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면(不眠) 上
불면 (不眠)
1. Nightmare
초여름. 실내의 공기는 비로 인해 유난히 습했다. 음악소리조차 묻혀 버릴 정도의 세찬 비였다. 창문을 타고 내리는 빗줄기가 끊이질 않았다. 건너 테이블에 앉은 여자는 커피를 세 번째 리필하고 있었다. 그녀의 테이블 위에는 찢어놓은 냅킨이 여러 장 있었다. 지한은 생각한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로 바람을 맞았을까. 무심한 눈길로 그녀를 살폈다. 관심이 있어서라기보다 그 역시 마찬가지로 기다림이 지루했기 때문이었다.
비 내리는 카페에 손님이라곤 어느 젊은 여자와 지한, 둘 뿐이었다. 확실히 이런 날씨라면 손님이 적은 것도 당연했다. 게다가 주말도 아닌 평일의 낮. 지한은 어쩌면 약속상대가 나타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쉬움은 없었다. 오히려 그편이 나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를 만나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도망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윤민한의 형입니다. 물어볼 게 있는데 만날 수 있을까요?
충동적으로 전화를 걸었지만 이렇게 쉽게 약속이 성립될 줄은 몰랐다. 마음도 머리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죠.
-·······.
-언제 볼까요. 그쪽이 만나자고 했으니까 내가 편한 시간에 해도 되겠습니까?
상대는 당황하지도 않고 즉시 대답을 했다. 용건을 묻지도 않고, 의심을 하지도 않고. 오히려 아연함에 할 말을 잃은 것은 지한이었다. 결국 그렇게 약속이 성립되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지한은 좀 전의 일이 믿기지 않았다. 남자의 태도보다는 자신의 이상한 충동 때문이었다.
왜 그런 짓을 한 걸까. 만나서 원하는 질문을 하고 원하는 답을 얻으면 그 다음엔 무엇을 하려고 그랬던 걸까.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잠들지 못하는 밤이 반복되어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니었을지. 이제와 이런 생각을 해서 무엇 할까. 지한은 마음속의 후회를 일단 접어두었다.
지한이 지난 일을 후회하는 사이 드디어 여자가 일어났다. 하기야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지한이 들어오기 전부터 자리를 잡고 있었다. 참 비장하고 우울한 표정으로. 지금 그녀의 표정은 차라리 우울함보다는 허무함이 깊었다. 이미 감정의 곡선은 슬픔을 지난 단계인 것이다. 이제는 포기를 해야만 할 때. 일어나는 여자와 눈이 마주칠까 지한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얼룩진 유리창은 사물을 제대로 비추지 못했다. 그러나 지한은 그 희끄무레한 창 너머로 얼핏 이상한 것을 보았다. 세찬 비는 뿌연 물안개를 만들어내기까지 했으니 더욱 의심스러운 장면이었다. 처음 지한은 어떤 그림자라고 생각했다.
머리 위에서 발끝까지 까만색 일색인 장신의 남자가 건널목 맞은편에 서 있었다. 그는 우산도 없이 그 빼곡한 빗줄기 속에 있었다. 거기까지라면 그렇게까지 인상적이지 않았겠지만, 비오는 날에 선글라스는 음이 튄 레코드처럼 그 회색 풍경 속에서 도드라져 보였다.
그것은 연예인들이 얼굴을 가릴 목적으로나 쓸법한 짙고 커다란 선글라스. 태양이 쨍쨍한 거리에서라면 패션이라 하겠지만 이런 날씨에는 어울리지 않는 액세서리인 것이었다. 그는 파란불이 깜빡이는 것을 내버려 둔 채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혹 잘못 본 건가, 다시 유심히 바라보았지만 분명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참으로 이상하다. 이상하긴 하지만, 그게 뭐 어떻다는 건가. 그냥 좀 정신이 나간 사람인 모양이지. 사실 요즘 세상엔 제정신인 사람을 더 찾아보기 힘들었다.
지한의 시선은 정면의 빈자리로 돌아왔다. 남의 일에 관심을 가져 봤자 좋을 건 없었다. 소매를 걷고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5분만 더 기다려 보자. 그렇게 생각하니 그 5분이 지난 시간보다 더욱 길게 느껴졌다. 시침이 느릿하게 움직이는 것을 초조하게 바라보던 그는 갑작스런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쾅―!
고막을 때리는 소리에 느릿하게 뛰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바로 곁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뻣뻣하게 고개를 들어 소리의 진원지를 바라보았다. 크고 짙은 그림자가 눈앞을 가득 메웠다. 그림자 안에 사람의 형체가 드러났다. 거기에는 어떤 남자가 서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나, 완전히 모른다고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아까까지 건너편에 있던 남자가 카페 유리창에 붙어 있었다. 그는 이쪽을 향해 웃고 있었다. 기괴한 웃음이며, 꿈같은 장면이었다. 유리창을 사이에 둔 채로 다른 세계가 존재하는 것 같았다. 물론 착각이었다. 유리창 안과 밖 모두에, 비는 여전히 세차게 퍼붓고 있었다.
-그 새끼, 미친놈이야.
정우섭은 그 남자에 대해 한마디로 정의했다. 깊은 생각도 없이 즉시 나온 답은 어느 정도의 감탄과 경멸을 동반하고 있었다. 어울리지 않을 듯, 그래도 또 어울리는 조화였다. 지한은 놀라지 않았다. 그저 그러냐고 덤덤히 반응했을 뿐이다. 사실 그 사람의 됨됨이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런 말을 떠벌리고 다니는 인간이니까 정상은 아니잖아. 일단.
정우섭은 지한의 친구이지만 오히려 동생과 더욱 친분이 깊었다. 그도 그럴 게 우섭과 지한은 고등학교 동창으로 학교 다닐 때는 제법 어울렸지만 이후에는 가끔 동창들 모임이 있어야 보게 되는 사이로 변했다. 딱히 사이가 틀어졌다기보다는 서로가 바쁜 탓이었다. 지한 자신의 성격도 그리 사교에 연연하는 타입이 아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하지만 지한의 동생 민한과 우섭은 대학 선후배 사이에 얼마 전까지 같은 방송국에서 일했었다. 마음도 맞는 편인 것 같았고 자주 어울리는 모습을 봐왔다. 그래서 지한은 ‘그’에 대한 일을 우섭에게 묻고 있었다.
-그렇게 심해? 혹시 정신병자라거나…….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아니지만 그냥 많이 이상해. 이상한 짓 엄청 해. 또라이 같은 새끼라고, 개차반. 미친놈. 정신 나간 새끼. 이름보다는 이쪽이 더 어울리지.
-그런 친구가 있는 줄은 몰랐네.
-모르는 게 차라리 낫지.
민한은 태양 같은 아이였다. 스스로 빛을 내며 사람들을 끌어 당겼다. 밝고 활동적인 성격, 구김 없는 웃음, 그는 애초에 태어나기를 지한과 다르게 태어난 듯 했다. 완전히 다른 사람.
그렇다고 잘난 체 하는 법 없이 늘 성실하고 겸손했으므로 친구도 많았고 윗사람으로부터 신뢰도 두터웠다. 민한은 지한이 보기엔 좀 멍청할 정도로 사람이 좋았던 것 같다. 좋게 말해 착했고, 나쁘게 말해 오지랖이 넓었다. 그 넓은 오지랖과 인간적 매력 탓에 민한은 여러 타입의 사람들과 두루 어울렸으므로 이상한 사람 하나 끼어 있다고 해도 그러려니 했다. 그러니 그런 이상한 친구가 있다고 해도 그렇구나 싶을 뿐이었다.
-그 사람 이름이 뭔데?
“김이후라고 합니다.”
한기가 들었다. 남자가 흠뻑 젖어 있는 탓이기도 했지만 밖에서 느꼈던 것보다 더한 존재감 때문이었다. 김이후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가 가까이 다가왔을 때 차가운 기운이 확 얼굴을 덮쳤다.
우섭이 말한 미친놈인지 개차반인지 몰라도 일단 그는 존재감이 강했다. 일단 등장부터 놀라웠으니까. 첫인상이란 사람의 전부는 아니라고 해도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법이었다. 거기다 그는 여전히 푹 잠겨 있었다. 얼마나 그 빗속을 헤맨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겉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몸 안까지 빗물로 가득 채워져 있을 것 같았다. 온몸을 감싼 새까만 옷처럼 까만 물이.
“민한이 형, 윤지한씨 맞죠?”
마르고 긴 몸과 짙은 선글라스의 조화는 어쩐지 회화적이었다. 더 자세히 분류하자면 고전이 아니라 현대회화 쪽. 이제는 정신 나간 사람이 아닐까 하는 의심보다는 이게 현실일까 하는 의심이 앞선다. 지한은 남자를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남자는 몸에서 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전혀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는 태연히 소파에 젖은 몸으로 앉아버렸다.
“네. 그렇습니다.”
당황하여 대답이 늦었다. 사실 지한에게는 가까스로 대답하는 것만으로도 최선이었다. 뒤늦은 대답에도 그는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선글라스를 벗었다.
“사실 멀리서 알아봤거든요.”
김이후라는 남자는 얼핏 봤을 때 예상했듯 핸섬한 얼굴이었다. 선글라스로 가려졌음에도 충분히 그 미형의 얼굴을 예상했었다. 섬세한 선으로 이루어진 얼굴이었으나 그렇다고 중성적인 느낌을 풍기진 않았다. 잘생긴 얼굴과 기괴한 분위기의 조화는 정우섭의 ‘미친놈’이란 평가와도 부합하는 면이 있었다.
이후를 살펴보느라 지한의 시선은 여전히 분주했으며 다소 멍한 기분이었다. 그가 하는 말을 반도 못 알아들은 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남을 빤히 바라보는 것은 분명 기분 좋은 일이 아니란 건 잘 알고 있었다.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만큼 특이했고-특이하다 못해 희한했고-뿐만이 아니라 시선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멀리서 이쪽을 미심쩍게 바라보는 여종업원도 눈살을 찌푸리진 않았다. 그저 이 잘생긴 남자의 기행이 신기하다는 눈길이었다. 아마 지한이 생각하는 것과 다름없는 생각을 할 것이었다. 멀쩡한 사람이 왜 이 폭우 속을 우산도 없이 걸어온 것일까. 거기다 선글라스까지 끼고. 그것은 평범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품을 의문이었다.
“비가 많이 오네요. 그렇죠?”
이후의 새삼스러운 질문에 놀라, 지한은 뒤늦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작은 천 조각으로 감당 안 될 정도로 젖어 있었지만 김이후는 그것을 선뜻 받아 들였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감사의 인사까지 했다. 대충 얼굴을 닦아낸 후 그는 젖은 손수건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더니 문득 지한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도 분명 마주보고 있긴 했지만 이번엔 더욱 열중해 보았다. 살갗에 깊숙이 박히는 시선이었다. 지한은 상대가 웃고 있음에도 살가운 느낌은 느끼지 못했다. 이상하게도 오히려 공격적이라는 느낌이었다. 그의 눈빛이, 웃음이 송곳처럼 얼굴과 눈을 찌르려고 든다.
“웬 미친놈인가 싶으셨죠?”
대답이 퍼뜩 나오지 않은 것은 틀린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후는 말문이 막힌 지한을 웃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어쩐지 무척 흡족한 표정이었다.
“손에 뭘 들고 다니는 게 거추장스러워서요. 아침에만 해도 이렇게 심하진 않았는데 폭우로 변하더라구요.”
생각보다는 정상적인 이유였다. 자신이 이상하게 보인다는 것을 아는 것 역시 지한의 오해를 풀어주었다. 어쩌면 생각보다 상식적인 인간인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여전히 마음이 불편한 건 어째서일까.
“보기엔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데요.”
“그런가요. 난 오히려 시원해서 좋은데.”
“하지만 감기 걸릴 지도 모르고……. 아, 아가씨 여기 수건 좀.”
지한은 마침 주문을 받으러 다가오는 종업원에게 부탁을 했다. 그녀는 알겠다고 대답하더니 곧 안으로 들어가 마른 수건 하나를 가져왔다. 시키지도 않은 따듯한 물도 함께. 그는 그녀에게도 깍듯이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듣던 것과 다르게 세심하시네요.”
“동생이 제 얘길 했습니까?”
놀라서 묻자 그는 처음으로 눈을 크게 뜨고 미묘하게 표정을 멈추었다. 이내 떠오른 웃음이 더욱 깊어져 있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엉뚱한 것이었다.
“오래 기다리셨겠네요.”
말을 돌리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면 원래 말투인가. 생각보다 정상적인 느낌이지만 확실히 좋은 느낌은 아니다. 어딘가 걸린다. 목에 걸린 커다란 가시처럼, 아무리 노력해도 풀어지지 않는 매듭처럼. 딱히 어떤 부분을 지적할 수 없었지만 신경에 거슬린다.
“보통 회사에 있으실 시간인 것 같은데.”
“그렇긴 합니다만. 시간 정한 건 그쪽이지 않습니까?”
지한은 의도치 않게 목소리가 삐딱하게 나갔음을 느꼈다. 원망하는 건 아니었다. 물론 여기에 나오기 위해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이른 퇴근을 해야 했다. 하지만 바쁜 일은 대충 처리하고 나왔고 자신 정도의 위치면 눈치 보지 않고 조퇴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말했는지 모르겠다. 어차피 상대는 기분 상해하는 눈치도 아니었지만 지한은 자신의 태도가 후회스러웠다.
“그랬습니까. 그때 제가 바빠서 정신이 없었습니다. 생각도 못했군요.”
“…….”
“죄송합니다.”
“사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서 용건이 뭡니까?”
아무래도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취소해야 할 것 같았다. 남자의 태도는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이 상당했다. 어긋나는 대화, 어딘지 일그러진 웃음. 희미한 현기증이 일었다.
“뭘 알고 싶어서 날 찾았습니까?”
그러나 다음 질문에 어지럽던 정신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지한은 딱히 전화로 무엇을 알고 싶다고 하지 않았다. 그냥 만나달라고 했을 뿐. 심각하지 않게 수락을 하고 멋대로 약속 시간을 통보한 것은 그쪽이었다. 마치 연락이 올 줄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물론 그럴 리는 없었겠지만 그 정도로, 그는 전화상에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이 불쑥 전화해서 만나자고 하면 일단 기본적인 의심은 해야 하는 것 아닐까. 비록 그가 민한과 얼마나 친숙한 사이였는지는 몰라도 그의 형인 지한과는 전혀 안면도 없는 상태였다. 지한은 도리어 이후를 의심하고 있었다. 그의 자연스러움이 태연함이 오히려 지한의 눈에는 모순으로 비쳤다.
“그쪽이 제 동생을 보셨다고 해서요.”
“제가요? 하하하.”
이후는 기막힌 듯 웃었다. 지한은 그의 웃음에 놀라기보다 안심했다. 기막혀 하는 것이 정상적인 반응일 것이다. 역시 헛소문을 들은 것이 아닐까. 술에 취해 흘린 말을 진짜인 것처럼 사람들이 전했을지도 모른다. 소문이란 원래 그런 것이니까. 그래, 그렇다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벌써 3개월 전에 녀석은 죽었죠. 설마 잊으신 건 아닐 텐데요.”
그의 말이 맞다. 지한의 동생은 3개월 전 교통사고로 죽었다. 그땐 아직 날이 추웠다. 초봄 이었지만 아직 날씨는 지독히 추웠고, 지금처럼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폭우 속의 교통사고. 응급조치를 받을 틈도 없이 동생은 즉사했다. 지한은 그 시체를 눈으로 확인했다. 몸이 반쯤 끔찍하게 뭉개진 시체를 보았다. 이상하게도 얼굴만은 잠든 것처럼 평화로웠던 그 이질적인 기억.
“그러니까, 당신이 죽은 제 동생을 보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런 동생을, 동생의 귀신을 본다고 했다. 바로 내 눈앞의 사람이. 그는 놀라지 않았다. 아까처럼 말도 안 된다는 듯 웃지 않았다. 오히려 모든 표정을 지우고 차갑게 돌변했다. 아니 어쩌면 그는 처음부터 웃고 있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사실입니까?”
