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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거짓된 운명이라 할지라도 Ⅰ(2) (2/11)

비록 거짓된 운명이라 할지라도 Ⅰ(2)

“…잘 먹었습니다.”

중얼거리듯 인사한 알렉은 재빨리 아침 식사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험악한 표정의 아버지가 계신 곳에 오래 머물고 싶지 않았다.

둘째 형도 똑같은 심정이었는지 알렉과 같이 일찌감치 일어섰다. 어머니는 침대에서 아침 식사를 하는 습관이 있기 때문에 이곳엔 없었다.

그러나 서둘러 도망치려던 알렉을 아버지가 불러세웠다.

“알렉, 할 얘기가 있다. 나중에 서재로 오너라.”

“…네, 아버님.”

어제는 얼굴도 보고 싶지 않다고 하셨지만 역시 학교 성적에 대해 야단치시려는 걸까.

무거운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알렉은 기운 없이 식당을 나섰다.

복도에 들어서자 크리스토퍼가 콧방귀를 뀌면서 빈정거렸다.

“정말 넌 우리 집의 수치야, 수치. 감독생으로도 뽑히지 못했다니, 그러면서 잘도 가족들 앞에서 태연하게 얼굴을 들고 있군그래.”

“…미안.”

알렉은 두말없이 사과했다.

할 수만 있다면 알렉도 이 집에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그렌필드에 있을 수만 있다면 계속 기숙사에 있고 싶었다.

그렇지만 방학 기간에는 집으로 돌아와야만 하니 불평한들 알렉으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누군가 시비를 걸면 미안해요, 라고 사과하는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이 못난 자신의 잘못인 것이다.

알렉은 가만히 바닥을 바라보면서 형의 싫은 소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것만이 이 집에서 알렉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대처법이었다.

동생의 어깨를 툭 밀치고 크리스토퍼는 자신의 방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형이 계단을 다 올라갈 때까지 알렉은 고개를 숙인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크리스토퍼의 기척이 사라지고 나서야 온몸의 힘을 빼고 터덜터덜 방으로 돌아갔다.

여름 방학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이런 일이 앞으로 두 달 가까운 기간 동안 계속될 것이라 생각하니 우울해졌다.

침대에 기대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서 알렉은 아버지를 찾아갈 타이밍을 계산했다.

너무 늦어도, 너무 일러도 아버지의 기분을 상하게 할 것이다.

야단을 맞는 것도 잔소리를 듣는 것도 익숙했다. 어릴 때부터 알렉은 부모님의 기대에 전혀 부응하지 못하는 아이였으니까.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텅 비우고 있으면 폭풍은 지나간다. 그것만이 알렉의 유일한 대항 수단이었다.

적절한 타이밍을 계산해 30분가량을 기다린 뒤 아래층의 아버지 서재로 향했다.

살짝 서재 문을 노크했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알렉은 한 번 더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라.”

그제야 대답이 돌아왔다.

온기라고는 느껴지지도 않는 아버지의 목소리는 몹시 사무적이어서, 알렉은 어깨를 움츠리고 문을 열었다.

“빨리 들어와라. 그리고 노크는 좀 더 분명하게 하도록 해. 잘 들리도록 말이야.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느냐.”

“네, 네. 죄송합니다, 아버님.”

알렉은 아버지가 앉아있는 책상 앞으로 쭈뼛쭈뼛 걸어갔다.

아버지의 차가운 눈빛에 완전히 주눅이 들어버렸다.

아버지는 손끝으로 책상을 톡, 톡 두들기고 있었다.

알렉이 거북함을 느끼기 시작할 무렵,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어릴 때부터 너는 늘 나를 실망하게 했지, 알렉. 그때마다 나는 너를 엄하게 꾸짖었지만 너는 아직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것 같구나.”

알렉은 입을 꽉 다물고 어깨를 떨어뜨린 채 아버지의 질책을 견디려 했다.

―이런 일은 익숙했다. 꾸중을 듣는 것은 항상 있었던 일이다.

