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25)

<11>

여행을 떠난 지 일주일... 

이제는 완연한 봄이라 이른 시간 아침이 시작되었다.

떠오르는 아침햇빛을 받으며 후안은 문을 열었다. 

어젯밤 잡은 자신과 슈엘... 두 사람의 방이었다. 

홀로 방안에 있던 녀석은 깨어 있었다. 

오늘도 하룻밤을 꼬박 샌 것이 분명하다. 

피곤이 가득한 얼굴이지만... 

웃는 얼굴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오셨어요, 후안님.”

“... ...”

후안은 대답대신 짜증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흥... 눈썹을 찡그리며 침대에 눕는 후안을 바라보며... 

슈엘은 시선을 떼지 않았다. 

바닥에 던져놓은 그의 옷을 집어 옷걸이에 걸어두는 와중에 

다시 한번 알아버린다. 

‘... 여자의 향수냄새. ’

그의 옷에 짙게 베어버린 

다른. 여자의 향기. 

-그가. 밤새. 다른 여자를 안았다는 사실.

알고 있는 사실인데도, 

이제는 익숙해질 만한데도 익숙해질 수가 없다. 

가슴이 아파 견딜 수가 없어... 

슈엘은 고개를 돌려 잠이 든 후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여행 칠 일째. 

언제나 그와 같은 방을 잡았지만... 

-후안과 같이 밤을 보낸 적은 단 하루도 없었다.

<< 반려로 맞아주세요 >>

하얀 백마위에서 슈엘은 거친 숨을 내쉬었다. 

건강엔 자신 있었건만 요 며칠 슈엘의 몸은 

급속도로 약해져가고 있었다. 

일주일동안 제대로 잠을 잔적도 

마음 편히 식사를 한 적도 없는 슈엘이다. 

밤이 되면 그를 생각하랴... 

그리고 식사 때는 그의 차가운 시선을 참아내느랴 

제대로 식사를 할 수가 없었다. 

오늘은 열까지 있어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고 있었다.

흘낏 후안을 바라보니 여전히 자신은 바라보지도 않는다. 

여행 첫날엔 그의 옆에서 당당히 가던 슈엘이었지만 이제는 

그의 뒤를 따라다니는 것이 고작이다. 

그. 차가운 시선이 무서워서...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알 수가 없는 그 눈동자.

...역시 네가 싫은 건가...하는 생각만 가득이다. 

노력해왔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가보다... 

이 사람은 여전히 내가 반려로 처음 온날 그대로 내가... 

싫은 거야.

그런데 정작 웃음이 나오는 것은 

그럼에도 그를 싫어할 수 없는 이 감정. 

그의 옆에 설수 없는 지금에도 그의 뒷모습을 본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끼는 이 마음. 

새까만 흑마위의 새빨간 머리카락은 불꽃처럼 빛난다. 

오만 할만큼 당당한 남자의 모습이다.

... 그래서 아직 가슴속에 있는 사랑은 

질리지 않고 

두근거리나 보다... 

하하... 이대로라면 평생 동안.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을지도...

저녁 무렵에야 도착한 이곳은 작은 소도시였다. 

성문을 들어오며 슈엘은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지금까지의 마을과는 다른 분위기. 

무언가 답답하고 음산한 기운이 가득한 도시이다. 

그저 단순히 내 몸이 좋지 않아서 이런 걸까... 

눈썹을 찡그리며 도시를 둘러보는 슈엘의 눈에 보인 것은 

눈에 띄게 대조되는 사람들 이었다. 

놀랄 만큼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지나가는 숙녀... 

그리고 그 옆의 옷을 거의 벗다시피 한 굶주린 아이. 

즐겁게 웃는 화려한 사람...

혹은 감정을 잃은 듯한 무표정한 얼굴. 

“최악의 지배자로군-.”

내뱉는 듯한 후안님의 목소리. 

그도 역시 느끼고 있구나... 이 도시의 황량함을... 

그는 왕으로서 이곳의 지배자를 탓하고 있었다.

“후안님, 이제 여관을 찾아봐야겠네요.”

일부러 쾌활하게 외쳤지만 대꾸는 없었다. 

슈엘은 그저 쓴웃음만 지을 뿐이다. 

조금이라도 대답해주다면... 무슨 말이든 해준다면 좋을 텐데... 

“햐아~ 잘생긴 여행자님들이시네~”

여관을 찾는 후안의 앞을 막아선 젊은 청년의 목소리.

키가 크고 마른체구의 남자는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두 사람 앞에 나타났다. 

후안이 귀찮은 표정으로 말을 세웠다.

“무슨 일이냐...”

“아니, 뭐 급한 일은 아닙니다요. 

단지 저희 아가씨가 지나가던 여행자님께 흥미를 보이셔서요.”

“?!”

후안보다도 재빨리 고개를 돌린 것은 슈엘이었다. 

남자가 가리킨 곳엔 한 여성이 서있었다. 

큰 키에 날씬한 몸매. 

그녀의 아름다운 몸을 빛내주는 윤기 나는 검정색 드레스. 

그녀의 자신감을 나타내는 탐스럽게 말린 갈색머리카락까지 영락없는. 

귀족가의 아가씨. 

다시 후안을 향해 고개를 돌려보니... 

그 또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흥미 가득한. 남자의. 눈동자. 로.

“어떻겠습니까, 저희 아가씨의 저택에서 하룻밤 묶으시는 것이... 

주인님과 안주인님께선 세상을 떠나신지 오래라 

저택엔 아가씨 혼자 외로이 계시 답니다.” 

슈엘은 간절한 눈으로 후안을 바라보았다. 

