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그럼... 다녀오렴. 슈엘.”
“응.”
사리엘의 마중이 평소와 다르다고 생각하며 슈엘은 문을 나섰다.
평소의 힘내- 라는 느낌이 아닌 건
나의 착각이겠지...?
이틀 동안 아프긴 했지만 변하는 건 없다.
아침에 도로 돌아와서 밀린 치까지 열심히 세공한
세 개의 보석이 담긴 주머니가 손에 들려 있었다.
제국에 와서 하루도 빠짐없이 만들어 후안님께 준 보석이
이제 서른세 개째...
한달이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봄이 다가와 아침의 햇빛은 따스했지만
역시 밤만큼은 아직도 영락없는 겨울이다.
후우- 차가운 입김.
“후안님은 내가 드린 보석을 가지곤 계신 걸까...”
혹시 버리거나 다른 사람에게 준 것은 아닐지 걱정은 되지만...
받아준것만으로도 나는.
기쁘니까-.
<< 반려로 맞아주세요 >>
“히야- 멋진 보석귀고린데? 반려님 것인가?”
“아...”
이안의 손에 들린 건 붉은 루비가 박힌 귀걸이...
잠옷 바람으로 돌아온 슈엘이 열심히 세공하던 보석중 하나였다.
주머니에 집어넣을 때 떨어진 건가.
“슈엘의 것...은 맞지만 그 애가 가질 것은 아니야.”
“... 형님께 드릴 선물이라도 되나보군.”
역시 눈치가 빠른 남자다.
그에게 다가가며 사리엘은 차가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가 받기에는 너무 아까운 물건이지.”
이안의 손에 들린 귀고리를 뺏으려는 사리엘의 손을 피하며
이안이 물었다.
“-왜...나를 경계해?”
사리엘의 곁으로 다가간 이안은
그의 얼굴을 감싸던 하얀 두건을 푸르며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내가 반려님 곁에 있으면 안 되나?
나는 황제에게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반려님의 최고의 조력자일 텐데?”
“넌- 위험하니까.”
두건이 바닥에 떨어지고 사리엘의 아름다운 얼굴이 나타났다.
우유처럼 새하얗고 투명한 피부와 맑은 녹색의 눈동자.
밤이 되어도 햇빛에 반짝이는 금발이 아름답게 사리엘의 얼굴을 감쌌다.
“사람좋은척해도 난 널 알아. 이안·루비젝트·란.
...넌 굉장한 욕심쟁이지.”
이안은 사리엘의 부드러운 입술을 매만지며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과찬인데, 사리엘왕자님? 그래서 본론은 뭐지?
내가 반려님을 욕심내기라도 한다는 건가?”
금빛의 속눈썹 밑으로 녹색눈동자가 전에 없이 냉정하게 빛났다.
“아니라는 듯 말을 하는군.”
“하아-?”
어이가 없다는 듯 이안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사리엘의 머리카락을 만지고 하얀 목에 살짝 입을 맞추며 그는 말했다.
“내가 원하는 건 너라고 했잖아, 사리엘...
난 너의 아름다움에 홀딱 반했다고...”
“... 원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은 달라, 이안.”
이안의 행동에 일말의 반응도 보이지 않은 채
여전한 무표정으로 금발의 왕자는 말했다.
“네가 앞으로도 슈엘에게 호감을 갖지 않는다고 어떻게 장담하지?
네 이름과 명예를 걸고 맹세할 수 있나?”
“... ...”
금색의 머리카락에 키스하던 행동이 멈춰지고
진지한 표정이 된 남자가 녹색눈동자를 직시했다.
잠시간 정적이 흐른 후 그는 말했다.
“지킬 수 없을지도 모르는 맹세 따윈 하지 않아.”
“...이안!”
사리엘의 볼에 짧은 입맞춤을 하며
이안은 테이블의 귀고리를 손에 쥐었다.
“미안 사리엘. 난 니가 꽤 맘에 들고
그 때문에 네가 원하는 건 들어주고 싶지만 어쩐지 그건 무리야.”
“...슈만은 안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단지 그럴 가능성...도 있다는 거지.
-이건 내가 전해주도록 할게.
... 그럼, 굿나잇- 알스의 왕자님.”
쾅.
닫힌 문을 바라보며 사리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후궁과 후안의 침소사이에 있는 정원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 슈엘은 고개를 들었다.
