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25)

<9>

"로빈!! 어서 말해!!"

"... ..."

로빈은 무서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안을 피해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끈질기게 쫓아오는 갈색눈동자. 

급기야 이안이 멱살까지 잡으며 소리를 질렀지만 

로빈은 여전히 묵비권행사였다.

"암살자를 잡으러 후궁으로 들어간 후에 시종한명이 있었지?"

평소엔 상상할 수 없는 필사적인 모습의 이안을 향해 

로빈은 대답했다.

“절대, 말해 줄 수 없어.”

<< 반려로 맞아주세요 >>

이안은 커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리엘이 없어진지 벌써 일주일째... 

슈엘. 그 바보반려가 자기몸 망가지는 것도 상관 않고 미친 듯이 

성안을 헤집고 다닌 것도 일주일째. 

그리고 그 모습이 보기 괴로워 

이렇게 직접 로빈을 찾아온 것이 삼일째였다.

거짓말 못하고 의리 빼면 시체인 로빈 이라지만 

이 로빈이란 자는 너무 강직하여 스스로가 말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은 아무리 친한 친구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 그러나 이안에겐 분명한 확신이 있었다.

바로 사리엘의 실종이 로빈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안. 네 물음에 난 절대 대답하지 않을 거야.

내가 말하는 그 시종에 관해선 황제폐하께도 보고하지 않은 상태라고. 

폐하께도 말씀드리지 않은 걸 내게 말한다면, 

나는 폐하를 배신하는 셈이 되니까!”

로빈의 남색눈동자가 단호히 빛난다. 

하- 내가 가장 좋아하기도...싫어하기도 하는 너의 눈빛이다, 그건. 

이안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형을 찾아야 해요. ...찾아야 해요...' 

같은 말만 되내이며 엉망이 되어선 돌아다니는 슈엘을 떠올리자 

도저히 요리조리 따질 상황이 아니다, 가 결론. 

"로빈. 정말 안 되겠냐?“

“안돼.”

“그 녀석이 내 연인이라 해도?”

"... ...라니. 이안 그 녀석, 사람 뒤통수를 때려도 유분수지."

로빈은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누워있는 

금발의 아름다운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얼굴이라니.

기껏 시종의 신분으로 천하의 바람둥이 이안과 사귄다는게 

전혀 이상해보이지 않을정도라구.

이안의 연인이란 이자는 일주일째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암살자의 검에 뭍혀있던 독- 

황제를 노린 것 답게 매우 귀하고도 독한 독이라 했다. 

그런 독을 맞고도 움직였다는 것, 

아니 이렇게 살아있는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그 독에 대한 내성이 없다면 말이지."

의사의 말을 따르자면 이 금발사내는 

독에 대한 내성이 있는 것이 틀림이 없었다. 

들어가는 재료조차 고가인 독에 대한 내성을 갖고 있는 것은 

귀족계층의 사람들뿐이다. 

눈에 띄는 아름다운 외모. 

냉정한 성격과 검술... 

그리고 이안의 연인. 

... 대체 넌 누구지...?

그때였다. 

오랫동안 감겨있던 녹색 눈동자가 보인 건. 

놀란 눈의 로빈을 향해 나지막이 빛나는 눈동자. 

사리엘은 눈동자를 돌려 시야를 확보했다. 

낯선 방의 풍경. 

... 내가 왜 여기 누워있는 거지. 

...그리고 저 은색머리카락을 보는 순간 사리엘의

두 눈이 번뜩였다.

로빈·레이크!!

벌써 며칠이나 정신을 잃었던 거야?!

사리엘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까만 눈동자의 동생이었다. 

슈엘---!

“내가 정신을 잃은 지 얼마나 지난 거죠?!”

어울리지 않는 다급한 목소리. 

로빈이 놀라 대답했다.

“일주일...”

“!!!”

눈에 띄게 놀라는 사리엘의 표정에 로빈은 당혹스러웠다.

뭐야 대체 저 얼굴은... 

검하나로 사람을 거의 죽여 놓을 때조차도. 

아무표정이 없었잖아...

로빈의 대답을 듣는 순간 사리엘이 몸을 일으켰다.

어지러움과 상처의 통증이 느껴졌지만 사리엘은 이를 악물었다.

그 모습에 놀란 얼굴로 로빈은 입을 벌렸다.

“이, 이봐! 너 대체 무슨짓이야! 아직 움직이면 안돼!!”

“... 돌아가겠어요.”

“어이-!”

로빈이 다급히 사리엘을 붙잡았다.

아아- 정말 대책 없는 녀석이다.

이렇게 예쁜 얼굴을 해가지곤 엄청난 고집불통이로구만.

억지로 사리엘을 잡아 침대에 눕히며 로빈이 말했다.

“-이안을 불러줄게! ”

“... ?”

“너 이안의 연인이라며. 

녀석을 불러올테니 좀 가만히 있어...이, 왕고집쟁이야!“

******

“... ...”

눈을 뜨고 싶지 않아... 

슈엘은 마음깊이 중얼거렸다. 

욱신거리는 허리의 아픔이라던가, 거칠게 안긴 상처 때문이 아니다.

... 외로움이 무섭다. 

눈을 뜨면 또 이 추운 방엔 분명 나 혼자일 테지. 

그러나 일어나야한다. 

아무리 상처받아도 일어나고 일어나는 것이 슈엘이니까. 

나, 슈엘의 유일한 장점이니까. 

어젯밤의 정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몸을 일으킨다. 

천천히 내비친 슈엘의 까만 눈동자 속에 

놀라운 감정이 가득했다.

“어..어어?”

이해할 수. 

없는 상황.

... 슈엘의 두 손에 붕대가 감겨 있었다. 

능숙한 것은 아니지만... 

분명 정성들여 감은 듯한 붕대. 

약초도 바른 것인지 싸한 느낌이 

붕대 안에 가득하다는 것을 그제야 느낀다.   

-그럴 리가 없어. 

하지만- 

하지만- 

그 사람밖엔 없잖아. 

... 이런 생각쯤은 해도 되는 거잖아..

붕대가 가득감긴 손으로 슈엘은 얼굴을 감쌌다. 

이상해지는 표정을 가리기 위함이다. 

단단히 감긴 붕대로 축축한 물기가 번진다. 

형의 일도 해결되지 않았는데 

이런 걸로 울어서 어쩌자는 거야-

물기 머금은 손을 내려 가만히 앉아 마음깊이 붕대감긴 손을 담아둔다. 

태양과 같은 그의 향기가 남아있을것 같아. 

빨갛게 부어오른 눈을 비비며 

슈엘은 생긋이 웃었다. 

역시 안돼...

당신이 내게 어떤 상처를 줘도 난

... 당신을 미워할 수가 없어요. 

이런 작은 것 하나에 

당신이 준 아픔의 열배를 치유 받아요.

... 나는 역시 당신을. 사랑해요.

붕대를 감은 두 손을 꽈악 쥐어본다. 

밤새 비가 온 것인지 유달리 밝은 햇빛을 바라보며 말한다.

“형 미안해. 

후안님께 안기는 순간은 잠시 형을 잊었어. 

... 용서해줄거지? 

이제부터는 정말 형생각만 할 테니까. 

형만 찾을 테니까.”

슈엘은 문을 나섰고, 후궁을 향해 오고 있는 

이안과 마주친 것은 금방이었다. 

일주일을 같이 찾아주었던 감사한 사람. 

기운은 없지만 힘차게. 슈엘은 손을 흔들었다.

“이안님-.”

“희소식이야, 반려님!”

“예?”

가슴의. 떨림.

