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거짓된 운명이라 할지라도 Ⅱ(2)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자 알렉은 바쁜 나날을 보냈다.
공부도 운동도 여전히 시원치 않았지만, 예전만큼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미즈키나 윌, 에릭과 어울리는 덕분에 괴롭힘당하는 일이 많이 줄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감독생을 제외한 스탯포드 같은 녀석들이 지나쳐 가면서 야유를 하거나 발을 거는 일은 가끔 있었지만 예전 같은 악질적인 장난은 없었다.
그것만으로 알렉의 일상은 꽤 순탄해졌다.
자연스레 알렉의 얼굴에 웃음이 많아졌다. 순수한 미소라기보다는 살짝 삐딱한 미소였지만.
미즈키와 친해져서 생긴 부작용도 있었다.
예를 들면, 지금이 그렇다.
“―그게 아냐, 스테이플턴. 몇 번을 말해야 알겠어?”
조금 짜증이 섞인 에드워드의 질책이 날아왔다.
“죄, 죄송합니다….”
알렉은 고개를 움츠렸지만 솔직히 무엇이 틀렸는지 몰랐다.
야간 자습 시간에 이용하는 학습실이었다. 알렉의 앞에는 에드워드가 앉아 알렉에게 수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지난번에 가르쳐줬잖아. 이런 경우는 이쪽 공식을 대입해서….”
짜증을 내면서도 참을성 있게 알렉을 지도하고 있는 중이다.
이런다고 이제 와서 성적이 좋아질 리 없다고 알렉은 거의 체념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즈키의 형들이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리고 참견쟁이 윌도. 같이 자습 시간을 보내는 사이에 자연스레 알렉의 공부까지 봐주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알렉에게는 달갑지 않은 친절이었다.
알렉은 스스로 자신은 머리가 나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나빴으니까 이제 와서 노력한다고 달라질 리 없었다.
그렇게 반론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알렉이 눈썹을 찌푸리고 있으면, 윌이 ‘무슨 일이야?’ 하면서 얼굴을 기웃거리고, 그러면 미즈키나 에릭까지 끼어들어서 결국 미즈키의 형들까지 나서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최소한 알프레드나 윌이 가르쳐주면 좋을 텐데….
에드워드의 엄격한 지도를 받으면서 알렉은 내심 투덜거렸다.
완벽주의 성향이 있는 데다 조금 성질이 급한 에드워드에게는 알렉 같은 열등생을 지도하는 일이 맞지 않았다.
알렉은 에드워드를 화나게 할 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에릭도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일이 어울리지 않았다. 알렉이 너무 멍청한 건지 모르지만 자꾸만 화를 냈다.
그런 점에서 알프레드나 윌은 인내심이 강했다.
알렉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으면 바로 가르치는 방법을 바꾸거나 적당한 조언을 더해 알렉의 사고를 이끌어 주었다.
미즈키는 머리는 나쁘지 않지만 알렉이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면 대체 어디를 모르는 건지 미즈키도 같이 고민에 빠져버려서 공부가 진행되지 않았다.
“미안해, 제대로 가르쳐 주지 못해서….”
하고 풀죽은 목소리로 사과하는 점이 무엇이든 자기 탓으로 돌리는 성격을 가진 미즈키다웠다.
미즈키 잘못이 아니라 알렉의 머리가 나쁜 것이 문제인데.
그렇지만 이런 식으로 모두와 함께 공부하는 것은 알렉에게는 처음 해보는 경험이었다.
진저리쳐질 때도 있었지만, 자신 같은 구제불능을 가르쳐 주려고 하는 모두의 마음에 쑥스러운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이렇게 있으면 어쩐지 자신도 그 사이에 소속되어 있는 기분이 들었다. 외톨이가 아니라 친구가 있다는 소속감.
“수학은 어쨌든 문제를 많이 풀어보는 게 좋다고 들었는데….”
미즈키가 말하자, 에릭이 물었다.
“호오, 어디서 들었어?”
“으음, 내가 입원해 있었던 요양원 선생님.”
“그럼, 의사?! 그건 머리 좋은 인간이 하는 소리잖아. 알렉한테 효과가 있을까?”
