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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거짓된 운명이라 할지라도 Ⅱ(1) (7/11)
  • 비록 거짓된 운명이라 할지라도 Ⅱ(1)

    “레너드… 안, 돼…, 으음, 후.”

    알렉이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거부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레너드는 한 번 더 키스했다.

    ―귀여운 알렉.

    이번 여름, 염원이 이루어져서 드디어 자신의 것으로 만든 사랑스러운 소년이었다.

    레너드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은 이 보잘것없는 소년뿐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레너드와 알렉은 척 보기에도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큰 키, 늘씬한 체격, 잘생긴 외모, 거기에 젊은 나이임에도 랭스턴 백작가의 수장다운 엄숙함과 품격을 갖춘 레너드.

    그와 비교해 알렉은 체구도 작고 빼빼 마른 데다, 부스스하고 볼품없는 빨간 머리에 주근깨로 가득한 얼굴을 한, 겁먹은 작은 동물 같은 생김새였다.

    함께 서 있으면 빈말로라도 어울린다고 할 수 없었다.

    알렉도 그런 자신에게 강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어서 잔뜩 움츠러든 모습이 그를 더욱 보잘것없는 소년으로 보이게 했다.

    그것은 알렉이 자신감을 갖지 못하도록 레너드가 오랜 시간에 걸쳐 꾸민 탓이기도 했다.

    “음… 으응… 아.”

    사랑스러운 알렉의 입술을 듬뿍 맛보고 나서 레너드는 고개를 들었다. 사실은 언제까지고 알렉의 입술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았지만 이제는 정말로 시간이 없었다.

    런던에서 알렉이 공부를 하는 그렌필드까지 걸리는 시간을 생각하면 슬슬 알렉을 차에 태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미 아파트 아래층에는 레너드의 지시를 받은 운전기사가 대기하고 있을 것이다.

    마지막 키스에 알렉은 뺨을 붉힌 채 아직 눈을 감고 있었다.

    젖은 입술로 작게 헐떡이는 숨소리가 레너드의 욕망을 강하게 자극했다.

    “―보내고 싶지 않아, 알렉.”

    열기를 띤 어조로 중얼거리자, 알렉이 눈물이 맺힌 눈을 뜨고 레너드를 바라보았다.

    키스 전에 안경을 벗겼기 때문에 알렉의 얼굴에서 유일하게, 누가 봐도 아름답다고 느낄만한 녹색 눈동자가 잘 보였다.

    알렉의 시력이 나빠진 것은 행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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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지 않았다면 이 예쁜 눈동자를 학교의 누군가가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자신처럼 알렉이 아름답다고 느끼게 된다면….

    가슴을 태우는 초조함이라는 짐승을 레너드는 남몰래 달랬다.

    알렉을 누군가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고 하는 조바심은 벌써 17년에 걸쳐 레너드와 함께하고 있었다.

    자신에게만 웃어주었다.

    단지 그것뿐인 갓난아기에게 이렇게나 독점욕을 느끼는 자신은 이상했다. 첫눈에 반했다고 간단히 말하기에는 지나치게 강한 애정이었다.

    그러나 가족을 잃은 자신에게는 순수하게 자신만을 따르는 알렉이 필요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알렉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게 되었다.

    몸도 마음도 전부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않고서는 직성이 풀리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넘겨주지 않을 거야, 알렉.

    자신의 광기는 알렉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깊었다.

    이번 여름, 드디어 몸까지 전부 손에 넣었는데도 굶주림은 더욱 커질 뿐이었다.

    예를 들면 그렇다.

    알렉을 그렌필드로 돌려보내면서 레너드가 이렇게 불안해진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까지는 걱정할 필요 따위 없었다.

    알렉은 불쌍한 외톨이에 낙제생이었으니까.

    괴롭힘당하면 당했지 누군가가 알렉을 좋아하게 될 일은 결코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레너드는 알렉을 놓고 싶지 않아서 더 힘껏 끌어안았다.

    “계속 같이 있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레너드….”

