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2화 (19/25)

<18>

슈엘·알스·슈

알스로부터 온 왕자님은 언제나. 웃고 있었다.

처음 만난 그 날부터. 두 눈과 입은 생긋이 웃고 있었다.

그런데....

너의 미소는 빌어먹을 만큼.

가슴이 아파.

그렇게 환하게 웃는데도 심장이 메여져와.

차라리.

웃지마.

네 웃는 얼굴은. 우는 얼굴보다 훨씬 처절해.

그런 웃음 따윈.

짓지 않는 게 나아.

“부탁이니까 그만좀 웃어, 반려님.”

슈엘의 이마위에 수건을 얹혀주며 이안은 중얼거렸다.

<< 반려로 맞아주세요 >>

이 추운 겨울에 무슨 일인지 흠뻑 젖어선...

그렇게 달려대었으니 감기에 걸리지 않고 베기겠는가.

침대에 누워 잠이든 슈엘을 보며 이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마에 살짝 손을 대보니 그리 뜨겁지는 않다.

음... 다행이야.

이정도면. 내일아침이면 말끔히 낫겠지.

“... ....”

이마를 짚던 손으로 조심히 슈엘의 얼굴을 내려가 본다.

까맣고 짙은. 눈썹.

지금은 보이지 않는 까만. 눈동자.

예쁜 모양의. 코.

빨갛게 상기된 볼.

“.... 뜨거운. 입술.”

........................츕.........

작은 소리와 함께 이안의 입술이 슈엘의 입술에

살짝 맞닿았다.

사춘기 소년처럼 폭발하는 두근거림.

이 작은 입맞춤에. 심장의 떨림은 가라앉지 않는다.

“... ...안님?”

"!!!!"

황급히 고개를 올리며 이안은 당황했다.

이런. 하필이면 왜 지금 깨어난 거야!!!!

이런 짓을 하고 있을 때....

“후안님..... ”

“.... .....”

일어난 게. 아니었다.

단순한 잠꼬대...

울컥, 하고 무언가가 이안의 속에서 꿈틀거렸다.

반쯤 감긴 까만 눈동자 속에 이안이 비춰졌다.

“후안님. 오늘밤도 와주셨군요..”

생긋.

.... 미소 짓는다.

이안은 멍하니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따스한 그 눈동자가 슬며시 감겨질 때까지

그 까만 눈동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니야.”

잘봐! 난. 붉은 눈동자가 아냐.

눈도! 코도! 입도! 형님과 이렇게 달라.

왜 너는 항상 내게서 그를 보냔 말이다!

이안은 슈엘의 손을 잡았다. 뜨거운 열을 품은 손을

조심히 잡으며 이안은 눈을 감았다.

“후안이 아니야.”

부드러운 손을 입을 맞추며 그는 오래도록 속삭였다.

“이안·루비젝트·란.” 

“이안·루비젝트·란. 이안·루비젝트·란... 이안·루비젝트·란.. 

이안·루비젝트·란. 

이안.... ...

이안... 

너의... 이안·루비젝트·란. ... ”

“!!!!”

잠에서 깬 슈엘은 벌떡 일어나 두 눈을 깜빡였다.

깜빡... 잠들어 버리고 말았어!

이마에서 떨어져버린 수건을 집으며 슈엘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왼쪽-.

오른쪽-.

침대위-.

창가앞 의자-.

책장 앞-.

“.... 안보여.”

괜찮을 줄 알았던 심장은 떨려왔다.

하하... 역시. 이렇게 되어버렸어.

어딜 봐도 그가 보이지 않는다.

눈을 뜨면 매일 아침 보였던 그의 얼굴이

사랑스럽고 소중해 가슴 벅찼던 소중한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몇 번을 보아도 설레였던 그의 얼굴은

이제.

없다.

그래도 조심히 되내여본다.

매일 아침, 잠이 든 그의 얼굴을 보며 몇 번이고 되내였던

그의 이름.

“후안님....”

대답해 주지 않아도 돼요.

“후안님...”

다만. 내가...당신을 바라볼 수 있기 해줘요.

“후안님!!”

