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남자는 거친 숨을 내밀며 달렸다.
이를 악물고 뛰긴 했지만 체력은 이미 한계...
배에서 나오는 피는 멈추지 않았다.
겨우 병사들을 따돌렸지만 날이 밝으면 잡히는건 시간문제다.
털썩- 구석진 골목의 바닥에 쓰러진 남자는
천근만근 무거워져가는 망토를 내던졌다.
선명한 금색머리카락이 완연히 달빛에 비춰졌다.
보석처럼 빛나는 머리카락 곳곳엔 붙어있는 새빨간 얼룩.
-사람의. 피다.
남자는 눈을 감았다.
[ 멜-]
.아마도.환청일것이다.
[ 멜- ]
피비린내만 맡으면 들려오는. 환청.
[ 멜-]
더 이상...나의. 이름을 부르지. 말아줘...
<< 반려로 맞아주세요 >>
“... 젠장, 이게 무슨 꼴인지.”
이안은 짜증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조금 전 일을 떠올리면 몇 십번 욕을 내뱉어도
화가 풀리지 않을 지경이다.
어둠이 사라지고 날이 밝아올 무렵
성을 나서는 슈엘과 후안을 마중 나갔건만
기껏 밤잠도 설치며 나갔더니 뭐?!
[이안님. 후안님은 걱정 마세요.]
라고?! 이봐, 바보반려!
내가 걱정하는 건 형님이 아니고 너야!
이 몸이 걱정하는 건!
떠나기전 얼굴을 보려했던건!
형님이 아니라 바로 너라구.
저도 모르게 눈썹을 찡그렸지만...
이안을 보며 말하는 와중에도
슈엘의 온신경이 향하는곳은 후안이었다.
까만 눈동자 가득 자리 잡는 사람은 언제나 같은. 한사람이다.
... 넌 진짜. 모르는 거냐.
아니면 모르는 척 하는 거냐.
대체 언제까지 내 앞에서 형님에 대한 말만 할 거야...
대체 언제까지
[후안님은 제가 꼭 지켜드릴테니까요]
-형님만 바라볼 거냐!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분함이 당황스럽다.
겨우 그까짓 사소한 일로 화내게 될 줄은,
어린아이 같은 이런 감정이 생길 줄은 이안도 몰랐던 사실이다.
갈 길이 급하다는 핑계를 대며 재빨리 슈엘을 데리고 사라지는
후안의 뒷모습을 보며 눈썹을 찡그린 것이 바로 조금 전.
이안은 아직까지 화가 풀리지 않았다.
“게다가 사리엘은 왜 나타나지 않는 거야?!"
기껏 준비한 말과 돈, 그리고 지도 등을 준비해
약속한 장소에서 한참을 기다려도 사리엘은 오지 않았다.
... 밤새 로빈의 저택에 소동이 있었다고 보고가 왔지...
로빈마저 상처를 입고 쓰러졌다 했다.
하지만 쓰러진 건 그녀석이지, 네가 아니잖아, 사리엘!
설령 상처를 입는다해도 바닥을 기어서라도 올 남자다, 사리엘은.
자신의 동생을 위해서라면 어떤 짓도 마다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더더욱 알 수가 없다.
그런 녀석이 오지 않다니... 무슨 일인거지.
이제 막 해가 뜬 새벽녘이라 상점들이 문을 열기 시작해
이안은 인적이 드문 골목길을 따라 걸었다.
괜히 사람들을 마주쳐 인사를 받는 것은
그쪽이나 나나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니까.
“음?!”
제국의 수도이자 대도시라지만
뒷골목안엔 쓰레기더미와 먼지가 꽤 쌓여있었다.
이안의 눈길을 뜬것은... 잿빛을 띤 그런 것들이 아니라...
어둡고 침침한 길에 선명히 떨어져있는 붉은색 자국이었다.
... 저쪽에서부터 시작된 핏자국...
갈색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예의 그 침입자인가.
하긴, 천하의 로빈이 다쳤을 정도라면 상대편이 무사할 리가 없다.