    진심 어린 레너드의 한탄에 알렉이 꼭 매달려왔다.

    “나도… 쭉 레너드 옆에 있고 싶어….”

    만약 알렉이 레너드의 친동생이었다면 절대 알렉을 그렌필드에 돌려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레너드는 마음속으로 자조했다.

    아홉 살에 부모를 잃고 대신 알렉의 부모―세인트 올즈리 후작가―밑에서 알렉의 형처럼 자랐다고는 해도, 알렉과 자신은 친형제가 될 수 없었다.

    즉 지금 현재 레너드가 할 수 있는 것은 세인트 올즈리 후작 부부를 자신이 바라는 대로 꼬드기는 것뿐이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알렉을 쭉 자신의 품 안에 가둬두고 싶었다.

    앞으로 조금만 더 참으면 된다.

    2년만 기다리면 알렉도 그렌필드를 졸업한다.

    그 뒤에는 어떤 핑계를 대고서라도 레너드의 곁으로 데려올 수 있다.

    오히려 세인트 올즈리 부부는 기쁜 마음으로 알렉을 맡길 것이다. 그만큼 후작가의 사람들은 아무 쓸모 없는 아들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그렇게 되도록 계획해온 것은 나지만 말이야.

    알렉을 품에 안은 채 레너드는 입술 끝만 비틀어 미소 지었다.

    귀여운 알렉이 자신 이외의 누군가에게든 애정을 갖는 것이 싫었다. 그 시선도, 미소도, 감정조차도 전부 자신의 것이 아니고서는 참을 수 없었다.

    알렉도 그럴 것이다.

    울기만 하는 갓난아기였던 알렉이 유일하게 미소를 지어 보인 것은 레너드뿐이었으니까.

    레너드가 안아 들면 울음을 그쳤고, 레너드가 먹여주면 이유식을 토해내지 않았다. 어머니도 보모도 두 손 들었지만 레너드만큼은 허락해주었다.

    레너드만이 알렉의 ‘특별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네가 내 것이 되는 건 처음부터 정해진 운명이었던 거야, 알렉.

    그래, 이것은 운명이니까 불안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올해 여름 방학에도 알렉에게서 미즈키를 떼어내지 않았는가.

    처음으로 친구가 생겨서 기쁘다고 말한 알렉에게 전화는 딱 한 번밖에 걸게 해주지 않았고, 저택에 놀러 가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알렉의 몸도 마음도 레너드의 것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레너드와의 행위를 부끄러워하면서도 몸을 열고 기뻐하며 받아들이는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알렉은 내 거야. 아무에게도 널 넘겨주지 않아.

    레너드는 알렉에게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마음속의 집착은 전혀 드러나지 않는 다정하고 온화한 미소였다.

    “쉬는 날에는 한 번씩 꼭 그렌필드에 찾아갈게. 연락할 테니까 미리 외박 허가받아놔, 알렉.”

    외박이라는 단어에 알렉의 뺨이 다시 빨갛게 물들었다.

    두 달 남짓 레너드와 지내며 순진무구했던 알렉의 몸도 마음도 사랑하는 사람과 하나가 된다는 의미를 알고 있었다.

    서로 좋아하는 사람들이 재회했는데 단지 얘기만 하고 끝날 리가 없다. 외박하자는 말은 그런 의미였다.

    레너드는 붉어진 알렉의 뺨을 손끝으로 살짝 쓰다듬었다.

    얼굴이 빨개지자 지저분한 주근깨가 더욱 도드라져 보였지만 그것조차 견딜 수 없이 사랑스러웠다.

    자신을 단순히 형 같은 존재가 아니라 한 명의 남자로 의식하는 증거라고 할 수 있는 그 반응이 귀엽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런 얼굴 하면 안 돼. 또 키스하고 싶어지니까, 알렉.”

    “아… 레너드….”

    알렉이 달콤한 숨을 흘렸다.

    힘이 빠져서 몸을 기대는 알렉을 보니 애정이 더욱 솟구쳤다.

