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거짓된 운명이라 할지라도 Ⅰ(1)
워튼관 앞에서는 차례대로 늘어선 자동차가 정차했다가 학생을 태우고 떠나고 있었다. 방학이 될 때마다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알렉은 그 모습을 울적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알렉산더 빅터 스테이플턴. 그것이 알렉의 정식 이름이었다. 지나치게 거창해서 구역질이 나는 이름이다.
고대 영웅 알렉산더 대왕의 이름에 빅터(승리)까지 더해지다니. 알렉이 자신의 이름대로 우수한 소년이었다면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알렉의 성적은 그와 정반대였다.
외모도 잃은 점수를 만회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푸석푸석한 빨간 머리에 주근깨 가득한 희멀건 한 피부, 빼빼 말라서 비실거리는―더 정확히 말하자면 전형적인 왕따 같은―볼품없는 외모.
그 겉모습대로, 알렉은 프렙 스쿨(주: 일류 대학으로 진학하는 명문 사립고)시절부터 따돌림당해 왔다.
지금 옆에 있는 아서 미즈키 피츠월터가 오기 전까지는.
그때, 앞으로 다가온 차를 보고 미즈키의 표정이 긴장한 듯 살짝 굳어졌다.
일본식 미들 네임을 가진 미즈키는 아버지가 영국 백작, 어머니가 일본인이라는 조금 복잡한 가정환경에서 자랐다.
“그럼 갈게, 알렉. 전화할 테니까 우리 집에도 꼭 놀러 와.”
“내키면.”
알렉은 퉁명스럽게 손을 저으며 미즈키를 밖으로 밀어냈다.
집에 돌아가는데 저렇게 긴장한 얼굴을 하다니, 미즈키의 아버지는 아직도 그의 어머니와 있었던 일을 신경 쓰고 있는 걸까?
하긴, 미즈키는 오랜 시간 아버지와 떨어져서 살았으니 아버지인 글램스코트 백작과 조금 어색한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알렉처럼 이혼도, 재혼도 하지 않은 부부 사이에서 태어났어도 미움받는 아이 또한 있는 법이다.
미즈키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면서 긴장하고 있는 것처럼, 알렉도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집인데도 돌아갈 때마다 기분이 우울해졌다.
여름 방학은 두 달에 가까운 기간이다.
길고, 음울한 두 달이 될 것이다.
본가에서 보낸 차를 발견한 알렉은 한숨을 내쉰 뒤, 짐을 들고 워튼관 계단을 내려갔다.
본가에서의 지긋지긋한 나날이 시작되었다.
늘 그렇듯이 이번 학기에도 알렉의 성적은 중하위권이었고, 스포츠에서도 눈에 띄는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
물론 감독생으로도 뽑히지 못했다.
분명히 부모님뿐만 아니라 형들에게도 바보 취급당하고 놀림 받을 것이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알렉은 그런 위치에 있는 소년이었다.
그런 가족들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알렉은 마음에 두꺼운 갑옷을 걸치고 차에 올라탔다.
링컨셔에 있는 세인트 올즈리 후작가의 매너 하우스(주: 귀족이나 영주들이 거주하는 호화로운 저택)에 도착할 때까지 알렉은 차 안에서 흔들리며 가끔 꾸벅꾸벅 졸았다.
주위는 대부분 세인트 올즈리 후작가의 토지였다.
인접한 랭스턴 백작가와는 서로 광대한 땅이 가로막고 있어서 ‘이웃’이기는 하지만 반대편 저택은 보이지 않았다.
문득 랭스턴 백작가의 이웃 형을 떠올리고 알렉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랭스턴 백작가에는 백작과 부인 헬레나 사이에 아들이 한 명 있다. 바로 알렉보다 연상인 레너드다.
불행하게도 헬레나 부부는 레너드가 9살 때 사고로 사망했고, 레너드는 어린 시절을 대부인 세인트 올즈리 후작 아래에서 보내야 했다.
알렉이 태어난 것은 레너드가 후작가에 온 지 1년 남짓 되었을 무렵이었다.
그래서인지 레너드는 알렉을 친동생처럼 귀여워하며 동생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형들을 대신해 지나칠 정도로 정성껏 보살폈다.
본가에 억지로 돌아가야만 하는 알렉의 유일한 위안은 레너드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 뿐이었다.
