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막 성에 도착한 로빈은 텅빈 서재 안을 보는 순간 쿵쾅쿵쾅
엄청난 발소리를 내며 이안의 침소를 향했다.
도대체가 또로군! 또!
처음엔 좀 성실히 하나 싶었더니 근래엔 계속 늦잠이다, 이녀석.
이안의 침소 앞에 도착한 로빈이 문을 열려는 순간
방문 앞을 지키고 있던 시종이 다급히 그를 말렸다.
“안, 안됩니다!! 로빈님.”
문앞을 막는 시종은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엥? 뭐야, 이 반응은?!
남색 눈동자가 의아함을 가득 띄며 그를 바라보았다.
시종은 다시 한번 문을 열려는 로빈을 저지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필사적으로 로빈을 막는 시종을 향해
로빈은 눈썹을 찡그렸다.
“이봐, 난 폐하의 친구이자 호위기사인 로빈·레이크야!”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저...”
“그러니까 뭐냐고!”
“폐하께선 지금 다른 분과 함께 계십니다.”
“......뭐? 다른 분이라니?”
시종은 우물쭈물 말을 삼키다 어쩔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
“어젯밤 부르신 창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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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앙-
문을 부셔버릴 듯 거칠게 문을 연 로빈은 소리쳤다.
“이안!! 이 망할 자식아!!”
로빈의 눈에 보인 것은 알몸의 두 남자였다.
침대에 누워있는 이안과 낯익은 저 얼굴은 분명....
멜이었다!!!!
제국의 귀족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희대의...남창!
로빈은 그대로 달려가 이안에게 소리쳤다.
“너...지금 뭘하자는 거야!”
아린부터 남의 침실에 무단으로 들어와 분노하는
친구를 빤히 바라보며 이안의 얼굴을 긁적였다.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그가 한마디 말을 내뱉었다.
“-황제가 하룻밤 남자를 품은게 놀랄 일인가?”
“!!!!!!!!!!!!!”
퍼어어억-
그순간 용서 없이 로빈의 주먹이 이안을 향했다.
“리엘을 두고 니가 어떻게 이럴 수 있어!!”
“...하?”
엄청난 주먹에 맞아 부어오르는 얼굴을 매만지며 이안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로빈을 바라보았다.
리에을 두고...라니?!
저 녀석...설마.
아직까지 나랑 얼음왕자가 애인사이라고 생각하고 있는거야?
진심으로 화내고 있는 그의 얼굴에 이안은 미간을 찌푸렸다.
둔한건 알았지만 이정도일줄은 몰랐다.
로빈·레이크!
“왜, 니가 그걸 신경쓰는건데?”
“뭣?!!!”
“네가 다른 남자를 안던 리엘과 헤어지던... 그건 네가 상관할 게 아니잖아.”
“!!!!”
순식간에 역전된 상황에서 이안의 갈색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그, 그건... 그러니까...”
“니가 리엘과 잤으니까?”
“!!!!”
그걸...어떻게...?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는 로빈을 향해
차갑고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엘은 네 연인이라고. 눈치채지 못할리가. 없지.”
“..................”
그것은 연인을 빼앗겨 분노에 찬 남자의 목소리였다.
노려본다는게 옳을 듯한 무서운 시선.
그제 로빈은 큰소리 칠 입장은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친구의 연인을 안은건..
나의 잘못이니?.
로빈의 얼굴이 눈에띄게 어두워지는 순간 이안이 말을 이었다.
“-라는건 거짓말.”
“?!!!!”
아까의 ‘그’는 사라져 있었다.
분노도 차가움도 없는
오직 장난기 많은 친구 이안이 로빈의 앞에 있었다.
무슨 말이냐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친구에게 이안은 말을 이었다.
“사과를 해야할쪽은 오히려 내쪽이겠지.”
“?!”
“사실 난... 너를 속였어, 로빈.”
이안이 입꼬리를 올리며 로빈에게 속삭였다.
“그는 네 연인이 아니야...”
“... 뭐?”
“리엘. 이 아니야.
사리엘·알스·리엘.
-알스의 두 번째 왕자야.”
늦은 밤, 멈출 기색이 없는 빗방울을 보며 사리엘은 깨어 있었다.
오늘은 유달리 늦는 로빈을 생각하며
창문 너머로 내리는 비를 바라보았다.
쏴아아---------
며칠째 멈추지 않는 비.
이것은 꼭 내 마음 같다.
새까만 어두운 밤 속에 내리는 비.
한없이 슬프고 외로워 보이는 건...
사랑을 하지 못하는 나와 너무도 닮아있다.
[ 로빈님은 아직 익숙하지 못하신 거예요.]
오늘, 저녁을 먹으며 알프레도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 15년간 한 사람만 바라보던 시선이
다른 사람에게 옮겨가자 자신의 감정을 눈치 채지 못하시는 거예요.
하지만 분명,]
[ 사랑을 담은 눈으로 리엘님을 바라보고 계시답니다...]
