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strange & beautiful.
“내가 여기서 내보내 주면, 날 다시는 만나주지 않을 거지?”
이후가 한 일에 어떤 이유와 사정이 있다고 해도, 혹 그를 이해할 수 있다고 해도, 용서는 힘들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그를 미워하지만은 않는다. 지한은 자신의 마음을 정확하지는 않지만 어렴풋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후에 대한 감정이 어떻든 그가 한 일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을 속이고 괴롭히며 마음을 가지고 놀았다.
“응? 그럴 거지?”
재촉하는 듯한 음성에 지한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생각해 봐도 답은 같았다. 이후를 원망하거나 미워하지는 않지만 역시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에게 가장 괴로운 일은 자신을 보지 못하는 일인가 보다. 그렇다고 해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해야 했다.
“그러니까 딱 하루만. 하루만 더 참아.”
하루. 지한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천천히 체념하고 있었다. 하루를 더한다고 해도 달라질 일은 없었다. 사실 이대로 여기 갇힌 채 모든 것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 것에 비하면 약속을 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 일인지도. 안도하는 마음과 달리 마음이 무겁고 괴롭다. 마주하고 있는 표정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알아. 하루도 참기 힘들겠지. 하지만 사실 여기서 당신과 죽어도 좋아. 그렇지만 당신은 싫겠지?”
죽어선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이젠 지한도 자신을 쉽게 포기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를 보고 깨달았다. 자신의 죽음이, 별것 아닌 것 같은 내 죽음이 타인에겐 어떤 영향을 끼칠지. 보지 못하니 알 수 없는 것이다. 적어도 나를 존중하고 좋아해줬던 사람들을 위해선 의미 없는 죽음은 안 될 일이었다.
“그래도 난 후회하지 않아.”
후회가 가득한 괴로운 얼굴로 그는 담담히 말한다. 마른 뺨에 비장한 웃음이 스쳤다. 지한은 지금 이 순간 무언가 끝나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끝을 억지로 붙잡을 수 없다는 것도. 그 사실을 이후역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당신은 좋았던 적이 없었겠지. 늘 괴롭고 힘들었겠지. 그런데 난 그런 당신이라도 볼 수 있어서 기뻤어. 착각할 수 있어서 좋았어.”
말해 줄 걸 그랬나. 사실은 늘 괴로웠던 것만은 아니었다고. 좋았던 일도, 기억하고 싶던 일도 있었다고. 덕분에 동생을 미워했던 자신을 버릴 수 있었다고. 그것만은 감사하고 있다고. 하지만 지한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입술을 천천히 눌러왔기 때문이었다. 길고 고요한 키스였다. 잠이 들듯 서서히 스며드는 입맞춤.
눈을 떴을 때 지한은 자유를 얻었다. 두 손은 더 이상 묶여 있지 않았고 문을 열려있으며 자신을 붙잡는 손길도 없었다. 두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문을 열고 나오자 두 눈을 찔러드는 햇빛이 괴로웠지만 이내 눈을 뜨고 탁 트인 세상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이 잠시 거리에 선채로 방황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눈부신 태양아래 조용히 눈물을 떨어뜨렸다.
*
고작 3일. 지한이 이후의 집에서 보낸 것은 고작 3일이었다. 하지만 그 삼일의 부재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직장에서도 한바탕 소동이 있었고, 집에서도 자신과 연락이 되지 않아 노심초사 했다고 한다. 또한 연인인 민혜 역시 많은 걱정을 했다. 그녀는 실종신고라도 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고백했다.
“대체 어디서 뭘 했던 거야?”
직장에서, 부모님에게도 들었던 질문이지만 지한은 누구에게도 뚜렷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저 모두들에게 죄송하다는 사과만을 전했을 뿐이었다. 그 밖에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시간으로 치자면 짧은 기간이었지만 수습을 하는 일은 제법 힘겨웠다. 일단 회사를 비운 것은 치명적이었다. 시말서 제출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이후에도 회사에서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물론이었다. 하지만 수군대는 말과 시선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지한은 그럴수록 더욱 일에 열중했다. 어차피 그런 종류의 관심은 시간이 지나면 잊혀 지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사람사이의 관계는 회복되기 힘든 법이었다. 민혜와의 결혼을 한 달여 앞둔 참이었지만 마음은 어느 때보다 멀어져 있었다. 이제까지 늘 이해하고 웃어주던 민혜도 인내심이 바닥난 걸까. 묵묵히 결혼 준비를 하고는 있었지만 전보다 말이 줄었고 웃음도 줄었다. 가끔씩 그날의 일을 캐묻기도 했다.
“정말 말 안 해 줄 거야?”
가만히 잘 지내다가도 발작적으로 그 같은 질문을 하곤 했다. 밑도 끝도 없었다. 그때마다 지한은 지한대로 묵묵부답으로 답했고, 그녀는 무슨 말을 하던 중이건, 혹은 식사를 하던 중이건 신경질을 내고는 일어나 가버렸다. 그러곤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전화를 하고 만났다. 평화롭고 따듯하던 일상이 일그러져 버렸다. 자신으로 인해서.
나는 그녀마저 병들게 한 게 아닐까. 지한은 죄책감과 자괴감 사이에서 괴롭고 또 괴로워해야했다.
보통 때는 잘 찾지 않던 집에서 그토록 다급하게 연락을 해왔던 것은 다름 아닌 어머니의 입원 때문이었다.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다고. 아버지는 처음엔 연락이 안 되는 아들에게 화를 낸 모양이었지만 해도 해도 연락이 너무 안 되니 후에는 민혜와 같이 걱정을 한 모양이었다. 뒤늦게 병실을 찾으려고 했지만 이미 퇴원을 했다고 집에나 들르란 말을 들었을 뿐이었다.
그 여자도 아플 때가 있구나. 너무나 당연한 것에 놀라고 말았다. 자신에겐 그토록 차가웠지만 그렇다고 모두에게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학벌 외엔 좋을 것이라고 없는 아버지를 좇아 모두가 손가락질 하는 결혼을 했던 것도 그렇고, 아들의 죽음에 식음을 전폐하며 결국 병까지 얻은 것을 보면 그녀도 충분히 온기를 지닌 인간임이 분명했다. 그 당연한 사실을 지금에야 알았다. 어렸을 때엔 몰랐다 쳐도 어른이 되서도 자신은 실상 그녀를 달리 보려 하지 않았었다.
게다가 그녀도 이제는 더 이상 젊고 아름답지 않았다. 어린 시절 처음 본 어머니는 화려하고 기품 있는 미인이었다. 그 아름다움을 천사 같다고 생각했던 자신. 그리고 그 아름다움이 날카롭게 변해 어린 마음을 찢어 놓았던 기억. 그때가 그러고 보니 언제였더라. 처음 보았던 그녀의 차갑고 도도하던 아름다움은 이제 없었다.
몇 번의 태풍이 지난 후, 폭염이 서서히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여름이 끝나고 가을에 들어서고 있는 중이었다. 지한은 뒤늦게 집을 찾았다. 어머니는 여전히 몸이 좋지 않다고 했다. 퇴원하고도 한 달이 지났는데, 여전히 회복을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생각보다 심각한 걸까. 아무래 사이가 좋지 않은 의붓아들이라 해도 걱정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지한은 더 이상 누군가의 죽음을 보고 싶지 않았다.
“오랜만이네요.”
평소 늘 무표정하던 가정부가 오늘은 유난할 정도로 반기는 표정이었다. 확실히 오랜만이긴 했지만 늘 사무적이던 사람이었다. 보통 다른 집의 고용인들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어머니가 직접 고른 사람답게 점잖고 말수가 적었다. 확실히 사교성은 없어 친해지기 힘든 사람이었지만 손끝이 야무져 일을 잘 했다. 그래서 벌써 이 집에서 일한 것이 횟수로만 10년을 넘기고 있는 아주머니였다.
“어머니는 계십니까?”
“네. 요즘엔 외출을 안 하세요. 아니 못하세요.”
“많이 안 좋으신가 봐요.”
“예. 안 좋으세요.”
아주머니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하나의 숨김도 없이, 그렇다고 호들갑스럽지도 않게. 그래서 지한은 그것이 거짓이 아님을 더욱 확실히 알았다. 집안의 분위기가 묘하게 무겁다. 지한이 늘 느끼던 마음의 무게가 아니라 공기 때문이었다.
“왔니?”
아버지가 밖에서 들리는 소리를 듣고 나왔다. 아픈 사람은 어머니라고 들었는데 그의 모습이야 말로 환자 같았다. 많이 여위었고 나이 들어 보였다. 아니면 원래 이런 모습이었든가. 지한은 아버지의 모습이 어쩐지 낯설고 멀게 느껴졌다. 이렇게 똑바로 바라본 적이 얼마만인가 싶었다. 어머니의 눈빛을 외면하고 대화가 단절되면서 자연스럽게 아버지와도 소원해 졌다.
“네 어머니는 약 먹고 낮잠 자는 중이다.”
“그래요?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마침 가정부가 차를 내와 두 사람은 거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부자간이었다.
“간다고 할 줄 알았는데, 고맙구나.”