면역이 되어서, 괜찮다.

그러나 아버지는 성적이나 기숙사에서 임원직을 맡지 못하는 것을 질책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보란 듯이 한숨을 내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리 말해도 성적은 오르지 않고 감독생도 되지 못한 데다, 친구 하나 제대로 고르지 못하다니.”

“…네?”

친구라니 무슨 말씀이지?

한심하고 못마땅하게 여기는 아버지의 표정을 알렉은 조심스레 올려보았다. 아버지가 어떻게 알렉의 교우 관계에 대해서 알고 계시는 건지 어리둥절했다.

집에 돌아온 뒤 한 번도 알렉에게 말을 걸지 않았는데 어떻게 아시는 걸까?

아버지는 벌레 씹은 표정으로 알렉을 쏘아보고 있었다.

“치, 친구를, 고, 고르다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버님.”

용기를 쥐어짜서 알렉은 아버지에게 물었다.

친구라고 하면 미즈키일 텐데 어째서 제대로 친구도 고르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는 걸까.

아버지는 언짢은 얼굴로 미간을 찌푸리고 그렌필드에서 세인트 올즈리 후작가로 보내온 여름 학기 보고서를 내밀었다.

“글램스코트 백작가의 아서 미즈키와 친해졌다고 하더구나?”

“네, 네. 기숙사에서 같은 방을 써서, 그래서….”

말이 도중에 끊겼다.

아버지가 책상을 쾅 내리쳤기 때문이다.

“행실 나쁜 여자의 아들과 왜 친하게 지내는 것이냐! 형인 에드워드나 알프레드라면 또 몰라도 아서 미즈키 따위와 친구가 되다니, 정말이지. 기숙사에서 같은 방을 쓰게 된 것도 한마디 하려다 그만뒀지만, 설마 네가 자신의 입장도 똑바로 이해하지 못한 채 제대로 백작가의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힘든 아이와 친해지다니. 실망했다, 알렉산더. 아무리 어리석은 아들이라 해도 친구 정도는 제대로 선택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는데.”

“하, 하지만, 아버님. 미즈키는 아버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애가 아닙니다. 아주 좋은 아이고, 저한테도 친절하게 대해주는….”

알렉은 열심히 미즈키를 변호했다.

실제로 미즈키와의 관계에서 좋지 않은 태도를 보인 것은 알렉이었다.

미즈키에게는 화풀이 삼아 못된 짓도 했다.

그런 알렉의 손을 놓지 않은 것은 미즈키였다.

미즈키의 참을성 강한 성격 덕분에 자신은 처음으로 친구를 사귈 수 있던 것이다.

미즈키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었다.

아버지의 한쪽 눈썹이 꿈틀 치켜 올라갔다.

“친절하게? 무슨 얼빠진 소리를 하는 게냐! 너한테 필요한 건 친절 따위를 주고받는 소꿉장난 같은 친구가 아니야! 너에게 이득이 되는 질 좋은 친구란 말이다. 다음 학기부터는 1인실을 쓰게 되니 마침 잘 됐구나. 아서 미즈키와는 두 번 다시 어울리지 말거라, 알겠지?”

“하, 하지만….”

“뭐냐?”

아버지의 녹회색 눈동자가 알렉을 싸늘하게 응시하자, 흠칫 놀라서 그 이상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이 알렉의 용기를 시들게 했다.

―미즈키는 잘못이 없…는데….

분명 미즈키는 한때 사교계를 술렁이게 만들었던 행실 나쁜 여성인 쿄코의 아들이기는 하지만, 미즈키 본인에게는 쿄코를 연상시키는 부분을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처음에 그토록 심술을 부렸던 자신을 줄곧 배려하고 신경 써준, 정말로 좋은 녀석인 것이다.

그러나 노기등등한 아버지 앞에서 결국 알렉은 말을 잇지 못하고 맥없이 서재를 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난 겁쟁이야.