그의 말을 떠올리며 사리엘은 차가운 창가를 매만졌다.
그럴 리가 없어, 라고 소리치는 나와
그래도 그의 말에 조금은 기대하게 되는 내가 있었다.
몇 번이나 함께 밤을 보냈고...
그리고 남색 눈동자가 다정히 나를 바라봐주었다.
그러니 조금은
조금은
그의 마음이... 나를 향하게 되지 않았을까?
-달칵-
침묵뿍인 저택에 문소리가 들리자 사리엘은 생각은 멈추었다.
그래, 조금은 희망을 가져보자.
라고 작게 중얼거리며 그는 황급히 방문을 나섰다.
계단 아래로 보이는 로빈의 얼굴을 확인하자
사리엘의 표정은 애써 기쁜 표정을 지웠다.
무표정으로- 결코 그를 기다린게 아닌 것처럼.
우연히, 잠이 깨서 방을 나온 것처럼..
뚜벅뚜벅.. 계단을 내려오던 사리엘은 무언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
로빈의 온 몸이 젖어 있었다.
뚝- 뚝- 차가운 빗물이 그의 옷끝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로빈?! 어쩌다..”
무섭게 내리던 그 비를 다 맞고 온건지 물으려던 찰 나
사리엘은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고개를 든 로빈의 얼굴때문이었다.
한번도 보여준 적 없는 눈동자...
비에 젖은 남색눈동자가 차갑게 식어 있었다.
“... 재밌었어?”
“네?”
“짝사랑에 허우적대는 날 놀리니 그렇게 재밌었어?”
“... ...”
“-사리엘. 왕자님.”
“!!!!!!!”
챙그랑. 하고 사리엘의 손에 들린 촛대가 바닥에 떨어졌다.
흔들리는 눈으로 로빈을 바라보자 로빈의 얼굴엔 미소가 어려 있었다.
아니- 미소가 아니다. ...
자신을 내리깐 자에게 보내는 조소.
그의 표정을 보는 순간 사리엘의 머릿속은 새하얗게 변해버렸다.
무...슨 말을... 해야...하지?
몇 번이고 생각했었다.
그가 내 거짓말을 알게 되는 날이 오면
그에게 변명할 대답은 몇 번이나 생각했었다.
그런데 생각이 나지 않아.
아무 말도 할 수가...없어.
“어떻게 그렇게 뻔뻔스럽게 날 속일 수 있지?!
다 거짓이었나?!!
나를 위로해준 말도, 내게 안긴 것도 모두?!!”
로빈은 밤이면 안았던 하얀 몸을 떠올렸다.
-언제나 차가웠던 녹색눈동자가 그때만큼은 다정히 빛났었다.
내게 입을 맞출 때만큼은 무표정한 그 가면이 깨지곤 했었다.
아기처럼... ... 사랑스럽게
내게 안겨왔다.
-그런데.
날... 속였다고?
그렇게 진실된 눈을 하고 내게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고?!
떨리는 두 손을 맞잡으며 사리엘은 고개를 숙였다.
로빈의 눈에도 덜덜 떨리는 하얀손이 보였다.
나지막이 사리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짓...”
로빈이 분노에 이를 악무는 순간
얼음 같던 사리엘의 가면이 깨져버렸다.
이성을 잃고 분노하던 로빈마저 당황할 만큼
그 차갑고 무표정했던 가면이 깨져버렸다.
“....일리 없잖아...
그럴 리가 없잖아.요..”
“... ....”
한번도 보여주지 않은 얼굴이었다.
자신에게 안길 때만 보여주었던 그...얼굴이었다.
아름답고
아기 같고
그리고...
한없이.
슬픈.
두 손으로 두 눈을 가리며 그는 말했다.
“-미안해요.”
“... ....”
“거짓말을 해서... 미안해요...”
“... ...”
“-미안해요.”
“... ...”
“나 같은걸...안게 해서...미안해요.”
“... ...”
“미안...해요... 위로같은게 아니었어요. 나는...”
흑...하고
하얀 손 밑으로 투명한 눈물이 흘러나왔다.
“당신을 사랑해요.”
“... ...”
“미안.......해요...”
그 순간 로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치솟았던 분노는 사라지고 혼돈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무서울 만치 강하고...
못당할만큼 독했던...
이 남자가 우는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도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거야.
너와 난 사랑으로 시작한 관계가 아니었잖아.
결코... 사랑으로 보낸 시간이 아니었잖아.
그런데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정리되지 않는 머릿속인 오직
‘그’가 날 속였다는 생각만 선명히 떠올라졌다.
“이제 내 말 따위...믿지 않아.”
“... ....”
그리고 사리엘이 눈물을 멈추고 눈을 뜬 순간
그 앞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물에 젖은 바닥에 그의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털썩...힘없이 사리엘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 사랑을 담은 눈으로 리엘님을 바라보고 계시 답니다...]
“...니예요...”
