다.

「무엇이든, 제발, 살려만 주시면……, 제발, 부탁, 제발…….」

울음을 섞여 나와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장석민은 빌고 또 빌었다. 공포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차라리 목이 잘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몇 분 전이 평온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일은 자신이 말한 것을 모두 지켜내고도 남을 남자였다. 이 미치광이 중동 사람에게 사람을 죽이는 일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어떻게 죽이는지가 그의 관심사일 뿐.

하일이 들고 있던 칸자르를 치켜들었다. 자신의 신체 일부가 절단될 거란 공포에 장석민은 숨을 삼키며 눈을 감았다.

하느님, 부처님, 알라님, 제발 자비를 베풀어 단칼에 죽게 해주십시오.

철컹, 하는 소리와 함께 무거운 것이 잘려나가는 묵직한 소리가 울렸다.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장석민은 하일을 올려다보았다.

하일의 발치에 동강이 난 자물쇠가 떨어져 있었다.

「무엇이든 하겠다?」

반달 모양으로 휜 칸자르를 칼집에 넣으며 하일이 물었다. 사악하고 교활한 목소리는 그의 새카만 속내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목이 마르면 이 독주를 마시게. 어떤 독이 들어있는지는 자네 알 바 아니고.

번들거리는 미소를 짓고 있는 하일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 하겠습니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장석민은 대답했다. 자신의 앞으로 내밀어 진 독주를, 공손히 두 손으로 받아들이는 것 외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혹시 영어를 하실 줄 압니까?」

장석민은 자신의 시중을 들어주고 있는 여자에게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돌아오는 것이 돌처럼 차가운 침묵이었다.

「영어를 할 줄 아는 분이 있습니까?」

다시 한 번 천천히 물었다. 여자는 귀머거리처럼 아무런 반응이 없다. 그녀는 장석민의 몸을 씻기고 향유를 발라주고 옷을 입혀주었다. 동물 우리에서 나와 사람의 모습을 갖추게 된 장석민으로서는 지금 이 상황이 감사할 따름이다. 그러나 하일이 그에게 요구한 일을 떠올리면 무턱대고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한국 대사관에 연락하고 싶습니다.」

장석민은 이번에 자신의 머리를 빗겨주려 나타난 여자에게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소용없었다. 그녀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장석민은 머리만 매만질 뿐이었다. 단장이 다 끝나자 시녀들은 모두 방에서 물러났다. 혼자 뎅그러니 남겨진 장석민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온몸에서 힘이 풀렸다. 우리에서 눈을 뜬 이후 처음으로 갖는 혼자만의 시간이었다.

"꿈이었으면……."

눈을 감았다가 뜰 때마다, 간절히 바라고 또 바라는 소망을 중얼거리며 장석민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러나 이건 현실이다. 목덜미에 난 칼자국이 그 현실을 마랳주고 있다. 몸서리쳐질 만큼 잔인하고 비현실적인, 현실.

바에서 여자와 대화 한 번 나눈 죄로 끌려와 동물 우리에 갇히고 사지 절단 위기에 짐승 먹이로 던져질 뻔하고. 심지어 지금은…….

"하아……."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쉰다. 그래 봤자 가슴을 누르는 답답함은 손톱만큼도 가시지 않는다. 가슴만 답답한 것이 아니라 머리도 깨질 듯 아프다. 변호사가 되어 처음 사건 수임을 맡았을 때보다 이천 배는 부담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부담감뿐인가. 황당함, 당혹스러움, 공포, 그리고 막막함을 동반한 수치.

금으로 장식된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얻어맞아 부어오르고 푸릇푸릇 멍이 남아 있지만 잘생긴 얼굴이다. 쌍꺼풀 없이 적당히 큰 눈과 오뚝한 콧날, 도톰한 입술까지, 조각 같은 미남은 아니지만 여자들 대다수가 호감을 품을 담백한 미남이었다. 선이 깔끔하고 가는 편이었지만 여성스러운 외모는 절대 아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장석민은 거울 속의 자신을 노려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하일이 그에게 요구한 사항은 성스러운 하젤의 신분을 유지하고 있는 자하르의 명예를 더럽히는 것이었다. 장석민은 하일이 제 동생이 자하르에게 열등감을 갖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하고 많은 미녀 공주를 놔두고 뚱뚱하고 못생긴 살레하를 자하르의 아내감으로 추진한 것만 봐도 그랬다.

하일은 동생이 유지하고 있는 하젤의 신분을 더럽히기만 한다면 자신이 왕이 될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어떻게 제가 감히 그분의 명예를 더럽힙니까.