슈엘의 까만 눈동자에 드넓은 하늘이 펼쳐진다.
제국만큼이나 위풍당당한 밤하늘.
... 보라색과 자주색이 까만 밤하늘과 뒤섞인 너무도 멋진 하늘.
대지보다도 넓은 하늘 속에
빛나는 별들이 너무도 아름답다.
저런 별들이 언제나 자신을 바라봐주고 있다 생각하자
기분이 좋아진다.
매일 저녁... 후안의 방에 갈 때면 이렇게 하늘을 보며 용기를 얻고 있다.
그가 다른 사람을 안고 있어도 그를 향해 웃을 수 있는.
그런.
용기를...
“아프다더니 왜 나와있는거냐.”
“?!!”
기척소리도 없이 들린 목소리에 슈엘은 놀랐다.
아니, 놀라기에 앞서 심장이 먼저 반응해버렸다.
두근-
두근-
머리로 알 기전에 몸이 안다.
‘도저히 둔한 나라곤 생각될 수 없을 만큼-.’
뒤를 돌아보자 보인 익숙한 붉은 눈동자에 슈엘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당신만큼은..금방 알수가 있어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은 예전부터지만
금방이라도 눈물이 나올 듯 눈시울이 따가워지는 것은 근래의 일이다.
... 반려로 왔지만- 후안이 나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가 내가 아닌 다른 남자를 안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가 나를 강제로 안았을 때...
그런 일이 있은 후부터 언제나 이 남자를 보면
눈물이 나올 것처럼 눈가가 따가워진다.
심장이 처절히 울어댄다.
그런데 이 감정을 말할 수가 없어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해야 한다.
‘...그것이..참 많이 힘들어요...’
머릿속과 몸이 엉망인 와중에도 슈엘은 짧은 시간동안
후안의 모습을 가슴깊이 담고 있었다.
광대한 밤하늘에 아래, 그의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붉은 머리카락은 까만 하늘에 먹히지 않은 채
오히려 더 그 당당함을 뽐내고 있었다.
심홍의 눈동자는 여전히 두려울 것 없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이 대륙뿐 아니라 저 하늘마저도 자신의 것이라는 듯이.
“하하- 여전히 후안님은 멋져요...”
“뭐?”
후안이 인상을 찌푸리지만 슈엘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정말요... 밤하늘과 아주 잘 어울리는걸요. 아름.. 다울 정도인걸요...”
“... ....”
후안이 아무 말 없이 자신을 즉시하자 슈엘은 자신이 실수한 것을 깨달았다.
이런 말을 듣고 좋아할 분이 아니신데!!
또, 실수해 버렸어!!
바보, 바보!
그러나 능글맞게 이전 말을 취소할 정도로
능청스런 사람이 되지 못하는 슈엘은
더더욱 말을 더듬을 뿐이었다.
“아, 죄송해요, 후안님. 저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단지,
저는 후안님의 많은 모습을 보지 못해서...
오늘같이 밤하늘 아래에서 보는 건 처음이니까,
그게 너무 멋지.. 앗, 그게 아니고...”
당황해하는 슈엘의 모습을 보며
후안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말에 더더욱 당황한 차라 슈엘은 그 미소를 보지 못했지만
분명 경멸하는 그럼 미소가 아니었다, 그것은.
앓고 있다는 슈엘의 소식에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이 이곳으로 향했다.
단 한번도 밞아본 적 없는 후궁의 길을 밞으며 후안은 고민에 빠졌었다.
그 녀석이 아픈 것을 내가 왜 신경 써야 하냐고.
멈추지 않은 걸음이 멈춘 것은 저 멀리 보인 모습 때문이었다.
며칠 째 보지 못한 녀석이 까만 밤하늘 아래 서 있었다.
녀석을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겨우 이틀 새에 창백할 만큼 새하애진 얼굴이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달빛에 반사되어 빛나는 까만 머리카락.
까만 눈동자 속에 밤하늘을 가득 담는 듯
그렇게 하늘을 바라보는. 모습.
그런 그를 보고 말을 꺼낸 것은...
자신도 모르고 튀어나온 행동이었다.
매일 귀찮게 하는 이따위 녀석... 그냥 모른 척 하고 돌아왔으면 되는데.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밤하늘을 향한 녀석의 시선이
나를 향해주길 원하는 마음이 강하게 솟아났다.
“엇, 후안님...!”