아니에요, 알프레도.
... 그가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에 사랑은 없어요.
그는 아직까지도 짝사랑 중이예요.
“....흑,,”
남색 눈동자는 여전히 그녀를 바라보는 짝사랑을 하고 있어요...
나와 함께
사랑을 하는 게 아니라.
******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의원님.”
슈엘의 예의바른 인사에 노인은 허허 웃었다.
자연스럽게 슈엘의 엉덩이를 쓰윽- 만지려는 그의 손길을
제지한 것은 후안이었다.
눈을 부릅뜨며 노려보는 그를 보며 노인은 눈썹을 찡그렸다.
“흥, 저녀석을 낫게 해주는 게 아니었어! 생전 마음에 안들 녀석을!!”
후안은 그의 말을 무시했고, 슈엘은 두 사람을 보며 싱긋이 미소 지었다.
이제막 후안의 몸이 낫고 다시 길을 떠나는 오늘은
오랜만에 햇빛이 따사롭다.
요즘은 우기라 흐린 날씨가 계속이었는데....
건강한 후안의 얼굴에.
그리고... 요 근래 어딘가 다정해진 그의 모습에
슈엘은 가슴이 벅찼다.
오랫동안 신세를 진 의원과 작별을 고하고
말을 사는 곳에 도착한 슈엘은 후안을 바라보았다.
세심히 말을 살펴보며 주인과 대화하는 그를 보자면
가슴의 두근거림은 점점 커져만 간다.
... ... 아아. 얼마나 행복할지 당신이 알까요.
건강한 그 모습이, 생기를 찾은 그 갈색눈동자가.
얼마나... 나를 감동시키는지. 당신이 알까요.
요 며칠 그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여전히 쌀쌀맞지만 사소한 것을 신경써주는
그의 행동에 얼마나 위로를 받았던가.
비가 오는 매일 밤.... 그는 함께 자주었다.
악몽 속에서 소리를 지를 때면 언제나 그의 목소리가 들리곤 했다.
[슈!!]
그리고 눈을 뜨면... 그가 있었지.
아직 꿈이 깨지 않은 것처럼 그가 눈앞에 있었다.
그의 체온이... 곁에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이따금 눈이 마주칠 때면
시선을 피하는 후안님이다.
“...슈!!!”
이전에는 아무리 화가 나셔도
내 시선을 피하는 일은 없었는데... 어째 서지...
“슈!! 위험해!!”
“...에엣?”
슈엘이 고개를 돌렸을 땐 이미 커다란 말이
슈엘을 향해 달려올 때였다.
엄청난 속도의 말을 가까스로 피했지만 작
은 아픔과 함께 슈엘은 인상을 썼다.
털썩- 주저앉은 슈엘을 향해 다가온 후안이 외쳤다.
“도대체 정신을 어디다 두고 있는 거냐!
말이 날뛰는 중에도 멍하니 있다니!”
“죄, 죄송...합니다.”
“휴우...”
깊은 한숨을 내쉬며 후안은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을 잡고 일어서려던 슈엘은
그제야 찌릿한 발목의 아픔을 느꼈다.
“저기요...후안님.”
“음?”
“문제가...생겼어요.”
그가 또 화를 내지 않을까 불안해하며 슈엘은 말을 이었다.
“발목을... 삔 것 같아요. 헤헤.”
두근두근. 그야말로 심장이 터질 것 같은...기분을 느끼며
슈엘은 맞잡은 두 손에 힘을 주었다.
말 한마리에 남자 두 명이 타는 웃긴 상황이 되어버렸지만
자신에게 이것은 결코 웃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나와 함께 타도록해.
부상당한 발로 말을 탔다간 사고 나기 십상이니까.]
그런 후안을 향해 감동받은 표정을 지었던
슈엘을 향해 돌아온 것은
[서둘러 성에 돌아가야 하니까.] 라는 후안의 냉랭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좋아.
난동을 피운 그 말에게 감사의 인사라도 하고 싶을 정도인걸요.
후안의 몸을 두른 손을 꼭- 잡으며
그의 넓고 강직한 등을 느끼며 슈엘은 말했다.
“이 말... 절 욕하겠네요. 저 때문에 많이 힘들 거예요.”
“훈련 받은 말이야. 너 하나쯤은 간단해.”
“... 그런가요.”
헤헤- 웃으며 슈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지는 붉은 노을을 바라보며 슈엘은 생각에 잠겼다.
저녁 빛의 노을.
조금은 촉촉한 여름의... 바람.
사람 없는 마을의 외길.
갈색의 말.
후안님과...나.
이 시간이 영원하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작은 소원을 바라며 슈엘은 혼잣말하듯 입을 열었다.
“형이... 있어요.”
-그 앞에선 도저히 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형의 이야기를 꺼내본다.
“겁쟁이인 전 처음 말을 배울 때
말에 타는 것조차 무서워했어요.
그래서 형이 저를 뒤에 태우고 해가질동안 알스의 곳곳을 돌아다녔죠.