그 순간, 전화벨 소리가 눅눅한 공기 중에 울렸다. 보통 핸드폰 벨소리로 쓰지 않을 법한 졸릴 정도로 느린 음악이었다. 그는 태연히 전화를 받았고 십 여분, 긴 통화를 했다. 기막힌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하필이면 이 순간에. 그는 무언가 말을 할 듯 입술을 달싹였었다. 분명히.
“얘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까 차라리 나중에 뵙죠.”
통화를 끝낸 이후가 돌연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생각지 못한 전개에 당황하는 사이 그는 막무가내로 이해를 구하려 들었다.
“미안합니다. 사실 지금도 없는 시간 내서 온 거라. 몰래 튀었더니 당장 오라고 난리네요. 내 쪽에서 연락하겠습니다.”
말투는 그러했지만 사실 통보에 가까웠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붙잡을 겨를도 없었다. 그는 이미 지한의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서 있었다.
“저기·····.”
“손수건은 세탁해서 돌려줄게요.”
등장처럼 불현듯, 난데없이 그는 돌아갔다. 사실 그리 길게 얘기할 셈은 아니었다. 그냥 대답만 들어도 되었다. 정말 내 동생의 귀신을 보는가. 그게 정말인가 확인하는 것. 그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인데,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 버렸다. 정작 중요한 얘기는 제대로 못하고 이후를 보내고 말았다.
지한은 허망한 마음으로 빈자리를 바라보았다. 소파에 묻은, 마치 멍 자국처럼 짙은 얼룩 바라보았다. 거기에서 무언가를 보고자 하지만 지한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후가 떠난 후로도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넋을 놓고 있는 사이 밖은 어두워져 있었다. 마음의 찌꺼기를 털고 싶은 마음에 나왔던 자리는, 더한 찝찝함을 선사했을 뿐이었다. 뭘까 이 기분은. 어이없기도 하고 기운이 쭉 빠지는 것도 같았다. 허무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무언가 많은 것이 빠져나간 기분이었다. 빠르게 눈앞에서 사라진 남자와 함께.
어차피 이른 퇴근에 시간은 많이 남아 우섭에게 들렀다. 혹 퇴근을 했으면 어쩌나 걱정했었다. 하지만 야근을 밥 먹듯 하는 녀석이었으므로 그날도 밤늦게까지 일하고 있었다. 전화를 하고 조금 기다리자 턱 밑에 수염이 자란 것을 빼고는 멀끔하고 훤칠한 남자가 마뜩찮은 표정으로 나타났다.
“설마 또 무슨 사고 났냐.”
“아니. 사고는 무슨.”
“니가 안 하던 짓 하니까 좀 무섭다구.”
우섭은 지한이 방송국에 찾아왔다는 전화를 했을 때도 조금 놀라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게 한 번도 직장에 찾아온 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기는커녕 동생이 죽기 전까지는 만남조차 드문드문한 사이였으니 당황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오히려 민한의 죽음 후 자주 얼굴을 보고 있었다. 장례식 때도 많은 도움을 받았었다.
“미쳤냐. 왜 그 인간하고 만나?”
어둑어둑한 방송국 로비 한구석에서 식은 자판기 커피를 사이에 두고 지한은 우섭에게 몇 시간 전의 일을 전했다. 그는 대뜸 화를 냈다. 아니 얘기하기 전에 화부터 냈다.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전화로 김이후에 대해 물었을 때도 그는 되도록 짧게, 대충 넘어가려고 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티가 역력했다. 연락처를 알아낸 것은 자력이었다. 유품 중에는 핸드폰이 있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너도 맞다고 했잖아? 그 사람 그런 걸 본다고…….”
“그래. 그 미친놈이 그런 소릴 하고 다니긴 한데, 자긴 귀신에 쓰였다고. 죽은 윤민한이가 자길 따라 다닌다고. 그런데 그게 실성해서 하는 소리지 사실이겠냐.”
지한이 우섭에게 그, ‘김이후’에 대해 물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것이었다. 얼마 전 우연히 만난 동생의 친구가 전해주었던 말 때문이었다.
‘어떤 놈이 민한이 귀신을 본다고 떠벌리고 다닌대요. 우습죠?’
마주친 장소는 술집이었다. 그는 취해있었고, 지한도 취해있었다. 회식을 하기 위해 찾아간 곳이었다. 주변은 시끄럽고 어지러웠다. 그저 취해서 흘린 농담 같은 말이었다. 하지만 지한은 웃을 수가 없었다. 순간 술기운이 흔적도 없이 달아났다. 찬물을 뒤집어 쓴 기분이었다.
“신경 쓰지 마. 미친놈이라니까.”
“너라면 신경 안 쓸 수 있어?”
“물론 신경 쓰이기야 하겠지. 죽은 동생 가지고 헛소리를 하니 열 받을 만도 해. 그렇지만 그냥 헛소리 한다고 생각하고 넘어가면 그만이야.”
“헛소리 같지가 않아서 그래. 왠지.”
“헛소리야. 니가 지나치게 예민한 거다.”
우섭의 말대로 자신이 예민한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상한 억울함이, 아니 억울함이라 하긴 어울리지 않는 감정일까. 여하튼 이건 이상하다고 생각되었다. 무언가 잘못된 것 같은 기분이 내내 떠나지 않는다.
“이상하다 싶어서.”
“뭘?”
“왜 내가 아닌 건가 싶어서.”
그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지한이 느낀 감정은 놀라움이나 두려움보다는 의아함이었다. 왜냐하면 동생의 귀신이 붙는다면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일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윤민한이, 모든 사람을 좋아하고 또 사랑 받았던 그 자연발광체가 죽는 순간 누군가에게 저주를 내렸다면 그건 한사람뿐이다. 윤지한은 하나 뿐인 동생을 깊이 오랫동안 증오했었다. 그것은 단순한 미움이나 시기가 아니었다. 그는 진심으로 동생을 증오했었다.
“그 사람 학교 친구는 아닌 것 같던데.”
고등학교 때부터 친했던 사람이라면 어쩌면 보았을 수도 있는데-그때까지는 같이 살았으니까-그때는 본적이 없다. 게다가 그는 장례식장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 왔다면 기억 못 할리가 없을 텐데.
“방송국 들어와서 만났나, 그 전부터 알았나. 나도 확실히는 모르겠다.”
“방송국 사람인가 봐?”
“아니 그건 아니고 딴따라.”
“가수?”
“아니. 가수는 아니고, 작곡해. 광고 음악이나 방송 음악 같은 거 만들고, 학원 강사도 나간다는 것도 같고.”
우섭은 여전히 좋은 표정은 아니었지만 전보다는 더 많은 얘길 해주었다. 어쩌면 이미 만나고도 왔으니까 더 이상 숨겨도 소용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런데 숨겨야 할 이유가 있나. 지한은 문득 뒤늦은 의문을 떠올렸다.
“방송국에서도 유명해. 같이 일한 사람치고 좋게 끝난 경우가 거의 없을 정도라니까. 한번은 단막극 음악을 했었는데 편집까지 다 마치고 방송 하루 남겨 놓고 음악이 맘에 안 든다고 바꾸자고 난리를 쳤었다니까? 그게 무슨 자기 뮤직비디오인줄 아나. 미친놈.”
내부 사정을 잘 모르겠지만 듣기에도 정상적인 경우는 아닌 것 같았다. 지한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왜 어딜 가나 사고치는 인간들 있잖아. 별 같잖은 이유로 시비를 걸어 싸움을 만들어. 그게 술에 취해서 꼬장 부리는 거라면 술버릇 더럽다고 하겠는데 그런 것도 아냐. 멀쩡한 정신으로도 그래. 아무래도 그 새끼는 부자인가. 그렇게 치료비를 물어주고도 파산하지 않았으니까 말야.”
“그래도 자기가 맞지는 않나봐?”
“음. 그런가. 그런데 본인도 자주 다쳐 있던데, 그래도 크게 다쳐서 입원한 적은 없는 것 같……. 아니지. 야, 여기서 그게 중요하냐.”
지한은 슬쩍 웃었다. 우섭이 어떤 사람을 이렇게 질색하는 모습 또한 이채로웠다. 싫으면 관심을 두지 않지 욕을 하는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정말 많이 싫어하는 모양이었다.
“야, 웃냐? 심지어 어떤 사람은 물렸대.”
“물려?”
이해할 수 없는 단어의 등장이었다. 차라리 때렸다고 하면 조금 놀랐을지언정 쉽게 납득했겠지만. 지한은 우섭이 말을 잘못한 게 아닐까 잠깐 의심했다.
“그래. 친 것도 아니고 손을 물었대. 회식 자리에서 장난으로 머리를 건드렸는데 대뜸 손을 물더라는 거야. 주위사람들이 말리는 대도 끝까지 안 떨어져서 애먹었다지. 어휴. 난 그 새끼 얼굴만 봐도 소름 끼쳐.”
하마터면 또 웃을 뻔했다. 어이없기도 했지만, 그 장면을 떠올리니 사람이 아닌 웬 큰 개가 한 마리 떠올랐기 때문이다. 물론 그리 귀엽게 생긴 개는 아니었다.
“게다가 기분 나쁘게 아무도 없는데서 혼잣말을 하기도 한다지. 그러다 웃기도 하고…….”
“정말?”
“그래. 그런 인간이라 귀신 얘기가 나온 건지도 몰라. 그렇다고 해도 그런 게 어딨어. 요즘 세상에.”
우섭은 현실적인 사람이어서인지 말도 안 된다고 단정 짓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있었다. 지한도 그런 것을 믿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놀란 것은 그런 장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런 것이 어울릴 법한 사람이었다. 어둠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릴······.
“별로 안 친한 나도 싫은 녀석인데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오죽 짜증나겠냐. 귀신이든 뭐든 신경 꺼. 엮이면 골치 아픈 인간이야. 알았어?”
왜 김이후의 무용담을 이야기 해 주었나 했더니 결국 결론은 같았다. 더 만나지 말란 소리였다.
“이제 와서 이런 말이 무슨 소용인가 싶긴 한데, 넌 나보다도 니 동생에 대해서 너무 모르더라.”
사실이었으므로 반박할 말이 없었다. 지한은 시선을 손에 든 종이컵 안으로 옮겼다. 어쩐지 우섭의 시선이 자신을 질타하고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네가 모르는 눈치라서 솔직히 말하지 않았는데, 그 두 사람 그냥 친구 사이는 아니었다.”
“설마 애인사이라도 된단 얘기야?”
확실히 친구라기엔 어울리지 않는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이였던가.
“너 민한이 녀석이 게이인거 알았냐?”
놀라야 할 것은 지한이었지만 오히려 우섭은 그가 자신의 말을 쉽게 받아들이는 것에 충격을 받는 눈치였다. 물론 자신도 얼마 전이었다면 그의 말에 당혹해야 했을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지금은 동생이 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죽기 얼마 전에 알았다. 별로 유쾌하지 못한 일로 인해서.
“……몰랐어. 그렇지만 지금은 알아.”
“그래. 그렇군.”
어쩐지 우섭은 안심하는 눈치였다. 아니, 안심한다기보다 체념하는 건가. 어쨌든 지한은 그의 표정이 평소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누적된 피로 탓이 아니었다. 자신들이 하는 이야기의 주제 때문이었다.
“뭐 그러면 얘기가 더 쉬운가. 그 둘 아마 사귀지 않았을까 싶어. 오래전에 이미 헤어졌다고 들었는데, 그러고도 친구로 지내는 건지 여전히 붙어 다니더라. 속도 좋지 윤민한. 그런 새끼랑 사귀었었다는 것도 놀라운데 그 뒤로도 오랫동안 그 인간 뒤치다꺼리를 하더라고. 착한 건 알았는데 참, 놀라워. 사실 그 녀석이 더 이상한 놈인지도 몰라. 아니. 분명히 그 녀석이 더 이상해.”
*
새벽녘 잠에서 깨어 시계를 보았다. 4시 38분. 마지막으로 확인했던 시간은 3시 55분이었다. 겨우 삼십분 남짓 잠들었을 뿐인데 그 사이에 긴 꿈을 꾸었다. 악몽이라면 악몽일 수 있었다. 죽은 사람이 나온 꿈이었기 때문이었다.
몸을 일으켜 창가로 다가갔다. 지한은 무거운 머리로 어렴풋 빛이 비치는 회색 하늘을 바라보았다. 지한은 동생이 죽은 후 제대로 잠든 적이 없었다.
밤을 꼬박 새우고 아침에 가까운 새벽에야 졸도하는 것처럼 정신을 잃었다 깨어날 뿐이었다. 어차피 잠은 다 잔 것 같았다. 어렵지도 않게 체념을 하고 남들보다 일찍 하루를 시작했다.
샤워를 하고 나와 커피를 진하게 내려 마셨다. 뜨겁고 진한 에스프레소가 식도를 타고 들어가 속을 데우자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공기가 유난히 무겁게 느껴지는 새벽이었다. 시계 소리만 고요한 새벽을 채우고 있었다. 그 소리조차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대학 때부터 집을 나와 자취를 했던 지한이었다. 그는 혼자가 편했다. 맞지 않는 타인과 함께 사는 공간은 그 자체가 고역이었다. 설사 그것이 가족이라 하여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와의 관계는 이미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나빠진 상태였던 때였다. 지한에게는 대학이라는 출구가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 모른다. 그 후로 벌써 십 년 넘게 혼자 살아왔지만 누군가를 그리워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혼자 있다는 게 힘겨웠다. 누군가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 누구라도 좋으니까.
지한은 무거운 몸을 일으켜 서재로 들어갔다. 책상에 앉아 제일 깊은 서랍을 열었다. 그곳에 쌓여 있는 몇 개의 비디오테이프. 그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낡은 목소리가 떠올랐다.
‘처음으로 만든 거라 되게 어설퍼.’
다큐멘터리 감독을 꿈꾸던 민한이 처음으로 만든 작품이었다. 후에는 어떤 공모전에서 상도 받았다고 했던가. 이것인지 그 다음 것인지도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민한은 자신의 성과가 하나씩 쌓일 때마다 그것을 지한에게 보고하곤 했다. 하지만 자신은 그것들을 한 번도 보지 않았다.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지한은 서랍 속을 가득 채운 테이프를 꺼내 쓰레기통에 쓸어 넣었다. 그것이 지한의 불면을 해소해줄 리는 없었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다. 동생이 살아있을 때, 그는 동생이 차라리 존재하지 않았다면 좋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 존재가 완벽히 사라진 지금 자신은 좋은가. 묻는다면 결코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꿈속의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니, 무슨 얘기를 하려고 했으나 늘 전해지지 않았다. 달싹이는 입술이 만들어내는 말은 소리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표정을 보면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원망과 후회로 가득한 눈이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을 저주한다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
특이할 것 없는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여전히 밖은 덥고 사람들은 넘쳐난다. 할 일은 쌓여 있고 피로가 묵직하게 어깨를 눌렀다. 하지만 해야 하니까, 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 지한은 해이해지려는 마음을 애써 떨쳤다. 그는 분명 안정적인 위치에 있었지만 그 자리가 쉽지 않은 자리임을 잘 알고 있었다. 너무 긴장을 풀거나 게을러서는 자칫 흔들릴 위험이 있었다.
윤지한은 확실히 성공가도를 달리는 청년이었다. 고위 공무원이신 아버지, 유명한 여성학자인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본디 아무것도 없는 집의 자식이었지만 유복한 집의 막내딸인 어머니를 만나 여러모로 득을 본 사람이었다. 덕분에 아들인 지한역시 경제적 어려움 없이 자랐고 부모님의 우수한 유전자를 물려받은 아이답게 성적도 외모도 평균 이상이었다. 대학 졸업, 그리고 곧바로 유학 후 희망하던 기업에 취직했다. 몇 년이 지난 지금, 32살의 나이에 팀장직을 맡게 되었다. 여기에는 사실 백 퍼센트 자신의 힘이 작용한 것은 아니었다. 지한은 자신이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지한에게는 미래를 약속한 여자가 있었다. 상대는 그룹 계열사의 사장의 하나뿐인 외동딸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배경 탓에 일부러 사귄 것은 아니었다.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같은 회사의 동료일 뿐이었다. 아름답고 현명한 여자였으므로 서로 호감을 느꼈고 만난 지 몇 개월 만에 연인사이가 되었다. 사귀게 된 후에야 그녀는 자신의 부모와 집안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물론 사실을 알고 그녀를 결혼상대자로서 더욱 진지하게 생각한 면은 없지 않았다. 자신에게 도움을 줄 처가가 있는 것이야 반길 일이지 저어할 일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수순을 밟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적어도 지한은 그녀를 스스로 선택했다고 생각했다. 주변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싶기도 했지만 상관없었다. 대부분이 시기가 섞인 비난들이었으므로.