―전화할 테니까 우리 집에도 꼭 놀러 와.

모처럼 그렇게 말해줬는데, 이래서야 아버지가 허락해주실 것 같지 않았다.

처음으로 생긴 친구인데….

서재 문을 닫은 것과 동시에 알렉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 눈에는 마침 외출을 하려는 크리스토퍼의 모습이 비쳤다.

아름다운 어머니가 둘째 형에게 상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다음엔 친구를 데려오렴.”

“여기보다 런던에 있는 아파트가 좋겠어요. 알렉 녀석이 있으면 돌이킬 수 없는 창피를 당할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하는 크리스토퍼에게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렇구나. 그 애는 손님이 계시면 평소보다 더 실수를 저질러대니까. 정말 어쩔 수 없는 아이야.”

둘째 형과 함께 알렉의 험담을 하고 나서 어머니는 형을 배웅하고 집 안으로 돌아왔다.

알렉은 그 모습을 주먹을 움켜쥔 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알렉한테는 미즈키와 어울리지 말라고 해놓고, 크리스토퍼에게는 친구를 집으로 데려오라고 한다.

둘 다 아들의 친구였다.

그런데도 부모님은 알렉의 친구가 가진 좋은 점을 조금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

―내가… 모자란 탓이야….

한 방울 흘러내린 눈물을 알렉은 주먹으로 난폭하게 닦아냈다.

자신과 형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가 분했다.

둘 다, 피를 나눈 똑같은 아들인데.

―이런 곳에… 더는 있고 싶지 않아…!

견딜 수가 없었다.

알렉은 몸을 돌려 정원으로 이어지는 커다란 테라스 창문이 있는 방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대로 저택 밖으로 빠져나갔다.

저택이 작게 보이는 위치까지 숨을 헐떡이며 달려간 알렉은 자신만의 비밀 장소인 울창한 수풀로 뛰어들었다.

그곳은 숲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작고, 그렇다고 나무 덤불이라고 하기에는 나무들이 빽빽한 장소였다.

자그마한 시냇물이 수풀 안을 가로지르고, 중간쯤에 크고 납작한 돌이 튀어나온, 조그마한 연못 같은 장소가 있었다. 그곳이 알렉의 비밀 장소였다. 알렉은 차가운 돌 위로 쓰러졌다.

야단맞는 것에는 익숙했다. 모두가 자신을 한심하게 쳐다보는 것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안 된다고 부정당하는 일에도 익숙했다. 그러나 오늘은 괜히 더 마음이 아프고 분했다.

미즈키는 첫 번째 친구였다. 프렙 스쿨 때부터 항상 괴롭힘당하고 외톨이였던 알렉에게 처음으로 생긴 친구였던 것이다.

친구가 생겼다고 말씀드리면 분명 칭찬받을 것이라 기대한 자신이 바보 같았다. 알렉은 콧물을 훌쩍 들이마셨다.

기뻐하기는커녕, 행실 나쁜 여자의 아들과는 어울리지 말라니, 너무 심했다.

알렉의 변호조차 들어주지 않은 것은 지나친 처사였다.

“…나 따위,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

안경을 벗고 코를 훌쩍거리면서 알렉은 가족을 저주했다.

덜떨어진 아들이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처음부터 알렉을 낳지 않았으면 될 일이었다.

우수한 아들만을 원한다면 차라리 어릴 때 죽여줬으면 좋았을걸. 그랬다면 자신도 이렇게 괴롭지 않았을 텐데.

못생긴 얼굴로 태어난 건 자신의 탓이 아니었다.

멍청하게 태어난 것도 결코 알렉의 책임이 아니다.

우수한 형들이나 부모님은 모를 것이다.

애쓰고 또 애써도 성과를 내지 못하는 인간의 비참한 심정을.

노력하고 있었다.

그렇게 보이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알렉 역시 있는 힘껏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형들을 따라가려 해도 따라가지 못했다.

열심히 노력했는데도 지금의 알렉 이상은 될 수 없었다.