아버지가 어색한 표정을 감추며 뒤늦게 꺼낸 말에 지한은 잠시 멍했다. 부모자식간이면 당연한 일을 감사받아야 하다니. 겉과 속이 다른 이 집의 실상을 확인 받은 것 같았다. 물론 이 모든 비극에 지한의 잘못이 없지만은 않았다. 부모를 원망했었지만 사실 자신도 노력하지 않았기는 마찬가지였다.
“네가 결혼하면 우린 시골로 거처를 옮길까 싶다.”
뜻밖의 얘기였다. 갑자기 웬 시골? 혹 집안에 자신이 모르는 안 좋은 일이라도 생겼는가 했지만 그것은 아니었다. 전적으로 어머니의 건강문제 때문이었다.
“많이 안 좋으신가 보죠?”
“그래. 네 어머니 많이 안 좋아. 수술 받고 요양할 생각이다. 그래도 좀 힘들더구나.”
예상했지만 이 정도 인줄은 몰랐다. 지한은 새삼 충격을 받았다. 사실 동생의 죽음 때보다 더한 충격이었다. 어머니가 돌연 결혼을 서둘렀던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었는데, 그때 이미 자신의 몸 상태를 알고 있었던 걸까. 그러나 그녀는 그런 순간까지도 내색하지 않았다. 여전히 차갑고 냉랭했다. 지한은 자신의 놀람을 애써 숨겼다.
“그럼 아버지 일은 어쩌실 생각이세요?”
“아무래도 욕심인가 싶다. 차라리 이런 식으로라도 그만두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그는 아마도 많은 생각 후에 모든 계획을 정리한 모양이었다. 아버지의 얼굴, 많은 고민이 지난 자리에 주름이 늘어있었다. 그래도 그의 얼굴은 전보다 편안해 보였다. 조금이지만.
“생각해 보니 내가 너무 욕심만 부리고 살아왔더구나.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했지. 너도, 그리고 네 모친도.”
이런 아버지는 처음이었다. 그는 의도적으로 돌아가신 지한의 모친에 대해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죄책감을 느낀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한은 그런 점을 많이 서운해 하고 원망했다.
“지금 이 사람도 나 때문에 많이 힘들었단다. 그래, 모두가 나 때문에 고통스러웠던 것 같다. 다 내 욕심 때문에.”
이해하려고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사실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은 여전히 변하지 않는다. 그는 비겁했다. 자신의 전 부인에게도, 아들에게도. 그리고 지금의 부인에게도. 그는 여러 사람의 불행을 외면해왔다.
“그러니까 이 사람, 너무 미워하지만은 말아줬으면 좋겠다. 좋게 지내는 건 어렵겠지만·····.”
지한은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싫다는 말도, 혹은 노력하겠다는 약속도. 이미 그 모든 것이 소용없게 생각되었다. 분명 얼마 전까지 자신은 의붓어머니를 증오해왔다. 그리고 그녀의 소생인 동생도 미워했다. 그래야 한다는 강박으로 수년을 살아왔다. 하지만 지금, 그 모든 게 소용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움도 증오도, 그리고 그 옛날 사랑받고 싶어 했던 자신의 어린 바람도 이제는 모두 낡은 시간 속에 존재할 뿐이었다.
결국 지한은 어머니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야 했다. 요즘엔 낮잠이 잦고 길어졌다고 아버지가 곤란한 듯 말했다.
“사실 난 당신에게는 별로 미안한 게 없습니다.”
잠든 어머니를 바라보던 지한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서로 눈을 마주하고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얘기였다. 차라리 그녀가 잠들어 있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들을 리 없었지만, 혹 듣는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잠든 얼굴이 미묘하게 경직되는 듯싶었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곧 조용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어머니에게 받은 미움을 고스란히 그 아이에게 돌려줬던 건 잘못했던 거겠죠. 그건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도 후회하길 바랍니다. 늦기 전에 후회했으면……. 적어도 그녀에게는 자신보다는 많은 기회가 있었다. 그는 잠든 어머니를 잠시 내려다 보다 등을 돌려 나왔다.
*
늦은 시간 퇴근은 일상적인 일이었으므로, 사람 없는 주차장이나 텅 빈 거리를 보며 두려움을 느낄 이유는 없었다. 항상 지나는 곳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그 평범한 일상의 부분에 낯선 느낌이 끼어들었다. 이상한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지한은 차키를 꺼내들던 손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착각이라기엔 리얼한 감각이었다.
‘설마…….’
묘한 느낌이 더욱 강해지면서 지한은 한 사람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떠오른 생각을 애써 지웠다. 그럴 리가 없었다. 물론 별다른 약속이 되어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스스로 ‘마지막’ 이라고 말했었다. 지한은 그 말을 믿고 싶었다. 다시, 무언가 시작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지한은 차에 올라 백미러를 살펴보곤 차를 출발시켰다. 그간에 많을 일을 겪어 심신이 약해진 탓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불안이 의심을 낳는 것이다. 이젠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정말 아무 일도……. 하지만 그런 생각을 몇 번이고 떠올려도 안심이 되지 않는다. 불안대신 구멍 난 허무가 마음속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늦네.”
불쑥 등 뒤에서 다가온 목소리에 안 그래도 곤두서 있던 온 신경이 놀라고 말았다. 놀란 표정으로 돌아보자 더 놀란 얼굴의 민혜가 서 있었다.
“왜 그렇게 놀래? 내가 더 놀랐다.”
“그러는 너야말로 왜 어두운데 서 있고 그래?”
분명 목소리가 다른데도 다른 사람일거라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지우려고 해도 자꾸만 떠오르던 남자. 그 남자가 아닐까 싶었다. 심장이 멈출 것 같던 충격이 여전히 가라앉지 않았다. 지한의 여전히 질린 얼굴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던 민혜는 지극히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그녀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했다.
“서 있던 게 아니고 나오던 길이었어. 기다리는데 하도 안 오길래. 퇴근 하는 길이야?”
“응. 그런데 그냥 갈 거야?”
“가려던 길이라고 했잖아.”
“자고 가지 그래?”
“됐어. 나 내일 일 있어서 들어가 봐야해.”
“그렇구나. 미안하게 되었네. 전화하지.”
주변이 어두워 잘 몰랐다. 한발자국 다가가자 그녀의 얼굴이 뚜렷이 보였다. 그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불신과 불안의 표정. 그녀는 내내 그곳에서 자신을 그렇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 일 때문에 늦은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그녀가 어떤 의심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체 했다. 아는 체 한다고 달라질 일도 없었다. 차라리 지나가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며칠 동안 사라졌던 일 이후로 그녀는 유난히 민감해져 있었다. 달이 지나고 계절이 변하고 있었지만 민혜의 표정은 여전히 무더운 계절과 비슷했다. 짜증과 혼란이 서며 있었다.
“아냐. 아무것도. 피곤 할 텐데 들어가서 쉬어.”
돌아서던 얼굴이 억지로 웃음을 머금고 있었지만 그것은 진짜 웃음이 아니었다. 성의 없는 웃음을 지으며 돌아서 휑하니 바람을 일으키며 자신의 차를 주차한 곳으로 걸어갔다. 돌아서 손을 흔드는 일도 없이. 지한의 마음속에도 바람이 불었다. 미지근하고 뜨거운 바람이었다.
돌아서니 여전히 아무것도 없는 어둠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목뒤를 핥는 듯한 축축한 시선은 대체 왜 자꾸만 신경에 들러붙는 걸까. 불쾌함을 떨치려 애쓰며 걸음을 옮겼다.
집으로 들어온 지한은 샤워도 잊고, 옷을 벗지도 않은 채 거실 바닥에 쓰러지듯 누웠다. 이상한 시선에 시달리면 묵직한 피로가 어깨를 눌러 왔다. 어쩌면 그것은 단순한 착각일지도 몰랐다.
그는 ‘마지막’ 이라던 스스로의 말을 지키려는 듯 전화도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전화번호를 바꾸고 비밀번호를 바꾸었지만, 그러지 않았어도 그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리 시원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 질척한 기분은 무엇일까. 빠져나왔다고 생각했는데 더 깊은 수렁에 발을 들인 기분이었다. 괴롭다. 아무것도 자신을 괴롭히지 않는데도.
지한은 손끝에서 멀지 않은 곳에 떨어져 있던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최근에 오디오를 샀다. 음악을 듣지도 않던 사람이 별일이라며 민혜는 말했었다. 자신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충동적으로 구입을 하고 말았다. 그리나 듣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그 남자의 음악. 이것을 들으려고 산 것이다. 우습게도. 어쩌면 그의 존재를 기다리는 것은 자신인지도 모른다. 어이없는 일이었다. 말도 안 되는 감정이었다. 그러나 부정할 수도 없게 그 감정은 강렬하며 분명했다. 지한은 그의 음악을 들으며 눈을 감았다.
*
지한은 오랜만에 우섭과 혜석을 만나기로 했다. 두 사람이 갑자기 지한의 집에 쳐들어왔을 때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이번 만남에는 여러 목적이 있었다. 일단 그간 신세진 일도 있었고-특히 혜석에게는 직접적인 도움을 받았다-전할 물건도 있었다.
