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2/25)

<21>

“봐, 반려님. 눈이야.”

“... ....”

“네가 그렇게 기다리던 눈이라고.”

“... ...”

까만 밤하늘속에 내리는 새하얀 눈을 보며 

이안이 말했지만 슈엘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사랑을 잃어버린 까만 눈동자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볼 뿐이었다.

<< 반려로 맞아주세요 >>

슈엘과 함께 성을 떠난지 삼일 째... 

이안은 쓴 웃음을 지었다.

도대체가 같은 사람이라곤 

생각할 수 없을정도잖아. 저런건.

이안의 손을 잡고 걷는 슈엘은 아기같았다.

아무런 감정도, 생각도 가지지 않은 아기...

그저 가끔씩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고 

손을 들어 눈을 만지곤 하는게 전부인... 고장나 버린 아기.

그 모습이 이렇게 슬플 줄은 몰랐다.

차라리.

다른 남자를 보며 사랑에 빠진. 

너의 그 슬픈 미소가 나을 정도다.

“읏차, 조심하라고! 눈 때문에 길이 미끄러워.”

“... ...”

헤에. 조금은 듣는 척이라도 해달란 말야, 반려님. 

이안이 쓸쓸히 웃으며 산 너머를 바라보았다. 

슈엘을 이끌고 향하는 곳은 알스였다. 

제국으로부터 알스로 가는 길은 험난했다. 

배를 타는 항구로 가는 데만도 몇 개의 도시를 지나야 했고 

도시와 도시사이엔 산이나 평야가 가로막고 있었다. 

게다가 며칠 째 그치지 않는 눈 덕에 산속의 길은 더더욱 험난했다. 

“여기서 좀 쉬어야 겠군.”

침낭을 내리며 이안이 털썩 주저 앉았다. 

고개를 돌리자 아직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슈엘이 보였다.

“쿡쿡. 예쁘지?”

눈이 내리는 하늘의 까만색 속엔 

보랏빛과 초록빛이 은은이 베여 있었다. 

눈이 오는 날 밤에 보이곤 하는 오로라. 

이안은 슈엘의 손을 붙잡아 자신의 옆에 앉히며 말했다.

“오로라라고 하는거야. 

알스엔 없는 제국만의 귀중한 보물이지.”

“... ...”

“예쁘지?”

“... ...”

끄덕 끄덕... 

그제야 슈엘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안이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

차가워진 슈엘의 손을 잡고있던 이안의 두 눈이 번쩍였다. 

한 쪽손으로 조심히 검을 빼며 이안은 말을 이었다.

“반려님. 그나저나 내가 말했줬던가?

양해도 구하지 않고 

갑자기 덥쳐오는 것 만큼 매너없는 짓은 없다고!”

촤아아악- 

이안의 검이 순식간에 휘둘려졌다. 

새빨간 피를 내뿜으며 사내 한명이 쓰러졌다. 

그제야 어둠 속에 숨어있던 일행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안과 슈엘을 포위한 그들은 모두 검은 복면을 쓰고 있었다.

“여기까지 쫓아오다니, 너무 질기네. 암살자 양반들.”

피묻은 검을 휘두르며 이안은 외쳤다.

“질긴 남자는 여자한테 매력없다는거, 모르나보지?!”

두놈... 

“으아악!!!”

이제...세놈째. 

거친 숨을 내쉬며 이안은 남은 상대를 바라보았다. 

이제 남은 수는 다섯 명. 

과연 저들을 이길 수 있을까... 

검을 든 상대를 보며 불안해진 것은 처음이었다. 

평소였다면 조금더 여유가 있었겠지만 

이안은 지금 슈엘을 지키며 싸워야만 했다. 

아직 상처가 낫지 않은 슈엘은 

검을 휘두를 여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까.

헤헷. 이것 참... 짜증나는군!

촤아악- 달려드는 또다른 사내를 베며 이안은 이를 악물었다.

“이-놈이!!!”

“으...!!”

이번엔 세 사람이 달려들었다. 

다리며 배에 크고 작은 상처를 입은 이안에게 그들은 벅찼다. 

겨우겨우 그들의 공격을 막아내는 

이안의 눈에 나머지 한 놈이 보였다. 

그는 슈엘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제기랄!!!”

악력으로 한 명을 베며 이안은 슈엘에게 달려들었다. 

