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리엘. 꼭 돌아와라.]
제국으로 떠나기전 큰형이 내게 한 말은 이 것뿐이다.
까만 머리카락과 까만 눈동자를 가진 알스의 첫 번째 왕자님.
두 미간을 찌푸리며 형은 말했다.
[꼭 돌아와서 웃는 모습을 보여줘.
그렇지 않으면 네가 너를 찾아가고야 말테니까.]
-고집스러운 까만 눈동자.
[꼭. 웃으면서 돌아와.]
... 응.
돌아갈게.
알스로 돌아와
형을 보며 웃으며. 인사할게.
<< 반려로 맞아주세요 >>
“... 또. 무슨 생각중인거지?!”
로빈이 사리엘을 덥썩 껴안으며 외쳤다.
방금 정사를 끝낸 후이기도 하지만 역시 네 몸. 뜨겁다고.
... 역시 감기에 걸렸어, 너.
그럼에도 몇 번이고 안아버린 자신의 잘못이 있긴 하지만
후회라고는 요 만큼도 하지 않는 로빈이었다.
“그냥...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무슨?”
남색 눈동자에서 사리엘은 안도감을 느꼈다.
한결같은 그 눈동자에서.
불안해하지 않아도 될 그 눈동자에서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이곳에 와서 겪었던 일들과 그리고... 알스를 생각했어요.”
“알스? ... 그리워, 리엘?”
“... 언제고 그곳이 그립지 않은 날이 없었는걸요.”
알스의 파란하늘과. 녹색의 바다.
하얀 성을 잊은 적이 없었어요.
매일 밤, 매일아침. 알스는 언제나 나를 찾아오곤 해요.
그 추억은. 결코 사라지는 법이 없어요.
“---가자.”
“... 네?”
“알스에 가자, 리엘.”
내가 태어나고 자란곳을 가보고 싶어.
아름답다고 소문난 그곳을 둘러보고 싶어.
그리고 너의 가족을 만나서 얘기하고 싶어.
[당신들의 리엘을 내게 주세요.]
하고.
귀중한 왕자님을 빼앗겨버렸다고 화낼지도 모르지만.
그들의 허락을 받고 싶어.
정식으로 너를 나의 짝으로 맞고 싶어.
“그치만. ... 무리일까?”
녹색의 눈동자가 로빈을 바라보았다.
그가 생긋이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로빈을 껴안으며 사리엘이 말했다.
“알스에 다녀와요, 우리.”
사리엘의 말에 로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축축하게 젖어버린 이불을 매만지며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우리 알프레도에게 혼나겠는걸, 이거?”
“우리라뇨?”
“엥?”
“로빈이 제대로 옷도 벗지 않은 탓이라고요. 난 빼줘요.”
“리, 리에에에에엘!!!!!!”
“형이 알스로요?”
슈엘의 놀란 얼굴을 보며 이안은 큭큭 웃었다.
하하. 형이나 동생이나 서로의 얘기를 못 들어선 안달이라니까.
“금방 돌아온다고 했어.
얼음왕자님이 동생을 두고 가버릴리 없지.
로빈과 함께 잠시 다녀오는 것 뿐이야.”
-그 사람과 함께.
로빈·레이크·라이. 형의 연인...
아주 정직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 슈엘님. 리엘을 꼭 행복하게 해주겠습니다. ]
로빈을 떠올리며 슈엘은 싱긋이 웃었다.
이런 와중에도 다행이다라고 생각하는 이기적인
자신에 놀라고야 만다.
형이 사랑하는 연인이 생기고 사랑을 하게 된 것에 대한
안도감과
그리고.
이제야 정말... 후안님이 형을 보지 못할 거라는.
이기적인. 마음.
-그 마음이 형에게 너무 미안해 심장이 아파왔다.
“그런데 가지 않을 거야?”
“네?”
“출발은 내일 이야.
알스는 결코 가깝지 않아.
최소한 한달, 그보다 더 오래 사리엘을 만나지 못할텐데
떠나기 전에 만나지 않을 거야?“
슈엘은 이안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만나고 싶어요- 란 말이 목 끝까지 나왔지만 그 말은 할 수가 없다.