    딱 한 번만 더. 레너드는 귀여운 연인에게 고개를 숙여서 다시 그 입술을 탐했다.

    차에 올라탄 뒤에도 알렉의 뺨은 뜨거웠다.

    넋을 잃은 채 창밖의 경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꿈결 같은 두 달이었다.

    레너드를 오래전부터 좋아했지만 그 ‘좋아함’이 특별한 ‘좋아함’으로 바뀐 여름이었다.

    구제불능인 자신과는 달리, 그렌필드에 있을 때부터 우수하고 멋지고 누구나 좋아하는―분명 여자들한테도 인기가 많았을 것이다―레너드가 알렉을 선택해주다니.

    그 제비꽃 색 눈동자가 뜨겁게 알렉을 바라보면서 ‘계속 같이 있을 수 있다면….’이라는 말을 하다니.

    거기다 레너드는 알렉의 교우 관계에 질투까지 했다.

    미즈키는 정말로 단순한 친구인데 ‘너에게 친구가 생긴 것은 기뻐해야 할 일인데도 널 빼앗길 것만 같아서 두려워.’라는 말을 한 것이다.

    그때 레너드의 안타깝고 괴로운 듯한 표정이 떠올라서 알렉의 가슴은 꾹 조여들었다.

    가족에게조차 멸시받고 있는 자신을, 레너드는 그렇게나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알렉의 모든 것을 빼앗고 싶다고 할 정도로 원해주었다. 그것이 기뻤다.

    ―괜찮아. 레너드 말고는, 아무도 좋아하지 않을 거야.

    알렉은 작게 미소 지었다.

    레너드는 걱정하고 있지만 알렉을 좋아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디서든 짐짝 취급이었고, 학교에서도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다. 미즈키도 좋은 녀석이지만 어디를 봐도 연애 대상은 아니었다.

    ―그런 천하태평 바보를 사랑할 리 없잖아.

    생각하는 것만으로 가슴이 두근거리는 사람은 레너드뿐이다.

    알렉은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헤아릴 수 없는 키스와 달콤한 포옹.

    물론 그 이상의 부끄러운 것도 잔뜩 했다.

    온몸이 녹아내리는 듯했던 어젯밤의 행위를 떠올리고 알렉은 얼굴을 붉혔다.

    멋대로 전화를 걸려다가 벌을 받았던 날을 제외하면 레너드는 늘 알렉에게 상냥했다.

    아니, 그때 받았던 벌도 알렉을 아프게 하지는 않았다.

    그저 괴로울 정도로 기분 좋게 해주었는데 손을 대는 것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것이 레너드가 내린 유일한 벌이었다.

    벌을 줄 때조차 레너드는 다정한 것이다.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알렉은 다시금 실감했다.

    알렉이 사랑하고 있는 것처럼 레너드도 알렉을 사랑해주고 있었다.

    어쩌면 호의가 사랑으로 바뀐 지 얼마 안 된 자신보다 레너드가 더욱 강하게, 깊이 알렉을 사랑하는지도 모른다.

    레너드는 알렉보다 열 살이 많다.

    알렉에 대한 연애 감정 또한 좀 더 일찍부터 갖게 되었는지 모른다.

    ―어쩌면 내가 클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도 몰라….

    생각해보면 레너드는 옛날부터 스킨십이 잦았다.

    언제나 끌어안아 주고, 머리카락이나 뺨을 쓰다듬기도 했으며 가벼운 키스도 밥 먹듯 했다.

    동생처럼 귀여워하면서 그 ‘동생’의 성장을 기다리는 레너드―그 모습을 상상하며 알렉의 얼굴이 점점 더 빨개졌다.

    이런 자신을 그렇게 기다려 주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만으로 기쁨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난 행복해, 하고 알렉은 생각했다.

    너무나 좋아하는 형 같았던 레너드가 연인이 되고 거기에 더해 미즈키 같은 친구도 생겼다.

    ―아, 하지만….

    문득 알렉은 불안을 느꼈다.