가족인데, 어째서 그것을 알아주지 않는 걸까? 어째서 그래도 괜찮다고 말해주지 않는 걸까?

그러긴커녕, 못한다고 계속 나무라기만 했다.

얼굴만 마주하면 항상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매도했다.

알렉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인데.

그래도 미성년자인 동안에는 이 상황을 계속 참아내야만 했다.

그들은 부모이고 알렉은 그런 그들의 아들이었다.

세상의 이목을 신경 쓰는 부모님은 알렉이 일찍 독립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멸시당하면서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날이 오기 전까지는―.

알렉은 비참함에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얼마나 울었을까.

문득, 알렉이 고개를 들었다.

어디선가 동물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말이었다.

―혹시…!

알렉의 가슴이 크게 뛰었다. 이곳은 알렉의 비밀 장소이고 사람이 거의 오지 않는 수풀이었다.

누군가 올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알렉은 기대에 차서 몸을 일으키고 눈물에 젖은 속눈썹을 깜박였다.

이윽고, 시냇물 너머에 사람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봤던, 너무나 좋아하는 그림자였다.

“―역시 여기 있었구나. 기다려도 집에 오지 않아서 분명 여기에서 울고 있겠다 했지.”

한 손에 승마용 채찍을 들고 있는 레너드였다.

한바탕 울고 난 뒤인데도 그 다정하고 달콤한 목소리에 다시 눈물이 맺혔다.

“레너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래. 나한테는 레너드가 있었지. 레너드만은 알렉의 마음을 이해해줄 것이다.

레너드는 말을 풀어놓고 나서 드문드문 놓여 있는 돌다리를 건너 알렉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알렉이 앉아있는 돌 위로 가볍게 올라와 눈물로 젖은 뺨을 상냥하게 쓰다듬었다.

레너드의 말은 훈련이 잘되어있어서 묶지 않아도 얌전히 풀을 뜯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알렉. 그렇게 울면 예쁜 눈이 빨개지잖아.”

놀리듯이 묻는 말에 알렉은 오열을 삼키면서 정말로 좋아하는 레너드에게 매달렸다.

알렉에게 예쁜 부분은 없는데 레너드만은 늘 칭찬하고 귀여워해 준다. 그 안도감에 알렉의 눈시울이 더욱 뜨거워졌다.

“아, 아버님이, 미즈키하고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흑…흑… 처, 처음 생긴 친구였는데… 흐흑.”

흐느껴 울면서 알렉은 레너드에게 호소했다.

그라면 이해해 줄 것이라 생각했다. 레너드는 훌쩍거리는 알렉을 달래듯이 품속에 끌어안고 등을 쓰다듬었다.

“왜 그런 말씀을.”

그렇게 중얼거리는 레너드에게 알렉은 울면서 이야기했다.

“해, 행실 나쁜 여자의 아들이라서 나, 나한테 어울리지 않는대…. 하지만, 어울린다니, 뭐가? 아무도 나와 친구가 되어 주지 않는데… 흑, 흑….”

말을 하면 할수록 점점 자신이 비참해졌다.

자신이 얼마나 쓸모없는 인간인지, 얼마나 따돌림당해 왔는지 그런 일들만 떠오르면서 처음으로 친구가 되어준 미즈키가 더욱 소중하게 여겨졌다.

그것을 금지당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가슴에 매달린 알렉을 레너드는 살며시 안았다. 그리고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들어 올렸다.

위로의 말은 따스했다.

“분명 부모님은 알렉을 걱정하고 계신 거야. 알렉한테는 지금까지 친구가 없었으니까 나쁜 녀석한테 속아서 친구라고 이용당하는 건 아닌지, 그걸 걱정하시는 거지.”

“그치만, 그치만, 미즈키는 좋은 녀석이야. 무지무지 좋은 녀석이라구.”

처음 생긴 친구인데, 레너드까지 오해하게 할 수는 없어서 알렉은 열심히 미즈키를 감쌌다.