눈물과 콧물 범벅이 된 꾀죄죄한 얼굴로 장석민이 훌쩍거리며 물었다.

저도 모르게 그 자신을 스스로 낮추고 있었다. 짐승의 먹이로 던져질 뻔한 위기를 겪고 나자 저절로 마음에 신분의 계급이 생기고 만 것이다. 

뭐든 하겠다고 했지.

그렇게 말하며 하일은 징그러운 미소를 보였다. 장석민은 소름이 오소소 돋았지만 그러겠노라고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하일의 요구는 간단했다.

자하르를 더러운 비역질로 타락시켜 하젤의 신분에서 끌어내릴 것.

간단한 만큼 황당하고 끔찍한 요구였다.

장석민은 말도 안 된다고 소리쳤다가 침을 질질 흘리며 으르렁거리고 있는 흑표범의 먹이로 그대로 던져질 뻔했다. 하겠다고, 뭐든 하겠다고 소리를 지르며 빌고 나서야 간신히 풀려날 수 있었다.

그분이 원래 남자를 좋아하는 분입니까. 

장석민이 피로 물든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닦으며 물었을 때 대답해준 것은 사이프였다.

그럴 리가.

그 한마디에 간신히 그친 눈물이 울컥, 치솟아 올랐다.

그럼 대체 제가 어떻게 그분의 명예를 더럽힌단 말입니까.

하일은 솥뚜껑만큼 커다란 손으로 제 수염을 쓸어내리며 대꾸했다. 그 방법은 네가 생각해낼 차례다. 살레하와 자하르를 결혼시키겠다는 생각을 해낸 것은 나니까.

비탄과 절망에, 말을 잃는 장석민을 내려다보며 하일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한 달 내에 왕위 계승이 정해진다. 그 안에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면 너는 내 손에 죽을 것이다.

그의 입술에 걸린 잔인한 웃음을 본 순간, 장석민은 깨달았다. 자신은 어차피 버린 카드임을. 어차피 짐승 먹이로 던져질 목숨. 아무렇게나 써보겠다는 심산인 것이다.

그나마 한 달이라는 기한을 준 것에 감사해야 할 정도였다.

"내가, 남자를, ……남자랑……."

장석민의 연애 인생에 남자는 발끝조차 들어온 적 없는 존재였다. 지금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었다. 그는 여자를 좋아했고 여자의 몸을 사랑했으며 여자와 하는 섹스를 즐겼다. 아름다운 곡선으로 이루어진 여자의 가슴과 둔부를 신봉했다.

그런데 가슴은 아스팔트이고 가랑이에는 오뎅이 달린 동성이라니. 장석민은 입고 있던 로브의 자락을 열어 거울에 몸을 비춰보았다. 남자의 몸을 5초 이상 들여다보는 것은 자신의 몸에 한해서다. 남자와 뒹구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린다. 헛구역질을 하던 장석민은 옷자락을 여미고 도로 자리에 앉았다.

"말도 안 돼. 미친 짓이야."

장석민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벌떡 일어나 의자 주변을 서성거렸다.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앉아보기도 하다가, 체념하고 누워보기도 했다가, 다시금 남자 몸을 떠올리고 헛구역질을 하며 벌떡 일어나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기를 두어 시간.

장석민은 목욕 시중을 들어주었던 여자가 들어와 나갈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영어하실 줄 알아요?」

여자의 비교적 정확한 영어 발음에 놀란 장석민은 물었지만, 여자는 대답하지 않고 이 옷으로 갈아입으라며 흰옷을 건넸다.

「제 말을 알아들을 줄 아세요? 제가, 지금 여기 잡혀 있습니다.」

간절하게 매달려 부탁을 했지만 여자는 무표정하게 장석민에게 입고 있는 옷을 벗으라고 손짓을 했다.

「부탁입니다. 제가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경찰이나 대사관에 연락해주시기만 한다면 그 은혜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장석민은 여자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조곤조곤 속삭였다. 여자들아 열에 아홉은 그에게 호감을 품게끔 하는 대화방식이었다.

「옷을 다 입으시면 부르세요.」

할 일을 마친 여자가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사람이 인정머리가 없군."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장석민은 여자가 가져다준 옷으로 갈아입으며 한국말로 쉴 새 없이 구시렁거렸다. 여자가 준 옷은 머리부터 발긑까지 눈 부실 만큼 하얀 전통복이었다. 몸에 닿는 실크의 감촉으로 짐작하건대 한두 푼 하는 옷이 아닌 게 분명했다.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가 엉덩이로 깔아뭉개버린 디올 옴므 재킷보다 비쌀지도 모르겠다.