죽지 않은 것이, 아직 잡히지 않은 것이 용할 지경.
짜증이 가득하던 머릿속에 호기심이 가득 찼다.
검에 손을 얹으며 이안은 핏자국을 향해 걸었다.
돌덩이나 쓰레기들에 발이 걸려 소리가 나긴 했지만 상관없다.
과연- 어떤 상처를 입고 쓰러져있을지 궁금한걸.
골목길을 걷던 이안의 발이 멈춰졌다.
핏자국이... 여기서 멈추었군.
벽으로 둘러싸인 곳이라 도망칠곳은 없다.
“이봐, 어서 나와. 숨어있을만한 곳은 없어.”
가벼운 말투지만 위엄 있는 목소리.
잠시간의 정적 끝에 상자더미 뒤편에서 나온 사람은...
검정색 옷에 넝마가 된 후드를 뒤집어쓴 체구가 작은 남자였다.
엉망이된 금발로 얼굴이 가리고 고개를 숙인 그를 보자
이안은 입 꼬리를 올렸다.
뭐야 저 꼴은...
저런 상처를 하고 용케 서있는군.
피범벅이 되어 구멍이 뚫려있는 배는
지금 죽는 다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조그만 몸으로 꽤 독하군.
흠- 마치 그녀석 같아.
알스에서온 금발의 왕자님.
무엇보다도 그가 생각나는 이유는 아마도
저 흔치않은 금발때문일것이다.
비록 피범벅이 되긴 했지만 보기 드문 금빛을 띄고 있었다.
“뭐, 어쨌건 최악의 날이라고 생각했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닌가보네.”
이안은 검을 고쳐 쥐었고 서서히 그에게 걸어갔다.
고개를 숙인 그는 흠칫하며 놀란 모양이지만
이미 힘이 남아나있지 않은 건지 도망치는 것도 불가능해보였다.
이안은 한 발작 한 발작 그에게 다가갔고
손을 뻗어 그의 턱을 잡았다.
“!!!!”
그순간 남자는 옷자락을 올려 얼굴을 가렸고
이안의 눈에 비췬 것은...
푸른색 눈동자뿐이었다.
“너... ....”
섬뜩할 만큼 선명한 푸른 눈동자에 위로 솟은 날카로운 눈매.
... 사람을. 죽일 듯 노려보는
증오가 가득한 시선.
이안은 한참을 그렇게 그 눈을 바라보았다.
얼굴을 보려면 볼 수 있었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이...눈이다.
알스의 반려를 그토록 표독스럽게 쳐다보았던 이 눈.
죽어가는 와중에도 사람을 노려보는 이 눈.
... 잊을수 없는 강렬한 블루.
“큭... 크하하하. 이거 진짜 놀랍군!!”
귀족들에게 이쁨받는 것으로 허영과 사치를 부리는
더러운 남창인줄만 알았더니
반황제파의 자객이라고?!
웃기는군.
정말 대단해-!
놀라움과 재미가 가득이다.
한참을 웃던 이안은 멜을 힘껏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쿨럭...”
바닥에 쓰러진 멜이 피를 토했지만 이안은 씨익 웃으며
눈을 내리깔 뿐이었다.
쿡쿡... 칭찬해주겠어.
이 나를 이렇게 웃게 만들다니.
남자에게 엉덩이나 흘들줄만 알았던 요부가 반황제파의 사람이었다니,
이렇게 재미있는 일은 흔치 않지.
바닥에 쓰러져있는 동안에도 이안을 향한 눈빛만큼은 죽어있지 않다.
그 눈빛... 마음에 안드는건 여전하지만.
-꽤. 재미있어.
차가운 눈빛으로 이안은 멜을 향해 말했다.
“어디한번 살아봐라.”
“?!”
“어디한번 살아서, 맘껏 날뛰어보라고.”
“... ...”
파란 눈동자가 알 수 없다는 빛이 가득했다.
이안은 몸을 돌려 멜을 뒤로하고 걸음을 내딛었다.