에릭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스파르타 방식인 점이 마음에 들었는지 에드워드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 선생 말이 맞아. 학교 레벨의 수학은 논리가 아니라 몸으로 익히는 정도면 돼. 다음에 수학의 트레빅 선생님께 알렉한테 맞을 만한 문제집을 물어볼게. 그걸로 특훈을 하는 거야.”
“특훈….”
숙제도 버거운데 또 다른 문제집으로 특훈을 하라니 무리다.
무심코 울상을 지은 알렉의 머리를 에드워드가 아무렇게나 쓰다듬었다.
“괜찮아. 제대로 단계를 밟으면서 배우다 보면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게 돼. 아직 자신이 뭘 공부해야 좋을지도 모르는 상태지만 끈기를 갖고 계속해가면 틀림없이 알게 될 날이 올 거야. 알았지, 스테이플턴.”
“…네.”
쓸데없이 책임감이 강한 사람은 이래서 싫었다.
알렉을 가르치면서 울화가 치밀면 그냥 손을 떼면 좋을 텐데, 의욕만큼은 절대로 꺾이지 않는 것이다. 거기다 선의에서 나온 것이다 보니 뭐라 할 수도 없었다.
“성적이 좋아지면 부모님도 아무 말 안 하겠지.”
에릭이 어깨를 으쓱하며 한마디 했다.
천사 같은 얼굴을 한 에릭은 사실 꽤나 고약한 성격의 소년이었다. 알렉과 어울리는 것도 미즈키가 같이 있을 때뿐인데 가끔 이렇게 핵심을 찌르는 말을 하곤 했다.
부모, 라는 말에 알렉도 입술을 삐죽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레너드와는 방학 동안 허락 없이 미즈키한테 전화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다음 겨울 방학을 생각하면 조금은 점수를 올려두고 싶었다.
그러면 미즈키의 전화도 바꿔줄 것이고, 가끔은 전화를 걸 수도 있을 것이다. 미즈키와 친하게 지내면서 성적이 오르면 부모님도 미즈키와 어울리는 것에 대해 좋게 생각하실지 모른다.
―좋아!
마음속으로는 불끈 힘을 주면서도 입으로는 마지못해 하는 듯이 알렉은 동의했다.
“알았어…. 할 수 없지.”
“잘만 되면 다음엔 미즈키도 알렉의 집에 전화를 걸 수 있겠네.”
대화를 듣고 있던 윌이 생긋 웃으며 말했다.
속마음을 들키자 알렉의 얼굴이 빨개졌다.
미즈키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이어서 기쁜 미소를 지었다.
“열심히 해, 알렉. 나도 협력할 테니까.”
“따, 딱히, 널 위한 게 아니거든! 나 자신을 위해서니까 오해하지 마.”
“또∼ 또∼ 수줍어하긴♪ 고집쟁이구나, 알렉은.”
윌이 미즈키 뒤에서 손바닥에 키스하고 날리는 시늉을 했다.
미국인다운 가벼운 행동이었다.
“아니라니까!”
알렉은 반론했지만 효과는 거의 없었다. 그래도 알렉에게는 내심 기분 좋은 일이었다.
레너드에게서 연락이 온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 뒤였다.
워튼관으로 전화가 와서 호출을 받은 알렉은 황급히 사무실로 달려갔다.
“알렉산더 스테이플턴입니다!”
“아아. 랭스턴 백작으로부터 전화네.”
“네, 감사합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레너드로부터의 전화였다.
알렉은 기쁨으로 가득 차서 수화기를 귀에 댔다.
“여보세요, 레너드!”
날아갈 것 같은 알렉의 목소리에 레너드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 목소리는 알렉도 나와 통화하는 걸 나처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고 생각해도 되는 걸까?”
라는 말을 했다. 물론 그 말 대로였다. 그렇게 말하려다 알렉은 순간 주저했다. 레너드가 어디서 걸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있는 곳은 기숙사 사무실이었다.
섣불리 말을 했다가는 사무직원이나 복도를 오가는 학생들에게 전부 들릴 것이다.