생사를 알 수 없게 된 디올 옴므 재킷을 떠올리자 마음이 착잡해졌다. 장석민은 전통복으로 갈아입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잘생기긴 했는데…….아직 좀 그렇지."

얼굴에 울긋불긋하게 남은 멍과 상처 때문에 본인이 가진 매력의 50퍼센트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지 않고서야 시중을 들어주러 온 여자가 그토록 자신을 무시할 리 없었다.

노크소리가 들리고 준비를 마쳤냐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석민이 그렇다고 답하자 여자가 들어와 배가 항만에 닿았으니 올라오라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배요?」

깜짝 놀라 되물었다. 이곳에서 눈을 뜬 이후로 내내 갇혀 있었다. 여기가 한국은 아닐 것이라 어렴풋이 생각하긴 했지만, 자세히 고민한 적은 없었다. 목숨을 보장받은 것도 얼마 전의 일이고 목숨 값 대신으로 받게 된 임무를 알게 된 것도 바로 직전이다. 여기가 어디인지, 혹은 어디로 가게 되는지 하는 문제까지는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배라니.

아까 문을 열고 흰색 옷을 입은 사이프와 하일이 나타났을 때 느꼈던 황당함만큼은 아니지만, 매우 황당했다. 황당함도 황당함이었지만 이곳이 배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선상이라고 인식을 하고 난 뒤에도 장석민은 물 위에서 느낄 수 있는 특유의 흔들림을 느끼지 못했다.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여자가 장석민을 안내해주었다.

「지금 여기가 배 안입니까?」

「그렇습니다.」

복도 바닥은 붉은색과 금색으로 직조된 카펫이 깔려 있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배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배처럼 안 생겼는데……. 정말 배에 타고 있는 겁니까?」

여자는 여기가 배든 비행기든 자신과는 조금도 상관없다는 얼굴로 그렇다고 대꾸했다.

호수구나. 이 정도로 흔들림이 없다는 것은 파도가 없는 민물 위라는 뜻이다. 장석민은 하일이 자신을 협박하기 위해 동물 우리를 배에 싣고 호수에 배를 띄웠다고 결론지었다.

굳이 호수에 배를 띄워 놓고 사람을 협박할 필요가 있나. 아무리 일국의 왕자라 해도 돈이 썩어 문드러지나. ……타르카 왕국이라고 했지.

「타르카 왕국은 국민의 수가 얼마나 됩니까.」

얼마나 돈이 썩어 문드러지는 나라인가 궁금해졌다. 나라의 경제 규모를 직접 물어보는 건 실례인 것 같아 국민의 수를 물었다. 인구수로 경제 수준을 알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경제 규모 정도는 짐작할 수 있는 터다.

잠시 생각하던 여자는 120만 정도입니다. 하고 대꾸했다. 장석민은 저런, 하고 한국말로 중얼거렸다. 120만이면 대전이나 광주의 인구보다 적다. 나라 전체가 인구수가 그 정도라면 볼 것도 없이 지구에서 찾아보기도 힘든 약소국가가 분명했다.

하일 이 미친놈. 얼마나 미쳤기에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의 왕자가 이런 데에 이렇게 돈을 쓰고 있는 거냐. 아니다. 차라리 잘됐다. 그런 나라의 둘째 왕자, 하일의 힘이 보잘것없을수록 자신이 탈출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올라가시면 됩니다.」

계단 앞까지 안내를 마친 여자는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는 듯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복도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끝까지 눈 한 번 마주치지 않았다. 장석민은 어차피 자신의 취향이 아니었다고 투덜거리며 계단을 올라갔다.

그래. 저 여자가 아니더라도 여기서 벗어난다면 앞으로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그중 한 명은 사람의 마음을 가진 자라서 한국 대사관과 연락이 닿겠지. 정신 똑바로 차리고 주어진 기회를 이용하면 된다. 고작 인구 120만 정도 되는 나라의 왕자 따위, 큰소리를 치는 것도 배 위에서 뿐이다.

장석민은 마음을 다잡으며 문고리를 돌렸다.

"……."

열었던 문을 다시 닫았다. 심호흡을 하고 다시 열었다.

"……. ……."

장석민은 생각했다. 방금 그 여자가 말한 인구수는 0이 두 개쯤 빠진 게 분명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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