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앞에서 꼬리 치는 햄스터가 뒤에서 발꿈치 문다 (3)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속으로 하나씩 사라져 가는 새파란 생명력 덩어리를 헤아렸다. 손발이 싸늘하게 식고, 눈앞이 어찔했으나 마지막까지 정신을 다잡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다.
완벽한 백색의 세상.
그 속에서 나를 포함한 모든 것이 아주 느리게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마력을 운용하는 일은 아주 정교한 작업이었다. 얇은 가닥을 핀셋으로 잡아당기는 것처럼, 혹은 아무렇게나 흩어진 쌀알을 하나씩 주워 옮기는 것처럼, 매초 정신력과 집중력을 갉아먹히는 느낌이었다.
다행히 거대한 해일처럼 밀려들던 마수들은 이제 10퍼센트 정도만 남은 듯했다. 성벽으로 진격하던 오우거들은 물론이고, 하늘을 메우던 비행형 마수들의 핵 역시 차례차례 부서져 갔으니까.
‘거의 다 정리된 것 같은데…….’
하지만 한 마리라도 더, 조금이라도 더 수를 줄여야 했다.
변이종 마수는 훈련된 기사 다섯 명으로도 상대하기 버거웠다. 한 마리라도 놓쳤다가 영지민이 공격당하면 피해가 커진다.
하지만, 내 의욕과는 달리 몸이 힘을 버티지 못했다.
“헉…….”
한순간에 맥이 풀리면서 탁한 숨이 터져 나왔다.
나는 심장 부근을 움켜쥐고 밭은기침을 토했다. 동시에 아무것도 없던 백색의 세상에서 순식간에 튕겨 나왔다.
깊은 심해에서 막 건져진 것처럼 코와 목구멍이 알싸했다. 더듬더듬 얼굴을 만져 보니 어느새 코에서 뜨끈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Д༎ຶ`)]
나는 안절부절못하는 시스템을 뒤로하고 얼른 상황을 살폈다.
내게 마력을 흡수당한 대다수의 마수는 전부 실 끊긴 인형처럼 쓰러졌다. 그리고 아래에서 대기 중이던 블레이크 기사단은 쓰러진 마수들의 숨통을 확실하게 끊어 내며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검을 내지르는 그들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도 결연했다. 모두가 제 보금자리를 지키려는 일념 하나로 뭉쳐 있었다.
“그럼, 이제…….”
남은 마수들을 처리해야지.
내가 막 인벤토리에서 활과 화살을 꺼낼 무렵이었다.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슈 님.”
블레이크 기사단의 단장, 제임스 러셀이었다. 그를 필두로 한 몇몇 기사단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에 있지 말고, 안전한 곳으로 옮겨 가십시오.”
“……네? 아니, 아직 마수가 저렇게나 남았는데 안전한 곳이라뇨!”
나는 코를 막지 않은, 그러니까 활을 든 손 그대로 검지를 쭉 뻗었다. 내가 마수를 삿대질하며 펄펄 뛰자, 제임스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대다수의 마수를 슈 님의 힘으로 해치웠습니다. 그러니, 남은 마수 무리는 부디 저희 블레이크 기사단이 처리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
정중하면서도 고집스러운 목소리였다. 나는 고개를 젖혀 울컥거리는 코피를 대충 훔치며 성루 너머를 바라보았다.
변이종 마수들은 동족의 시체를 밟고 전진했다. 그리고 블레이크 기사들은 그들을 필사적으로 상대하고 있었다.
이들도 블레이크 영지의 사람들이다. 누구보다 북부를 사랑하고, 북부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
그 광경을 홀린 듯이 바라보고 있으려니 제임스가 내 이름을 불렀다. 그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제임스가 말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전란 중 건네기엔 이른 말이었다. 하지만, 반듯하게 고개를 숙인 그는 더없이 진지하고 진중해 보였다.
“당신의 정체를 의심하던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당신만큼 이곳을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저는…….”