주말마다 런던에서 돌아오는 부모님은 형들에 비해 한참 뒤떨어지는 막내아들의 손을 놓은 지 오래여서, 알렉에게는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맏형인 오거스터스는 오델리 자작으로서 아버지와는 별개로 저택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이쪽에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물론 맏형은 아무 쓸모 없는 막내 따위 안중에도 없었다.
그래도 큰형은 만날 일이 없으니 그나마 나았다.
우울함에 한몫하는 것은 둘째 형 크리스토퍼였다.
여름 방학이 시작되면 둘째 형도 본가로 돌아올 것이다.
그러면 둘째 형은 알렉의 성적이며, 감독생으로 뽑히지 못한 것에 대해 또다시 온갖 야유와 조롱을 퍼부을 것이 틀림없었다.
둘째 형은 덜떨어진 동생을 보면 부아가 치미는 모양이었다.
가족들의 태도가 그러하니, 고용인들도 알렉을 대할 때는 깔보는 기색이 역력했다.
저택의 어디에도 알렉이 있을 곳은 없었다.
마음 편히 있을 수 있는 곳은 레너드가 있는 곳뿐이고, 레너드만이 구제불능인 알렉을 받아들여 주었다.
레너드만이 알렉의 한심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알렉은 차 안에서는 보이지 않는 레너드의 저택을 애틋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빨리―사실은 가족보다 먼저―레너드를 만나고 싶었다.
레너드도 알렉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래. 가방을 놓고 바로 레너드한테 인사를 하러 가야지.
레너드는 틀림없이 알렉이 돌아오는 날을 알고 있을 것이다.
방학이 되면 늘 그렇게 알렉을 맞이해 주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레너드에게 보고하고 싶은 일도 있었다.
미즈키에 대한 얘기였다.
본인에게는 쑥스러워서 도저히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지만, 미즈키는 알렉에게 생긴 첫 번째 친구였다.
미즈키 덕분에 에릭이나 윌 같은 친구도 생겼다.
알렉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음이 잘 맞는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고 같이 밥 먹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친구가 생기자 지난번 집에 돌아올 때보다 마음이 조금은 가벼웠다.
언제나 괴롭힘당한 이야기만 했지만 이번만큼은 레너드에게 밝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번에는 알렉에게 친구가 생긴 것을 아버지나 어머니도 기뻐하실지 모른다. 형도 친구가 생겼다고 하면 조금은 알렉을 다시 볼지 모를 일이었다.
그런 기대를 안고 알렉은 저택 앞에 멈춰선 차에서 내렸다.
“어서 오십시오, 알렉산더 님.”
일견 정중한 태도로 집사가 알렉을 맞이했다.
알렉이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세인트 올즈리 후작가에서 일하고 있는 중년의 집사였다.
알렉은 우물쭈물 고개를 끄덕였다.
“다, 다녀왔어. 아버님이랑 어머님은 런던에서 돌아오셨어?”
“조금 전 돌아오셔서 차를 들고 계십니다.”
“그래.”
알렉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떨구었다.
누구보다 먼저 레너드를 만나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았다.
부모님이 돌아와 계신다면 다른 일보다 먼저 혼나러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먼저 인사를 드리러 가시지요, 알렉산더 님.”
“알고 있어.”
화풀이 삼아 알렉은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다른 고용인이 이미 알렉의 짐을 방으로 옮기고 있었다.
이래서야, 곧바로 부모님께 가는 수밖에 없다. 알렉은 마지못해 부모님이 쉬고 계신 티 룸으로 향했다.
세인트 올즈리 후작가는 아주 오래전 선조가 시작한 무역 사업이 지금까지 호조를 이어오고 있어서 몰락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고 있었다.
저택 내부도 부지런히 손질한 덕택에 닳아빠진 카펫이나 색 바랜 커튼 같은 것은 한 장도 없었다. 하지만 생활이 아무리 풍족하다 한들 알렉에게는 이곳이 지옥과 다를 바 없었다.
어디에 있어도 싸늘하고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문 앞에서 한숨을 내쉰 알렉은 어두운 표정으로 노크했다.
“들어오너라.”
아버지의 낮고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오자 알렉은 머뭇거리며 문을 열었다.
“다녀왔습니다, 아버님, 어머님.”
그러나 들어온 것이 알렉이라는 것을 알자 부모님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외면하며 인사를 받지 않았다.
“저기….”
알렉은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물러가거라.”
