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울지마, 울지마, 울지마 슈엘.
절대 울면 안돼.
절대... 절대 울면 안돼.
마음속으로 다짐한다, 마음속으로 맹세한다.
후궁전밖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슈엘은
까만 밤하늘을 보며 눈물을 참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터질듯한 눈물을 참으며 두손을 꼬옥- 잡고 있었다.
우는 모습을 형에게 보여줄 수 없는 노릇이다.
조금이라도 울면 밤새도록 울음이 멈추지 않을 것같아서
메여오는 가슴을 쥐며
하늘을 보며 열심히 웃어보였다.
“헤헷-. 난, 괜찮아. 천하의 슈엘인걸! 괜찮아-. 괜찮아-.”
큰소리로 외쳐본다.
얼어붙을 듯 차가운 입김이 생겨났다 금세 사라진다.
유난히 혹독한 밤바람이 슈엘을 감쌌다.
아름다운 밤하늘에 유독 달빛이 아름답다.
... ...그래서 슈엘은 더더욱 웃을 수밖에 없었다.
<< 반려로 맞아주세요 >>
다음날부터 봄축제준비로 성은 분주했다.
반려- 라곤 하지만 공식적인 행사에 한번도 참가하지 못했던
슈엘이 바빠진 것도 다음날부터였다.
오히려 분주한 것이 슈엘로서는 더욱 좋았다.
혼자 방에 있다간 계속 그 사람만 생각에 가슴이 아플 것 같으니까.
“슈엘님! 어서 준비하셔야죠.”
아침부터 시녀들이 슈엘을 들볶는 통에 후안의 방에
인사를 가지 못한 것이 걸리지만,
사실 그가 자신을 보는 시선이 두려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슈엘님~! 그것 끝나고 이방으로 또 오셔 야해요~!”
“슈엘폐하, 저 불러주시는거 잊지 않으셨죠?!”
평소 시중은 거의 사리엘이 도맡아했기 때문에
봄축제를 빌미로 슈엘을 맡게 된 시녀들은 신이 났다.
깔끔히 잘생긴 외모에 큰 키에 탄탄한 몸.
플러스. 슈엘의 귀여운 성격덕분에
후궁의 시녀들은 모두 슈엘팬클럽의 일원이었다.
“으아악, 이게 뭔...가요?”
시녀들에게 끌려가면서도
대체 봄축제중에 내가 바쁜 일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던 슈엘은 후궁의 어느 한 방에 도착하자 경악했다.
슈엘이 처음 보는 시설이 가득한 방에는
열명이 넘는 시녀들이 생긋이 웃으며 대기하고 있었다.
“슈엘님은 여전히 후궁의 시설에 둔하시군요. 호호-.”
시녀 한명이 침대에 손짓에 슈엘은 살짝 겁을 먹으며 누웠다.
시녀들이 갑작스럽게 슈엘을 향해 달려들었고 저항할 틈도 없이
옷이 벗겨진 슈엘의 눈엔
아름답던 여인들이 순간 마녀처럼 보였다.
“뭐, 뭐하시는 거예요?!”
그녀들을 씨익 웃으며 슈엘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이곳은 반려님들이 아름답게 자신을 가꾸시는 마사지실이랍니다~”
“안 그래도 반려님이라고는 유일하게 슈엘님뿐인데 정말 너무 하세요~!
자주좀 오시라고요!”
“슈엘님 피부가 좋은 건 인정하지만,
피부란 건 관리를 안 해주면 금세 망가진다는 걸 아셔야죠.”
“아, 아뇨 저는!!!”
그녀들은 웃었다.
자신의 몸 곳곳을 유린(?)당하며 슈엘은 마음속으로 외쳤다.
‘혀어어어어어어어엉---------!!’
하루 종일 계속되는 안마며 마사지, 각종 미용에 슈엘은 정신이 없었다.
과연- 폐하의 반려로서 귀족들 앞에 서는 만큼
이만큼의 정성을 따라오는구나.
거울속의 그리 달라지지 않은 듯한 얼굴을 보며 슈엘은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꾸며봤자, 난 평범한 남자인걸.”
뭘 어떻게 해도 자신이 멜이나 형처럼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착잡한 심정에 창가에 턱을 괴고 슈엘은 생각에 잠겼다.
어젯밤 일을 떠올리지 말자- 라고 생각해도
자꾸 머릿속을 멤도는건 어쩔 수가 없다.
후안의 차가운 표정과 말을 떠올리자 가슴이 욱씬 아파오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혼자 좋아해버린 탓이지 뭐...”
작게 한숨을 쉬며 화창한 하늘을 보다
문득 슈엘의 눈에 밝히는 누군가가 있었다.
평소엔 시녀들이나 병사들뿐인 후궁 밖의 정원에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햇빛에 반짝이는 선명한 붉은 머리카락.
슈엘이 빤히 바라보자 그가 시선을 느낀 듯 고개를 올렸다.
갈색의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자 슈엘은 웃었다.
“이안님-!”
후궁앞 정원의 벤츠위에 앉은 슈엘과 이안은 소풍이라도 온 듯 편히 앉았다.
“어때, 잘되고 있어?”
“예?”
“봄축제 준비말야.”
“헤헤,네. 시녀 분들께서 기운이 넘치셔서...
좀 피곤하긴 하지만 꽤 재미있게 준비하고 있답니다.”
본래 사람을 좋아하는 슈엘이니 북적거림을 싫어할 리 없다.
그런 슈엘의 모습에 이안은 그저 빙긋 웃을 뿐이었다.
이게 어제 그 녀석과 같은 녀석이라니-.
이 녀석의 회복은 정말 놀랄 만큼 빠르다.
아무리 상처를 받아도 다음날이면 생긋이 웃는 그런 힘.
상처를 필사적으로 숨기고 웃을 수 있는 힘.
...굉장한 힘을 가졌구나, 너는.
“반려님, 너 말야...”
“예?”
실은 네가 만든 귀고리를 돌려주려고 온 것이지만...
주머니속의 귀고리를 매만지던 이안에게선
전혀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형님이... 너를 좋아한다고 생각해...?”
“... ...”
순간 아이처럼 웃던 슈엘의 웃음이 굳어졌다.
