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3/25)

<22>

“벌써 며칠 째 잠을 설치시는 겁니까.”

“잠이 오지 않아.”

딱 잘라 말하는 황제에게 로빈은 눈썹을 찡그릴 뿐이었다. 

현재 후안과 로빈이 있는 곳은 알스의 국경지대였다. 

후안이 파혼과 동시에 황제의 직위를 포기하겠다는 

어마어마한 발표를 한 후 벌써 일주일째였다. 

그길로 성을 나서는 후안을 재빨리 로빈이 뒤따랐다.

[얼마간 자리를 비웠다고 잊으신 겁니까? 저는 폐하의 호위기사입니다.]

덕분에 생긴 든든한 아군덕에 두어번쯤 마주쳤던 

암살자들의 위협을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암살자들의 위험이 거의 없는 이 먼곳까지 와서도 

후안은 하루도 마음 편히 잠이 드는 일이 없었다.

창문을 열며 로빈이 입을 열었다.

“이제 곧 도착인데, 

갑자기 쓰러져버리거나 하시면 곤란하다구요~ 폐하."

그 말에 후안은 작게 웃음을 지었다. 

창문 밖으로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로빈이 미소지었다.

“참 신기하군요. 

며칠전까진 겨울이었는데... 점점 날씨가 따뜻해져가고 있어요.”

알스로- 향하는 길은 봄이 오는 길 같았다. 

매섭던 바람이 시원해지고 

새하얀 눈도 보이지 않는 봄을 찾아오는 길. 

사리엘과 같이 향했던 그때에도 이 신기한 변화에 즐거웠던 것이 기억난다.

“폐하도 예전에 알스에 방문 하신 적이 있으셨죠?”

“으음.”

“하하, 저는... 너무 아름다운 나라라 놀랐어요.”

후안은 조용히 오래전의 그때를 떠올려 보았다. 

황태자로 알스로 방문했을 그때 

후안의 기억에 남았던 건 오직 한 사람이었다. 

어머니처럼 샛노란 금빛의 머리카락을 가진 아름다운 왕자. 

황제가 되어서도 잊지 못했던 남자. 

하지만...

지금은.

그의 얼굴이 생각나지 않는다.

알스의 봄빛을 받으며 웃고 있는 그가 아니라... 

제국의 눈 속에서 울고 있는 녀석이 생각난다. 

흔들리는 까만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며 

꿋꿋이 시선을 돌리지 않는 그 녀석이 생각난다.

당장이라도-

안고싶어.

당장이라도....

입을 맞추고 싶어.

할수만 있다면

... 

..........너를 사랑하고 싶어.

후안은 왼 손을 입가로 가져갔다. 

그의 네 번째 손가락엔 붉은 루비의 반지가 빛나고 있었다. 

사랑합니다, 라는 작은 글자가 새겨진 루비의 반지. 

반지에 입을 맞추며 후안은 눈을 감았다.

<< 반려로 맞아주세요 >>

“슈!!”

알스의 왕과 왕비에게 인사를 하던 이안의 눈에 한 남자가 보였다.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 

그래...  슈엘과 똑 닮은 저 자는 분명...

“이... 망할 자식!!!!”

-알스의 황태자. 쥬엘이다. 

대뜸 자신에게 주먹을 날리는 쥬엘을 바라보니 

그의 얼굴은 이미 장난이 아니다. 

그야말로 슈엘의 거친 사나이버젼인 그는 

목이라도 조를 듯 이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야-이!!! 이안, 이 빌어먹을 녀석아!”

“... 왕자주제에 그 거침없는 말투는 여전하군요.”

“딴 소리 하지마.”

쥬엘의 손이 슈엘을 가르켰다.

“어째서 슈를 데리고 온거야!!!”

쥬엘의 머릿속엔... 

일 년 전 알스를 떠나던 슈엘이 떠올려졌다. 

덩치에 안맞게 아이처럼 선한 눈매를 가진 

착한 세 번째 동생. 

밤의 반려로 떠나는 것임에도 

수줍게 웃으며 알스를 떠났었다.

...알아?!

그건... 

이 둔한 내가 봐도. 

알 수 있을정도로 사랑을 담은 눈이었어.

그런 녀석이었는데...

어째서 저렇게 변해버린거냐.

애정밖에는 장점이 없던 저 녀석이 어째서 저렇게 

메마른 표정을 짓고 있는거냐고-.

