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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6 Wednesday, 2008} 새벽바람
불면(不眠) 下
4. 전이(轉移)
손끝에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세게 묶여 있기 때문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실직고 하자면 현재 지한에게 확실하게 보이는 것도, 느껴지는 것도 없었다.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머릿속도 좀체 움직이지 않았다. 묶인 곳은 손목뿐인데 다리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몸 전체가 꼼짝없이 묶인 듯한 기분이었다. 뭔가 약을 먹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럴지도. 거기까지 생각이 움직이기까지도 오래 걸렸다. 졸린 것도 같고 졸리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이기도 했다. 모든 것이 무력했다. 생각까지 더디게 할 정도의 약효였다.
“마실래?”
이후는 지한에게 술병을 내밀었다. 하지만 대답할 기운도 정신도 없었다.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그조차 불가능했다.
“싫어? 마시는 게 좋을 텐데.”
그는 벌써 오래 전부터 지한의 맞은편에 앉아 술병을 비우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눈을 떠보니 이후의 얼굴이 보였다. 그의 눈빛이 눈 안에 들어왔다.
“아아. 손이 그렇게 묶여 있으니까 마시기 힘들겠구나.”
이후가 대답 없는 지한에게 다가왔다. 그의 걸음이 흔들리는지 지한의 시야가 흔들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느리게, 그래도 정확히 지한의 앞에 와 섰다. 입술이 뜨겁게 닿았다. 억지로 입이 열리고 더 뜨거운 액체가 입술과 입술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목구멍을 태울 듯 넘실대던 액체는 속을 뒤틀었다. 그가 입술을 떼어내자 지한은 몸이 쓰러질듯 구부러지더니 미친 듯이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자기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아는지 몰라서 억울하지, 화나지?”
그는 고통스러워 얼굴을 찡그리는 지한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지한은 마음속으로 그의 질문에 대답했다. 대답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런 감정은 이미 지난 후였다. 처음엔 그런 생각을 했지만 지금은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다. 하지 못하는 건지, 일부러 하지 않는 건지는 정확하지 않았다.
“누군가 도와 줄 거라고 생각하지 마. 여긴 내 집이고, 내 세상이고, 내 구역이야. 아무도 못 와. 죽은 사람은 더더욱.”
가면을 벗고, 무대에서 내려온 그는 전보다 더욱 거칠고 어둡고 멋대로였다. 그리고 훨씬 불안해 보였다. 아마도 지금의 모습이 진짜일 것이다. 지한은 이런 상황에 맞지 않게 그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민한의 죽음에 망가져 가는 것은 자신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여기 그보다 더한 사람이 있었으니까.
“아니면 그 점쟁이를 믿어? 잘 보긴 하는데 완벽하진 않더군. 하긴, 그 정도만 되도 당연하다고 해야겠지. 난 사이비 점쟁이들을 많이 봤거든. 터무니없고 고약한 노친네들이 전부였어. 어쨌든 난 죽지 않은 게 아니라. 죽었어.”
“그게 무슨·····.”
갈라지듯 나온 목소리가 겨우 그에게 닿았다. 하지만 도저히 몸을 일으킬 순 없었다. 누운 채로 이후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웃었다. 자신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하나도 즐겁지 않은 얼굴로 웃는다.
“겁먹을 필요 없어. 그렇다고 내가 귀신이란 얘긴 아냐. 대신 반이 죽었고 반은 살아남아서 이렇게 숨을 쉬고 있는 거지.”
갈수록 그의 얘기는 어렵게 변했다. 풀려고 할수록 꼬이는 매듭처럼. 그의 말도, 표정도 자세히 보려고 하면 자꾸만 복잡하게 얽혀 갔다. ‘반쪽짜리 인간’ 이란 게 뭘까. 지한은 그 말을 이해하고자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이후의 손이 다가와 지한의 입가에 남은 물기를 닦아 냈다. 그리고 천천히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코앞에 닿은 얼굴이 위험하게 속삭였다.
“무서워? 아니면 불쌍해? 당신은 죽은 사람한테는 약하잖아. 응?”
아니 그런 척 하는 건가. 지한은 눈을 감지 않고 그를 응시했다. 시야가 자꾸만 뿌옇게 흐려져 똑바로 바라보긴 힘들었지만 그래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먼저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입술을 부딪쳐 왔다. 이후는 무방비한 지한의 입술을 열고 혀를 뽑을 듯 강하게 휘감고, 모든 호흡을 빼앗을 듯 오랫동안 머물렀다.
“나도 위로해줘. 당신 동생이 아니라 나를······.”
격렬하게 끌어 안겨 바닥에 내동댕이치듯 쓰러졌다. 하지만 이미 어떤 통증이나 감각도 멀어진 후였다. 몸을 헤집는 손길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후가 무엇을 더 하는지 알기도 전에 흐릿하던 눈앞이 완전히 닫혀 버렸다.
잤던 건지, 기절했던 건지 모르겠다. 다만 많은 시간이 지났음은 알 수 있었다. 다만, 얼핏 눈을 뜰 때마다 멈추지 않고 계속되던 섹스가 끝났다는 것이 다행스러울 뿐이었다. 그저 소강상태라도 쉴 수 있음에 감사할 뿐이었다.
빠져 있었다. 고개를 내밀어 숨을 쉴 틈도 없이. 저 깊은 심해에 붙잡혀 익사하기 직전까지. 시간도 장소도 알 수 없는 상태로 계속 꿰뚫리고 사정을 강요당하며 많은 시간을 지내다 보면 머릿속이 이상해질 것만 같았다. 딱히 약을 먹이지 않더라도 도망칠 생각도 의지도 사라질 것만 같았다.
지금은 어떤 상태냐면, 머릿속은 제법 정리가 되었지만, 여전히 몸은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 정도로 혹사를 당했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지한은 굳이 몸부림치지 않고 몸에 힘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눈으로 이후를 찾았다. 떨어지지 않을 듯 몸을 붙이고 결박하던 남자가 없었다. 어딜 간 걸까. 갔어도 멀리 가진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지한은 그냥 그를 기다렸다. 그를 기다리는 일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이후가 알몸으로 방 안에 들어왔다. 차가운 물을 뚝뚝 흘리며. 지한은 자신도 좀 씻고 싶단 생각을 했다. 목도 말랐다. 그가 다가오자 차가운 기운이 확 끼쳐 기분이 좀 나아졌다. 시원했다. 손을 뻗어 차가운 몸을 만져보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물소리 같은 걸 들은 것 같다. 빗소리인가 생각했던 것이 샤워하는 소리였을까.
“물을…….”
마른 목소리가 겨우 뱉어낸 말을 알아들었는지 이후가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나 그가 내민 것은 물이 아니었다. 불쑥 눈앞에 내밀어진 한 장의 사진이었다. 지한은 눈만 들어 그것을 자세히 보았다. 이후 자신의 사진인 것 같았다. 지금보다는 훨씬 어린 티가 남아있는 얼굴이었다. 교복이 어쩐지 낯익었다.
“내 형이야.”
이후는 뜻밖의 사실을 알려주었다. 지한의 눈이 확대된 채로 그를 오랫동안 응시했다. 그가 했던 어떤 말들 중에서 제일 솔직한 고백이건만,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 아이러니하게도.
*
이후가 민한을 처음 만난 것은 꽤 오래전이었다. 하지만 처음엔 타인보다 조금 나은 정도의 관계였다. 그래도 각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가 자신의 형과 오래도록 친하게 지냈기 때문이었다.
김이성. 지금은 없는 이한의 형제. 사실 형이란 호칭보다는 차라리 서로의 이름을 불렀다. 그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아니, 가깝거나 멀다는 거리를 말할 수 없을 정도의 형제였다. 이성은 이후와 한날한시에 태어난 쌍둥이 형제였다.
닮은 얼굴이란 것은 생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나이가 먹고 어른이 되어 가면서 차차 그 상황에 익숙해지고 요령을 익히지만 이후는 그런 부딪침을 싫어했다. 반면 조금 먼저 태어난 탓인지 몰라도 형은 그런 일에 신경 쓰지 않았다. 성격이 전혀 다른 쌍둥이였다. 같은 얼굴인데도 한 명은 천사 같고, 한 명은 악마 같다고. 친척들은 수군댔다. 이후는 그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보기에도 형과 자신은 너무나 달랐다.
형은 모범생으로, 온화하고 과묵하던 이성과 달리 이후는 툭하면 또래의 아이들에게 싸움을 걸었고 사고를 치고, 마침내 또래의 집단에서 겉돌았다.