일주일간 어두웠던 이안의 표정이 밝아져 있다. 

밝게 빛나는 얼굴은 햇빛 때문만은 아니다. 

이안의 갈색 눈동자가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찾았어, 사리엘을.”

“... ...”

슈엘의 걸음이 멈추었다. 

한발작.. 두발작 멈춘 슈엘은 우뚝이 서서 이안을 바라보았다. 

... ...까만 눈동자에 눈물이 고이는가 싶더니 곱게 휘인다.

“아아... 형을... 찾았군요.”

그 모습에 이안은 놀란 눈으로 슈엘을 바라보았다. 

... 뭐냐, 이 바보왕자.... 그런 표정은, 

반칙이라고...

했잖아. 

언제나 자신을 놀라게하는 표정을 너무도 쉽게 보인다, 

알스의 바보반려는. 

언제나 예상할 수 없는 반응을 보인다.

울며불며 소리치며 좋아할 줄 알았는데... 

저런 미소를 보자 가슴이 설렌다.

“...여기야 슈엘.”

일주일동안 그렇게나 듣고 싶었던 목소리.

슈엘의 고개가 느릿하게 돌려졌다. 

이안에 뒤에서 짙은 녹색의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에게서

낯익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슈엘의 동그랗게 뜬 눈동자위로 익숙한 얼굴이 비춰졌다. 

오늘처럼 고운 햇빛과 가장 잘 어울리는 

금빛의 머리카락.

... 나무보다 푸른 녹색의 눈동자. 

슈엘의 입이 형- 이라고 외치기도 전에 

다리가 먼저 그를 향하고 있었다. 

만나면 크게 외치고자 했던 것이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슈엘은 가는 몸을 와락 껴안았다. 

슈엘의 품속에 있는 몸이 이전보다 가늘어졌다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아팠지만 지금만큼은 이 손안에 

사리엘이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슈엘의 눈에 그제야 눈물이 고였다. 

커다란 입은 연신 미소가 떠날 줄 몰랐다. 

아이 같은 모습... 

스스로의 사랑을 찾아 떠난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는 애정. 

슈엘의 온기를 느껴서야 사리엘은 웃을 수 있었다.

슈엘 나를 찾아준거니... 

나는 아직은 너의 아주 소중한 사람 중 한명인거니...  

이런 기쁨은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다. 

이제는 어른이 돼버렸지만 

여전히 나에게만큼은 어리고 작은. 동생. 

나의 슈... 

사리엘의 손이 슈엘의 등을 껴안았다,

“미안해 슈엘. 널 걱정시켰구나.”

“.... 괜찮아. 괜찮아...”

이렇게 무사히 돌아와준것만으로도. 

그것만으로도...

******

“형. 미안...”

풀죽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슈엘에게 사리엘은 미소 지었다.

간단한 짐을 싼 가방을 묶으며 까만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슈, 몇 번을 말해야 알겠어.

난 니가 행복하다면 그걸로 족하다니까.“

“... ....”

부드럽고 다정한 형의 말에 슈의 얼굴은 더더욱 시무룩해졌다.

기껏 성으로 돌아온 사리엘이 짐을 싸서

도망치듯 몰래 나가는 건 모두 자신 때문이었으니까.

[이대로 다시 성으로 들어오게 된다면, 

분명 형님께 그 모습을 들킬 거야.]

이안의 말을 듣는 순간 슈엘의 가슴은 내려앉았다.

그의 말이...맞았다.

알스의 시종이 사라졌다는 건 온 성에 퍼져있었다.

그 시종이 돌아왔다는 소식은 후안님의 귀에도 들어갈 테고

후안님께 형의 얼굴이 드러나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래서 내린 결정이 사리엘이 잠시 슈엘의 곁을 떠나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디에 있게 되는건데?”

“레이크 백작가. 로빈·레이크란자가 이안의 절친한 친구래.”

“... 그 분, 좋은 사람이인거지?”

슈엘의 물음에 사리엘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내 떠오르는 남색 눈동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걱정마. 아주 정직한 눈을 가진 사람이니까.”

슈엘은 꼬옥 사리엘을 안았다. 

짧은 포옹이 끝나고 사리엘은 슈엘에게서 떨어졌다.

은밀히 성을 나가는 일이라 슈엘은 멀리 나갈 수 없었다.

“힘들면 이안님께 말해서라도 다시 돌아와, 형.”

“-응.”

넓은 방 안에 홀로 서서 억지로 미소를 짓는 동생을 바라보며 

사리엘은 겨우겨우 문을 닫았다.

문을 닫고 사리엘은 작게 한숨을 내 쉬었다.

이젠... 매일 볼 수 없겠구나.

분명 예상했던 일이었다.

얼굴을 가리고 시종을 가장한 속임수는 오래가지 않을거라는건

언젠간 이 커다랗고 외로운 성에 슈엘을 혼자 두고

떠나야 한 다는걸.

사리엘의 발걸음이 무겁게 옮겨졌다.

다시 저 문을 열고 동생에게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걸음을 내딛었다.

그런 사리엘의 앞, 저 멀리에 누군가 보였다.

어두운 밤이라 정확히 보이진 않았지만 

빨간 머리카락만큼은 선명히 보였다.

자신을 마중 나온 이안인가 싶어 사리엘은 작게 소리를 내뱉었다.

“여기야!.”

검은 그림자가 대답했다.

“거기 있는 건 누구지?”

“!!!!!!!!!!!!!”

순간 사리엘의 녹색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 닮았지만 이안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더 낮고- 더 위엄 있는 목소리.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들린 건 분명

황제의. 목소리였다.

어쩌지?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너무도 어두운 밤이라 아직 정확히 서로가 보이진 않았지만

황제는 점점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섣불리 도망쳤다간 의심받을지도 모를 일이다.

게다가 얼굴을 가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언제나 냉정히 빛났던 사리엘의 눈동자가 떨려왔다.

저벅 저벅.

점점 다가오는 황제의 걸음소리.

그리고 그 순간 구름 속에 가려져 있던 달빛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사리엘의 발과 손.

그리고 하얀 옷이 달빛에 비추는 순간-

“!!!!!!”

사리엘의 앞에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그는 사리엘을 끌어 안았다.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는 순간 그의 입술이

사리엘의 입술에 닿았다.

구름을 빠져나온 달빛에

반짝이는

은빛의...머리카락.

로빈···레이크?!!!!!

사리엘이 밀칠 틈도 없이 닿은 그의 입술.

놀란 얼굴로 로빈을 바라보니 그의 눈동자 또한

긴장에 가득 차 있었다.

“... 로빈?”

사리엘과 로빈의 곁으로 다가온 후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안이 가까이 다가오자 로빈은 그제야 자신의 입술을

사리엘에게서 떼었다.

그러나 여전히 사리엘을 자신의 품에 꼬옥 안으며 그는 후안을 바라보았다.

“왓! 황제폐하!!!”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가. 돌아간 게 아니었나?”

“아, 물론 돌아가야죠! 

그런데 요 작은~~ 악마가 절 유혹하는 바람에.“

커다란 덩치의 로빈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금빛의 머리카락이나 얇고 하얀 손목만큼은 보였다.

... 성에서 일하는 시녀인가-.

“자네에게 그런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군.”

“하..하하하..”

별안간 성안의 시녀와 노는 남자로 전락한 

로빈은 식은땀을 흘리며 하하 웃었다.

그의 얼굴에 피식 웃으며 후안은 고개를 돌렸다.

“이상한 소문은 돌지 않게 즐기도록 하게.”

“...네, 네에~ 폐하도 부디 안녕히 들어가시길.”

