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북부에서 햄스터 난다 (1)
아주 잘 벼린 날이었다. 로렌츠의 성정과 그 날카로운 욕망처럼.
센이 휘두른 검은 정확히 로렌츠의 가슴을 꿰뚫었다. 그녀가 수없이 귀를 대어 보았던, 벨리알의 심장이 있는 부위와도 같았다.
“…….”
센은 천천히 검을 놓고 비틀거리며 한 발자국 물러났다. 덜덜 떨리는 주먹을 꽉 쥔 채, 마지막까지 로렌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비로소.
째깍.
멈추어 있던 시간의 아주 작은 틈새로부터 다시금 세상이 흐르는 소리가 났다.
*
아주 찰나라고 느껴진 순간이었다. 나는 얼른 고개를 들고 센과 로렌츠를 찾았다.
센은 반듯하게 서 있었다. 어딘가 위태로워 보이지만,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땅을 디디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굳세었다. 왜인지 알 것도 같았다. 사람은 지켜야 할 것이 있다면 강해지는 법이니까.
반대로 로렌츠의 몸은 너무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흰 눈밭으로 쓰러졌다. 무릎이 닿고, 고개가 숙어지고, 끝내 몸이 완전히 엎어졌다. 그가 엎어진 곳에서부터 시작된 붉은 피는 센을 지나 카일의 발치에 닿았다.
카일은 그제야 움직였다.
그는 곧장 로렌츠에게 다가가 죽음을 확인했다. 주변은 고요하고, 하늘에서 내리기 시작한 눈만이 사락사락 쌓이는 소리가 났다.
한참 로렌츠를 살피던 카일은 잠시 후, 허리를 폈다. 그러고는 로렌츠를 따라 북부까지 온 사람들에게 소리를 높여 외쳤다.
“황제는 죽었다.”
짧은 그 한마디로 모든 상황이 정리되었다. 로렌츠를 따르던 병사들 모두가 전의를 상실했다.
“무기를 버리고 투항해라. 블레이크는 투항하는 자를 해치지 않는다.”
그 목소리에 병사 중 절반이 망설임 없이 검을 놓았고, 나머지 절반은 저들끼리 눈치를 보며 잠시간 머뭇거렸다.
그때, 정신을 차린 센이 검을 높이 들며 외쳤다.
“로렌츠 세레나 마인하르트를 믿지 마라! 황제는 선황제를 저주했고,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을 위해 마인하르트의 백성들을 마법의 제물로 바쳤다! 그 증거가 블레이크 성에 있다!”
갈라지고 쉰 목소리가 이어서 말했다.
“너희들이 받들던 긍지는 허상에 불과하다! 우리는 반역을 준비하지도 않았고, 벨리알 전하는 의식조차 찾을 수 없는 상태니까!”
의미 없는 싸움일 뿐이다. 그렇게 하찮은 존재로 전락하여 죽는다 한들, 누구도 그 용기를 가상하다 치하하지 않는다.
현실을 깨달은 병사들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그보다 앞서 무기를 내려놓은 이들이 순순히 성으로 따라가는 모습을 보자 더욱 그랬다.
카일이 근엄하게 말했다.
“포로들을 지하 감옥에 데려가라. 신원을 확보하고, 음식과 물을 나눠 주어라. 치료가 필요한 이들은 따로 가두고 적절한 조처를 한다. 철저히 감시하되, 함부로 고문하지 않는다. 알겠나?”
“예, 전하!”
“남은 인력은 시체를 수습한다. 내일 한꺼번에 장례를 치를 것이다!”
“대공 전하의 명을 받듭니다!”
나는 그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어둠이 차곡차곡 내려앉은 벌판 위, 오로지 사람으로 인해 벌어진 비극을 살아남은 이들이 정리하고 있었다.
카일 역시 로렌츠의 시체를 수습하라고 명령한 뒤, 제게 가까이 있는 병사를 수습해 들어 올렸다. 한없이 진지한 얼굴이었다.
이겼다.
그리고 살아남았다.
긴장이 풀리며 현실감이 찾아왔다. 몸이 덜덜 떨리고 고통이 찾아왔다.
“슈.”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카일이 내 어깨를 조심스럽게 감쌌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정리는 알아서 할 테니, 센과 미리 들어가 있어라.”
“괜찮습니다.”
카일은 대답 대신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내 왼팔을 조심스레 들었다. 볼품없이 떨리고 있는 내 손이 시야에 들어왔다.
“네 덕에 북쪽 방비를 무사히 해낼 수 있었다. 그러니, 지금은 돌아가서 쉬어도 돼.”
“전하는…….”
피투성이가 된 그의 모습이 유독 아프게 담겼다. 어깨며 목덜미, 뺨에 베인 상처가 보였다. 손은 누구 것인지 모를 피로 흠뻑 젖어 있어 붉지 않은 부분이 없을 정도였다.
나는 말을 흐리며 견과류 상점을 열었다. 주욱 늘어선 목록을 오래 볼 것도 없이, ‘잣이 콕콕 진통제 곶감 말이’를 입에 욱여넣었다. 곧, 아픔이 가시며 떨림이 잦아들었다.
이어 ‘호두껍질 속 부드러운 연고’를 하나 산 나는 연고를 그의 뺨에 발라 주었다.
“이게 뭐예요. 다치기나 하고.”
“면목이 없군. 걱정할 것 같아 최대한 덜 다치려고는 했다만.”
카일이 살짝 웃으며 내 손길을 받아들였다. 그러더니 연고 통을 쥐고 있는 내 손에 자신의 손을 얹더니 내용물을 조금 덜어, 내 이마를 문질렀다.
“어깨는 바로 의사를 찾아가. 센이 안내할 거다.”
