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25)

<16>

“흥, 로빈 녀석, 도대체 언제 철이 들 셈이지?”

대체 집에 안가고 어디서 지내고 있는 거냐?

란 그의 물음에 말 안해줄거야! 라고

쏘아보며 성을 나가는 로빈을 떠올리며 이안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 바보가...

그 애같은 행동 때문에 얼음왕자님이 얼마나

가슴 아픈지도 모르고.

로빈을 떠올리며 이안이 걷는 곳은 후궁의 정원이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는 가을의 바람을 맞아보았다.

아... 풀냄새.

기분 좋은 향기다.

정원은 화려한 꽃들보단 초록의 풀들과 나무들로 가득했다.

이제 가을이 다가는 무렵이라 나무들이 많이 지긴 했어도

여전히 그 싱싱할 풀 냄새만큼은 남아있다.

“하하. 그 녀석다워, 정말.”

후궁의 정원은... 후궁들의 손길이 닿는 곳이다.

사람이라곤 슈엘뿐인 거대한 궁전 앞의 정원은 그의 손길이 닿는다.

순례를 떠나기 전 알스에서 가져온 씨를 열심히 심고 있던

그가 생각나 이안은 웃었다.

끙끙대며 심던 녀석을 본게 엊그제 같은데

작은 나무와 풀들은 어느새 자라서 겨울을 준비하고 있구나.

그래... 벌써 그렇게 많은 시간이 지났군.

“어....”

익숙한 목소리에 이안은 고개를 돌렸다.

후궁 문을 나서던 슈엘이 멈춰서 이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저기...”

슈엘인 순간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째서. 이곳에 계신거지.

이안의 고백한 이후로 슈엘은 

제대로 이안과 얘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평소에는 웃으며 자신일 반겼을 녀석이

시선을 피하며 당황해 하자 이안은 가슴이 아팠다.

아아.

정말... 그럴 셈이냐, 반려님.

나는 내 행동에 후회하는 법이 없어.

언제나 그랬어.

그런데 너는...

나를 후회하게 만들 셈이야?

“안녕, 반려님.”

“.................”

-평소처럼 다정하고 장난스런 목소리.

그제야 슈엘은 슬쩍 고개를 들어 이안을 바라보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이안은 

예전처럼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싱긋이. 웃으며.

후안님이라면 절대 짓지 않을 표정으로.

“뭐야- 인사도 안해주는거야?”

가슴이 두근거린다.

이것은 ‘안도’의 감정.

슈엘의 까만 눈동자가 기분 좋게 휘였다.

“안녕하세요. 이안님. 저녁 바람이 시원하지요?”

“........응.”

그래.

너의 이런 얼굴이 보고 싶었어-.

<< 반려로 맞아주세요 >>

“리엘님. 오늘도 식사를 거의 남기셨네요.”

“... 미안해요, 알프레도.”

고개를 내저으며 그는 사리엘을 바라보았다.

벌써 오랜 시간 돌아오지 않는 주인을 기다리는 사리엘의 얼굴은 

너무나 가여워 보였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로빈을 위해 

매일매일 창문 밖을 바라보는 그가 입을 열었다.

“알프레도... 로빈은 어딜간거죠?”

알프레도 조차 그 말엔 대답할 수 없었다.

로빈에게 자신이 있는 곳을 비밀로 해달라고

몇 번이나 다짐받았기 때문이다.

단지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로빈님은 건강히 계시다는 말 뿐이었다.

창가를 바라보는 시선을 돌리지 않으며 사리엘은

혼잣말 하듯 그에게 말했다.

“내가 사라지면 돌아올까요?”

“... ...”

“내가 이 감정을 그만 두면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갈까요?”

그는 나를 향해 웃고

그리고 나는 그에게 톡 쏘듯 말을 내뱉고

그럼 그가 어린애처럼 화를 내며 검을 내밀고

함께 대련을 하고...

그는 여전히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다른 곳을 향하는 그의 옆얼굴을 나 몰래 바라보고

그렇게 원래대로 돌아갈 순 없는 것일까.

알프레도가 고개를 내저으며 아니라고 말하려는 찰나

사리엘이 벌떡 일어났다.

황급히 문을 나서는 사리엘을 보며 창가를 바라본

알프레도의 눈엔 낯선 남자가 보였다.

