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레이크가의 저택.
오늘도 뒤늦은 밤 귀가한 로빈의 발길은 사리엘의 방을 향했다.
그리고 그런 날이면 사리엘의 방엔
두 남자의 신음소리가 가득했다.
로빈은 드러난 정신없이 하얀 몸에 입을 맞추었다.
길고 새하얀 목에...
가는 어깨에...
분홍빛의 유두에...
하얀 피부에 새빨간 자신의 흔적이 남자 로빈은 즐거웠다.
그의 입맞춤에 작은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사리엘이 로빈의 옷을 벗겼다.
그 부드러운 손길에 로빈은 옷을 다 벗겨지기도 전에
사리엘에게 입을 맞추었다.
작은 입술이 기다렸다는 듯 그의 입술을 반긴다.
너무나 부드러워
그의 입술이 떨고 있다는 걸 로빈은 눈치 챌 수 없었다.
<< 반려로 맞아주세요 >>
“아!!!”
로빈의 손가락이 자신의 깊숙한 부분에 닿자 사리엘이 소리를 질렀다.
많은 밤들을 안겼지만
아직까지도 익숙해지지 않은 감촉에 사리엘은 눈을 감았다.
“감지마.... 리엘... 눈을 떠.”
-네 푸른 눈동자를 보고 싶어.
사리엘이 눈을 뜨자 환히 웃는 로빈이 보인다.
땀에 젖어 찰랑이는 은빛의 머리카락...
‘사랑스럽다는 듯’ 날 바라봐주는. 눈동자.
그 모든게 미칠 듯 가슴을 설레게 했다.
“.리엘 미안... 이제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어.”
“?!!”
뜨거운 그의 것이 자신을 파고드는 고통에
사리엘은 비명을 질렀다.
“하...아악!! 아... 아앗......으....”
초록 눈동자에 눈물이 맺혔다.
아픈것이 분명함에도 눈을 감지 않는 그 모습이...사랑스럽다.
너무도 사랑스러워 견딜수가 없다.
이때만큼은 아무것도 생각할수 없어.
-너외엔
누구도 생각할수 없어...
긴 속눈썹위로 입을 맞추며 로빈은 그의 것을 분출했다.
어두운 방안에 은색의 달빛이 비췄다.
침대엔 몇 번이나 절정에 다다랐던 두 남자가 누워있었다.
로빈은 자신의 품에 안겨있는 하얀 얼굴을 바라보았다.
긴 금색 머리카락... 말아 올라간 속눈썹.
잡티하나 없는 피부.
처음 본 그날도 이 아름다움에 놀랐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보다도 수십배 더 아름다워진 것 같아 감탄만 튀어나온다.
-도대체, 얼마나 더 예뻐질 셈이야. 너는...
“무슨 생각을 해요...?”
감겨있던 눈이 떠지고 녹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당황한 얼굴로 로빈은 두 손을 흔들었다.
“아니...그냥, 뭐.”
-네가 너무 예뻐서.
란 말을 했다간
무섭게 나를 쏘아보겠지?
얼굴을 긁적이는 로빈을 바라보며 사리엘이 나지막히 입을 열었다.
“오늘도... 로즈양을 만났나요?”
“ ... 응.”
“또 고백을 하지 못했나요?”
“ ... 응.”
무표정한 얼굴로 사리엘을 보며 로빈은 알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예전같았으면 로즈를 만나고 온 날은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녀에게 또 고백하지 못한 내가 한심스러워 잠이 들 수 없었다.
그런데 왜일까....
“-정말 위로하는 힘이 있나봐.”
“?”
“네 몸.”
“!!!”
얼굴은 빨갛게 달아오른 주제에 아무렇지도 않은 척
표정을 관리하는 그를 보며 로빈은 눈을 감았다.