슈엘의 목소리가 방안 가득 울렸다.

화를 내듯 높은 고음의 소리...

필사적으로 내지르는 목소리에 목이 아파왔지만

정작 아파오는 곳은 다른 곳이었다.

열이 남아있는 몸으로 미친것처럼 슈엘은

몇 번을 후안을 불렀다.

보이지 않는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외쳤다.

쉰 목소리가 섞어져 나왔을 때 달칵... 문이 열렸다.

붉은. 머리카락.

슈엘은 황급히 달려 나갔다.

아찔한 현기증이 났지만 그런 것은 상관없었다.

와주셨어!! 와주셨어-!!!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있어!!!

슈엘은 그의 앞에 섰다.

큰 키와 붉은 머리카락.

날카로운 인상은 그대로인데도.

“이안...님...”

-그 사람이 아니다.

갈색 눈동자가 슈엘을 바라보았다.

평소와는 다른... 화가난 눈동자.

“대체 몇번을 말해야 하지?! 난 이안·루비젝트·란 이야!”

“죄, 죄송해요, 이안님.”

“이안·루비젝트·란. 이안·루비젝트·란! 이안! 루비젝트! 란!”

“네에...?”

이안이 슈엘을 벽으로 밀치며 입을 맞췄다. 

츕- 하고 혀와 혀가 맞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슈엘의 혀가 파고드는 그의 혀를 거부했지만 이안의 혀는

그까짓 반항쯤은 여의치 않다는 듯 부드러운 그곳을 핥았다.

이토록 집요한 키스는 처음이었다.

거부하려는 마음과 달리 슈엘은 그를 떨쳐낼수 없었다.

온 힘을 다해 입 맞추는 한 남자를 떨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감기기운이 남아있는 몸은 열이 점점 더 해가기만 했다.

“우읍......으..ㅅ”

그의 키스는. 뱀과 같았다.

아무리 발버둥 치고 쳐도 쫓아오는 뱀.

악착같고 탐욕적인 뱀의. 키스.

사랑을. 원하는 키스.

그의 새빨간 머리카락과

붉은 빛 도는 갈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자

슈엘의 가슴이 철렁였다.

그만해요-.

제발. 그만해요...

“..... .....”

스르르..마치 마법이 풀리듯 그의 입술이 떼어졌다.

영혼이 떨어져나가듯 강하게 슈엘을 안았던 그의 팔마저

슈엘의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마치 술사의 실이 빠진 인형처럼 이안은 멍하니 슈엘을 바라보았다.

“제발... 그만해요, 이안님.”

까만 눈동자 가득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

눈썹을 찡그리며 이를 악무는 그 모습에 이안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슈엘은 울지 않았다.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두 눈에

가득 힘을 주고는. 이안을 바라보았다.

촉촉해진 까만 눈동자는 절실히 말하고 있었다.

-나는. 상처 받았다고.

“‘그’사람을 닮은 얼굴로 그런 키스같은건 하지 말아요.”

그런.

사랑을 담은 키스 따위 하지 말아요.

절대 그 사람에게 받을 수 없는 그런 입맞춤을

그를 닮은 얼굴로 하지 말아요.

제길!! 이안은 이를 악물었다.

슈엘의 한마디에 담긴 감정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이. 얼굴이 지금껏 싫었던 적은 없었다.

왕의 피를 증명하는 얼굴..

그런데 이제 싫어.

이런 얼굴 따위.

네가 사랑하는 남자의 얼굴따위. 이젠. 증오스러울 정도야.

너의 시선을 빼앗을 수 있는 방법을..내게 알려줘.

뜨거운 불로 이 얼굴을 엉망으로 만든다면 

너는 나에게서 다른 남자를 보지 않을까?

이. 새빨간 머리카락을 까만색으로 물들인다면...

박혀있는 이 눈동자를. 빼버린다면

이제. 내게서 형님을 보지 않을까?

... 그게 안된다면.

“....미안...”

이 얄랑한 감정 따위로 널 상처 입힌 내가 

용서받을 수 있는 방법이라도

알려줘. 반려님.