까만 머리카락의 까만 눈동자.

레이크가에 갑자기 찾아온 손님을 향해 달려 나간 사리엘은

그를 껴안고 있었다.

******

저녁 바람을 맞으며 갈색눈동자가 말했다.

[사리엘은. 사랑을 하고 있어.]

왜. 말해주지 않았던 거야.

[아주 힘든 사랑이지. ... 

오랫동안 한 여자를 마음에 품은 남자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힘든 사랑이라면.

어째서 내게 기대지 않았던 거야.

섭섭함과 놀람보다도 걱정이 앞섰다.

오랜만에 재회했던 형이. 그 슬픈 눈동자가

사랑 때문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형은 내 사랑을 위해 그렇게 애써주었잖아.

내가 할 수 있는 건 힘내라는 응원밖에는 없지만

그렇지만.

그것만이라도 절박할 때가 있는 거잖아.

“... 왜 말하지 않았어?”

유난히 넓은 레이크가의 정원을 거닐던 

슈엘이 걸음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아무 말 없이 걷던 사리엘 또한 걸음을 멈추고 슈엘을 바라보았다.

“형. 내가 걱정할까봐 말하지 않은 거야?”

-어째서 이야기한 거야, 이안.

슈에게만큼은 말하지 말라고 그렇게 당부했는데.

눈썹을 찡그리는 사리엘을 보며 슈엘은 외쳤다.

“형은 언제나 그래!”

-어렸을 적부터 그랬어.

아픈 형을 보고 내가 운 후부턴 형은 한번도 아픈적이 없었어.

아니, 아프지...않아야 했어.

내 앞에선 웃기 만해.

아파도 그저 웃기만 해.

“형. 나는 그런 건 싫어.”

“..... ....”

“조금만 더 나를. 의지해줘.”

사리엘은 슈엘을 바라보았다.

달라지지 않은 어린아이 같은 선한 눈매와 까만 눈동자.

하하하. 왜 이렇게 기쁠까.

너의 그 말이 왜 이렇게 고마울까.

“고마워, 슈.”

정원의 벤치에 앉아 두 사람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느 때보다도 가을의 밤하늘...

“형. 입어! 가을바람은 차단 말야.”

망토를 벗어 걸쳐주자 사리엘이 고개를 내저었다.

몇 번이고 걸쳐주려는게 실패하자 슈엘은 

잠시간 고민한 후에 사리엘의 꼬옥 붙은 후에

망토를 두 사람 어깨에 걸쳤다.

조금 우스운 꼴이긴 했지만 성공이지-.

빙그르 웃는 슈엘은 사리엘의 손을 잡았다.

어린시절부터 사리엘의 손은 차고

슈엘의 손은 따스했다.

그래서 그들은 손을 맞잡는걸 좋아했다.

오랜만이었다.

이렇게 오랜만에 함께 있는 건.

이렇게 평화롭게 서로의 온기를 느꼈던 건.

“참 아름다운 정원이네.”

“...응.”

“형. 정원은 집주인을 닮는데-.”

“...하하. 정말 그런지도."

이곳의 정원은 참 크고 멋져.

크고 웅장한 나무가 있는가 하면 작고 소소한 꽃들도 많아.

화려한 꽃들이 가득한 것보다

멋지고. 아름다운 정원이야.

“이곳의 주인은 어떤 사람이야?”

“이안에게 들었구나?”

“응. 로빈·레이크. 

후안님의 호위기사로 제국에선 손꼽히는 가문의 수장.

성에서 마주치면 인사한 것이 전부였지만.“

“네가 보기엔 어떤 사람이었어?”

슈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떠올려보았다.

활발한 성격의 슈엘이지만 언제나 후궁 안에만 있는 터라

사람을 만나는 일이 적었다.

다만 로빈·레이크 만큼은 특별하다.

언제나 후안의 곁을 지키던 기사였고.

무엇보다 형이 신세를 지게 된 사람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사람.

내게 너무나 소중한 사람 두 사람을 지켜주는 사람이었구나.

“굉장히 예쁜 은빛 머리카락을 가졌고 .. 눈동자는 짙은 남색...”

“-응.”

“헤헷. 미남이라기 보단 호남 형이랄까. 시원스럽게 잘 생긴 사람이었지.

무엇보다도. 눈이 아주 맑았어.“

-아주 정직했던 눈이 기억이 난다.

