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앞에서 꼬리 치는 햄스터가 뒤에서 발꿈치 문다 (4)
온몸을 두드려 맞은 것처럼 아팠다.
어깨와 이마에서 피가 쏟아졌고, 속은 누군가 진탕 헤집은 것처럼 울렁거렸다. 마치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듯한 기분이었다.
정제되지 않은 숨과 거센 기침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입안에 찝찔하고 불쾌한 피 맛이 감돌았던 것도 같다.
“……하아, 하…….”
나는 흐린 눈앞을 어떻게든 다잡으며 뻣뻣하게 얼어붙은 손아귀를 억지로 폈다.
그러나 바닥으로 떨어져야 할 피 묻은 비수는 녹스의 숨이 다하는 순간, 한 줌 빛으로 변해 사라졌다. 시전자가 죽음과 동시에 형상화한 마법도 사라진 모양이었다.
‘그럼, 변이종 마수들도 멈췄나?’
나는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는 눈꺼풀 위를 대충 문지르곤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잠시, 새하얀 눈밭을 검붉게 물들인 녹스에게로 시선을 두다가 단호하게 고개를 돌렸다.
동정할 것 없다. 나를 죽이려 했던 상대다. 무엇보다 이 전쟁의 원인이었다. 어쭙잖은 죄책감을 느낄 필요도, 애도하고 있을 시간도 없었다.
“……아직, 카일이 전장에 있어.”
내가 지켜야 할 사람이 저곳에 있었다. 나는 이를 악문 채 발을 끌다시피 움직였다.
어디 타고 갈 거라도 있었으면 좋겠는데…….
“슈 님!”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등 뒤에서 제임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역시 엉망인 몰골로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오른손에는 검을 쥐고, 왼손에는 말고삐를 쥔 채.
“푸훗.”
“…….”
“풋, 아하하. 푸핫, 하하…….”
그럴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맥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 상황이 너무 황당하고, 뿌듯하고, 짜증 나고, 기쁘고, 슬프고, 이상하고, 어처구니없었다. 나도 모르는 내 감정이 뒤죽박죽 섞여서 터져 나온 것만 같았다.
제임스도 나와 비슷한 얼굴이었다. 그 와중에도 그는 최대한 침착하게 고삐를 건넸다.
“안전한 곳에서 기다리시라고 해도 안 들으시겠죠.”
웃음기가 채 가시지 않은 얼굴로 내가 답했다.
“전하 곁이 제일 안전해서요.”
“그건 맞네요. 이 북부에서 카일 전하의 곁만큼 안전한 곳은 없죠.”
“…….”
“전하를 잘 부탁드립니다.”
말에 오르는 내게 제임스가 말했다.
“외람된 말일지도 모르나…… 전하께서는 슈 님의 곁에 계실 때 가장 행복해 보이셨습니다.”
“제임스 경.”
“너무 오래 외로웠던 분입니다. 이 차가운 땅까지 떠밀리듯이 오셔서 겨우 이곳에 마음을 붙이셨습니다. 저희는 전하의 쓸쓸함을 덜어 드릴 수는 있었지만, 전하를 그렇게 웃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
“슈 님은 이 영지의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해내셨지요. 그러니까…….”
제임스의 간절한 시선에 어쩐지 울컥한 나는 고삐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온몸이 욱신거리는 와중, 눈두덩의 시큰거림이 유독 선명하게 느껴졌다.
“전하의 곁을 지켜 주십시오.”
나는 제임스를 내려다보며 다짐하듯이 말했다.
“네.”
그건 그에게 하는 말이자,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제가 지킬 거예요.”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
모진 삭풍이 끝없이 불어오는 밤이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벌판 위에서, 카일 블레이크는 미친 듯이 앞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의 팔이 허공을 거칠게 가를 때마다 눈송이가, 차디찬 겨울바람이, 그리고 그의 앞을 겁 없이 막아서던 이들이 베여 쓰러졌다.
카일은 투항하는 이들을 상대로 적의를 태우지 않았다. 무기를 버리고 엎드리는 이들은 북부의 병사들이 재빨리 끌고 갔으며, 전쟁 포로의 고문은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적이 된 이들은 결코 살려 두지 않았다.
그의 검은 정확히 숨통을 베어 넘겼고, 쓰러진 이에게는 시선조차 두는 일이 없었다. 누군가의 명령 때문에 맥없이 목숨을 던지는 이들을 동정하고 싶지 않았다. 정말로 걱정되는 사람은 따로 있었으니까.
“쓸데없이 피를 흘리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
카일이 검을 곧게 뻗었다. 길쭉한 검신에서 붉은빛이 불길처럼 타올랐다.
난장판 속에 고고히 서 있던 로렌츠 또한 몸을 돌려 카일을 바라보았다. 그의 녹색 눈동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음울하고 권태로운 빛을 벗어던진 채였다. 그의 갑주 역시 피로 반쯤 뒤덮여 있었다.
“그래. 여기까지 올 줄 알았지.”
로렌츠의 눈이 기회를 잡은 짐승처럼 음험하게 번들거렸다. 카일은 황성에서 나고 자란 이들이 종종 그런 눈빛을 하는 것을 본 적 있었다.
“이제는 체면을 차릴 필요가 없어졌거든.”
“반역을 운운하지 않았던가?”
로렌츠가 검을 크게 떨쳤다. 북부의 피가 설원에 엉망으로 뿌려졌다. 카일은 그 식지 않은 피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았기에 저도 모르게 인상을 구겼다.
“그건 그냥 체스 말을 움직이는 사소한 비용 같은 거지.”