슈엘을 향해 달려드는 사내에게 휘두른 검이 그의 가슴에 박혔다. 

‘낭패다!!!’

아무리 힘 써도 검은 빠지지 않았다. 

마지막 남은 암살자 한명이 이안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날카로운 검이 자신에게 향하는 순간 

이안은 공포를 느꼈다. 

무기도 없이 슈엘을 보호하며 

저 자를 공격할 방법은 불가능했다. 

이안은 슈엘의 앞을 막았다.  

두 눈을 찡그리는 순간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촤악-

사람을 베는 소리. 

“?!!”

하지만...베인건 자신이 아니었다. 

놀란 눈으로 이안을 앞을 바라보았다. 

새하얀 눈 속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피뭍은 검을 닦으며 그는 이안을 향해 뒤를 돌았다. 

“너....”

얼굴을 감싸고 있던 하얀 천을 푸르자 

요정처럼 아름다운 얼굴이 나타났다. 

금빛의 머리카락은 눈에 반사되어 더욱 밝게 빛나고 있었다. 

보석처럼 새파란 눈동자를 빛내며 그가 입을 열었다.

“짧은 머리가 훨씬 낫네요, 이안....”

이안이 작은 소리로 내뱉었다.

"... ...남창..."

“어째서 네가 여기 있는거지?”

이안의 상처를 붕대로 감으며 멜은 대답했다.

“당신에게 말할 필요는 없겠지.”

여전히 오만한 말투에 이안은 기가찰 노릇이었다. 

말할 필요가 없다고? 

너는 나를 뭘로 보는 거냐. 

네 앞의 이안·루비젝트·란이란 남자는 바보가 아냐. 

제국 최고로 눈치 빠른 사내가 나라고. 

그런 네가 지금 너의 위치를 모를 것 같아? 

왕족을 구하고 동료를 살해했다. 

그런 너를 그 조직이 가만 둘리가 없어.

“쫓기고...있군.”

“... ...”

“뭐, 그런 것쯤은 니가 수도에서 보이지

않았을 때부터 눈치 챘었어. 

아직까지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는 것은 의외지만.”

배신자라면 왕족보다도 

더 철저히 죽이는 게 그들의 습성이라 했다. 

용케 그들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았군. 

쿡쿡 웃는 이안을 보며 멜은 붕대를 감는 손에 힘을 주었다.

“으윽."

“... 그나저나 도대체 왜지?  

당신이 여행을 그만두고 제국으로 돌아온 것은 

암살의 위험 때문 아니었나? 

이런 시기에 호위병 하나 대동하지 않고 왜 성을 떠난 거야!”

그 말에 이안은 크게 웃었다. 

웃음을 멈춘 이안은 자고있는 슈엘을 바라보았다. 

다정한 그의 갈색눈동자에 멜의 가슴은 지끈거렸다.

천천히 그가 입을 열었다.

“사랑에 빠져버려서.”

바보들이나 하는 거라고 생각했던 사랑에 첨벙 빠져버렸지. 

하하... 그것 참. 못해먹을 짓이라니까.

쓸쓸히 웃는 이안을 향해 멜은 차가운 눈초리로 말했다.

"한심한... 남자가 됐군."

"부정하지 않겠어. 참...그나저나, 내게 또 빚을 져버렸네."

제국의 왕자라는 작자가 

일개 남창에다 전직 암살자에게 빚을 지다니. 말세로군.

휴- 하고 한숨을 내쉬는 이안이 말했다.

"뭐든지 말해. 신변의 보호든 거액의 돈이든 꼭 갚을테니."

"... ...."

그의 말에 멜은 잠시 말이 없었다.

잠시후에 멜의 입에서 나온 말은 간단했다.

"생각나는 게 있으면 그때...받겠어.."

******

며칠째 후안은 후궁안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누구도 그 곳엔 들어가지 못했다. 

냉정한 황제의 화를 살 가봐서였다. 

성에는 이미 슈엘이 이안이 도피한것이란 소문이 파다했다. 

저 젊은 황제는 자신의 형제와 눈이 맞은 

밤의 반려에게 분노하고 있는 것이라고. 

똑-똑

노크소리가 울렸지만 후안은 멍하니 의자에 앉아있었다. 

침대엔 지금까지 슈엘이 후안에게 주었던 

주머니들이 수십 개 놓여 있었다.

후안은 몇 번이고 그것을 꺼내놓고 

집어놓는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다.