세차게 떨려오는 심장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뒷모습은 자신을 볼 수 없었던 탓일까. 

아니... 

분명 내가 무슨 말을 하던 

그의 결정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후안은 고개를 끄덕였고 슈엘의 까만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의 저택은 상당히 크고 화려한 규모로 

담이 유난히 높은 집이었다. 

예상과는 달리 그녀는 귀족가문이 아닌 죽은 대상인의 외동딸로 

저택의 높은 담은 재산을 노리는 도둑을 막기 위해서라고 했다.

철컹- 외부와 단절이 되는 거대하고 튼튼한 철문을 지나며 

슈엘은 음산한 기운을 느꼈다. 

이 도시에 들어설 때보다 더한 기분 나쁜 느낌. 

높은 담과 철문, 그리고 커다란 저택의 크기에 비해 

이상할 정도로 보이지 않는 하인의 수가 

점점 더 슈엘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알님~. 알님은 어디에서 오신건가요?”

신경이 예민해진 슈엘을 흔들어 놓는 것은 바로. 

저 앞에서 후안에게 달라붙어 콧소리를 내는 여자 때문이었다. 

폰넬이라 하는 상인의 딸은 

귀족가의 아가씨와는 다른 적극성이 있었다. 

그녀는 가끔 흘낏 슈엘을 바라보았고 

다시 꺄르르 후안을 보고 미소를 터뜨렸다.

“... ...”

후안의 말과 자신의 말을 끌고가며 슈엘은 

그들을 보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시선은 주인의 의견을 무시하고 그들을 향하기 일쑤였고 

그때마다 그녀의 갈색눈동자와 마주쳐 상처받고야 만다. 

고개를 푹 숙인 슈엘에게 이따금 

말을 거내는것은 그녀의 하인-지크였다. 

내내 미소를 띠고는 있지만 어쩐지 정이가지 않는 사람...

“슈님과 알님은 무슨 관계시죠?”

“... 어떤 관계로 보이나요?”

그가 대답하지 않았기에 슈엘은 입을 다물었다. 

아마도 시종과 주인이겠지. 

잘생긴 남자와 여자는 주인공이 되어 걸어가고 

한사람은 남자의 말을 끌고 그 뒤를 따라가고 있어. 

이런 거... 어떻게 봐도 시종으로 보이겠지... 

슬픈 마음보다는 분한 마음이 든다. 

찰랑이는 갈색머리카락을 보며 울컥- 하고 뭔가가 솟아난다.

-나야.

그의 옆에 있어야 할 사람은 나야! 

당신이 아니라 바로...

나라구...!! 

목까지 차오른 말인데도 내뱉을 수가 없는 외침. 

가슴의 지끈거림은 점점 심해져져만 가고 있었다.

이를 악물고 고개를 숙인 슈엘은 

지크가 자신을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알지 못했다.

접대용 방이 수십 개가 되는 저택이라 

슈엘과 후안의 방은 각각이었다. 

넓은 방에 들어와 짐을 놓으며 후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작 그의 머릿속에 있는 건 조금 전까지 

암컷의 냄새를 풀풀 풍겨오던 여자가 아닌 

슈엘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내 옆에 아닌 뒤에서 걷게 된. 그 녀석. 

“젠장!!!”

그 까만 눈동자를 생각하자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침대에 풀썩 누워본다. 

생각나는 얼굴은 여전히 바뀌지 않는다.

... 짜증이나. 

그런 녀석 따위...

다른 녀석을 마음에 둔 녀석 따위가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 거야. 

그녀석이 누군가를 마음에 품은 것을 안 그. 날. 

여자를 안은 것은 홧김이었다. 

분한마음과 너 따위가 누굴 마음에 품든 상관없어... 

란 마음으로 여자를 안았다. 

하지만 만족감은 커녕 짜증만이 밀려왔다. 

말도하지 않고 여관으로 돌아가지 않았으니 

어쩌고 있을까 그녀석... 

밤을 새고 기다리고 있을까, 잠을 자고 있을까, 

여관으로 돌아가는 내내 안았던 

여자의 얼굴따윈 까마득하게 잊고 머릿속은 온통 

그녀석뿐이었다. 

끼이익... 

그러나 문을 연후에 보인 것은 아무도 없었다.  

... 하...하하하! 

스스로의 바보스러움이 화가 난다! 

왜 그녀석이 아주 당연하게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

생각한거지?!

어딜 갔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그녀석이 이곳에서 날 기다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화가나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석이 기다릴 거라 생각했던 스스로가 한심했다. 

침대에 누워 신경질적으로 눈을 감았다. 

머리끝까지 가득 찬 분노 때문에 눈을 감은지 한참만에야 잠이 들었다.

눈을 뜨자 보인 것은 그녀석이었다. 

옷을 갈아입고 아침을 주문하고 오겠다는 녀석의 까만 눈동자는 

언제나와 다름이 없어서 그것이 더더욱 화가 났다. 

너는 내가 어제 뭘 하든, 

어디에 있든 상관없는 건가?! 

그래... 너를 강제이다시피 

반려로 맞이한 나란 남자에게 신경 쓸 틈같은건 없겠지. 

그래도 너는 나의 반려야!!! 

괴로워해! 

질투하라고! 

[어제 다른. 여자를 안았어.]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지만 그녀석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 나의 심장은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 심장의 끝이 도달한 것은 

그 까만 눈동자에 대한 분노였고 

그날부터 난 매일 밤 다른 여자를 안게 되었다. 

슈엘. 

알스의 반려여... 

“넌 네게 애정을 구걸해야해. 

무릎을 꿇고 빌어서라도 네게 사랑을 갈구해야 한다고!!”

“어떤가요? 알님의 입맛에 맞으시는지...”