‘이상하게 지금은... 편히 잠들 수가 있어-.“
아침 햇빛에 눈을 뜬 로빈은 자신의 품속에서 잠든
하얀 몸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어젯밤의 흔적이 여실한 아름다운 몸.
몇 번이나 입을 맞춘 곳에 남은 새빨간 키스마크.
...이안이 봤다간 정말 목숨이 날아갈지도.
근데 어째서일까.
친구에 대한 죄책감보다도.
두 사람의 관계가 이렇게 신경쓰이는건.
‘연인’이라는 두 녀석의 관계가 맘에 들지 않는건.
....에이이이!!!!
어디서 악마라도 씌어온거냐, 로빈·레이크?!!!
무슨 이런 이안 같은 생각을...!!!
“제발- 정신 차려. 로빈.”
이 아름다운 남자는... 네 사람이 아니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잖아.
그와 보내는 하룻밤은 결코 사랑이 아니잖아.
그래. 이건... 착각이다.
긴긴 짝사랑이 너무 힘들어서 내가 지금
착각을 하고 있는 거야
... 이제 그만 그 짝사랑을 끝내고 싶어서
내 심장이 지금
착각을 하고 있는거라구...
로빈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하얀 볼에 살짝 입을 맞췄다.
그의 몸에 이불을 덮어주며 로빈은 방을 나섰다.
쾅...
방문이 닫힌 후 사리엘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두 손으로 입을 막으며 사리엘은 조심히 눈을 떴다.
두근두근-
세차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 ...방금 전...
입맞춤은....
단순한 아침. 인사...야.
머릿속으로 그렇게 말해보아도 감정은 따라주지 않는다.
제멋대로 감동받고 기대해버리고야 마는 심장.
한순간 지나갔던 그의 부드러운 입술을 떠올리며
사리엘은 입꼬리를 올렸다.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
하얀 이불속에 숨어 방긋이 웃는 사리엘의 귀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 밖의 복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로빈!”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녀의 목소리-.
“로즈?!!”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사리엘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웃고 있던 입이 그대로 굳어졌다.
“뭐야, 왜 그 방에서 나오는 거야?”
“아, 아니.... 그게...”
“흐음~ 설마 애인이라도 숨겨둔 것 아냐?!”
“애인이라니!!! 그럴 리가 없잖아!!!!”
커다란...목소리.
너무나 크게 부정하는 목소리에 사리엘은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까지 말할 건 없잖아...
아무리 좋아하는 여자 앞이지만
밤새 그렇게 날 안아주었으면서.
내게 입을 맞췄으면서
... 그렇게 기분 나쁜 듯이 부정할 건 없잖아요.
그의 목소리와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때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점잖은 발소리..
이내 귀에 익은 다정한 목소리가 들린다.
“...리엘님. 일어나셨습니까?”
“... ...”
-다정한 노인의 목소리.
하얀 이불을 뒤집어쓴 채 사리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얀 이불 속에 숨어버린 그를 향해 알프레도는 빙긋이 웃었다.
“울고계십니까?”
“.. ....”
대답소리는 여전히 들리지 않았다.
하얀 이불속에 있는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오랜 시간동안 많은 사람을 보아온 알프레드는
모든 걸 알고 있었다.
어느 날 이 커다란 저택에 묶게 된 이 아름다운 손님은
자신의 주인과 특별한 관계가 되었다는 걸.
오랜 시간 사랑에 아파한 젊은 주인을 그가 보듬어 주고 있다는걸...
“리엘님. 로빈님께선 변하고 계십니다.”
“... ....”
“조금씩이지만 분명 한결같던 그 시선이 당신에게로 옮겨가고 있답니다.”
“... .....”
“그러니 힘을 내세요.”
그는 진심으로 사리엘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로빈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신이지만
‘사랑’만큼은 그가 해 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랑에 힘들어하는 로빈의 남색눈동자는
언제나 그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조금씩 그 눈빛이 변해갔다.
따스한 사랑을 알아갔다.
