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8/25)

<18>

“후안님-. 좋은 꿈 꾸셨나요?”

“으음.”

이제는 후안의 방에 찾아가 슈엘이 인사하는 일은 없었다.

지방순례이후 후안이

매일같이 슈엘의 방을 찾았기 때문이다.

슈엘이 눈을 뜨면

언제나 꿈처럼 그가 있었다.

아침이 되면 슈엘은 그 전날 만들었던 보석을 후안에게 보여주곤 했다.

미소 섞인 아침인사와 함께.

<< 반려로 맞아주세요 >>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수많은 밤을 보내면서

후안의 마음은 점차 녹아가고 있었다.

이 녀석은 밤의 반려다.

라는 사실은 그의 마음속에서 변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특별한' 밤의 반려라는 수식어가 생겼다.

“슈.”

“네...네엣.”

언제고. 이름을 부르면 저렇게 놀란 얼굴이다.

예전 같았으면 너- 라던가 반려- 라고 불렀을 이름이

순례이후에는 입에 붙어버렸다.

슈.

... 녀석에게 참 잘 어울리는 이름.

내가 이름을 불러준것만으로

빨갛게 달아오른 녀석을 보면 괴롭혀주고싶은

마음이 가득하다.

“몸은 괜찮나?”

“네? 네! 네에, 괜찮아요!”

벌써 며칠이나 쉬지 않고 후안을 받아들였던 몸이다.

아무리 튼튼한 녀석이라도 아프지 않을리 없지.

그런데도 후안은 슈엘을 안는 것을 하루라도 쉴 수 없었다.

후안에게 안기기 위해 준비된 여자는 수두룩하건만

이상하게도 지금, 젊은 황제의 마음을 빼앗은 것은

저 건장한 남자였다.

아름다운 것과는 거리가 한참 먼 저 평범한 녀석이.

“정말인가? 조금이라도 힘들거나 하다면...”

“아뇨! 아프지 않아요! 이렇게나 건강한걸요!”

당황한 얼굴로 아프지 않다고 외치는 모습.

후안은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고 있었다.

저 녀석은.

나에게 빠져있다.

이제 그것은 후안에게 확신이 되었다.

조금이라도 후안이 오늘밤 오지 않을 것처럼 말을 하면

녀석은 당황한다.

혹시나 내가 오지 않을까 어떻게든 내 마음을 돌리려 애를 쓴다.

그 난처해하는 모습이 후안은 즐거웠다.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않는 녀석이었지만

녀석이 자신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쯤은 불 보듯 뻔했다.

“아! 그렇지-.”

후안이 말을 이을까 난처해하며 슈엘이 작은 주머니를 

후안에게 내밀었다.

언제나.

후안에게 주곤 하는 작은 주머니.

여태껏 한번도 후안이 그걸 착용한 적은 없지만 슈엘의 선물은

단 하루도 끊긴 적이 없었다.

주머니 안의 물건을 꺼내본 후안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붉은 루비의 반지. 

... 반지는 처음이었다.

슈엘이 보낸 많은 선물 중엔 여러 가지 세공품이 있었지만

반지만큼은.

보낸 적이 없었다.

“마음에... 드시나요?”

아이처럼 당황했던 얼굴을 사라지고

사랑을 하는 남자의 눈으로 슈엘은 후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까만 눈동자에는 따스함이 가득했다.

“받아...주실 거죠?”

“.... ....”

... 반지는 그 어떤 것보다 고귀하고 특별한 선물이야.

쉽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지.

... 넌 이것을 만들 때

얼마나 많은 감정을 담은거지?

내게 이것을 건내줄때.

... 얼마나 많은 용기를. 냈을까.

후안은 그제야 슈엘의 손이 떨리고 있는 것을 눈치 챘다.

혹시나

그것을 뿌리치고, 싫어하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이 그 속에 있었다.

후안은 또 한번 이상한 감정을 느끼고야 말았다.

이 녀석을 보았던 그때부터 느껴졌던 이 감정.

심장이.

매여지는.

아픔.

후안은 슈엘을 바라보며 말했다.

“고맙다.”

“... ....”