굳어진 슈엘이 전의 그-애달픈 미소를 지으며 이안을 바라보았다.
“좋아...해주실 거라고 믿어요.”
까만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었다.
“언젠간 제 마음을 알아주실 거라고, 그렇게 믿어요.”
두근-.
이안은 슈엘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역시 이 감정은...
“반려님. 하나 청을 하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무슨 일이냐는 표정의 슈엘에게
이안은 진지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봄축제때 나와 짝이 되지 않을래?”
슈엘은 잠시 이안을 바라보았다.
정직한 까만 눈동자가 이안을 주시하다 핑그르르 웃는다.
아이처럼 순수하게.
“안돼요, 이안님. 저의 짝은 오직 후안님뿐인걸요.”
봄의 햇빛이 유독 반짝이는 그날.
슈엘의 미소에
이안은 생애처음으로
사랑을. 확신했다.
“폐하!!”
황제 앞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우렁찬 목소리에 후안은
그제야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훤칠한 키에 탄탄한 몸을 가진 남자로
짧은 은색머리카락과 짙은 남색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청년이었다.
“말하라, 로빈경..”
로빈이라 불린 남자는 의아스런 눈으로 후안을 바라보았다.
영 황제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흐음-! 그 냉정하던 폐하가 오늘따라 왜 저렇게 넋이 나갔단 말인가.
사생활이 무슨 문제가 있든
정무를 볼 때만큼은 여의치 않고 하시던 분이.
어쨌건 할말은 하고 해야 하는 남자, 젊은 백작 로빈은 입을 열었다.
“봄축제가 끝나고 바로 지방순례를 떠나야 합니다.
3년에 한번 있는 지방순례가 돌아오는 해란걸 잊지 않으셨겠죠?
또, 하나 이건 중대한 일입니다만...”
“... ....”
“폐하!!”
불같은 성격의 로빈의 외침에도 후안은 눈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평소의 차가운 표정과는 다른 그저 바보스러울 정도로 멍한 표정.
자신의 주군을 보며 로빈은 혀를 찼다.
‘제발 정신좀 차리십쇼...폐하.
봄축제때 암살자의 위험이 있단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무슨 말을 해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
로빈은 흘깃 황제를 보며 생각했다.
‘어쩔 수 없군. 이번에도 나, 로빈·레이크·루가
폐하를 위해 열심히 뛰어야겠구만-.’
로빈이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가자
후안의 시선은 의자에 걸려있던 숄에 집중되었다.
체크무늬의 숄.
그녀석이 걸치고 있던 숄이었다.
바람이 너무 차다며 걸쳐주었던... 숄.
숄을 집어 가까이 대니 부드러움과 함께 그녀석의 향기가 느껴진다.
싱그러운 풀의 향기.
달콤하거나 짙은 꽃의 향기가 아닌 은은한
풀의 향기.
‘그 녀석과 잘 어울리는군...’
책상서랍을 열어 서랍에 가득 담겨있는 주머니를 꺼내본다.
한주머니 한주머니마다 보석이 담겨져 있었다.
녀석이 하루도 빠짐없이 세공한 보석들.
귀고리에서부터 브로치까지...
모두가 깔끔한 디자인으로 붉은 루비가 박혀 있었다.
“... ...”
어제 그 녀석에게 한 말을 곱씹어 본다.
[ 더러운 녀석-]
그 말에 상처받은 녀석의 얼굴에 생각나자 가슴이 아파온다.
알고 있으면서,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 아이 같은 녀석은
다른 남자와 놀만큼 영악하지 못하다 는걸 알고 있으면서도
화가 치밀어 오른다.
자신이 모르는 이안과의 관계가 신경 쓰여 견딜 수가 없다.
“제기랄....”
후안은 답답했다.
무언가 말하고 싶지만 그 ‘어떤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슈엘, 그 녀석에게 해줄 수 있는 말...
생각나지 않는다.
20년 동안 최고의 자리에 있던 그에게
‘미안해...’라는 말은
떠오르기조차 어려운. 말이었으니까...
******
차가웠던 겨울의 흔적이 사라지고 봄이 오는 것은 금방이었다.
길었던 겨울이 지겨웠다는 듯 봄향기가 빠르게 제국을 감쌌다.
거리와 성, 모두가 분주했다.
축제기간은 오일이지만 준비기간까지 생각하면
대륙최고의 축제라 자부할 만큼 성대한 파티였다.
“슈엘님!! 어서요, 어서요!”
예상은 했지만 축제당일이 되자 지금까지보다도
바쁜 일정에 슈엘은 정신이 없었다.
미용에서 댄스연습, 제국의 왕실예절까지 배워야 했던 슈엘은
후궁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그의 얼굴을 볼 수도 없었다...
“선물이 많이 밀려있는데...”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세공한 보석들이 벌써 여러 개가 쌓여 있었다.
슈엘의 서운함과는 달리 시녀들은 분주했다.
“슈엘님! 오늘부터는 봄축제의 시작이라구요! 정신 차리세요!”
“폐하의 반려로서 모든 사람이 반할만큼
아름다워져야 한단 말이예요!”
그녀들의 말에 슈엘은 할말을 잃었다.
아름다운...은 아마도 무리일 텐데.
나는 그저 평범한 남자라구요, 여러분...
“슈엘님, 이제 눈을 감아보세요.”
“음?”
마사지며 헤어까지 마친 슈엘은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들이 두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분명
화장품...?!
그쪽으론 무지한 슈엘이라도
저것이 여성들이 즐겨 쓰는 화장품인걸 알고 있었고
순간 놀란 마음만 가득했다.
“저,저기요! 저는 해봤자, 흉할 거예요. 그러니까...”
“조용히!!”
“!!”
카리스마 넘치는 여인의 외침에 슈엘은
헙- 하고 입을 닫았고 그녀는 당당히 말했다.
“좋아요, 화장할 때는 그렇게 입을 다무는 거예요. 그럼, 시작합니다.”
“!!!!!!”
연회장은 이미 귀족들로 가득했다.
올해엔 특히나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그들의 관심사는 단하나 알스의 반려였다.
저 유명한 황제 후안·루비젝트·알의 유일한 반려...
슈엘은 후궁 안에만 있을 뿐
연회나 사교장에는 전혀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얼굴을 세간에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저 까만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가진 남자라는 사실밖에는.