사리엘을 만나러 로빈의 저택에 다녀온 그날
슈엘은 후안과 마주쳤다.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했던 방문을 여는 순간
어두운 방안에 그가 있었다.
차가운 심홍의 눈동자가.
슈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딜 다녀오는 거냐.]
[아... 저어...]
[이번이 처음이 아니더군!
지난번에도 이안과 성밖을 나갔었다고?!]
슈엘을 향해 걸어온 후안은 그를 벽에 밀치고
성난 얼굴로 외쳤다.
[대체 너,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발정난 암캐 마냥, 남자라도 만나고 다니는 거냐?!]
-놀람과 당혹감으로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불안한 눈동자로 그를 쳐다보지만 후안의 눈동자에
[배려]란 없었다.
... 분노만이 가득한. 그런 눈동자.
슈엘의 옷을 강제로 벗긴 그는 나체가 된 슈엘의 몸을
조사하듯 바라보았다.
눈썹을 찡그리며.
그 분노를.
지우지 않고.
자신의 흔적 외에, 아무런 흔적이 없는 슈엘의 몸을 보며
후안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혼잣말 하듯 작은 목소리로 그는 중얼거렸다.
[---지마.]
[... ...]
[내 허락 없이 멋대로 성밖에 나가지 말란 말이다.]
네가. 이곳에 없는걸 알았을 땐
미치는 줄 알았다.
내 자신이 어쩌질 못할 정도로 걱정되고 화가 났단 말이다.
내 눈앞에서 사라지지마.
절대.
내가 보이는 곳에 있어야해, 너는.
후안은 슈엘의 입에 입을 맞췄다.
이상하게도 화난 그와는 다르게 입맞춤만큼은 부드러워
슈엘은 겨우. 눈물을 참을 수가 있었다.
그의 말에 심장은 상처받고.
그의 키스에. 심장은 위로받는다.
... 어쩔 수 없는.
사랑이야.
“이안님께서 형의 소식을 들려주셨으니 됐어요.
... 형이 알스에서 돌아오면 그때 만나면 돼지요.”
“... 형님이. 외출하지 말라는 명령이라도 내린 거야?”
언제나. 무서울 정도로 영리한 사람.
마음을 들킨 것 같아 슈엘인 두 손을 내저었다.
‘그’가 나쁜 것이 아니다.
‘그’에게 미움 받기 싫은 자신의 탓이다.
“아뇨, 아뇨! 그냥 제가 근래에 외출을 너무 자주 한 것 같아서...”
“반려님.”
이안이 슈엘의 곁으로 다가갔다.
슈엘은 갈색의 눈동자에서. 잊으려 애썼던
‘남자’를 보았다.
사랑한다고 고백했던. 진지한 남자의 눈동자.
평소처럼 말하고 웃곤 하지만
그는. 가끔씩
그런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피해보지만 이안은 슈엘의 얼굴을
강제로 자신을 향하게 하며 말을 이었다.
“나는 안돼?”
“... ....”
“이런 답답한 곳에 가둬놓지 않아, 나는.
네게 많은 사람을 만나게 해주고 소소한 행복을 줄 수 있어.
너만 바라보게 하는 그런 사랑은 하게 하지 않을 거야.”
제발.
나를 선택해줘-.
평소의 그 넘치는 여유가 사라진 절박한 눈동자였다.
슈엘은 갈색 눈동자에 담겨있는 감정에 가슴이 아팠다.
당신은...
‘나’예요.
나를 사랑하지 않는 자를 마음에 품은
‘나’와 같아요.
그래서 가슴이 아프네요.
그런 아픔을 아는데도, 거절할 수밖에 없어서.
가슴이 아파요.
“이안님. 저는 후안님의 반려예요.”
“알고 있어!”
“그러니...”
“형님의 반려는 네가 아니야!”
“몇 번이나 말해야 해?!
형님은 다른 여자를 진정한 반려로 맞이할 거야!!!
형님의 옆은 네가 아니란 말이다.
너만 불행할 뿐이라고!“
“... 행복해요.”
“거짓말마.”
“행복해요.”
“슈엘!”
“내가...웃고 있잖아요.”
까만 눈동자가. 웃고 있었다.
슬프게.
슬프게.