살아남아봐.
자존심과 오만함이 뭉쳐진 인간.
너 같은 인간이 남자에게 몸을 팔고
손에 검을 들면서까지 갖고자하는것이 뭔지 정말
-궁금해졌거든.
******
“그래서? 다친 것은 로빈 혼자뿐입니까?”
“...예.”
60이 넘은 노년의 집사-알프레도-가 이안을 맞았다.
어젯밤 일어난 일에대한 집사의 설명을 들으며 이안은
로빈의 방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로빈뿐이라고?
사리엘이 다친 곳은 한 곳도 없고?
그럼 설마, 사리엘이 로빈을 간호하기위해
이곳에 남았다는 거야?!
“... 크핫.”
-웃음이 나왔다.
도저히 말도 안돼는 얘기다.
동생이 아니면 정을 주지 않는 그 얼음왕자가
기껏 로빈의 상처 때문에 동생을 따라가지 않았다니...
그럴 리가...
“... ...”
로빈의 방문을 연 이안의 웃음이 멈추었다.
정신을 잃은 로빈이 누워있는 침대... 그리고 그 옆의 사리엘을
보는 순간 이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어째서
저런 얼굴을 하고 있는거야...
이건... 뭐랄까.
'날 잡아서 이안 놀래키기... 라고 해야 하나.
얼음 같고 사람에 무관심하던 녀석이 언제부터.
저런 표정으로 로빈을 바라보게 된 거지?
피식- 나오는 웃음을 흘리며 이안은 말을 내뱉었다.
“놀랍군. 동생밖에 모르던 네가...”
“?!”
그제야 놀란 얼굴로 사리엘은 고개를 들었다.
언제나 변함없던 그 얼굴이 당황한 빛을 띄자 이안은 웃음이 나왔다.
“언제부터야?”
“뭐...?”
“언제부터 반려님을 바라보는 눈빛으로...
그 녀석을 바라보게 되었어?“
“!!!!”
휙- 하고 사리엘의 시선이 로빈을 향했다.
노려보는 듯 하지만 그 속에 담겨있는건
원망이나 분노가 아니다.
... 숨겨온 감정을 들킨것에 대한
부끄러움.
이안의 손가락이 사리엘의 작은 입술을 매만졌다.
“안돼, 사리엘.”
이안의 얼굴이 하얗고 아름다운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
츕- 입술과 입술이 닿아 작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내 사리엘의 귓가에 다가가 조그맣게 속삭인다.
“-이녀석은 안돼.”
너는 분명히 아름다워.
보석처럼 빛나고 아름다워서 누구든 널 갖고싶어하겠지.
내가 그러하듯이. 하지만-
그만은 안돼.
왜냐하면. 아주 올곧고 한결같은 로빈이란 남자는.
“...로.....즈..”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로빈의 목소리...
신음소리와 함께 ‘그녀’의 이름을 내뱉고 있었다.
사리엘의 얼굴은 이전과 다름없이 무표정했다.
하지만 심장만큼은 죄여오듯 아파왔다.
상처받은 녹색 눈동자를 향해 이안은 말했다.
“로빈이란 남자는. 다른 여자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
“축제요?”
동글동글한 눈매로 되묻는 슈엘에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넉넉한 몸집에 사람좋은 얼굴의 그녀는 슈엘과 후안이 처음 묶게 된
여관의 주인으로 이제 막 마을에 도착한 슈엘에게
여러 가지 마을에 관한 소식을 들려주던 참이었다.
“그치만 봄축제가 끝난 지 얼마 안됐잖아요?”
“허~ 이 청년좀 보게.”
여주인은 혀를 쯧쯧 차며 말을 이었다.
이 큰 제국에 축제가 봄축제 하나뿐이겠느냐...
겨울이 긴 제국이니만큼 각각의 마을마다 봄을 맞는 축제가
많은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이 마을의 제비꽃축제라는 것이다.
“와- 제비꽃축제요?”
축제라면 사족을 못쓰는 슈엘이다.