그래도 크게 삐뚤어지지 않았던 것은 그의 어머니가 우연히 피아노 학원에 보내면서부터였다. 의외로 이 말썽 많은 아이는 그 얌전한 취미에 몰두했다. 희한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이후의 모친은 다행스럽게 여겼다. 솔직히 이 튀는 아이 때문에 그녀는 걱정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음악은 유일하게 이후가 형보다 뛰어나고 칭찬을 받는 것이기도 했다. 유학까지 생각할 정도로 그는 진지하게 음악과, 연주에 몰두해 있었다. 어쩌면 유일하게 형과 다른 장기이기 때문에 더욱 매달렸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이후는 자신의 반쪽을 미워하거나 시기하진 않았다. 이성은 이후의 또 다른 자신. 이성에게도 그것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와 다르기를 원했으나 그를 부정하진 않았다. 형제로서, 자신의 반쪽으로서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꼈다. 서로가 없으면 살수 없을 거라고 믿고 살아왔다. 그것은 이후에게, 혹은 그의 형제에게 일종의 종교와 같았다.
-정말 많이 닮았네. 이성이 동생이야? 아니, 형이었던가.
처음 본 사람들은 물론 가끔 부모님도 헷갈리는 얼굴을 민한은 처음 보는 자리에서 퍼뜩 알아보았다. 목소리조차 비슷한 그들이었다. 이후는 눈앞의 사람을 다시금 바라보았다. 분명 또래일 것으로 보이는 얼굴이었다. 이성과 같은 교복. 하지만 왠지 더 깨끗하고 밝은 느낌이었다. 표백제로 깨끗이 빨아놓은 셔츠 같은 느낌이었다. 민한의 첫인상은 그랬다.
-이성이는 없는 건가. 나중에 올까.
-아니. 있어.
이후는 뒤늦게 물러나며 이성의 손님을 안내했다. 그 후 종종 마주쳤다. 하지만 마주친 게 전부였다. 어떤 긴 대화나 접촉은 없었다. 보통 형제의 친구들과 각별한 사이가 되는 일이 없지 않겠지만 이후에게는 불가능했다. 그는 그다지 사교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다만 윤민한이라는 사람의 인상은 오래도록 그의 뇌리에 남아있었다.
왜 그럴까, 외모는 못나지 않은 정도, 성격이 좋아 보여 인기가 많을 것 같기는 하지만 딱히 끌릴 구석은 없었다. 오히려 이후는 그 같은 스타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한없이 사람이 좋아 속없는 짓을 하는 족속들을 싫어한다. 차라리 독하고 비겁한 사람 쪽이 좋았다. 상대하기 수월했다. 그런데 그는 싫지 않았다. 오히려 신경 쓰이고 돌아보게 되었다. 왜 그 녀석은 그렇게 신경이 쓰일까. 이후는 그 이유를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자신의 반쪽 때문이었다.
-내가 걔를 좋아해.
이후는 이성에게 그를 좋아하냐고 물었다. 물론 친구로서, 란 의미는 아니었다. 자꾸만 걸리는 게 이상해서 물었더니 그런 대답이 돌아왔다. 그는 굳이 숨기려고도 안했다. 오히려 이후는 자신이 물어놓고 놀랐다. 그래서였나. 그래서였는데 난 왜 금방 눈치 채지 못했을까.
서로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뒤늦게 눈치 챈 게 좀 한심스러울 정도였다. 게다가 그렇게 말하는 이성의 표정은 좋아한다는 말을 하는 얼굴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딘지 씁쓸한 표정.
-그럼. 걔는?
-좋아하긴 하지만······. 내가 최고는 아니래. 나보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나봐.
-양다리야?
-양다리인 건가. 나도 잘은 모르겠다.
그 후 조금 유심히 보게 된 걸 빼고는 달라진 일은 없었다. 가끔 셋이 밥을 같이 먹고 텔레비전을 보면서 별거 아닌 얘기를 주고받을 때는 있었다. 어차피 두 사람이 가끔씩 이후에게 질문을 던지는 정도로. 이후는 일부러 둘 사이를 방해하지 않으려 방에 들어가거나 밖으로 나갔다.
이성의 말과 달리 둘은 겉으로 보기엔 서로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친구이상의 분위기가 흘렀던 것이다. 그것이 일방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후는 두 사람이 섹스 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언젠가는 우연히 본적도 있었지만 별 느낌은 없었다. 어차피 그는 동성에겐 딱히 흥미가 없었고, 좋아하는 사람까지 같을 이유는 없었다. 그래도 윤민한이 조금 더 특별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는 했다.
이후는 그날 이후 둘의 사이에 참견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형제가 슬픈 것은 싫었으므로 둘이 서로를 오래 좋아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이성의 마음이 진실이고 간절했으니까. 그것은 말하지 않아도 이후에게도 충분히 느껴졌다. 둘은 달랐지만 분명 하나로 이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
“얼굴은 똑같지만 알맹이는 완전히 틀렸어. 진짜 좋은 놈이었지.”
그제야 지한은 똑같은 얼굴의 남자의 정체를 정확히 알았다. 생각지도 못했다. 그에게 형제가 있었다는 것은 그렇다 치고, 쌍둥이라니. 그렇게 흔한 것은 아니지만 희한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사람의 쌍둥이라고 하니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든다.
몇 시간 전 들었던 얘기가 떠올랐다. 사실 어제 인지도 모르고 그제인지도 모르겠지만 지한은 시간의 흐름을 정확히 가늠하기 힘들었다. 여하튼, 그는 자신의 반이 죽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럼 지금은?”
의식할 새도 없이 목소리가 나왔다. 여전히 까끌하고 물기 없는 목소리였지만 이번에는 확실히 목소리가 닿았는지 이후가 반응을 보였다. 미묘한 웃음이었다. 찡그리듯 움직인 입가가 웃음을 짓는 건지 울음을 토해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고통스러워보였다.
“좋은 놈들은 다 일찍 죽더라.”
역시 그런가. 이미 예감했던 말이지만 직접 들으니 더욱 피부에 와 닿았다. 혜석이 했던 말들이 모두 이해가 갔다. 혼자 살아남은, 아니 혼자만 죽지 않고 살아남은 남자. 그를 따라다니는 죽은 형제의 그림자. 모르는 사람의 죽음임에도 지한은 어째서인지 슬픔을 떠올렸다.
“우리는 당신네 형제와 달리 사이도 좋았어. 형이 죽어서 나도 그냥 따라 죽고 싶을 만큼.”
하물며 쌍둥이, 같은 얼굴을 한 사람. 얼마나 각별했을지는 설명해 주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지한은 말없이 시선을 떨어뜨렸다. 목이 더욱 뜨겁게 탔다.
“그거 알아? 나 사실 민한이 녀석 장례식장에 갔었어. 당신은 날 못 본 모양이지만·····.”
뜻밖의 일이었다. 지한은 그가 오지 않았다고 단정하고 있었다. 그 같은 사람을 보고 잊었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지한은 그에게 왜 장례식장에 오지 않았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렇다고 하지 않았나. 아니, 대답하지 않았을 뿐이구나. 이후는 대답을 하지 않았고 지한이 그걸 멋대로 생각했을 뿐이다.
“당신은 울지 않더군. 솔직히 좀 어이없었어. 화도 났지. 그래도 피가 반쯤은 통한다고 들었는데…….”
이후의 말대로 지한은 울지 않았다. 아무리 사랑할 수 없었던 동생이라고 해도 그의 죽음이 반가울 리는 없었다. 슬픔도, 후회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눈물을 흘릴 정도의 슬픔은 아니었기 때문일까, 자신도 이상하게 생각될 정도로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하긴 세상엔 형제지만 남보다 더 서로를 괴롭히고 사는 사람들도 있긴 해. 차라리 무관심한 타인이 낫겠다 싶은 관계도 분명 있어.”
그는 딱히 비난하려는 것 같지 않았다. 그저 놀라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한은 스스로를 비난하고 있었다. 타인보다 못한 관계란 자신들이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었다. 형제라는 이름이 그들에겐 되레 무거운 굴레였다.
“내 형은 윤민한을 오랫동안 좋아했어. 아마도 죽기 전까지도 좋아하고 있었을 거야.”
이후의 얘기는 다시 자신의 형제에 대한 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두 사람이 비슷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이성의 죽음도 사고였다. 얄궂게도 민한과 같은 교통사고였다. 그때 이후는 해외에 있었다. 유학을 가려 마음을 먹고 시험을 준비하며 체류 중이었던 것이다. 귀국을 하니 이미 사망선고가 내려진 후였고, 장례식까지의 모든 절차가 끝나 있었다.