몇몇 이름 높은 귀족들과 이야기하며 와인을 마시는 후안의 모습을
흘깃흘깃 보며 귀족들은 저마다 수군거렸다.
“그런 남자를 왜 반려로 삼으신 걸까요...”
특히나 젊은 황제에 대한 인기는 엄청나서
귀족가의 아가씨들의 슈엘에 대한 관심인 더욱 지대했다.
관심...이라기보다는 시기였지만.
그들에게 슈엘은 용서할 수 없는 존재였다.
지금껏 후안의 파트너들을 시기하지 않은 적은 없지만
그들은 모두가 인정할 만큼 엄청난 미인이었다.
금발의 푸른 눈동자를 가진.
하지만 이번만큼은 다르다-.
평범한 젊은 남자... 라니.
그녀들에겐 슈엘은 이미 ‘깔볼 수 있을만한’ 대상이었다.
“오-.”
연회장에 탄성이 터져나왔다.
사람들의 시선을 모두 돌려버릴 만큼 특별한 남자의
출연 때문이었다.
금발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에 파란색 눈동자.
남자를 매료시키는 요염한 얼굴을 가진
아름다운 남자.
하얀 피부가 도드라지는 붉은 옷은 중성적인 디자인으로
그의 날씬한 몸매가 돋보였다.
사람들은 모두 감탄사를 내뱉었고, 그들은 모두 그를 알고 있었다.
“멜...이군요.”
“흥, 저 더러운 남창... 또 나타나셨군.”
넋 나간 사람들 틈으로 여인들의 욕설이 튀어나왔다.
멜... 제국 제일의 고급남창.
사교계의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인기남창이었다.
매년 봄축제때엔 대귀족출신의 남자 곁에서 어느 여성보다
우아하고 요염한 자태로 그 아름다움을 뽐내었다.
남성들에겐 최고의 눈요기였지만 여성들에겐 ‘적’.
올해에도 변함없이 오만한 표정으로 연회장에 나타났다.
“근래엔 폐하의 밤시중을 들었다는군요.”
“아-. 믿을 수 없어요, 저런 더러운 사람이 폐하의 사랑을 받다니...”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이야기하던 여인이
놀란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더러운 사람-이라고 칭한 멜이 자신의 앞에 와있는것이다.
귀족의 영양인 자신보다 더욱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멜은 싱긋이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저도 믿을 수 없군요.”
“?”
“고아한 레이디께서 저같이 더러운 사람도 받는 그-
사랑을 받지 못해 안달이시라니 말이죠-.”
“?!!”
여인이 수치스런 표정으로 얼굴이 빨개졌지만
멜은 개의치 않고 여전히 미소를 띄울 뿐이었다.
“멜. 그런 말은 레이디께 실롈세-.”
멜을 따라오며 한 남자가 말했다.
요 몇 년 봄축제때 나타나는 멜의 파트너는 언제나 달랐다.
그러나 매번 바뀌는 파트너에게도 특징이 있었는데
바로 높은 가문의 남성이라는 사실이었다.
금방이라도 울 듯한 어린 아가씨에게
정중한 사과를 하며 그는 멜의 손을 잡았다.
“너답지 않군. 평소엔 그런 말 따윈 무시했으면서.”
“... 요즘은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아서요. 앞으로 조심할게요.”
실제로 며칠째 멜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마도 후안... 그가 자신을 부르는 것이 끊겼을때부터일거다.
이런 짜증이 시작된 건.
비록 남창이지만 멜은 스스로를 최고의 상품이라 자부했다,
그런데!
그따위 녀석에게... 그를 빼앗기다니.
멜은 알고 있었다. 황제가 왜 자신을 부르지 않는지.
...그 녀석 때문이다, 분명.
그 아이처럼 바보 같고 어리석은 알스의 왕자님.
... 그에게 졌다는 수치감.
멜은 오늘을 기다렸다.
-기필코 네가 창피당하는 꼴을 봐주겠다고.
“그런데 멜, 넌 그 알스의 반려를 알고 있나?”
“쿡. 몇 번 보았죠...폐하의 침실에서.”
“소문대로 그저 평범한 남자일뿐이던가?”
“글쎄요? 어떨까요...”
멜은 시선을 돌려 후안을 바라보았다.
“다만 많은 기대는 하지 않으시는 게 좋겠군요-.”
또 한번 사람들의 웅성거림에 돌려 멜은 입구로 시선을 돌렸다.
이번엔 탄성- 이라기보다는 당황했다는 신음소리가 어울릴 것이다.
“세-세상에!!”
“이안왕자님께서 돌아오셨다니, 대체 언제 오신 거요?”
“아니 그것보다도, 전하의 파트너가!!”
놀랄 것도 당연했다.
여행만 다니느냐 몇 년에 한번 얼굴을 비취는 이안의 등장.
게다가 그의 옆에는...
젊은 백작 로빈이 있었으니!!
“이봐, 로빈. 반응이 괜찮은 것 같지 않나?”
“난 단지 날 흠모했던 레이디들이 질투에 미쳐
자네에게 칼부림이라도 할까봐 걱정이 되는데?“
자유로운 왕자 이안과
젊은 백작이자 황제의 호위기사이기도 한 로빈.
두 사람은 절친한 친우였던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제국 제일가는 괴짜이기도 했다.
우아한 정장을 차려입은 잘생긴 두남자의 모습은
분명 그림이 되었지만...
“꺄아, 말도 안돼. 어떻게 이안왕자님이 로빈님과!!”
“두분 사귀시는 거야? 설마?! 인정할 수 없어!!”
분명 오랫동안 기억될 최고의 스캔들이었다.
여인들은 두 멋진 남자가 나타났다는 것에 기뻐해야할지
그 두 사람이 짝이라는 것에 울상을 지을지 고민에 빠졌다.
패닉에 빠져버린 그녀들을 보며 로빈은 이안을 쏘아보았다.
“이안, 난 널 용서할 수가 없어!!
너 때문에 내가 괜히 남색 취급당하잖아!! 이 몸의 인기가 으아~”
“미안. 로빈.”
전혀 미안한 기색 없이 로빈의 등을 두들기며 이안은 잔을 들었다.
