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25)

<12>

바닷바람에 붉은 머리카락에 휘날렸어요. 

파란 바다와 진홍의 빛이 너무나 잘 어울렸는데... 

후안님은 인상을 찡그리는 거예요. 

하하... 그때 알았어요. 

이 사람은 바다를 싫어하는구나 하고...  

언젠간 만나면 묻고 싶었어요. 

왜...바다가 싫으세요? 

당신처럼 드넓고. 

강한 바다를 왜... 좋아하지 않나요?

<< 반려로 맞아주세요 >>

후안은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무 말 없이...아무런 대꾸도 없이 걷는 후안을 보며 

슈엘은 두 손을 꼬옥 쥐어보았다. 

며칠 전까지 만해도 조금이지만 

나를 바라봐주고... 내 말에 대답해주었는데... 

묵묵히 걷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에 잠긴다. 

한발작... 

한발작의 거리. 

언제나 그와 내겐... 한발작의 거리가 있다. 

아무리 몸을 섞어도... 

한발작의 거리가 그와 나사이엔 있다.

요 며칠... 후안은 슈엘을 하루도 빠짐없이 안았다. 

밤이 되어 방문을 닫고 이내 붉은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볼 때면 

슈엘의 가슴은 두근거렸다.

...그리고 이내 눈물날 만큼 아픈 마음이 자리 잡았다. 

이제는 익숙해진 그의 차가운 체온이라던가 

그의... 큰 손의 느낌. 

거친 입맞춤까지도... 

꿈이 아닌가 싶을 만큼 행복했지만... 

조금은 다정해진 그 손길에 작은 희망이 생겨났지만 

날이 밝으면 다시 벌어지는 이 거리는 

더더욱 지독한 외로움을 주고 있었다. 

[....대신. 나를 안으세요.]

-알고 있어. 

당신이 나를 안는 건... 

그저 욕구의 배출이라는 걸 알고 있어요. 

그래서 이렇게 가슴이 아픈 거겠죠.

하지만... 나는 절대 그 말을 후회하지 않아요. 

조금이라도... 

잠시라도... 당신을 가질 수 있다면. 

... 그럴 수만 있다면...

“슈.”

“.............”

“슈.”

“예, 예에?!!”

놀란 눈으로 슈엘이 고개를 들자 후안이 

짜증이 역력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아....”

여행길에 넋을 놓아버린 자신에 대한 경멸감이라 생각하니 

슈엘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제 곧 도시에 도착한다. 넋놓지 마.”

“...넷... 죄, 죄송해요 후안님.”

그러나 슈엘의 사과 따윈 관심도 없다는 듯 

무정하게 휙- 돌아버리는 후안이다.

... 그 모습에 눈썹을 찡그리며 슈엘은 쓴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긴 산길을 지나고 성문을 들어선 슈엘을 덥친것은 완연한 소금내였다. 

‘이건... ’

까만 눈동자가 커다랗게 커지나 싶더니 

이내 아이의 얼굴이 되어 주변을 바라본다. 

거친 말투지만 활기 넘치는 사람들. 

도시에 가득한 소금냄새와 생선비린내. 

평소보다 눅눅한- 하지만 시원한 바람. 

그제야 슈엘은 저 멀리- 거대한 배들의 장관을 볼수 있었다. 

“바...다!!”

저도 모르게 내뱉어진 탄성. 

언제나 자신의 앞에 있던 후안을 뒤로하며 

슈엘은 달렸다. 

재빠르게 달려 나간 슈엘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녹색 빛의 드넓은 바다였다. 

끼룩끼룩... 

오랜만에 보는 새하얀 갈매기의 울음소리에 

슈엘의 가슴은 벅차올랐다. 

거대하고 아름다운 배들을 보자 이내 가슴한켠이 찌잉- 하고 울린다.

두 손을 들어 바람을 잡아본다. 

이내 느껴지는 세찬 바닷바람에 슈엘은 웃었다.

정말 오랜만이야... 

푸른빛의 아름다운 바다... 

한시도 잊은 적 없는 나의 고향. 

-너무나 보고 싶었어.

슈엘의 모습에 후안은 그제야... 작은 공국 알스가 떠올랐다. 

바다와 가까운 곳이었지 그곳은. 

아이처럼 바다를 구경하는 슈엘을 보노라면... 이상한 감정이 든다.

매일 밤 녀석을 안았다. 

머리는 여자대신 녀석을 안는 거라 말하지만... 

분명 밤이 되면 밀려드는 감정은. 욕망이었다. 

어떤 여자를 안을 때보다 밀려드는 남자의 욕망. 

...그... 단단한 남자의 몸을 안고나면 

밀려드는 풍족감.

아침에 눈을 뜨면 보이는 까만 눈동자에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이내 솟아오르는 것은 그 감정에 대한 짜증이었다. 

내가 왜... 그녀석을 보며 이런 감정을...가지는 거야.

스스로가 한심스러워 견딜 수가 없다. 

그리고 후안은 오늘, 그 짜증의 한계에 부딪혔다.

... 소금냄새가 강하게 풍겨져나오는 

이 도시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바다에 가까운 이곳에 온 순간부터...

“후안님 저 배좀 보세요. 굉장히...크고 아름다워요!

슈엘의 손이 가르키는건 커다란 범선. 

자그마한 나라에 살았던 슈엘에겐 분명 놀랄 만큼 

거대해 보일 터였다. 

아이처럼 탄성을 내뱉는 슈엘을 보며 후안은 

자신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후안님?”

“................”

내가. 왜. 웃고 있는 거지... 

바다 따윈 질색이다. 

이 세상에서 없애버릴수 있다면 없애고싶은게 

저. 거대한 바다가 아니었던가―. 