레너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어, 알렉. 하지만 두 분은 미즈키에 대해 직접 알고 있는 게 아니잖아? 그러니까 오해를 하시는 거야. 기회를 봐서 천천히 오해를 풀면 돼. 자, 정말로 울음을 그치지 않으면 에메랄드 같은 눈이 다 녹아버리겠어.”

그렇게 말하고 나서 알렉의 안경을 벗기고 양쪽 눈가에 쪽, 쪽 입을 맞추었다.

“…아.”

어릴 때 했던 것과 똑같은 키스인데 알렉의 가슴이 뛰었다.

언제부터인지 알렉에게 키스를 받으면 이런 기분이 드는 일이 많아졌다. 부끄러운 것 같기도 하고 기쁜 것 같기도 한, 묘하고 신기한 감정이었다. 쑥스러워서 고개를 떨구자 레너드의 손가락이 알렉의 턱을 다시 들어 올렸다.

제비꽃 색의 눈동자가 기분 탓인지 조금 절박한 눈빛으로 알렉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째서, 그런 눈으로…?

그렇지만 그 의문을 물어볼 틈도 없이 레너드의 키스가 알렉의 입술에 떨어졌다.

“어?… 으음.”

천천히 입술이 닿고 그대로 살며시 빨아올리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레너드는 가볍게 빨아올리기만 하는 입맞춤을 몇 번이나 알렉에게 했다.

위로하는 듯한, 다정한 키스였다.

그래. 레너드는 눈물을 멎게 하려고 키스한 걸 거야.

어릴 때처럼, 우는 아이를 달래듯이.

―하지만….

알렉은 이미 작은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같은 또래의 학우들보다 성장이 늦되긴 해도 이제 어리다고는 말할 수 없는 나이인 것이다.

그래서일까.

눈물은 멎었지만 그 대신 의도치 않은 열기가 알렉의 몸속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올라왔다.

이것은 뭘까?

―어쩌지? 왠지, 나….

몸 안쪽이 근질근질해서 알렉은 참지 못하고 몸을 비틀었다. 레너드의 키스를 받으면서 전에는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각이었다.

이렇게 조심스럽게, 부드럽게 받는 키스는 오랜만이라서―어릴 때 이후로 처음이라서―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간신히 입술이 떨어지자 알렉은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뺨을 붉히며 바닥만 내려다봤다.

이번에는 그 뺨에 입술이 닿았다.

쿡쿡 웃는 소리가 들렸다.

“어릴 때와 똑같구나. 이렇게 키스를 해주면 알렉은 꼭 울음을 그쳤지. 말 잘 듣는걸.”

온화한 목소리가 귓불을 간질이자 알렉의 등줄기가 오싹하고 떨렸다.

어째선지, 온몸의 힘이 풀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제 어린애가 아니야.”

입술을 삐쭉거리며 간신히 반론했지만, 심장이 부풀어 오르는 기분에 알렉은 어쩔 줄 몰랐다.

허리 안쪽이 욱신거리고 온몸이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

호흡이 뜨거웠다. 왜 이러지, 하고 생각하면서 알렉은 레너드에게 안긴 채 그의 가슴에 기댔다. 레너드의 손이 다정하게 알렉의 어깨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 손이 팔을 쓰다듬으며 내려가 허리에 이르자 온몸이 떠오르는 것 같은 감각이 한층 더 심해졌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봐도 안경이 벗겨져 있는 탓에 레너드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여서, 그것이 왠지 더욱 현실감을 잃게 만들었다.

마치 꿈속에서 일어나는 일인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레너드의 다른 한 손이 알렉의 허벅지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 손이 천천히 기어 올라왔다. 기어 올라오다가 이윽고―.

“―…앗.”

“정말이군. 이제 어린애가 아니야.”

레너드가 의미심장하게 웃는 소리가 귓불에 스쳤다.

“레, 레너드….”

알렉은 당황했다.

허벅지를 기어 올라온 손바닥이 알렉의 가장 약한 부분을 가만히 누르고 있었다.