쥬엘의 얼굴에 이안은 씁쓸히 웃었다.

“... 할수 없잖아요.

반려님이... 원했으니까.“

“... ....”

이안의 멱살을 잡은 쥬엘의 손이 떨어져나갔다. 

언제나 강경하던 까만 눈동자 가득 안타까움이 머물렀다. 

그는 슈엘에게 다가갔다. 

오랜만에 만난 어머님의 품에 안겨있던 

슈엘이 쥬엘을 바라보았다.

“...혀엉...”

“돌아오지 말라고 했잖아!”

“... ...”

“어떤 일이 생겨도! 절대 돌아와선 안된다고 말했잖아!”

“... ...”

-넌.

그곳에서 행복해져야 했다고...

이 바보야.

거친 말투지만 그 속의 사랑을 

슈엘은 알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형에게 싱긋이 웃어주고 싶지만 

웃는 방법이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이 아니면... 살아갈 수 없어.”

심장이 너무 차갑게 얼어버려서...

제국의 추운 겨울을 견딜수 없어. 

이제는...

작은 공국인 알스는 봄의 나라였다. 

4계절 내내 봄인 곳. 

아름다운 바다가 가까이에 있는 하얀 성은 알스의 자랑이었다. 

따뜻한 햇볕을 맞으며 슈엘은 누워있었다. 

아무도 없는 잔디밭에 누워 슈엘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파-란 하늘. 

바다와 같은 색을 가진 아름다운 하늘. 

바다의 향기. 

봄의 바람. 

나의 고국... 알스. 

몇 번이고 다시 오고 싶었던 곳.

“뭐해?”

쓱- 하고 파란 하늘을 가려버리는 

낯익은 얼굴에 슈엘이 대답했다.

“ 하늘을 보고 있답니다.”

“흐음-.”

슈엘의 옆자리에 털썩 누우며 이안이 말했다.

“알스는 언제와도 날씨가 좋군!”

“... ...”

“과연, 네가 자란 곳 다워.”

이곳은 너를 꼭 닮았어, 반려님. 

여전히 하늘만 멍하니 바라보며 슈엘이 물었다.

“멜은...”

“살아있을거야. 분명.”

알스의 국왕께 도움을 요청해 사람을 보냈지만... 

이미 그 곳엔 아무도 없었다고 했다. 

사람도... 시체도-. 

제길. 그런 말을 해놓고, 

그런 얼굴을 해 놓고 멋대로 날 위해 죽는 것 따위 

내 쪽에서 사양이다. 

절대로 찾아내서 제대로... 

네 이름을 불러주겠어.

네게 만큼은 빚같은거, 절대 지고싶지 않으니까.

"... ..."

두 사람 사이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바람소리만 가득한 그곳에서 침묵을 먼저 깨뜨린 건 이안이었다.

“...  이젠. 웃지 않을거야?”

“예?”

“반려님. 마지막으로 웃은게 언제였는지 기억해?”

“... ...”

생각을 더듬어 보지만 기억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웃었던 건... ... 언제였지? 

기억나지 않아. 

웃는 방법조차...이제는 기억나지 않아. 

하하하. 정말 바보가 되버렸구나, 슈. 

그렇게 연습했던 것 조차도 잊어버리고.

“난 니가 웃었으면 좋겠어.”

“... ....”

“나를... 바라보지 않아도 되니까 

조금이라도 웃어줬으면 좋겠어.”

슈엘의 까만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내 떠오르는 그의 얼굴을 생각하자 가슴이 아파왔다.

웃음을 보고싶었어요, 나도. 

그의 웃음을 조금이라도 보고싶었어요. 

선홍의 눈동자를 담은 그의 눈동자가 작게 휘어질때면 

눈물이 나올정도로 가슴이 설레였으니까. 

-사랑이. 

점점. 

커져갔으니까... 

하지만. 이제 그 웃음은 볼 수 없어..

이제는... 

“자, 이렇게-.”

씨이익- 웃어보이는 이안을 바라보며 

슈엘은 손바닥 가득 사람의 온기를 느꼈다. 

슬픔에 젖어있는 까만 눈동자를 향해 이안이 웃고 있었다.

“조금씩, 조금씩. 웃음을 되찾자.”

“... ....”

“반려님, 분명. ...다시 사랑을 할 수 있을거야.”

“-당연하지!”

