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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심화 [深化] (3/6)

3. 심화 [深化]

또 다시 잠들지 못하는 밤이다. 일상이 되었다고 하나 괴로움까지 익숙해 진 것은 아니었다. 지한은 수면제를 찾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수면제가 그의 머릿속의 고민들까지 잠재워 주길바라면서. 지난 몇 개월 생각 없는 밤이 없었지만 오늘 밤은 특히 그랬다. 

금요일 밤, 지한은 일을 일찍 끝내고 약혼녀와 저녁식사를 했다. 오랜만의 데이트인 셈이었다. 그는 일부러 그녀가 좋아하는 장소를 골랐고 옷차림에도 신경 썼다. 음식은 맛있었고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민혜는 기본적으로 말솜씨가 좋았다. 누구와 함께라도 잘 어울리는 사람, 어딜 가나 빛나는 사람이었다.

“어머님이 우리 결혼 날짜 다시 상의하자고 부르셨어.”

민혜가 갑자기 꺼낸 얘기에 지한은 손을 멈추었다. 그는 스테이크 대신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잊고 있던 가족의 존재가 불쑥 떠오를 때면 지한은 어색하고 거북한 기분이 들었다.

지한은 차라리 자신들의 결혼이 미뤄져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상태로는 누구와도 행복할 수 없었다. 적어도 불행하지는 않아야 하지 않을까.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를 위해서라도 모든 일이 해결된 후에 결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해결할 자신도 없으면서 무책임한 건지도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여름엔 번거로우니까 가을쯤, 10월이 어떻겠냐고.”

“그랬구나.”

“못 들었나보네. 하긴, 나도 놀랐어. 내년 봄으로 미루자고 하시던 분이 웬일인가 했지.”

애써 잘됐다는 말은 했지만 입안이 씁쓸했다. 지한의 어머니는 그의 인생에 있어서 여러모로 얄궂은 사람이었다. 정확히는 그들 모자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민한 또한 지금 그의 발목을 잡고 있는 사람 중 한명이었다. 죽어서까지 말이다.

“자기는 별로 안 기쁜 얼굴이네.”

“아니. 기뻐.”

물론 겉으론 오해라고 웃으며 변명했다. 하지만 그렇게 보았다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민혜는 똑바로 보고 있었다. 자신이 거짓말쟁이 일뿐.

서로 기분 상한 것 없이 재밌게 떠들고 웃다가 헤어졌다. 하지만 어딘지 석연치 않은 구석이 그녀의 웃음이나 농담 사이사이에 끼어들었다. 지한은 점점 자신이 없었다. 그녀에게 언제까지 거짓말을 할 수 있을지. 이미 그녀는 자신의 변화를 눈치 챘다. 알지만 말하지 않을 뿐이었다. 참지 못해 말하는 순간이 올 것이었다. 분명히.

약을 먹기 위해 물을 찾아 주방에 들어갔다. 수면제를 먹어도 약효가 돌때 까지는 얼마간을 기다려야 할 것이었다. 시계를 보니 새벽 3시를 넘기고 있었다. 드물게 출근하지 않는 토요일이란 게 다행스러웠다. 

주 5일제가 기본인 회사였지만 그의 경우엔 토요일은 물론 일요일에 출근하는 때도 많았다. 다행히 이번 주말은 오랜만에 쉴 수 있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찾지만 않는다면. 많이 아픈 건지 몰라도 그는 연락해 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먼저 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이상한 연민은 그때 한번으로 충분했다.

수면제를 삼키려다 식탁 위에 놓인 채 며칠째 그대로인 봉투를 발견했다. 혜석이 선물한 차였다. 재스민 차였나, 국화 차였나. 수면제를 먹는 것보다 나을 거라며 사양하는대도 억지로 손에 쥐어준 것이었다. 지한은 손바닥에 털어놓은 알약을 바라보며 잠시 고민하다 그것을 싱크대에 버렸다. 대신 차를 끓이기 위해 물을 올려놓았다. 내일은 그에게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지난번에 얘기 하지 않은 것을 말하기 위해서였다.

*  

어린 시절, 늘 뒤를 따라오는 시선이 있었다. 귀찮을 정도로 한곳을 쫓아오는 시선을 지한은 싫어했다. 돌아서 화를 내도, 또 화를 내도 어린 동생은 자신을 따라오고 있었다. 

-따라 오지 마! 

소리를 지르자 작은 얼굴이 움찔 굳었지만 돌아서는 법은 없었다. 걸음을 더욱 빨리 해 보아도 녀석은 부지런히 뒤를 따라왔다. 숨이 찰 정도로 뛰다가 돌아서 보아도 멀지 않은 곳에 동생의 모습이 보였다. 참다못해 머리를 때리고 몸을 밀치고 도망쳐도 울지도 않고 쫓아오고 있었다.

-가버려. 너 때문에 나까지 혼난단 말야. 

지한은 그런 동생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얼굴만 봐도 짜증이 치밀었다. 동생 때문에 혼날 생각을 하면 더욱 갑갑해졌다. 지금쯤 집에서는 아이가 없어졌다고 난리를 칠지도 모른다. 

하는 수 없이 성큼성큼 다가가 손을 붙잡고 집으로 되돌아갔다. 다행히 가지 않겠다고 생떼를 부리진 않았다. 다만 집 앞에 도착하고도 좀체 집안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너 또 따라오면 가만 안 둬. 

으름장을 놓았지만 안심이 되지 않아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동생은 따라오지는 않았지만 언제까지고 거기 서 있을 듯 했다. 늘 그런 식. 울면서 매달리는 것보다도 그런 일들이 지한에겐 견디기 힘들었다. 말을 하지 않으면 떼를 쓰지 않으면 자신은 화를 낼 수 없으니까. 화를 내고 싶어도 화를 낼 수 없었다. 말없이 쫓아오는 시선과 바보 같이 웃던 얼굴 앞에선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한번은 늘 혼자 맡겨졌던 할머니 댁에 동생이 함께 있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의 사정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든 지한은 동생과 함께 있었다. 늘 썰렁하고 조용한 할머니 집이 쓸쓸했었다. 분명 혼자보다는 나았을 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반가운 존재였던 것은 아니었다. 차라리 멀리 옆 마을에 사는 시골아이들을 만나 노는 게 나았다.

거기서도 동생은 자신의 뒤를 졸졸 따라 다녔다. 싫은 얼굴로 화를 내도 늘 두세 걸음 쯤 멀리 떨어져 있다. 지한은 어떻게든 동생을 떼어놓고 싶었다.

-좋은 데 가자. 

달콤한 말로 꼬여내기란 쉬웠다. 자신도 어렸지만 동생은 더욱 어렸으니까. 게다가, 속모를 꼬마는 자신을 싫어하고 미워하는 형을 무조건적으로 따랐다. 그런 형이 하는 말이니 당연히 의심 없이 따라왔을 것이다. 오히려 기뻐하는 얼굴이었다. 바보 아냐. 지한은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겉으론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곳은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낡은 창고였다. 농작물이나 농기구를 놓는 마을 공동의 창고였다. 겨울 농한기였으므로 사람의 출입이 없어져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가끔 동네 아이들이 들어와 노는 일도 있지만 날씨가 추워지면서 그조차 드물어 졌다. 동생은 그 캄캄하고 넓은 창고 안을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도 자신을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아무런 의심도 없이. 

-여기 있어. 잠깐 어디 갔다 올게. 

지한은 그 손을 가만히 떨쳐내고 말했다. 무슨 소린지 알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깜빡 거리는 동생에게 지한은 다시 한 번 천천히 설명했다.  

-어디 가지 말고 여기 꼭 있어야 돼? 

-응. 

의심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쁜 짓을 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떨렸지만 망설임은 없었다. 지한은 자신을 귀찮게 구는 동생 쪽이 더 나쁘다고 생각했다. 동생을 내버려 두고 밖으로 나왔다. 등 뒤에서 조금 불안한 목소리가 물어왔다. 

-형. 금방 올 거지? 

일부러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알았다고 대답을 했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저 도망쳐야겠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무리 멀리 까지 와도 뒤를 돌아보면 동생의 모습이 보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한은 밖으로 나와 문을 걸어 잠갔다. 아무도 동생이 여기 있는지는 모를 것이었다. 

형이라고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어쩐지 등 뒤로 쫓아오는 것 같았다. 이상한 이명에 쫓겨 그는 뛰었다. 바람이 차가웠다. 하지만 가슴은 이상하게 뜨거웠다.

잠들기 전 마신 차의 효험인지 몰라도 짧지만 수면을 취할 수 있었다. 눈을 떴을 땐 7시였다. 지한은 하릴 없이 집안을 서성거리다가 이르게 밖으로 나섰다. 오전의 거리는 아직 한산했다. 혜석의 가게-정확히는 그 누나가 사장이라고 했지만-가 있는 곳은 특히나 사람이 드물었다. 너무 일찍 온 건가, 후회와 걱정을 안고 까페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크게 틀어놓은 음악이 지한의 귀를 잠시 먹먹하게 했다.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주인인 혜석의 누나가 개점전인 카페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하나 머뭇거리는 사이 그녀가 불쑥 몸을 일으키고 지한을 바라보았다. 

“지난번에 오셨던 혜석이 동창이시죠?”

놀라지도 않고, 마치 거기 있는 걸 아주 오래전부터 알았다는 듯. 말투 또한 태연자약했다. 지한은 당황한 마음을 숨기고 겸연쩍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일찍 온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네. 그런데 아직 가게 열기 전 인가보죠.”

“보통 때는 지금도 안 열어요. 그런데 혜석이 걔가 오늘은 좀 일찍 열자고 그러더라구요. 손님 올 거라고.”

이번엔 놀란 것을 숨길 수가 없었다. 손님이란 게 설마 자신인가 싶어서 그녀를 향해 눈짓해 보였다. 그 작은 움직임에도 혜석의 누나는 그의 생각을 눈치 챘는지 슬며시 웃었다.  

“놀라셨나. 걔 하는 일이 그건데요 뭘. 그 정도도 못 맞추면 체면 서겠어요? 후후.”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눌러 끄고 창문을 닫았다. 에어컨을 켜고 돌아오더니 여적 서 있던 지한에게 자리를 권했다.

“잠깐 심부름 시켰어요. 앉아서 기다리세요.”

“예. 고맙습니다.” 

지극히 평범한 가게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이상한 공간에 와 있는 기분이었다. 혜석도 그랬지만 그의 누나도 묘한 느낌이었다. 그녀에게도 무언가 신통한 능력이 있는 것인지도 모르고 특별한 존재와 오랫동안 함께 해왔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아, 더워. 무슨 날씨가 이렇게 더워.”

문이 열리고 방울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확인해 보지 않아도 혜석임을 알 수 있었다. 딱 한 번 보았지만 지한은 그의 목소리나 얼굴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혜석은 자신의 누나에게 들고 있던 봉투를 맡기곤 한참을 투덜거렸다. 그리고는 에어컨 앞으로 조르르 달려가 찬바람을 쐬느라 바빴다. 

“벌써부터 이렇게 푹푹 찌면 낮엔 어떻게 돌아다니라고. 진짜 날이 갈수록 더운 거 같아. 지구 온난화인지 뭔지……. 아, 왔어?”

아는 체를 해야 할까 싶었을 때, 그가 먼저 지한에게 아는 체를 해왔다. 그의 누나가 그랬듯, 그 역시 별로 놀라는 것 같지 않았다.

“오늘은 컨디션이 좀 좋아 보이네. 좀 잤나봐?”

“잘 아네.”

감탄과 놀람은 처음 만났을 때도 그러했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손님에 대해 묻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아무래도 그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게 맞는 모양이었다.  

“이건 그냥 얼굴 보고 아는 거야. 지난번보다 얼굴이 나아졌길래, 달리 점 친 게 아니라. 내친 김에 하나 더 맞춰볼까?”

얼떨떨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혜석은 누나가 내준 얼음물을 싹 비우고 입안에서 얼음까지 씹어 가며 말했다. 비장함은 찾을 수 없었다.  

“밥은 좀 제대로 먹어. 하루에 한 끼도 놓치고 지나가는 일이 태반이지? 오늘 아침도 당연히 먹지 않았을 테고, 어제도 식사를 하는 둥 마는둥 했을 거야.”

“맞아. 그런데 원래 입이 짧은 편이기도 해.”

“짧으면 늘리라구. 기가 허하면 나쁜 것들이 자연스럽게 들러붙기 마련이거든.”

그렇게 말하며 내놓은 것은 포장된 초밥이었다. 그는 자신의 누나에게도 한 상자를 가져다주고 돌아왔다. 심부름이란 게 이것이었던 모양이었다. 하긴 점심때가 다 되어가긴 했다.

“절대 사양하지 마. 여기 초밥 진짜 맛있는 집이거든. 일부러 많이 사왔어.”

협박과 같은 박력에 밀려 지한은 그가 내미는 젓가락을 받아들었다. 맛있는 집이라고 자랑한대로 충분히 맛이 있었다.

“내가 올 줄 알았나봐?”

식사가 끝나갈 무렵 그는 일어나 차를 만들어 왔다. 무슨 차인지 모르겠지만 좋은 거라 하기에 입가심도 할 겸 마셨다. 커피를 즐기는 편이었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때 할 말 다 못했을 것 같아서, 아무래도 정섭섭이가 옆에 떡 버티고 있는데 마음 편히 말 못하겠지.”

“그거 우섭이 말하는 거야?”

“응. 애칭이야. 애칭. 그쪽도 그렇게 불러줘. 좋아할걸?”

싫어할 것 같은데. 지한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이었지만 이 친구와 함께 있으니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그것은 그가 가진 특별한 능력과는 다른 영역일 것이다. 그저 천성에서 우러나오는 밝음 때문일 것이다. 지한은 절대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하여 부럽다기보다는 그저 감탄할 뿐이었다. 

“사실 편법이긴 하지만 우섭이한테 네 동생에 대해서 물어봤어.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거든.”

“그게 더 도움이 될지도 몰라. 나보다 더 친형제 같았어.”

그것은 그저 사실이었기 때문에 어떤 기분도 들지 않았다. 다만 남 앞에선 어쩐지 부끄러운 기분이었다. 언젠가 우섭이 자신에게 푸념처럼 늘어놓았던 핀잔을 들었을 때도 비슷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혜석의 반응은 그와는 조금 달랐다. 어떤 연민이 그의 두 눈에 스쳤다. 조금 전까지 명랑하던 얼굴이 문득 어른스럽게 변해 있었다. 지금 그는 지한의 나이와 비슷해 보였다. 아니, 그보다 훨씬 긴 세월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없겠지. 네 동생은 널 온전히 형제로 바라볼 수 없었을 테니까.”

“…….”

“하지만 넌 너대로 필연적인 이유 때문에 동생을 미워할 수밖에 없었을 테고. 비극이로군. 비극이야.”

몸을 흔드는 전율은 두려움과는 다른 떨림이었다. 아무리 그에겐 당연한 일이라고 해도 그의 이상한 능력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 이 사람에겐 대체 무엇이 보이는 걸까. 무엇이 보이기에 이렇게 소름끼치는 사실들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그런 표정 짓지 마. 나도 전부를 아는 건 아냐. 게다가 넌 특히 잘 안보여. 어려워.”

“더 보여도 곤란할 것 같은데…….”

그는 재밌는 농담을 들은 듯 어깨를 흔들며 웃었지만 지한은 농담을 한 게 아니었다. 그 이상을 본다면 곤란했다. 이를테면 그 남자와 자신 사이에 있었던 일들 같은 것은 누구에게도 들키기 싫었다.

“동생을 어떻게 하고 싶어?”

“어떻게 하다니?”

“그 남자 말대로 정말 네 동생이라면 어쩌고 싶냐고. 억지로라도 쫓아 보낼 방법이 있을 지도 몰라. 그러고 싶어?”

“그런 방법이 정말 있다는 거야?”

지한은 자신도 모르게 반색하며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런 방법이 있다면, 벗어날 수 있다면 진작 말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그는 지난번 그런 얘기에 대해서는 하지 않았었다. 혜석은 지한의 표정의 찬찬히 살피더니 신중하게 대답했다.

“난 굿하는 무당은 아니라 직접 해줄 순 없겠지만. 이를 테면 아는 절에 부탁해서 천도제를 지내줄 수도 있어. 방법이야 만들면 있을 지도 몰라. 하지만 나라면 아무리 미워했던 동생이라도 그러고 싶진 않을 것 같아서……. 웬만하면 평화적으로 좋게 하는 게 어때?”

혜석의 말은 이후의 말과 달리 들리지 않았다. 원하는 것을 들어주라니. 여기서 어떻게 더? 자신이 아무리 나빴다고 해도 알지도 못하는 것을 내놓으라 떼쓰는 귀신 따위에 얼마나 더 휘둘려야 하는 것인지 지한을 알 수 없었다.

“이렇게……. 이렇게 지옥 같은데 내가 더 참아야 한다고?”

지한은 화를 내고 말았다. 화를 내야 할 대상은 여기 없었음에도. 깨문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말이 분노에 떨리고 있었다. 지한은 그저 억울하고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입으론 미안하다고 용서해달라고 매달렸지만 사실은 그렇게 생각했다.

“죄책감은 느껴. 하지만 후회하진 않아. 난 걔를 미워할 수밖에 없었어. 그 마음 따위 알고 싶지도 않았어. 그게 그렇게 큰 죄야? 왜 죽어서 까지 사람을 이렇게 괴롭히냐구. 왜…….”

혜석은 지한의 원망이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는 것을 바라보면서도 그는 엷은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 차분한 침묵에 지한은 입을 다물었다.

“고인 물은 썩는 법이라, 영혼도 가야 할 곳에 가지 않고 머물면 생전에 아무리 좋은 사람이었다고 해도 변할 수밖에 없어. 이미 죽어서 육체를 잃는 순간 영혼은 변한다고 생각하면 돼. 누군가에게 잘 보이거나 예의를 지킬 필요도 없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그만이야. 어차피 죽은 사람이잖아?”

“…….”

“그래도 우린 살아있는 사람들이잖아. 그쪽은 죽었고, 아무리 혼이 살아있어 봤자 그들에겐 아무런 미래도 희망도 기회도 없어.”

혜석의 웃음은 어딘지 인자하고 씁쓸한 구석이 있었다. 지혜로운 노인의 얼굴 같으며 부처의 얼굴 같기도 했다. 많은 것을 알아 오히려 궁금한 것도 없다는 얼굴이었다. 지한은 그의 부드러운 이해 앞에 화가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말과 표정이었다.

“네 동생이 가야 할 길을 가지 못하고 있다면 그 못한 말을 들어줬으면 좋겠어. 일단은 원망을 접고 이해하려고 해봐. 달래주고 위로해줘. 어렵게 들리겠지만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일지도 몰라.”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역시 아무도 없는 걸까. 지한은 오랜 침묵 끝에 서서 시간을 보낸 후에야 이 집에 아무도 없음을 알았다. 전화라도 했어야 했나 후회가 들기도 하지만 막상 마주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는 마음도 있었다. 

혜석의 말 때문인지 몰라도 지한은 자신도 모르게 이곳으로 오고 말았다. 대문 앞에서 망설이기 수 분, 하지만 망설인 것이 무색하게 집은 비어있었다. 언제나처럼 문은 열려 있었다. 이 정도면 좀 심하다 싶을 정도였다. 

거실 바닥엔 마시고 남은 맥주 캔이 어지럽게 뒹굴고 있었다. 컵을 깨뜨렸는지 던졌는지 분명 얼마 전까진 명확한 형태를 갖추고 있었을 유리컵의 잔해가 흩어져 있었다. 위험하고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다. 그것을 주어 들다 문득 곁에 쌓여 있는 비디오테이프가 눈에 들어왔다. 영화는 아닐 테고, 손으로 쓰여 있는 제목을 바라보았다. 