아버지의 목소리가 차갑게 울렸다.
“아버님의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란다, 알렉산더. 오거스터스는 네 나이에 워튼관의 기숙사장을 맡았었고, 크리스토퍼 역시 감독생으로 뽑혔었어. 그런데 너란 애는 감독생으로 뽑히긴커녕 성적까지 엉망이니. 나도 너한테 실망이 크구나.”
그렇게 말하고 나서 어머니 역시 알렉을 외면해버렸다.
찻잔을 들고 있는 완벽하게 손질된 가늘고 긴 손가락을 알렉은 비참한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서 나가거라. 얼굴만 봐도 언짢아지니까.”
“…네. 죄송합니다, 아버님, 어머님.”
알렉은 풀죽은 얼굴로 부모님 앞에서 물러났다.
친구가 생겼다고 얘기해보고 싶었다. 그러면 못난 막내아들을 조금이라도 다시 봐주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부모님은 그럴 틈도 주시지 않았다.
알렉의 성적이나 학교에서의 생활은 직접 부모님에게 보고가 올라가니 야단맞는 것은 각오하고 있었다.
하지만 부모님은 알렉에게 화를 낼 가치도 없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혼나는 것보다 훨씬 비참한 일이었다.
알렉은 2층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가기 위해 올라가던 계단에서 둘째 형 크리스토퍼와 마주치고 말았다.
벌써 집에 돌아와 있었던 것이다.
알렉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부모님에 이어 형도 싫은 소리를 할 게 분명했다.
예상대로 크리스토퍼는 콧방귀를 뀌면서 알렉에게 야유를 쏟아부었다.
“임원으로도 뽑히지 못했다면서, 알렉? 너 같은 멍청이가 동생이라니 창피해서 누가 알게 될까 봐 겁난다.”
지나쳐 가면서 가차 없이 내뱉었다.
알렉은 입술을 깨물고 형의 비아냥을 듣고만 있었다.
대꾸하면 다섯 배는 더 심하게 몰아붙이는 데다 애초에 어떻게 받아쳐야 좋을지도 알 수 없었다.
맏형 오거스터스만큼은 아니지만, 크리스토퍼도 충분히 우수한 성적을 유지하고 있었다. 두 사람 다 알렉은 발뒤꿈치에도 미치지 못하는 잘난 형들이다.
그 형들이 봤을 때, 자신은 얼마나 한심하고 미련해 보일까.
게다가 머리까지 나쁘니 더 답답할 것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알렉은 늘 가만히 듣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고 자신의 방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갑갑하기 짝이 없는 연미복을 벗고 사복으로 갈아입었다.
체크무늬 반소매 셔츠의 옷자락을 바지 위로 내놓고 싶었지만, 단정하지 못한 옷차림이 눈에 띄기라도 하면 또다시 부모님의 심기만 거스르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알렉은 셔츠 자락을 깔끔하게 바지 안으로 집어넣고 살그머니 자신의 방을 나섰다.
집사의 눈을 피해 현관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가 헛간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자신의 자전거를 꺼내 훌쩍 올라탔다.
집에는 1초도 더 있고 싶지 않았다.
상쾌한 여름 바람에 알렉의 푸석푸석한 빨간 머리칼이 날렸다.
희멀건 한 피부는 여간해서는 햇볕에 그을리지 않았고, 대신 여기저기 주근깨가 생겼다.
특히 얼굴에는 보기 싫을 만큼 주근깨가 잔뜩 흩어져 있었다.
알렉의 외모 중 그나마 예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맑은 녹색인 눈동자뿐이었다.
그렇지만 그 몇 안 되는 장점도 두꺼운 안경에 가려져 있어 알렉 자신조차 그 아름다움을 알지 못했다.
큰형은 금빛 머리칼에 진한 녹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둘째 형은 어두운 갈색 머리칼에 금색이 감도는 녹회색 눈동자가 아름다웠다. 그들의 만분의 일이라도 닮아서 자신도 조금쯤은 봐줄 만한 얼굴이었다면―.
매일 같이 그렇게 기도했지만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따돌림당하고, 고용인들도 뒤에서 ‘후작가의 오점’이라고 수군대는 알렉을 귀여워 해준 것은 레너드 형뿐이었다.
레너드만은 알렉이 실수해도 화내지 않았고, 공부를 못해도 바보라고 놀리지 않았다.