똑-똑

다시한번 들리는 노크소리. 

여전히 대답이 없자 문 밖으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쥴리엣입니다.”

“... ...”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이안님과  슈엘님의 소식을 가지고 왔습니다만.”

“!!!!”

순식간에 문이 열리고 그녀앞에 후안이 나타났다. 

예상했던 반응, 오히려 그녀가 놀란 건 후안의 얼굴때문이었다

며칠 전 보았을 때보다 

더 나약해지고 메마른 사내의 얼굴로 그는 변해 있었다.

면도도 하지 않은 엉망이 된 그가 다급히 물었다.

“당장 말하시오!”

“... 이안님과 슈엘님은 어제저녁 수도관문을 넘었다고 합니다.”

“!!!”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후안은 일어섰다. 

문을 나서려는 그의 손을 그녀가 붙잡았다.

“폐하!”

“?!”

“지금. 어딜가시려는 겁니까.”

어디라니... 

당장 말을 타고 성을 나가. 녀석을 찾아오겠어. 

나의 반려를. 데려오겠어. 

타오르는 심홍의 눈동자에도 그녀는 물러섬이 없었다. 

그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그녀는 말했다.

“지금 나가신다면 저는 고국으로 돌아가겠습니다.”

“?!”

“폐하께서 밤의 반려를 데리고 온 후에 

저 쥴리에뜨는 없을것입니다.”

-이것은. 도박이었다. 

후안이란... 한 사람의 남자와 황제사이에 거는 도박. 

쥴리엣이 거는 쪽은 황제로서의 후안이었다. 

황제로서의 그는... 날 택할 것이다. 

날 놓치면 제국으로선 큰 이익을 놓치는 셈이야. 

루시아국의 힘을 가져갈 수 있는 기회다. 

황제인 당신이라면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아.

“밤의 반려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이안님과 성을 떠났습니다. 

그런 경박한 사내 때문에 이, 쥴리엣을 놓칠 셈인가요?”

후안의 눈앞에 익숙한 얼굴이 아른거렸다. 

벌써 며칠이나 보지 못했던 

까만 머리카락과 까만 눈동자가... 

당장이라도 쫓아가 그 손을 붙잡아 버리고 싶었다. 

따스한 가슴에 귀를 대어 심장소리를 듣고. 

그리고. 

달콤한 그 입술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하지만...

“... ...”

하지만.

-난.

황제......야.

황제는.

사랑에 빠져서는

안돼.

[후안님-]

까만 눈동자가 웃는다.

아이처럼... 해맑게.

손을 뻗어보지만 이내 주먹을 쥐고 손을 내린다.

...나는...

너를.

사랑할 수.

없어..

심장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끼며 후안은 눈을 감았다.

두 주먹을 꾸욱 쥐며 그는 말했다.

“알...겠소. 공주 ... 가지 ...않겠소.”

******

“첫눈이 늦나 싶더니 정말 미친 듯이 내리는군.”

술집에 들어서며 이안이 말했다. 

옷 위의 눈을 털며 그는 슈엘을 바라보았다. 

술집엔 들어올 생각도 않고 멍하니 눈을 맞는 

슈엘을 잡아끌며 그가 말했다.

“눈이 그렇게 좋아, 반려님? 

하지만 상처에 좋지 않단 말야.”

“... ...”

슈엘의 대답은 없었다. 

뭐,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됐나, 이런건. 

겨울이라 사람이 찬 술집의 구석에 자리잡은 이안은 씁쓸히 웃었다. 

사람을 좋아하니까 이런 곳, 좋아할 줄 알았는데. 

역시 이정도론 그 웃음을 

다시 보는건...무리인가 보지? 

슈엘의 옷을 자상하게 여며주는 

이안을 바라보며 멜은 생각에 잠겼다.

마치...다른 사람 같군... 

나를 안던 차갑고 이기적인 남자는. 어딜 간 거지? 

그에게 이런 모습이 있다니 놀랄 일이다. 

멜의 시선을 의식하며 이안은 고개를 돌렸다.

“그나저나 안됐군. 

시선 끌기를 좋아하던 네가 

이제는 그 모습을 숨겨야 한다니.”

이안의 말대로 멜은 망토와 천으로 얼굴을 감추고 있었다. 

화려한 그의 모습을 그대로 보이고 다닌다면 

당장이라도 암살자의 표적이 될 테니까. 