[사랑해요-.] 

잊고 있던 기억이 생각나자 소금향기가 역겹게 느껴진다. 

지독한 어지러움. 

후안은 눈썹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바다를 향해 걷던 슈엘이 걸음을 멈춘다.

“.... 후안님, 역시 기분이 안좋으세...”

타악- 후안을 향하던 슈엘의 손이 차갑게 거부당했다. 

“날. 만지지마.”

“.....아... 죄...송해요...”

아이처럼 들떠있던 까만 눈동자가 순식간에 어두워진다. 

겨우 밀쳐진 것 뿐인데 

당신이 쳐낸  손이 너무도 아프네요.

...하하.. 내가 너무 꾀병이 심한 가요... 

거부당한 손을 꼬옥 잡으며 슈엘은 후안을 바라보았다.

이제야 생각나는 건 아주 오래전 보았던 후안의 얼굴이었다. 

아름다운 알스의 바다에게 고개를 돌렸던 제국에서 온 손님. 

대륙의 권력과 힘을 가진... 붉은 머리카락의 소년.

-소년은... 바다를 보는것조차 싫어했었다. 

“아...그렇지 후안님은...바다를 좋아하시지 않죠?”

슈엘의 말에 놀란 것은 후안이었다.

... 네가 그걸 어떻게 알지? 

내가 바다를 싫어하는걸 어떻게...? 

아니 그것보다도 놀란 이유는 그 말투였다.

... 오래전부터 나에 대해 

알고있는듯한 그 말투...

“가요, 후안님. 바다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

생긋이 웃는 그 미소가 불편하다. 

네 그 표정이 싫단 말이다, 나는. 

사람을 답답하게 만드는 그런 미소 따위!! 

휙- 하고 후안은 고개를 돌렸고 슈엘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가버리지 말아요. 날 두고 가지 말아요! 

서둘러 그의 뒤를 따라오며 속삭이듯 말한다.

“갈매기 소리가 참 좋죠?”

“... ....”

“사람들의 소란스러움이 참 좋네요.”

“... ....”

“이곳... 참 멋진 곳이...”

“-그 입. 당장 다물어.”

....이제야 대답해주었다. 

슈엘은 그제야 말을 멈출 수 있었다. 

화내도 좋으니까, 뭐라 말해도 좋으니까, 

날 무시하지 말아요. 

내가 없는 사람인냥... 행동하지 말아줘요, 부디.

항구의 도시를 걷는 내내 두 사람사이엔 어떠한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침묵과 불편함이 가득할 뿐이었다. 

슈엘은 이 상황이 답답할 뿐이다.

...비록 사랑 없는 행위지만 매일 밤 몸을 섞으며 

조금은... 조금은 이 관계가 달라질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이 사람과 나의 관계란 바뀌지 않는다. 

아무리 열심히 그만을 바라보아도...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

날이 저물 무렵 두 사람은 한 술집에 들어갔다. 

북적대는 술집엔 독한 술향이 가득 풍겼다. 

평소 같았더라면 이런 곳은... 들어가지 않은 후안이었다. 

슈엘은 그를 조심스럽게 바라보았지만. 

후안은 까만 눈동자가 어딜 향하든 상관하지 않았다. 

완벽한 무관심...

“독한 술로... 한병 가져와.”

“예~~ 잠시만 기다리세요, 손님.”

시원스런 점원의 대답소리. 

후안은 구석의 자리에 앉았고 슈엘이 조심히 그의 옆에 앉았다.  

작은 목소리로 용기를 짜내 입을 열어본다.

“후안님. 식사를...먼저 하셔야죠.”

“.... ....”

“저녁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술을 마시는 건 좋지 않아요....”

슈엘이 헙...하고 입을 막았지만 

이미 후안의 날카로운 시선이 슈엘을 향한 차였다. 

날이 곤두선 검처럼.........시퍼런 그의 눈이. 무서웠다. 

“... 그래도. 식사를.. 하세요. 아주 조금이라도 좋으니...”

“닥치라고 했어.”

“......................”

“다시 한번 말하게 하지마.”

“......................”

슈엘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이내 이를 악문다. 

흥... 흥....누가. 그 눈동자에 질줄 알구요? 

당신의 말에 주눅 들지 알구요? 

절대 그럴 순 없어요. 

아무리 무서워도, 

당신을 위한 것을 내가 그만둘 리 없잖아요? 

이내 슈엘은 의자에서 일어나 카운터를 향했다. 

주인과 뭐라 말하는가 싶더니 금방 돌아올게요...라고 외치며 

가게 밖으로 나가는 녀석이 보인다.

하...정말 귀찮게 하는군. 

후안이 눈썹을 찡그리며 테이블위에 놓인 술을 바라보았다. 

한잔 마셔보니 화상이라도 입을듯 독한 술이다. 

... 술이 아니라... 독이로군 이것은. 

쓴웃음을 지으며 후안은 눈을 감았다.

... 바다의 파도소리가 들린다. 

철썩..........쏴르르........  

모든걸 삼키는 바닷소리. 

[ 사랑해요- ]

젠장...젠장!! 그만해!!

이제제발 그 입좀 다물어...!!

“어머~ 잘생긴 여행자시네. 옆에 앉아도 될까요?”

후안을 현실로 돌아오게 한 것은 경박한 여자의 목소리였다. 

눈을 뜨자... 이내 현실이 보인다. 

어둠같이 짙었던 바다가 아닌 냄새나고 칙칙한 술집. 

가슴이 훤히 드러낸 옷을 입은 여자 두 명이 

후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후안이 대답이 없자 여자들은 콧소리를 내며 그의 곁에 앉았다.