제발. 부탁이야.

******

쥴리엣 공주가 제국에 온지도 삼일.

제국은 완연한 겨울이 찾아왔다.

창밖을 바라보며 쥴리엣은 눈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첫눈이 내리는 날 후안에게 고백할 셈이었다.

그러면 그날... 폐하는 나를 반려로 맞으실 테지.

낭만을 꿈꾸는 그녀가 생각해낸 작은 계획이었다.

쿡쿡-  웃으며 그녀는 자신이 반한 남자를 생각해본다.

후안·루비젝트·알

제국의 젊은 황제.

잘생긴 외모와 더불어 흔들림 없는 권력. 

그리고 황제에게 요구하는 능력까지. 

모든 것을 갖춘 남자.

그는.

다이아몬드였다.

이 세상의 중심에 있는 보석.

고귀하고 외롭고 아름다운. 차가운 보석.

그녀는 그를 갖길 원했다.

지금껏 갖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가졌던 그녀였다.

그녀에게 후안은 생애 최고의 선물이 될 것이다.

“문제는... 그 녀석인데 말이지.”

창문에 턱을 괴며 그녀는 생각에 빠졌다.

후안에게 들러붙는 여자 따위로 보이는 것이 싫어

느긋하게 그를 지켜보던 그녀가 황급히 제국으로 오게 된 것은

‘그’녀석 때문이다.

슈엘·알스·슈.

알스에서 온 왕자.

제국의 황제가 반려를 그것도 남자 반려를 들였단 사실은

온 대륙에 엄청난 이슈가 되었다.

그것도 소국의 볼품없는 평범한 왕자 따위를!

그녀에게 슈엘은 명백한 적이었다.

대단할 것 없는 사내가 폐하의 유일한 반려라는 사실이.

그녀를 화나게 했다.

“감히 어디라고 폐하를 넘보는 거야... 그 녀석.”

그가.

황제를 사랑하는 것은 알고 있다.

처음 보는 순간 그 정직한 눈동자에 거짓이 없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황제의 눈길도 받지 못했던 그날의

그 뒷모습을 그녀는 기억했다.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상처받은 남자의 뒷모습.

그녀는 당장이라도 웃음을 터뜨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거봐! 넌 나의 상대 따윈 되지 않는다니까!

완연한 우월감에 입 꼬리를 올리던 그녀의 시선에 누군가 비췄다.

”이안...왕자?“

선명한 레드의 빛. 제국 왕가의 상징인 새빨간 머리카락.

황제와 너무도 닮은 얼굴이지만

그보다는 더 여유가 느껴지는 얼굴.

창문 밖으로 보이는 이안의 모습에 그녀의 시선이 고정되었다.

기껏 제국에 온 그녀에게 이안은 형식적인 인사 외엔

어떤 대화도 , 만남도 청해온 적이 없었다.

그래서 더더욱 그는 그녀의 관심을 끌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듯 서 있던 그가 반가운 표정을 짓는다.

천하의 이안왕자가 저리 반겨주는 사람이라니?

쥴리엣은 조금더 자세히 그들을 살펴보았다.

“...알스의 왕자?!”

분명.그였다.

기운 없이 생긋이 웃으며 이안과 인사하는 남자.

성안을 산책하는 그들은 마치 친구처럼 다정했다.

아니.

그런 것이 아니야.

슈엘을 바라보는 이안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녀의 밤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저건.

마치. 연인을 보는 듯한 표정이잖아?

******

“반려님, 안녕!”

“이안님?!!”

놀란 얼굴로 슈엘이 이안을 바라보았다.

바람에 휘날렸던 긴 머리카락이 보이지 않았다.

짧아진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이안은 웃어보였다.

“어때, 잘어울려?”

“... 아, 물론 멋져요! 멋지긴 하지만...”

가볍고 자유스러운 그와 잘 어울리는 머리긴 했지만

갑자기 그 긴 머리를 자르시다니...

의아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슈엘에게

이안은 역시! 라는 장난스런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헤에? 그런데 오늘은 기분이 좋아 보이네?”

“네!”