불쑥, 하고 이안과 슈엘의 

위로 나타난 얼굴은 쥬엘이었다. 

슈엘과 쌍둥이처럼 닮았지만 

좀더 키가 크고 사납게 생긴 이, 황태자는 이안을 쏘아보았다. 

그는 이안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런 뻔뻔스러운 타입도 타입이지만, 

제국의 왕자가 아니던가! 

흥... 내 소중한 동생들을 아프게한 

왕가 따위 누가 환영할 줄 알고! 

그의 따가운 시선을 능청스럽게 피하며 이안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히야- 그런데 성 안에 나무가 정말 많네요.”

성안 가득한 나무에 감탄을 내뱉는 

이안을 보며 쥬엘이 말을 내뱉었다.

“다 내가 키운 거야. 보지도마!”

“... 어린앱니까?”

“이!!!!”

금세 화를 내는 아이 같은 황태자의 시선을 피하며 

이안이 나무를 바라보았다. 

“전부터 궁금했는데 이 나무... 무슨 나무죠?”

“-벚꽃나무.”

그러보니 전에 이 무능력하고 안하무인인 녀석이 

왔을 땐 벚꽃이 피지 않는 계절이었군. 

미간의 주름을 지우며 쥬엘이 나무를 매만졌다. 

신경질적이고 터프한 그지만 그역시 

어쩔 수 없는 알스의 왕자였다. 

소소한 것을 사랑하는 알스의 왕자-.

“정말 아름다운 꽃나무야. 뭐, 너에겐 과분하겠지만 보여줄게.”

“흐음? 아직 꽃이 피려면 먼 것 같은데요?”

“한순간이야.”

“... ...”

“온 하늘을 뒤덮을 만큼의 하얀 꽃이 만발하는 건 눈깜짝할 새지.”

마치. 마술처럼 말이야.

다정한 눈으로 나무를 바라보는 쥬엘을 향해 

이안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눈 깜짝 할 새에 한순간 피는 꽃나무라...

“아아- 그건 마치... 사랑 같군요.”

“... ...”

“사랑을. 닮은 나무라... 음- 멋지네요.”

나무를 바라보는 이안을 쥬엘은 

아무 말 없이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한대 쥐여밖아 

제국으로 돌려보내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잖아.

-그런 표정을 지으면-.

작게 한 숨을 내쉬며 쥬엘은 작게 말을 내뱉었다.

"사랑을 빠진 남자를... 미워할 정도로 

악마는 되지 못한다고-."

******

어두운 밤. 슈엘은 잠들어 있었다.

알스에 온 후에도 슈엘의 잠은 줄어들지 않았다. 

하루의 대부분, 슈엘은 잠을 자곤 했다. 

몸을 둥글게 말고 어린아이처럼. 

들키지 않게 몰래 숨어버린 아이처럼 

조용히 잠이 들곤 했다.  

차갑고 무섭고- 

하지만... 다정한 심홍의 눈동자. 

새하얀 눈이 내리는 하늘에 그가 서 있다. 

새빨간 머리카락이 하얀 눈 속에 아름답게 빛난다. 

그가 웃는 순간 슈엘은 그에게 달려간다.

[후안님!]

그러나 손을 뻗는 순간... 그가 등을 돌린다. 

다시 한번 외쳐보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그의 품에 안긴 여자를 보는 순간 슈엘은 눈을 떴다. 

“하아... 하아...”

슈엘은 황급히 침대를 내려와 창문앞에 섰다. 

창 밖으로 보이는 

노란 달을 바라보며 손을 내밀어 보았다. 

밤바람이 부는 창밖의 손엔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새하얀 눈...  

이곳엔. 내리지 않아. 

그건 꿈이야.

꿈.

..꿈.

-그는. 내 곁에 . 없어.

“흐........윽.......”

눈물은 이제 말랐다고 생각했다.

사랑이 말랐으니까.

웃음이 말랐으니까.

눈물도 이제 말랐을 거라 그렇게 생각했는데...

“흐으.......으아......흐흑..... 아아아.!!”

-눈물만큼은 사라지지 않았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이 새까만. 

나의 속에...

아직 눈물만큼은

...남아 있었다.

아침이 훨 씬 지나서야 슈엘은 눈을 떴다. 

꿈을...꾸었다. 

제국을 떠난 후부터 하루도 빠짐없는 후안님의 꿈. 

매일매일 그는 꿈속에서 웃고 있었다. 