“팀장님. 마음에 안 드는 거라도 있으세요?”
무슨 생각 중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조금 전까지 분명 지한은 부하직원이 가져온 기획안을 훑어보고 있었다. 잠시 긴장된 어깨 너머, 창밖의 풍경을 훔쳐보긴 했지만 거기에 특별히 인상적인 풍경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니. 기획안 잘 봤어. 조금만 다듬어서 위에 보고 하면 될 것 같은데.”
지한은 혹 자신이 실수라도 한 게 아닌가, 상사의 눈치를 살피는 한 대리를 향해 애써 웃어 보였다. 그는 성실한 부하직원이고 또한 성격 좋고 눈치는 더욱 뛰어난 사람이라 가까이 두고 싶은 사람이었다. 유일하게 자신을 편견 없이 대해주는 회사동료 이기도 했다. 그런 사람에게 불만이 있을 리 없었다.
“더위 먹으신 거 아니에요? 요즘 안색이 영…….”
“원래 더위는 쥐약이야. 차라리 겨울이 낫지.”
여름이 좋은 것은 이럴 때 더위 핑계를 댈 수 있다는 걸까. 더위에 약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최근 윤지한이 밤을 지새우며 고민하는 문제는 다른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 문제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솔직히 말하려도 말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했거니와.
“아아. 저도요. 장마철이라 툭하면 비 내려, 습하고 덥지. 어휴. 어제는 집 에어컨이 고장 나서…….”
“힘들었겠네.”
“예.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실장님도 정 힘드시면 예비 사모님한테 보약이라도 지어 달라고 하시죠, 왜?”
그는 지한의 약혼녀인 황민혜와 입사 동기였다. 그의 친숙한 농담에 지한은 픽 웃을 수밖에 없었다.
“사모님이라니 징그럽다.”
“약혼도 하셨잖아요. 그럼 곧이죠, 뭐. 결혼은 가을쯤 하실 거 아닙니까.”
“글쎄.”
분명 그럴 예정이기는 했다. 하지만 지한의 약혼식 이후 사고를 당한 동생 때문에 그의 어머니는 이 결혼이 불길하다고 말했다. 그 전까지는 제법 살갑게 지내던 지한의 약혼녀에게도 차가워질 정도였으니, 그건 좀 심각한 문제였다.
누구보다 동생을 사랑했던 사람이었다. 자신의 반쪽처럼 여기며 산 여자인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떨치지 못하는 것을 이해는 한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상대-이를테면 자신의 약혼녀-에게 그런 식으로 대하는 것은 곤란했다.
한대리가 말한 예비 사모님이 퇴근 무렵 집에서 저녁을 해놓고 기다리겠다고 했다. 약혼까지 한 사이니 집을 오가는 게 어색하지 않았지만 보고 싶다는 핑계로 찾아와 꺼낼 얘길 생각하면 골치가 아프다. 분명 그녀는 결혼을 재촉할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비상식적인 시어머니에 대한 푸념을 늘어놓을 것이다.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혜가 반갑지 않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문제가 골치 아플 뿐이었다.
“뭐해?”
민혜는 거실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마음대로 남의 옷을 빌려 입고 소파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지한에게는 그 모습이 무척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게다가 남자 옷을 입고 있음에도 그녀의 여성스러운 몸매와 애교 있는 표정 등은 숨길 수 없었다.
“뭐하긴 낭군님 기다리고 있었지.”
그녀는 몸을 일으킬 생각도 않고 그저 손을 들어 인사 했다. 여전히 시선은 화면을 향해 있었다.
“재밌는 거 해?”
“그냥 볼만해. 다큐멘터리 같은 건데, 거의 다 끝났어. 밥 먹자.”
민혜의 말대로 프로그램은 끝 무렵이었다. 대충 보니 강원도 어디쯤 되는 산골짜기 풍경이 비쳐졌지만 내용은 알 수 없었다. 이미 잔잔한 음악과 함께 엔딩 타이틀이 올라가고 있었다. 그녀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하지만 지한은 여전히 화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왜 그래?”
이상하게 여긴 민혜가 주방까지 갔다가 지한의 곁으로 돌아왔다. 그는 옷깃을 잡아당기는 느낌에 놀라 그녀를 돌아보았다.
“아니. 음악이 좋길래.”
분명 아는 이름을 보았다. ‘김이후’ 흔한 이름은 아니었으니까 그 남자가 맞을 것이었다. 방송음악을 한다고 했으니까 이런 데서 이름을 보아도 이상할 건 없었다. 그저 이채로울 뿐이었다. 여름 날 폭우 같은 첫 느낌과는 다른 음악이었다.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느낌이었다. 잔잔히 아름답게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는 음악이었다.
“음악 얘길 하고 별일 이네. 자기한테 그런 감상적인 면이 있는 줄 몰랐어.”
입맛이 없었지만 약혼녀가 직접 차려준 밥상을 마다 할 수 없어서 열심히 숟가락을 옮겨가고 있었다. 무슨 얘길 하나 했더니 조금 전 일 때문인 듯 했다.
“그게 왜?”
“그냥. 우리 데이트 할 때도 영화라든가 콘서트장 같은 데는 거의 안 갔잖아. 자기가 그런데 싫어해서 난 되게 감성이 메마른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내가 그렇게 재미없는 인간인가.”
“그런 뜻 아니니까, 걱정 마. 심심한 사람은 아냐. 너무 실속 있어서 문제죠. 완벽한 남자.”
비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일만 하느라 자신에게 소홀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건지. 그저 겸연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어설프게 변명을 해본다. 오해라고 생각했다. 자신은 그리 완벽한 인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어딘가 모자란 사람이 분명했다.
“나도 예전엔 책도 많이 보고 음악도 많이 들었어.”
“정말?”
그녀의 커다란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지금 지한의 모습으론 의외라고 생각하는 것도 당연했다. 아예 책을 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보는 활자는 신문과 잡지가 대부분. 그 외에는 경제관련 서적들이 예외라면 예외일 것이다. 그는 운전 중에 그 흔한 라디오조차 켜지 않는다. 누군가 동석해서 틀어놓으면 어쩔 수 없이 듣지만 그 상대가 친한 사이라면 꺼달라고 정중히 부탁할 정도였다.
“지금은 전혀 안 보고 안 듣지만, 예전에는.”
“왜?”
“그냥 어느 순간 실제 하지 않는 것에 애정을 줘서 뭐하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 갑자기 허무해 지더군.”
“그래서 실용주의자가 되셨다?”
물론 학창 시절 읽었던 문학작품이나 음악 영화 등이 일생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다. 기본적인 교양을 갖추는 것이 일을 하는 데도 좋으니까. 지금도 잡지나 매체를 통해 유행이나 문화에 대한 감각을 의무적으로 익히긴 하지만 분명 예전에 보았던 것들이 지한의 기본적 교양수준에 보탬이 되었다.
그러나 학생 때 느꼈던 소소한 감동보다는 성인이 되어 일을 통해 얻는 성취감이나 사회적 지위의 성장 쪽이 차라리 만족감을 주었다. 게다가 그것은 애정이 없어서 가능한 일이니까. 손해 보는 감정은 전혀 없었다. 일은 언제나 노력하는 만큼 보답을 돌려주었다.
“자기 전화 아냐?”
식사가 대충 끝나갈 즈음에 전화벨 소리가 들려왔다. 지한은 민혜의 것이 아닌가 했다. 그녀가 이렇게 지적을 해주어서야 알았다. 낮에 회사에서도 그렇고 요즘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김이후입니다.
낯선 번호에 의심스러운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지만 설마 이 남자일 줄은 몰랐다. 지한은 그의 전화번호를 핸드폰에 저장하지 않았었다. 어차피 자주 볼 사이도 아닐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만나기로 했잖아요. 빌린 것도 돌려줘야 하고.
하긴 분명 그렇긴 했다. 비록 지한이 대답할 사이도 없이 성립된 일방적인 약속이라 해도 말이다.
-그쪽도 나한테 할 말이 많으실 테니까요. 만납시다.
*
김이후는 처음과 달리 정상적이고 안정된 모습이었다. 그때도 딱히 지한에게 피해를 주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정우섭이 그렇게까지 말리는 사람이니 긴장을 완전히 풀 수는 없었다.
“찾기 어렵지 않았습니까?”
내면이 어떤지는 파악할 수 있을 리 만무했지만 겉으로 보기에 그는 예의바르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뇨. 전혀.”
“다행이네요.”
물론 남의 사정 생각 않고 불쑥 밤중에 전화해 나오라는 것은 무례한 일인지도 모른다. 덕분에 지한은 민혜의 잔소리를 엄청 들어야 했다.
아이러니한 남자였다. 그는 처음 만났을 때는 검은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고 있었지만 지금은 낡은 진에 화이트 셔츠를 입었다. 물론 한 올도 젖지 않았고 여전히 잘생긴 얼굴이었다. 마르긴 했으나 단단해 보이는 팔목엔 낡은 가죽 시계를 차고 있었다. 그때의 음울함은 벗어 버린 듯 호쾌한 청년으로 보일 정도였다. 한가지, 그는 지난 번 그 선글라스를 셔츠 주머니에 끼워두었다. 퍽 아끼는 물건인 모양이었다.
“주문하시겠습니까?”
웨이터가 다가와 그를 관찰하던 시선을 거두었다. 그다지 술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차를 마실 수도 없으니 가볍게 칵테일 종류를 시켜야 하나 싶었다.
“나랑 같은 걸로 해요.”
“…….”
“여기 롤링 락 한 병.”
그러나 불쑥 끼어든 김이후가 멋대로 주문을 해버렸다. 마셔본 적 없는 술이라 뭔지도 몰랐다. 나온 걸 보니 맥주였다. 일반 맥주와 달리 약간 다른 맛이었다. 그러나 일부러 권해준 것이 무색하게 그다지 취향인 맛은 아니었다. 어차피 술이 마시고 싶어서 나온 것도 아니니 그냥 한 모금만 마시고 내려놓았다.
“오늘도 때가 안 좋았나보네요. 표정이 좋지 않네.”
확실히 좋진 않았다. 그렇다고 골이 난 건 아니었다. 아마 표정이 별로라면 그쪽에서 멋대로 시켜놓은 낯선 맥주 맛이 신경 쓰이기 때문일 것이었다.
“사실 나 다른 사람 기분 맞추는 거 잘 못하거든요. 아니, 눈치가 없는 건가. 그래서 미움도 많이 받고 그래요.”
그런 거 치고는 김이후는 정곡을 찌르는 말들만 했다. 눈치가 없다기보단 오히려 남의 기분을 알고 그 반대로 행동하고 있단 기분이 들었다.
“이 시계 혹시 낯이 익지 않습니까?”
김이후는 불쑥 지한의 눈앞에 자신의 마른 팔목을 내밀었다. 정확히는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를 내 보였다. 당연히 그 뜻을 쉽게 알 수 없었다. 설명을 듣고는 왜 그랬는지 알게 되었지만. 설마, 지한은 그런 사람이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민한이 녀석이 준 거거든요. 아니, 내가 마음에 든다고 일방적으로 뺐었던가. 어쨌든.”
“그렇군요.”
“그때는 이게 유품이 될 줄은 몰랐죠.”
죽은 사람과의 추억을 얘기하는 것 치곤 즐거운 표정이었다. 자기 입으로 유품 운운하면서도 그에게서는 슬픔은 볼 수 없었다. 겨우 삼 개월 전에 죽은 친구, 혹은 옛 연인에 대해 얘기하면서도 그는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지한이 그의 얘기에 동요했다. 그는 입맛에 맞지 않는 술을 억지로 식도로 흘려보냈다.
“장례식엔 왜 오지 않았습니까?”
“장례식이요?”
“민한이 장례식 때 못 본 것 같아서요.”
그렇게 각별한 사이였다면 왜 그때 얼굴을 보이지 않았던 걸까. 지금도 저렇게 애정이 뚝뚝 흐르는 표정을 하면서. 그는 자신의 손목에 찬 시계를 사뭇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며 매만지고 있었다. 지한을 바라보면서도 여전히.
“그것보다는 다른 게 궁금해서 만나자고 했던 거 아닙니까?”
또 대답하지 않았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이래서야 대화가 제대로 이어질 리가 없다. 어차피 그 질문에도 답해줄 것도 아니면서.
“아무래도 맥주 가지고는 안 되겠네.”
그는 블랙 러시안을 주문했다. 지한도 맥주보다는 차라리 그쪽이 낫겠다 싶어 그가 따라준 술잔을 족족 비웠다. 그리 주량이 센 편도 아닌 주제에 무리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술에 취하기라도 하면 좀 나을까 싶었기 때문이었다.
김이후는 역시 말없이 한동안 술잔을 비우는데 주력했다. 술이 들어갈수록 그의 얼굴에서 웃음이 가라앉고 있었다. 사실 기분 나빠야 하는 것은 그보다는 지한 쪽이었다. 그는 맥락 없는 대화와 상대의 이상한 태도에 어지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당신, 나보고 윤민한이 귀신을 보냐고 물었었지?”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는 입을 열었다. 갑작스러운 반말에 놀랐지만 말하는 당사자는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따질 마음은 들지 않았다. 지한은 그저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서서히 축적된 열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그렇다 치면 어쩔 건데. 뭔가 전할 말이라도 있어?”
여전히 김이후에게서는 ‘그렇다.’는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아니라는 말도 아니었다. 그의 변한 태도에 떠올렸던 불쾌함도 잠시 잊었다. 지한은 망설이던 끝에 대답했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고는 생각했습니다.”
사과하고 싶었다. 잘못한 것이야 셀 수 없이 많았지만 한 번도 미안하다 말한 적 없었다. 그것이 내내 걸렸다. 하다못해 미안하단 말이라도 했었다면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다시 만난다면. 만나서 얘기 할 수 있다면. 다시 잠들 수 있을 것이라고.
갑자기 머리 위로 차가운 것이 쏟아졌다. 피하지도 못하고 고스란히 그것이 얼굴이 적시는 것을 지켜봐야했다. 이후는 지한의 얼굴에 술을 쏟았다. 머리를 적시고 얼굴로 내려온 액체가 입술을 지나 턱 아래로 떨어졌다. 지한은 아연하게 굳어 아무런 반격도 못했다. 반격은커녕 말도 하지 못했다.
“웃기지마. 정말 미안하지도 않은 주제에.”
웃음 섞인 일갈이었다. 놀라서 바라보니 김이후는 지독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알코올 탓이 아니었다. 불쾌함, 아니 수치 탓이었다.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얘기하지 말아요.”
왜 이런 짓을 하는지 항의하는 게 먼저였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지한은 다른 것을 따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오는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는 무언가 알고 있을까. 알고서 하는 얘길까. 그렇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말과 표정이었다.
“물론 나야 당신이 무슨 큰 ‘잘못’을 했는지야 모르지. 알 리가 없지만 말야.”
“…….”
“당신 지금 정말 비겁한 눈을 하고 있거든.”
김이후가 손을 뻗어 지한의 젖은 뺨을 슬쩍 건드렸다. 얼굴에 올랐던 열이 순식간에 내려갔다. 열과 함께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몸을 일으켰다. 끼익.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끔찍하도록 길게 이어졌다.
“단순히 편해지고 싶어서 그러는 거 아냐? 내 말이 틀려?”
지한은 그의 옆자리를 보았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만 혹 남자의 곁에 다른 사람이 앉아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의 곁에 앉아 귓속에 속삭여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윤지한이란 인간이 했던 모든 잘못들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도망쳐야 한다. 더 이상 여기 있을 수 없었다. 쫓기는 기분으로 움직이지 않는 몸을 돌렸다.
