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북부에서 햄스터 난다 (2)
파르라니 빛나는 시스템 창엔 꿈같은 말이 적혀 있었다.
‘내가 이야기의 결말을 ‘선택’할 수 있다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그리고 경우의 수에도 두지 않았던 기회였다. 수치가 다 차면 내 의사와는 관계없이, 당연히 돌아가게 될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선택할 수 있다는 건 즉, 앞으로 내가 머무를 곳을 결정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 내가 머무를 곳.
이제는 내 보금자리가 된 카일의 곁에.
“…….”
심장이 쿵쿵, 내 귀에도 들릴 만큼 크게 뛰기 시작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시스템 창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섣불리 그것을 누를 수는 없었다.
[동기화]라고 쓰인 버튼을 마주하자, 문득 현실 세계에 있는 내 몸에 대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죽는 건가?’
따지자면 영혼은 이쪽에 있는 거니까, 현실 세계의 나는 이 선택으로 인해 죽은 사람이 될 것이다. 삼촌과 절연한 뒤론 무연고자나 다름없으니, 어차피 찾을 사람도 없을 테지만.
문득, 지난 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떠올려 보면 삶에 그렇게 나쁜 사람들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분명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은 적도, 반대로 내가 도움을 준 적도 있었다. 그저 깊게 얽히고 감정을 나눌 사람들이 없었던 거지.
내 시선이 자연스럽게 센을 향했다. 뒤이어 벨리알, 그리고 그 옆에 조금 어색하게 서 있는 제임스나 다른 기사들. 마지막으로 방에 들어온 직후부터 벨리알은커녕 줄곧 나만 바라보고 있었던, 카일에게로.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눈이 마주쳤다. 어정쩡하게 뜬 내 검지는 여전히 시스템 창에 닿지 않고 있었다.
먼저 입을 연 쪽은 카일이었다.
“슈.”
그가 성큼성큼 다가와 나를 번쩍 안아 올렸다. 나는 상황도 잊고 입을 쩍 벌리며 카일을 향해 소리 죽여 외쳤다.
“……전하!”
그러나, 어쩐 일인지 이목은 잠시 쏠렸다가 금방 흩어졌다. 마치 ‘이런 일이 한두 번인가’라는 양.
“치료부터 하지.”
나는 센과 벨리알이 있는 쪽을 힐끔 바라봤다. 상체를 일으켜 앉은 벨리알은 센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그녀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있었다.
무언갈 중얼거리는 것 같았으나, 워낙 작은 소리인 데다 목이 오래 잠겨 있던 탓에 잘 들리진 않았다. 다만, 눈물을 쏟아 내면서도 환하게 웃고 있는 센의 얼굴을 보자니 나쁜 내용은 아닌 것 같았다.
카일은 내 어깨가 부딪치지 않게 손으로 살며시 감싼 채 방을 벗어나 응접실로 향했다. 지금껏 우리가 늘 밀회 아닌 밀회를 나누곤 했던 그 장소였다.
그러고 보니 나중에 알았다. 원래 이곳엔 구급상자 같은 거라곤 없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카일이 나를 위해 가져다 놓았다는 걸.
그는 나를 소파에 내려놓고 익숙하게 구급상자를 꺼냈다. 그즈음엔 ‘잣이 콕콕 진통제 곶감 말이’의 효력도 다해서 알싸한 고통이 밀려들고 있었다.
“윽…….”
내가 이를 꽉 깨물고 낮게 신음하자, 카일이 얼른 소독약과 붕대를 꺼냈다.
“씁, 아야야…….”
아팠다. 그것도 무지하게.
상처를 치료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는지 카일은 자비 없이 피를 닦고, 더 자비 없이 소독했다.
덕분에 어깨, 손, 다리 어느 곳 하나 성한 곳 없이 붕대를 칭칭 감게 되었다.
“사감이 담기신 것 같은데요, 전하.”
“내 사감이라면 너를 향한 사랑이겠지.”
“……할 말 없게 하시네.”