슈엘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금세 물기가 어려 버린 두 눈을 가리며 슈엘은 웃고 있었다.

생긋이 웃고 있는 입이 조그맣게 대답했다.

“...네.”

-네.

... 네.

후안님.

... 처음으로 해준. 감사의 인사에

저 또한

마음 깊이.

감사드려요.

“하하.... 유난히 더 좋은 아침이지요, 후안님?”

슈엘은 이 작은 행복이 부디 영원히 지속되기를 기도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작은 바람은 산산이 부서졌다.

후안에게 도착한 한통의 편지와 함께.

******

어두운 밤. 슈엘은 초초한 마음으로 후안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쯤이면 오시곤 했는데 어째서 오시지 않는 거지.

책을 읽어보고 낮에 세공했던 보석을 몇 번이나 손봐보지만

1초, 1초가 1년처럼 길게 느껴지는 슈엘이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왔던 후안님이시다.

오늘 하루쯤은 오시지 않을 수도 있어.

오늘 하루쯤은-.

슈엘의 심장이 무겁게 가슴을 짓눌렀다.

... 오늘 하루가 아니라면?

오늘만이 아니라. 내일도 오시지 않는다면?

내일 모래도.

그 다음날도.

... ... 이제. 찾아와 주시지 않는다면?

언제고 슈엘의 마음 속 에 있던 불안감이었다, 그것은.

약속하지 않은 방문.

그저. 후안님이 내키지 않는다면 언제든 오지 않아도 상관없는

밤의 반려.

“... ... 욕심내지마.”

슈엘은 거울안의 자신을 바라보며 말했다.

언제고 자신에게 건 주문이었다.

“그를. 가지려 하지마.

자그마한 행복에 만족해. 

웃어... 슈엘.”

슈엘은 입 꼬리를 올렸다.

하하.

오랜만이다...

웃는 연습.

요 근래에는 정말 진심으로 행복해서 이런 미소연습같은건

하지 않아도 됐었는데.

두 눈을 휘이고.

입 꼬리를 올리고.

거울안의 웃는 얼굴은 명백한 가짜지만

그래도 어쩔 수가 없다.

몇 번을 겨울을 향해 웃은 슈엘은 두 손을 꼬옥 쥐고

방을 나왔다.

이대로 후안님이 오시지 않는다면

밤인사라도 해야지, 하는 결심에서였다.

오랜만에 향하는 후안님의 방이건만

슈엘의 걸음걸이는 예전처럼 힘차지 못했다.

그때에는.

후안님이 다른 남자를 안고 있어도

힘차게 걸어갈 수 있었는데.

“문을 열면 다른 남자가 후안님에게 안겨 있어도

웃었어야만 했지“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경험이다.

기껏 용기를 낸 슈엘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제 다시 시작인건가 하는 불안감이 머릿속에 가득했지만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하고 

힘없이 단념하는 자신이 있었다.

후안의 방문 앞에 서서 슈엘은 커다랗게 숨을 내쉬었다.

하하-.

정말. 이런 거 오랜만이잖아?

힘내자- 라고 외치며 노크를 하려는 찰나

커다란 목소리가 안쪽에서 들려왔다.

“형님. 쥴리엣 공주를 초대한 게 사실입니까?!”

“... 그래.”

....이안님의. 목소리.

... ‘쥴리엣 공주’...?

“루시아에서 먼저 보내온 편지다. 

이곳에 오고 싶다는 공주의 바람대로 초대를 한 것뿐이야.”

“그건 단순한 초대가 아니지 않습니까.”

루시아라면 제국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국가로

넓은 토지와 자원을 가진 대국이었다.

그런 곳에서 편지가 오다니...?

슈엘의 손은 허공에 멈췄고

이안의 목소리는 선명히 슈엘에게 들려왔다.

“그녀를 왕비로 맞아들이시려는 거군요.”

.........................

“쥴리엣공주는 현재 왕비 제1후보입니다.

그녀의 방문을 막지 않는다는 건 그녀를 왕비로 맞으시겠다는 거겠죠?“

“..........................”

....  가슴이 두근거렸다.

세차게.

세차게.

모처럼 용기를 냈던 일이 무색하게

슈엘의 심장은 찢겨지고 있었다.