슈엘의 대답에 사리엘은 두 눈을 휘였다.

응. 맞아.

이름은 로빈.레이크.

눈이 아주 맑은 사람이야.

아이처럼 순수하고 정직하고

오랫동안 한사람을 사랑하는 한결같은 사람.

그래서 더더욱.

“... 날 너무 힘들게 하는 남자야.”

한순간 슈엘의 가슴이 아려왔다.

그에 대해 말하는 사리엘의 얼굴은 낯선 것이었다.

처음 보는 얼굴.

사람에 힘들어하는 얼굴.

사랑에 상처받은 얼굴.

-어느 때보다도 아름다운. 형의 얼굴.

“형... 형이 원하는건 뭐야?”

“................”

“그 사람이 형을 사랑해줬으면 좋겠어?”

“... ...”

그순간 이었다.

툭- 하고 비가 내렸다.

우기가 끝난 제국에 오랜만에 내리는. 가을의 비...

여름의 비보다 더더욱 차가운 물방울을 맞는 순간

봄비속의 그가 생각났다.

처음 보았던...그의 눈물이 생각났다.

[ 오늘, 로즈에게 고백을...하려 했어. ]

그녀를 바라본 시간이 너무 길어서

그녀를 사랑한 시간이 너무 길어서

고백하지 못하는 바보 같은 남자가 봄비를 맞으며 울고 있었다.

... 잊고 있었다.

그가 나만을 봐주길 바라는 욕심이 커져가 잊고 있었어.

... 내가 바라는 건..

내가 바랬던건...!!

******

“응?”

하얀 레이스가 달린 우산을 든 아가씨가 사리엘의 앞에 서있었다.

자주색 머리카락을 양 옆으로 묶은 평범한 인상의 소녀는 

놀란 눈으로 그녀의 저택 앞에 서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비에 젖은 금빛 머리카락과 녹색 눈동자.

감탄이 튀어나올 만큼 아름다운 남자.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슬픈 눈을 하고 있어요?”

“.. ....”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사리엘의 온몸이 떨려왔다.

이 목소리는...

언제고 자신의 심장을 휘젓는 소녀의 목소리였다.

“당신이... 로...즈양이군요.”

“날...알고 있나요?”

그녀의 말을 듣는순간 사리엘의 녹색 눈동자엔

눈물이 고였다. 

아아-

그가 그토록 사랑하는... 여인이구나.

이 소녀가.

“당신을 만나러 왔습니다.”

“... ....”

“부디 내 말을. 들어주세요, 로즈.“

아직도 두 눈이 빨갛게 부어있는 남자를 향해 로즈는 뜨거운 차를 내밀었다.

커다란 입을 생긋 웃으며 그녀가 말했다.

“로즈표 레몬홍차예요! 맛은 보장하죠.”

-환한 미소였다.

고개를 끄덕이며 사리엘은 차를 받아들였다.

뜨거운 차의 온기에 차가워졌던 온 몸이 녹아드는 느낌...

하지만 나의 심장을..

녹일 순 없겠지.

사리엘은 눈앞의 그녀를 바라보았다.

바구니에서 쿠키를 꺼내드는 그녀는... 평범한 소녀였다.

결코 미인이라곤 말할 수 없는 수수한 얼굴의 아가씨.

하지만 어쩐지 알 것 같다.

그가 오랜 세월 그녀를 사랑하는 이유.

밝게 웃는 모습이 반짝반짝 빛나는...

너무나 예쁜 사람이니까...

“자, 그럼 어디한번 말해보세요.”

“... ...”

“내게 할말이 있어서 왔다고 했잖아요?”

두근-

두근-

심장이 아파온다.

찻잔을 든 사리엘의 손이 눈에 띄게 떨려오고 있었다.

사리엘은 메마른 목구멍으로 침을 삼켰다.

몇 번이나 입을 오물거리던 그의 눈앞엔 그가 떠올려졌다.

남색 눈동자와 은색 머리카락을 가진...

... 나의. 남자.

오랜 시간 짝사랑에도 웃음짓는. 

그녀의. 남자.

“로...빈...을 아시죠?”

“로빈 레이크?! 물론요! 나의 오랜 친구인걸요.”

“... 그에 대해... ...잘... 알고 있나요?”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눈동자엔 확신이 있었다.