아마도 평생 보지 못할 미소. 

그런데... 그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언제나 그의 곁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오늘 만큼은

그의 곁엔 아무도 없었다.

오직.

나만이 그 미소를 바라보고 있었다.

“덕분에.. 늦잠을 자버렸지만.”

하얀 눈위에서 분명 

내게만 웃고. 

내게만 사랑을. 주고 있었다. 

잠시동안 눈을감고 아직도 선명한 꿈속의 그를 떠올려본다. 

하지만 이 팔에 그의 온기가 없다는걸 

아는순간 심장이 멈춘다. 

울컥 눈물이 고인다.

“제발.그만좀 해!”

툭-툭 볼을 치며 슈엘은 일어났다. 

침대옆의 거울을 바라보며 

슈엘은 입술의 양 옆으로 손가락을 가져갔다. 

조심히 손가락을 올려본다. 

양 옆으로 올라가는 입꼬리. 

빙긋이- 빙긋이-  거울 속의 얼굴을 보며 슈엘이 작게 되내였다.

“웃어-.”

여전히 웃지 않는 거울을 보며 슈엘은 외쳤다.

“웃어!”

입이... 웃고 있었다. 

그제야 슈엘은 입가에서 손을 떼었다. 

마치 고정된 것처럼 빙긋이 웃고있는 입.

“행복해....야 지.”

행복해야지... 슈. 

사랑을 버렸는데..

.... 웃어야지.

슈.

그 순간 슈엘의 눈에 무언가 하얀 것이 날아들었다.

...눈?! 

아니... 눈이 아니야. 

창문을 보니 새하얀 꽃잎이 성을 가득 덮고 있었다.

“벚꽃...!”

이상하게 발걸음이 빨라졌다. 

정원으로 나가자 슈엘의 눈에 새하얀 세상이 펼쳐졌다. 

새하얀 벚...꽃... 

분홍빛을 띈 하얀 벚꽃이 온 성 가득 피어있었다. 

살랑거리는 봄바람에 하얀 벚꽃이 눈처럼 내리고 있었다.

“... ....”

하얀 벚꽃을 보면... 그가 생각난다. 

영원히 고칠수 없는 버릇처럼. 

새하얀 벚꽃이 이렇게 눈처럼 내리는 날 그를 처음 만났다. 

불꽃처럼 새빨간 머리카락이 휘날리고 있었다. 

노을을 간직한... 붉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소년. 

제국의... 황태자.

처음 본 그 순간부터 사랑에

빠진 것이다.

지독할 정도의 사랑에...

..

.....

..

뭐..

지...?

시간이... 과거로. 돌아갔...어? 

슈엘의 까만 눈동자가 커다랗게 떠졌다.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그때처럼... 

내 눈앞에 후안님이 보이는 거야?

오래전 그때처럼...

새하얀 벚꽃 속에 그가 있었다...

이건. 꿈이야...

꿈이야

꿈....

“...슈.”

꿈에서처럼 그가 웃는다. 

이제 꿈에서처럼 후안님은. 사라질거야... 

꿈에서처럼... 

“너를... 데리러 왔어.”

... 두근.

오래전에 잊고있었던...심장소리가 들려온다.

이젠. 죽어버린거라 생각했던 나의 심장이

작은.

온기를 되찾는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후안을 보며 슈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웃어.

... 웃는 연습... 언제나 했잖아.

.... 웃을 수 있었잖아.

그러니까...

그러니까............

“...........말아요......”

“날... 보지............말아요.............!!!”

두 손으로 슈엘은 얼굴을 가렸다.

웃을수가...없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아파와서 도저히. 

입꼬리를 올릴 수가 없었다.

수천 번을 연습한 그 표정을 지을 수가 없었다. 

벌벌 떨며 물러서는 슈엘을 바라보며 후안은 가슴의 지끈거림을 느꼈다.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녀석을 만나는 순간 내 품에 가두겠다고. 

도망갈수 없게 내 품에 가둔후에 입을 맞추고.

그리고.

그 까만 눈동자를 향해 고백하리라고...

하지만 날. 피할 줄은 몰랐다.

아이같은 까만 눈동자가... 날 바라봐주지 않는 다는 게

이렇게나 슬픈 일인줄 몰랐다.

심장이.

아파서.

...터질 것 같아.

한발작 한발작 다가오는 후안을 보며 

슈엘의 온 몸이 떨려왔다.