이상한 소문이라뇨!

라고 소리치고 싶은걸 겨우겨우 참으며 로빈은 후안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후안의 모습이 사라져서야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까지 안고 있을 셈이죠?”

“으왓!!!”

그제야 로빈이 황급히 사리엘을 안은 손을 풀었다.

로빈의 품에 안겨있었던 사리엘이

그제야 자유가 된 몸을 움직이며 말했다.

“왜... 거짓말을 한거죠?”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사리엘은 이 자에 대해 아는 것이 있다.

바로 너무도 정직하며

자신의 주군에게 충성을 다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어째서..

거짓말을 한거야.

얼음같이 차가운 녹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로빈은

얼굴을 긁적였다.

“-폐하껜 너무너무 죄송하고 송구스럽지만...”

“... ....”

“네가 폐하껜 절대 그 모습을 보여선 안됐다고 했잖아.”

“... ...”

입꼬리를 올리며 그가 말했다.

“맹세하지 않았던가? 널 결코 폐하께 보이지 않겠다고-.“

“... ...”

그 순간 사리엘은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어째서 방금

심장이.. 두근거린 거지?

빙긋이 웃으며 로빈은 사리엘에게 손짓했다.

“지금 몰래 성을 나오는 중이잖아? 어서가자.”

바람이 불었다.

봄이 온 제국이었지만 여전히 밤바람은 차가웠다.

로빈의 안내로 두 사람은 인적이 드문 성의 길을 걷고 있었다.

인적이 드문 그곳에 길을 밝히는 등같은건 없었다.

다만 환한 달빛만이 길을 비추었다.

길을 걷던 로빈이 앗차- 하는 표정으로 사리엘을 바라보았다.

“으악. 그러보니 나, 실수한거지?”

“네?”

“저기 리엘, 너..이안의 연인이잖아.”

그래, 그에겐 거짓말을 했었다.

알스의왕자라는걸 들키면 얘기가 복잡해지므로.

내 이름은 리엘이며 이안의 애인이라고.

그는 정직한 마음만큼이나 쉽게 친구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였었다.

“키스를 말하는 거라면 신경쓰지 마요.

날 도와주려고 한 일이잖아요.”

“헤-헤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지만-”

순간 아이 같던 남색의 눈동자가 진지하게 바뀌었다.

그 눈동자에 사리엘의 가슴이 또 한번 두근거릴 때

그가 말했다.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은 또, 그렇지 않잖아.”

“... ....”

“좋아하는 사람에게 다른 사람이 입을 맞췄다면 화가날거야. 

아무리 이안 녀석이라해도.“

“... ....”

환한 달빛 속에 속삭이듯 말하는 그의 얼굴은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가볍고 쾌활하고 아이 같은 그와도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던 그와도 다른 얼굴이었다.

사리엘은 저런 눈동자를 또 하나 알고 있었다.

따뜻하고 그리고 

또 아픔을 간직한 저런 눈동자.

-꼭 닮아있어.

슈의 눈동자와.

“사랑을... 하고 있군요.”

“에엥?”

헉- 하고 놀란 얼굴로 로빈은 사리엘을 바라보았다.

정곡을 찔린 얼굴로 얼굴이 빨개진 로빈은

주위를 둘러보며 사리엘에게 속삭였다.

“어떻게 알았어?! 이안이 말해준거야?!”

진지한 눈동자.

...비밀이었던 건가.

“아니요. 그냥... 알 수 있어요.

사랑에 빠진 남자는. 

눈빛부터가 다르니까.”

사리엘의 대답에 이안의 눈동자가 놀란 듯 동그랗게 떠졌다.

헤에- 참 신기한 능력을 가지고 있네, 이 녀석.

부끄럽다는 얼굴로 로빈은 사리엘을 바라보았다.

“하하, 들켜버렸네! 에에~ 거참.”

“... ...”

머리를 긁적이며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한참 후 그답지 않게 조그만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예쁜 여자야.”

“... ...”

“말 많고 손 맵고 날 부려먹는데 이골이 난 여자인데

그 애가 너무 예뻐 보여서 미치겠어.“

“... 많이. 좋아하고 있군요.”

사리엘의 말에 로빈의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남색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였다.

“응. 짝사랑이지만... 아주 많이. 사랑하고 있어.”

그가 반짝반짝 빛난다고 생각되는 건.

달빛에 비취는.. 은빛의 머리카락때문인걸까.

부드럽게 웃는 그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이유를

사리엘은 알 수 없었다.

******

“어젯밤은 즐겁게 보냈는가, 로빈경.”

막 입궁한 로빈에게 후안이 뱉은 말이었다.  

헉- 하고 빨개진 얼굴로 로빈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하하하-! 비,비밀입니다. 폐하!!”

황제를 지킬 때의 날카로운 눈은 사라지고 당황해하는 얼굴에

후안은 웃음이 나왔다.

부드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후안을 향해 로빈이 말했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응?”

“축제기간 내내 어두운 표정이시더니 오늘은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후안은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축제기간동안 쌓인 갖가지 서류더미를 읽어 내려가던 후안은 

완료된 서류를 검토하던 로빈을 바라보았다.

“로빈경, 축제 첫 날. 내 반려를 보았었지.”

“아, 네에.”

“... 어땠었나.”

어땠었냐라-.

봤다고는 하나 슈엘님이 나오신 건 축제 첫 날 뿐이다.

그간 사라진 시종을 찾아 들었으니...

뭐, 지금에야 대충 일이 해결되었지만.

“폐하의 옆자리가 잘 어울리는 아주 멋진 분이더군요. ”

뭐, 폐하의 취향과는 360도 다른 분이라 놀라긴 했지만요. 

“흠... 그래...”

뭘까. 

날카로운 심홍의 눈동자가 부드럽게 풀어져 보이는 건 

내 착각인걸까. 

“그나저나 폐하, 잊지 않으셨겠죠? 올해는 지방순례의 해입니다.”

“음? 아아 그랬지.”

깜빡 잊고 있었다는 말투...지만 도저히 로빈이 뭐라 말할 수 없는 것이 

그 조차도 깜빡 잊고 있었다. 

여러 가지 사건들 덕분에... 말이지.

4년마다 있는 지방순례의 해. 

황제가 직접 자신의 영토를 둘러보고 오는 시기였다. 

역대의 몇몇 황제들은 순례랍시고 

지방영주들에게서 푸짐한 대접을 즐기는 여행쯤으로 즐기기도 했지만 

후안에게 이것은 엄연한 황제로서의 임무였다. 

이전의 순례에서 후안은 정체를 숨기고 백성들이 사는 모습을 둘러보았다. 

지방 영주에게는 따로 들러 여행을 위한 보조품을 지급받을 뿐이었다.

이번 해에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물론 폐하의 호위기사로 제가 동행합니다.”

“... ...”

후안은 잠시 아무 말 않고 생각에 빠졌다. 

지난번에는 자신과 로빈 둘만 여행을 떠났었다. 

4년마다 돌아오긴 해도 정확한 시기를 밝히지 않는 순례이기에 

은밀히 떠났다 돌아와야만 했다. 

하지만-

“로빈, 경은 여기에서 성을 지키도록.”

“예?”

입이 떡 벌어진 로빈을 향해 후안은 무뚝뚝이 툭 내뱉었다.

“같이 갈 사람이 있어.”

“예에에?”

“나의 반려다. ... 이번 지방순례는 녀석과 둘이 가겠어.”

“으아앗! 이럴 순 없다구요, 폐하!”

로빈이 소리를 치며 저택의 문을 열었지만 그를 맞는 사람은 없었다.