“기다려.”
비틀거리는 걸음이 나직한 목소리에 멈추었다. 지한은 돌아서지 않았다.
“기다려. 후회할 거야, 당신.”
후회라면 섣부른 짓을 한 자신을 후회할 뿐이었다. 우섭이 말한 대로 이 남자와 엮이는 것은 좋을 게 못된다. 잘못된 것을 알았으니 지금이라도 돌아서 가면 된다. 그렇게 하면 된다.
귀신 따위 있을 리가 없잖아. 있더라도 여기엔 없어. 있다면 내 꿈속에 있겠지.
“후회한다고 했잖아.”
등 뒤에 있던 남자가 어느새 눈앞에 있었다. 벌써 문밖으로 달아난 마음과 달리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붙잡힌 손을 바라보다 그의 눈빛이 심상치 않음을 보았다. 문득 우섭과 나누었던 말이 떠올랐다.
-……머리를 건드린다고 손을 덥석 물더란 거야. 지가 개새끼냐구. 미친놈.
물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의 눈에 번뜩이는 사나운 기운은 짐승의 그것과 같았다. 생각도 감정이 뚝 끊겼다. 목 줄기를 물어뜯길 것 같은 두려움에 눈을 감아 버렸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다만, 그는 지한의 입술을 덥석 물었다. 입술을 물렸으나 목을 물어뜯긴 기분이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
“자기 얼굴이 왜 그래?”
충분히 예상했던 반응이기 때문에 당황하지 않았다. 자신의 꼴이 어떤지는 스스로가 가장 잘 알았다. 머리는 젖은 데다 입술은 찢어져 꼴이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변명거리를 떠올릴 겨를은 없었다. 지한은 그녀를 보고 싶다는 생각만 떠올리고 이곳에 왔을 뿐이었다.
“자는 거 깨웠나.”
“그게 문제야 지금? 뭐야 대체. 세상에…….이거 찢어진 거 아냐, 누구랑 싸운 거야?”
부드럽고 연약한 손길이 입술 위의 상처위로 스쳐갔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조금 마음이 놓였다.
“그런 거 아냐. 힘드니까 일단 들어가도 돼?”
현관문을 기대선 팔이 떨렸다. 몸에 기운이 없는 것은 술 때문인지, 상처 때문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더는 말할 기운도 서 있을 기운도 없었다. 지한의 간절함을 알았는지 민혜는 말없이 비켜섰다. 그녀가 힘없는 손을 잡아끄는 순간 지한은 그녀를 잠시 끌어안았다.
그저 확인하고 싶었다. 여기 지극히 평범하고 따뜻한 여자가 있다. 부유하고 행복한 집안에서 곱게 자란 여자였다. 그런 것 치고는 교만하지도 않고 사치스럽지 않은 점은 무척 신기할 지도. 그런 사람이라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었다. 윤지한이 평생을 갈구해오던 것이 그녀, 자체였기 때문이었다.
연애 기간 2년 넘게 ‘보고 싶어서’ 란 이유로 갑자기 쳐들어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마도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하지만 예외인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키스’ 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지한에게 그것은 그저 사고 혹은 폭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아랫입술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감각은 서늘하고 소름끼쳤다. 타인의 이가 살을 파고드는 선연한 느낌을 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얼핏 닿은 입술은 그와 달리 무척 부드러웠다. 방심한 사이 공격적으로 깨물린 다음 축축하고 말랑한 입술에 삼켜졌다. 그 사이로 뜨거운 혀가 입안과 밖을 오갔다.
겨우 남자가 떨어졌을 때 입술에선 감각이 없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들의 시선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당분간 지한은 공황상태였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야수 같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에 반해 이후는 한결 개운한 표정이었다. 입술에 얼핏 붉은 피가 묻어 있었다. 그게 자신의 것임을 깨달은 것은 늦은 후였다.
-손님. 여기서 이러시면 곤란한데요.
웨이터가 다가와 정중히 언질 해 주었을 때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애써 존대를 하고 있었지만 그의 얼굴에 피어오른 희미한 짜증과 혐오감이 느껴졌다. 얼굴이 달아오르고 잊었던 통증이 살아났다. 바닥을 향해 떨어지고 있는 붉은 피는 끔찍할 정도였다. 알았다고 대충 대답을 하고 겨우 가게를 빠져나왔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눈가가 어지러웠다.
-이런, 어떡하나. 많이 아프겠다.
가게 입구에 잠시 몸을 기댄 채 서 있을 때 뒤늦게 따라 나온 김이후가 웃으며 말했다. 그의 손이 멍한 얼굴을 무시한 채 입가의 핏방울을 스윽 닦아 냈다.
-아참. 이거 돌려줄게요.
남자가 건넨 것은 지한의 손수건이었다.
“얘기하기 싫으면 안 물어 볼게. 대신 병원엔 가봐.”
됐다고 사양하는 걸 기어이 치료를 해준 후에야 민혜는 한결 편안한 표정이 되어있었다. 아픈지 어떤지도 모르고 있었는데 소독약이 닿으니 그제야 화끈거리고 쓰라렸다. 표정 관리하느라 힘들었다.
마음이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오니 이 얼굴로 내일 출근은 어떻게 해야 하나하는 걱정도 떠올랐다. 내일이면 더욱 부어오를 텐데, 무척 흉할 것이다.
“나 얼굴 많이 이상해?”
딱딱한 분위기를 풀어 볼까 해서 농담처럼 물어봤다. 사실 걱정이 되기도 했다. 보는 사람마다 이 얼굴에 대해 물을 텐데 말주변 없는 자신이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민혜는 웃으며 그의 뺨을 툭툭 두드렸다. 그것만으로도 어쩐지 입술 쪽이 당기는 느낌이었다.
“그래. 무지무지 이상하다. 아랫입술은 팅팅 부어서 진짜 못났다. 혹시 중요한 자리 나갈 일 없어? 아님 피티 할 일이나.”
“다행히도 없어. 다음 주까지는.”
“정말 다행이네. 자고 갈 거지?”
“응.”
과연 잠들 수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오늘은 정말이지 홀로 밤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지한이 그녀를 찾아온 것은 그런 이유도 있었다. 자신의 나약함을 보여주기 싫어 혼자 있고 싶지 않은 밤에도 그녀를 찾아온 일은 없었지만 오늘은 그저 외롭거나 괴롭다는 말로는 설명 안 되는 밤이었다. 괴이한 밤이었다.
지한은 낯선 천장을 한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불면은 여전했지만 이상한 생각이 떠오르진 않아 좋았다. 그런 이상한 남자 따위, 얼굴도 떠오르지 않는다. 지한은 입술 아래서 여전히 쓰라린 상처의 존재가 오히려 버거웠다.
“안 자?”
잠든 줄 알았던 민혜가 깨어있었던 건지 말을 걸어왔다.
“신경 쓰지 마. 나 원래 잘 못자잖아.”
“역시 자기도 힘든 거지?”
“뭐가?”
“동생 일 말야.”
민혜는 할까 말까 몇 번이나 망설였던 말을 꺼냈다. 그동안 알면서도 모른 척 넘어왔던 그녀로서도 오늘 일은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솔직히 민혜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취한 것 같지는 않지만 술 냄새를 풍기고 있었고 얼굴엔 상처를 달고 나타났다. 누구보다 싸움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목소리 한번 높이지 않던 지한이 갑자기 이런 몰골로 나타나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말은 안했지만 지한이 요즘 부쩍 야위어 가는 게 안쓰럽던 그녀였다. 마음이 무거워 그녀역시 쉽게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나 담배 피워도 돼?”
지한은 결국 참지 못하고 몸을 일으켰다. 평소엔 질색하던 그녀도 지금만은 허락을 해주었다.
“너도 힘들지? 나 때문에…….”
창가로 다가가 문을 조금 열어놓고 온 후에 담배에 불을 붙였다. 민혜도 지한을 따라 일어나 있었다. 아무런 문제없는 여자였지만 아무래도 잠들지 못하는 연인을 두고는 도무지 심란해서 혼자 잠들 수 없는 게 당연했다.
“내가 뭘.”
“결혼도 늦어지고, 어머니는 히스테리가 심해지고·····.”
“히스테리 정도는 아냐. 자식 잃은 부모 심정이 다 그렇지. 좀 이상해지신 건 맞지만 원망하지 않아. 날 뭐로 보고 그래?”
하지만 지한은 괜찮다는 말을 완전히 믿지 않는다. 그녀의 집에서도 좋지 않은 소리가 나올 게 뻔했다. 결혼이란 아무래도 개인뿐만 아니라 집안에도 중요한 경사인데 그 경사를 앞두고 사돈 맺을 집에 흉고가 생겼으니, 좋은 기분은 아닐 것이다. 거기다 결혼까지 한정 없이 미루자고 하고 있고, 지한이 생각해도 질릴 정도니까.
“나한테 물어보지 말고 자기 자신한테나 물어봐.”
“내가 왜·····.”
“왜긴, 자기가 누구보다 힘든 얼굴을 하고 있잖아.”
힘든 것은 맞다. 그렇지만 지한은 그녀의 연민의 눈빛에 가슴이 아렸다. 그녀가 알고 있는 지한의 슬픔과 지한의 진짜 슬픔은 종류도 기원도 달랐다. 자신이 순수하게 동생의 죽음에 슬퍼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럴 수 없는 자신의 마음이 이 순간 무엇보다 비극이었다. 김이후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
그날도 어머니는 자신을 데리러 오지 않았다. 방학을 얼마 앞둔 여름 무더위 속을 9살짜리 아이는 혼자 걸어 돌아왔다. 어차피 그런 일은 비일비재 했다. 아침에만 해도 꼭 데리러 가겠다고 해놓고 약속을 멋대로 파기하는 일. 그 정도는 사실 아무 일도 아니었다.
그녀는 겉으로는 문제없는 어머니였다. 아름다운 외모에 사회적으로도 성공한 여성이었다. 하지만 텔레비전에 나와 자녀교육에 대해 진지하게 설파하는 그녀는 실상 자신의 자식에게는 이론과 달리 행동했다. 분명 그녀는 아이를 때리지도 않았고 거친 언사를 퍼붓는 일도 없었다. 다만 그녀는 다른 종류의 폭력을 휘두르곤 했다.
그것은 한 아이의 보호자로서 할 수 있는 일들이었다. 유치원 학예회에 불참하여 아이를 외톨이로 만든다거나 저녁식사를 챙겨두지 않고 동생만 데리고 외출을 한다거나 하는.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다만 그날은 동생을 데리고 나가지 않았다. 근처 슈퍼라도 간 걸까. 멀리 간 거라면 분명 동생을 떼어놓고 갔을 리가 없었다.
동생은 거실 마루에 얇은 이불을 대충 덮은 채 잠들어 있었다. 동생은 유치원도 다니지 않는 나이였다. 그래도 말은 제법 하였고 벌써 한글을 외우기 시작했다. 동생은 똘똘한데다 떼를 쓰지 않는 착한 아이였고 거기다 애교가 많은 아이였다. 모두가 동생을 좋아했다. 자신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가까이 다가가자 쌔근쌔근 숨소리가 들려왔다. 작고 보드라운 얼굴에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 벌려진 입가에서 미지근한 숨이 빠져나왔다 들어가기를 반복했다. 동생은 너무나 행복한 얼굴로 잠이 들어 있었다. 시원하고 안락한 공간에서. 아무런 고통이나 슬픔도 모르고.
‘나는 그 땡볕을 홀로 걸어 왔는데. 예전부터 지금까지 죽.’
아이는 순간 마음속을 웅성거리며 물들이는 이상한 감정에 입술을 깨물었다. 격렬한 미움이 몸 밖으로 빠져나오려 했다.
평소에도 아이는 동생이 얄미웠다. 자신의 마음도 모르고 동생은 걸음마를 떼기 시작하자 자신을 졸졸 쫓아다녔다. 뿌리치고 떼어내도 자꾸만 쫓아 왔다. 한번은 화가 나 밀쳐 낸 적도 있었다. 바닥에 넘어진 아이는 아픔에 서럽게 울었지만 이내 울음을 그치고 자신을 또 따라오기 시작했다. 돌아서면 다시 웃고 있었다.
아이는 동생을 온전히 사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늘 얼굴을 보며 함께해온 존재를 온전히 미워하는 것 또한 어려웠다. 그러므로 이런 순간은 없었다. 이렇게 격렬한 미움이, 느껴본 적 없는 이상한 감정이 든 것은 처음이었다.
‘이 아이만 없었다면 좋았을 텐데…….’
제대로 이름도 알 수 없는 감정이 몸을 흘렀다. 손을 움직였다. 아이는 떨리는 손을 뻗었다. 알지 못함에도 자신이 하는 일이 옳지 않은 것이란 예감이 떠올랐다.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여전히 눈을 뜨겁게 물들이는 미움이, 그 격렬한 충동이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조용이 숨을 내쉬는 입을 막았다. 손바닥 안에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 부드러운 입술이 느껴졌다. 순간 머릿속에 여러 가지 장면이 스쳤다. 자신을 바라보며 웃는 동생의 얼굴. ‘형’ 이라고 처음 어눌한 발음으로 자신을 부르던 순간. 하지만 아이는 눈을 감고 모든 것을 외면한 채로 더 힘을 주었다.
눈을 뜨니 또 비슷한 시간이었다. 4시 35분. 곁에는 잘 아는 여자가 평화롭게 잠들어 있었다. 민혜의 숨소리가 고요한 공기 중에 들려왔다. 그녀를 확인하고 나서야 그는 가슴을 물들이던 서늘함을 몰아낼 수 있었다. 두렵고 불쾌한 꿈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현실로 돌아왔다. 그녀는 그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에어컨이 희미하게 작동중임에도 그의 몸은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잠든 시간은 기억하지 못한다. 평소보다는 그래도 길게 잔 것 같다. 그래봤자 악몽을 꾼 탓에 피로는 전혀 사라지질 않았다. 오히려 더욱더 쌓인 기분이었다.
조용히 주방으로 들어가 얼음물을 마셨다. 심장은 여전히 펄떡 거리고 있었다. 쉽게 진정되질 않았다. 평소와는 다른 꿈이었다. 꿈이라기엔 너무 리얼하고, 어딘지 낯익은. 하지만, 그게 현실일리 없었다. 그렇겠지. 아무리 자신이 동생과 잘 지내지 못했다고 해도, 그래도 그런 일을 상상한 적은 없었다. 지한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잠을 청할 수 있을 리 없었지만 일단 돌아가 누웠다. 자신이 오가는 틈에도 민혜는 뒤척이지도 않고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녀의 뺨을 슬쩍 만져 보았다. 아직 따뜻하고 숨을 쉬고 있었다. 지한은 그 너무나 당연한 사실에 안도하고 말았다.
*
-오늘 저녁 집에 다녀가거라.
지극히 사무적인 말투에 궁금증도 일지 않았다. 지한은 알겠다고 한 뒤에 전화를 끊었다. 딱히 일이 있는 것 같진 않았다. 사실 지한의 집안에는 더는 일어날 사고도 없었다. 아마도 어머니에겐 동생의 죽음보다 더한 쇼크는 없을 것이다.
“입술이 그래서 밥 먹는 것도 곤욕이겠어요.”
식사시간에 제일 바쁘던 한대리가 어쩐 일로 숟가락을 놓고 있나 했는데 아마도 지한의 상태를 걱정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아침에야 괜찮다는 말로 넘겼지만 뭘 먹으려 하니 아무래도 얼굴이 찌푸려 질 수밖에 없었다. 표정관리가 힘들었다. 결국 솔직히 털어놓았다.
“죽을 맛이야.”
“먹어야 죽을힘도 있는 거거든요. 팍팍 좀 드세요.”
“그래. 고마워.”