... 왜... 내게 다가오는 거예요. 

다가오면 안되잖아요.

내게 등을 돌리고... 

멀어져야 하는 거잖아요.

당신의 옆엔

다른 사람이 있어야 하는 거잖아요.

무서웠다...

눈앞에 있는... 그의 슬픈 표정이.

사랑을 담은 듯한 그 표정이 

맞닿는 그 순간 사라질까봐.

이 모든게... 다시 꿈일까봐.

도저히 그에게 다가갈 자신이 없었다.

슈엘은 등을 돌렸다. 

멀어지는 슈엘을 보는 순간 후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 처음보는 녀석의 뒷모습.

한번도, 뒷모습은 보여 준적이 없었다.

어떤 말을 해도. 어떤 상처를 줘도... 

까만 눈동자에 잔뜩 힘을 주고, 

두 손을 꾸욱 쥐고 한번도 자신에게 뒷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그 사랑을. 

이렇게 뒤늦게야 깨달은 것이다.

“...슈!”

멀어지는 슈를 아 걸음을 내 딛는 후안의 앞에 누군가 나타났다.

타오르는 붉은 머리카락.

자신과 한 핏줄임을 증명하는 너무도 닮은 얼굴.

언제나처럼 여유 있는 눈동자가 아니었다. 

필사적인 얼굴.

그가 후안의 앞을 막으며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형님-.”

******

[걱정마세요.형님]

[... ...]

아버지가 서거하시고 소년의 나이로 황제가 되던 날. 

녀석은 말했었다.

혼자의 자리에 앉게된 내 옆에 서선

갈색 눈동자가 빙긋이 웃었다.

[제가 그 고독하고... 지루한 자리를 탐낼 일은 없을테니까요.]

[흥. 네가 넘본다고 해도 쉽게 빼앗길 것 같으냐.]

[...예.]

[-이안!]

[어쨌건 저는 진심입니다.]

싱긋 웃으며 녀석은 말했다.

[... 맹세합니다. 제가 형님을 배신하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비켜라, 이안.”

“싫습니다.”

한발작, 후안이 발을 내딛자 이안은 후안에게 검을 겨누었다.

이안의 얼굴을 보는 순간 후안은 느꼈다.

이 남자는 자신이 아는 

이안·루비젝트·란이 아니라고.

이안이란 녀석은

지독한 욕심쟁이지만 후안의 것만큼은 

넘보지 않는 녀석이었다.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면, 

차라리 얻기를 포기하고자 하는 녀석이었다.

그래서 갈색 눈동자는 언제나 여유가 넘쳐흘렀다.

하지만...

이 앞에 있는 자는 다르다.

여유 따윈 이미 사라지고 없는 절박한 눈동자.

-진심을. 담은 눈동자.

이 눈동자는 분명 낯이 익었다. 

왜냐하면...

“나와 싸우겠다는 거냐.”

“...예.”

-오늘 아침. 거울 속에서 보았던 나의. 눈동자와 

지독히

닮아 있었으니까.

하얀 벚꽃이 휘날리는 알스의 하얀 성에서 

두 남자는 한참동안 검을 겨누었다.

몇 번이고 검이 맞부딪쳤고 서로에게 양보가 없었다.

“잊으신 겁니까, 형님?”

챵- 이안의 검이 후안에게 날카롭게 돌진했다.

“왕위를 욕심내지 않는 조건으로

형님은 제게 무엇이든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내 반려를 준다는 말은 하지 않았어!”

“약속하셨잖습니까.”

이안의 검을 막아내는 후안을 쏘아보며 이안이 말했다.

“형님의 반려님이 형님께 도망치는 날이오면. 제게 주시기로.”

“... ...”

분명, 그런 말을 했었다.

내게.. 도망치는 날이 오면 네게 주기로.

그때는 그럴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날 싫어하는 녀석따위, 가질 필요가 없다고.

그런 녀석따위는 네게 줘버리면 그만이라고.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그녀석이 아무리 날 미워해도, 

내게 도망쳐도 아가 붙잡아 버릴테다. 

어디에도 가지 못하게 아무도 보지 못하게 가둬두고. 

나만이..

녀석을 사랑할테다.

그러니-

절대.

양보할 수 없어!!!

챵------

후안의 검이 이안의 얼굴앞으로 바로 다가왔다.

이안이 황급히 뒷걸음질 쳐 피하려는 순간 

이안의 발이 나뭇가지에 걸렸다.