산과 들과... 바다를 보여줬어요.
그때본 노을빛과 바람... 을 아직까지 잊을 수 없어요.”
... 그리고 오늘의 이 순간 또한 잊을 수 없겠죠.
평생을 가슴에... 간직하겠죠.
“... 마음에 안 들어.”
“예?”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슈엘에게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앞에서 다른 남자얘기는 하지마.”
“.........................”
이상해요. 정말로 이상해...
겨우 그런 말에 눈물이 나올 것 같다니.
이렇게 기쁠 수가 있다니.
정말로 이건...
너무 이상해요.
콧잔등이 시큰해옴을 느끼며 슈엘은 생긋이 웃었다.
그의 등에 얼굴을 기대며 슈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
오랜만에 보는 성의 모습에 슈엘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쏟아져 나왔다.
우기가 지나고 가을이 되었어.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거구나.
익숙해지기도 전에 떠난 곳이었지만 그래도
긴 여행을 끝내고 온 자신을 반겨주는것 같아 즐거웠다.
‘이제 곧 형을 볼 수 있어.’
무엇보다 기쁜건 그 사실이었다.
형을 볼수 있다!
당장이라도 형에게 달려가고싶은 마음을 참으며 슈엘은 말에서 내렸다.
후안이 신하들에게 둘러쌓여 본궁으로 들어간후
슈엘은 서둘러 후궁을 향했다.
옷을 갈아입고 씻은후에...
후안님께 말씀드려 잠시 외출을 하자.
그리고 형을 찾아가는거야.
헤헷. 분명 놀랄 거야.
...힘든 일이 없었냐고 물어봐주고 토닥여주겠지?
내가 돌아온 것에 기뻐해주겠지?
슈엘의 머릿속에 가득한 것은 이미 사리엘이었다.
긴 시간동안 보지 못했던 아름다운 금빛과 블루였다.
꺄악~대며 반기는 시녀들에게 인사를 하며
방으로 들어간 슈엘은 걸음을 멈추었다.
몇 개월 동안 주인 없이 적막해진 방을 상상했던
슈엘에게 펼쳐진 작은 이벤트.
커다랗고 허한 방 가득 찬 붉은색의 장미.
코끝을 자극해 오는 장미향에 슈엘은 입이 벌어졌다.
“우...우와아..............”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 눈의 슈엘의 등뒤로
누군가 그를 껴안았다.
당황한 슈엘을 향해 그는 웃어보였다.
“잘 다녀왔어, 반려님?”
“이안님!!”
쿡쿡- 웃으며 장난스럽게 슈엘을 껴안은 그가 속삭였다.
“어때? 내가 마련한 환영이벤트.”
“멋져요! 우와아...정말. 감사합니다, 이안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슈엘은 감사의 말을 전했다.
정말...이런 선물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까만 눈동자에 가득한 행복을 보며 이안은
무감동했던 심장이 다시 두근거림을 느꼈다.
피어나는 감정에 묘한 즐거움을 느끼며 그는 물었다.
“... 순례는 어땠어?
반황제파의 습격이 있었다는 보고는 들었어. ...괜찮은 거야?”
“아.... 예. 그럼요.”
-어린 생명을 빼앗기고 쓰러져가는 눈동자가 생각났지만
슈엘은 웃을 수 있었다.
“후안님도, 저도 건강하게 돌아왔답니다.”
이안은 슈엘의 표정에서 아픔을 느꼈다.
이전보다 더욱 쌓여진 애절함을 느꼈다.
하하... 반려님. 그게 아니잖아.
무슨 일이 있었던 거잖아.....
“그래.. 그렇군.”
그래도 이렇게 대답하는 수밖에는 없다.
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는 없지.
-나는 너에겐 이렇게 약한걸. 어쩔 수가 없잖아.
“뭐, 좋아. 어쨌건 가볼까?”
“예?”
“사리엘을 만나러 가봐야지.”
“-예!!”
밀린 정무들에 정신없는 후안을 뒤로하고 이안은 몰래
슈엘을 데리고 성을 나왔다.
슈엘의 걱정하는 표정이 역력했지만
[형님은 바쁘다고. 겨우 외출가지고 말하는 게 더 실례야.]
라는 말로 이안은 슈엘을 설득했다.
아직 여행의 피로가 풀리지 않은 말을 달래며 슈엘은 말을 몰았다.
여행의 피로같은건 풀 틈도 없이
서둘러 달리는 슈엘을 보며 이안은 웃었지만
그것은... 쓴.웃음이다.
형을 너무도 좋아하는 알스의 왕자님.
지금의 사리엘을 보면 너는 어떤 표정을 할까.
사랑에 상처받아 웃을 수 없게 된 녹색 눈동자를 보고도
너는 웃을수 있을까...
그것은 사리엘의 친한 친구이자,
슈엘을 연모하는 남자로서 이안의 작은 걱정이었다.