본래 모국인 알스는 날씨가 따뜻한 날이 많아 축제가 많았지만
제국에 와서 제대로 축제를 즐긴 적이 없는
슈엘에게 그것은 신나는 일이었다.
“그래, 뭐 여러 가지 재미있는 것들이 있지만...
제비꽃축제의 명물은 뭐니 뭐니 해도 제비꽃 빛의 보라색 불꽃놀이지.
불꽃아래에서...”
그렇게 여주인의 맛깔 나는 말솜씨에 빠져있던
슈엘은 앗차 싶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슈엘의 등 뒤로 후안이 문을 열고 나가는 모습...
으아앗 후안님! 혼자 나가시다니!
“아주머니, 얘기 감사합니다!”
슈엘이 꾸벅 웃으며 먼저나간 붉은머리의 남자를
황급히 쫓아나가는 모습을 보며
여주인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키도 커다란 사내놈이 동글동글한 눈을 해갖고 저러니
주인을 쫓아가는 큰개 같잖아, 호홋.
그나저나 슈엘이란 저 남자.
정말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너무 귀여운걸.
축제의 불꽃놀이에 대한 말을 들을 때의 그 반짝이는 눈동자라니-.
소녀처럼 빛나던 눈동자를 떠올리며 그녀는 호쾌한 웃음을 지었다.
“후안님, 후안님께서는 아세요? 오늘부터 마을에 축제가 있대요.”
“... 축제?”
후안이 흘낏 슈엘을 바라보려니 슈엘이 기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헤헤... 이제야 봐주시는군요.
가끔은 좀, 옆을 봐달라구요...
“제비꽃축제라고 한데요,
그러고 보니 마을에 축제분위기가 물씬 풍기네요.”
슈엘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처음 마을에 들어왔을 땐 몰랐는데 해가지니 마을이 점점 분주한 것이
영락없이 밤축제의 시작이다.
벙긋벙긋 웃으며 연신 입을 벌리는 슈엘을 보며
후안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 이녀석은 뭐가 그렇게 좋다고 떠드는 거지.
매번 웃고 즐겁다는 듯 웃는다.
사소한 것에 행복을 느끼는 마음을 후안으로선 알 수가 없다.
저녁을 먹기로 결정한곳은 고급레스토랑.
고급이라기보다는 이 작은 마을에
그나마 깨끗한 식당이란 편이 맞을 것이다.
왕실에 비한다면 볼품없는 식당이지만
의자에 앉은 슈엘의 가슴이 터질듯이 두근거려왔다.
“... ...”
후안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연신 떠들어대던 녀석이 왜 이렇게 조용하지...?
자신 앞에 마주앉아있는 슈엘은 고개를 숙이곤
후안을 바라보지도 않는다.
하? 뭐야...또.
짜증이 밀려온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당황스러울 정도로
솔직하게 부딪혀오는 그 까만 눈동자가
내 시선을 피할 때면 화가 난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마음에 들지 않는다.
강제로라도 고개를 돌려 자신을 보게 만들고 싶은 충동이 든다.
“이봐, 슈.”
“!!”
뭘까.
고개 숙인 녀석의 어깨가 움찔하듯 놀라는 것은.
성밖으로 나가기 전 서로의 예명을 부르기도 하지 않았었나...
정체가 들통날까봐 정한 예명이란 것은 서로의 애칭이었다.
[그럼... 슈라고 부르면 되겠군.]
이라고 말하자 얼굴이 빨개졌던 녀석이 떠올려졌다.
숙여졌던 고개가 살짝 들려지니 잔뜩 긴장한 얼굴...이다.
“나 때문인가?”
“예에에?”
“나 때문에 불편해서 식사를 못한 다해도 참아.
싫어도 앞으로 계속 같이 먹어야 하니까.”
신경질적으로 내뱉는 후안의 말을 슈엘은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두 손을 힘껏 내저으며 부정한다.
“아니요, 그럴 리가요! 전혀 그렇지...”
“나도. 너와 단둘이 먹는 게 그다지 기쁘진 않아.”