필사적으로 중심을 잡으려 애 썼지만 

결국 넘어진 이안의 목엔 날카로운 검날이 다가와 있었다.

이안을 내려다보며 후안이 중얼거렸다.

“어렸을 때부터의 버릇은 여전하군.”

어렸을때부터 이안과 자주 검술연습을 했던 

후안은 그의 약점을 알고 있었다.

제국에서도 몇 번째안에 들만큼 훌륭한 검술을 가졌지만 

이안에겐 작은 약점이 있었다.

영악하고 머리가 비상한 그지만 검을 겨룰때만큼은 

‘검’에만 집중하게 되어

주위를 살피지 않게 된다는 것.

덕분에 뒤에 있는 나무를 생각지 못하고 넘어져버린 자신의 멍청함에 

눈썹을 찡그리며 이안은 검을 바닥에 놓았다.

“후...”

작게 한숨을 내쉬며 후안이 

검을 검집에 집어넣는 순간 이안이 후안에게 달려들었다.

갑자기 달려든 이안의 밑에 깔려버린 

후안은 당황스런 얼굴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역전된 위치에 만족하며 

이안은 씨익 입 꼬리를 올렸다.

“형님 또한 어렸을 때와 변한게 없으시군요.”

그래.

자신과 달리 영악하지 못한 이 외골수인 형님의 약점은 바로...

이런 함정을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비겁하구나, 이안!”

“...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제가 지독한 욕심쟁이라는 사실을.”

어떠한 수를 쓰더라도.

얻고자 하는 것을 얻어야 하는 남자란 걸.

퍼억- 밉살스런 동생의 얼굴을 향해 

후안의 주먹이 날아갔다. 

눈물이 나올 정도로 얼얼한 펀치에 이안또한 주먹을 날렸다.

금세 부풀어 오르는 뺨의 아픔을 느끼며 후안은 이안의 멱살을 잡았다.

“절대-.지지 않는다!!”

“저 또한 .지지 않습니다!!”

퍼억- 

용서 없이 날아온 이안의 주먹에 후안은 이를 악물었다. 

두 사람의 싸움을 시작한지 벌써 몇 시간째.. 

벌써 하늘은 샛노란 노을이 지고 있었다.

“하아...하아...”

피가 나오는 코를 스윽 만지며 이안은 후안을 바라보았다.

심하면 심했지 도저히 자신보다 나을 것 없는 

후안의 몰골에 이안은 웃음이 터질 지경이었다.

천하의 형님이.

천하의... 제국의 황제가.

온 얼굴에 멍투성이라니!

하하하하. 정말 걸작이로군.

이건 정말...

... ... 화가나.

살갗이 벗겨져 버린 주먹을 매만지며 

이안은 후안에게 말했다.

“이렇게 싸워 본건 오랜만이군요.”

“... ...”

“그때도 이렇게. 싸웠었지요.”

“... ...”

그래.

그때도 이렇게 엉망이 되어선 

서로에게 주먹을 날렸다. 

비가 많이 오는 어느 날... 그녀의 장례식 때였다. 

제1왕비이자, 그 아름다움으로 제국에 이름을 떨쳤던 그녀. 

금빛의 머리카락과 녹색의 눈동자를 가졌던. 

후안의 어머니인... 

그녀가 하늘로 보내진 날.

그 날 처음으로 후안은 누군가를 때렸다. 

이안또한 막연히 커 보이고 절대적인 존재였던 

형에게 대든건 그 날이 처음이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몇 시간을 치고 박고 

싸우는 그야말로 어린애 싸움. 

다음날,  엉망이된 두 왕자의 얼굴덕에 

온 성은 난리가 난건 말할 것도 없었다.

그때를 회상하니 웃음이 나올 뿐이다.

이제는 그때처럼 싸울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 나이에 그것도... 

남자 하나를 두고 이렇게 싸울 줄은 몰랐는데...말이지요.

“형님...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그건 나도...마찬가지야.”

두 사람의 체력은 이미 한계였다. 

이젠 마지막... 누구의 주먹이 먼저 닿느냐가 승패였다. 

비틀거리며 후안에게 다가가며 이안은 말했다.

“형님. 저-  진심입니다.”

“... ...”

“반려님에 대한 감정, 진심입니다.”

“... ...”

“안되겠습니까?”