형의 시체조차 제대로 보지 못했다. 더욱이 믿을 수 없는 죽음이었다. 솔직히 처음부터 믿을 수가 없었다. 이후는 간혹 자신의 반쪽 같은 형제의 죽음을 상상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어쩌면 자신의 심장도 같이 멈출지 모른다고 믿었다. 틀림없이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런 예후도 없었다.
한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일은 누구에게나 힘들 것이다. 게다가 자신의 반쪽으로 여기던 존재의 죽음이었다. 이후는 한동안 믿지 않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아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충격을 받은 부모는 해외로 떠나기로 마음을 먹은 듯 했다. 하지만 이후는 그들을 따라가지도 다시 유학을 준비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냥 한국에, 가족이 살던 집에 남기로 했다. 그때까지도 이후는 자신의 형제가, 기다리면 돌아올 거라 생각했다. 기다리다보면 이성이 나타날 것만 같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환하게 웃으며. 오랜만이다. 라고 인사할 것만 같았다.
한때 사람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불빛이 켜져 있던 집에 이후는 혼자 남았다. 그의 부모는 그 집을 팔자고 했지만 이후만은 한사코 반대했다. 집이 없어지면 형이 돌아올 곳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잘 지냈어?
기다리던 사람 대신 뜻밖의 인물이 집을 찾아왔다. 형의 오랜 친구이며, 한때 그의 연인이기도 했던 윤민한이었다. 그는 오랜만에 만난 사람처럼 스스럼없이 다가왔다. 장례식 이후 두 달 만이었다. 그때의 수척함은 완전히 떨쳐버린 듯 밝은 얼굴이었다.
마치 그를 처음 만난 고교시절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이후는 멍한 기분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돌아서 이층으로 올라가면 형이 방에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누가 왔어? 라고 물을 것 같은 기분.
-나 기억 안나?
-아니. 잘 기억해.
불안한 기색으로 질문을 해온 민한은 이후의 대답에 겨우 안심한 눈치였다. 이후는 그를 집안에 들였지만 달리 손님 대접을 하지 않았다. 차를 내오거나 식사를 권하거나 하는 기본적인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성격 탓이기도 했지만 그는 그런 정상적인 사고를 할 정신이 없었다.
집안은 금세 더럽고 황폐하게 변해 있었다. 그 자신의 모습도 마찬가지였다. 손질 안 한 머리와 수염. 거실엔 술병이 나뒹굴고 있었다. 그는 매일같이 술에 의지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다시 대학에 복학을 하거나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지도 않았다. 지극히 일상적인 일조차 무시한 채 지내는 나날이었다. 슬픔이라기보다 무력함이었다.
-너는 앞으로 계속 한국에 있을 거야?
한참을 곁에 앉아만 있던 민한이 물어왔다. 그는 어색해하지도 어려워하지도 않았다. 보통 자신과 친한 소수의 사람을 제하고는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보통이었다. 하긴 민한은 예전부터 그랬다. 부딪치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이후는 성의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럼. 나 가끔 찾아와도 될까.
-마음대로 해.
물론 그 다음에 따라온 질문에도 별 생각 없이 대답했다. 막연히 싫지 않다는 생각은 들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만나기 싫지만 그라면 괜찮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형이 사랑했던 사람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이후는 그를 신뢰하는 마음이 있었다.
민한이 돌아간 후 이후는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녀석을 보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기 때문인지도 몰라도 갑자기 잠이 쏟아졌기 때문이었다. 그동안은 늘 술에 취해자거나 버티다 쓰러지듯 기절한 잠이 전부였다.
계단을 전부 올라왔을 때 바람에 스치듯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후는 자신이 헛것을 들었다고 생각했다.
-누가 왔어?
문이 스르륵 열렸다. 집안에 다른 사람은 없었다. 바람이 불지도 않았다. 그러나 문은 살아있는 것처럼 스스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도망칠 수도 없었다. 텅 빈 공간에 무언가 희미한 형체가 맺히는 듯 했다. 목소리가 또렷이 들렸다.
-누구야?
흡사 거울 앞에 세워진 기분이었다. 하지만 거울에 비친 자신은 스스로 말을 하고 움직였다. 같은 듯 하나 다른 사람이었다. 이후와 똑같은 얼굴은 세상에 한 명 뿐이다. 아니 한 명 있었다. 그러니까, 죽어서 여기 없어야 할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눈앞에서 웃고 있었다.
-누가 왔냐구. 왜 대답을 안 해?
이후는 그때야 그의 죽음을 실감했다. 살아있는 듯 생생한 모습이었지만 그는 분명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죽은 자가 산 사람에게 인사를 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또 당연하다는 듯.
*
뜨거운 목안에 차가운 물이 흘러들어오자 괴로웠다. 손은 여전히 묶여 있었으므로 주는 물을 열심히 받아넘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물을 마셔 한결 편해야 함에도 지한은 갑갑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얘기는 끊어졌다 이어지곤 했다. 그는 서두르는 법이 없었다. 얘기를 하다가 지한을 끌어안은 채 잠들기도 했고 일어나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태웠다. 그 사이 지한도 잠이 들었다 깨어나곤 했다. 그럴 때가 아니면 자신을 쉬게 내버려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부터야. 나도 네 점쟁이 친구처럼 이상한 걸 알고, 보게 되었어.”
그것은 거짓이 아닐 것이다. 혜석도 그런 말을 했었으니까 분명했다. 혜석은 이후가 진짜로 ‘보는 사람’ 이라고 했다.
지한은 말없이 이후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모르겠다. 그의 얼굴에 깃든 감정을 읽으려 몇 번 노력해보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후의 생각을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겠다. 빗소리로 시간의 흐름을 가늠해 보려 하나 그조차 힘이 들었다. 오랫동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분명 이 집에 올 때는 비는커녕 햇살이 살을 태울 듯 극성을 부리고 있었다. 언제부터 내리던 비일까. 그 소리는 줄어들 줄 모르고 오히려 시끄럽게 변해갔다.
“형뿐만 아니라 다른 것도 봤어. 길을 가다가도 남들이 안보는 이상한 것들이 눈앞을 아른 거렸어. 그래서 더더욱 밖에 나갈 수가 없었지. 술에 취했을 때에 용기가 나서 겨우 밖을 나설 수 있었을 정도야. 원래부터 그런 인간이었더라면 상관없었을 텐데 갑자기 그러니까 환장할 것 같았어. 정말 미칠 것 같았지.”
남들과 다른 것을 보는 기분을 지한은 모른다. 다만, 그런 것이 있다는 가정만으로도 자신은 미칠 것 같았는데 직접 본다면 그보다 더한 두려움과 절망을 느끼지 않을까. 그저 예상할 뿐이었다.
“민한이 녀석이 날 구해줬어. 그래, 그 애가 날 구하지 않았으면 난 미쳤겠지. 분명 그랬을 거야.”
이후는 계절이 바뀌고 달이 바뀌어도 집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아니, 나갈 수가 없었다. 자꾸만 눈앞에 나타나는 환상은 밖으로 나가면 더욱 심해졌다. 게다가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느끼는 공포는 차라리 혼자 있을 때보다 더 심했다.
그는 홀로 집안에 갇혀 태연히 눈앞을 지나다니는 망령과 하루하루를 보냈다. 형제의 죽음을 믿지 않고 그가 살아 돌아오길 바라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돌아오길 바란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차라리 죽음을 인정하는 일보다 어려웠다.
알았던 사람, 정말 좋아했던 사람이라고 해도 죽은 사람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란 힘든 일이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두렵고 무서웠다. 사랑했던 사람이 망령이 되어 자신을 맴돈다는 사실이 괴롭고 두려웠다. 한편으로 원망스럽기도 했다.
나 혼자 살아남은 게 잘못된 일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자신들은 한날한시에 태어났으니까, 당연히 죽음도 함께 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할지도. 그렇다면 차라리 나를 데려가. 이후는 이성의 모습을 한 환영을 향해 몇 번이고 외쳤지만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혹 자신이 미친 것이 아닐까 의심하며 두려워하며 그는 죽은 형제와 함께 살아야 했다. 처음엔 놀라고 두려워했지만 나중엔 무감해질 정도로 환상은, 그는 이후의 곁을 빈번하게 맴돌았다. 말을 걸어왔다. 살아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하지만 이후는 그것을 자신의 형이라고 믿지 않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날씨가 따듯해 졌는데 좀 나가보지 그래?
-…….