“난 소식 없길래 안 하는 줄 알았다.”
우섭은 자신 앞에 내밀어진 청첩장을 슬쩍 열어보더니 무뚝뚝한 표정으로 농담을 건넸다. 짓궂은 농담이었지만 당연히 나쁜 뜻은 없었다. 약혼 후에 바로 했어야 했을 것을 중간에 많은 일들이 있었기 때문에 몇 달이나 미뤄진 것이었다.
“초치는 소리 하지 말고 고맙다고나 해라. 너 같은 놈한테도 청첩장 주는 친구가 있다니.”
“뭐야?”
두 사람은 여전했다. 여전히 마음이 잘 맞는 듯 했고 즐거워보였다. 가끔 투덕거리는 모습이 나쁘다기보다 보기가 좋았다. 지한은 그들을 보며 소리 없이 웃었다. 순수한 마음에서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농담을 할 여유도 없이 살고 있었다. 이제 자신을 괴롭히던 존재는 어디에도 없건만 그는 즐겁지가 않았다.
“그런데 신랑 얼굴이 많이 상했네. 무슨 걱정이 남아있어?”
웃고 떠드는 사이에도 혜석은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상태를 걱정해 왔다. 만나는 것은 오랜만이지만 중간에 안부전화는 받았다. 그는 별 말 없이 괜찮냐는 질문을 해왔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음을 눈치 챈 듯한 통화였다.
“걱정이 왜 없겠냐, 이상한 인간이 들러붙고.”
그것은 우섭이 앞서한 장난스러운 말과는 달리 확실히 쓴 맛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무엇을 말하는지, 누구를 말하는 건지는 지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때 제대로 된 설명을 하지 못한 탓인지 그는 여전히 이후에게 감정이 나쁜 모양이었다. 하지만 지한에게는 이미 끝난 일이었다. 이젠 걱정할 것도 없는 일. 그랬으면 바라는 일이었다.
“이젠 괜찮아. 그런 일 없을 거야.”
단정하는 말투에 놀란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의 표정은 의심으로 변했다. 어떤 의심인지는 구체적으로 모르겠지만, 의심하면서도 다소 안심한 것 같기도 했다.
“정말이냐?”
“응.”
“그럼 이건 미친개 떨어진 기념으로 쏘는 거냐?”
“어이구. 자기는 뭐 성격이 좋은 것처럼 말하네. 그치?”
혜석이 눈치 좋게 끼어들었지만 우섭은 취한 것인지 아니면 그간 참아왔던 감정 때문인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지한은 뭐라 대꾸해야 할지 몰라 우섭의 말을 가만히 듣기만 했다.
“야, 감히 누굴 비교 하냐. 적어도 난 인간이잖아. 말로 해서 통하는 사람이라구.”
기분이 이상했다. 속에서 무언가 튀어오를 것 같은 기분. 억울하고 안타까운 기분. 그런 기분들이 갑자기 목구멍 끝까지 올라왔다. 지한은 소주를 들이켰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진정시킬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급기야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이 밖으로 흘러나왔다.
“좀 이상한 사람이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은 아니었어.”
그를 끔찍하고 불쾌한 존재라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감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두려우면서도 다가가고 싶었고 물러나고 싶으면서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가끔 보이는 불안한 얼굴과 이상한 욕망을 나중에는 안쓰러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우섭이 믿기지 않는 표정을 하는 것도 당연했다. 자신이 왜 이렇게 변한 것일까. 스스로도 놀라울 지경이었다.
“너 내가 누굴 말하는지 알긴 아는 거지?”
“그래. 잘 알아.”
“아는데 지금 이러는 거냐.”
“말이 심한 것 같아서 그래. 알고 보면 안 된 사람이라구.”
하지만 지한은 이제 그의 외로움을 잘 안다. 그의 깊고 절절한 외로움이 자신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지한은 그가 그런 짓을 한 것은 상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지한이 가족의 사랑에 목말라 결국 누군가를 미워하는 쪽을 택했듯이. 이런 감정이 동정인지, 동질감인지 정확히 모르겠다. 떠올리면 그저 아플 뿐이었다.
“야. 얘 취했나 보다.”
우섭이 화를 내듯 뱉어난 말은 차가웠다. 지한은 말없이 시선을 피했다. 실수를 한 건지 모르겠지만 어쩐지 가만히 있기가 힘들었다.
“취한 건 너야. 이 주정뱅이야.”
“안 취했다. 꼴랑 이거 먹고 취했겠냐. 내가.”
혜석은 어색한 공기를 자연스럽게 와해시켰다. 하지만 그 후에도 지한은 우섭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는 어쩐지 자신을 비난 하는 것도 같았고, 그저 이해할 수 없어 혼란스러워하는 것도 같았다. 사실 그런 반응이 당연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는 정상이었다. 이상한 것은 자신.
고작 두 달 전에는 아예 모르던 사람이었다. 알게 된 이유도 불쾌했고, 그를 만나 겪은 일은 악몽이었다. 그런 사람을 지한이 나서서 변호한 것이었다. 스스로도 기가 막혔다.
“그런데, 정말 끝난 게 맞아?”
우섭이 화장실에 간 사이 혜석이 진지한 얼굴로 물어왔다. 좀 전까지 열심히 웃고 떠들던 얼굴은 어디 갔는가 싶을 정도로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내내 저런 마음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아, 참견하려는 게 아니고.”
지한은 고개를 저었다. 참견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런 마음을 털어놓을 때가 없어서 답답했던 참이었다. 자신을 괴롭히던 동생의 존재는 거짓이고, 이후의 연극이 끝나 자신은 해방 되었다. 하지만 있었던 일을 없던 일로 할 수 없듯이, 지한은 예전의 자신으로 쉽게 돌아올 수 없었다.
“나도 잘 모르겠다. 끝난 건지 아닌 건지.”
혜석도 더는 아무 말도 묻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모르는 것을 알고 있는 그도 자신의 일에는 이렇다 할 해답을 내려줄 수 없는 모양이었다. 애초에 다른 사람에게 기대 할 수 없는 문제였다. 자신이 결론을 내야 할일이었다.
“결혼은 도피처가 아닐 거야.”
헤어지기 전 혜석은 지한에게 받은 청첩장을 흔들어 보이며 이 같은 말을 했다. 자신의 마음을 정확히 읽은 듯한 말이었다.
지한도 그와 같은 의심을 하고 있었다. 과연 이렇게 결혼해도 되는 걸까. 이런 마음으로 이런 자신이 그녀와 함께 해도 되는 걸까. 적어도 마음의 정리를 끝낼 시간이라도 필요한지 모른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생각도 들었다. 어서 빨리 지금의 생활을 벗고 새로운 생활로 옮겨가면, 그러면 지금의 고민도 감정들도 사라지지 않을까. 그런 얄팍한 기대가 그를 점점 어리석게 만들고 있었다.
늦지 않은 시간에 헤어졌다. 아무래도 어색한 분위기 탓이었다. 지한은 조금도 취하지 않은 채 거리로 나왔다. 택시를 잡아야 한다는 생각도 잊고 걸음을 옮겼다. 대낮처럼 환한 거리와 귀를 스치는 음악, 사람들의 웃음소리. 그 눈부신 빛의 점멸, 스치는 거리의 풍경 속에서 그는 불현듯 낯익은 느낌을 감지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소름이 끼치도록 선명한 눈빛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 돌아보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 이게 착각일까.
“김이후.”
자신도 모르게 그 이름을 조용히 불러보곤 스스로 놀라 어깨를 굳혔다. 실수했다. 이건 실수였다. 지한은 그렇게 생각하며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빠른 걸음에 지나던 사람과 어깨를 부딪쳤다. 사과도 잊고 더욱 빨리 걸었다. 아니 뛰었다. 누군가 쫓아오는 기분이었다. 아니, 쫓아오고 있었다. 말도 안 돼. 그는 부정하면서도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놔.”
끊어질 듯한 목소리로 지한은 등 뒤에 다가온 남자를 향해 말했다. 그에게 잡힌 손을 노려보며 말했다. 차마 얼굴을 바라볼 자신은 없었다. 이런 식으로 마주칠 줄은 몰랐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일상적이기 짝이 없는 곳에서.
“당신이 나를 불렀잖아.”
주변의 다른 소리는 모두 소거된 채로 그의 목소리가 명확하게 들려왔다. 전보다 마르고 거칠고 하지만 힘이 있는 목소리였다. 지한은 그의 말뜻을 몰라서, 아니 알기 때문에 혼란스러웠다. 분명 그의 이름을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긴 했다.
“내가, 내가 언제…….”
“불렀어.”
확신에 찬 목소리. 그는 늘 망설임이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연극을 하고 있던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고. 무엇이 그를 이렇게 당당하게 만드는지 궁금할 정도로.
몸을 돌리고 그의 얼굴을 확인한 후에야 지한은 그 이유를 어렴풋 알았다. 이후는 물러날 데 없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였나. 그래서 그렇게 뻔뻔한 듯 당당한 듯 어떤 비난에도 애원에도 끄덕하지 않았던 건가. 뒤로든, 앞으로든 물러날 곳이 없어 절박하기 때문에. 그런 이유로 그는 오히려 담대했다.