-그것은 모두 리엘님이 주신 사랑이겠지요.
몸을 돌리는 그에게 나지막히 대답소리가 들려왔다.
“... 고마워요.”
하얀 이불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노인은 미소 지었다.
“아침식사를 하러 내려오세요.
오늘은 특별히 리엘님께서 좋아하시는 요리를 준비해놓았으니.”
******
[ 사랑해요- ]
아아... 금빛의 머리카락. ...
하늘을 품은 푸른색의 눈동자.
-나의. 어머니.
.. 사.랑.해.요.
또박또박 되내이는 그녀의 작은 입술.
몇 번을 떠올려보아도 무섭도록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
이내 검은 바다가 그녀와 한 남자를 삼켜버린다.
[어머니!!!]
그러니 내 손에 그녀는 닿지 않는다.
아무리 불러도 그녀는 나를 돌아보지 않는다.
데엥----
... 슬프고 묵직한... 종소리.
하얀 장미가 가득 한 흰색의 관엔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거대한 제국을 호령하던 남자.
그러나 이제는 한구의 시체일 뿐인.. 나의. 아버지.
데엥---
그래... 이것은 장송의 종소리.
... 왕의 서거를 알리는 제국의 종소리.
아버지를 실은 하얀관은 점점 내게서 멀어지고
쾅- 하고 닫히는 문소리와 함께 그가 보이지 않는다.
냉정하고 굳건하고 차가웠지만...
언제나 자신을 지켜주었던 강대한 아버지는 이젠 보이지 않는다.
끔찍한 공포심에 나는 뒷걸음질 친다.
까만 복면의 사내들이 날카로운 검을 들고 내 뒤를 쫓는다.
그 날카로운 검이 내 심장을 향하는 순간
어두웠던 공간에 하얀 손이 나타난다.
-나는 황급히 그 손을 잡았다.
“...........................”
후안은... 눈을 떴다.
환한 아침햇빛이 쏟아져 나오는 이곳은...
분명 낯설었지만 포근한 침대 위였다.
붕대가 감긴 배의 상처에 신경 쓰기도 전에
후안의 눈에 들어온것은... 그녀석이었다.
까만 머리카락과 까만색의...아이의 눈동자를 가진 그녀석....이었다.
슈엘은 후안의 침대위에 머리를 기대어 잠이 들어 있었다.
“...............................”
후안의 손을 꼬옥- 잡고 있는 슈엘의 손을 보는 순간
후안은 가슴이 지끈거림을 느꼈다.
슈엘의 하얀 손은.. 새빨간 피투성이였다.
그제야 슈엘의 온 몸에 붙어있는
검붉게 변한 핏덩이가 보인다.
... 이렇게 둘이 살아있다는건 분명...
“... 네 손으로....”
사람을... 죽인 거냐...
어찌된 일인지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어 작은 한마디가 후안의 입속을 돈다.
정말로 이상한일이다.
이상할 정도로 가슴이 아프다.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 큰 죄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나는 왕이다.
사람의, 게다가 반역자의 목숨하나쯤은
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픈 거냐.
... 고작 네가 사람을 한명 죽였다는 사실이...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픈 거지...?
“........안...”
눈을 감은 슈엘이 눈썹을 찡그리자 그제야
후안은 슈엘이 얼굴가득
식은땀을 흘리는 것을 알았다.
“.........미안....... 미안해.........”
“..........................................”
울지않는것이 이상할 만큼 처절한 목소리로
미안하단 말을 되내인다.
... 피묻은 하얀 얼굴을 손으로 쓰담으니...
이내 슈엘의 속눈썹이 움직이나 싶더니...
까만 눈동자가 보이기 시작한다.
후안이 놀라기도 전에 벌떡- 일어난 것은 슈엘이었다.
“후, 후안님?!!”
슈엘의 까만 눈동자에 감도는 것은 분명... 안심이었다.