삐죽거리던 입을 집어넣고 꼼꼼히 묶인 매듭을 매만지고 있자니 그가 구급상자를 정리했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그의 손목을 콱 낚아챘다.
“어허, 동작 그만. 전하도 치료하셔야지 어딜 그냥 넣으세요.”
“처리해야 할 일이…….”
“그거 좀 치료하고 간다고 안 늦습니다.”
나는 기어코 구급상자를 열어 그의 상처를 돌보기 시작했다.
목에 난 얕은 상흔부터 허리에 길게 난 창상까지. 그리고 허벅지를 할퀴고 간 마법의 흔적 위에도 꼼꼼히 연고를 발랐다.
약이 잘 스며들라고 붕대를 감았더니 카일 역시 나 못지않은 미라 신세가 됐다.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그건 서로의 꼴이 우스웠다기보다는 무사히 살아남았다는 안도의 웃음이었을 것이다.
“센이 행복해 보여서 기분 좋더라고요.”
나는 소파에 몸을 기대며 흘러가듯이 중얼거렸다.
“당연히 그래야 마땅한데, 누리지 못했던 거잖아요. 오랜 시간 고생하기도 했고, 또 많은 것을 잃어도 봤고.”
처음 만났을 때도 그녀는 밝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냥 씩씩하다는 표현에나 어울릴 만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조금 전 본 그녀의 얼굴은 그때의 얼굴과는 비교도 되지 못할 만큼 환하고 아름다웠다. 행복이라는 단어를 형상화한다면 딱 그렇게 생겼을 만큼.
“너도 그래.”
한 박자 늦게 카일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네?”
“너 또한 내게는 행복해졌으면 하는 사람이다.”
무척 일상적인 어조였다. 일견 담담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들릴 목소리. 그러나 진심이 눌러 담긴 그 말은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부드럽게 간질였다.
“…….”
문득, 목이 메어 곧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행복해졌으면 하는 사람. 여태 누군가가 내게 그렇게 말해 준 적이 있었는지는 굳이 생각해 보지 않아도 분명했다.
많은 사랑을 받았다. 너무도 과분해서 무겁게 느껴질 정도의, 그렇지만 그 무게를 결코 내려놓고 싶지는 않은 사랑이었다.
나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헛기침을 몇 번 한 뒤에야 겨우 한 마디를 꺼냈다.
“전하도 제게 그런 사람이에요.”
그 어느 때보다 더 큰 진심을 담아서.
“그래.”
카일이 낮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부드럽게 맞물렸다.
나는 눈을 감았다. 온 세계에서 그의 존재만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벨리알의 재활 치료는 센의 주도 아래 수월하게 흘러갔다. 처음에는 갓 태어난 사슴처럼 픽픽 쓰러지던 그가 고작 일주일 만에 벽을 짚고 걸을 수 있는 지경까지 왔으니, 그녀가 얼마나 고생했을지는 불 보듯 뻔했다.
물론, 벨리알도 퍽 고생하는 것 같았지만.
“벨리알 전하! 조금만 더 드시라니까요. 아이참. 슈가 전하 드신 것의 두 배는 먹었겠어요.”
“……아니. 저쪽은 원래 많이 먹지 않나.”
“그래서 안 드시겠다고요?”
“…….”
“자. 아, 해 보세요. 아.”
“……아.”
오늘도 센의 단호하고도 맑은 눈동자에 못 이긴 벨리알이 입을 벌렸다.
나는 신선한 토마토와 양상추를 가득 넣은, 그러니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샌드위치를 씹다 말고 멈추었다.
‘이게 이런 기분이었나?’
어쩐지 카일과 연애를 막 시작했을 때, 블레이크의 사용인들이 나만 보면 다 시선을 피하던 때가 생각났다.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거지. 특히, 카일의 대외적인 이미지를 생각하면 괴리감을 느끼지 않는 게 더 이상하다.