제발.

대답하지 말아요.

아니라고.

말해줘요.

제발.

“물론...이다.”

.......................................................

털썩.

슈엘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다리에 힘에 풀려 일어날 수 없었다.

손가락부터 발끝까지 온 몸이 떨려왔지만

아무런 소리도 낼 수가 없었다.

“... 공주를 반려로 맞아실거라면 알스의 반려를 제게 주십시오.”

“거절한다.”

“제게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를 제게 주기로.”

.... .....

“그건, ....그건 내가 질릴 때까지...의 얘기야.”

... 절망감.

숨이 막힐 정도의 절망감에 슈엘은 입을 막았다.

숨을 내쉴 수 없어 괴로운데도 손을 놓을 수는 없었다.

이대로라면

소리질러버릴거야.

괴로워서

소리쳐 버릴 거야.

바들거리는 다리로 슈엘은 몸을 일으켰다.

벽에 손을 기대어 겨우겨우 한걸음 한걸음을 내딛으며

슈엘은 입을 막은 손을 놓지 않았다.

[고마워.]

얼마 전 아침.

웃고 있던 그가 생각났다.

그의 얼굴에 안심한 자신이 바보였던 것이다.

그는. 단 한번도

내 선물을 단적이 없는데.

작은 브로치 하나 단적이 없는데.

사실 내 선물같은건

이미 버려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매일 밤 내게 들러줬던건 단순히.

내 몸을.

원했을 뿐인데.

뭘 그렇게 오만했던 거냐, 슈엘·알스·슈.

그가 몇 번 안아줬다고

한심한 착각에 빠져있던거야?

“흑...................”

결국은 눈물이 터져 나오고야 만다.

후안을 기다렸던. 자신의 방에 도착하자 참고 참았던

아픔이 쏟아져 내리고야 만다.

이상한 일이야. 이럴 수는 없어.

다. 예상했던 일이잖아.

후안님께 진정한 반려가 생기는 일 같은 건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던 사실이었잖아.

“흐윽...................................”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가슴 아프지?

심장이

타들어가서...

죽을 것 같아.

아파서.

죽어버릴 것 같아.

슈엘은 바닥에 앉아 탁자의 거울을 짚었다.

거울 안에서 흉하게 울고 있는

까만 머리카락과

까만 눈동자를 가진 남자를 보며 슈엘은 말했다.

“울지마.”

그래도. 남자는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울지마!”

이대로 영원히. 눈물이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울지 말란 말이야!!!!”

울지마!!

울지마!!!

울지마!!!!!!!!!!!!!!!!!!!!!!!!

슈엘은 울부짖었다.

거울속의 처량한 남자와

얼굴도 모르는 한나라의 공주.

그리고.

[내가 질릴 때의 얘기야. 

그 녀석에게 질릴 때가 되면 네게 주겠다.]

너무도 사랑해

미워하지 않을 줄 알았던 남자를 향해

"흐윽...... 흑... 흐아아아아악!!!!!!!!!!!!!!!!!!!!!!!!!!!!!!!!"

소리높혀 울부짖었다.

후궁을 향해 걸으며 후안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자신을 바라보았던 갈색 눈동자는 진심이었다.

후안은 기억하고 있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그날, 알스의 반려를 달라던 그때의 이안을.

[형님의 반려를 제게 주십시오.]

그렇게 말하던 그의 얼굴은 분명 여유가 있었다.

장난인가 싶을 정도의 가벼움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새,

그렇게 절박해진거지?

................네가 어째서.

진심이 되어버린거냐.

동생을 향한 질투심이 타오르지만 그 감정을 그 앞에

내비칠 수는 없었다.

밤의 반려를 향한 질투심 같은걸 내보일 순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쥴리엣공주는 현재 왕비 제1후보입니다.

그녀의 방문을 막지 않는다는 건 그녀를 왕비로 맞으시겠다는 거겠죠?]

... 이안의 말을 떠올리며 후안은 스스로를 이해시켰다.

쥴리엣 공주는 루시아의 왕이 가장 아끼는 막내공주였으며

무엇보다도 후안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철없고 오만한 공주는 후안을 향한 마음을 내비치곤 했다.