“그건 착각이야. 네가 지금도 제 정신이 아니니까 헛소리를 들어도 당연한 거잖아?”
지한은 잠시의 감상을 끝내고 붙잡힌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그를 한껏 밀쳐내듯 말했다.
“마지막이라고 했잖아. 그런데 지금 뭐하는 짓이야? 이러는 거 미친 짓인 거 몰라? 제정신이라면 이런 짓은 안 해!”
섬뜩한 분노가 꿈틀거리며 타올랐다. 지한은 있는 대로 그것을 쏟아냈다. 그러나 쏟아내면 쏟아낼 수록 마음을 태우는 심화는 더욱 크게 타올랐다. 어떻게든 이 뜨거움을 토해내고 싶은데 토하지 못해, 끝내 안을 태우고 있었다. 안의 화와 달리 밖으로 내보내는 것은 냉랭한 말과 한한 독이었다. 그것은 정작 상대를 상처 입히지 않았다.
“그래. 난 미쳤어. 그런데 당신은 지금 멀쩡한 줄 알아?”
오히려 그는 자신이 돌아본 것이 기쁜 듯 웃었다. 그리고 말도 안 되는 걱정까지 해주었다.
“내가 뭘! 헛소리 그만하고 꺼져. 자꾸만 이러면 신고하겠어.”
“난 그냥 당신을 보고 있었을 뿐인데?”
단순한 의이함이 그의 웃음 위로 떠올랐다. 지한은 자신의 표정에 감정을 숨기지 않고 소리쳤다.
“쳐다보지도 마. 네가 쳐다만 봐도 살이 썩는 것 같아. 내 얼굴을 뜯어 버리고 싶다구!”
그대로 돌아서 걸었다. 그의 표정을 살필 틈도 없었다. 여전히 따라붙는 시선은 알고 있었지만 멈출 이유는 없었다. 지한은 그가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겨우 견디고 있는 자신의 곁을 맴도는 이유가 무엇인지, 앞에 얼굴을 보이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더 괴롭길 원하는 걸까, 그걸로는 만족하지 못했나.
몸이 휘청하는 느낌과 함께 그가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어깨를 뒤로 빼려했지만 이미 그전에 그가 달려들었다. 입술이 잡아 뜯기는 기분이었다. 동시에 머릿속을 있는 대로 할퀴고 지나간다. 눈을 뜬 채로 차에 치인 기분이었다. 그런 적은 없지만 그런 기분이 아닐까 싶었다.
겨우 그를 밀쳐 냈을 때 주변의 시선이 모두 자신들에게 쏠려 있었다. 밤이긴 했지만 주변엔 사람이 많았다. 길거리 한복판. 하기야 그런 걸 신경 쓸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그러나 허무로 가득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큰일 났네. 보기만 해도 살이 썩을 것 같다며?”
지한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뺨을 올려붙였다. 맥없이 휘청이는 몸을 향해 또 주먹을 휘둘렀다. 그렇다고 분이 풀릴 것 같진 않지만 이 갑갑한 감정에서 벗어날 리는 없지만 지한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힘이 빠진 지한이 그의 곁에 똑같이 주저앉았다. 구경을 하던 사람들은 이내 흥미를 잃고 흩어진 후였다. 이후는 맞아서 부어오른 뺨으로, 더러운 바닥에 누워 웃고 있었다. 정작 아픈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지한이었다. 쏟아 부어 남아있지 않을 거라 생각한 감정은 여전히 안에서 끓어오르고 있었다. 이제는 입 밖으로 내뱉기도 힘들었다. 몸을 일으키던 지한의 입술사이로 지친 음성이 흘러나왔다.
“부탁이야. 날 그냥 내버려 둬.”
“나는 당신을 괴롭히려는 게 아냐.”
“그럼 대체 왜 이래?”
“그냥 보고 싶었어. 그 뿐이야.”
지한은 그에게서 태연히 흘러나온 말에 경직되었다.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 건데, 그러면 마치. 마치 나를 정말로······.
“당신을 사랑해.”
지한은 그를 내버려 두고, 그의 고백을 버려두고 돌아섰다. 그의 목소리가 자꾸만 귀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말도 안 돼. 이런 게 사랑일리가. 지한은 눈앞에서 보고 있는 지독한 감정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말을 부정하면서도 자신은 동요한다. 그의 고백에 그의 키스에 그의 눈빛에 소름 돋는 충격을 받는다. 무엇보다도 두려운 것은 이런 자신이었다.
*
한번 모습을 보인 후로 그의 집요한 추적은 더욱 노골적으로 변했다. 전화를 받지 않자 회사에까지 매일같이 전화를 해왔다. 집근처에서 모습을 보이는 일도 종종 있었다.
지한은 보면서도 보이지 않는 거처럼 행동했다. 그전처럼 독기를 내보이진 않았다. 그 한 번으로 소용없는 일임을 철저히 깨달았으므로, 오히려 그는 그런 반응을 원하는지도 모를 일이라고 생각했다. 철저히 무시로 일관하기로 했다.
“우연이네.”
지금도 그런 상황 중 하나였다. 기다리고 있던 게 뻔한 사람이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해왔다. 지한은 그를 없는 사람처럼 지나쳤다.
“밤공기가 제법 선선해 졌어. 안 그래?”
그는 지한이 어떤 반응을 보이듯 자연스럽게 옆으로 따라 붙었다. 지한은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묵묵히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따라오는 느낌이 선명했지만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는 한술 더 떠 태평한 제안을 해오기 까지 했다.
“근처에서 술이나 한잔 하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하지만 지한은 문이 닫힐 때까지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긴 한숨 후에 지한은 옆을 돌아보았다. 그의 웃는 얼굴은 어쩐지 희극적이었다. 그는 아직도 관람객 연극을 계속하는 걸까.
“이런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아?”
며칠 만에 그를 마주보았다. 그래도 그의 마음은 저만치 물러나 그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지한이 느끼는 두려움은 폭력이나 감금에 대한 기억 때문이 아닌 그의 끈질긴 태도에 대한 진력냄이었다.
“오랜만이네.”
“뭐가?”
“목소리 들려주는 거. 난 당신이 벙어리가 되었는 줄 알았어.”
지한은 보이지 않도록 가볍게 진저리 쳤다. 그는 기쁜 듯 웃었다. 지한은 그를 보고 있으면 늘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나 다음 달에 결혼할 거야. 알고 있어?”
이후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하지만 눈빛만은 서서히 온도를 낮춰갔다. 대번 서늘해진 표정으로 그는 말했다.
“정말 결혼 할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
“가만히 있지 않으면 어쩔 건데.”
지한 역시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그 여자를 죽여 버릴 거야.”
한 치도 망설임 없는 협박, 아닌 단언이었다. 그 남자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그렇게 할 것이었다. 하지만 지한은 똑같이 냉정한 얼굴로 쏘아 붙여주었다.
“그럼 난 널 죽여 버릴 거야.”
지한은 멈춰있던 엘리베이터 문을 열고 그 안에 들어갔다. 그리고 화석이 되어 서 있는 남자를 내버려 두고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기 직전 그가 뛰어들듯 들어와 자신을 끌어안았다. 벽에 몸을 부딪치며 쏟아지는 무게를 그대로 몸으로 견뎌냈다. 지한은 그를 밀쳐내지 않았다. 하지만 결코 허락하지도 않았다.
“결혼 하지 마.”
“할 거야. 당신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야.”
“제발 그러지마. 싫어. 그 여자하고 결혼하면 나 죽어 버릴 거야.”
숨이 넘어갈 것 같은, 흐느낌이 섞인 목소리였다. 간절하고 처절한 바람이 느껴졌다. 하지만 지한은 그를 한 번에 밀쳐냈다. 더 이상 그에게 흔들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누구보다도 자신을 위해서.
“죽고 싶으면 죽어버려! 난 말리지 않아. 하지만 난 그 여자랑 같이 잘 살 거라구. 아주 행복하게.”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가 올라갔다. 지한은 아무도 없는 공간에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웃음은 이내 울먹임으로 변했다. 차가운 벽에 기댄 채 얼굴을 가렸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난 괜찮아. 울고 있는 자신을 스스로 다독였다. 거기에 안아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이 정도 물건 쉽게 나오지 않아요. 역세권에 백화점도 멀지 않아요. 없는 게 없어요. 보시면 조망도 참 좋죠. 집도 집이지만 주변 환경도 중요하잖아요?”
지한은 쉴 새 없이 떠드는 공인중개사의 말에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자신이 대충 들어도 상관없었다. 싹싹한 민혜가 알아서 체크하고 있을 것이었다.
확실히 경치는 좋았다. 마음에 들었다. 아파트 단지 내에는 잘 정리된 공원이 있었고 그 뒤에는 강이 흐르고 있었다. 지은 지 얼마 안 된 아파트라 집은 비어있었고 온통 새것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새것의 냄새를 진하게 풍겼다. 둘이 살기엔 충분한 평수였다. 사실 지한이 보기엔 좀 넓다 싶었지만 그녀의 집에서는 지금의 평수도 좁지 않겠냐며 걱정을 해왔었다.