주인이 가져다준 술을 한모금 마시며 멜이 입을 열었다.

“마음에 안들어.”

“응?”

“알스의 왕자. 언제까지 저 지경인거지?”

저런 인형 같은 상태라면. 

차라리 그때가 나았다. 

깨끗한척, 위선적인 모습이 짜증났지만 

그래도 그때는 생기가 있었다. 

까만 눈동자 가득 용기만큼은 잃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저런 꼴이라니... 

더욱 더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건.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야.”

멜의 말에 차가운 말로 선을 긋는다.

암살자의 위험이 있어 멜을 곁에 두지만 

이안에겐 멜의 자리는 없는 것이다. 

그런 것쯤은...알고 있었어. 

그런 것쯤은. 

잔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멜은 

뜨거운 술 한 잔을 목으로 넘겼다. 

그때였다. 시끄러운 술집 속에서 그 소리가 들린 것은.

“이야아- 정말 경사가 났군, 경사가 났어!”

“그 루시아국의 공주님과의 혼사라니! 황제도 수완이 좋구만!”

“이제 곧 성대한 결혼식이 치러지겠어~ 낄낄.”

데구르르-. 

슈엘의 손에 들려있던 컵이 바닥에 뒹굴었다. 

뜨거운 우유가 나뭇바닥을 적셨다. 

한번도 반응하지 않았던 슈엘의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이안이 잡기도 전에 슈엘은 말을 한 사내들에게 달려갔다. 

“지금, 뭐라고...했나요?! 뭐라고....”

사내들이 낄낄 웃으며 대답했다.

“아직 모르나, 젊은이? 

황제폐하가 쥴리엣공주님께 청혼을 했다는군!.”

“... ....”

“이제야 폐하께도 진정한 반려가 생기는거라고.”

“.... ...”

“-밤의 반려 따위가 아니라 말이지.”

“!!!!”

퍼어억- 마지막 말을 내뱉은 사내가 바닥에 쓰러졌다. 

사내의 앞에는 붉은 머리의 남자가 서 있었다. 

주먹을 매만지며 이안은 그에게 외쳤다.

“알고 있나, 자네? 사내가 함부로 써서는 안되는 게 있어. 

그건 바로- 혀와 네 이 쪼그라든 아들놈이지.”

꽈악- 그의 급소를 밞으며 이안이 씨익 웃었다. 

냉소에 가까운 미소를 띄우며 이안은 사내를 바라보았다.

멜이 황급히 다가와 이안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그만해. 겨우 이런 일로 소란을 피우다니.”

멜의 말에 이안은 차갑게 멜을 쏘아보았다.

“겨우 이런 일이라고?”

“... ...”

“뭐, 너 같은 녀석은 알 수 있을리 없지.”

"... ..."

이안은 쓰러질 듯 떨고 있는 

슈엘의 손을 잡고 가게안을 나왔다. 

뒤늦게 술집에서 따라 나온 멜의 눈에 보인 건 슈엘이었다. 

인적 없는 조용한 밤하늘아래. 

쏟아지는 눈을 맞고 있는 그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에게 다가가려는 찰나 이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가가지마.”

“... ...”

“울고... 있으니까”

“... ...”

멜의 눈에 슈엘의 뒷모습이 보였다. 

키가...컸었는데 언제 저렇게 작아 진거지... 

화가 날정도로 반짝반짝 빛나는 녀석이었는데.. 왜 저렇게 

초라해...진거지. 

“사랑을 해서야.”

“... ...”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사랑 같은 걸해서 저 꼴이라고.”

나도, 저 녀석도...

이안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남창. 네 녀석은 절대 알 수 없어. 

저녀석의 마음도, 내 마음도.”

그 말에 멜의 녹색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 사람을 바보처럼 사랑하는 마음.. 

알리가 없잖아.

왜냐면 ...

그런 건

이미 아주 오래전에

버려야

했으니까.

"... ..."

세 사람의 위로 차갑고 새하얀 눈은 끊임없이 내리고 있었다.

******

후안은 매일같이 슈엘의 방에 있었다. 

며칠동안 후안은 작은 반지 하나만을 만지작대고 있었다. 

바로... 그녀석이 마지막으로 주고 간 선물.

- 사랑합니다 -

고 써져있는 루비의 반지.

루비가 닳을 만큼 후안은 몇 번이고 반지를 매만졌다.

...지우고 싶었다. 