“후후- 왜 당신 같은 분이 혼자일까?”

“외롭지 않아요? 자아~오늘은 내가 당신의 잔을 가득채워줄게요.”

후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들이 웃으면 웃는 대로...

말하면 말하는 대로 지켜볼 뿐. 

그저 한잔한잔 지독한 독을 삼키며 

도시에 가득한 바다냄새를 잊을 수 있길 바랄뿐이었다.

“호호호.... 무슨 얘기라도 해봐요, 

얼굴은 정말 미남인데 너무 말을 아끼시네요, 여행자님.”

“말이 없어서 더 멋진걸~.”

땀범벅이 되어 술집에 돌아온 슈엘은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심장이 달아올랐다. 

... 후안의 곁에 있는 여자들은... 

한눈에 보아도 거리의 창녀라는 것이 분명했다. 

질투...보다 먼저 가슴에 가득찬 것은 분노였다. 

“자- 어서 한잔 더 하세요.”

쪼르르... 술을 따르는 그녀의 손목을 잡는 남자의 손. 

그녀가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올리자... 

까만 눈동자를 가진 남자가 보였다. 

선한 그의 얼굴에 웃으려던 찰나에 슈엘의 

격양된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주...독한 술이잖아요! 더 이상 후안님께 술을 권하지마세요!!”

“아하......?”

이내 화장기 짙은 여자의 눈에 적개심이 가득했다. 

자신의 유일한 자랑인 듯이 커다란 가슴을 흔들거리며 

후안에게 안겨 묻는다.

“뭐야아, 뭐예요, 이사람. 여행자님과 일행인가요?”

후안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새초롬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저렇게 화내는 이유가 뭘까?”

“비싼 술을 혼자 마신다고 저러는거아냐? 깔깔-.”

천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지만 슈엘이 신경 쓰는 것은 

그녀가 아닌 후안의 몸이었다. 

올라오는 냄새만으로 얼마나 독할지 짐작이가는 술... 

그런 술병이 벌써 세병째라니!

술잔을 잡는 후안의 손을 잡으려니 이내 차갑게 슈엘의 손을 밀친다.

“후안님!! 더 이상은...”

붉은 눈동자가 그제야 슈엘을 바라보았다.

“시끄럽게 떠들어댈 거면 당장 내 앞에서 사라져.”

“...........................................”

아까보다도... 용서 없이 차가운 심홍의 눈동자. 

슈엘의 심장이 세차게 두근거렸다.  

몇 번을 말해봐도 지금의 그에게는 소용이 없을 거란 생각, 

나의 말 따위...

그에게 닿을 수 없다는 

지독한 현실. 

슈엘은 고개를 숙이며 이를 악물었다.

“좋아요... 오늘만큼은... 마음껏 마시세요. 하지만....”

떨리는 손을 들키지 않으려 애쓰며 슈엘은 

후안의 앞에 종이봉투를 내놓았다. 

“빈속에... 마시면 안 좋잖아요. 

그러니까... 이것 꼭.. 드셔야 해요. ...꼭.”

다짐을 받는 듯 후안을 한번 바라보고 

슈엘은 깔깔 웃는 그녀들을 뒤로하고 가게를 나왔다. 

“뭐야, 정말 이상한 관계네, 두 사람.”

“친구인줄만 알았는데... 아닌가보네. 

음... 저 사람 당신의 시종인거죠?”

그녀들의 말을 무시하며 후안은 종이봉투의 내용물을 꺼내보았다.

...모습을 드러낸 것은 

갓 구운 따스한 빵...

......................................... 

“아... 진짜로 사왔네요, 그 손님.”

새술을 탁자에 놓으며 점원이 빵을 보며 말했다.

“아까 그 손님이... 자기 일행이 입맛이 없다면서 

맛있는 빵집을 물어보길래 말해줬거든요. 

하핫... 가까운 거리도 아닌데다 손님도 많았을 텐데 벌써 사오다니. 

꽤 능력 있는 분이신데요?”

“.............................”

후안은 이마에 손을 집고는 고개를 숙였다.

“-젠장!”

터덜터덜... 

이제 어두워진 밤하늘을 바라보며 슈엘은 바닷가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어휴...진짜 이. 겁쟁이.”

결국 그의 말에, 그의 눈동자에 도망쳐 나오듯 

그를 말리지 못한 자신이 한심스럽다. 

아니... 그의 말이 주는 상처에 도망쳐 나온 내가... 

그를 위해서라고 아무리 외쳐도 

결국은 그의 어떤 말도 거역할 수 없는 이... 

작은 사랑에 가슴이 아프다.

이내 파도소리와 소금향이 점점 짙어져온다.

“...............음....”

두 눈 가득 커다란 바다를 바라본다. 

늦은 시각 조용해진 배들과 햇빛과 함께 사라진 사람의 냄새... 

밤의 바다란 참 고요하고... 포근하다.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해지는...힘이 있다.

“이야~ 이거 우연인걸.”

“?!”

갑작스레 들린 목소리에 슈엘의 재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잿빛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는 남자. 

슈엘보다도 머리하나가 큰 장신이지만 

둔하다기보다는 날렵한 인상을 주는 마른체구. 

머리에 쓴 후드를 벗기자 드러난 얼굴에 슈엘의 

까만 눈동자가 더더욱 커졌다.

“지..크?!”

“기억해준다니 영광인야 왕자님.”

큭큭 웃으며 지크는 슈엘에게 다가갔다. 

그가 슈엘에게 읽은 표정은... 

공포나 혐오가 아닌... 순수한 놀람.

...역시 넌 재미있는 생물이야...하핫.

“여긴...어떻게 온건가요? 