“. ...훌륭하오.”

후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폰넬은 만족한 웃음을 짓는다. 

기다란 테이블 양 끝에 앉은 두 남녀의 중간에 

어설프게 앉게 된 슈엘의 가슴은 답답하기만 했다. 

지금까지의 식사도 마음 편히 먹은 적은 없지만 

오늘은 그중에서도 최악이네... 

후안을 향해 미소를 보내는 폰넬을 흘낏 바라보니 

입안의 스프가 도저히 넘어가질 않는다. 

미끈미끈 거리는 액체를 씹고 씹어보지만 

도저히 목구멍으로 넘길 수가 없다.

일방적으로 폰넬의 말소리가 주를 잇지만 

그녀의 말끝마다 대꾸하는걸 잊지 않는 후안이다. 

내 말에는 대꾸한번 해주지 않으시면서... 

그의 모습에 슈엘은 더더욱 상처를 받는다. 

다시 생각해보면 저사람은 한나라의 왕이기전에 매력적인 남자다. 

... 불꽃의 강함을 가진 매력적인 남자. 

저런 아름다운 아가씨가 호의를 보이는 것이, 

그런 아가씨의 호의를 받아들이는 것이 

자연스러운... 

... 오히려 나 같은 남자를 반려로 옆에 둔다는 것이 

이상한 거겠지... 

“저...죄송합니다만 이만 일어나도 될까요?”

스프의 반도 채우지 않은 슈엘에게 폰넬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요!”

“... ....”

후안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고 살짝 눈썹을 찡그릴 뿐이다. 

슈엘은 그를 향해 만들어진 미소를 지었다. 

그들을 등지고 걸으려니 등 뒤에서 그녀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여자의 목소리에 머리가 점점 심하게 어지러움을 느낀다. 

그녀의 웃음소리에 

점점... 심장이 아파온다.

자신의 방에 도착해서 슈엘은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후안의 일이 가슴에 걸려있지만 

그런 걱정이 가득인 채로 잠이 들 정도로 

슈엘의 몸은 피로가 쌓여 있었다. 

슈엘이 눈을 뜬것은 저택이 어둠 속에 휩싸인 늦은 밤이었다.

“알님, 제가 아끼는 와인이랍니다.”

폰넬은 적색의 포도주를 후안에게 내밀었다. 

잔을 받아들며 후안은 짙은 포도 향에 어지러움을 느꼈다.

“한번도 음미한 적이 없는 향인데...?”

“후후. 은밀한 루트로 구입한 아주 귀한 포도주이니까요.”

눈웃음치는 그녀의 표정은 후안의 취향이었다. 

오만하고 자신만만한- 그리고 이성의 육체를 원하는... 

후안의 와인 잔을 입에 가져다 대었고 

톡-쏘듯 독특한 포도향이 후안의 입에 가득 찼다.

******

“오늘밤도 시체를 치워야겠구만.”

“하여튼 폰넬아가씨도 단단히 미쳤어. 

세상에 어디 그런 취미를 가지다니.”

“크큭... 그게 어디 취미인가. 그건 단순한 살인이야. 살인.”

“?!!!”

문밖으로 들리는  목소리에 눈을 뜬 슈엘은 

그들의 대화에 졸음이 단번에 사라져버렸다. 

이 사람들...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 거지? 

시체....? 

살인...이라니?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분명 폰넬아가씨다. 

소름이 끼치는 와중에 슈엘은 냉정히 주위를 살폈다. 

침대 밑에 짐과 놓아두었던 검이 손에 잡힌다. 

다행이야... 

짐은 건들지 않았구나...

슈엘의 문 앞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모두 거친 남자들의 음이었는데 

그중엔 처음 후안의 말을 세웠던 지크의 목소리도 있었다.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문 가까이 다가간 

슈엘은 귀를 기울였다.

“하여튼 대단한 도시에 대단한 영주야, 낄낄. 

돈만 갖다 주면 이런 살인도 눈감아 주니 말이야...”

그들이 재미있는 듯 크게 웃었고 이내 싸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더 대단한건 우리 아가씨지 뭐냐. 

마음에 든 남자를 유혹해 심장을 파내다니. 

정말 섬뜩한 마녀가 아니고 뭔가.”

“!!!!”

자칫하면 손에 든 검을 놓칠 뻔했다. 

덜덜덜...슈엘의 온몸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저 남자들은 분명 자신을 감시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대로 나간다면 목숨이 위험해...하지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생각해볼 여유는 없었다. 

슈엘은 문을 열었고 복도에 있던 세 남자가 놀란 눈으로 

슈엘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방은 어디죠?!!!”

선한인상임에도 키가 크고 몸이 좋은 터라 

검을 든 모습은 위압감은 충분했다. 

잠시 멈칫하던 그들은 서로의 허리춤에서 검을 꺼내들었다.

“그러니까 내가 뭐랬냐... 

이녀석을 가두든가 문을 잠가놓든가 하자 그랬잖아.”

이게 나 네탓이야.지크”

지크는 메마른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이편이 더 재미있잖아?”

슈엘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사람을 베어본적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없었지... 

심장이 뛴다. 

온몸이 떨리고 열 때문에 모든게 어지럽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해내야해! 

후안님이 위험해...!!

슈엘은 가장 앞에 있는 한 사람에게 다가가 칼을 휘둘렀고 

촤아악- 거친 소리와 함께 그의 팔에 새빨간 상처가 그어졌다.

“!!!”

순간 슈엘의 팔에 힘이 빠졌다. 

빨간색 피... 

내가...낸 상처....? 

손끝까지 느껴지는 사람을 베는 감촉이 소름끼쳤다. 