“아무리 힘들어도, 아파도. 전 후안님 앞에선 웃을 수 있어요.”
심장이 타들어갈듯이 아파도.
온 몸이 비명을 질러도
그 앞에선 전 웃을 수 있어요.
그가 아무리 상처 줘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이렇게 웃을 수가 있어요.
그건. 행복이 아닌가요?
웃을수 있으면.
... 행복한 것이 아니었나요?
이안은 ‘절망감’을 느꼈다.
소름끼치도록 한결같은 저 감정을 돌릴 방법을
이안은 알지 못했다.
언제고 자신감 넘치는 자신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어떠한 방법도,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
제길, 이럴 순 없는 거야.
이안·루비젝트·란은 절대 포기하지 않아.
절망하지 않아.
슬픈 눈빛으로 슈엘을 바라보며 이안은 방을 나갔다.
“... ....”
닫혀진 문을 슈엘은 말없이 바라보았다.
나와는 얼마나 다른 사랑인가... 저 사람의 사랑은.
당당하게 돌진하고.
겁 없이 부딪치고.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
[형님의 반려는 네가 아냐!]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애절함과 동정심이 느껴졌던 그의 말.
이안은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슈엘의 상처마저도 감수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상처마저도 각오하는 그런 사랑.
“그런 건. 난 할 수가 없어.”
후안님의 반려가 되고 점차 욕심은 커져가지만
그 욕심을 다 부릴 만큼 여유롭지 못하다.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것처럼 아슬아슬한. 경계선.
그의 ‘미움’을 받지 않으려는 노력만이
절실한 괴로운 현실.
“멍하니 뭘 하고 있는 거지?”
“!!!”
갑작기 들려온 목소리에 슈엘은 뒤를 돌아보았다.
익숙한 얼굴이 의아한 표정으로 슈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는 오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로
매일 밤 슈엘의 방에 오는 후안의 모습.
슈엘의 가슴이 뭉클해졌다.
“후안님!”
슈엘은 후안에게 달려들었다.
슈엘이 먼저 자신에게 달려와 안은 것은 처음이었기에
후안은 당황스러웠다.
이안이 다녀갔다는 시녀의 말에 치밀어 올랐던 짜증마저도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놀란 눈의 후안을 보며 슈엘은 즐겁게 말했다.
“후안님. 오늘도 와주셨군요. 기뻐요.”
“대체....”
“기뻐요, 기뻐요. 정말...기뻐요.”
예전과는 다른 걱정이 생겼어요.
이제. 후안님이 오지 않으면 어쩔까 하는.
하지만 당신의 얼굴을 보면
그런 불안감같은건 금세 잊게 되요.
“... 오늘은 정말 이상하군.”
“헤헷, 그런가요...”
[형님의 반려는 네가 아냐!]
... 훨씬 예전부터 알았던 일이예요.
이미 알아버린 그의 따뜻한 온기라던가
그가 내 방에 찾아와주는 기쁨이라던가
그의 곁이 당연한 반려의 자리라던가
그런 것이. 사라져도.
그를 보며 웃을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
“흥! ... 흥! ... 바보 같은 녀석.”
이안은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이 바보 같은 반려님...같으니.
한결같은 그 모습에 반해버렸는데 이제는.
그 한결같은 모습을 바꿀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을 지경이다.
성안의 정원을 거닐며 이안은 중얼거렸다.
“내가 널 더 행복하게 해줄 수 있어....”
그러나.
진심은 진실이 되질 못한다.
완강한 녀석의 경계선에 가로막힌 나의 고백은 진실이 될 수가 없다.
이안은 화가 났다.
짜증이 나고.
슬플 지경이었다.
...사랑을 몰랐을 시절의 자신은 이렇지 않았었다.
사랑에 빠진 남자를 비웃었다.
그렇게 쉬운 것을 왜 못할까.
라는 오만함이 그 속에 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야. ...막상 닥쳐오니 이놈의 감정이란
통제 불능이다.
평소 같았으면 이안의 생각대로 움직여야 할
타인의 감정과 자신의 감정은 통제되지 않는다.
화가 날정도로 그의 뜻에 따라주지 않는다.
“대체 내가 어떻게 해야... ”
!!!!!