이런 글씨따위. 

사랑합니다.란 글자따위.

네...

가없는 그런 사랑 따위.

“.......으............”

어두운 방안에서 후안은 가슴을 붙잡았다. 

심장이 아파왔다. 

심장이 뜯어져 나갈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으.......................아........으으..”

털썩... 

후안은 바닥에 쓰러졌다. 

후안의 손에 들려있던 반지가 저 바닥으로 또르르 굴러가버린다. 

자신에게 멀어져가는 반지에 누군가의 뒷모습이 겹쳐진다.

아름다운. 금빛의 머리카락...이 찰랑인다. 

어머님의... 뒷모습. 

어린시절 보았던 그대로 젊고

아름다운 뒷모습이 보인다. 

그녀를 부르려 하지만 심장이 아파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으...!!”

그녀가 사라지고

후안의 앞에... 그보다 더 익숙한 뒷모습이 보인다.

까만...머리카락...

큰...키...

남자의... 몸.

하지만.

아이처럼 따뜻한.영혼.

“..................”

후안은 손을 뻗었다. 뒤를...

돌아봐!!! 

나를... 

봐!!!!!!!!!!!!!!!!

그러나 그의 뒷모습은 후안에게 점점 멀어질 뿐이었다. 

가슴을 부여잡고 멀어져가는 

손을 잡으려는 순간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제폐하...]

“.........................”

[황제폐하]

“..........................”

[폐하]

[폐하]

[폐하]

“으.........으아아아......!!!!!!!!!!!!!!!!!!!!!”

후안은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폐하...폐하...  황제. 후안·루비젝트·알. 

그것이 나였다. 그것만이 나의 전부였다. 

지독하게 외롭고 쓸쓸한...자리.

하지만 황제가 아니면 내가 있을 곳은 없었다. 

아무 곳도... 

...아무... 

곳도.... .... ...

[....님]

“...................................”

[후안 님]

“..................................”

[좋은 아침입니다.]

“........................................”

한결같은 까만 눈동자.

“...................................슈...”

후안은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손을 잡으려는 순간... 따뜻한 손은 사라져버린다. 

그제야 후안의 눈엔 아무도 없는 방안이 보였다. 

어두운 방안엔 자신만이 바닥에 누워있었다. 

... 그는... 없었다.  

후안의 눈엔 저 멀리 굴러간 반지만이 보였다. 

후안은 바닥을 기어 반지를 잡았다. 

반지를 잡은 두 손은 덜덜 떨려왔다.

“.... ..............슈...”

“.....................슈...”

“.................슈... ....”

벌써 수백 번, 수천 번을 이름을 되내였지만 

녀석은 나타나지 않는다. 

언제나 당당하고 오만했던 붉은 눈동자가 떨려왔다.

“그 눈동자는 이젠...나를... 바라봐주지... 않아...................”

눈물을 흘릴 수 없어. 

심장은 더더욱 아파왔다. 

******

벌써 며칠이 지난 걸까. 

이런 기묘한 구성으로 길을 떠나게 된 건. 

이안은 슬쩍 멜을 바라보았다. 

두건으로 얼굴을 가리긴 했지만 

살며시 보이는 하얀 피부와 파라눈동자는 여전히 매혹적이었다. 

그래... 이 녀석인 남자를 유혹하는 얼굴을 가진 남창이었다. 

그리고 거침없이 사람을 죽이는 암살자. 

그 어느 쪽도 이런 식으로 나를 도와줄만한 남자는 아니었다.

그런데...어째 서지?

우리와 동행하면 위험해지는 건 멜이다. 

혼자라면 오히려 몸을 숨기기가 쉬울 것이다. 

왜 날...도와주는 거냐.

아무리 영리한 이안도 그것만큼은 눈치 챌 수 없었다.

“날이 저물었군. 오늘은 이곳에서 쉬어야겠어.”

멜의 말에 따라 이안은 짐을 풀었다. 

침낭을 풀고 모닥불을 피워놓자 어두웠던 산 속에 환해졌다.

침낭을 깔고 앉은 이안은 슈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침낭 속에서 눈을 감고 있는 슈엘은 어느새 잠이 들었다. 

슈엘을 바라보며 멜이 입을 열었다.

“걷지 않으면... 자기만 하는군.”

“... ....”

그래... 형님의 결혼식이 정식으로 발표된 

그 날부터 슈엘은 잠이 많아졌다. 