얼굴에 새파랗게 질린 슈엘은 한 발작 뒤로 물러났다. 

사람을 베는 공포가 심장을 억눌렀다. 

좋은 움직임을 보여주었던 슈엘이 도리어 뒤로 물러나자 

사내들은 재빠르게 눈치를 챘다.

-이녀석, 사람을 벨수 없는 녀석이다.

한 사내가 슈엘을 향해 달려들었을 때 누군가 그의 팔을 베어내었다. 

동정 없는 잔인한 칼놀림. 

새빨간 피를 내뿜으며 팔이 바닥에 떨어졌고 

남자는 비명을 질렀다.

“크아아악!!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

....지크!!!!”

-지크였다. 

그는 여전히 메마른 웃음을 띠고 있었다.

“낄낄낄..... 놀이는 여기서 끝이야. 이제 질렸거든!”

“뭣?!”

큭큭 웃어대는 그는 단순한 하인이 아니었다. 

-지금까지완 다른 사람이 서 있었다.

광기어린 미치광이의 눈...  

가면을 벗어던진 것처럼 다른 사람으로 변한 그는 

능숙히 칼을 잡았다.

이미 자신이 베어버린 다른 자의 팔 따위는 신경 쓰지 않으며

그는 말했다.

“이집의 정신 나간 아가씨의 시종을 들어주고 

이런 놀이에 동참한 것도 다 상부의 명령에서였어.

이집의 엄청난 재산이 필요했으니까!”

“-는 사실 대외적인 변명이고 사실 

이집 아가씨의 취미가 꽤나 흥미를 끌었지. 

하지만 뭐, 이젠 그것도 지겹고 재산도 이미 넘어왔으니까...”

그제야 사내들은 홀연히 나타난 지크란 청년이 

언젠간부터 아가씨가 제일 가까이 두는 하인이 되었고, 

이집의 재산을 관리했다는 것이 떠올랐다.

“이제 여긴 볼 일없어. 거기! 너!”

검 날의 끝이 슈엘을 가리켰다.

“알스의...반려인가? 킥킥...”

“!!!!”

까만 두 눈이 크게 뜨여지는 모습이 재미있다. 

“네게 질문을 하나 하지. 

이놈들이나 내게 심장을 꿰뚫리겠냐. 

아니면... 내 도움을 빌어 이녀석들을 죽이고 

황제를 구하겠느냐?!”

슈엘은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다. 

처음 보는 제국의 남자가 나와 후안님의 정체를 아는 것,

그녀의 하인이었던 자가 갑자기 저렇게 변해버린것도, 

그리고 자신을 도와주겠다는 것, 모든 것이...

“대신 내 도움을 받을 경우엔 해야 할 일이 있어...”

찢어진 눈초리가 날카롭게 빛난다.

“무릎을 꿇고 내 발에 키스를 해라. 어때?”

“... ...”

남자는 흥미로웠다. 

그는 반황제파의 조직원중 한 사람으며 

애초에 황제와 반려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황제를 보는 순간 베면 그만이었지만 그런 것도 다 뒷전일 정도로 

저놈의 까만 눈동자가 눈길을 끌었다. 

한없이 한사람만 바라보는 모습... 처음이다. 

그런 강렬한 눈빛은! 

그건 자신의 고귀함에 취한 왕자 따위가 낼 수 있는 눈빛이 아니었다.

내내 보여준 행동은 보통의 왕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사내를 위해 

네가 어떻게 할지 호기심이 생긴다.

일국의 왕자인 네가 과연 나같은 것에게.... 

.... .....

“... ...”

지크의 앞에 다가온 슈엘이 무릎을 꿇었다. 

정직한 까만 눈동자가 그를 비추었다. 

큰 소리로 외치던 지크는 잠시 어깨를 멈칫했다. 

노예출신인 그가... 생전 처음 보는 먼 나라의 왕자는 

그에게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 그의 발에 입을 맞추었다. 

비굴한 입맞춤이 아닌... 

절실한 입맞춤...

  ... ... 세계의 밑바닥에 있던 노예의 발에 

정상의 고귀한 인간이 입을 맞춘 것이다! 

크...크하하하!!! 

“지크, 이 노오옴!!!!”

사내 두 명이 지크에게 달려들었지만 

지크는 발한번 떼지 않고 그 둘을 한꺼번에 베었다. 

두 사람이 피를 토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성격, 조직에 대한 애착도, 모든 것이 원만치 않은 지크가 

조직의 회원이 될 수 있었던 건 

사람을 베는 천부적인 능력이었다.

두사람의 솟아나온 피에 맞아 피범벅이 된 슈엘은 눈을 떴다. 

피비린내 가득한 얼굴에 

까만 눈동자만이 더럽혀지지 않고 빛나고 있었다.

“... 날 도와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합니다. 지크.”

“... ...”

깨끗한 눈이었다. 

압도적인 공포에 짓눌리지도, 

이 같은 행동에 수치스러움을 느끼지도 않는 깨끗한 눈동자... 

슈엘은 일어나 지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방은 어디죠?”

“..... ....”

지크는 멍한 눈으로 왼쪽 방향을 가리켰고 

슈엘은 고개를 살짝 꾸벅이곤 달려가기 시작했다.

... 점점 작아지는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지크는 

이마를 짚고 웃기 시작했다.

“크하하하하!! 이건, 뭐야?! 알스의 반려, 저놈은 대체!!!”

-처음 보는 생물이다. 

처음부터 신분을 타고난 놈이 저럴 수는 없는 것이다. 

저건... 확실히 신기하고 재미있는 생물이었다. 

지크는 입꼬리를 올리며 내뱉었다.