하긴, 태생부터가 다른 공주님이었다. 그녀는. 다행히도 공주님은 집의 넓이로 행복의 크기를 정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는 지한이 부담스러워하자 서운해 하는 부모님을 설득해 적당한 평수의 아파트를 둘러보기로 합의했다.
“이 집 어때?”
베란다에 서서 창밖 풍경을 바라보고 있던 지한은 다가온 그녀의 목소리를 반색하며 웃었다.
“마음에 들어.”
“그래도 다른 집도 좀 둘러보자. 우리의 첫 집인데 쉽게 결정할 순 없잖아.”
“난 이 집이 좋아.”
민혜는 조금 놀라고 있던 참이었다. 집 같은 건 알아서 하라고 할 줄 알았던 지한이 시간을 내 따라온 것도 그랬지만 이렇게 명확하게 자신의 의견을 낼 줄 몰랐다.
“그래? 꽤 마음에 들었나봐.”
잠깐 공인중개사의 속사포 같은 말 틈에서 벗어났던 그녀는 휴식을 끝내고 다시 거실로 돌아갔다. 무슨 할 얘기가 그렇게 많은 걸까. 그래도 자신 혼자 상대하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르겠다. 아직도 떠들고 있는 두 여자를 스윽 바라보며 지한은 다시 베란다 난간에 몸을 기댔다. 미지근한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바람결에 일상의 소란스러운 소리들이 들려왔다. 아이들과 산책 나온 젊은 부부. 그들의 유모차. 울고 있는 아이와 엄마. 좋은 꿈을 꾸고 있는 기분이었다. 담배를 피우려고 입에 물었다가 장소를 생각해 내고 불을 붙이지 않았다.
오랜만에 민혜의 기분이 좋아보였다. 지한의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그녀의 영향이기도 하고, 오랜만의 외출이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새 집, 새로운 생활. 모든 게 잘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강박에 가까운 기분이 가슴에 떠올랐다.
“배고프지? 저 아줌마 친절하긴 한데 너무 말이 많더라구.”
아파트 세 곳을 둘러보고서야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진력났다는 듯 얼굴을 찡그려 보였지만, 그녀는 이내 환하게 웃었다.
“뭐 먹을래? 오늘은 내가 쏠게.”
“차라리 너희 집에 갈까.”
“그럼 오랜만에 실력발휘한번 해볼까.”
“기대할게.”
지금의 평화로운 공기, 옆에서 기분 좋게 재잘거리는 여자의 웃음소리. 그런 것들도 모두 꿈의 일부일까. 오랜만에 찾아온 평화가 낯설고 감격스럽다. 이대로 모든 것이 계속되길 바라고 있었지만, 꿈을 깨운 것은 전화벨 소리였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전화를 끊고도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지한을 이상하게 여긴 민혜가 그를 향해 물었다. 질문에 대한 답은 느리고 그리고 어색하게 돌아왔다.
“아, 아냐. 아무것도.”
다급하게 돌아온 표정이 웃었지만 어쩐지 신경이 쓰였다. 무슨 전화인지 몰라도 그는 통화 내내 네, 아니오. 두 단어로만 일관 했다. 전화를 받던 표정역시 단조로웠다. 단조롭고 차가운 표정, 그리고 전화를 끊은 후엔 넋을 놓고 당분간 멍하니 서 있었다.
“그래. 아니라면 다행이지 뭐.”
아무 일도 아니란 것은 거짓말일 게 뻔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뻔한 거짓에 속는 척 했다.
낯선 번호에 생각 없이 받았다. 물론 목소리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전화를 건 사람은 병원의 간호사였다.
-김이후씨가 입원하셨는데요. 보호자와는 연락이 불통이고……. 친한 사이라고 하던데, 지금 병원에 와주실수 있으세요?
병원이란 것은 사실인지 모르겠지만 무슨 수작인지 모르겠다. 어디를 어떻게 다쳐서 저런 요구를 하는지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남자가 다치든 말든 무슨 상관이람. 자신은 그에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괜한 동정으로 돌아보아선 안 된다. 돌아보는 순간 또 덜미를 잡힐게 뻔했다.
‘죽고 싶으면 죽어버려.’
그러나 그 때, 며칠 전 자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별 생각 없이 내뱉은 말. 어떻게든 그를 쫓아내기 위해 필사적이었던 것뿐이다. 그런 말에 정말로 반응했을 리는 없다. 어쩌다가 어떻게 다쳤는지라도 물어볼걸 그랬나. 아연한 정신으론 그럴 생각도 들지 않았었다. 무슨 말을 하는 지도 모르고 기계적으로 대답만 했을 뿐이었다. 거기다 눈앞엔 민혜의 의문스러운 눈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뭐 만들어 줄까. 내가 못하는 거 빼곤 다 해줄게. 나 그래도 요즘 레퍼토리 늘었다?”
“민혜야.”
“응?”
차가 그녀의 집 근처에 진입할 즈음. 그는 생각을 끝내고 결심을 굳혔다. 후회하는 일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 이미 기분 좋은 꿈은 끝이 났다.
“나 갑자기 볼 일이 생각났어. 그러니까……가봐야 할 것 같아.”
어렵게 얘기를 꺼내는 사이 차를 세웠다. 민혜의 눈이 자신을 오랫동안 응시했다. 딱히 화를 내는 것 같진 않지만 편안한 표정도 아니었다. 지한은 재촉하지 않고 대답을 기다렸다.
“혹시 아까 전화 때문이야?”
“어. 아는 사람이 아프대.”
“어떤 아는 사람?”
“…….”
“알았어. 할 수 없지, 뭐.”
친구라고 말해도 되었을 텐데 그 순간 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을까. 확실히 그녀는 기분이 상해 있었다. 어떤 부분에서 기분이 나빴는지는 알 수 없지만 좋은 분위기를 완전히 망쳐버렸다.
입원할 정도의 위중한 상태는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이후는 응급실에서 잠들어 있었다. 전화를 했던 간호사인지는 모르겠지만 이후를 찾아온 지한을 보고 조금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무래도 이후는 병원에서도 달가운 손님이 아닌 모양이었다.
“가벼운 접촉사고였어요. 다리가 좀 삔 것 외엔 타박상이 전부입니다. 깨어나면 퇴원하시면 되요.”
“사고라면 교통사고입니까?”
교통사고인데 이정도이면 경미한 것이 아닐까.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그 점만은 다행스러웠다. 간호사의 태도는 한결같았다. 그녀는 지한이 그리 반갑지 않은 듯 했고, 거기다 이후를 빨리 데려가 주길 원하는 눈치였다.
“저도 잘은 모르겠는데, 경찰 말을 들어보니 이분이 뛰어드셨다고 하네요. 운전자는 먼저 가셨구요. 아무래도 운전자 잘못은 아닌 모양이더라구요.”
뛰어들었다니. 밤도 아닌 한낮에? 지한은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어느새 저만치 달아나버린 간호사를 다시 부를 수 없었다. 사실 그녀도 사고를 목격한 사람은 아니니 그 정도가 아는 것의 전부일 것이었다. 지한은 편안한 얼굴로 잠든 남자를 바라보았다. 어이없는 사고를 쳐놓고 참 속도 편하게 잠들어 있었다.
지한은 어이가 없어서 웃음부터 나왔다. 그는 자신의 말대로 정말 죽으려고 했던 모양이었다. 진짜로 죽고 싶었든 아니든 시도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달리는 차에 뛰어들다니 참 무모한 사람이었다. 그의 무모함과 이상한 성격을 많이 겪었음에도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무엇을 그를 이렇게 만드는 걸까. 그는 정말 자신을 사랑해서 이런 짓을 하는 걸까.
잠든 남자의 곁에 앉아 지한은 말없이 기다렸다. 그가 깨어날 때까지는 기다려 주고 싶었다. 왜인지 모르게 오늘은 그러고 싶었다. 우울한 눈빛으로 그의 이마에 난 상처를 바라보던 그는 손을 뻗어 그것을 어루만졌다. 정말 죽어버렸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아찔했다. 이정도로 끝나서 정말 다행스러웠다. 아무리 그의 존재가 버겁고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해도, 죽어서 정말 다시는 볼 수 없게 되는 일을 원한 게 아니었다. 그런 것은 싫었다. 무서웠다.
“대체, 넌 왜 날 이렇게 무섭게 만드는 거야?”
두려움의 종류란 여러 가지 있겠으나 지한에게 두려움이란 ‘돌이킬 수 없음’ 이었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나려는 순간,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려는 자신. 그런 순간의 돌이킬 수 없음. 자신은 여전히 그 두려움 위에 있었다.
“꿈인가.”
눈을 뜬 그가 아직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한은 성의 없이 대답하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피했다. 자신의 생각이나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깨어난 그의 시선과 마주쳐 안도했던 잠깐의 감정을. 그건 정말이지 보여선 안 될 마음이었다.