같이 올 파트너라면 널려있을 너에겐 미안하지만...친구.
나는 내 파트너로 데려올 만한
매력적인 레이디를 만나지 못해서 말이지.
그리고... ‘그 녀석’때문이기도 하고.
“근데 대체 알스의 반려라는 남자, 어떤 남자야? 너는 알거 아냐.”
“궁금한가?”
“그럼, 이몸은 제국의 모든 일이 다 궁금하다고.
특히 폐하에 관련된 일은-.”
황제의 호위기사라고 해도 밤일까진 관계하지 않는 터라
슈엘의 얼굴한번 제대로 본적 없는 로빈이다.
워낙 외향적인 성격에 적극적인 로빈이 두 눈을 빛내며 궁금해 하자
이안은 소리 내 웃었다.
“까만 눈동자에 머리카락...”
“그건 알아! 유명하다고! ...유일한 정보이기도하고.”
“그리고... 키도 꽤 크고 잘생긴- 영락없이 남자인 주제에
하는 행동이나 얼굴은 어린아이 같아선...”
“.... ...?”
“아주... 귀여워.”
“... ...”
로빈은 순간 놀랐다.
하아-... 저 녀석이 저런 표정을 짓다니.
이안은 황제 후안과는 달리 서글서글한 사내라고 알려져 있지만
로빈만은 알고 있다.
이안·루비젝트·란은 어찌할 바 없는 왕의 자손이라 는걸...
황제처럼 냉정하고 정없는 녀석인란것을.
하지만... 그 녀석에게 이런 표정을 짓게 하다니
과연 어떤 남자일까, 알스의 반려는...
“이안, 로빈경. ... 너희 둘, 무슨 생각이지?”
둘의 곁에 다가온 후안의 등장에 로빈은 당황했다.
으아아, 천하의 봄축제에 이런 꼴을 폐하께 보여드리게 될 줄이야!
끄응... 이걸 뭐라고 말해야 한담.
갑자기 이안이 나타나서 나의 파트너가 되다오! 라고
말했다고는 할 수가 없다.
로빈이 뭐라 말할 틈도 없이 이안이 나섰다.
“그게 말입니다 형님. 저와 함께 와주실 레이디가 안계시지 뭡니까-.”
“웃기는 소리군...”
후안의 말에 이안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혹시나 형님이 반려님을 저에게 양보해주실지 몰라
이렇게 편한 친구를 옆에 끼고 나왔습니다.”
‘오이이이잉?!’
옆의 로빈은 이게 또 웬소리냐... 라는 표정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후안의 차가운 표정엔 불쾌감이 떠올랐다.
“아직도 그 타령이냐, 이안?”
“하하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엄청난 욕심쟁이라는 것을요.”
두 사람을 감싼 공기가 무거워진 순간이었다,
멜이 후안의 곁으로 온 것은.
“오랜만에 뵙습니다, 폐하.”
멜의 인사에 후안은 살짝 놀란 듯 바라보더니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나저나 두 분이 무슨 이야기를 하시길...래...”
멜이 놀란 눈으로 말을 멈추었다.
멜의 표정에 후안은 의아해하며 멜의 시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또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 ...”
지금까지 와의 사람들과는 다른 존재감...
화려함이나 강렬한 느낌은 아니었지만
그것은...오래도록 기억될 아름다움이었다.
단정한 까만 머리카락.
하얀 얼굴에 도드라지는 까만 눈동자.
어떤 색도 전혀 섞이지 않은 순수한 블랙의 눈동자가
밝게 빛나고 있었다.
선하게 생긴 눈매는 아이처럼 동그래선 소년과 같은 앳된 매력이 났다.
단아한 입술.
조각과도 같이 잘생긴 남자의 모습.
금색의 장미가 수놓아진 하얀 정장을 입은 그 모습은
마치 성스러운 조각상과 같았다.
단지 준수한 남성적 매력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 아름답다-
란 말이 나올 만큼 독특한 매력을 갖고 있는 남자...
사람들은 모두 감탄했다.
"...오랜...만입니다, 후안님..."
저 남자가 바로... 알스의 반려...
슈엘·알스···슈...
******
후안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분명 그녀석인데...
알스에서 온 바보 같은 반려... 그녀석인데..
뭐지, 이 기분은?
가슴이 두근거려왔다.
바보라도 된 듯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져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후안의 눈앞에 슈엘이 다가올 때까지도
그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후안님...?”
떨리는 목소리...
역시 나, 이런 모습 이상한걸까...
알스에서도 무도회장에 나가긴 했지만
슈엘은 언제나 왕자답지 않은 수수한 옷을 즐겨 입었다.
제국의 화려한 정장은 익숙지 않았다.
가벼운 화장이지만 그것 또한 슈엘에겐 너무도 낯설었다.
거울에 비췬 모습이 부끄러워 선뜻 들어오지 못하는 슈엘은
시녀들에게 끌려오다시피 연회장에 들어온 것이다.
슈엘은 조심히 시선을 위로 향했다.
“.... ...”
두근.
뭐지... 저 눈은?
언제나 냉소적이던 붉은 눈동자가 아닌 따뜻한 눈동자...
설마-
나를... 보고 있는 건가요...?
슈엘과 눈이 마주치자 후안이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그 행동에 슈엘의 가슴은 또다시 욱신거린다.
‘뭐야... 역시... 착각이었잖아.
그런 눈을 내게 보여줄 리가 없는데...’
그래도 슈엘은 웃었다. 생긋이 웃을 수 있었다.
“아름답군요. 슈엘왕자님.”
‘그’를 보기 전까지는.
여태껏 후안만이 가득했던 슈엘의 시야가
그제야 주변의 사람들을 비추었다.
... 어째서 당신이 여기있는거야... 왜?
왜 후안님의 곁에 있는 거지...
오만해보일정도로 도도한 표정으로 멜은 웃고 있었다.
“당신이야말로 너무 아름다워요, 멜.”
진심으로 그런 말을 할수 없는 자신을 탓하며 슈엘은 말했다.
웃는 얼굴이 살짝 굳어진 것을 알아챈 건 이안이었다.
멜과 슈엘을 보는 순간 이안은 모든 것을 알아챘다.
흐음... 저 금발 녀석,
꽤 심사가 꼬여있는 녀석이로군.