“크큭.. 멜... 확실히 네가 싫어할만한 타입이긴하군.”

“하아... 하아...”

다리에 힘이 풀려왔지만 슈엘은 계속 달렸다. 

복도의 끝...드디어 화려한 장식을 한 그녀의 방문이 보였다. 

“후안님!!!”

슈엘은 다급히 문을 여는 순간 후안이 보였다.

후안 또한 문고리를 잡고 놀란 얼굴로 슈엘을 바라보았다.

피투성이의...모습....

“뭐야...너.... 그 꼴은...”

“.... .....”

슈엘은 동상처럼 굳어 그곳에 서있었다. 

후안이 자신을 보는 시선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가 살아있다......................... 

란 커다란.... 안도감... 

“이봐?!!”

포도주에 타있던 강력한 독약은 왕인 후안에겐 

이미 내성이이 있는 약이었고, 그는 모든 것을 눈치 챘다. 

처음 집에 들어왔을 때부터 느낀 위압감의 정체는 바로 이것이었다.

문제는 자신이 아니라 슈엘이었다. 

그녀석 역시 위험하단 생각에 재빨리 폰넬을 기절시키고 

방을 나가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피투성이가 된 녀석이 서 있었다.

어울리지 않는 새빨간 색으로 물들인 녀석이... 

처음 보는 표정으로. 

...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후안...님....”

“... ....”

슈엘의 까만 눈동자가 흔들린다. 

이내 한 발작 자신에게 다가오더니 손을 내밀다, 이내 멈칫한다.

“아... 저... 꼴이 엉망이죠... ... 

후안님께 이런걸 묻혀선 안되는데...하하... "

그럼에도 쉽게 후안의 주위를 떠나지 못하는 손은 허공을 맴돈다. 

“다친 덴 없으신 거예요?”

“...아.... 응.”

그 말에 결국 슈엘의 손은 후안의 얼굴을 향하고 만다. 

후안의 얼굴에 질척한 피가 느껴졌지만 

그런 것은 신경쓸 것이 되지 못했다.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으로 슈엘은 소리쳤다.

“이제부터 다른 여자는 안지마세요!!!”

-생전 처음 듣는 이 녀석이 외침소리.

생전 못 지을줄 알았던 화난...표정....

“언제 또 이런 일이 안 일어난다고 어떻게 장담해요...?! 

다른 여자는 안지 마세요!”

“... ...”

“... 안전해지면... 

후안님이 안전해지고... 

정말 고귀하고 아름다운 아가씨를 반려로 맞으면... 

그때 안으세요. 

그때, 그 사람을 소중하게 안아주시라고요...”

심하게 목소리가 떨리는데도, 

눈가가 촉촉이 젖었는데도 

절대 눈물은 흘리지 않는다. 

“그대신 그때까지... 

후안님께서 누군가를 안고 싶으시다면... 차라리"

눈물대신 처절한 미소를 흘린다.

“절... 안으세요.”

******

“... 후우...”

작은 한숨을 내쉬며 후안은 슈엘을 바라보았다. 

건강한 빛을 띄던 피부가 창백하다... 

반짝반짝 빛나던 까만 눈동자가 보이지 않는다. 

건강한 게 유일한 장점인 녀석이었는데...

벌써 하루... 

눈을 감고 아파하는 녀석을 보면 처음 본 그때가 생각난다. 

처음 제국에 와 방긋이 웃으며 인사하던 녀석.

... 건강한 녀석이었지. 

아무리 상처 줘도 견뎌낼 것 같은. 

그런 녀석이었다. 

제길... 그런데 왜 이렇게 앓아눕는 거냐! 

한두...번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그렇게 건강하던 녀석이 이곳에.

내 곁에. 온 뒤로 몇 번을 이렇게 아파했다는걸...

짜증이 솟아오른다. 

... 아파하는 모습 따위는 보고 싶지 않았다.

“....안님...”

“?”

누굴...부르는 거지? 

분명 심한 고열이었다. 

다녀간 의사는 극도의 피로와 스트레스... 

그리고 감기가 겹쳐진 거라며 푹 쉬지 않으면 위험할거라 말했다. 

아마도 하루는 더 있어야 눈을 뜰 거라고. 

그렇게 말했었는데....

“....님...”

대체. 누굴. 그렇게 부르는 거야.

... 화가 난다. 

슈엘의 입가에 귀를 가져가 들려오는 그 소리를 듣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런 와중에도 네가 생각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그. 누군가를. 찢어죽이고 싶은 분노가 

치솟아 오름이 두려운 것이다. 

슈엘의 이마위에 있던 수건을 잡자 

그의 땀에 축축해져있는 면이 느껴진다. 

후안은 수건을 집고 일어섰다. 

다른 수건으로 갈아주기 위함이었다. 

몸을 돌리고 나서려던 후안의... 팔에 느껴지는 것은 

뜨거운. 사람의 체온이었다.

“가지...마세요...”

“?!”

데일 듯... 뜨거운 슈엘의 손이다. 

닫혀있던 까만 눈동자를 힘겹게 뜨고 슈엘은 후안을 바라보았다. 

하하. 몸이며 머리며 안아픈곳이 없는데, 

심장이며 

눈물이며 

안아픈곳이 없는데... 

그래도 웃음이 나와요. 

왜냐면. 

이렇게 아픈 후에 눈을 뜨면 당신이 

보인 적이 한번도 없었거든요.

“... 꿈이...아니네요...”

후안의. 차가운 온도를 느끼며 슈엘은 감동을 받는다. 

이 남자가 자신 앞에 있다는 이 현실이 믿겨지지 않아 

가슴이 벅차오른다.

“정신을...차린건가?”