‘길 위의 죽음’ 

한 번도 동생이 건네준 테이프를 재생시킨 적이 없었다. 궁금하단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버리지 않았던 것도 그저 귀찮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남자는 이것을 보고 왜 울고 있었을까. 지한은 테이프를 플레이어에 집어넣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이런저런 쓰레기로 지저분한 소파에 앉았다. 그냥 돌아가긴 허무하고 밖은 아직 더웠다.

이미 죽은 사람을, 만질 수도 볼 수도 없는 사람을 이제 와서 이해하라 해봤자 그에겐 힘들었다. 살아있을 때도 불가능했던 일이었다. 민한의 흔적을 살펴본다 해도 함께 했던 기억을 헤집어 본다 한들, 잊었던 감정을 상기 시키는 일이 전부였다. 이해하고 싶은 마음은 미약했다. 다만 이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

하루 종일 여러 가지 것들에 시달리고 밤늦게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여러 가지 일이 한꺼번에 터져 수습하느라 바빴다. 경쟁사에서 지한의 회사와 똑같은 기획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품 출시일이 이쪽보다 한 달이나 빨랐다. 대책회의다 뭐다 해서 하루 종일 이곳저것을 불려 다녔다. 위에서 쓴 소리 험한 소리를 들었고 반대로 그 역시 밑의 사람들에게 화를 냈다. 야근이라도 해야 할 판이었지만 어느 정도 타협점을 찾은 터라 일단은 퇴근하기로 했다. 

집 앞에 도착할 무렵엔 어느덧 자정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어차피 일찍 돌아가도 잠을 못자는 지한이긴 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잠들지 않는 것과 일을 하느라 잠들지 못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었다. 

시동을 끄고 차에서 내리자 하루 종일 참고 있던 한숨이 터져 나왔다. 사람들 앞에서 한숨을 쉬지 않은 것은 덩달아 기운이 빠질까봐서 였다. 그때는 어떻게든 움직이고 생각해야 했었다. 좌절하거나 짜증내 할 틈도 없었다. 

집에 돌아오긴 했지만 내일의 일을 생각하니 그리 가벼운 기분도 아니었다. 어쨌든 길바닥에서 시간을 허비할 수도 없는 노릇. 현관으로 들어서려다 주차장 한가운데 서 있는 그림자를 발견했다. 지나쳐도 될 것을 발견한 것은 아는 사람 이어서였을까. 익숙한 기분에 무심코 다가섰다가 깜짝 놀랐다. 

집에 찾아가도 볼 수 없었던 김이후였다. 생각지 못한 순간에 불쑥 나타나는 버릇은 여전했다.

“당신 뭐하는 거야?”

바로 곁에 다가갔음에도 이쪽을 바라보지 않는 게 이상해 결국 먼저 말을 걸었다. 그럼에도 그의 시선은 여전히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사실 이상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본래도 이상한 사람인데, 이 늦은 시간 남의 아파트 앞을 서성거리고 있는 것은 그렇다 치고 지금 그의 표정이나 분위기에서 풍기는 이질적인 느낌은 뭐라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는 아파트를 훌쩍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머무는 곳을 따라가 보니 대충 지한이 사는 층이었다. 설마 저걸 보고 있었던 건가.

“형은 잘 모르겠지만 난 여길 자주 왔어. 정말 자주.”

묘한 느낌의 원인은 이것이었나. 그는 어느새 ‘민한’ 이 되어 말하고 있었다. 지한은 그 타이밍이나 변화의 순간을 정확히 모른다. 언제나 갑작스러웠다. 지한이 느끼는 기분이 급작스러움이라면 그의 경우엔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옷을 갈아입은 것처럼, 혹은 두껍고 어두운 장막을 떨쳐낸 것처럼.

“그래. 몰랐군.”

지한은 전처럼 무조건 뒷걸음치거나 떨기만 하진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아무렇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었다.

“늘 여기까지 왔다가 돌아가곤 했지. 보고 싶어서 왔는데도 겨우 근처를 서성이다 돌아가는 게 전부였어.”

“왜?”

“거절당하는 게 무서웠거든.”

불 꺼진 아파트를 바라보던 시선이 지한의 곁으로 돌아왔다. 눈을 마주하는 것은 여전히 두려웠다. 어떤 불빛도 없는 어둠을 바라보는 기분이기 때문이었다. 눈앞에 마주하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은 얼마나 막막한 일일지,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날 쫓아낼 거야?”

말도 안 되게 난폭하게 굴 때와 달리 그는 연약해 보였다. 하긴, 억지로 몸을 누르고 있던 순간에도 표정만은 금방이라도 스러질 듯 했었다. 

“……아니.”

가까스로 그 한마디를 했다. 거절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그렇다고 온전히 품을 자신도 없었지만 그는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다행이다.”

그는 진심으로 기쁜 얼굴을 해보였다. 흐릿하던 표정이 그 순간 명확하게 떠올랐다. 그 얼굴을 보느라 어느새 손을 붙잡힌 것도 몰랐다. 

지금, 이 남자는 옛날의 동생을 떠올리게 했다. 늘 자신의 뒤를 따라오던 동생을. 지한은 늘 그런 민한을 쫓아내고 거부했었다. 사실 어른이 되어서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방법만 달랐을 뿐, 민한은 자신을 늘 쫓아오고 지한은 늘 외면했다.

일단 집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여전히 지한은 뭘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멀뚱히 얼굴만 보고 있을 수 없었다. 언제부터 서 있었냐는 물음에도 정확히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난 배가 고파서 뭐라도 먹을 생각인데. 어쩔래?”

물으면서도 묘한 기분이었다. 그를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동생의 표정을, 말을 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동생이라고 부를 순 없는 노릇이었다.

“집에 있는 게 없어서 맛있는 건 해줄 수가 없지만.”

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지한은 대답을 듣자마자 돌아서 주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지금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를 모르겠다. 알 수 없는 일들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일단 소매를 걷었다. 있는 거라곤 햇반과 인스턴트식품들이 전부였다. 어차피 할 줄 아는 것도 얼마 없었다. 전자레인지를 돌려놓고 밖을 보았다. 무얼하나 싶었더니 처음 오는 집인 것처럼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처음 오는 것도 아닐 텐데.”

그가 정말 윤민한이라면 그렇다. 몇 번인가 온 적이 있었다. 오래 머물다 간 기억은 없지만 어쩔 수 없이 마주해야 할 때도 있었다. 그래도 되도록은 밖에서 만나고 싶었다. 

“처음은 아니지만 이렇게 여유 있게 구경할 틈은 없었으니까.”

구경할 만한 집도 아니었다. 혼자 사는 썰렁한 집이었다. 최소한의 가구만 들여놓았다. 워낙 물건을 늘리는 것을 싫어하는 지한이었다. 필요 없는 것들을 바로바로 버리는 습관 탓에 지저분하진 않지만 그 정도가 전부였다.

“방에 들어가 봐도 돼?”

“마음대로 해.”

예의바른 귀신이로군. 지한은 그의 조심스러운 태도에 적응이 쉽지 않았다. 김이후라고 해도 윤민한이라고 해도 둘 다 어울리지 않았다. 이제까지의 행동과는 전혀 달랐다. 마치 살아있는 인간처럼 천진한 질문을 하고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정확히는 살아있을 때의 ‘윤민한’ 처럼. 이라고 해야겠다. 조금 다른 점이라면 죽기 직전의 그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좀 더 어릴 때의 민한 같았다. 거절당하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끊임없이 말을 걸고 쫓아오던 그 꿋꿋한 꼬마아이가 생각났다. 

식사 준비는 금방 끝났다. 고작 햇반에 민혜가 챙겨준 밑반찬이 전부. 혼자 있으면 충분히 진수성찬이겠지만 다른 사람을 초대하기엔 초라한 식탁이었다. 그런 것을 타박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냥 기분의 문제였다. 

오래도록 방에서 나오지 않는 그를 부르러 갔다. 안방이 아닌 서재에 있었다. 문을 열고 그의 뒷모습을 발견하자 불현듯 떠오른 일이 있었다. 쓰레기통을 비웠던가. 일을 봐주는 사람이 가끔 오긴 했지만 근래엔 전혀 부르질 않았으니까 아마도 비우지 않았겠지. 아, 이런. 아니나 다를까 이후는 책상 옆 쓰레기통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분명 그것을 본 것이다. 

“미안. 나 불렀어?”

포기한 심정으로 그를 기다렸으나 의외로 그는 아무런 변화 없는 얼굴이었다. 차갑게 아래를 바라보던 눈길이 분노로 바뀔 것이라 생각했건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지한은 천천히 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래.”

민한이 아닌, 이 남자와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의 집에 들락거리긴 했지만 식사를 한 일은 전혀 없었다. 권했어도 자신이 싫다고 했을 것이다. 그 기분 나쁜 집에서 밥이 넘어갈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지금이 편안한 것도 아니었다. 눈앞의 상대 때문이었다. 

“오랜만이다. 형하고 밥 먹는 거.”

사실 민한과도 식사를 한 일이 오래전이었다. 그것도 이렇게 단둘이는. 같은 집에 살 무렵에도 지한은 일부러 아침을 거르고 학원과 독서실을 핑계로 늦게 들어오곤 했다. 휴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보니 이렇게 밥을 먹는 일도 없었다. ‘민한’ 이 감탄스러워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형은 별로 달갑지 않겠지만 난 좋아.”

“…….”

“같이 밥 먹고 얘기 하고……. 다른 집 형제들은 당연한 건데 우린 이런 게 안 됐잖아?”

지한은 그의 말을 들으면서도 눈은 그의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왼손. 양손잡이인 동생은 밥 먹을 때만은 왼손을 사용했다. 그러다 가끔 잊은 게 생각났다는 듯 오른손으로 바꿔지기도 했다. 그런 버릇이 똑같았다. 가지런한 젓가락질이나 조용한 목소리도 비슷했다. 외면하려야 외면할 수 없는 모습들이 눈에 밟혀 지한은 혼란스러웠다.

싱크대에 틀어놓은 물은 한참 동안 멈추지 않고 흘렀다. 지한은 주방 찬장을 뒤져 두통약을 찾아냈다. 아까부터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불안한 마음을 감추고 있기란 쉽지 않았다. 태연히 그와 대화하고 눈을 마주쳤지만 사실 매 순간 도망치고 싶었다. 그가 지한의 서재에서 쓰레기통에 버려진 민한의 테이프를 내려도 보고 있을 때는 정말 눈앞이 아찔했다. 다행스럽게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후에도 내내 신경이 쓰였다. 뭔가 일어날 거란 생각에 무서웠다.

물을 잠그고, 젖은 손끝으로 뜨거운 이마를 훔쳤다. 에어컨을 틀어놨음에도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조용한 거실로 한걸음씩 옮겼다. 두통은 여전히 머리끝을 맴돌았다. 이후는 소파에 누운 채 잠들어 있었다. 그의 얼굴은 보니 무척 피곤한 모양이었다. 가만히 감은 눈이 가끔 파르르 떨리는 것이 애처롭기도 했다. 이런 느낌의 얼굴이었나. 이후의 얼굴과 민한의 얼굴과 섞이고 겹쳐 다른 얼굴로 변해 있었다.

완전히 잠들었음을 확신하고 겨우 그 곁에 앉았다. 물기가 남은 손을 훔쳐내고 손을 가져가 보았다. 머리카락을 스치고 이마위에 슬쩍 올려놓은 손을 그마저 금방 거두어 들였다. 깨울 생각은 없어서 몸을 일으켰다. 이대로 잠들어 주는 것이 차라리 나았다. 영원히 깨어나지 않는 다면 더욱 좋을 지도. 

담요라도 덮어줘야겠다 싶어 돌아왔을 때 그는 눈을 뜨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듯 바라보던 눈이 어느새 불쑥 다가왔다. 보이지 않는 손이 여러 개 몸을 끌어당기듯 곁으로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두 뺨을 감싸는 손이 차가웠다. 아무런 생각 없이 눈을 감아버렸다. 입술이 슬쩍 닿았다가 떨어졌다.    

“왜 피하지 않지? 이제와 새삼 내가 불쌍해?”

눈을 뜨니 차갑게 변한 얼굴이 지한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극단적일 정도로.

“조금만 더 일찍 불쌍히 여겨주지 그랬어. 난 늘 형의 동정을 구걸했지만, 형은 그런 날 쓰레기 취급했지. 아까 그 테이프처럼 쓰레기통에 처박아 두고 잊어버렸잖아. 그렇지?”

어깨를 붙잡은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어깨를 누르는 고통보다는 찔러들듯 날카로운 눈빛이 더욱 아팠다. 지한은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변명씩이나 하는 거야? 내가 그렇게 무서워? 얼른 떠나줬으면 좋겠어? 천만에. 죽을 때까지 떨어지지 않고 괴롭혀 줄 거야. 꼭 그렇게 해 줄 거야. 내가 형을 놓아줄 것 같아?”

어깨를 부여잡고 있는 두 손이 목을 조르는 기분이었다. 갑갑하고 힘겨웠다. 도망치기 보다는 차라리 눈을 감고 외면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한은 그러는 대신 그를 뿌리쳤다. 그를 뿌리치고 몸을 일으켰다. 

“그래. 난 네가 여전히 미워. 싫어. 그리고 지금은 무섭기 까지 해. 그러면 안 돼?!”

그가 그렇게 말한다면 지한도 할 말은 있었다. 많았다. 말하지 않고 참아왔을 뿐이었다. 한번 터진 말은 계속 해서 흘러나왔다.

“난 널 좋아할 수가 없었어. 도저히. 좋아하려고 했던 적도 있지만 난 그러면 안 되니까.”

쓰러진 그는 여전히 차가운 눈을 하고 있었지만 조금 전처럼 달려들진 않았다. 그는 가라앉고 누그러져 있었다. 화로 일렁이던 표정이 천천히 정체하고 있었다. 그는 지한을 향해 짧게 물었다.  

“왜?”

“날 낳아준 어머니는 쓸쓸하게 혼자 죽었는데, 그렇게 괴롭고 비참하게 죽었는데. 난 그런 어머니를 두고 행복해 질 수 없잖아!”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마치 다른 사람이 자신 대신 말하는 기분이었다. 기분도 감정도 생소하지만 모두 자신의 것이다. 다만 애써 밑바닥에 오래도록 쟁여놓아 낯설 뿐이었다. 

“너를 동생으로 받아들이고 네 어머니를 어머니라 부르면서 아무것도 모르고 행복해 질순 없잖아. 그래선 안 되잖아. 널 미워해야 맞는 거야. 너와 네 어머니를 증오하고 욕하며 살아야 해. 예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지한은 얼굴도 기억 못하던 어머니를 딱 한번 본 적이 있었다. 한번이자 마지막이었다. 오랫동안 병을 앓다 죽기 얼마 전. 그녀의 소원이 억지로 헤어진 아들을 보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죽기 전에 한을 풀었을지 몰라도 지한에게는 반대로 한이 생겨났다. 생모가 남겨준 것은 그것뿐이었다. 그는 그녀가 생전에 쌓고 또 쌓아온 모든 증오를 물려받은 듯 그것을 고스란히 동생과 새어머니를 향해 쏟아내며 살았다. 그것이 당연한 운명인 것처럼. 의무인 것처럼.

“그러니까 난 나쁜 게 아냐. 나는…….”

몸을 단단히 옭아매던 손길이 스르르 빠져나갔다. 그와 함께 지한의 몸은 바닥으로 힘없이 쓰러졌다. 더 이상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대신, 참았던 오열이 눈물도 없이 흘러나왔다. 

민한의 마음이 필연적이고 필사적인 것처럼 지한에게도 그의 감정 이상의 이유가 있었다. 쉽게 놓아주지 않는 이유가 있었다. 본인조차 지겹고 놓고 싶은 순간이 많았지만 결국 놓지 못하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 지한이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둘러봤을 때 방금 전까지만 해도 눈앞에 있던 사람이 없었다. 피로와는 다른 묵직함이 머리를 누르고 있었지만 마음은 한결 나았다. 돌아갔나. 멍한 머리로 주변을 둘러보며 생각했다.

“다 울었어?”

돌아갔으리라 생각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그는 베란다 문을 열고 나왔다. 담배 냄새가 풍겼다. 담배냄새? 기억하건데 동생은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조금 전과 틀린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목소리도 표정도 지금은 확실히 ‘김이후’였다

“안 그렇게 생겨서 꽤 자주 우네.”

“어떻게…….”

어느새 돌아왔냐고 물으려다가, 그런 질문도 우습지 싶어 관두었다. 그는 아까부터 여기 있었다. 다만 민한으로서 말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지한은 그를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 기분을 느꼈다.

“그 녀석은 숨어버렸어. 그쪽이 그렇게 나와서 꽤 놀란 모양이야.”

무엇에 놀랐다는 건가. 순순히 당하던 사람이 화를 내며 대들어서 놀랐단 건가. 그런 일에 놀랄 정도로 소심하다면 애초에 자신에게 그런 짓은 하지 말았어야 하지 않나. 조금 기가 막힐 정도다. 

“실은 나도 놀랐거든.”

딱히 놀리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건네는 휴지를 순순히 받을 순 없었다. 무엇보다 그는 오해하고 있다. 지한은 울지 않았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것을 슬쩍 밀어내며 지한은 몸을 일으켰다. 

“됐어. 울었던 게 아냐.”

“그럼 이건 뭔데?”

무례한 손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자신의 손가락에 묻은 액체를 무심히 바라보다 혀를 가져갔다. 이후는 ‘짜.’ 라고 중얼거리며 웃었다. 지한은 당황해 그를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커다란 손이 얼굴을 감싸듯 만지며 남아있던 물기를 닦아 냈다. 이번엔 피할 생각도 못했다.   

“죽은 사람들은 멋대로야. 죽어버린 것도 멋대로 인 것처럼. 그쪽이 괴로울 거라거나 힘들 거란 생각은 전혀 안 해. 못하는 거지.”

“잘 아는 것처럼 말하지 마.”

혜석도 이 남자도 어떻게 이렇게 똑같은 말을 하는 걸까. 자신의 일이니 아니니 쉽게들 말하는 거다.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수긍하기도 쉽지 않았다. 손을 들어 괜히 얼굴을 닦아 냈다. 더럽거나 이상해서는 아니었다. 기분 탓인지 얼굴이 뜨거웠기 때문이었다. 얼굴이 뜨거웠다. 그의 손이 닿은 부분이 선명하게 남은 것 같다.

“누구보다 잘 알아. 난 혼자만 살아남았거든.”

이후는 지한의 말에 담담히 답했다. 이상한 농담을 할 때와는 다른 표정이었다. 여전히 그는 웃고 있었으나 그 웃음이 문득 어두워져 있었다. 무슨 뜻일까. 혼자만 살아남았다니. 

“밤도 늦었으니까 퇴장해 주지. 그런데 일이 많이 바빠?”

“좀 바빠. 그런데 방금 전 그 말은…….”

“갈게. 배웅은 필요 없어.”

이후는 지한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원하는 대답은 항상 들려주지 않는다.

*

“왔어? 늦었네.”

그 천연덕스러운 인사에 지한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라 잠시 헤맸다.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한꺼번에 떠올렸다. 이 남자가 왜 여기에 있는지, 혹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건지. 그런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지 않는 질문들 말이다. 

“왜 여기에, 아니 어떻게 들어왔어?”

무엇을 먼저 물어야 할지 몰라 말이 꼬였다. 왜 여기에 김이후, 이 남자가 있는지 대체 어떻게 이렇게 당당히 들어와 있는 건지. 모두가 의문이었다.

“그쪽이 바쁘다길래 내가 온다고 했잖아.”

바쁘냐고 물은 적은 분명 있었지만 그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지한의 기억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설령 그렇게 말했다고 해도 남의 집에 이렇게 쉽게 들어올 수 있었던 이유 또한 알고 싶었다.

“조심성 없더라. 지난번에 등 뒤에서 빤히 보고 있는데도 모르고 말야. 혹시 알려주고 싶었던 건가.”

지난번이라면 그날인가. 그가 이상한 상태로 지한의 아파트를 찾아왔던 날을 말하는 건가. 