일을 끝내고 들어오는 주인을 맞는 것이 하인들의 예의겠지만 

로빈백작가에 그런 예의는 존재하지 않았다. 

새벽 늦게 들어오는 것이 태반인 로빈인지라

주인이 들어와도 누구하나 깨는 사람이 없었다.

‘일찍 일어나고 일찍 자자’라는 구호가 하인들에게 교육되었기 때문이었다.

(주인의 생활패턴은 간단히 무시한 채)

쿵쾅쿵쾅, 중얼거리며 2층계단을 올라가던 

로빈의 눈앞에 나타난 건 의외의 인물이었다. 

“이 새벽녘에 너무 시끄럽군요.”

“!!!”

며칠 전까진 저택에 존재하지 않았던 낯선 금발.

아아아아~ 그렇지. 

저 녀석이 있었다.

“뭐얏-공짜로 먹여주고 재워주고 도움까지 주는 사람한테 

그렇게 밖에 말 못해, 리엘?”

“그거랑 이거랑은 별개예요.”

리엘. 

바로 멀고먼 알스에서 왕자를 모시고 온 시종이자

자신의 친구인 이안의 애인이었다.

며칠 간 동거(?)를 하며 알아낸 것이 있는데 그건 바로

저 금발의 미인은 천사 같은 외모와 어울리지 않게 

엄청나게 얼음같다라는 것이다!

“알았어, 어쨌건 미안해, 미안하다구~! 

이제 조용히 할 테니 다시 들어가서 주무시지요, 리엘님~.”

“잠은 벌써 다 깼어요.”

낮게 깔리는 목소리. 

눈을 껌뻑이고 자세히 사리엘을 보자 그의 손에 들린 것은 그의 얇은 검이었다. 

“뭐야, 아직 새벽인데...?”

“아직 새벽이 아니라 이제 곧 아침이죠.”

사리엘에 대꾸하며 로빈을 지나쳤다. 

헤에... 재미있겠는걸. 

밤새도록 계속된 일의 피로도, 후안의 충격적인 선포도 잠시 잊혀진 체 

로빈은 사리엘을 따라 나섰다.

쉬익- 쉬이이익- 

날카로운 검소리가 바람을 갈랐다. 

아직은 보랏빛 짙은 새볔하늘속에 은색의 검 날이 빛났다. 

은빛의 달빛 속에서 검을 휘두르는 사리엘의 모습은 마치 

춤을 추듯 아름다웠다. 

요정처럼 빛나는 금빛의 머리카락이 

사리엘의 움직임에 맞춰 흔들렸다. 

정원의자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는 로빈의 눈이 반짝였다.

“정말... 아름답군.”

많은 사람을 보았다고 생각했지만... 

저런 남자는 처음이었다. 

여인보다도 연약하게 생겼는데 

그 안엔 무서울 정도의 강함을 감추고 있다. 

엄청난 매력이야-.

로빈은 허리춤에서 자신의 검을 꺼냈다. 

묵직한 중형 검으로, 레이크 가문의 문장이 세공된 로빈의 애검이었다.

“이봐 리엘, 어때? 나랑 검을 주고받는 건?”

어린아이처럼 환히 웃는다. 

... 그 얼굴에 순간 슈엘의 모습이 겹쳐졌지만 사리엘은 고개를 흔들었다.

가까이 다가온 로빈에게 사리엘은 고개를 돌렸다.

“아뇨. 타인과 검을 주고 받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엣? 왜에에에에! 

그걸 좋아하지 않으면 대체 뭐가 좋단 말야?! 

혼자 휘두르며 연습하는 건... 재미없잖아?!”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 

그러나 사리엘의 표정은 단호했다.

... ‘지키기 위한’검이었다. 

힘없는 나를. 

그리고 내 힘이 필요할 슈를 위해 배운 검이다. 

... 검이 맞닿는 것에서 오는 즐거움은 애초에 없어. 

묵묵히 입을 다문 사리엘의 표정에서 로빈은 완고한 거절을 읽었다. 

잠시 머리를 굴리던 로빈이 아하~ 외치며 주먹을 쥐었다.

“나 사실 아주 중대한 이야기를 들었거든. 

바로 폐하와 슈엘님의 이야기야.”

“?!”

빙고-. 

무관심하던 녹색 눈동자이 이내 집중을 한다. 

확실히 시종이라 그런지 리엘은 슈엘님께 굉장히 약하다. 

하핫 미안미안. 

너의 약점을 잡아버려서. 그치만-

“꼭 너와 대련해보고싶어. ...네가 이기면 알려줄게. 어때?”

눈썹을 찡그리며 사리엘은 로빈을 바라보았고,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기다렸다는 듯 로빈 역시 두 손으로 검을 빼들었다.

챵-

로빈의 칼날과 사리엘의 칼날이 잠시간 맞부딪치며

작은 인사를 나눴다.

검을 통해 전해오는 날카로움을 느끼며 로빈은 말했다.

“그럼- 알스의 검객 리엘님. 잘 부탁해~!!”

아침이 밝아오는 로빈가의 정원에 금속음의 소리가 가득했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이미 동이 터오고 저택안의 불이 켜지고 있었다. 

아침햇빛에 두남자의 땀방울이 반짝거렸다.

“하아...하아...”

사리엘은 거친 숨을 내쉬며 로빈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새빨개진 로빈 역시 힘들 테지만 그는 즐거워 죽겠다는 듯 

얄미운 미소를 가득 띠고 있었다. 

다시 한번 로빈의 검이 저돌적으로 공격해왔고 

사리엘은 가볍게 몸을 피해 그의 검을 피했다. 

힘들어진 호흡과 점점 아파오는 손. 

감각을 잃어가는 팔. 

...심장이 거칠게 뛰고 있었다. 

그런데 이 감정은 뭐지. 

이렇게 힘든데 

왜 이렇게...

“헤에- 멋진 공격인데?"

-즐거운 거지?

사리엘의 검을 피하며 로빈이 내뱉는다. 

두눈을 동그랗게 뜬 채 어린아이처럼 소리 지른다. 

... 약속이라도 한 듯 로빈의 공격이 들어온다. 

그의 검을 막기 위해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

챠앙-

분명 로빈의 검을 막았지만 사리엘은 풀썩 쓰러져 버렸다. 

그의 손에서 빠진 검은 바닥을 나뒹굴었다. 

배를 잡고 이를 악무는 사리엘을 보고서야 

로빈은 잊고 있었던 사실을 깨달았다.

“으와앗 미안, 미안해!!”

아주 조금만 검을 겨룬 후 그만 둘 생각이었다. 

아직 상처가 낫지 않은 녀석이었으니까.

다만 너무 즐거운 기분이 잊어버리고 만 것이다. 

로빈·레이크! 

상처가 다낫지 않은 녀석을 상대로 이게 무슨 실수냐!! 

“괜찮아?!”

“나에게 물을 시간에 약이나 가져다주겠어요?”

“아, 응. 조금만 기다려!”

로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재빨리 저택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눈 깜짝할 새 상자를 들고 나오는 로빈의 모습에 사리엘은 기가 찼다.

한숨도 못잔 주제에 몇 시간씩 대련을 하고... 

저렇게 기운 넘치게 뛰어다니다니.

...정말. 괴물 같은..남자잖아...

“으윽...상처가 또 벌어졌네.

이봐, 나도 바보지만 너는 더 바보야. 

대체 왜 아프다고 말하지 않은 거야!”

“...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았어요.”

... 실은 잊고 있었다. 

상처의 통증 따윈 잊고 검을 휘둘렀다. 

... 그런 적은 처음이야. ...정말로.... 