“... ...”

후...하고 안도하는 표정. 

후안이 다시 시선을 돌리고 몸을 돌릴 때 

슈엘의 손은 더더욱 애절하게 그의 손을 잡았다.

“이봐, 난 수건을....”

고개를 돌려 말하려 했지만 후안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슈엘의 그. 절박한 표정 때문이었다. 

아픔의 고통이나 피로가 아닌... 절박한. 눈동자.

“...가지 마세요. 제발...”

슈엘은 불안했다. 

이 남자가 이대로 문을 다서서 또... 

돌아오지 않지 않으면...? 

또. 다른 여자를....안으면? 

....어지러움 속에서도 악몽과 같은 끔찍한 시간들이 머릿속을 지나간다. 

견딜 수 없어. 

이런 몸으론... 홀로 당신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시간이나... 

다른 사람을 안고 돌아오는 당신을 웃으며 반기는 

그런 고통을 견딜 수 없어. 

결코... 웃을 수가 없어.

“... ....”

후안의 마음은 복잡했다. 

이녀석의 이표정이 무얼 말하는지 알 수가...없었다. 

다만 그 까만 눈동자가 너무나 애절해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네게 그런 표정 따윈... 어울리지 않아. 

후안은 다시 의자에 앉았고 

그런 그에게 슈엘은 어린아이처럼 파고들었다. 

뜨거운 체온이 가득 후안에게 느껴졌다.

“너무 아파서... 제정신이 아닌 건가...”

“... ....”

슈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싱긋이... 힘든 미소를 지을 뿐. 

후안이 슈엘의 입에 입을 맞추었다. 

타오르듯 뜨거운 혀다. 

슈엘의 가지런한 이와 부드러운 혀를 핥자 

그가 간지럽다는 듯 몸을 움찔거린다. 

그런 그를 더더욱 괴롭히려는 듯 

후안의 혀는 점점 더 슈엘의 입속을 간지럽혔다. 

긴 입맞춤이 끝나고 후안은 조용히 슈엘의 목에 입을 맞췄다. 

이를 세워 하얀 목을 빨갛게 물들이자 슈엘이 작은 탄성을 내뱉는다. 

후후... 저런 남자의 목소리가 귀엽다고 느끼다니... 

정말... 네가 미쳐버린 건...아닐까...

자신의 영역임을 표시하듯 슈엘의 몸 곳곳에 입을 맞추었다.

... 정말로 미친 듯이 원하게 된다. 

이성을 잃어버릴 정도로 

이... 남자의 몸을 원하는 자신!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아니... 이해 따윈, 이제 집어치워. 

그런것따위... 

... 지금만큼은....

“으......으윽....”

슈엘은 입술을 깨물며 비명을 참았다. 

후안의 것이 자신으로 들어오는 과정은 언제나 그에겐 고통이었다. 

아직까지 이 행위가. 슈엘에게 만족감을 준적은 없었다. 

다만... 당신이니까... 

내가 사랑하는. 당신이니까....

“뭐야...하아... 너... 좀더 소리를 내도..돼.!”

슈엘의 위에서 후안이 불만인 듯 인상을 썼지만 

슈엘은 그저 이를 악물 뿐이었다. 

되도록이면 소리를 내지 않아야 한다. 

나를 안아주는 당신이. 조금이라도 내가... 

당신이 원하지 않는 남자임을 

잊게 해야 하니까. 

그래야. ...하니까...  

눈을 감고 절정에 달하는 자신의 남자를 바라보는 

슈엘은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마저 잊었다. 

그의 등에 손을 올려 안으며. 그를 느낀다. 

그처럼 거칠고 뜨거운 그의 남성을 느낀다.

정말 바보 같게도 이 행위에 당신의. 

사랑을. 

느낀다. 

... ... 조금만... 

조금만이라면 괜찮겠지요... 

지금만이라도. 당신이 나를 좋아해준다고 느끼는 건.

... 괜찮겠지요....?

아마도 고열 속에서 정신을 잃었던 것 같다. 

... 아직도 머리의 어지러움과 몸의 피로는 그대로였다. 

정신을 차린 것은 조금 전이었지만 

슈엘은 벌써 몇분째 눈을 뜨지 않고 있었다.

...언제나 눈을 뜨면 혼자였다. 

그가 날 안아준 후에 남는 것은 끔찍한 고독이었다. 

그런데... 지금 느껴지는 

이. 체온은 뭐지...? 

시원한 체온을 간직한 피부가 맞닿아 있었다. 

누군가의 품안에 자신이 소중히 안겨 있었다.

분명. 익숙한 체취다. 

분명 익숙한 그의...향기다... 

그런데 무서워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눈을 뜨면 이 체온과 감촉이 모두 사라질까봐... 

또 외로이 있는 내가 될까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 ....”

터질듯 두근대는 심장을 느끼며 

슈엘은...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조심히... 조심히.... 

이. 현실이. 

깨어지지 않을 것을 기도하며.

“............................................”

... 눈을 뜨자 보인 건... 그의 얼굴,,, 

보기 좋게 그을린 피부와... 

날렵한 턱선과 콧날. 

... 과묵히 닫혀진 입술.

...아침햇살에 찬란히 빛나는 심홍의 머리카락... 

분명히... 

그다. 

사랑할 수 밖에는 없는 아름다운 남자의 얼굴. 

그의 품안에... 내가 있는 것이다.

서로가 알몸인 것에 새삼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다. 

심장이 두근대는 와중에도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다.

떨리는 손을 들어 그의 머리카락을 만지고. 

그의 콧날과 얼굴을 쓰담아 본다.

“........ 잘생겼네요, 참....”