“비밀 번호 외우기 쉽던데 바꾸는 게 좋겠어.”

그날이라면 조심성이 없는 것도 당연했다. 애초에 그런 것을 생각할 정신이 없었다. 죽은 동생을 맞이하는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필사적으로 떨리는 마음을 숨기는 게 고작이었다.

모든 설명을 들었지만 그래도 지한은 그가 여기 있는 것을 용납하기 쉽지 않았다. 그는 누구보다도 자신의 공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약혼녀를 처음 집에 데려온 것도 사귄지 일 년이 지나서였다. 비밀번호를 넘겨준 것은 약혼하기 얼마 전이었고. 그런 집에 김이후란 남자가 쉽게 드나들 수 있게 된 것은 비극이었다. 친한 사이도 아니고 친해지고 싶은 사이도 아니었다. 오히려 보고 싶지 않은 사람 영순위인 것이다.

게다가 그는 남의 집이라는 인식 자체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웃옷을 벗고 있었다. 물으니 덥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에어컨을 켜고 있으면서 뻔뻔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하긴 최소한 밑까지 벗지 않은 걸 감사해야 하나. 그뿐만 아니라 그는 주인이 오기 전에 마음대로 냉장고를 비웠다. 

“목이 말라서 말이야.”

빈 맥주캔을 아연하게 바라보는 지한을 향해 이후가 말했다. 목이 마르다면 물을 마셔도 될 텐데. 상식이나 논리가 통하지 않는 상대니 여기서 그만해야 할지도 모른다. 일일이 따지다간 지한만 피곤할 뿐이었다.

“미안하지만 난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어.”

“해. 방해하지 않을게.”

혹 이렇게 말하면 돌아간다고 말할까 약간 기대했는데 역시나 그런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태연히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며 대답했다. 지한은 그런 이후를 잠시 노려보다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가방을 내려놓고 하루 종일 목을 죄고 있던 타이를 풀어냈다. 

생각 할수록 이상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라면 왜 왔을까. 분명 지금의 그는 온전히 자신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저러다가도 갑자기 변하거나 하는 일도 있지만 오늘은 상태가 퍽 좋아보였다. 아픈 것 같지도 않고 술에 취해있지도 않았다.

샤워를 하기 위해 욕실에 들어왔다. 바로 찬물을 틀었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쏟아지는 물줄기가 얼굴을 때렸다. 문득 어떤 시선을 느껴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분명 닫아놓은 문이 열려 있었다. 문가에 이후가 서 있었다.

지한은 들고 있던 비누를 놓쳤다. 그걸 밟기까지 했다면 슬랩스틱이 되었겠지만 그런 일은 다행이 없었다. 차라리 이후의 등장은 스릴러의 그것과 비슷했다. 그의 서늘한 눈빛이 차가운 물보다 더욱 냉랭하게 피부 속을 파고들었다.

“뭐야…….”

맥 빠진 물음이 뒤늦게 흘러나왔다. 혹시 또……. 가만히 있다가도 문득 변해서 다른 사람의 얼굴로 말하는 남자였기 때문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인지 몰라도 그것은 아닌 듯싶었다. 

“미안. 놀랐어? 불렀는데도 대답이 없길래.”

미안한 것 같지 않은 표정으로 뻔뻔히 미안하단 말을 하는 것도 이상했지만 남의 샤워하는 문을 열고도 물러날 생각을 않는 것도 충분히 이상했다. 물론 그게 이후에게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닌 모양이었다.

“배가 고파서 그러는데 뭘 좀 만들어도 돼?”

“마음대로 해.”

너무 소박한 질문에 오히려 어이가 없었다. 겨우 그걸 물어보려고 욕실 문을 벌컥 열고 저렇게 쳐다보고 있었단 말인가. 지한은 다시 샤워기 물을 틀었다. 하지만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왜 내가 쳐다보는 게 신경 쓰여?”

그런 시선이라면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같은 남자라고 해도. 이쪽은 완전한 알몸이었다. 무방비한 기분이 들었다. 저 남자라면 이 정도 거리라면 단숨에 다가와 자신의 목을 조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한 순간 그가 맨발로 욕실 안으로 들어왔다. 물러날 틈도 없이 그는 다가와 있었다. 이후는 지한과 함께 샤워기 밑에 섰다. 그는 금세 흠뻑 젖었다. 그리고 손을 뻗었다.

붙잡으려는 손길과 잠시 몸싸움이 있었다. 벗어나려는 지한과 붙잡으려는 그의 손길이 물줄기 아래 지루하게 이어졌다. 결국 이후의 승리였다. 지한은 불안하게 몸을 벽에 기댄 채 몸을 누르는 무게에 꼼짝도 못했다. 허벅지 사이에 들어온 다리가 미묘한 부분을 찔렀다. 허리를 끌어안은 손도 난잡하긴 마찬가지였다. 턱을 붙잡혀 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왜 그래? 내가 덮치기라도 할까봐?”

이미 그러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이 상태라면 그는 할 수 있는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살인을 하든, 섹스를 하든.  

“걱정 마. 지금은 제정신이니까.”

달려든 기세가 무색하게 그는 쉽게 물러났다. 문이 닫히고 바닥에 떨어진 비누가 하수구 옆으로 밀려나 있었다. 한참 동안 물 흐르는 소리만 욕실을 채웠다.

오랫동안 샤워를 했다. 밖으로 나가는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그저 몸에 들러붙은 이상한 열기가 쉽게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차가운 물이 피부를 적시고 또 적셔도 몸의 온도가 떨어지지 않았다.

이후는 자신이 말 한대로 정말 뭔가를 만들고 있었다. 샤워를 하고 나온 지한은 그 광경을 잠시 신기한 마음으로 보았다. 요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선천적으로 ‘파괴’가 어울리는 사람이지 ‘생산’이 어울리는 인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음악을 만든다는 그의 직업도 어울리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당신도 먹을래?”

“됐어.”

“맛있는데?”

어떤 근거에서 저런 자신감이 나오는지 모를 일이었다. 지한은 기가 막혀 웃었다.

지한은 주방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무시하고 거실에 노트북과 일거리를 늘어놨다. 정말로 할일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식사를 끝낸 이후가 어느새 그의 맞은편에 앉아있었다. 시선을 모른척하고 노트북을 바라보았지만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 없을 때 우리 집에 다녀가지 않았어?”

“오지 않으면 또 어떤 협박을 할지도 모르니까 할 수 없잖아.”

이후는 그냥 왔느냐고 물었을 뿐이지만 지한은 자신도 모르게 딱딱한 변명까지 해버렸다. 이상했다고 반성했지만 상대방은 그리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거 재미있었어?”

무슨 소린가 했다가 뒤늦게 알았다. 테이프를 본걸 알았나 보다. 문을 열고 집을 비울정도로 무심한 인간인줄 알았는데 누가 다녀간 흔적이나 물건을 건드린 것은 귀신같이 알고 있으니 아이러니 했다.

“그거 아주 슬프지. 난 그거 볼 때 마다 눈물이 나.”

“…….”

“정말 너무 슬퍼.”

성의 없는 말투에서 느껴지는 슬픔의 울림에 지한은 멈칫했다.

조용하다싶어 고개를 들었더니 이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돌아간 걸까. 처음엔 신경 쓰였지만 이후엔 아무런 시비도 걸지 않았다. 지한은 곧 일에 몰두했다. 돌아간 것을 모를 정도였다. 여기저기를 살펴보았지만 그의 모습은 없었다. 

물을 마시러 주방에 들어갔다가 그가 남긴 흔적을 발견했다. 무엇을 만들었나 했더니 제법 그럴싸한 파스타였다. 자신에게 먹으라는 것인지 몰라도 한사람 몫이 남아있었다. 지한은 옆에 놓여있던 포크를 들어 그것을 한입 맛보았다. 이후가 자신한 대로 그것은 맛이 있었다. 포크를 내려놓고 보니 세팅한 식탁위에는 시디 한 장이 함께 놓여 있었다. 

음악 듣는 취미가 없는 사람이니 당연히 집에 오디오는 없었다. 대신 노트북에 넣고 재생시켜보았다. 음악이 흘러나왔다. 어쩐지 낯이 익은 음색이었다. 지난번 텔레비전에서 들었던 음악인 것 같았다. 지한은 잠깐 들었던 그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음식과 CD가 무슨 의미인지 지한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흘러나오는 음악은 아름답고 목가적이었다. 어떤 분노도 추한 욕망도 느껴지지 않았다.  

비슷한 만남이 얼마간 이어졌다. 그는 그런 식으로 남의 집에 불쑥 찾아왔다 돌아가길 반복했다. 민한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이상하게 여긴 지한이 그에게 물었다. 전엔 그토록 자주 나타났었는데 갑자기 모습을 감추었기 때문이었다. 벌써 며칠 째인가.

“느껴지긴 하지만 곁으로 다가오진 않더군.”

이후는 자신의 집인 것처럼 소파를 차지하고 누워있었다. 지한은 손님처럼 불편하게 맞은편에 앉아있었다. 이제는 그런 것에 일일이 신경을 쓰지 않을 정도로 이런 모습이 익숙했다. 그 정도로 시간이 많이 지났다는 것이다. 

“왜?”

“글쎄. 나도 잘 모르지.”

변덕도 심하군. 지한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중얼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반길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불안까지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언제 다시 나타날지 몰라 조마조마한 기분이었다.

“지금도 사실 여기 있어. 당신 눈엔 보이지 않겠지.”

지한은 놀랐지만 곧 그가 일부러 음산하게 말하고 있음을 알았다. 남은 진지한데 이렇게 놀릴 여유가 있다니. 황당할 뿐 화는 나지 않았다. 이후는 매사에 이런 식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죽은 사람인데 무섭다거나 두려운 기분이 들지 않을까. 자신의 몸을 빌려 나타나는 민한에 대해서도 그저 찝찝하다는 말뿐이었다. 물어본 적도 없긴 하지만. 

“이대로 떠나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지한은 대답을 망설였다. 왜 하필이면 자신인지, 왜 하필이면 이런 때 나타난 건지. 여러 가지 원망과 한탄을 했었다. 이 꿈같은 일이 얼른 끝이 나길 바랐다. 분명 그런 생각을 한 적도 있었지만, 그렇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다.

“아니.”

“아니라구. 왜? 없으면 두발 뻗고 잘 수 있을 거 아냐.”

분명 그럴 거라 생각했지만 지금 당장 민한이 떠나 완전히 사라진다 해서 지한의 마음이 편안할 것 같지 않다. 마음 편히 잠들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대로 떠난다면 그것이 아쉬울 것 같았다. 이상하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

“웬일이야. 음악을 다 듣고?”

민혜가 놀라서 묻는 것도 당연했다. 음악은커녕 라디오조차 틀지 못하게 하던 사람의 차에 음악이 흐르고 있었으니 당연할 수밖에. 카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지난번 이후가 놓고 갔던 시디였다.   

“조용하고 좋잖아.”

“좋긴 한데, 이상하잖아. 사람이 안하던 일 하면 이상한 거라구.”

나중에야 그 시디에 대해 설명을 들어보니 그간 작업한 노래를 앨범으로 만들어보자는 제의가 있어서 그런 작업을 한창 하는 중이라고 했다. 바빴다는 것은 사실인 모양이었다. 

‘정말 들어볼 줄은 몰랐거든. 의외로 마음에 들었나봐?’

그의 말대로, 그게 의외로 마음에 들어서 차에 놓고 듣고 있었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오며가며 듣다보니 익숙해 졌다. 없으면 허전해 질 정도로. 다른 음악과 달리 조용하고 평화로워 거슬리지 않는다는 것도 좋았다. 물론 그렇다고 그 음악의 주인까지 좋아졌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오늘은 민혜의 배우 친구가 공연한다는 뮤지컬을 보러 가기 위해 시간을 냈다. 일부러 라면 가지 않겠지만 친구라기에 같이 가자는 제의를 흔쾌히 수락했다. 시간을 내기는 어려웠지만 어려워도 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일이라도 해줄 수 있으면 해줘야 했기에. 

가끔 봐도 식사를 하는 게 전부였는데. 그래서인지 민혜의 기분이 좋아보였다. 표정이 밝고 좋았다. 하늘도 쾌청했다. 온도는 다소 높았지만 나쁘지 않은 날이었다.

“난 무지 재밌었는데, 자긴 어땠어?”

공연 내내 몰입해 있어서 부르는 것도 모를 정도였으니까 잘 알고 있었다. 웃고 울고 감정표현에 솔직한 그녀는 이런 것을 볼 때도 자신과 달랐다. 지한은 그녀의 얼굴에 남은 눈물 자국을 손으로 슬쩍 훔쳐 주고는 웃었다.

“괜찮았어.”

“설마 인사치레야?”

“아니. 오랜만이라 그런지 괜찮네. 정말이야.”

영화를 본지 1년쯤 되었던가. 오랜만이라 그런지 이런 것도 나쁘지 않았다. 지한은 항상 타인의 가공된 인생에 집중할 수 없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그런 기분 때문에 영화나 책을 멀리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건 무슨 변화일까. 오늘은 좀 다른 기분이었다.

민혜가 대기실에 친구를 보러 가고 지한은 로비에 혼자 남겨져 있었다. 유리창으로 여전히 오후의 햇살이 반짝이고 있었다. 들어갔을 때 보다는 해가 많이 기울어져 있었지만 여름인 탓에 초저녁임에도 한낮 같았다. 

“여기서 보네.”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가 지한을 현실로 끌어내렸다. 하지만 그 목소리와 얼굴은 현실성이 없었다. 이 남자가 왜 여기에…….

“공연 보러 왔나봐.”

헛것을 보는 게 아니었다. 분명 이후였다. 눈앞의 얼굴도, 목소리도 분명 그였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지한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출구가 어딘지도 모르고 걸음을 옮겼다. 이런 곳에서 마주치다니. 낭패감이 몰려왔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몸이 자연스럽게 반응했다. 둘 만이라면 상관없지만 이런 대낮의 공공장소에서 만나는 일이 생길 줄 몰랐다. 게다가 민혜가 돌아올 텐데.

“왜 도망쳐?”

도피는 짧게 끝났다. 이후는 어렵지 않게 지한을 붙잡았다. 무어라 대답을 하기도 전에 지한의 시야에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민혜가 돌아왔다. 하필이면, 지금.

“미안. 한참 기다렸지.”

“아, 아니. 괜찮아.”

지한은 서둘러 붙잡힌 팔을 빼냈다. 그 행동이 더욱 어색했을 거란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민혜는 당연히 지한의 곁에 선 이후를 궁금해 했다. 

“그런데 누구셔? 아는 분?”

지한이 설명을 해주지 않자 눈만 찬찬히 굴리던 그녀가 질문을 해왔다. 지한은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허둥댔다. 아무렇게나 둘러댈 수 있었지만 이 남자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나 예의를 신경 쓰는 인간이 아님은 경험으로 잘 알지 않았는가 게다가 그는 지한의 약혼녀를 상대로 협박한 일도 있었다. 

“반갑습니다. 지한이형 후배입니다.”

하지만 그는 의외로 평범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그럴싸하게 웃는 얼굴은 누구에게나 호감을 줄 것 같았다. 민혜 또한 그의 태도에 의문스러움을 걷어내고 환하게 웃었다.

“어. 그러시구나. 반가워요. 나는·····.”

“약혼녀 분이 미인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맞네요.”

“하하. 미인은요. 지한 씨 밖에서 그러고 다녀요?”

“예. 은근히 자랑이 대단하시더라구요.”

이후의 손이 어깨를 두드렸다. 걱정하지 말라는 듯. 하지만 지한은 쉽게 안심할 수가 없었다. 한동안 천연덕스러운 대화가 오갔다. 지한은 여전히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어떤 말이 나올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럼. 전 일행이 있어서 가보겠습니다.”

이후가 멀리 떨어진 여자를 가리켰다. 일행이 있었단 말인가. 괜한 생각을 했던 걸까. 지한은 혹 자신을 쫓아온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동안의 행적으로 보아 그럴만했던 사람이니 당연한 의심이었다. 그런데 정말 일행이 있다니, 지한은 지금의 우연이 어느 때보다 놀라웠다.

“그래요. 아쉽네요. 그럼 다음에 또 봬요.”

“네. 다음에.”

안심인지 허탈함인지 모를 감정으로 지한은 멀어지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친숙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이십대 중반쯤 되었을까. 세련된 차림과 몸의 실루엣이 마치 모델인 것처럼 화려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미인이지 않을까, 생각 되었다. 크고 마른 이후와 무척 잘 어울렸다. 무슨 사이인 걸까. 지한은 자신도 모르게 그들을 훔쳐보고 있다가 이후가 이쪽을 돌아보는 순간 시선을 옮겼다. 눈이 마주쳤단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돌리니 민혜가 왜 그러냐고 물어왔다. 아니라고 대답하고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형식적으로라도 인사를 해야 했는데 끝까지 아무 말도 못했다. 민혜는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저런 후배가 다 있었어?”

“응. 별로 친하진 않아.”

오히려 그녀는 그를 좋게 본 모양이었다. 분명 방금 전의 모습만 보아서는 멀쩡하다. 기본적으로 잘생긴 얼굴인데다 지한도 처음엔 강한 인상에 비해 의외로 예의바른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으니까. 착각을 하는 것도 이상하진 않았다.

“괜찮다. 여자 친구는 있대? 없으면 내가 소개해줄 수도 있는데.”

“됐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말이 날카롭게 흘러나왔다. 아차 싶었지만 이미 민혜의 눈가가 흐릿해져 있었다. 그녀는 곧 마음 좋게 웃으며 가볍게 받아쳤다. 

“왜 정색을 하고 그래. 실은 사이가 나쁜 후배야?”

지한은 말 대신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주말의 외출이 엉망이 되어버렸다. 이후 때문이 아니라 바로 자신 때문에. 지한은 그렇게 생각했다.

“미인이긴 하지만, 저런 타입 싫어하지 않았어?”

여자는 멀어지는 남녀를 바라보며 무심하게 물었다. 대답은 뒤늦게 돌아왔다. 이미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진 후였다. 이후는 엉뚱한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누구? 저 여자?”

“시치미 떼긴. 아까 그 여자 노리고 온 거 아니었어?”

“노리긴 뭘 노려.”

원래도 대화상대로는 적합한 인간은 아니었다. 차라리 동물하고 말하는 게 낫다 싶을 정도로 말이 통하지 않는 인간이었다. 그래도 인연이란 게 뭔지 오랫동안 알고 지내곤 있었지만 옛날에 왜 이런 인간하고 사귀어서 이 쓰잘데기 없는 인연을 만들었나, 그녀는 항상 후회하곤 했다. 오늘만 해도 얼마나 생뚱맞았는지 모른다. 

“공연은 안 보고 내내 쳐다보고 있던데······. 잡아먹을 것 같은 눈으로 말야.”

이후가 기분 나쁜 웃음을 지어보였다. 딴청을 피우는 것보다 그것이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슨 꿍꿍이를 벌이고 있는 건지 생각하기 싫을 정도로 불길했다.  

“왜 이런 공을 들이나 했더니 애인 있는 여자였잖아. 나쁜 새끼.”

“여자 아니야.”

“그럼?”

그녀는 자신이 제대로 찍었다고 생각했다. 공연 때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아까 세 사람이 대화할 때 이상한 공기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여자가 아니라면 대체 뭐지? 노려보며 채근해보았지만 속 시원한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후는 그녀의 윗옷 주머니에 걸려있던 선글라스를 꺼내 그녀의 얼굴에 씌어주곤 한발자국 물러났다. 

“내 취향의 남자. 또 연락할게. 가.”

“여기서 헤어지자고? 덕분에 스케줄 펑크 내고 왔는데?”