루시아는. 제국 다음으로 가는 강국이다.

그쪽에서 이렇듯 자리를 마련해준다면 결혼을 하면 그만이다.

적당히 공주에게 맞는 남자를 연기해 그녀를 갖는다면 그만이다.

제국으로서는 최고의 정략결혼인 셈이었다.

[후안님-.]

가슴이 따끔거리며. 까만 눈동자가 생각났다.

매일 아침 자신을 보던 따스한 눈동자가 생각나자

후안은 짜증이 났다.

“어차피 그 녀석은 밤의 반려 일뿐이야!”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밤의 반려 따위 때문에 반려를 맞지 않는 자는 없어!

이게 다 네 녀석 때문이다, 슈.

왜 그렇게 바보 같을 정도로 정이 많은 거냐.

도대체 왜 그렇게.

“행복하다는 눈빛을. 하냔 말이다.”

이것은 일생, 후안에게 없던 감정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이토록 따스하게 바라보았던 건

이토록 따스하고 한결같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건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그러데.

그런 것이 이토록 기분이 좋을 줄은 몰랐었다.

이런 ‘설레는’감정같은건 몰랐었다.

길게 한숨을 내쉬며 후안은 슈엘의 방 앞에 도착했다.

평소보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자지 않고. 날.

기다리고 있겠지.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간 후안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캄캄한 어둠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방안에서 슈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나를. 사랑하세요?”

“?!”

“... 나를. 사랑해 줄 수 있나요?”

“.... ...”

“ ... 나만. 사랑해 줄수는 없나요?”

대체 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후안이 화를 내지 못할 정도로 낮고. 슬픈 음색이었다.

어떤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어둠 속에 후안은 서있었다.

한 참후

낯익은 웃음소리와 함께 슈엘의 손에 들려있던 등불이 켜졌다.

“하...하하!”

슈엘이 빙긋이 웃으며. 후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놀랐죠, 후안님? 어때요, 제 연기, 재밌지 않았어요?”

까만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이며 후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제야 후안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안심할 수 있었다.

따스하게 웃는 슈엘을 보며 후안은 생각했다.

그래... 언제나 옆이 있는 녀석이다.

왕비를 맞고 이렇게... 잊지 않고 들러주면 되겠지.

비록 밤의 반려지만. 평생 아껴주면 되겠지.

이녀석 또한 그것으로 만족하겠지.

“하하하핫. 후안님도 조금은 웃어봐요-. 하하하...”

슈엘의 미소를 보며 후안은 나지막한 미소를 띄었다.

평소보다 어두웠던 방안. 그래서 그는 알지 못했다.

빨갛게 부어오른 슈엘의 눈가와

촉촉이 눈물이 맺힌 까만 눈동자를.

심장의 아픔을 머금고 웃는.

그. 미소의 의미를.

******

제국에 와 맞은 아침은 

겨울과 봄과 여름과 가을의 아침.

몹시도 추웠던 겨울의 아침. 당신은 내 곁에 없었어요.

그래서 나는 당신에게 인사하기 위해

늘 용기를 내야 했었죠.

여름의 아침. 당신은 내 곁에 있었어요.

그것이 사랑 때문이 아니란 걸 알아도

나는 꿈같은 그 상황이 너무 기뻤어요. 

가을의 아침. 

이제 눈을 뜨면 당신이 보이는 꿈같은 상황이

당연한 듯 펼쳐졌어요.

이제... 다시 돌아온 겨울의 아침.

“...............후안님...”

슈엘은 잠이든 후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른 아침 일어나 그의 얼굴을 본 날은 이제 셀 수도 없다.

아침 햇빛을 받는 그의 얼굴은 수십 번 수백 번을 보아도

언제고 설레였다.

그에게 안겨있는 내내 하지 못했던 말은 중얼거린다.

당신의. 이름.

사랑하는. 남자의 이름.

“후안님....”

‘당연’하다는 생각은 한번도 한 적 없어요.

언제나 후안님이 나를 찾아와줘서 기뻤어요.

이후로도 욕심내지 않을게요.