쿡쿡.. 하고 웃지만 웬일인지 눈가엔 눈물이 고인다. 

왜지... 기쁠 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슬픈 거지... 

꿈일 거라 생각했던 일이 현실이 되자 

어쩐지 심장이 욱신거린다.

그래. 사실...알고 있었다. 

이렇게 심장이 아파오는 이유.  

마음 깊은 곳에서 웃음이 나올 수 없는 이유.

“.....당신은....나를 사랑하지 않잖아요...”

.... 그렇잖아요.... 

이렇게 내 곁에 있어도. 

나를 안아도.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잖아요... 

나의 반려는 분명 후안 ·루비젝트 ·알. 당신뿐이지만... 

당신의 반려는 내가 아니잖아요. 

누군가 다른. 

아름다운 여성이 당신의 곁에 있을...거 잖아요... 

하하... 겨우 하룻밤 안아준걸로 

이렇게 당신과 아침을 보낸 것으로 들뜨다니. 나는 참...

“...바보네요...”

결국 눈물이 눈가에 고인다. 

훗날 당신의 달콤한 입맞춤을 받고 

나보다더 사랑받고 지켜지고... 

그리고 이렇게 아침햇살이 비췰 때에 

당신과 함께 눈을 뜰 누군가를 생각하자 

가슴이 아파 견딜 수가 없다.

“... 벌써 일어났군...”

막. 잠에서 깨는 그의 모습. 

심홍의 눈동자가 점점 선명히 나를 향한다. 

무감정한 목소리에 점점 더 눈물이 나올 것 같은 내가 있다. 

그러나 그에게 눈물은 보일 수 없어.

눈가를 적시는 눈물을 멈추는 방법은 이미 배운지 오래다. 

촉촉해졌지만... 이제는 흘러내리지 않을 눈물. 

그는 아마 평생 눈치 채지 못할... 

투명한 나의. 투정. 

자신을 바라보는 후안을 바라보며 슈엘은 싱긋이 웃었다.

“좋은...아침입니다... 후안님.”

******

“이안폐하, 세금에 관한 서류를 검토하셔야 합니다.”

“이안폐하, 올해 징집된 병사들에 대한 자료입니다. 확인해주십시오.”

“이안폐하...”

“제길! 그놈의 폐하, 폐하, 미치겠네!!!”

서류를 내팽개치며 이안은 소리를 질렀다. 

이내 문소리가 들리며 장난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안폐하,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 이봐 로빈! 너까지 그러기야?!”

찌릿... 자신을 노려보는 이안을 바라보며 로빈은 재미있다는 듯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린다. 

세상에- 천하의 방탕왕자 이안 ·루비젝트 ·란이 폐하라니 

웃지 않고는 못 베길 일이 아닌가. 

분명 왕의 능력. 은 갖춘 남자지만 왕의 재질만은 갖추지 못한 남자다. 

자유스럽고- 그리고 타인을 위해 시간을 쓴다는 건 절대 

생각할 수 없는 지독한 이기주의자. 

그렇기에 스스로 왕의 자리를 포기한 그가 임시로나마 

황제가 된 것은 정말 한편의 희곡이었다.

“흥, 이 서류만 끝나면 오늘일은 끝이야. 절대... 하지 않겠어.”

“뭐... 그러시던가요. 폐하.”

씨익 웃는 로빈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안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괴물친구... 진짜 베이긴 베였던 거냐?”

“괴물이라니! 이 건강한 몸을 시기하려면 적당히해!”

아이처럼 불끈하는 로빈의 얼굴에 이안은 입을 히죽였다.

한심하게 정신을 잃고 쓰러져있던게 엊그제이건만

이틀 만에 깨어난 녀석은 언제 기절했냐는 듯 건강했다.

“그나저나...리엘은, 요즘 어때?”

“뭐야~! 애인걱정이냐?!”

친구를 툭툭 치는 로빈의 얼굴에 이안은 깨닫는다.

천하의 둔탱이 로빈.

...역시 눈치 채지 못했구나, 얼음왕자님의 감정.

차라리 잘 된 걸까.

-이녀석은 아주 오래전부터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람이 있으니

사리엘의 감정은 오히려 짐이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로빈. 어째 오늘 좀 이상하다?”

“응?”

“유난히- 옷이라던가 머리에 신경 쓰고 온 것 같은 건 내 착각인가?”

“에에엥?!!”

확-하고 빨개진 녀석의 얼굴.

너무 알기 쉽다, 이녀석은.

쿡쿡 웃으며 이안은 말했다.

“-데이트냐?!”

“...데이트까지는 아니고...”

얼굴을 긁적이며 로빈이 말했다.

‘그녀’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면 언제나 

진지한 표정을 짓는 친구.

“-고백을 할 거야.”

“... 거짓말~.”

“이안!!!”

불끈 하고 자신을 쏘아보는 남색 눈동자에 이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벌써 몇 번이나 로빈이 입에 담았단 말았던 말이다.

그녀-로즈-에게 고백한다는 말은.

하지만 언제나 성공한 적이 없었잖아...

이안의 눈빛에 담긴 감정을 깨달은 로빈은 눈썹을 찡그렸다.

“정말 할 거야! 오늘...!”

“... 그래.”

“정말정말정말이라고!!!! ... 하고, 말거야.”

잔뜩 긴장한 얼굴로 방을 나가는 로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안은 생각에 잠겼다.

아이처럼 단순하고 쾌활하고 그리고...

사랑에 힘들어하지.

그게 참, 닮았다.

-반려님과.

-힘내. 라고 되내이며 이안은 펜을 들었다.

톡- 톡-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

사리엘은 커튼을 걷어보았다.