-집에만 있으면 답답하잖아
아무리 무시해도, 그것은 그런 자신을 무시하는 것처럼 계속해서 말을 걸고 곁을 떠나지 않았다. 시선을 주지 않고 일부러 다른 곳을 보며 버텼지만 그것이 보내는 시선은 살아있는 사람의 것과 달리 뼛속깊이 침투하는 냉기와 스산함을 동반하고 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어딘가 이상해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후는 몸을 일으켜 손에 잡히는 물건을 집어 던졌다. 천천히 컵이 추락하고 파편이 튀었다.
-시끄러워.
당연히 영혼은 상처 입지 않는다.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그는 말없이 이후를 바라보다 사라졌다. 그래도 곧 나타나리란 것을 알았다. 왜 살아 있을 때 그렇게 자신에게 다정했던 사람이 죽은 후에 자신을 괴롭히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
-여기 있었네.
고요해 졌다 싶더니 다시 들려온 목소리에 짜증이 일었다. 그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쏘아붙이려던 말이 차마 나오지 못하고 멈추었다. 그것은 망령이 아닌 정말 살아있는 사람이었다. 민한이었다. 그는 이후의 사나운 표정에 겸연쩍은 표정으로 변명하기 시작했다.
-문을 열어놨길래 들어왔어. 방해했나.
-놀랐잖아.
이후는 자신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또 그 이상한 환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화난 표정을 했지만 사실 그가 반가웠다. 오랜만에 보는 살아있는 사람이었으므로. 하지만 안도하는 마음과 달리 이후는 그리 상냥할 수 없었다. 오히려 반대로 행동하게 된다. 자꾸만 나타나는 그의 존재가 의심스러웠다. 고마워해야 할 일인지도 몰랐지만 이후는 타인의 이유 없는 친절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 정도로 정신이 예민하고 허약해져 있었다. 의심하고 쓸데없는 오해를 키우며 말도 안 되는 증오를 키운다.
-왜 왔어?
-내가 가끔 찾아온다고 했었잖아.
그래도 이렇게 자주 인지는 몰랐다. 거의 일주일에 한 번꼴인 것 같았다. 청소를 해주기도 하고 잘은 못하지만 밥을 해준 적도 있었다. 멋대로 자신의 얘기를 떠들다 갔다. 이후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대학동아리에서 영화를 찍고 있다는 것, 최근에는 다른 분야에 관심이 생겨서 따로 뭔가 만들어볼까 생각중이라고 했다.
-오늘 날씨 정말 좋아. 집에만 붙어있기 아까운 날씨야.
똑같은 말이었지만 녀석이 하는 말은 살아있는 인간의 말이기 때문일까. 전혀 다른 기분이었다. 게다가 민한은 이후의 거친 태도에도 아랑곳 않고 웃었다.
-상관하지 마.
-진짠데. 뭐, 싫으면 할 수 없지.
바보 같을 정도로 한결같았다. 보통은 넘어갔을 일을, 날카로운 마음 때문이었을까 그날만은 쉽게 넘기지 못하고 시비를 걸었다.
-밥은 먹었니. 나 밥 안 먹었는데.
-관두라고. 내 말 안 들려?
주방으로 향하려는 민한을 막아서며 이후가 외쳤다. 그 태도의 강경함 때문인지 험악한 표정 때문인지 그는 얼어있었다.
-내가 불쌍해서 이러는 거냐구. 그래, 듣자하니 자선사업이 취미라고는 하던데.
비꼬는 말투에도 그는 동요하지 않고 차분히 표정을 가라앉혔다. 웃음은 살아나지 않았지만 그는 떨지 않았다. 다만 눈가에 서서히 가라앉는 슬픔이 느껴졌다.
-아니. 그 반대야.
-반대?
-사실 내가 쓸쓸해서 오는 거라구.
김이성이 없기 때문에. 일까? 이후는 예전에 둘 사이를 눈치 챘지만 그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여전히 사이가 좋아보였고, 집에 놀러오는 일도 있었지만, 가끔 싸우는 모습을 본 적도 있었다. 이성이 혼자 괴로워하는 일도 목격했었다. 어쩌면 잘 안 되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었다. 그래도 그들은 대체로 즐겁고 평화로워보였다. 형제라도, 아니 형제이기 때문에 더욱 참견할 수 없었다. 죽기 얼마 전까지의 기억을 떠올려 보면 그랬다.
확실한 것은 그의 죽음을 가장 많이 슬퍼했던 사람이 윤민한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장례식장을 내내 지키며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오히려 현실감이 없어 슬픔조차 모르고 지나갔던 이후와 달리 그는 격렬히, 온전히 슬퍼하고 있었다.
-그런 소리 함부로 했다간 보기 싫은 걸 볼지도 몰라.
하지만 그런 민한이라고 해도, 그를 그만큼 그리워하는 사람이라 해도 실제로 그를 만나면 어떨까. 그의 귀신을 본다면 어떤 기분일까. 이후는 진심으로 궁금해 졌다. 자신이 보는 망령을 그 역시 보게 된다면 그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때도 지금처럼 웃을 수 있을까.
-난 네가 보고 싶어 하는 녀석을 매일 보고 있거든.
-…….
-귀신 말이야.
민한의 표정이 놀란 듯 경직되었다. 이후는 속으로 웃었다. 그래. 놀라겠지. 놀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마 곧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화를 낼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후가 거짓말이 아니라고 한다면 미쳤다고 비난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대했던 반응은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았다.
민한은 무언가 말할 듯하다가 그대로 등을 돌려 방에서 나갔다. 돌아올 반응에 준비하고 있던 이후는 오히려 당황했다. 혹시 너무 놀라서 도망치는 건가. 이후는 천천히 그를 따라갔다. 민한이 향한 곳은 현관이 아니라 주방이었다. 그는 주방 찬장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라면 밖에 없네. 혹시 쌀은 없어?
-없을 텐데……. 근데 정말 밥 해먹을 생각이냐?
-어. 나 지금 무지 배고파. 배고프니까 밥 먹고 얘기 하자.
너무 놀라서 이러는 건지, 원래 여유 있는 성격인건지. 이후는 기가 막혀 잠시 그의 웃음을 바라보았다. 결국 그 여유 만만함에 지고 말았다. 일단 그도 오래 굶어 배가 고픈 참이었다. 비록 라면뿐이긴 했지만 오랜만에 하는 식사였다. 식사라는 일상적인 행위조차 이후에겐 낯설어진지 오래였다.
-그거 정말이니?
한참 후에야, 허기짐을 채우고도 한참이 지난 후에야 민한은 물어왔다. 조심스러웠지만 두려움은 느껴지지 않는 물음이었다.
-그래.
믿을까, 말까 고민을 하는 걸까. 아니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고 있는 걸까. 민한은 그대로 심각하게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커다란 동요나 충격은 없었다.
-난 미치기 일보직전이라구. 자꾸만 이상한 게 보여. 있어선 안 될 사람이 옆에서 얘기 하고 있단 말야.
말로는, 설명으로는 알 수 없을 것이다. 직접 겪지 않으면 그 이질적이고 소름끼치는 감정을 모른다. 보이지 않는 게 보인다. 죽은 사람이 살아있는 것처럼 말한다. 그런 것이 자신에게만 보인다. 끔찍한 고독이며 비극이었다. 누구에게도 그 고통을 이해받을 수 없을 것이다. 머릿속에 벌레가 기어가는 것 같았다. 뇌를 파먹고 신경을 갉아먹는 것 같다. 환각 증상이란 게 이런 걸까. 그는 그때마다 그런 생각을 했다.
-왜 죽어서 날 이렇게 괴롭히는 걸까.
이대로라면 자신은 미쳐버릴 것이다. 미쳐서 죽을 것이다. 형은 그것을 원하는 것일까. 한날한시에 태어난 하나의 몸에서 태어난 자신들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안타까워 자신을 데리러 온 것일까. 그렇다면 차라리 얼른자신의 목숨을 가져가길 원했다. 그편이 현실에서 고통스러워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괴롭히려는 게 아닐지도 몰라.
단호한 목소리였다. 상냥한 웃음을 일부러 지어보이지도 않고, 시종 진지하고 차분했다.
-죽은 사람들도 우리가 그리울 거야. 네가 보고 싶어서, 걱정되어 그러는 건지도······. 아니, 분명 그런 걸 거야.
그 말은, 민한의 선하고 공정한 성품다웠다. 그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이후는 그의 말을 이해하고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이해하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왜 자신은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던가. 왜 자신을 생각해 곁을 머무는 이성을 나쁜 환상으로 망령으로 생각하고 두렵고 불쾌하게 생각했던 건지. 그는 자신의 짧은 생각을 후회하고 반성했다.