“... ...”
기운차게 흔들렸던 슈엘의 팔이 멈추었다.
기운 없이 내려앉은 두 손이 꼬옥 모아진다.
세차게 두근거리던 가슴이 내려앉아 아파올정도로 죄여든다.
스프를 떠먹는 후안의 얼굴을 훔쳐보듯
몰래 바라보며 고개를 숙인다.
이내 스푼을 집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웃으며
맛있게 스프를 먹는다.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후안을 향해
장난스런 미소를 지으며.
“후안님, 음식이 정말 맛있네요. 그렇죠?”
“.... ....”
대꾸 않고 조용히 음식을 먹는 후안을 보며 슈엘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이 자리가 불편하다고요?
내가 당신과 먹는 이 식사가 싫다구요?
그럴 리 없잖아요. 왜냐면 이 저녁은
당신과 함께하는 첫식사니까.
너무 기뻐서 그래요.
나는 너무 기쁘고 두근거려서
당신의 얼굴을 당당히 바라보는 것조차 너무 힘들다구요..
“하-”
바보처럼 웃는 자신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는 후안을 보는 순간
입안 가득한 스프를 목너머로 넘길 수 없다.
“... ...”
그런데...
이렇게 기쁜데 왜 이렇게 목이 메일까요..
맛있게 먹어야 하는데 하하... 정말.
이상해...
식사를 끝내고 나오니 이미 어두워진 밤하늘 아래로 마을은 변해있었다.
조용해보였던 마을에 화려하고
떠들썩한 축제가 시작된 것이다.
체하지 않은 것이 신기할 만큼 겨우겨우 밥을 먹은
슈엘의 얼굴에 그제야 화색이 돌았다.
“와- 정말 예쁘네요...”
제비꽃축제라는 이름답게 보랏빛 제비꽃으로 장식된 마을곳곳.
어린 여자아이부터 젊은 아가씨,
아이와 함께 나온 넉넉한 여성마저도 제비꽃을 머리에 꽂고 있었다.
소박한 꽃에 소박한 사람들.
하지만 어느 공주님이나 귀족아가씨보다도
행복 가득한 웃음.
슈엘은 이런 것이 너무도 좋았다.
기분 좋은 사람들... 기분 좋은 웃음이 좋다.
여관으로 향하려고 하는 후안의 손을
저도 모르게 잡고는 동그란 눈으로 외쳤다.
“설마 돌아가시려고요?”
“이제 곧 밤이야. 내일 곧 길 떠날 테고...”
말과 표정에 묻어나있다.
이런 축제는 귀찮다고-.
다시 돌아서려는 후안의 팔을 꽈악- 잡으며 슈엘은 말했다.
좀처럼 볼 수 없는 진지한 표정으로.
“후안님, 애초에 순례를 떠난 이유가 뭐죠?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기위해서가 아니었나요?”
“??”
“그럼 이런 축제도, 사사로운 것도 다 즐기고 체험해봐야죠.
그래야 후안님이 다스릴 백성들 우읍!”
후안의 손이 자신의 입을 막아버리자 슈엘이 놀란 얼굴이 되었다.
후안이 눈썹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그래, 그래 알았어. 그러니까
후안님, 이니 하는 것도 그만해.”
으엑.... 그제야 알았다는 표정으로 슈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깜빡했다... 후안님의 정체가 밝혀져서는 안되지.
게다가 후안님 후안님을 크게 외쳤으니...
꼬리 내린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슈엘은 다시 한번 후안을 바라보았다.
“저기 그럼...같이 가시는 거죠?”
“흥.”
귀찮아- 라는 표정이 역력했지만...
이젠 등 돌리지 않는다.
거리를 향해 걷는 후안을 보며 슈엘의 두 눈이 휘었다.
앞서가는 후안의 옆으로 걸어가
그의 걸음에 자신의 걸음을 맞추어 본다.
꿈같은 일이다.
그 “후안”님이 내 옆에 있다니... 나와함께 축제를 보고 있다니.