황제가 오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식으로 헐값을 치르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다. 기나긴 생명을 손에 거머쥐고 나면, 나는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어지지.”
영원 속에서 모든 것은 하찮아질 테니까.
카일은 로렌츠의 말뜻을 이해했지만, 동시에 그의 속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모든 의미와 가치를 잊는 영생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결국, 욕망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 텐데.
“그때, 너를 죽였어야 했는데.”
로렌츠가 낮게 말했다. 카일 역시 웃음기 없는 말투로 응수했다.
“같은 생각이다.”
검게 얼룩진 로렌츠의 검과 붉은빛에 둘러싸인 카일의 검이 격돌했다.
두 사람은 한 치도 물러나지 않고 치열하게 부딪쳤다. 부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상대의 목숨만을 집요하게 노렸다.
카일은 로렌츠의 검술 곳곳에 배어 있는 그의 비열함을 보았다.
벨리알과는 영 딴판이었다. 벨리알이 차남이라는 신분을 극복하기 위해 더욱 노골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야욕을 드러냈다면, 로렌츠는 되레 기회를 노리며 발톱을 숨긴 쪽에 가까웠다.
자신의 자질이 뛰어나지 않음을 알고, 정면 돌파하는 대신 기회를 노려 상대의 숨통을 끊으려는 거다.
하지만, 카일은 순순히 죽어 줄 생각 따윈 없었다.
그는 살아남고 싶었고, 이젠 함께 살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 저를 행복하게 할 유일한 사람을 만났고, 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고 싶었다.
챙!
금속이 부딪치며 단말마의 비명 같은 소음이 일었다. 두 사람에게 압도당한 병사들이 주춤주춤 물러났다. 조금 질린 듯 표정이 낯빛이 창백했다.
카일은 검을 바투 쥔 채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이 순간만큼은 그 어떤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앞으로 달려 나갈 것처럼 거세게 뛰는 심장, 타오르는 마력, 그리고 생존에 대한 의지만이 가득했다.
검은 부츠가 언 땅을 단단히 디뎠다. 앞발에 힘을 싣고, 횡으로 그어 내자 눈이 녹을 새도 없이 부서지며 날렸다. 형체를 가진 것을 모두 우그러뜨릴 검기가 로렌츠의 어깨를 크게 할퀴었다.
물론, 로렌츠 역시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싸늘한 무표정을 지은 그는 눈으로 따라가기도 힘들 만큼 빠르게 검을 휘두르고, 마치 말뚝을 땅에 박듯이 목을 노리고 찔러 들어왔다. 그의 검은 방금까지만 해도 카일의 머리가 있던 자리를 꿰뚫었다.
그때, 누군가가 말 위에서 뛰어내리며 외쳤다.
“전하!”
카일은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슈의 합류 때문만은 아니었다. 말의 뒤편에 누군가 타고 있었다.
이 전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인물.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은둔을 선택했던 여인이 적의로 가득한 녹색 눈동자를 빛내고 있었다.
“센!”
앞서 달려 나가는 센에게 슈가 무언가를 던졌다. 새카만 씨앗처럼 보이는 작은 간식이었다.
“그거 알아? 이 빌어먹을 황제 자식아.”
슈가 씩 웃어 보였다. 이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어떤 해답을 찾아낸 사람처럼 자신감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센은 손안에 쥔 초콜릿을 꽉 쥐었다. 무심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 조그만 과자가 살짝 으스러졌다.
말을 타고 달려가던 때, 슈가 했던 말이 자연히 떠올랐다.
‘기억해 줘, 센. 난 이번에도 너를 선택했어.’
그녀는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에게 기회가 왔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벨리알이 그렇게 되고 나서부터 하루도 로렌츠를 원망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벨리알을 사랑하는 마음을 먹고 자란 복수심을 칼날처럼 벼려 가며 견디던 세월이었다.
그리고 바로 오늘, 로렌츠의 숨통을 끊을 수 있는 날이 왔다.
해바라기 씨 초콜릿을 입에 넣기 직전, 센은 홀린 듯 뒤를 바라보았다. 슈는 결연해 보였다.
“있잖아, 슈.”
센이 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말했다.
“넌 그 누구보다도 이곳을 사랑하는구나.”
단맛이 혀끝을 타고 퍼졌다. 그녀에게는 보이지 않는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얼음, 땡! 해바라기 씨 초콜릿 | 기적 수치 5% 소모 | 시간을 1분간 멈출 수 있습니다.]
순간, 거짓말처럼 세계가 멈추었다.
완벽한 정적 속, 센은 홀로 우뚝 섰다. 마치 자신이 이 세계의 유일한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느껴졌다.
누군가 애정 어린 시선으로 지켜보는 이야기의, 기어코 행복해지는 결말을 손에 넣고 말 그런 주인공.
그녀는 피와 흙, 얼음과 으스러진 눈송이, 시체와 검을 밟으며 내달렸다. 센의 희고 단호한 손이 굳어 버린 로렌츠의 손에서 검을 빼앗았다.
고요한 세계 속 그녀의 폐부에 차가운 공기가 들어차는 소리만이 선명했다.
“로렌츠.”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
그러므로, 모두가 치열하게 살아가는 거다.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다. 적어도 센은 그렇게 생각했다. 욕망과 욕망이 싸웠고, 더 큰 욕망이 승리했을 뿐.
“너는 죽어도 이 땅을 가질 수 없어.”
1분.
누군가의 원수를 갚기에는 더없이 충분한 시간이었다.
북부대공의 햄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