부하직원들 대부분이 자신을 그리 편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딱히 심하게 혼낸 적도 없고 과중한 업무를 지운 적도 없건만. 이해는 했다. 그리 재미없는 성격에, 근래엔 소문도 좋지 않았다. 지한의 유명한 약혼녀 탓이었다. 그럼에도 한대리만은 입사 초기나 지금이나 자신을 스스럼없이 대하고 있었다. 딱히 자신이 마음에 들어서라고는 생각 않는다. 성격 탓이리라. 게다가 한 대리는 민혜와 친했다. 예전에는 혹 연애감정이 있나 의심을 했을 정도로. 물론 지금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거 어쩌다 그러셨어요?”
아무래도 묻고 싶은 걸 참고 있던 모양이었다. 결국 숟가락을 내려놓고 물을 마셨다. 오늘따라 구내식당 메뉴도 좋지 않았다. 하필이면 육개장이었다.
“물렸어.”
“예? 물리다니……. 개, 개요?”
고개를 슬쩍 끄덕였더니 진짜로 믿는 눈치였다. 민혜에게 변명이라고 개에게 물렸다고 했을 때는 농담하지 말라며 화를 냈었는데 이쪽의 반응은 전혀 틀렸다. 개 같은 인간에게 물린 건 맞으니 거짓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광견병 주사 인가, 뭐 그런 거 맞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농담이야. 그냥 좀 넘어졌어.”
진지하게 호들갑을 떠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결국 이실직고 했다. 너무 심각하게 걱정을 해주니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그는 곧 맥 빠진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참나. 농담 정말 재미없게 하시네.”
자신이 생각해도 정말 재미없는 농담이었으므로 지한은 한 번 더 사과했다.
입술의 상처 때문에 먹은 것도 없었지만 헛구역질이 나왔다. 구토기에 화장실을 들락거렸지만 결국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속이 문제가 아니라 다른 곳이 문제인 모양이었다. 한참을 헛구역질을 반복하다 지쳐 문을 열고 나왔다.
점심시간 직후의 화장실은 고요했다. 하얀 조명이 병질 적으로 느껴졌다. 지한은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몰골을 확인했다.
걷은 셔츠 사이로 마른 손목이 드러났다. 그리고 움푹 들어간 뺨은 생기라곤 찾아 볼 수 없다. 최소한 이상한 얼굴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지금은 그리 보기 좋은 꼴이 아니다. 원래도 살이 잘 붙지 않는 체질이건만, 그나마 있던 살마저 빠져나가고 있었다. 잠을 못자고 먹지도 못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입술의 상처까지 더하니 약을 하는 사람이라 해도 믿을 것만 같았다. 입술을 상처를 슬쩍 건드렸다가 찌르르 울리는 통증에 미간을 찌푸렸다.
‘당신 비겁한 눈을 하고 있어. 알아?’
통증과 함께 지난밤의 목소리가 살아났다. 애써 잊고 있던 목소리, 그리고 그 표정들. 이해할 수도, 이해하고 싶지 않은 남자가.
그것이 폭력이었는지 키스였는지 알 수 없었다.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단순히 내가 자신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 그런 이유로 충분히 사람을 때릴만한 인물이란 얘긴 들었지만 그런 식의 폭력을 행사할 줄은 몰랐다. 그런 짓을 해놓고 태연히 아프지 않냐고 물었었지. 그런 짓을 해놓고, 그토록 아프고 열렬한 긴 입맞춤을…….
심장이 흔들렸다. 아니 오장육부가 함께 흔들렸다. 다시금 구토기가 치밀었다. 칸막이 안으로 들어가 구역질을 했으나 아무것도 토해지지 않았다. 차라리 토하고 또 토해내 속을 모두 비어냈으면 좋겠다.
아픔보다 더욱 강하게 기억되는 섬뜩한 열기와 감촉이 떠올라 지한은 입술을 강하게 눌렀다. 차라리 아픔이 나았다. 상기되는 기억의 생생함은 그를 더욱 괴롭혔다.
*
지한은 집에 올 때마다 늘 타인의 그림자를 느낀다. 분명 자신도 유년시절을 보낸 집이건만. 아니 지한은 거기서 생활하던 이십년 남짓한 시간동안 늘 그런 느낌과 함께 해야 했다. 다만 예전에는 그 감정의 이름을 몰랐을 뿐이었다.
“우리 큰 아들. 너무 오랜만이라 얼굴도 까먹겠다.”
아버지는 예나 한 달 전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나 지금이나 별 변화가 없었다. 그 역시 동생의 죽음에 상심이 컸으나 그들 가족 중에는 제일 먼저 털고 일어난 인물이었다. 우유부단한 성격은 인자함으로 비치긴 하나 때론 그 성격이 잔인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적어도 지한에게는 그러했다.
“죄송합니다. 회사 일이 바빠서.”
“아니다. 그 나이에 바쁘지 않은 게 더 이상한거지. 암.”
“아버지가 탓하려고 하시는 말 같니. 반갑다고 그러는 걸 눈치 없이…….”
아버지의 곁에서 처음부터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던 어머니는 결국 한마디 거들고 말았다.
“여보.”
“저녁 준비 해놨으니까, 일단 먹으면서 얘기 하자.”
그는 부인을 원망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딱히 그럴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마음이 상하지도 않았다. 어떤 영향도 없는 것이 미안할 정도로 말이다.
“이해해라. 네 어머니 상태가 어떤지 너도 잘 알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모르는 게 있었다. 어머니는 상태가 좋든 나쁘든 자신에게 한결같았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에야 아버지는 어렵게 얘기를 꺼냈다. 얘기는 간단하게 두 가지였다. 직장을 그만 둔다는 것과 정계에 진출해볼 생각이라는 것이다. 기관에서 일하며 몇 번 인가 제의를 받은 적이 있었지만 이제까지는 한사코 거절하던 양반이 웬일일까 했다.
“너도 알겠지만 난 아무래도 정치 쪽엔 관심이 없었거든. 그렇지만 주변에서 하도 권하고, 게다가 너희 장인 될 분도 적극적으로 협력을 해주시겠다고 하더라.”
“그렇군요. 잘됐네요.”
의외라고 생각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이제까지는 별 욕심이 없다고 비슷한 얘기만 나오면 뒤로 빼던 분이었던 것이다. 아마 지한의 장인이자 민혜의 아버지가 적극 권한 모양이었다. 돈 있고 힘 있는 분이 뒤를 봐주겠다니 좋은 기회였다. 말은 저렇게 해도 사실은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었다. 남자에게는 어느 정도 권력욕이 있는 모양이었다.
“잘 될지 어떨 지야 앞으로 봐야 아는 거겠지.”
“당연히 잘 돼야죠. 당신이라도 잘 되어야 내가 살 의욕이 나지 않겠어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자네도 참…….”
아버지는 지한의 눈치를 보았다. 그럴 필요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아도 곤란한 눈치였다. 당연한 수순으로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예전에는 이 어색함을 완화해줄 존재가 있었지만 지금은 없었다. 지한이야 익숙한 일이라 상관없겠지만 아마도 아버지는 지금 이 순간 어느 때보다 죽은 동생을 떠올릴게 틀림없었다. 불안하고 어긋나게 이어진 가족을 이어주었던 것은 민한이었으니까.
“그래도 네가 처가 덕은 잘 보는 모양이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네요.”
그 말에 숨겨진 의미를 알고 있었다. 그 외에 다른 것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거겠지. 하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이로써 어머니는 더 이상 지한의 약혼녀에게 함부로 대할 수 없을 것이었다. 지한의 어머니는 감정적인 여자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실리를 추구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점이 싫었지만 지금은 차라리 다행스러웠다.
불편한 분위기 탓인지, 아버지는 이내 식사를 다 했다는 핑계로 일어났다. 지한도 그를 따라 일어나려 했지만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져 멈칫했다. 아버지는 할 말이 끝났겠지만 아무래도 어머니는 아닌 모양이었다. 무슨 할 말이 남아있을까. 지한은 일단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한참 말없이 노려만 보던 그녀가 홱 시선을 옮기며 쓴 소리를 내뱉었다.
“넌 어쩜 그렇게 무심하니. 나나 니 아버지는 걱정 되지도 않던. 안부 전화 한통 없고.”
안부 전화를 해봤자 그리 반가워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 집엔 어머니만 있는 것은 아니기에 틀린 말은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해서 하는 말이니. 그게?”
비슷한 말을 자주 듣는 구나. 지한은 같지만 분명 다른 말을 떠올린다. 그 남자도 똑같은 말을 했었다. 하지만 그때와 달리 지한의 심장은 동요하지 않았다.
“넌 진짜 애가 정도 없고 감정도 없는 것 같니. 동생이 죽든 말든 슬픈 건지 안 슬픈 건지.”
“어쩌면 피가 반밖에 안 섞여서 그런 지도요.”
자신도 모르게 나간 말이었다. 지한은 속으로 놀라긴 했지만 그 말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마주한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는 것을 보면서도 별다른 죄책감이나 후회가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유리컵이 어깨를 스쳐 바닥으로 떨어졌을 때는 성가시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쨍하고 날카롭고 신경질 적인 소리와 함께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소리에 놀란 아버지가 뛰어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글쎄, 얘 말하는 싸가지 보라니까요!”
그녀는 비틀거리며 남편에게 다가가 매달렸다. 차갑게 언 시선은 신경 쓰이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허둥대는 얼굴은 조금 신경 쓰였다.
“제가 실언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기가 막혀. 어떻게 그런 말을……. 얼굴 색 하나 안변하고.”
사과를 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어머니에게 자신의 말은 조금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만의 분노와 울분에 휩싸여 부들거리고 있었다. 지한은 그녀의 경악에 찬 시선을 외면한 채 바닥에 흩어진 유리조각을 주었다.
“당신도 그만 좀 해. 얘라고 속이 편하겠나.”
“혹시 모르죠. 속으로 좋아라할지.”
“여보!”
그러는 사이에도 어머니의 히스테리는 계속 되었다. 참다못한 아버지가 소리를 질렀다. 파편은 멀리까지 퍼져 있었다. 지한은 애써 바닥에 흩어진 유리 파편에만 신경을 집중 시켰다.
*
지한은 아침부터 민혜에게 심상치 않은 전화를 받았다.
-자기가 꿈같은 거 믿는 사람 아니란 거 아는데, 오늘은 정말 이상했어. 조심해.
알았다고는 했지만 설마, 무슨 일이 생길까 싶었다. 그녀의 말대로 지한은 미신을 믿는 타입이 아니었다. 우습게보진 않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 알았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민혜의 당부가 무색하게도 출근길에 접촉사고가 났다. 큰 사고는 아니었지만 이것저것 처리하느라 결국 오후를 넘겨서야 출근을 했다.
“그래도 큰 사고 아닌 게 어딥니까. 다행이라고 생각하세요.”
위로의 말을 들었지만 그럼에도 기분은 저조할 수밖에 없었다. 최근 잘 풀리는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오랜만에 집에 가서 어머니의 심기를 건드리고 그 때문에 아버지로부터도 좋지 않은 시선을 받아야 했다. 대놓고 말하지 못하는 것은 지한이 이미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성인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었다. 오히려 그 아들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었다.
20살 이전만 해도, 아버지는 어머니의 불평등한 처사보다도 지한의 융통성 없음을 탓하곤 했다. 그도 아버지의 말이 완전히 틀리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아마도 다른 사람이었다면, 자신보다 훨씬 긍정적이고 붙임성 있는 인간이었다면 이렇게까지 어머니와 사이가 틀어지진 않았을 것이다.
늦은 출근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퇴근까지 늦어 졌다. 다음날 처리하면 되지만 한번 일이 밀리면 또 밀리기 마련이었으므로 차라리 하루 피곤한 것이 나았다. 팀장이 돌아갈 생각을 안 하니 눈치를 보는 팀원들을 먼저 돌려보내고도 세 시간 넘게 회사에서 보냈다. 꽤 늦은 시간임을 확인하고 겨우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차 없이 돌아가야 했다. 차는 일단 카센터에 맡겼다. 상대방이 병원도 가보라고는 했는데, 시간이 이래서야 내일로 미루는 수밖에 없었다. 사실 별다른 충격은 없었다. 사고당시엔 편두통 기가 있었지만 두통이야 지한에게는 잦은 병이었으므로. 다행이 상대방은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성격이 좋아 보이는 인물로 목소리 높이지 않고 서로 웃으며 헤어졌다.
어머니와 싸우고 거기다 교통사고가 나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재수 없는 날은 아니었다. 다행히도 무탈하게 처리되었고 몸도 멀쩡했다. 자신을 걱정해주는 다정한 연인도 있었다. 하지만 좋게 생각하려고 해도 찜찜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일 쪽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회사마저 문제가 생긴다면 솔직히 견디기 힘들 것 같다.
회사정문을 나와 지하철을 타야 할지 버스를 타야 할지, 오랜만에 이용하는 대중교통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을 때였다.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엔 확실히 저장을 해놓았다. 대비해야 할 번호였기 때문이다. 김이후였다. 지한은 번호를 확인하고 마음의 준비를 했다.
며칠을 뜸해 다시 연락이 올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웬일일까. 의아함보다는 불쾌함이 앞섰다. 이제 그는 명백히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런 일이 있지 않았다고 해도 분명. 여전히 아랫입술 위에는 희미한 상처가 남아있었다.
“여보세요.”
-목소리가 기운이 없네.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나 봅니다.
이 순간 가장 나쁜 일이라면 이 남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온 것이었다.
“별로. 그런데 전화를 했으면 일단 본인 이름을 밝혀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미 알고 있잖아요. 안 그렇습니까?
“용건이 뭡니까?”
지한은 남자의 말에 일일이 대꾸할 생각이 없었다. 되도록 전화를 빨리 끊는 것만이 원하는 것이었다.
-보고 싶어서 전화했는데요. 안 돼요?
“애석하지만 난 아니라서요. 이제 당신과 만나지 않을 겁니다.”
-왜요? 동생 보고 싶지 않아요?
김이후는 결국 자신이 흔들릴 수밖에 없는 카드를 꺼냈다. 하지만 이번에도 별 소용은 없었다. 마음의 동요는 있으나 생각에 변화는 없었다. 그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불면증에 대해서도. 차라리 신경정신과 상담을 받아야 할 일이지 이 남자에게 기대할 일은 아니었다. 지한은 그렇게 결론 내렸다.
“이젠 믿지 않습니다. 아니, 사실이라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그 정도로 내가 보기 싫다?
“마음대로 생각하시죠.”
-보기 싫어도 봐야 할걸요?
물론 남자는 지한의 결정 따위에 신경을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더 이상 대꾸할 마음도 들지 않아 전화를 끊었다. 보기 싫어도 봐야 한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물론 그가 작정하고 찾아온다면 봐야 하겠지만 그는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이름과 전화 번호, 그리고 동생이 전해준 단편적인 모습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면서도 되도록 빨리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감이 좋지 않았다. 택시를 잡기 위해 도로 끝으로 나섰다, 건너편 인도에 서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택시를 잡으려고 들었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설마……. 아니겠지.’
마음속에 놀라움과 의심이 동시에 스쳤다. 잘못 본 거라고 생각했다. 얼핏 스친 실루엣은 정확하지가 않았다. 8차선 도로를 사이에 두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기분 탓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넘기기에 낮은 편에 서 있는 남자가 이상하게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표정조차 보이지 않건만 그런 느낌이 강렬하게 들었다.
-끼익―!
날카로운 소리가 귀를 찢을 듯 울렸다. 타이어 타는 냄새가 얼핏 나는 것 같았다. 쌩쌩 달리는 차를 무시한 채 남자가, 김이후가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이내 급정거 하는 차들로 인해 도로는 마비가 되었다. 운전자들이 일제야 고개를 내밀고 남자를 향해 욕설을 내뱉었다. 사고가 나지 않는 게 용할 정도였다. 곧 신호가 바뀐 탓인지도 모른다.
지한은 도망쳐야겠다는 생각도 못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였다. 있지도 않은 빗줄기가 눈앞을 스치는 듯 했다. 하지만 그는 젖어 있지 않았다.
“잡았다.”
마침내 지한의 앞에 다가온 김이후가 웃으며 말했다. 이미 그는 지한의 손목을 결박하듯 꼭 쥐고 있었다.