슈엘이 생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오늘도 여지없이 슈엘의 방으로 놀러온 이안은 눈썹을 찡그렸다.

...보나마다 형님에 관한 일일테지.

며칠 째 어두웠던 얼굴이 환해진 것만 봐도 알 수가 있다.

... 조금 많이 슬프긴 하지만 말이지.

“그나저나 날씨가 이렇게 추운데 어째서 눈이 내리지 않지요?”

“음? 반려님. 눈을 좋아해?”

“그럼요! 그럼 이안님은 좋아하지 않아요?”

“나는 글쎄... 눈이라는게 말이지. 제국에선 질릴만큼 보는데다가 

눈이 오는 날은 길도 미끄럽고 스타일도 최악이 되버려서.”

“하하하. 그건 배부른 투정이라구요, 이안님.”

“투정?”

슈엘의 까만 눈동자가 어린아이처럼 웃고 있었다.

알스는 봄의 나라라 눈이 오지 않지요.

그래서 저는 언제나 눈을 상상하곤 했어요.

반려로 이곳에 오던 날.

제국은 온통 흰 눈으로 뒤덮여 있었죠.

하얀 가루가 온 세상가득 빛나고 있었어요.

정말... 아름다웠어요.

슈엘은 기억하고 있었다.

누구도 반겨주지 않았던 슈엘을 반겨주었던 제국의 하얀 눈을.

그리고.

붉은 색의 그와...너무도 잘 어울리는 순백의 색을.

“제국엔 눈이 자주 와서 그런 소릴 하시는 거예요. 

오랫동안 보지 못한다면 분명 그리워지실걸요?”

“과연 그럴까....”

슈엘은 그저 헤헤 웃을 뿐이었다.

그 미소에 이안은 싱긋이 입꼬리를 올렸다.

“어쨌건 올해의 첫 눈이 늦긴 하군. 겨울이 온지 벌써 한참인데 말이야.”

“첫 눈...”

“아참. 그거 알고있어, 반려님?”

“?”

“첫 눈에 관한 재미있는 전통...”

호기심 가득한 까만 눈동자를 향해 이안은 말했다.

“반려님. 첫 눈은 웃으며 맞아줘야해.”

“행복이요?”

“응. 첫 눈은 웃으며 맞아주는 것이 전통이라고.. 

그래서 제국의 사람들은 그 날, 꼭 행복해야만해.”

“... ..”

갈색 눈동자가 따스히 슈엘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첫 눈이 오는 날은... 아무생각 없이 웃자, 반려님.”

“예. 그래요. 이안님.”

첫 눈이 오는 날은...

아픈 가슴이라던가 슬픈 심장은 잊고.

웃어요, 우리.

저도

이안님도

그리고... 후안님도.

부디 웃으며 첫 눈을 맞기를... 

벌써 몇 번이나 슈엘은 거울을 바라보았다.

머리도 단정히 빗었고... 

시녀에게 부탁해 준비한 푸른빛의 옷은 단아한 색을 띄고 있었다.

이상하지 않지? 

하고 몇 번이나 거울을 확인한 슈엘의 심장은 띄고 있었다.

“앗차차. 잊으면 안되지.”

탁자위에 놓인 붉은색 주머니를 챙기며 슈엘은 방을 나섰다.

쥴리엣 공주.. 그녀가 온 뒤론 후안님께 

선물을 드릴 수가 없었다.

그것은 아마... 내가 겁쟁이이기 때문이겠지.

슈엘은 두려웠다.

늦은 밤 후안을 찾아가면 혹여나 그가 그녀와 함께 있을까봐...

지난날의 그때처럼.

금빛 머리카락이 그에게 안겨있을까봐.

너무도 무서워서 그의 방을 찾아갈 용기는 나지 않았다.

하하... 겁쟁이가 되어버렸구나, 정말 나.

스스로가 한심해도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다.

그때는... 몸을 파는 창부였지만 지금은... 다르니까.

그녀는 결코 한 순간 지나갈...그런 사람이 아니니까.

“에이- 그만두자, 이런 생각.”

고개를 내젖으며 슈엘은 걸음을 옮겼다.