아니 그것보다 그때 일 이후 어떻게 된 거죠?”

지크와 만났던 그 사건은... 

무능력한 영주를 벌하고 수도에 연락을 함으로서 조용히 끝냈었다. 

황제의 지방순례란 극비사항이었기에 

그렇듯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끝낸 것이다.

그런데 후안에게도, 어느누구에게도 그에 관한 말은 들을 수 없었다. 

다만 하루아침에 주인을 잃은 엄청난 저택의 유산을 

사라진 하인 한명이 가져갔다는 말 외에는. 

지크가 낄낄 웃으며 대답했다.

“보시다시피 내 임무는 무사히 마치고 잘 지내고 있지.”

“.................”

그제야 지크가 어떤 조직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이 떠오른 

슈엘은 경계의 빛을 띄었다.

“... 당신이 속해있다는 그 조직은 어떤 곳이죠?”

단호한 검정색 눈동자. 

한동안 두 사람의 정적이 이어졌다. 

메마른-그렇지만 흥미 가득한- 목소리가 조용히 울려 펴졌다.

“황제를... 죽이려는 조직이지.”

슈엘의 손이 덜덜 떨렸다. 

까만 눈동자가 이내 두려움과..경계감 가득 

지크를 바라보았다. 

그모습이 아쉽다는 듯 지크는 허리에 손을 얹고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에게 이 사실을 숨기지 않는 것은...”

“............”

“네가 그 황제.를 위해서 어느 정도로 힘을 발휘할지 보고 싶어서야.”

그토록 한결같이 순수하게 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내는 힘은 

얼마나 강할까...  

나는 네게 흥미가 있어. 알스의 왕자님.

“네 모든 것을 바쳐 황제를 지켜라.”

뒤로 물러서는 슈엘가까이 다가가 은밀한 고백을 하듯 속삭인다.

"-그렇지 않으면 황제는... 죽어."

“!!!!”

“우리 조직의 조원들은 곳곳에 포진되어 있어. 

너희가 묶는 여관의 주인일수도 지나가는 작은 소녀일수도 있지. 

그들은 평범한 사람을 가장하며 황제의 목숨을 노린다. 

지방순례보다 황제를 죽이기 쉬운 기회는 없으니까.”

“왜....왜 후안님을?!!”

그는... 백성들을 생각하는 현명한 왕이예요, 그런데 왜?!

잠시 말을 멈춘 그는 웃음틀 터뜨렸다.

하.....하하하., 왜 후안님이냐고?! 하...큭큭..

“그가 후안이어서가 아니라. ...황제라서지!!”

“......................”

반황제파. 

...사람을 지배하는 황제를 증오하는 자들의 조직. 

우리가 노리는 것은 사람위에 서는 

그 오만한 인간들의 죽음뿐이지. 

그자가 현자이든 성인이든 하는 것은 관심이 없어. 

단순한 증오. 

그렇게 더욱 두려운 거야, 우리들은.

“...난 분명 경고했다. 부디 황제를 열심히 지키도록.”

“........................”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슈엘의 심장이 전에 없이 불안해졌다. 

쿵쾅쿵쾅..

사랑으로 인한 것이 아닌 막연한 불안감. 

그가... 위험하다는 불안감.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으려는데 

멀리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슈!!!”

후......후안님?! 

휘청...휘청...

평소때라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걸음. 

술에 잔득 취해있는 그의 모습에 놀라 슈엘은 달려 나갔다. 

슈엘의 어깨에 기댄 후안에게서 

지독한 알콜 냄새가 베어있었다.

“후안님! 괜찮으세요? 대체 왜이렇게 많이.... 웁!”

뜨거운 입김이 느껴지나 싶더니 이내 

달아오른 그의 혀가 맞닿았다. 

평소보다도 거친 그의 입맞춤에 혀가 아려올 지경이었다. 

미친 듯이 슈엘의 혀에 입을 맞추며 

후안과 슈엘은 모래바닥에 쓰러졌다.

“하...하아....... 후...후안님?”

.... 붉은 눈동자가... 

.... 가슴이 메여질 정도로 슬프다. 어째서...? 

왜 이렇게 약한...모습을 보여주는 거예요? 

“앗...!!”

눈빛을 교차할 틈도 없이 후안의 손이 자신의 옷을 벗기자 

슈엘은 다급히 소리쳤다.

“후안님! 여기선...안돼요!”

그러나 그의 행동은 멈추지 않았다. 

다시 한번 슈엘의 입가득 자신의 혀를 집어넣곤 

입속가득 핥기 시작한다. 

“하아... 후.... 후안님?!”

“시끄러워!! 지금은 아무말 말고  안겨!!”

...떨리는 목소리. 

술기운 때문인 걸까...

하지만  역시 평소엔 상상할 수 없는 그런... 

절박한 목소리. 

슈엘은 눈을 감고 그의 등을 안았다.

아무도 없는 바닷가엔 두남자의 신음소리만이 들려오고 있었다.

“아.. 웃..... 후안님, 아...ㅅ”

슈엘이 이를 악물자 후안은 

더더욱 손가락을 슈엘의 깊은 곳까지 넣었다. 

“소리를 질러!! 참지 말고 소리 내란 말이다!”

“................”

그러나 슈엘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순 없었다. 

조금이라도 소리를 냈다간 

이내 이 행위를 멈추고 차가운 눈동자로 

나를 바라볼 당신이 두렵다.

... 스스로가 이런 남자를 안았다는 사실에

이 행위를 멈출 당신이 두렵다.

.... 당신이 이 행위동안만은... 

내가 까만 눈동자를 가진 

평범한 남자란 사실을 잊었으면 해서.