이후는 처음부터 많이 취해 있었다. 그리 늦은 시간도 아니었건만 어디서 술을 마셨는지. 마주하자 술 냄새가 확 풍겼다. 뻔뻔한 웃음을 머금은 얼굴과 달리 눈가가 붉게 충혈 되어 있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이었다.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
“놀랐어요? 보고 싶지 않아도 보게 될 거라 했잖아요.”
잡힌 손목이 죄어 왔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쉽게 뿌리치지 못한 것은 그의 심상치 않은 상태 때문이었다. 어영부영 하는 사이 근처 포장마차에 들어와 있었다.
이미 많이 마신 것 같은데도 이후는 계속 해서 술을 들이부었다. 그 표현이 딱 어울렸다. 그 정도로 많이 마시고 있었다. 감정이 좋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그만마시라고 해야 하나 고민되기까지 했다.
안주조차 손대지 않은 채 소주를 한 병쯤 비웠을 때 즘, 그가 고개를 들어 얼굴을 가리켰다. 무얼 그리 유심히 보나 했는데 아무래도 입술의 상처가 신경 쓰인 모양이었다.
“그거 많이 나았네요.”
이런 경우를 고양이가 쥐 생각 한다고 하나. 지한은 자신이 저질러 놓은 행태를 뻔뻔스럽게 바라보는 남자를 기막힌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덕분에.”
“오래오래 사라지지 않았으면 했는데.”
아니 신경 쓴다는 것치고는 그리 미안한 표정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차라리 아쉬운 표정이었다. 오래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니?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었다. 남의 고통을 즐기는 사디스트가 아니라면 말이다. 그런 인간일 가능성도 물론 있었다. 이제까지의 행동들로 보아서는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 원래가 고약한 인간인 건지도 모른다.
“나하고 술 마시자고 회사까지 온건 아닐 텐데요.”
빨리 볼일보고 떠나고 싶단 마음뿐이었다. 어차피 중요한 얘기는 없을 것이었다. 지난번에도 그랬고,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으니까. 지한은 이제 그에게 아무런 기대도 없었다. 기대보다 차라리 두려움은 있었다. 이 남자가 자신을 흩트려 놓기 때문이었다. 동요하지 않으려 해도 동요하며 흔들리지 않으려 마음을 다잡아도 힘없이 흔들린다. 왜일까?
“형.”
김이후의 입에서 나온 말에 지한은 적잖게 놀랐다. 하지만 그는 태연했다. 마치 옛날부터 자신을 그렇게 불러왔다는 듯.
“이상하게 형이 보고 싶더라구요. 만난 이후로 쭉. 그래서 그냥, 지나던 길에…….”
“…….”
“나 오래 기다렸어요.”
“그렇게 부르지 말아요.”
“뭘요?”
“방금 전에, 형이라고. 그거 기분 나쁘니까요.”
겨우 흔들리는 마음을 수습하고 날카롭게 쏘아 붙였다. 아니, 그러려고 했지만 그렇게 들리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지한의 불안과 달리 이후의 태도는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즐거워보기기까지 한다. 그는 자신의 동요하는 모습을 즐기고 있는 듯 했다. 아니 그런 것 같은 게 아니라 그랬다. 처음부터.
“왜요? 이렇게 부르면 안 됩니까? 어차피 동생 친구고, 내가 연하인건 분명한데.”
하지만 보통은 상대의 허락도 없이 붙이지 않는 호칭이었다. 만난 지 며칠 안 된 사이에는 더욱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지한은 이 남자에게 듣는 ‘형’ 이란 부름에 어쩐지 오싹한 기분을 느꼈다. 어깨를 스치고 가는 이상한 한기에 조용히 몸서리를 쳤다.
“동생 생각이라도 나나보죠?”
“난 원래 그 호칭을 싫어합니다. 그냥 이름으로 불러요.”
“아……. 그래요? 윤지한씨.”
비꼬듯 붙인 말이 신경 쓰였지만 ‘형’ 이라는 말보다는 나았다. 변명이 아니라 지한은 그 호칭을 싫어했다. 보통 친한 선후배간, 나이 차 나는 친분관계에서도 쉽게 쓰이는 호칭이었지만 지한은 누구에게도 한 번도 그것을 허락한 적이 없었다. 하기야 그는 동생인 민한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조차 싫어했을 정도였다.
“그만 마셔요. 많이 마신 것 같은데·······.”
“술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다고, 내버려 둬.”
그만하고 일어나자고 말하려 했다. 그가 말꼬리를 자르며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물론 지한은 김이후가 걱정되어 한 말이 아니었다. 지한은 자신을 걱정하기에도 힘들었다. 남의 사정이나 아픔 따위 관심 둘 여력이 없었다. 하물며 계속해서 이상한 짓을 하는 남자를, 왜.
“뭐가 그렇게 견딜 수 없는데요?”
그런데도 그런 질문을 한 이유는 뭘까. 지한은 그저 충동적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진지한 대답을 기대하지도 않았다.
“지난번에 왜 나보고 장례식에 오지 않았냐고 물었었지?”
지한은 잘 생각이 나지 않아 잠깐 머뭇거렸다. 약간 생각해야 기억날 정도로 오래전 일이었다. 기억하고 있다는 것도 신기하건만 며칠 전 일인데 지금 와서 대답을 해주려는 건가. 대답 참 빠르다고 생각했다. 비꼬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그의 표정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이후의 분위기가 조금 전과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여전히 입 끝에 남은 웃음도 알콜에 젖어 축축한 눈빛도 다른 느낌이었다.
“난 그 애가 죽은걸 아직도 실감할 수 없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해.”
이후는 지한에게 처음으로 슬픔을 내보였다. 말에서, 표정에서, 그리고 그의 눈빛에서 정제된 슬픔이 느껴졌다. 그것은 슬픔이기도 했고 어떤 의문이자 노여움이기도 했다. 그는 뻔히 있는 진실을 향해 화를 내고 있었다. 어머니와 같이, 하지만 또 다르게.
“그건 나도 마찬가집니다.”
“아냐. 그런 게 아니란 말이야. 윤지한씨.”
“그럼, 뭡니까?”
처음엔 움찔했다. 지한은 이후가 자신을 비난하려고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다. 그는 어머니처럼 자신이 거짓으로 슬퍼한다고 말하려는 게 아닌 것 같았다.
“아직도 살아있는 것 같은데, 다른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고 해. 난 지금도 이렇게 생생히 느껴지는데.”
얼굴의 근육이 자신도 모르게 굳었다. 그러나 고개를 돌리거나 눈을 감을 수도 없었다. 그의 서늘한 표정만이 눈앞을 가득 채웠다. 지한은 그의 말이 뜻하는 바를 어지럽게 생각했다.
“지금 여기 귀신이 있다는 건 아니니까 긴장 풀어. 그냥 그렇다는 얘기니까.”
생각은 그의 픽, 하는 웃음에 거기서 끊기고 말았다.
“장난치지 말아요.”
“정말 놀랐나보네.”
진지한 말이라서 믿었건만, 또였나. 하지만 쉽게 진정이 되지 않았다. 경련이 이는 입술을 깨문 채 손대지 않고 있던 술잔을 비웠다. 차라리 물이 더 필요했지만 누굴 불러 무언가 부탁할 기력도 없었다.
“크크큭…….”
빈 잔에 술을 따르던 이후가 참지 못하겠다는 듯 웃었다. 그는 다시 홀로 대작을 하기 시작했다. 지한의 잔에는 여전히 넘칠 것 같이 가득찬 술이 남아있었다. 그의 태도가 불손하고 하는 말은 모호하기 짝이 없지만, 모두가 농담 같진 않았다. 말속에 담긴 마음은 진짜였다.
김이후란 사람에게 윤민한이 차지하는 바가 크다는 건 알겠다. 그것은 지난번에 이미 확인했었다. 하지만 지한은 그가 생각보다 크게 낙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보이지 않는 슬픔이 존재하는 것이다. 자신은 상상조차 못할.
웃음소리가 이상해 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억눌린 소리는 웃음이 아니라 마치 울음소리 같았다. 희미한 소리, 그렇지만 분명 어떤 흐느낌을 닮아 있었다. 물기가 밴 소리가 고개 숙인 이후로부터 흘러나왔다. 이내 테이블 위로 빗물 같은 눈물이 툭 떨어졌다.
“뭐 하는 겁니까?”
지한은 그걸 보고도 믿기지 않아 어이없는 질문을 했다. 차라리 광인 같은 웃음이 어울리지 이런 눈물이 어울리는 남자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울고 있었다. 대답을 듣지 않아도 이제는 알 수 있었다. 그는 얼굴을 적신 눈물을 닦아내지도 않은 채 고개를 들었다. 젖은 눈가가 충혈된 듯 붉었다. 목소리엔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슬픔이 섞여 있었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들 수가 없어. 숨을 쉬고 있는데도 살아있는 것 같지가 않아. 당신은 이런 기분을 알아?”
술주정인지도 모른다. 취하지 않고도 이상한 짓을 하는 사람이었지만 그만큼 많이 마셨으니까 당연했다. 하지만 술주정이라 쉽게 넘기기 힘든 부분이 있었다. 잠들 수 없다. 그건 자신과 마찬가지였다.
“내가 이상하지? 그래. 다들 이상하다고 말하지. 그렇게 살지 말라고 말했지. 그런데 그 애는, 그 애만은 그냥 이렇게 살아도 된다고 했어.”
김이후가 말하는 사람이 누군지 말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는 동생의 얘기를 하고 있었다.
“윤민한. 단 한 사람만 그렇게 말했어. 이런 인간에게 그대로 있어도 괜찮다고 말해줬다구.”
그리고 그는 다시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따금 억눌린 소리가 흘러나왔다. 운다기보다 어딘가 아픈 곳을 누르고 있는 기분이었다. 옆 테이블의 사람들조차 이따금 바라볼 정도였으나 그는 상관치 않았다.
희미하게 흔들리는 어깨를 바라보고 있자니 연민인지 동질감인지 모를 감정이 일었다. 이상한 행동만 일삼는 이상한 남자인데, 왜 자신은 이 순간 그를 가엽다고 여길까. 마시지도 않은 술에 취했나. 이해할 수 없는 마음에 눈가를 찌푸렸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손은 멀리 나가 있었다. 움직이지 않는 어깨를 슬쩍 건드렸다. 괜찮냐고 물으려던 말은 차마 나오질 못했다. 이후가 순간 고개를 들어 지한을 바라보았기 때문이었다. 손을 물리며 몸을 움츠렸다. 마음까지 움츠러들 정도로 그의 눈빛은 차가웠다. 김이후는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그 애는 당신이 죽였어. 그렇지?”
영문 모를 말을 던져놓고 그는 돌아섰다. 그리고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들 수 없다던 이후는 그의 장담대로 술을 마시고 곯아떨어졌다. 자신이야 편할지 모르겠지만 지한에겐 곤란한 일이었다. 가게 점원의 도움으로 택시를 탈 순 있었지만 이 무거운 짐을 어디에 내려주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일단 지한은 주민등록증에 적힌 주소지로 향해 달라고 했다. 다행히 택시가 목적지에 도착할 무렵엔 조금 정신을 차린 것 같기도 했다.
“여기가 집 맞습니까?”
그래봤자 비몽사몽간이라 고개를 끄덕이는지 대답을 하는지, 잘 보이지도 않았다. 아파트나 오피스텔에 살 것 같은 이미지였지만 의외로 가족과 함께 사는 건인지-그 성격으로 보아 누군가와 같이 산다는 게 왠지 상상이 안됐다. 그는 이층짜리 단독주택에 살고 있었다. 혹 다른 가족이 있을까 싶어 초인종을 눌렀으나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담 너머의 집에도 불빛이 보이지 않았다. 주머니를 뒤져 열쇠를 찾았다. 다행히 열쇠가 딱 맞았다.
겨우 담벼락에 기대 있는 남자를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여러 가지로 성가신 사람이었다. 성가시긴 하나 불쾌하다는 기분은 다소 사라져 있었다. 아무래도 그런 모습을 보아서 인지도 모르겠다. 울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누구라도 타인의 약한 모습을 보면 마음의 경계가 허술해지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딱히 다른 감정이 있어선 아니었다. 지한은 자신의 행동을 그렇게 합리화시켰다.
“괜찮습니까?”
지한은 침대가 있는 방을 찾아 김이후를 눕혔다. 엎드린 채로 뭔가 중얼거리기에 정신을 차렸나 싶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옷이라도 벗겨 줘야 하나 싶었지만 거기까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여기까지만 해도 자신은 충분히 친절했다. 할 도리를 다 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쉽게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혹 이 남자도 동생의 꿈을 꿀까. 그렇다 해도 자신과는 전혀 다른 의미일 것이다. 지한은 그에게 잠시지만 이상한 동질감을 느끼는 것이 우습다 생각되었다.
목이 말라 잠시 주방에 들어갔다. 집은 생각보다 깨끗했다. 조금 오래된 것도 같지만 전체적으로 손질이 잘 되어 있었다. 정원도 그렇고 거실이나 주방의 상태도 그렇고. 하지만 음식을 잘 해먹진 않는지 냉장고가 썰렁했다. 설마, 이 넓은 집에 혼자 사는 건가. 그나마 맥주와 생수 따위가 냉장고 한쪽을 채우고 있었다. 물을 따라 방안으로 들어왔다. 깨어나면 목이 마를 것 같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가보겠습니다.”
어차피 들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일단 인사를 했다. 방을 나서려다 다시 돌아섰다. 쓸데없는 참견인건 알지만 아무래도 불편해 보여 단추를 몇 개 풀어주자 싶었다. 침대 곁으로 다가갔지만 더 가까이 다가가는 일은 어쩐지 힘들었다. 머뭇거리다 손을 뻗었다. 그러나 지한의 손은 웬일인지 다른 곳에 닿아 있었다. 그의 이마엔 땀이 맺혀 있었다. 손끝에 미끄러운 물기가 느껴졌다.
지한은 희미하게 떨리는 심장의 진동을 무시한 채 천천히 손가락을 아래로 미끄러뜨렸다. 감은 눈과 단단한 뺨과 그리고…….
‘그 애는 당신이 죽인거야.’
문득 뇌리에 스치는 목소리에 멈칫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건만 왜 자신은 그 말을 상기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분명 그렇게 생각하는데 왜 자꾸만 생각날까. 그의 목소리가 심장을 누르고 있었다. 지한은 이상한 불안함에 휩싸여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
잠들었으리라 생각한 손이 불쑥 다가와 그를 붙잡았다. 고작 손목을 붙잡혔지만 온몸을 결박당한 듯한 기분이었다. 지한은 그에게 사로잡혔다. 잠시 시간이 몇 템포 늦게 지나가는 듯 했다. 시간이 다시 제 모습을 찾았을 때, 지한은 그의 밑에 있었다. 이번에야 말로 온몸을 묶인 채였다. 그의 무게가, 더운 채취가 몸을 누르고 있었다. 어느새 이후는 멀쩡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 하는 겁니까.”
겨우 맥 빠져 흘러나온 말에 그는 느릿하게 웃었다. 선명한 웃음과 또렷하게 돌아온 눈빛에도, 그러나 그의 표정이 더욱 멀어진 기분이었다. 이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떤 설명도 없이 짙은 그림자가 눈앞을 덮쳐들었다. 시야가 어두워짐과 동시에 남자의 입술이 지한에게로 달려들었다.
예전의 기억이 살아나 몸이 바짝 긴장했으나, 그때와는 달랐다. 부드러움은 없으나 깨물진 않았다. 그저 놀라 벌어진 입술 안으로 다만 혀가 파고들 뿐이었다. 그것은 따로 살아있는 듯 안에서 멋대로 움직였고 또 재빨랐다. 달아나려는 혀를 붙잡아 휘감고 핥아 올렸다. 고개를 돌리면 그대로 따라와 다시 입술을 덮쳤다. 끈질기도록 길고 집요한 행위가 이어졌다. 뒤늦게 몸을 뒤틀며 저항을 해보나 이미 벗어날 수 없었다.