두 손을 뒤로하고 후안을 바라본다.
무표정한 표정이지만 시선이 주의곳곳을 살핀다.
춤추는 사람들을 바라보기도 하고...
아주 잠시지만 놀랍다는 듯
재미있다는 듯 표정이 바뀌기도 하고...
모두 기억해둬야지.
나중에- 아주 시간이 흐르고 ...
후안님의 곁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있게 되면...
떠올릴 수 있게.
하나하나 잘... 기억해둘거야.
“저기, 후..가 아니라 알님. 저기 한번 가봐요.”
“뭐?”
또다시 귀찮다는 표정 역력하지만 슈엘은 용기를 내어 후안을 끌고
한 아가씨의 앞으로 갔다.
아름다운 천을 머리에 쓴 그녀는 싱긋 웃었다.
“어서 오세요, 손님.”
그녀가 능숙하게 타로카드를 펼치며 슈엘을 향해 말한다.
“기가 막히게 잘 듣는 점한번에 20프랑입니다. 저렴하죠?”
“와-!”
생전 처음 점을 봐보는 슈엘의 눈동자는 어린아이처럼 빛났다.
이게 말로만 듣던 카드점이구나.
여자의 앞에 쪼그려 앉아 점보는 방법에 대해 열심히 듣는 슈엘을 보며
후안은 한숨을 내셨다.
...저녀석이 일국의 왕자라고 하면
대체 믿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잠깐의 설명이 끝나고 그녀가 능숙하게 카드를 섞어
기묘한 모양으로 슈엘앞에 놓았다.
“원하시는 카드를 세 개 선택하세요.”
기다렸다는 듯 슈엘이 선택한 카드를 뒤집었고 그녀는 말했다.
“첫번째 카드는 당신에 대한 걸 나타네요.
후후... 아주 귀여운 사람이네요, 당신은.
겉모습과 다른 속마음. 어린아이의 순수함. 무한한 애정. 이라고 나왔어요.”
피식- 쪼그려 앉은 슈엘의 머리위로 후안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와아. 후안님께서 웃으시다니.
슈엘의 마음은 어느새 점보단 후안에게 향해버린다.
여인은 두 번째 카드를 뒤집었다.
“이건 당신의 마음을 나타내죠.
음... 당신은 누군가를 아주 많이 사랑하고 있군요.
보답을 바라지 않는 사랑. 지켜보는 사랑. 한사람을 향한 연정.”
“.... ....”
슈엘이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음속을 들킨 것 같은 당황스러움에 슈엘은
후안의 표정이 차갑게 변한 것은 알아채지 못했다.
“그리고 세 번째 카드. 이건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붉은머리의 사자. 얼음의 심장....”
“으악!!안돼요!!!”
여인도 놀랄 정도로 큰소리로 외치며 슈엘은 휙- 후안의 손을 잡았다.
안돼... 더 이상은.
들켜버린다.
“여기 20프랑이요. 멋진 점을 봐줘서 고마워요!”
여인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북적되는 사람들 틈을 빠르게 걷는 슈엘의 가슴은
어느 때보다 쿵쾅거리고 있었다.
설마, 설마. 알아채신 건 아니겠지.
설마... 들켜버린건...
당황스러움과 부끄러움에 혼란스러운 슈엘을 제자리로 돌려놓은 것은...
차갑게 떨어지는 후안의 손이었다.
그제야 후안의 손을 잡고 걸었다는 걸
깨달은 슈엘의 얼굴은 더더욱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저어. 죄, 죄송해요. 저도....모르게 ... ...”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제야 본 후안의 얼굴에 차가운 기운이
슈엘의 심장을 침식했다.
즐겁...다고 생각했는데.
아주 서툴고 어색한 둘만의 시간이지만
후안님도 분명 즐거우시다고 생각했는데
내 착각이었던 걸까.
이제는 보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 혐오의 눈이다.
차가운 심홍의 눈동자다.
“... ...”
대체 왜? 내가... 뭘...잘못한거야?
제발 그런 표정은 짓지말아요.