쌓이고 쌓인 주머니속의 보석들의 묵직함을 느끼며....

똑-.똑-.

경쾌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이 시간에... 노크라니...?

쥴리엣이 제국에 온 후 언제나 두 사람이 함께하는 저녁시간이었다.

후안이 줄리엣을 바라보자 공주는 생긋이 웃었다.

“아참, 후안님께 말씀을 드리지 않았군요.”

“?”

“오늘 식사엔 슈엘님을 초대했습니다.”

후안이 뭐라 말할 틈도 없이 그녀는 노크소리에 응했고

이내 후안의 앞에 낯익은 얼굴이 나타났다.

“아,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후안님. ... 쥴리엣 공주님.”

뭐...야...

왜 이 녀석이 나타나는 거지?

며칠 째 보지 못했던 까만 머리카락.

여전히 정직한 까만 눈동자는 아이처럼 빛나고 있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쥴리엣 공주님.”

“저야 말로 응해주셔서 기쁘군요. 슈엘님.”

... 그녀를 향해 웃는 슈엘의 얼굴에 후안은 가슴이 아파왔다.

며칠...

못 본 것 뿐인데...

왜. 그렇게...

마른 거냐...

며칠 새 수척해진 슈엘의 얼굴에 후안은 가슴이 아파왔다.

슈엘이 흘깃 후안을 바라보다 눈이 마주치자 

이내 얼굴이 새빨갛게 물든다.

“그...근래엔 아무 일 없으셨죠?”

“... 응.”

“그래요...다행...입니다..”

... 잔뜩 긴장한 얼굴로. 떨리는 목소리로.

아무렇지 않다는 듯 후안의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저렇게나 떠는 주제에...

“하하, 그나저나 오랜만이네요, 후안님.”

보고 싶었습니다... 정말로.

입 밖에 내지 못할 말을 삼키며 슈엘은 

후안을 향해 미소 지었다.

세 사람사이의 디너의 주인공은 쥴리엣 공주였다.

그녀의 주된 이야기는 제국에서 보낸 요 며칠 간의 이야기였다.

제국의 귀족에게 선물 받은 와인의 맛이라든지...

근래에 듣게 된 음악이라던 지의 자잘한 이야기를 하던 그녀는 

흘낏 슈엘을 바라보았다.

“요즘은 너무 추워서 나가기도 싫으니 성에만 있게 된답니다.”

“그러세요? ”

슈엘은 있는 듯 마는 듯 이야기하던 그녀가 슈엘을 바라보자 

후안은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 철없는 공주가 대체 무슨 속셈인거지?

“그러니 슈엘님이라도 제 방에좀 자주 들러주세요.”

난처한 얼굴로 슈엘이 대답하려는 찰나 그녀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앗차! 슈엘님께는 어려운 일이죠?”

“네? 그게 무슨...”

“슈엘님께선 매일 이안님과 만나시느냐 바쁘실 텐데 말입니다.”

“?!!!!”

챙그랑.

한 순간 조용해진 방안에 차가운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후안이 들고 있던 나이프가 쟁반에 떨어지는 소리였다.

“어머~ 후안님. 뭘 그리 놀라시나요?”

그녀의 목소리만이 방 안 가득 울리고 있었다.

“후안님과 이안님께서 아주 각별한 사이라는 것은 

성 안에 유명한 이야기가 아닙니까.”

“공주님! 그런 말은 실례입니다!”

슈엘이 소리쳤지만 그녀의 말은 멈추지 않았다.

“실례라뇨? 그럼 제가 거짓말을 한다는 건가요?”

“그런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 이안님이 후궁에 든다는 걸 부정할 수 있습니까?”

슈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의 얼굴을 보며 공주는 표독스런 미소를 띄었다.

“슈엘님은 과연 훌륭한 제국의 반려시군요. 

후안님이 아닌 이안님까지도 상대해주시다니.”

“그만하십시오, 공주님!”

그녀의 비꼬는 말 속에 담겨 있었다.

슈엘을 향한. 경멸이.

[당신은 제국의 왕가에 바쳐진 남창이야-.] 라고.