오싹한 느낌에 이안은 몸을 피했다.
순간 이안이 있던 자리에 날카로운 단검에 박혔다.
뭐야. 이것은.
이런 곳까지 암살자가 왔단 말인가?!
물론 예고와는 전혀 관계없는 그들이었지만
무모하리만큼 너무도 갑작스러운 암살자의 출연에
이안은 당황해하며 검을 뽑았다.
“으윽!”
단검하나가 다시 날아오나 싶더니 이안이 피하자마자
검은 복면을 쓴 남자가 달려들었다.
평소 같았으면 여유롭게 그를 관찰했을 이안이었지만
이것은 장난이 아니었다.
엄청난 스피드로 이안의 급소를 찔러 들어오는 그의 검술은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몇 번을 검을 나누며 이안의 머릿속에 무언가 떠올랐다.
날씬한 몸과 날렵한 몸놀림.
날카로운 검놀림.
...장미의.
향기.
챵---------
그의 검을 막아내면서 이안은 입을 열었다.
“... 남창?!”
챠앙------ 또다시 이안을 향해 검이 날아들었다.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는 확실한 살의.
이안은 웃음이 나와야 했다.
매일 멜을 안으며 이안은 그가 자신의 목숨을 노릴 상황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사내에게 엉덩이를 내주던 경박한 요부가
암살자로 돌변해 나를 향해 검을 향할 때면.
웃으며 오만한 그녀석을 베어주자 생각했다.
그런데.
이 기분은 뭐지?
챵------------------
분명. 이안의 예상보다 그 검은 날카로웠고
그 살의는 이안에게 숨 막히는 긴장감을 느끼게 했지만
어딘가. 처절했다.
얼음처럼 차갑기만 할거라 생각했던 그의 검은
이안의 생각보다도 뜨겁고.
감정에 차올라.
생각과는 달리 그를 쉽게 벨 수가 없었다.
“마음이 바뀌었나 했더니, 결국 날 죽일 결심을 한거냐?!”
“... ....”
남자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몇 번인가 부딪힌 검의 경합.
이안이 바닥에 떨어져있던 나뭇가지에 발이 미끄러져
중심을 잃었을 때 남자의 검이 무섭게 이안을 향했다.
끝인가. 라고 느낀 순간, 어째선지 남자의 검이 멈칫했고
이안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챠앙----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남자의 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빈손이 된 남자를 향해 검을 겨눈
갈색 눈동자는.
흥미롭게 빛나고 있었다.
“마지막이 약하군, 너. 설마 날 봐준거냐?”
이안이 그의 복면을 벗겨내자
일순. 아름다운 남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새하얀 얼굴의 블루의 눈동자.
붉은 입술만큼이나, 오만하고 매혹적인 눈빛.
-분명. 멜이었다.
“흠. 지난번 일을 계기로 날 죽이려는 걸
포기한줄 알았다만 그건 아니었나 보지?“
“... ....”
멜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두운 밤하늘만이 멜의 시야에 가득 찼다.
구름에 가려.
달이 보이지 않는 새까만 밤.
-그날 밤과 같은.
[정신을 차렸구나, 멜.]
독뭍은 화살에 정신을 잃었던 그날.
멜은 죽음을 기다렸다.
그런데 정작 그를 찾아온 것은... 지크였다.
반황제파의 동료이자
멜과 더불어 조직의 가장 이질적인. 존재.
갈색의 눈동자는 여전히 메마르고 차갑게
멜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며 멜이 일어나니 어깨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
능숙한 솜씨에 이내 지크의 솜씨인 것을 알았고
그의 손엔 멜의 검이 들려 있었다.
[멜. 너 미치기라도 한거냐?]
[... ....]
[다 성공한 암살을 너 때문에 망쳤다고 하더군.]
지크의 얼굴이 멜의 얼굴 가까이로 다가갔다.
뱀처럼 메마른 갈색 눈동자엔 살기가 가득했다.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아. 너의 행동은 곧 배신이다.]
순간 지크의 손에 들린 검이 멜을 향했다.
멜이 피할 틈도 없이 엄청난 속도로 멜을 향한 그의 검은
멜의 심장 바로 앞에서 멈춰졌다.