사리엘이 기다리고 있다는 곳은 성에서 떨어진 숲이었다.
단풍이 물든 나무속에 서있는
한사람의 모습에 슈엘은 서둘러 말에서 내렸다.
“형!”
“................”
하얀색 후드를 뒤집어써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분명!!
슈엘은 달려가 그를 꼬옥-안았다.
아아... 역시 형이야.
형의 감촉이야.
형의... 향기야.
코끝이 찌잉해진 슈엘은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사리엘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후드를 벗겨냈다.
..............................
“형..........? 왜 이렇게....”
분명 형의 얼굴이다.
화사한 금발과 녹색눈동자...
분명 형의 얼굴인데 왜 이렇게... 변한거지?
여전히 아름답지만 이전과는
다른 ‘슬픔’이 머물러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응?”
복받쳐오는 가슴의 애임에 슈엘이 조심스럽게 묻자
사리엘은 고개를 내저었다.
잔잔한 미소를 띠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입을 연다.
“나는 건강해, 슈. 걱정하지마.”
슈엘의 볼을 쓰다듬으며 사리엘은 눈썹을 찡그렸다.
“.... 눈빛이 슬퍼졌구나. 슈. 너야말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아, 아니. 무슨 일은!”
두 손을 휘저으며 슈엘은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얼마나 행복한데...
후안님이 예전보다 조금은 나를 생각해주시는것 같아.
무사히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날 형은 웃으며 맞아주었어.
그렇게 무서웠던 비 오는 밤은 이제 끝나고
기분 좋은 가을이 왔지.
슬프지 않아.
... 나는 슬프지, 않아 형.
슈엘을 꼬옥- 껴안으며 사리엘은 속삭였다.
“슬픔을 혼자...참지마, 슈.
언제든 내가 네 옆에 있어 줄테니...”
“....응! 헤헷.. 응! 알고 있어.”
슈엘은 싱긋이 미소 지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슈엘은 성으로 돌아왔다.
연신 웃는 슈엘을 보며 이안은 어젯밤의 일을 떠올렸다.
내일쯤 반려님이 도착할거야- 란 그의 말에
며칠째 어두웠던 사리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사리엘, 한 가지만 물어보자
너. 이대로 로빈과 끝날 셈이야?]
그 순간 녹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얀 두 손이 떨려오고 있었다.
사리엘의 정체를 알려준 것이 실수였던 걸까.
그날 이후 사리엘의 이야기를 꺼내면
로빈은 시선을 돌리며 그의 말을 피했다.
더 이상 아픔 받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남색눈동자는
분명 또 다른 상처를 가지고 있었다.
[ ...끝내고 말 것도 없어.]
[ ... ...]
[ 그날이후 그를 한번도 보지 못했는걸.]
-우기의 끝을 알리던 비가 내리던 그 날 이후
레이크가의 주인은 저택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하루도 빠짐없이 그를 기다렸지만
늦은 새벽, 그가 내는 문소린 이제 들리지 않았다.
사리엘은 미소 지었다.
하지만 미소라고 하기엔
시리도록.
슬픈.
웃음.
[... 이제 그를 만나는 일은 없어.]
[... ...]
[슈가 행복해지면 난, 알스로 돌아갈 거야.
그리고 그는 여전히 한 여자만을 사랑하겠지.]
[-처음부터 내가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말을 끝내는 사리엘의 얼굴은 낯익은 얼굴이었다.
쓸쓸한 눈동자는 이안에게 너무 익숙한 것이었다.
바로... 오랜 시간 짝사랑을 했던 자신의 친구가
매일 보여준.
남색 눈동자와 꼭 닮아 있었다.
하하...바보 같은 녀석들.
서로를 앞에 두고
짝사랑 밖에 할줄 모르는 지독한 바보들...
-하지만 웃을 때가 아니잖아, 이안.
너조차도...
...
그런 눈빛을 하고. 있잖아.
슈엘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이안이 입을 열었다.
“반려님. 너는 짝사랑을 해본 적이 있니?”
그 말에 슈엘의 입꼬리가 자연스레 올라간다.
이안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슈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오래전부터 하고 있어요.
그리고 지금까지도, 하고 있잖아요.“
당신과 닮은 붉은 머리와 붉은 눈동자를 가진 그 사람을
혼자 사랑하고 있잖아요.
-열심히. 필사적으로.
“반려님 짝사랑은 보답을 약속할 수 없어.”
“그래도 할 수 없어요. 마음대로 되는게 아니니까.”
“-형님이,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된다해도?”
“... ...”
“형님이 내게는 시선한번 주지 않아도?”
“... ...”
슈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이 사랑은, 끝나지 않아요.”
흔들림 없는 까만 눈동자를 보자 이안은 슬퍼졌다.
변하지 않는 사랑은 없어.
제발 니 사랑을 확신하지마.
“사랑을 하고 싶지 않니?”
“...네?”
“시선도 주지 않는 남자 따위 이제 그만 바라보고
마주보며 웃는 사랑을 하고 싶지 않냐고.”