아픈 현실에서 도망치는 것처럼 깊게 잠이 들곤 했다. 

말은 없어지고... 잠은 많아지고... 하하. 

천하의 게으름뱅이가 되버렸구나. 반려님.

이안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산 속에서 바라보는 하늘은 유달리 높다.

높은 밤하늘... 차가운 바람에 온 몸이 시원하다. 

“하나만 물어보자.”

타닥타닥... 타들어가는 모닥불을 보며 이안이 물었다.

“왜 그런 조직에 들어간 거지?”

“... 왕족이 싫으니까.”

단순한 대답. 

이안이 눈썹을 찡그렸다. 

왕자 앞에서 참 대담하군-. 

“그럼 지금은?”

“... ...”

“지금은 왕족을 죽이긴 커녕 지켜주고 있잖아.”

멜은 이안을 바라보았다. 

저런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봐주는건 처음이었다. 

저 갈색 눈동자가 호의를 갖고... 나를 바라보는 건. 

... 나쁘지 않군. 저런 시선도.

“... 별로, 의미는 없어.”

“... .... 흐음.”

턱을 긁적이는 이안은 입을 닫았다. 

뭐... 대답하기 싫다면야 억지로 들을 필요는 없겠지. 

시선을 돌리는 멜을 바라보며 이안은 눈을 감았다.

“이안-.”

작은 속삭임에 이안은 황급히 눈을 떴다. 

가까이 다가와 속삭이는 이 목소리는 분명 멜이었다. 

“뭐야...남...창...”

멜의 파란 눈동자에 이안은 모든 걸 눈치챘다. 

누군가...우릴 바라보고 있다. 

아니, 이 시선은 분명...살기!! 

이안은 조심스럽게 검을 집었다. 이안을 향해 멜은 낮게 속삭였다.

“어서 알스의 왕자를 깨워.”

“.... ....”

이안은 조심스럽게 슈엘의 몸을 흔들었다. 

조용히 눈을 뜬 슈엘을 향해 이안은 속삭였다.

“조용히. 반려님-.”

심각한 목소리에 슈엘또한 

상황을 눈치 채며 몸을 일으켰다. 

슈엘의 손을 잡으며 이안은 멜의 곁으로 다가왔다.

“적은. 몇이지?”

“한 명.”

“뭐?!”

낮게 소리친 이안이 눈썹을 찡그렸다. 

늘 몰려다녔던 암살자와 

다른 적은 숫자에 놀란 것이 아니다. 

겨우 한 명의 적임에도... 

눈에 띄도록 긴장한 멜의 모습 때문이었다. 

무표정이었지만 분명... 검을 든 하얀 손은 떨리고 있었다.

사람의 피를 그토록 많이 묻힌 녀석이 

이정도로 무서워할 정도라면. 

대체 어느 정도의 괴물이라는 거야...?

“지크.”

“...뭐?”

“조직 내의 최고 실력을 가진 남자.”

메마르고 날카로운 눈동자를 떠올리며 멜은 말했다.

“당신은 반려를 데리고 도망쳐.”

“그게 무슨...”

“방해돼.”

“... ...”

“당신은 전의 부상이 낫지도 않았고 

반려는 저 모양이야. 오히려 짐이야.”

파란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이안의 머리는 혼란스러웠다. 

보통 때의 그라면 서슴없이 그의 말에 따랐을 것이다. 

이안의 관심사는 어디까지나 슈엘이었으까. 

슈엘만 무사하다면 어떤 희생이라도 치룰 수 있어. 

그랬는데.... 

복잡한 표정을 짓는 이안을 향해 멜은 

무언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참...재회했던 날 당신이 말했던 것 생각나?”

“남창! 이 상황에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뭐든 해준다고 했잖아. 구해준 보답....”

“... ...”

이안의 귀 가까이에 멜은 속삭였다. 

멜의 속삭임에 이안의 갈색눈동자가 흔들렸다.

“기껏 바란다는 게 겨우?”

“... ...” 

이안을 바라보는 파라눈동자는 

어느 때보다... 밝게 빛나고 있었다. 

꽉 다물었던 이안의 입이 열렸다.

“...죽지...마라. 멜....”

이안이 입을 여는 순간 멜은 웃었다.

... 아이처럼. 순수하게.

“어서가!!”

모닥불을 끄며 멜이 외쳤다. 