이렇게 양보를. 구걸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언제나 여유 있게 웃으며 능숙하게 ‘빼앗는 법’을 알았던 저 녀석이 

엉망이된 얼굴로 구걸을 한다. 

하... 후안은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이안이 슈엘과 성을 떠난 걸 안 순간 가졌던 

증오에 가까웠던 분노는 이미 사라져 있었다.

-알기 때문이다. 

저 감정이 얼마나 진지한 것인지. 

그 애정이 얼마나 깊은 것인지. 

하지만...

“안돼.”

그녀석에 관해서만큼은. 

절대. 

안돼.

"그럼... 어쩔 수 없군요!"

후안을 향해 이안의 주먹이 올라갔다.

******

[이안왕자.]

[예, 왕비님.]

-왕자는 왕비의 자식임이 분명하지만 

왕가의 가족에겐 그것은 형식일 뿐이었다. 

왕은 아버지지만 어머니는 자신을 낳아준 여성만이 어머니였다. 

그래서 이안 또한 왕비를 어머님이라 부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분명 이안에게 또 한명의 어머니였다. 

이질적일정도로 빛나는 

금빛의 머리카락과 녹색 눈동자를 가진 어머니. 

-아름답고. 상냥한 어머니.

하지만 그녀는  ‘자식’과 ‘타인’을 

분명히 구분할 줄 아는 여자였다. 

누구에게나 친절한 그녀는 자기 자식인 

후안에게만큼은 유일하게 차갑고 엄격했다. 

이안은 알고 있었다. 

그 차가움은 모두 사랑이라 는걸. 

그녀가 한번 화를낼때마다... 

형님은 점점 어른이 되어간다는 걸.

[왕자께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어요.]

[무엇인가요?]

[왕자는 아직 어리지만 현명해요. 그러니 왕자를 믿고 부탁하는 거예요.]

[... ...]

그녀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그녀는 내게 속삭였다.

[후안을 부디... 잘 부탁해요.]

그것이. 내가 본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 날 밤, 그녀는 아들과 성을 떠났고... 

다시 성에 돌아왔을 때 그녀는 사라져 있었다. 

인형처럼 감정을 잃은 얼굴로 형님만이... 돌아왔다. 

형님은 무덤덤히 바다가 왕비님을 먹어버렸다 했다. 

시체가 없는 장례식이 치러지는 날까지도 형님은 울지 않았다. 

형님은... 그녀를... 원망하고 있었다.

먼저 덤빈 것은 나였다.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형님께 난 소리를 질렀다. 

후안·루비젝트·알! 

모든 걸 다 알아버린 눈 따윈 하지마! 

그녀에게 상처받은 얼굴하지마!

가장 쉬운 것은 알지도 못하면서. 

왜 모르는거지? 

당신보다 어린 내가 아는데. 

나조차..

그녀가.

당신을 

사랑한 것을 아는데...

언제나 슬픈 눈빛을 했던 그녀가 

행복한 듯 웃었던 건 오직. 

당신을 보고 있을 때 뿐이었는데...

[후안을 부디... 잘 부탁해요.]

... 이봐요, 어머니.

그런 부탁하지 않았어도 애초에 나. 

꽤 괜찮은 동생이었다구요. 

“... 죽었냐?”

“... ....응.”

벚꽃이 떨어지는 정원에 쓰러져있는 

시체(?)를 바라보며 남자는 말했다.

“오- 이런!! 하나뿐인 나의 친구가!! ”

“... 재미없어, 이 바보- 로빈!”

은빛의 머리카락을 살랑이며 

남색 눈동자가 씨익 웃었다. 

누워있는 친구의 얼굴을 찬찬히 관찰하며.

히야- 이 녀석이 이런 얼굴을 할 때도 있구나. 

좋은 구경 하는군. 

언제나 뺀질거리며 웃고 있던 녀석이 엉망이 된 얼굴을 보자 

걱정보다는 후련함이 앞선다. 

“니가 질줄 알았어.”

“흥!”

“넌- 중요한데서 폐하께 약하거든.”

그래... 죽마고우가 괜히 죽마고우가 아니다. 

로빈은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이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이고 욕심쟁이 녀석은...  

형에게 약하다는걸.  

그리고. 여유넘치는 얼굴 뒤엔...

“... 아프지?”

“... ....”

... 분명. 아픔이 숨어있다는 걸. 

“이곳에 온건 폐하때문이기도 하지만 너 때문이기도 해.”