슈엘은 황급히 후안을 바라보았다.

아니...예요. 후안님.

그녀의 말을 믿으시는건.... .............

슈엘의 눈동자가 순간 어두워졌다.

무표정한 후안의 얼굴을 보는 순간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차갑고.

차가워서.

슈엘의 감정마저도 얼릴 듯한 그런 눈빛이었다.

불안한 얼굴을 한 슈엘을 향해 후안이 입을 열었다.

“공주의 말이 사실인가?”

“아닙니다. 이안님과 제가 어떻게...”

부들부들 떨리는 슈엘의 손이 다급히 옷자락을 쥐었다.

더 이상 떨지 않으려는 노력이었다.

“그럼 이안이 매일 후궁에 든다는건?”

“그건...”

“어서 대답해.”

그의 눈빛과 감정 없는 목소리가 무서워

온 몸이 덜덜 떨릴 지경이었다.

슈엘은 용기를 내어 그를 바라보았다.

“... 그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건!”

촤악!!!!!!

슈엘이 말을 잇기도 전에 차가운 것이 슈엘을 향해 날아왔다.

...후안의 손에 들려있던 잔을 채웠던 포도향의 와인이었다.

뚝...뚝... 떨어지는 보라빛 알콜에 

슈엘의 머릿속은 엉망이 되었다.

“변명은 필요 없다!”

“... ....”

“짐도 잊고 있었소, 공주. 

알스에서 온 반려는 

엉덩이가 가볍다는 사실을 말이요.”

“...쿡쿡. 말이 지나치신걸요...폐하.”

꺄르르르르..... 그녀의 웃음소리가 

슈엘의 귓속에 윙윙 대었다.

말을...해야 하는데.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하는데...

어떡하면 좋아...

말을... 할 수가 없어.

아...무런 소리도 낼 수가 없어...

떨리는 손을 주체 할 수가 없어...

엉망이 된 슈엘을 지나치며 후안은 중얼거렸다.

“경박한 놈.”

탕-.

닫혀진 문.

셋 이던 방은 이제 한 명.

슈엘은 흔들리는 촛불과 

끝내 주지 못한...  의자위의 붉은 주머니를 바라보았다.

빙그르르...

입 꼬리가 올라간다.

두 눈이 휘인다.

바보같은 주인을 가진 입과. 눈은

결국. 

몇 백번이고 연습한 그 표정밖에는 지을 수가 없다.

“하......하하하...”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런게... 아니라구요...”

... 

심장은 이렇게 찢겨 가는데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처절히 웃는 것 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슈엘님! 대체 무슨 일이신건가요?!”

“... ....”

얼굴가득 축축이 젖어 돌아온 슈엘을 향해 

시녀 한 명이 걱정스런 얼굴로 그를 맞았다.

오랜만의 폐하와의 식사라며 즐겁게 나갔던 슈엘이었다.

즐겁게 돌아오는 슈엘님의 얼굴을 보기위해 기다렸는데...

이런 모습이라니.

물에 적신 손수건으로 슈엘의 얼굴을 닦으며 그녀는 말했다.

“분명 폐하와 저녁식사를 하신다고...”

“... 응. 했어요, 저녁식사.”

언제나 따뜻했던 목소리엔 아무런 감정도 베어있지 않았다.

마치.

감정이 없는 물건처럼

메마른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포도향이 좋지요?”

“... ...”

“폐하의... 향기랍니다.”

폐하에겐 항상. 와인의 향기가 나지요...

그의.

향기가 베어버렸어요.

그런데... 왜지...

왜 이렇게.

그의 향기가...

“...가슴이 아프죠?”

“.................슈엘님.”

“... 말해줘요.”

“... ...”

“사랑이란거... 끝이 있는 거죠?”

“... ...”

“..........끝이 있는 거죠?”

끝.이 없는 거라면...

나... 영원히 이렇게 심장이 아플까요?

그렇다면...난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어-.

달칵....

어두운 새벽녘 들리는 문소리에 슈엘은 잠이 깼다.

몇 시간을 설치다 겨우 든 잠이었다.