서로를 어색하게 바라보다가 슈엘이 이제야 깨달은 듯 입을 열었다.
자신이 걸치고 있던 숄을 벗자
후안이 의아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날씨가 춥잖아요. 너무 얇은 옷만 걸치셨군요... 걸치세요.”
후안이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도 모른 채
슈엘은 그에게 다가가서
그의 넓은 어깨에 숄을 걸쳐주었다.
이틀 동안 지독한 감기에 시달려
아직 완쾌도 안된 데다 추위도 잘 타는 슈엘이었지만
그런 건 아무상관도 없었다.
그저 후안이 차가운 바람을 맞지 않게 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자신에게도 맞는 숄이니 그에게도 작지 않을 것이다...
후안의 어깨에 살짝 손이 닿자
슈엘은 놀라서 화들짝 손을 떼었다.
“!!!”
손이... 떨리는 것을
눈치채신 건 아니겠지...
심장의 두근거리는 소리나 뜨거워지는 눈시울은 감출 수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을 순 있어도
작게 떨고 있는 손만큼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모른 채 후안은 불쾌해졌다.
‘분명 손이 떨렸었다, 이 녀석.’
역시 날...무서워하는 건가.
지금까지 자신이 슈엘에게 한 행동을 생각하면
무서워한 다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런데도... 저런 반응은 짜증이 날정도로 불쾌했다,
불현듯 후안의 머릿속에 한 남자가 떠올려졌다.
[형님의 반려를 제게 주십시오.]
잠시 잊던 일이 생각나자 불쾌감은 배가 되었다.
이안의 이상할 정도의 관심이 생각나자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안과는 무슨 관계지?”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슈엘은 놀란 얼굴로 후안을 바라보았다.
사리엘과 친구라는 이야기만 빼놓고는 숨길게 없는 질문...
“며칠 전 아침에 우연히 인사를 나눈...”
“겨우 인사몇마디에 그녀석이 그런 말을 하나?!!”
슈엘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후안의 차가운 음성이 정원을 가득 메웠다.
슈엘은 도저히 후안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 그저 자신을 원망하는 듯한 눈동자에
가슴이 더욱 메여 왔다.
“그 외에도 또 무슨 일이 있었지? 나에게 숨기는 일이 있잖아?!”
“... ...”
형과 이안님의 관계를 눈치챈 것인가...
아니, 그럴 리는 없다.
그것을 알 리가 없어.
하지만 자신이 그에게 무언가를 숨긴다는 것은 사실이라
슈엘은 더더욱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뇨, 아무것도... 없습니다... 후안님.”
.... 당신에게는 아무것도 숨기고 싶지 않았는데.
그런데도 벌써 이렇게나 비밀이 생겨버렸다는 사실이.
내가 당신이 원하던 알스의 왕자가 아닌 것부터... 시작한
비밀이 너무 많아진 것 같아
-미안해요.
매번 그 심홍의 눈동자를 당당하게 바라보았던 슈엘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그럴 수 없어 고개를 숙였다.
“!!”
그러나 그것은 짜증이 치솟는 후안에게 있어서
기름을 붓는 것과 같은 행동이었다.
어떤 말을 해도 피하지 않던 그 눈길이 자신을 피하는 순간
후안의 분노가 폭발했다.
“대체 뭘 숨기는 거냐, 슈엘!!
밤의 반려로 끌려온 녀석 주제에!!“
“... ...”
가슴에 박혀오는 심한 소리에도 슈엘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지금이라도 소리치는 그에게 다가가 그를 안고
내 마음을 그에게 고백하고 싶었다.
모든 것을 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그 사실을 알면...당신이 나를 떠날걸 아니까.
나를 더욱 싫어할 것 을 아니까.
그래서... 나는 말할 수가 없어요.
“슈엘·알스·슈! 건방진 반려여-”
“?!”
슈엘의 팔을 후안이 거칠게 낚아챘고
슈엘이 들고 있던 주머니가 바닥에 떨어졌다.
슈엘의 얼굴 가까이에 자신의 얼굴을 가져간 후안이
미소라 할 수 없는 웃음을 지었다.
“아직도 내가 우습게 보이나 보군!”
“예?! 아뇨, 후안님, 그럴ㄹ...!!!”
슈엘이 반박하기도전에 후안의 혀가 들어왔다.
거칠게 들어온 혀가 슈엘의 혀를 유린했다.