까만 눈동자엔 아직도 아이처럼 빛나는 순수가 있었다.
금방이라도 울듯이 물기가득한 눈에 후안을 담는다.
후안의 얼굴을 바라보던 슈엘은 그제야 눈치 챈 듯
당황해하며 말했다.
“아......저....죄송....해요.”
“...?”
황급히 후안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며 슈엘이 얼굴을 붉힌다.
“저... 후안님이 나쁜 꿈을 꾸시는 것 같아서...”
... 피투성이의 두 손을 허리 뒤로 숨기며 슈엘이
입술을 깨물며 웃는다.
“... 이런 모습이라니.... 너무 더럽죠...?”
“.........................”
목소리가 점차 떨려온다.
“하하. ... 피투성이의 반려라니...
.... 정말 이런 모습은 보여드리고 싶지 않았는데....
정말로... 헤헷. ”
-후안님이 너무 걱정되어... 떠날 수가 없었어요.
당신이 다시 건강히 눈을 뜨기 전까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 뜨거워지는 눈가에 눈물이 맺지 않도록 참으며 슈엘은 웃었다.
“그래도... 후안님이 무사하셔서 정말...너무 다행입니다.”
생긋이 휘이는 두 눈.
까만 머리카락이 아침햇빛을 받아 찰랑인다.
낮지만 청명한 목소리가 후안을 향한다.
“........좋은...아침 이예요, 후안님.”
“으윽....”
이를 악무는 후안을 보며 작은 키의 살집 있는 의원은
누런 이를 내보이며 말했다.
“젊은 청년이 이것도 못 참나~ 허참.”
이내 후안이 노인을 노려보았지만
붕대를 든 노인은 휘파람을 불며 유유히 시선을 피할 뿐이다.
깊은 상처에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으며 노인은
아쉽다는 듯 입을 열었다.
“흥, 그만큼 깊은 상처를 입고 왔기에
어디 시체하나 생기겠나 싶었는데 무섭도록 빨리 회복하는군.
자네는 인간의 탈을 쓴 괴물이야! 괴물!”
“.... 이상한 말을 하는군. 의원이란 자가 환자의 죽음을 바라는 건가?”
차가운 말투에 노인은 고얀 놈- 이라며 후안의 상처를 꾸욱 누르자
후안이 헉...하고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이!! 이게 대체!!!”
“이보쇼, 괴물청년.”
“?!”
퉤- 하고 창문 밖으로 침을 뱉으며 노인은 말했다.
“자네는...분명 귀족이지?
얼굴에 새하얗게 질려 배에 구멍이 뻥- 뚫려 온 그날 한 눈에 알았지.
내가 영~ 마음에 안 드는 족속이란 걸 말야.
그런데 내가 왜 하루밤낮을 잠도 자지 않아가며 자네를 살린 줄 아나?”
“..............?”
의아해하는 후안의 얼굴을 노인은 장난스럽게 쏘아보았다.
“바로 슈 녀석 때문이야!”
.... 늦은 밤이었다.
조용한 마을에 말소리가 들려오나 싶더니 이내 문을 쾅쾅- 두드리는 것이다.
두 눈을 비비며 일어나 문을 여니...
문 앞에 서있는것은 ... 두 남자였다.
피투성이가 된 남자의 몸엔 한 남자가 기대어 있었다.
그때의 그 까만 눈동자를 잊을 수 없다.
밤의 어둠 속에서도 선명한 그 까만 눈동자는
오랜 노인의 세월 속에서도 귀한 그것이었다.
... 놀랄 만큼 절실한 눈동자로 남자는 말했다.
[ 제발....후안님을 살려주세요!! ]
“자기도 피투성이에 엉망인 주제에,
얼마나 절박한 눈동자를 하던지!
내가 자네를 살리지 못하면 그대로 따라 죽기라도 할 태세였다고!