딱히 자기가 보고 싶어 연락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갑자기 뮤지컬을 보러 가자고 찾아와서 이쪽 스케줄까지 펑크 냈는데 식사대접도 없이 찢어지자고 하니 화가 났다. 원래가 이런 무개념의 인간이었던 것을 잊었다. 역시 쫓아오는 게 아니었다. 혹시 재밌는 일이 있을까 싶어 온 건데 호기심 때문에 화를 자초했다.

“미안해.”

“망할 놈. 애인 있는 여자인지, 남자인진 모르겠지만 관둬. 큰 코 다칠 거다.”

“건투를 빌어줘서 고맙군.”

“또 연락하면 죽여 버릴 거야.”

진심이었다. 죽인다고 죽을 인간이 아니란 게 문제였지만.

“이 은혜는 다음에 이자까지 쳐서 갚을게.”

멀어지는 이후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소금을 팍팍 뿌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더불어 취향의 남자라는 사람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저런 인간에게 걸렸으니 얼마나 인생이 고달파질까. 그건 겪은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녀는 선글라스를 벗어 핸드백에 넣고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민혜는 친구와 뒤풀이 자리에 간다고 했다. 물론 지한에게도 권했지만 그는 모르는 사람 사이에 끼어 식사를 할 정도로 넉살 좋은 편은 아니었다. 일이라면 억지로라도 끼어 있겠지만. 다행히 민혜도 억지로 권하진 않았다. 

헤어져 나올 즈음엔 햇살이 조금 누그러져 있었다. 그래봐야 한낮의 열기는 그늘 없는 주차장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 빛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자니, 일순 머릿속이 일그러지며 핑 돌았다. 차키가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현기증인가. 몸을 굽히는 것조차 귀찮아 잠시 그것을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누군가의 손이 다가와 그것을 낚아채기 전까지.

“괜찮아?”

고개를 드니 이후가 차키를 든 채로 웃고 있었다. 그는 지한이 반가운지 몰라도 지한은 아니었다. 아까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고.

“저쪽으로 타. 보니까 상태가 별론데 내가 운전해 줄게.”

“일행 있는 거 아니었어?”

“볼일 있다고 가버렸어. 그쪽도 바람 맞은 것 같은데 사이좋게 같이 돌아가자구.” 

사이좋게. 라니. 불만스러운 얼굴을 해보였지만 이미 그가 운전석을 차지한 후였다. 지한은 체념하는 심정으로 보조석으로 걸어갔다. 

이후의 운전은 의외로 안정적이었다. 거칠게 몰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하긴 도로에서까지 멋대로라면 진작 면허정지를 먹었겠지.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는 의외로 다정할 때도 있고 눈치 있게 굴기도 했다. 물론 모든 것이 자신 마음에 내킬 때였지만. 

“아까는 과민하게 굴어서 미안했어.”

아무래도 사과를 하지 않으면 찜찜할 것 같아서 용기를 냈다. 미안한 마음은 사실 별로 없지만 별일 아닌 것을 가지고 호들갑 떤 자신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뭐가?”

모르는 체 하는 건가. 지한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모르면 됐어.”

“왜, 내가 일부러 쫓아온 줄 알았어?”

모른다는 듯 되물어오더니 사실은 뻔히 알고 있었다는 건가. 지한은 그럴 법도 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반응은 확실히 너무 과했다. 오히려 그가 아무렇지 않게 대해준 덕분에 민혜도 이상한 생각을 하지 않고 넘어갔다.  

“미친놈이란 소린 자주 듣지만 그런 짓 할 정도로 한가하진 않거든.”

그런 짓이라면 이미 하지 않았나. 몇 번이나 회사에 찾아왔었고 집까지 찾아온 것은 정상적인 일이었나. 물론 그가 민한을 핑계로 설명한다면 할 말이 없었다. 그럼 도대체 어디까지가 김이후의 마음이고 행동인걸까. 지한은 무엇보다도 그 점이 혼란스러웠다.

“사실 나야말로 놀랐거든. 이런데서 볼 줄은 몰랐어.”

“뭐가 이상하다는 거지?”

“이런 건 전혀 즐길 것 같지 않아서 말야.”

똑바로 보았다고 해야겠지만 그리 기분이 좋지 못했다. 상대에게 자신의 본질을 들키는 일은 유쾌한 기분이 아니다. 스스로가 말하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이 공연, 초연 때 민한이랑 같이 왔었어. 아마 재작년이었던가.”

지한이 동생의 이름을 꺼내는 것을 조심스러워하는 것과 달리 이후는 늘 스스럼없었다. 마치 지금도 살아있는 사람을 얘기하듯. 멀리 떠나 있는 친구의 얘기를 하듯. 엄연히 말하자면 그에겐 살아있는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민한을 보고 말하며 심지어 몸에까지 들이고 있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분명 그들은 가까이에 있는 것이다. 지한은 그 사실이 익숙해지지 않았지만 말이다. 

“나는 별로였는데, 녀석이 무척 좋아했어. 그래서 다시 보러 왔지. 그 애는 예전부터 연극이니 뮤지컬이니 보러 다니는 걸 좋아했어. 혼자도 잘 오고……. 그리고 영화 보는 것도 좋아했지. 영화 볼 때는 늘 혼자 보는 것이 원칙이었어. 사람 많은 주말엔 절대 사절. 집중이 안 된다고. 같이 가도 일부러 멀찍이 자리를 잡고 앉아 봤지.”

그런 것을 좋아한다는 것은 어렴풋 알았다. 영화과에 간다고 했을 때도 영화감독 쪽을 지망하는 줄 알았으니까. 나중에는 분야가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았지만. 하지만 지한이 아는 것은 겨우 그 정도. 구체적인 취미나 기호는 몰랐다. 아니 알지 않으려 했다는 게 맞을 것이다. 

“심지어 한때는 클래식에 심취해서 알바까지 뛰어서 콘서트 보러 다닐 정도였다니까.”

“집에 책이며 음반 같은 게 많긴 해.”

깔끔한 걸 좋아하는 어머니가 유일하게 잔소리 할 때가 그럴 때였다. 민한은 방안에 책들이 넘쳐나도 결코 버리는 법 없었다. 필요하지 않게 되면 바로 버리는 자신과 달리. 그는 한번 애정을 준 것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 애정의 대상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몰랐지만.   

“바보야. 녀석은.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오질 못했어. 사랑하는 형에게서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했듯이.”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그리고 이내 묘한 시선이 따라왔지만 지한은 그의 눈을 외면했다. 

사실 알면서도 외면하고 있었다. 알게 된 이후의 일이 두려워. 지한은 동생을 온 마음으로 미워하는 일이 벅찼다. 그 마음까지 알았다면 더욱 힘겨웠을 것이다. 사람을 증오하는 일은 좋아하는 것만큼 힘든 일이었다. 지한은 동생이 죽었을 때, 그 죽음을 물론 슬퍼하기는 했지만 다행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더 이상 미워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래서 속이 시원하다 생각했다. 물론 그런 생각이 오래가진 못했다.

“그리고 또 뭘 좋아 했는데?”

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지한은 일부러 그의 빤한 시선을 무시하며 시선을 창밖으로 옮겼다. 아직 햇살이 눈이 부셔서 눈을 감았다.

“더 말해줘. 난 잘 모르니까……. 알고 싶어.”

이제와 소용없는 일일지 모른다. 알아봤자 가슴 아플 분인지도. 그래도 지한은 진심으로 알고 싶다고 생각했다.

  

비가 올 것 같은 하늘을 쓸데없이 오랫동안 올려다보았다. 오랜만의 집이었지만 조금도 반가운 기분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다시 돌아가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심호흡을 하고 초인종을 눌렀다. 가정부가 문을 열어주었다.

“사모님은 외출중이세요.”

힘이 빠지는 순간이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망설이고 돌아서려던 자신이 우습게 느껴졌다. 그래, 늘 집에만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현재도 바쁜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일이 아니라도 일부러 약속을 만들어 돌아다니는 사람이었다. 선천적으로 집에 붙어있는 것을 싫어하는 타입이었다. 그런 점은 민한과 닮은 것 같았다. 민한은 일 때문이 아니라도 여행을 좋아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곤 했다. 

“식사는 했어요?”

“아뇨. 괜찮습니다.”

물을 달라고 하려다가 청소 중에 나온 것 같아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했다. 물정도야 자신이 가져다 마시면 될 것이었다. 어머니의 행선지를 물으려다가 관두었다. 알아서 뭘 하겠는가. 어차피 서로 간에 관심을 끊고 사는 게 편한 사람들이었다. 

본래 여기 온 목적은 어머니와 결혼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서였다. 날짜를 받아놨다고 하는데 정작 아들에겐 자세한 얘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한은 민혜에게 그 얘기를 전해 들었다.

‘아무리 사이가 불편하다고 해도 안 보면 더 할 거야. 그냥 부딪쳐봐.’

최근엔 지한보다 어머니를 자주 보는 민혜가 충고를 해왔다. 조심스럽고 다정한 태도였다. 그녀의 말은 맞았다. 피하기만 해서 좋을 것은 없었다. 오랜만에 보든 자주 보든 그리 달라질 관계는 아니었지만 현명한 여자의 충고를 따르는 게 나쁠 건 없었다. 게다가 결혼은 당사자들만의 일은 아니었기 때문에 싫어도 얘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지한은 어머니를 조금만 기다려 보기로 했다. 한 시간 쯤 기다리다 소식이 없으면 자리를 뜨는 수밖에. 전화하기가 싫어 불쑥 찾아왔더니 이 모양이었다. 

기다림은 지루했다. 뭘 할까 하다가 오랜만에 예전에 지내던 방을 둘러볼까 해서 몸을 일으켰다. 어차피 텔레비전을 보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그밖에는 달리 할 일도 없었다. 그러나 지한이 발걸음을 멈춘 것은 맞은편의 민한의 방이었다.

“아주머니.”

아래층으로 내려가 가정부를 찾았다. 그녀는 주방에서 그릇을 닦고 있었다. 지한의 부름에 행주를 내려놓고 일어섰다. 

“예. 뭐 찾는 거 있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뭐 좀 물어보려고요. 동생 물건 정리 했습니까?”

“그거라면 사모님이 전혀 건드리지 못하게 하셨어요. 청소만 매일 하고 있어요.”

“그래요. 그렇군요.”

어머니가 매일 같이 민한의 방을 드나든다는 아버지의 말을 들었다. 장례 후 한 달은 내리 그 방에서만 잤다는 말까지 들었다. 죽은 아들에 대한 그리움이 깊은 모양이었다. 그 말을 듣고도 지한은 아무런 감상도 느끼지 않았었는데, 지금 와서 그 때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그런 어머니라면 물건을 처분하는 일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아드님이 그리우셔도 그렇지. 죽은 사람 물건은 그냥 두는 게 아닌데.”

다시 행주를 집어 들며 가정부가 혼잣말을 했다. 지한은 그녀의 말을 모른 체하고 다시 위층으로 올라갔다.

문을 여니 벽 한 면을 채우고 있는 책장이 우선 눈에 들어왔다. 동생의 방은 넓고, 그 넓은 벽을 차지하는 책장 또한 컸지만 거기를 가득 채우고도 바닥에 쌓여 있는 책이 많았다. 그밖에 이런저런 비디오테이프와 DVD와 포스터 따위가 즐비했다. 물건이 많아 지저분할 수도 있었지만 신기하게도 정리가 잘 되어있었다. 

마치 지금도 사람이 살고 있는 방 같았다. 솔직히 몇 개월 되지 않았으니 그새 사람의 흔적이 싹 사라진다는 것도 불가능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까지 생생한 느낌이 체취가 느껴질 줄은 몰랐다.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방안은 그토록 따스하고 상냥한 공기가 머물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지한은 동생의 방에 들어오는 것이 실로 오랜만이었다. 이 집에 살 때도 필요한 일이 아니면 절대 들어오지 않았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거의 없었다. 솔직히 처음 보는 방 같은 느낌이었다. 바로 맞은편에 있는 방이었음에도 한 번도 먼저 들어오려 한 적이 없었다.

창문을 열자 습기 찬 바람이 들어왔다. 천둥소리가 먼 하늘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침대에 앉아보기도 하고 책을 넘겨보기도 했다. 수많은 책 중에는 지한이 아는 책도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에 보고 버린 세계명작시리즈였다. 그것은 제목만 똑같은 책이 아니라, 예전에 자신이 보았던 책이 맞았다. 첫 장에 적혀 있는 ‘윤지한’ 이라는 이름을 보고 더욱 확실히 알았다. 중학생이 되어 더 이상 유년시절에 보았던 책들이 필요 없어져 버린 것이다. 그것이 왜 여기 와 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한은 책상 서랍 안에서 낡은 시계를 발견했다. 중학교 때였나 부모님이 여행을 다녀와 사준 것이었다. 하지만 지한은 그것을 며칠간 차고 버렸다. 그저 부모님에게 보이기 위해서였을 뿐이었다. 사실 지한은 그 선물이 별로 기쁘지 않았다. 어차피 어머니 역시 형식적으로 사온 선물이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지한은 그것을 학교 가던 길에 하천가에 버렸다. 분명 버려서 없을 것이 분명한데……. 놀라웠다. 지한조차 기억 속에서 버려버린 물건들을 동생이 간직하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밖에도 지한과 관련된 물건들을 여러 개 발견했다. 쓰다만 노트, 플라스틱 명찰, 언제 적인지 모를 사진 한 장이 서랍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었다. 고등학생 때였는지 중학교 때인지 모호한. 친구들과 찍은 사진이었다. 지한 혼자만 웃고 있지 않은 사진이었다. 지한 본인조차 그 존재를 잊고 있던 사진을 민한은 오랜 시간 간직해 온 것이었다. 

“거기서 뭐하는 거니?”

가시 돋친 목소리에 지한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지한은 주변이 부쩍 어두워졌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왔다는 것도 알았다. 그녀가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문가에 서 있었다. 그녀의 눈은 무언가 잘못된 것을 찾아내려는 듯 날카롭고 신중했다. 지한은 당황해 손에 든 것을 흘렸다. 어머니가 다가와 그것을 주어 들었다. 그 사진을. 사진과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네 동생은 널 정말 좋아했지. 네가 이렇게 차갑고 정 없는 애였는데도 말이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뻔했다. 익숙한 일이기도 했고, 그러나 민한의 방이기 때문일까. 평소와 달리 마음이 술렁거렸다. 자책감 때문일까, 다른 이유일까. 

“왜 이제와 새삼 후회라도 되니? 미안하기라도 하니?”

그녀의 비난은 부당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답하긴 싫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다 말할 수 있어도, 이 여자의 앞에서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 네게 최소한 양심이 남아있다면 넌 미안해야지. 니가 그 애한테 어떻게 했는데.”

“제가 뭘 어쨌다고 그러십니까?”

예상치 못한 반격에 그녀는 눈에 띄게 휘청거렸다. 몰아치던 차가운 표정이 멈칫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선 깨어지지 않는 그녀의 차가움은 지한의 앞에선 무너지고는 했다. 물론 그렇다고 따뜻하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뜨겁고 강렬한 증오를 말하는 것이다.

“몰라서 묻니? 뻔뻔하구나. 그래. 이렇게 뻔뻔하고 위선적인 애니까 그 어린 나이에 그런 짓을 했겠지.”

지한은 그녀의 말을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짓’ 이 뭘까. 지한은 알 수 없는 분노를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지한은 어른들이 보지 않을 때 동생을 꼬집거나 울린 적이 분명 있었다. 넘어져 우는 동생을 내버려 두고 놀러간 적도 있었고, 자꾸만 따라오는 동생이 싫어서 창고에 가둬놓고 밤이 늦었을 때에 돌아간 일도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런 일이 어차피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고는 그조차 관두었다. 체념을 알게 된 것이다. 그때의 경솔했던 자신이 옳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까지 비난받을 일은 한 적이 없었다. 어머니의 분노는 극적일 정도로 크고 강렬했다.    

“기억 못한다면 말해주지. 네가 네 동생한테 한 일을 말이다. 난 처음에 내 눈을 의심했지. 아무리 그래도 어린애인데, 그래도 제 동생인데. 설마 아닐 거야. 설마 정말 죽이려고 했겠냐 생각했거든.”

어머니가 말하는 자신은 천하의 몹쓸 인간이며 생각도 못한 잔인한 아이였다. 누가 누굴 죽이려고 했다는 걸까. 지한은 다른 사람의 얘기를 듣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분명 그녀의 비난이 향하는 곳은 바로 자신이었다. 믿을 수 없는 얘기들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넌 내가 널 빤히 바라보고 있는데도 멈추지 않았어. 내 눈을 빤히 바라보면서 숨이 넘어가려는 네 동생의 목을 꼭 붙잡고 있었어.”

순간 머릿속에 어떤 장면이, 장면들이 뒤죽박죽으로 떠올랐다. 급기야 자기들끼리 부딪치고 깨어져 결국엔 하얗게 흩어졌다. 남은 것은 소름끼치는 섬뜩함뿐이었다.   

“저는 그런 짓을 한 적이, 제가 왜 그런 짓을·····.”

“아니. 넌 했어. 넌 잠들어 있는 네 동생의 목을 조르고 있었어. 겨우 10살 넘은 애가……. 그 어린 애가! 넌 그런 애야. 그런 끔찍한 애야!”

천둥소리가 아까보다 가깝게 울렸다. 비구름이 바로 곁에 다가온 모양이었다. 그녀의 흐느낌과 함께 빗소리가 우스스 떨어졌다. 울분을 터뜨린 그녀는 당분간 몸을 웅크리고 울었다. 손에 쥔 사진이 무참하게 구겨졌다. 그와 함께 지한의 마음도 구겨지고 찢겨져 갔다. 그 위로 비가 내린다. 굵고 세찬 비였다.

이것은 모함이다 잘못된 일이다. 그건 그냥 꿈일 뿐이었는데. 자신의 불안한 마음이 불러낸 악몽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내 꿈을 왜 이 여자가 알고 있는 거지. 어떻게 이렇게 잘 알고 있는 걸까. 지한은 계속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 흐느낌이 잦아든 후에 비난의 말이 이어졌다. 아니 그것은 비난일아기 보다는 차라리 저주에 가까웠다. 

“그런 형을 형이라고 부르고 따르던 우리 민한이만 안 됐지. 아마 그 애는 죽어도 떠나지 못하고 있을 게다. 분명해.”

빗소리가 이제는 시끄러울 정도로 커져있었다. 운치는커녕 무식하다 생각될 정도로 굵은 빗줄기가 땅에 내리꽂히고 있었다. 그 커다란 소리 사이로 다른 소리가 끼어들었다. 문이 거칠게 열리고 닫혔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다급한 듯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이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웬일일까. 누군지는 알고 있었지만 평소와 다르게 조심성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평소엔 늘 숨을 죽이고 긴장한 표정으로 조용히 들어와 자신을 머뭇거리는 시선으로 바라보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는 건지, 이랬다. 마주한 꼴은 더욱 볼만했다.

“시원하겠다.”

우산 쓰는 것도 잊었는지 흠뻑 젖어 있는 지한을 향해 이후는 태평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시원하다기 보단 추워보였다. 어깨가 떨리는 것을 의식하지도 못하는 모양이었다. 입술이 파랗게 질린 채로 무언가 말하려고 움직였다. 하지만 쉽게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나. 성격 탓인가 걱정보다는 호기심이 일었다. 

“거기서 그러지 말고 일단 들어와.”

이후는 일단 그의 손을 끌아 당겼다. 그렇지만 평소처럼 쉽게 끌려오지 않았다. 단단히 버티고 서 있었다. 저렇게 불안한 모습으로 서있건만 고집을 피우고 있었다. 이후는 다소 놀랐다. 그리고 더욱 놀란 것은 그 다음 순간이었다.

“그래서 떠나지 못하고 있는 거야? 나를 좋아해서 그런 게 아니라 내가 밉고 싫어서 그래? 내가 원망스러워서, 복수하고 싶어서?”

이 남자가 보고 있는 것은 자신이 아니다. 이후는 분명이 알 수 있었다. 절대 믿지 않는다고, 어떤 순간이든 의심을 지우지 않던 남자가 왜 이럴까. 심상치 않은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과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목소리. 모든 것이 평소와는 달랐다. 