그때, 우리의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울렸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제임스였다.
그는 커다란 자루 하나를 들고 있었는데, 덜 닫힌 입구에서 희미한 푸른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북쪽은 거의 정리가 끝났습니다. 핵은 따로 모았고요. 슈 님께서 따로 쓰신다고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더는 싸울 일이 없을 것 같기는 하지만, 행운 수치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나는 고마움을 담아 짧게 웃어 보이고는 자루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현재 보유 현황 | ♣ x 3000]
행운 수치가 정확히 3000이 되었다. 공교롭게도 ‘행운의 자명종’을 살 수 있는 수치였다.
‘문제는 그걸 어디다 쓰는지 모르겠다는 거지…….’
마음 같아서는 카일의 곁에 더 머물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나를 계속 신경 쓰는 것 같아서 센과 함께 먼저 성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녹스도, 로렌츠도 죽었으니 이제 카일이 위험해질 일은 없겠지.
[밀린 기적 수치는 원할 때 한꺼번에 정산됩니다.]
[새로운 알림 약 33건.]
[새로운 알림 약 64건.]
[새로운 알림 약…….]
[정산 진행 중. ‘카일 제인 마인하르트’의 예상 사망 시간을 조회할 수 없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잠깐, 잠깐!”
싸우느라 정신없어서 시스템 창 좀 안 봤다고, 이렇게까지 한꺼번에 밀려올 일이야?
내가 허공에 대고 버럭 소리치자, 함께 성으로 돌아가던 센이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일이야? 어디 아파, 슈?”
“……아니, 그건 아니고.”
내가 어물거리자 말의 앞에 앉아서 고삐를 쥔 센이 희미하게 웃었다.
“어깨가 많이 아프겠지만 조금만 참아. 바로 의사에게 보이자.”
곶감 말이를 먹어서 별로 아프진 않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너도 손을 삔 것 같던데. 같이 치료해.”
그러자 그녀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네가 치료하고 있으면…… 나는 벨리알 전하께 다녀와서 받을게.”
“응?”
“말해 줘야지. 전쟁이 끝났다고.”
다각, 다각, 다각. 침묵 사이로 말이 발을 옮기는 소리만이 선명했다.
센의 목소리는 조금 흔들리고 있었다.
“원수를 갚았다고. 이번에도 너와 전하의 도움을 받았다고. 블레이크 영지의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길바닥에서 처참하게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전부 말해야지. 전하께서도 고마워하실 거야.”
나는 저도 모르게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 성격에?”
“아하하. 혹시 모르잖아. 다시 눈을 뜨면 사람이 변할지도. 죽을 뻔하기까지 했는데.”
센이 먼저 말에서 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행운이 도와준다면 언젠가는 전하께서 일어날지도 몰라. 몸은 다 나았거든. 카일 전하께서 보내 주신 의사의 말로는 영혼의 문제일 가능성이 크대.”
기적이 일어나면 눈을 뜰 수 있다. 몸의 문제가 아니다. 영혼이 잠들어 있을 뿐이다.
나는 행운 코너에서 보았던 한 줄을 떠올리고 우뚝 굳었다.
[행운의 자명종 | ♣×3000 | 영혼까지 깨워주는!]
그래.
이제 이 물건이 대체 왜 내게 찾아왔는지 알 것 같았다.
“……센.”
나는 그녀의 팔을 잡으며 간절하게 외쳤다.
“벨리알, 지금 어디 있어!”
*
푸른빛을 띤 자명종은 너무 작았다. 그건 시계라기보다는 그저 태엽 조각에 더 가까운 모양새였다.
나는 얼음 결정처럼 차가운 자명종을 잠시 만지작거리다가, 느리게 숨을 내쉬는 벨리알의 가슴팍에 살짝 올려놓았다. 창백하게 질린 벨리알의 얼굴 위로 파르스름한 빛이 어렸다.
내게서 자초지종을 들은 센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벨리알의 머리맡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녀는 벨리알의 손을 양손으로 꼭 쥐고는 그곳에 이마를 가져다 대며 간절하게 속삭였다.
“전하. 일어나세요. 슈가 깨워 주겠대요. 그럴 수 있대요…….”
작은 태엽이 천천히 녹아 가며 그의 안으로 흡수되었다.
“……우리 몫의 기적이 남아 있나 봐요.”
센의 눈가에 어룽진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슈, 고마워.”
“…….”
“넌 정말 기적 같은 존재야.”
“아니.”
나는 움찔, 떨리는 벨리알의 눈꺼풀을 내려다보며 작게 속삭였다.
“나한테는 이 세계가 기적이었어.”
[중간 정산이 완료되었습니다.]
[원작에는 없는 인물, ‘센’이 등장했습니다.]
[원작에는 없는 인물, ‘벨리알’이 등장했습니다.]
[해당 인물들의 예상 사망 시간을 조회할 수 없습니다.]
[인물의 변화에 기여한 만큼 ∞㏄¿ 수치에 반영됩니다.]
센에게 말해 주고 싶었다.
네 인생은 한 권의 소설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너는 소설 속에서도 행복한 결말을 기어코 손에 넣을 만큼 대단한 사람이니까, 이야기 밖으로 나가 버린 뒤에도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고.
어느새 나는 네게도 정이 들어 버렸다고.
하지만, 이런 순간만 되면 말주변이 없어지는 나는 그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고마워.”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센은 내 눈에서 내가 하고 싶었던 모든 말을 들었다. 그녀가 행복하게 웃었다. 동화책의 공주님처럼.
그리고,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벨리알과 내 사이로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당신은 이 ‘이야기’의 ‘결말’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원한다면.]
북부대공의 햄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