“꿈이 아냐. 정신 차려.”
“뭐야, 진짜잖아.”
어이없다는 듯 말한다. 정작 어이없는 사람을 앞두고.
“정말 죽으려고 한 거야? 내가 죽어 버리라고 해서.”
“응.”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었다. 지한은 일단 화를 참고 이유를 물어보기로 했다.
“왜?”
“당신이 그렇게 하라며?”
말도 안 되는 논리를 술술 말하는 그의 태도에 지한은 기가 차서 참을 수가 없었다. 지한은 몸을 벌떡 일어났다. 앉아있던 의자가 쓰러질듯 덜컹거렸다. 이후는 여전히 조금 멍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멍한 눈빛에 엷은 웃음이 떠올랐다.
“또 때리려고? 하지 마. 난 환자잖아.”
“그래서 참고 있어!”
깨어난 그와 병원을 나섰다. 혼자 걷기 힘들다고 엄살을 피워 지한은 마지못해 그를 부축해 나왔다. 정말 불편한 건지 어떤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은 환자이기 때문에 내팽개칠 순 없었다.
“그럼 이제부터 데이트 하는 거야?”
차에 태운 것도 못마땅하건만 그는 눈치 없이 이런 소리를 한다. 하긴 언제는 눈치 있게 굴었던가. 지한은 그에게 그런 것을 원하진 않았다. 다만 최소한의 상식을 지켜주길 바랄뿐.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집에 데려다 줄 테니까 얌전히 들어가.”
“어디? 당신 집?”
“내 집이 아니라. 네 집이야.”
“싫어. 당신 집으로 가자.”
“장난치지 마. 내가 얼마나 놀랐는 줄 알아? 사람을 이렇게 가지고 놀아도 된다고 생각해?!”
지한은 결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운전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운전하는 중이라 참으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심정을 모른다. 단순히 화가 나는 것이 아니었다.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며 여기까지 왔는지. 자신의 생각 없는 말을 후회하며. 그를 애써 밀어낸 자신을 후회하며 그렇게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건만.
“정말 놀랐어?”
“그래.”
“후회했어?”
지한은 그 질문에는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의 후회를 긍정하면 그것은 감정을 긍정하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숨 막히는 시간이 조용히 흘러갔다. 말이 채우던 공간을 이후의 시선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술작품을 감상하듯 천연해 보이면서도 일순 포르노를 보는 것 같은 맹목적인 욕망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 여자랑 같이 있었어?”
집에 도착해 내리기 직전 그는 엉뚱한 질문을 했다. 지한은 그 질문의 의중을 몰랐지만 솔직히 대답했다.
“그래. 네가 내 데이트를 망쳤어.”
“그것 참 잘됐군.”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그가 멀어졌다. 창밖의 그는 사라질듯 흐릿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집에 돌아온 지한은 민혜에게 전화를 했다. 아까의 일이 아무래도 신경 쓰이기 때문이었다. 기분이 상한 것 같았는데 이대로 넘기기엔 어쩐지 염치가 없었다. 이미 그 남자에게 달려간 시점에서 이미 남아있던 염치란 게 있는가 싶기도 했지만.
-친구는 괜찮아?
“응. 별 거 아니었더라구. 괜찮아.”
-다행이네. 그럼 그 친구하고 아직 같이 있는 중?
“아냐. 얼굴만 보고 돌아왔어.”
아까의 기분은 착각이었을까. 의외로 그녀의 목소리는 쌩쌩했다. 조금 상기되어있는 것 같기도. 아니, 숨이 찬 느낌으로 들렸다. 걷는 중인 듯 자동차 소음과 이런저런 소리가 섞여 들렸다. 분명 그녀를 집 앞에 내려주고 돌아왔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데 넌 아직 밖이야? 소리가.”
-아. 나? 나 그냥 잠깐 뭣 좀 사러 왔어.
“그렇구나. 그래도 일찍 들어가 위험하니까.”
전화를 끊으려고 했으나 핸드폰을 내려놓기 직전 그녀의 목소리가 자신을 다시 불러왔다. 여전히 그녀의 목소리는 바깥의 소리와 섞여 조금 어그러지게 들려왔다.
-지한씨.
“응?”
-지한씨 날 사랑하는 거 맞지?
지한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부끄럽거나 당황해서는 아니었다. 의외였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이런 질문을 하는 일은 드물었다. 차라리 사랑한다는 말을 듣기 위해서는 먼저 말하곤 대답을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이것은 일종의 확인이었다. 시험이란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왜 그런 소릴 해?”
-그냥……. 듣고 싶으니까.
“·······.”
-대답 해. 대답 안했잖아. 아직.
멀리서 느껴지던 음성이 앞으로 차례로 다가오는 기분이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런 착가에 잠시 멈칫했다. 침묵은 또 다른 재촉이었다. 지한은 어색하고 불편한 기분으로 대답했다.
“사랑해. 사랑하지.”
-그래. 나도 지한씨를 사랑해. 누구보다도 사랑해. 그러니까 결혼하려는 거야. 자기도 마찬가지지?
민혜는 지한의 불안과 흔들림을 감지한 것인지도 모른다. 통화를 끝내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지한은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녀역시 자신의 불안에 영향을 받은 것이리라. 조금 더 신경 쓰고 잘 해야 할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에게 더 미안한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지한은 거실 탁자 위에 올려놓았던 액자를 가져와 바라보았다. 몇 번인가 여행을 다녀온 일은 있었지만 이렇게 단둘이 찍은 사진을 드물었다. 현상을 해서 직접 액자에 넣어 그녀가 이곳에 둔 것이었다. 매일 바라보며 사랑한다고 말해달라고 했었다.
“미안해.”
하지만 지금 자신은 그 사진을 향해 사과하고 있었다. 차마 눈을 마주치지도 못한 채로.
지한은 리모컨을 눌러 음악을 재생시켰다. 오디오에 걸려있는 음악은 한 가지, 늘 같았다. 그의 존재는 자신을 이렇게 힘들게 하는데. 늘 고민을 주고 불편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데. 그런데 그의 일부인 음악은 자신을 편안하게 해준다. 잠이 오지 않는 밤에도 고독한 공기를 조용히 떠도는 음악을 듣고 있자면 머릿속에 남아있던 찌꺼기 같은 생각들이 지워졌다. 그것은 완전히 휴식이었다.
-탕.
철제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짧게 울렸다. 지한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잘못 들었나. 옆집, 혹은 다른 데서 들린 소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방문자가 있다면 초인종을 누를 것이었다. 하지만 지한은 안심하지 못하고 조용한 현관을 바라보았다.
-탕. 탕. 탕!
이번엔 착각이 아니었다. 누군가 지한의 집 현관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 소리가 지한의 심장을 그대로 두들겨댔다. 이런 짓을 할 사람은 한 명 뿐이었다.
“무슨 짓이야. 그만해.”
지한의 목소리에 그 소리는 멈추었다. 지한은 막힌 철제문 사이로 그 남자를 보았다. 상처 입은 주제에 야릇한 웃음을 짓고 있을 그의 얼굴을. 그 얼굴에 서린 광기를 닮은 욕망을. 정말 끈질긴 욕망.
“초인종을 눌러봤자 열어주지 않을 것 같아서.”
안 듣는 게 나을 것 같은 변명이었다. 대꾸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그대로 내버려 두면 다른 집에 피해가 될 것 같아 어쩔 수가 없었다.
“대체 여긴 왜 왔어? 아프다더니 엄살이었나 보지?”
“아까 얘기 못한 게 있어서 그래.”
핑계인 게 뻔했다. 하지만 지한은 화를 내는 대신 보이지 않는 남자를 조용히 노려보았다. 문에 몸을 기대고 있는 걸까. 아니면 한 발작 떨어져 있는 걸까. 목소리만 들어서는 잘 모르겠다. 지한은 닫힌 문을 눈으로 확인하고 한 발작 물러났다. 어차피 문은 닫혀 있고 자신을 해칠 사람은 없었다.
“그럼, 거기서 하고 가.”
“얼굴을 보여줘.”
“아까 봤잖아.”
“그걸로 안 돼. 모자라.”
얼마나 해야 만족을 아는 걸까. 그의 욕망은 대체 만족을 알기나 하는 걸까. 지한은 그의 숨김없는 말을 그저 욕망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려 했다.
“보여줘.”
“싫어.”
“그럼 가지 말고 거기 있어. 여기……. 여기쯤 있나.”
이상한 일이지만 그가 문을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아니 보였다. 지한은 그 이상한 감각에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한발자국 다가섰다.
“아까, 나 정말 죽고 싶어서 그랬던 게 아니었어.”
“…….”
“내가 다치면, 내가 아프면 당신이 올 것 같아서 그랬어. 아니면 얼굴을 보여주지 않잖아. 그래서 그랬어.”
“그게 뭐야, 너 정말 미친 거야?”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튀어 올랐다. 그런 주제에 죽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고? 모든 게 내 탓이라고? 죽고 난 다음에도 그렇게 말할 걸까. 동생의 죽음을 나 때문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그래, 난 미친놈이야. 당신을 차지하려고 죽은 친구를 이용했지. 난 그 녀석을 정말 좋아했는데. 그렇게 소중하다고 자기 입으로 말해놓고, 그 녀석에게 그러면 안 되는데……. 정말 그러면 안 되는걸 알지만. 어쩌겠어. 난 개자식이야.”