“증명할 것입니다. 전하께서 저희를 지켜 주신 건 맞지만, 저희 역시 블레이크의 일원입니다. 손 놓고 보호만 받고 싶지는 않습니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좋아요.”
이곳은 그들의 땅이다. 나 혼자 모든 것을 책임질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나는 성루 아래로 펼쳐진 모습을 힐끗 바라보았다. 모든 게 작아 보이는 와중, 여전히 흰 사내가 이쪽을 올려다보는 모습이 보였다.
녹스.
그를 상대하려면 내 힘이 아직 필요했다.
“저도 안전한 곳으로 물러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아직 할 일이 딱 하나 남았네요.”
“예?”
“저 마법사 놈 말입니다. 저 자식은 제가 상대하는 게 제일 승산이 있거든요.”
몸이 영 내 말을 안 듣기는 하지만, 적어도 이변 간섭률이 있는 한 녹스를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조금 더 버틸 수 있어.’
코피가 거의 멎어 갔다. 나는 소매로 얼굴을 아무렇게나 훔친 뒤, 아래로 내려갔다. 어느새 나 역시 이 땅의 사람들처럼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안녕.”
새하얀 눈을 닮은 사람이었다. 북부의 녹지 않은 얼음을 빚어 만든 것처럼 희고 불길했다. 마치, 그 자체가 이 땅을 척박하게 만든 추위인 것처럼.
놈을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그때와 비슷한 두려움이 내 피부를 타고 차갑게 흐르는 듯했다.
“안녕은 무슨.”
하지만, 나는 물러나지 않았다.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적어도 그것 때문에 꼬리를 말고 도망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래. 네 말이 옳아, 꼬마. 안녕할 수 없는 일이기는 했지. 눈앞에서 심장을 빼앗겼으니까.”
녹스의 목소리가 한없이 낮아졌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주변을, 맥없이 떨어져 숨을 거둔 변종 마수들을 훑었다.
“썩 대단한 능력은 없는 주제에 아등바등 애쓰는 꼴이 가상해서 호의도 좀 베풀어 줬건만.”
“믿는 도끼에도 발등이 찍히는데, 안 믿던 햄스터에게 뒤꿈치 물리는 건 당연한 거 아니냐.”
내가 별것 아니라고 믿었기 때문에 방심했을 거다. 아니, 그걸 넘어서 적당히 갖고 놀 수도 있을 거라고 여겨, 호의를 베푸는 척 놀려 먹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뒤통수를 거하게 얻어맞은 셈이니 불쾌하고 자존심 상하겠지.
‘업보다, 이 빌어먹을 자식아.’
나는 러브러브 코너에서 샀던 ‘자유자재 빼빼로 스틱’을 인벤토리에서 꺼내 들고는, 다른 손으로 까딱거렸다.
“덤벼. 남의 땅에 허락도 없이 쳐들어온 놈하고 할 말 없으니까.”
놈의 미소가 일그러졌다. ‘겨울의 심장’을 빼앗겼으니, 그 안을 새로이 채우기 위해 북부의 모든 생명을 거두려 들겠지.
타협점은 없다. 누구 한 명이 죽을 때까지 싸울 뿐이다.
어떤 신호도 없이 우리는 격돌했다. 녹스는 곧장 새하얀 비수를 소환했고, 나는 그의 마법에 간섭했다.
시스템의 도움을 받자 다섯 자루가 모두 해제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얼음을 벼려 만든 비수를 힘주어 밟자 빠작, 소리와 함께 힘없이 부서졌다.
나는 빼빼로 스틱을 몽둥이처럼 휘둘렀다. 기사들과 훈련을 받기는 했어도 고작 몇 달에 불과했다. 검술을 배운 이들 특유의 멋진 모습 따위는 없었으나, 아무래도 좋았다.
‘죽일 각오를 해야 해.’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을 뿐이다.