다음부터는 종종 나타나는 이성을 무섭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살아있을 때처럼 대해보기도하고 가만히 바라보기도 했다. 그러자 그는 오히려 말이 없어지고 희미해 졌다. 마침내는 나타나는 횟수도 줄어갔다. 다른 환상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형의 환상 말고도 거리에서 종종 다른 끔찍한 환상을 보곤 했었는데 그런 일도 점차 줄어들었다.
단지 한마디로, 생각을 바꾼 후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 가끔 만나게 되는 상식 밖의 장면들도 아무렇지도 않게 넘길 수 있었다. 어차피 실재하지 않는 존재들,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다. 못한다. 그들은 실재하는 이편의 사람들의 그리워하며 원하며 곁을 맴도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는 그렇게 달라진 것을 받아들이고 다시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
빗소리가 그쳤지만 빛이 느껴지진 않았다. 그렇다고 완전히 어두운 것 같지도 않았다 . 저녁일까. 새벽일까. 얼핏 핸드폰 벨소리가 들려왔다. 내 건가. 지한은 익숙한 멜로디라고 생각했다. 이후가 일어나 옷 사이에서 그것을 찾아냈다. 그는 그것을 잠시 무표정하게 바라보더니 망설임 없이 던져 버렸다. 배터리가 분리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그는 소리가 멈추자 지한의 옆에 앉았다. 등 뒤에 그의 체온이, 심장 소리가 느껴졌다.
“정말 내 동생을 본적이 없어?”
지한은 등 뒤의 사람에게 말했다. 표정을 보지 않은 채였지만 거짓말을 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거짓말을 해도 사실 상관은 없었다.
“없어.”
“정말 한번도?”
그의 손이 다가와 뺨을 만지고 목을 어루만지고 벗은 몸을 천천히 애무했다. 의미 없던 행위에 욕망이 깃들었다. 이미 알몸이어서 거칠 것도 없었다.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었다. 그가 가슴을 애무하며 어깨를 깨물었다. 아찔한 상처 위에 혀 바닥이 스치고 또 안심하면 몇 번이고 깨물렸다. 그는 그런 식으로 깨물고 자국을 남기는 것을 좋아했다.
“생각해봐. 그런 녀석이 남에게 폐를 끼칠 일을 하겠냐구.”
지한은 서서히 퍼지는 미지근한 열기와 통증에 눈을 감으며 그의 말을 상기했다. 자신을 향한 맹목적 미움을 묵묵히 견디던 동생을 떠올리면, 그의 말은 옳았다.
“그래. 죽어서도 마찬가지야.”
뒤늦은 대답이 돌아왔다. 그의 손은 허리 뒤를 끌어안으며 사타구니 사이로 들어왔다. 등 뒤로 이미 선명하게 부풀어 오른 그의 욕망이 아프도록 엉덩이 사이를 찔러 대고 있었다.
“그럼 왜……. 나한테 그런 거짓말을 했어?”
자신의 말을 듣는 건지, 듣지 않는 건지 그는 오로지 다른 행위에 열중해 있었다. 미약하게 반항하며 힘을 주던 다리가 그가 성기를 만지작거리자 힘없이 벌려졌다. 그는 그 사이에 자신의 페니스를 끼우고 노골적으로 문지르고 찔렀다. 금방이라도 안으로 들어올 것 같이.
“왜 그런 짓을, 읏, 아……!”
마침내 몸이 완전히 뒤집히고 그가 페니스를 찔러 넣었다. 이미 몇 번의 행위로 풀어져 있던 곳은 어렵지 않게 그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혹사당한 몸은 그가 오갈 때마다 아프다고 비명을 질렀다. 자꾸만 두 다리가 아래로 꺼질 것만 같았다.
이후는 허물어지려는 허리를 붙잡아 올리곤 거칠게 움직였다. 시트에 입술을 묻은 채 나오려는 신음을 참았다. 고개를 뒤틀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엔 뜨거운 욕망과 차가운 슬픔이 기름과 물처럼 분리 되어 있었다.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호흡 사이로 끊임없이 묻는다. 도대체 왜, 왜, 왜……. 마음속의 의문이 커질수록 그의 움직임이 한층 거칠어졌다. 다리가 벌려지고 허리가 휘었다. 모든 것이 엉망으로 섞이고,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글쎄. 왜 일 것 같아?”
그는 여전히 쉽게 대답을 들려주지 않았다.
일상이 안정되고 이후는 학교로 돌아갔다. 뭘 할 생각이건 학교를 졸업하는 게 어떻겠냐고 민한이 충고해왔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이후는 그의 말을 따르고 의지했다. 그는 기꺼이 도움을 주고자 했고 이후에게도 거절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후는 그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형과의 관계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사람으로서 받아들인 것이었다.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성이 그토록 좋아했던 사람이므로 끌리는 것도 당연했다. 사실 끌리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세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자신의 반이 죽은 채인 이후는 예전과 완전히 같을 수 없었다. 현실은 형의 죽음과 죽음 이후로 극단적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파란 하늘도 사람들도 예전에 보던 것과 판이하게 달랐다.
민한은 전보다 더 자주 이후의 집을 오갔다. 어떤 날은 일주일 내내 있었던 적도 있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해도 이정도로 붙어있어도 되는 건가. 성격 탓에 달리 친구가 많지 않던 이후도 이상하게 여겼다. 어떤 사정이라도 있는 걸까.
-사실 난 우리 집이 싫어.
그처럼 모범적인 인간이 하는 말로는 어울리지 않았다. 평소처럼 웃으면서 하는 말도 아니었다. 거기다 약간 표정을 찡그린 채였다. 농담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럼 나와 살지 그래?
그를 좋아하고, 그의 존재를 기꺼이 반기면서도 이후는 그의 성격만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억지로 바꾸라고 할 생각은 없었지만 스스로를 희생시켜가며 남을 위하는 ‘자원봉사’따위는 집어 치웠으면 좋겠다. 그렇게 괴로운 표정을 지으면서.
-나까지 나오면 부모님이 적적하실 테니까 안 돼. 안 그래도 밖으로만 나돈다고 서운해 하시니까.
무엇이 싫은 걸까. 이후가 보기에 민한은 부모님과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아니, 함께 있을 때 종종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걸려오는 걸 보면 오히려 굉장히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그런 어머니가 있는 집이 싫다고 했다. 답답하고 견디기 힘들다고 했다.
-그렇게 싫은데 왜 참아?
-나도 모르겠어. 왜 참는 걸까, 난. 항상 답답하고 힘든데 난 멍청한 표정으로 웃고 있어. 어렸을 때부터 습관이라 그래. 난 반대로 해. 힘들면 웃어. 너무 자주 그래서 버릇이 되었나봐.
이후의 경우엔 예전부터 화가 나면 있는 대로 성질을 부렸다. 덕분에 싸움에 자주 휘말렸고 가족들이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힘들었긴 했다. 하지만 그편이 훨씬 살기 편하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니까 마음의 짐 같은 것은 없다. 민한은 그런 자신과 정 반대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오래도록 참아온 일이란 무엇일까. 참다못해 바래버린 표정이 안쓰럽다 생각되었다.
-뭐가 그렇게 힘든데?
알아도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궁금했다. 도와줄 수 있는 거라면 도와주고 싶긴 했다. 그쪽이 자신보다 훨씬 성숙하고 어른인 인간이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하지만 그는 곤란한 듯 웃으며 말하지 않았다.
숨기는 것이 있다고 생각했다.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가까워지고 자주 만날수록 그런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데, 너 나를 형 대신이라고 생각하냐.
그렇다고 느낀 적은 없었지만 혹시나 싶었다. 이후는 혼자 끙끙 앓을 체질은 아니었다. 궁금하고 이상한 게 있으면 어떻게든 알아내는 쪽이 속이 편했으니까. 민한은 기가 막힌다는 듯 웃었다.
-말도 안 돼. 너희는 얼굴 빼고는 완전히 틀려. 하나도 안 닮았는데.
-아니면 형한테 미안해서 이러던가.
오래전 일이라 잘 기억은 안 나지만 그때 옛날 이성에게 들은 얘기가 떠올랐다.
‘내가 걜 좋아하는데 걘 나보다 다른 사람을 좋아해.’
어쩌지 못하는 무력함에 씁쓸해 하는 얼굴. 쓸쓸한 웃음. 그 표정만은 목소리보다 더욱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의 표정이 약간 흔들린다고 생각했다. 분명 잘못 들은 건 아니었는데 그 뒤에 어떻게 된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아무리 부모보다 가까운 형제간이라 해도 말해주지 않고, 일부러 묻지 않는 한 모른다. 이후는 이성의 그런 얼굴을 보고 의식적으로 그 주제를 피했다. 그러고도 둘은 오래도록 함께여서 괜찮은가 보다 했었지만.