아무리 말을 해도 잠도 안자고 씻지도 않고,
자네를 치료하는 것만 묵묵히 바라보는데... 흥.”
그 시선을 떠올리며 노인은 혀를 찼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녀석에겐 아까운 ...마음이 아닌가.
그만큼 깊고 한결같은 애정을 담고 있었다, 그 눈동자는.
“.... ....”
노인의 이야기에 후안은 잠시 말이 없었다.
.... 나를... 위해서?
그녀석이 나를 위해서...그렇게 까지 했다는 건가?
어...째서? 어째서냐. 슈.
내가 이 제국의 왕이기 때문이냐?
...기쁨과 동시에 후안을 찾아온 것은 혼란이었다.
복잡한 표정을 짓는 후안의 머리통을 따악- 때리며 노인이 말했다.
“그런 표정은 하지마! 그 녀석, 또 걱정한다구!”
긴 세월을 간직한 따스한 눈동자가 후안을 향한다.
“그녀석을 소중히 대해줘라.”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슈엘이 들어왔다.
이제는 평소처럼 깔끔한 모습으로 돌아온 슈엘의 손에 들린 것은
스프가 들린 쟁반이었다.
“아... 치료는 다 끝났나요?”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슈엘이 생긋이 웃으며 그에게 고개를 숙인다.
“오늘도 너무 감사합니다, 의원님.
정말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금세 감동받은 표정의 슈엘을 향해 큭큭 웃으며 노인이 말했다.
“어린놈이! ... 사람을 고치는 게 본래 내 직업이다.
그렇게 감사할만한 일은 아니야.”
헤헤 웃던 슈엘이 이내 두 눈이 휘둥그래지며 소리쳤다.
“우왓!!”
슈엘의 엉덩이를 쓰윽- 만지며 노인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이따금 이런 선물도 있다면야~ 나한텐 꽤 짭짤한 일이지, 껄껄껄.”
“이... 영감탱이가!”
후안이 몸을 일으키려다 상처의 아픔에 다시 내려앉자
이제는 보이지 않는 노인의 목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부디 얌전히 있으라고.
자꾸 그렇게 움직이다간 금방 상처가 벌어져서 죽어버릴껄? 크하핫.”
문밖을 노려보는 후안을 보며 슈엘이 웃으며 침대로 다가갔다.
“후안님, 아직 몸이 낫지 않았잖아요. 안정을 취해야지요.”
저 영감이 방금 네 엉덩이를 만졌잖아! 란 말같은것은...할 수가 없다.
후안이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따스한 스프가 눈에 들어온다.
어딘가 서툰 스프의 맛.
그런데도 며칠째 질리지가 않는다.
이상하게도 음식 맛에 둔했던 후안에게
맛있다...란 감정이 생겨난다.
한 숟갈 스프를 뜬 슈엘이 후-후- 하고 조심스럽게 스프를 식힌다.
벌써 며칠째... 반복되는 일상.
처음에, 슈엘이 후안에게 스프를 먹여준다고 했을 때
인상을 쓴 것은 후안이었다.
그런 둘을 바라보던 노인이 한심하단 표정으로 말했다.
[환자는 의원 말을 들어야지.
절대적인 안정이 필요하니, 최대한으로 간호를 받도록 해라. 이상!]
... 그 말에 후안은 평생 자신이
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 일을 하게된 것이다.
이렇게 덩치 큰 녀석이...주는 스프를 받아먹는 자신이라니.
“자아, 후안님. 자, 아~ 하세요.”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우스울 거라 생각했던 이것은 생각보다도 즐겁다.
진지한 얼굴로 스프를 한 숟갈 한 숟갈 떠주는 그 모습이...
금방이라도 웃음이 나올 것처럼 재미있다.
후우- 하고 마지막 한 숟갈에 입김을 불며
슈엘은 후안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따뜻해졌다고 느껴지는 것은...
그가 아프기 때문일까.