...그저 당신이 안고 싶은 

‘한 사람’으로 느껴졌으면 해서.

“아악!!”

화가난 듯 들어오는 후안의 성기에 슈엘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평소와 다른 섹스. 잊고 있었던... 

첫날밤의 섹스. 

그가 분노로 나를 안았을 때의 그...아픔이다. 

요 며칠 부드럽게 애무하고 삽입하던 그와는 다른...격렬한 고통. 

슈엘의 입술이 바들바들 떨리자 

후안은 입을 맞췄다. 

분홍빛의 입술이 그제야 떨림을 멈추자 

재미있다는 듯 씨익 웃는다.

“후, 후안...후안님... 아....으윽..........”

그의 얼굴을 보며 고통을 참아보지만 

슈엘의 안에 파고든 그의 성기는 더욱 깊숙이 침투했다. 

슈엘은 결국 참고 있던 눈물을 터뜨렸다.

“........흑............”

그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 후안은 웃었다.

....................그런데 그 미소가 너무 슬퍼보여 

슈엘은 가슴이 아팠다.

.... 쏴아아........ 

악몽과 같은 바다의 울음소리.

.... 이내 뜨거운 체온이 느껴져 후안을 눈을 떴다.

... 그래... 이제는 너무도 당연하듯 느껴지는 이 체온.

- 그녀석이다. 

눈을 뜨자, 

까만 눈동자가 부드럽게 후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 자신이 비취자 놀란 듯 화들짝 일어난다.

“.이, 일어나셨...”

“...누워라, 슈. .... 네가 없으니 추워.”

“................”

여름에 가까워진 날씨지만 

알몸인 두 사람에게 밤기운은 서늘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슈엘은... 조심히 후안의 곁에 다가갔다. 

떨어졌던 온기가 다시 돌아오자 

후안은 발끝까지 다가오는 따스함을 느꼈다.

하하... 이내 어젯밤 일이 떠오르자 한심스런 조소가 나온다. 

술김에 이런 곳에서 녀석을 안고 

게다가... 이녀석보다 먼저 잠이 들다니. 정말... 최악이로군.

게다가 이 포근한 천은...

아마도 먼저 눈을 뜬 녀석이 꺼낸 것이 분명하다. 

겨우 얇은 천일뿐인데... 

언제부터 이렇게 따뜻했지 이것이...

쏴아아아아.........................

아무도 없는 곳의 둘만의 세상. 

별이 가득한 까만 밤하늘과 검은 바다... 

은색의 달빛.

-그때와 같은 밤이다. 

슈엘을 안은 팔에 힘을 주자 

슈엘의 어깨가 경직됨이 느껴졌지만... 

신경 쓰지 않고 후안은 입을 열었다.

“그때와.....같은 밤이야.”

나의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때와 같은 밤...

검은 바닷가의 그녀는 이미 사람이 아니었다. 

은백의 달빛을 받은 그녀는...

요정이 되어 있었다. 

새하얀 얼굴로 금빛의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요정... 

작은 입술이 움직였다.

[ 사랑해요- ]

그녀의 작은 몸이 한 남자의 몸에 안겼다.

남자는 처절할 만큼...슬프게 웃으며 그녀를 안았다. 

붉은 눈동자를 가진 어린 소년은 외쳤다.

[어머니-!!!!]

그러나 까만 바다는 그들을 놓아주지 않았다. 

서로가 하나이듯 껴안은 두 사람을 바다는 삼켜버렸다. 

마치...

그. 사랑을 지켜주겠다는듯이... 

어린 소년은 그 이후 바다를 증오하게 되었다.

“.............불륜이었지.”

“..............................”

“귀족가의 아가씨가 

신분도 알 수 없는 하찮은 노예를 사랑하게 된 거야... 

하...하하. 왕비의 자리에 올라 왕의 자식을 나으면서까지 

그 사랑을 잊지 못하고...그렇게 사라진 거다!”

“....................................”

슈엘이 눈에 비췬 것은... 제국의 왕이 아니었다. 

당당하고 오만한 눈동자로 사람을 바라보는 

절대적인 강자가 아니었다. 

어머니를 잃어 슬프게 우는 작은 소년이었다.

“날...사랑한 게 아니었어.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의 자식 따위를...”

“...사랑하셨어요.”

후안의 얼굴에 두 손으로 쓰담으며 슈엘은 말했다. 

까만 눈동자 가득 그를 담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그래도 당신의 어머니는 당신을 사랑하셨어요. 

아이를 낳는다는 건 

사랑 없이는... 

애정 없이는

불가능한걸요.”

멈춰져있던 얼음의 심장에...뜨거운 온기를 불어넣어준다.

“분명 당신의 붉은 머리카락을... 

붉은 눈동자를 사랑했을 거예요.”

“...............................”

후안은 멍하니 슈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 

마법과 같은 힘을 지닌 

정직한 목소리에 마음을 빼앗긴다. 

아아.

아까의 술....... 이 아직 깨지 않은 걸까.

쏴아아아..................... 

파도소리에도. 사람이 취하는 걸까.

“..........................미안했어. 아까는....”

생전 처음으로 입밖에 내뱉은 단어. 

이내 슈엘의 목구멍에 뜨거운 것이 차올랐다. 

조심스레 뜨거운 것을 삼키며 슈엘은 웃었다. 

“아니요.......아니요......... 

저는. 괜찮아요..”

아프지 않아요. 

당신이 주는 고통은..........내게 아픔이 아니에요. 

...상처가 아니에요.

.... 그 하나가 하나가 

내겐.... 

보물..인걸요...

******

"어머머~ 아까 그 사람 당신이 술 마시는데 웬 참견이야?"