아까처럼 사람들도 좀 보고 조금은 웃기도 하고 그래봐요.
바로 옆에 있는 그였지만 아주 먼 거리가 느껴진다.
아까와는 다르다. 심장이 욱신거린다.
무표정한 후안의 입에서 감정 없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재미있었나?”
“예...?”
“그따위 점이 재미있었냐고 물었다. 실실대며 웃는 꼴이라니.”
“.하...하하 제가 그랬나요?”
머리를 긁적이며 웃지만 웃는 게 아니다.
하늘에서 폭죽소리가 울려 퍼졌다.
팡- 커다란 소리... 나지막이 들려온 목소리.
“...이안인가?”
“예?”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후안을 바라봤지만
그는 이미 고개를 돌린 후다.
“축제를 즐기고 싶으면 혼자 즐겨. 이따위 축제, 나는 별로야.”
“저어-”
후안을 향해 손을 뻗어봤지만 타악-하고
아려올정도로 슈엘의 손을 거부한다.
“그 표정은 또 뭐지? 정말 어이가 없군.
설마 네가 여행을 즐기러
너와 함께 왔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뭐 니가 기껏 해줄 일이라고는 밤상대겠지만 그것도 무리겠군.”
-제발 부탁이니까...
“네가 다른 남자를 마음에 품고 있는 더러운 몸이라 걸 잊고 있었어.”
-... 그렇게 말 하지 마세요.
슈엘의 눈동자가 떨려왔다.
떨리는 두 손을 꾸욱 잡았지만 도저히 멈춰지지 않는다.
차가운 심홍의 눈동자에 담겨있는 감정은 분노에 가깝다.
시선을 돌리는 후안을 보며
잠시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슈엘은 재빨리 그의 앞으로 발을 올렸다.
귀찮다는 듯 바라보는 눈동자가 무서웠지만
슈엘은 피하지 않았다.
펑-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함께 밤하늘 가득 빛나는 것은...
보라색의 폭죽.
밤하늘을 빛내는 보랏빛의 제비꽃...
슈엘은 미소를 띄었지만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표정이다.
그 미소에 가슴이 아파 후안이 눈썹을 찡그릴때즘
무언가 부드러운 것이...
후안의 입술을 지나갔다.
“... ...”
아주 짧은 순간.
... 꿈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는 한 순간.
분명... 슈엘의 입술이 자신의 입술을 스쳤다.
부드럽고 작게 떨리는 입술이.
놀란 얼굴로 후안은 슈엘을 바라보았다.
순간 머리끝으로 올라오는 것은 욕망이었다.
이 남자를 가지고 싶다는 욕망.
안아버리고 싶다는 욕망.
아이처럼 울리고 싶은 욕망.
하지만...
[ 당신은 누군가를 아주 많이 사랑하고 있군요. ]
한순간 잊었던 여자의 목소리가 또다시 머릿속을 가득 메운다.
더더욱 화가 난다.
이녀석이 다른 남자를 마음속에 품고 있다는 사실!
후안은 몸을 돌렸다.
펑-
멀어져가는 후안의 뒷모습에서 슈엘은 시선을 떼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찾아버릴 수밖에 없는
자신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후안님. 그거아세요?”
조그맣게 중얼거려본다.
... 후안과 나오기전 여주인에게 들었던 제비꽃축제에 관한 이야기.
[제비꽃축제의 명물은 뭐니 뭐니 해도
제비꽃빛의 보라색 불꽃놀이지.
불꽃아래에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입을 맞추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나?. 후후.]
펑-.
소박하지만 예쁜 보랏빛의 제비꽃이 다시 한번 나타난다.
“제비꽃의 꽃말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는거.”
-그거... ... 아세요?
슈엘은 축제가 끝나고도 한참동안 그 곳에 서 있었다.
괜찮아-
지금쯤이면 화가 풀리셨을 거야...
축제가 끝난 쓸쓸한 밤거리였지만
여관을 향하는 슈엘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방에서 잠을 잔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두근거리기도 하고... 긴장되기도 한 기분.