그제야 비로소, 알렉은 자신의 그곳이 단단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째서, 왜…?!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알렉의 허리를 레너드가 꽉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일인데.

레너드는 놓아주긴커녕, 다리 사이에 올라와 있던 손을 떨어뜨려 알렉의 바지 지퍼를 능숙하게 내리기 시작했다.

“레, 레너드, 왜 그래…? 하, 하지 마…!”

심장이 아플 정도로 빠르게 뛰어서 머릿속이 쿵쿵 울리고 있었다. 자신이 어떻게 된 것인지, 레너드가 뭘 하려는 것인지 알렉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부끄러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것도, 레너드의 눈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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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어….”

“쉬잇. 괜찮아, 알렉. 편하게 해주려는 것뿐이니까.”

달콤한 목소리로 귓불에 속삭였다.

그것은 지금껏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을 정도로 달콤하고, 녹아내릴 만큼 상냥한 목소리였다.

“레너드… 무슨… 앗.”

안고 있던 허리를 가볍게 들어 올리더니 넋이 나가 있는 알렉의 허리에서 속옷과 함께 바지를 끌어내렸다.

녹음이 짙은 수풀이라고는 해도 희미하게 햇살이 새어드는 장소였다. 은은한 햇살 속에서 하반신을 드러낸 알렉은 깜짝 놀라 저항하려 했다. 하지만 허벅지에 걸린 바지 탓에 제대로 도망칠 수가 없었다. 거기다 조금 부풀어 오른 성기를 레너드가 움켜쥐자, 하체의 힘이 빠지고 말았다.

“시, 싫어….”

어째서 이런 일이 생긴 걸까? 왜 레너드가 자신의 바지를 벗기는 걸까? 믿어지지 않는 상황에 숨까지 막혀왔다.

신음하듯 벌어진 입술에 레너드가 쪽 키스를 했다. 그리고 평소와 다름없는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 상태로 있으면 괴롭잖아? 괜찮아, 곧 편하게 해줄게.”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그렇게 말하고 나서, 감촉을 확인하듯이 레너드의 손이 알렉의 것을 위아래로 훑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

레너드가―너무나 좋아하는 레너드가 성기를 만지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알렉은 경악에 휩싸였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쾌감에 녹아내리고 있었다.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처음으로 느끼는 다른 사람의 손길이 너무나도 자극적이어서 의식이 쾌락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등줄기가 움찔움찔 떨리고 성기는 점점 고개를 쳐들었다.

“시…싫어… 앗, 레너드… 싫어!”

부끄럽다. 레너드가 만져서 이렇게 되다니, 너무 부끄러웠다.

이제 만지지 않으면 좋겠다. 그만하길 바랐다.

알렉은 힘겹게 몸을 비틀어서 저항했지만 능숙한 손길에 온몸에 힘이 풀려 도망칠 수가 없었다.

“레너드… 싫어… 싫어.”

어째서 레너드는 이런 짓을 하는 걸까?

영문을 알지 못한 채, 알렉은 작은 소리로 계속 애원했다.

점점 성감이 커져서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레너드의 손은 단순히 주무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기둥을 간질이거나 가끔은 주머니를 건드리기도 하면서 알렉을 몰아붙였다.

알렉은 고개를 흔들어 어떻게든 쾌감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릇된 행동을 하고 있다. 이런 행동은 용서받지 못한다.

그렇지만 레너드의 손길에 몸은 점점 달아오르고 끝에는 이슬이 맺히기 시작했다.

“싫어… 싫어, 나올 것 같아… 나와… 아앗!”

레너드의 손에서 도달하고 싶지도, 사정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부들부들 떨리는 성기 끝을 손바닥이 끈적하게 쓸어 올리자 알렉은 비명을 질렀다.

버틸 수가 없다.

허리가 움찔 떨렸다.

“으읏…!”