-너 양다리였잖아.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건가.
그럴 생각은 아니었지만 속이 좁은 탓인지 몰라도 괜스레 목소리가 차갑게 나갔다. 이후의 따지는 듯한 말에 민한은 잠시 당황했다. 자신이 어떤 말을 해도 끌어안고 웃어보이던 그가 긴장으로 표정을 굳혔다. 그는 뻣뻣한 표정을 풀려고 애쓰고 있었다.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던 건 사실이야. 하지만 날 좋아해주지 않았어. 아니 오히려 날 싫어했어.
괜한 소릴 한 건가, 후회할 때쯤 자신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후는 일부러 가볍게 대답했다. 무거운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널 싫어하는 사람도 다 있냐.
-있어. 적어도 세상에 딱 한 명. 날 절대로 돌아보지 않는 사람.
절대. 라는 말은 어떤 시간을 보낸 후에 나오는 말일까. 그게 벌써 고등학교 때니 아직도 진행 중이라면 꽤 오래된 게 맞을 것이다. 이후는 그의 마음이 진행 중이라고 확신했다. 민한의 표정이 죽은 사람의 추억을 말할 때보다 더욱 어두워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난 네 형한테도 똑같은 짓을 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어.
죄책감. 확실히 그는 이성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후가 생각했던 것보다 복잡하고 깊은 감정이었다.
-우습지? 그렇게 날 돌아보지 않는 사람을 야속하게 생각했는데, 나야말로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 똑같은 짓을 했어. 아니, 어쩌면 난 그 사람보다 나쁜지도 몰라. 난 날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을 순전히 이용했으니까. 외롭고 쓸쓸해서 네 형에게 기댔어. 그러면서도 별로 미안한 마음도 없었어. 좀 더 잘했어야 하는데……. 그런데 이젠 기회를 영영 잃었어.
역시 괜한 얘기를 꺼냈다고 생각했다. 들어서 속이 시원할 줄 알았는데 더욱 갑갑해 졌다. 끔찍하도록 무겁고 어쩔 수 없는 얘기들은 사람을 피곤하게 한다. 아무리 얘기해도 같은 결론이 나올 얘기.
-그 사람을 지금도 좋아해?
-응.
-그럼, 형이 살아있었어도 마찬가지였을 테지. 그런 걸 미안해하지 마. 어쩔 수 없는 거잖아?
미안해한다고 달라질 일도 없다. 사과를 들었더라면 그는 더 비참했겠지. 그렇지? 이후는 보이지 않는 곳을 향해 물었다.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죽은 형은 자신의 안에 늘 함께 하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형의 죽음을 받아들인 것도 사실 눈앞의 사람 덕분이었다. 그런데 그는 여전히 벗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그러면 내가 김이성 대신 용서해주지. 아마 그 자식도 널 원망하진 않았을 거다.
-그런 건, 말도 안 돼.
펄쩍 뛸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후도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쪽보다는 이쪽이 그의 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는 보지 못했을 표정과 마음을 모두 안다. 민한은 그것을 몰라 괜한 죄책감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돼. 우린 한 몸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아니 한 몸이니까.
어쩔 줄 모르고 방황하던 표정이 마침내 무너지듯 사라졌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을 일어나지 않았다. 울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이후는 그가 흐느낌을 멈추고 고개를 들기를 기다렸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격렬한 감정을 보낸 민한이 고개를 들었다. 맑은 눈가가 기운을 잃은 듯 쳐져있었다.
-사실 나는 내 형을 좋아해.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 일 것이다. 이후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차분한 눈동자를 마주했다.
*
깊은 한숨 소리와 함께 뜨겁던 몸이 떨어졌다. 그는 지친 듯 지한의 옆에 몸을 눕히고 한동안 거칠게 숨을 골랐다. 지한 역시 그와 같은, 아니 그보다 더한 피로에 몸을 늘어뜨리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어떤 순간보다도 머릿속은 또렷했다.
“날 보내줘.”
애원의 말은 결코 아니었다. 지한은 이미 자신에 대한 걱정이나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그를 생각하면 이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당신을 위해서 하는 말이야. 내가 오랫동안 보이지 않으면 실종처리 될 거고, 당신하고 내 관계를 아는 사람도 있으니까……. 금방 알게 될 거야.”
믿을지 모르겠지만 정말로 걱정이 되었다. 사실 지한의 말은 하나의 과장도 없이 사실이었다. 이후가 하고 있는 일은 엄연히 납치감금이었다. 그가 자신에게 잘못한 일이야 그밖에도 많았지만 일단 처벌가능성 있는 죄목을 따져보면 그 정도였다. 그런 것을 걱정하는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이런 일을 벌이지도 않았을 거란 건 알고 있지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날 걱정해서 하는 말이야?”
“그래.”
그는 의외로 선선히 지한의 걱정을 받아들였다. 비꼬거나 역정을 내는 일 없이.
“고마워. 고맙지만 아직은 아니야.”
그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물끄러미 바라보자 필터를 들어 보인다. 고개를 끄덕이자 곧 입에 물려주었다. 미지근하고 씁쓸한 담배 연기가 폐 속으로 들어왔다. 무언가 녹는 기분이었다. 사실은 폐가 썩는 중이겠지만 차라리 쾌감이 일정도로 기분 좋은 감각이었다.
“당신 생각보다는 착한 것 같아. 나 같은 인간을 걱정도 해주고 난 사실 정말 못된 인간일 거라고 생각했거든. 냉혈한에 피도 눈물도 없는 마왕정도 되려나 생각했지.”
그렇게 말하며 이후는 즐거운 듯 웃었다. 하지만 지한은 그의 농담에 웃을 수 없었다. 이후는 지한의 입에 물려주었던 담배 필터를 가져가 다시 제 입에 물렸다.
“그렇다고 녀석이 당신 욕을 했던 건 아냐. 그럴 리가 없지. 많은 얘기를 해줬지. 사실 내가 해달라고 한 적도 있었어.”
“왜?”
“궁금했거든. 내 형이 아무리 자길 좋아해도 소용없을 정도로, 그 정도로 좋아했던 사람이 누구인가. 나 같은 인간도 이 녀석을 싫어하지 않는데 어떤 인간이 감히 싫다고 내치고 구박하나. 어쩌면 질투를 했던 것도 같아.”
언젠가도 들었던 얘기인 것 같다. 물론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상황에서 훨씬 차가운 표정으로.
“그래서 나한테 이러는 거야?”
“틀려. 전혀·····.”
이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다. 알듯 말듯 머릿속에 여러 가지 사실이 겹쳤다 흩어진다. 그의 얘기를 들어도 모르겠는 것 투성이었다. 더욱 늘어가는 것만 같다.
“당신은 아직 중요한 걸 몰라.”
이후가 민한의 도움을 받아 일상으로 돌아오고 그럭저럭 사람처럼 살아가게 된 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이후는 그는 어떨까 생각했다.
민한은 겉보기에 문제가 없어 보였다. 처음 만났을 때와 다름없는 한결 같은 모습. 성격이 좋고 사람이 성실해 그의 곁에는 늘 사람이 넘쳤다. 꿈이 있었으며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착실히 자신의 인생을 쌓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점점 말라가고 어두워졌다. 그 어둠은 얼핏 보기에 표시나지 않았다. 하지만 늘 곁에서 바라보는 사람의 눈에는 자꾸만 어른거려 간혹 그의 얼굴을 완전히 덮어버리곤 했다.
간혹 술에 취해 찾아오는 날이면 민한은 늘 자신의 형 얘기를 했다. 자신의 형을 좋아한다고 울면서 고백한 후에 그는 이후에게 형의 얘기를 자주 했다. 그것은 어둠이 깊을수록 더욱 자주 그랬다. 하지만 그는 얘기를 하는 것만으로는 자신의 어둠을 떨쳐낼 수 없었다. 오히려 얘기 할수록 그것은 더욱 짙어 졌다.
-차라리 내가 죽는다면 형은 날 생각해 줄까.
술주정인걸 알기에 이후는 대답하지 않았다. 민한은 그가 듣든 말든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어차피 그는 별다른 대답을 원해서 말하고 있는 게 아닐 것이다.
-좀 더 잘해줄걸, 그런 생각을 할까.
하나마나한 가정이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산사람이었다. 함께 있을 수 없었다. 이후는 그때도 간혹 형의 환상, 혹은 그의 영혼을 보았지만 아무리 함께 있다 해도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었다. 제대로 만질 수도 대화를 할 수도 없었다. 그저 안타까움뿐이었다.