벌써 두 번째였다. 그때와 달리 이번엔 분명 키스, 라고 말할 수 있는 행위였다. 거칠고 막무가내이긴 했으나 분명 외면할 수 없는 생생한 욕망이 느껴졌다. 그는 폭력적인 키스를 퍼부으며 몸을 더듬기까지 했다. 손이 닿는 곳마다 피부가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견딜 수 없는 불쾌감에 가까스로 남자의 어깨를 밀쳐 냈다. 그는 밀쳐진 그대로 몸을 기댄 채 지한을 바라보았다.
“당신 미쳤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지한의 억울함과 두려움이 떨리는 목소리에 섞여 흘러나왔다. 그러나 이후는 오히려 차갑게 비웃었다. 지한의 감정을 정당하지 않은 것처럼 취급했다. 이 남자는 왜 이렇게 떳떳할까? 단순히 미쳤기 때문에? 아니면 이유가 있는 것인가. 설명해 줄 사람이 아닌 것을 알지만 알고 싶었다. 이유라도 알고 당하면 억울함이라도 덜하지 않을까.
눈을 감을 생각도 못하고 다가오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남자의 눈이 미미하게 빛을 내뿜었다. 낯선 눈빛과 표정이었다. 원래가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는 남자였지만 지금 이 순간엔 더욱 불가사의 했다. 그가 뱉어낸 말 역시.
“내가 널 싫어하는 건 모두 네 잘못이야.”
기시감을 느꼈다. 들은 적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누군가에게 들었던 말이라기보다는 자신이 한 말 같았다. 지한은 언젠가 누군가에게 그 말을 한 적이 있단 생각이 들었다. 이후의 목소리에 자신의 목소리를 덧입혀 본다. 머릿속에 얼핏 오래된 화면이 지나갔다. 지한은 자신과 마주하고 있는 얼굴을 기억해 냈다. 그건…….
“내가 널 좋아할 수 없는 것도 네 잘못이야. 네가 윤민한이기 때문이라구.”
“…….”
“형이 그렇게 말했잖아?”
민한이었다. 지한은 자신의 동생에게 그렇게 말했다. 아무런 가책도, 망설임도 없이. 그때 민한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던가. 아직은 자신보다 작았던 동생, 작았던 어깨가 나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하얗게 질린 얼굴은 애써 웃고 있었다. 지금의 남자의 표정과 닮아 있었다. 그는 웃고 있었다.
“당신 지금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장난치는 거라면 그만둬.”
“고등학교 졸업 며칠 전이었잖아. 형은 집을 나가 산다고 했고, 난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어. 그렇지만 형은 말도 안 되는 참견이라고 화를 냈지. 상관하지 말라고, 눈빛도 보내지 말라고 했어. 끔찍하고 불쾌하다고·····.”
민한이 이 남자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을 줄은 몰랐다. 지한은 정확히 기억조차 못하는 일을. 하지만 그보다 더 이상한 것은 따로 있었다.
“난 웃었지만, 사실 울고 싶었어. 울고 싶은 걸 필사적으로 참고 있었어. 그때도, 그리고 그 다음에도 몇 번이나 그랬어.”
이후는 마치 자신이 ‘윤민한’ 인듯 말하고 있었다. 그의 말이, 표정이 동생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연약하지만 다정한, 부드럽지만 꺾이지 않는 그 아이의 얼굴이. 그의 서늘한 얼굴위에 얇은 천처럼 덧씌워졌다.
“그러니까, 내가 이러는 것도 형 때문이야. 형이 날 이렇게 만든 거야. 그래야 맞는 거지?”
빠르게 뛰던 심장은 이제 아예 멈춰 버린 것 같았다. 그의 얼굴 위에 자꾸만 동생의 표정이 떠올랐다. 머릿속에선 아니라고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고개를 젓고 있는데 마음은 이미 흔들리고 부서지고 있었다.
“당신 누구야?”
지한은 자신도 모르게 얼빠진 질문을 던졌다. 그의 이름은 이미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택시 안에서 주민등록증까지 확인했다. 하지만 지한은 혼란스러움에 확인받고 싶었다. 자신의 말도 안 되는 혼란을 부정해주길 바랬다.
“나야. 형…….”
어떤 그리움이, 그리고 원망과 슬픔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그 눈빛은 더욱 선명히 죽은 사람의 것과 닮아 있었다. 물어보았던 것은 자신이었지만, 그 대답을 듣고 울컥 터져 나오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분노라고 해도 사실 그건 두려움과 비슷했다.
“이상한 소리 지껄이지 마. 왜, 왜 이런 장난을…….”
“장난? 그래, 마음대로 생각해. 믿지 않아도 상관없어.”
화를 내야 하는데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리고 어그러져 있었다.
“예전엔 참았지만 이젠 안 참아. 이제는 내 마음대로 할 거야.”
“뭘 하려는 거야?”
이후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남자는 자신의 항의를 가볍게 비웃었다. 그는 독백과도 같은 말을 이어나갔다.
“어차피 내가 참든 안 참든 형은 날 좋아해 주지 않을 거잖아?”
어지러운 머릿속을 제대로 정리할 시간도 주지 않고 그는 다시 손을 뻗어 힘없는 몸을 가두었다. 두 손이 목을 조를 듯 다가왔다가 어깨를 눌렀다. 어차피 도망칠 기력도 없었다. 지한은 눈앞의 현실을 이해하는 일 조차 할 수 없이 무력하기만 했다.
“말도 안 돼.”
힘없이 중얼거린 말에 그는 잠시 흐릿하게 웃었을 뿐,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힘없는 저항은 그에게 별다른 타격을 주지 못했다. 그는 지한의 타이를 거칠게 풀어내곤 그것으로 두 손을 묶었다. 허리 아래는 이미 자신의 몸으로 눌러놓아 달아날 방도는 없었다. 남자의 손이 희미하게 경련하는 뺨을 감쌌다. 시체처럼 차가운 손이었다.
이런 상황임에도 지한은 그가 하려는 일이 무엇인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사실 상상하기도 싫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 지금 일어나는 일 중에 도대체 진실이라 믿을 수 있는 것이 하나라도 있을까. 분명히 자신이 죽음을 확인한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 아니, 자신이 그 사람이라고 말하는 미친 인간이 있었다. 그편이 더욱 진실에 가까웠다. 지한은 그렇게 생각했다.
*
분명 그날은 이상한 날이었다고 기억한다. 전에 없었던 방문이었다. 민한이 갑자기 자신을 찾아온다거나 하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혹 볼일이 있어도 전화로 어렵게 약속을 정하고 찾아오고는 했다. 그래봤자 대부분이 집안의 대소사와 관련된 일들이었다. 지한이 집을 들락거리는 것을 꺼리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신이 찾아오는 것이었다. 그것이 배려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지한은 동생에게 그런 전화가 올 때마다 항상 차갑게 대했다.
-무슨 일이야?
지한의 물음에도 민한은 우두커니 있었다. 늘 헤프던 웃음도 없었다.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떠올려 보면, 그날 여러 가지로 이상한 징후가 많았다.
-너 술 마셨어?
놀라움이 가시자 은근한 짜증이 피부 위로 드러났다. 그는 애써 감정을 감추지도 않은 채 한밤중의 불청객을 쓰윽 훑어보았다. 문밖, 어스름한 빛 속에 서 있는 민한의 얼굴의 표정이 확실하진 않았지만 눈가에 붉은 기운이 돌았다. 그리고 얼핏 풍기는 알코올냄새.
-조금.
민한은 선선히 인정했다. 하지만 짧은 말끝에 따라온 옅은 웃음은 전과 같지 않았다.
-일부러 술주정 하러 온건 아닐 테고······.
-…….
-일단 들어와.
이상하다 생각하면서도 부러 걱정의 말을 하지는 않았다. 대신 차갑게 조소하며 안으로 들어왔다.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뒤따르는 기척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만 의문을 떠올릴 뿐. 최소한 쫓아내지 않은 것으로 되었다 생각했다.
지한이 주방에서 차가운 물을 가지고 돌아올 때까지 민한은 거실에 서 있었다. 그의 모습은 앉을 자리를 몰라 헤매는 어린아이 같았다. 그의 옆에는 충분히 넉넉한 소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허둥대던 시선이 지한과 마주쳤다. 마치 절벽위에 서 있는 사람의 얼굴과 같았다. 술주정을 이상하게 한다, 라고 생각하기에 너무나 이상했다. 이상한 얼굴이었다.
-왜 그래? 뭐 문제 있어?
결국 놀라서 물어볼 정도로. 약간은 걱정하는 마음도 들었다. 그러나 민한은 그의 질문에 대한 대답대신 엉뚱한 소릴 했다.
-축하한다고 말하려고 왔는데, 깜빡했어.
-뭘?
-약혼 말야.
약혼이라고 해도 그리 거창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절차 일뿐이었다. 이미 양가의 공인된 사이가 된지 오래이며, 민한도 형의 연인과는 이미 오래전에 안면을 텄다. 가끔 자신도 모르게 전화까지 주고받는 사이라고 해서 놀란 적도 있었다. 이미 가족으로 인정받고 있는 여자와의 약혼식은 그저 절차일 뿐이었다.
-새삼스럽게 축하는 무슨.
-그 여자가 그렇게 좋아?
-좋아해. 좋아하지 않는 여자랑 결혼할 리가 있겠어?
너무나 당연한 얘길 하라 하니 기가 막혔다. 지한은 다시 한 번 민한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그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그는 지한의 시선이 자신을 따라오자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테이블 위에 놓인 물 잔을 바라보는 녀석의 얼굴은 알 수 없는 상념에 젖어 있었다.
-부럽다.
-……부러우면 너도 결혼을 하던가.
결혼이란 말을 담으면서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동생은 결혼을 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할 수 없을 것이란 표현이 정확한지도. 지한은 어렴풋 동생의 성적 취향에 대해 알고 있었다. 알게 된 것은 사실 더 오래전일지도 모르겠지만 애써 그것을 동생이 게이란 사실과 결부 시키지 않았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경멸이나 혐오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로.
-아냐. 그런 게 아냐.
-그럼 뭔데?
민한이 자신에게 시비를 걸려고 하는 얘기가 아님은 알았다. 아무리 취했어도 그는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난 형이 그렇게 망설이지 않고 말할 줄은 몰랐어. 형 같은 사람이…….
어떤 원망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원망? 물론 자신은 좋은 형이 아니었다. 스스로의 생각에도 나쁜 형이었다. 그러나 동생에게서 느껴지는 원망은 ‘형’에게 향한 것이 아니었다. 민한은 말끝을 흐리는 것과 동시에 표정 또한 지워가고 있었다.
-취했나 본데, 오늘은 그냥 여기서 자고 갈래?
결단코 그런 생각이 없었지만, 지한은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거라 생각했다. 아무리 야박한 사람이라도 이런 상태의 가족을 내보낼 순 없는 것이었다.
-나 멀쩡해. 마시긴 했지만, 그렇게 많이 마신 것도 아냐.
-알았으니까, 나중에 얘기 하고…….
-나중에 언제? 언제 형이 내 얘길 들어준 적이 있나?
-…….
-없잖아. 그렇잖아.
비난이라기보다는 사실이었다. 지한은 그의 젖어서 힘없는 목소리에 찔린 듯 가슴이 뜨끔했다. 표정을 찌푸린 것은 자신이 느낀 감정을 숨기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그런 이유 때문이기도 했다. 민한은 상대의 변화와 상관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나한테는 한 번도 다정한 적이 없지. 따듯한 눈길조차 주지 않았어. 그런데 난 왜 형을 미워할 수가 없을까.
내내 같은 자리를 지키던 그가 조금씩 다가왔다. 기분 탓인지 도망치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형이 이렇게 좋을까.
지한도 인간인지라 동생을 내내 미워하는 일은 힘겨웠다. 가끔 흔들린다. 빼곡한 마음에도 틈이 생긴다. 그럴 수밖에 없도록 민한은 한결같았다. 자신이 어떤 말을 해도 돌아서면 웃어주었고 상냥한 말들을 건넸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은, 좋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니 그보다 더 힘든 일이었다.
죄책감 따위 느끼지 마.
지한은 스스로에게 말했다. 기도처럼 간곡하게. 그런 감정 따위 자신에게는 하등의 도움도 안 된다. 어차피 동생은 자신보다 많은 것을 가졌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모두 가졌다. 남의 몫까지 혼자서 독차지 한 녀석이었다. 그것이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더라도 지한에게는 고통이었으며 슬픔이었다.
-헛소리 그만하고 돌아가. 멀쩡하다니까, 혼자 갈 수 있지?
두통이 밀려오는 머리를 가볍게 저으며 몸을 돌렸다. 이정도면 술주정은 충분히 들어주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민한의 생각은 달랐는지, 그는 방으로 들어가려던 지한을 붙잡았다.
-뭐하는 거야, 너. 이거 안 놔?
지한은 처음엔 무슨 짓인가 싶어 화가 났지만 다음에는 붙잡힌 손아귀가 의외로 단단해서 놀랐다. 힘껏 흔들어 뿌리치려 했지만 상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지한은 경악과 불쾌함을 두 눈 그대로 드러내며 입술을 깨물었다. 분노에 몸이 떨렸다.
팔을 잡은 손은 억세었으나 표정은 여전히 힘이 없고 흐릿했다. 그의 얼굴에 점점 선명해지는 감정은 한가지뿐이었다. 짙은 슬픔이었다. 원망이라기보다는 안타까움이라기보다는 그냥 슬픔일 뿐이었다.
-나 한 번도 형을 미워한 적은 없지만 죽여 버리고 싶단 생각은 했었어.
-뭐?
-형을 죽여 버리면 내 마음도 죽어버리지 않을까, 생각했거든.
차분한 음성에 어울리지 않는 놀라운 고백이었다. 하지만 차라리 그쪽은 현실성이 있었다. 다음에 이어진 고백은 현실과 멀었다. 너무나 멀어서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가능성을 떠올리지도 않았던 것을.
-사랑해. 형.
민한이 끌어당기는 손을 즉시 뿌리치지 못한 것은 그 현실성이 결여된 말 때문이었다. 끌어안은 팔의 필사적인 기운 때문이었다. 귓가에 닿는 숨결은 꿈이라기에 너무 뜨겁고 절박했다.
-사랑해. 내가 그 여자보다 형을 훨씬 더 사랑해.
지한은 그런 고백을 들은 적도, 해본적도 없었다. 그렇게 절절하고 깊은 고백을. 하지만 그래서 감동을 받았느냐면, 전혀 아니었다. 감동보다는 머리위로 얼음물이 쏟아진 차가운 충격만이 격렬하게 일어났다. 지한은 손끝에 힘이 돌아오자 그를 즉시 밀쳤다. 그리고 균형을 잡기도 전에 뺨을 때렸다.
-철썩.
살벌한 소리가 크게 거실을 울렸다. 장신의 몸이 휘청거리다 결국 바닥으로 쓰러졌다.
-미쳤어, 너?
그것은 정신 차리라는 의미였다. 아니, 정신을 차리고 싶은 것은 차라리 자신이었다. 오히려 쓰러져 있는 민한은, 동생은 멀쩡한 표정이었다. 오히려 좀 전보다 선명해진 눈빛이 지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친 거야, 너. 아니면 술에 취했거나…….
-미친 건 맞을 지도 모르지만 술에 취한건 아냐. 진심이야. 형도 알고 있잖아?
-몰라. 난 그런 거 알고 싶지도 않아!
민한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지한은 자신도 모르게 한발자국 물러나고 말았다. 말로는 독하게 쏘아 붙이고 있지만 실은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그는 동생이 낯설고 무서웠다.
미지의 괴물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그 괴물이 자신을 해칠지 어떨지는 알 수 없지만, 본 적 없는 모습을 한 생명체이므로 그저 막연히 두려운 마음이 드는 것이었다. 이런 기분이 들었던 것은 처음이었다. 처음? 아니, 정말 처음인가? 오래전에도 이런 순간이 한 번, 아니 몇 번 있었던 것 같은데…….
-나는 오래 전부터 형의 방에서 자위를 했어.
민한의 말과 동시에 어떤 장면이 드문드문 눈앞을 스쳤다. 하지만 워낙 짧고 흐릿해서 제대로 이어지진 않았다. 이건 제대로 된 기억이라 할 수 없었다. 그런 걸 내가 어떻게…….