여전히 아무 말 없는 후안을 향해 

가슴을 흔들던 여자중 한명이 후안의 앞에 놓인 빵을 바라보았다.

"술자리에 이딴 거나 사오고... 흥!"

귀찮다는 듯 그녀가 빵을 밀치자 툭...하고 

바닥에 빵이 떨어졌다.

후안이 눈썹을 움찔했지만 그녀는 더더욱 그에게 안겨들었다.

"여행자님- 이곳을 나가요~. 오늘밤...제가 ...."

그녀는. 심홍의 눈동자에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술에 잔뜩 취한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강렬한- 

사람에게 공포를 줄만큼의 강렬한 눈동자.

"아....."

"나와 그가 무슨 사이냐고 물었나?"

"..............."

"녀석은 나의 반려야!"

그리고 후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떨어진 빵을 집었다.

여자는 휘청거리는 걸음걸이로 

술집을 나서는 남자의 뒷모습을 붙잡을 수 없었다.

먼지를 툭툭 털며 빵을 한입 뜯으며 그는 말했다.

".....맛있군,  이것."

-이것은. 슈엘은 모르는 작은 이야기.

이제는 기억 속에 파묻혀버린... 만취했던 

그의. 작은 이야기....

******

“로빈님.”

“... ....”

“로빈님!”

알프레도가 목소리를 높이자 그제야 로빈이 고개를 들었다.

멀뚱히 자신을 바라보는 집사를 보며 로빈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엥??

“왜 갑자기 로즈가 없어진거지?”

“로즈아가씨라면 벌써 예전에 돌아가셨습니다만...”

“... ...”

알프레도의 대답에 로빈은 입을 쩍 벌렸다.

대체 언제 돌아간거야?

아니...

로즈가 돌아가는 것도 모르고 내가 무슨 생각에 빠졌던거지?

-이상했다. 

그녀가 앞에 있으면 

그녀의 목소리와 눈동자를

하나라도 놓칠까 필사적이었는데...

요즘은...

이상해.

그날 이후, 몇 번이나 안았던...하얀 몸이 생각난다.

어두운 밤- 

창문 너머로 비춰오는 달빛에 비춰지는 하얀 몸.

[ 로빈- ]

땀에 젖어 자신에게 안겨오는 

녹색 눈동자가 떠올라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로빈앞의 잔을 치우며 알프레도가 입을열었다.

“그런데... 어제도 리엘님의 방에서 주무셨지요?”

“!!!!!”

화끈-하고 붉어진 얼굴로 경악에 가까운 표정을 짓는 로빈은

알프레도를 바라보았다.

벌써 3대째 레이크가문의 집사인 이 온화한 노인은

그런 것쯤은 당연히 알고 있다는 듯 젊은 주인을 바라보았다.

“로빈님. 리엘님을 사랑하십니까?”

“무, 무슨말이야! 그런게 아니야!!!”

-집사는 알고 있잖아. 

내가 좋아하는 게 누구인지... 

어렸을 때부터 내가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고개를 내젖는 주인을 보며 주름 짙은 그의 눈이 부드럽게 휘였다.

“그럼 도대체 매일 밤 리엘님을 안으시는건가요?”

“그, 그건!!!”

그건....

[-위로예요.]

아름다운 목소리로 내뱉었던 차가운 말.

-내게 안기는 밤이면 언제나 그는 이 행위는 단지

‘위로’일 뿐이라고 했다.

로빈은 눈썹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단순히 위로일뿐이야!”

“... ...”

“그냥... 위로일뿐이라고...”

“둘이 같이 있는 게 그렇게 신경 쓰여?”

이안의 물음에 사리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무표정이지만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 이안은 웃음이 나왔다.

로빈의 저택에 놀러온 이안을 맞아준건

친구인 로빈이 아니라 사리엘이었다.

[로빈은 지금 로즈양과 함께 있어.]

라고 말하는 그의 표정엔 질투가 어려 있었다.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리는 사리엘을 이안은 빤히 바라보았다.

역시 사랑이라는 건 예측불가다.

그 얼음왕자의 눈매가 저렇게 부드러워지다니...

... 나의 친구를

가슴에 품게 되다니.

조용한 서재에 이안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렸다.

“몇 번이야?”

“뭐?”

“몇 번이나 그 녀석과 잤어?”

“!!!!”

가여울정도로 사리엘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책을 집고 있는 새하얀 손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그런 사리엘을 향해 이안은 어깨를 으슥했다.

“내가 눈치빠른 거야 어디 하루 이틀인가?”

-사실 이안은 근래 로빈의 행동에 추측했을 뿐이다.

요즘 들어 사리엘의 이야기만 나오면 표정이 굳는 친구의 얼굴.

되도록 다른 곳으로 소재를 돌리려는 모습에

로빈의 머릿속엔 사고 쳤군- 이란 네글자가 지나갔다.

게다가 오늘 사리엘의 반응으로 인해

추측은 확신이 되었다.

여전히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사리엘은 냉정하려 애썼다.

당황해 하지마, 사리엘.

아무...의미도 아니잖아.

그와 자는건 그저 ‘위로’일 뿐이야.

그가 자신을 안는건 오직 그녀를 만나고 온 날뿐이었다.

사랑에 지친 눈동자로-

도저히 끝나지 않는 감정에 슬퍼하는 눈동자로-

나를 안을때 보이는 따뜻한 남색눈동자는

‘나의 것’이 아니었다.

... 얼굴모를 그녀... 로즈의 것이었다.

“로빈은 말이야. 짝사랑 경력이 15년째야...”

“... ...”

“로즈네스 ·드쟈르 ·로즈. 