    레너드가 쓸쓸한 표정을 짓는 것이 싫어서 미즈키에게 연락하는 것을 계속 미루기만 했다.

    미즈키가 그 때문에 화가 나 있진 않을까.

    일단 자신이 만나러 갈 수 없는 사정을 설명은 했지만 퉁명스러운 자신의 설명만으로는 미즈키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레너드도 말하지 않았는가.

    ‘미즈키가 정말로 널 용서해 준 건지….’

    곧바로 이어서 괜찮다고 말했지만 그것이 레너드의 배려에서 나온 한 마디라는 것은 알렉도 알고 있었다.

    미즈키가 정말로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애초에 자신은 미즈키에게 정말 지독한 짓을 했다.

    괴롭히는 학생들 편이 되어 가짜 초대장을 보내고 함정에 빠뜨린 적도 있었다.

    알렉이었다면 분명 상대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신용하지 않는다.

    미즈키는 같은 나이 또래에 비해 믿기지 않을 만큼 성격이 좋고 인내심이 강했다.

    그렇지만 이번 여름 내내 한 번도 먼저 연락을 하지 않은 알렉에게 정나미가 떨어졌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알렉은 미즈키를 탓할 수 없었다.

    자신은 다시 외톨이 학생 생활로 돌아갈지 모른다.

    알렉은 초연하게 생각했다.

    새 학기부터는 드디어 5학년 2학기니까, 워튼관도 개인실을 배정받을 것이다. 미즈키와도 떨어지게 된다는 뜻이다.

    미즈키와 떨어지면 윌이나 에릭과의 사이 역시 멀어질 것이다. 그들은 미즈키의 친구이고, 알렉과 어울리는 건 미즈키가 있기 때문이니까.

    알렉에게 유일하게 다행스러운 점은 쭉 자신을 괴롭혀왔던 프레드릭 스타포드가 감독생으로 뽑히지 않았다는 것 정도일까.

    감독생의 권한을 내세워서 알렉을 더 지독하게 괴롭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오싹해졌다.

    대신 감독생으로 뽑힌 것은 그렌필드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윌, 즉 윌리엄 듀였다. 한눈에 봐도 불량스러워 보이는 소년이지만 한 편으론 눈매가 날카로운 면이 있었다.

    그는 한때 미즈키가 에릭의 눈엣가시였던 때도 다른 사람들처럼 에릭의 겉으로 보이는 얼굴에 속지 않고 두 사람 사이를 중재했었다.

    그런 빈틈없는 부분을 상급생에게 인정받은 모양이다.

    알렉도 윌이 잘난 녀석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신학기부터 학교 총대표가 된 미즈키의 의붓형 알프레드 피츠월터와는 또 다른 타입이지만 리더십이 느껴지는 소년이었다.

    이번 학기부터 기숙사장이 된 에드워드 피츠월터―이쪽도 미즈키의 형이지만―에 이어서 내년에는 윌이 워튼관의 기숙사장이 되어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뭐, 나하곤 관계없지만.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감독생은 꿈도 꾸지 못하는 열등생인 자신에게는 다른 세상 이야기나 마찬가지다.

    자신은 그저 이번 학기도 작게 웅크리고 가능한 존재감 없이 별다른 사고 없이 지낼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설령 미즈키가 자신을 싫어하게 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레너드가 있으니까….”

    친구가 아무도 없어도 자신에게는 레너드가 있다.

    재능도 외모도 갖지 못한 알렉이지만 최고의 연인을 가졌다.

    ―레너드가 사랑해주니까, 난 괜찮아….

    그렇게 자신에게 타이르면서 알렉은 워튼관까지 가는 긴 시간 동안 눈을 감았다.

    워튼관에 도착한 것은 저녁 무렵이었다.

    레너드가 한참 동안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미 거의 모든 학생이 기숙사에 돌아와 있었다.

    즐거운 얼굴로 재회를 반가워하는 학생들 옆을 지나쳐서 알렉은 재빨리 기숙사 계단을 올라갔다.