“이봐. 갑자기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내가 어떻게 하면 될까. 그래. 너도 똑같이 하면 되겠구나.”

이후가 더 붙잡기도 전에 지한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이곳저것을 헤매다 겨우 주방을 찾아 들어갔다. 싱크대 위에 있던 그릇이 어지럽게 쏟아졌다. 

-쨍그랑. 쾅, 와장창. 

천둥소리와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섞여 어느 것이 어떤 소리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그 요란한 파괴는 한참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지한은 깨진 조각을 밟는 것도 모른 채 무언가를 열심히 찾고 있었다. 이후는 그 모습을 한 발작 떨어진 채 바라보았다. 마침내 그가 원하는 것을 찾을 때 까지. 그는 서랍을 뒤져 날이 시퍼런 칼날을 찾아냈다. 

“이거면 되겠지. 이걸로 날 찔러.”

지한은 칼날을 자신의 목에 바로 가져갔다. 부주의한 칼끝이 그의 마른 목을 스쳐 희미한 혈흔을 만들어 냈다. 이후는 냉랭한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실상 저걸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 중이었다. 

“왜? 마음에 안 들어? 아니면 목을 졸라도 좋아. 그래, 똑같이 하는 게 좋겠지. 마음대로 해……. 날 죽여.”

이후는 지한이 앞으로 다가온 순간 손을 뻗어 그의 손에 들린 칼을 붙잡았다. 몸을 끌어당겼을 때처럼 의외로 그는 세게 버텼다. 지한은 이번에도 쓸데없이 고집을 부렸다. 한참을 실랑이 끝에 이후는 그의 손에서 그것을 빼앗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쪽도 그쪽도 조금 피를 봐야했다. 크게 다친 것은 아니었지만 피가 팔을 타고 흘러 옷을 적시고 있었다. 솔직히 조금 아프기도 했다. 

여전히 주변은 위험했다. 저만치 던져진 칼은 물론 깨진 그릇으로 바닥은 살벌했다. 그럼에도 또 다시 칼을 쥐려고 손을 뻗는 지한을 막아섰다. 아무리 해도 말을 듣지 않는 그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이후는 그를 그대로 와락 끌어안았다. 그래도 지한은 품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썼다. 필사적이었다. 어떤 순간보다도.

“정신 차려. 좀……. 진정해.”

말을 하면서도 좀 우스웠다. 자신이 이런 말을 타인에게 하다니. 늘 다른 사람에게 듣던 말이었다. 그런 말은 누구보다도 자신에게 어울렸다. 지금 이 남자에게 어울리는 말은 아니었는데. 이후는 여전히 꿈틀거리는 몸을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머리를 어깨에 힘껏 누르고 숨을 골랐다. 실랑이를 한참 했더니 그 역시 기운이 없었다.

“미안해……. 미안해.”

“뭐가?”

들려오는 목소리는 꺼질듯 연약하게 하지만 끈질기게 이어졌다. 무엇이 그렇게 미안할까. 이후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그는 자신을 향해, 아니 동생을 향해 몇 번이나 그 말을 했지만 이번처럼 간절하게 들리지 않았다. 그전의 말들은 거의가 방어일 뿐이었다. 두려워 내뱉는 방어의 수단이었던 사과들. 그것과는 분명 틀렸다. 

“그때 그건 실수가 아니었어. 난 널 정말 죽이고 싶었어. 네가 세상에서 없어졌으면 했어. 정말 그랬어. 그랬단 말이야·····.”

흐느끼는 음성이 무척 괴롭게 들렸다. 죽이고 싶다고 말하는 목소리는 차라리 자신을 죽이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 정도로 괴로움이 느껴졌다. 이후는 한숨을 내쉬고 그를 끌어안은 팔에서 힘을 놓았다. 

“진짜 답답한 사람이네. 정말 그녀석이 당신을 원망할거라고 생각해?”

빗물인지 무엇인지 모를 물에 흠뻑 젖은 얼굴이 이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분명 눈가를 붉게 물들이고 있다. 그것은 눈물일 것이다. 아직도 기댄 몸이 떨리고 있었다.  

“원망하긴커녕, 그런 짓을 하게 한 자신을 미워했을 걸.”

“그, 그럴 리가. 말도 안 돼.”

“아니, 말 돼. 윤민한은 그런 인간이니까, 그만큼 당신을 사랑했으니까.”

“······.”

“그걸 알면 돼. 그거면 충분해”

지한의 얼굴은 무척이나 어리고 약해 보였다. 그는 갑자기 어린아이가 되어 이후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한은 어린 시절의 자신으로 돌아가 버린 지도 모른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순식간에 시간이 돌려졌다. 잊고자 했지만 결코 지워지지 않았던 시간으로. 

“그리고 어차피 당신은 못했잖아. 아니 못했을 거야.”

“정말?”

물기에 젖은 목소리가 안타깝게 물어왔다. 이후는 웃었다.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웃음이 그의 입가에 걸렸다. 슬픔과 괴로움에 지쳐 자신에게 기대있는 남자와 달리 이후의 마음은 어쩐지 즐거웠다. 즐거워 웃음이 나오는데 어쩐지 가슴이 묵직하게 내려앉는다.

“그래. 당신은 그렇게 착한 사람은 아니지만, 또 그렇게 나쁜 사람도 아니니까.”

손을 뻗어 불안에 떨고 있는 뺨을 감쌌다. 그는 반항 없이 순순히 끌려왔다. 이후가 그의 입술을 지그시 누르고 안으로 천천히 침범했을 때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입술이 잠깐 떨어졌을 때, 눈을 뜨고 힘없이 물어왔다.

“당신……. 누구야?”

지한의 물음에 이후는 난처한 듯 웃었다. 그는 망설였다. 지한은 그의 망설임이 낯설다고 생각했다. 망설이고 나처해하는 것은 늘 자신의 몫이었는데……. 멈춰있던 그의 웃음이 씁쓸하게 번지고 망설이던 손이 다시 그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몰라. 나도 모르겠어.”

무책임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지한은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숨도 쉴 수 없도록 쏟아지는 입맞춤도, 젖은 몸을 파고드는 낯선 손길도.

*

여러 가지 감정이 비가 쏟아지듯, 아니 파도치듯 한꺼번에 밀려왔다. 몸을 삼킬 듯 핥는 입술과 몸을 벌리고 끊임없이 감겨드는 손가락은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가슴을 물들이는 뜨겁고 부드러운 감정은 가슴을, 몸을 그대로 녹여버릴 듯 했다. 녹아 없어져도 사실 상관없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니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이해할 수 없는 희망과 절망이 교차했다. 

몇 번이고 거칠게 끈질기게 부딪쳐오는 입술을 견디지 못하고 몸이 허물어졌다. 쓰러지듯 바닥에 누여진 몸 위로 충격 없는 무게가 느껴졌다. 피부와 피부가 어느새 빈틈없이 닿았다. 이후는 어느새 자신의 옷도 훌훌 던져 버리고는 지한의 머리 위에 흩어져 있는 파편을 손으로 성의 없이 쓸어버렸다. 손끝에 희미한 상처가 남았지만 개의치 않는 듯 했다. 지한은 그 손끝을 바라보았다. 상처 입은 손끝이 자신의 몸을 끌어안고 매만지는 것을 보았다.  

젖은 시야에 들어온 것은 어둡지만 다정한 눈빛이었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는 차가웠다. 하지만 몸은 식을 틈이 없었다. 젖어서 무거운 옷을 벗겨내고 속옷까지 잡아 뜯듯 끌어내렸다 뜨거운 손이 피부를 움켜쥘 듯 쓸어내렸다. 

옷을 적신 물기는 어느새 살까지 완전히 적셨다. 그 물기는 이후의 몸까지 차갑게 적셨다. 입술을 가르고 치열을 훑던 혀가 아쉬운 듯 빠져나가 다른 곳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이후는 지한의 몸에 묻어있는 물기를 모조리 마실 듯 혀를 미끄러뜨리고 입을 맞추었다. 갈급한 사람처럼 다급하고 정성스럽게. 

그의 노력은 죽은 듯 늘어져 있던 몸을 살려냈다. 이후의 입술이 유두를 잘근 깨물자 가슴이 희미하게 튀어 올랐다. 그와 함께 이상한 열기도 피어올랐다. 희미하게 벌어져 있던 지한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이후는 마주친 눈을 향해 깊숙이 웃으며 입술을 더욱 아래로 미끄러뜨렸다. 그리고 지한의 다리를 부끄러울 정도로 활짝 벌렸다. 그리고 그 사이에 익숙한 듯 몸을 기대왔다. 두개의 몸이 딱 맞는 자물쇠처럼 맞물려갔다. 

이후는 말라서 평평하기 그지없는 배에 키스를 하고, 그 다음엔 허벅지 안쪽에 자잘하게 입을 맞추며 경련하는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이미 지한의 성기는 그 집요한 애무에 고무되어 뻣뻣하게 서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이후가 그것을 손에 움켜쥐고 입술에 하듯 키스했다. 

“흐읏…….”

힘겨운 숨을 토해내던 입술사이에서 울음 섞인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더욱더 거침없이 그것을 물고 입안에서 자극했다. 정상이라면 질색하며 물러나야겠지만 지한은 지금 손끝을 움직이는 것조차 힘겨웠다. 

마치 모든 것이 자신의 의지와 다르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지한은 무력하게 자신을 장악해 가는 남자를 바라보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져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나약한 몸이 뜨거운 점막 안에서 괴롭혀져 곧 사정하고 말았다. 

“아, 아……!”

그런 후에도 사타구니에서 머리를 들지 않았다. 더욱 음란하고 끈질기게 할짝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늘어진 성기를 욕심껏 핥은 후에 고개를 들고 입술을 훔쳤다. 젖은 입술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의 해결되지 못한 욕망처럼. 

이후는 지한의 몸을 더욱 바짝 끌어당기며 지한의 다리사이에 자신의 욕망을 노골적으로 비벼댔다. 반사적으로 굳어버린 다리를 끌어올리며 그는 손을 뻗어 엉덩이를 움켜잡고 벌렸다. 피부가 팽팽히 당겨지는 기분이 불쾌했다. 그 사이로 들어오는 타인의 손길은 더욱 기분이 나빴다. 하지만 움칠대는 몸을 더욱 단단히 누르며 나머지 손은 더욱 깊숙이 안으로 들어왔다. 

안의 근육이 저항하며 필사적으로 밀어내려 해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아니 더욱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그의 손이 내밀한 부분을 비벼 댈 때 마다 지한은 짧게 숨을 삼키며 눈물을 흘렸다. 조금 전까지와는 다른 이유로 그는 울고 있었다. 그래도 그 묵은 슬픔은 밑바닥에 옅게 깔려 있었다.  

“당신, 누구…누구야…….”

지한은 열기 속에서 헛소리처럼 여러번 중얼거렸다. 그럴수록 몸을 만지는 손길은 거칠고 급하게 변했다. 이후는 그의 생각을 차단하고 시야를 막아버렸다. 

“누구든 무슨 상관이야?”

그런가. 그럴지도……. 지한은 이상하게 쉽게 납득해 버렸다. 지금 이 순간 이 남자를 잊자. 이 얼굴을 잊자. 지한은 그렇게 눈을 체념했다. 체념인지 허락인지 모를 표정이 욕망과 열기에 들뜬 공기에 흐릿하게 퍼지자 그는 잠시 멈추었던 것을 계속했다.

“생각 하지 마. 보지도 마. 그냥…….”

“아……! 으응, 읏!”

“그냥 거기 있어. 도망치지 말고.”

어차피 도망칠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 말을 어렴풋 떠올렸지만 그 순간, 손가락이 드나들던 곳으로 어느새 이후의 페니스가 들어오고 있었다. 두꺼운 성기 끝이 무식한 기세로 안으로 진입했다. 몸이 휘고 발끝까지 단단히 굳어 버렸다. 이후가 더욱 안으로 그것을 드밀었을 때는 참으려 해도 몸이 멋대로 날뛰었다. 달아나려고 꿈틀 거리는 지한의 허리를 옭아매듯 끌어안고 이후는 허리를 더욱 깊숙이 집어넣었다. 

“아, 아아·····!”

살이 한계까지 벌어지며 그의 성기를 받아들이는 모습은 조금 기괴할 정도였다. 지한은 맨 정신이라면 바라보지 않았을 광경을 시선을 떨구어 바라보았다. 힘겹게 숨을 내쉬며 턱을 들자 바로 곁에 있던 입술이 닿았다. 그의 혀가 밑을 파고든 성기처럼 게걸스럽게 입안으로 파고들었다. 입천장의 거칠한 부분을 핥고 이가 부딪치고 단물이라도 된 듯 침을 삼켰다. 그 질척한 키스에 정신이 팔린 사이 내벽에 감싸여 있던 페니스가 슬슬 움직였다. 

크게 뒤로 빠진 성기가 다시 깊숙이 들어왔다. 충격에 몸이 위로 밀려났다. 잔뜩 구겨진 몸을 더욱 단단히 죄며 이후가 다시 움직였다. 아까보다는 부드럽게 그렇지만 더욱 빠르게. 지한은 그때마다 울며 숨을 삼켰다. 아프기도 아프지만 몸 안에서 근질대는 이상한 기대감이 그를 괴롭혔다. 그것이 쾌감의 전조임을 한참 후에야 알았다. 

살과 살이 부대끼고 스치는 소리에 질척한 물기가 섞여 들어갔다. 건조한 열기에도 끈적한 요염함이 짙어져 갔다. 지한의 몸을 오가는 피스톤 질은 더욱 거칠어 졌다. 내벽을 찌르는 이후의 성기는 시간이 갈수록 집요하게 한 곳만을 찔러댔다. 그곳을 스칠 때마다 지한은 더욱 크게 울부짖으며 몸을 뒤틀었다. 그의 팔에 매달려  ‘좀 더, 더…….’ 라고 요구하며, 마침내 쾌감을 따라 스스로 허리를 흔들었다.

얽힌 몸이 완벽하게 하나가 되어 흔들렸다. 무언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고 어깨에 피부를 찢는 통증이 아찔하게 스쳤지만 그런 것을 상관할 겨를이 없었다. 그저 안에서 자맥질하는 이후의 욕망에 흔들리며 느끼느라 정신이 없었다. 

섹스인지 고문인지 모를 감각의 향연이었다. 뚫리고 흔들리고 전율하며 마침내 토해내는 행위의 반복, 또 반복. 그리고 그 짙고 위험한 쾌감에 가려진 감정들. 그것들은 다만 물러나 있을 뿐이지 여전히 가슴에 남아있었다. 지한은 그것을 잊기 위해 그에게 더욱 강하게 매달려 있었다. 

절정에 달한 움직임이 둔하게, 그러나 더욱 강하게 지한을 꿰뚫었다. 뜨겁고 한없이 부드러운 것이 안을 가득 채웠다. 채우다 못해 넘쳐흘렀다. 이제껏 쉼 없이 달리던 이후가 겨우 지한의 몸에 쓰러지며 깊은 한숨을 지었다. 

마주친 눈이 농밀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지한은 거기에 비친 옅은 슬픔을 느꼈다. 그의 것인지, 아니면 그의 눈에 비친 자신의 슬픔인지 알 수 없는 그런 슬픔이. 그리고 그 슬픔 곁에 이상한 애틋함도 함께 있었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을 바라보는 것 같은 눈이었다. 모든 것이 비현실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말이 안 되는 것은 그것이었다. 왜 당신이 나를 그렇게 바라보는 걸까.  

아주 오랫동안 잔 것 같았다. 며칠, 혹은 몇 년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은 깊은 잠이었다. 지한은 눈을 뜨고도 한동안 그 막연한 감각 속에서 헤맸다. 그 다음엔 몸이 적응하는 시간이었다. 몸이 이상하게 무거웠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는 아직도 꿈속을 헤매는 감각에 둘러싸여 있었다. 겨우 몸을 일으키다가 어깨 즈음에서 느껴지는 쓰라린 통증에 놀라 손을 뻗어보았다. 희미한 상처가 만져졌다. 찢어졌다기보다는 긁힌 정도였지만 꽤 컸다. 그리고 내려다 본 몸 곳곳에 상처와는 다른 자국들이 남겨져 있었다. 그것들을 본 후에야 지한은 간밤의 일을 떠올랐다. 얼굴이 천천히 달아올랐다.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 강렬한 기억이었다. 그래, 그건 분명 꿈이 아니었다. 혼란과 고통을 참을 수 없어 방황하던 자신이 왜 그를 떠올렸는지 모르겠다. 그……라기 보다는 동생을 찾아온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민한은 정작 만나고 싶은 순간에 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지한을 맞아준 것은 이후였다.

시트를 들춰보니 옷을 입지 않긴 했지만 상태는 깨끗했다. 몸에 남은 자국이 아니라면 꿈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정도였다. 그러길 바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독한 후회가 밀려왔다. 하지만 그 순간의 자신은 어쩔 수 없었다. 머릿속에 어렴풋 스치는 간밤의 기억, 그 기억속의 자신. 지한은 그 낯선 모습에 아연해 졌다. 자신인데도 다른 사람 같은 느낌이었다.

대충 옷을 찾아 입고 밖으로 나왔다. 푸르스름한 새벽의 빛에 의지해 걸음을 옮기다 문득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는 방을 돌아보았다. 그곳에서 흐릿한 음악소리가 흘러나왔다. 지한은 이끌리듯 그곳으로 향했고 문을 열었다. 

작지도 넓지도 않은 캄캄한 방안에는 컴퓨터와 키보드 그리고 알 수 없는 장비가 어지럽게 놓여있었다. 아마도 그가 일하는 작업실이 아닐까 싶었다. 이후는 헤드폰을 끼고 있는데다 등을 돌리고 있어 지한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는 건반 앞에 앉아 반복적인 멜로디를 반복하고 있었다. 

“벌써 일어났어?”

보지 않고도 그는 지한의 존재를 눈치 채곤 말을 걸어왔다. 지한이 대답이 없자 몸을 일으켰다. 그는 집안에선 늘 반라의 차림이었다. 몸에 자신이 있는 건지, 아니면 단순히 열이 많은 건지. 평소엔 별로 신경 쓰지 않던 차림새를 지한은 새삼 쳐다볼 수가 없었다. 어색한 행동인 걸 알면서도 시선을 피했다. 그는 그것을 비웃는 건지 뭔지 피식 웃었다. 

“지금은 멀쩡하네.”

“나는 늘 멀쩡해.”

지한도 드문드문 어제의 일을 기억했다. 자신이 어제 이 집에 쳐들어와 무슨 이상한 짓을 했는지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알고 있으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은 뻔뻔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제는 누구더러 뻔뻔하다는 욕을 할 수 없을지 모르겠다.

“그렇지. 맞아. 당신은 늘 정상이야. 나하고 다르게.”

그렇다고 그렇게 말하는 것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쩐지 비꼬듯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후는 평소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그 다름없음이 지한을 더욱 불안하게 했다. 돌아서 방을 나오려는데 이후가 그를 붙잡았다.

“피.”

“뭐?”

“여기.”

이후는 정확히 지한의 어깨를 건드렸다. 지한은 그의 손길을 피해 뒤로 물러나다가 비틀거렸다. 비틀거리는 몸을 재빨리 다가온 손이 붙잡았다. 아파서는 아니었다. 지한이 그를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딘지 씁쓸하고 안타까운. 참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었다.

이후는 한참을 집안을 뒤지더니 소독약을 찾아가지고 왔다. 뽀얗게 먼지까지 앉아있는 소독약의 효험이 의심스럽긴 했지만 지한은 그의 친절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신경 쓰이면 그냥 좋을 대로 생각해.”

묵묵히 치료를 하던 이후가 무심히 말했다. 웃음도 장난도 섞이지 않은 목소리였다. 물론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냥 귀신한테 당한 거라고 생각하란 말야. 나랑 섹스 했다고 생각하면 싫을 거 아냐?”