지금은 성인이 되어 이웃인 랭스턴 백작 저택에서 지내고 있는 형을 만나기 위해 알렉은 자전거를 타고 열심히 달렸다. 간신히 도착했을 때는 온 힘을 다해 페달을 밟은 탓인지 숨이 찼다.
현관 앞에 자전거를 세우고 무거운 노커를 두드리자 곧바로 랭스턴 백작가의 집사가 나왔다.
후작가의 집사와 마찬가지로 이곳 집사도 무뚝뚝했지만 알렉을 멸시하는 태도는 보이지 않았다.
레너드가 멸시하지 않으니 이곳 고용인들도 알렉에게 예의를 갖춰 대하는 것이다.
자신이 사는 저택의 고용인들과는 천지 차이였다.
알렉은 집사의 안내를 받으며 레너드가 있는 서재로 향했다.
“어서 와, 알렉.”
레너드 올딩턴이 미소를 지으며 알렉을 맞이했다. 예상대로 알렉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레너드, 다녀왔어.”
너무나도 좋아하는 그에게 달려가서 꼭 끌어안았다.
레너드도 알렉을 소중히 안아주었다.
“조금 키가 큰 것 같은데? 알렉. 만날 때마다 크는구나.”
즐거운 듯이 웃으면서 레너드가 알렉을 내려다봤다.
주근깨투성이인 알렉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고 얼굴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한 번 고개를 끄덕이더니 어릴 때처럼 알렉의 이마에 키스했다.
“그렌필드는 어때? 이젠 지낼 만해?”
조금은 걱정스러운 말투로 다정하게 묻는다.
알렉이 줄곧 괴롭힘당하고 있는 것을 레너드만은 알고 있었다.
알렉은 제일 좋아하는 형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레너드의 아름다운 제비꽃 색 눈동자를 쳐다보면 알렉은 언제나 가슴이 두근거렸다.
너무 아름답고 상냥해서 못생긴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것이다.
알렉이 조금 고개를 떨구자, 이제 어린애도 아닌데 어르듯 품에 꼭 안고 불안을 달래는 말을 들려준다.
“괜찮아. 알렉은 정말 착해. 난 알렉을 정말 좋아해.”
마음을 위로하는 속삭임에 알렉의 가슴이 벅차올랐다.
어떻게 레너드는 항상 자신이 가장 바라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 걸까? 어쩜 이리 듣고 싶은 말을 해주는 걸까?
차가운 부모님이나 친형들보다 레너드가 훨씬 ‘가족’에 가까웠다.
그 말에 안심한 알렉은 다른 누구의 앞에서도 보인 적 없는 어리광 섞인 목소리로 하소연했다.
“…성적도 나쁘고, 감독생도 되지 못해서 또 아버님과 어머님을 실망하게 해 드렸어. 얼굴도 보기 싫으니 당장 나가라고 말씀하셨다구.”
“하지만 수업을 빠지거나 비겁한 행동을 한 건 아니잖아?”
레너드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레너드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알렉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면 그걸로 충분해. 여름 학기 수업은 쉰 거야?”
알렉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과외활동은 어땠어? 분명, 여름 학기에는 해마다 보트 레이스를 했었는데.”
“노력은 했지만 도중에 상대 보트에 부딪혀서 친구가 강에 빠져버렸어.”
“친구?”
알렉의 말에 레너드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제야 미즈키를 떠올린 알렉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어두운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번에는 좋은 소식도 있던 것이다.
“맞아! 친구가 생겼어. 미즈키라는 애야.”
“친구가… 그렇구나. 미즈키라면 분명 알렉과 같은 방을 쓰는 애였지.”
레너드의 뺨에 천천히 미소가 떠올랐다.
사랑스러운 듯 자신을 향한 제비꽃 색 눈동자를 알렉은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레너드가 기뻐하고 있다.
드디어, 너무나 좋아하는 형을 기쁘게 해줄 이야기가 생긴 것이다.
―다행이다.
레너드가 이끄는 대로 서재에 놓인 소파에 나란히 앉은 알렉은 들뜬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처음엔 못되게 굴었어…. 그런데도 미즈키가 나를 용서해줘서 지난 학기부터 조금씩 얘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이번 학기도 친절하게 대해줘서…. 그 밖에도 친구… 아니, 같이 다니는 멤버가 생겼어.”
“그 애들은 친구가 아니야?”