“히야아~ 반려님! 오늘 정말 아름다운데?!”
연회장이 다 울릴 정도로 호쾌하게 말하는 이안의 모습에
슈엘의 얼굴이 금세 빨개졌다.
으아아악!
그런 예의상 하는 얘기를 그렇게 크게 얘기하실 필요는!!
당황해서 이안에게 쉿- 쉿- 을 외치며
한손가락을 입가까이 대는 슈엘을 보며 이안은 웃었다.
“왜? 나는 단지 반려님의 외모에 감탄한 것 뿐이야.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거라구...”
“으앗...으아아아, 그, 그만하세요. 제발!!”
후안의 옆자리에 있기엔 외모에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던
슈엘은 더더욱 크게 당황했다.
더 이상, 사람들의 주목은 싫다구요, 나는...
“?!!!”
슈엘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이안 또한 놀란 표정으로 슈엘과 그리고... 후안을 바라보았다.
그들을 묵묵히 지켜보던 후안이 갑자기
슈엘의 손을 잡았기 때문이다.
후안..님?
이안과 떠들고는 있었지만 내내 후안을 신경 쓰고 있던 슈엘조차도
생각 못한 후안의 행동에 슈엘은 놀란 눈을 감추지 못했다.
상처받았던 가슴이
또다시 조그맣게 두근거리고 있었다.
그에게 잡힌 손에서부터 열이 오르는 느낌...
“두 사람, 너무 시끄럽군.”
후안은... 화를 내고 있었다.
자신의 앞에서 슈엘과 이안이 즐겁게 떠드는 꼴이라니!
시선을 돌리곤 있었지만
슈엘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며 웃어대는 이안의 모습은
내내 짜증스럽게 느껴졌다.
녀석이 하는 한마디 한마디에 반응을 보이는 슈엘의 모습이
원망스러울 정도다.
저 녀석을 괴롭힐 수 있는 건, 나뿐이야!
알 수 없는 소유욕이 머리끝까지 가득 차 올랐다.
평소대로라면 당황해하며 죄송하다고 말할 슈엘이지만
슈엘은 아직까지도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후안의 손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연회를 시작한다.”
그들을 지켜보던 연회장의 사람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을 쯤 후안은 크게 외쳤다.
그제야 조용하던 연회장에 아름다운 음악소리가 연주되기 시작했다.
여전히 멍해있는 슈엘에게 후안이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멍해있을거냐.”
“?!!”
“설마 춤까지 출줄 모르는 건 아니겠지.”
삐뚤어지게 나오는 말이지만
지금의 슈엘에겐 그런 말투는 상관할 바 없음이었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슈엘은 아이처럼 고개를 내저었다.
“설마- 설마요. 출 수...있어요.”
당신과 추기위해... 얼마나 연습해 왔는데요.
후안은 슈엘의 손을 놓은 후 다시 정중히 손을 내밀었다.
“-그럼, 한 곡 추도록 하지.”
“...예... 예에!!”
슈엘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아직까지도 이 상황이 꿈처럼 느껴졌다.
아무리 내가 후안님의 반려로 이곳에 있어도
아주 언짢은 얼굴로 나와는 춤같은거 추기 싫다고,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후안님이 내게 먼저... 춤을 신청해 주다니...’
너무나 기뻐 슈엘의 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얼굴은 새빨개져서 부끄러움이 가득한데도
후안의 무뚝뚝한 얼굴을 계속 바라보았다.
당신이 좋아요, 정말 좋아요.
나의 사람...
나의 반려 후안님...
눈물이 나올 정도로 나는.
당신이
너무도
좋아요...
홀의 중심에서 댄스를 추는 두 사람을 보며 이안은 커다랗게 웃었다.
“하하하하하!”
뭡니까, 형님.
오늘도 어린아이처럼 심술만 부릴 줄 알았더니 위기감이 든 겁니까?
예상외로군요, 오늘 형님의 행동은.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우위는 변하지 않는다.
이안은 알고 있으니까, 제국의 황제 후안이란 사람을.
형님은 높은 자리에 너무 오랜 시간 있어서 사랑을 모릅니다.
어린아이보다도 말이죠.
무지한 사람에게 이기기보다 쉬운 일은 없거든요, 형님.
차가운 미소를 보내는 이안을 보며 로빈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봐, 이안. 표정관리좀 못하겠냐?”
“?”
“눈치 없는 나라도 알겠다, 지금 니가 무지막지하게~
사악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쯤은.”
“... 이거 조심해야겠는걸. 네녀석이 알정도면.”
“뭣이!!”
킥킥 웃으며 이안은 로빈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로빈경, 네가 보기엔 어때? 슈엘이란 녀석...”
“뭐, 꽤 괜찮았어.”
실은 굉장히 놀랐다... 저런 외모일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는데.
뭐, 소문처럼 도저히 여자론 보이지 않은 건장한 남자긴 했지만.
일순 보인 매력은 그런 것들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특히- 그 까만 눈동자는 너무 선해 보인다.
커다란 그녀석이 귀여운 아이처럼 보일정도로.
“여전히 자넨 솔직해서 좋아~, 흐음, 문제는 오히려 넌데 말이지.”
이안의 갈색눈동자가 자신을 향하자 멜은 흠칫했다.
그때까지도 멜은 무서운 표정으로
슈엘을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남창. 네가 얼마나 잘난 녀석인지는 모르겠지만
황제의 반려를 그렇게 노려보는 건
당장 끌려 나갈 죄목이 될 수 있다는 걸 알아라.”
차가운- 눈동자였다.
이제껏 실실 웃던 자라고는 생각 못할 만큼.
멜은 고개를 숙였다.
이 남자는... 황제의 동생이자 마음만 먹는다면
무서운 힘을 가질 수 있는 자이다.
아직까지 자존심보다는 생존이 우선이었다.
이안에게 뒤돌아선 멜의 눈동자엔 표독함만이 가득 찼다.
이 나를 무시하다니...
‘너희들의 언젠간 내 앞에 무릎 꿇게 만들겠어, 반드시!’
멀어지는 멜을 보며 이안이 냉소적인 미소를 띄울 때
로빈은 미묘한 변화를 눈치 챘다.
“?!”
이 이질적인 느낌이 뭐지...