    알렉에게 말을 거는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차라리 그편이 나았다.

    알렉에게 있어 누군가 말을 걸어온다고 하는 것은 대부분 불쾌한 경험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놀림을 당하거나 악담을 듣거나 둘 중 하나였다.

    자신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다면 그편이 나았다.

    여름 방학 전에 이미 개인실 배정을 받은 알렉은 고개를 숙인 채 새로운 방으로 들어갔다.

    오늘부터는 1인실에서 생활하게 된다.

    미즈키가 시끄럽게 말을 걸어오지도 않고, 미즈키의 친구들이 소란을 피우며 방으로 들어오는 일도 없을 것이다.

    속이 다 시원했다. 알렉은 혼자 그렇게 되뇌면서 커다란 한숨을 내쉬고 침대에 앉았다.

    레너드의 아파트에 있는 것보다 훨씬 딱딱한 스프링이었지만 긴 여정에 지쳐있었기 때문인지 신경 쓰이지 않았다.

    벌렁 누워서 알렉은 천장을 바라보았다.

    미즈키나 다른 녀석들은 이미 기숙사 안에 있을까?

    아마도 벌써 돌아와 있겠지.

    ―만나러… 가봐야 하나….

    미즈키의 방이 어디인지는 알고 있었다.

    여름 방학이 시작되기 전에 다 함께 서로의 방에 짐을 옮겨주었으니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미즈키의 방에는 분명, 에릭과 윌이 와있을 것이다. 아니면 미즈키가 두 사람 방에 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면 알프레드나 에드워드와 같이 있을지도….

    미즈키와 두 형은 처음에는 이런저런 일들이 많았던 것 같지만 지금은 형제간에 사이가 좋았다. 아니, 이런저런 일들이 많았기 때문에 보통 이상으로 사이좋은 형제였다.

    특히 알프레드는 여러 가지로 미즈키를 신경 쓰고 곁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미즈키는 상당한 괴롭힘을 당했는데 형들이 구해주지 않아서 꽤 지독한 일을 당하기도 했다.

    에드워드는 무뚝뚝한 면이 있으니까 그 정도는 아니겠지만 원래 다정한 성격인 알프레드는 그 일을 아직 마음에 두고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미즈키는 몸도 약하니 더욱 그럴 것이다.

    “좋겠다….”

    알렉은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처음에 고생을 좀 하기는 했지만 미즈키한테는 이제 자신을 지켜주는 형제들이 있었다.

    하지만 알렉을 절대적으로 보호해줄 사람은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날 뿐만 아니라, 이곳에서는 아무런 힘이 없었다.

    미즈키나 알프레드처럼 나이가 비슷하면 학교도 기숙사도 같아서 틀림없이 지켜줬을 텐데 알렉에게는 그런 사람이 없었다.

    겨울 방학이 시작되려면 아직 세 달이나 남았다. 그렇게 긴 시간 동안 레너드를 만나지 못하다니 너무 괴로웠다.

    “…아냐, 쉬는 날마다 만나러 와주겠다고 한걸.”

    그때는 꼭 외박 허가증을 받아놔, 라고 말했다.

    1박 2일의 짧은 시간이긴 하지만 가끔 레너드의 체온을 느낄 수 있다. 예전의 자신과 비교하면 훨씬 행복한 상황이 아닌가.

    알렉은 혼자서 중얼거렸다.

    쉬는 날마다, 라는 게 어느 정도의 기간인지 모르겠지만, 겨울 방학이 되기 전까지 몇 번은 레너드를 만날 기회가 있다.

    그런 기회가 있는 것만으로 전보다는 훨씬 이곳 생활을 견디기 쉬울 것이다.

    설령, 미즈키가 알렉에게 질려서 이제 친구가 아니라 해도―.

    “혼자라도 괜찮아….”

    알렉은 중얼거렸다.

    혼자인 정도가 아니라 자신은 줄곧 비참하게 따돌림당했다.

    그것을 쭉 견뎌온 것이다.