뚝- 금빛 머리카락에 매달려 있던 빗방울이

찻잔에 떨어졌다.

투명한 차가 일으키는 파동을 바라보며 사리엘은 말했다.

“그가... 너무나 정직한...남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알고 있어요?”

“.... 네.”

“... 그리고 그가... ... 너무도 순수한 남자인 것도 알고..있나요?”

“... 네.”

떨리는 하얀 손을 맞잡고 그는 말했다.

“그럼...그가 ........ 

오랜 시간 한 여자만을 사랑했다는 걸..

알고 있나...요...?

“... ...”

대답 없는 그녀를 향해 사리엘은 무릎을 꿇었다.

로즈가 놀란 얼굴로 사리엘을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무릎을 꿇은 채로 사리엘은 그녀의 앞에 고개를 숙였다.

“부탁...이예요...”

“... ....”

“그가 너무나 오래 당신을...위해 울었어요...”

그의. 달콤한 키스가 생각났다.

“많은걸...바라는게 아니에요. 단지...”

사랑을 담은 남색 눈동자가 생각났다.

“-그의 고백을 들어줘요.”

“... ...”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말하지 못한 그의 고백을..

들어주기라도 해줘요...제발.”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나의’것이 아니었다.

내 앞에 있는 당신의 것이었다.

로즈는 무릎을 꿇어 사리엘에게 눈을 마주쳤다.

로빈을 닮은 그녀의 눈빛은 정직하고 당당했다.

“미안하지만 당신의 부탁 따윈 소용없어요.”

“... ....”

“사랑에. 부탁 따윈 소용없다는거... 알고 있잖아요.”

“... ...”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로빈?” 

“!!!!!!!!!!!!!!!!!!!!!!”

녹색 눈동자가 크게 뜨여졌다.

기둥 뒤에서 나타나는 그를 보는 순간 사리엘의 온 몸이 차갑게 식어왔다.

-바보.

바보. 사리엘.

-이미 그는 그녀의 곁에 있었는데.

이미 그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였는데....

-그것도 모르고 혼자 잘난 척. 

그의 사랑을 구걸했다니...

“리엘...”

로빈이 입을 여는 순간 사리엘의 눈에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또 혼자 제멋대로 착각해버렸다. 

혼자 제멋대로 

사랑하고

위로하고..

상처받고.

로빈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순간 사리엘은 도망치듯 방을 나갔다.

도저히 그곳에 있을 수가 없었다.

이제는 도저히

그를 바라볼 수 없었다.

저택을 나서자 차가운 비가 사리엘을 감쌌다.

“-흑...”

쏴아아아-----------

가을의 비는. 너무도 차가웠다.

“흐...윽...”

쏴아아아아------------

끝내야 하는 사랑은.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

갑자기 느껴진 온기에 사리엘은 뒤를 돌아보았다.

차가워진 그의 손을 잡고 있는 건 로빈이었다.

사리엘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왜, 나를 쫓아온 거예요.”

“... ...”

“어서.. 그녀에게 돌아가요!”

아이처럼 울며 사리엘은 외쳤다.

듣는 사람이 더 슬퍼질 만큼 애절한 목소리였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백하겠다고 했잖아요.”

“... ...”

“언젠간 꼭... 그 마음을 고백...하겠다고...그렇게 말했잖아요.”

그 순간 로빈의 손이 사리엘의 손을 놓았다.

그의 온기가 떨어져나가는 순간 사리엘은 

손이 잘려나가는 고통을 느꼈다.

“지금... 고백할거야.”

그의 말에 사리엘은 로빈을 향해 웃었다.

억지로 입꼬리를 울리고 눈꼬리를 휘이며 엉망이 된 미소로

사리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힘내요- 라고 작게 속삭이며 사리엘은 몸을 돌렸다.

한 발작.. 한 발작..

슬픈 발걸음을 딛는 순간 등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좋아해.”

“사리엘·알스 ·리엘, 너를 사랑해. 마음깊이.”

“... ....”

-환청...이야.

빗소리가 너무 커서 내가 잘못 듣고 있는 거야.

그가 그럴 말을 해줄 리가 없어.

그럴 리가...

그러나 머릿속과 반대로 몸은 움직이고 있었다.

어느새 몸이 로빈의 품에 안기고 있었다.