예전 같았으면 상상도 못했을
대담한 행동을 하는 내내 심장은 떨려온다.
후안에게 마지막 한 숟갈을 떠주며 슈엘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창문밖 어두운 회색구름을 보며 말한다.
“비가...올려나 봐요.”
근래 들어 계속된 잿빛 하늘이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장마철인건가...하고 슈엘은 창문을 바라보았다.
이네 어두워진 하늘을 배경으로
쏴아아- 하고 거친 비가 쏟아내져 내렸다.
... 언제나 봄이었던 알스에선 보기 힘든 날씨.
... 회색 하늘과 뿌연...세상...
슈엘의 까만 눈동자가 불안한 듯 흔들렸다.
빈 그릇을 접시위에 놓으며 슈엘은 말했다.
“이렇게 큰 빗소리를 듣는 것은... 처음이네요.”
“...아아.”
봄의 나라 알스에선... 저렇게 큰 비는 내리지 않는다.
... 슈엘의 어깨가 떨렸지만
얼굴만은 그저 싱긋이 웃고 있었다.
밤이 되도록 빗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모든 것을 사라지게 만들 것처럼 쏟아져 내리는 빗소리 속에도
슈엘은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
오늘 있었던 일들...등 사소한 이야기를 하는 슈엘의 모습은
분명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 위화감은...
“시간이...늦었군요.”
태엽시계를 바라보며 슈엘은 그제야 시선을 돌렸다.
“충분히 수면을 취하셔야 건강해지죠.”
장난스런 말투지만 분명 그 속에 있는 것은...
... 며칠째 느끼는 슈엘의 변화에 후안은 눈썹을 찌푸렸다.
“그럼, 좋은 꿈...꾸세요, 후안님.”
“.........”
...이내 생긋이 웃으며 후.... 하고 불을 끈 후에
슈엘은 침대에 몸을 눕혔다.
이내 어두워진 방에는 차가운 빗소리만이 들려온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났을까...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슈엘의 시선이 향한곳은 후안이었다.
보이지 않지만 그곳에 있을 그를 생각하며
슈엘은 이불을 꼬옥 쥐었다.
차가운 빗소리에 슈엘은 더더욱 세게 이를 악물었다.
분명 춥지 않은 날이었음에도 슈엘의 몸은 덜덜 떨려왔다.
온몸의 식은땀에 옷은 이미 축축이 젖어있었다.
[-날 왜 죽였어요?]
-원망을 가득 담은 갈색의 눈동자가 슈엘의 눈에 보였다.
[-날 왜 죽였어요?]
그 눈에 가득한 것은 원망이었다.
썩어가는 피부와 터져 나오는 선명한 새빨간 피.
쏴아아아-----
빗소리가 너무 무서워 슈엘은 귀를 막았다.
“..........슈”
“...............”
“.....슈!”
“....................”
그제야 슈엘은.... 이 목소리가 그의 목소리임을 알았다.
내가 만들어낸 환상이 아니라....후안님의 목소리...
잠들었을 거라 생각했던 그의 목소리에
공포에 떨었던 슈엘의 가슴이 조금씩 여유를 되찾아간다.
어둠 속에서 그의 목소리가 똑똑히 들려왔다.
“너...이리와.”
“예?”
“밤마다 악몽...꾸잖아.
같이 잔다면 좀 나아지질도 모르지.”
“...................”
.... .....
좋은 꿈꾸세요...하고 인사를 하고 불을 꺼요.
....그럼 아주 조용하고...무서운 어둠이 계속 되요.
밤이 어둡고 어두워질 무렵에 후안님.... 하고 이름을 불러보면
당신이 대답하지 않아요.
...그때야 돼야 나는 잠이 들 수 있어요.
그때가 되야... 끔찍한 악몽에 시달리고
후안님께 들리지 않는
작은 비명을 지를 수 있으니까.
-그래서 후안님은 알지 못할 거라 생각했어요.