빛이 사라지자 곧 암흑이 되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 속에서 이안은 슈엘의 손을 잡고 뛰었다.

챙- 

검과 검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몇 번이고 들려오는 쇳소리를 뒤로하고 이안과 슈엘은 달렸다.

촤아악-- 

사람을 베는 소리... 

하지만 이안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격하게 뛰어오르는 심장소리를 들으며 이안은 슈엘의 손을 꽉 쥐었다.

지금은

온기가

우선이야...!

몇시간을 쉬지 않고 달린 이안은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하아...하아...”

이안에게 이끌려 달렸던 슈엘또한 

숨이차 헉헉대었다 . 

칠흑처럼 어두웠던 밤이 끝나고 아침이 다가오고 있었다. 

산 너머로 보이는 태양을 바라보며 이안은 외쳤다.

“제---길!!!”

넌 남창이야!! 

검을 숨긴 남창! 언제라도 자신을 안고 있는 

남자를 죽일 수 있는 남창 따위가...  

어째서...

어째서.............

[...죽지...마라. 멜....]

겨우 그 한마디에 아이처럼 웃었었다. 

죽여도 시원찮을 타인 때문에 죽을 상황인 주제에, 

미소 따위는 어울리지 않는 남창주제에!

행복하게. 

웃었었다...

이안은 슈엘을 안았다. 

슈엘의 까만 눈동자가 슬프게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님. ... 멜은...”

“... 그녀석이 좋아서 한 짓이야.”

“... ...”

“그 녀석이 원해서 우릴 구해준거라고!”

“... ...”

슈엘은 이안을 꼬옥 안아주었다.

이안의 귓가에 낮게 속삭이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이름을 불러줘-.]

남이 기껏... 보답해준다는데

기껏.

기껏 받고싶은게 겨우... 그런 거냐, 너는. 

그런데 그제서야 깨달았다.

너의 이름을 부른 것은.  처음이었다 는걸.

그래.

나는...

너의 이름을 한 번도 불러주지 않았었어.

-멜.

******

남자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남자를 바라본 시종 한명이 외쳤다.

“로빈님?!”

그래, 분명 그였다! 

황제의 특별 휴가로 오랜 시간 성을 비웠던 로빈·레이크. 

변함없는 은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그는 문을 열었다. 

회의실에 있는건 고위층 관리와 귀족들...그리고 

그 중심에 앉아있는건 부쩍 마른 후안이었다. 

무감정했던 그의 눈동자가 작게 빛났다.

“돌아왔군. 로빈경...”

“...  ... 폐...하.”

후안의 얼굴을 보는 순간 로빈의 심장은 내려앉았다. 

그 제멋대로인 친구가 슈엘과 함께 

성을 떠났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그 소식에 알스에서 황급히 말을 몰아 돌아왔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라니...

언제나 당당했던 주군의 눈동자는 

마치.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공허했다.

”레이크경. 지금은 폐하와 나의 결혼식 준비 중입니다. 

급하지 않는 일이라면...”

후안의 옆에 앉아있는 쥴리엣을 바라보며 로빈은 눈썹을 찡그렸다.

하... 결혼식 준비?! 

내 살다 살다 이렇게 결혼준비가 

우중충하고 어두운 건 처음이군. 

정작 당사자가 저 모양인데 대체 이 어디가 결혼식준비란 말이야. 

로빈은 슬픈 눈으로 후안을 바라보았다.

폐하. ... 그 ‘감정’은 어쩌신 겁니까. 

제가 알스로 떠나기전 본 폐하의 눈 속엔 분명... 

따뜻함이 있었습니다. 

분명...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 감정이 사라진 거지요? 

슈엘님이 오기전 그때의 

그. 메마른 눈빛으로 돌아간 건 어째서 입니까.

“폐하.”

“... ....”

“이 결혼에 사랑은 있습니까?”

“레이크경!”

쥴리엣이 로빈을 노려봤지만 남색의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로빈을 바라보며 후안은 지친 듯 말했다.

“로빈경. 나는... 황제요...”

결혼에 사랑은

필요치 않아

황제에게. 이익이 되는 결혼은 곧... 의무였다.

후안의 말이 끝나는 순간 문소리와 함께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슈는 더. 많은 것을 버렸습니다."

“?!”

모두의 눈이 한 곳에 집중되었다. 

놀랄 만큼...아름답고 청명한 목소리였다. 