당신의 옆 자리 같은건... 당신의 사랑 같은건

이제 욕심내지 않을 테니까

아침 햇빛속의 당신의 얼굴을.

볼 수만 있게 해주세요....

겨울을 맞는 제국은 오랜만에 분주한 아침을 맞이했다.

루시아로부터 오는 특별한 손님 때문이었다.

온 성안의 사람들은 분주하게 청소와 파티를 준비했다.

그 모습에 슈엘은 작게 한 숨을 내쉬었다.

“슈엘님. 슈엘님-.”

“... ...”

“슈~ 엘~ 님!”

“아!! 앗, 네, 네에...”

슈엘이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자 그의 앞엔

슈엘의 수발을 드는 시녀 몇 명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뭘 그리 생각하고 계세요?”

“하하... 그냥 대단하다 싶어서. 역시 루시아국의 공주님이랄까.

환영준비가 굉장한데요.“

“으음, 뭐. 일단은 루시아국의 보물이라 불리는 귀한 공주님이니까요.”

“... ....”

슈엘은 그녀들의 말투에서 공주에 대한 적대감을 느꼈다.

‘일단은’이라.

본래 성안에선 무겁게 입을 다물어야할 시녀들이지만

그녀들은 슈엘앞에선 언제고 솔직했다.

눈치빠른 그녀들은 알 고 있었다.

현 황제폐하의 유일한 반려인 이 먼나라의 왕자님은

누구보다 인자한 성품을 가졌다는 것은.

덕분에 슈엘은 언제나 얌전하고 나서는 법이 없는반면

성 내의 시녀와 신하들 사이에선 인기가 높았다.

“그나저나 슈엘님. 어서 가셔야죠!”

“응? 가다니....”

“그 유명한 쥴리엣 공주가 오신다구요! 그 공주님,

성격은 재수없지만 외모만큼은 굉장한 미인이라구요!“

뜨끔.

슈엘의 심장속으로 그녀의 말이 베어들어왔다.

“맞아요. 폐하의 유일한 반려님인 슈엘님이신데 질 순 없잖아요.“

“어차피 난 남자예요! 질 수 없다던가 그런것이...”

그러나 그녀들은 당찼다.

시녀들이란 본디 자신이 모시는 주인이 가장

아름답고 반짝이길 바라는 법이었다.

“슈엘님은 정말 멋진 남자예요! 저희들이 보장하죠.

그러니까- 더 멋져져서 공주의 기를 죽이는 거예요!

아셨죠?“

슈엘의 팔을 잡으며 한 시녀가 기운차게 윙크했다.

슈엘은 봄축제때의 악몽을 떠올리며 반항했지만

언제고 남자는 여자를 이기지 못하는 법이다.

“쥴리엣 공주는 어떤 분이시죠?”

능숙한 솜씨로 슈엘의 머리를 정리하던 시녀가 대답했다.

“루시아 국왕의 소중한 막내공주님이란건 알고 계시죠?”

“... 응.”

“정말 아름다운 분이세요. 마치 여신처럼.”

“.... ....”

“하지만. 아름다움이란 아름다움은 모두 외모로만 

쏟아낸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마음은 그리 예쁘지 않아요.

고집 세고, 오만한 공주님이시죠.“

이상하게도. 가슴이 아파왔다.

험담에 가까운 그녀의 이야기에 조금이나마 

다행이라고 여기는 이 감정이 너무도 비참했다.

슈엘은 두 손을 마주 잡고 그녀를 떠올려보았다.

막강한 힘을 가진 나라의 귀한. 공주님.

남자를 유혹하는 입술과

따뜻한 가슴을 가진... 

여자.

얼굴도 모르는 그녀에 대한 질투심이 점점 커져가지만

슈엘은 누구에게도 이런 얘기를 할 수 없었다.

그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으며 얘기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날이 어두워질 무렵. 

제국의 성은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평소보다 밝은 빛.

그녀를 환영하기 위함이다.

하얀 정장을 입고 성의 정경을 바라보며 슈엘은

처음 자신이 제국에 왔을때를 떠올려 보았다.

내가 이곳에 왔을땐 간단한 절차를 밞는 것 뿐이었지.