그것은 이성적 판단이라기보다는 호위기사로서의 날카로운 감이었다.
쾌활한 음악이 흐르고 아름다운 귀족들이 우아하게 춤을 추는 연회장.
달라진 것은 없었지만 분명 이 느낌은...
적신호!!
로빈은 냉정히 연회장 곳곳을 훑어보았다.
로빈의 행동에 이안 또한 웃음을 멈추곤 날카로운 눈이 되어 말했다.
“문제가 있나..?”
“장담할 순 없지만... 넌 황제폐하를 주시해줘, 이안.”
“뭐?!”
난 검하나 없다고...
억울한 표정의 이안을 보며 로빈은 고개를 돌렸다.
평소의 장난스런 표정이 깨끗이 사라진 채
날카로운 기사의 얼굴만이 남아 있었다.
“연회장 곳곳에 무장을 한 부하들이 있어.
위험한일이 생기면 그들이 너와 폐하를 보호할거야.
하지만 혹시나, 하는 일이 있을 수 있으니까.”
로빈은 씨익 웃었다.
“넌- 이 ‘레이크’가의 로빈이 인정하는 몇 안 되는 검사니까.”
“띄우기는-.”
귀찮은 표정이 역력한 이안에게 손을 흔들며 로빈은 연회장 밖으로 나왔다.
역시... 이 불쾌함, 침입자다...!
로빈은 온 몸의 신경을 집중했다.
봄축제중의 암살자라니...
나라전체가 움직이는 성대한 축제중에 소란을 피울 순 없었다.
-조용하고 은밀하게. 그를 잡아야 한다.
“으앗!!!”
궁전앞 정원을 수색하던 로빈을 향해 무언가 튀어오른건 순식간이었다.
가까스로 피했지만 로빈의 얼굴에 작은 상처가 그어졌다.
까만 복면을 쓴 마른체구의 남자는 로빈이 나타나자 당황한 눈치였다.
“호오- 드디어 나타나셨구만!”
로빈의 은발이 달빛에 비춰졌다.
남자는 당황했다. 저 은발은!!
그가 놀랄 틈도 없이 로빈의 검이 날카롭게 바람을 갈랐다.
남자가 재빠르게 그의 검을 피했지만
그런 공격에 몇 번이 계속되자 도저히 당해낼 수 없었다.
“이익..!!”
남자가 들고 있던 흙을 로빈의 눈에 뿌린 후에 달아나기 시작했다.
로빈이 그의 뒤를 쫓았다.
저 암살자 녀석! 결코 놓치지 않겠다!
근래에 잦아진 황제암살...시도.
그 조직에서 보내온 녀석이 틀림없었다.
결코 놓칠 수 없었다.
도망가던 남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 인적이 드문 건물에 숨어들어가 버린 것이다.
로빈은 난처한 듯 내뱉었다.
“하필이면... 후궁전이라니...”
“... ...”
슈엘의 시선은 오직 후안만을 향하고 있었다.
음악이 끝날 동안 슈엘은 더듬거리며 후안에게 많은 말들을 했다.
그러나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긴장했었어...
후안의 손을 잡기가 미안할 정도로
그와 맞닿은 손에 땀이 차있었다.
심장은 터질듯이 두근거려와서 가벼운 댄스임에도
숨이 차오를 정도였다.
그래도 잊을 수 없는 것이 있다면... 아마도 그의 눈동자.
매번 시선을 피하거나 차가웠던 심홍의 눈동자가 오늘만큼은
유난히 부드럽게 슈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슈엘이 웃음을 지으면 곧 시선을 돌리곤 했지만
곧 슈엘을 향해 돌아오곤 했었다.
슈엘은 천천히 그리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후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오랜 시간 가까이 그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기회는
흔하지 않으니까.
환한 불빛에 붉은 머리카락이 더욱더 아름답게 빛난다.
불꽃을 간직한 듯 선명한 심홍의 눈동자.
선이 확실한 턱이 더 날카로워진 것이 보이자 가슴이 아프다...
살이...빠지셨네요, 후안님.
‘내가... 당신을 힘들게 하는 걸까요.’
음악이 끝나가면서 슈엘은 웃는 게 점점 힘들어졌다.
이제... 끝나는구나...
한곡정도는 춰주실 수 있는 거겠지만
아마도 지금부터는 귀찮으시겠지.
너무도 아쉬운 마음에 슈엘은 눈썹을 찡그렸다.
음악이 끝날 때쯤 슈엘은 후안을 향해 미소 지으며
그의 손을 자연스럽게 놓았다.
... 너무도 힘들게 손을 떼었지만
정작 얼굴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연기를 한다.
“후안님... 감사합니다.”
한곡이면, 한곡이면 됐어요.
당신과 춤을 췄다는 것만으로 기쁘니까.
당신이 나를 귀찮게 여기질 않길 바라니까.
... 당신이 오늘 밤을 즐기길 원하니까...
그러나 정작 손을 떼는 슈엘의 행동에
후안은 기분이 나빠졌다.
뭐냐, 대체.
이 내가 손을 잡고 춤까지 신청해줬는데 어째서 이 녀석은..!!
불쾌했다!
겨우 단 한곡을 쳐놓고 이제 됐다는 듯 손을 놓는 그 모습이.
그리고 무엇보다도...
슈엘의 온기가 사라지자 드는 커다란 상실감이 싫었다.
“!!!”
그러나 슈엘은 찡그린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후안을 보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말았다.
내가 또 뭘 잘못한걸까...?
두 번째 곡이 시작되고 있었다.
앗차... 그렇구나...
“죄송합니다, 후안님!”
자신이 곁에 있으면 -아무리 밤의 반려라해도- 선
뜻 그에게 다가와 춤을 같이출 여인이 없을 터였다.
바보 슈엘... 왜 이렇게 둔할까...
슈엘은 바보처럼 헤헤 웃으며 후안에게 멀어졌다.
그가 불쾌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자 가슴이 욱씬 아려왔지만
그래도 그를 향한 시선만큼은 멈추지 않았다.
사람이 드문 2층의 테라스의 의자에 앉은 후 유리문을 닫았다.
유리너머로 화려한 연회장에 비추었고...
어느 곳에서나 도드라지는 붉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역시...".