“…….”

“난 상관없어.”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고 말해야 했을까. 아니, 나는 정말 싫지 않았던 건가. 지한은 고민하는 사이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지한은 출근하기 위해 이후의 집을 나왔다. 그때까지도 이후는 자신의 작업실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많이 바쁜 모양이었다. 어쩌면 자신이 찾아와 방해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지한의 옷은 어제와 달리 바짝 말라 있었다. 하늘 또한 어제의 폭우가 무색하게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상태였다. 그의 마음만이 여전히 물기를 머금고 있을 뿐이었다. 

텅 빈 거리에서 택시를 기다리며 어깨의 상처를 어루만졌다. 쓰라린 통증이 어제의 일을 상기시켰다. 완벽한 기억보다 더 선명히 남아있는 감각들을. 그 분명한 쾌감과 욕망을, 이상한 위로를. 말들을. 어깨가 스치고 아픔을 느낄 때마다 아마 기억할 것이다.    

*

“난 더운 나라도 좋아하지만 자긴 아무래도 싫지? 동남아 아니면 유럽 쪽도 괜찮을 것 같아. 유럽을 갈 거면 일정을 좀 더 넉넉하게·····.”

테이블 위에는 여행사 팸플릿이 펼쳐져 있었다. 지한의 시선은 그 팸플릿을 정확히 비켜나 민혜의 앞에 놓인 물 잔을 향해 있었다. 그 어긋난 시선을 뒤늦게 눈치 챈 그녀는 말을 멈추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조차 통하지 않아 결국 그녀는 말로써 지적할 수밖에 없었다. 약간의 걱정과 한숨을 뒤로하고. 

“무슨 생각해?”

“아냐. 그냥 좀…….”

멍한 얼굴에 뒤늦게 난처한 기색이 돌았다. 원래 이렇게 넋을 놓는 일이 자주 있던 사람이라면 말을 않을 테지만 요즘의 그는 확실히 심했다. 걱정도 되지만 동시에 짜증이 나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일이 바쁜 사람이라 결혼준비는 자신의 몫이 될 거란 건 이미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도 신혼여행지에 대해 상의하고 있는데 이런 태도라니. 최소한의 협조도 불성실하니 마음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나랑 있을 때는 좀 내 생각만 하면 안 돼? 아니지. 이거 내 일이 아니라 우리 일이라고.”

“미안해.”

“미안하면 좀 개선의 여지를 보여줘야지. 자기 요즘 늘 그래.”

희미한 짜증이 스민 눈빛 앞에서 지한은 멈칫했다. 이런 얼굴을 하게 하다니. 정말 한심하단 생각이 들었다. 

“또 미안하다고 하려면 말을 마.”

하지만 미안하다는 말 밖에 할 말이 없었다. 지한은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피해버린 그녀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손을 뻗어 테이블 위에 있는 그녀의 손을 잡으려는 찰나 음식이 나왔다. 

민혜는 음식이 나오곤 불만스러운 얼굴로 음식을 꾸역꾸역 입안에 넣었다. 어딜 봐도 토라진 게 역력했다. 어떻게 풀어주어야 하나 고민하며 지한도 식사를 시작했다. 새로 생긴 파스타 집이라 모험 삼아 들어왔는데 후회스러울 정도로 평이한 맛이었다. 인테리어가 멋져서 민혜가 가보고 싶다고 해서 들어온 가게였다. 

“진짜 음식도 맛없고……. 짜증나게.”

“그러게. 집에서 한 것보다도 별로네.”

“자기 파스타 만들 줄 알아?”

최소 한 시간은 말을 하지 않을 것 같이 굴던 민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왔다. 놀랐나. 하긴 라면 끓이는 것조차 본적이 없는 남자가 이런 말을 하니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지한은 자신도 모르게 떠올린 누구를 생각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아니. 누가 만들어줬었는데……. 잘 하더라구.”

안 먹으면 후회할거라고 한대로 이후가 만들어준 파스타는 맛이 있었다. 먹지 않고 버리려다가 파는 것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그럴싸한 모양새 때문에 맛을 볼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 자리에 앉아 싹싹 비웠다. 배가 고팠던 탓도 있을 것이다. 이후의 작품은 최소한 이 집 파스타 보다는 훌륭했다. 물론 지한은 그 사실을 요리를 만든 당사자에게는 말해주지 않았다.  

원체 입맛이 없던 지한은 음식을 반쯤 먹다 포기했다. 그래도 꿋꿋한 민혜는 여전히 식사를 계속하고 있었다. 팸플릿을 무심히 넘겨보던 지한은 민혜가 팔꿈치를 툭툭 건드리는 바람에 고개를 들었다.

“지한씨, 저기 그 사람 아냐?”

“누구?”

민혜가 가리키는 방향이 지한이 앉은 쪽에서는 바로 보이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래도 발견하기까지는 다소 오랜 시간이 걸렸다. 

“왜 지난번에 뮤지컬 보러 갔다가 만난 지한씨 후배.”

“아니. 아닐 거야.”

“아니긴, 맞는 것 같은데. 우리 쪽으로 오네.”

어떻게 해볼 새도 없었다. 이후가 이미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난데없고 갑작스러웠다. 그래도 두 번째이기 때문일까, 지난번처럼 허둥대진 않았다. 그렇다고 반가운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그런 일도 있었는데…….

“또 보네요. 어쩐지 그럴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이후는 낯선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포장된 얼굴이었다. 이렇게 보니 지극히 평범한 ‘후배’로 보였다. 아마 민혜도 깜빡 속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한은 그처럼 연기에 능숙하지 않았다. 그저 표정 없는 얼굴을 유지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래요. 나도 그랬거든요. 약속 있어요?”

“예. 만나기로 한 사람이 늦네요.”

“자기는 왜 가만있어. 인사 안 해?”

“아·····. 그래. 오랜만이네.”

겨우 그 한마디를 하는 게 힘이 들었다. 마주친 눈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 지도 신경이 쓰였다. 이후는 이내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보이며 지한의 어깨를 툭 쳤다. 

“오랜만은 무슨. 엊그제도 며칠 전에도 봤잖아요?”

“이 사람이 원래 그래요. 보기하고 다르게 은근 무심하고 둔해요.”

하필이면 이후의 손이 닿은 곳은 그날 긁힌 상처가 남아있는 곳이었다. 며칠이 지났음에도 누군가의 손길이 지나니 상처가 아릿했다. 지한은 슬쩍 입술을 깨물며 그를 노려보았다. 이후의 손은 여전히 그 곳을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일행 올 때까지 같이 있어요. 심심하잖아요?”

“그럴까요. 그래도 됩니까, 선배?”

“그건 좀.”

“되죠. 안 될 게 뭐 있어.”

지한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민혜가 끼어들어 자리를 권했다. 민혜는 이 남자의 무엇이 마음에 든 것일까. 물론 그녀가 겨우 두 번 본 ‘김이후’ 라는 남자는 멀쩡하다 못해 매력적이기까지 했을 지도 모른다. 이런 사람이 수틀리면 사람을 물거나 협박하거나 자기 욕구에 따라 아무 곳에서나 발정한다고는 생각도 못하겠지. 알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민혜가 화장실에 간다며 자리를 비킨 후에야 지한은 그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이후는 그녀가 사라진 후에야 본래의 방만하고 멋대로 인 얼굴로 돌아왔다. 자세조차 삐딱하게 변했다. 지한은 그런 이후를 사납게 바라보았다.

“설마 지금도 우연이라고 할 셈이야?”

“아니. 실은 오늘 만나기로 했던 거 알았거든.”

“어떻게?”

“핸드폰. 문자 보냈더라.”

“기가 막히는 군.”

“그냥 보기만 할게. 댁의 약혼녀 한 번 더 보고 싶어서 말야. 내 타입이거든.”

“수작 부리지마.”

“잘할 것 같은데? 몸매도 좋고…….”

지한은 참지 못하고 몸을 일으켰다. 자신의 애인을 이런 식으로 말하는데 가만있을 남자는 없을 것이다.  

“농담이야. 그렇게 노려볼 거 없어. 나는 당신 같은 타입이 좋아. 물론 섹스를 포함해서.”

테이블이 흔들리고 그 위에 올려놓았던 손이 떨려왔다. 이후는 그 위로 태연히 손을 가져왔다. 마디가 굵은 손가락이 지한의 손가락 사이로 파고들어 손을 아프도록 꽉 쥐었다. 끈적하고 농밀한 움직임이었다. 마치 침대위에서처럼. 지한은 그 손을 가까스로 풀어냈다. 기분이 급속도로 불쾌했다. 아니, 불쾌함과는 다른 감정이 일었다. 지한은 그 감정을 애써 생각해 내지 않으려고 고개를 저었다.

“헛소리 하지 말고, 가줘. 부탁이야.”

성의 없는 말투에 어울리지 않는 간절한 부탁이었다. 이후는 다시 평소의 다소 삐딱하고 나른한 자세로 돌아와 있었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태도였지만 그렇다고 무슨 짓을 할 것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간의 경험을 보건데, 언제 갑자기 이상한 짓을 할지 몰라 불안한 기분이었다. 안심할 수가 없었다. 

“조금만 있게 해줘. 그냥 어떤 사람인지 얘기 해보고 싶었거든.”

“당신이 왜 궁금해?”

“글쎄. 라이벌이라고 생각해서 랄까.”

이상한 말이었다. 지한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귀를 의심했다. 무슨 소리냐고 물으려던 차에 민혜가 자리에 돌아왔다. 그녀는 가게에 대한 푸념을 중얼거렸다. 

“새 건물이라 화장실은 깨끗하네. 여긴 깨끗한 거 말고 장점이 없는 것 같아.”

“그래요? 맛이 별로인가 보네요.”

“네. 일행 오시면 그냥 자리 옮기세요. 맛이 영 아니에요.”

“충고 고마워요. 그렇게 하죠.”

일행은 무슨, 있지도 않은 일행 얘기를 하는 두 사람을 보니 기가 막혔다. 지한은 속으로 불만을 삼켰다. 물론 이 남자가 자신을 따라 이곳에 온 것을 알 리 없는 민혜는 해맑게 웃고 있었다.

“그런데 일행은 여자분?”

“네. 뭐·····.”

“혹시 지난번 그 분이에요? 애인인가 보죠?”

게다가 그녀는 오늘따라 이상하게 수다스러웠다. 그녀는 이후에게 관심을 보였다. 지난번에도 그랬지만 지금은 더욱 적극적이었다. 이상한 관심이라고 생각했다. 남의 사생활에 함부로 참견하는 경거망동하는 여자는 절대 아닌데, 왜 이럴까.

“민혜야.”

지한은 참지 못해 그녀를 불렀다. 하지만 불편한 것은 자신뿐인지 두 사람은 오히려 지한은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왜? 물으면 안 되는 거야?”

“아뇨. 괜찮은데요. 애인은 아니고 그냥 여자 친구입니다.”

“여자랑 어떻게 친구를 해요. 그치 지한씨?”

민혜는 지한은 바라보았다. 이후 역시 지한을 바라보았다. 지한은 그의 시선을 정면에서 마주하다가 그 뻔뻔할 정도로 빤한 시선에 결국 먼저 시선을 옮겼다. 왜 그런 식으로 쳐다보는지 알 길이 없었다. 탐색하는 시선이 오래 끌다가 웃으며 물러났다. 

“실은 예전엔 그런 식으로 만났던 사이가 맞습니다. 지금은 그냥 편하게 지내죠.”

“어, 그래요. 잘 어울리시던데 안타깝네요.”

결국 세 사람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후는 태연하게 일행이 사정이 있어서 오지 않기로 했다는 거짓말을 했다. 어쨌든 지한은 그에게 벗어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족했다. 

“아쉬워하지 마. 우린 더 자주 보잖아?”

참 속편한 해석이었다. 이후는 계산을 하는 지한의 곁에 서서 말도 안 되는 농담을 했다. 무시한 채 밖으로 나가려는데 팔을 붙잡혔다. 버티고 서려고 했지만 워낙 갑작스러워 그럴 수가 없었다. 결국 그대로 끌려가 입술이 겹쳐졌다. 순간이었지만 강렬한 키스였다.

“잘 가.”

놀란 머리가 아무런 대처도 못하는 사이 그는 먼저 사라졌다. 다행일지 몰라도 아무도 보지 않았다. 하지만 지한은 그 순간 벌거벗겨진 기분을 느꼈다. 

*

“대체 무슨 생각이야?”

눈앞의 남자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한이 왜 화를 내는 건지, 왜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른다는 듯 시치미 떼고 있다. 하지만 입가의 웃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대로였다. 

사실 미안해하거나 신경 쓰기를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 뻔뻔한 얼굴을 이해한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지한은 처음부터 그랬고,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그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었다. 다만 포기하는 일은 생기겠지만 말이다. 

지한은 이후와 헤어지고 나서도 내내 불편한 마음으로 오후시간을 보냈다. 집으로 돌아오니 반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와 있었다. 그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화가 나는데 낮의 일은 완전히 잊어버린 듯 행동하고 있었다. 지한은 참지 못하고 불만을 터뜨렸다.

“아까 식당에 나타났잖아.”

“뭐 어때서? 난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이러지마. 제발. 내가 당신이 하자는 대로 하면 민혜한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잖아.”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잖아. 그냥 구경만 했는걸.”

이후의 말이 사실이기는 했다. 그는 수상한 소리를 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의 등장만으로도 지한은 불편하고 불안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민혜의 앞이었다. 아무 일도 없이 넘어가긴 했지만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난다면 지한의 신경은 남아나질 않을 것이다.

지한은 더 이상 항의할 의지를 잃었다. 통하지 않는 말을 혼자서 해봤자 기운이 빠질 뿐이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것을 아무렇게 내려놓고 털썩 주저앉았다. 자신을 따라오는 시선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모든 게 귀찮아 졌다.

이후는 지한이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것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것은 낮에 민혜가 건넸던 여행사의 팸플릿이었다. 살펴보고 마음에 드는 나라가 있으면 말해달라며 상냥하게 건넸던 것이다. 

“여행 가려고? 아……. 신혼여행?”

“상관 하지 마.”

지한은 이후의 손에서 팸플릿을 뺏어 들었다. 이후는 한동안 말없이 자신의 빈손을 내려다보았다. 상처 받았다기보다는 무언가 의아한 표정이었다. 고개를 든 그는 지한을 향해 물었다. 

“정말 그 여자랑 같이 살 자신 있어?”

지한은 그 질문의 의미를 알지 못해 대답을 하지 못했다. 뜻을 알지 못함에도 그리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애써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분명 말도 안 되는 시비 일 뿐이었다.

“직장동료로서 자연스럽게 만난 사이, 외모로 보나 성격으로 보나 완벽한 여자. 거기다 집안까지 완벽하니 결혼상대자로서 손색이 없었겠지. 당신 인생의 수순대로라면 너무나 당연한 선택이었어. 하지만 너무 완벽해. 재미없어. 그런 관계일수록 위기에는 더 없이 약하거든. 쉽게 안심하고 있다가 한방에 흔들려. 아마……조금만  건드려도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릴걸?”

흔들리다니, 그런 일은 없다. 누군가가 훼방을 놓지 않는다면 문제없이 모든 것이 진행될 것이다. 지한은 몇 년 전부터 당연한 듯 민혜와의 결혼을, 미래를 생각했다. 너무나 당연해서 다른 일은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사소한 감정에 흔들려 망칠 수 없었다. 그렇다.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없어야 한다.

“그게 무슨 뜻이야? 우리는 아무 문제가 없어.”

지한은 정색하며 화를 냈다. 하지만 목소리가 묘하게 떨렸다. 과연 '우리' 두 사람 모두 문제가 없을까. 그 중 한명은 사실 치명적 문제점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렇겠지. 이건 그냥 내 희망사항일 뿐이야.”

“…….”

“화났어?”

지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말하지 못한 것은 화가 났기 때문이 아니었다.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의 말을 인정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에.

“그 여자가 그렇게 좋아?”

“좋아하니까 결혼하려는 거야. 당연한 걸 물어보지 마.”

“그래. 그렇구나.”

지한의 망설임 없는 대답에 이후는 어쩐지 실망한 얼굴이었다. 아니라는 대답을 바라기라도 했다는 건가. 지한은 그의 기대가 당혹스러웠다. 그건 마치 질투라도 하는 것 같은……. 아니, 말도 안 되지. 질투라니. 그는 그저 민한의 말과 감정을 전해주는 매개체일 뿐이다. 그가 좋아하는 사람은 죽은 민한이었고, 그가 자신에게 느끼는 모든 감정은 아마 민한과 관련된 감정이 전부일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간혹 마치 자신을 좋아하는 듯 말하고 행동한다. 며칠 전 밤에도 분명.

“당신 혹시 그 여자 앞에서 운 적 있어?”

엉뚱한 질문에 지한은 눈을 크게 떴다. 점점 그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언어로서는 알아듣겠지만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럴 거야. 당신 성격에 말이 안 돼.”

“그래. 그게 뭐 어떻다는 거야?”

“아니. 기뻐서 그래. 당신 내 앞에서는 몇 번이나 울어줬잖아?”

기쁘다는 말의 울림은 어떤 가식도 섞여 있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웃음에 지한은 긴장이 풀리는 걸 느꼈다. 그의 손이 다가와 자신의 뺨을 만지는 것도 모를 정도로, 지한은 당분간 얼이 빠져 있었다.

“그 여자는 당신의 그런 얼굴을 모르겠지. 고통스러워 이를 악물고 우는 당신의 안쓰러운 얼굴을 말이야. 난 몇 번이나 봤는데.”

이상하다. 이 남자는 확실히 이상해. 하지만 더  이상한 것은 자신이었다. 지한의 그의 말에 화를 내면서도, 불쾌해하면서도 그의 행동하나, 하나에 반응하고 있었다.

아주 멀리서 들리는 소리인줄 알았다. 분명 다른 집에서 들리는 소리일 거라 생각했었다. 그 정도로 그 소리는 멀리서 들려왔다. 지한을 깨어준 것은 이후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조차 지한에게는 가깝게 느껴지지 않았다.

“누가 온 것 같은데 안나가봐?”

어깨를 흔드는 손길을 뿌리치고 몸을 일으켰다. 부주의한 걸음이 휘청거리자 떨쳐낸 손이 다시 다가왔다.

“조심해.”

정말 걱정스러운 목소리였다. 하지만 지한은 한기를 느끼며 떨었다. 그는 자신의 감정이 혼란스럽고 무서웠다. 이 순간 누군가 자신의 집에 찾아온 것이 벨을 눌러준 것이 차라리 다행스러웠다. 말도 안 되는 감정에서 자신을 구해줬으니 말이다. 

“집에 없는 줄 알았잖아. 왜 이렇게 늦게 나와?”

하지만 지한은 문을 연 순간 그런 생각들을 모두 지웠다. 별 생각 없이 문을 열긴 했지만 특별히 누군가가 찾아왔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생각 할 겨를이 없었다는 것이 맞을 지도 모르겠다. 그에겐 그저 도망칠 곳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설마 그 도망친 곳이 이런 곳인 줄은 몰랐던 것이다.

“우리 안 반갑나. 놀랐어?”

반갑고 반갑지 않고를 떠나 이 둘의 등장이 의외로웠다. 우섭과 혜석이었다. 등 뒤에 있는 사람을 생각하면 한층 곤란했다. 지한의 아연해진 얼굴을 오해한 우섭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사과했다.

“갑자기 미안해. 얘가 갑자기 너네 집에 쳐들어가자고 난리잖아.”

“뭐 어때. 우리 댁 없는 사이에 많이 친해졌거든. 그치?”

혜석은 언제나와 같이 밝고 스스럼없었다. 오늘의 밝음은 눈치 없을 정도로 유난했다. 지한은 영문도 모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혜석이 무슨 질문을 했는지도 몰랐다.  

“오늘은 손님이 많네.”