‘반려’로 왔음에도 누구도 날

환영하지 않았어.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웃긴 했지만 슈엘은 결코

바보가 아니었다.

성에 들어서자 자신을 바라보는 그 시선의 의미를 그는 알고 있었다.

밤의 반려에 대한.

동정...

경멸...

혹은. 

갑자기 반려를 맞이한 황제에 대한 의아함.

어느것하나 따스한 눈빛이라곤 없었다.

게다가 그렇게 만나길 고대했던 후안님마저도 

차가운 눈으로 날 보았었다.

"... 그녀에게만큼은 그러지 않으실테지만.“

사실은 알고 있었다.

내가 아닌 아름다운. 형이었더라면... 

후안님께선 웃으며 맞아주었을거란 사실을.

남자다운 몸과 생김이 그의 취향이 아니었기에

그토록 

차가웠던 것 ... 쯤.. 은...

“... ....”

슈엘은 걸음을 멈추었다.

커다란 분수가 있는 정원안 깊숙한 장소.

그 곳에 한 여인이 서 있었다.

...어째서?

왜 하필

가장 만나고 싶지 않았던

사람을 만나는게 되는거지.

슈엘의 두 손이 떨려왔다.

두 다리도 조금씩 떨려왔다.

‘공포’처럼 다가온 그녀를 향해 슈엘은 고개를 숙였다.

밤하늘 아래 반짝이는 금빛 머리카락.

고풍스런 웨이브가 너무도 잘 어울리는 우아한 얼굴.

고집 세 보이는 블루의 눈동자.

이국의. 아름다움....

“만나 뵙게 되서 반갑습니다.

쥴리에뜨·루시아·쥰 공주님-.“

-루시아에서 온 아름다운 공주.

그녀였다.

고개를 숙인 슈엘을 향해 쿡-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슈엘의 정중한 인사에 그녀는 웃고 있었다.

입꼬리를 올리며 그녀는 부채로 얼굴을 가렸다.

“어머나~? 당신이 그 유명한 알스의 반려?”

서로에 대한 예의같은건 그녀는 이미 예전에 무시해버렸다.

루시아왕의 막내딸로 애지중지 길러진 그녀는

딱 한가지 누구보다 자신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것은.

이 사람을 무시해도 되는가, 안되는가에 대한 기준을

재는 능력이었다.

그리고 슈엘의 선한 눈동자를 보자마자 그녀는 기준을 내렸다.

이 사람은. 마음껏 무시해도돼.

어차피 그 쪼그만 나라에서 팔려온 밤의 반려같은건

이런 기준조차 내릴 필요가 없지만 말이지.

“그나저나 공주님께선 왜 여기에...”

“흥, 당신에게 말해줄 이유는 없잖아?”

혼자 본성으로 가 폐하의 앞에 나타나 그를 놀래키려는 셈이었다.

기껏 본성까지 안내하는 시녀를 떼어놓았는데

정원에서 길을 잃어버리다니!

-이런 사실을 자존심 강한 그녀가 말할 리가 없었다.

그렇습니까...하고 선한 눈동자가 애써 웃는 모습을 보자 

번뜩! 하고 그녀의 눈이 반짝 빛났다.

“참-! 당신있지.”

“...슈엘입니다. 쥴리엣공주님.”

“그래, 슈엘. 당신한테 부탁이 있는데 말야.”

그녀가 손을 들어 그녀의 뒤에 있는 분수대를 가리켰다.

“저 분수대속에 내 중요한 물건이 빠져버렸는데 좀 건져줘..“

“중요한 물건이요?”

“그래. 어서!!”

거의 명령조에 가까운 부탁.

아무리 그녀가 불편해도 슈엘은 누군가의 부탁에 약했다.

분수대의 난간위로 슈엘은 살짝 발을 담구었다.

대체...어떤 걸 말하는거지?

귀고리라던가.. 그런 걸 말하는건가.

어두운 밤이라 가뜩이나 보이지 않는 물건을 찾아

분수바닥을 꼼꼼히 살펴보는데

순간 그녀의 손이 슈엘의 몸을 밀었다.

“으앗!!!”

풍덩-!