그의 따뜻하고 단단한 몸에 손을 두르고 있었다.

“누구를...바라보고 있다고요?”

“사리엘·알스·리엘.”

“누구를...마음에 품고 있다고요?”

“사리엘·알스·리엘.”

“누구를....사랑하고 있다고요?!!“

“사리엘·알스·리엘, 사리엘 알스 리엘.

15년간 짝사랑하던 남자를 구제해준 아름다운 나의 남자. 리엘.

이제부턴... 언제고 너뿐이야.“

그 순간 사리엘의 입이 로빈의 입에 닿았다.

뜨거운 그의 입에 입을 맞추며 사리엘은 웃고 있었다.

눈물 범벅이에 웃는 얼굴마저도 

사랑스런 연인을 향해 로빈은 속삭였다.

“나랑 자자, 리엘-.”

빙긋이 웃으며 대답소리가 들려왔다.

“-대신 이제 위로는...안해줄거예요.”

“다 젖었어.”

“차가운건 당신도 마찬가지라구요.”

비에 젖은 차가운 몸으로 두 사람은 서로를 껴안았다.

그들이 품고 있던 물기에 침대에 물기가 번져왔지만

그 축축한 느낌마저도 부드럽게 느껴졌다.

사리엘의 마지막 단추를 푸르고 그의 옷을 벗겨내자

새하얀 몸이 로빈의 눈에 비취었다.

아름다운.

몸.

갸날프지만 강한 너의 몸.

로빈은 사리엘의 손을 잡았다.

모든 것이 부드러운 이 남자의 몸중 유일하게 ‘손’만이 거칠다.

나는 알고 있어.

하루도 빠짐없이 검을 들었기 때문이야.

너의 그 검으로. 소중한 네 동생을 지키기 위해서.

... 너는 검을 손에서 놓지 않았어.

-정말로 멋진...형이지.

하얀 손등과 손바닥에 키스.

쿡쿡. 간지러움을 참지 못하는 사리엘의 웃음소리에

로빈은 즐거웠다.

“역시 기분좋은 거야?”

“그게 아니라, 간지러워서...”

“하하하!”

애써 변명을 하는 그얼굴이 너무나 사랑스럽다 느끼며

로빈은 사리엘에게 입을 맞추었다.

“사랑해.”

사리엘의 녹색눈동자가 멍하니 로빈을 바라보았다.

처음 봤던 그때의 그 남색눈동자 그대로다.

사람을 사랑하는 남자의 눈.

쌍커풀 없이 시원하게 뻗은 그의 눈가를 

매만지며 사리엘은 말했다.

“이 눈동자는 이제 내것이예요.”

“...응.”

“절대 다른 사람에게 향하면 안돼요.”

“...응.”

쿡쿡 웃으며 로빈은 사리엘에게 말했다.

“평생 바라볼 수 있게, 내 옆에만 있어달라고.”

******

여름의 마지막 비가 내렸던 그 날.

늦은 밤 로즈의 저택엔 익숙한 손님이 찾아왔다.

“뭐야? 어째서 이런 시간에 그런 꼴로 로빈이 나타나는 거지?”

수건을 가져와 로빈의 젖은 얼굴을 닦아주며 로즈가 말했다.

평소와는 달리 풀죽은 오랜 친구를 바라보며

그녀는 눈썹을 찡그렸다.

“-차였구나?”

두 눈이 휘둥그레져선 자신을 바라보는 로빈을 향해

로즈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니 감정 읽는 건 나의 특기잖아.”

정직한 남색 눈동자가 마음속을 훤히 내비치고 있는데

모르는 게 이상하지.

생긋이 웃으면서 그녀는 말했다.

“그래서? 위로라도 받으러 왔나, 로빈군?”

장난스런 미소를 짓는 그녀를 보며 로빈은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예전 같았으면 그녀에게 위로 따윈 받을 수 없었다.

그녀에게 받은 상처를 어떻게 

그녀에게 위로받을 수 있을까.

그래서 세상누구보다 절친한 친구에게

위로받은 적은 한번도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 그녀에게 위로받고 싶어졌다.

사랑에 데인 아픔을 그녀에게 말하고 싶어졌다.