아주 오래전부터 레이크가문과 절친한 드쟈르 가문의 아가씨지.”

-15년.

그러나 15년이란 세월은 

두 남녀간에 사랑보다는 우정을 깊게 만들어버렸다.

로빈의 애달픈 마음과 상관없이 

로즈에게 그는 친구일 뿐이었다.

“로빈이 마음만 먹는다면 로즈와 결혼은 할 수 있어.

드쟈르 가문이 레이크 가문의 로빈을 마다할리 없으니까.

다만-

그런 식으론 로즈가 불행하게 되니까..

로빈은 그녀에게 청혼할 수 없는 거야.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기 전까진...”

“그토록 질긴 짝사랑을 이길 수 있겠어?”

“... ....”

이안은 사리엘에게 다가가 그의 책을 덮었다.

분홍빛의 입술에 손을 대자 뜨거워진 온기가 느껴진다.

이 얼음왕자는 사랑에 빠진 자신이 얼마나 

매혹적으로 변했는지 알고있는걸까?

이안은 사리엘의 턱을 잡고 그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만해.”

그러나 이안의 행동은 멈춰지지 않았고

그의 입술이 사리엘의 입술에 맞닿았다.

사리엘이 이안을 밀치려는 찰 나 그가 보였다.

어느새 방안에 들어온 로빈이 자신과 이안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황급히 사리엘이 이안과 떨어졌지만

로빈에겐 

키스 중이던 ‘연인’인 방해꾼의 출연에 황급히 

입술을 뗀 것 이상으론 보이지 않았다.

“로빈! 타이밍 나쁜 건 여전하구나?”

이안의 능글맞은 표정에 로빈은 눈썹을 찡그렸다.

잠시 잊고 있었던 두 사람의 관계를 인지하는 순간

가슴 속에서 짜증이 밀려들었다.

저. 녹색 눈동자가 바라보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는 사실이.

저 부드러운 입술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는 사실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남의 집에서 키스한 네 잘못이야!”

인상을 쓰며 대답하는 로빈의 모습이 이안은 의아했다.

로즈를 만난 후에는 언제나 입이 귀까지 걸려서 

바보처럼 웃기만 하지 않았던가?

“그나저나 이안폐하, 웬일로 여기까지 온 거야?!”

“... 폐하는 빼줘.”

“이안폐하, 일은 다하고 온 거냐?”

-그래, 저 녀석. 분명 심사가 베베 꼬여있다.

한마디 한마디에 가시가 박혀있는 친구에게 이안은

생긋이 웃었다.

“황제에게도 가끔은 휴식이 필요하지.”

“뭐?!”

이안의 손에 들린 건 분홍색의 초대장이었다.

“내게 도착한 초대장이야. 너도 같이 가자.”

장미꽃이 대롱대롱 달려있는 초대장을 보는 순간

로빈은 기가 막혔다.

저 이안이라는 작자가 충실히 정무를 본다는 건 상상이 안 되지만 

저런 파티에 일일이 놀러다니는건 너무하잖아.

“니가 싫다면 리엘과 가야지.”

“!!!”

이안이 사리엘의 손을 잡는 순간 무섭게 다가온 로빈이

그 손을 낚아챘다.

활활 불타오르는 남색 눈동자가 이안을 쏘아보며 외쳤다.

“안돼!”

“왜?”

“그...그건...”

그제야 로빈은 의아해하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리엘이 보였다.

빤히 바라보는 녹색눈동자에 로빈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왜냐니까?”

끈질기게 물어오는 자신의 친구를 향해 로빈은 대답했다.

입을 비죽히 내밀고 진지한 눈동자로.

“사실 너에게 숨긴 것이있다, 이안.”

“응?”

“사실... ....”

“... 오늘은, 레이크 저택의 대청소날이야.”

“푸훗...크하하하하...”

파티가 열리는 저택을 향하며 이안의 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애다- 역시 그 녀석은 애야.

진지한 눈동자로 대청소를 외치며 황급히 사리엘의 손에

빗자루를 쥐어주던 로빈을 떠올리며 이안은 배를 잡았다.

아,정말 웃기다.

모처럼 갔던 게 꽤 큰 성과를 남긴 것 같다.

사리엘을 바라보는 남색눈동자를 보는 순간 이안은 감지했다.

로즈를 바라보던 그 다정한 시선.

그것과 똑같은 눈빛이었다.

“음.... 그래, 15년이나 짝사랑만 해왔잖아.”

-이제 진짜 ‘사랑’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이안은 빙긋이 웃으며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까만 하늘의 반짝이는 별을 보며 그는 

제국 어딘가에 있을 슈엘을 생각해보았다.

“이제 그 짝사랑이 나한테 넘어왔나 보다, 로빈.”

******

초대장을 보낸 저택에 들어선 이안은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은밀하고 쾌락적인 밤으로 전하를 초대합니다―

라고 쓰여진 내용이니 만큼

평범한 파티가 아닐 거라곤 생각했지만... 이건...

“하아....아...읏...”

방 안에선 남자의 거친 숨소리들이 들려오고 있었다.

아마도 귀족들의 섹스 파티였나 보군.

‘로빈녀석과 같이 왔으면 큰일 날 뻔했군...“

이런 것에 정색을 하는 친구와 달리 자신은

애초에 이런 것에 그다지 거부감도 없었다.

게다가 근래에 황제대행이니 뭐니 해서 스트레스도 받았던 차,

잘됐다 싶으며 이안은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방안엔 이미 여러 명의 남자가 있었다.

젊고 잘생긴 귀족가의 남자들이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뒤엉켜 있었다.

유일하게 단정히 옷을 입고 있던 남자가

이안을 향해 고개를 꾸벅였다.