-기억 안 나? 형, 그때 보고 있었잖아?
지한의 의지와 달리 머리는 멋대로 어떤 기억을, 기억인지 백일몽인지 모를 화면을 재생시켰다. 문틈 사이로 보였다. 중학생이었던 민한이 침대에 누워있었다. 하지만 그곳은 자신의 방이었다. 지금은 지한의 머리를 웃도는 키였지만 그땐 아직 작았던 동생이었다. 아직은 어린소년 같은, 청년이란 말보다 소년이 어울리는.
소년이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미간사이에 모아진 주름,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흔들리는 어깨, 이상하게 뜨거운 열기. 괴로운 듯, 황홀한 듯. 뭘 하는 걸까? 자세히 보기 위해 문을 더욱 크게 열었다. 민한의 손이 쥐고 있는 것은 자신이 벗어놓은 셔츠였다. 나머지 손은 사타구니에 깊숙이 들어가 있었다. 절정을 향해가는 숨소리가 더욱 크게 귓전에서 울렸다.
-내가 형의 침대에 사타구니를 처박고 발정하던 거, 봤잖아?
보았다. 하지만, 꿈이라고 생각했다. 불쾌한 꿈을 꾸었다고. 당연히 그건 꿈이어야 했다. 그런데 왜 이 녀석이 내 꿈을 알고 있는 거지?
-안……봤어. 그런 거 몰라. 헛소리 작작해. 너, 아무리 그래도 난 니 친형이야. 니가 호모건 변태건 상관 안 해. 그렇지만 왜, 왜 하필이면 날 좋아한다는 거야?
-잘 알아. 우린 친형제가 맞아. 빌어먹게 잘 알고 있지. 비록 반밖에 섞이지 않아서 형은 날 사랑하지 않지만…….
-그만해. 그만하라니까!
지한은 그것이 진짜든 아니든, 이젠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았다. 말을 하는 그의 입술이 파들파들 떨렸다. 오히려 맞아서 뺨이 붉게 물든 민한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높이 턱을 들고 눈을 들어 지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차라리 남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남이었으면 적어도 이렇게 미움 받는 일은 없었을 거야. 그렇지?
-천만에 난 네가 싫어. 내가 널 싫어하는 건 네가 그냥 ‘윤민한’ 이기 때문이야. 누구의 탓도 아니고, 니 탓이라구!
억울하다고 말한다고 하는 수 없었다. 윤민한이 아무리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라고 해도 자신에게만은 나쁜 사람이었다. 좋아할 수 없는 존재였다. 미워해야만 하는 존재였다. 지한은 그렇게 해야 한다고, 수없이 외쳤다. 그 일에 의심은 없었다. 망설임도 없어야 했다.
-난 널 증오해. 경멸해. 니가 헛소리를 하고 있는 지금은 더욱더 싫어 졌어.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더럽고 끔찍해.
입 밖으로 독을 토해낸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시야는 어지럽게 뒤틀렸다. 차라리 시선을 피했다. 괴로워야 할 사람은 민한인지도 모른다. 경멸과 모멸 섞인 날선 말에 여과 없이 상처 받고 차가운 눈빛에 슬퍼해야 할 사람은 그였다. 그런데 지한은 가슴에 치받치는 격렬한 통증을 느꼈다.
-아마 남이었더라도 싫었을 거다. 그것만은 분명해!
고요했다. 태풍이 지난 폐허처럼, 어둠이 걷힌 새벽처럼. 지한은 감은 눈을 천천히 떴다. 눈을 감았다 뜨면 다른 곳, 혹은 다른 시간에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자신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민한도. 지한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처참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바라고 눈을 들었지만 거기엔 여전한 표정이 있었다. 고요하게 가라앉은 눈이 지한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알고 있어. 형 예전부터 나한테 그렇게 말했지. 내가 ‘윤민한’ 이기 때문에. 그래서 날 싫어한다고 했었지?
아니 정말 여전한 것이었을까. 아무렇지도 않았던 걸까. 사실 그의 조용한 눈 속에 이는 폭풍을 그저 보지 못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지한은 수없이 그날을 수없이 시뮬레이션 했다. 그날, 자신이 조금만 더 침착했더라면, 그래서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후회가 덜했을까. 동생의 악몽에 시달리며 밤을 지새우는 일은 없었을까.
-하지만, 어쩔 수 없어. 나도 똑같거든. 나도 형이기 때문이야. 형 말대로라면 내가 형을 좋아하는 건 형 탓이잖아.
기억 속 민한의 말처럼,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수없이 반복해도 자신은 똑같이 말했을 것이다. 똑같이 잔인했을 것이다.
-이건 죽어도 안 끝날 거야. 난 아마 죽어서도 형을 좋아 할 거야.
보이지 않는 저편에서 처참하고 비참하게 스러진 채로, 그래도 그는 웃고 있었다. 그것은 고백이 아닌 예언이 되어 버렸다.
*
처음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옷이 벗겨지고 타인의 손이 닿아도 지한은 한동안 아무런 감각도 느끼지 못하는 공황에 빠져 있었다. 너무 많은 일이, 많은 감정이 한꺼번에 그를 덮쳤기 때문이었다. 감정이 포화에 이르러 겨우 다시 비워졌을 때에야 눈앞에 무언가 보이기 시작했다. 헐벗은 몸 위로 느껴지는 축축한 감각을 알았다. 그것은 목덜미며 어깨, 가슴, 허리와 복부, 무릎과 허벅지와 그 안쪽의 은밀한 곳까지 들어서려 하고 있었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허리를 비틀며 몸 위에서 느껴지는 소름끼치는 감각에 치를 떨었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알 수 없는 얼굴을 한 남자가.
“형이 나를 증오한다고, 끔찍하다고 말했을 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
이후는 여전히 자신을 ‘형’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는 느긋하게 뺨을 핥으며 사타구니 사이를 더듬었다. 속옷위로 느껴지는 노골적인 촉감에 흠칫 놀라 버둥거리는 사이 뺨에 번쩍 불이 일었다. 뺨을 맞았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태연하게. 그러나 지한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아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 얄미운 얼굴을 한 대 치고 싶다고 생각했어.”
입가가 터졌는지 입안에서 비릿한 맛이 느껴졌다. 놀라 벌어진 입술위로 남자가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그리고 당장 형의 다리를 벌리고 내걸 쑤셔 넣고 싶다고 생각했지. 그렇게라도 하고 싶었어. 어차피……. 어차피 내 것이 되어주지 않을 텐데 더 이상 참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상냥하고, 또는 부드럽게 속삭인 입술이 키스를 했다. 입술을 빨고 핥는 힘이 강하고 집요했다. 굳어있는 혀를 희롱하고 입천장을 긁듯이 돌아다녔다. 입술뿐만 아니라 입술 안까지 아프고 쓰라릴 정도였다.
아플 정도의 키스는 다른 곳에도 이어졌다. 얼굴을 돌아다니고 목을 남김없이 빨던 입술이 아래로 내려가 미묘한 곳을 건드렸다. 가슴의 돌기를 핥는 뜨거운 혀의 느낌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낯설고 기묘한 감각을 피하려는 몸을 더욱 단단히 끌어 당겼다. 묶인 손은 무력하고 다리는 몸에서 절단된 듯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무슨 짓을, 읏, 아……!”
더는 물을 필요 없이 앞으로의 일은 선명해 졌다. 팔은 묶인 채이며 다리 사이로 들어오는 손을 밀쳐낼 힘도 없었다. 절망보다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 현실에 아연한 채였다. 겨우 현실로 받아들이게 된 것은 그의 손이 다리를 벌리고 허리를 들이밀었을 때였다. 아직 벗지 않았음에도 그의 욕망은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것이 뜻하는 바를 알 수 있었다.
“하지 마. 안 돼…….”
달아나지 못하고 그저 제자리에서 버둥거리는 초라한 두 다리를 간단히 제압했다. 그는 옷을 모두 벗지 않고 자신의 하의만을 끌어냈다. 바지와 속옷을 한꺼번에 끌어내자 발기한 페니스가 툭하니 불거져 나왔다. 이질적이고 두려운 광경이었다. 분명 자신에게도 있는 것이지만 그것은 살덩어리가 아닌 흉측한 무기로 보였으니까. 지한은 숨을 삼켰다. 삼킨 숨은 오랫동안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후의 모든 행동에 망설임이 없었다. 오직 이 순간만을 오래도록 공모하고 기다려 왔던 사람처럼. 그 순간에도 그것이 김이후 본인인지 알 수 없었다. 믿는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 모든 상황이 이미 믿을 수 없게 되어 있지 않은가.
“왜, 안 돼?”
지한의 사타구니 사이를 애무하듯 내내 향해 있던 시선이 잠깐 위로 향했다. 눈빛이 한층 어두워져 있었다. 그러나 입가의 웃음은 흥분에 물들어 있었다. 다리가 더욱 크게 벌어지고 곧바로 높이 들려졌다. 남아있던 속옷마저 끌어내지고 그 위에 찌를 듯 다가온 타인의 성기가 닿았다. 맨 허벅지에 닿은 생생한 페니스의 느낌에 온 피부가 긴장했다. 허벅지 안쪽을 비벼대던 페니스가 더욱 안으로 들어왔다. 정확히 그것은 둔부 사이를, 항문을 향해 있었다.
“……!”
무언가 말을 담으려 했던 입술이 벌어진 채 그대로 굳었다. 애원의 말을 담으려 했는지, 욕을 하려 했는지도 잊었다. 닿았다 생각할 사이도 없이 그대로 꿰뚫고 들어왔다. 모두 들어오지 않았지만 지한이 그것을 알리는 없었다. 조금 들어온 것만으로도 준비 없는 곳은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잘 되잖아.”
다소 억눌린 음성이 짧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더욱 안으로 밀고 들어오려 했다. 투둑. 살이 찢기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지만 지한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아악!”
그는 뒤늦게, 그러나 여전히 고통스러운 채 겨우 짧은 비명을 내뱉었다. 아픔보다 더한 충격에 견디지 못한 비명이 지한의 가슴을 찢고 나오고 있었다. 남자는 들리는 소리를 묵인한 채 자신의 욕망에 의해 움직였다. 허리를 더욱 깊이 밀고 들어오며 아픔에 힘을 주고 버티는 다리를 더욱 단단히 붙잡아 올렸다.
“그만, 으흑…읏, 아, 아……!”
묶인 손을 미친 듯이 흔들고 몸을 빼려 했지만 이미 단단히 쐐기가 박힌 채였다. 내벽의 근육이 세차게 저항하고 있음에도 그것은 더욱 깊숙이 들어왔다.
“그만해. 제발, 윽…….”
생살을 찢고 들어오는 타인의 성기는 섹스가 아닌 폭력을 휘두르는 것 같았다. 아픔과 충격에 악문 이사이로 울음이 나올 것 같은 것을 가까스로 참으며 눈을 감았다. 이건 꿈이야. 꿈인 게 분명해. 신음사이로, 괴로운 숨 사이로, 지한은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그런 생각이라도 떠올리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억지로 들어온 살덩어리는 그럼에도 여전히 욕심을 채우지 못한 채였다. 남자는 몇 번이고 안으로 들어오고 빠져나갔다 들어오길 반복했다. 반복되는 폭력에 지한의 몸은 급기야 체념하고 힘을 잃어 갔다. 의지의 문제라기보다는 생리적 포기였다. 너무 갑작스럽고 강한 충격은 그를 단숨에 기절시켰다. 다만 몸이 먼저였고 여전히 정신은 살아 있었다. 차라리 기절하고 싶었다. 잠들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은 이런 순간조차 쉽게 잠들지 못했다.
퍽퍽, 소리가 날 정도로 허리를 강하게 쳐 올렸다. 흔들리는 몸을 끌어 안에 더욱 결합이 깊어지도록 했다. 그러면서도 간혹 허리를 굽히고 몸을 바짝 붙여 입술을 먹어치울 듯 물어뜯고 빨아대기도 했다. 그것은 키스라기엔 이미 너무 깊고 농밀한 애무로 변해 있었다. 그조차 지한은 체념한 채 바라보아야만 했다. 자신의 몸이 기형적으로 변하고 형편없이 해체되는 가운데도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었다. 비명을 지르다 못해 쉬어 버린 목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녹슨 관에서 흘러나오는 바람소리 같은 숨소리만이 쌕쌕 흘러나왔다.
뱃속에 그의 성기가 들어왔다 나가는 감각이 계속해서 느껴졌다. 토할 것 같단 생각이 들었으나 입에서 토해지는 것은 마르고 뜨거운 숨결뿐이었다. 이미 자신의 몸은 땀과 알 수 없는 액체들로 젖어 갔다. 힘을 잃고 마른 풀처럼 늘어져 흔들리는 대로 흔들렸다. 지한은 눈앞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으나 이젠 표정조차 눈 안에 들어오지 않았다. 눈을 뜨고 있음에도 모든 것이 암흑이었다.
밑은 이미 감각이 무뎌져 있었다. 터져 흘러나온 피는 굳고 흐르길 반복했다. 오직 지한을 범하고 있는 남자만이 여전히 욕망을 죽이지 못하고 그곳을 부지런히 오갔다. 그는 이미 몇 번인가 안에 자신의 욕망을 풀어낸 후였다. 사정을 하고도 수그러질 줄 모르는 욕망은 이미 저항과 생각을 포기한 몸을 다시금 찾아들었다.
미끄러지는 다리를 붙잡아 벌리고, 피와 정액이 묻어 흉흉한 물건이 몇 번이고 몸을 가르고 들어왔다. ‘스윽, 스윽’ 피부가 닿으며 나는 소리가 마치 자신의 뼈를 베어내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 정도로 고통은 길고 질겼다. 어떤 수치나 모멸감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지한은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재는 일조차 관두었다.
“이렇게 쉬운데…….”
격렬한 운동으로 지친 목소리가 말했다. 그럼에도 그는 추삽질을 멈추지 않은 채였다. 그는 힘없이 밀려나려는 허리를 단단히 붙잡고 지한의 몸으로 더욱 몸을 가까이 가져갔다. 빠져나가려는 정신을 겨우 붙잡고 있는 게 전부인 귓속으로 그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하지만 느리고 띄엄띄엄 이어진 말은 뜻을 알 수 없었다. 열고 있는 눈조차 닫은 지한에게 하물며 말이 제대로 들어 올리는 없었다.
“고작 이렇게 쉬운 걸 왜…왜 못한 거야.”
분명한 건 아는 목소리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낯선 음성이었다. 낯설고 먼 목소리. 차라리 뱃속에서 꿈틀대는 욕망은 더욱 리얼했다. 그것만이 진짜. 그것만이 꿈이라 치부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
“결국 저질렀군.”
죽은 듯 늘어진 몸을 바라보며 이후는 담배를 입술에 찔러 넣듯 물었다. 잠든 얼굴은 창백했고 여전히 희미한 경련을 머금은 채였다. 헐벗고 여윈 몸은 체액과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끔찍해야 할 광경을 그는 조금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애틋함까지 느껴질 정도의 눈빛이었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일 생각도 잊고 얼룩진 시트에 몸을 웅크린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만져보았다. 엎드려 반밖에 보이지 않는 뺨과 바짝 구부린 목과 어깨, 마른 등을 천천히 내려오다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는 문득 고개를 들어 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해 웃었다.
“만족했어?”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그저 새벽의 푸른 어둠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 누군가 있다는 듯 바라보고 말하고 있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만족하지 못했다고? 이런…….”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마침내 필터 끝에 불을 붙이고 연기를 빨아 들였다. 연기가 흘러가는 곳을 향해 그는 또 말한다.
“하아. 귀신 주제에 너무 질긴 거 아냐? 그래, 좋아.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이후는 마지막 한 모금을 달게 빨아들이곤 재떨이에 필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여전히 깨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손을 뻗었다. 젖은 머리를 쓸어 올리고 뺨을 건드렸다. 애틋하게, 안타깝게, 감격스럽게.
“나도 이 사람이, 마음에 들거든.”
마른 입술위에 천천히 입술을 가져갔다. 눈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 무엇을 향한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