레너드의 의문에 알렉은 조금 시선을 떨어뜨리고 작게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 같이 다니긴 하지만… 자신이 없어…. 레너드하고는 잘 얘기할 수 있는데 학교에선 자꾸만 삐딱하게 굴게 되거든. 미즈키가 있어서 같이 끼워주는 것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어.”
미즈키도 그저 알렉을 동정하고 있는 것뿐일지 모른다.
그런 불안이 고개를 쳐들자 알렉은 더욱 자신이 없어졌다.
자신은 다른 사람이 좋아할 만한 녀석이 아니다.
따돌림당하는 게 더 익숙했고, 미즈키에게도 여러 가지로 못된 짓을 했다.
“괜찮아.”
레너드가 알렉의 머리카락에 키스했다.
알렉은 불안 가득한 눈빛으로 레너드를 올려다보았다.
그 눈에 비친 것은 다정한 레너드의 미소였다. 그리고 그 손이 알렉의 뺨을 감싸듯이 어루만졌다.
“괜찮아. 진짜 알렉은 아주 착한 사람이니까. 분명 그 애들도 알고 있을 거야. 그러니까 친하게 지내주는 걸 테고. 알렉, 자신을 가져.”
기뻐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그렇게 생각해주는 것은 분명 레너드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껏 그랬으니까.
알렉은 작은 목소리로 반론했다.
“그치만, 친구 같은 거 계속 없었는걸…. 나한테 친절하게 대해주는 사람도 레너드밖에 없었고….”
풀이 죽어서 어깨를 떨구자, 레너드가 다시 알렉의 뺨을 따스한 두 손으로 감쌌다.
살며시 알렉의 고개를 들어 올려 가만히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알렉과 달리 차분한 갈색 머리칼은 윤기를 띠고 있다. 푸석푸석한 빨간 머리와는 다르다.
레너드도 그렌필드의 워튼관을 졸업했다.
현재 총대표인 알프레드 피츠월터와 마찬가지로 첫 번째 해에 기숙사장을 맡았었다.
두 번째 해에는 학생 총대표로도 뽑혔었다.
무엇을 해도 실패만 하는 알렉과는 정반대였다.
귀여워서 견딜 수가 없다는 듯이 레너드는 알렉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 지었다.
“알렉은 내 귀여운 동생이잖아? 갓 태어난 알렉은 아주 작고, 엄청난 울보였어. 하지만 신기하게도 내가 안아주면 바로 울음을 그쳐서 세인트 올즈리의 부모님도 쓴웃음을 짓곤 하셨지. 꼭 내가 알렉의 친부모 같다면서.”
“나, 그렇게 심한 울보였어?”
“그래. 유모가 돌봐주는 것도 싫어했는데 내가 돌봐주면 바로 웃었어. 부모님이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되던 무렵이었지만, 작은 알렉이 열심히 매달리는 모습이 사랑스러워서 나는 외로움도 잊을 수 있었지. 그러니까, 몇 살이 되든지 넌 나의 귀여운 동생이야, 알렉.”
그렇게 말하고 레너드가 한 번 더 살며시 알렉을 끌어안았다.
그대로 등을 쓰다듬으며 알렉에게 마법을 걸듯 말했다.
“괜찮아, 넌 착한 사람이니까, 미즈키도 다른 아이들도 너의 좋은 점을 분명히 알고 친구가 된 거야. 잘됐구나, 알렉. 한꺼번에 많은 친구가 생겨서. 정말로, 잘됐어.”
“그렇게 생각해, 레너드? 미즈키도 윌도 에릭도, 정말로 나와 친구가 되어준 거라고 생각해?”
“그렇고말고. 너만큼 귀여운 사람은 없으니까, 당연하지.”
다정한 말에 알렉은 안심한 듯 눈을 감았다.
사실은 부모님에게도 친구가 생긴 일을 이야기하고 잘됐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여전히 잘하는 건 하나 없지만 그래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받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괜찮다.
레너드가 이렇게 알아주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레너드의 가슴에 뺨을 묻고 알렉은 행복한 기분으로 눈을 감았다. 알렉은 눈치채지 못했다.
잘됐다고 속삭이는 레너드의 눈이 순간적으로 차갑게 빛난 것을. 끌어안은 팔에 희미하게 힘이 들어간 것을.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알렉은 너무나 좋아하는 형에게 응석 부리며 부모님과 형제들에게서 받은 상처를 치유 받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