결국 알렉은 바르르 떨면서 레너드의 손안에 부끄러운 꿀을 쏟아내고 말았다. 하얀 것이 흘러나와 그 손을 더럽힌다.

“아…앗…! …하아, 하아, 하아.”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자위와는 다른 쾌감이었다.

―이런 게….

다른 사람이 해주는 것이 이렇게나 기분 좋은 일이었다니.

도달한 뒤에도 가시지 않은 여운에 알렉은 넋이 나간 채 숨만 몰아쉬었다.

그러나 곧바로 현실로 돌아왔다.

알렉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얼마나 엄청난 일을 저질러 버린 걸까. 이제 다 틀렸다.

레너드에게 이런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고 말다니. 분명 자신에게 넌더리가 났을 것이다. 너무 부끄러워서 알렉은 그런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위로해주기 위한 키스였는데 몸이 달아올라 버린 자신의 잘못이라고.

가쁜 호흡 속에 수풀을 오가는 작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창피한 마음에 알렉의 온몸이 빨갛게 물들었다.

꼼짝도 하지 못하는 알렉의 하반신을 레너드가 재빠르게 깨끗이 닦았다. 그리고 바지를 다시 입혀주고 눈가에 키스를 했다.

싫어진 건 아닐까? 레너드의 손길에 사정해버린 자신을. 눈물이 가득 맺힌 눈으로 알렉은 레너드를 올려다보았다.

“레너…드….”

그러나 그 눈에 비친 것은 더없이 만족스러워하는 남자의 미소뿐이었다. 그 입술이 가만히 움직였다.

“기분 좋았어, 알렉?”

속삭임을 들으며 알렉은 멍하니 레너드를 바라보았다.

―기분… 좋았냐고…?

레너드는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을 정도로 상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상냥하고, 달콤했다.

화내지 않는다. 기분 나쁘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레너드는―.

손바닥이 알렉의 뺨을 감싸고 엄지손가락이 입술을 살짝 어루만졌다. 알렉은 머릿속이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도망치고 싶을 만큼 견딜 수 없던 수치심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레너드의 제비꽃 색 눈동자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유혹하듯이 다시 한 번 레너드가 알렉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지자, 그 손가락에 이끌리듯 알렉은 눈을 감았다.

자신도 어째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레너드가 원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으음.”

다시, 한번 레너드가 살짝 입술을 빨아올렸다.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 없는 듯한 키스였다. 입술이 떨어지자 레너드는 알렉을 꼭 끌어안고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기분 좋았어, 알렉?”

머릿속이 멍했다. 온몸이 감미롭게 욱신거리고 있었다.

알렉은 무언가에 조종당하는 것처럼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렇게 하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처럼 여겨졌다.

―왜냐면… 그래. 레너드가… 했으니까….

그 말이 모든 것의 대답인 것만 같았다.

부끄러웠고, 음란한 모습을 보인 것은 싫었지만 레너드가 해준 일이었다.

레너드가 바랐으니까―.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알렉을 레너드의 팔이 더욱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그리고 칭찬하듯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둘만의 비밀이야.”

현기증이 났다.

지금 한 것은 잘못된 행동이지만, 이건 두 사람만의 비밀.

레너드와 둘이서 하는 것이라면 어떤 부끄러운 짓이라도 좋았다. 음란한 알렉도 용서해 주는 레너드.

“…응.”

알렉은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너드와 아주 특별한 것을 나누었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

다시 한 번 턱을 잡고 레너드가 입을 맞추자, 알렉의 몸에서 더욱 힘이 빠졌다.

입술을 마주 댄 채 레너드가 속삭였다.

“내일, 다시 여기로 올 수 있지?”

눈앞에 있는 아름다운 제비꽃 색 눈동자를 알렉은 빤히 바라보았다.

눈동자 속에 희미한 열기가 보였다. 그것은 알렉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것과 똑같은 열기였다.

“…응. 올게.”

레너드에게라면 무슨 짓을 당해도 상관없다.

꼭 끌어안긴 채, 알렉은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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