젖은 옷을 갈아입고 편한 옷을 입은 로빈은 그녀에게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는 흥미 짙은 눈동자로 로빈의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 때엔 화를 내고, 어느 때엔 울상을 짓고

그리고 어느 때엔 하하 웃으며...

“-그래서?”

“...리엘은 알스의 왕자였어.”

“널 속였다는 게 그렇게 화나?”

“당연하지! 처음부터 내게 거짓말을 했어.

그렇게 오랫동안 함께였는데... 

-이건 배신이야.”

그 말에 로즈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게 거짓말을 하다니. 리엘이란 남자 형편없구나.”

꿈틀하고 로빈의 인상이 구겨졌지만 로즈는 상관하지 않았다.

차를 한 모금 마시며 그녀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로빈. 나 지금에야 말하는 건데...”

“뭣?”

“며칠 전에 내가 너에게 줬던 쿠키 기억나?”

갑자기... 왠 쿠키얘기?

분명 며칠 전 그녀가 대뜸 로빈에게 쿠키를 선물한 적이 있었다.

[니가 생각나서 만들었어-] 라는 말과 함께

로빈의 손에 쥐여지고는 황급히 떠나던 그녀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아리송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니 그녀가 씨익 웃었다.

“그거 사실 리챠드꺼야.”

“.... 뭐?”

“리챠드를 주려고 만들었는데 그 애가 통 입에 안대지 뭐니.

그렇다고 버리는 건 너무 아까워서, 헤헤..”

그 순간 로빈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해버렸다.

우웩-하고 목을 쥐여 잡으며 로빈은 리챠드를 떠올려보았다.

리챠드.

이제는 할아버지가 되어버린

하얗고 부드러운 털을 가진...

.........멍.멍.이!!!!!!!!!!!!!!!!!!

“우...웨에에엑...”

로빈은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남은 가뜩이나 심각한데 도대체 그런 얘기를 왜 하는 거야!!

원망스런 눈으로 로즈를 바라보려는데 그녀가 앗차

싶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 또 있다!”

“...?!!!”

또 ?!!! 불길한 표정을 짓는 로빈에게 그녀는

진지한 눈동자로 말했다.

“내게 너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초콜릿을 줬던 거 기억나?!”

로빈의 머릿속에 또다시 빛바랜 그 날이 떠올려졌다.

아주오래전... 두 사람이 만난지 처음 맞은 발렌타인 데이날.

로즈가 로빈에게 툭하니 무언가를 건넸다.

설마 초콜릿?!! 하고 놀란 얼굴로 꺼내보니

정말 초콜릿!!! 이었다.

잔뜩 감동한 얼굴로 로즈를 바라보니 로즈는

잔뜩 심통난 얼굴로 말했었다.

[내가 좋아하는 오빠는 초콜릿을 싫어한대!]

-그러니 니가 먹어! 라고 로즈는 소리쳤었다.

그 날 어린소년 로빈은 사랑의 아픔에 훌쩍대며

몰래 초콜릿을 먹어야만 했다.

“설마... 로즈...”

그때도. 리챠드...거였냐... 하고 그녀를 보니 

그녀가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네 거 였어.”

15년 동안 로빈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밝은 웃음이었다

“그 초콜릿. 네게 주려고 만든 거였어.”

“... .....”

-내 첫사랑은 너야, 로빈.

“-네가 사과해야 하니?”

“... ... .”

“내 거짓말은 널 배신한거야, 로빈?”

“....... 아니.”

“-사람은 진실을 말할 수 없는 상황이 있는 거야.

하지만 거짓말속에도 분명 진심은 있어.”

팡! 소리가 나도록 로빈의 등을 치며 그녀가 말했다.

“그러니 그를 용서주란 말야! 이 바보로빈!”

“하...하하... 하하, 응.”

“뭘 웃어? 웃지마. 너 진짜 바보 같아-.”

“하..하하하. 쿡...하하하...”

그녀의 핀잔에도 로빈의 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어쩐지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생각해보면 이렇게 간단한걸....

도저히 내 스스로가 한심해서 그리고 그에게 미안해서 

웃음이 나왔다.

그 날 로즈와 로빈은 오랜만에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좋아해, 로즈.”

“알아.”

“앞으로도 난 널 좋아할거야.”

“당연하지. 꼬부랑 할아범이 되서도 날 좋아해야해, 너는. ”

-그리고 그날 처음으로 로빈은 그녀에게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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