붕대를 감아주는 로빈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사리엘은 감탄했다. 

햇빛에 반사되어 빛나는 은발이 유난히 아름답다. 

흔한 머리색인데도 

이렇게 “은”빛으로 반짝이는 머리카락은 보기가 어렵지...

은색의 반짝임에 빠진 사리엘을 현실로 되돌려놓은 것은 

로빈의 뜻밖의 질문이었다.

“....리엘... 알스의 남자들은 다 그래?”

“예?”

“다들 너나 반려님처럼 그렇게 빛나?”

그의 질문에 녹색 눈동자가 멍하니 로빈을 바라보았다.

“슈엘...왕자님의 경우는 특별해요. 

너무나 맑고 순수해서 언제나 예쁘게 빛나죠.”

슈엘을 생각하며 사리엘의 눈은 부드럽게 휘었다. 

... 처음본 사리엘의 미소에 로빈은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너무 예쁜 얼굴이라 그런가.

-가슴이 두근거리잖아.

“.... 그럼 너는?”

“....나는... ”

잠시 말을 멈춘 리엘이 입을 열었다.

“...빛나지 않아요. 

우연히 타인이 원하는 외모를 갖고 태어났을 뿐이지

나에게... 반짝임은 없어요.”

쓸쓸한 말투... 

고개를 숙인 사리엘의 귀에 활기찬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 온갖 고상한 표정은 다지으면서 바보로구만.”

“...?”

“누가 네 외모를 말했어? ”

봄의 햇살이 정원에 가득 찼다. 

유난히 큰 그의 목소리가 선명히 들려왔다.

“-금빛 머리카락이 아니더라도, 

네가 말하는 그런 외모가 아니더라도, 너는.

충분히 빛나고 있어.“

... ...

아주 단순하고 솔직할 뿐인 말. 

그저 가볍게 지나갈 수도 있는 말... 

그래서 누구도. 

나에게 해주지 않았던 말. 

따뜻한 말로 위로 받는 기분이다.

...  사리엘의 시선이 한동안 로빈에게 멈추었다.

사리엘의 가슴은 생전 느껴본적없는 두근거림으로 가득 찼다. 

그때였다.

조용한 정원 가득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로빈! 어디있는거야~?!”

-명랑하고 쾌할한 소녀의 목소리.

그 순간 로빈의 표정이 바뀌었다.

순식간에 변한 환한 표정으로 로빈이 일어섰다.

“로즈?!”

커다란 나무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소리의 주인은

저 멀리서 대답했다.

“오랜만에 아침을 얻어먹으려 왔는데, 어디있는거야, 대체!”

그녀의 말에 로빈은 웃었다.

키가 작은 그녀는 큰 나무가 많은 이 정원을 싫어했다.

장난스런 미소를 지으며 로빈은 외쳤다.

“하하, 거기서 기다려! 내가 갈 테니까.”

로빈의 눈매며 입가엔 미소가 가득했다.

...반가움의 미소. 

사랑을 하는 남자의 얼굴.

“미안, 리엘. 반려님의 얘기는 나중에 해줄게.”

사리엘은 황급히 달려 나가는 로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말하지 않아도 알겠다.

‘ 로즈. ’

그가 마음에 품고 있는 소녀다.

이상하게 가슴이 아파왔다. 

사리엘은 고개를 숙여 그가 감겨준 붕대를 바라보았다.

“... 내가 아냐.... ”

-빛나는 건... 당신이야... 로빈.

******

“와- 날씨가 정말 좋은데?”

이제 완연한 봄이다. 

봄바람을 느끼며 슈엘은 춤을 추듯 흥겹게

후안의 방을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봄을 맞은 몸과 달리 마음만은 여전히 복잡한 겨울이었다.

아아. 도대체 벌써 얼마 만에 가는 거지... 

매일 아침마다 인사하자고 결심한 것이 무색할지경이다. 

이렇게 띄엄띄엄 그의 방에 가는 것은.

...매일매일 꾸준히 가도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은데 

이렇게 가끔가다간 두근거림이 몰려와서 

기절할지도 몰라.

후안의 방문 앞에서 잠시 멈춰 슈엘은 창가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 그리고 크게 한숨을 내쉰다. 

어제 하루 종일 연습했잖아.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게 인사할 수 있어. 

뻔뻔한 얼굴로 인사하고, 선물을 드리고

웃을 수 있어.

하늘의 구름을 향해 입꼬리를 올려본다. 

하루에 수백 번 수천 번을 하는 미소짓기 연습.

...웃는 것 빼면 시체인 슈엘이지만,

후안 앞에서 자연스럽게 웃기위해선 연습이 필요하다. 

아무리 심장이 고장난 듯 쿵쾅거려도- 

눈물이 떨어질듯 고여 와도 

웃을 수 있는. 

... 나를 만들기 위해.

슈엘은 문고리를 잡고 돌렸다. 

그리고 슈엘의 눈에 비췬 것은... 의자에 앉아 잠들어 있는 후안이었다.

“...후안...님?”

이런 모습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의자에 앉아 불편한 자세로 책상위에 몸을 기댄 모습은 

당당히 앉아있던 그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 책상위에 쌓여있는 많은 양의 종이를 보자 

슈엘은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 일을 하시느냐 밤을...새신거구나... 

촛불이 켜져 있는 것으로 보아 새벽녘에 잠이 들어버린 모양이다.

후- 하고 불을 끄며 슈엘은 슬며시 후안을 바라보았다.

.... 저렇게 곤히 자는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다. 

... 슈엘은 후안의 건너편 의자에 앉아 턱을 괴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슈엘은 조금 더 자세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차갑게 빛나던 눈동자가 보이지 않는 눈가가 

피곤해보이는것이 안쓰럽다. 

날카로운 콧날을 따라 내려가면 보이는 예쁜 입술. 

후후... 예쁜 입술이라, 

후안님께 이런 말을 한다면 화를 내시겠지...

그렇게 한참을 후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몇 번을... 몇 십번을... 보아도 질리지 않을얼굴. 

아마도 수천 번을 보아도 나를 

두근거리게 할. 얼굴. 

“... 지금. 뭐하는 거지?”

방실방실 웃던 슈엘이 놀란 얼굴이 되어 후안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보이지 않았던 심홍의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고 있자 

슈엘은 앗차- 싶어 입을 벌렸다.

얼굴은 새빨개져선 말조차 횡설수설로 튀어나온다.

“그러니까 이시간때면 일어나계실줄 알고 들어온 건데... 

너무 곤히 자고계시니까 깨우기가 힘들어서, 

아니, 그게.. 그렇다고 절대 안 깨우려고 한건 아니고요.”

“... ...”

슈엘의 놀란 모습에 후안은 피식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 놀랄 사람은 네가 아니라도 바로 나야.

... 뭐가 그리 당황스러운 거지? 

이전 같았으면 자는 모습을 보는 것에 화냈을 후안이 

인상 쓰지 않는 것에 다행스러워하며 슈엘은 입을 열었다.

“어쨌건. -좋은 아침...입니다. 후안님.”

“... ....”

대답이 없자 다시 한번 슈엘의 입이 움직인다. 

이번엔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 좋은 아침 이지요? 』

“... ...”

생긋이 웃는 표정. 

하지만... 뒤로 숨긴 붕대속의 두 손엔 땀이 가득이다.

슈엘은 자신을 바라보는 날카로운 시선을 피하는 법이 없었다.

피할 리가 없잖아. 날 바라봐주는 시선을... 

잠시의 정적 후에 후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좋은... 아침이로군.”

“.... ...”

슈엘의 표정이 살짝 바뀌었지만 후안은 눈치 채지 못했다. 