어린아이를 다루듯 너무도 쉽게 입안을 탐닉해갔다.
저항하고 싶지만 저항할 수 없었다.
‘저항하란 말야, 슈엘!’
하지만... 아무리 사랑 없는 키스라해도.
그래도...
‘그’다.
... ‘그’의 키스야.
나는 이런 사랑 없는 입맞춤마저도 거절할 수 없어.
이런 내 행동이 경멸당할걸 아는데도
밀칠 수가 없어...
앞으로 언제가 될지 기약할 수 없는
그의 체취를 담아두고...싶은 욕심이 앞선다.
“하아... 웁?!”
범해진다는 표현이 맞을만한 거친 입맞춤 후에 숨을 쉴 틈도 없이
다시 한 번 입을 맞춰오는 후안의 행동에 슈엘은 당황했다.
익숙지 않은 키스가 너무 힘들었고.
그의 행동 또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조용한 정원 속에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온 건.
“반려님-!”
“.... ....”
“반려님, 어디 있는...”
이안이 슈엘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후안의 입맞춤이 멈춰지고 그의 입술이 떨어졌다.
슈엘은 거친 숨을 내쉬며 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하아...하아...”
세 사람 사이엔 슈엘의 숨소리만이 선명히 들려왔다.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바닥에 쓰러진 슈엘의 앞을 가로막으며
후안이 입을 열었다.
“이 녀석을 왜 찾고있는거냐, 이안.”
슈엘은 멀뚱히 이안을 바라보았다.
후안과의 키스장면을 들켰다는 부끄러움보다는 안도감이 앞섰다.
갑자기 화를 내는 후안은... 무서웠으니까...
아무리 헤헤, 하고 웃어도.
아무렇지 않은척해도 분노하는 후안에게만큼은
넉살좋은 자신을 연기할 수가 없었다.
또다시 사랑 없이 강제로 안기는 것은...
눈물이 나올 만큼 싫다.
“다시 한번 묻겠다, 이안. 왜 이 녀석을 찾은 거냐.”
“글쎄요, 왜일까요, 형님?”
손에 들린 귀고리 한 짝을 주머니에 숨기며 이안은 후안을 바라보았다.
이것만 주면 쉽게 끝날 일 이것만 어쩐지 주고 싶지 않았다.
화가 난 듯한 형님의 저 반응이 이안은 너무 흥미로웠다.
뻔뻔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안을 바라보며 후안은
눈썹을 잔뜩 찡그렸다.
저 녀석이 왜 슈엘을 찾는 거지?
차라리 그 시종을 찾는다면 아무 말 않겠지만
이 밤중에 후궁에서 나와 슈엘을 찾는 이안의 모습은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그 순간 후안의 머릿속엔 이상할 마치 슈엘을 원했던
이안의 모습이 생각났다.
장난처럼 가벼웠지만 분명 진지하게 그 녀석을 달라 말했었다.
“하-. 그렇게 된 건가?”
후안이 뒤를 돌아 자신을 보자 슈엘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 저 눈빛은... 처음 보는 눈빛... 이었다.
지금까지 자신을 보고 분노하거나 짜증을 냈을 때와는
다른...
눈빛...
-경멸의 눈빛이다.
지금껏 슈엘을 깔보는 말을 일삼았어도
저런 차가운 눈빛은 보인 적이 없는 후안이었다.
슈엘의 몸이 눈에 보일정도로 떨려왔다.
심홍의 눈빛에 섞인 전에 없는 차가움이 슈엘을 덮쳐왔다.
“... 형님. 지금 반려님에게 벌이라도 주고 있는 겁니까?”
후안의 고개가 돌려졌고 어느새 그의 곁에 다가온 이안이
그를 당당히 마주보고 있었다.
“반려님... 떨고 있잖습니까.”
이안은 흘깃 바닥에 앉아있는 슈엘을 바라보았다.
슈엘의 표정을 보자 하아- 하는 한숨이 나올 지경이다.
아침엔 그렇게 신나있던 녀석이...
아이처럼 즐거워하던 녀석이...
금방이라도 울 듯한 얼굴이었다.
까만 눈동자가 두렵다고...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이안이 슈엘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려던 찰나
후안이 슈엘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안. 적당히해라.
내가 내 것에 남이 손대는걸 용서할 만큼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라 는걸 알 텐데?”