커다란 소리와 함께 슈엘은 분수대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차갑게 언 물이 슈엘의 온 몸을 흠뻑 적셨다.

“고, 공주님! 대체 이게 무슨....”

“깔깔깔. 바보같이 이런 장난에 당할줄이야.”

그녀는 소리내어 웃었다.

슈엘을 내려다보는 눈동자엔 끝이없는 오만함이 담겨 있었다.

자신의 짖궂은 장난에 만족한 듯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물에 젖은 꼴이 아주~ 잘 어울려, 알스의 왕자님. 쿡쿡.”

“... ....”

슈엘은 그제야 깨달았다.

이 예의없는 공주에게 모욕당했음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지만 슈엘은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대국의 공주님이어서가 아니었다.

단지.

그녀는.

후안님이 반려로 맞을 사람이니까.

누구보다도 후안님의 옆자리에 적합한 자라고 했다.

후안님께 필요한 힘과 재력을 줄 수 있는...

그것을. 이런 일로 망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슈엘은 이를 악물었다.

화를 참는 그 모습에 쥴리엣은 더더욱 커다랗게 웃었다.

“뭘 그렇게 쳐다봐? 그곳에 계속 있을 셈이야?

흐음~ 감기에 걸려도 난 몰라.“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화를 삭이는 목소리. 그녀는 즐거웠다.

한없이 남을 깔아뭉갤수 있는 이 기분을 그녀는 좋아했다.

그것도 그 상대가 고귀한 존재면 존재일수록

그녀의 쾌감은 커져간다.

기껏 단정한 것이 무색하게 엉망이 된 슈엘을 앞세우며

그녀는 걸음을 내딛었다.

알스의 반려?!

기껏 폐하께서 들여온 반려가 저 자란 말이야?

...쿡쿡.

저런 남자따위, 

이 쥴리엣의 상대따윈 되지 못해.

갑작스런 공주의 등장에 성안의 사람들은 웅성대었다.

정원에서 사라져 버렸던 공주가 뒤늦게야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쥴리엣 공주님, 깊은 반가움으로 인사드립니다.”

“여전히 아름다우시군요. 오랜만에 얼굴을 뵙습니다.”

“오시는길이 고단하진 않으셨는지요.”

그녀에게  인사하기 위해  이른시간부터 성에 와있던

몇몇 귀족들이 그녀에게 인사했다.

그녀가 빙긋이 웃으며 그들을 대했다.

“먼 길이었지만 힘들지 않았답니다. 

황제폐하를 뵈러 오는 길인걸요.“

그녀가 흘낏 슈엘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귀족들과 당당히 말을 주고받는 그녀를 보며

슈엘은 주먹을 꾸욱 쥐었다.

환하고 아름답게 치장한 공주.

후안님의 반려가 될 것이 확실한... 여인.

그 옆에 서 있는 내 꼴은

초라해.

흠뻑 젖은 옷과.

추위에 떨려오는 몸.

그리고 별볼일없는 밤의 반려라는 직책이

슈엘을 더더욱 비참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어머, 슈엘님. 벌써 후궁으로 가시는 건가요?”

“............”

아까와는 다른 여자가 슈엘의 앞에 서 있었다.

오만한 말투는 여전하지만 예의를 지키는 이국의 공주님.

분할 정도로 다른 자의 시선을 의식할줄 아는

교활한.... 아가씨.

지끈.

심장이 아파왔다.

슈엘은 그녀에게 고개를 숙인 후 몸을 돌렸다.

무언가 무거운 것이 심장을 꾹꾹 누르고 있었다.

심장의 아픔.

더 이상.

이 곳에 있을 수 없어

그녀를... 볼 수가 없어.

그러나 슈엘이 문을 향해 걷는 순간 성안으로 막 들어오는

한 남자가 있었다.

큰 키에.

붉고 긴 머리카락.

심홍의 눈동자를 가진.

나의. 남자.

“... ....”

슈엘은 발을 멈추었다.

까만색 정장을 차려입은 그의 모습에 가슴이 뭉클하다.

하하. 정말... 멋져요.

검정색 정장이 정말 잘 어울려요, 후안님.

그것은.

그녀를 위해서지요?