슈엘이 눈썹을 찡그리며 미소를 띄었다.
“그런 방법은 몰..라.....”
동그랗게- 떠진 까만 눈동자에 비췬 자신을 바라보며
이안은 슈엘에게 입을 맞추었다.
갑자기 다가온 입술에 슈엘은 당황했다.
츕- 하고 작은 소리를 내며 그는 입술을 떼었다.
한번도... 본 적 없는 진지한 갈색 눈동자로.
그가 다정히 슈엘을 눈에 담고 말했다.
“나랑... 사랑을 하자.”
“... ...”
“짝사랑 따윈 하게 하지 않을게. 그러니 나랑...
사랑을 하자.”
“... ...”
그 순간 까만 눈동자가 떨려왔다.
그러나 이내 침착하게, 그리고 슬프게 그 눈은 이안을 바라보았다.
언제부터 인지 알수 없는 그의 감정에...
슈엘은 고개를 내저었다.
“안돼요.”
“짝사랑 따위 힘들뿐 이잖아!”
“... 그래도 안돼요.”
“!!!!”
“나... ... 이 사랑을 끝내는 방법을 몰라요, 이안님.”
-그 순간이었다.
까만 눈동자가 크게 떠지며 이안을 향한 건...
자신을 향하는 눈동자가 아닌걸 아는 순간 이안은 등을 돌렸다.
익숙한 얼굴이 이안의 뒤에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지금 뭘 하고 있는 거냐.”
“... 아무도 없는 후궁에서 반려님을 꼬시고 있었습니다...
라고 말하면 될까요, 형님?“
붉은 눈동자엔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
“녀석은 내 반려야!
황제의 반려를 가지려는 건 큰 죄인걸 모르나, 이안?!”
“하...하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이안이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형님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 버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까,
밤의 반려라는 것은.
누군가에게 줘버려도 아깝지 않은 그런 것이 아닙니까.”
부정하지 않는 후안의 모습에 슈엘은 상처받은 표정이었지만
이안은 이런 이기적인 말을 해서라도
너를 상처 입혀서라도
-네 그 사랑을 끝내고 싶다.
“그럼 푹 쉬시길, 형님. ...반려님.”
이안은 후안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슈엘을 지나쳤다.
오늘일은...내가 미안-. 이라고 작게 중얼거리며.
이안이 후궁을 나가고 남은 사람은...
슈엘과 후안이었다.
슈엘은 후안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안님이 했던 말이 사실이다.
나의 자리 따위, 밤의 반려자리 따위...
그에게 있어 하찮은 것이란것즘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플까.
갑자기 듣게 된 이안님의 고백보다도
왜 그 말이 더 가슴이 남을까...
후안의 앞에 다가가 슈엘은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저는... 이만 들어가 볼게요. 좋은 밤 되시길... 후안님.”
그렇게 뒤돌아선 슈엘의 손을 잡은 건 후안이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
“방금 전 상황에 대해 변명해보란 말이다!”
변명....................?
무슨 말을 하라는 건지 모르겠어요, 나는.
당신이 어떤 말을 듣고 싶은 건지 알 수가 없어요.
나를 사랑하지 않잖아요,,,
당신이 나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은 ‘사랑’이 아니잖아요.
그건...
‘소유욕’일 뿐이잖아요.
슈엘·알스·슈에 대한 소유욕이 아니라....
황제의 반려에 대한 소유욕.
그런데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
슈엘은 고개를 돌려 후안을 바라보았다.
“이안님께서... 저에게 마음을 고백하셨습니다.”
“!!!”
당신의 놀란 얼굴은... 정말 오랜만이네요.
“하지만- 화내지 말아요,
저는 다른 사람의 고백에 응하진 않아요.
왜냐하면....”
왜냐하면 나는...
당신을 사랑하니까.
- 목까지 차오른 그 말을 할 수가 없어 슈엘은 고개를 숙였다.
붉은 눈동자를 애써 피하며 입을 열었다.
“나는... 당신의 반려니까요. 비록 밤의 반려라고 해도...”
“......하.”
후안은 웃음이 새어나왔다.
언제까지 그런 말을 할 거냐, 너는.
나는 분명 들었어... 네 말을 들었단 말야!
너는 분명 나를 사랑한다고 말했어, 슈엘·알스·슈.
그런데 어째서 네 마음을 밝히지 않는 거냔 말이다!
후안은 화가 났다.
언제까지
‘저는 반려니까요’란 말로 도망칠 건지 답답해졌다.
후안은 슈엘의 손을 잡고 그의 입에 입을 맞췄다.
슈엘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후안은 속삭였다.
“얌전히 안겨. 네 말대로 넌 밤의 반려니까.”
“........... ”
두근거렸던 슈엘의 심장은 뚝-하고 떨어졌다.