단하나 확실한 건 이 상황이 기쁘다는 것이다.
이인실인 방한칸을 주문한 것은 다름아닌 후안이었다.
... 각기 다른 방을 쓰지 않고 한방에서
잘 것을 그가 먼저 제안한 것이다.
비록 같은 침대에서 자는 것은 아니지만 그게 어디야.
-기쁘고 설렌다.
자는 척 하며 눈을 감고는 후안님의 잠드신 후에
몰래 일어나 그의 얼굴을 봐야지.
시원하게 뻗은 콧날과 잘생긴 그 얼굴을
한 시간이고...두시간이고... 눈에 담아두어야지.
날이 밝으면 방금 일어난 척하며 후안님을 깨우고...
가슴이 벅찰 만큼 행복한 상상이었다.
하지만.
“... ...어?”
분명...그가 있을 거라 생각했던 방안은 텅 비어 있었다.
침대 두 개만 덜렁 있는 방은 냉기가 느껴질 만큼 추워보였다.
머리가 아찔해지는 느낌이었다.
서둘러 1층으로 내려가 여주인에게 물어보았지만
그녀가 하는 말이라곤
그를 보지 못했다는 말 뿐.
터덕터덕...기운 없는 걸음으로 방에 돌아와 침대에 앉아 생각했다.
“후안님은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으신 거야...”
-바보처럼 당연하게도.
그가 이곳에 있을 줄 알았다.
처음으로 나를 맞는 그의 얼굴을 볼 거라 생각했다.
그런... 바보처럼 행복한 상상을 했었다.
밤이 깊어가도 그는 오지 않았다.
슬픔과 불안감이 마음속을 뒤흔든다.
그가 없다는 상실감과 그가 혹시나
무슨 일을 당한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
생각이 다다르자 가슴이 두근거려 견딜 수가 없다.
슈엘은 짐과 같이 두었던 검을 집어 들고 방을 나섰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다면... 견딜 수가 없어.
그렇게 날이 밝도록 슈엘은 도시구석구석을 다녔다.
피로에 지친 발이 아픔을 호소했지만
그런것따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심장이 터질듯이 두근거린다.
사랑이나 애정이 아닌... 걱정으로. 불안감으로.
미친 듯이 슈엘은
붉은 머리의 남자를 찾아 헤맸던 것이다.
날이 밝자 혹...그가 돌아왔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슈엘은 여관으로 돌아갔고...
아무도 없었던 방의 한쪽 침대엔 그가 누워있었다.
풀썩...
다리에 힘이 풀려 슈엘은 쓰러지듯 바닥에 앉았다.
한동안 자고 있는 그의 얼굴을 보다가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하하...정말 너무하네요.
내가 얼마나 당신을 걱정했는데..
이렇게 자고 있다니.
눈물이 나올까봐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슈엘은
그의 얼굴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 .....”
...그런 슈엘의 눈에 비췬 것은...분명한.
키스마크.
붉은색 키스마크가 후안의 매끈한 목이 선명히 남겨 있었다.
그의 하얀셔츠깃에 뭍어있는 것은
새빨간 루즈자국이었다.
..............뭐야....이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 슈엘은 한동안 굳어 있었다.
다시 한번 잠들어 있는 후안의 얼굴을 보고-
그의 몸에 남아있는 다른 사람의 흔적을 보았다.
“..........................”
격렬한. 질투심.
머리가 아파오고 심장이 아파올정도로
죄여드는 이 감정은
질투였다!
슈엘은 뒷걸음치듯 자신의 침대로 향했다.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듯- 자신의 감정을 에워쌌다.
푹- 이불을 뒤집어쓰고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그날 아침. 후안은 말했다.
“어제. 다른 여자를 안았어.”
그의 차가운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여행 동안 다른 여자를 안을 거라고.
...너는 이름만 반려일 뿐,
밤의 반려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 슈엘은 그저 두 눈을 휘이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울부짖는 심장을 들키지 않으려 애쓰며.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