생긋이 웃는 표정이 이내 흔들리고 

눈가가 아주 미묘하게 빨게졌다는것은 눈치 채지 못했다.

“예...정말로 좋은 아침 이예요.”

활짝 웃으며 슈엘은 신난다는 듯 

허리에 메여있던 주머니를 조심히 꺼내들었다. 

후안에게 줄 선물이 담겨있는 빨간색 주머니. 

“이번에도 꽤 묵직해요. 또...밀려버려서. 

헤헷... 매일매일 잊지 않고 드리려고 했는데 자꾸 이렇게 되네요.”

후안의 앞에 조심스레 주머니를 가져다 놓는 

슈엘의 손이 작게 떨린다. 

선물을 드렸으니 이제 나가야 하지... 

하지만 조금만. 조금만 더 보고 싶어. 

조금만 더 후안의 얼굴을...보고 싶어... 

문 앞에 서서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슈엘의 시선에 

후안은 당혹스러웠다. 

할말이 생각나지 않아 입을 꾹 다물고 있는데 

이내 슈엘이 문고리를 잡고는 고개를 숙인다.

“그럼 저는 가볼게요, 푹 쉬세요...”

슈엘이 문고리를 돌리는 순간, 후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낮게-. 

그러나 다급히.

“몸은...괜찮나?”

“예? 그럼요. 후안님 덕분에 다 나았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기쁜 표정을 지으며 슈엘은 두 손을 들어올렸다. 

붕대가 감긴 손을 보며 후안은 

손이 아니라... 네 몸을 말하는 거다... 라고 작게 내뱉었지만 

슈엘은 듣지 못했다.

후안은 걱정이 되었다. 

로빈과 밤새 서류를 보는 와중에도 그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 탄탄하고 매혹적이던 남자의 몸이. 

자신의 밑에서 울부짖는 얼굴이.

...그리고 자신에 의해 새겨진 상처가 생각나... 

어느 것에도 집중 할 수 없었다.

본래 아픔을 주려 시작한 것인데 오히려 아픈 것은. 

벌을 준 자신이었다. 

마지막 보았을 때완 달리 밝게 인사하는 슈엘의 얼굴에 

후안은 한명의 시종이 떠올랐다. 

“시종을 찾기라도 한건가?”

이내 슈엘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역력하다. 

고개를 숙이며 황급히 답한다.

“아뇨...저어  찾...지 못했어요.”

“... ...”

언제나 당당히 눈을 마주치는 슈엘이 시선을 돌리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짜증을 불러온다.

짜증 섞인 말투로 후안이 말했다.

“흥, 또 거짓말을 하는군.”

“.... ....”

한순간 밝았던 슈엘의 얼굴의 어두워졌다. 

슈엘은 이를 악물며 붕대를 쥔 손을 매만졌다. 

“도대체 매번이 속이는군, 너는. 이제는 정말 지겨워.”

뭐라고 반박하지 않는 점이 더더욱 화가 난다. 

뭐라고 말을 좀 하란말야! 

평소의 그 바보같이 뻔뻔한 모습으로 아니라고 말해보란 말이다! 

그러나 슈엘은 고개를 숙인 체 아무 말이 없었다.

슈엘에게 다가가 후안은 그의 턱을 잡아 고개를 올렸다. 

강제로 들려진 슈엘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하...하하! 뭐야, 대체! 정말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너는! 

왜 웃고 있는 거야!!!

“이젠 상관없어, 니가 그 시종을 찾았다한들”

“?!”

“어차피 만나지 못할 테니까...”

후안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이제 며칠 후면 난 성을 떠난다. 

그런데 나없는 동안에 밤의 반려가 다른 남자라도 만난다면 

대단한 망신이 아닐 수 없지. 그러니.”

“-너도 함께야.”

...기뻐해야 할 말인데... 기뻐할 수가 없다. 

...그와 함께 갈수 있다는 말에 기뻐서 웃어야 하는데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 

...아까와 같은 미소를 띠고 있지만 

슈엘은 결코 웃고 있지 않았다. 

...가슴만은 처절히 울고 있었다. 

부탁이에요.

제발 부탁이니 나를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요. 

... 제발 부탁이니까... 

내가 다른 사람을 마음에 둔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제발...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좀...

알아채줘요.

후안은 슈엘을 잡은 손을 놓았고 

슈엘은 아까처럼 고개를 숙였다. 

웃는 것은 이제 한계. 

하지만 웃지 않는 모습 따위, 상처받은 모습 따위를 보일 순 없다. 

시선을 바닥에 향한 채 슈엘은 인사했다.

“그럼... 푹쉬세요, 후안님.”

문틈으로 점점 가려지는 후안을 바라보며 슈엘은 

천천히 문을 닫았다. 

그리고 문을 닫은 후 털썩 내려앉아 붕대감긴 손을 들었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손에 감긴 하얀 붕대가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울줄알구요? 절대 안 울어요."

-왜냐면...

당신이 내 인사에 처음으로 답해준 날이니까.

절대. ...울지 않아요.

******

“형님!! 납득할 수 없습니다!”

어두운 밤. 

후안의 서재에서 터져 나오는 커다란 목소리. 

목소리의 주인인 이안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후안은 입을 열었다.

“모든 것은 내 결정이다. 네가 납득한다. 안한다는 문제가 아니야.”

그 말에 이안은 이를 악물었다. 

올해의 지방순례는 반려와 둘만이 간다는 소식을 들은 건 방금 전. 

워낙 극비의 일이다보니 바로 순례를 떠나기 바로 전날인 

오늘에야 그 사실을 알아버린것이다.

“아무리 비밀리에 떠난다고는 해도 지방순례는 위험합니다. 

게다가 요즘 형님의 목숨을 노리는 반황제파의 암살자가 

더 잦아지지 않았습니까! 

언제 그들의 위협을 받게 될지 모릅니다. 

그런데 반려님과 단 둘이라니요!”

그는 불안했다. 

위험할지 모르는 여행길에 슈엘이 동행한다는 것이. 

... 후안과 “둘”만 떠나는 여행이라는 것이.

“그런 자들에게 쉽게 목숨을 내줄 만큼 약하진 않아, 나는. 

그리고 알스의 반려, 그녀석도... 

엄연한 남자이고 한나라의 왕자다. 

자신의 몸을 지킬 정도의 실력은 가지고 있겠지.”

-이 말엔 도저히 반박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분명 후안은 자신이나 로빈 만큼의 손꼽히는 검사였고 슈엘은....

그 내면이 어린아이처럼 여리거나 순수하단 것에 상관없이 분명 

건장한 남자이며 한 나라의 왕자였으므로.

“좋습니다. 반려님이 따라 가는 것에 관해선 

아무 말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저도 동행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이것이 최후의 방법이다. 

이안의 눈빛은 진지했고 여지껏 그의 말을 무시하던 후안은 

이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같은 피를 이어받은 흔적이 역력한 닮은 얼굴. 

그러나 양보해줄 수 없는 것이 있다. 

낮은목소리속의 강압적인 톤으로 후안은 말했다.

“허락하지 않는다, 이안. 

나는 나와 나의 반려와 둘이 순례를 떠난다고 발표했고 

그건 번복되지 않아. 

... 이안·루비젝트·란. 내가 없는 동안 넌 왕의 자리를 지켜라.”

부탁이 아니다.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왕의 명령이었다.

이안은 눈썹을 찡그리며 눈을 감았다.

“... 알겠습니다,... 폐하.”

“정말 따라가려는 거야?”