아아.... 이 입술의 따뜻함이 사랑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몸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나’
를 원하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눈가에 고이는 눈물을 꾸욱-
참아내며 슈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후안은 슈엘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갔고
적막한 후궁 안에 커다란 문소리가 울려 퍼졌다.
몇 번의 입맞춤 후에 후안이 슈엘의 옷을 황급히 벗겨내었다.
파란색의 옷을 벗겨내자 보이는 하얀 피부에
후안은 입을 맞췄다.
슈엘이 터져나오는 신음소리를 감추려 이를 악물었다.
“흐으..............”
후안은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럴 셈이냐.
이를 악물지 말고 소리를 내란 말야!”
그러나 슈엘은 고개를 저었다.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돌렸다.
“이-!”
화가 난 후안이 슈엘의 머리카락을 꽈악- 움켜잡았다.
전해오는 아픔에 눈살을 찌푸리는 슈엘의 얼굴을
자신의 곁으로 가져온 후안은
슈엘의 입에 입을 맞췄다.
츄웁-- 혀와 혀과 맞닿는 긴 키스.
화를 내뿜듯 거친 키스에 슈엘은 혀가 아려왔다.
입을 맞추며 후안은 슈엘의 바지를 벗기고
속옷사이로 그의 성기를 어루만졌다.
“으읏...!!!”
당황한 슈엘의 얼굴은 후안을 멈추지 못했다.
슈엘의 성기를 잡고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이며...
그리고 부드럽게 그것을 만져주며 후안은 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으...............”
아찔한 아픔과 쾌락에 슈엘은 두 눈을 감았고,
이내 슈엘의 남성은 질척한 액체를 내뿜었다.
얼굴이 빨개진 슈엘의 두 눈에 눈물이 맺혔지만 후안의 키스는
아직도 멈추지 않았다.
그의 혀를 가득 머금은 채로 슈엘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후안의 손가락이 슈엘의 그곳을 몇 차례 애무하고 나서야
두 사람이 입에 떼어졌다.
거친 숨을 내쉬며 슈엘은 후안을 바라보았다.
... 참 이상한일이야.
사랑하는 남자가 내 앞에 있는데...
이렇게 가까이 살을 맞대고 있는데
어째서
이렇게.
추울까.
바들바들 떠는 슈엘의 손을 보며 후안은 눈썹을 찡그렸다.
저도 모르게 그 하얀 손을 꼬옥 잡고는 입을 맞추었다.
“어디가... 아픈 거냐? 왜 ... 이렇게...”
슈엘은 그저 아무런 대답 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아니요, 후안님.”
[시선도 주지 않는 남자 따위 이제 그만 바라보고
마주보며 웃는 사랑을 하고 싶지 않냐고.]
그 말에 고개를 내저은건 나였다.
“아프지 않아요. 저는... 아프지 않아요.”
그러니 이런 대답밖에는 할 수가 없어.
...이런 거짓말 밖에는...
******
“... 지독한 술냄새군요.”
사람이 없는 어두운 술집안.
술잔을 채우는 이안을 향해 누군가 말했다.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고개를 돌린 이안의 눈동자는 분노에 차있었다.
누군가 다가온다면 주저 없이 베어버릴 그런 눈빛.
그 눈빛 때문에 영업에 끝났음에도 주인은 가게 문을 닫지 못한 채
멀리서 이안을 조심히 바라있던 차였다.
하지만 그는 이안을 향해 한걸음 다가갔다.
갈색의 후드를 벗자 금빛의 머리카락이 달빛에 비취었다.
“뭐냐... 남창.”
짧은 말속에는 내까짓게 왜 이곳에 있느냐는 뜻이 담겨져 있었다.
멜은 그저 두 눈을 휘이며 대꾸했다.
“매일 밤 부르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오늘은 성에 계시지 않더군요.
... 그래서 이 곳까지 찾아왔습니다.”
웃고 있는 그 눈동자가 오늘따라 더더욱 화가났다.
사람을 내리까는 저 오만한 파란 눈동자가.
“썩 꺼져.”
그 말에 눈썹을 치켜 올리며 멜은 입을 열었다.
“형편없는 사람이군.”
“?!”
“겨우 알스의 왕자, 그 하나를 못 얻어서 그 꼴이란 말인가?
한낱 남창에게 감정을 들킨 것에
부끄러워할 자존심마저 잊고!”
“!!!”
갈색 눈동자에 당황함이 내비췄다.
감히 왕족 앞에서 보이는 저 오만한 행동 때문이 아니라
이안이 마음에 품고 있는 상대가
슈엘이란것을 알아챈 사실 때문이었다.
녹색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이안을 향하고 있었다.
“나는... 내 소망을 이루기 위해 귀족의 개가 되고....
목숨을 걸고 검을 들어.
하지만 당신은 뭐지?”
다시 한발작 멜은 이안에게 다가갔다.
이안의 손에 들려진 술잔을 잡아 바닥에 술을 내부으며 그는 말을 이었다.
“당신은 왕위가 욕심나지 않아 나라를 버리고 여행을 떠났어.