슈엘은 가만히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어떤... 말을 해야하지?

그녀의 앞에선 그를 향해 어떤 얼굴을 해야하지?

평소처럼.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눈물이 핑 도는 것을 참으며 슈엘은 두 눈 가득 힘을 주었다.

이제 두 눈을 휘이고.

입 꼬리를 올리면 돼.

그리고 그의 눈을 바라보며... 

쥴리엣 공주님이 오셨습니다. 하고 인사하면...

“후 안.. .”

“...... ......”

후안은. 아무 말 없이 슈엘을 지나쳤다.

까만 눈동자가 눈물을 참고 있는것 따위는 알바 아니라는 듯이

그대로 슈엘을 지나쳤다.

단 한번의 눈길도.

주지 않은채로.

나의 웃음 같은건. 상관없다는 듯이

그렇게. 차갑게.

... ...

“황제폐하! 오랜만에 인사를 드립니다.”

“환영하오, 쥴리엣공주.”

.....그녀를. 향한

따뜻한 . 목소리.

...그러지 마요.

나를 맞이한 그때와는 너무도 다른 환영의 인사.

... 그러지 마요.

“쿡쿡, 그나저나 폐하께서 맞으셨다는 알스의 왕자를

뵈었습니다만 정말 인상 깊던걸요.“

“... 그랬소?”

제발 그만해요.

“소문처럼 여신처럼 아름다운 분은 아니시더군요.

게다가 저 모습좀 보세요! 알스의 왕자님께선

물이 젖은 몰꼴로 손님께 인사를 하는 취미가 있으신가 봅니다. 호호.“

그녀가 날 어떻게 보던 그런 건 상관없으니까

제발. 그녀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말아줘요.

제발...

제발.

"그대가 신경 쓸 필요가 없는 남자요, 쥴리엣공주.“

“...................”

-쿵.

-심장...소리가.

이젠.

들리지 않아.

슈엘은 달렸다.

하아...하아... 

거친 숨이 슈엘의 목 끝까지 가득 찼다.

물에 젖은 온 몸이 바람에 차가워졌지만

그것보다도 더 차가운 것은

나의.

심장.

본성에서 후궁까지의 거리가.

이렇게 길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다.

누군가에게 기듯 슈엘은 달리고 있었다.

아니, 분명 쫓아오고 있었다.

이국에서온 아름답고. 교활하기까지한 여인이

웃으며 슈엘을 쫓아오고 있었다.

“하아... 하아...............”

차라리 이대로.

심장이. 

터져버렸으면.

심장이 터져버린다면 차갑게 굳은 심장이

다시. 뛰지 않을까?

그래서. 이런 아픔 따위는 사라지게 되지 않을까?

아픔이 사라지면...

“... 반려님.”

“...... ......”

다시, 후안님을 보며 웃을 수 있지 않을까.

“왜. 울고 있는 거야... 너.”

슈엘의 앞에 나타난 이안을 향해 슈엘은 웃었다.

형편없는 웃음.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입만이 하하하- 웃고 있다.

“헤헷. 이안님... 안...녕하세요?.......하하하.”

“웃지마.”

“하하하하 하하...  하하...하.”

“웃지마!!!!!!”

이안은 슈엘에게 다가갔다.

웃음을 멈추지 않은 슈엘에게 다가가 그를 꼬옥 안아주었다.

... 건강했던 너의 몸이. 언제 이렇게 가늘어 진거지...

가슴 한 켠이 찡해옴을 느끼며 이안은 슈엘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하...........하하하.................하...”

“... 웃지마.-.”

“ 하하 하... ㅎ...  ................흐윽.”

“웃지마, 반려님.”

“흑........................흐윽....”

“... ...”

“우윽................흐으윽..............”

울면... 안되잖아요. 그렇잖아요.

내 계획은 이런 게 아닌데...

그의 옆에 다른 반려가 생겨도 바보처럼 싱글벙글

웃어야만 하는데.

“흐으윽.....................”

그렇게.

웃는 모습만 그에게 기억되게

웃어야만 하는데....

이젠 어쩌죠.

눈물이. 멈추지 않아.

웃는 방법이. 이제 생각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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