슈엘이 구석의 의자에 앉자마자 아름다운 귀족의 젊은 아가씨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후안의 주위를 에워쌌다.
그중 한 여인의 손을 잡고 춤을 추는 후안의 모습...
예상했던 장면인데도 가슴이 아프다.
'제발 사라져,
이 이기적인 독점욕!!'
저 사람의 나의 사람이 아니다...
단지 내가 멋대로 좋아하고 마음에 품은 사람일뿐이야.
내가 멋대로 그가 원하는 반려라고 속이며
따낸 지위일 뿐. 나는...
그 사람에 대해 질투하면 안 되는 거잖아, 슈엘...
그가 날 바라봐주고 조금이라도. 조금이라도 날 생각해주면
그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잖아...
그것만으로도 나는....
“금방이라도 울 듯한 눈이로군요.”
“!!!”
슬픈 표정으로 후안을 바라보던 슈엘의 앞에 선것은...
멜이었다.
어느새 테라스로 온 멜은 슈엘을 올려다보며 싱긋이 웃고 있었다.
“흐음? 겨우 저런 장면정도로 상처를 받는 건가요, 슈엘왕자님?”
“... 상처... 받지 않았어요.”
너무도 뻔한 거짓말에 멜의 눈꼬리가 휘었다.
“다행이군요. 겨우 저 정도에 상처받는다면 아마 몇 년도 못가
왕자님께선 만신창이가 되버릴 테니까요.”
“무슨... 얘기를 하는 거죠?”
까만 눈동자에 불쾌함이 떠오르자
멜은 더더욱 재미있다는 듯 입을 열었다.
“폐하의 위치를 생각해보세요.
대륙을 지배하는 대제국의 젊은 황제죠.
아직 반려라고는 당신뿐이지만... 그것이 얼마나 오래 갈까요?”
“?!”
“폐하는 욕심이 많으신 분이예요.
아마 앞으로는 많은 반려들이 후궁에 들어가게 될 거예요.
지금은 당신이 유일한 반려라 주목받고 있지만
그것도 한순간이랍니다, 왕자님!”
... 몇 번이고 생각해본 일이었다.
생각해야만 하는 일.
나는... 그의 ‘유일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거...
알고 있었다.
후안님의 반려로 오기를 결심한 날부터... 알고 있었어...
아마도 이제 몇 주, 몇 개월 후면
이번에야말로 그가 선택한 아름다운 반려들이 올 테지.
... 후안님은 다른 반려들을 안으실 테고 날...
잊어갈거야.
하지만-
“나는 그에게 잊혀지지 않아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에게 찾아가
그에게 웃어줄거예요.
매일 잊지 않고 그에게 선물을 주고
...그가 날 귀찮아해도 뻔뻔스럽게 그의 곁에서
‘바보같은 반려’를 연기할거예요.
그가 누굴 안든 누굴 사랑하던 간에
아무렇지도 않게 웃을 수 있는
그런. 반려로 기억될 테니까...
“... 흥, 근거 없는 자신감이군요.”
인상을 살짝 찡그린 멜이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일생을 같이할 단한사람의 여인을
왕비님으로 맞이해도-?”
굳건히 버티던 까만 눈동자가 일순 흔들렸다.
그가... ‘단’한사람만을 사랑하게 된다면...
단 한사람만을 보며
웃고, 화내고, 슬퍼해준다면...
나는...
“이거야 원- 정말 건방지기 짝이 없는 사내로군.”
낮고 편한음의 목소리에 슈엘은 고개를 들었다.
슈엘의 눈에 멜을 쏘아보는 이안이 보였다.
“당장 사라져-.”
“!!”
멜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더니 이내 테라스 밖으로 멀어져갔다.
그러나 그 순간까지도 오만한 뒷모습을 보며
이안은 고개를 내저었다.
...만만히 볼 수 없는 녀석 이구만...
고개를 돌리자 의자에 앉아있던 슈엘이
멍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 이봐, 반려님.”
“... ...”
“....슈엘·알스·슈!”
“예엣!!!”
슈엘이 놀란 듯 고개를 돌리자
이안이 어이없다는 듯 한숨 섞인 웃음을 내뱉었다.
뭐냐, 도대체 이 녀석은...
겨우 그런 이야기 따위에 휘둘리지 말라고.
저런 남창 따위에게 휘둘리지 말란 말야.
“파트너가 바쁘신가보군, 반려님.”
“아, 음, 예... 아마도요...”
두 번째 곡이 끝나가는 중인데도
여전히 후안의 다음상대가 되길 기대하며 몰려있는 여인들을 보며
슈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문 너머로 두 번째 곡이 끝나자 이안은 슈엘의 손을 잡았다.
"이안님?!!”
“하하- 모처럼 니가 그렇게 기대하던 봄축제잖아?
좀더 즐기자고.
그렇게 풀죽어서 이 추운- 테라스에 숨어 있지 말고 말야.”
“!!!”
슈엘이 놀란 눈으로 이안을 바라보았고
이안은 슈엘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 나의 춤 신청을 받아주시겠습니까-?”
그러나 이안은 슈엘의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슈엘에게 향해 내민 팔을 갑작스럽게 잡아버린 손 때문이었다.
이안은 손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왠일로이 추운 곳까지 나오신 거죠, 형님?”
어느새 여인들을 제치고 테라스로 온 후안이었다.
“분명 말했다 이안. 내 소유물에 손대지 말라고.”
“하하- 깜빡 잊었네요.
반려님이 형님의 소.유.물.이란 사실을...”
일순 굳어지는 슈엘의 표정을 보면서
이안은 미안함을 느꼈지만 어쩔 수가 없다.
... 너를 상처 주는 일이 있어도
난. 너를 가지고 싶으니까.
이런 감정 또한 내 형님못지 않게 삐뚤어진
애정이란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너를 갖고 싶다는 욕망은 점점 강해져간다.
...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이안!”
“-후안님!!”
후안이 소리친 것과 동시에 슈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안이 고개를 돌리자 슈엘이 그를 마주보며 활짝 웃고 있었다.
방금 전 이야기 따위는 잊었다는 듯이
쾌활히 슈엘은 손을 내밀었다.
'.... 아주 작은 용기가 필요해, 슈엘.'