한번 흔들리기 시작하자, 똑바로 서 있기 힘들 정도였다. 그의 이해할 수 없는 광기가 자신에게까지 번진 것 같았다. 자신도 함께 미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개자식이라도 좋아. 당신을 볼 수 있다면, 가질 수 있으면.”
이런 게 정말 저열한 욕망인가. 하지만 사랑이라고 해도 자신이 그 마음을 돌아볼 이유는 없다. 그저 일방적인 감정일 뿐이야. 그는 일방적인 감정을 핑계로 나를 괴롭히고 있어. 내 숨을 조이고 있어. 그는 스스로의 말대로 개자식이다. 미친놈이다. 그런 사람을 내가 왜······.
“제발, 한 번만 보여줘. 문을 열어줘. 난 불쌍한 개자식이니까 제발 불쌍하게 생각해 줘.”
안 돼. 절대 안 돼. 말도 안 되는 일이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자신은 점점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그의 말에 이끌리듯 움직인다. 머릿속에선 전혀 다른 생각을 하는데 몸은 그 반대로······. 아니, 그것 또한 자신이 맞다.
다른 나. 그를 받아들이려는 나. 그를 생각하고 그를 좋아하는 마음을 품은 나. 지한은 그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나’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짓을 하려 했다. 잠금 쇠가 떨어져 나가고 문이 열렸다. 묵직하고 긴 소리를 내면서.
*
빗소리인줄 알았던 소리는 아직도 재생되고 있는 음악소리였다. 그 빗소리를 닮은 소리에 헐떡임이 섞여 들었다. 자신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임에도 지한은 그 소리들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부끄러움과는 다른 이질적인 감정에 지한은 당황하며 잠자코 몸을 내주었다. 이후가 옷을 채 벗기지도 않고 허기진 사람처럼 달려들었을 때도 그는 기꺼이 팔을 벌리고 다리를 벌렸다.
현관 바닥에 그대로 쓰러져 등 뒤로는 선득한 냉기가 올라왔지만 몸 위로는 뜨거운 기운이 치달렸다. 그의 입술이 몸 구석구석을 더러운지도 모르고 입 맞추고 애무하고 음란한 욕망을 부추겼다. 그는 이제 지한의 사타구니 사이에 얼굴을 처박고 개처럼 핥아 댔다. 그러나 귀여운 동물의 그것처럼 사랑스러운 움직임이 아니었다. 차라리 맹수의 공격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허벅지가 흔들리며 손을 뻗어 그의 목을 할퀴어도 그는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혀로 애무하던 성기를 뜨거운 입안으로 삼켰다. 이후는 입안에 들어온 것을 부지런히 애무하며 손을 뻗어 느슨하게 이완된 애널 안에 손가락을 거침없이 집어넣었다. 페니스를 자극당하며 뒤가 쑤셔지니 눈에 보이지 않아야 할 야릇한 쾌감이 눈앞에서 터져나가는 듯 했다.
“으, 흐읏…….”
숨 막힐 것 같은 열기에 갇혀 지한은 견뎌내지 못하고 그대로 사정했다. 고통에 가까운 강렬한 쾌감이 뱃속을 강하게 울리고 몸으로 퍼져나갔다. 이후의 어깨에 불안하게 걸쳐있던 다리가 쾌감에 경련했으며 그의 팔을 붙잡은 손 마디마디에 힘이 들어갔다. 붙잡은 팔이 붉게 물들어 가며 상처가 늘어갔다.
주체 못하는 감각에 몸부림치는 지한을 자신의 무게로 누른 채 그는 헐떡이는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갔다. 밑을 늘리는 손가락은 움직임이 둔해 졌지만 확실히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지한은 막힌 입안에서 신음을 토해냈다.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그는 만족스러운 듯 입 꼬리를 올리고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이 욕망의 얇은 베일에 감싸여 흐릿하게 번져 갔다.
무언가에 홀린 기분이었다. 묶여 있지도 않고 의식도 확실한데 그에게는 의지가 없었다. 도망칠 의지, 저항할 의지. 대신 자신을 채운 것은 막 고개를 든 욕망이었다. 그를 받아들이고 같이 품고 싶은 욕망이었다. 인정한 순간 그것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사정을 하고도 다시 일어나는 욕망을 참을 수 없어 스스로 허리를 흔들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재촉하는 음란한 몸에 보답을 하려는 듯 허리를 맞춰왔다. 위험하도록 완벽하게 발기한 성기가 구멍으로 빨려들듯 들어왔다. 수월한 듯 매끈한 움직임이었지만 받아들인 지한의 몸은 커다란 충격에 진저리쳐야 했다.
온몸의 세포까지 일렁이는 충격이 그를 덮쳤다. 서서히 빠져나갔다. 하지만 안심할 틈도 없이 이후가 허리를 움직였다. 뒤늦게 그가 다리를 다쳤다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그의 움직임은 다친 사람 같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도 스스로의 아픔을 잊었는지 모른다. 지한이 그러하듯이. 멀리 허리를 물렸다가 강하게 다시 밀어 올려졌다. 여러 번, 그리고 더욱 빠르게. 이후의 움직임이 분주해질수록 지한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호흡도 다급하게 이어졌다.
“좋아. 정말……. 좋아.”
짙은 욕망에 젖은 목소리가 귓가에 뜨거운 호흡을 내뱉으며 만족스럽게 속삭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의 성기는 지한의 몸을 꿰뚫고 안을 헤집고 있었다. 한계까지 벌려진 곳이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더욱 크게 벌려지며 그를 먹어치우고 있었다. 이것은 하나가 되는 과정이라기보다는 서로를 먹고 먹히는 싸움 같았다. 흥분을 참지 못한 그가 때때로 지한의 목이며 어깨, 귓불을 깨물었다. 그러나 아픔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지한을 흔드는 쾌감은 강렬했다.
“좋아서, 그냥…이대로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그만……. 아, 싫어, 싫…읏…….”
“날 여기서……. 죽게 해줘.”
싫다는 말을 힘겹게 내뱉으면서도 몸으로는 그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다리로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팔을 뻗어 그의 목에 매달렸다. 다가오는 얼굴을 향해 입을 맞추고 서로의 호흡과 타액을 여러 번 나누었다.
빈틈없이 결합된 살 무덤 사이로 뿌연 액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연결된 부위에 젖은 소리가 요란히 울렸다. 귀두 끝이 살아있는 것처럼 출혈된 내벽을 사정없이 찔러댔다. 그때마다 지한의 몸은 작살에 찔린 물고기처럼 튀어 오르며 금방이라도 숨을 멈출 것 같은 안타까운 비명을 짧게 뱉어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사정의 말의 섞여가며.
“제발, 아…으, 읏……!”
한번 사정 후에도 그는 쉬는 법 없이 바로 안에서 풀죽은 성기를 천천히 흔들었다. 그러는 사이에 다시 발기한 물건이 기세 좋게 움직임을 이어갔다. 만족을 모르는 사내였다. 그는 처음보다 더욱 집요하고 거칠게 움직였다. 따라가기도 힘든 움직임에 그저 힘없이 흔들릴 뿐이었다.
견디기 힘든 감각이 무자비하게 흘러들어왔다. 몸을 휘감는 격정이 불꽃이 되어 몸을 태울 것만 같았다. 두려움에 지한은 힘없는 손을 뻗어 그를 밀어내려했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고 더욱 허리를 강하게 밀어 올렸다. 그를 받아들인 곳은 한계에 달해서도 잔뜩 수축하며 그를 감싸고 자극했다. 연결된 몸이 강한 자극에 움찔거리며 더욱 세차게 움직였다. 쾌감은 거부해도 몸을 관통하고 머리를 하얗게 만들었다.
“이제 그만, 응, 흐읏…….”
그만하라는 말도 거부의 몸짓도 모두가 소용없었다. 엄살인지 몰라도 정말 딱 힘이 들어 죽을 것 같단 말이 더듬더듬 흘러 나왔다. 이제는 모든 것이 무섭고 두려웠다. 힘이 빠진 흐느낌이 비명을 질러 지친 목을 타고 흘러나왔다. 듣기 싫은 소리라고 생각했지만 멈출 수 없었다. 아마 보이는 것도 그리 좋아 보이진 않을 것이다. 눈물이 이미 젖은 얼굴을 타고 계속해서 흘렀다. 멈출 수가 없었다. 그가 자신을 멈추지 못하는 것처럼. “울지 마.”
차가운 느낌이 뺨을 감쌌다. 차갑고 기분 좋은 손이었다. 몸을 태우는 뜨거운 쾌감과는 다른 서늘하고 다정한 감각이었다.
“울고 싶은 건……. 나야.”
눈을 뜨니 어둔 얼굴이 자신을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웃는 입술과 달리 눈을 채운 것은 출혈된 눈물이었다.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정말 울고 싶은 것 같았다.