‘불러오기’를 해제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렇게 이 전장에서 피해 버리는 순간 북부의 방어선은 무너진다.
나는 녹스의 목, 머리, 가슴팍을 노리고 무기를 휘둘렀다. 그러다가 채 무력화하지 못한 비수를 막아 내느라 손에 쥔 무기가 멀찌감치 나가떨어졌을 때는 급한 대로 주먹을 말아 쥐고 달려들었다.
녹스 역시 제 마법이 내게 높은 확률로 안 통한다는 것을 깨닫고 난 뒤에는 나처럼 주먹을 쓰기 시작했다.
“건방진 애송이가!”
녹스가 소리쳤다. 동시에 그의 주먹이 내 턱을 가격했다. 눈앞이 하얗게 번쩍이는 듯하더니 입안이 터졌는지, 새삼스럽게 비릿한 맛이 느껴졌다.
“……새끼, 손 한번 더럽게 맵네.”
나는 벌판에 피 섞인 침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그대로 아픈 척, 동요한 척 비틀거리고 있다가 녹스가 가까이 다가온 순간 그대로 주먹을 날렸다. 그 반반한 낯짝을 어찌나 세게 쳤는지 주먹이 다 얼얼할 지경이었다.
이미 죽은 사람이라 그런가, 얼굴이 붉어지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대신 검붉은 피를 뱉어 냈다. 핏물 사이에 이 하나가 섞여 나왔던 것도 같았다.
‘흥.’
나는 속으로 놈을 비웃었다.
늘 고고한 척, 한 걸음 뒤에서 관망하는 척 점잔이나 떨던 주제에 한 대 맞고 나니까 나와 비슷비슷하다는 점이 우스웠다.
그깟 학구열이 다 뭐라고.
놈이 재료 따위로 취급하던 사람들은 카일이 목숨 걸고 지켜 내고 싶어 했던 이들이었고, 놈이 원하는 것만 취한 뒤 아무렇게나 버린 땅은 이 땅의 사람들이 평생을 들여 일군 고향이었다.
‘남의 삶을 바닥으로 떨어뜨리려면 네 삶도 시궁창에 처박힐 각오는 해야지.’
녹스가 내 목을 졸랐다. 예전과는 다른, 노골적인 살기를 담은 손짓이었다.
손끝이 닿은 곳에서부터 아득한 고통과 한기가 퍼졌다. 아마도 내 팔을 쥐었을 때처럼 ‘서리의 중독’을 쓴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대로 당할 수는 없었다. 나는 마력을 끌어 올려 그의 마법을 해제하고 주먹을 내질렀다. 피가 울컥 토해져 나왔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날것의 싸움이 이어졌다. 주먹으로 때리고, 손톱으로 할퀴고, 머리채를 잡아당기면서 눈밭 위를 굴렀다.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큭.”
무력화하지 못한 비수 하나가 이마를 스쳤다. 날카로운 통증이 곧 뒤따라왔다.
눈꺼풀을 타고 피가 흘러서 시야가 흐려졌지만, 닦아 낼 시간조차 없었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비수를 쥐어 손아귀에 감추고는 몸을 옹송그렸다.
[긴급 탈출 호박씨 스틱 | 기적 수치 8% 소모 | 반경 10m 안으로 순간 이동할 수 있습니다.]
급하게 먹은 과자에서는 흙과 얼음, 피가 섞여 불쾌한 맛이 났다.
나는 추위와 통증 때문에 감각이 거의 없는 턱을 억지로 움직여 과자를 삼켜 냈다. 그리고, 곧장 몸을 움직여 녹스의 뒤를 노리고 놈의 등을 무릎으로 찍어 눌렀다.
놈이 재빨리 날려 보낸 비수 하나가 내 어깨를 관통하는 동시에…… 내가 손아귀에 쥐고 있던 단 하나의 칼날이 녹스의 숨통을 기어코 끊어 내었다.
북부대공의 햄스터