알렉은 작은 소리로 ‘응.’이라고만 대답했다. 사정은 레너드도 이해할 것이다. 레너드 역시 이 워튼관의 졸업생이니까.
“장소를 생각해서 짧게 말할게. 이번 주말에 간신히 시간을 낼 수 있게 됐어. 데리러 갈 테니까 외박 허가받아놔.”
“레너드…. 응, 기뻐.”
사실은 정말 좋아해, 라던가 나도 만나고 싶었어, 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게 한계였다.
“나도야. 기다리다 목이 빠질 것 같아, 알렉. …감독 선생님에게 신청서를 낼 때는 가정교사라고 적도록 해. 내가 사정을 설명해 둘 테니까, 그렇게 하면 통할 거야.”
“응, 알았어.”
레너드가 미리 말을 해서 알렉은 과외 수업을 받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성적이 나쁜 알렉이 걱정되기 때문에…라는 핑계였다.
5학년 1학기쯤 되면 슬슬 3A 레벨 시험도 준비에 돌입해야 하는 시기니까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이렇게 하나부터 열까지 레너드가 가르쳐 주고 있었다. 그 사실이 알렉을 황홀하게 만들었다. 보호받고 있다는 것을, 소중하게 여겨주고 있다는 것을 강하게 느낄 수 있어서 행복했다.
서둘러 전화를 끊고 알렉은 당장 기숙사 감독 선생인 패터슨에게 낼 신청서를 작성했다. 레너드가 말한 대로 패터슨은 전부 알고 있었는지 두말없이 신청서를 받아주었다.
알렉은 레너드와 재회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며칠 후―.
잔뜩 상기된 얼굴로 워튼관을 나서는 알렉을 미즈키는 창문을 통해 지켜보고 있었다. 웬일로 알렉이 외박을 나간다고 하니, 에릭도 윌도 함께 지켜보고 있는 것이었다.
“오∼, 저게 알렉이 말한 그 형인가.”
윌이 감탄스러운 얼굴로 말하자, 에릭이 매섭게 쏘아붙였다.
“랭스턴 백작은 이 기숙사의 몇 대 전 기숙사장이고, 나중에는 총대표도 되셨던 분이야. 그렇게 깔보듯이 말하지 마.”
최근 들어 갑자기 윌과 에릭의 충돌이 거칠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윌은 전혀 개의치 않는 태도였다.
휘파람을 불며,
“굉장한걸, 알프레드와 똑같다는 거네.”
그렇게 말하고 미즈키를 힐끔 쳐다보았다.
이유도 없이 미즈키는 얼굴을 붉혔다.
―왜 얼굴이 빨개지는 거지…?
자신과 알프레드의 ‘특별’한 관계를 윌에게까지 들켰을 리는 없는데. 에릭을 힐끔 살펴보자 에릭은 못마땅한 얼굴로 윌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미즈키에게 팔짱을 꼈다.
“저 형은 기숙사장에 학교 총대표, 큰형은 워튼관의 기숙사장, 둘째 형은 감독생. 알렉도 고생이 많겠어.”
윌은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는지 미즈키에게 말을 걸어왔다.
미즈키도 얼굴이 빨개진 것을 얼버무리고 싶어서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해, 알렉의 가족들은. 하지만 저 형하고는 굉장히 친한 모양이야.”
다정한 포옹을 받고 알렉은 무척 기쁜 얼굴이었다.
그대로 리무진에 올라타는 모습이 보였다.
“정열적인 포옹인데? 형제 복은 없는 것 같지만 저 형한테는 귀여움받나 봐.”
윌이 그렇게 논평을 하자 미즈키도 끄덕였다.
다행이다,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에릭에게서 들은 알렉의 가정환경은 그다지 즐거울 것 같지 않았다.
그런 알렉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주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사실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분명 저 사람이 있기에 알렉은 힘든 나날을 견디고 있는 것이다.
―마치, 나에게 있어서 알프레드 같아.
물론 알렉은 미즈키와 달리 그런 관계가 있을 소년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알렉을 구원해줄 사람이 바로 곁에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알렉에게는 분명 즐거운 주말이 될 것이다.
미즈키는 그렇게 생각하며 달려가는 리무진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