-오늘 우연히 길 가다 형을 만났는데, 날 피하더군. 적어도 아는 체를 할 거라고 생각했어. 옆에 있던 사람에게 동생이라고 소개해주진 않더라도 말야.
이후는 그의 형에 대해 많은 얘기를 들었다. 그들은 보통의 형제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이복형제라는 것을 제하고라도 그렇게 모질고 일방적인 관계가 있을까. 처음엔 그의 모진 형을 욕했지만 나중에 이상하게 생각될 뿐이었다.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민한은 자신의 형을 부도덕한 감정으로 바라보고 있었으나 그가 원하는 것은 겨우 따뜻한 말 한마디, 상냥한 시선일 뿐이었다.
-차라리 모르는 사이였더라면 좋았을까.
한숨 같은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았다. 이후는 그제야 몸을 일으켜 민한에게로 다가갔다. 축 늘어진 몸을 일으켜 자신의 침대에 던지듯 내던져놓았다. 저러다 술이 깨면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서둘러 집으로 돌아갈게 뻔했다. 늘 같은 패턴이었다. 이후는 지겹다는 생각보다는 안됐다는 생각을 했다.
-좀 그만두면 안 돼?
이성도 분명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자신처럼 안타까워하고 때론 짜증도 내며 화를 냈겠지. 하지만 그가 못한 일을 자신이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저 지켜보는 일 밖에 할 수 없었다.
-넌 이래서 아직도 그러고 있는 거냐?
그는 등 뒤에 서 있는 희미한 형체를 바라보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자신의 반쪽을. 이제는 희미하고 빛이 바래 사라지기 일보직전이었지만 간혹 뒤를 돌아보면 죽은 형제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적어도 그는 연애를 제외하고 모든 일은 잘 풀렸다. 대학 졸업전 출품한 작품이 상을 받았고 방송국에도 수월하게 들어갈 수 있었다. 대학 졸업 후, 그는 더욱 바빠졌다. 그전부터도 바쁜 사람이었지만 더욱 피부에 와 닿을 정도로 바빠졌다. 이후도 학생 때 취미로 시작한 작곡을 졸업 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놀기만 할 수가 없었다. 서로 일이 많아지고 여유가 없어지면서 얼굴을 보는 일도 줄어들었지만 서운하다기 보다는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에겐 그 편이 나을 것이라 생각했다. 감정을 소모할 시간도 없이 바쁘길 원했다. 그러다 보면 서서히 잊혀 지겠지, 포기하게 되겠지. 그렇게 되기를 원했다. 민한은 이후가 유일하게 행복하게 되길 바라는 사람이었다. 그정도로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난 너라면 섹스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이후는 지나가는 말로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남자에게 욕정 한 적도 흥미를 느끼지도 않지만 어쩌면 윤민한이면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 정도로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민한은 못된 농담이라고 핀잔을 주었다.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라고 해도 믿어주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과 감정은 별개인 모양이었다. 그는 변하지 않았다. 조금도. 정말적일 정도로 여전했다.
민한이 오랜만에 집에 찾아왔다. 약간 타고 말라 있었다. 해외 출장을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커다란 짐까지 그대로. 집에 가서 짐을 풀지도 않고 곧장 이곳으로 온 모양이었다. 그는 몹시 피로해 보였다. 단순히 여행의 피로 때문이 아닌, 다른 이유가 있는 모양이었다. 이후는 대수롭지 않게 그를 맞았다.
-선물.
안으로 들어온 민한은 불쑥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워낙 여행이 잦은 사람이라 작은 선물을 하는 일은 흔했지만 이번 건 좀 고가였다. 브랜드 네임이 익숙한 선글라스였다. 아마도 돌아오는 길에 면세점에서 산 것 같았다. 돈을 많이 버는 녀석도 아닌데 이정도면 꽤 마음먹고 샀을 것이다.
-나 생일 멀었는데?
의아함에 묻자 피로한 얼굴에 웃음을 떠올랐다. 맥없이 웃는 얼굴이 심상치 않다 생각하면서 이후는 그것을 꺼내서 자세히 보았다. 눈썰미 있는 녀석이라 디자인은 꼭 마음에 들었다.
-실은 다른 사람한테 주려고 샀는데……. 못 줬어.
이후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자연스럽게 누군가를 떠올렸다. 그의 표정 때문이었다. 민한이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은 딱 한 사람 때문이었다. 모른 체하며 이후는 그것을 내려놓았다.
-비싼 거 같은데 정말 가져도 되냐. 나 한 번 받으면 절대 안 뱉는다.
-안 뺏어. 걱정 마.
-혹시 그 사람 주려고 샀던 거냐. 너희 형.
역시 맞는 모양이었다. 말이 끊기고 웃음이 사라졌다. 그의 얼굴이 한층 어둡게 변했다.
-선물도 안 받는다고 하냐.
-그런 건 아니지만…….
들어올 때부터 느껴졌던 심상한 기운은 이런 이유였나 보다. 잠잠하다 싶더니 또 인가. 이후는 익숙한 일이라 이젠 화도 나지 않았다. 이제는 조금 관조적인 자세였다. 안타까운 마음은 별개로 존재했지만 자신이 아무리 화를 내도 안타까워해도 그가, 그리고 그들은 변할 리가 없었다. 결국 자신은 구경꾼일 뿐이었다.
-난 거절당하는 데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은가봐. 항상 무서워. 한 번 더 거절의 말을 들을까봐. 싫다는 말을 들을까봐.
이후는 한 번도 그런 고민을 한 적이 없었다. 좋은 것이 있으면 어떻게든 가졌고, 흥미가 떨어지면 그대로 버렸다. 사람을 사귈 때, 여자를 사귈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원망의 말을 들어도 미움을 받아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자신의 인생을 대신 살아주는 것도 아니면서 무슨 요구들이 그렇게 많은 건지. 이후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래도록 성실하게 마음을 키우며 조심스럽게 사귀는 일은 거의가 없었다. 유일하게 다른 건 친구인 민한 뿐일까.
이후는 그의 마음이 답답하게 느껴져, 반대로 그를 이해해보려고 노력한 적도 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너는 왜 이렇게 깊이 절망하고 있는 걸까. 왜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일까. 갖고 싶은 것이 있다면 어떻게든 가지면 되잖아? 그걸 가지지 못해서 숨이 막히기 일보직전인 표정으로, 괜찮다고 말하는 건 위선이 아닌가.
-결혼할지도 모른대.
-누가? 너?
이후는 난데없는 결혼선언에 놀라 물었다. 하지만 곧 그것이 누구를 가리키는 말임을 알았다. 체념의 눈빛, 그러나 그 안에 결코 포기되지 않는 감정이 분명히 보였다.
-형 말이야.
잠깐 눈을 붙이겠다며 민한은 소파에 누웠다. 그는 피로에 억눌려 기절하듯 잠들었다. 삼십분인가 후에 휘적휘적 몸을 일으켜 집에 돌아가겠다고 했다. 이후는 데려다 주겠다고 차키를 들고 따라나섰다. 불안한 마음 때문이었다. 그의 모습이 금방이라도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불안.
-이상하지. 어차피 형이 결혼을 한다고 해도 달라지는 일은 없을 게 당연하잖아. 여전히 형은 날 미워할 거고, 날 쳐다보지도 않을 텐데.
차 안에서도 그는 계속 꿈꾸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떤 꿈이냐면 아마도 악몽일 것이다. 악몽 속에 갇혀 있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 민한이 말했다.
-그런데 왜 난 이런 기분인걸까.
이후는 그런 기분이 당연하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아무리 가망 없는 상대라도 자신에게 늘 차갑기만 한 사람이라고 해도 좋아하는 사람에게라면 누구나 같은 감정을 가질 테니까. 욕망하지 않는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그는 형의 조그만 관심과 약간의 다정함을 원한다고 늘 말했지만 실상 원하는 것은 따로 있었던 것이다. 이후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당연한 것을 애써 외면하며 살아왔으니 병이 드는 것이다. 그의 병은 불치병이었다. 아니 난치병이었다.
-죽고 싶어.
이후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윤민한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놀랄 말이었다. 죽음은 자신 같은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말이었다. 그에겐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 곧바로 욕지기가 튀어나왔다.
-병신 같은 새끼. 헛소리 하지 마. 죽긴 왜 죽어.
-…….
-너 죽어버리면, 다시 죽고 싶을 만큼 후회하게 해 줄 거야.