가는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창문을 열자 싱그러운 풀 향기와 비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힌다.

창가에 턱을 괴고 사리엘은 눈을 감았다.

이렇게 혼자 있는 밤, 눈을 감을 때면

언제고 생각나는 얼굴은 한 사람이었다.

-까만 밤하늘처럼 까만 눈동자와 까만 머리카락을 가진..

나의. 왕자님.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다른 사람이 생각난다.

소년처럼 빛나는 남색눈동자와 반짝이는 

은빛의 머리카락이

떠올려진다.

[왜... 가지 않았어?]

그가 깨어난 그 날 내게 했던 말.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그에게 아무 대답을

할 수 없었던 나를 향해 그는 웃었다.

[하지만, 뭐랄까.]

[.. ...]

[네가 떠나지 않아서- 기뻐.]

-가슴이 설레는. 미소였다.

사리엘의 눈을 뜨는 순간 한순간 시선이 한 곳을 향했다.

창문 저 편으로 보이는 은색의 반짝임.

“로빈...?”

-분명 그였다.

차가운 봄의 비를 맞으며 정원에 있는 자는 분명 그였다.

이런 늦은 밤에 왜 저런 곳에?

사리엘은 황급히 문을 나섰다.

그리고 비를 맞고 있는 그의 앞에 서는 순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천천히 사리엘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남색의 눈동자는

슬픔을 가득 머금고 있었다.

언제나 웃음을 지었던 그 눈매엔

투명한 

눈물이 고여 있었다.

한발작 다가오는 사리엘을 향해 로빈이 입을 열었다.

“-오늘, 로즈에게 고백을...하려 했어.”

순간 사리엘의 걸음이 멈추었다.

... 심장이

멈추었다.

그러나 남색 눈동자 가득 고인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하... 하하. 그런데... 또 실패해버렸어.”

“... ....”

“도저히 고백을 못하겠어. 

그녀의 눈동자를 본 순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어.“

아무리 둔한 로빈이라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그 눈빛은

‘남자’를 보는 여자의 눈이 아니라는 걸.

오직 ‘친구’를 향한 눈빛 이라는 걸 

오랜 시간 그녀를 바라보았던 로빈은 알 고 있었다.

그런 로빈을 향해 사리엘은 다가갔다.

그의 앞에 다가간 사리엘은 그의 눈가를 매만졌다.

뜨거운... 눈물이

하얀 손가락에 닿았다.

사리엘의 입술이 로빈의 눈가에 닿자 

남색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지금...뭐 하는...거야?”

차갑게 식은 로빈의 입술에 사리엘의 입술이 다가왔다.

츕-

짧은 입맞춤.

새하얀 달빛 속에 녹색의 눈동자가 로빈을 바라보았다.

사람이 아닌 것처럼 빛나는 

금빛 머리카락이 찰랑였다.

“당신을. 위로하는 거예요-”

******

어두운 로빈의 방 안엔 은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으....”

로빈은 짜릿하게 느껴지는 쾌감에 눈을 감았다.

로빈의 다리사이에 얼굴을 묻은 사리엘이 그의 성기를

빨고 있었다.

아찔한 쾌감에 신음소리를 내 뱉으며 로빈의

시선은 아래를 향했다.

자신의 남성을 빨고 있는 남자의 얼굴.

하얀 얼굴과 길다란 금빛의 속눈썹.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요정처럼 아름다운 그 얼굴이... 

저런 남자를 유혹하는 표정을 짓다니.

파란 눈동자를 보는 순란 로빈은 눈을 감았다.

참지 못하고 그의 성기에서 불투명한 정액이 쏟아져 나왔다.

자신의 정액이 뭍은 하얀 얼굴에 로빈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미, 미안!! 미안...”

“... ...

사리엘은 아무 말 없이 손으로 얼굴을 닦았다.

손에 뭍은 질척한 타액을 핥는 새빨간 혀를 보자

로빈은 참을 수 없는 욕망을 느꼈다.

로빈의 허리에 앉은 사리엘이 

옷을 벗고 새하얀 알몸을 드러내는 순간

로빈의 머릿속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자신의 오래된 친구의 붉은 눈동자도...

오랜 시간 마음에 품고 있는 여인마저도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하......으..........읏....”

위로 선 로빈의 성기 위로 사리엘의 뜨거운 그곳이 맞닿았다.

낯선 성기를 받아들이기 힘든지 사리엘은 눈썹을 찡그렸다.

-그런데 그런 표정마저도

이렇게 흥분되다니..

“우읏.......”

이내 뜨거운 것이 로빈의 성기를 감쌌다.

좁지만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에 로빈은 엄청난 쾌감을 느꼈다.

조금씩 조금씩 사리엘의 허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리...리엘... 으...읏...”

정신을 잃을 정도의 쾌감에 로빈의 몸이 달아올랐다.

자신을 내리깔고 있는 녹색 눈동자를 보며 로빈은

사리엘의 얼굴을 매만졌다.

남자의 성기를 담는 고통에 땀에 젖어있던 사리엘이 

놀란 얼굴로 로빈을 바라보았다.

느릿느릿 로빈이 말을 내뱉었다.

“이것은... 위로 인거지...?”

“.. ....”

“... 위로...인거지...?”

“... ....”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다.

그러나 그에게 반박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사리엘은 입을 열었다.

“ ...네 ....”

... 남색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순간 사리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터져 나올 듯한 눈물을 참으며 사리엘은 가면을 썼다.

차갑고 무표정한 가면을 쓰고 사리엘은 말했다.

-네.

이건 위로예요.

사랑에 아파하는 남자를... 위로하는 거에요.

“그러니...

날... 그녀라고 생각하고 안아요. 

로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