그리고 돌아온 지금 당신은 탐나는 것이 생겼지!
그러나 그게 황제의 반려라며 울부짖는군.
자신에게 분하고 싶다면...
적어도 그것을 위해...”
의자에 앉아 자신을 올려다보는 이안을 향해 멜은 말했다.
“-목숨을 바쳐.”
갈색 눈동자가 진지하게 멜을 바라보았다.
이런 시선은 처음이었다.
언제나 비아냥거리고 장난스럽게 보던 눈동자였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쉭- 하는 바람을 가르는 소리에
이안이 시선을 돌리는 순간 화살한촉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피하려 했지만 술에 취한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런...!!
그순간 이었다.
멜이 몸을 돌려 이안을 감싸 안았다.
“!!!!!”
뭐야...
이녀석...왜 나를...
다행히 화살은 멜의 어깨를 살짝 스쳤을 뿐이었다.
한순간에 술이 깸을 느끼며 이안은 멜을 바라보았다.
찢어진 옷 틈으로 피가 새어나오는 어깨에
이안이 멜을 바라봤지만 멜의 표정엔 어떠한 아픔도 없었다.
“단순히 스친거야.”
어깨를 천으로 감싸며 멜은 말했다.
“이게... 당신을 노리는 사람들이야.”
“... ....”
“언제 어디에서든 기회만 있다면 그들은 당신을 노려.
당신은 잠이 들어 있을 때도,
그 한심한 사랑에 술을 마실때도
절대 경계를 늦춰선 안돼.“
그 말에 이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흥, 그런 자들 따위에게 내가 당할 것 같으냐?”
가볍게 말을 넘기는 이안의 행동에 멜은
그의 멱살을 잡았다.
가는 그 손목에서 어떻게 이런 힘이 나오는지
강하고 억척스런 힘이 느껴졌다.
평소의 요부의 눈빛과는 다른 사나운- 눈빛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죽이지 못한 게 아냐!
나는 당신을 몇 번이고 죽일 수 있었어!"
-강렬한. 녹색 눈동자였다.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마!
왕족이든 노예든 죽음 앞에서만큼은 평등하니까!
목숨을 지키려고 발버둥치란 말이야!!!!”
이안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체 뭐야 너...
너야말로 날 죽이려는 녀석이잖아.”
“... ...”
순간 블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다문 입을 열며 멜이 말했다.
“오늘의 이건... 단순히 예전일의 빚갚음이야.”
그래. 아무 의미도 없어,이건.
멜은 이안의 멱살을 놓았다.
휙- 하고 돌아서는 멜을 향해 이안은 턱을 괴고 말했다.
“덕분에 술이 깼어.
잃어버릴 줄 뻔했던 자신감도 되찾고 말이지.”
"-고마워, 남창."
"..............."
멍하니 이안을 바라보며 멜은 말을 이었다.
조심히... 조그맣게.
"당신은 이상해.
보통 왕가의 사람들은.. 남창 따위에게
자신을 죽이려는 암살자 따위에게..
고맙다는 말 따위 하지 않아."
“쿡쿡.... 사실 오늘 저녁. 죽였어야 하는데.
술에 취한 남자 따위.... 최고의 기회였는데.”
죽일 생각이었어...
언제든, 어느 때라도 당신을 죽일 생각이었어.
당신이 나를 부른 날이면 날카로운 단검을
품속에 넣고 찾아가곤 했어.
하지만 어느 날부턴가 단검을 들고 가지 않게 되었어.
암살자 따위를 뻔뻔하게 안고는 잠들어 있는
그 얼굴에
죽이고자 하는 마음보단
지켜보고 싶다는 마음이 커져갔어.
왕족 따위, 눈앞에 있으면 얼마든 베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날 모욕한 사내인데
어째서 죽이질 못하게 된 거지?
사람이 드문 숲 속에 도착한 멜은 이를 악물었다.
빨랐던 걸음이 점점 천천해지고 이내 비틀거리더니
쓰러지듯 나무에 기댄 멜은 어깨를 바라보았다.
상처를 감싼 천위로 번지는 피는 검붉은 색을 띄고 있었따.
“피했다고 피했는데...
... 당연하게도 독무든 검이었군, 이거.”
-스치기만 해도. 중상이야.
하아- 하고 숨을 내쉬자 작은 입김이 생겼다.
짧은 가을이 끝나고 또다시 겨울이 다가옴을 느끼며
멜은 눈을 감았다.
상처에 익숙하다 생각했던 몸은 고통에 강했다.
독에 당한 치명상에도 의식은 또렷했다.
“표적을 구해주다니... ... 엄연한 배신자로군.”
멜이 눈을 뜨자 그의 앞에는 검을 든 사내가 서있었다.
어두운 밤 속에 맹수처럼 눈은 빛내며 그는
멜에게 검을 겨누었다.
“잊지 않았겠지, 멜? 배신자에겐. 죽음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