“하하- 글쎄요. 제가 아는 형님은 자신이 하찮게 여기는 물건엔
남이 그걸 어떻게 대하건 무관심한 분이셨습니다만-?”
능글맞은 미소를 띠며 말하는 이안에게 후안은 할 말이 없었다.
이 녀석은 그런 물건이 아니야! 라고 외치고 싶지만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치 그것은 자신이,
슈엘을 소중히 여긴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기 때문에.
도저히 그런 말은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슈엘은 기다리고 있었다.
부디 그렇게 말해주길.
자신이 후안의 하찮은 물건이 아니라고... 말해주기를...
슈엘 ·알스 ·슈는 자신의...
.
“자신의 위치도 잊고 여러 남자들과 어울리는 더러운 녀석이다.”
반려라고
말해주기를..
“하지만 그렇다 해도 내 것에 손대는 건 용납하지 못해.“
“... ...”
슈엘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두근거렸던 마음조차
저 밑의 보이지 않는 어둠으로 사라져버렸다.
까만 눈동자는 이미 초점을 잃은 채
오직 심홍의 눈동자를 가진 그 사람만을 기계적으로 비취고 있었다.
반짝임이 사라진 무감동의 눈동자로.
‘여러 남자들과 어울리는 더러운 녀석’
그 말에 반박을 해야 하는데 슈엘은 도저히 그에게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이대로 입을 연다면 소리쳐 버릴 것이다.
[난 당신만을 사랑해요!
후안·루비젝트·알
내가 사랑하는 건
당신이야!!]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이 차가운 눈동자가 이제는 완전한 ‘혐오’로 바뀔 것 같아서
도저히 그런 말을 할 수가 없다.
겨우 붙잡고 있는 반려란 자리마저도 빼앗길 것 같아서
도저히 말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목을 타고 올라오는 뜨거운 것을 삼키며 슈엘은
힘들게 입을 열었다.
“...후안님.”
“?!”
방금 전 하늘을 보고 있던 때보다 훨씬 작아보이는건...왜일까...
어느 때보다도 작고-
그 봄빛같이 환한 존재감이 옅어진 슈엘이
후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까만 눈동자엔 슬픔을 가득한 채로.
“저... 이만 돌아가 볼게요...”
여전히 심홍의 눈동자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슈엘은 후안의 손을 잡았다.
“!!”
슈엘의 손이 애처로울 정도로 떠는 게 느껴지자 후안은 당혹스러웠다.
가슴이 저려올만큼...
슬픔 떨림이 슈엘의 손에 가득했다.
“이거... 사실 오늘 드리려고 했거든요. ... 받아주실거죠?”
떨리는 손으로 슈엘이 후안의 손에 쥐여준 것은 주머니...
이제는 익숙해진 보석을 담은 빨간색 주머니였다.
슈엘의 손이 후안의 손을 떠나자
그의 손에 남겨진 주머니의 무게는 너무도 무거웠다.
어느 때보다도... 묵직하게 그의 손에 남았다.
그리고 이안을 등지고 후안을 향해 돌아선 슈엘은 입을 움직였다.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겠다는 듯이.
이 말은 당신만이 들어주었으면 하는 듯이.
『 오늘도... 좋은 밤 되셔야 해요... 』
슈엘은 생긋이 웃었다.
아무리 슬퍼도 지을 수 있게 연습한 웃음-.
그리고 뒤를 돌아, 쓰러질듯이 기운 없는 모습으로 슈엘은 걸어갔다.
후안에게 점점 멀어져갔다...
“... ....”
슈엘의 뒷모습을 보며 이안은 손을 잡아주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손을 잡고 쓰러질 듯한 저 몸을 자신에게
기대고 싶은 감정이 솟아났다.
이렇게 안쓰럽고 이렇게 가슴 아픈 적은 처음이다.
모진 소리로 저 녀석을 쫓아 보내는 형님이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작은 원망을 담아 후안을 보는 순간 이안은 놀란 얼굴이 되었다.
“?!”
저... 표정은 뭐지...?
멀어지는 슈엘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후안의 얼굴.
얼핏 보면 그저 차가운 눈동자겠지만 이안은 눈치 빠른 자였다.
심홍의 눈동자에 숨겨져 있는 감정을 읽어낼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어찌할 줄 모르는 아이의 눈...이다, 저것은.
무언가에 너무나 서툴러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런 눈동자.
혼란스런 감정과 슬픈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분명.
‘설...마....’
형님...
저 녀석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