그리고 대처할 사이도 없이 그들은 만났다. 우섭의 표정이 대번 굳었다. 혜석은 그저 눈을 크게 뜨고 이후를 바라보았다. 이채로운 눈길이었다. 신기한 생물은 본 듯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는 입가엔 뜻 모를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우섭의 기막힌 시선은 천천히 지한을 향했다. 그의 질문은 어디를 향해있는지 애매했다. 

“너……. 니가 왜 여기 있어?”

“아, 오랜만이네요. 반가워요.”

“하나도 안 반가워. 니가 왜! 야, 윤지한. 이거 뭐야?”

그는 지한에게 설명을 원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무어라 설명해야할지 몰라 막막했다. 어떤 예를 들어도 말이 안 되기 때문이었다. 이 말이 안 되는 관계를 묵인하고 있는 것은 누구도 아닌 자신이었고.

“잘 됐네. 뭐. 사람이 많을수록 즐겁잖아?”

상황을 정리한 것은 집주인인 지한이 아니라 객일 뿐인 혜석이었다. 그는 각양각색의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들을 주욱 훑어보더니 호기롭게 외쳤다. 그는 조금도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았다. 마치 이런 일을 예상하기라도 했다는 듯. 누구도 아닌 혜석이기 때문에 지한은 그 생각이 의심스러웠다.  

여전히 표정이 험악한 우섭을 대신에 혜석이 여기까지 온 연유에 대해 설명했다. 사가지고 온 술과 안주거리를 분주하게 늘어놓으면서 말이다. 한잔 할까 해서 찾아왔다고 했다. 우섭이 처음 말했던 것처럼, 그 생각은 혜석의 의견이었나 보다.

하지만 지금 상황으로 보아 즐겁게 마시고 놀 상황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멤버가 이상했다. 우섭은 지한에게 여러 번 말했듯 이후를 매우 싫어했다. 그는 호불호가 뚜렷한 인간이었고 그것을 표현하는 대도 망설임 없는 사람이었다. 예의상이라도 웃고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우섭은 금방이라도 주먹을 날려도 이상하지 않은 표정으로 이후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후는 그의 눈길을 대놓고 무시한 채 지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지한의 곤란해 하는 표정을 즐기는 듯 했다. 우는 모습을 웃으며 바라보고 있었을 때처럼 말이다. 그리고 혜석은 그런 이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이후를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 그랬을 수도 있지만 그의 시선은 그런 호기심과는 다른 속셈을 담고 있는 듯 했다.

“어이. 뭘 보는 거야?”

결국 이후는 그에게 시비를 걸듯 물어왔다. 혜석의 눈길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앉아있던 터라 더욱 놀라웠다. 지한은 두 사람을, 아니 우섭까지 포함하여 세 사람을 불안하게 살폈다.

“야. 얘가 너보다 훨씬 연상이야. 반말 하지 마.”

“아, 그랬어? 몰랐네. 그럼 존댓말로 하면 되나. 왜 꼴아 보세요?”

일어서려는 우섭을 혜석이 지그시 노려보았다. 그 차분한 웃음은 의외의 박력이 있었다. 지한 또한 그의 표정에 입을 다물었다. 무언가 어깨를 무겁게 붙잡는 기분이었다.

“기분 나빴다면 사과할게요. 댁을 보는 게 아니라, 사실 그쪽 뒤에 있는 분을 보고 있었거든요.”

혜석의 시선이 향한 곳에 아무도 없었다. 텅 빈 어둠만이 존재할 뿐. 그는 그곳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지한은 보이지 않는 존재의 출연에 전율했다. 그래봤자 자신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후는 여전했다. 다만 표정이 더욱 험악해 졌을 뿐.

“허튼짓하면 가만 안 둬.”

이후의 협박은 어쩐지 지한을 향한 듯 느껴졌다. 그저 지한의 착각이었다. 실제로 음산하고 살벌한 목소리며, 표정이었다. 그것은 농담으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라면 정말 그럴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명백한 협박이었다. 

“죽이긴 누굴 죽여. 이젠 협박까지 하냐. 이 새끼가, 진짜.”

“우리 섭섭이 또 오바 한다. 걱정 마. 내가 훨 쎄거든.”

아슬아슬한 분위기가 계속되었지만 혜석은 오히려 더욱 차분하게 변해갔다. 그는 농담을 건네며 우섭의 팔을 붙잡아 말렸다. 그리고 다시 이후를 바라보았다. 이후도 말은 살벌하게 했지만 아직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도 혜석을 관심 있게 바라보는 눈치였다. 좋은 의미의 관심이 아닌 것은 당연했다.

“그래. 뭐가 보이는데?”

“여러 명, 당신하고 가까운 사람도 있네요. 혹시 당신 가족?”

“잘 찍네.”

이후는 차갑게 웃었다. 웃음은 짧게 떠올랐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냉랭한 표정을 보면서도 혜석은 흔들림이 없었다. 억지로 감추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는 이후의 찢을 듯한 시선과 공격적인 말투에도 태연하기만 했다. 오히려 곁에서 지켜보는 지한이 조마조마했다.  

“찍는 게 아니라 그냥 보여서요. 더 맞춰볼까요.”

“좋을 대로.”

“사고로 죽었네요. 고통스럽고 외로웠다고 말하네요. 그리고 당신 혼자만 살아남았군요.”

“…….”

“아니. 당신 혼자만 죽지 않았어. 내 말 맞지?”

지한은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놀라기도 했지만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이후의 표정이 폭발할 듯 위험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지한은 자신을 향한 시선들을 향해 변명처럼 말했다.

“잔 필요하지 않은가 해서.”

“맞다. 있어야지.”

“가져다줄게.

자리를 비우는 것이 걱정되긴 했지만 여기 있는 것 또한 힘들었다. 그저 대화만 오갔을 뿐이었다. 지한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음에도 피로를 느꼈다. 지한은 싱크대 앞에 서서 늦은 한숨을 내쉬었다. 돌아가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런 상황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혜석이 이후를 보여 달라고는 했었지만, 실제로 만나게 할 생각은 없었다. 과연 이후가……. 혹은 그의 안에 있는 민한이 그런 일을 용납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의 이후를 보아도 그러했다. 그는 확실히 혜석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고 있다. 그래서 처음부터 철저히 경계한 것이다.

“미안해.”

기척도 없이 다가온 혜석의 사과에 지한은 놀라서 몸을 돌렸다. 그는 아까와 달리 풀 죽은 표정이었다. 그는 눈치가 없는 사람이 아니다. 지한이 힘들어 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왜.

“내가 너무 까불었나. 그렇지만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

“혹시 일부러…….”

그는 웃었다. 그 웃음에 지한은 몸에 꽉 차 있던 긴장이 스르르 빠져나감을 느꼈다. 

“네가 만나게 해주지 않으니까 어쩔 수 없었어.”

“딱히 그런 건 아니었어.”

“그래. 너도 어쩔 수 없었겠지.”

“정말 놀랍네.”

몇 번을 놀랐지만 지금처럼 놀란 적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들켰다고 해서 싫은 기분은 아니었다. 오히려 한숨 놓이는 기분이었다. 누구에게도 알리지 못해 갑갑했던 마음을 그에겐 억지로 숨길 필요가 없었다.

“나 너무 잘 알아서. 징그럽지? 나도 알아.”

“아니. 아냐.”

문득 서글픈 표정을 지어보이는 혜석을 향해 지한은 고개를 저었다. 다른 상황에서라면 이런 혜석을 두려워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의 존재에 감사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도 다 아는 건 아냐. 특히 너는 내가 이제까지 봤던 사람들 중에 제일 어려워.”

혜석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의외였다. 지한은 점을 치는 사람들을 많이 아는 것은 아니었다. 만난일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어떤 무속인이라 해도 혜석처럼 많은 것을 알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알지 못함을 말한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는 인간이다. 신이 아닌 것이다. 

제일 불안한 두 사람을 남겨두고 왔다는 걸 알고 지한과 혜석은 돌아가기로 했다. 다행히 아무 일도 없었다. 그렇다고 평화로운 분위기는 아니었다. 우섭은 말없이 맥주 캔을 비우고 있었다. 이후는 불편한 얼굴로 그래도 꽤 얌전히 앉아있었다. 다행히도 아무 일도 없이 시간이 지나갔다. 혜석은 아까의 일을 잊은 듯 웃으며 떠들었고 우섭은 그의 말에 틱틱 거리면서도 대꾸해주었다. 

지한은 자리에 돌아와서 혜석의 말을 떠올렸다. 이후에게서 보았다는 그의 가족을. 혼자 사는 게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혼자 살기에 지나치게 큰집이었으니까. 사실 그의 가족이 어쨌든 상관없었는지도 모른다. 예전에 들었다면 별로 오래 생각하지 않았을 말인데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 혜석의 말 대로면 그는 사고로 가족을 잃은 모양이었다. 본인은 그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혼자만 살아났다는 것과 혼자만 죽지 않았다는 말의 차이는 뭘까. 그것이 신경 쓰였다.

“어이쿠.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나 누나한테 혼나. 가봐야 돼.”

혜석은 오래 머물진 않았다. 이미 목적을 달성한 모양이었으므로 이후에게도 달리 시비를 걸지 않았다. 처음 쳐들어왔을 때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지자 부자연스럽던 활기도 뚝 끊겼다. 공기가 무겁게 변했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멀어진 후에야 지한은 천천히 이후를 돌아보았다. 그는 화가 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지한을 향한 감정이었다.

“씨발. 놀랐잖아.”

내려오는 엘리베이터에서도 말이 없던 우섭이 한숨처럼 욕설을 내뱉었다. 혜석은 그 소리에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사실 그 집에서 나오자마자 승질을 냈어야 당연한 사람이 말이 없다는 게 이상할 법도 했다. 혜석은 자기 생각에 빠져 있어 옆 사람을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뭐가?”

“야. 너 아는 거 있음 다 불어봐. 뭐야, 저건 대체.”

그간의 일들로 미루어 보건데-우섭은 김이후가 얼마나 악랄하고 싸가지 없는 놈인지에 대해 자주 설명한 바 있었다-그가 김이후를 반가워하지 않았으리란 건 당연했다. 혜석의 경우엔 어느 정도 예상한 상황이었지만 우섭 또한 지한 못지않게 놀랐을 것이다. 사고를 치면 어쩌나 조마조마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말 못해. 이건 엄연히 내 신용 문제야.”

“신용 좋아하시네.”

걱정을 하는 것도 당연한지도 모른다. 별다른 능력이 없는 사람이 보기에도 지한의 모습은 불안해 보일 것이다. 우섭은 친구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그러는 것이므로 이해는 한다. 하지만 혜석은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이 스스로도 무겁고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는 내내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저 숨기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 남자는 '진짜'다. 혜석이 그의 뒤를 떠도는 존재를 보았다면 그는 자신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동시에 자신을 방해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모종의 위협을 하고 있었다. 말 뿐만이 아니라 눈빛으로, 표정으로 가지고 있는 수단을 총동원해서 말이다. 그가 내뿜는 살기를 견뎌내느라 진이 빠졌다. 

“아니. 가만. 너 저번엔 잘 모르겠다고 하지 않았냐.”

삐져서 혼자 저만치 걸어가던 우섭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그걸 이제야 눈치 챘냐. 바보. 혜석은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아차 싶었다. 그는 좀 더 모른 채로 있는 게 나았다. 어차피 혜석은 알고 있는 것을 이 바보, 다혈질에게 알려줄 생각이 없었다.

“아참. 나 갑자기 볼일 생각났어. 너부터 가라.”

척 보기에도 변명 같은 말이었지만 하는 수 없었다. 볼일이 있는 건 거짓말도 아니었다. 혜석은 말하면서 이미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너 말하기 싫으니까 도망치는 거냐?”

“아냐. 정말 급한 볼일이라서 그래.”

혜석은 우섭에게 손을 흔들고 재빨리 돌아섰다. 당연히 거기 서라는 협박과 애원의 말이 들렸지만 무시했다. 겨우 안전한 곳에 도착해서야 한숨 돌렸다. 그는 핸드폰을 꺼냈다. 지한에게 하지 못한 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곳에선 감히 입에 담을 수 없었던 말이 남아있었다.

“전화 안 받을 거야?”

그 팽팽한 정적을 깨뜨린 것은  핸드폰 벨소리였다. 지한은 이후의 지적에 겨우 그 소리를 알아챘다. 전화를 받으라고 말하면서도 그는 여전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지한은 그의 눈치를 보며 핸드폰 폴더를 열었다.

“여보세요.”

-나야. 그 사람 여전히 옆에 있어? 

전화를 걸어 온 것은 방금 전 집을 나간 혜석이었다. 지한은 자신을 바라보는 이후의 눈치를 보며 대답을 했다.

“응.”

-그럼 듣기만 해도 돼. 아까 못한 말이 있어서 그래. 

“뭔데?”

순간 전화가 툭 끊겼다. 저쪽에서 끊은 게 아니라 이쪽에서 끊긴 것이었다. 지한은 빈손을 힘없이 늘어뜨리며 코앞에 다가온 남자를 바라보았다.

“형은 나를 기어코 쫓아낼 셈이야?”

언제나 낯선 기분이었다. 타인의 얼굴에 비치는 동생의 표정과 목소리, 비현실과 현실이 교차하는 순간. 생각을 할 수 없게 된다. 몸은 떨리고 마음은 얼어버린다. 지한은 이후가, 아니 민한이 핸드폰을 박살내는 모습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내가 아직도 그렇게 밉고 싫은 거냐구. 난 이미 죽었는데.”

지한이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하지 못한 채 헤맬 뿐이었다. 언제나 그랬다. 혜석은 동생의 앞에서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다. 그건 그가 살아있을 때도 마찬가지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황은 전혀 달랐지만 그는 화를 내고 슬퍼하며 또, 절망한다. 그리고 또 다시 화를 낸다. 

“하지만 소용없을 걸. 어떤 인간을 데려와도 날 쫓아낼 순 없을 거야.”

“그런 게 아냐. 넌 뭔가 오해를 하고 있어.”

뒤늦게 상황을 설명하려 했다. 자신이 누구에게 말하는 지도 모호한 상황에서. 하지만 언젠가 혜석이 말한 듯이 죽은 사람에게 논리와 사정을 설명하는 일은 무리였다. 그에겐 아무것도 통하지 않았다. 오로지 그가 앞세우는 것은 자신의 감정만이 전부였다.

“항상 아니라고 하지. 자기 잘못은 없다고 하지. 그럼 다 누구 탓인데, 내 잘못이야?”

“그러는 너는……. 너는 왜 내 말을 안 들어?”

“듣기 싫어. 어차피 형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잖아.”

답답함에 소리 쳤지만 돌아온 것은 싸늘한 거절의 말이었다. 동생의 비난은 비난이 아닌 사실이었다. 지어낸 모함보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 지한을 꼼짝할 수 없게 만들었다. 미안하다는 말도 이제는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닿지 않으리란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말은커녕 눈빛조차 피했지. 지금도 이해하는 척, 미안해하는 척 내 앞에서 연기하면서 사실은 날 어떻게든 쫓아버릴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지한은 처음에 그가, 아니 이 모든 상황이 두렵고 불쾌하고 곤란해 피하고만 싶었다. 꿈이길 바랐다. 그의 말대로 어떻게든 자신에게 붙어버린 망령을 떨쳐낼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금씩 변했다. 이해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도와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한 번도 들어준 적 없는 동생의 마음을 들어주고 편안히 잠들지 못하는 그를 가야 할 곳으로 돌려보내주고 싶었다. 하지만 믿지 못하는 그에게 억울하다 말할 수 없었다. 자신의 생각들은 모두 늦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 네 마음대로 생각해.”

포기라기보다는 순응이었다. 믿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되었다.

“날 방해하면 다 죽여 버릴 거야. 형 친구도, 그 여자도……! 아니면 형부터 죽여줄까?”

순간 목을 힘껏 붙잡혔다. 강하고 억센 힘에 숨이 막혀 버렸다. 호흡이 불가능했다. 죽는다, 죽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마음은 차분했다. 차라리 이대로 모든 것이 끝난다면, 그게 동생이 원하는 것이라면 들어주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지한은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괴로운 삶을 버텨온 이유도 지금에 와서는 불투명했다. 

내가 이제까지 무엇을 위해서 살아왔던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내가 민혜를 그렇게까지 사랑하던가. 물론 그녀를 좋아하고 그녀의 존재에 감사하며 그녀와 함께 행복을 꿈꾸었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 이 순간 삶의 이유가 되지 못한다. 일로 성공을 해봤자, 아니면 돈? 그걸로 무엇을 살 수 있을까. 

“당신, 왜……. 왜 이렇게 쉽게 포기하는 거야?”

그것은 현실의 목소리였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살아있는 목소리. 지한은 놀라서 눈을 떴다. 눈을 뜨니 괴로운 얼굴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입을 열어 뭔가 말을 하려는 순간 그의 몸이 떨어졌다. 그 반동에 지한의 몸은 바닥으로 힘없이 주저앉았다.

“그렇게 죽고 싶어? 사는 게 싫어?”

그는 화를 내고 있었다. 화를 내는 그의 얼굴은 자신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하는 것 같기도 했으며, 그 반대로 보이기도 했다. 마치 자신을 사랑하는 것 같기도……. 그런 생각을 태연히 떠올릴 정도로 지한은 아직 덜 깨어있었다. 모든 것이 이상하고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바로 눈앞의 남자.

“……왜 네가 화를 내는 건데?”

“제길. 나도 몰라. 모르겠다구!”  

돌아선 그는 지한을 향해 있던 화를 다른 곳에 풀기 시작했다. 그는 손에 잡히는 것을 잡히는 대로 던지고 부셨다. 술병이 깨지고 화분이 쓰러지고 의자가 뒤집혔다. 

지한은 그 모든 장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같은 장면을 보고도 그의 마음은 둔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마치 잠에서 막 깨어났을 때와 같았다. 여전히 목 언저리가 얼얼했다. 민한은 정말로 죽이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멈춘 것은 이후였다.

그 순간, 지한은 분명 이후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서 울분을 터뜨리고 있는 것이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민한인지, 이후인지. 지한은 그것을 알지 못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

눈을 뜨니 아무도 없었다. 지한은 거실 카펫 위에서 눈을 떴다. 새벽의 희뿌연 빛이 거실 창으로 여과 없이 들어오고 있었다. 눈이 부시다. 간만의 일이 꿈인 듯 느껴졌다. 하지만 몸을 일으켜 거울을 보니 목에는 선명한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엉망이 된 집안. 치울 의지가 들지 않을 만큼 엄청났다. 

그 사람 다치지나 않았을지 모르겠다. 지한은 조금 태평한 생각을 떠올렸다. 이제는 어떤 일이 있어도 놀라지 않을 것 같았다. 죽은 동생이 나타나 자신을 원망하는 이 상황에서 무엇을 믿지 못할까. 

지한은 모든 것을 내버려 두고 출근 준비를 했다. 도우미가 이 꼴을 본다면 불평할 게 뻔했지만 돈을 조금 더 주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보다는 다른 것이 더 걱정이었다. 동생은, 그리고 이후는 화가 나 있었다. 각자 다른 이유로. 정말 죽는 줄로만 알았으니까. 하지만 포기한 순간에 물러나 너무나 순순히 물러나 버렸다. 

점심시간에 회사로 손님이 찾아왔다. 지한은 민혜인가 싶어서 묻지도 않고 내려갔다. 핸드폰은 어제의 사고로 고장 났고 연락이 안 되니 답답해 찾아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야. 걱정했잖아.”

하지만 지한의 예상은 한참 빗나가 있었다. 혜석이었다. 그의 얼굴엔 긴장과 반가움에 섞여 있었다. 물론 지한도 그가 반가웠다. 놀란 것은 의외였기 때문이다. 어제도 봤는데 왜, 또? 

“어떻게 왔어?”

“어떻게 오긴. 전화 안 되서 놀랐다. 경찰에라도 신고해야 하나 했어.”