“어서 와라.”
툭툭- 침대시트를 치는 소리에
슈엘은 결국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가 보지 못할 이 어둠에 감사하며
슈엘은 조심히 후안의 침대로 발을 옮겼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안고 슈엘은 조심히 후안의 옆에 누웠다.
두근두근.
어느새 빗소리는 들리지 않고...
커다란 자신의 심장소리만이 가득이다.
“흠... 뭐, 불편하진 않군.”
그것이 그의 버릇인 듯...슈엘을 꼬옥 안고
잠이 드는 후안을 느끼며 슈엘은 고인 눈물을 참느냐 애썼다.
... 하하. 당신말대로 악몽은 꾸지 않겠네요.
...하지만 이러면 도저히 잠들 수가 없잖아요.
가슴이 설레어서 도저히 나는 잠을 잘 수가 없어....
한참의 시간 후에 슈엘은 조심히 되내어보았다.
“후안...님?”
“후안....님....”
언제나처럼 들리지 않는 대답소리에 슈엘은 싱긋이 웃었다.
대답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은 똑같은데....
오늘만큼은 무섭지 않아.
오늘만큼은... 악몽을 꾸지 않을 것 않아요.
보이지 않는 얼굴이지만 그의 잘생긴 얼굴을 떠올리며
슈엘의 손이 조심스레 그의 얼굴을 만졌다.
매끄러운 얼굴...
날카로운 턱선과 오똑한 콧매를 느끼며 슈엘의 손은 떨려왔다.
“후안님...............”
“후안님..................”
듣지 못할 그에게 말해본다.
“................사랑해요..........................”
슈엘은 천천히 그 말을 되내이며 눈을 감았다.
짙은 어둠 속에서 슈엘은 후안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심홍의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너... 방금 ... 무슨 말을 한거야...'
******
쏴아아아-------
빗소리에 잠이 깬 이안은 고개를 돌렸다.
밤새 자신이 품었던 남자-멜-의 하얀 나체가 보였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창가에 앉아 그는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나 강렬했던 파란 눈동자가 그때만큼은
온화한 빛을 띄었다.
“비를 좋아하나?”
“... ...”
이안의 목소리에 멜은 고개를 돌렸다.
이내 파란 눈동자가 그 ‘분노’를 품은 눈으로 돌아왔다.
-못 말리겠군
멜의 변화에 웃음 지으며 이안은 멜의 곁으로 다가왔다.
창문을 열며 그는 손을 내밀었다.
“우기가 시작되었군.”
“... ....”
“그 녀석-. 여름감기라도 걸리면 안되는데...”
“... ...”
자신을 대할 때완 달리
저 남자가 부드러운 표정을 짓는 건
‘어떤 사람’을 생각할 때뿐이었다.
“당신은...”
“...?”
“마음에 품은 자가 있으면서 왜 날 안는 거지?”
“....핫...”
그 말에 이안의 입에선 웃음이 새어나왔다.
상대하는 남자가 몇인지도 모르는 남창이 지금 나에게
그런걸 묻는 거야?
쿡쿡 웃으며 이안은 대답했다.
“너와의 섹스는 꽤 만족스러우니까. 그리고...
-날 죽이려는 상대를 안는 것만큼 스릴있는것도 없지.”
멜의 하얀 몸에 남겨진 키스마크를 바라보며 이안이 물었다.
“그런데 언제냐?”
“.... ?”
“언제 내게 칼을 겨눌 거냐?”
장난스런 표정을 지으며 이안은 멜에게 말했다.
“기다리고 있다고. 나.
내 목숨을 가지러 온 널 보기 좋게 베어버리는날을-.”
그 말에 멜은 고개를 돌렸다.
“기회가 된다면 언제든.”
멜의 대답에 이안은 호쾌하게 웃었다.
자신의 죽음을 경고하는 암살자의 앞에서
호탕하게 웃는 남자를 멜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 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