그래. 이해한다. 닥쳐 보니 알겠다. 이게 꽤 눈꼴이 시리고 섬찟섬찟 소름이 돋는 행위라는 걸. 뭐, 그래도 행복해 보이니 기분은 좋지만.
“아, 맞다. 슈. 가는 길에 카일 전하께 서류 하나만 전해 줄 수 있어? 책상 위에 놓아뒀는데.”
“그래. 그러지, 뭐.”
어느새 그릇과 물컵을 치우던 센이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그녀가 부탁한 서류를 들고 문을 나섰다.
“안녕하십니까, 슈 님…….”
“안녕하세요, 슈 님…….”
“좋은 점심입니다…….”
복도에서 마주친 사용인들은 죄다 비쩍 말라 있었다. 얼마나 혹사당했는지 얼굴이 푸석한 걸 넘어 생기조차 없었다.
이들이 왜 다 이런 꼴인가 하면, 그 대답이야 단순했다.
승리를 했어도 전쟁은 전쟁이다. 성벽이 부서지고, 나무가 쓰러졌으며, 적지 않은 피를 흘렸다. 게임에서야 그저 이기기만 하면 차후는 생각하지 않아도 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블레이크의 모두는 지금 어느 때보다도 혹독한 계절을 지나고 있었다. 특히,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를 몰골의 제임스가 제일.
“…….”
나는 제임스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반사적으로 그의 수명을 확인했다.
[조회할 수 없는 인물입니다!]
힘들게 살려 놨더니 과로로 죽는 건 아니겠지? ……에이, 그럴 리가.
“아.”
비틀거리며 다가오던 제임스가 내 어깨와 부딪혔다. 어찌나 힘이 없는지 내가 아니라 그가 밀렸다. 근육이 저토록 우락부락한 사람이…….
“괜찮으세요?”
“괜찮습니다.”
아닌데. 안 괜찮은 것 같은데.
그러나, 내가 걱정스럽게 바라보든 말든 제임스는 산송장처럼 걸어갔다.
‘조만간 기력에 좋은 아이템이라도 몇 개 챙겨 주든가 해야겠다.’
그렇게 복도를 지난 나는 익숙한 문 앞에 섰다. 쥐 죽은 듯 고요했지만, 안에 누가 있는지는 명확했다.
“들어갑니다.”
두 번의 노크와 함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남쪽으로 난 커다란 창에서 환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리고, 그 빛을 등진 채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내가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사람. 카일 블레이크가.
“슈.”
그가 안경을 벗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기분 좋게 웃으며 그에게로 팔을 뻗었다. 카일이 내 몸을 받아 안으며 마주 웃었다.
“넘어지면 어쩌려고.”
“전하께서 받아 주실 건데요, 뭘.”
“그건 그렇지만.”
절대로 놓지 않겠다는 듯 나를 끌어안은 팔에 단단히 힘이 들어갔다. 나 역시 그의 목을 더 바짝 끌어당기고 나지막이 웃었다.
허공에는 시스템 창이 떠 있었다. 어딘가 시무룩하고 미안해 보이는 시스템의 이모티콘 옆에 [정산 완료]라고 적힌 창이었다.
[현재 기적 수치 100%]
그래. 비로소 선택해야 할 시간이 왔다.
어떤 삶이 진짜 내 현실이 될 건지.
때마침 ‘불러오기’의 시간이 다 되어 밝은 빛이 내 몸을 감쌌다. 카일이 팔을 느슨히 풀고 양손을 오목하게 모았다. 나는 익숙하게 그곳으로 내려앉으며 햄스터인 채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시선이 마주쳤고, 우린 조금 침묵했다.
그러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치 이 말을 아주 오랫동안 품고 있었던 사람처럼. 또, 연습한 사람처럼.
“이제 너도 이 불편한 생활을 끝낼 때가 되었겠지.”
덤덤한 체하면서도.
“괜찮을 거다, 슈. 서로가 어디에 있든.”
조심스럽고.
“내가 널 사랑한다는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니까.”
다정하게.
북부대공의 햄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