    앞으로 2년만 더 버티는 것쯤 아무렇지도 않다.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고, 마음을 억누르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척하면서 그렇게 참으면 된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알렉의 마음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한 번 맛보았던 달콤하고 즐거운 시간―.

    그 시간이 알렉을 나약하게 만들고 있었다. 레너드가 있으면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생각했는데 미즈키라는 친구와 보낸 나날도 알렉에게 있어서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레너드처럼 한없이 어리광을 받아주는 것과는 또 다른 친구와 보내는 마음 편하고 따뜻한 시간.

    그것이 이제 없다고 생각하면 괴로웠다.

    친구가 어떤 건지 몰랐던 때에는 알지 못했던 괴로움이었다.

    미즈키를 만나서 알렉에게 화가 나 있는지 아닌지 확인해보고 싶은데 겁이 나서 할 수가 없었다.

    이럴 바에야 레너드가 회사에 있는 동안이라도 전화를 했으면 좋았겠지만, 그때는 미즈키를 걱정하기보다 레너드가 쓸쓸함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 일이 훨씬 더 중요했다.

    ―그렇지만…, 날 사랑해주는 사람은 레너드뿐이니까.

    이런 알렉을 레너드만이 태어난 그 순간부터 사랑해주었다.

    소중하게 여겨주었다. 지켜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알렉의 연인이 되어 주었다. 어떻게 그런 사람의 쓸쓸함을 모른 척할 수 있을까.

    그렇기에 이번 여름 내내 레너드하고만 시간을 보낸 것을 알렉은 후회하지 않았다.

    다만 한편으로는 연인과는 다른 ‘친구’의 소중함이 알렉을 괴롭히고 있었다.

    레너드가 알렉에게 유일한 사람이라면, 미즈키는 알렉에게 있어 처음으로 생긴 친구였다.

    “미안해… 미즈키.”

    전화 못 해서, 미안해. 놀러 가지 못해서, 미안해. 결코 미즈키를 무시하려던 것은 아니었지만 알렉에게는 어쩔 수는 일이었다. 천장을 바라보는 녹색 눈동자에 눈물이 고였다.

    레너드가 있으니까 괜찮다고 자신을 다독이면서도 미즈키가 화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울고 싶어졌다.

    인간의 마음이란 어려운 거구나, 하고 알렉은 생각했다.

    너무나 좋아하는 레너드가 연인이 되었으니까 다른 누구에게든 미움을 받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친구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바보라니까…, 난.”

    조금이라도 이 가슴의 통증을 가라앉히려고 미즈키에 대한 생각에 머릿속에서 몰아내려 했다. 대신 레너드를 떠올렸다.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레너드, 알렉을 사랑해주는 레너드.

    ‘귀여운 알렉.’

    레너드는 몇 번이나 그렇게 말해주었다.

    절대 귀여울 리 없는데. 진심을 담아 그렇게 말했다.

    레너드의 눈에는 알렉이 참을 수 없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존재인 것 같았다.

    안타까울 정도로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알렉을 바라보았다.

    레너드에게 있어서 자신은 각별하다.

    특별한 존재로서 사랑받고 있다.

    “레너드, 좋아해…. 빨리, 계속 옆에 있고 싶어….”

    그렇게 되면 괴로운 일도 힘든 일도 전부 사라질 것이다.

    레너드만으로 알렉의 몸도 마음도 채워질 수 있다.

    헤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보고 싶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알렉은 흠칫 놀라서 황급히 눈물을 닦았다.

    “네, 네… 들어오세요.”

    누구일까? 무슨 볼일일까?

    쭈뼛쭈뼛 몸을 일으킨 알렉은 문이 열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그 눈이 커졌다.

    “―알렉, 오랜만이야!”

    “미, 미즈키….”

    조금 쑥스러운 미소를 지은 미즈키가 방으로 들어와 친숙하게 알렉의 옆에 앉아서 말을 걸었다.

    “아까 기숙사로 들어오는 게 창문으로 얼핏 보이길래, 혹시 알렉 아닌가, 했지. 늦게까지 안 돌아와서 걱정했어.”