“... ...”

“이렇게 아플걸 뻔히 아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냐.”

“... 하나도 안 고마워.”

“헤헤헤.”

로빈은 이안에게 손을 내밀었다. 

친구가 내민 손에 갈색눈동자가 흔들렸다. 

아...역시 이녀석은 천하의 바보야. 

바보주제에... 

내 일에서만큼은 뭐가 이렇게 빠삭하냐. 

형님 덕에... 온 몸이 다 아프다.

반려님 덕에..  ... 심장이. 화가 날 만큼 아프다. 

그런데 너 때문에. 입은 더 아프다. 

다 찢어진 입이 제멋대로 

웃는 바람에 눈물날 만큼 아프단 말야.

이 친구야-.

손을 잡고 일어서는 이안을 향해 로빈이 말했다.

“오늘은 내가 쏜다! 실연당한 친구를 위해서~”

“잘됐군. 그럼 내가 알스의 최고급 주점을 소개하지.”

“엑?!!!”

로빈이 놀란 눈으로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그곁엔 쥬엘이 있었다. 

듬직한 체구로 이안을 부축하며 그가 말했다.

“재수없는 녀석이긴 하지만 

실연당한 남자한텐 부드럽다고, 나는!”

“하...하하.. 저.. 그런데.. ”

제국에서 급하게 오느냐... 

갖고 있는 돈이 좀 적은데...라고 말하려던 로빈은 

금새 입을 닫았다. 

왕터프한 이 소국의 왕자님은 무서웠다. 

더구나 연인의 형인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꼼짝할 수 없다. 

땀을 흘리며 로빈은 하하 웃었다.

“네에... 갑시다, 쥬엘형님! 그리고- 실연당한 나의 친구!”

"실연 아니야."

"하긴... 실연으로 치기에도 뭣하군. ... 짝사랑이 옳겠어,"

"쥬엘님!!"

새빨간 노을을 등지고 후안은 성안으로 들어갔다. 

오늘 아침 갑자기 찾아왔던 제국의 황제가 

엉망이 되어 나타나자 성안엔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 

치료를 해야 한다며 온 몸을 버들버들 떠는 늙은 의사를 제치며 

슈엘을 찾던 후안의 눈에 한 남자가 보였다. 

작은 키에 외소한 몸을 가진... 노인. 

하지만 까만 눈동자만큼은 소년처럼 맑게 빛나고 있었다. 

“허허. 루비젝트폐하. 어디서 그렇게 맞고 오셨소.”

“슈는 어디있소.”

거침없는 후안의 말투에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또 내 아들놈을 상처주려고? 절대 못 알려주지.”

“이 영악한 영감이!!”

그에게 다가가려는 찰나 후안은 비틀거리며 벽에 몸을 기댔다. 

하... 정말 꼴불견이로군! 

그러나 그의 의지와는 달리 온 몸은 이미 말을 듣지 않았다. 

허허 웃으며 알스의국왕- 아벤-은 억지로 후안을 의자에 앉혔다. 

“타국의 성까지 와서 형제싸움이라니... 

루비젝트 왕가가 언제 이렇게 유치해진 거요.”

“슈가 있는 곳이나 알려...윽!!!”

시종이 가져온 하얀 가방을 연 

그의 손엔 솜집은 집게가 들려 있었다. 

피멍든 곳을 손으로 닦아내며 그가 말했다.

“태자였던 시절이나 황제였던 시절이나 변한 게 없구료.”

“...으...”

따가운 느낌에 눈썹을 찡그리는 후안을 향해 

그는 인자하게 웃었다.

“철이 덜 든 점이 변한 게 없어. 

흠...그래서 내가 우리 슈를 보내지 않으려 했는데...”

“무엄하오!! 아벤...악!”

상처부위를 꾸욱- 하고 누르며 아벤은 후안을 바라보았다. 

“옛날부터 우리 알스의 왕들은 

제국의 황제에게도 무엄했다는걸, 잊었소?”

“흥, 잊을리가.”

“그런데 이상하지 않았소? 

제국의 황제 앞에서 기죽지 않은 이 소국의 왕이 

소중한 아들을 순순히... 자네에게 보낸 게 말이오.”

“그게 무슨...”

놀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황제에게 그가 웃으며 말했다.

“설마... 이 알스의 왕가가 겨우 황제의 명이 무서워 

소중한 왕자를 보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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