멜은 온 몸에 돋는 소름을 느꼈다.
지크란 자는.
강해.
무서울 만큼.
...집요하고 강한. 암살자다.
[그러나, 이대로 죽이기엔 넌 무척 아까운 존재야. ]
[... ...]
[멜, 너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다.]
지크는 들고 있던 검을 멜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안을. 죽여]
이것이.
네가 살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어이, 남창. 설마 못 보던 새에 벙어리가 되버린 거냐?”
“... ....”
멜은. 이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래.. 지크. 네 말처럼 나는 미쳐버린 게 분명해.
보기만 해도 증오스러웠던 이런 남자를
왕의 피를 가진 남자를
죽일 수 없다니.
... 살아주길. 바라게 되다니.
블루의 눈동자는 한동안 이안의 얼굴을 가득 담았다.
날카로운 턱선과 콧날.
붉은 빛을 띈 갈색의 눈동자.
새빨간. 머리카락.
다른 자를 마음에 품은.
남자.
“당신... 역시 강하군.”
“... 음. 너도 꽤 강했어.”
“이정도면 ‘그’가 와도 쉽게 당하지 않겠어.”
“애초부터 누군가에게 살해당할 한심한 실력은 아니야.”
“후훗. 그런가?”
그 말에 멜은 웃었다.
그 웃음에 이안의 심장은 철렁 내려앉았다.
처음 보는. 미소였다.
이 녀석의 미소라는 것은.
꾸미지 않은.
오만하지 않은.
이런. 아이 같은 미소란 것은.
“... 죽지마.”
“... ....”
“당신이 죽는 건. 왠지. 슬퍼.”
“... ...”
이안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남자를 홀리는 요부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순수한 얼굴로
멜은 말하고 있었다.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이안을 향해 멜은
그의 얼굴에 다가가 입을 맞췄다.
긴.딥키스.
능숙한 키스의 달콤함에 이안이 젖어들때쯤
멜은 그의 입에서 입을 떼었고
그의 얼굴 가득했던 미소는 서서히 사라졌다.
그리고 본연의 그. 차갑고 오만한 표정으로 돌아갔을 때
멜은 입을 열었다.
“살아야해.”
“... ....”
“꼭.”
... 달빛이 없던 그날 밤.
멜은 이안을 떠났고 그 날 이후...
제국 사교계에 이슈를 몰고 다녔던 아름다운 남창은 모습을 감추었다.
******
“폐하, 부탁드릴 것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무엇이오, 로빈?”
“알스에 다녀올 생각입니다. 한 달간 제게 휴가를 주십시오.”
“휴가를 주는 건 어렵지 않소. 그런데 알스라니?”
“저의 연인의 고향입니다.”
순간 후안의 눈이 놀란 빛을 띄었다.
여자에게 통 관심이 없는 줄 알았던 그가 연인이라니.
문득 오래전, 키스를 하고 있던 로빈과 마주쳤던 게
기억났다.
“예전의 그 작은 악마인가?”
“!!!!”
순간 로빈의 남색 눈동자가 커졌다.
...설마 그걸 아직까지 기억하고 계셨다니.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로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후안은 빙긋이 웃으며 로빈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넸다.
“황제의 도장이 들어간 서류요. 여행을 가는데 도움이 될 테지.”
“감사합니다!”
로빈이 생긋이 웃으며 후안에게 고개를 숙였다.
방을 나서 기전 그는 아차- 하고 생각난 듯이 후안에게 물었다.
“참-. 폐하 알고 계십니까?”
“음?”
“저의 연인. ... 굉장히 멋진 남자입니다.”
“...하아?
예상대로 놀란 얼굴의 후안을 보며 로빈은 두 눈을 휘이며 말했다.
“세상엔 여자보다 부드럽고 상냥하고 사랑스런 남자도 있더군요.
반려님을 아끼는 폐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할까요.“
“뭐?!”
“슈엘님을 아껴주십시오.”
[형을. 행복하게 해주세요.]
생긋이 웃던 까만 눈동자가 알스의 봄빛처럼 따뜻했다.
“정말 좋은 분이십니다. 폐하를 마음깊이 사랑하실 분이시죠.”
“.... ....”