그러고 보니 한창 통화중 끊어버렸다. 물론 지한이 원한 일은 아니었지만 상대방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침에라도 전화를 해줄 걸 그랬다고 후회했지만 이미 지난 일, 어쩔 수 없었다.

“미안하다. 전화 했어야 하는데 깜빡 했어.”

“됐어. 무사한 거 봤으니까 다행이지 뭐.”

“걱정할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닌데······.”

괜한 말을 덧붙였다. 생각했다. 혜석의 놀란 표정을 보기 전에 말이다. 그는 놀란 얼굴에 천천히 어색한 웃음을 떠올렸다.

“사실 사이가 좋았던 거야? 감쌀 줄은 몰랐다.”

전이라면 망설임 없이 절대 아니라고 했겠지만,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사이가 좋다고 할 순 없지만 이젠 마냥 미운 것도 아니었다. 이해할 수 없고, 이해 할 마음도 없는 이상한 인간이라고만 생각했었다. 어떻게든 밀어내고 외면하고 싶었지만 어느 날부턴가 자신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가끔은 손을 내밀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것은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신을 싫어한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그게 아니란 것을 알았다. 어제의 일만해도 그렇다. 그 순간, 민한의 손에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때. 그가 자신을 구해준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근거라곤 하나도 없는데…….

혜석은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이었다. 괜찮다고 말했는데도 안심을 하지 못한 눈치였다. 지한은 일부러 밝은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그 역시도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분위기만 더욱 무거워졌다. 그는 무엇을 그렇게 신경 쓰고 있는 걸까. 그러고 보니 어제도.

“그런데 어제 하려던 말이 뭐야?”

단순히 화제를 전환하기 위해 꺼낸 말은 아니었다. 지한은 어제의 통화를 떠올려 보았다. 혜석은 웃으며 돌아간 지 몇 분 만에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했던 것이다.

“그 남자 내가 진짜인걸 알아. 보통 인물은 아냐. 분명히 보는 눈을 가지고 있어.”

지한은 그들이 나누던 묘한 대화들을 떠올렸다. 보이지 않는 것을 말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에 화를 내던 이후, 그리고 혜석. 그리고 아마도 자신이 모르는 것이 그것 말고도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뭔가 네가 얘기한 것과는 틀려.”

“그게 무슨 뜻이야?”

지한은 혜석의 말뜻을 퍼뜩 알아듣지 못했다. 맞는데, 틀린다. 다른 의미를 가진 단어가 동시에 나왔다. 지한이 그의 말을 이해하려고 그의 표정을 살피자 그는 다시 쉽게 설명했다. 하지만 그 말 또한 지한에게는 어려웠다.

“그 남자가 하는 말 중에 거짓이 있다고.”

컴퓨터가 오랫동안 화면대기 상태였다. 그 까만 화면에 비친 지한의 얼굴은 창백하고 긴장을 잃은 상태였다. 평범한 사람의 얼굴에 서려있는 기본적인 생활의 긴장마저 사라진 얼굴이었다. 그는 바로 곁에 누군가 다가올 때까지도 쉽게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다.

“팀장님. 말씀하신 거요.”

반응이 늦게 돌아왔다. 하지만 자신의 상사가 요즘 상태가 매우 나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한 대리는 예의 그러려니 했다. 아무래도 결혼을 앞두고 있는데도 회사 일도 만만치 않은 탓이 아닐까 싶었다. 

“아. 고마워.”

핸드폰을 또 사는 것도 귀찮아서 회사핸드폰을 빌리기로 했다. 벌써 이번 달 들어 두 번째였다. 다른 것은 괜찮지만 일관계의 사람들에게 연락해야 한다는 것이 참 번거로웠다.

“핸드폰은 왜 자꾸 망가뜨리세요? 혹시 싸우다 그런 건 아니죠?”

“아냐. 내가 그렇게 난폭한 사람으로 보여?”

“아뇨. 팀장님 말고 민혜가 던졌나싶어서요. 걔도 화나면 무섭다구요.”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말에 지한은 잠깐 힘없이 웃었다. 연인인 자신이 보기에는 화를 내도 귀여울 뿐, 무섭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오히려 늘 담담하고 어른스러운 그녀가 가끔 화를 낼 때 귀엽다고 생각돼 역시 연하구나 느낀 일은 많았다. 하지만 동기이고 친구인 한 대리의 눈에는 그녀가 다르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일단 지한은 민혜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에게서도 한 대리와 비슷한 반응이 돌아왔다. 

-자기 정말 요즘 왜 그래. 어디 아파? 

원래 실수가 잦은 인간이라면 모를까, 너무 실수를 하지 않아 인간미 없게 느껴지던 사람이 최근 이상하게도 같은 실수를 여러 번 하고 멍하니 앉아있을 때도 잦다.

“아프긴.”

분명 상태가 나쁘긴 하나 그것은 몸의 병과는 차원이 달랐다. 몸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치기도 하겠으나, 근본적인 병증은 마음에 있었다.  

-불면증 여전한 거야? 

“요즘은 좀 나아졌어. 친구가 차를 선물 해줘서.”

-그래. 다행이네. 

밝은 목소리에는 전과 다른 석연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밝은 빛 아래 서 있지만 저만치 몰려오는 구름을 바라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지한은 자신의 기분이 기우이길 바랐다.

“혹시 다른 여자 생긴 거 아냐?”

“여자는 무슨.”

말도 안 되는 농담이라고 생각하다가 멈칫했다. 말도 안 되는 얘기는 아니었다. 여자는 아니었지만…….

“아님 남자거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 그녀의 목소리와 겹쳤다. 지한은 손에 힘이 풀려 핸드폰을 놓칠 뻔했다. 침묵 끝에 가벼운 웃음소리가 뒤따랐다. 가볍지만 묘하게 무겁게 울리는 웃음소리였다. 

“뭐야. 농담인데 반응 너무 썰렁하다.”

농담인 게 당연한 말에 너무 지나치게 반응했다. 지한도 그녀를 따라 웃으려고 했다. 하지만 마른 웃음은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오후 내내 고민하던 지한은 결국 이후를 찾아보기로 했다. 결국 본인에게 확인해보는 것이 가장 좋을 듯싶었다. 

‘나 그 남자에게서 네 동생을 느끼진 못했어. 어쩌면 내가 알지 못했던 건지도 몰라. 그 사람 근처는 굉장히 혼란스럽거든.’

얘기하는 그의 얼굴에 이상한 피로감이 끼어들었다. 밝은 표정으로 숨기고 있던 진짜 얼굴이 아닐까. 지한은 뒤늦게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도 그는 끝까지 자신의 힘듦은 내색하지 않으려 했다. 오히려 지한을 걱정해 주었다.  

‘애매한 조언이라 미안해. 그렇지만 나도 천하무적은 아니라……. 하지만 내가 잘못 봤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혜석의 말은 온통 모호하고 분명한 구석이 없었지만 그의 말대로 더 정확히 안다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어쩌면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말해주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생각해 보면, 제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누구도 아닌 당사자일 것이다. 숨기는 것이 있다면 그에게 들어야할 것이었다. 게다가 어제의 일을 묻고 싶기도 했다. 얼핏 카펫 위에서 핏자국을 본 것이 신경이 쓰였다. 

이후의 집은 여전했다. 여전히 황량하고 쓸쓸했다. 그의 가족에 대해 알게 된 후이기 때문인지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돌아올 사람이 없는 혼자뿐인 집인 것이다. 그렇지만 그 집의 대문은 여전히 누군가를 향해 열려 있었다. 

지한은 그 누군가가 자신일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예전의 습관이라고 그는 말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지금은 다르게 생각한다. 어쩌면 그는 자신을 위해 문을 열어놓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간 건가. 대문을 열 때부터 어쩐지 그렇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는 일도 생활도 불규칙적인 사람이라 매우 한가한가 싶으면 어느 때는 얼굴도 볼 수 없을 정도로 바빠지기도 했다. 어쩌면 볼일을 보러 나간 건지도 모른다. 지한은 별로 당황하지도 않고 어색하지도 않게 들어와 옷을 벗고 자리에 앉았다. 

아직 햇볕이 남아있음에도 그늘이 깊게 진 거실은 늘 같은 풍경이었다. 며칠 전에도 그리고 이 집에 처음 왔을 때처럼. 그저 지저분하다 생각된 그 풍경은 조금 다르게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흡사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풀숲같은 모습이었다.

머릿속의 많은 생각들은 고요한 공기 속에 차차 가라앉았다. 여기까지 달려올 때는 도무지 진정할 수가 없었는데 막상 당사자가 없는 정적뿐인 집안에 들어서자 어지럽던 의문도 조용히 멈추었다. 조급할게 무엇이 있을까 싶었다. 어차피 오늘 모든 걸 알게 될 테니. 

무질서하게 쌓아놓은 물건들 중에 가장 시선이 가는 것은 낡은 테이프들이었다. 이후는 그것들을 민한이 아주 예전부터 모아온 습작이라고 했었다.

‘죽기 얼마 전에 그것들을 정리해서 맡겨놓더라구. 작업실을 따로 구한다는 이유였지만 사실 자기가 죽게 될 걸 알았던 건지도 몰라.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지한은 동생이 이렇게 많은 습작을 완성했는지 몰랐다. 대학 때부터 틈만 나면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는 사실은 알았다. 그래서 가끔 볼 때 마다 볕에 그을려 있던 것도 알았다. 하지만 무얼 하는지 궁금해 한 적은 없었다. 잘 지냈냐고, 뭘 하고 지냈냐고. 그런 기본적인 안부조차 묻지 않았었다. 그때 한마디라도 해볼걸. 그래서 그 얘기를 들어줄 걸. 모든 것이 그것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지한은 그중 제목이 적혀있지 않은 테잎이 몇 개 있음을 알았다. 그냥 공 테잎일까, 아니면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왜냐하면 다른 테잎들에는 제목과 촬영 연도까지 꼼꼼하게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지한은 그것을 플레이어에 집어넣었다. 딱히 없던 관심이 생겼다기보다 작은 호기심일 뿐이었다.

화면에 비춘 것은 특별한 풍경도 놀라운 장면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쩐지 눈에 익었다. 지한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낡은 창틀과 무거운 커튼, 짙은 색 나무 바닥, 유일한 가구인 소파만이 조금 새것이었다. 

화면 속에는 지한이 앉아있는 거실풍경이 보였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같았다. 어스름한 불빛조차 닮아있었다. 계절조차 여름인 모양으로 매미소리가 안과 밖에서 겹쳐 들렸다. 누군가 카메라 앞으로 다가왔다. 얼굴을 확인하기 전에 목소리가 먼저 들렸다.

-어떡해. 나 좀 떨려. 

지한의 눈앞에 진짜 민한이 있었다. 물론 화면 속 과거의 모습이지만 그것은 지한의 동생이 맞았다.

-나 잘나와. 그래? 

-대충. 

그리고 얼굴이 보이지 않는 다른 목소리 또한 알고 있었다. 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람은 이후였다. 민한은 카메라 앞에 선 것이 어색한 듯 웃으며 그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럼 시작할게. 이상하면 말해줘야 돼. 알았지? 

-알았어. 

흔들리던 민한의 눈빛이 점점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의 눈이 더욱 분명하게 지한을 향하고 있었다. 사실은 카메라를 향한 것, 혹은 이후를 향한 것이겠지만. 지한은 그렇게 느꼈다. 이윽고 그가 던진 질문에도.

-저기, 제가 잘 보입니까? 

지한은 들고 있던 리모컨을 떨어뜨렸다. 아니 떨어뜨렸다가 보다 손안에서 흘러내렸다는 것이 맞았다. 그는 그것을 집어 들어 스톱 버튼을 눌렀다. 귀신을 본 것도 아닌데 심장이 미칠 듯이 뛰었다. 식은땀이 뺨을 타고 흘렀다. 자신조차 스스로의 동요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이유모를 두려움을 느끼는 자신을 타이르고 달래 다시 리모컨을 쥐었다. 다시 민한이 얘기하기 시작했다. 편안하고 차분한 얼굴에 쑥스러운 웃음을 머금은 채였다. 

-저는 윤민한이라고 합니다. 사실 이걸 누가 보게 될지 모르겠지만, 일단 말해두자면 이건 제 얘기라 그리 재미가 없을 지도 몰라요. 어쩌면 지루할까봐 걱정되기도 하고. 

민한이 말했듯이 그것은 그, 자신에 관한 내용이었다. 자신의 소개, 그리고 일상의 모습들. 잠에서 막 깨어난 그, 세수를 하고 옷을 입고 식사를 하고 거리를 걷는다. 친구들을 만나고, 간혹 그 친구들도 한마디씩 건넸다.

-야. 너 이거 뭐하는 거야? 웬 카메라? 

-별거 아냐. 신경 쓰지 마. 

-뭐 찍는 거냐? 

-비밀이야. 비밀. 

그도 가끔 카메라를 의식해 손을 흔들어 보일 때도 있었지만 그 외엔 아무런 대본도 연기도 없었다. 꾸밈없는 화면에 꿈결 같은 사람이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 형이야.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얼굴에 멍해졌다. 민한이 카메라를 향해 흔들어 보이는 것은 낡은 사진이었다. 싸운 듯 앉아있는 형제. 동생은 환하게 웃고 있지만 지한은 불퉁한 얼굴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때 찍은 사진인지, 지한은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분명 사진 속의 인물은 자신이었다. 

-아니까, 설명하지 마. 지겨워. 

카메라는 어딘가에 올려놓은 듯 고정되어 있었지만 목소리의 남자는 화면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가끔 지나치긴 하지만 의식적으로 그것을 피하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무성의한 말투와 독설은 이후였다. 

-그래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꼭 얘기해야 해. 내 인생의 중요한 페이지에는 모두 들어가는 사람이니까. 

잠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 다음 숨죽인 웃음소리가 들렸다. 민한은 의아하게 이후를 바라본다. 아마도 그를 바라보는 것일 것이다. 

-왜 웃어? 

-웃기니까. 

-웃겨? 

-그래, 너 병신 같아. 

의외로 그의 말에 혐오나 비웃음은 섞여 있지 않았다. 마치 농담을 들었을 때처럼, 혹은 정말 우스운 상황을 맞닥뜨린 것 같은 그런 웃음이었다. 그러나 어딘지 이질적인 느낌. 

-그래. 네 말이 맞아. 난 정말. 바보 같지. 멍청하지. 

자조의 말이 느리게 흘러나왔다. 민한은 기분이 상한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조금 씁쓸한 표정이었다. 그는 힐끔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마치 지한을 바라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당연히 그럴 리는 없었다. 

-난 네가 부러워. 

-뭐가? 제정신이냐. 

명백한 불쾌함과 의아함이 섞인 말투였다. 그 다운 목소리, 말투. 민한은 그의 반응에 웃었다. 아까의 씁쓸함이 남아있지 않은 얼굴이었다.

-너처럼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고 싶어. 내 마음이 내 발목을 잡아. 넌 그렇지 않잖아. 

대답은 아까처럼 즉시로 돌아오지 않았다. 생각을 하는 건지, 단순히 다른 일을 하고 있는 건지 목소리의 남자는 표정을 보여주지 않았다. 마침내 저쪽에서 어른거리던 그림자가 민한의 곁으로 다가왔다. 이번에는 분명히 얼굴이 보였다.

-그래? 난 네가 부러운데. 

민한은 호기심을 가지고 그를 바라보았다. 이후처럼 정색을 하진 않지만, 그 역시 퍼뜩 이해하지는 못하는 눈치였다. 이후는 아까 민한이 그랬던 것처럼 카메라를 잠깐 들여다보았다. 그 눈빛이 이쪽을 바라보는 것 같아 지한의 가슴이 희미하게 떨렸다. 그의 시선은 다시 민한에게로 돌아갔다. 

-넌 그냥 하지 않을 뿐이야. 나라면, 내가 너라면……. 

“언제 왔어?”

화면을 막아선 것은 이후였다. 집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이후가 서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고저가 없이 평이했다. 표정도 삭막할 정도로 움직임이 없었다. 그는 화면을 힐끔 바라 볼 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지한은 그의 얼굴에서 손으로 시선을 옮겼다. 대충 묶어놓은 붕대가 왼손을 감싸고 있었다. 아마도 어제의 상처일 게 틀림없었다.

“상처가······.”

지한은 말보다 손을 먼저 들었다. 그는 그 손을 뿌리치진 않았지만 순순히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자연스럽게 물러나 싱긋 웃었다.

“뭐야. 날 걱정해 주는 거야? 영광인데.”

“딱히 걱정하는 게 아니라, 보기 흉하니까.”

지한은 민망한 손을 거둬드렸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당황한 마음이 배가 되어 몰려왔다. 

“신경 쓰지 마. 자업자득이니까.”

이후는 자신의 손을 대수롭지 않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시선은 어느새 아직도 재생되고 있는 비디오를 향해있었다. 화면속의 그의 모습은 사라졌다. 이미 다른 화면으로 바뀌어 있었다. 

“녀석의 마지막 작품이야.”

“뭐?”

“그러니까 저건 자신에 대한 다큐멘터리라고. 물론 녀석이 죽어 버려서 미완성으로 남았지만…….”

자세히 설명해 주지 않아도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다. 왜 이런 것을 만들어 남겨놓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화면속의 민한은 여전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이제는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지 않았다. 이후가 나타난 이후로 제대로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대신 지한의 머릿속에는 아까의 장면이 여러 번 재생되었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내내 보았던 민한이 아닌 아주 가끔 비추던 이후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의 얼굴, 목소리와 표정과 말들. 화면 속에서 이쪽을 바라보던 무심한 눈빛.

“뭔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가봐.”

이후의 시선은 여전히 화면을 향해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이제는 그것을 보고 있지 않았다. 이후의 옆모습을 바라보던 지한이 결심을 굳히고 입을 열었다. 그 역시 무언가 예감하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당신 나한테 숨기는 게 뭔지 물어보려고 왔어.”

“내가 뭘?”

평이한 어조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는 듯 이상한 행동을 하고 막말을 했지만, 사실 그의 그 반대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딱 한번 폭발한 것은 지난 밤 이었다. 그때만이 그의 진짜 얼굴이었다. 

“모른 체 하지 마. 당신 지금도 나한테 거짓말 하고 있잖아.”

이후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떤 표정도 없었지만 그 순간 그의 얼굴에 많은 생각이 지났다고 생각했다. 표정이 없던 얼굴이 서서히 움직였다. 그는 입 끝을 올려 가볍게 웃었다. 그리고 그 다음엔 소리를 내서 웃었다.

“하하하.”

더욱더 커지는 웃음소리가 희극적이기보다는 차라리 비극적으로 느껴졌다. 지한은 굳어가는 얼굴과 달리 가만있지 못하는 심장을 손을 들어 눌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대로 터져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한은 아직 아무런 말도, 질문도 하지 않았다. 그가 왜 웃고 있는지, 그 웃음의 의미가 무엇인지 전혀 궁금해 하지 않은 채. 그의 웃음이 끝나기를 그저 기다리기만 했다. 마침내 그는 정색하듯 웃음을 멈추었다. 그는 햇살을 등지고 서 있었다. 낮임에도 밤보다 더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 그걸 이제야 알았어?”

지한은 그의 대답에 머릿속이 서서히 지워지는 것을 알았다. 여기까지 오면서, 아니 혜석의 말을 들었을 때부터 예감하고 있던 일임에도 지한은 이후가 그것을 부정해주길 원했다. 그 편이 나았다. 그렇다고 할 경우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어딜 가려고. 내 얘기 끝나지 않았어.”

충격에 뒷걸음질 치며 돌아서려던 그를 이후가 막아섰다. 위협은 말뿐만이 아니라 온몸에서도 느껴졌다. 지한은 숨을 내쉬지도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어느 때보다 그가 두렵게 생각되었다. 자신의 목을 조르던 때보다, 더. 

“당신, 지금부터 여기서 한 발자국도 못나가. 알아들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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