이 시간에... 누구...?

몸을 일으키던 슈엘을 덮친 건 커다란 남자의 그림자였다.

...후안님?!

익숙한 체취와 체온...

어두운 밤. 보이지 않는 그의 몸이 슈엘을 억눌렀다.

혼란스러움을 느끼며 슈엘은 그의 몸 가득히 나는 포도향을 맡았다.

진한.알콜의 향.

왜 그가 이곳에 있는가 보다는 걱정이 앞선다.

왜 이렇게 술을 드신 거예요.

몸에...좋지 않은데.

이렇게 취할 정도로... 힘든 일이 있던 건가요?

츕---

후안의 입술이 슈엘의 입술을 찾아 격렬히 맞부딪쳤다.

거친 키스였다.

와인향기가 가득 슈엘의 입안에 번졌다.

그의 키스는 언제나. 이렇듯 절실했다.

애정을 갈구하는...

어린아이처럼 거칠게 슈엘의 입을 탐하곤 했다.

“후...후안님.. 읏...”

아플 정도로 거칠게 슈엘의 유두에 입 맞추는 

후안의 머리를 잡으며 슈엘은 이를 악물었다.

슈엘의 가슴 아래로- 아래로 향하는 후안의 입맞춤에

슈엘의 온 몸이 달아올랐다.

그의 혀.

그의 손.

그의 몸.

그의 체온.

그의... 향......

.......기...

“?!!!”

후안의 머리를 감싸 안는 순간 사라졌던 슈엘의 이성이 돌아왔다.

이......향기는.....

이... 머리의 향은.........

후안님의 향기가 아냐.

“..........만.”

-다른 여자의. 향이었다.

“그만!!!!!!!!!!!!!!!!!!!!!!!!!!!!!!!”

후안님의 향기가 아니었다.

그녀의. 향기.

..........이질적인......... 이국의 향기.

머릿속이 엉망이 되었다.

그제야. 떠오른다.

금빛 머리카락을 가진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이.

... 달아올랐던 몸이 차갑게 식어간다.

보이지 않는 그의 얼굴엔 시선조차 둘 수가 없었다.

“나......나를 안지 말아요.....”

“... ....”

울컥.

나오려는 눈물을 참으며 슈엘은 말했다.

그가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슈엘은 무서웠다.

그만해...그만해, 슈엘.

그런 말 따위 해서는 안되잖아.

안되.............는데

분명 그런데 멈출 수가 없다.

창문 밖으로 까만 구름만이 슈엘의 눈에 들어왔다.

달빛이 비치지 않는 어두운 밤.

슈엘의 온 가슴이. 

몸이. 

감정이. 

떨리고 있었다.

“제발 부탁이니...................”

달빛 없는 밤에. 취한 것이다.

“그녀를 안은 손으로.........나를 안지 말아요.........”

“... ...”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심장소리만이 방 안 가득 울려퍼졌다.

이것은 나의 욕심이었다.

“............하-.”

“................................”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거냐.”

술에 취한. 그의 목소리가 차갑게 들려왔다.

“누가 그 따위 말을 들어줄 줄 안거냐?!”

“....................................”

“몇 번 널 안아줬다고 해서 잊은 거냐. 

슈엘·알스·슈. 넌 단지- ”

“!!!!!!!!!!!!!”

슈엘이 다급히 자신의 두 귀를 막았다.

그러나 후안은 거칠게 슈엘의 두 손을 잡아챘다.

슈엘의 귀 가까이 후안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밤의 반려야.”

“...................................”

“내가 원할 때 뒤만 대주면 그만일 뿐인 녀석이란 말이다.”

들으면......................

.....안돼...........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또렷이 들려왔고 

방안 가득 메웠던

슈엘의 심장소리는 이미. 들리지 않았다.

입을 맞추는 후안의 차가운 혀의 감촉.

슈엘의 눈가엔 눈물이 맺혔다.

사랑엔..........끝이 있는 거죠?

..........내 사랑도. 언젠간 끝나는 거죠?

그렇다면...

누구라도 좋으니 제발

이. 감정을................끝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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