    “…런던에서 오느라 시간이 걸렸던 것뿐이야. 딱히 걱정할 일은 아니잖아.”

    미즈키의 태도가 방학 전과 다르지 않은 것에 안도하면서도 입에서 나오는 말은 퉁명스러웠다.

    내심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알렉은 휙 고개까지 돌려버렸다.

    미즈키는 늘 있는 일이라 별로 개의치 않는 표정으로 물었다.

    “맞다, 알렉 넌 런던에 있었지! 재미있었어? 런던은 어떤 곳이야? 난 런던을 지나간 적은 있는데 아직 거기서 지내본 적은 없거든.”

    힐끗 곁눈질로 쳐다보자, 미즈키가 흥미진진한 얼굴로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거기에는 제대로 전화도 걸지 않았던 알렉에 대한 분노도, 실망도 담겨 있지 않았다.

    자기도 모르게 알렉은 울컥 해버렸다.

    “뭐야,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을 텐데?”

    “하고 싶은 말?”

    미즈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똑같이 작은 체구에 똑같이 말라깽이인데도 동양적인 사랑스러움이 있는 외모 때문에, 누구든지 무심코 미소를 지을 만큼 귀엽게 보였다.

    홍차색 머리카락은 찰랑찰랑 윤기가 흐르고, 하얀 피부에는 주근깨 하나 없었다. 작지만 예쁜 벚꽃색 입술은―레너드와 그런 관계가 된 지금에서야 느끼는 것이지만―동성이라 해도 무심코 키스를 하고 싶어질 만큼 사랑스러웠다.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에릭을 다들 천사라고 표현하는데 미즈키 또한 천사였다. 동양의 피를 이어받은 만큼 이국적인 천사였다.

    게다가 에릭과 달리 내면까지 진정한 천사였다.

    추한 알렉과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르다.

    알렉은 입술을 삐죽 내밀고 내뱉었다.

    “착한 척하지 마. 난 약속을 어기고 전화도 안 했잖아….”

    “그 일을…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 알렉.”

    미즈키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알렉의 손을 살짝 잡았다.

    알렉은 그 손을 뿌리치지도 못하고 그냥 잡혀 있었다.

    어째서 미즈키가 화내지 않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도… 반성했어….”

    이윽고 미즈키가 조그만 목소리로 얘기하기 시작했다.

    “알렉하고 통화를 할 수가 없어서 끈질기게 전화를 걸었잖아? 왠지 타이밍이 안 맞네, 하고 계속 전화를 걸었던 건데, 그 이야기를 에릭한테 했다가 혼만 났어. 그렇잖아, 난… 저기, 엄마 일도 있고 해서 사람들이 별로 좋게 보지 않으니까. 알렉의 부모님도 아주 엄격하신 편이라고 에릭이 말했어. 그러니까, 전화를 바꿔 주지 않는 건 그게, 알렉의 부모님이 나를…. 알렉의 입장도 좀 생각해보라면서 에릭이 야단을 치더라구. 미안해, 알렉.”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미즈키.”

    도리어 사과를 받고 알렉은 동요했다.

    잘못한 것은 자신인데 미즈키가―거기다 에릭까지―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니, 의외였다.

    자기도 모르게 미즈키를 돌아본 알렉에게 미즈키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런던에서 알렉이 전화를 걸어줘서, 정말 기뻤어!”

    “기뻤다니… 그렇게 퉁명스럽게 말했는데….”

    알렉은 말끝을 흐렸다.

    레너드 앞이어서 별다른 이야기도 못 했고 미즈키가 기분 상했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통화였다.

    그런데 미즈키는 조금도 화가 나지 않았는지 고개를 저었다.

    “친한 형네 집이라고 했잖아? 혹시 그 형이라는 사람의 눈을 피해서 전화를 거는 게 아닐까 해서…. 괜찮았어? 런던은 재미있었어, 알렉?”

    안색을 살피는 표정으로 물어서, 알렉은 한숨을 내쉬었다.