로빈이 탁자에 턱을 괴며 묻자 사리엘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사리엘은 벌써 몇 시간째 검을 손질하고 있었다. 

날카로운 검을 더 날카롭게-. 

불빛에 반사된 검 날의 빛은 예사롭지 않았다.

“제국의 지방순례라는 것은 극비리에 떠나는 것만큼 

위험이 많다고 들었어요. 

호위기사도 따라가지 않는데 너무 위험해요.”

“그래, 나도 그래서 걱정이라고! 

내가 폐하를 지켜드려야 하는데... 대체 슈엘님과 같이 가시겠다니!”

어린아이가 투정부리듯 불만을 토로하는 모습에 

사리엘의 눈은 부드럽게 휘였다. 

로빈은 알지 못했지만 그것은 슈엘에게만 보이는 

사리엘의 미소였다.

“슈엘님이 짐이라도 될 듯한 말투군요.”

“물론이야! 그가 겉으론 보기엔 꽤 강해보인다는건 인정해. 

하지만... 난 단 한번 보았을 뿐이지만...

그의 얼굴은. 결코 검사의 얼굴이 아니었어.”

사람은커녕 동물한마리도 

제대로 베지 못할 것 같은 눈동자였다. 

도저히 그 손에 검을 들고 능숙하게 그 날카로운 무기를 다룬다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다.

그 말에 사리엘은 고개를 돌렸다. 

“당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응?”

“당신이 말한대로 슈엘님은 사람을 쉽게 상처주지 못해요. 하지만-”

녹색 눈동자가 확신에 차있었다.

“소중한 것을 지킬 땐 아주 강하죠. 

나조차 쉽게 이기지 못할 만큼.”

로빈은 순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칭찬에 인색한 사리엘이 인정하는 슈엘의 검실력때문이 아니었다. 

평소에 차갑고 자신의 감정을 내비취지않는 

저 -리엘이 

감정이 가득실린 목소리로. 

눈동자로. 말했기 때문이다. 

슈엘님의 이야기가 나올 때 만큼은 

무감동한 녹색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난다.

쳇... 그게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쁜거냐구.

“흐음~ 그렇게 반려님의 실력을 믿으면서 왜 그들을 따라간다는 거야?”

“반려님이 검을 드는 것을 막기 위해서예요.

그. 손에 누군가의 피를 묻히는걸 막기 위해서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면 자신은 

그 배의 상처를 받는 사람이니까...”

그래서... 니가 대신 피를 묻히겠다는거냐. 

사람을 벨 때 일말의 동정심 없는 사람이란 걸 알고 있다. 

네가 천사 같은 얼굴을 가지고 냉정히 사람을 

벨수 있다는 걸.

하지만... 사람을 베고 죽이며 

기뻐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만 누구든 상처받는 법이다. 

하지만 그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슈엘’님을 위한다.

그 감정을 단순히 왕자를 향한 

시종의 충성심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건 이미 충성심이나 하는걸론 설명할 수 없는

가슴 아플 정도로. 애달프고 한결같은 희생이었다.

“-뭐, 대화는 여기까지 하고.”

탁자위에 올려둔 검을 잡으며 로빈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앞으로 꽤 오랫동안 보지 못 할텐데 어때?”

어느새 놀이처럼 되어버린 그들만의 대련. 

검을 닦던 수건을 내려놓으며 사리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목이 마르군- 남자는 작게 중얼거렸다. 

시선을 이리저리 돌려 눈에 익숙한 풍경을 눈에 남는다. 

차가운 돌로 만들어진 밀실... 

로빈이 잡은 범인들을 가두는 지하감옥이었다.

“로빈님께선 왜 저런 녀석을 아직까지도 성에 보내지 않은 거야?”

“그러게 말이야. 하루빨리 성에 보내 형을 받게 해야 되는데.

감히 황제폐하를 암살하려 하다니! 목을 쳐도 모자랄 녀석!”

황제폐하의 암살범-. 

이전 봄축제때에 로빈에게 잡혀온 남자는 

병사의 말에 한쪽 입을 비식거렸다. 

하- 무지한 것들. 

도대체 언제까지 황제라는 이름 앞에 무릎을 꿇을 거냐.

왕족이라는 것들이 얼마나 잔인한 것들인지 모르나?!

그 오만한 것들에게 우리 같은 인간들은 벌레만도 못하단 말이다.

“응? 뭐야, 이 녀석?”

고개를 든 남자와 눈이 마주친 병사가 인상을 찡그렸다. 

암살자주제에 자신을 깔보는 듯한 그 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벽에 이어진 쇠사슬에 두 팔과 다리를 포박당한 채지만 

남자의 눈빛만큼은 죽어있지 않았다.

“어서 그 건방진 눈 치우지 못해?! 어디서 감히....!”

병사가 몽둥이를 들고 남자를 향하던 차였다. 

푸욱- 하고 사람을 꿰뚫는 소리가 들려왔다.

병사가 고개를 숙였을 때 이미 그의 가슴엔 날카로운 검이

튀어나와 있었다.

“우...윽...”

병사가 쓰러지자 그의 뒤에 가려졌던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자로... 착각할 듯한 작고 가녀린 몸. 

하지만 분명히. 단단한 남자의 몸이다. 

복면사이로 비취는 푸른 색 눈동자가 

얼음처럼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다...당신은...”

남자의 입술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복면의 남자로부터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아직까지 살아 있는 거지?”

“아, 아니요! 

스스로 목숨을 끊진 못했지만 어떤 것도 말하지 않았소! 미, 믿어줘!!!”

홀로 감옥에 갇혀서도 당당하였던 그였으나 

그의 눈동자는 공포로 가득했다. 

“붙잡힌 자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 비밀을 누설하지 않는다. 

그걸 잊다니 한심하구나.”

“제발 사...살려.......!!!”

남자의 눈이 크게 떠졌다. 

비명소리를 낼 틈도 없이 그의 심장이 날카로운 검이 관통했다. 

까만 후드에 새빨간 피가 튀었지만 검을 든 남자는 개의치 않았다. 

“침입자다!”

지하 감옥 위로 소란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검정색 망토는 바람에 날렸고, 

이내 지하 감옥에서 남자의 모습은 사라졌다.

“뭐?!”

사리엘과 대련을 하던 로빈은 숨을 고르며 부하의 보고를 들었다.

지하에 있던 암살자가 죽어?!

봄축제며 지방순례며 하는 것들로 성으로 보낸 것을 늦춘 것이 실수였다. 

조직의 잔당이 여기까지 잠입해 녀석을 죽일 줄이야. 

생각도 못했던 비상사태다. 

“그래서 지금 녀석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뭐어?!”

“하...하지만 나갈수 있는 통로는 모두 막아놨으니 

아직 안에 있을 겁니다.“

“.... ...”

로빈은 잠시 사리엘을 바라보았다. 

“리엘, 너는 지금 당장 저택을 떠나.”

“?!”

“슈엘님을 따라가야 하잖아. 

두 분은 아침 일찍 성밖에서 출발이야. 지금 나가야해.”

로빈은 커다란 입을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안전하게 슈엘님을, 여유가 있다면 폐하도 지켜줘.

그럼 부디, 다치지 마라!”

사리엘이 뭐라 말할 틈도 없이 로빈은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홀로 남겨진 정원에서 사리엘은 한참동안 

로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피냄새가 난다.  

로빈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대백작가문 로빈·레이크가문의 본가답게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저택이었다.

덕분에 ‘한사람’을 찾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곳곳을 흩어져서 침입자를 찾기 시작한지 몇 시간 째,

어느새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로빈은 그에게 가까이 왔다고 확신했다. 