문을 열고 들어온 하얀 옷을 입은 남자.. 

하얀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분명 낯익은 자였다. 

그래... 오래전에 사라졌던 슈엘이 데려왔던. 

그 시종....이다.

“슈는 알스의... 사랑받는 왕자였어요. 

알스의 햇빛과 가족과...

따스함을 모두 버리면서까지 이곳에 왔습니다."

하얀 손이 얼굴을 가리고 있던 천을 풀었다. 

주변에서 탄성 소리가 새어나왔다.

...사람을 뛰어선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하얀 얼굴과...녹색 눈동자. 

후안이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얀 두건을 푸르자... 

풍성한 금빛 머리카락이 쏟아져 내렸다. 

요정처럼 아름다운 남자가 후안의 앞에 나타났다. 

............... 알스의... 여신............ 

금빛 머리카락과 녹색눈동자. 

...분명. 오래전 보았던 그... 아름다운 왕자였다. 

차가운 눈동자로 그가 말했다..

“그리고... 이젠 사랑까지 버려버린 슈를 위해 

당신은... 

... 그 고독한 자리조차 버릴 수 없습니까-.”

그의 모습을 본 순간 후안의 눈동자가 떨려왔다.

...시종...이 아니었어 - 녀석의 형. 이었다.

그제야 모든 게 연결되었다.

시종을 감싸던 녀석의 모습.

-그 행동에. 화를 냈던 나의 모습.

가슴이 아파왔다.

심장이 지끈거렸다.

나는...

얼마나 그 녀석에게 상처를 줬던가-.

외로웠을 것이다. 많이... 무서웠을 것이다.

홀로 낯선 곳에 와 환영받지 못해 쓸쓸했을 것이다.

그런데

언제나 웃고 있었다.

까만 눈동자가 언제나 웃고 있어

그.

아픔을

눈치 채지 못했다.

"나를 보니 나를 갖고 싶어졌습니까?"

"... ...."

"당신이 원하는 건... 누구죠?!"

그래-.

처음 봤을 때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까만 머리카락에 까만 눈동자.

커다란 몸집.

그런 남자 따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점점

가지고 싶은 마음이 커져갔다.

점점 더 사랑스러워... 져 갔다.

이제서야 확실해졌다.

그토록 원하던 알스의 아름다운 왕자를 

눈앞에서 보는 순간-.

빛나는 녹색눈동자보다... 보이지 않는 까만 눈동자를

더욱 절실히 원하게 되는 순간-

아아-.

이 감정은.......

.... 

"미안하오."

"... ....."

사리엘은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후안이 바라보는 사람은 그가 아니었다.

바로 불안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쥴리엣 공주였다.

공주의 손을 잡으며 후안은 말했다.

"공주의 손에 있는 이것. ... 가져가겠소."

"!!!!"

공주의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낸 후안은 모두에게 외쳤다.

"-나는 알스로 간다!"

"폐하!!!!"

공주의 외침에 그는 말했다.

"공주께...대단한 무례를 범했군. 

이 일에 대해선 제국의 이름을 걸고 사과하오."

"루시아국은... 이 일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 용서?"

"!!!"

공주의 얼굴이 굳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는 한없이 약해져갔던 그가 아니다.

제국의...

황제...

온 몸이 떨려왔다.

그제야  공주는 눈 앞의 이 남자가 

냉정하기로 소문난 황제임을 떠올렸다.

... 잊고 있던 것이다.

그.눈동자가 너무 부드럽게 변해 있어서...

이 젊은 황제의 무서움을. 

잠시 잊었던 것이다.

바들바들 떠는 그녀를 향해 후안은 차갑게 말했다.

"전쟁을 치루겠다면. 불사할 것이오."

"!!!!!!!!!!"

잔뜩 울상이 되어 폐하!!! 를 외치는 대신을 향해 후안은 말했다.

"나에 대한 어느 충언도 듣지 않을 것이오!

나에겐 이제 그대들의 말을 들을 의무가 없으니까."

그래.

이런 쉬운 방법이 있었군.

황제인 나를 버리고

후안.으로-.

너를 찾아가

네게 용서를 구하고

한번도 하지 못했던. 그 말을 한다면.. .

그래서

너의 웃는 얼굴을 볼 수 ... 있다면...

"나 후안·루비젝트·알은... 이 시각부터 황제의 자리를... 내놓는 바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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