“당신이 너무 좋아서……. 울고 싶어. 정말이야.”
땀과 섞인 눈물이 흔들리는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툭 떨어지는 느낌과 함께 안으로 그가 깊게 들어왔다. 깊이 들어와 오래 머문다. 맞물린 몸이 어떤 슬픔에 떨며 참았던 욕망을 끝내 풀어냈다.
해방감이 느껴지는 한편 지독한 허탈함이 가슴을 쓸어내리는 듯 했다. 쓰러지듯 겹쳐오는 몸을 끌어안으며 지한은 감았던 눈을 떴다. 욕망과 열기가 치열하게 부딪치고 폭발하고 사라진 자리에 남아있는 것은 선득한 슬픔이었다. 몸을 차지하고 마음껏 욕구를 풀어내어도 해결되지 않는 감정에 그는 흐느끼고 있었다. 지한은 그 슬픔을 어쩐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알지도 못한 채 입술이 열렸다. 하지만 전하려던 말은 조금도 흘러나오지 못하고 멈추었다.
-털썩.
무언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였다. 무겁지 않은, 하지만 결코 가볍지도 않은 것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아니, 그 소리 전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먼저였는지도 모른다. 비밀 번호를 누르는 익숙한 소리가 먼저였던가. 그런 것은 사실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신발을 벗지도 못한 채 현관에 서 있는 여자였다.
그녀의 소리 없는 비명. 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아연함에 질린 얼굴. 모든 것이 숨도 내쉬지 못하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몸이 순식간에 식었다. 지독했던 쾌감도, 마음속에서 웅성이던 죄스럽지만 애틋한 열기도 모두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누군가에게 건네려던 말도 입안에서 수그러들었다. 대신, 얼어버릴 것 같은 냉기가 움직임을 멈춘 공간에 가득했다. 가득 채우다 못해 팽창하여 깨질 듯.
깨진다. 그녀의 눈에 들어있던 무언가가, 지한의 가슴속에 있던 무언가가, 그리고 또 다른 무언가가.
모두가 넋을 놓고 있던 중에,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이후였다. 그는 당황하지도 여전히 연결되어있던 지한의 몸에서 물러나 옷을 입었다. 그리고 아직까지 시선이 고정된 채 누워있는 지한에게도 주변에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던 옷을 건네주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손에 쥔 채로 움직이질 않았다.
“날 사랑한다며?”
날카로운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손끝에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눈 앞에서 현실이 멀어졌다. 지한은 여전히 지금의 상황이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을 하기 힘들었다. 비슷한 일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한 적은 있으나 실제로 일어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녀의 몸이 분노에 파들거리는 것을 보고 있음에도. 믿기 싫은 현실이란 이런 것일 게다. 최악의, 최악. 하지만 모두 자신이 자초한 일이었다. 도망칠 수 없었다. 모두가 자신이 기꺼이 맞아야 할 일.
“몇 시간 전에 그렇게 말해놓고······.”
“…….”
“후후……. 그럼 모두 거짓말이었던 거야?”
이상한 웃음소리가 파랗게 질린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그는 웃으며 어깨를 떨었다. 몸을 굽히고 몸을 떨던 민혜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의 얼굴은 눈물로 번져 있었다. 배신당한 상처에, 슬픔에, 노여움에, 그녀의 맑던 눈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뻣뻣하게 굳어 있던 뺨이 말할 때 마다 경련하듯 떨려왔다.
“변명이라도 해봐. 지금 이게 무슨 일인지, 내가 뭘 본 건지……. 왜 아무 말도 안 해?”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었다. 돌연 누군가에게 목소리를 빼앗긴 기분이었다. 입술을 달싹여 보아도 아무런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숨소리만 힘겹게 빠져나왔다. 벌어진 눈은 그저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사람이 변해도 너무 변했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당신은 죽은 동생핑계를 대면서 얼버무렸어. 난 이해하려고 했어. 화가 날 때마다 자신을 다독이면서, 그래도 내 남자니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이해해야 한다고…….”
알고 있었다. 너무나 잘 알아서 이래선 안 된다는 것도 알았고. 이 여자가 아닌 다른 사람을 머릿속에 떠올린다는 것만으로도 그것은 죄가 된다고, 자신은 알면서도 이런 짓을 했다. 그래서 비난 받아 마땅하다는 것도.
그녀의 경멸에 찬 시선이 지한의 모습을 훑었다. 경멸과 슬픔과 배신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똑바로 서 있기도 힘들 정도의 감정이었다. 그 감정이 지한을 덮쳤다.
“그런데 자기는 이런 짓을 하고 있었던 거야. 이런 짓을 하면서. 이 남자를 버젓이 내 앞에서 소개 시켰잖아. 속아 넘어가는 내가 재미있었니? 그랬어?”
민혜가 지한의 곁에 다가와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흔들었다. 그녀의 연약한 손길에 흔들리며 지한은 더듬더듬 겨우 입을 열었다. 뒤늦은 변명인지, 사죄의 말을 하려는 건지. 지금의 그녀에게는 어떤 말도 용납되지 않았다.
“아냐. 나는, 나는 그런 게······.”
“그럼 내가 본건 뭐야? 내가 잘못 본거라고 말할 셈이야?”
나오려던 말이 덜컥 멈추었다. 참을 수 없는 노여움에 흔들리던 그녀의 눈은 사실은 아니라고 말해달라고 그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지한은 그렇게 말할 수가 없었다. 결국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시선을 피하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니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비명처럼 소리를 지른 그녀는 들고 있던 자신의 백으로 그를 후려쳤다. 안에 들어 있던 물건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얼굴이며 어깨 할 것 없이 마구잡이로 쏟아지던 구타가 겨우 멈추었다. 힘이 빠져 쓰러지듯 멈추었지만 그녀의 울음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미안해.”
그 말을 입에 담는 것조차 죄스럽다. 가슴이 쥐어뜯기는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제와 후회를 해도 사과를 해도 없었던 일이 되는 건 아니다. 자신은 한 여자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 동시에 이것은 자신에게도 상처가 되리란 것을 알았다.
“미안해? 미안하면 어떡할 거야?”
“·······.”
“그래. 미안하면 죽을래? 그럴 거야?”
쏟아진 물건들을 바라보던 그녀의 눈빛이 희번덕 빛났다. 지갑과 화장품과 핸드폰 사이에 작은 물체가 하나 떨어져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손에서 날카로운 칼끝을 드러냈다. 그것의 정체에 놀라서 소리친 것은 이후였다.
“이봐, 뭐하는 거야.”
“당신은 닥치고 가만히 있어. 끼어들지 마!”
이때까지 말없이 있던 그가 이쪽으로 다가올 듯 움직이자 민혜는 돌연 그를 향해 칼을 들이밀었다. 이후를 향한 분노는 지한에게 향한 그것보다는 더욱 선명하고 단순했다.
“그래. 끼어들지 마.”
지한은 애써 차분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몸도 마음도 어쩌지 못하고 떨고 있었다. 지한은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놀라웠다. 이런 것을 가방 속에 넣고 달려왔다니. 아까 자신과 통화중일 때 그녀는 이미 이리로 오고 있었던 같았다. 그때 이미 그녀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건가.
어쩌면 그녀는 오랫동안 자신의 비밀에 대해 알았는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자 이제까지의 이상했던 공기와 미묘했던 대화들이 차례로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언제고 이 칼로 자신을 찌르려고 생각해 왔던 것이다.
“왜 그런 눈으로 날 보는 거야, 내가 이상해 보여? 난 정상이야.”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그럴 여유가 없는 듯 했다. 지금 그녀를 움직이는 것은 순수한 분노였다. 그 순간은 좋았던 기억도 감정도 생각해내지 못할 것이다. 작은 나이프를 쥔 게 고작인 연약한 몸이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마구 떨리고 있었다.
“이상한 건 너야. 더럽고 끔찍한 건 너라구.”
지한은 체념하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다. 체념은 어떤 어리석은 인간이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정말 그녀가 자신을 찌른다고 해도, 죽인다고 해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동자가 순간 차갑게 멈추었다. 그녀가 넘어지듯 자신을 향해 다가왔다. 차가운 느낌이 가슴을 스치는 듯싶었지만.
“…….”
살을 찌르고 들어올 것이라 생각했던 아픔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눈앞이 당분간 캄캄하더니 서서히 빛이 들어왔다. 눈앞에 들어온 것은 자신의 가슴을 쥐고 쓰러져 있는 이후와 자신이 한 일에 놀라 하얗게 질린 민혜의 얼굴이었다. 숨을 쉬는 것 같지도 않은 얼굴이 눈앞에 쓰러져 꿈틀거리는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발치엔 피 묻은 작은 칼이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지한은 묻는다. 누구에게 향한 질문인지도 정확하지 않았다. 무릎 위로 이후의 손이 올라왔다. 그는 지한의 손을 찾아 세게 쥐더니 고개를 들고 고통으로 경련하는 얼굴에 웃음을 지었다.
“내가 한 게 아니라 저 여자가……한 거야.”
이후는 겨우 말을 마치고 그대로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