    미즈키는 여전했다. 여전히 태평하고, 다정했다. 그리고 여전히 이런 알렉을 상대로 참을성 있게 대했다.

    미즈키에게 한 손을 잡힌 채 알렉은 중얼거리듯이 대답했다.

    “즐거웠어. 그는―레너드라고 하는데, 그 사람만큼은 옛날부터 나한테 잘해줬기 때문에 친형 같은 사람이야. 전화도 제대로 허락받고 했으니까 괜찮아.”

    “그렇구나. 아… 혹시, 알렉을 런던으로 부른 것도 그 레너드라는 사람?”

    묘한 부분에서 감이 좋은 건지, 아니면 알렉의 가족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기 때문인지 미즈키가 물었다.

    알렉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늘 방학 동안에는 레너드가 도와줘.”

    “그래…. 그럼 런던에서의 여름 방학은 즐거웠겠네. 헤헤, 다행이다.”

    미즈키는 기쁜 표정으로 알렉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알렉이 즐거운 방학을 보냈다는 것이 정말로 기쁜 것 같았다.

    ―얼간이.

    알렉은 마음속으로 비웃었다.

    자신 같은 인간에게까지 다정한 미즈키가 정말로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바보 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알렉 같은 못된 녀석도 용서한 것이다.

    쳇, 하고 생각하면서 알렉은 미즈키에게서 손을 빼냈다.

    하지만 이걸로 대화는 끝이라는 의미처럼 들리지 않도록 반대로 물어보았다.

    “너야말로, 여름 방학에 뭐 했어?”

    “나? 나는 말이지….”

    대답을 하면서 미즈키의 눈썹이 시무룩하게 쳐졌다.

    지긋지긋하다는 한숨을 내쉬는 미즈키를 알렉은 무슨 일인가 싶어서 쳐다보았다.

    하지만 곧 그 이유를 이해했다.

    “여름 내내 수영 연습을 해야만 했어….”

    “그렇군. 너, 앞으로 잘 못 나가지?”

    콕 짚어서 얘기하자, 미즈키가 원망스러운 듯이 알렉에게 눈을 흘겼다.

    “그러는 알렉은 수영할 수 있어?”

    “음… 뭐어, 빠져 죽지 않을 정도로는.”

    미즈키의 반격에 알렉은 부루퉁하게 대답했다.

    피차 운동 신경은 타고나지 못한 두 사람이었다.

    미즈키도 커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여름 방학 전에 있었던 보트 대회에서 물에 빠졌잖아? 그 뒤로 알프레드가 심하게 걱정을 해서…. 그렇지만 어릴 때부터 수영장에는 들어가 본 적이 없는데 그리 간단하게 수영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기운 없이 투덜거리는 소리에 알렉은 쓴웃음을 지었다.

    요양원에서 자랐다는 미즈키는 알렉 이상으로 운동을 싫어했다. 볼멘소리가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어째… 힘든 여름이었던 것 같네.”

    조금은 위로해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그렇게 말하자, 미즈키의 눈이 더욱 원망스러운 빛을 띠었다.

    “알렉은 즐거운 여름 방학이었나 봐. 그렇게 들리는데.”

    “후후… 뭐, 그렇지.”

    “좋겠다….”

    미즈키가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침대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정말로 수영 연습에 넌더리가 난 것 같았다.

    쿡쿡 웃으면서 알렉은 가볍게 잘난 척했다.

    “너도 최소한 빠져 죽지 않을 정도로는 수영을 할 수 있게 되어야지, 미즈키.”

    “넌 수영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간단하게 말하는 거야….”

    얼굴을 두 손으로 덮은 미즈키를 보며 알렉은 코웃음을 쳤다.

    그러면서도 내심 안도하고 있었다.

    예전과 다름없는 미즈키다.

    레너드도 걱정했지만 기우였다.

    미즈키는 변함없이 알렉을 친구로 대해주고 있다.

    알렉은 미즈키의 코를 꽉 꼬집으면서 큰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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