민한은 놀라지도 않고 이후를 보고 있었다. 운전을 하느라 돌아보지 못했으나 그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있었다. 그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훗. 어떻게?
-궁금하면 죽어보든가.
-어떡하냐. 나 무서워서 죽을 수가 없겠다.
제 정신이 돌아왔나. 이후는 그가 잠깐 미쳤던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그런 말을 할 수 없다. 민한의 집에 도착해 차는 멈추었다.
-고마워. 다음에 보자.
들어가겠다며 인사를 하는 얼굴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악몽 속의 웃음, 그는 그곳에서 빠져나갈 곳을 잃었는지도 모른다. 붙잡을 새도 없이 차에서 내렸다. 민한이 집으로 들어간 후에도 이후는 오랫동안 떠날 수가 없었다. 기분이 끔찍하도록 우울했다.
전에도 와 본 적 있는 집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도 대궐 같지만 안에서 보면 더 넓은 집이었다. 하지만 이 넓은 집은 텅 비어 있다. 사람이 살고 있었지만 살지 않는 곳보다 공허했다. 민한은 이 집에 있으면 가슴에 구멍이 뚫린 기분이라고 했다. 구멍이 뚫린 채로 웃으며 구멍이 뚫린 채로 살아간다. 그는 그 기분이 싫어 자신 같은 인간에게 도망쳐 오기도 했다. 남들 앞에서 웃는 만큼, 아니 그보다 더 울었으며 절망했다. 그렇게 서서히 병이 들어갔다.
이후는 다시 차에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주머니에 넣어둔 것을 꺼냈다. 선물 받은 선글라스였다. 남의 선물을 가로채긴 했지만 그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원래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기 때문에 더 마음에 들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는 그것을 쓰고 쏟아지는 햇살을 바라보았다. 아직 날이 춥지만 햇살만은 강하고 따뜻했다. 이런 하늘 아래서 민한은 죽고 싶다고 말한 것이다.
맞은편에 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그 차는 민한이 들어간 집 앞에 바로 섰다. 이후는 출발할 생각을 못하고 그 차를 바라보았다. 차에서 사람이 내렸다. 젊은 남자. 자신 또래, 혹은 좀 위일까. 양복차림의 깔끔한 인상, 무미건조한 표정의 남자였다. 웃는다면 좀 더 잘 생겨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삭막한 얼굴은 변함이 없었다. 그는 무슨 일인지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
그 사람이구나. 이후는 어렵지 않게 그를 알아보았다. 민한의 형이었다. 민한이 그로 인해 병이 들 만큼 좋아하는 사람.
-윤지한…….
이후는 자신도 모르게 그 이름을 입 밖에서 꺼냈다. 착각이겠지만 남자가 자신의 목소리를 들은 듯 이쪽을 힐끔 쳐다보았다. 아주 잠깐이었다. 이후가 선글라스를 벗고 앞을 보았을 때 이미 그의 모습은 사라진 후였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귀 바로 옆에서 울렸다. 갑자기 술을 마신 듯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호흡이 뛴 것처럼 힘들어 졌다. 뭘까, 이 기분은. 이후는 조금 전에 저쪽에서 서서 자신을 바라보던 남자를 떠올렸다. 잠깐뿐이었던 시선을 기억하려 했다.
대체 이건 무슨 감정일까. 당혹스러웠다. 깊고 격렬한 미움인가, 아니면 혐오인가. 가슴은 여전히 진정이 되지 않았다. 가슴을 송두리째 사로잡혀 멋대로 조종당하는 것 같다. 이런 감정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왜 자신이 모르는 남자를 보고 이런 기분을 느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입술을 깨물고 숨을 몰아쉬었다. 이상한 징후는 쉽게 가라앉지 않고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며칠 후, 민한이 죽었다. 형의 약혼식에 간다고 전화했던 다음 날이었다. 잘 다녀오라고 말했는데 결국 돌아오지 못했다. 그는 결국 악몽 속에서 나오지 못했던 것이다.
*
“씻고 싶어.”
땀과 체액으로 엉망이 된 몸은 눅진하고 찝찝했다. 신경 쓸 틈도 없이 지쳐서 기절하기 일쑤였지만, 이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사실 씻어 내고 싶은 것은 다른 것인지 모른다. 몸의 오염보다는 마음의 오염을 씻어 버리고 싶었다. 깊이 섞여 버린 앙금들이 모두 빠져나올 리는 알 수 없었지만.
이후는 지한이 몇 번인가 그 같은 요구를 하자 하는 수 없다는 듯 그를 일으켰다. 손을 붙잡힌 채 거칠게 끌려가 욕실 안에 들어왔다. 샤워기 아래 쓰러지듯 주저앉자 곧바로 물줄기가 쏟아졌다. 얼굴을 찌르는 물줄기가 아플 정도로 세찼다.
“추워?”
몸이 미친 듯이 떨렸지만 지한은 고개를 저었다. 그가 내민 손을 붙잡지 않았다. 머리카락을 적신 물방울이 눈 위로 떨어졌다. 물소리가 가득 찼던 공간에 숨소리가 들어와 있었다.
“대체……. 언제까지 이럴 거야?”
이제 지한은 이후에게 사정하지 않는다. 그에게 그런 일은 통하지 않는다. 자신의 마음이 내키지 않는 일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동정도 협박도 논리도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해도 너무한다고 생각했다. 이미 충분히 잔인한 일을 했으면서, 기어코 자신을 죽일 생각이 아니라면.
“이만하면 됐잖아. 내가 아무리 미워도 그렇지 이건 너무·····.”
그 자신에게도 결코 즐거운 일은 아닐 테니까. 그는 괴로운 얼굴을 자주 했다. 전의 표정들과는 틀렸다. 잔인할 정도로 차가운 웃음도 냉소적인 시선도 없었다. 그는 불안에 쫓기고 안절부절못하지 못했다. 웃음소리는 기괴하고 거친 행동은 오히려 자신을 상처 입히고 있었다.
“그래. 난 당신이 미워. 미웠어! 그런 거라고 생각했어. 당연하잖아. 내가 당신한테 달리 다른 감정을 품는 게 말이 안 되지!”
이후가 손을 뻗어 지한을 거칠게 일으켰다. 멱살을 잡힌 채 힘없이 끌려갔다 벽에 세게 처박혔다. 등이 세게 울릴 정도의 통증에 기침을 토해냈다. 눈을 뜨자 젖은 얼굴이 보였다. 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액체가 그의 뺨을 흘러내리고 있었다.
“난 그저 동생이 죽었는데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남자를 꼭 울게 해줘야겠다고 생각했어. 그 멍청한 자식이 불쌍하고 안타까워서, 그 녀석이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를 알려주려고. 그러려고 그따위 웃기는 연극을 했던 거야. 알아?”
단단하고 강한 그의 팔에 힘을 잃고 떨어졌다. 이윽고 그는 지한에게 몸을 기댔다. 무게를 견디지 못한 지한의 몸이 벽을 타고 주르륵 내려앉았다. 두개의 몸이 구겨지듯 바닥에 쓰러졌다.
많은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이후는 여전히 몸을 일으킬 줄을 모른다. 지한은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당황할 일은 이제 없을 거라 생각했다. 더 놀랄 일도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괴롭고 힘든 얼굴을 한다. 타인의 감정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실제로 그의 감정이었다.
“녀석인 체 살다보니 뭐가 먼지 모르게 되었어. 당신을 좋아하고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이……. 진짜가 되어버렸다구.”
고개를 든 얼굴이 흐느끼듯 말한다. 지한은 멍하니 눈을 들어 그를 올려볼 뿐이었다. 어떤 기시감이 마음속에 퍼졌다. 부드러운 파동은, 그렇지만 격렬하게 안을 흔들었다.
“이상한 일이지. 감정도 전염이 되는 가봐. 그런 걸까?”
그는 오히려 지한에게 묻는다. 아무것도 모르는, 몰라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에게 묻는다.
“당신을 좋아해.”
“…….”
“윤민한이 아니라, 내가. 내가 당신을 좋아하고 있어.”
놀라지 않았다. 왜냐면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민한이 아닌 이 남자와 몸을 섞었을 때도 느꼈던 감정이며, 들었던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고백이 한층 괴롭고 간절했다.
“날 어떻게 해줘. 제발.”
지한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만 손을 뻗어 그를 끌어안았다. 그를 안자 어쩐지 울고 싶은 격렬한 기분이 들었다. 닿은 피부위로 그의 감정이 생생히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감정이 혈관을 타고, 피를 통해 전해진다. 이런 느낌이 그가 말한 전염인걸까. 그렇다면 자신도 이미 전염된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