부하들과는 떨어져 홀로 있었지만 로빈에겐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적은 분명 굉장한 검사일게 분명하다. 

아무리 훈련받은 병사라지만 

몇 명이든 다치거나 죽을 것이다. 

그럴 바에는 처음부터 자신 혼자 싸우는 것이 나았다. 

-설령 상처를 입더라도...

로빈이 침입자의 기척을 따라 온곳은 북쪽정원으로 

사람이 드나들지 않는 그늘진 뒷정원이었다. 

울창한 나무와 어둠 사이로 그는 숨어 있을 것이다. 

조심조심 로빈은 한발한발을 내딛었다.

쉬익- 

무언가 날아오는 소리에 로빈은 서둘러 몸을 피했지만 

그의 다리엔 날카로운 상처가 베어졌다. 

로빈을 스친 단검의 주인이 그제야 모습을 드러냈다.

로빈이 놀란 건 

교묘히 숨어있던 침입자가 모습을 드러낸 것 보다

그의 눈 때문이었다.

까만 복면 속에서 유일이 보이는 눈.

녹색빛 나는 푸른 눈동자... 

눈동자 색이 좀 다르긴 하지만 마치...

그 녀석 같잖아?

로빈은 검을 집은 손에 힘을 주었다.

“흥, 저런 장난감 검하나가 다리를 스쳤다고 못싸울만큼 

약하진 않아, 나 로빈·레이크는.”

분명 쉽게 이길 수 없는 상대임에도 로빈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파란 눈동자에 자꾸 리엘이 생각나는 탓이었다.

-음, 지금쯤 성밖을 나갔겠군. 그녀석.

로빈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크- 딴생각 할 때가 아니지.

검을 꺼내든 상대가 로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휘익- 로빈의 칼날이 먼저 바람을 꿰뚫었다. 

챵-

쉬익-----창--

로빈의 검이 몇 번을 침입자를 스쳤지만 모두 작은 상처일 뿐 

큰 상처는 남기지 못했다. 

다시 한번 몸을 움직였을 때 로빈은 심한 현기증을 느꼈다.

“이런- 혹시나 했지만...역시나야?”

로빈의 몸에 상처는 없었다. 

방금 전 단검에 맞은 상처가 전부... 

작은 상처지만...분명 

독에 중독 되었다!!!!

이제껏 참아왔지만 다리부터 시작된 마비에 로빈은 

제대로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로빈은 이를 악물며 침입자를 바라보았다. 

휘청거리는 로빈을 보며 그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가 빠른 속도로 로빈에게 달려오는 순간

파란 눈동자에 가득한 것은 이겼다, 란 거만한 빛이었다.

하! 하하! 내가 미쳤지!! 

저런 녀석을 보고 리엘을 생각했었다니.

그녀석이 아무리 얼음왕자라지면 결코

“그런 재수 없는 눈빛은 하지 않는다고!!!으야얍!!!”

이미 예전에 온몸이 마비되어야 하는 독약이었다. 

그러나 필사적으로 짜낸 로빈은 손을 들었다.

로빈의 기합소리와 함께 

그의 단단한 검날이 침입자의 배를 꿰뚫었다. 

순간 침입자의 눈동자가 작아졌지만 

그 또한 손에 쥔 검을 놓지 않았다. 

촤아악- 

로빈의 가슴을 베어버린 검은 침입자의 손을 떠나 

바닥으로 튕겨져나갔다.

“쿨럭...”

침입자는 입안 가득히 피를 토하며 로빈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그는 벌벌 떠는 손으로 자신의 배에 박힌

로빈의 검을 집었다.

“?!!!”

-믿을 수 없을 만큼 지독한 녀석이다...

경악스런 로빈의 표정을 뒤로하고 그는 로빈의 검을 빼들었다.

구멍이 뚫려버린 그의 배에서 엄청난 피가 새어나왔지만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붉은 선혈을 뒤집어쓴 그가 로빈에게 다가오자 로빈은 공포를 느꼈다.

몸은...이제 움직이지 않아.

끝장이다!!

-침입자가 검을 들어올린 순간이었다.

“로빈!! 거기있나요?!”

언제 들어도 놀랄 만큼 아름다운 목소리.

....설마?!

그 녀석은 떠났을텐데...?

로빈을 부르는 소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암살자는 몸을 돌렸다.

-도저히 이 몸으론 누굴 상대할 여력이 없다!! 

“이...자...식! 놓칠....줄 알고?!”

로빈이 이를 악물며 최후의 힘을 내었다. 

그의 손이 침입자의 까만 후드를 벗겨내는순간

-긴 금빛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

로빈은 손을 뻗었지만 더 이상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온몸에 퍼진 독이 신경까지 닿은 모양이었다.

흐릿해지는 시선너머로 한밤의 침입자는 사라졌다.

******

“...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후안의 방밖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며 어쩔 줄 몰라 하던 

슈엘이 놀란 표정으로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아직 이른 새벽이것만 

대체 언제부터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

차가운 새벽바람에 슈엘의 볼은 빨간 홍조가 띄어 있었다.

막 방을 나온 후안의 모습에 동그란 까만 눈동자가 더욱 커졌다. 

언제나 정장을 입으신 것밖엔 보지 못했는데... 

하얀셔츠하나에 면바지...저런 가벼운 복장이라니...

처음 보는 후안의 모습에 슈엘은 두근대던 가슴이 편안해짐을 느꼈다. 

‘어휴- 후안님께서 저렇게 옷을 입으셨다고 괜히 편해져서는-.’

콩하고 자신의 머리를 때리는 슈엘의 행동의 의미를 후안은 알 수가 없었다. 

하. 여전히 알 수 없는 녀석이로군. 

그리고 이내 눈에 들어온 슈엘의 모습에 웃음이 나온다. 

하얀색 면티와 갈색바지... 

왕족이나 귀족으론 보이지 않을 평민의 옷을 입으라고 했던 건 

자신이지만... 저렇게 잘 어울릴 줄이야. 

하하. 성에서 입는 고급정장보다는 

저쪽이 잘 어울리잖아, 저녀석.

“후안...님?”

동글동글 까만 눈동자가 두 눈을 껌뻑이자 후안은 휙-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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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에 있어 지켜야할일에 대한 문서는 읽어두었겠지?”

“아, 예! 알아요! 다 외워두었어요. 

먼저 저와 후안님의 신분을 밝히지 않는 것과....”

주절주절 하나부터 열까지 내뱉는 슈엘의 말을 듣는 체 마는 체 하며 

후안은 걸음을 내딛었다. 

후안의 뒤를 쫓아오며 슈엘은 

지금껏 외운 주의사항을 말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후안님을 제일 우선으로 지켜드릴것.”

“...?!”

마지막 말만이 선명하게 후안의 귀에 들려왔다. 

가볍게 말하던 슈엘만큼도 이때만큼은 진지했다. 

후안은 그제야 슈엘의 허리춤에 있는 검을 보았다. 

... 작지 않은 크기와 날렵한 모양. 

...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검이다. 

복잡한 마음. 

저 녀석이... 저런걸 가지고 가다니. 

전혀 어울리지 않아, 저런것따위.

“흥, 웃기는군. 기대도 하지 않아.”

“?!”

“네가... 사람을 죽일 수나 있을까? 짐이 되지 않는다면 그걸로 족해.”

“.... ....”

까만 눈동자가 잠시 흔들린다는 분명... 착각. 

언제나 그랬듯 부드럽게 휘인다.

“죽일 수 있어요.”

목소리가 떨린다는걸... 모르는지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후안님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사람을 죽일 수도-.”

-내.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죽임을 당할 수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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