후안은 아무런 대답 없이 로빈을 바라보았다.
씨익 웃으며 로빈은 후안에게 인사했고 이내 방안에는 후안이 남았다.
아이처럼 싱글벙글 웃으며 사라진 로빈을 떠올리자
슈엘의 얼굴이 겹쳐졌다.
아이같이 웃는 모습이 무척이나 닮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일까.
예전이라면 화냈을 말이 화나지 않는 건.
[폐하를 마음깊이 사랑하실 분이시죠.]
... 이토록.
기분이 좋은 것은.
그때문일거야, 분명.
“헤이-사고뭉치 친구.”
“이안!”
성밖의 한 술집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안을 향해
로빈은 손을 흔들었다.
우스울 정도로 실실대는 로빈의 얼굴에 이안은 그의 어깨를 툭 툭 쳤다.
“넌 감정을 좀 숨겨야 한다고 몇 번이나 말해야겠냐!”
“흥-. 뭘 모르는 건 너야, 이안.”
로빈이 이내 설교하는 얼굴로 이안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바보같이 솔직하지 못했다가 리엘을 놓칠 뻔 했는걸!”
“헤에?”
“아직도 외로운 솔로인 네게 절친한 친구로서 충고해주는건데
너야말로 그 능청스런 표정은 그만하고 좀 솔직해져라.
그래갖고 어디 연애한번 제대로 해보겠냐.“
“... ...”
진지하게 쏘아붙이는 친구의 얼굴에 이안은 커다랗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하...하하하하! 크큭... 크하하”
“뭐, 뭐야...”
이 녀석의 말에 반박하지 못할 때도 있다니.
정말- 많이 컸구나. 로빈.
사랑에 있어선 나보다 선배라 이거냐...
이안은 몇 번이고 솔직하게 고백했던 자신을 떠올렸다.
그리고.
언제고 후안을 바라보는 슈엘의 까만 눈동자를 생각했다.
그래.
사랑은. 솔직함이야.
그것보다 더한 무기는 없지.
호쾌하게 웃으며 등을 치는 이안의 폭행 아닌 폭행에
로빈이 인상을 찌푸렸지만
그것은 조금도 이안의 관심거리가 되지 못했다.
“그나저나 이안. 상담할게 있다.”
“음?”
“리엘의 부모님께서 날..마음에 안 들어 하시면 어떡하지?”
푸핫-.
하고 이안의 입에 들어갔던 맥주가 튀어나왔다.
인상을 쓰는 로빈을 향해 이안은 눈썹을 찡그렸다.
“로빈·레이크.”
“응?”
“나한테 상담할게 정녕 그것뿐이냐?”
“....응.”
하...하아아아.
역시. 이 녀석은 바보야.
이안은 길게 한숨쉬며 로빈을 향해 물었다.
“잊지 않았겠지? 너는 레이크가문의 수장이라고!”
“응. 물론이야.”
“그런 내가 남자를 반려자로 맞는 게 뭘 뜻하는지 알겠어?
레이크가문의 대가 끊긴다는 거다!
과연 가문의 사람들이 사리엘을 순순히 받아줄까?“
“응.”
...뭐?
지금 잘못들은 건 아니겠지?
다시 한번 말해보라는 표정의 이안을 향해 로빈은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일이라면 벌써 숙부님께 말씀드렸어.”
“뭐?!”
“나의 반려는 알스의 두 번째 왕자라고 말야.“
이안은 이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수가 없었다.
그의 머릿속은 로빈의 말을 해석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로빈의 숙부라면 레이크가문을 이끄는 주요한 인물중 한명이자
레이크가 내에선 로빈 다음으로 세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단순하기 짝이 없는 로빈과는 달리 계산적인 남자.
“그가 모든걸 납득하고 찬성해줬다고?”
“오히려 좋아하시던걸.
알스의 왕가와 인연을 맺는 것이
레이크 가문으로써는 좀더 이득일 테니까.
게다가 이왕 이렇게 된거 숙부님의 막내아들을 양자로 데려가면
딱이라면서 입이 귀에 걸리시더군.“
오. 신이시여.