『 저와... 춤을 춰주시겠어요? 』
벙긋-벙긋-
소리 없는 말을 입술로 되내이는 슈엘을
후안은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 그 눈에 혹여나 불쾌감이나 혐오감이 있을까 무서웠지만
슈엘은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 정직한 까만 눈동자를 보며 후안은 치솟았던
이유모를 짜증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 한번정도는 나쁘지 않겠지.”
“... ... 정말...요?"
놀란 얼굴로 뒤묻고는 슈엘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지만
후안은 신경 쓰지 않았다.
단지 이 녀석이 자신에게 춤신청을 해주었다는 것에
웃음이 나올 만큼 기분이 좋아졌다.
차갑게 대답은 했지만... 후안은 분명 기뻐하고 있었다.
아까의 그 짧은 시간...
분명 훌륭하다고는 말 못할 슈엘의 춤솜씨였지만.
녀석과의 시간은 대단히 즐거웠다.
"헤헷, 이번에도 잘 부탁드려요, 후안님."
후안의 손에 따뜻한 온기가 맞닿았고...
세 번째 곡이 시작되었다.
정작 궁의 주인들은 넓고 아름다운 홀이 아닌
2층의 작은 테라스에서. 댄스라니-.
자신은 이미 싹 무시하며,
발을 맞추는 슈엘과 후안을 보며 이안은 한숨을 쉬었다.
"이거야 원, 언제나 예상 밖의 행동이잖아, 반려님."
자존심이 상했지만, 왠지...
지금의 이분위기는 끼어들기가 어려웠다.
오늘은 자신의 패배다.
이전과 다름없이,
아니, 오늘은 더더욱 흔들림 없는 슈엘의 시선에
이안은 조용히 테라스를 나왔다.
"젠장-. 가끔은 시선을 돌릴 순 없냔말야, 바보 녀석아-."
눈썹을 찡그리며 이안은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그나저나 로빈이 말한 위험한 낌새는 보이지 않는군.’
젊은 나이에도 뛰어난 감과 실력을 가진 은빛의 로빈·레이크·루
녀석이 밖으로 나가 잘 처리했는지 수상한 감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가슴한편에 피어오르는 불안감이 뭐지...
이안은 연회장을 나와 주변을 지키고 있는 병사에게 물었다.
“로빈 백작을 보지 못했나.”
갑자기 눈앞에 나타는 왕자의 출연에 병사는
당황한 얼굴로 급하게 말을 이었다.
“로빈 대장님께선 현재 암살자를 쫓아가셨습니다.
만약의 위험에 대비해 저희들은 이곳을 지키라는 명을 하셨습니다만..”
아아- 이 바보같을 정도로 충실한 친구라니.
제국 내에서 1,2위를 다툴 정도로 훌륭한 검술을 갖춘
녀석이라는 건 인정하지만 명색이 백작에 기사대장이라는 놈이
혼자 암살자를 쫓아가?
이런 말단은 형님과 귀족을 지키게 하고?
하- 언제야 철을 차릴 거냐 로빈·레이크!!
맨날 그렇게 위험한곳에 뛰어들다간 몸이 남아나지 않는다고.
넌 귀족의 거드름을 좀 피울 필요가 있어, 이친구야.
“어디로 쫓아간 거지?"
“저, 저쪽으로-.”
“?!”
이안은 그가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후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저 방향은.
-후궁전...인거냐?
******
“... 이거 정말 속 썩이는군.”
로빈은 한숨을 내쉬며 조용한 발걸음으로 후궁전 곳곳을 뒤지고 있었다.
봄축제의 첫날밤인데다
안 그래도 반려라곤 하나뿐이라
할 일없이 무료한 시녀들은 모두 후궁을 나갔다.
남아있던 몇몇의 병사들에게는 이곳에 들어온 놈이 나가지 못하도록
밖을 철저히 지키라고 한터라
텅텅 비어버린 후궁 전을 뒤져 암살범을 잡는 것은 로빈의 몫이었다.
의외로 쉽게 잡히겠다...라고 생각했던 것이 오산이었던가.
반려들의 침실 외에도 별의별 방을 갖춘 후궁전의 넓이는 혼자돌기에
그리 만만한 크기가 아니었다.
그때였다.
조용한 후궁 전에 날카로운 금속음이 들려온 것은.
[체에엥-]
분명 이 소리는..
검이 맞닿은 소리!!
로빈은 놀란 눈으로 소리의 방향을 찾았다.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던 곳에 더구나나 날카로운 금속음이라니!
게다가 이 소리는 아주 빠른 속도로
꽤 높은 수준의 검대결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리고... 소리가 멈추었나 싶더니 잠시 후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
[촤아아악-]
소리의 크기로 치자면 분명 작은 소리였다.
그러나 조용한 후궁 안에서 신경이 곤두선 로빈은
분명 들을 수 있었다.
이 소리... 사람을 베는 소리다!
로빈의 발이 더욱더 빨라졌다.
금속음과 함께 베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오고 있었다.
분명, 서로를 베며 싸우고 있는 것이다!!
한참후에 그는 어느 한방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이방은 분명-’
후궁 전에서 유일이 주인이 있는 곳...
방의 문패엔 슈엘·알스·슈 란 이름이 정갈히 적혀 있었다.
로빈은 침을 꿀꺽 삼키며 재빨리 문을 열었다.
반려의 방이라고 하기엔 소박한 방안엔 두 사람이 보였다.
피투성이가 되어 바닥에 쓰러진 사내는...아까의 그 암살자였고
또 한 사람은...
“... 당신... 이름과 정체를 밝히세요.”
손님이라도 맞듯 당당한 목소리.
달빛에 마법처럼 빛나는 금색의 머리카락.
천상의 천사처럼 아름다운 얼굴...
녹색의 눈동자가 차갑게 로빈을 비추며 말을 이었다.
“밝히지 않으면... 난....”
“?!!!”
로빈이 놀란 눈으로 쓰러지는 그를 안았다.
그의 하얀 옷엔 그의 피와 암살자의 피가
엉망으로 뒤섞여 있었다.
깊은 상처를 몸에 간직한 그는 정신을 잃는 와중에도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절대... 날... 황제에게 보이지.. 마... ”
“?!!”
로빈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사리엘-는 로빈에게 안겨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