“이안님...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아-”

고개를 끄덕이며 이안은 한창 쾌락에 심취에 있는

사내들을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창부라도 부른 건가...?

여러 명의 남자가 한 사람에게 달라붙어 있었다.

“하...응...웃...”

남자..의 신음소리...

새하얀 몸으로 여럿의 남자를 한꺼번에 받고 있는 남자는

고통스러워 보였다.

눈썹을 찡그리며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이안의 눈동자가 커졌다.

한 사내의 성기를 입에 담고 있던 -‘그’또한 놀란 눈으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남...창...?”

그제야 긴 금빛의 머리카락과 파란 눈동자가 보였다.

사내들에게 둘러싸여 고문에 가까운 섹스를 요구받는

저 자는 분명 멜이었다.

“흐아....으윽..”

음란한 소리와 함께 사내들은 쾌락에 차있었다.

파란 눈동자는 여전히 표독스러웠지만

그 도발적인 눈동자는 오히려 그들을 흥분하게 만드는 모양이었다.

이안의 옆에 있던 사내가 말했다.

“제국에 제일가는 남창인 멜입니다.

오늘을 위해 비싼 돈을 주고 불러왔습니다.

이안님께서도 함께 즐기시지요.”

하! 하하..!

그래, 죽지 않고 살아있었군.

아직도 그 속에 검을 감추고 저렇게... 남자들에게

뒤를 대주고 있었어.

이안은 다시 고개를 돌려 멜을 바라보았다.

이안과 마주친 파란 눈동자... 

그런데 그 눈동자에 수치감은 없었다.

저렇게 사내들의 놀이감으로 안겨있는 와중에도

녀석의 눈에 부끄러움이라곤 없었다.

이안은 뒤엉켜 있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 출연에 그들의 시선이 모두 이안을 향했다.

그런 그들을 향해 이안은 말했다.

“당장 나가라.”

“... ...예?”

“날 초대한 게 아니었어? 왔으니 즐겨야지.”

“... ...”

“-난 이렇게 여러 사람이랑 한 놈을 공유할 생각 없어.”

그 말에 쾌락에 젖어있던 남자들이 흠짓 놀랐다.

기껏 초대장을 보내줬건만 파티를 엉망으로 만드는

그 행동에 반발할 만도 했지만

그들은 알고 있었다.

자유로운 왕자 이안은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인데다가

잔인하다는 것을.

여기서 그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알몸의 남자들은 도망치듯 방을 나갔고

넓은 방엔 두 사람만이 남았다.

정액투성이가 된 멜을 내리깔아 보며 이안이 말했다.

“다행히 살아있었네, 남창.”

“... ...”

“그래, 구멍 뚫린 배는 잘 치료하셨나?”

“네, 덕분에.”

툭- 내뱉는 멜의 대답은 건방지기 짝이 없었다.

하얀 천에 입속에 들어간 정액을 뱉어내는 멜을 향해

이안이 물었다.

“-왜냐?”

“... ....”

“왜 왕족을 미워하는 거지?”

“전하께 대답할 의무는 없습니다.”

“흐음- 그럼 다른 질문”

이안의 시선이 하얀 몸을 향했다.

정액이 흘러나오는 엉덩이에 시선을 뺏기는 자신이

우스웠지만 확실히 제국 제일의 요부라 할만 했다.

그저 저 외모만으로 남자의 시선을 빼앗는 녀석이니까.

“남자에게라면 누구에게나 안기나?”

“원하는 만큼의 돈을 지불하는 자에게만요.”

“흥... 밑에 깔려 신음소리를 내뱉던 녀석이 황제의 목을 노리는 

암살범이라 는걸 알면 놀랄 귀족이 한두 명이 아니겠군.“

“-그 속엔 황제폐하도 계셨죠.”

그 말에 이안은 순식간에 멜을 덮쳤다.

바닥에 멜을 내리깔으며 이안의 갈색눈동자가 파란 안광을 내뿜었다.

“난 니가 맘에 안 들어!

너의 그 이중성이 재미있어 두고 보곤 있지만 

정말 형님께 해를 입히는 일이 생긴다면 

결코!! 용서하지 않을 거야.”

-장난스러웠던 그의 눈동자가 너무도 진지해 멜의 눈이 잠시 커졌다.

왕가의 사람에겐 한번도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황제의 형제중 누구도 저렇게 진지하게

황제를 위한 말을 입에 담는 자는 없었다.

아니, 저런 말은커녕 기회가 된다면 형제를 죽이고

왕위에 올라가고 싶어 하는 자들이 그들이 아니던가....

‘왕족에겐 안 어울려, 저런 말 따위.’

멜은 고개를 돌려 이안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이안이 그의 턱을 잡고 자신에게로 돌려놓았다.

이 눈이라면 보는 것만으로 사람을 죽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분노에 찬 파란 눈동자.

-그런데 어째서일까.

이 파란 눈동자를 보자 굴복시키고 싶다는

정복욕이 생겨난다.

하얀 얼굴에 뭍어있는 불투명한 정액.

하얀 몸 곳곳에 선명히 남아있는 붉은 자국.

아직 사그라지지 않은 그의 분홍빛 성기에 시선이 갔다.

“열기가 아직 식지 않았나보지?”

“?!”

이안이 부풀어 있는 멜의 성기를 매만졌다.

오만했던 얼굴이 인상을 쓰자 이안은 웃음이 나왔다.

“원하는 만큼의 돈을 지불하는 자라고?”

“... ...”

찰랑- 멜의 몸 위로 금화들이 떨어졌다.

멜의 허리위에 앉은 이안이 옷을 벗으며 말했다.

“-그럼 어디한번 날 유혹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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