이안은 이대로 바닥에 쓰러져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애초에 저 녀석이 온갖 운을 갖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서울 만치 행운이 많은 녀석이었지만
사랑을 쟁취함에 있어서
이렇게. 고민할거리가 없다니.
“그러니까 이제 내 고민은 하나야.
리엘의 부모님이 내가 마음에 안 드시면 곤란한데.“
- 따위의 투정을 늘여놓는 로빈의 얼굴에 이안은 기가 막혔다.
정말이지 사심을 담아 널 때리고 싶구나, 로빈.
질투가 날정도로 순조로운 로빈의 사랑에 이안의 머릿속엔
무언가가 번뜩 떠올랐다.
“각오를 단단히 하고 가야할거야, 로빈.”
“각오?”
“알스의 왕가는 결코 만만치 않거든.
특히 사리엘의 형이자 알스의 황태자인 쥬엘님은”
“.... ....?”
“대단한 근육질에 알스최고의 검사에.. 엄청난 브라콤이라고.”
“... ....”
이안의 갈색눈동자가 말하고 있었다.
너는 알스의 여신을 훔쳐간 도둑과도 같은 존재라고.
그 말에 로빈의 얼굴이 이내 어두워졌지만
이안은 애써 그를 위로하는 말같은건 하지 않았다.
“음, 그리고 또 하나. 네가 각오해야 될 일이 있군.”
“뭐야 또?!”
이안은 로빈의 귀에 무언가 속삭였다.
그 순간 로빈의 온몸엔 소름이 돋아 올랐다.
흐 어억... 잊고 있었어!!!
그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니!!!
“그럼 어디, 잘 다녀오라고. 친구.”
굳어있는 로빈의 어깨를 다정히 쳐주며 이안은 술을 들이켰다.
즐거워보이는 이안과는 달리 로빈의 귓가엔
방금 전 이안이 속삭인 말만이 들려왔다.
[사리엘과 결혼하면 네가 존경해 마지않는
폐하의 형님이 된다는 것 즘은 알고 있겠지?]
“이안. 너 너무 많이 마셨어.”
“무슨소리. 내 주량을 우습게보지 말라고.”
“... ...”
로빈은 지긋이 자신의 친구를 바라보았다.
재치 있고 유머 있고
그리고 지독히도 이기적이고
사랑에 무덤덤했던 나의 친구.
아무리 둔한 나지만
나는 네가 변해가고 있다 는걸. 알고 있어.
이인과 어깨동무를 하며 로빈은 술집을 나왔다.
따뜻한 열기가 가득했던 술집을 나오자 차가운 냉기가
로빈과 이안을 감쌌다.
“... 로빈. 걱정마.”
“... ....”
“알스의 왕가는 달라. 보통의 왕가와는 아주 다른 사람들이지.”
취기가 돈 그의 목소리가.
다정하다.
“나와 형님같이 이기적이고 차가운 사람들이 아니야.
아주 따뜻한 사람들이지.
바보 같을 정도로 정이 많은 고귀한 사람들.“
“... 응.”
“그런데 왜 그들을 우습게보지 못하는지 알겠어?”
쿡-. 하고 웃는 이안의 미소가 쓸쓸했다.
“그들은 아주. 현명한 바보들이라서 말이지.”
“... ....”
이안은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온통 까맣군.
까만 머리카락과 까만 눈동자가 생각나.
빌어먹게도 그 녀석은 매일 밤이면 생각이나.
“그러니까 널 인정해줄거야.
제국의 긍지 높은 가문의 기사이자
엄청난 바보지만 정직한 남자인 너를 싫어할 리가 없잖아.“
“하하하. 응.”
로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로빈... 겨울이 되기 전에 돌아와.”
“.... ...”
“제국에 첫 눈이 내리기전에 사리엘을 꼭 이곳으로
데리고 돌아와.”
그녀석이 유일하게 마음을 기댈 수 있는 사람이야.
반려님이 많이 힘들 때 옆에 있어줄수 있도록-.
내가 내 사랑을 쟁취하려 그를 힘들게 해도.
... 그가.
형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상처입어도.
힘낼 수 있게.
마음껏 울 수 있게.
꿋꿋이.
웃을 수 있게.
꼭- 알스의 아름다운 왕자를 데리고 돌아와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